골드퀸
7
제1장 잠입
“제롬 님?”
제롬이라 불린 사내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의 선홍빛 눈동자가 빛을 발하다 이내 사라졌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제롬은 시선을 돌리고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제롬의 옆에 그보다 키가 작은 남자가 제롬이 시선을 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 이내 그를 따라 걸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제롬은 조금 전 보았던 한 하녀를 떠올렸다. 갈색 머리에 금안을 지닌 여자.
‘착각인가?’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지우고 말했다.
“적합자가 부족하다.”
“하면?”
“더 많은 노예를 데려오도록.”
제롬의 말에 남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무리하게 노예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만약 지금보다 더 노예들을 사면 남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자 제롬의 선홍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남자의 몸을 옭아맸다.
“커, 커억.”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지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죄, 죄송…….”
“데려오도록.”
“아, 알겠습…….”
그제야 제롬이 그를 놓아주었다. 남자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사이 제롬은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제롬의 뒷모습을 보다 미간을 구겼다.
“젠장, 목숨이 남아나지 않겠군.”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남자는 제롬에게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형님을 뵈어야겠군.”
남자는 벨리앙 백작의 처소가 있는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한 남자가 창가에 서서 우울한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건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먼 곳을 응시했다. 그가 바로 벨리앙 백작이었다. 벨리앙 백작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살이 빠져 광대가 튀어나왔고, 눈가가 움푹 파였다. 창턱에 내려놓은 손은 뼈마디가 보일 정도였다.
“이벨린…….”
벨리앙 백작의 입에서 낮게 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이 더욱 애잔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애잔함은 그리움을 넘어 종래엔 분노로 변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다시 그의 가슴속 깊이 가라앉았다.
똑똑-
“백작님, 리베앙 남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순간 벨리앙 백작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그가 뒤를 돌았을 때는 음울한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들라 하라.”
백작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몸을 뉘였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한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백작에게 다가왔다.
“여긴 왜 왔는가?”
“후후, 형님의 문후를 여쭙기 위해 왔지요. 잘 드시지 못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리베앙 남작은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하녀가 그들 앞에 따뜻한 차를 내왔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백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리베앙 남작은 그런 형님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건 연민도 동정도 아니었다.
“노예들을 더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백작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리베앙 남작은 그런 백작의 모습에 혀를 찼다.
‘여전하군.’
한풀 꺾이긴 했으나 벨리앙 백작은 쉬이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었다.
“지금도 몇 명이나 되는 노예를 사들이고 있는지 아는가?”
“알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가 원하고, 형님 또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리베앙 남작이 그를 달랬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의 말을 거역했다간…….”
“……그 아이에게 손 하나라도 댄다면 결코 용서치 않을 거네.”
백작이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말했다. 그의 전신에선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평생 칼 한 자루 들지 않고 산 그였지만, 그간의 연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작은 일순 움찔했지만, 결국 그는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 이미 말을 했습니다.”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눈을 감고 최대한 분노를 억눌렀다.
“더 이상 노예들은…….”
“노예 상인을 조금만 지원해 주면 알아서 노예들을 더 공급할 겁니다.”
백작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그 탓에 납치되는 이들이 있음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벨린…….’
남작은 백작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무사할 겁니다. 밥도 잘 먹고 있으니 염려 놓으시지요. 아무렴 제가 제 조카를 다치게 하겠습니까?”
“…….”
백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곤 이내 힘을 풀어버렸다.
“……노예 상인들을 지원하라 그리 이르겠네.”
“후후, 잘하신 선택입니다.”
리베앙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백작에게 볼일은 다 끝났다. 그가 나가려 하자 백작이 그를 붙들었다.
“그 아이는…….”
“그럼 이만.”
리베앙 남작이 그렇게 가버리자 홀로 남게 된 백작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벨린…….”
딸의 이름을 그저 되뇔 뿐이었다.
* * *
“하아, 배고프다.”
휴가 테이블에 엎어지며 늘어졌다. 그 옆에서 렌스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나 숀은 미간을 구기고 잔뜩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렌스가 그런 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그럼 불만이 없겠냐?”
숀은 좀이 쑤시는지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했다. 옆에서 알런이 그런 숀을 바라보았다.
“완전 짐짝 취급이잖아.”
숀은 자신들을 여관에 둔 채 간 헬리아 공주와 대장을 떠올리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자신들은 기사인데, 이건 짐도 이런 짐이 없다. 하지만 그런 말을 알런 앞에서 내뱉을 순 없었다. 그런 숀을 보고 렌스는 혀를 찼다.
“진상 떨지 말고 이참에 알런이랑 밖에나 나갔다 와.”
“알런이랑? 밖은 왜?”
숀이 렌스의 말에 알런을 보았다. 알런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형한테 편지를 보내야 할 것 같거든요.”
“형이라면…… 그 세인이라는?”
숀은 묘한 느낌에 눈을 좁혔다. 알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걱정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늦은 적은 없었거든요.”
자주 이런 일이 있었나 보군. 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냥 눈에 훤했다.
‘그 형이라는 자도 고생이구나.’
이런 동생이 있다면 제법 골머리를 썩었을 것이다.
“뭐, 할 수 없지. 할 것도 없고.”
숀이 일어나자 알런이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둘은 여관을 빠져나가 터벅터벅 편지를 부치기 위해 정보길드로 갔다. 길을 걷다 숀은 문득 알런의 형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이 ‘세인’인 탓이다.
“형이 서점에서 일한다고?”
“아, 형이요? 네. 원체 책을 좋아했거든요.”
“그, 형은 어떻게 생겼어?”
알런의 눈이 좁아졌지만 대답을 해주었다.
“뭐, 저랑 닮은 편이지만, 키도 크고 체격도 있어서 분위기가 좀 달라요.”
“흐음.”
숀은 알런의 설명대로 알런의 형을 이미지로 떠올려 보았다.
‘큭.’
그러자 단번에 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젠장, 왜 그놈 얼굴이.’
숀은 눈을 찌푸렸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아무래도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나 보다.
“한데…….”
알런이 잠자코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숀을 바라보았다. 조금 멀찍이 떨어진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 꺼림칙한 모양이다.
“뭐야, 내가 무슨 벌레도 아니고.”
“아까도 그렇지만, 설마 형을…….”
“야!”
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굴도 안 봤는데 뭔 소리야!”
“아, 그럼 얼굴을 보면…….”
“너 이리 와. 죽을래?”
숀이 알런의 머리통을 팔에 끼더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알런이 팔을 파닥거리며 항복했다.
“아, 아파요!”
“너 자꾸 그럴래?”
“아, 농담이라구요.”
그제야 숀은 알런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알런의 미심쩍은 눈은 여전했다.
“그렇게 그 ‘세인’이라는 이름이 걸려요?”
“…….”
숀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친구, 아니, 나쁜 놈이거든.”
“나쁜 놈이요?”
알런이 미간을 구겼다. 아무래도 형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 나쁜 놈이라니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나쁜 놈이고말고, 아주 바람둥이에, 얼굴은 또 얼마나 재수가 없는지, 거기다가…….”
‘날 배신했고. 정말 친구라고 여겼는데.’
숀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에 알런이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친했나요?”
“친하긴 개뿔.”
자신만 친한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더 기분이 나빴다.
“몰라. 이 이야긴 그만해.”
숀이 고개를 저었다.
“저긴가?”
이야기하는 사이 영지에 있는 정보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많았다. 숀과 알런은 줄을 서고 몇 분을 기다려서야 차례가 돌아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점원의 말에 알런은 이미 써놓은 편지를 내밀었다.
“수도까지 보내는 편지군요?”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가격은 1실버입니다.”
제법 비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알런이 돈을 내는 대신 스윽 숀을 바라보았다. 숀은 알런이 자신을 바라보자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왜?”
알런은 대답 대신 씨익 웃으며 점원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숀은 알런의 의도를 알아챘다.
“야, 너 날 감히 지갑으로 데려와?”
“그게…… 아시잖아요? 제가 돈도 뺏기고 길도 잃고…….”
알런이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자 숀은 이를 으득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이 짐 덩어리.”
결국 숀은 그의 주머니에서 1실버를 꺼내야만 했다.
“나중에 청구하면 안 받아주려나?”
헬리아 공주의 얼굴을 떠올리곤 숀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 * *
퍽퍽퍽-
“내가 꼭 받아내고 만다.”
헬리아는 방망이로 빨래를 내려쳤다. 그럴 때마다 물이 튀었다. 그녀의 옆에는 바구니 한가득 빨랫감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하아…….”
하녀로 잠입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하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틈틈이 주변을 탐색하긴 했으나 그래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으려면 일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이렇듯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겨울에. 아주 찬물로.
퍽퍽퍽-
잠입을 했더라도 일한 만큼의 값은 꼭 받고 가겠노라 헬리아는 다짐했다. 열심히 빨래하는 헬리아 주위에는 다른 하녀들도 함께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헬리아의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 대단하다. 신의 경지야!’
‘빨래의 신이야!’
하녀들은 헬리아의 능숙한 손놀림에 모두 놀라 눈이 커졌다. 속도도 눈부시게 빨랐지만 이 차가운 물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더 대단했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어느새 자신의 할당량을 다한 헬리아가 일어섰다. 애초에 자신의 몫을 다하고, 거기다 추가로 다른 이의 것도 해주었다. 그 바람에 하녀들은 헬리아를 좋게 보았다.
“먼저 들어가. 날도 이제 어두워졌는데.”
“맞아. 신혼이랬지?”
“호호호.”
나이 든 하녀들은 헬리아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헬리아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러고 보니 방이 하나잖아.’
잊고 있던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빨래를 널어놓고 방으로 가는 길이 멀기만 했다.
‘먼저 와 있으려나?’
문 앞에 선 헬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방 안에 이안은 없었다.
“후우, 먼저 씻기나 해야겠군.”
하루 종일 일을 한 탓에 몸에 먼지가 가득했다. 헬리아는 앞치마를 벗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씻고 나온 헬리아는 머리를 말리다 이내 깜짝 놀랐다.
“와,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해야지.”
흐릿한 램프의 불빛 사이로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묘해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램프의 불빛이 비쳐 이안의 검은 눈동자에 불빛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씨, 씻어.”
헬리아는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얼른 그에게 다가가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안은 손을 내밀어 수건을 받아 들곤 눈을 좁혔다.
“물이…….”
이안의 목소리에 헬리아는 자신의 머리에서 물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머리를 닦지 않아 그 물이 옷을 적셨다. 이안은 낮게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물기가 흐르는 그녀의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이, 이건 내가…….”
“물바다로 만들 생각입니까?”
그 말에 헬리아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보고 찔끔했다. 원래 보통 때는 엘라임이 머리를 말려주곤 했었다. 헬리아는 가만히 이안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투박할 줄 알았는데 제법 손길이 부드러워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다 됐습니다.”
이안의 목소리에 헬리아는 그제야 퍼뜩 눈을 떴다.
“그럼 주무십시오.”
이안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하자 헬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어차피 야영할 땐 바로 옆에서 잤으면서.”
“…….”
“그냥 여기서 자.”
이안은 그 말에 헬리아를 잠시 쳐다보더니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근처 의자에 앉았다.
“설마 앉아서 잘 건 아니지?”
“여기면 됩니다.”
이안은 팔짱을 끼고 딱딱한 의자에 몸을 기울였다. 헬리아의 눈이 좁아졌다. 차라리 바닥에 누워 잤으면 딱딱한 바닥이지만 그러려니 했을 거다. 한데 앉아서라니.
헬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아…….”
그녀는 머리를 흩뜨렸다. 도대체 그 오카마 요정 자식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가 다시는 요정 말을 곧이곧대로 믿나 봐라.’
헬리아는 유니를 만나면 그 얼굴을 한 방 때려 주리라 결심했다.
“이리로 와.”
“괜찮습니다.”
“덮치지 않을 테니까, 침대에서 자.”
어둠 속에서 이안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안 오면 내가 나갈 거야.”
헬리아가 일어나려 하자 이안이 할 수 없다는 듯 침대로 다갔다.
“그냥 잠만 자는 거야. 야영하는 거랑 똑같아.”
“…….”
이안이 한숨을 짓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가 침대에 올라왔으니 헬리아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럼.”
헬리아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워낙 쇠심줄 같은 성격의 소유자 아니겠는가. 헬리아가 잠에 빠져들자 이안은 그런 그녀를 응시하다 결국 몸을 뉘였다.
캄캄한 밤.
멀리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상반신만 일으킨 채로 고개를 돌리고 달빛에 비친 헬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안의 손이 헬리아의 얼굴에 다가가 이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의 손가락에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후우…….”
그는 한숨을 내쉬곤 하늘에 뜬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짹짹짹-
아침을 울리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헬리아는 햇볕이 눈가에 내리쬐자 인상을 찡그리다 이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엔 그녀 혼자뿐이었다. 헬리아는 빈 침대를 내려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암~”
혼자 터벅터벅 빨래터로 가는 헬리아가 하품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눈꺼풀이 처지는 게 잠이 부족해 보였다.
“헬리아!”
그 순간 엘라임이 나타나 득달같이 헬리아를 불렀다.
“왜?”
헬리아는 주변을 살피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은 헬리아를 쭈욱 살피더니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
“뭔데?”
그냥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헬리아가 물었다. 엘라임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암~”
그때 헬리아가 하품을 하자 엘라임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뭐 했어?”
“자고 왔지. 내가 뭘 해?”
엘라임은 미심쩍은 눈을 하다 이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헬리아가 누군데…….’
그는 고개를 젓고는 헬리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뭐 하는 거야?”
“됐어. 배고파.”
“배 속에 거지가 들었냐?”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이제 어쩔 거야? 계속 이렇게 할 거야?”
계속 헬리아가 이안과 한 방을 쓰는 게 싫은 엘라임은 얼른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헬리아는 턱을 쓰다듬고 말했다.
“이제 움직여야지.”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 * *
“멈춰라.”
벨리앙 백작의 본관을 지키는 병사가 하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냐?”
병사의 말에 하녀는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빨랫감을 가지러 왔습니다.”
“못 보던 하녀인데?”
병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녀를 훑었다. 그러자 하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새로 들어온 리아라고 합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새로 하녀가 들어왔다는 이야길 들었긴 한데…….”
병사는 미간을 좁히다 창을 거두었다.
“들어가 봐라.”
“그럼 수고하세요.”
하녀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좋았어.’
하녀, 헬리아는 바구니를 든 채 주변을 살폈다. 본관을 담당하던 하녀와 일을 바꾸었다. 하녀는 흉흉한 기사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 언제나 고역이었던지 쉽게 헬리아에게 일을 넘겨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 이외에도 곳곳에 기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헬리아의 눈이 매처럼 날카로워졌다.
‘역시 감시당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보호가 아닌 감시였다. 헬리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똑똑-
“백작님, 빨랫감을 가지러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작의 방문 앞을 지키는 기사에게 검사를 받은 이후 헬리아는 드디어 백작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와라.”
백작의 목소리는 예전에 들었던 것과 달리 매우 낮고 음울했다. 헬리아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헬리아는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백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선 과거 그 당당한 기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백작은 헬리아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헬리아는 우선 주변을 살폈다. 문밖에서 보초를 서는 두 명의 기사를 제외하곤 다행히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헬리아는 천천히 백작에게 다가갔다. 백작은 그제야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하녀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자 백작은 의아했다. 게다가 상대는 처음 보는 이였다. 백작가의 하녀를 모두 알진 못하지만 자신의 방을 드나드는 하녀의 얼굴을 모를 순 없었다. 백작이 눈을 좁히곤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가 낮게 말했다. 하녀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그간 안녕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백작의 미간이 치켜 올라갔다.
“이렇게 새장 속 새가 되시다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백작은 그녀가 평범한 하녀가 아님을 눈치챘다. 백작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절 잊어버리셨다니 이거 섭섭하네요. 도움도 드렸는데.”
“도움이라니……!”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작은 순간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의 시선이 헬리아의 얼굴에서 떠나가지 못했다. 머리색은 갈색이나 하녀의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금안이라, 금안?’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백작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아니, 다, 당신은…….”
“쉿. 너무 목소리가 큽니다, 백작.”
백작은 어째서 그녀가 자신 앞에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헬리아 공주가?’
백작은 너무 놀라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러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도대체 이곳엔 왜?’
백작이 아르센 왕국에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헬리아 공주에 대해 딱 하나 정확히 파악한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은 결코 공주가 쓸데없는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감시를 당하시는 겁니까?”
헬리아의 물음에 백작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우울해졌다.
“아십니까? 제게 딸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백작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질인 겁니까?”
“역시 공주님이십니다.”
백작은 단번에 알아차린 헬리아 공주에게 그리 놀라지 않았다.
“공주님이 주신 포션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온 이후 제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한 남자와 함께였습니다. 그때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백작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저를 억압하고 제 딸아이를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자들이 노예들을 사들이고 있는 건가요?”
“예.”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항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벨린을, 그 아이를 죽게 놔둘 수 없었습니다.”
헬리아는 그제야 백작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다. 리베앙 남작과 함께 찾아온 흑마법사. 그들은 벨리앙 백작령을 거점으로 노예들을 사들였고, 헬리아는 그들이 그 노예들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직 그녀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백작이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 딸아이를 구해 주십시오.”
“알고 계십니까?”
헬리아가 벨리앙 백작을 응시했다.
“나는 제국의 사람도 아닐뿐더러, 아르센 왕국의 공주입니다. 제가 왜 백작을 위해 그녀를 구해야 하죠? 저번 일은 거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
백작은 헬리아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백작은 질끈 이를 물다 이내 헬리아를 직시했다.
“이곳에 있다 하나 귀가 없는 건 아닙니다. 듣기로는 황제 폐하의 탄신일에 사신으로 각국의 왕자와 공주들이 초대되었다 합니다. 그곳에 공주님도 참석하겠지요?”
백작은 헬리아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헬리아는 더 해보라는 식으로 그를 보았다.
“한데 마차를 타고 편히 수도로 올라갈 공주께서 이런 곳에 그런 차림으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필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여전하시네요.”
“별로 추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공주께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상하여 생각한 것뿐입니다. 제게 원하시는 바가 있겠지요?”
헬리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역시 국왕 빈센트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던 그 기백이 어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끌려갈 헬리아가 아니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고, 굳이 백작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단지 상황을 알고자 백작을 찾아왔을 뿐이죠.”
“…….”
백작은 헬리아의 말에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곤 이 대화의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탁드립니다. 딸을 구해 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심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것이었다. 헬리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 * *
“충!”
“이상 없나?”
“옛!”
벨리앙 백작의 딸 이벨린이 있는 건물엔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근처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주시하던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벨리앙 백작의 처소보다 훨씬 더 감시가 심했다. 알아본 바로는 청소와 빨래 등 잡다한 일은 내부에서 모두 처리한다고 한다. 벨리앙 백작 때처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몰래 들어갈 수밖에 없겠는데.”
헬리아는 건물을 살피며 주변을 오가는 경비병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정문과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감시했다.
“엘라임, 네가 주의를 끌어줘.”
-알았어.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부스럭.
엘라임이 움직이는 소리가 경비병에게 포착되었다. 두 명의 경비병은 갑자기 난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무슨 소리가 들렸어.”
경비병 한 명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가 다가갈수록 수풀의 움직임은 더욱 커졌다. 경비병은 창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다가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다람쥐야!”
경비병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수풀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괜히 쫄았네.”
경비병은 괜히 다람쥐를 향해 창을 휘이 저었다. 다람쥐는 잔뜩 털을 세우곤 후다닥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와 다른 경비병이 한눈을 파는 사이 검은 그림자가 휘익 창문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타악.
건물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의 눈을 피해 헬리아는 벽을 타고 올라가 열린 창문으로 건물 안으로 잠입했다. 다행히 운이 좋았는지 그곳을 지키는 경비병은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움찔.
“…….”
-무슨 일이야?
그새 헬리아의 어깨에 앉은 엘라임이 갑자기 멈춘 헬리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낭패라는 듯 미간을 구겼다.
“……방이 어디지?”
주변을 살피던 헬리아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니 이벨린이 잡혀 있는 방이 어딘지 모르고 있었다. 헬리아는 한숨을 내쉬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있을 만한 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러보길 한참. 헬리아는 다행히 어렵지 않게 이벨린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멀리서 이벨린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 두 명을 훑어보았다.
‘제압할 수밖에 없겠어.’
헬리아가 기사들을 제압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이벨린의 방에서 누군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자는!’
헬리아는 얼른 몸을 숨겼다. 노예 시장에서 보았던 그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 그 흑마법사였다. 그의 뒤로 한 하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따라가고 있었다.
탁.
걸어가던 흑마법사가 일순 자리에서 멈춰 섰다.
두근두근.
헬리아는 갑작스런 흑마법사의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설마 들킨 건가?’
“무슨 일이십니까?”
제롬은 기사의 말에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젠장,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헬리아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한데 하필이면 자신의 뒤쪽으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이다. 헬리아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어쩔 수 없나?’
헬리아가 마나를 끌어올리려 할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채 끌어당겼다. 제롬이 헬리아가 있던 장소에 서더니 멈춰 섰다.
“제롬 님?”
“아니다. 돌아간다.”
제롬은 주변을 한번 살피곤 몸을 돌렸다.
“후우…….”
헬리아는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역시나. 헬리아는 자신을 잡아당긴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안이었다.
“여긴 어떻게?”
“하아.”
이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혼자서 무모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헬리아는 이안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암튼 여긴 어떻게 있는 거야?”
“이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
설마 다짜고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줄 몰랐던 이안은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따라 들어왔다.
“아깐 그자입니까?”
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강해.
엘라임은 헬리아가 이안과 붙어 있는 게 못마땅한 듯 이안의 머리를 작은 발로 짓밟으며 말했다.
-조심해.
헬리아는 엘라임의 말에 흑마법사의 기운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왜 이곳에…….”
-다시 올지 모르니까 얼른 움직여.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생각을 접고 엘라임에게 말했다.
“주변 이목을 끌어줘.”
-알았어.
엘라임이 쪼르르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는 방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기사들의 시선이 일순 엘라임에게 향했다. 헬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법을 시전했다.
‘슬립! 홀드!’
그러자 잠에 빠진 기사들은 그대로 몸이 굳은 채 서 있게 되었다. 꼭 경비를 서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헬리아와 이안은 두 기사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이벨린인가?’
헬리아는 이벨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작스레 들어온 헬리아와 이안을 보고 크게 놀란 듯했다.
“누, 누구세요?”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당신이 이벨린인가요?”
“네, 네.”
헬리아는 이벨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걱정 마세요.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하, 하지만…….”
“더는 갇혀 있지 않아도 돼요.”
이벨린은 헬리아를 믿지 못하는 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하기야 갑자기 나타나 구해 준다는 말을 선뜻 믿기는 힘들 것이다.
“백작께서 보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배, 백작님이…….”
이벨린은 이내 눈물을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 못 가요. 저, 전 못 가요.”
헬리아는 이벨린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이안이 그녀에게 신호를 주었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이다. 헬리아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벨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헬리아는 그녀를 이곳에서 빼낼 필요가 있었다.
“……!”
이벨린의 손을 잡은 헬리아는 돌연 손을 잡아당겼다.
“당신 누구지?”
“그, 그게…….”
헬리아는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굳은살에 이벨린을, 아니, 그녀로 변장한 여자를 응시했다. 백작가 외동딸의 손에 굳은살이 생길 일이 없지 않겠는가. 여자의 손은 거칠었고, 투박했다. 마치 하녀의 손처럼. 헬리아는 여자를 다그쳤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이벨린은 어디에 있지?”
“아, 아, 구, 구해 주세요!”
여자는 헬리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아가씨는 그자에게 끌려갔어요. 그, 그자는 아가씨를 죽일 거예요. 아,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여자는 이벨린의 하녀였다. 그녀는 울면서 헬리아에게 애원했다.
“이벨린은 그럼……!”
헬리아는 그제야 이 방에서 나온 흑마법사와 함께 갔던 하녀를 떠올렸다.
“어째서 그녀를 데려간 거야?”
“시, 실험을 한다고 했어요. 아, 아가씨의 마, 마나 친화력이 높아서…… 주,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제, 제발 아가씨를…….”
“젠장!”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렸다.
“어서 이벨린을 찾아야 해!”
“어디로 데려간 거지?”
그날 그자가 데려갔던 여인의 수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하녀의 말처럼 실험을 한다 했을 때 그 인원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헬리아는 벨리앙 백작의 본관과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건물, 그리고 이벨린의 처소를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외의 장소라는 것. 벨리앙 백작가에서 헬리아가 조사해 보지 못한 장소가 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서쪽에 위치한 별관이었다. 헬리아 일행은 곧장 별관으로 향했다.
서쪽에 위치한 별관으로 가자, 역시나 그 주변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별관은 대개 손님방으로 사용하는데 이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무언가 있다는 것이다.
헬리아는 별관을 응시했다. 이곳에 그자가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
* * *
까악까악-
창밖에서 새카만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까마귀는 하늘을 비행하며 울음을 토해냈다. 제롬은 하늘의 원을 그리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
차분한 음성, 그러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묻어 있었다. 하녀 차림을 한 여자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제롬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바로 진짜 이벨린이었다.
제롬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의 불길한 진홍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차 재미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그런 눈이었다.
“곧 알게 될 거다.”
이벨린은 덜덜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느 캄캄한 지하실. 벽에 붙은 촛대만이 음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이벨린은 항거할 수 없는 제롬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자 이벨린은 가슴이 찢어졌다. 아버지는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그 누구보다 어진 영주셨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만들었고, 하물며 그들은 이곳에 끌려와 죽음을 맞이했다. 이벨린은 그 일이 모두 자신으로 인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다.
‘나 때문에…….’
자신이 인질이 된 탓에 아버지는 이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자결을 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가짜를 내세워 여전히 아버지를 압박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벨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
지하실을 걷는 이벨린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두렵고 무서웠다. 실험을 할 거라 했다. 무슨 실험일까. 이벨린의 입술을 떨려왔다.
끼이익-
제롬이 문을 열었다.
“들어가라.”
제롬의 미소가 더욱 번져 나갔다.
* * *
뚜벅뚜벅.
별관 안으로 들어가자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되레 밖보다 안이 더 추웠다. 숨을 쉬자 나오는 입김에 헬리아는 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귀, 귀신 나올 것 같아.
엘라임이 헬리아의 뒤통수에 딱 달라붙어 바들바들 떨었다. 도대체 정령 주제에 비슷한 귀신이 뭐가 무섭다고. 정령이나 귀신이나 실체가 없긴 마찬가지 아닌가.
까악까악!
-귀, 귀신!
“까마귀야.”
헬리아는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찌푸렸다. 이걸 도로 정령계로 보내 버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안의 말에 헬리아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없지?”
경비를 서야 할 자들은 물론, 아예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암울하고 음습한 기운만이 건물 안에 감돌았다. 헬리아가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눈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것일까? 헬리아가 깊게 생각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까마귀가 한 마리가 하늘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저 까마귀 이상하지 않아?
그때 엘라임이 까마귀를 보다 입을 열었다. 헬리아는 또 귀신 타령을 한다 생각해 귀담아 듣지 않았다.
“까마귀가 뭘.”
-아니, 꼭 우릴 지켜보는 것 같아서.
헬리아는 순간 아차 싶었다.
“까마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웅! 쿠웅!
사방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온몸에서 검은 기류를 흘리는 기사들이 검을 들고 헬리아와 이안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라니!”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의 실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났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이안이 검을 빼 들고 단숨에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이안의 공격에 짚단처럼 쓸렸다.
“……그놈들.”
헬리아는 데스나이트들의 벗겨진 투구 안을 보곤 이를 갈았다. 긴 머리카락, 앳된 얼굴. 여자아이였다.
헬리아의 눈에 짙은 살기가 감돌았다. 그녀의 머리는 더욱 차분해졌다. 이안도 순간 주춤했다. 하지만 곧 검을 고쳐 잡았다.
“이안, 빠져나간다.”
헬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살아도 산 존재가 아닌 자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지.”
헬리아와 이안의 공격에 데스나이트들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이안, 흩어져서 찾아야 되겠어.”
“위험합니다.”
“이대론 찾을 수가 없어. 나는 엘라임이 있으니까 부탁해.”
헬리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응.”
헬리아와 이안이 갈라졌다. 이안은 위층으로, 헬리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까보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데스나이트들을 처리하고 헬리아는 지하로 내려갔다. 더욱 음산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이 냄새는…….”
-피 냄새야.
옅게 맡아지는 피 냄새에 헬리아는 더욱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자 안은 횃불 하나 없이 깜깜했다. 그러나 헬리아는 어렴풋이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긴 복도가 눈에 띄었다.
“여긴 어디지?”
헬리아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등줄기에서부터 시작된 오싹함이 헬리아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뚝뚝.
물기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계속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막혔어.”
벽을 만져 보았지만 문이 없었다. 헬리아는 혹여 장치라도 있을까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엘라임도 헬리아의 어깨에서 내려와 작은 발바닥을 두들겼다.
달칵.
-어?
엘라임은 달칵거리는 소리에 발을 슬쩍 들어 올렸다.
두드드드드.
그러자 바닥의 한 부분이 내려앉더니 이내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한 거야?”
-그, 글쎄?
두드드드드.
소리와 함께 천천히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헬리아와 엘라임 앞에 캄캄한 복도가 드러났다.
* * *
달칵.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간 이안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검을 겨누며 걸음을 옮겼다. 헬리아가 걱정되어 자꾸만 신경이 분산되었다. 하루 종일 잠을 자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가 아무리 무뚝뚝하고 표현이 없다 하나 옆에 헬리아가 자고 있는데 맘 편히 잘 수는 없었다.
‘누구지?’
상대도 그제야 이안을 눈치챘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안은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이 이벨린인가?”
이벨린은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가 뒷걸음질 쳤다.
“백작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아, 아버지가…….”
이벨린은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안은 이벨린이 왜 그곳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 실험을 한다고 했어요.”
“실험?”
실험이란 말에 이안은 눈을 좁혔다. 헬리아에게 흑마법사가 여자들을 데려갔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실험에 대해선 자세히 듣지 못했다.
“무엇을 실험하는 거지?”
“잘 모르겠어요. 단지 마나 친화력이 높은 자들을 데려갔어요.”
이벨린이 이곳에 온 이유는 우연히 그녀의 몸이 마나를 받아들이기 쉬운 몸이라는 것을 제롬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노예들로는 부족했던 제롬은 이벨린에게 검사를 해보았고, 그녀에게서 높은 마나 친화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렇게 실험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그건…….”
이벨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미간을 좁히다 물었다.
“그자는 어디에 있나?”
“실험실에.”
이안은 불안감에 얼른 되물었다.
“실험실은?”
“지, 지하에 있어요.”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헬리아!’
* * *
빛조차 들지 않은 캄캄한 복도를 헬리아와 엘라임이 걷고 있었다.
“뭐가 보여?”
-아무것도.
엘라임은 헬리아의 머리에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어둠이었지만 정령인 그에게 그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음?
“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얼마 가지 않아 헬리아와 엘라임은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헬리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사, 살려 주세요.”
“까아아악!”
여자들의 비명이 실험실 안을 가득 메웠다. 피 냄새와 비명. 헬리아는 그 광경을 보고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여자들은 실험대에 묶여 마나를 강제로 주입당하고 있었다.
“커어어억!”
한 여자가 발작을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마나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그중 마나를 이겨낸 여인들이 있었다. 한 남자가 그런 여자들을 체크하곤 다른 곳으로 보내었다. 그러면 또다시 그 자리에 다른 여자들을 올려놓았다.
헬리아는 이 괴상한 실험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실험을 하는 거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흑마법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실험실 안에는 흑마법사로 보이는 남자 셋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헬리아가 보았던 흑마법사보다 훨씬 실력이 낮아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그를 보좌하기 위한 자들인 것 같았다.
헬리아는 바로 마법을 일으켰다. 우선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흑마법사에게 홀드와 슬립 마법을 걸었다. 헬리아의 실력이 더 상위였기에 그자는 순간 눈을 부릅뜬 채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여자를…… 음? 어디에 간 거지?”
다른 흑마법사가 잠에 빠진 흑마법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커억!”
헬리아가 그 기회를 틈타 그의 뒤를 점해 기절시켰다. 기절한 놈들을 묶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우선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헬리아는 방 안에 있는 흑마법사를 모두 제압했다. 하지만 이대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들의 수가 이것뿐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데다가 아직 그자가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우선 이벨린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벨리앙 백작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했다. 헬리아는 실험실 구석에 마련된 철제 감옥으로 다가갔다.
“흑흑흑.”
“엄마…….”
열댓 명의 여자가 작은 감옥 안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감옥 안에선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헬리아가 다가가자 그녀들은 극도의 긴장 상태를 보였다.
“히익!”
“오, 오지 마!”
“주, 죽고 싶지 않아!”
바로 곁에서 계속 여자들이 죽어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 이미 뼛속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여자들이 두려움에 떨자 헬리아는 그녀들을 진정시켰다.
“쉿! 조용히 하세요.”
다행히 여자들은 헬리아가 흑마법사들과 다른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흐느낌을 멈췄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왔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헬리아는 우선 이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빠르게 여자들을 살폈다.
‘이곳엔 없나.’
이벨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 이곳까지 오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 눈에 익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흑흑, 할아버지.”
‘제이니?’
그림으로 본 촌장의 손녀 제이니와 똑 닮아 있었다. 헬리아는 어린 여자아이까지 온몸이 상처로 뒤덮여 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데스나이트들이 떠올랐다. 아직 꽃피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들이었다.
‘흑마법사!’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곤 감옥을 부수기 위해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나 감옥은 그대로였다. 특수 처리가 된 감옥임이 분명했다.
‘젠장.’
감옥을 열기 위해 더 강한 마법을 사용하다간 안에 있는 여자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헬리아는 아까 기절시켜 놓은 흑마법사를 향해 움직였다. 분명 열쇠가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있어야 할 흑마법사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어디…….”
순간, 그녀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로군.”
“……!”
헬리아는 갑작스레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진홍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바로 제롬이었다.
‘언제……!’
그가 다가올 때까지 헬리아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제롬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으로 헬리아를 훑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감옥에서 본 그 여자군.”
“…….”
“그때 변장을 한 건가? 아니면 지금이 변장한 모습인가?”
제롬의 물음에 헬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제롬은 천천히 헬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헬리아는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제롬은 이내 걸음을 멈추고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한데 궁금하군.”
제롬의 눈이 날카롭게 그녀를 훑었다.
“분명 그때는 빛이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제압했지?”
부서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데스나이트들을 보았다. 제롬은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곧 그녀가 직접 처리했다는 뜻.
‘힘을 숨긴 건가?’
제롬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십 기가 넘는 데스나이트를 처리했다면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목적이 뭐지?”
헬리아가 제롬을 응시했다. 그의 진홍색 눈동자와 헬리아의 금안이 부딪쳤다. 제롬은 자신의 기세에도 흔들림 없는 헬리아의 모습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목적이라, 그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제롬의 눈이 더욱 사이한 붉은빛을 띠었다.
“누구냐?”
“말해도 모를 텐데.”
“훗.”
헬리아의 당돌한 말에 제롬은 낮게 웃었다. 하지만 그뿐. 제롬의 눈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로 입을 열게 해주지.”
파앗!
“다크 스피어!”
제롬이 마법을 시전하자 허공에서 검은빛을 풍기는 화살이 생성되어 헬리아를 향해 쇄도했다.
“까아아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먼지가 휘날렸다. 쇠창살에 갇혀 있던 여자들은 폭발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서서히 먼지가 가시기 시작했다. 그동안 팔짱을 끼던 제롬이 어느새 팔을 풀고 늘어뜨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지가 사라지면서 흐릿하게 헬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엔 단 하나의 상처도 없었다.
“더욱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웃으며 말하는 제롬이었지만 처음과 달리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푸른 머리의 남자가 헬리아의 앞에서 그녀를 보호하듯 지키고 서 있었다.
헬리아는 제롬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한번 묻지. 다크니스는 여자들을 데리고 뭘 하려는 거지?”
제롬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네년, 정체가 뭐냐?”
이전까지 가볍게만 보이던 그의 태도가 단번에 진중해졌다.
다크니스. 그 단어 하나에 제롬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결코 나와선 안 되는 단어가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정말 다크니스였군.”
혹여 그냥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롬의 반응 하나만으로 이 모든 사건이 다크니스의 소행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 굳진 말라고. 변명하려 해도 믿을 수 없잖아?”
“…….”
“과거의 망령들이 여자들을 데리고 실험이라도 할 셈인가?”
“과거의 망령이라…….”
제롬의 이성은 빠르게 차갑게 식어갔다. 자신들의 조직을 아는 자. 사로잡을 수 없다면 반드시 처치해야 한다.
‘대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롬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입을 너무 함부로 놀리는군.”
“원래 말하라고 있는 게 입이니까.”
제롬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헬리아의 금안도 빛이 났다.
“다시는 그 입을 놀리지 못하게 찢어주마.”
“할 수 있다면.”
제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십 개의 검은 구체가 빠르게 헬리아와 엘라임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하나에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구체! 스치기라도 하면 결코 상처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검은 구체는 엘라임이 만들어낸 수룡의 입에 먹혀 사라졌다. 그 순간 맞부딪친 힘의 파동으로 실험실이 산산조각 부서지기 시작했다.
“까아아악!”
잡혀 있던 여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기파의 여파가 여인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헬리아는 서둘러 마법으로 기파를 차단했다.
“제법이로군!”
제롬은 이들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다크니스를 알고, 자신의 공격을 간단히 막은 실력까지!
“다크 파이어!”
제롬의 공격이 연달아 헬리아와 엘라임을 향해 쏟아졌다. 엘라임은 그에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공격을 시도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결! 제롬은 엘라임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진 웃음이 여유까지 있는 듯 보였다.
‘카쟌보다 강해!’
헬리아는 제롬의 실력에 눈을 찌푸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강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직접 손속을 겨뤄본 제롬은 이제껏 그녀가 상대한 어떤 이보다 강했다. 물론 그녀가 그 힘을 쓰지 않았을 때의 일.
‘힘을 써야 하나?’
헬리아가 나서려 할 때, 엘라임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헬리아가 그 힘을 쓰지 않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제롬과 상대할수록 엘라임의 미간에는 골이 깊게 패였다.
엘라임은 제롬의 공격을 막으며 이를 물었다.
‘원래 힘만 사용할 수 있다면.’
자신은 헬리아의 정령. 아무리 정령계를 다스리는 사대 정령왕인 물의 정령왕이라 하나, 결국 그도 태초의 맹약에 따라 계약자인 헬리아의 힘을 끌어다 쓰는 계약관계에 있다. 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맹약. 그리고 그 제약은 지금 엘라임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가 제롬을 이기려면 헬리아가 그 힘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라임은 이제껏 외면하고 있었던 그 사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이 엘라임의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젠장!’
콰아앙!
공격의 여파로 실험실이 부서지자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아직 이곳엔 창살에 갇힌 여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여긴 지하였다. 천장에서 파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아예 지하에 생매장될 판이었다.
‘이러다간…….’
문제는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 제롬은 실험실이 무너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공격을 마구 퍼붓겠는가.
“자, 그럼 탐색은 이 정도로 하지.”
제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기세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의 로브가 연신 날리며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전보다 더욱 짙은 검은 기운이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뿜어져 나왔다.
“엘라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롬이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엘라임의 공격은 제롬에게 통하지 않았다. 제롬의 눈이 번뜩였다.
“겨우 그 정도인가!”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류가 흘러나오더니 그의 손에 모였다.
파아앗!
제롬의 공격에 엘라임은 이를 앙다물었다. 그 순간 그의 공격과 제롬의 공격이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건물의 한쪽 벽이 완전히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천장의 작은 균열이 이윽고 큰 균열이 되었고 그로 인해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여긴 지하실이라고!”
그사이 제롬의 공격이 연이어 이어졌다. 엘라임의 신경은 제롬에게 쏠려 있었다. 헬리아는 천장에서 잔해가 아래로 떨어지자 얼른 몸을 움직였다. 쇠창살이 막고 있지만 아예 무너진다면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없었다. 거기다 최악인 상황이 벌어졌다.
쿠우우웅!
쇠창살 바로 위에서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실드!”
쾅!
헬리아가 조금만 늦게 실드를 펼쳤다면 여자들은 바위에 짓눌려 형체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을 위기에서 구한 헬리아의 행동이 도리어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마법사였군!”
그 광경을 보게 된 제롬의 눈이 더욱 짙게 변했다. 그녀 한 명이 지금까지 찾은 적합자 백 명에 준했다. 그만큼 헬리아의 힘은 막강했다. 제롬의 눈이 번뜩였다.
‘저 여자만 있으면!’
제롬의 기세가 더욱 거칠어졌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엘라임이 그런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방해되는군.”
제롬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선 저 방해물을 어떻게든 처치해야 했다.
“죽어라!”
빠르게 날아간 검은 기운은 엘라임을 옥죄기 시작했다.
“크읏!
“엘라임!”
엘라임은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힘을 많이 쓰면 쓸수록 헬리아의 몸에 부담이 되었다. 적정한 한도 내에서 움직이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힘을 막 쓸 수도 없는 노릇.
“큭!”
엘라임의 신음에 헬리아가 파이어 마법을 시전했다. 검은 불덩이가 제롬을 향해 날아갔다.
“크윽!”
제롬은 엘라임에게 신경을 쓰다 헬리아의 공격을 받자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생각보다 헬리아의 마법 실력이 더욱 뛰어났다. 그저 마법 몇 개 부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제롬의 눈이 구겨졌다.
그 순간 잡힌 여자들 위로 천장이 또다시 부서져 내리자 헬리아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실드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제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쓸데없는 인정은 피를 부르는 법이지.”
그는 헬리아를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해 냈다. 그의 시선이 여자들을 향했다.
“크윽!”
“괜찮아?”
엘라임은 헬리아의 걱정 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난 괜찮아.”
“좀 더 힘을 사용해야겠어.”
“하지만…….”
“명색이 정령왕이 흑마법사한테 질 수는 없잖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이대로 질 수 없었다.
“힘들면 말해.”
“응.”
헬리아가 제롬을 노려보았다.
제롬은 헬리아와 엘라임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이제 제대로 해보지.”
그가 손을 뻗자 어디선가 다크나이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끝내라!”
제롬의 명령에 다크나이트들은 일제히 헬리아와 엘라임을 향해 달려갔다.
“엘라임!”
“알았어!”
순간 엘라임의 몸에서 푸른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크아악!”
“크어억!”
엘라임의 공격에 수십 명의 다크나이트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제롬은 눈을 찌푸렸다.
“숨겨둔 한 수가 있군. 하지만 어림없다!”
다시금 제롬이 지시하자 다크나이트들은 무작정 엘라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엘라임은 쉽게 그들을 처치했다. 하지만 제롬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러자 헬리아와 엘라임을 향해 달려가던 다크나이트들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여자들에게 가는 게 아닌가!
“젠장! 저놈이!”
“헬리아!”
헬리아가 여자들에게 달려가자 엘라임도 달려갔다. 하지만 제롬이 엘라임을 막아섰다.
“그렇게 안 되지.”
제롬은 입꼬리를 올리고 엘라임을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쏟아부었다.
“크윽!”
갑자기 신경이 헬리아에게 간 탓에 엘라임은 제롬의 공격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쿠, 쿨럭!”
엘라임은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상당한 부상으로 인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더는 힘을 썼다간.’
그랬다간 헬리아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그리고 그것이 제롬이 바라는 일임을 모르지 않았다.
“자, 그럼.”
제롬이 헬리아에게 몸을 돌리자 엘라임이 일어섰다. 하지만 다크나이트들이 그를 막아섰다. 엘라임은 입술을 깨물었다. 패배는 있을 수 없는 일. 그가 걱정하는 일은 그저 헬리아의 안위였다. 엘라임은 제롬을 노려보며 다크나이트를 상대했다.
‘헬리아!’
“헉, 헉.”
다크나이트로부터 여자들을 보호한 헬리아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크나이트들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놈들…….”
다크나이트의 투구에 비친 것은 모두 여자. 실험으로 죽은 이를 다크나이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헬리아는 흑마법사의 간악한 짓거리에 이를 갈았다.
“후후후.”
천천히 제롬이 헬리아에게 다가갔다. 그의 주위로 다크나이트들이 흉흉한 눈을 빛내며 헬리아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들을 전부 죽일 셈이야?”
“필요하다면.”
“…….”
헬리아는 제롬을 노려보았다. 제롬은 웃으며 헬리아를 가리켰다.
“하지만 네가 순순히 내 말을 따른다면 여자들을 살려 주겠다.”
“…….”
헬리아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제롬을 보았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헬리아는 한 걸음 제롬에게 다가갔다.
“재수 없는 새끼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또 한 걸음 다가갔다.
“바로 너 같은 놈이.”
제롬의 눈이 와락 구겨졌다.
“그럼 죽어라!”
다크나이트가 움직였다. 헬리아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다크나이트 때문에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정말 위험하다고.’
손이 떨려왔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엘라임이 힘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자신이 힘을 쓸수록 그녀는 지쳐 갔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순순히 물러날 순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제롬이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었다. 이제 실험체든 헬리아든 상관없었다. 그는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어차피 실험체야 다시 구하면 그만! 제롬은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릴 요량으로 힘을 모았다.
“죽여주마!”
제롬의 눈에 핏발이 섰다. 거대한 검은 회오리가 헬리아를 향해 폭사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이거 정말 위험하다고.”
그녀는 그런 상황에도 차분히 눈을 감았다.
“절대 힘을 쓰셔선 안 됩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키안의 목소리. 헬리아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키안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그녀 스스로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았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힘이 얼마나 몸에 부담이 되는지.
“그게 마음대로 돼야지.”
심장에서부터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스윽-
헬리아의 동공이 세로로 길어졌다. 금색의 눈동자는 더욱 짙게 빛났고,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힘이 뿜어져 나왔다.
“헬리아!”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던 엘라임은 헬리아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의 기운에 그녀를 말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헬리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휘이이잉-
폐허로 변한 실험실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뿌옇던 먼지가 공간을 휘감았고, 그 중심에 헬리아가 서 있었다.
“크윽, 이, 이건 대체…….”
제롬은 어마어마한 미증유의 힘이 자신을 억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힘이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내가 떨고 있어……?’
제롬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물었다.
“젠장, 죽어라!”
제롬은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헬리아를 향해 더욱 강한 힘을 퍼부었다.
콰아아아앙!
검은 폭풍이 헬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데스나이트들이 헬리아를 포위했다. 앞에선 검은 폭풍이, 좌우 사방에선 데스나이트의 검이 헬리아를 향했다.
“헬리아, 피해!”
엘라임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헬리아에게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부족했다. 엘라임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렸다.
그때 헬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오연히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착각을 느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미 온몸은 뜨거운 피와 끓어오르는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커억!”
그녀의 손길 한 번에 데스나이트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크윽, 이, 이럴수가!”
제롬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그의 시선 끝에 헬리아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말을 잊고, 몸이 굳었다. 그저 느끼는 거라곤 두려움과 공포뿐.
까아아아아-
자신을 둘러싼 어둠이 그녀가 내뿜는 빛에 비명을 질러댔다. 헬리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지상의 천사가 있다면 그녀와 같지 않을까. 하지만 제롬에게 헬리아는 저승의 사신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동공이 제롬의 신형을 훑었다.
“읍!”
제롬은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제롬은 그렇게 정의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야!’
마법도, 흑마법도, 신성력도 아니었다. 정체 모를 미증유의 힘.
‘도대체…….’
한 번도 이런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여자의 이야기는!
“어둠의 망령, 어둠으로 돌아가리라.”
헬리아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듯한 목소리. 헬리아의 눈매는 즐거운 듯 휘어져 있었다. 제롬은 저런 눈을 많이 봐왔었다.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의 눈. 현재 그녀의 눈이 그러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대상은 자신이었다.
‘아, 알려야 해. 알려야!’
제롬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리아가 그를 막았다.
“쿨럭!”
갑자기 수십 톤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제롬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뚜벅뚜벅.
고요한 실험실 안에 헬리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제롬은 그 소리가 마치 죽음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데, 데스나이트.’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전부 바닥에 축 처져 있을 뿐, 그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헬리아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데스나이트 한 기를 집어 올렸다. 단단한 갑옷 안에는 눈도 감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가 싸늘하게 식은 채 죽어 있었다.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 듯 눈동자는 공허하기만 했다.
헬리아는 그런 여자아이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자 여자의 시체는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얼마나 대단한 목적이기에 아직 채 꽃피지 않은 아이들을 죽이는 거지?”
헬리아는 손 안에서 가루가 된 데스나이트의 잔해를 흩날리며 제롬을 보았다.
“그걸 내가 말해줄 것 같으냐?”
제롬은 최대한 힘을 모아 헬리아를 공격했다.
“죽어라!”
그러나 부질없는 짓. 헬리아의 미소가 더욱 싸늘해졌다. 힘을 이끌어내면 평소와 달리 심장이 차가워진다. 온몸은 피로 끓어오르는데 오직 심장만은 마치 얼음처럼 변해 버린다. 그녀의 눈에 제롬은 그저 자신보다 하등한 종일 뿐.
“말하지 않는다면.”
헬리아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제롬의 왼쪽 뺨에 길게 상처가 생겨났다.
“큭큭큭.”
헬리아는 웃으며 제롬을 공격했다. 그의 온몸에 깊고 얕은 상처가 생겨났다.
“커억!”
제롬은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했다.
‘젠장!’
도대체 상대의 정체가 짐작가지 않았다. 제롬은 이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 결코 우연히 아님을 인지했다.
‘반드시 알려야 해. 반드시…….’
“쿨럭!”
그러나 헬리아의 공격은 끊이질 않았다.
“이제 마지…….”
제롬은 더 이상 공격이 없자 이상함을 느꼈다. 천천히 헬리아를 보자 그녀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제롬은 숨을 헉헉 내쉬며 상황을 살폈다. 혹여 다른 술수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헬리아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때다!’
제롬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는 기분이었다. 깨질 듯한 통증에 헬리아의 허리가 꺾였다.
“하아, 하아…….”
“결코 그 힘을 쓰셔선 안 됩니다.”
“어째서?”
키안은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도 아실 겁니다. 그 힘이 얼마나 공주님의 몸에 무리를 주는지.”
“그건…….”
헬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키안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힘,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이상하다니?”
헬리아는 키안의 말에 눈매를 좁혔다. 자신의 몸에는 드래곤의 피가 반이 흐른다. 헬리아는 그 힘에 대해서 그저 자신이 반은 드래곤이기 때문에 얻은 거라 생각했다.
한데 키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아무리 드래고니안이라도 반은 인간. 그런데 공주님의 그 힘은 드래고니안의 힘을 뛰어넘습니다.”
“…….”
“이제까지 드래고니안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니 그 힘, 쓰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
헬리아는 키안의 말에 한 가지 궁금증이 떠나가질 않았다. 어째서 이런 힘을 갖고 있는 것인가. 키안은 굳어진 헬리아의 표정에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직접 본 드래고니안은 공주님이 처음이니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몸에 부담이 되니 쓰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젠장.”
다시금 키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드래곤의 힘을 쓰면 안 된다는 말. 헬리아의 몸은 인간의 나이로 치면 성인이지만 드래고니안의 긴 수명으로 봤을 땐 겨우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탓인지 그 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헬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일은 벌어진 뒤. 게다가 그렇지 않으면 죽을 판인데 더운밥 찬밥을 가리겠는가. 헬리아는 찢어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크크큭.”
제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는 제롬이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크윽, 그냥 가게 놔둘 줄 알고.”
헬리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근!
하지만 다시 찾아온 심장의 고통에 헬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입술은 터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마!”
제롬은 헬리아가 힘을 못 쓰는 틈을 타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젠장!”
헬리아는 도망치는 제롬을 노려보았다. 그가 도망가게 내버려 둔다면 대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뭐가 되느냔 말이다.
“엘라임!”
“……헬리아.”
“어서 저자를…….”
“헬리아!”
헬리아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엘라임은 얼른 그녀의 몸을 받아 들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헬리아를 이대로 놓고 갈 순 없었다. 그리고 그를 쫓다가 힘을 쓰게 되면 되레 헬리아를 더욱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하아…….”
헬리아는 엘라임의 그런 생각을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힘쓰지 말라고 했잖아.”
“안 쓸 수 없었잖아.”
“…….”
엘라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
헬리아는 엘라이의 굳어진 표정에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네가 미안해?”
“정령왕 주제에…… 미안.”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힘을 못 쓰는 건 순전히 자신 탓이다. 자신의 힘이 겨우 이 정도일 뿐.
콩!
“아프지도 않아.”
“아프라고 때린 건데.”
“…….”
힘을 많이 쓴 탓에 헬리아는 기운이 없었다. 엘라임은 헬리아를 더욱 꼭 껴안았다.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널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멋대로 힘을 쓴 거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
그러나 엘라임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헬리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쓰지 마.”
헬리아는 엘라임의 머리를 흩뜨렸다.
“공주님!”
그때 멀리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네.”
헬리아는 달려오는 이안을 보고는 웃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던 헬리아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공주님!”
이안은 상황을 파악하곤 얼른 다가왔다.
“무사한 건가?”
“어딜 갔다 이제 온 거야?”
엘라임의 타박에 이안은 눈을 좁혔지만 그녀와 떨어진 자신의 잘못이었다.
“몸은?”
“쉬면 될 거야.”
엘라임은 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헬리아를 더욱 꼭 껴안았다. 하지만 곧 몸이 옅어지기 시작하자 그는 이를 물었다. 엘라임은 홱 이안을 돌아보며 그를 노려보았다.
“말로만 지키지 말라고.”
“…….”
“다시는.”
엘라임은 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숨이 고른 걸 보니 곤히 잠든 모양이다. 엘라임은 잠이 든 헬리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안을 보았다.
“다시는 넘겨주지 않을 테니까.”
다시는. 엘라임은 마지막까지 주저하며 헬리아를 이안에게 넘겼다. 이안의 품에 안긴 헬리아를 보며 엘라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제껏 자신이 정령이라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존재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겼다. 한데 오늘 자신이 정령이라는 사실이 매우 사무쳤다. 그랬다면 그녀를 마지막까지 안아주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헬리아를…… 부탁해.”
엘라임의 모습이 어느덧 사라졌다. 이안은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잠든 헬리아를 보았다.
“나 또한.”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더는 이렇게 잠들게 하지 않겠다.”
* * *
다시금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가에 서 있던 벨리앙 백작의 시름도 깊어만 갔다.
‘이벨린…….’
벨리앙 백작은 헬리아를 떠올렸다. 그녀의 확고한 눈빛은 그에게 안심을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혈육에 대한 걱정이었다. 벨리앙 백작은 두 손을 맞잡았다.
“데이슨.”
“예, 백작님.”
“잘되겠지?”
“물론입니다.”
백작가의 기사단장 데이슨이 벨리앙 백작을 위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백작가 내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쨍그랑!
폭음 때문인지 아니면 거대한 힘의 파동 때문인지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백작님!”
“이, 이게 무슨!”
데이슨은 얼른 백작을 보호했다. 벨리앙 백작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혹여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안 되겠다. 가봐야겠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기다릴 순 없다.”
“백작님!”
데이슨은 벨리앙 백작을 만류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움직이다간 지금까지 참아왔던 일이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었다.
“이제까지 수모를 참으며 기다려 왔습니다. 섣불리 움직여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
벨리앙 백작은 침음을 되삼켰다.
그런데 그 순간, 덜컥 방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아버지!”
“……!”
벨리앙 백작의 눈이 커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벨린의 얼굴을 만졌다.
“이, 이벨린…….”
“네, 아버지.”
이벨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벨리앙 백작은 자신의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벨린, 이벨린…….”
“아버지.”
벨리앙 백작은 이벨린이 혹여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살폈다. 다행히 어디 하나 다친 구석이 없어 그는 마음을 놓았다.
“미안하구나. 이 아비 때문에…….”
“아니에요. 괜히 저 때문에 아버지가…….”
“이벨린…….”
벨리앙 백작은 다시 한번 이벨린은 안아주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이냐?”
“모르겠어요. 그자에게 끌려갔는데 한 남자가 저를 구해 주었어요.”
“한 남자?”
“눈동자가 검은 사람이었어요.”
“눈동자가……!”
벨리앙 백작은 헬리아 공주와 함께 있던 기사, 이안 플로렌스를 떠올렸다.
‘그자인가! 그럼 역시 이 일은 공주께서!’
콰아아앙!
다시 한번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백작의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기사 데이슨에게 명령했다.
“데이슨! 지금 즉시 백작가 내의 모든 기사를 불러 모아라! 이제 때가 되었다!”
“명 받잡겠습니다!”
데이슨이 부복한 뒤 얼른 방을 나섰다. 벨리앙 백작의 눈은 마치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이제 결말을 지어야겠구나.”
“아버지…….”
“걱정 말거라. 계속 못난 아비의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되지 않더냐?”
벨리앙 백작은 이벨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의 눈이 빛을 발했다.
“이날을 기다렸다. 그분이 만들어준 기회를 이대로 놓쳐선 안 된다.”
벨리앙 백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후후후.”
리베앙 남작은 자신의 방에서 금고를 열어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돈은 나날이 그의 금고로 들어왔고, 백작가를 움직이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제롬은 그저 실험체에 대해서 관심을 표할 뿐, 백작가 내부의 일에 대해선 건드리지 않았다. 리베앙 남작은 히죽 웃으며 황금을 바라보았다.
“요 예쁜 것들.”
황금을 정성드레 닦은 리베앙 남작은 다시 금고에 넣고 골똘히 생각했다.
“백작가도 내가 다스리는데 아직까지 남작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되지.”
점점 더 배가 부른 리베앙 남작은 킥킥거리며 백작이 될 자신을 떠올렸다.
“이번 일만 잘되면…….”
리베앙 남작은 벨리앙 백작을 몰아내고 자신이 이 백작가의 주인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콰아앙!
그때 멀리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행복한 꿈에 젖어 있던 남작은 퍼뜩 놀라 창문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야?”
거대한 폭발은 몇 번이고 연이어 이어졌다. 남작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돌리다 이내 폭발이 난 곳이 별관이라는 것을 깨닫고 신경을 껐다.
“무슨 실험을 하기에 이렇게 소란인지, 쯧.”
겨우 간담을 쓸어내린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때 방 밖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데 발걸음 소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철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챙챙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리베앙 남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들의 모든 움직임은 자신이 관여한다. 누가 함부로 기사들을 움직였단 말인가.
“이놈들이 분수도 모르고, 따끔하게 한 소리 해야겠군.”
리베앙 남작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아니, 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척척척!
수십의 기사가 리베앙 남작의 방으로 쳐들어오더니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짓들이냐! 네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리베앙 남작은 기사들을 향해 삿대질을 했지만 날카로운 검끝이 자신을 향하자 식은땀을 흘렸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불안감이 그를 뒤덮기 시작했다. 좀 전의 폭발도 어쩌면 실험에 의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이, 일이 잘못되었다!’
리베앙 남작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제, 제롬, 그자에게 가야 한다!’
그가 살길이라고는 제롬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 외엔 없었다. 실상 그가 백작가에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도 제롬이 이벨린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 이벨린!’
“이벨린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느냐!”
“네 그 입에 다시 이벨린의 이름을 올린다면 입을 찢어버릴 것이다.”
“혀, 형님!”
리베앙 남작은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째서 형님이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저 후안무치한 놈을 잡아라!”
“혀, 형님! 이러실 순 없습니다. 이벨린이…….”
퍼억!
벨리앙 백작이 리베앙 남작의 얼굴을 세게 내려쳤다.
“크윽.”
“이벨린이라면 내 곁에 있다! 네놈의 죄를 알렸다!”
“혀, 형님!”
리베앙 남작은 이제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어느 것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백작의 다리에 붙어 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저는 단지 그들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는구나! 그동안 네놈이 한 짓을 내가 모를 것 같은가! 어서 끌고 가라!”
“혀, 형님!”
리베앙 남작은 기사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갔다.
“아, 안 돼!”
* * *
“으음.”
따사로운 햇살이 헬리아의 얼굴을 비췄다. 헬리아는 눈을 찡그렸다. 누군가 자신의 이마를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쉽게 떠지지 않았다. 헬리아는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무언가 손에 걸리는 게 있다.
파리인가? 한데 이 겨울에? 자꾸만 귓가에서 왱왱거리는 통에 헬리아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결국엔 그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
“일어났네?”
“……!”
헬리아는 눈앞에 작은 머리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엑!”
그 날파리 같은 것은 데구르르 굴러 침대에서 떨어졌다.
“아고, 아프네.”
“뭐…… 야?”
헬리아는 조그만 생명체를 보고 눈을 좁혔다. 자신의 팔뚝만 한 길이에 날개가 한 쌍 달려 있었고, 긴 은발에 은안을 지녔다.
‘모습이 마치…….’
“요…… 정?”
“빙고!”
유니는 웃으며 헬리아의 눈앞에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다행히 몸은 건강하네.”
“뭐야?”
헬리아는 자꾸만 왱왱거리는 통에 짜증 나 그것을 단숨에 잡았다.
“켁.”
“너 뭐야? 왜 요정이 여기에 있지?”
요정은 이종족보다 더 보기 힘든 종족이었다. 물론 최근 요정이라 주장하는 괴생명체 여장 남자를 한 명 만났지만 이것이 그것과 같은 것임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거 놓고…….”
“공주님!”
헬리아의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이안과 하녀가 들어왔다. 하녀는 안으로 들어와 헬리아가 깨어 있는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아마 백작에게 소식을 전할 모양이다.
이안은 헬리아와 그녀의 손에 붙잡힌 요정을 보고 눈을 좁혔다.
“그건 뭡니까?”
“요정이래.”
헬리아는 요정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요정이 여기에 있는 거지?
“자, 잠깐, 모르겠어?”
“뭘?”
“나라구, 나.”
“나가 누군데.”
“이것 참, 나 유니라고.”
“…….”
“…….”
헬리아와 이안 모두 입을 다물었다. 뭐 누구라고?
“유…… 니?”
헬리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 오카마 놈이라고?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게…….”
“오카마가 뭔진 모르겠지만, 나라구. 내가 그랬잖아. 혼혈이라고. 혼혈은 인간과 요정을 오갈 수 있어.”
“…….”
홱!
헬리아는 얼른 요정을 놓아주었다. 근데 그 모습이 놓아주었다기보다 흡사 더러운 것을 떨쳐 내는 듯했다.
“에잉, 너무하네.”
“……정말이야?”
“어쩔 수 없지.”
헬리아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유니는 원래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우람한 근육과 다리털, 거대한 체구의 남자로 말이다.
“…….”
“짜짠, 어떠세요? 유니 맞지요? 호호호.”
요정일 때와 인간일 때의 성격과 말투가 확연히 달라졌다. 헬리아는 얼른 유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젠장, 눈이 썩었어.’
“얼른 다시 변신하기나 해.”
“호호호, 이게 더 좋지 않나요?”
“좋긴 개뿔. 얼른 눈 썩기 전에.”
“호호호, 어쩔 수 없죠.”
유니는 호호 웃으며 다시 요정으로 변신했다. 헬리아는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더 남자의 거시기를 봐야 한단 말인가. 인간에서 요정으로 변할 때는 거적때기라도 걸친 주제에 왜 요정에서 인간으로 변하면 옷을 안 걸치냔 말이다!
헬리아는 푹 한숨을 쉬었다. 몇 년 폭싹 늙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정이 유니라는 것을 깨닫자 그간 밀려왔던 분노가 다시금 되살아났다.
“누가 신혼부부라고?”
“왜? 그게 더 재밌잖아?”
‘젠장, 그냥 인간일 때가 나았나?’
헬리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요정과 말다툼을 하면 손해 보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후우, 그래,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아니, 애초에 올 수 있었으면 네가 왔으면 좋았잖아?”
“그게 안 된다니까. 벨리앙 백작 내에는 결계가 쳐져 있어서 못 들어왔어.”
“그럼 지금은?”
“누가 결계를 깨준 덕분에.”
헬리아는 유니의 말에 자신이 쓴 힘을 떠올렸다. 그 파동에 결계가 부서진 모양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귀쟁이의 말대로 힘은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알고 있어. 그보다 여긴 왜 온 건지나 말해.”
“확인할 게 있어서.”
“확인?”
유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요정이 진지해지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데. 헬리아는 괜한 속설을 떠올리며 그를 주시했다.
“지하실에 다녀왔어.”
“실험실에?”
“응, 그런데 아무래도 좀 걱정이 되는 게…….”
유니는 이걸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확실치 않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데?”
“아무래도 정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할 것 같아.”
“최악의 상황이라니?”
유니가 말을 멈추고 이안을 보았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돼.”
“세르게니아 님과 엑시온의 이야긴 들어 알겠지?”
과거 헬리아의 어머니이자, 마지막 골드 드래곤인 세르게니아가 마룡 엑시온을 봉인한 이야기일 것이다.
“알다시피 엑시온은 봉인되었을 뿐,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야.”
헬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만약 그들이 엑시온이 봉인된 봉인구를 찾아냈다면…….”
“이 모든 일이 엑시온의 봉인을 풀기 위한 일이다?”
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룡 엑시온. 드래곤인 세르게니아가 그 목숨을 바쳐야 겨우 봉인했던 존재. 그것이 다시 부활하려 하고 있다. 바로 흑마법사들의 손에 의해서.
헬리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는 단순히 흑마법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엑시온이 봉인을 풀고 나온다면, 그를 봉인한 세르게니아를 향해 분노를 퍼부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의 분노는 어디를 향하겠는가.
“봉인이 풀리기 전에 막아야 해.”
“후우…….”
헬리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시아 제국과 흑마법사, 그리고 마룡 엑시온. 점점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엑시온이라…….”
헬리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벨리앙 백작은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은 눈이 내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진중하게 빛났다.
“백작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깨어나셨는가?”
시종의 말에 벨리앙 백작은 반색하며 들어오라 일렀다. 그러자 헬리아와 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은 헬리아를 보더니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백작의 걱정 어린 말에 헬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후우, 다행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백작은 헬리아와 이안을 소파로 안내했다. 하녀가 곧 그들 앞에 따뜻한 차를 내왔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공주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 겁니다.”
헬리아는 벨리앙 백작의 말에 씨익 웃었다. 그리 말하는 백작치고 그간 준비해 온 것이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단시간에 리베앙 남작을 잡을 줄은 몰랐다. 헬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문을 뗐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백작은 헬리아의 질문에 잠시 말을 골랐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의 은인이라고는 하나 헬리아는 아르센 왕국의 공주. 자신은 제국의 귀족이다. 그러나 백작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현재 제국이 황제 폐하 측인 강경파와 황태자 전하 측인 온건파로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리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균형이 깨졌다는 겁니다.”
벨리앙 백작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서는 여전히 대륙 통일에 대한 야망을 갖고 계십니다. 지금까진 황태자 전하께서 그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제는…….”
“……전쟁입니까?”
헬리아의 말에 백작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수도로 가신다 들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조심하시길 바란다는 말뿐일 것 같습니다. 가시겠지요?”
백작의 걱정 어린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백작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수도로 올라가고 싶지만 그간 리베앙 남작이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귀족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 매우 송구하나,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훗, 말로만 그러는 건 아니겠죠?”
헬리아가 백작을 보며 눈매를 휘었다. 백작은 그런 헬리아를 보며 함께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국을 등지는 일이라도 저는 옳은 일을 할 것입니다.”
백작과 헬리아의 눈빛이 오랫동안 교차했다. 헬리아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잊지 않겠습니다.”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폐하를, 폐하를 조심하십시오.”
백작의 마지막 말에 헬리아는 묘하게 그를 보았다. 백작은 일어서는 헬리아를 보며 함께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헬리아는 거듭 조심하길 바란다는 백작의 말에서 이번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느꼈다.
“그럼 다시 또 기회가 된다면 뵙지요.”
헬리아는 굳은 얼굴을 펴고 웃으며 벨리앙 백작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