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초대의 목적
휘이잉-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북쪽에서 불어온 매서운 찬바람이 아르센 왕국을 뒤덮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창가에 서서 창문에 서린 성에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얼어붙은 표면이 녹으면서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겠군.”
똑똑-
“공주님, 클리드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
헬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리드가 잔뜩 몸을 떨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꼴이 어찌나 처량한지 헬리아는 혀를 찼다.
“레브, 장작을 더 넣고 차를 내와.”
“알겠습니다.”
“에취!”
클리드는 기침을 내뱉으며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추위에 유난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춥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에취!”
클리드는 기침으로 대신 답했다. 헬리아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클리드는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이곤 김이 서린 안경을 닦아냈다.
“너무하십니다.”
“네가 나한테 감기를 옮기는 게 너무한 거야.”
헬리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클리드는 순간 울컥했지만 곧 레브가 차를 가져왔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얼어붙은 몸이 얼추 녹는 것이 느껴졌다. 클리드는 그녀 앞으로 자신이 가져온 편지를 건넸다. 헬리아는 클리드가 내민 편지들을 보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초대장입니다.”
“보면 알아. 그냥 초대장은 아니지.”
초대엔 반드시 목적이 있는 법이다. 목적 없는 초대란 있을 수 없다. 간혹 목적이 분명치 않는 초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헬리아의 경우엔 초대의 의도는 뻔하고 뻔했다. 헬리아는 시니컬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편지를 집어 들었다.
“로만 자작가로군.”
“예, 예로부터 로만 자작가는 유서 깊은 문관 가문으로…….”
“전에 연회에서 자작 부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에게 자신의 아들이 어떠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말해줬지.”
헬리아는 클리드에게 편지를 휙 던지며 말했다.
“최소 엄마 젖은 떼고 오라고. 아줌마가 양심도 없어. 세 살 애를 나보고 어쩌라고. 제대로 걷기나 할지 모르겠네.”
헬리아는 또 다른 편지를 집었다.
“이번엔 카이사스 백작가군.”
헬리아가 편지를 다시 클리드에게 던졌다.
“차라리 세 살 꼬맹이가 낫지. 그 백작, 나보고 결혼하자고 하더군. 칠십 먹은 노친네가 욕심도 많지.”
“그, 그게…….”
“아, 호프만 백작가.”
헬리아가 이전과 다른 표정을 짓자 클리드가 기대하는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헬리아는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부서뜨렸다.
“아들이 남색가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
“모두 거절해.”
헬리아가 클리드에게 받은 편지를 도로 그에게 건네주었다. 클리드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전부 응하지 않을 셈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내게 붙으려는 자들이야. 이제 와서. 그런 자들은 언제고 또 배신하게 마련이지. 적당히 거절하고 시끄럽지 않게 선물이나 보내.”
아돌프 후작의 반란 이후 아르센 왕국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후작의 역모에 연루된 이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고, 가문은 멸문했으며, 가솔들은 노비가 되어 팔려 나갔다. 그와 함께 빈 권력의 자리는 헬리아 공주의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무런 배경도 힘도 없던 폐위되었던 공주가 일국의 실세로 우뚝 솟은 것이다.
그녀를 비웃고 천시했던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첨과 아부를 떨었고, 그녀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고자 선물을 보내왔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초대장이 그녀에게 보내졌다. 모두 그녀와 어떻게든 끈을 대보려는 속셈이었다.
헬리아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초대장을 보내온 몇몇 귀족 중에는 그녀에게 못 할 말을 했던 자도 있었다. 천한 하녀의 핏줄이라는 둥, 왕족의 씨가 아니라는 둥. 헬리아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유독 뒤끝이 긴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귀족들의 변심도 빨랐다.
“혼인이라…….”
헬리아에게 오는 편지의 대부분이 혼인첩이었다. 하기야 누가 이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왕국의 실세이며 다음 왕위 후보이자 미혼인 그녀에게 혼담이 끊이질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열아홉 살이나 되도록 아직까지 약혼자나 정혼자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녀와 혼인만 한다면 제대로 한몫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이들의 욕망을 부추겼다. 정략결혼이 싫다던 자들도 헬리아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목을 매었다.
헬리아는 아직 혼인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생각도 없었다.
“정말 혼인해야 하나.”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1왕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세드릭이?”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클리드가 편지를 들고 밖을 나서자 곧 세드릭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딱, 딱, 딱.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후우.”
지팡이를 짚으며 걷는 모습이 여전히 위태로워 보이지만, 더 이상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았다. 세드릭은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때와는 달랐다. 이렇게 서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만족했다.
“레브, 차를 가져와.”
“알겠습니다.”
헬리아는 세드릭을 소파로 안내했다. 세드릭은 함께 온 노엘의 도움 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추운 겨울에도 걷느라 땀이 흐른 것이다. 노엘이 그런 세드릭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곤 뒤로 물러났다.
“몸은?”
“괜찮아. 오히려 기분이 좋아.”
세드릭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처럼만 같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이제 걸을 수 있고,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르는 남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이나 그리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헬리아가 세드릭의 뒤에 있는 노엘의 손에 들린 캔버스로 추정되는 물건을 보곤 눈을 살짝 찌푸렸다. 세드릭은 가끔 불쑥 찾아와 헬리아에게 모델을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헬리아는 한 번 모델을 해주곤 결코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가만히 있는 것만큼 딱 질색인 것도 없었다.
“모델은 한 번뿐이야.”
헬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모델을 해달라 떼를 쓸 게 분명했다.
“오늘은 그것 때문이 아니고, 노엘.”
“예.”
노엘이 캔버스를 세드릭에게 건넸다. 세드릭은 그것을 다시 헬리아에게 주었다.
“봐봐.”
“이건 뭐야?”
세드릭이 건네준 캔버스를 받아 든 헬리아는 캔버스를 싸고 있는 종이를 벗겼다.
“이건…….”
“다 완성돼서 보여주려고.”
세드릭이 말갛게 웃었다. 헬리아는 세드릭의 얼굴을 보다 이내 캔버스에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웃었다고?”
“기왕이면 웃는 게 좋잖아?”
헬리아는 그림을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화폭에 그려진 자신은 햇빛을 등지고 앉아 티 없는 말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찌나 그 웃음이 깨끗한지 헬리아는 속으로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순수하게 웃지 못한다고.’
헬리아는 다시 세드릭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림 속 자신의 웃음과 세드릭의 웃음이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자신의 웃음이 아니라 세드릭의 웃음이었다. 깨끗하고 순수한.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했을까. 그녀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것을.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헬리아는 세드릭 같은 사람에게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그 싫어하는 모델을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선이면 선, 구도면 구도, 색채면 색채. 확실히 세드릭은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혹시 다른 작품은 얼마나 있어?”
“세어 보진 않았는데 한 몇십 개 있는 것 같아.”
“몇십 개?”
이게 웬 떡이냐. 헬리아는 입맛을 다셨다. 필요에 의해서 엘라드 상단을 만들고 왕국 최고 상단에까지 올려놓았지만,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래 헬리아는 돈을 좋아했다. 돈이야말로 최고의 무기지. 세드릭의 작품들은 아주 비싼 값에 팔릴 것이다. 헬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는 찰나였다.
“자, 그럼.”
세드릭이 헬리아가 들고 있는 그림을 가져가 버렸다.
“왜 가져가?”
“그냥 보여주려고 왔어.”
“……주는 거 아니었어?”
“응.”
“모델 해줬잖아.”
“해준다고 했으니까. 모델 값은 치른 거지.”
“…….”
헬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야 깨닫는 거지만 정말 세드릭의 성격은 아버지 빈센트를 똑 닮았다.
‘상판대기 반반한 것들은 상종을 하면 안 돼.’
그 안에 헬리아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헬리아가 속으로 투덜거릴 때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반짝이는 눈동자를 몰라볼 리가 있겠는가. 갖고 싶어 안달하는 눈동자인데. 그러나 세드릭은 쉽게 주지 않았다.
세드릭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모델 해주면 생각해 볼게.”
“치사하긴.”
“누구한테 배운 방법이지.”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이자 헬리아는 후우 하며 한숨을 지었다.
“다 줘야 돼. 내 몸값은 비싸다고.”
“응.”
세드릭이 씨익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헬리아는 너무 바빠 제대로 만나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기뻐하는 세드릭의 모습에 헬리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 원, 오빠가 아니고 동생이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초대는 다 거절한 거야?”
지나가면서 클리드가 초대장을 한 아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헬리아에게 많은 초대장이 올 것은 안 봐도 뻔했다.
헬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세 살 아기는 어떠냐는 질문을 받아본 게 아니라면 말을 마.”
“하하.”
“웃음이 나오지?”
헬리아의 매서운 눈초리에 세드릭은 웃음을 참았지만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차라리 혼인하는 게 어때? 네가 원한다면 아바마마는 누구라도 허락하실 거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없어.”
“정말?”
“…….”
세드릭의 물음에 헬리아는 그저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를 좋아한다? 그런 건 헬리아에게 머나먼 일이었다. 사랑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가끔 꿈을 꾼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던 그날을. 헬리아는 그날 이후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 너는?”
“응?”
헬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세드릭을 보았다. 세드릭은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뜨끔했다.
“생각해 보니까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혼인도 안 하고. 소문에도 사귀는 여자는 없는 것 같은데…….”
“그, 그게 다리 때문에…….”
“구실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구, 구실이라니!”
세드릭의 얼굴이 빨개졌다. 헬리아는 킥킥 웃었다.
“이제라도 사귀면 되잖아?”
“그, 그게…….”
세드릭은 본전도 못 건지고 꼬리를 말고 말았다. 하기야 누가 누구한테 충고를 한단 말인가. 최근 세드릭에게도 헬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초대장과 혼담이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도 다 거절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혹시 뭐?”
헬리아가 가늘게 세드릭을 보다 말했다.
“괜찮아. 혹 말 못 할 취향이라도 난 존중해 줄게.”
“아, 아니야!”
세드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다. 헬리아는 그런 세드릭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놀리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헬리아가 어떻게 세드릭을 요리할지 생각할 때 창가에서 소리가 났다.
톡톡-
“무슨 소리지?”
“가끔 새가 창문을 두들기거든.”
헬리아가 일어나 창가에 다가가자 비둘기 한 마리가 창문을 부리로 두들기고 있었다. 그녀는 몸으로 세드릭의 시야를 가리고 비둘기의 다리에 있는 통을 꺼냈다. 통 안에는 깨알 같은 글자가 적힌 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걸 본 헬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헬리아?”
“아니야. 아무것도.”
헬리아는 웃으며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는 세드릭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똑똑-
“공주님, 클리드 님께서…….”
시종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클리드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클리드는 세드릭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헬리아의 눈이 좁아졌다.
“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레칸 대륙의 거대한 북부를 홀로 차지하고 있는 강대국으로, 현 황제는 카사스 2세이다.
“황제 카사스 2세가 올해로 여든을 맞는다고 합니다.”
“매해 있던 일이군.”
헬리아는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제국엔 누가 가지?”
매해 황제의 탄신일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것이…… 올해는 귀족이 가지 않는다 합니다.”
멈칫.
헬리아는 클리드의 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럼 누가 가게 되는 거지?”
“1왕자 전하입니다.”
세드릭은 놀란 눈으로 클리드를 보았고, 헬리아는 주머니 속에 넣은 종이를 몰래 구겼다. 초대엔 언제나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헬리아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 * *
“흠, 짐이 너무 많은가?”
세드릭이 시녀들을 진두지휘하며 사신단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옷은 넉넉히 챙겼어?”
“예, 충분히 챙겼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겨울은 아르센의 겨울보다 춥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옷을 더 가져가야겠어. 따뜻한 옷으로 준비해.”
“예.”
세드릭은 차곡차곡 정리되는 물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제국만이 아니라 다리가 다친 이후 첫 여행이었다. 세드릭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왕자님, 헬리아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헬리아가?”
세드릭은 헬리아의 방문에 웃으며 그녀를 맞이하였다. 헬리아는 주변에 쌓인 상자들을 보며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갈 준비는 잘되어 가?”
“잘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첫 여행이라.”
“제국은 추워.”
“제국의 겨울 산이 그렇게 유명하대. 아르센엔 눈이 잘 안 오잖아? 꼭 구경하러 갈 거야.”
세드릭의 들뜬 모습에 헬리아는 낮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시녀가 곧 차를 내왔다. 헬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세드릭을 응시했다. 세드릭은 헬리아의 얼굴을 보곤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할 말이 있어 왔어.”
헬리아가 시녀들을 보자 세드릭이 그녀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세드릭 뒤엔 오직 노엘뿐이었다.
“노엘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아니, 그라면 들을 자격이 있어.”
헬리아는 다시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찻잔에 차가 없어질 때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바루스 공작이 암습당했어.”
“…….”
세드릭이 헬리아를 보았다. 페르시아 제국은 황제를 주축으로 한 강경파와 황태자를 주축으로 한 온건파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중이다. 그러다 며칠 전 황태자의 장인이자 황태자비의 아버지인 바루스 공작이 암습을 당하면서 두 파벌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바루스 공작은 황태자파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온건파는 이 일의 주범이 강경파라 확신하고 있었다.
“알고 있으라고 온 거야.”
“…….”
헬리아는 가만히 있는 세드릭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세드릭은 미동하지 않았다. 되레 뒤에 있는 노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못 간다고 말씀드리십시오. 너무 위험합니다.”
노엘은 세드릭을 말렸다. 제국의 상황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정치에 무지한 노엘도 잘 알고 있었다. 헬리아가 남기고 간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번 사신행은 너무도 위험했다. 또다시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가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노엘은 지금도 가끔 그날의 꿈을 꾼다. 세드릭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꿈을. 그럴 때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노엘은 말리고 또 말렸다.
“왕자님……!”
“노엘,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지만 전하께 말씀드리면…….”
“노엘.”
세드릭이 노엘을 보았다. 노엘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겨우 그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건만…….
“왕자님…….”
“난 괜찮아. 제국에서 초대한 사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제국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 그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야.”
“차라리 귀족을 보내시는 게 어떠십니까? 굳이 왕자 저하께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나라도 왕자와 공주들이 올 거야. 그런데 우리만 귀족을 보낼 순 없잖아? 제국에서 왕족을 초대한 거야. 이건 우리나라의 명예가 걸린 문제야.”
세드릭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노엘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렇게 될 일이었다면, 2왕자나 비앙카 공주라도 있었으면 했다. 아돌프 후작의 반란으로 후작가는 풍비박산 났고, 비비안 후궁은 탑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2왕자 조슈아와 비앙카는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따로 유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족은 이제 헬리아와 세드릭밖에 남지 않았다.
“하면 공주…….”
“노엘!”
헬리아의 이름을 꺼내려 하자 세드릭이 버럭 화를 냈다. 그의 차가운 음성에 노엘은 흠칫 몸을 떨었다.
“헬리아는 이제 후계자야. 나와는 달라.”
“왕자님!”
“나는 갈 거야. 노엘, 같이 가줄 거지?”
“…….”
노엘은 무릎을 꿇고 세드릭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세드릭은 환하게 웃었다.
“안 갈 거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출발이 언제래?”
“모레.”
헬리아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뒤로 엘라임이 따라 걸었다.
“위험한 거야?”
“바루스 공작이 움직이지 못하니 온건파의 힘이 크게 위축되어 있을 거야. 그 틈을 강경파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
헬리아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게다가 최근 제국 내에 유통되는 철과 밀의 양이 크게 줄었어. 아무래도…….”
헬리아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전쟁이라니. 지금은 겨울이야. 겨울엔 전쟁을 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성적이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제정신이길 바라야지.”
헬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세드릭의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라임, 긴장을 푸는 약을 만들어줘. 첫 여행이니 긴장을 많이 할 거야.”
“알았어.”
“그럼 일이나 하러 가야겠군. 할 일이 많아졌어.”
헬리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 어렸던 그늘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 * *
“출발한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으로 가는 사신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행렬은 성문을 빠져나가며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사신단을 반기는 것인지 어느새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그런 사신단의 행렬을 내려다보던 빈센트는 하얗게 물들어가는 대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좋은 날이건만 왠지 눈이 달갑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군요.”
빈센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르센 왕국은 중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눈이 잘 내리지 않았다. 그의 근심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전하…….”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세바스찬.”
빈센트는 흰머리를 올백으로 가지런히 넘기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어찌 다시 돌아왔습니까?”
“공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세바스찬은 아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뜻은 완고했다. 아돌프 후작의 반란 이후 헬리아는 세바스찬을 다시 빈센트의 곁으로 보냈다.
빈센트는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세바스찬도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빈센트는 미소를 띠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많이 내릴 것 같습니다. 길이 험해서 잘 갈지…….”
“그분이라면 잘 헤쳐 나가실 겁니다.”
“후우…… 저는 언제나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는군요.”
“전하…….”
“아십니까?”
빈센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아이가 이제 제게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세바스찬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빈센트도 그의 답은 바라지 않았는지 가볍게 웃었다.
“좀 더 곁에 있길 바랐으나 그게 되질 않는군요.”
“전하.”
“차라리 평범한 촌부로 태어났다면 행복했을까요?”
빈센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자신은 왕이고, 자신의 딸은 공주인 것을.
“공주님은 잘해내실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당당히 돌아오실 겁니다.”
“그러겠지요.”
하지만 빈센트의 굳어진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반드시 그래야지요. 반드시 다시.”
빈센트는 자신도 모르게 목에 걸린 펜던트를 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오늘따라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다시…….”
빈센트는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 * *
벌떡.
세드릭은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듯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내 방?”
세드릭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얼른 일어나 창가로 힘겹게 걸어갔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 오늘이 며칠이지? 노엘!”
세드릭이 노엘을 불렀다. 노엘은 천천히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노엘, 내가 얼마나 잔 거야?”
“…….”
“그리고 왜 사신단이 먼저 간 거야? 노엘!”
“왕자님.”
노엘이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노엘!”
“죄송합니다.”
“서, 설마 아니지? 응?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세드릭이 노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노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릴 수 없었습니다.”
“……!”
“전해드리라는 편지입니다.”
세드릭이 노엘이 건넨 편지를 재빨리 읽었다.
[갔다 올게.]
“헤, 헬리아.”
세드릭은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녀다운 편지였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단 한 줄뿐인 편지. 하지만 세드릭은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툴툴거리지만 실상 누구보다 다정했다. 세드릭의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헬리아…….”
* * *
“왜 그랬어?”
덜컹거리는 마차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헬리아에게 엘라임의 음성이 들려왔다. 헬리아는 대답 대신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많이 쌓일 것 같네.”
“이렇게 할 것까지는 없었잖아.”
그제야 헬리아는 엘라임을 돌아보았다.
“왕궁 안에만 있기 답답하잖아? 원래 난 예전부터 여행 가고 싶었어. 기회가 없어서 못 간 것뿐이지.”
“그것뿐이야?”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진실을 물어왔다. 헬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행 좋잖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웃었다.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헬리아 공주 만세!”
“와아아아!”
사신 행렬이 지나가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헬리아는 그에 부응하기 위해 창밖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환호를 질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라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 속고 있는 거야.”
“죽을래?”
헬리아가 눈을 흘기자 엘라임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묘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누구?”
“그 시커먼 놈 말이야.”
엘라임은 최근 이안을 보지 못한 것을 떠올렸다. 헬리아는 심드렁하게 마차 창틀에 턱을 괴었다.
“어제 폐관 수련이 끝났다고 하니까 가다가 합류할 거야.”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안은 후작의 반란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플로렌스 공작을 따라 영지로 돌아갔다. 새로 얻은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헬리아는 잘 가라고 등까지 떠밀어 보냈다. 한데 막상 그가 없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그 녀석도 예외는 아닌가 보네.”
헬리아는 무뚝뚝한 이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괜히 심통이 나 창문을 닫아버렸다. 작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엘라임은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엘라임은 조용히 헬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캄캄한 밤.
어느덧 눈도 그치고 하늘은 반짝이는 별을 내보였다. 페르시아 제국으로 향하는 사신단 일행은 어느 숲속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사신단의 대표는 헬리아 공주였지만, 책임자는 모에스 백작이었다. 모에스 백작은 갈색 머리에 제법 준수한 중년인으로 이번 헬리아 공주의 사신단의 호위와 책임을 맡게 되었다.
“야영 준비를 하라! 눈이 많이 쌓여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모에스 백작의 말에 병사들과 마법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제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고, 마법사들은 보온 마법과 알람 마법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녔다. 모에스 백작은 인망이 있고 아랫사람을 천시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빈센트가 이번 사신단의 책임자로 그를 임명한 것이다.
모에스 백작은 주변이 얼추 돌아가자 헬리아가 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그는 헬리아 공주를 연회에서 처음 보았다. 사십 대에 부인까지 있지만 공주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모에스 백작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헬리아 공주가 있는 마차 앞에 섰다.
“공주님,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헬리아가 내려왔다. 잠시간 주변에서 소란이 멎었다. 헬리아의 외모에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모두 손을 놓고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본 것이다.
헬리아는 싱긋 웃었다. 모두의 얼굴이 붉어졌다.
‘커, 커억, 살인미소다.’
‘내 평생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헬리아가 모에스 백작에게 다가갔다. 모에스 백작도 잠시 정신을 팔았지만 이내 제정신을 차렸다.
“먹으러 안 가나요?”
“아, 예.”
헬리아는 모에스 백작을 따라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로 가 앉았다. 엘라임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지만 대부분 그를 헬리아의 호위 기사로 여겨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갖가지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야영치고는 굉장한 호사였다.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은 대개 이렇게 먹곤 했다. 헬리아는 테이블의 음식을 보고 주변을 살피다 모에스 백작을 보았다.
“이게 다인가요?”
“아, 그게 부족하시면…….”
모에스 백작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병사들은 겨우 빵과 스프를 먹는데 그녀가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대가 왕족이긴 하나 모에스 백작은 사치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현명하고 뛰어나다고 소문한 공주가 겨우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 실망할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져온 걸 깜빡했네요.”
“예?”
헬리아가 손짓하자 함께 따라온 레브가 다가왔다. 그런데 레브의 뒤로 시종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뭡니까?”
“뭐긴요? 먹을 거지. 이런 거 먹고 어떻게 거기까지 가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잘 먹어야지요.”
그녀의 신호가 떨어지자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음식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아!’
모에스 백작은 그제야 헬리아 공주가 그 유명한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임을 떠올렸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모에스 백작은 헬리아의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돈이 많다고 해도 아랫사람에게 이렇게 베푸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술도 있는데 한잔하실래요?”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 * *
“완전히 곯아떨어졌군.”
헬리아는 주변을 돌아보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엘라임은 미간을 좁혔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술에는 무색무취의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그 덕분에 사신단 전원이 잠에 빠졌다. 헬리아는 혹여 깨어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말했다.
“여기서 따로 가야지.”
엘라임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정을 떠나기 전 잔뜩 수면제를 만든 걸 떠올렸다.
헬리아가 엘라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엘라임은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지자 얼굴이 붉어졌다.
“왜, 왜?”
“쉿, 깨겠어. 그보다 이제 사람을 바꿔치기 할 거야.”
“저, 저기…….”
엘라임은 가까이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론 어떻게든 손을 치우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지자 엘라임은 순간 덜컥했다.
“왜, 왜?”
“너…….”
‘서, 설마.’
“딴생각했지?”
“…….”
엘라임은 팍 김이 새버렸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인지.
“그래서 어쩔 건데?”
“레브가 내 역할을 할 거야. 미리 환상 마법을 걸어놨으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들키지 않을 거야.”
“효력은?”
“한 달.”
“그럼 무리지 않아? 가는 데 한 달 반이 걸리는데.”
“수도에 가서는 합류할 거야. 그때 맞춰 도착하면 돼.”
“그런데 왜 따로 가려고?”
엘라임이 의문을 던지자 헬리아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제국의 움직임이 수상해. 그들의 초청에 응하긴 했지만 꿍꿍이를 알아야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가만히 갈 순 없지.”
혼란스런 시국에 굳이 제국이 왕족들을 초청한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사신으로 온 이들에게 위험이 생기면 그것은 제국의 위상 문제이다. 제국이 그런 짓을 벌인다면 분명 다른 국가에게 꼬투리를 잡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언제 움직일 거야?”
“지금.”
* * *
히이이잉-
“워워.”
숀은 우는 말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말을 달랬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걱정으로 어두웠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거야?”
“명이니 어쩔 수 없지.”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렌스의 말에 숀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장작을 가져온 휴가 그런 숀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다 잘되지 않겠어?”
“하아, 너희는 걱정이 없어서 좋겠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혹시 그날?”
“야! 죽을래!”
“렌스, 저 녀석 확실히 그날이지?”
“그런 것 같다.”
“이놈들이…….”
휴가 장작을 모닥불 옆에 놓고는 몸을 떨었다. 그는 매서운 바람에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흐유, 추워라. 그보다 언제 오신데?”
“기다려 봐봐. 이제 오실 때가 되었는데.”
“그런데 좀 걱정이 되긴 하네. 대장님도 안 계신데.”
휴의 말에 숀과 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은 헬리아 공주의 기사로 오늘 아침만 해도 평범하게 사신 행렬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그들 앞에 헬리아 공주가 찾아와 그들에게 따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왠지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것 같아 기대가 되면서도 막상 닥치고 보니 걱정이 앞섰다.
꼬르륵.
그때 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휴는 머리를 긁적이며 환하게 웃었다.
“기다리다 지치겠다. 뭐 좀 먹자.”
“야, 공주님이 오시는데.”
“공주님이 오시면 바로 갈 텐데, 이때가 아니면 언제 먹겠냐?”
“휴 말이 맞아. 이대로 무작정 기다릴 순 없잖아.”
렌스와 휴가 입을 맞춰 이야기하자 숀도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타닥.
모닥불에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휴는 고기를 눈이 빠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렌스는 그런 휴를 보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숀을 불렀다.
“숀?”
숀은 하염없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기가 아닌 다른 것을 보는 눈이었다.
“숀?”
“어, 어? 나 불렀어?”
“요새 너 이상해.”
렌스가 숀의 이상한 반응에 살짝 눈을 찡그렸다. 아돌프 후작의 반란 사건을 기점으로 숀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간간히 멍하기도 하고, 무슨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렌스는 한 가지 짚이는 일이 있었다.
“세인은 꼭 살아 있을 거야.”
“아니야!”
숀이 버럭 화를 냈다. 렌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숀이 이상해진 것이 세인의 실종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반란 사건으로 몇몇 기사와 함께 세인이 실종되었다. 대개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숀이 저리 넋을 놓는단 말인가.
렌스는 휴를 보았지만 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아니. 뭐 미안…….”
숀은 아무것도 모르는 렌스와 휴를 보며 괜히 화풀이하는 자신이 싫었다.
‘세인, 어째서, 어째서 네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채간 나쁜 놈 정도로 생각했다. 한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같이 부대끼고 생활하다 보니 그를 진짜 친구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배신감 때문일까.
‘세인…….’
숀은 그날 세인이 헬리아 공주에게 칼을 들이민 것과 자신을 공격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믿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 숀은 가슴이 너무 아프고 화가 났다.
공주님은 세인의 정체에 대해 함구하라 했다. 그래서 세인의 정체를 아는 기사는 숀이 유일하다. 숀은 그래서 이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속 시원해질까. 하지만 왠지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제국으로 간다. 숀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 번이라도 다시 세인을 만난다면 반드시 이 배신감을 갚아주리라. 하지만 숀은 텅 빈 감정에 우울했다. 친구, 친구라고 생각한 존재에게 당한 배신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스락!
그때였다. 들려온 소리에 숀과 렌스, 휴는 모두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곧 모습을 드러낸 이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로 헬리아 공주였다.
“인기척 좀 내세요!”
숀이 괜히 짜증을 부리자 헬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아주 살판났네?”
“그, 그게…….”
“얼른 준비해. 바로 산 탈 거니까.”
“예? 이, 이것만.”
휴가 놀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가리켰지만 헬리아는 일절의 자비도 없었다.
“움직인다. 실시!”
“큭.”
“대장보다 더하다니까.”
“진작 알아봤지.”
결국 숀 일행은 눈물을 머금고 고기를 남기고 떠나야 했다. 그렇게 헬리아 일행은 사신단과는 다른 길로 제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스슥-
수풀 사이로 빠르게 달려가는 인형이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인간의 속도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어둠만큼이나 새카만 로브를 걸친 그는 어둠에 동화되었다.
어둠이 그였고, 그가 어둠이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휘익!
달려가던 그가 어느 곳에서 멈춰 섰다. 나무 위에 선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일련의 무리가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그가 찾고자 한 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더 기감을 넓혀 기운을 탐색해 보았으나 이곳 어디에도 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결코 헷갈릴 수 없는 기운.
“조금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군.”
낮게 읊조린 그는 몸을 돌렸다.
* * *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헬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던 하늘은 이내 말간 보름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달빛에 쌓인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헬리아는 그 광경을 보며 아름답다고 여겼지만, 숀 일행은 아니었다.
“흐으으으, 추워.”
“공주님, 이제 야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추워 죽겠습니다요.”
숀 일행은 로브를 바짝 여미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겨울이 아닌가. 거기다 밤이 되자 기온은 훨씬 낮아졌다.
헬리아는 혀를 찼다.
“남자가 되어가지고, 쯧.”
“남자가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성 차별이에요! 성 차별!”
“맞습니다!”
숀과 휴가 우우 하며 헬리아에게 야유를 보냈다. 헬리아는 참으로 꼴값 떠는 기사들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방에 마을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좀 참아봐.”
“우우우, 공주님, 그 이야기는 한 시간 전에도 하셨지 않습니까!”
숀이 발끈해 나섰지만 헬리아는 귓가를 긁적였다.
“기시감이야, 기시감.”
“하아…….”
헬리아의 행동에 일행은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나. 그저 저 말을 믿고, 분명 좀 전에도 들었지만 조금 더 참을 수밖에.
그때 멀리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 마을이에요!”
“다 온 거야!”
“거짓이 아니었어!”
헬리아는 기사들의 반응에 눈매를 찌푸렸다. 저놈들은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녀도 아니고. 옆에서 엘라임이 잠시 그녀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헬리아는 이 근방에 마을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알아본 바로 마을은 여기서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마을에서 난 소리가 아니야.”
그 말에 기사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을은 여기서 반나절 거리라고.”
“에엑! 근방이라면서요!”
“역시 거짓말이었어!”
“우릴 속인 거야!”
“조용히 안 할래?”
그제야 숀 일행은 잠잠해졌다. 그러다 그들도 상황을 인지했는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숲 한가운데 마을도 아닌데 사람 소리가 난다면 필시 예삿일은 아닐 터. 그들의 눈에 경계의 빛이 어리자 헬리아도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곧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 *
“흐흐흐, 이거 월척이로구나!”
“형님, 형님 다음이 접니다.”
“크크크.”
가죽옷에 털모자를 쓴 세 명의 장한은 떨고 있는 한 인영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에 칼을 둘러메고 웃음을 짓는 이들은 산적이었다. 그들은 국경 지대에 터를 잡고 아르센 왕국과 페르시아 제국을 오가는 상단을 습격하여 먹을 것과 돈을 갈취해 왔다.
오늘도 마차가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봤는데 그곳에 웬 아리따운 처자 한 명이 홀로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본 세 산적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먼지투성이에다 상처까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외모는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운지 산적들은 회가 동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크크, 형님, 어서 끌고 가지요. 이거 참을 수가 있어야지.”
“사, 살려 주세요.”
여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아가씨, 가만히 있으면 다치지 않을 거야.”
“그래,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크크크.”
세 명의 산적 중 큰형인 루켄이 여인의 팔을 잡고 끌었다. 가느다란 팔뚝이 손아귀에 타악 잡혀오자 그는 연신 음탕한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에 여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시, 싫어요!”
제법 강단 있게 뿌리쳐 보려 했지만 상대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어디서 앙탈은! 자, 어서 돌아가자.”
“예, 형님!”
여인의 팔을 잡은 루켄은 마차가 보이지 않자 몸을 돌렸다. 허탕을 쳤지만 수확은 나쁘지 않았다. 여인을 보는 루켄의 눈에 음심이 동할 찰나였다.
‘어, 어떻게 하지?’
여인은 이대로 끌려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어?’
그때 여인의 눈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사, 살려 주세요!”
* * *
“이거야 원.”
상황을 확인한 헬리아는 혀를 찼다. 산적으로 보이는 놈들이 한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어떻게 합니까!”
숀 일행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몸을 움직이자 헬리아가 먼저 말고삐를 잡았다.
“뭘 어떻게 해? 돌아가야지.”
“예?”
“돌아간다구요?”
“저 상황인데요?”
“딱 봐도 아주 귀찮을 상황이구먼. 피하는 게 상책이야.”
헬리아의 말에 숀 일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친단 말인가. 그것도 귀찮아진다는 이유로! 그러나 헬리아는 숀 일행과 생각이 전혀 달랐다.
‘괜히 일 잘못 꼬이면 손해 보는 게 누군데!’
함부로 구해 주는 거 아니라고, 구해 주면 보따리까지 내놔야 한다. 게다가 밤길에 혼자 움직인 저 여인도 이상했다.
“사, 살려 주세요.”
하지만 그녀가 말고삐를 틀기도 전에 그들을 먼저 본 여인이 외쳤다.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팍 썼다.
“가게?”
“쯧.”
엘라임은 그런 헬리아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살려 달라 말하는데 회피할 헬리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뭐, 회피하려고 하긴 했지만.’
여인의 외침 덕분인지-헬리아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산적들이 그들을 발견했다.
“마침 잘되었구나!”
루켄은 헬리아 일행을 보며 웃었다. 상단의 마차는 아니었지만 말을 타고 있고, 제법 돈이 있어 보이는 게 빈손으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여자도 얻고, 돈도 얻고,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가진 걸 내놔라!”
루켄이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뭔가 반응이 와야 하는데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귀찮지만 여인을 구해야겠지.”
“그럼 제가 나설까요?”
그들은 루켄의 이야기를 아주 완벽히 무시하고 있었다.
“이익, 이놈들이! 본때를 보여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루켄이 신호하자 두 명의 산적이 칼을 빼 들고 건들건들 헬리아 일행에게 다가갔다. 호기롭게 그들을 처치할 목적으로 걸어갔는데, 점점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 이 녀석들 대체 뭐지?’
‘잘못 걸린 거 아니야?’
산적들은 가까이 가자 그제야 헬리아 일행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그건 결코 장식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에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산적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뭣들 하는 거냐!”
루켄이 미적거리는 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들도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씨, 우리보고 어쩌라고.’
‘완전 똥 밟았다!’
일자무식이라곤 하지만 그들이 겪어온 바로는 이런 자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뭐지?’
루켄도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는 그때서야 움직이지 않는 수하들을 보곤 찔끔했다.
‘젠장, 도대체 뭐야? 설마…….’
감을 잡은 루켄은 침을 꼴딱 삼켰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좀 전의 여인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침착해라, 루켄.’
루켄은 심호흡을 하곤 다시 신색을 회복했다. 당황해 놀라 제대로 사고를 하지 못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이렇게 꿀릴 게 없었다.
“흥, 제법 한가락하는 놈들이구나!”
그때였다.
수풀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수십 명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일순 태세를 정비하더니 일사분란하게 헬리아 일행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오셨습니까, 두목!”
루켄은 산채 식구들을 이끌고 온 자신의 우두머리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산적의 우두머리, 로한은 루켄이 아닌 그가 붙잡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더니 입술을 핥았다.
“호오, 제법 예쁘장한 계집이구나.”
그러다 그의 시선이 헬리아에게 향했다.
“호오!”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한 떨기 은은하게 피어난 백합이라면 헬리아는 화려하게 빛나는 장미와도 같았다. 은은한 백합도 아름다우나 로한의 취향은 가시가 돋은 장미 같은 여자였다.
로한의 눈동자에 음심이 마구 흘러나왔다. 헬리아는 그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어딜 가든지 발정 난 개새끼는 존재하는 법. 헬리아가 움직이려 하자 엘라임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보지 마, 눈 썩어.”
엘라임이 싸늘한 눈으로 로한을 노려보았다. 로한은 그 순간 몸이 얼어붙은 듯한 착각을 느껴야 했다. 엘라임의 표정은 그만큼 차가웠다. 평소 웃던 그가 아니었다. 헬리아를 바라보는 로한의 음탕한 시선에 엘라임은 그를 죽여 버리고 싶어졌다.
“크크크, 오늘은 제법 수확이 좋구나! 밤이 심심치 않겠어!”
로한이 크게 웃었다. 엘라임이 스윽 앞으로 나섰다.
“죽여도 돼?”
평소 그가 쓰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라임은 그만큼 화가 나 있었다. 감히 누구에게.
“적당히 손만 봐줘. 죽이진 말라고. 불쌍하잖아.”
헬리아가 히죽 웃었다. 어찌나 그 웃음이 섬뜩한지 화가 났던 엘라임이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을 정도였다.
‘크, 큰일 났어. 진짜 화가 났잖아.’
엘라임은 저도 모르게 살짝 물러섰다. 헬리아는 로한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로한은 순간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었다.
‘뭐, 뭐지?’
“죽음은 너무 자비롭잖아?”
헬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거친 그녀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의 거시기를 잘라 불에 구워줄 테니 걱정 말라고. 크크크.”
“거, 거시기?”
로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오한이 엄습했다.
‘이, 이거 괜히 잘못 건드린 거 아니야?’
하지만 이미 활시위는 떠나갔고, 로한은 이내 이성을 잃었다.
‘어차피 수는 우리가 많다. 어린 여자에게 겁을 집어먹을 내가 아니란 말이다!’
로한은 분노 때문에 결코 해선 안 될 실수를 저질렀다.
“저년을 잡아와라!”
“와아아아!”
산적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피융! 피융!
수십 개의 화살이 헬리아 일행을 향해 쏟아졌다.
“크하하하! 네년의 그 기고만장함이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휘이익!
거대한 물 회오리가 허공에 생겨나더니 모든 화살을 쓸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대체!”
물 회오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매복해 있던 산적들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거대한 물줄기에 산적들은 비명을 지으려 제대로 칼조차 휘두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자, 그럼…….”
말끔하게 정리된 주변을 둘러본 헬리아는 몸을 떨고 있는 로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그의 거시기를 말이다.
“따, 딸꾹!”
로한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거시기를 향하자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막아 보아도 두려움에 비롯된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뽑아줄까나아? 으응?”
“딸꾹!”
그 순간만큼은 피아를 넘어 숀 일행과 산적 모두 자신의 거시기를 저도 모르게 보호했다. 헬리아가 한 발 앞으로 더 나서자 로한이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했다.
“도, 도망가야…….”
로한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로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번뜩이는 검날이 목줄기에 와 닿자 얼음이 된 듯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어, 언제!’
서늘한 검날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로한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로한은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신이여, 왜 이런 시련을! 내 거시기!’
로한의 머릿속엔 이미 주마등이 촤르륵 펼쳐졌다.
‘누구지?’
헬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며 이맛살을 좁혔다. 그가 산적 우두머리의 목에 검을 겨눌 때까지 그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적인가?’
하지만 로한의 반응을 보아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늦었습니다.”
“이 목소린…….”
헬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휘익.
로한의 목에 검을 들이민 남자가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달빛에 그의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은빛이 아니었다. 밤하늘보다 더욱 검은 색의 머리카락. 그가 예의 무뚝뚝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안!”
헬리아는 이안의 등장에 살짝 놀람과 동시에 반가움을 느꼈다. 국경 인근에서 볼 줄 알았는데.
“아예 못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이안의 몸에선 예전과 달리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곧 몸 안의 기운을 제대로 갈무리하고 있다는 뜻. 폐관수련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헬리아는 그런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너무 늦었다고.”
“대장!”
“대장님!”
숀 일행도 이안의 등장에 반가운 듯 외쳤다. 왠지 이제야 제대로 된 사람과 함께 다닐 수 있다는 안도감도 살짝 들었다. 헬리아 공주님과 함께해 보니 얼마나 대장이 자비로웠는지.
“당신은 여전히 악취미로군요.”
“그놈이 나쁜 거지. 설마 내가 진짜로 그놈 거시기를 뜯겠어? 그런 더러운 짓은 사양이야.”
‘당신이라면 하고도 남아’라는 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상황은 너무나 쉽게 종결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산적들은 결코 이날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 * *
“저, 저기 구해 주셔서…….”
“그럼 이만.”
상황이 해결되자 여인이 쭈뼛쭈뼛 헬리아 일행에게 다가왔지만 헬리아는 얄짤 없었다. 자비도 없이 바로 말에 올라타려 하자 여인이 얼른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다리를 잡고 난리야!”
“저, 저기!”
여인은 헬리아의 다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손을 쓰지 못했다. 거기다 연약한 여인에게 손을 쓰기엔 모두들 신사였다. 물론 헬리아는 신사가 아니기에 매정하게 여인을 떼어냈다.
헬리아는 다리를 툭툭 털었다. 여인은 울상을 지었다.
“저, 저기…….”
“안 돼!
“아직 말도 안 했는데요.”
“암튼 안 돼.”
여인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헬리아가 누군가. 애가 울어도 꿈쩍을 안 하는 초냉혈인 아니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는 여인의 눈물에 모두 안절부절못했다.
“고, 아니, 아가씨, 여자 혼자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숀이 나서서 헬리아를 말렸다. 공주님이라면 정말 버리고 갈 사람이다.
“맞습니다. 이런 추운 날 혹시 객사라도 하게 되면…….”
“가는 길이니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렌스와 휴도 거들자 여인이 눈을 반짝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헬리아는 표정을 구겼지만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시커먼 세 명과 여인의 눈빛에 결국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가, 감사합니다!”
여인은 헬리아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헬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정말 어디서 본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헬리아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헬리아가 자신의 턱을 들어 올리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 저기…….”
“어디서 본 적 없어?”
“그, 그게…….”
여인의 얼굴은 아주 새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헬리아는 요리조리 여인의 얼굴을 훑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더는 기억이 나지 않자 여인의 턱을 내려놓았다. 여인은 마치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수줍은 새색시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보다 다음 마을까지야. 알았어?”
“아니, 저기 이왕이면 제국까지…….”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이란 말에 다른 이도 모두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인을 보았다.
“제국인인가?”
그러고 보니 억양이 아르센 왕국 사람들과 미묘하게 달랐다. 한데 제국의 여인이 이런 곳까지 무슨 일이지?
“수도로 가는 중이었습니다만, 그게 가다가 길을 잃어 배를 잘못 타는 바람에…….”
배를 얼마나 잘못 타면 제국이 아니라 여기에 있냔 말인가. 헬리아는 골이 다 지끈거렸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나서…….”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은 해야겠으니.
“그러고 보니 소개하는 걸 잊어버렸네. 리아라고 해.”
“아, 저는 알런입니다.”
그렇게 헬리아 일행에 짐 하나가 추가되었다.
* * *
밤이 깊어지면서 다시금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다행히 헬리아 일행은 국경 인근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마을 안은 적막이 가득했다. 마을 안으로 진입한 일행은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눈이 내려서 그런 것일까. 하얗게 쌓인 눈은 밟은 흔적이 없었고,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마을이라 여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숀이 주변을 살펴보다 빨개진 코를 훑었다. 추위에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숀의 말에 헬리아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마을은 작았다. 가게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다른 마을로 갈까요?”
“다음 마을은 너무 멀어. 어쩔 수 없지만 민박을 할 수밖에.”
제대로 일정을 세우고 움직인 여정이 아닌지라 미처 방을 생각지 못했다. 헬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숀 일행이 잘 곳을 찾으러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후. 기사들이 다시 헬리아에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모두 묶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대개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마을엔 공동 회관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곳엔 사람이 적어서인지 공동 회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헬리아는 일행을 나누기로 결정했다. 헬리아는 이안, 엘라임, 알런과 함께하고, 숀과 렌스, 휴는 따로 묶었다. 헬리아 일행은 우선 마을의 촌장집으로 보이는 가장 큰 집으로 향했다.
똑똑-
이안이 나서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데 열린 것은 문이 아니라 문 위쪽 중앙에 난 작은 문이었다. 열린 작은 문 사이로 한 쌍의 눈이 헬리아 일행을 훑었다.
이안이 나서며 말했다.
“지나가는 여행자입니다.”
탁.
“일없네.”
이안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가 다시 한번 더 문을 두드리려 할 때 헬리아가 나섰다.
“네 그 시커먼 눈동자에 누군들 안 도망가겠어.”
“…….”
이안이 마뜩치 않다는 듯 얼굴을 구겼지만 헬리아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똑똑-
“지나가는 여행자예요. 머물 곳이 없어서 하룻밤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평소 하지 않는 공손한 말투, 그러나 이미 다들 많이 들어온 가식적인 말투라 누구도 동요치 않았다. 그녀의 내숭이 통한 것일까. 굳게 닫혔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귀족은 아니겠지……?”
노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평범한 여행객이에요. 부탁드려요.”
그러자 반쯤 열렸던 문이 활짝 열렸다. 집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주름진 눈으로 헬리아 일행을 훑었다. 헬리아는 경계 어린 노인의 표정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음 덕분인지 노인은 눈에 준 힘을 풀었다.
“저는 리아라고 합니다. 혹시 이 마을의 촌장님이신가요?”
“그러네. 한데 하룻밤이면 되겠는가?”
“하룻밤이면 충분합니다.”
“……들어오시게.”
“감사합니다.”
헬리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헬리아를 보다 이내 뒤에 있던 일행을 향해 다시금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촌장 하겐트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보아하니 여자들은 몰라도 남자들은 꺼리는 모양이다.
“뒤에 있는 자들은 일행인가?”
“네. 부탁드려요.”
“흐음.”
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때문에 받아들이는 거네.”
“감사합니다.”
헬리아가 촌장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뒤에 있는 이안을 향해 혀를 찼다.
“역시 네 얼굴이 문제였어.”
“…….”
헬리아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은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