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42)

제2장 반격

또르르-

투명한 글라스에 붉은 와인이 차올랐다. 캄캄한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오롯이 촛불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 안을 비췄다. 후작은 와인 한 모금으로 입안을 축였다. 그러나 와인의 달콤한 맛을 전혀 음미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헬리아 공주. 마치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그녀의 존재는 그의 신경을 사사건건 건드렸다. 최근 플로렌스 공작을 주축으로 헬리아 공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커져 갔다. 기존에 중립을 표방하던 귀족들은 물론, 왕세자 측 세력까지 흡수하며 그 몸집은 이미 2왕자파를 능가할 정도였다.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냉기를 머금었다.

“……헬리아 공주.”

그때 그의 상념을 깨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후작님, 월리슨 남작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게.”

문이 열리고 월리슨 남작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촛불 몇 개만이 방 안을 비출 뿐, 어두컴컴했다. 그 중심에 후작이 푸른 귀기를 발하며 서 있었다. 월리슨 남작은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 살 떨리는 모습에 월리슨 남작은 침을 꼴딱 삼켰다.

후작은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

“앉게.”

“아, 예.”

월리슨 남작은 앉으면서도 연신 후작의 기색을 살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숨 막혀 죽겠구먼.’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건 후작이 아닐까. 월리슨 남작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눈알을 굴렸다.

“사업은 잘돼 가는가?”

“아, 예. 후작님께서 뒤를 봐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군.”

“…….”

월리슨 남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후작은 그저 와인 잔을 빙빙 돌리고 있을 뿐이거늘, 마치 그의 손아귀에 자신의 목덜미가 잡힌 듯 옴짝달싹 못 했다.

후작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의 눈은 맹수처럼 월리슨 남작을 옭아맸다.

“엘라드 상단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후작의 질문에 월리슨 남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곧 그가 이곳에 불려온 이유를 직감했다.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알게 되자 월리슨 남작은 한결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예, 아르센 왕국 최고의 상단이라 알고 있습니다.”

“최고라…….”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라드 상단. 헬리아 공주와 함께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놈들이었다. 엘라드 상단은 많은 귀족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왕국 최고의 상단. 거기다 특정한 세력 밑에 귀속되어 있지 않은 상단이었다. 많은 귀족이 엘라드 상단을 포섭하려고 천문학적인 로비를 펼쳤지만, 엘라드 상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돌프 후작도 엘라드 상단을 포섭하려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한낱 상인 나부랭이가 최고라니…….”

월리슨 남작은 후작의 언사에 살짝 눈이 좁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다년간에 단련된 그의 표정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심사가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한낱 상인과 함께 있는 자가 누군데.’

자신도 상인인지라 후작의 말이 고까웠다. 후작이 월리슨 남작의 기색을 읽고 살짝 웃었다.

“내 한낱 상인 나부랭이라 해서 마음이 상했나?”

“아, 아닙니다.”

월리슨 남작은 땀을 삐질 흘렸다. 눈치도 빠르셔라.

“자네를 말하는 게 아니니 너무 개의치 말게. 내 알기로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는 작위도 없는 일개 평민이라지? 일개 평민이 왕국 최고라는 말을 듣는 것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월리슨 남작은 후작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물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한낱 평민이 어찌 후작님 같은 높으신 분들을 제치고 최고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후훗.”

후작이 와인을 음미했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월리슨 남작이 후작을 바라봤다.

“그 최고의 자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네.”

월리슨 남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가?’

그는 일어나 대뜸 머리를 숙였다.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최고의 자리에 후작님의 이름을 올리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후작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하오나…….”

월리슨 남작의 말에 후작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월리슨 남작은 그것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남작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일개 평민이 이룩한 것치고 그 아성을 무너뜨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금이 필요합니다.”

“자금이라?”

“상대는 왕국 최고라고 말을 듣는 상단입니다. 그들이 가진 돈이라면 왕국을 살 수 있다 말할 정도로 대단한 금력을 지녔습니다. 그런 자들을 상대하려면 우선적으로 자금이 필요합니다.”

후작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엘라드 상단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출혈은 감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있는 게냐?”

“그들에게 단순히 자금으로 승부를 건다면 승산은 삼 할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자들. 그들을 무너뜨린다 해도 결국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뭘 원하는 게냐?”

월리슨 남작이 고개를 들고 후작을 바라봤다.

“권력입니다.”

“권력이라?”

“그들이 지니지 않는 것. 그것으로 승부를 봐야 합니다.”

“권력이라, 그럼 내가 어찌해야 하는가?”

“후작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후작은 가만히 월리슨 남작을 바라보았다. 월리슨 남작은 긴장으로 손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후작의 입이 열렸다.

“좋다. 엘라드 상단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최고를 드리겠습니다.”

월리슨 남작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 * *

“또 움직였잖아.”

“…….”

헬리아는 표정을 미미하게 구겼다. 그 탓에 다시 한번 세드릭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리아!”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는지…….”

헬리아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캠퍼스 앞에 앉은 세드릭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세드릭은 연필로 슥삭슥삭 헬리아의 전신을 그려 나갔다.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세드릭이 헬리아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처음엔 단호히 거절했지만, 세드릭의 간곡한 청에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저변에는 세드릭의 그림 몇 점을 얻는다는 대가가 있지만 말이다.

“아주 비싸게 팔아버려야지.”

헬리아는 왕족의 그림이라는 이점을 살려 어떻게 하면 비싸게 팔까 음흉한 생각을 했다. 세드릭의 그림 실력 또한 수준급이라 제법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것이다.

“음흉하게 웃지 말고.”

“네네.”

헬리아는 비스듬히 누워 세드릭을 응시했다.

“요즘 어때?”

세드릭이 그림 그리는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헬리아는 그저 심드렁하게 말했다.

“후작이야 변함 없지.”

“아니, 그거 말고.”

헬리아가 세드릭을 바라봤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세드릭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안 경 말이야.”

“……왜 그 사람이 나와?”

“어? 사귀는 거 아니었어?”

“누가 누구랑 사귀어?”

세드릭이 잠시 스케치를 멈추고 헬리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가를 올렸다.

“설마 비밀 연애?”

“아니라니까!”

“뭐야, 진짜?”

“아니라고.”

“흐음.”

세드릭은 다시 쓱싹쓱싹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 사귈 거야?”

“내가 왜?”

“이안 경 인기가 많더라고.”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세드릭의 의도가 뭔지 감이 안 잡혔다.

“저번에 보니까 여자들한테 선물도 많이 받더라.”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다 뺏긴다?”

“…….”

헬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 당황했지?”

“……내가 뭘.”

“뺏긴다고 하니까 당황했잖아.”

“지어내지 마.”

당황은 아니지만 좀 거슬리긴 했다. 헬리아는 누구에게 자신의 것을 뺏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이안은 자신의 호위 기사가 아닌가? 단지 그뿐이다.

“흐음. 그렇구나.”

“잔말 말고 그림이나 얼른 그리기나 해.”

세드릭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다리가 점점 호전되면서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헬리아도 따라 옅은 웃음을 지었다.

세드릭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캠퍼스에 옮겨 그렸다.

“다 그리면 보여줄게.”

“그러시던가요.”

“킥킥.”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세드릭이 뒤를 돌아보자 시종이 헬리아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클리드 님께서 보내신 전갈입니다.”

“클리드가?”

헬리아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읽은 그녀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그 모습에 세드릭은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이런.”

“무, 무슨 일이야?”

헬리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작한 모양이야.”

“응? 뭘?”

“얼른 그림이나 그려. 안 그럼 간다?”

“아, 응.”

세드릭은 영문을 모른 채 그저 헬리아가 가버릴까 봐 얼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가엔 또 다른 형태의 미소가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다.

* * *

“크윽!”

온통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엘라드 상단의 총본부. 워렌의 술 냄새에 직원들은 모두 슬금슬금 그를 피해 다녔다.

“으아아악!”

워렌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은 이미 붉다 못해 검게 변했고, 짙은 기미가 눈 아래까지 점령했다. 머리는 제대로 빗지 않아 산발이었다. 거지도 이보다 신색이 훤할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어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대머리 돼요.”

어니는 워렌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 들고 냄새를 맡다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술을 몇 병이나 드신 거예요?”

“지금 그게 문제야!”

어니가 워렌에게 시원한 물을 대신 권했다. 워렌은 타는 목마름 때문에 얼른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윽, 젠장! 월리슨 상단 놈들!”

워렌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니는 그런 모습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라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상도덕이 있지! 남의 걸 빼앗아?”

“우리도 많이 빼앗았잖아요?”

“야!”

워렌이 어니를 향해 고함을 쳤다. 그리고 막 소리치려 했다.

“…….”

하지만 막상 소리치려니 할 말이 궁색해졌다. 어니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다 그를 달래기 위해 말했다.

“그, 그래도 뺏긴 사람들이 한 번도 원망 안 했잖아요? 윈윈 아니겠어요?”

“그거야 뺏긴 놈들도 눈치채지 못하게 뺏어오니까.”

“……하, 하.”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어니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게 돈을 많이 쏟아부을 줄 알았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적정 액수를 넘어 계약하는 건 오히려 우리가 손해예요.”

“젠장,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난 거야? 어디 돈 나는 나무라도 발견했나?”

최근 월리슨 상단은 전투적으로 시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견고한 엘라드 상단마저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었다.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라도 가진 듯 그들은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계약을 따내고 투자를 했다. 엘라드 상단도 돈이라면 뒤지지 않지만, 결코 손해를 보면서까지 계약하진 않았다. 또한 헬리아가 그것을 두고 볼 인사도 아니었다.

“돈만이 아니야.”

워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디 대단한 줄이라도 잡았는지 다들 벌벌 떨고 있어.”

어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줄이라뇨?”

“어디 줄이겠냐.”

“그럼…….”

“후우, 아돌프 후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번 치료약 문제도 그렇고 제대로 심기를 건드린 거지.”

“으악, 그러면 어떻게 해요? 아돌프 후작이라니!”

“좀 조용히 좀 해봐. 정신 사납잖아!”

어니가 주변을 발발거리며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자 워렌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자신의 앞에 앉혀 두었다. 어니는 푹 한숨을 내뱉었다.

“이러다 더 큰일 나는 건 아니겠죠?”

“우리가 누구냐! 엘라드 상단이라고. 왕국 최고의! 쉽게 당하겠냐! 게다가 우리 상단주가 가만히 있겠어?”

“맞아요! 리아 님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 거예요!”

어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헬리아라면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헬리아 이야기가 나오자 워렌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이내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요 아가씨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런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로 봐선 수상했다. 칼을 들이민 적에겐 가차 없는 존재가 바로 헬리아였다. 그녀만큼 집요하고 또 집요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요람에서 벌어진 일을 무덤까지 잊지 않는 자가 헬리아다. 그런 그녀가 여태까지 잠잠하다는 건 분명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뜻이다. 워렌은 순간 든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주께서 오셨습니다.”

워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헬리아가 이안을 대동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흰 가면을 쓰고 있는 헬리아는 워렌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잘 지냈어요?”

워렌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지금 잘 지냈냐는 말이 나와!”

“냄새 나요. 도대체 언제 씻은 거예요?”

헬리아는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키곤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

“상황이 어떤데요?”

“아돌프 후작이 엘라드 상단을 박살 내려고 아예 작정을 했다고.”

“뭐, 저번의 일에 꽤 속이 상한 모양이죠. 하긴 그 짓까지 했는데 별 소득도 없었으니. 큭큭.”

“웃음이 나와!”

워렌이 다그치자 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울까요?”

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무슨 일이라니요?”

“시치미 떼기는? 네 그 시커먼 속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저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이 어딨다고요.”

“…….”

그녀의 그 말에 워렌은 물론 이안과 어니도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헬리아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칫.”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워렌이 물었다. 헬리아는 자신의 가면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

“이제 제대로 반격하는 거죠.”

“반격이라니? 어떻게?”

헬리아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 *

“크하하하. 이게 다 얼마냐!”

월리슨 남작은 책상 위에 가득한 황금을 보며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아돌프 후작의 지원을 받은 월리슨 상단은 최근 승승장구였다. 어떤 거래를 하든지 아돌프 후작의 배경 덕분에 쉽게 계약을 따낼 수 있었고, 돈이 부족하다면 후작이 원조를 해주었다. 월리슨 남작이 최근 벌어들인 돈은 같은 기간 엘라드 상단의 수익을 상회했다.

“큭큭큭.”

월리슨 남작은 자신의 금고에 황금을 차곡차곡 쌓으며 흐뭇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마치 빵빵한 풍선이 터진 듯 축 처졌다.

“하아, 암만 벌면 뭐 해.”

그는 신경질적으로 금고를 닫았다. 목에 가시처럼 자신을 조여 오는 것이 그를 웃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니지.”

황금을 보니 물욕이 든 월리슨 남작은 치밀어 오르는 욕심에 다른 생각을 했다.

“이제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잖아?”

그녀는 자신에게 아돌프 후작을 도우라는 말만 했지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물론 평소의 눈치 빠른 그라면 결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온통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들어차 있었다. 황금으로 딱딱하게 굳은 머리는 온통 황금밖에 생각할 줄 몰랐다.

“애초에 금제니 뭐니 그런 것도 이상해.”

월리슨 남작은 은밀하게 마법사를 고용해 금제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마법사는 금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금제는 건 사람의 힘도 소모되는 일. 영원한 금제는 없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고통을 느꼈을 때는 직접 만났을 때뿐이었어. 그럼 역시!”

남작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없는 거구나! 없는 거야!”

자신에게 걸린 금제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남작은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큭큭큭, 내 반드시 받은 수모를 갚아주마.”

그녀에게 얼마나 수모를 당했던가. 순간 그녀의 금발이 떠올랐다.

“크크, 고년 얼굴은 제법 내 취향이었어.”

그의 눈동자는 음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상단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

순간 월리슨 남작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호기롭게 웃어젖히던 그는 없었다.

“누, 누구…… 인데?”

“아름다운 금발 미녀였습니다.”

금발에 대한 남작의 집착을 알고 있는 총관은 그가 부른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허억.”

월리슨 남작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설마.’

“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밖에 있습니다. 들일까요?”

“아니!”

월리슨 남작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거, 겁낼 필요 없다.’

꿀꺽.

“밖에 경비원이 있느냐.”

“예, 전에 말씀하신 대로 마법사와 익스퍼트 중급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후작의 원조를 빵빵하게 받은 월리슨 남작은 제일 먼저 돈을 투자해 호위 기사를 고용했다.

“절대, 절대 들이지 마라.”

“예?”

“절대 들이지 마!”

“아, 예.”

총관은 평소와 다른 남작의 행동이 얼떨떨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아.”

월리슨 남작은 초조하게 눈알을 굴렸다. 총관이 밖으로 나가고 몇 분이 지났다. 밖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 갔나?”

콰아아앙!

그 순간 문이 문짝째 날아가며 월리슨 남작의 옆에 박혔다.

“허억!”

“잘 지냈어?”

월리슨 남작은 너무 놀라 숨을 쉬지도 못 했다. 그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문을 부수고! 그녀, 아니, 헬리아가 월리슨 남작을 향해 걸어왔다. 월리슨 남작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 어떻게?”

“호위를 말한 거라면…….”

헬리아가 월리슨 남작을 툭 쳤다. 남작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전부 꿈나라로 가 있을 거야.”

월리슨 남작은 몸을 떨었다. 헬리아는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겨우 그 정도로 날 막을 생각이었어?”

“허억!”

월리슨 남작은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이미 공격을 했다. 그녀의 성격상 가만두지 않을 거다.

“머리 굴리지 마.”

“흡.”

“부숴 버리기 전에.”

헬리아가 주저앉은 월리슨 남작과 시선을 마주쳤다.

“설마 뒤통수치려고 한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헬리아가 월리슨 남작을 향해 웃었다. 남작은 그녀의 웃음에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게 아니라면 왜 뒤통수를 쳤을까? 아, 금제가 뻥이라고 생각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 그건…….”

헬리아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월리슨 남작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끄아아아아!”

금제가 있든 없든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고통스러운 건 같았다. 그걸 월리슨 남작은 이제야 알았다.

“사, 살려…….”

월리슨 남작이 눈물 콧물 질질 흘릴 때 헬리아가 손을 멈추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돈 많이 벌었지?”

“그, 그게…….”

“후작이 참 돈을 많이 썼더라?”

월리슨 남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 다 드리겠습니다.”

“다?”

월리슨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나 헬리아는 심드렁했다. 월리슨은 그녀의 마음에 들 만한 답을 골라 입을 열었다.

“제가 사라지겠습니다.”

“흐음?”

월리슨은 헬리아 공주의 입장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내버려 둔 이유도 말이다.

‘젠장, 내가 왜 그랬지?’

그녀는 자신을 놓아준 게 아니었거늘.

“후, 후작이 막대한 자금을 상단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사라지면…….”

헬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만족스런 대답이었다.

“좋아.”

“가, 감사합니다.”

“돈도 놓고 가.”

“예?”

“설마 가져가려는 건 아니겠지?”

“무, 물…… 론입니다.”

헬리아가 서늘하게 웃자 월리슨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악마 년, 네년이 다 가져라. 퉷퉷퉷!’

그날 이후 월리슨 남작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 * *

“이번 월리슨 상단의 매출입니다.”

페이튼 자작이 내민 보고서를 읽은 후작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엘라드 상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월리슨 상단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였다. 부담이 되는 액수였지만, 그 결과가 고스란히 눈앞에 보이니 후작으로서는 만족스런 결과였다.

“엘라드 상단은?”

“최근 모든 계약을 월리슨 상단에 빼앗겼습니다. 또한 엘라드 상단과 거래했던 대부분이 월리슨 상단으로 옮겼습니다.”

“좋군.”

후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애초에 이랬어야 했다. 후작은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시원했다. 이참에 월리슨 남작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를 느낀 후작은 페이튼 자작에게 물었다.

“월리슨 남작을 부르게.”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복면을 쓴 이가 내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작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하지만 복면인의 말을 듣는 순간 후작의 웃음은 싹 사라졌다.

“월리슨 남작이 상단의 자금을 모두 횡령하고 사라졌습니다.”

“뭐라!”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윽!”

순간 후작은 솟구치는 혈압에 뒷목을 잡았다.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페이튼 자작이 부축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걸로 보이느냐! 횡령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월리슨 남작이 횡령이라니. 그에게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것이…….”

복면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로서도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송구합니다. 미연에 방지를 했어야 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후작의 노성이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 아돌프 후작이 일개 상인에게 횡령을 당해? 하!”

후작은 어이가 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 월리슨 남작이라는 놈의 사지를 잡아 죄 뜯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장 그놈을 잡아와라!”

후작의 눈이 이글거렸다.

“명을 받듭니다.”

복면인은 한차례 부복을 한 뒤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후작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몸이 분노로 떨렸다.

“이놈을, 내 이놈을!”

엘라드 상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월리슨 상단에 들어간 돈은 한 해 자신의 영지를 운영하고도 남을 엄청난 자금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엘라드 상단의 자금력은 그보다 윗줄이기 때문에 후작은 자신의 권력과 인맥을 이용해 투자자를 모았고, 그들의 돈으로 엘라드 상단을 압박했다. 그의 의도대로 압박엔 성공했다. 문제는 그저 편리한 도구로만 여기던 월리슨 상단이 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으득, 월리슨 남작!”

후작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로 인해 손해를 본 귀족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아돌프 후작이라는 권력 앞에 몸을 사리고 있지만 틈이 생긴다면 그를 물어뜯는 피라냐가 될 것이다.

“후, 후작님.”

시종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후작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또 무슨 일이냐!”

시종은 제가 한 일도 아닌데 자신한테 화를 내는 후작이 야속하기만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소임에 맡게 방문객의 등장을 알렸다.

“에,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가 후작님을 뵙기를 청하옵니다.”

“엘라드 상단주가?”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녕하십시까,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꽤나 뻣뻣한 인사였다.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것에 뭐라 하지는 않았다. 후작은 마주앉은 엘라드 상단주를 관찰했다.

‘소문대로군.’

언제나 흰 가면을 쓴 괴짜라는 소문이 돌았다. 후작은 그 소문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가면으로 인해 도통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십 대 초반 정도의 젊은 여자였다.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전까지 엘라드 상단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엘라드 상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월리슨 상단을 이용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는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엘라드 상단이라.’

순간 후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전까지 몇몇 충돌은 있어 왔지만, 아돌프 후작과 엘라드 상단이 불구대천의 원수는 아니었다. 또한 상대는 상인.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적의 손도 잡을 위인이다. 후작의 표정이 변한 것도 그쯤이었다.

“내 익히 소문은 들어 알고 있네. 왕국 최고의 상단이라고.”

“훗,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이가 많지는 않는데 그 나이에 최고 상단의 상단주라니, 놀랍군.”

순간 가면 속에 가려진 상단주의 눈동자가 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명확치 않았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들리는 소문에는 저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그 뼈 있는 말에 노련한 후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그런 소리를 했던가?”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표정만 봐서는 정말 그런 것 같아 그의 노련미가 엿보였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한데 이곳엔 어인 일인가?”

후작이 얼른 화제를 돌리자 엘라드 상단주는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후작님과 한 번도 거래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지 뭡니까?”

후작의 입가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월리슨 남작의 견제로 엘라드 상단의 거래 대부분이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엘라드 상단이라면 분명 그 배후가 아돌프 후작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역시 이익으로 움직이는 놈들이군.’

“월리슨 상단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직까지 그 분이 쉬이 풀리지 않은 탓이다. 월리슨 남작을 잡으면 반드시 그 목을 개 먹이로 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다 이내 상단주의 흰 가면을 보고 냉정을 되찾았다. 과거의 실수보단 미래의 실속이 우선이었다.

후작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언제 화가 났냐는 듯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하다.

“그런 일이 있었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말하는 후작.

상단주가 입을 열었다.

“그 바람에 후작님께서 피해가 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상단주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깍지를 꼈다. 그 자세가 퍽 편안해 보였다.

“후작님도 알다시피 저는 상인입니다. 이익을 좇는 자지요. 이익이 되는 일엔 아군이든 적이든 모두 같답니다.”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원하던 말이었다.

‘엘라드 상단이라면 이번 손해를 만회할 수 있겠군.’

후작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나 표정은 조금 심드렁하게 지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건가?”

“간단합니다. 저희는 후작님에게 자금을 드리고, 후작님은 저희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후작의 눈이 작게 휘었다. 그가 원하던 바였다.

“어떻습니까? 후작님은 손해를 메울 수 있고, 저희 상단은 후작님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얻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서로 윈윈이 아니겠습니까?”

후작이 턱을 쓰다듬었다. 겉으론 무표정했지만, 속은 이미 계산을 완료한 상태였다. 적이었을 때는 최악의 적이지만, 아군이었을 때는 최고의 동료다. 상대가 지닌 자금은 가히 왕국 최고가 아닌가.

‘왕위가 멀지 않았음이야.’

엘라드 상단이 자금을 대준다면 마르지 않는 돈줄을 얻은 것과 같다.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단주가 말했다.

“후작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함께 사람이 왔는데 그를 불러도 되겠습니까? 제 호위 기사라 검을 소지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만 그가 물건을 갖고 있는지라.”

“물론일세.”

후작은 돈 문제를 해결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고 얼마 뒤 호위 기사로 보이는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단주는 흰 가면, 호위 기사는 검은 가면. 참으로 요상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손에는 상자가 들려 있었다. 후작은 기대감을 감추려 애를 썼다.

호위 기사가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열어 보시지요.”

“그럼 내 자네의 성의를 봐서 받도록 하지.”

후작은 천천히 상자를 얼었다.

“이, 이게.”

후작의 눈이 커졌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상단주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라니요?”

“네, 네년이!”

후작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상자를 상단주에게 던졌다. 그러자 뒤에 시립해 있던 호위 기사가 상단주를 보호했다.

상단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상단주는 혀를 차며 바닥에 흘러내린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이거야, 원.”

상자 안에 들었던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종이 쪼가리였다. 그러나 단순한 종이는 아니었다.

“돈을 갚으셔야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내가 월리슨 남작의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이냐!”

그것은 월리슨 남작이 끌어다 쓴 차용증이었다. 문제는 전부 후작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가장 많은 돈을 지원해 준 곳이 바로 엘라드 상단이라는 점이다.

후작은 그제야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월리슨 상단주를 어디에 감추었지?”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잘 살고 있을지 아닐지.”

“이익!”

후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장 저들을 잡아라!”

아돌프 후작의 외침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상단주 일행을 둘러쌌다.

“네년, 무슨 수작이더냐?”

“수작이라니요?”

상단주의 말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가 천천히 자신의 가면을 만졌다.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 순간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 너는!”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면을 벗은 그녀의 얼굴은 본 그의 얼굴은 온통 붉어졌다.

“헬리아 공주!”

“재밌지 않았습니까?”

헬리아가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돌프 후작은 믿을 수 없었다.

“다시 소개하지요.”

헬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것은 예의라기보다는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 헬리아입니다.”

“어, 어떻게!”

후작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그녀에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분노를 터뜨렸다.

“이곳에서 순순히 빠져나갈 줄 알았더냐?”

기사들이 헬리아 공주를 둘러쌌다. 그러나 헬리아는 전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검은 가면을 쓴 호위 기사가 가면을 벗어던지고 칼을 빼 들었다.

“아, 제 호위 기사라면 후작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으득, 네놈은.”

아돌프 후작은 이안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자신이 철저히 헬리아 공주의 손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왕족인 제게 칼을 들이미는 겁니까?”

헬리아는 후작을 향해 조소를 지었다. 후작은 왕족 시해죄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작은 냉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정녕 그리하시겠습니까?”

헬리아가 후작을 바라봤다.

“제가 이곳을 엘라드 상단주의 신분으로 온 것 같습니까? 아니면 헬리아 공주의 신분으로 온 것 같습니까?”

아돌프 후작은 헬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헬리아가 파놓은 덫에 걸렸음을 알아차렸다.

“이, 이익!”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제게 무슨 해가 생긴다면 그 죄는 모두 후작이 받으실 겁니다. 자, 저를 붙잡으시겠습니까?”

후작은 주먹을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터져 눈이 불어졌다.

헬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종이를 주워 그의 옷깃에 넣었다.

“상환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감히, 이 나를!”

“아, 그리고 이걸 빠뜨릴 뻔했군요. 월리슨 남작에게 지원해 주신 돈은 제가 아주 잘 받았습니다. 이번에 새로 사업을 하나 시작하는데 돈이 부족해 어떻게 할지 고민했는데, 덕분에 아주 잘될 것 같습니다.”

“이 죽일 년!”

후작의 손이 헬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헬리아가 후작의 손을 잡았다. 헬리아의 금안이 빛났다. 그것은 맹수의 것처럼 번뜩였다.

“맞는 건 사양하지요. 이건 제가 받을 게 아니거든요.”

헬리아는 후작의 손을 쳐 내고 몸을 돌렸다. 기사들은 그녀가 지나가도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헬리아!”

헬리아는 멀리서 들려오는 후작의 고함에 입꼬리를 올렸다.

* * *

아르센 왕성의 대전.

왕좌에 앉은 국왕 빈센트는 좌우로 서 있는 대신들 가운데에 서 있는 한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사신단 일행이었다.

“대페르시아 제국의 백작 헤스테인입니다.”

사십 대 후반의 헤스테인 백작은 키가 제법 컸지만 살집이 많아 통통한 몸매를 지녔다. 그는 살 때문인지 연신 비 오듯 땀방울을 흘려댔다.

“잘 오셨네.”

빈센트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연례 사신단을 웃음으로 맞이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아르센 왕국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국가로, 레칸 대륙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 거대 강국이었다.

아르센 왕국과는 거대한 물줄기인 세이트론 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어 오랫동안 왕래가 잦았다. 아르센 왕국과 페르시아 제국은 국교를 위해 서로 매년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사신단은 헤스테인 백작을 필두로 수십 명의 귀족이 함께였다.

헤스테인은 자신을 향해 도열해 있는 왕과 귀족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쯧쯧, 하나같이 촌스럽기 그지없군.’

헤스테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그의 본국인 페르시아 제국에 비해 아르센 왕국은 훨씬 낙후되어 있었다.

헤스테인 백작은 페르시아 제국 제1황비의 외척 가문으로 권위 의식에 똘똘 뭉친 골수 귀족이었다. 이번에 황제의 명을 받아 처음 제국의 사신으로 온 그는 꽤 거만해져 있었다. 그 탓에 그는 연신 아랫사람을 대하는 윗사람의 태도로 왕국의 귀족들을 대했다. 심지어 그것이 국왕이라도 말이다.

“한데 조금 그렇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헤스테인의 말에 빈센트가 물었다.

“제 비록 제국에서 백작 위를 지니고 있지만, 대제국의 폐하를 대신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귀국의 왕께선 어찌 하대를 하시는지요?”

빈센트의 눈매가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의 입가는 여전히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그렇군.”

빈센트의 대답에 헤스테인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나불거렸다. 빈센트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헤스테인의 무례한 행동에 아르센 왕국 귀족들의 심기가 사나워졌다. 헤스테인 백작을 향해 살기가 쏟아지는데도 얼굴에 철면을 깐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겨우 왕국의 귀족 주제에 어디 제국의 귀족에게 감히!’

헤스테인은 의기양양해 있었다.

“하면 이렇게 하면 되겠군.”

“예?

빈센트는 자세를 삐뚜름하게 잡은 다음 내리깐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달라진 국왕의 태도에 헤스테인 백작은 당황했다.

“돌아가라.”

“도, 돌아가라니요?”

헤스테인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반문하였다.

“긴 여행 탓에 귀라도 먹은 건가?”

빈센트는 나긋한 표정을 짓고 왕좌에 턱을 기대었다.

“돌아가라.”

그제야 빈센트의 말을 알아들은 헤스테인이 대로하였다.

“이, 이게 무슨 무례요! 본 백작은 대페르시아 제국의…….”

“이거 아주 햇병아리구먼. 아니 그렇소, 하이든 후작?”

빈센트가 웃으며 하이든 후작을 보자, 후작은 미미한 비웃음으로 헤스테인 백작을 쏘아보았다.

“여행이 힘들었나 봅니다. 저보다 젊은 인사가 귀까지 먹었으니…….”

그 조롱에 가까운 언사에 아무리 눈치 없는 헤스테인이라도 발끈했다.

“다, 당장 사과하시오!”

헤스테인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자 빈센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아르센 왕국의 귀족들은 그것이 결코 평범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거야, 원. 또 시작이군요.’

‘저 웃음에 누가 감히 당할꼬.’

‘허허,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저 고약한 녀석을 눌러 버리지요.’

아르센 왕국의 귀족들은 속으로 헤스테인을 향해 고소를 지었다. 철혈의 미소가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게 되리라. 헤스테인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사과라니? 어찌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인가?”

“무례한 언사요.”

“누가 무례했던가? 후작, 내가 그랬소?”

하이든 후작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빈센트는 다른 귀족들에게 물었지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 이게!”

“헤스테인 백작이라 했던가?”

빈센트가 미소를 흘렸다. 그것을 보고 헤스테인은 왠지 오싹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뭐, 뭐야!’

“자네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하는 소리야.”

“아, 아르센 왕국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도 좋은가?”

“예?”

“이런 이런,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야.”

빈센트가 슬쩍 목에 손을 가져갔다. 헤스테인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저, 저는 사신입니다! 제국이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뭐라 하였는가?”

빈센트가 씨익 웃었다. 헤스테인은 순간 소름이 쫙 올라왔다.

‘이, 이게 뭐야!’

자신이 생각한 상황과 전혀 달랐다.

“하나 충고해 주자면 그 나불거리는 입을 잘 간수해야 할 것이네. 짐은 아주 자비롭지만…….”

빈센트의 시선이 좌우에 도열해 있는 귀족들을 향했다. 헤스테인의 시선도 그를 따라 좌우를 훑었다.

‘헉.’

아르센 왕국의 귀족들이 하나같이 그를 향해 흉흉한 눈빛을 흘리는 게 아닌가! 헤스테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이거야 원.’

빈센트는 턱을 짚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의 눈빛에는 헤스테인 백작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아르센 왕국은 결코 제국의 속국이 아니다. 제국의 사신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헤스테인 백작의 무례한 태도에 그의 기를 눌러주려 했던 것이다.

“이, 이익!”

백작은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빈센트는 그 모습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송구합니다.”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네는 누구인가?”

빈센트가 눈에 이채를 띠고 그 남자를 보았다. 오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벨리앙 백작이라 하옵니다.”

헤스테인은 그에게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벨리앙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헤스테인은 입술을 깨문 채 뒤로 물러났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벨리앙 백작의 두 눈엔 총기가 흘렀고, 인상은 반듯했다.

‘이거 제대로 된 자로군.’

어찌 그가 먼저 앞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빈센트는 삐딱했던 자세를 풀고 조금 당겨 앉았다.

“하오나…….”

벨리앙 백작이 눈을 곧게 뜨고 말했다.

“헤스테인 백작의 말처럼 저희는 본국의 폐하를 대신해 이곳으로 온 사신들이옵니다.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중하고도 당찬 말이었다. 제국 귀족으로서의 자부심도 느껴졌다. 빈센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더 이상의 기 싸움은 그만두고 그를 맞이하였다. 벨리앙 백작은 빈센트의 기세가 변하자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벨리앙 백작은 빈센트를 보며 손에 땀이 흐르는 것을 애써 감췄다.

‘역시 철혈의 미소를 지닌 왕이로군.’

아르센 왕국은 레칸 대륙에서 제국 다음가는 국력을 지닌 국가였다. 헤스테인은 멋모르고 설쳤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왕국과 적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벨리앙 백작은 싸늘한 눈으로 헤스테인 백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시선을 돌렸다. 헤스테인 백작이 말을 할 수 없는 이상 그가 본론을 꺼내야 했기 때문이다.

“본국의 폐하께서는 아르센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네.”

“하여 본국의 폐하께는 좀 더 아르센 왕국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좀 더 돈독한 관계?”

빈센트의 표정이 변했다. 그에 아르센 왕국의 귀족들도 웅성거렸다. 벨리앙 백작이 입을 열었다.

“본국의 폐하께서는 아르센 왕국의 비앙카 공주님과 본국의 황태자 마마의 혼인을 바라시고 계시옵니다.”

벨리앙 백작의 말에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그에 아르센 왕국의 시종이 눈치 빠르게 나서며 그것을 받아 들고 빈센트의 앞으로 나가갔다.

“……이것은.”

빈센트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황제 폐하의 친서이옵니다.”

제국에서 온 혼담은 아르센 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 * *

“어서 오십시오.”

아돌프 후작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 제국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헤스테인 백작은 아돌프 후작의 극진한 대접에 입꼬리를 올렸다.

“헤스테인 백작이라 하오.”

사십 대밖에 되지 않은 헤스테인 백작의 반공대에도 후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가엔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아돌프 후작이 보기에 상대는 아직 나이만 먹었지 제대로 정치 물도 못 먹어본 풋내기였다.

‘제국도 한물갔군. 이런 하룻강아지를 보내다니.’

아돌프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헤스테인 백작은 더욱 우쭐해졌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헤스테인 백작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한 후작은 그를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으로 안내했다. 헤스테인 백작은 아돌프 후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한데 벨리앙 백작께서는 무슨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돌프 후작은 벨리앙 백작과 헤스테인 백작 두 사람을 모두 초대했다. 아니, 솔직히 멋모르는 헤스테인 백작보다 벨리앙 백작이 오길 기대했었다.

헤스테인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대전에서 겪었던 굴욕이 다시금 떠오른 탓이다. 빈정이 상한 헤스테인은 입술을 비뚜름하게 치켜 올렸다.

“나로는 안 된단 말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일이 있어 오지 않았소.”

아돌프 후작은 얼른 그를 달랬다. 목적만 아니라면 이런 벌거숭이 인사의 목을 콱 비틀어버렸을 것이다.

“자자, 드시지요.”

후작이 시종에게 눈짓하자 시종은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식당 안으로 아리따운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 달라붙은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들을 보자 헤스테인 백작의 눈이 빙그르 돌아갔다. 그는 하녀들의 몸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큼큼, 그럼.”

하녀들은 웃음을 지으며 백작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백작은 아름다운 하녀가 따라준 와인을 마시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만족스런 식사를 끝내고 두 사람은 접객실로 옮겨 차를 마셨다. 아돌프 후작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강녕하신지요?”

“늘 같으시오.”

제국의 황제 카사스 3세는 연로한 나이임에도 여전히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 본인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그나마 황태자의 나이가 젊은 축에 속해 아비보다 늙어 죽을 염려는 없겠지만, 만약 황제가 제 나이에 황태자를 낳았다면 황태자는 황위에 오르지도 못 하고 늙어 죽었을 것이다.

“이번 혼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헤스테인 백작은 후작의 말에 옅게 비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왕국의 공주 따위가 본국의 황태자와 혼인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헤스테인 백작은 이 사신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엄명이 떨어져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치가 없고 머리가 얕은 자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서로 좋은 일 아니겠소?”

“물론이지요. 이 혼담으로 인해 왕국과 제국 두 나라 간의 유대가 더욱 깊어질 겁니다.”

“이를 말이겠소.”

후작과 백작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속내는 서로 달랐다.

동상이몽.

후작은 제국의 후광으로 2왕자를 왕위에 올려놓기 위함이고, 백작은 그저 황제의 명을 이행하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으려는 속셈이다. 서로의 결과물은 달랐지만 가는 방향은 같았다.

“받으시지요.”

후작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백작 앞에 내밀었다. 백작은 힐끔 그것을 보더니 스윽 손을 가져갔다.

“이것은?”

“로칸 산맥의 금광 권리서입니다.”

헤스테인 백작은 누가 볼 새라 서둘러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후작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참금이라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큼큼, 폐하께서도 후작의 노고에 깊이 감명받으실 거외다.”

후작은 백작을 한번 보더니 작은 상자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투박해 보이는 상자였다.

“먼 제국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백작은 슬쩍 작은 틈새로 상자 안을 확인하고 빠르게 덮었다. 금빛이 언뜻 스쳐 보이는 것이 확인하고 말고 할 것 없이 황금이다.

“뭘 이런 걸 다…….”

백작은 상자를 얼른 품에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가 받아야 할 것은 모두 받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살펴 가시지요.”

백작은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김에 입을 열었다.

“한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혹여 혼담이 깨지는 일은 없겠소? 그렇다면 귀국의 폐하께서 심히 아쉬워하실 겁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작이 웃자, 백작도 웃었다. 제국에서 먼저 혼담을 청해 왔다. 특별한 명분이 없는 이상 왕국에서 혼담을 거절한다면 제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백작은 후작을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끼이익-

캄캄한 어둠 속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문을 열고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정오가 넘은 시각. 가게 안에는 그저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만 몇몇 있을 뿐 조용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카운터로 갔다. 그곳에는 외눈 안경을 쓴 은발의 바텐더가 그날 쓴 컵을 닦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남자는 의자를 끌고 그의 앞에 앉았다. 바텐더 잭은 자신 앞에 앉은 남자를 한번 흘깃 보고는 말했다.

“무엇을 드릴까요?”

“…….”

남자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망설이고 있었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잭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주위를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면 정보를 구할 수 있다고 해서 왔소.”

잭의 눈빛이 변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잭이 로브를 입은 남자를 키안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똑똑-

“손님이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잭은 로브를 입은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남자는 안에 있는 키안을 보고 눈이 커졌다.

“에, 엘프?”

“이쪽으로 앉으시죠.”

키안이 웃으며 그를 맞은편 자리로 권했다. 남자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쭈뼛쭈뼛 자리에 착석했다. 방 안은 온통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그 점이 엘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정보를 원하시나요?”

“원래 이렇게 쉽게 정보를 살 수 있는 것이오?”

키안은 남자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남자는 자신이 들었던 베라에 대한 정보가 실제와 다른 것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거야 상대에 따라 다르지요.”

남자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그가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대자 키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먼 제국의 사신께서 이런 곳을 찾는다는 게.”

로브를 입은 남자, 아니, 벨리앙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한동안 검을 쥐다가 이내 손을 떼고 로브를 벗었다. 단정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떻게 아셨소?”

“기업 비밀이라고 해두죠.”

“후우…… 그래서 그냥 들여보내 줬군. 내가 무슨 정보를 의뢰할지도 정보가 되니까.”

“등가교환 아니겠습니까?”

키안의 웃음에 벨리앙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

벨리앙 백작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이미 이곳까지 온 마당에 가릴 것이 없었다.

“엘라드 상단의 활력 포션 원액이 필요하오.”

키안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황태자비의 병환 때문이군요.”

벨리앙 백작은 멈칫했지만, 그것으로 상대의 정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맞소. 제국에서 황태자비 마마의 병을 고치려 했지만, 고칠 수 없었소. 해서 엘라드 상단의 활력 포션 원액이라면…….”

엘라드 상단의 포션은 왕국은 물론 타국에서도 유명했다. 물론 거래하는 수량은 극히 적었지만,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다.

“그 일이라면 저희가 아니라 엘라드 상단에 직접 가보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

이미 가보았다. 사람을 시켜 활력 포션 원액을 요청했지만 기업 비밀이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벨리앙 백작은 그 원액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베라에 온 것이다.

“활력 포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오.”

“글쎄, 원액에 대해선 워낙 철저해서.”

키안의 말에 벨리앙 백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고 말을 이었다.

“그럼 엘라드 상단의 주인을 만나게 해주시오.”

키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흐음, 워낙 비밀스럽게 감춰진 사람이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겠소.”

벨리앙 백작의 눈이 굳게 빛났다. 키안은 자신의 매끈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이걸 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재보는 것이다. 하지만 곧 결정을 내렸다.

“아시다시피 엘라드 상단주에 대해 알고자 하시는 손님이 많이 이곳을 찾으셨죠.”

“그럼?”

기대에 찬 벨리앙 백작의 눈을 보고 키안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왜인지 아십니까?”

“엘라드 상단주가 낸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얹어주겠소.”

머리 회전이 빠른 벨리앙 백작이었다. 정체를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엘라드 상단에서 돈을 받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흐음, 엘라드 상단이 얼마를 주는 줄 아시고요?”

“그건…….”

왕국 최고라 불리는 상단이다. 적은 돈은 아닐 것이다. 벨리앙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키안의 목소리에 벨리앙 백작이 그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운이 좋으시군요.”

“운이 좋다니……?”

“마침 그 기간이 오늘로 끝입니다. 한데 아직 갱신 전이랍니다.”

키안의 말에 벨리앙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럼!”

“알려드리지요.”

키안이 눈매를 곱게 휘며 말했다.

“헬리아 공주를 만나세요.”

벨리앙 백작의 눈이 커졌다.

* * *

“이런 매국노 같은 놈!”

공작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자가 제정신이란 말인가!”

“궁지에 몰렸으니 뭐라도 해야겠지요.”

“공주!”

플로렌스 공작은 여유롭게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헬리아를 향해 외쳤다. 헬리아는 그런 공작의 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브가 따라준 차를 음미했다.

“그리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후우…….”

맞장구쳐 줄 사람이라도 있어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헬리아의 무심한 반응에 공작은 맥이 풀렸다. 그는 이미 식은 차를 벌컥 마셨다.

“이제 어찌할 셈인가? 황태자와 비앙카 공주가 혼인을 한다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거네.”

“글쎄요.”

헬리아는 찰랑거리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느긋한 표정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제국과의 혼인.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돈으로 아돌프 후작을 옭아맸지만, 겨우 그뿐이었다. 아돌프 후작은 능구렁이처럼 달아날 또 다른 구멍을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헬리아는 제국과의 관계에 대해 잘 알아보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노련한 정치가답게 후작은 많은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혼인을 거절한다면 문제가 생기겠죠?”

“이를 말인가!”

게다가 후작이 이 좋은 혼담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후우, 제국이 아무 이유도 없이 후작의 혼담을 받아들였을 리 없네.”

“뭐 큰 거라도 지참금으로 가져갔겠지요.”

미혼도 아닌, 이미 황태자비가 있는 황태자와 혼인을 시킨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정치적인 이유였다. 후작은 제국에게 어떠한 대가를, 그리고 제국은 후작에게 힘을 빌려주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혼인이 성사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후우…….”

“전…… 하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전날의 일 때문인가. 묘하게 전하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혼인을 허락할 걸세.”

“그렇군요.”

공작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돌프 후작이 받아들인 혼담으로 야기된 문제는 단순히 후계자 싸움에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후 제국의 내정 간섭이 염려되었다.

헬리아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공작을 보며 옅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는 걱정이 안 되시나 보오.”

“아직 혼인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네만. 거절할 명분이 없네. 아무리 왕국의 힘이 약하지 않다 하나, 상대는 제국일세. 우리 쪽에서 거절한다면 제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걸세.”

“이참에 명분 하나 잡겠군요.”

헬리아의 머릿속에 더 나아가 전쟁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제국의 황제 카사스 3세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닐세.”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카사스 3세는 19살에 제국의 황제에 등극한 후 수많은 전쟁을 치러 왔다. 현재 나이 팔십을 바라보고 있지만, 제국을 이토록 거대한 영토로 이룩한 업적은 바래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까지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권력에 대한 야욕을 지닌 인물로 보였다.

“그거 걱정이군요.”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서 초조함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플로렌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헬리아를 보았다.

“혹 무슨 방도가 있는 모양이군.”

헬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어찌할 생각인가?”

“제국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봤지만…….”

“아뇨, 아주 자세히 말이죠.”

헬리아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한데 재밌는 상황이더군요.”

“재밌는 상황?”

헬리아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 * *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은 반짝거렸고, 악사들의 음악 소리는 파티의 흥을 돋우었다. 제국에서 온 사신단을 맞이하는 연회였다.

“제법 화려하군요.”

헤스테인 백작은 아르센 왕성의 연회홀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흥, 제법이군.’

아르센 왕성의 연회홀은 제국의 연회홀 못지않게 크고 웅장하며 화려했다.

“한데 이 여성분이…….”

헤스테인 백작은 아돌프 후작 곁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에 맑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 장미의 여신이라고 부를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쉽군, 황태자와 혼인할 사이가 아니었으면…….’

헤스테인 백작의 눈이 음흉한 욕망으로 번들거리자 비앙카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오랜 시간 다져진 그녀의 포커페이스는 이런 돼지 한 마리로 무너지지 않았다.

“비앙카라고 합니다.”

비앙카가 치마를 살짝 들고 예를 표했다. 헤스테인 백작은 비앙카의 인사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국왕 빈센트는 제국과의 혼담 문제를 뒤로 물렸다. 너무 급작스러우니 추후 논의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백작은 왕국의 거절 따윈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2왕자 전하는 보이지가 않소?”

“몸이 좋지 않아 연회에 참석치 못했습니다.”

아돌프 후작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최근 2왕자 조슈아의 행동이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멍해 있었고, 항상 카쟌을 찾았다.

‘내 반드시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대로 그자를 없애야겠군.’

후작은 칼날을 벼렸다. 저번 일로 카쟌의 도움을 받았지만 길게 봐서 결코 곁에 오래 둘 만한 자가 아니었다.

백작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엔 비앙카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가는 동안 눈요기는 되겠군.’

그가 음흉한 눈길을 비앙카에게 쏟는 그때였다. 벨리앙 백작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헤스테인 백작은 원체 연회와는 거리가 먼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의외였는지 말을 걸었다.

“이곳엔 웬일이오?”

“무엇을 말인가.”

벨리앙 백작은 연신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소?”

“아닐세.”

“처음 뵙겠습니다. 아돌프 후작입니다.”

아돌프 후작이 벨리앙 백작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눴다. 제국의 사신과 잘 지내보려는 속셈인 것이다. 하지만 벨리앙 백작은 후작의 인사를 받고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벨리앙 백작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백작은 연신 주변을 돌아보며 헬리아 공주를 찾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엔 헬리아가 서 있었다. 헬리아의 등장 하나만으로 연회장은 한층 밝아진 듯 환해졌다. 귀족들은 모두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결코 파티에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초대장을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한 건도 참가하지 않아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헬리아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친분을 맺고 싶어 하는 모든 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비앙카 공주의 혼담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고, 헬리아 공주는 아직 미혼이다. 젊은 청년들은 물론 아들을 둔 중년 귀부인들까지 헬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제 아들은 어떠신가요?”

귀족들이 한마디씩 던지는 통에 헬리아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건 숫제 노처녀가 친척집에 간 꼴이 아닌가. 헬리아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벨리앙 백작이었다.

“안 나가십니까?”

클리드는 벽의 꽃을 자처하는 두 남자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한 명은 흑발과 흑안에 맞춰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이안이었고, 다른 한 명은 푸른 머리를 곱게 묶어 허리 아래로 내리고 흰 연미복을 입은 엘라임이었다.

클리드는 그 사이에 끼어 두 남자를 힐끗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후우,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클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라임 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안 경은 헬리아 공주님 옆에 있지 않는 건가.

“호위 안 하십니까?”

“연회장 내에선 근접 호위를 하지 않는다.”

이안의 말에 클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주변 벽 쪽에 호위 기사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호위 기사이기 전에 플로렌스 공작의 장남이었다. 충분히 연회를 즐길 만한 신분이었다.

그런데 이안이 움직였다. 헬리아에게 사람들이 몰리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이안이 헬리아에게 걸어 나가자 이제 엘라임과 단둘이 된 클리드는 이안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엘라임을 보았다.

“안 나가세요?”

“우웅?”

입에 우그적우그적 꼬치를 집어넣고 있는 엘라임의 모습에 클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자신은 저 말없는 검은 머리 이안 경보다 순박한 그를 더 좋아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은인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괜한 참견인지 모르지만 말을 꺼냈다.

“저 모습을 보니 조만간 공주님도 혼인할 때가 되셨나 봅니다.”

음식을 입안에 넣던 엘라임이 멈칫했다.

“혼인? 꼬마가?”

“꼬마는 무슨, 벌써 열여덟이신데요. 시집갈 나이지요.”

“하지만.”

엘라임은 먹던 꼬치를 내려놓았다. 왠지 입맛이 없어졌다.

“……그렇겠지.”

“한데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뭘?”

엘라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공주님이 혼인하시는 거 말입니다.”

“그거야 나랑은 상관없지. 어차피 똑같을 텐데.”

클리드는 이 답답한 남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자신은 이안 경보다 그가 더 좋았다.

“안 똑같습니다. 이제부터 공주님 옆에는 매일 다른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다른 남자랑 걷고 먹고 자는 겁니다.”

“그게 다른 거야?”

“그, 그거야…….”

클리드는 엘라임의 동그란 눈동자에 침음을 삼켰다.

“그냥 먹고 자는 거잖아.”

“그게 아닌데…….”

엘라임은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클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어떻게 설명을 하지?’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말해 그도 아직 동정이었다.

“아, 암튼 앞으로 라임 님이 공주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정령인데.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나는…….”

‘가족, 친구, 애인? 뭐지?’

엘라임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이미 이안이 서 있어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물리쳤다. 아니, 그의 날카로운 기운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엘라임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정령 말고 나는 그녀의 뭐지? 엘라임은 오랫동안 헬리아와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무 많이 먹었는지 괜히 속이 쓰렸다.

* * *

헬리아는 클리드가 엘라임을 부추긴다는 사실도 모른 채 벨리앙 백작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눈을 빛냈다. 헬리아의 입매가 싱긋 올라갔다. 그녀는 백작에게 다가가는 듯하다가 이내 테라스로 들어갔다. 벨리앙 백작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주변을 살피다 헬리아가 들어간 테라스로 다가갔다. 한데 그 앞에서 이안이 그를 막았다.

“다른 곳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이안의 딱딱한 말에 벨리앙 백작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든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가 정말 엘라드 상단의 주인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베라의 정보였다. 밑져야 본전인 것이다.

“잠시면 되네.”

“불가합니다.”

이안이 계속 막자 벨리앙 백작은 애가 탔다. 어떻게든 그녀를 만나 황태자비의 약을 구해야 했다. 그가 이번 사신행에 오른 이유도 그 약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좀 안 되겠나?”

“…….”

이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작은 소리라 백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위층으로 올라가시지요.”

백작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눈썹을 모았지만 이내 눈치가 빠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 왕국의 연회홀 테라스는 2층으로 되어 있었다. 벨리앙 백작은 헬리아가 들어간 테라스의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아갔다.

“흡!”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앞에 헬리아가 떡 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백작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엔 헬리아 공주가 없었다.

“당신이…….”

벨리앙 백작은 초조한 기색을 애써 지워내며 입을 열었다. 헬리아는 미소로 답했다.

“다시 소개하지요. 엘라드 상단주 헬리아입니다.”

“정말이었군!”

벨리앙 백작은 새삼스런 눈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여인이 왕국을 아우르는 대상단의 주인이란 소리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나이가 어린데 대단하오.”

“나이가 전부는 아니지요.”

“허허.”

백작은 허탈하게 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고쳤다.

“엘라드 상단에 포션의 원액이 있다는 말을 들었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부디, 부디 그 원액을 내게 파실 수 없겠소?”

백작이 애원하듯 말을 토해냈다. 그것만이 구원인 듯 그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헬리아는 가만히 백작을 보았다.

“황태자비의 치료약 때문인가요?”

백작은 그 말에 잠시 놀랐지만, 상대는 최고의 상단주이다. 그 정도 정보력은 있을 터.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소.”

“원액이 일반 포션보다 효과가 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닙니다. 치료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소.”

백작의 머릿속엔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간절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빛을 생각하면 작은 가능성이라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었다.

“그러니 부탁하오.”

헬리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단, 반드시 치료에만 쓰셔야 합니다.”

“물론이오!”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하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소.”

“혼담을 파기해 주십시오.”

헬리아의 말에 백작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혼담을 하고 말고는 겨우 백작 위에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백작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헬리아가 웃으며 그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었다.

“그저 상황이 되면 그때 나서주시면 됩니다. 판은 제가 모두 준비할 것입니다. 백작님은 합리적으로 판단하시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알 수 없지만, 백작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비록 아직 스물도 안 된 여인의 부탁이지만, 그녀는 엘라드 상단주이다. 그녀의 생각 저변에 어떤 의도가 깔려 있음을 백작은 짐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황태자비였다.

“염려 마세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할 것이오?”

헬리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백작은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패가 모였으니 시작해야지요.”

헬리아의 눈동자엔 아돌프 후작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 * *

“크흐흐흐.”

깊은 지하실. 카쟌은 자신의 연구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앞에는 기괴한 액체가 끓고 있었다. 액체를 젓는 카쟌의 눈동자는 기괴한 빛을 띠었다.

“다 완성되었다.”

카쟌의 눈이 번뜩였다.

“헬리아 공주.”

그의 눈은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크크크.”

* * *

새파란 하늘엔 새하얀 조각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내리쬐는 햇볕은 따사롭기만 하다. 이런 포근한 날에는 어김없이 졸음이 솔솔 쏟아지게 마련이다. 여기 한 남자도 의자에 몸을 뉜 채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까마귀 깃털보다 더 새카만 머리카락, 막힘없이 시원하게 뻗은 눈썹과 콧날. 한 번 보면 결코 잊어버리기 힘든 매우 아름다운 남자였다. 아마 그를 추종하는 여자만 해도 수십은 될 터.

“가만 보면 잘생기긴 했어.”

금빛 눈동자를 댕그랗게 뜬 헬리아는 잠에 빠져든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대륙에서 찾아보기 힘든 검은 머리카락은 묘한 매력을 주었고, 차갑게 생긴 인상 또한 절벽 위에 핀 고고한 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얻기 힘들수록 더 바라지 않던가.

“생긴 거만 멀쩡하지.”

헬리아는 살짝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암만 호감이 생기려다가도 그의 냉소적인 태도에 한 발짝 물러서기 일쑤다. 도대체 이런 남자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의 취향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헬리아는 그를 볼 때마다 꺅꺅거리던 머리 빈 귀족 영애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흠.”

헬리아는 마치 조각 미술을 감상하듯 잠든 이안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 보았다. 잘생기긴 했지만 대개 무표정하고 비웃는 얼굴이라 환히 웃는 모습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무미건조의 극치였다.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 친구가 없는 거야.”

이 냉소적인 남자에게 웃고 떠들 친구라니,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암암, 그렇고말고.’

친구 한 명 없을 게 분명했다.

헬리아는 좀 더 허리를 굽혀 이안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는 척하는 건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것인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의 행동이 더 대담해졌다.

그녀와 이안과의 거리는 고작 십 센티. 아차 하면 코가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지 않고 있는 탓인지 헬리아는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가까이 살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무슨 기억 말입니까?”

“엇!”

헬리아의 몸이 뒤로 튀어 올랐다. 갑자기 눈앞에 검은 동공이 보인 탓이다. 그러나 이안이 먼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간격은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헬리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몰래 훔쳐본 죄가 있으니 심장이 뜨끔했다. 하나 이내 신색을 고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왜 변태처럼 자는 척해?”

이안의 눈매가 틀어졌다. 그는 헬리아의 적반하장에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물론 한 소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 누구처럼 몰래 잠자는 사람 얼굴이나 쳐다보는 변태적인 취미는 없습니다.”

소태를 씹은 것처럼 헬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반박할 구석을 찾기 위해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깬 거야?”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지?”

생각해 보니 이안은 익스퍼트 최상급. 기척을 숨길 줄 모르는 헬리아를 못 느낄 리 없었다.

“깼으면서 왜 잠자는 척한 거야?”

“말해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헬리아는 태연한 이안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도대체 왜 잠도 안 자는 주제에 눈을 감고 있는 거람? 헬리아는 자신이 한 짓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안은 그런 헬리아의 비난 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책상에 놓인 식은 차를 마시곤 남은 잠을 쫓아냈다. 그는 애써 창피함을 숨기려는 헬리아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보며 웃은 적이 드문 이안은 얼른 찻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든 모양이다. 그러나 헬리아의 생각대로 그는 익스퍼트 최상급. 아무리 잠에 빠져들어도 언제든지 위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항상 기감을 열어놓고 있었다. 실상 헬리아가 그의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는 깨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노곤히 취한 몸이 기분이 좋아 그저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는 헬리아가 자신이 잠든 것을 보고 다시 갈 줄 알았다. 만약 그녀가 다가와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 줄 알았다면 일어나 있었을 것이다. 설마 몰래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이미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을 땐 눈을 뜰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그런데 그녀가 코앞에 다가오자 그는 타이밍이고 뭐고 더는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갓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그녀의 온몸에서 향긋한 향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안은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미쳤군.’

그는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상념을 털어냈다. 괜한 생각이 든 것은 잠에서 덜 깬 탓이리라.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헬리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안이 본 것은 그녀의 도드라진 붉은 입술이었다.

‘……잠이 덜 깼군.’

이안은 다시금 머리를 저었다. 그나마 그였기에 이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코앞에 차려진 아름다운 여성을 마다할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 아니지?”

헬리아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흘겨보자 이안은 낮게 헛기침을 내뱉고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뭔가 이상한 생각한 것 같은데…….”

헬리아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딱히 증거가 없어 더 추궁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뭐 그렇다고 치고.”

이안은 잠시 시선을 외면했다. 헬리아는 그의 앞에 투박한 나무 상자를 건넸다.

“받아.”

헬리아가 건넨 상자를 본 이안은 눈을 좁혔다.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기보다 왜 이것을 자신에게 건네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그는 상자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그녀를 보았다.

“……이건 뭡니까?”

“더 원망하진 말라고.”

“……무슨 말입니까?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이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헬리아의 다음 말에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인하르트.”

“…….”

이안은 입을 다물고 오랫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헬리아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지레짐작했다.

“그 전에 묘한 말을 했었지. 이래 봬도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고. 뭐, 예전 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이안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헬리아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형의 죽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였지?”

“…….”

헬리아는 이안을 보며 그를 닮은, 아니, 그가 닮은 이안의 형 아인하르트에 대해 떠올렸다.

아인하르트 플로렌스.

플로렌스 공작가의 장남이자, 열여섯의 나이로 최연소 왕실 기사가 된 천재였다. 무예가 출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음 대 공작으로서 넘치는 문무를 겸비하고 있었다. 성격 또한 좋아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런데 그의 나이 열일곱. 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공작가로 돌아왔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말이다. 아인하르트의 죽음에 공작가는 분노했고, 바로 범인 색출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증거가 없었고, 사건 또한 크게 공론화되지 못한 채 묻혔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왕성이 아니라 왕성 밖이었으며, 원래 그는 그 시각 당시 근무를 서고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여론은 어린 기사가 근무지를 이탈하여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시비가 붙어 죽은 것으로 몰았다.

기사단은 그 일을 크게 확대시키길 원치 않아 쉬쉬했고, 왕실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 더는 나서지 않았다. 플로렌스 공작가의 장남이자, 최연소 왕실 기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불명예 죽음이었다.

“…….”

이안은 검은 눈동자로 헬리아를 그저 응시했다. 헬리아는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인하르트의 죽음이 더는 공론화되지 못한 이유.

그건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인하르트가 근무 중 죽음을 당했더라도 그는 왕국에 두 명밖에 없는 공작가의 장남. 그 죽음이 결코 사사로울 리 없었다. 다만 문제는 헬리아가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안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눈동자는 다시 중심을 잡았다.

“기억은…….”

“나지 않아.”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그저 짐작했다.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기억을 닫은 게 아닌가 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됐습니다.”

의외의 말인지 헬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안은 가만히 헬리아를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형보다 그녀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도 그녀에 대한 원망보단 그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형의 죽음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답답함이 누군가를 원망해야 할 정도로 거셌다. 그래서 그녀를 원망했다. 한데 가까이서 그녀를 보고 느끼면서 그 원망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킬 사람이 아니라는 것. 도리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이안은 언제나 신경이 쓰였다.

‘형도 이런 마음이었나?’

자신이 아는 형이라면 그녀가 다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겨우 일곱에 불과했으니.

‘그녀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건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매끄럽게 입가에 묻어난 미소는 그의 냉막한 분위기를 단번에 걷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헬리아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웃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왠지 아쉬워 헬리아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미소가 걷힌 후에도 그의 얼굴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무언가 마음의 짐을 한껏 털어낸 사람처럼. 헬리아는 그런 이안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상자를 그에게 밀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걸 모른 척할 만큼 뻔뻔하진 않아. 그러니까 이걸로 원망은 접어둬.”

이안은 그녀가 건넨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것을 본 이안은 다시 헬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의뭉스런 미소를 짓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엔 화창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날씨 좋네.”

“이건…….”

“내일이 후작의 생일이래.”

이안의 눈이 번쩍였다.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단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때? 생일 선물로.”

“놀라겠군요.”

“그치?”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내일은 비가 올 거야. 아주 왕창.”

새파란 하늘엔 먹구름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헬리아는 확언했다. 그리고 이안은 확신했다.

“내일이군.”

* * *

“호호호!”

“축하드립니다. 후작!”

홀 안을 가득 메운 악기의 선율이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이들의 웃음소리와 뒤엉켰다. 가식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 이들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자 다시금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아돌프 후작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후작.”

사십 대의 대머리 남자는 파리스 남작과 사촌지간으로, 월링턴 남작이었다.

“어서 오시오, 월링턴 남작.”

“소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월링턴 남작은 금니로 된 송곳니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는 후작과 악수를 나누며 속으로 이곳에 오지 않은 파리스 남작의 우둔함을 꾸짖었다. 파리스 남작은 아돌프 후작이 횡령 사건으로 크게 휘청거릴 때 후작의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흐흐, 아무리 그놈이 머리가 잘났어도 줄을 잘 서야 하는 법.’

월링턴 남작은 후작이 닦아놓을 탄탄대로를 따라 걸으며 얻게 될 부수입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루턴 백작입니다.”

그때 월링턴 남작과 후작의 사이로 루턴 백작이 비집고 들어왔다. 오십 대의 평범하게 생긴 루턴 백작은 후작과는 먼 인척관계로 후작의 생일이 되자 눈도장을 찍으러 나온 것이다.

“오랜만이오, 루턴 백작.”

자주 보지 않는 얼굴이지만 후작은 가볍게 그와 악수하며 그의 참석을 반겼다.

“하핫, 이거 자주 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뭐, 하핫. 앞으로 자주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루턴 백작의 뻔뻔함에 월링턴 남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하이에나 같은 놈. 그간 간을 살살 봐오다 이렇게 후작이 잘나가니 고개를 드는구나.’

제 얼굴에 침이 묻는 줄도 모르고 월링턴 남작은 혀를 찼다. 하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후작 각하.”

또 한 사람 후작에게 다가간 이가 있었다. 그는 밀러 자작으로 이제까지 그 존재감조차 없던 이였다.

“누구…….”

후작도 그의 얼굴을 잘 모르는지 뜸을 들이자 밀러 자작이 얼른 웃으며 답했다.

“밀러 자작입니다.”

“아.”

밀러 자작의 얼굴은 루턴 백작만큼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이제까지 중립을 표방하였지만 실상 이리저리 줄을 잡지 못한 떨거지였다. 그러나 시기가 이쯤 되자 얼른 후작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이것은 제 작은 성의입니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밀러 자작은 후작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후작은 그 상자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 이내 시종에게 건넸다.

“고맙네.”

몸을 낮추고 복종의 선물을 건네는 그를 바라보는 후작의 입가엔 옅은 웃음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 파티에 참가한 귀족의 대다수가 어중이떠중이거나 월리슨 남작의 횡령 사건으로 그를 등졌다가 후작이 다시 일어서자 돌아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뭐 하나 믿고 등을 맡길 수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후작은 가볍게 혀를 차며 터져 나오는 조소를 감추기 위해 검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 입가를 감췄다. 그 조소의 반은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반은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월리슨 남작의 횡령 사건으로 인해 후작이 받은 피해는 상당했다. 그가 끌어간 돈은 후작가 자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후작은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가진 사업을 여럿 접어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세로 군림해 온 후작가다. 비록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를 지지하던 일반 귀족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하이에나처럼 이익이 되는 곳에 붙던 이들이었다. 후작이 하락세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그들은 서둘러 그에게서 발을 뺐다.

하지만 제국과 비앙카 공주의 혼담 소식이 오가자 이들은 얼른 후작의 품으로 기어들어 왔다. 후작은 이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주었다. 아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 터. 이들이 되레 헬리아 편에 서게 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끌어안아 적당히 떡밥만 뿌려주며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낫지 헬리아의 편에 서게 놔둘 수는 없었다. 또한 오랫동안 정치를 해온 그에게 이런 일쯤은 그저 비웃음 한 번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어차피 그런 세상인 것을.’

후작은 와인 한 모금으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의 눈이 차갑게 식어갈수록 파티의 열기는 한층 더해갔다.

* * *

“이거 비도 오라지게 오는군.”

화려한 파티의 불빛이 아스라이 비치는 바깥에는 보초를 서고 있는 경비병이 비를 맡으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개 같은 날씨야.”

하늘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퍼붓는 비를 보며 경비병들은 모자를 더 눌러썼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무슨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야야, 들어봐, 이거…….”

달그락달그락.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마차야.”

“마차라고? 얼래? 진짜 마차네?”

경비병들은 파티가 시작되고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 마차가 오는 것이 의아했다. 우람한 체구를 한 두 마리의 흑마가 투레질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히이잉-

마차가 어느덧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경비병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차에 다가갔다. 흑마가 투레질을 하자 경비병은 흠칫했지만 마부가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한결 차분해졌다.

“후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러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경비병은 마부를 보았지만 늙어 귀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쑤시며 앉아 있었다. 경비병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말이 없자 다시 한번 물었다.

“혹 초대장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다행히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먼저 내려 우산을 폈다. 그가 마차 입구에 우산을 대고 문을 열었다.

경비병들은 마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 입을 열지 못했다. 화려한 금발은 내리쬐는 태양빛보다 더 밝았고, 영롱한 호박 빛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보다 값비싸 보였다. 이 흐린 날씨에도 그 빛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저, 저기 도대체 누구…….”

한낱 경비병인 그들은 그녀의 신분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결코 가벼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했다.

“참 개 같은 날씨야. 안 그래?”

“예?”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 분위기야. 좋아.”

뭐가 좋다는 것일까. 후작의 생일이 이런 개 같은 날씨에 어울린다는 말로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경비병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럼.”

여인은 당당한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은 그녀를 막아섰다.

“파, 파티엔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여인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한데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보였다.

“헬리아.”

“예?”

여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공주가 직접 축하해 주러 온 걸 영광으로 알라고.”

경비병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 * *

“후작님,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페이튼 자작의 말에 후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공주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비앙카 공주.”

후작은 친근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 누가 보나 외손녀를 사랑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한 톨의 애정조차 들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러나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일까. 비앙카는 후작과 똑 닮은 미소로 화답했다. 후작은 비앙카의 손을 잡고 흐뭇하게 웃었다.

“바쁜 걸음을 하셨구려.”

“누구 생신인데 와보지 않겠어요?”

후작은 그 안에 든 비꼼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가 보기에 비앙카는 아직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자자, 어서 가시지요. 모두들 이 늙은이보다 아름다운 공주님을 보고 싶을 겁니다.”

비앙카는 눈을 살짝 찌푸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지었다. 웃음, 또 웃음.

“정말 축하드립니다.”

“왕국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태자와 혼인이라니…….”

귀족들은 비앙카를 보며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혼담을 놓고 축하의 말을 늘어놓았다. 비앙카는 내심 저들의 가식적인 말을 알아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 저들은 앞으로는 제국의 황태자와 혼인을 축하한다 하면서도 뒤로는 첩실로 들어간 그녀를 깎아내리고 조롱하기 바쁘리라.

‘반드시 왕비가 되겠어.’

이미 혼담은 되돌릴 수 없는 일. 그렇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병약한 황태자비가 죽은 뒤 그 자리를 꿰차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외할아버지, 당신도 가만두지 않겠어.’

비앙카의 눈이 시뻘건 불길을 담은 채 후작을 노려봤다. 그러나 후작은 가소로운 듯 웃었다.

‘네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

비앙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후작이란 존재는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늪이었다.

“쯧쯧, 아직 어려.”

후작은 자신에게 연신 발톱을 드러내는 비앙카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을 향한 그 발톱은 그저 가소로워 보일 뿐이었다.

“저리 감정을 드러내서야 어디 안주인 자리를 꿰차겠나.”

지금 후작의 머릿속엔 이미 황태자비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를 그는 준비했다.

“발표는?”

“내일 오전입니다.”

페이튼 자작의 대답에 후작은 미소를 흘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미 회의를 거쳐 마지막 국왕의 재가만 남은 상태였다. 혼인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절할지.

“거절할 수는 없겠지. 후훗.”

거절할 시엔 제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 고고한 종자들은 한낱 왕국이 거절했다는 것을 알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가해올 가능성이 있다. 국왕 또한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헬리아 공주는 어찌 하고 있느냐?”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날 연회 때를 제외하고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합니다.”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결코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분명 어떤 꿍꿍이를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다른 자들의 움직임은?”

“공주의 측근들에게 모두 감시를 붙였지만 이상 없었습니다.”

“계속 주시해라.”

“예.”

“공주는 어떻게든 이 혼담을 막으려 할 것이다.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페이튼 자작에게 당부에 또 당부를 했지만,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론 과연 그녀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자신은 제국과의 혼담이라는 카드를 내려놨다. 과연 그녀는 이 카드를 어찌 받을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기는 것은 나다.”

후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 마침 끊어진 음악 사이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순간 찾아든 적막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문을 향했다.

또각또각.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돌프 후작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인상을 와락 구겨 버렸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샹들리에의 불빛보다 반짝거리는 금발과 고혹적인 금안을 품은 눈매가 곱게 휘었다.

“여길 어떻게…….”

헬리아는 싱긋 웃었다. 그녀의 뒤로 언제나처럼 이안이 뒤를 따랐다.

“생신을 축하드리러 왔지요.”

헬리아는 후작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며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자신의 등장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 노련한 후작조차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겠지.’

헬리아는 후작에게 다가갔다. 후작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눈매를 좁히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와 있는 건지 가늠할 요량인 듯하다. 하지만 그가 헬리아의 의도를 알아챌 리 만무했다. 헬리아와 아돌프 후작이 나란히 서 있자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현재 가장 크게 충돌하고 있는 두 세력의 우두머리. 응당 흥미롭지 않을 리 없었다.

후작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헬리아를 바라봤다.

“공주가 내 생일을 축하해 줄 줄은 몰랐군그려.”

“자주 부대끼는 사이 아닙니까?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미운 정도 정이라고.”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후작이 페이튼 자작을 사납게 쳐다봤다. 자작은 송구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가 헬리아 공주를 주시하라 이른 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았거늘, 떡하니 헬리아가 저택에 찾아온 것이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지?”

그때 헬리아와 후작의 곁으로 비앙카가 걸어왔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헬리아를 쏘아보았다.

“말했잖아? 후작의 생일이라기에 찾아왔지.”

언제나 당당한 태도와 표정이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네년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리 만들었단 말인가? 자신은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허우적거리며 다른 나라 첩실로 들어가는데, 그녀는 당당히 외할아버지 앞에 선다. 비앙카는 분하고 원통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헬리아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을 보며 분에 못 이겨 하는 비앙카의 모습을.

“어처구니가 없네.”

“뭐야?”

비앙카의 눈이 희번뜩 떠졌다. 헬리아는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한 점 따스함도 없는 웃음이 맺혔다.

“뭐 하나 알려줄까?”

헬리아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제 잘못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씩씩대는 비앙카를 향해. 헬리아가 친한 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비앙카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비앙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냥 편하게 살려고 했어.”

과거에 너무 힘들게 살아서 그저 휴가처럼 이 생을 살고 싶었다. 그저 밥 먹고 잠자고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럴 생각이었다.

“공주 자리? 솔직히 관심도 없었어. 그저 밥은 굶지 않겠구나 싶었지.”

평민들도 밥 잘 먹고 사는데 공주면 밥 굶을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공주고 뭐고 다 버리고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살까도 싶었어. 옛날에 외국으로 여행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갔거든.”

헬리아는 말갛게 웃었다. 비앙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옆에 있던 후작도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헬리아는 그런 그들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은 전부 사실이다. 정말로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하지만 그녀를 뒤흔든 건 그들이다.

“공주 주제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누가 자꾸 툭툭 치잖아? 그거 알지? 잠자고 있는 사람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신분은 공주지만 반쪽 공주라 시녀들은 무시하기 일쑤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거기까진 그래도 참았다. 그 정도는 어떻게는 바꿔서 조용히 살면 되니까.

“근데 네가 건드렸잖아?”

“…….”

비앙카가 헬리아를 노려보았다. 헬리아는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순간 비앙카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헬리아의 금안이 무섭도록 자신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시답지도 않은 짓으로 말이야.”

이 모든 일의 시초. 비앙카의 모함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결코 당하고는 못 살아. 아니, 결코 당하고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거든.”

아직도 헬리아의 가슴 저편에는 끊어내지 못한 과거의 복수가 남아 있었다. 이제는, 그리고 앞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복수.

“이, 이게 모두 내 탓이란 말이야?”

비앙카는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헬리아의 손을 쳐 냈다.

“응.”

헬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면서 후작을 바라봤다.

“날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감히!”

“후작님.”

헬리아가 후작을 바라봤다. 후작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후작님을 위해 자그마한 생일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받지 않겠소.”

단호한 후작의 한마디에 헬리아는 즐거운 듯 웃었다. 이거, 이렇게 단번에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이 선물을 드리려고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데, 그럼 섭하지요.”

‘암, 얼마나 열심히 이날을 준비했는데. 그대로 갈 순 없지.’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장난은 그만하시오.”

“장난이라니요?”

후작은 가증스럽게 웃는 헬리아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년을 반드시 죽이리라. 그리고 그 사지를 찢어 저잣거리에 던지고야 말리라.

후작은 더 이상 헬리아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제국과의 혼담으로 인해 초조한 것이리라. 그렇기에 이렇게 와 물을 흐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녀의 눈에 어린 묘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오랫동안 정치판에 구른 후작이지만, 도통 헬리아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아, 드디어 왔군요.”

헬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철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들려온 일련의 발걸음 소리. 문이 열리고 그 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 척! 척!

“뭐, 뭐야!”

“왜 병사들이!”

파티에 참가한 귀족들이 아연실색하며 우왕좌왕하며 소리쳤다.

“감히 이게 무슨 짓이냐!”

후작이 노한 표정으로 일련의 병사들을 보며 노성을 터뜨렸다.

“이러고도 감히 무사할 줄 아느냐!”

“무사하지 못할 건 후작 당신이오.”

병사들 사이로 아르센 왕국의 감찰관 세인트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찌?”

후작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지만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작이 엄숙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펴더니 입을 열었다.

“아돌프 후작은 전 왕세자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이 시간부터 자택에 연금한다.”

왕세자 암살 사건의 용의자라니! 후작은 난데없이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용의자라니!

백작은 두루마리를 접으면서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후작을 향한 경멸이 가득했다.

“후작의 작위 때문에 감옥이 아닌 연금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아시오.”

“이, 이게 무슨 소린가!”

“무슨 소리긴.”

후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헬리아가 서 있었다. 헬리아는 테이블에 차려진 와인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며 여유롭게 웃었다.

“네, 네가!”

“후작.”

헬리아가 한 발짝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녀와 후작의 시선이 맞닿았다. 헬리아는 천천히 그의 귓가로 다가가 속삭였다.

“날 믿으면 안 되지.”

헬리아가 그에게 한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후작의 눈이 커졌다. 과거 헬리아를 복위시켜 주는 대가로 받은 그 문서. 자신의 악행이 담긴 증거였다.

“분명 그것은!”

“깜빡 속았지? 근데 누가 그 좋은 걸 그냥 주겠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익!”

후작이 헬리아를 죽일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앞을 이안이 막아섰다. 헬리아는 이안의 등 뒤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생일 선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아돌프 후작.”

“아아악!”

후작이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네년을! 네년을!”

헬리아는 유유히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지나쳤다.

“생일 축하해요.”

그에겐 결코 잊지 못할 선물이 되리라.

헬리아는 크게 웃었다.

* *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플로렌스 공작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헬리아는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향긋한 차향이 기분을 개운하게 만들어주었다. 아니, 차향 덕분이 아닐지도.

“무엇을 말입니까?”

그의 끈질긴 시선에 헬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플로렌스 공작은 눈을 좁혔다. 공주의 나이는 이제 열여덟. 그런데 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결국 궁금한 사람이 목을 맨다고 공작이 먼저 물었다.

“진본이 아니었는가?”

그 이야기에 이안의 시선도 헬리아에게 향했다. 그 역시 이 일의 전말에 대해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혼담을 파기하기 위해 어떻게든 후작에게 제재를 가할 것을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이것일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왕세자 시해 사건!

오랫동안 이안이 추적해 왔고, 살아남은 암살자를 찾아 마지막 종착점에 도달했지만, 그녀가 먼저 문서를 빼내갔다. 그 뒤로 헬리아는 자신의 복위를 놓고 후작과 거래를 했다. 문서를 파기하는 대신 공주 자리를 얻는 것으로.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런 줄 알았다. 플로렌스 공작과 이안이 대답을 원하는 눈빛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지. 후작이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네.”

분명 알아봤을 것이다. 문서에는 후작가의 인장이 찍힌 것은 물론 후작의 친필 또한 들어가 있었다. 후작이 자신이 쓴 서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거기다 그는 사인을 할 때면 특별히 마법 처리가 된 잉크를 사용했다. 그 잉크는 매우 특수한 처리가 필요해 조합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헬리아가 문서를 얻고 그것을 후작에게 넘겨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완벽하게 위조할 수는 없는 노릇. 한데 진본이 나왔다.

“완벽하게 위조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시간이…….”

헬리아는 싱긋 웃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위조해 줄 사람이 있답니다.”

헬리아의 시선이 하품을 하고 있는 엘라임에게 향했다. 공작은 헬리아의 시선을 따라 엘라임을 보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가 정령사라 해도 위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령왕이라 이건가?’

하지만 엘라임의 진짜 정체를 아는 이안은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면 어떤 종류의 잉크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허허.”

공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처럼 일이 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담 파기를 넘어서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후작의 목을 벨 기회가 아닌가. 한편으로 헬리아 공주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말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는가.”

“적을 속이려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요.”

“왜 더 일찍 공개하지 않았는가?”

헬리아는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만약 처음부터 공개했다면 그녀는 공주로 복귀할 수도, 지금처럼 공작이 그녀를 돕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요악.

후작은 그녀에게 없애야 할 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필요한 적이었다. 그래서 헬리아는 최후의, 최후까지 문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후작은 헬리아에게 목줄을 잡힌 줄 모르고 날뛰었던 것이다.

“이거야…….”

플로렌스 공작은 혀를 내둘렀다. 그간 헬리아 공주가 보여준 일만으로도 그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거늘, 이제는 아예 보이지가 않는다. 적이 되면 무서운 자.

‘후우, 적이 아닌 게 다행이구먼.’

공작은 힐끔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나란히 두면 꽤 보기 좋은 한 쌍인데.’

공작은 이참에 공주와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끝이 나는군.”

공작은 왠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죽게 한 후작을 제 손으로 처치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만이 아니었는지 내내 이안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분명 형의 원수인 후작의 몰락에 기뻐해야 하거늘 그러지 못했다.

“아쉽구먼, 아쉬워.”

“아쉽지는 않을 겁니다.”

헬리아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후작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을 뿐이에요. 아직 벼랑 끝. 벼랑 아래가 아니란 말이죠.”

헬리아의 눈이 짙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니 끝은 모르는 겁니다.”

헬리아는 남아 있는 찻물을 끝까지 다 목으로 넘겼다.

* * *

“발표 연기라니!”

제국의 사신들은 갑자기 오늘로 예정되어 있던 발표가 미뤄지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헤스테인 백작의 심기가 사나워졌다. 어서 이곳의 일을 마무리 짓고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꼬여 버린 것이다.

“이건 제국을 무시한 처사네. 혹여 혼담을 미루려고 하는 게 아닌가?”

헤스테인 백작은 노성을 터뜨렸다. 다른 귀족들도 심기가 불편하긴 마찬가지.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겠소?”

당장에라도 따지러 나갈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헤스테인 백작을 벨리앙 백작이 다독였다. 이 사신단의 책임자는 헤스테인 백작이었지만, 연륜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실질적으로 사신단을 이끄는 것은 벨리앙 백작이었다. 하지만 헤스테인 백작의 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건 제국과 왕국 간의 국가적 문제요. 내부 문제는 내부 문제로 끝났어야지!”

“후우, 사람을 보내놨으니 곧 이유를 알게 될 거요.”

벨리앙 백작의 말에 헤스테인 백작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은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목이 타는지 시종을 불렀다.

“차를 내와라! 아니, 시원한 것으로 내와라!”

“백작님!”

문이 열리고 사태를 파악하러 보낸 이가 들어왔다. 귀족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헤스테인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연기가 된 건가?”

“아돌프 후작이 연금되었다고 합니다.”

“아돌프 후작이?”

백작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왕세자 시해 용의자로 검거되었답니다. 지금 조사 중이라 연금되어 있습니다.”

“하, 왕세자 시해라니!”

헤스테인 백작은 눈을 좁혔다.

‘이거 이러다 전부 백지 되는 거 아니야?’

백작은 자신의 품속에 있는 금광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후작이 만약 이대로 범인으로 확정된다면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그는 사형당하거나 노예가 될 것이다.

‘젠장, 똥 밟았군.’

“그 일로 아르센 왕실이 소란스럽습니다.”

“흐음.”

헤스테인 백작은 침음을 삼켰다. 그에겐 후작이 사형되거나 노비가 되는 것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가진 재물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닌가가 고민될 뿐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혼담은 오히려 악수였다.

사신단이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유독 차분한 이가 있었다.

‘이건가?’

벨리앙 백작은 이 사건이 헬리아 공주가 벌인 일임을 확신했다. 분명 이 일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일 것이다.

‘무섭군, 무서워.’

벨리앙 백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생생히 떠올랐다. 열여덟이라고 믿기 힘든 눈빛이었다. 사람을 한순간에 사로잡는 그런 눈빛. 결코 그 눈빛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백작은 그런 눈빛을 많이 봐왔다. 바로 제국의 폐하이신 카라스 2세에게서 말이다.

‘결코 적이 되어선 안 될 자다.’

어린 나이가 제국의 황제와 같은 눈빛을 하는 자다. 적이 아니라면 반드시 죽여야 할 자. 하지만 벨리앙 백작은 적보다 아군이 되길 택했다.

‘이렇게 잠자코 있을 수야 없지.’

이미 판은 공주가 다 짜놓았다. 그럼 자신은 그 판 위에서 움직일 뿐.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엔 묘한 희열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혼담 파기.

아르센 왕국에서 혼담을 거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에서 파기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헬리아 공주는 제국에게 취소할 명분을 주었다. 백작은 사신단이 모여 있던 접견실을 나가 자신이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단단히 문을 잠그고 제국에서 가져온 통신 구슬을 꺼냈다. 거리가 먼 탓에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통신구였지만 충분히 상황을 알릴 수 있었다.

통신 구슬이 빛을 냈다.

[……벨리 ……백작이오?]

거리가 먼 탓에 통신 환경이 나빴다. 하지만 못 알아들을 수준은 아니었다.

“예, 태자 전하.”

벨리앙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통해서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태자! 황태자는 웃음을 지었다. 먼 거리 통신으로는 오로지 목소리만 들렸지만 백작은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맙……. 그대 덕분에 ……병이 나을 수…….]

그 말에 벨리앙 백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이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그대…… 공이 크오.]

“아닙니다.”

[어디서…… 구한 ……이오?]

벨리앙 백작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혼담을 파기하기 위해선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이곳과 제국에서의 연계가 필요한 상황.

“포션을 준 것은 헬리아 공주였습니다.”

[헬…… 아 공주?]

“예, 그 대신 공주가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말하시오. 내 무엇이든 ……하겠소.]

벨리앙 백작은 이야기를 꺼냈다. 현재 제국은 황태자의 혼인 문제로 황제와 황태자 간의 알력 싸움이 불거진 상황이다.

황태자는 혼인을 거부했고, 황제는 혼인을 요구했다. 이제까지 황태자비의 병환을 문제로 황태자는 거부할 명목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황태자비가 건강을 되찾는다면 황태자로서도 충분히 거절할 명분이 생긴다. 무엇보다 이 혼담의 가장 큰 주축이었던 아돌프 후작이 왕세자 시해범으로 연금된 상태라는 것이 가장 컸다.

“혼담을 파기해 주십시오.”

이 혼담은 반드시 깨지리라. 벨리앙 백작은 이 모든 판을 짠 헬리아 공주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 * *

아름드리나무 뒤에서 한 남자가 머리만 빼꼼히 내민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마치 불길에라도 휩싸인 듯 일렁거렸다. 남자의 시선 끝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쳇, 뭐가 좋다고 웃냐고.”

나무에 달라붙어 남녀를 보고 있던 엘라임이 투덜거렸다. 그는 정원에 앉아 있는 헬리아와 그의 옆에 서 있는 이안을 보며 눈을 흘겼다. 금발의 헬리아, 그리고 검은 머리의 이안. 둘 다 선남선녀인지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흥, 잘 어울리긴 얼어 죽을.”

엘라임은 연회 이후로 왠지 헬리아를 대하는 게 어색해졌다. 가만히 얼굴을 쳐다볼 수 없다고나 할까.

그때 그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든 원흉이 지나가고 있었다. 엘라임은 눈을 좁힌 채 얼른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으악!”

“쉿!”

“뭐 하시는 거예요?”

클리드는 엘라임의 손짓에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무 뒤에서 숨어 있는 꼴이라니.

“조용히 해. 다 들리잖아.”

헬리아와 이안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안 되겠다.”

엘라임은 얼른 클리드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헬리아와 이안은 어리둥절했다.

헬리아가 이안을 보며 물었다.

“왜 저래?”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까지 가실 거예요?”

엘라임은 클리드의 말에 순간 울컥해졌다. 자신이 왜 죄지은 사람처럼 도망가야 하는가!

“내가 너 때문에!”

적반하장이라고. 클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 때문에요?”

“그래!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머리만 아프잖아!”

클리드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뭘요?”

“그러니까 네가, 네가…….”

엘라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애꿎은 잔디만 발로 짓이겼다.

“됐어.”

“신경 쓰이죠?”

“…….”

엘라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날 이후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헬리아의 무엇인가. 하지만 또 왜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가, 자신은 그저 정령이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의 계약자, 자신은 정령왕. 그런데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족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왜 고민하고 있는가. 엘라임이 고민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고민하지 말아야 할 것이 고민되니 그것이 고민이었다.

“공주님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요?”

“잘 어울리긴 개뿔!”

“그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클리드는 이 둔한 사내를 위해 운을 뗐다.

“헬리아 공주님의 부군으로 이안 경만 한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데요.”

“부군이라니! 그럼 남편 말이야?”

“남편이죠.”

“말도 안 돼! 그 비루먹은 검둥이 자식이? 인물이 그렇게 없냐!”

엘라임은 발끈했다.

‘감히 누굴 누구한테 붙여?’

엘라임은 딸을 시집보내기 싫어하는 팔불출 아버지처럼 굴었다.

“다들 그래요. 사실 그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왜? 남자는 많잖아?”

엘라임은 기필코 그 검둥이 자식은 아니 된다는 눈빛으로 클리드를 쏘아 보았다. 클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아르센 왕국의 공작은 마탑주이신 베로니카 공작님과 플로렌스 공작님뿐입니다. 베로니카 공작님께선 슬하에 자녀가 없으시고 공작가의 공자는 이안 경과 그의 동생분입니다.”

“다른 녀석들은?”

엘라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찌푸렸다. 세상에 남자가 반이거늘 어찌 그 검둥이란 말인가!

“그 밑으로 후작가가 있지만, 아돌프 후작은 비비안 후궁뿐이고 아들이 없습니다. 그 외엔 1왕자의 외할아버지이신 하이든 후작입니다. 그분에겐 아들이 계시지만 나이는 사십 댑니다. 손자 나이는 이제 고작 열 살이 채 되지 않았구요.”

“뭐야!”

“그 밑으로는 공주님과 혼인하기엔 격이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부군을 맞아들이기엔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내정 간섭의 우려도 있고요.”

“하아…….”

엘라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놈밖에 없다는 거야?”

“그렇죠. 하지만 공주님이 원하신다면 평민이라도 혼인하실 수 있습니다. 부군의 힘이 필요하지 않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공주님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라는 뒷말을 잇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만으로 혼인을 하기엔 공주님은 제 또래와 달랐다. 주위에서 원하는 사람과 혼인하라고 말해도 그녀는 이해득실을 따질 것이다. 그녀의 성격이 앞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에이 씨!”

엘라임은 잔디를 벅벅 발로 긁어댔다. 헬리아의 성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녀의 속내를 모를까. 물론 아직까지 이안을 마음에 두고 있진 않지만 혼인을 해야 할 날이 온다면 그로 결정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졌다. 아까 먹은 과자가 얹힌 걸까?

“나 간다.”

엘라임이 몸을 돌렸다.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뭐?”

엘라임이 클리드를 보았다. 무슨 소리냐며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다. 클리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헬리아에게 보여준 행동, 헬리아가 그를 대하는 행동. 둘 사이에는 다른 이들이 끼어들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있었다.

“아세요? 공주님은 당신과 있을 때 가장 편안해합니다.”

“그건 내가…….”

내가 그녀의 정령이니까 그런 것이다. 그런 거다. 엘라임은 한 번 혀를 찬 뒤 머리를 흩뜨렸다.

“나도 몰라.”

엘라임은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후작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해.”

“예, 알겠습니다.”

“사신단의 분위기는 어때?”

헬리아의 물음에 클리드는 대답했다.

“현재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흐음.”

혼담이 연기된 후 한차례 사신단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한 번 이후로 사신단은 잠잠했다.

‘생각이 많겠지.’

후작이 주도해서 만들어진 혼담이다. 후작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혼담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 사신단 내부에서든 제국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혼담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벨리앙 백작이 잘해 줘야 할 텐데.”

아르센 왕국이 아닌 제국에서 이 혼담을 파기해야만 한다. 그래야 모양새가 제국이든 왕국이든 좋다.

“그런데 아까 어딜 간 거야?”

“예?”

클리드가 반문하자 헬리아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클리드는 헬리아의 눈빛에 뜨끔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좌해 왔지만 익숙해지지 않은 것은 바로 저 눈빛이다. 사람의 속살까지 다 벗길 듯한 눈빛!

“아까 나무 뒤에서 훔쳐보고 있던 엘라임이랑 말이야.”

“아, 그건…….”

뭐라 말을 해야 할까. 클리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엘라임보다 도무지 헬리아 공주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섣불리 이야길 했다가 초를 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입을 열지 못했다.

“별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흐음.”

헬리아는 클리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클리드는 흠칫했다. 사람의 속을 꿰뚫는 눈빛.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뭐 사람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있겠지.”

“공주님 그건…….”

“큰일은 아니지?”

“……예.”

“좋아, 그럼 넘어가지. 엘라임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네가 말 안 한 이유가 있겠지.”

“……송구합니다.”

클리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이 괜히 쑤셔 놓은 건 아닐까.

“그럼 가봐.”

클리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다시 헬리아를 보았다.

“공주님은 라임 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엘라임?”

헬리아가 그 난데없는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진지한 클리드의 모습을 보고 매끈한 턱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엘라임은 엘라임이지.”

그러나 끝까지 답을 바라는 클리드의 표정에 헬리아는 한숨을 푹 쉬고 턱을 괴었다.

“당연한 존재.”

클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헬리아는 그런 그를 보지 못했다. 엘라임은 자신의 정령. 그리고 자신은 그의 계약자. 영혼으로 묶인 이 관계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헬리아는 그 외 다른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거군요.”

클리드는 그녀의 대답에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괜히 쑤셔 놓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뭘?”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헬리아는 옅게 한숨을 쉬더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을 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헬리아는 밖으로 나갔다.

“뭐 해?”

“…….”

헬리아는 엘라임을 금방 찾았다. 그의 계약자인 자신이 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엘라임은 과거 그녀가 머물렀던 데이지궁 근처에 있는 호수에 가만히 서서 금빛으로 물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라임.”

그녀의 부름에 엘라임의 고개가 자연스레 뒤를 향했다. 노을의 영롱한 빛과 어우러진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꼬맹이 많이 컸어.”

피식 웃는 엘라임의 모습에 헬리아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뭔 청승이야?”

틱틱거리지만 그 안에 걱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엘라임은 잘 알았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에게서 향긋한 물 내음이 풍겼다. 호수보다 더 짙은 물 내음. 편안한 내음이다.

“꼬맹아.”

“왜?”

“꼬맹아.”

“자꾸 꼬맹이라 할래?”

“헬리아.”

“…….”

헬리아는 나직이 귓가를 파고드는 그의 음성에 순간 몸을 움찔했다. 엘라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빛의 푸른 머리카락은 노을에 반사된 호수처럼 황금빛으로 빛이 났다. 자신의 머리색보다 더 금빛으로.

엘라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

헬리아는 가만히 엘라임을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묘한 초조함이 손끝에서부터 번져 나갔다.

“나…….”

엘라임이 말을 맺었다.

“배고프다.”

헬리아는 그 말에 입가를 씰룩였다. 엘라임은 히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밥 언제 먹어?”

“……배가 고파?”

“응,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뭘 먹은 게 없더라고.”

“이 거지새끼가! 네가 그러고도 정령왕이냐!”

사람을 괜히 걱정스럽게 만들어! 헬리아는 화가 나 신던 신발을 벗어 손에 쥐었다. 엘라임은 그 모습에 뒷걸음질 쳤다.

“뭐, 뭐 하려는 거야?”

“뭐 하긴.”

그러면서 신발을 힘껏 엘라임을 향해 던졌다.

“이러려는 거지!”

타악!

“아파!”

“아프라고 하는 거다, 이 거지새끼야!”

“이씨!”

엘라임은 투덜거렸지만 다른 쪽 신발을 손에 든 헬리아를 보고 얼른 도망쳤다. 헬리아는 도망가는 엘라임의 뒤를 쫓았다. 물론 손에는 신발 한 짝을 들고서.

“왜 도망가!”

“네가 쫓아오니까!”

그렇게 노을이 짙은 오후가 물 흘러가듯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소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널리 퍼져 나갔다. 아르센 왕국 수도는 물론 왕국 전체에 아돌프 후작의 만행이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느 한 주점.

허름한 가게 안은 일을 마치고 한잔 걸치러 온 이들로 북적였다. 한 남자가 거칠게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술로 인해 잔뜩 붉어져 있었다. 목수인 거쉬는 자신의 동료 레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들었는가?”

레크는 거쉬가 입을 열자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왜 그새 또 마누라가 도망갔는가?”

“예끼, 이 사람이. 오랜만에 오늘 마누라 밥 먹고 왔네.”

“그럼 뭔가?”

“이 사람, 이거 귀는 열고 사는가? 온 천지가 그 이야기인데.”

“말을 해줘야 알 것 아닌가?”

거쉬는 혀를 쯧쯧 차며 입을 열었다.

“옛날에 있었던 왕세자 습격 사건을 아는가?”

그 말에 레크는 오랜 기억을 되짚어 기억해 냈다.

“왕세자 습격 사건? 아, 그 이야기 말인가? 하지만 결국 범인을 못 잡지 않았는가?”

“잡았다고 하는구먼!”

“뭐여!”

레크는 놀라 눈이 커졌다. 당시 그 사건으로 왕국이 소란스러웠다. 타국의 습격이니 내부에 일어난 암투이니 말이 많았지만 결국 범인을 잡지 못했었다.

레크가 궁금증에 얼른 물었다.

“그게 누군가?”

작게 목소리를 낮췄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컸다.

“아, 글쎄, 그게 아돌프 후작이라는구먼!”

“아, 아돌프 후작! 이, 이 사람아, 목소리가 크네!”

타박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밀도 아니구먼!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게. 다들 그 후작 놈을 욕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그러면서 옆 테이블을 향해 물었다.

“이보시오! 거 아돌프 후작 아시오?”

그러자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중년 남성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놈의 후레자식 때문에!”

“아돌프 후작이라고?”

“그 악적!”

“살인마!”

가게 안이 온통 후작의 욕설로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소식에 어두웠던 사내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실세 중의 실세가 아돌프 후작 아니었던가?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살인마를 잡은 이가 누군지 아는가?”

“그게 누군가?”

“그 바로 아름다우신 헬리아 공주님이라네. 금발의 성녀님 말이여!”

헬리아 공주의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은 온통 그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그녀가 빈민가에서 보여주었던 일들까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거쉬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레크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곧 후작의 재판이 열린다네.”

“재판?”

“그래, 곧 후작의 목이 떨어질 거야. 암, 그럴 만하지!”

거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크는 그런 거쉬의 낯선 모습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 * *

“온통 후작의 이야기뿐이야.”

잭의 말에 화초에 물을 주던 키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키안은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그렇게 소문을 내고 돌아다녔으니 안 날 리 없겠죠.”

키안은 웃으며 헬리아 공주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한쪽 입가가 올라가 있으리라. 키안이 흰 장갑을 벗고 자리에 앉자 잭은 그에게 홍차를 담은 찻잔을 건네주며 마주 앉았다.

“공주의 짓인가?”

키안은 향긋한 홍차 향을 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공주가 아니면 누가 그러겠습니까? 그보다 요한은 어디 갔습니까?”

“빈민가에 갔더군.”

천생 신관인지라 요한은 지난번 불길에 죽어간 이들을 못 본 척 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빈민가를 찾아가 사람들을 돌봤다. 키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잭을 보았다.

“후작 주변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계속 주시를 하고 있지만 그자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 저택도 찾아봤지만 없더군.”

잭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작을 쑤시면 어떤 식으로든 후작과 관련된 그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행적은 오리무중.

“곧 드러낼 겁니다.”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게 아닐까?”

“그자, 조직의 목표보다 자신의 목표를 더 중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까지 몸을 숨긴 자들과는 행동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을 숨긴다. 그들을 끈질기게 섬멸한 자신들 때문이다. 그렇기에 베라는 그들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한 꼬리는 다르다.

“후작과 손을 잡고 있다는 건, 분명 원하는 바가 있을 겁니다.”

“모습을 드러낼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훗, 그 아돌프 후작이 한낱 쥐가 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후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겁니다. 후작이든, 그자든.”

키안의 눈이 반짝였다.

“공주에게 사람을 붙이세요.”

“헬리아 공주에게? 후작을 좀 더 파보는 게 낫지 않아?”

“결국 후작의 목적은 공주의 목숨이 될 겁니다. 그자도.”

“알겠어. 바로 사람을 붙이지.”

잭이 몸을 돌리려 할 때 무언가 깊이 생각하던 키안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저도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네가?”

잭은 믿기 힘들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움직인 적은 과거 그분이 있었을 때뿐이었다. 키안이 움직인다. 그건 베라가 전면적으로 움직인단 소리였다.

“이번엔 제가 필요할 듯싶습니다.”

키안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사실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공주의 몫이겠죠.”

* * *

아르센 왕국의 대전.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사신단이 국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아돌프 후작이 연금된 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대전의 상석에 앉은 국왕 빈센트는 중앙에 서 있는 제국의 사신단을 바라보았다.

“알현을 요청한 이유가 무엇인가?”

빈센트의 질문에 헤스테인 백작이 앞으로 한 발 나아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어린아이처럼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최근 아돌프 후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빈센트는 의자 손잡이에 팔을 걸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야기하라는 듯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헤스테인은 짜증스런 표정을 억지로 풀어내며 입을 열었다.

“제국의 폐하께선 그 일을 들으시고 매우 유감을 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빈센트의 태도에 헤스테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아돌프 후작은 혼담이 예정된 비앙카 공주의 외조부가 되는 바,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왕실에 반역의 죄를 저지른 집안과 연을 맺어 아르센 왕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시옵니다.”

“그래서 파혼하자는 말인가?”

아직 성사된 일도 아니지만 빈센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헤스테인 백작은 불쾌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자국에서 먼저 혼담을 꺼냈다가 도로 취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하려 해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

헤스테인 백작이 말이 없자 빈센트는 가만히 팔걸이를 두어 번 내려쳤다.

“참으로 불쾌하군.”

빈센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헤스테인은 흠칫 놀라 살짝 뒷걸음질 쳤다. 호리호리한, 거기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어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혼담도 그렇고 파혼도 그렇고. 대제국의 면모가 이런 것인가? 이번 일로 참으로 실망했네.”

빈센트의 푸른 눈동자에 헤스테인은 꼼짝할 수 없었다.

“그, 그건…….”

헤스테인은 어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에게 내려온 지시는 파혼을 하라는 것뿐. 그 외에 어떠한 설명도 충분히 전달받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혼란스러운 건 그였다.

‘제, 젠장,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그때 헤스테인 앞으로 벨리앙 백작이 한 발 나섰다. 헤스테인은 불만스러웠지만 꼬리를 만 채 뒤로 물러섰다. 빈센트는 벨리앙 백작이 앞으로 나서자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벨리앙 백작이라 합니다.”

벨리앙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로 심기가 어지러운 줄 압니다만,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아돌프 후작의 일로 왕국에 적잖이 실망을 하셨습니다.”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계속해 보라는 듯 제지하지 않았다.

“본국의 황제 폐하께선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분이십니다. 하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인을 강요하시는 것보다 아르센 왕국을 어지럽히지 않고자 하시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벨리앙 백작이 빈센트를 응시했다.

‘제국은 제국이로군.’

빈센트는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애써 감추며 벨리앙 백작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욕심나는 인재였다. 혼담을 번복한 것은 매우 무례한 일. 한데 벨리앙 백작은 본국 황제의 명예에 누가 될 일을 아르센 왕국을 위한 일이라며 상황을 바꾸었다.

빈센트는 잠시 벨리앙 백작을 보더니 더는 강하게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그로서도 이 혼담은 원치 않았다. 실상 벨리앙 백작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누가 봐도 제국이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또 일을 벌였구나.’

빈센트는 이 일을 만든 헬리아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돌프 후작의 일부터 지금의 일까지. 일련의 사건을 미리 준비한 그녀의 혜안이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다.

“내 제국 폐하의 생각을 읽지 못했군.”

“송구합니다.”

벨리앙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빈센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국의 뜻을 받아들이겠네. 하나, 파혼이 되었지만 제국과 왕국의 인연이 끊어진 것은 아님을 명심해 주게.”

“당연한 말씀입니다.”

벨리앙 백작은 체면치레를 해준 빈센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헤스테인 백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사신단은 아르센 왕국에서 며칠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 준비에 서둘렀다. 황태자와 비앙카 공주의 혼담이 엎질러진 마당에 계속 있기엔 눈치가 보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더 왕국에 있는 것은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었다.

제국의 사신단이 떠나는 당일 아침. 헬리아는 벨리앙 백작을 찾았다. 다른 사신들은 떠날 준비에 바빠 그들의 만남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벨리앙 백작은 입가에 웃음을 드리우며 헬리아를 향해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고개 숙인 백작을 일으켜 세웠다.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백작은 헬리아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가만히 헬리아를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는 딸이 하나 있답니다. 아주 어여쁜 아이지요. 그동안 딸이 하나라 아쉬운 적은 없었는데, 오늘처럼 아들이 있길 바란 적은 없군요.”

벨리앙 백작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꼭 헬리아와 맺어주고 싶었다. 헬리아 공주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 며칠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헬리아는 백작의 말을 웃으며 넘겼다. 백작도 그녀의 웃음에 함께 미소를 지었다.

“다시 또 만날 수 있겠지요?”

벨리앙 백작은 몇 번 만나지 않은 이 공주에게 흠뻑 빠지고 말았다. 할 수 있다면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물론이지요.”

“하하, 그리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벨리앙 백작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이별을 고할 차례였다.

“그럼 옥체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그 아돌프 후작이라는 자, 몇 번 보지 못했으나 그대로 물러날 이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런 눈빛을 지닌 자는 결코 당하고 살지 않지요.”

벨리앙 백작은 아돌프 후작을 떠올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언제나 위험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법이니까요.”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공주님이라면 어떤 일이든 잘 해결하실 겁니다. 그럼 또 언젠가 뵙지요.”

벨리앙 백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헬리아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가 제국의 귀족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곁에 붙여두고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다시 만난다면…….”

헬리아는 벨리앙 백작의 충고를 새겨들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녀의 눈이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반짝거렸다. 그 눈빛은 빈센트가 벨리앙 백작을 바라보았을 때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 * *

아돌프 후작의 저택.

저택 주위엔 병사들이 철저히 경계를 서고 있으며, 후작이 연금된 방문 앞에는 두 명의 기사가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연금된 이는 저택의 방을 나갈 수 없으며, 방문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제외하곤 열리지 않는다. 그 외에 모든 행동은 왕실의 재가가 떨어져야 한다.

‘음?’

후작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 렌은 순간 묘한 기척을 느꼈다. 그의 실력은 익스퍼트 상급. 그의 예민한 기감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칼을 뽑아 들며 그와 함께 보초를 선 오웬을 향해 눈짓했다. 오웬도 이미 기척을 느꼈는지 칼을 뽑아 들었다.

스윽-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렌과 오웬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이 렌의 호위를 받으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오웬은 그 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찍찍!

“뭐야.”

잔뜩 긴장했던 오웬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렌이 물었다.

“뭔데?”

오웬은 쥐를 잡아 그에게 내보였다. 쥐가 찍찍 소리를 내면서 버둥거렸다.

“쥐야.”

쥐는 붉은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쥐가 오웬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

“아얏!”

쥐는 쏜살같이 렌을 향해 달려갔다. 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오웬을 보며 그가 놓친 쥐를 잡아 들었다.

“이거 하나 못 잡냐?”

렌이 쥐를 잡아 들자 오웬은 피가 난 자신의 손가락을 지혈하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런 렌도 쥐에게 물리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앗!”

“그러는 너도 못 잡냐?”

오웬은 그런 렌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쥐는 렌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쫄래쫄래 도망가고 있었다.

“재수 없기는.”

“기다려, 약 상자 가져올게.”

렌이 투덜거리자 오웬이 약 상자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떴다. 렌은 피가 흐르는 손을 지혈하며 눈을 찌푸렸다. 쥐한테 물리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후작의 방 안.

왕세자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자택에 연금된 후작은 처음과 달리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헬리아를 얕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열여덟의 어린 나이와 화려한 외모에 그녀의 능력을 얕잡아 보았던 것이다. 실상 그녀는 속에 구렁이 천 마리는 들어 있을 그런 괴물이었다.

후작은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저택은 이미 수십 명이 넘는 병사와 기사가 철저히 감시를 하고 있었다. 물샐틈없는 경계. 하지만 후작의 입꼬리가 작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힐끔 방 안에 놓인 오래된 자명종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있는 거대한 책장으로 다가갔다. 누가 보면 심심해 책이라도 읽으려는 모양새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후작은 책장 한편에 꽂힌 한 권의 책을 빼내 그 책을 다른 빈 공간에 꽂았다.

드르륵-

그러자 작은 소음과 함께 책장이 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책장이 사라진 공간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 램프를 들어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터벅터벅.

후작의 발걸음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램프에 비친 그의 얼굴은 전날보다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이 자라났고, 살이 더 빠진 듯 인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나약해진 육체와 달리 그의 눈빛만은 이전보다 더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작이 다다른 곳은 어느 한 철문. 문을 열자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작은 방에는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문이 하나 더 나 있었다.

“오셨습니까?”

후작의 오른팔 페이튼 자작이 먼저 와서 그를 맞이했다. 페이튼 자작이 방에 놓인 테이블 의자를 끌자 후작은 당연한 듯 그의 수발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페이튼 자작은 후작의 얼굴을 보며 안색을 흐렸다.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어서 앉게.”

“예.”

페이튼 자작이 자리에 앉자 후작이 상황을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송구합니다. 최대한 발뺌을 해보았으나, 문서가 진본으로 밝혀졌습니다.”

후작의 눈이 찌푸려졌다. 일말의 가능성으로 위조 문제를 제기했지만 헛수고였던 모양이다. 헬리아에 대한 분노가 더욱 쌓여갔다.

“그리고 혼담은 제국 측에서 먼저 파혼을 요청해 왕국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페이튼 자작은 계속 입을 열었다.

“제국의 사신단은 어제 자국으로 돌아갔습니다.”

“…….”

후작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결국 마지막 카드까지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곧 재판이 있겠군.”

페이튼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은 일주일 뒤로 잡혔습니다. 아마 재판에 간다면…… 힘들 겁니다.”

페이튼 자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대로 재판에 선다면 아돌프 후작은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며 그에 동조한 귀족들은 줄줄이 엮여 나갈 것이다.

“준비는?”

그러나 후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혹여 마지막 카드까지 못 쓰게 된다면 그다음 수를 생각해 두고 있었다. 물론 결코 쓰고 싶진 않았던 방법이지만.

“이미 천 명의 병사가 수도를 향해 비밀리에 진군 중입니다.”

“고작 천 명이더냐?”

“송구합니다. 영지에도 이미 감시가 심한지라……. 그나마 수도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이 백여 명 더 됩니다.”

“그걸론 부족하다.”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히 돌아갔다. 벼랑에 몰린 탓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면 죽기 살기로 앞으로 나아갈 뿐. 후작의 눈이 독기를 품었다.

“다크소드는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쯧쯧.”

후작은 가볍게 혀를 찼다. 다크소드의 특급 암살자에게 의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했다. 그만큼의 일을 해줘야 하거늘 아직까지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이유는 뭐라 하는가?”

“섣불리 암살을 시도하다간 실패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소드 마스터입니다.”

그 말에 후작의 표정은 더욱 못마땅해졌다.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최고 암살자로서의 자부심 때문일까. 그의 움직임은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앞당기라고 하거라.”

“예.”

후작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천여 명의 병력, 그것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건 어려울 것이다. 다크소드가 헬리아 공주를 처리한다 해도 그 이후의 일이 남았다. 다크소드의 특급 암살자는 매우 까다로운 자로 한 번 의뢰에 단 한 명의 사람만 암살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병력이 모자라…….”

후작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하면 생각이 나올 것 같다는 듯 톡톡톡 두어 번 두드렸다.

그때 후작 대신 페이튼 자작이 먼저 생각을 내놓았다.

“그자들을 이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자들?”

후작은 월리슨 남작의 횡령 사건과 이번 사건으로 그를 지지하는 많은 세력을 잃었다. 그 때문에 그를 도와줄 이는 거의 없었다.

“예, 몇몇 적당한 자를 추려놓았습니다.”

페이튼 자작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후작에게 내밀었다. 후작은 그것을 살펴보고는 찌푸려진 미간을 폈다.

“확실한 자들인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페이튼 자작이 확신했다. 그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이제 움직이실 겁니까?”

“이만하면 오래 있었지. 답답한 곳은 질색이야.”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저택에는 수많은 비밀 통로가 있고, 그 통로 중에는 그의 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도 존재했다. 후작은 이제까지 나갈 수 없어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준비가 되기 전까지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후작이 움직이려는 찰나 찍찍거리는 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 앞에 검은 쥐 한 마리가 붉은 눈을 흉흉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군.’

후작은 그 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평안하신지요? 후작 각하.

쥐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이튼 자작은 얼른 검을 뽑아 후작을 보호했다.

“네놈은 누구냐!”

-크크크, 이거 절 잊어버리신 것 같아 섭섭합니다.

“너는…….”

후작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는지 눈을 좁히며 쥐를 응시했다. 쥐는 우스꽝스럽게 작은 앞발을 들어 올려 예를 차렸다. 쥐가 한 탓에 그 모습은 께름칙하기 그지없었다. 쥐는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 웃음은 너무도 사이해 페이튼 자작은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네놈 설마 흑마법사더냐?”

후작은 경계의 눈으로 쥐, 즉 카쟌을 바라보았다. 빈민가의 일 때도 그렇지만 그의 능력은 사이하기 짝이 없었다. 쥐는 후작의 말에 살짝 눈이 커지더니 킥킥거리며 웃었다. 인간과 구강 구조가 다른 탓에 쥐의 웃음소리는 찍찍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카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후작은 더는 그에 대해 묻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당연히 후작님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찾아왔지요.

“하, 나를 도와?”

-이거 섭섭합니다. 이래 봬도 2왕자 전하의 스승이며 전날 빈민가의 일을 함께 도모한 동료가 아닙니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후작은 쥐를 노려보았다. 후작은 바보가 아니다. 카쟌이 어떤 야망을 지녔는지 모를 리 없었다. 쥐가 입꼬리를 올리며 섬뜩하게 웃었다.

-헬리아 공주를 제게 주십시오.

후작이 눈을 찌푸렸다.

“헬리아?”

무슨 연유로 그녀를 달라고 하는 것일까? 전날의 복수 때문일까?

-받은 것은 꼭 돌려줘야 하는 성미라서 말이지요.

후작은 가만히 쥐를 응시했다. 저 카쟌이 단지 헬리아 공주만을 원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후작은 그것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면, 자신도 이용해 주면 그뿐.

“좋네. 그리하지.”

후작은 곧 승낙했다. 그에겐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죽여야 하네.”

-물론입니다. 그럼 이제 제가 움직여야 할 차례군요. 그럼 우선 이 칙칙한 곳에서 벗어나도록 할까요?

“출구는…….”

페이튼 자작이 후작이 들어온 문과 반대에 있는 문으로 향하려 했지만 쥐는 후작이 나온 방향으로 움직였다.

-자자, 따라오시지요.

쥐가 히죽 웃었다. 후작은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 것인지 궁금해져 쥐를 따라나섰다.

“후작님.”

페이튼 자작이 후작을 불렀지만 후작은 그저 쥐를 따라 움직였다. 결국 그도 최대한 경계를 하며 후작의 뒤를 따랐다.

드르륵.

책장이 열리고 한 마리의 쥐와 후작, 그리고 페이튼 자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방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였다. 쥐는 당당하게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밖으로 나가는 문. 그러나 그 문 앞은 기사들이 단단히 지키고 서 있을 터였다.

“정문에는 기사들이 있습니다.”

페이튼 자작이 말했지만 쥐는 작은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쥐의 움직임이 인간과 너무도 흡사해 그 괴이한 모습이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능력을 보여드린다고.

그때 문이 끼익 열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후작은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고는 놀라 눈이 커졌다.

-자, 어떠십니까?

어딘지 모르게 흐리멍덩한 눈을 한 기사 두 명이 손수 후작의 방문을 연 것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것처럼. 쥐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문을 통과했다. 후작도 쥐를 따라 문을 나섰다. 아주 쉽게. 두 기사의 배웅을 받으면서 말이다. 후작 일행이 빠져나가는 동안 저택 안의 그 누구도 그들을 저지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 * *

팔랑거리는 나비는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세드릭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나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어지러운 상념이 가득했다. 분노인지, 아니면 기쁨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왕자님, 공주마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노엘, 아니, 아디스의 목소리에 세드릭은 뒤를 돌았다. 그러자 나비는 깜짝 놀라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왔어?”

헬리아는 정원에 놓인 테이블에 다가가 앉았다. 헬리아는 시녀가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가만히 세드릭을 보았다.

“후작의 재판이 일주일 후야. 들었지?”

세드릭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의 물결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떻게 되지?”

“사형.”

헬리아의 단호한 말에 세드릭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거렸다. 그것은 분노, 그리고 허탈함이다. 후작이 죽는다는 소식이 기쁜 한편 자신은 그의 죽음에 그 어떠한 일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엄습했다. 후작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자신을 위해 죽어간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세드릭이 주먹을 꽉 쥐자 헬리아가 그의 머리를 콩 박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헬리아.”

“정 그러면 나중에 돌이라도 던지든가.”

헬리아는 가볍게 말하며 그를 타박했다. 그에 세드릭은 피식 웃으며 자신 안에 있는 울분을 털어버렸다. 그들에 대한 죄책감은 평생 짊어질 의무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짐에 묻혀 살 순 없었다.

“고마워.”

세드릭의 말간 눈동자가 헬리아의 금안을 투영했다. 그 맑은 눈동자에 헬리아는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고마워할 이유는 없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세드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긴 왜 없어.”

헬리아가 세드릭을 보자 그는 힘겹게 휠체어 팔걸이에 손을 얹더니 힘을 주었다. 헬리아는 세드릭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의 이마에선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바로 그때였다.

“자, 봐봐.”

세드릭은 오롯이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는 너무도 기쁜 얼굴로 헬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가…….”

“네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

밝은 미소와 달리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만큼 힘이 든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기뻤다.

“네 덕분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서 있을 수도 없었어.”

“…….”

“고마워, 헬리아.”

순간 세드릭의 신형이 흔들렸다. 헬리아가 얼른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예전처럼 가볍지 않았다. 살이 제법 붙었기 때문이다. 헬리아는 눈을 찌푸렸다.

“무거워.”

“후후, 아무래도 계속 서 있는 건 좀 힘드네.”

세드릭이 양팔로 헬리아를 감싸 안았다. 그의 가슴에 파묻히게 된 헬리아는 그가 얼마나 두근거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두근두근. 그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잘했어.”

“응.”

세드릭은 웃으며 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욱 꽉 그녀를 껴안았다. 서서 보니 헬리아의 키는 고작 자신의 턱 아래였다. 품 한가득 들어오는 작은 몸. 헬리아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고 가녀린 소녀였다.

‘작고 가녀린 소녀라.’

맞는 말이면서도 뭔가 우스웠다. 그녀의 등을 볼 때마다 든든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큰 등이 이리 품 안에 넣고 보니 너무도 작았던 것이다.

“내 걱정은 하지 마.”

“누가 걱정한다고.”

세드릭은 피식 웃었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그녀를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강하지만 헬리아는 누구보다 정이 많았다. 다만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근데 언제 오빠라고 불러줄 거야?”

“누가 오빠야?”

헬리아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흘겼다. 세드릭이 울상을 지었다.

“나이도 내가 많잖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언젠간 꼭 오빠 소리를 듣고 말 테야, 라고 세드릭은 다짐했다.

그때였다.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남매가 서로 도닥일 때 클리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헬리아의 눈이 찌푸려졌다. 클리드가 이렇게 뛰어올 정도면 분명 큰일이 생긴 것이리라. 그리고 그 직감은 정확했다.

“후, 후작이 탈주했다고 합니다!”

결국 후작이 움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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