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17화 (17/42)

골드퀸

5

제1장 타오르는 불길

“아름답군.”

불길에 휩싸인 빈민가의 하늘은 몹시도 붉었다. 마치 저녁노을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광경. 그러나 그 노을빛은 붉은 피와 닮아 있었다.

한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한쪽 눈이 검은 안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는 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의 여유로운 몸짓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모습은 몹시도 대조적이었다. 세상을 태울 것처럼 날뛰던 불길도 오직 그만은 피해가듯 남자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이제 그놈들을 처리하러 가봐야겠군.”

빈민가에 불을 지르라 명한 기사, 아니, 카쟌은 빈민가의 가장 외곽에 위치해 있는 하수구를 향해 걸어갔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이 불을 낸 장본인이 그이니 말이다.

카쟌은 벌어진 입가를 쓰다듬었다. 이번 일로 아돌프 후작의 입지는 크게 올랐다. 치료약을 통해서 명분을 다져 놓은 것이다. 헬리아 공주의 존재를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이런 유리한 상황을 놓칠 리 없는 아돌프 후작이니 판도는 후작에게 기울 것이다.

“크흐흐흐, 일이 끝나면 그 노인네도 얼른 죽여 버려야겠군.”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의심의 칼을 갈고 있는 아돌프 후작이다. 지금은 서로 손을 잡고 있지만, 그것이 한시적임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카쟌은 콧소리를 내며 하수구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큭큭, 이제 그것들만 처리하면 완벽하군.”

그저 직접적으로 중독시키는 것보다 쥐로 하여금 사람들을 중독시키는 방법이 꼬리를 밟히지 않고 더 자연스럽게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것이 인위적인 소행임을 알아차린다 해도 증거가 없다. 아니, 오늘 그 증거마저 카쟌은 없앨 예정이다.

“음?”

그때 카쟌의 눈이 빈민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도대체 저놈들은 누구지?’

카쟌은 우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둘러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카쟌은 흘깃 세 사람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바로 하수구 뒤편이었다.

‘설마 들킨 것인가?’

한편으로는 우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의 복장을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빈민이 아니군. 역시 알아차린 것인가.’

그들의 옷은 빈민이라고 보기엔 깔끔했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저들을 처리하면 그만이다.

카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온통 붉은 불길이 하늘을 메웠고, 시커먼 연기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사방에 가득 찬 뜨거운 열기가 피부로 느껴지자 헬리아는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녀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설마 벌써 소각을?”

전염병이 도는 마을은 폐쇄하고 소각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치료약이 나와 있고, 치료를 하고 있는 도중이다. 손쓸 방도가 버젓이 있음에도 소각을 명하는 경우는 없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의 실수인가? 아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일이 아돌프 후작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챘다. 독에 중독된 사람들, 그리고 하수구에서 발견된 쥐들.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뒤처리를 할 셈인가?”

혹여 모를 증거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기 위한 철저한 계획에 헬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기분은 점점 더 바닥을 치고 내려갔다.

“꼬리를 자르고 버젓이 성인(聖人) 행세를 하겠다?”

뒤로는 독을 뿌린 주제에 앞으로는 치료약을 배포하며 사람들의 민심을 얻는다.

“그렇게는 안 되지.”

결코 후작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놔두지 않으리라. 헬리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성으로 가자.”

그 순간이었다.

“역시 알고 왔군.”

낮은 저음과 함께 검은 망토를 두른 낯선 남자가 나타났다. 엘라임과 이안은 이미 헬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헬리아 일행과 남자 사이의 거리는 대략 오 미터. 남자의 등장에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헬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놈 짓이냐?”

전염원을 만들어 쥐들을 감염시키고 사람들을 중독시킨 자. 이곳에 나타나 저런 말을 할 자는 그자밖에 없었다. 헬리아는 긴장한 채 그를 주시했다.

“호오, 놀랍군. 벌써 다 안 건가?”

카쟌은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카쟌이 한 발 앞으로 더 나가자 엘라임과 이안이 기세를 올렸다. 피부에 와 닿는 살기에 카쟌은 큭큭거렸다.

“재밌군. 정체가 궁금하긴 하지만, 아쉬워. 이대로 죽어야 하니. 큭큭.”

카쟌의 망토가 펄럭이며 흉흉한 기세가 일행을 휘감았다. 기분 나쁜 기운에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구지?’

이 일의 배후에 아돌프 후작이 있음을 짐작했지만, 직접 마주한 상대에 대해선 정보가 없었다.

‘이 정도 힘을 가진 자라니.’

그러나 헬리아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정체를 안다 해도 상황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큭큭.”

카쟌은 헬리아의 당돌한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상대가 헬리아 공주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녀의 외모를 모를뿐더러, 그녀가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탓에 더욱 못 알아본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공주란 사실을 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그럼 지체할 필요 없겠군.”

카쟌은 그들을 결코 자신보다 윗줄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만 죽어라!”

카쟌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류가 헬리아 일행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지독히도 암울한 기운! 그것은 헬리아가 처음 본 기운이었다.

“마법사였나?”

하지만 마법사라고 생각하기엔 그가 내뿜는 기운이 너무나도 사이했다. 검은 기류는 헬리아 일행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끝이군.”

카쟌은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

콰아아앙!

바닥은 검은 기류가 할퀸 상처들로 갈라졌고,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이거 참, 손맛 정도는 맛볼 줄 알았는데.”

거대한 폭발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시하군.”

카쟌은 망설임 없이 하수구로 몸을 돌렸다. 이제 그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수행하면 된다. 그런데 그가 몸을 돌리려 할 찰나였다.

“어딜 가시나?”

어느덧 피어오른 연기가 가시자 그 자리엔 멀쩡하게 서 있는 헬리아 일행이 보였다. 카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공격을 막았단 말인가?’

상대에 대한 경계로 그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하지만 입꼬리는 위를 향했다.

“제법 한 수가 있는 모양이군.”

배짱을 부리던 헬리아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결코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나를 이길 수 없다!”

카쟌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강력하고 빠른 공격이었다. 그가 손을 펼치자 허공에 검은 구체가 나타나 헬리아 일행을 향해 떨어졌다.

“죽어라!”

유성처럼 떨어지는 구체! 그러나 당할 헬리아 일행이 아니었다. 상대의 공격에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는 일! 엘라임은 손을 저어 구체를 밀어냈고, 이안은 검으로 단칼에 구체를 동강 냈다.

쿠웅!

폭발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헬리아 일행은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제법이군.”

“…….”

헬리아는 엘라임과 이안을 보았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역시 힘이…….’

수천 마리나 되는 쥐를 상대한 탓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어찌 피하긴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안은 호흡이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엘라임은 그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속전속결이야!”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과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카쟌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간을 끌수록 힘든 것은 자신들이 될 터!

엘라임의 공격이 먼저 카쟌을 향해 뻗어갔다.

“칫! 정령사인가?”

캐스팅도 없이 물을 난사하는 모습에 카쟌은 낮게 혀를 차며 공격을 막아냈다. 정령사는 캐스팅이 없기 때문에 속도가 빠르고 공격이 변칙적이라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거기에 정령사가 드물기 때문에 공격 패턴이 생소했다. 카쟌이 뒤로 몸을 빼는 순간, 이안의 검이 카쟌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카쟌은 검날을 피하기 위해 하늘로 솟구쳤다.

“이거야…….”

이쯤 되니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하마터면 두 놈의 연계에 목을 내줄 뻔했다. 그는 축축이 등을 적시는 긴장감에 입을 비틀었다. 한 명은 검사, 한 명은 정령사.

“평범한 놈들은 아니군.”

그렇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미 지쳐 있군. 큭큭.’

카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 후에 차근차근 알아내지.”

카쟌이 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헬리아 일행은 지쳤음에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젠장, 귀찮은 놈들!’

정령사가 먼저 공격을 해 시선을 뺏으면, 그 순간 검사 놈이 그의 품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쥐들을 처리하면서 손발을 맞춘 터라 그들의 연계는 완벽했다. 카쟌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내가 이런 놈들한테!”

성가신 공격에 카쟌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때 그의 눈에 가만히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아까 그녀를 지키려는 검사와 정령사의 행동으로 보아 저 여자가 중요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카쟌이 빠르게 엘라임과 이안을 제치고 헬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카쟌의 손이 헬리아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카쟌은 헬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웃어?’

헬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간 순간 카쟌은 자신의 배가 몹시도 뜨겁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크, 크억!”

피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네, 네년은…….”

그의 배는 시커멓게 타 있었다.

“훗.”

헬리아는 카쟌의 배에 파이어볼을 터뜨렸다.

“마, 마법사.”

그녀가 마법사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카쟌의 패착이었다.

“크윽.”

카쟌은 빠르게 몸을 내뺐다. 그 자리를 엘라임과 이안이 채웠다.

‘젠장, 겨우 저런 놈들 때문에.’

카쟌은 심기가 사나워졌다. 가볍게 뒤처리를 할 요량으로 온 빈민가였다. 한데 지금 그의 기분은 몹시도 더러웠다.

‘크윽, 상처가.’

급소를 빗나가긴 했지만, 이대로 있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

저들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분명 앞으로 방해가 될 게 명확했다.

‘무슨 수를 써야…….’

그때 지근거리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그 순간 카쟌은 물론 헬리아 일행까지 그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잔해 더미가 깔린 곳에서 새어 나온 소리였다.

“사, 살려 주세요.”

한 어린아이가 몸을 일으키며 울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년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혀, 형을 살려 주세요.”

아이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바로 샨이었다. 샨은 론의 몸을 흔들며 울었다.

“혀, 형!”

“샤, 샨…….”

아직 의식을 잃지 않았는지 론이 먼지로 뒤덮인 샨의 얼굴을 매만지며 힘없이 웃었다.

“괘, 괜찮은 거야?”

“혀엉!”

론은 흐릿해가는 의식을 부여잡고 샨을 확인했다. 다행히 론이 샨을 보호한 덕분에 샨의 몸에는 큰 상처가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론의 상태는 심각했다. 론의 머리카락은 피범벅이었고, 눈앞은 자꾸만 캄캄해져 샨의 모습조차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론은 샨이 무사한 것에 안도했는지 웃었다.

“사,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혀, 형!”

샨이 울부짖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형이 너무 고마웠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형, 형!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꼬, 꼭 사, 살아야 해.”

“형!”

카쟌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놈들 때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헬리아 일행이 그 광경을 보고 있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카쟌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피어올랐고, 그 순간 그의 손에서 검은 구체가 나와 어린 소년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헬리아는 그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먼저 몸을 움직였다.

“하하하!”

카쟌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광소했다. 그의 예상대로 상대는 어린놈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헬리아는 정확히 그 구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헬리아!”

“공주님!”

엘라임과 이안이 그녀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헬리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시선에는 론과 샨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는 움직이고 있었다. 왜일까? 왜 자신은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일까.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론의 말이 헬리아의 가슴에 꽂혀 깊숙이 처박혀 있던 어떤 감정을 끄집어냈다. 왜 다들 죽으면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죽는 데도 왜 웃는 거지? 죽은 레헨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감싸며 죽어갔던 레헨. 그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자신의 기억인가? 그녀의 시선이 론과 샨 형제를 지나 검은 구체에 닿았다.

콰아아앙!

“헬리아!”

엘라임이 달려갔다. 이안은 검을 쥔 채 카쟌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카쟌은 이미 플라이 마법으로 훌쩍 허공에 뜬 상태. 연기가 피어오른 자리를 보며 크게 웃었다.

“가소롭기는! 네놈들도 이제 죽어라!”

카쟌이 이안과 엘라임을 향해 마법을 펼쳤다. 이안은 입술을 깨문 채 카쟌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의 시선이 아직도 연기가 자국한 곳을 바라봤다.

‘당할 리가 없어. 침착해.’

스스로 그녀가 당할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쳤다.

“젠장!”

“크하하하!”

카쟌은 매섭게 이안을 몰아붙였다.

“죽어라!”

“크윽!”

이안은 카쟌의 공격에 결국 벽에 처박혔다. 이미 체력을 소진한 상태인데다 상대의 공격이 강했다.

“쿨럭.”

터져 나오는 피를 억지로 막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은 검으로 바닥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제법 명이 긴 놈이구나.”

카쟌이 이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채를 부여잡더니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크윽!”

“죽어라!”

카쟌이 이안의 숨통을 끊기 위해 손을 펼쳤다.

“음!”

그때였다. 카쟌은 이상한 낌새에 몸을 피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저건…….”

그가 바라본 곳엔 헬리아가 떡하니 서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오롯이 서 있었다.

파아앗!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어느새 그 빛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뭐, 뭐야!”

그와 함께 카쟌의 팔찌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팔찌가…….’

카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팔찌가 왜 빛이 나는지 파악할 새도 없었다. 헬리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길게 찢어진 동공, 샛노란 눈동자는 가히 괴물의 것이었다.

“대, 대체!”

카쟌이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바람에 흔들리던 헬리아의 머리카락이 이내 서서히 끝에서부터 금빛을 띠더니 순식간에 칙칙한 갈색으로 염색했던 머리가 원래의 금발로 변해갔다.

“너, 너는!”

금발에 금안. 그녀의 본모습에 카쟌은 순간 그녀의 정체가 떠올랐다.

“헤, 헬리아 공주!”

카쟌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온몸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잘게 떨렸다. 그때였다.

“히익!”

그녀의 시선이 카쟌을 향했다. 카쟌은 그녀의 눈동자를 본 순간 누군가 발목을 꽉 잡은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저, 정체가 뭐냐!”

인간이 아니었다. 이건 결코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카쟌은 저 근원에서부터 시작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도, 도망가야 해.’

불길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카쟌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있다가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될 터. 카쟌이 몸을 빼려 하자 헬리아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이내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미증유의 힘이 카쟌의 몸을 휩쓸었다.

“크아아악!”

카쟌의 외침이 커졌다. 헬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죽어라.”

헬리아가 손을 뻗어 카쟌을 겨누었다. 그녀의 눈은 초점이 사라진 채 허공을 응시했다. 헬리아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피는 역류하듯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왠지 이 억눌러진 힘을 분출해야만 할 것 같았다.

“크아아악!”

헬리아의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카쟌은 그런 헬리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 살려줘!”

“죽어라!”

카쟌은 이를 악물고 힘을 쥐어 짜냈다.

‘이런 젠장! 이게 대체!’

카쟌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밑져야 본전이다!’

카쟌은 온 힘을 다해 헬리아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헬리아는 카쟌의 행동이 가소로웠지만, 그의 손이 가리킨 곳에서 소리가 들려오자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형!”

헬리아의 시선이 급격히 돌아갔고, 그 자리에 론과 샨 형제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카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너무도 급작스런 공격이라 헬리아는 막아내지 못했다. 그녀가 멈칫한 틈을 타고 카쟌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이 수모는 잊지 않겠다!”

헬리아는 이를 악물고 멀리 사라져 가는 카쟌을 향해 마지막 공격을 퍼부었다.

“크아악!”

헬리아가 쏘아낸 마법 공격에 카쟌의 몸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헬리아는 떨어진 카쟌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서둘러 론과 샨 형제를 살폈다. 하지만 연기가 자욱해 론과 샨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헬리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에서 피 나.”

그때 엘라임이 연기를 헤치고 나타나 헬리아의 손을 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라임.”

“걱정하지 마. 죽지 않았어, 봐.”

헬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엘라임의 뒤를 바라봤다. 연기가 사라진 곳에 론과 샨 형제가 보였다. 살아 있었다. 엘라임이 대신 카쟌의 공격을 막았던 것이다.

“하아…….”

빳빳이 선 긴장감이 어느새 빠져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혀, 형!”

론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아무리 불러 봐도 깨어나지 않았다. 샨은 론의 몸을 흔들었다.

“흑흑흑, 혀엉.”

그녀는 천천히 론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엘라임이 손을 뻗어 론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론의 몸으로 스며들자, 론의 상처는 말끔히 사라졌다.

“으음.”

론은 몇 번 신음을 흘린 뒤에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이 흐렸지만 이내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주변이 말끔히 보였다.

“샨…….”

“형!”

샨이 얼른 론에게 다가갔다. 샨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었다.

“괜찮은 거지?”

“으응.”

샨은 론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헬리아는 조용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붉었다. 마치 피를 흘리는 듯 세상은 붉었다. 타오르는 불길, 하늘을 메운 검은 연기, 사람들의 비명. 헬리아는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헬리아.”

옆에 있던 엘라임이 그녀를 불렀다. 헬리아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손을 쥐었다 펴길 몇 차례, 그녀가 엘라임을 돌아보았다.

“불을 꺼야겠어.”

헬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건 결코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다.

“독이나 쥐로는 이번 일이 아돌프 후작이 한 일이라고 밝혀낼 수 없겠지.”

의심은 가지만, 그가 한 일이라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후작을 몰아붙여 봤자 소용이 없는 일. 후작은 이번 일로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 다음 왕세자의 자리에 더욱 힘을 가할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 없지.”

헬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불을 끈다.”

헬리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네 힘으론…….”

“지금은 가능해.”

헬리아는 몸속 깊숙이 차오르는 힘을 느끼며 엘라임에게 말했다.

“가능해. 그렇지?”

엘라임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헬리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증유의 힘은 그가 그녀의 정령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엘라임에게 헬리아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밥값 좀 제대로 해봐.”

“내가 낸 밥값도 좀 생각해 보라고.”

야속한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투덜거렸지만 그 덕에 어느새 그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엘라임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비틀거리며 갑작스런 상황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헬리아가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치료해 주었다.

“당신은…….”

“이봐, 검둥이.”

엘라임이 이안의 말을 끊었다. 이안은 처음으로 진지한 엘라임의 눈동자를 보았다.

“…….”

“뒤를 부탁해.”

“무슨.”

그 말을 끝으로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그의 몸을 감싸더니 그의 입에서 인간의 목소리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초의 맹약에 따라.]

헬리아와 엘라임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엘라임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론도, 샨도, 그리고 이안도 놀라 말을 잊지 못했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나 물의 정령왕 엘라임.]

엘라임은 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열 살의 그 작고 여린 소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파아앗-

엘라임의 주변으로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주변에 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맥을 추지 못했다.

[계약자 헬리아 아르센, 그대의 바람에 따라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엘라임의 몸이 이내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와 함께 헬리아의 한쪽 다리가 꺾이며 무릎을 꿇었다. 헬리아는 울컥 넘어오는 핏덩이를 억지로 삼키며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의 주위에는 이미 바람이 둥그렇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엘라임은 그런 헬리아를 보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현신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힘이 그의 힘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면, 그녀가 내제된 힘을 끌어올린 이 순간이라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가능했다.

엘라임은 눈을 감았다. 그의 몸 안에 헬리아의 힘이 흘러들어왔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 엘라임은 헬리아를 보며 쓰게 웃었다.

[절대 무리하진 마.]

헬리아는 입가에 흐르는 혈흔을 닦아내고 다시 일어섰다. 엘라임은 이제 인간의 몸을 벗고 정령왕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헬리아는 엘라임의 진짜 모습에 가만히 그를 보다 입을 열었다.

“정말 정령왕이었네.”

여전히 피가 울컥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한 방 먹이자고.”

그 순간 엘라임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 * *

톡- 톡-

갑자기 맑은 하늘에 푸른빛이 어리더니 작은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에 비해 그 물방울은 너무도 미약해 금세 사라졌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쏴아아아!

하늘을 가득 메운 푸른빛이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물줄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비가.”

“저기 하늘에!”

“비다! 비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타오르던 불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물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불은 맥을 추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부, 불이 꺼지고 있어!”

“우와!”

하늘에서 내린 비로 인해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 * *

“공작님! 모든 봉쇄를 해제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플로렌스 공작은 표정을 굳히고 붉게 타오르는 빈민가를 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이곳까지 전해졌다.

“마법사들은?”

“그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플로렌스 공작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사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불을 끄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마법사들도?”

현재 빈민가의 불을 끄는 데 동원된 인력은 병사와 마법사들이었다. 이만한 전력이면 충분히 불을 끄는 데 무리가 없을 거라 여겼다.

기사가 말했다.

“누군가 불에 마법을 부린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플로렌스 공작의 눈이 좁혀졌다.

“마법을?”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쉽게 불을 끄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작은 낮게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빈민가의 불이 밖으로 번지지 않는 것을 최우선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대피시켜라.”

“옛!”

불이 꺼지지 않는 현재로서는 현상 유지를 하고 더는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일뿐이었다.

그때였다.

“고, 공작님!”

“무슨 일이냐?”

“하, 하늘이!”

“하늘?”

플로렌스 공작은 기사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대체?”

검게 연기로 물들었던 하늘이 푸른빛에 감싸이기 시작하였다.

* * *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의 빛. 만물을 아우르는 태양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화마로 뒤덮인 인세의 지옥에 도래한 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땅에 떨어져 거친 화마를 잠재웠다. 물방울이 닿은 불은 이내 스러지며 잠잠해졌다.

“천, 천사님…….”

샨이 멍하니 헬리아를 보며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며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아름다워…….”

멀리서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벌렸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에 눈이 부셨다. 불이 거짓말처럼 꺼지기 시작하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은 이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겨났다. 그들은 헬리아의 몸에서 뻗어 나온 빛에 절로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한 명이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어느새 무리가 되어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아름다운 금빛을 흩뿌리는 헬리아를. 그들의 눈에 그녀는 천사였다.

“천사님이 오신 거야.”

“우릴 구하러 천사님이 오신 거야!”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내린 비. 그리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여인. 그들은 직감적으로 꺼질 것 같지 않던 이 불을 끈 이가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흩뿌리는 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를 느끼게 만들었다. 범접할 수 없는 신성을 본 듯 그들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모, 몸이!”

한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단순히 시작에 불과했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이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열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빈민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몸이 낫고 있어!”

“맙소사!”

화상에 일그러진 상처, 독에 중독된 몸이 하나둘 낫기 시작한 것이다.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 비가 몸을 낫게 하는 거야!”

“처, 천사님이 우릴 구원해 주신 거야!”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우와아아아!”

“천사님이시다!”

“우릴 구해 주러 오신 거야!”

사람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환호했다.

“형! 천사님이었어!”

샨은 론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치료소 앞에서 돌팔매질을 당했을 때 맨 처음 나타나 구해 준 이도 그녀였다.

“우릴 구해 주러 하늘에서 내려오신 거야.”

론은 샨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시선은 헬리아에게 다다랐다. 그리고 그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살게 해주셔서. 사람들의 눈가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공작님, 이건 대체…….”

조엘 남작이 눈을 크게 뜨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며 말했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빛이 흘러나오자 플로렌스 공작과 병사들은 빈민들을 따라 빛이 흘러나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결코 믿기지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공작은 조엘 남작에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저지했다. 공작 스스로도 지금 상황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공주는…….’

뛰어난 마법사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헬리아 공주를 향해 연신 천사네, 구원자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의 눈이 매처럼 반짝였다.

“남작.”

“예, 공작님.”

“뒤처리를 부탁하지. 그리고 정보원을 풀게.”

조엘 남작은 공작의 시선이 헬리아 공주에게 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공작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틀 내로 수도는 물론 왕국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럼 부탁하네.”

“예.”

공작은 헬리아 공주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답군.”

* * *

거대한 바닷물이 일순간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숨이 턱턱 막혀 왔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헬리아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았다. 뜨겁게 치솟아 오르던 불길이 어느새 빗물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환호는 귓가에 닿지 못했다. 그녀는 가만히 불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손바닥을 보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의 근본,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지?’

오랫동안 가져왔던 물음이 오늘에서야 생각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이제껏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 간다. 정령왕을 부르고, 정령왕의 힘을 이처럼 쓸 수 있는 존재.

‘나는 인간이 맞는 건가?’

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헬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정령왕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과거에도 인간이 정령왕을 부른 전례는 있었다. 단순히 힘의 강함만으로 자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정의 내릴 수 없다.

자신은 인간이다. 붉은 피를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이 기분은 뭐지?’

가슴속에서 자꾸만 불쑥 치미는 의문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나는 인간이야.’

그저 자신이 지구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기억으로 인한 낯설음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합리화하면 끝일까?

‘나는…….’

다르다. 다름을 느낀다. 남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다름을. 그것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헬리아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세 치 혀로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저 이제까지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왔고,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럼 나는 뭐지?’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자 스스로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도 그쳤다.

[헬리아.]

정령왕의 모습을 한 엘라임이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그가 곁으로 다가오자 진한 물 냄새가 퍼져 나왔다.

헬리아는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

나는 누구지? 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헬리아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공주님!”

피를 토한 헬리아의 몸이 허물어지자 이안이 달려갔다. 하지만 엘라임이 먼저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엘라임은 쓰러진 헬리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고 하얀 얼굴을 보았다.

[헬리아.]

엘라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까지 헬리아에게조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였다. 평소 장난기 넘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현재 물의 정령왕 엘라임으로서 존재했다.

[시간이 별로 없군.]

그는 아쉬운 듯 한 번 더 헬리아의 얼굴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그 순간 엘라임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계약자인 헬리아가 정신을 잃자 그와 헬리아의 연결이 약해진 것이다. 엘라임은 조심스럽게 헬리아를 안아 들고 이안에게 걸어갔다.

“…….”

이안은 표정을 굳힌 채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그는 똑똑히 보았다. 저 존재가 인간이 아님을. 엘라임은 이안의 경계를 알아차렸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안에게 다가가 헬리아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넘겨주기 싫은 듯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헬리아를 부탁해.]

“…….”

[아마 한동안 나오기 힘들 것 같아.]

“……당신은 누구지?”

[그건 보면 알지 않나?]

엘라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이안은 엘라임에게 둔 시선을 거두고 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누구지?”

[헬리아는 헬리아야.]

엘라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안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인가?’

그녀가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가 무엇이든 그가 어떻게 할지는 그 스스로의 몫. 이안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눈에는 한 치 흔들림도 없는 어둠이 드러났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엘라임은 이안의 눈빛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곧 깰 거야. 그때까지 부탁해.]

순간 그의 몸이 투명해지더니 한 방울 물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린 비도 그치며 푸른 하늘을 내비쳤다. 불길이 치솟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늘은 푸르렀다.

이안은 헬리아를 내려다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언제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이익이 되지 않은 일에는 나서는 일이 없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했다. 이안은 그런 그녀가 싫었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그녀. 한데 오늘의 일을 겪으면서 이안은 그녀의 한 단면을 보고 그녀의 전부를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고 깨달았다. 이안은 복잡한 눈으로 헬리아를 보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스윽.

어느 순간 사람들이 하나둘 자연스레 길을 비키더니 이내 좌우가 갈라지며 반듯한 길이 생겼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경외를 담은 표정으로 그들을, 헬리아를 지켜보았다.

이안은 사람들이 만든 그 길을 따라 묵묵히 헬리아를 안고 걸어갔다.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내려온 빛줄기가 그들을 오랫동안 비추었다.

* * *

“엄마, 엄마.”

작고 흰 얼굴, 금발에 금안을 지닌 어린아이는 자신과 똑 닮은 여인을 향해 물었다. 아이의 얼굴엔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엄마.”

아이의 부름에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의 여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왜 나는 아바마마와 달라요?”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

“하나도 닮지 않았대요. 저는 아바마마의 딸이 아니래요.”

아이는 울먹였다. 자신의 머리카락도, 눈 색도 오직 여인과 같을 뿐이었다.

“저는 아바마마의 딸이 아닌가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사람의 딸이란다. 그걸 의심하지 마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따뜻한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녀의 시선엔 자신이 오롯이 들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시선을 맞추고 자신을 보는 여인의 눈동자 속에 자신이 들어차 있었다. 아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무기력에 헬리아는 낮게 신음했다. 무리하게 힘을 쓴 탓인지 그녀의 몸은 쉽게 깨어나질 못했다. 열도 나는지 몸이 뜨거워 헬리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그녀의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시원해…….’

헬리아는 시원하게 열을 식히는 무언가로 인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누구?’

흐릿한 시야 사이로 희미한 인형의 움직임이 보였다. 하지만 시야가 또렷하지 않은 탓에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세바스찬인가?’

헬리아는 껌뻑껌뻑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시원한 기운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그 시원한 것이 떨어져 나가려 했다. 헬리아는 안간힘을 써서 멀어져 가는 그 인형의 옷깃을 잡았다.

“가…… 지 마.”

그 말에 인형의 움직임이 멈췄다. 얼핏 그가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헬리아는 무겁게 내리누르는 수마로 인해 다시 어둠에 빠져들었다.

“잘 자렴. 나의…….”

낮게 울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주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꾸만 그녀를 일깨웠다.

“……공주님.”

몇 차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뒤에서야 헬리아는 그 소리를 또렷이 인지할 수 있었다. 헬리아는 그 무엇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몇 번 눈을 움직인 후에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스찬.”

“예, 공주님. 세바스찬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헬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세바스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 늙어 있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헬리아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세바스찬 이외에도 클리드와 이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헬리아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윽.”

“좀 더 누워 계십시오. 힘을 많이 쓴 탓에 기력이 부족합니다.”

헬리아는 세바스찬과 클리드, 이안 이외에도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의원인가…….”

“예, 다행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정양만 잘 하시면 며칠 안에 바로 일어나실 겁니다.”

의원은 다시 한번 헬리아를 살피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는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안 경이 쓰러진 공주님을 데려오신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는 그가 이번 일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뒤에 서 있는 클리드도 마찬가지일 터. 헬리아는 이안을 보았다. 그는 말없이 헬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바스찬, 좀 더 쉬고 싶어요.”

“예, 그럼 식사는 좀 있다 들이겠습니다.”

헬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바스찬은 그녀의 안색을 몇 차례 더 훑어본 뒤에서야 몸을 돌렸다.

“아, 저기 세바스찬.”

“예, 공주님.”

“혹시 세바스찬이었나요?”

“예?”

세바스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헬리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나가 보세요.”

“예.”

‘도대체 누구지?’

헬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꿈인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야.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후우, 제발 몸부터 생각하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클리드는 빈민가에 불이 났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었다.

“그보다, 어떻게 됐어?”

“빈민가 말씀이신가요?”

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민가의 불은 모두 꺼졌습니다. 공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수도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모두들 공주님을 성녀님이나 천사님으로 부르고 있답니다.”

‘성녀? 천사?’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냥 뭐…….”

“그 일로 공주님의 지지가 크게 올랐습니다. 아마 후작의 속이 꽤나 사나울 겁니다.”

“치료약은?”

“말씀하신 대로 요한이란 분과 마탑주이신 베로니카 공작님의 협력을 얻어 치료약을 만들었습니다. 아직 판매 전입니다.”

“판매라…….”

헬리아는 치료약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무료로 배포해.”

“예? 전부 말씀이신가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 큰 손실은 없을 거야.”

클리드는 헬리아의 말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배포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리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섰다.

“…….”

방 안에는 헬리아와 이안 단둘뿐이었다. 헬리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다 여전히 서 있는 이안을 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묻고 싶으면 물어.”

“……그자는 누굽니까?”

이안이 묻는 그자가 엘라임이라는 것을 헬리아는 알았다. 아마 그 광경을 보았다면 묻지 않을 리 없겠지. 헬리아는 이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차분한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정령왕.”

“…….”

“물의 정령왕 엘라임.”

“…….”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크게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분증에는 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헬리아는 자주 엘라임을 엘라임으로 불렀다. 거기에 그 광경을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잘 거야. 나가 봐.”

헬리아는 무거운 몸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러나 이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눕지 못하고 다시 상체를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안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

그 말에 헬리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누구냐고?’

헬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내가 ‘무엇인지’ 궁금해.”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헬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이안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헬리아는 쓴웃음을 삼켰다.

* * *

“뭐라? 천사? 성녀?”

아돌프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페이튼 자작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수도 안에 헬리아 공주에 대한 찬사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왜?”

그토록 2왕자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을 바꿔놓느라 많은 자금을 투여했다. 각종 구제 활동을 벌였으며, 치료소를 짓고 치료약까지 싼값에 팔았다. 그런데 들려온 소식은 2왕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헬리아 공주에 대한 찬사니 그로서는 이해 불가였다.

“그것이…….”

페이튼 자작은 어찌 말해야 하나 말을 골랐지만, 후작의 노성에 결국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이번 빈민가의 불을 헬리아 공주가 껐다고 합니다.”

“아니, 헬리아 공주가 어떻게?”

후작은 어째서 헬리아 공주가 빈민가의 불을 껐으며, 또 어떻게 그 불을 껐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더냐?”

“정확히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도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콰앙!

후작은 의자 손잡이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년이!”

헬리아 공주가 마법사란 사실은 이미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빈민가의 불을 끌 정도인지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아니,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후우…….”

아돌프 후작은 높아지려는 혈압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숨을 골랐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소문이 빠른 걸 보면 그쪽에서 손을 쓴 모양이군.”

후작은 의자에 몸을 기울이고 손잡이를 톡톡 쳤다.

“어떻게 보는가?”

“이번 일로 헬리아 공주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습니다.”

페이튼 자작의 말에 후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제까지 두각조차 드러내지 못한 공주였다. 하물며 사람들조차 헬리아 공주가 누군지 몰랐던 상황. 그것이 이번 한 번의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사람들은 헬리아 공주의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후우…….”

아돌프 후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쪽은?”

“……그나마 치료약 덕분에 지지율이 크게 올랐습니다만…….”

“공주 때문에 완전 묻혀 버렸군.”

이번 일은 다음 왕세자에 걸맞은 명분을 얻고자 벌인 일이다. 그런데 도리어 갑자기 튀어나온 헬리아로 인해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후우, 애초부터 싹을 잘랐어야 했거늘.”

아돌프 후작은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복위시켜 준 일을 뼛속까지 후회했다.

그때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살짝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엘라드 상단에서 치료약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엘라드 상단에서?”

후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엘라드 상단의 저력이라면 충분히 치료약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이다. 후작은 가벼이 넘겼지만, 복면인의 다음 말은 결코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엘라드 상단에서 치료약을 무료로 배포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놈들이 왜!”

돈 버는 상인이라면 제값을 받고 물건이나 팔 것이지 왜 그것을 무료로 배포한단 말인가! 아돌프 후작은 엘라드 상단에서 치료약을 배포할 경우 자신들이 받을 타격을 생각했다.

“젠장!”

“후작님, 이렇게 되면…….”

페이튼 자작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후작이 그의 말을 잘랐다.

“우리 쪽의 치료약도 무료로 배포한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이쪽에서 계속 값을 고집한다면 명분은커녕 오히려 욕만 먹을 게 분명했다.

“엘라드 상단 놈들…….”

“제재를 가할까요?”

왕국 최고의 상단이라 하지만 결국 상인 집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 힘이 막강해 이제까지 쉬이 건드리지 못했지만, 가질 수 없는 존재라면 부숴놓아야 할 것이다.

“월리슨 남작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후작님.”

그때 시종 한 명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더냐?”

“전하께서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회의를?”

후작이 눈을 찌푸렸다.

* * *

하늘은 온통 푸르러 마치 바다를 거꾸로 올려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왜 따라오는데?”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따라 다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안의 정론에 헬리아가 홱 뒤를 돌아 그를 노려봤다.

“가.”

“안 갑니다.”

“왜!”

헬리아의 말에 이안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헬리아는 순간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본인의 상태를 자각하십시오.”

“……내 상태가 뭘.”

“힘 하나도 못 쓰지 않습니까?”

헬리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숨기려 해도 그에겐 숨길 수 없었나 보다. 막대한 힘을 쓴 영향으로 현재 헬리아는 마법은 고사하고 엘라임조차 부를 수 없었다.

“맘대로 해.”

헬리아는 척척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평소 아무도 찾지 않는 왕성 뒤편에 위치한 언덕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아 풀이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고, 바닥에 돌들이 가득했다.

헬리아는 씩씩하게 걸어가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찰나였다.

“조심하십시오.”

“그것참 미안하게 됐네.”

이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계속 손잡고 있을 거야?”

그녀의 말에 이안은 퍼뜩 손을 쳐 냈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거 아니야? 아님 내가 인간 같지 않아?”

그렇다고 손을 팍 칠 건 뭔가. 괜히 빈정 상하게.

“……아닙니다.”

“아니긴.”

“아닙니다.”

“뭐, 알았어. 어차피 처음부터 당신은 날 싫어했고.”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꽉 잡힌 손에 헬리아가 깜짝 놀랐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파.”

“제대로 걷기도 힘드니 따라오십시오.”

“손은 놓고 가.”

“길도 제대로 모르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 가는지나 알아?”

이안이 헬리아를 돌아보았다. 손을 잡은 탓에 둘 사이의 간격은 가까웠다. 이안의 검은 눈동자에 헬리아가 어리자 그녀는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분의 무덤으로 가는 것 아닙니까?”

“…….”

“이곳엔 그것밖에 없으니까.”

헬리아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헬리아는 그녀의 어머니인 세니아 후궁의 묘로 가는 것이었다. 이안은 말이 없어진 헬리아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헬리아는 묵묵히 이안을 따랐다.

“이상하지 않아?”

이안은 그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 같지?”

헬리아는 곰곰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어릴 적부터 체력이 남달랐고, 정령왕을 불렀으며, 이전 날엔 이상한 힘까지 내보였다. 이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 정도 힘은 다들 합니다.”

“아니.”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의 천재니 하는 그런 자들과 자신은 달랐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인간이었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테지. 나는…….”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입니다.”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정말 달라지는 게 없을까?”

헬리아가 쓰게 웃었다.

“달라질 거야.”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이안은 화가 난 듯 그녀를 노려봤다. 어째서 자신이 화가 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당신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헬리아는 이안의 말에 그를 빤히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그에 이안이 움찔했다.

“위로하는 거야?”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차피 애초에 당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뭐야!”

헬리아는 이안의 말에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힘이 없는 그녀의 공격에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이들이 당신의 정체를 알아도 놀랄지…….”

“그거야…….”

헬리아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칫.”

스스로 생각해도 다들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턱 하니 맥이 풀렸다. 이안은 그녀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말을 참 재수 없게 해.”

“정론이라고 말해두죠.”

“언제 저 입을 꿰매든가 해야지.”

헬리아와 이안은 언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정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그를 본 헬리아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이곳에서 다 보는구나.”

빈센트였다.

어째서 저 사람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헬리아는 가만히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살짝 위로 올라간 입꼬리, 세월을 머금은 듯 영롱하지만 깊고 푸른 눈동자. 삼십 대라고 믿을 정도로 엄청난 동안의 얼굴. 빈센트는 헬리아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만히 서서 그녀의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다 보았느냐?”

“…….”

빈센트는 씨익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지.”

변죽도 좋아라. 헬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빈센트는 시시각각 변하는 헬리아의 표정에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그녀와 이안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햇볕 아래에 있지 말로 이리 오너라.”

이안과 헬리아의 손을 끊고 그 자리에 빈센트가 들어와 헬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빈센트가 살짝 눈을 흘기자 뭐라 입을 열진 못했다.

빈센트는 헬리아를 정자 안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큰 석관이 놓여 있었다. 헬리아는 빈센트를 한 번 보다가 조심스럽게 석관을 만졌다.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손에 스며들었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헬리아의 물음에 빈센트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게 웃었다.

“너와 닮은 사람이었단다.”

“……욕은 아니겠죠?”

“후훗.”

빈센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헬리아는 다시 석관을 관찰했다.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인지 이음새가 없었다. 그 점이 특이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왜 죽은 것인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병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헬리아는 빈센트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왜 돌아가신 거죠?”

그 말에 빈센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보여 헬리아는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그녀는…….”

“하고 싶지 않으시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빈센트는 헬리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저 수명이 다한 거란다.”

“하지만…….”

그녀는 고작 삼십 대에 목숨을 잃었다. 창창한 나이였다. 그런데 수명이 다하다니?

“병인가요?”

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수명이 다했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게 말이다.”

빈센트의 표정이 왠지 울 듯해서 헬리아는 더는 묻지 않았다. 빈센트가 헬리아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씨익 웃었다. 차가운 기운이 너무나 익숙해 헬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이 다 떨어진 모양이구나.”

“저기…….”

빈센트가 몸을 돌렸다. 헬리아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는 아버지라 불러다오.”

그는 휘적휘적 길을 걸어갔다. 헬리아는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그 차가운 기운. 그는 멀어져 가는 빈센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라…….”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그 말이 너무나, 너무나 낯설고 기뻐서.

“가자.”

헬리아도 몸을 돌렸다.

* * *

“크으윽.”

어두운 연구실 안. 카쟌은 고통스런 신음을 삼키며 배에 난 상처를 치료해 나갔다. 배에 포션 두 병을 뿌리고 나서야 간신히 고통이 가셨다. 하지만 부서질 대로 부서진 그의 자존심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젠장. 헬리아 공주!”

카쟌은 그녀의 눈빛에 떨었던 자신을 떠올리곤 수치심에 이를 물었다. 그때 보았던 그 눈빛.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흡사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두려움이 일었다.

“그런 계집한테…….”

겨우 계집 따위에게 도망친 자신이 한심해졌고, 그만큼 자신을 그렇게 만든 헬리아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다.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자 그 위로 의혹이 떠올랐다.

“어째서 팔찌가 빛이 난 거지?”

카쟌은 팔에 찬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영롱한 보석이 반짝이는 팔찌. 하지만 도대체 빛이 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팔찌의 반짝임과 그녀의 알 수 없는 힘이 이해가 되었다. 카쟌은 잠시 고민하다 연구실에 굴러다니는 통신 구슬을 집어 들었다.

“…….”

조직에서는 팔찌가 반짝이면 바로 보고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카쟌은 이번 사건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카쟌은 망설였다.

“조직에서 이 일을 알면 분명 사람이 올 텐데…….”

카쟌이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조직으로 돌아가거나 최악의 사태는 그대로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들인 세월이 얼만데.”

이번 사태로 아돌프 후작이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카쟌은 자신이 도운다면 필시 사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그럴 만한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조직엔 알릴 수 없다. 하지만.”

카쟌은 통신을 연결했다.

치이익-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고압적인 말투가 들려왔다. 카쟌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원하는 답을 얻고자 다시 입을 열었다.

“팔찌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해 일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카쟌은 최대한 저자세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정보인지 구슬에서는 담담한 말소리가 들렸다.

[팔찌는 드래곤의 힘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혹시 그것이 아티팩트도 가능합니까?”

구슬의 목소리가 변했다.

[무엇을 발견했나?]

카쟌은 갑자기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순간 흠칫했지만 차분히 숨을 고르고 시치미를 뗐다.

“생각해 보니 팔찌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혹시나 아티팩트는 아닐까 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건 조직의 일이다. 너는 팔찌가 반응하면 그것을 그대로 보고하면 그만이다.]

카쟌은 배알이 꼴렸지만 표정을 관리했다.

“아, 그런 겁니까? 죄송합니다.”

[달리 보고할 게 있나?]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뚝-

그러자 곧장 구슬이 빛을 잃더니 통신은 끊어졌다. 카쟌은 짜증이 치솟아 올라 구슬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이런 대우라면 필시 자신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카쟌은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그년 때문에 한동안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이참에 준비를 해야겠군.”

헬리아 공주로 인해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바로 그녀가 가져온 쥐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가 전염병이 아닌 독에 의한 인위적 사고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 때문에 순식간에 조사단이 꾸려졌고, 범인을 색출하는 작업에 왕국이 뒤숭숭했다. 특히 아돌프 후작과 카쟌과의 연계를 알고 있는 헬리아 공주는 우회적으로 내부로 수사망을 펼쳤다.

카쟌이 이렇게 숨어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아마 아돌프 후작 또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테니, 카쟌이 다른 곳에 불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크크크.”

카쟌이 낮게 웃었다.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나다.”

카쟌의 웃음이 연구실에 퍼져 나갔다.

* * *

“후우…….”

헬리아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찻잔을 달그락거렸다.

“도대체 왜 안 나오는 거지?”

엘라임을 현신시킨 이래로 헬리아는 다시 그를 소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은 몸 안의 마나가 다 차기를 기다렸고, 마나가 찬 이후엔 곧장 그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혹여 이대로 그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묘한 불안감이 그녀의 신경을 좀먹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 더욱 그랬다.

초조했다. 생각해 보면 열 살 이후부터 엘라임과 함께였다. 지낸 세월로 따지면 세바스찬이 더 오래되었지만, 세바스찬에게 헬리아는 왕국의 공주이면서, 그가 모실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깍듯했다.

하지만 엘라임은 달랐다. 그에게 헬리아는 공주가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인간. 자신의 계약자. 그뿐이었다.

헬리아는 엘라임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언제나 자신을 어린 꼬마 취급하는 먹을 거 좋아하는 이상한 정령. 정령이 그렇게 꼬치를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엘라임…….”

그의 빈자리가 이렇게 컸던가. 정령과 계약자라는 영혼의 계약으로 묶인 탓일까? 마치 반쪽을 잃어버린 듯 심장이 아려왔다.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거야!”

이대로 영영 엘라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헬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뜨렸다. 괜스레 짜증이 나고 혼란스러웠다.

“엘라임.”

다시 한번 그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정적만이 그녀를 감쌀 뿐 엘라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는 마구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다시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뭐가 문제인 거지? 정말 이대로 못 보게 되는 건가? 헬리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후우…….”

“공주님.”

그때 혼란스런 그녀의 곁에 시녀 앤이 다가왔다.

“왜?”

심기가 사나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앤은 똥 밟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공주님이 천사님이라고? 천사의 탈을 쓴 악마 아니고?’

속으로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 앤의 눈앞에 헬리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까악!”

“내 욕했지?”

“무, 무슨 말씀이세요?”

헬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앤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무슨 독심술이라고 배우셨나?’

“독심술은 안 배웠으니까 얼른 온 이유나 말해.”

앤은 한동안 또 시달리겠구나 단념하곤 입을 열었다.

“아까 욕실에 물을 받아놓으라고 하셨잖아요.”

조금 부루퉁하게 대답이 나갔지만, 다행히 헬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알았어. 시중은 필요 없어.”

“예.”

종종 혼자 씻는 헬리아였다. 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욕실에 홀로 들어간 헬리아는 옷가지를 벗기 시작했다.

스윽-

몸에 두르고 있던 옷이 하나둘 사라지자 그녀의 희고 고운 나신이 드러났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흰 살결이 조명에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녀는 옷가지를 모두 벗어둔 채로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탕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물이 그녀의 발목을 감쌌고, 이내 그녀는 풍덩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하다.”

온몸의 피로가 노곤히 풀리자 헬리아는 얼굴까지 단번에 물에 담갔다. 복잡한 상념이 물에 씻겨 나가는 듯했다.

몸을 일으킨 헬리아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녀는 가만히 물을 바라보다 이내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엔 짙은 수심이 가득했다.

“이 바보야. 좀 나오라고.”

헬리아는 괜히 짜증이 나 자신을 비춘 표면을 흩뜨려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물에서 푸른빛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빛이 욕실을 가득 메웠다.

파아아앗!

“자, 잠깐…….”

헬리아는 이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

“나오라고 할 땐 안 나오고!”

푸아아악!

물이 높이 치솟더니 그 안에서 생글거리는 엘라임이 푸른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나타났다.

“드디어 나왔네.”

엘라임은 물에서 나오더니 이내 평소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알아차리나 기다렸다고.”

연결 고리가 약해진 탓에 매개인 물이 필요했다. 헬리아가 물이 가득 담긴 욕실 안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가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계속 투덜거리던 엘라임은 그때서야 헬리아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물에 찰랑거리는 그녀의 하얀 나신이 그의 시선에 잡혔다.

“왜, 왜 모, 몸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다 못해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바보가!”

헬리아는 근처에 있던 비누를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날렸다.

“아얏! 아파!”

엘라임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녀의 몸이 보이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왜, 왜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거야!”

“여긴 욕실이야!”

엘라임의 얼굴이 완전히 잘 읽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눈을 꼭 감아도 헬리아의 흰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열 살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어엿이 굴곡진 몸매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어서 나가!”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당황하여 그저 사라지면 될 일을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한데 그 순간 문 앞에 떡하니 마주친 남자로 인해 사태는 더욱 커졌다.

채앵!

이상한 기운을 느낀 이안이 서둘러 욕실로 온 것이다. 이안이 검을 빼 들더니 엘라임을 향해 겨누었다.

“네놈은.”

“이, 이런!”

이안은 칼을 쥔 채 엘라임을 겨누었다.

“시, 실수라고!”

“죽여주마.”

“자, 잠깐!”

그때 이안을 향해 또 하나의 비누가 날아왔다. 기감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던 이안은 날아오는 비누에 저도 모르게 반응하였다. 비누가 토막이 나고 이안의 시선이 그것을 던진 헬리아에게 향했다.

홱!

그곳에 여전히 헬리아가 알몸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 탓에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헬리아는 자신의 욕실에 무단 침입한 두 남정네를 바라보다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당황은 자신이 해야 하는데 저 두 놈이 더 당황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둘 다 나가!”

헬리아의 외침에 이안과 엘라임은 허둥지둥 욕실을 뛰어나갔다. 헬리아는 허겁지겁 나가는 두 사람을 보고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

“…….”

욕실을 헐레벌떡 나온 이안과 엘라임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조용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이건…….”

“…….”

“…….”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이어졌다. 어느 날의 화창한 오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에서 헬리아는 차향을 음미했다. 그녀의 앞에는 플로렌스 공작이 앉아 있었다. 헬리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공작을 보며 말을 꺼냈다.

“가신 회의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

“공주도 사색이 된 후작의 얼굴을 봤어야 했네.”

“그거 아쉽군요.”

헬리아는 작게 키득거렸다. 안 봐도 뻔했다. 이번 일에 아돌프 후작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잘 알았다. 수도에 전염병, 아니, 독을 풀고 치료소를 만들어 독에 중독된 이들에게 선심 쓰듯 치료약을 내민다. 그것으로 2왕자의 명성을 얻으려는 작전.

꽤 그럴듯한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헬리아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정확히는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헬리아가 숟가락을 턱 하니 얹었다는 것.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거지요.”

헬리아가 가져온 쥐로 인해 왕성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단순히 전염병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독에 중독된 것이니 말이다. 그 후 왕실은 빠르게 범인 색출에 들어갔다. 물론 그 범인이 후작임을 확신했지만, 그를 잡을 만한 증거가 없기에 후작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후작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네.”

“하지만 발목은 잡을 수 있겠지요.”

범인 색출에 조사관들이 파견되면 증거가 없더라도 뒤가 구린 후작은 결국 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작님은 최대한 후작을 압박해 주세요.”

“그리하겠네. 한데…….”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뭘 그리 보시나요?”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공작은 그날 보았던 그 빛무리를 결코 잊지 못했다. 헬리아 공주의 몸을 감싼 그 빛을. 그것은 결코 평범한 힘이 아니었다.

“마법사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그런 재주를 가졌을 줄은 몰랐군그래.”

“저도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랐죠.”

헬리아는 쓰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도 잘 모르는데 남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말해주지 않을 셈인가?”

공작은 그녀가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헬리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자신도 그런 힘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내가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문득 드는 생각에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공작님은 저희 어머니에 대해 잘 아시나요?”

이제껏 헬리아는 ‘어머니’, 그 단어조차 생소한 말을 일부러 꺼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니아 마마 말인가?”

공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분이라면 공주가 더 잘 알지 않겠나?”

“별로 기억나는 게 없어서 말이죠.”

“흐음.”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세니아 마마는 꽤, 아니, 많이 특이하셨지. 공주처럼 말일세.”

헬리아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공작은 빈센트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저는 별로 특이하지 않습니다만.”

“충분히 특이하네.”

“그래서요?”

저한테로 오는 초점을 피하고자 말을 던졌다. 공작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활발하고, 음흉한 사람이었지.”

“뭔가 말이 이상한데요?”

“그러고 보면 성격도 공주와 똑 닮았군그래. 아니지.”

공작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웃었다.

“공주는 전하와 마마의 성격을 아주 적절히 닮았다네.”

“……칭찬은 아닌 것 같군요.”

헬리아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었네. 하녀 출신이라곤 하나 아마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공작은 과거를 떠올리고는 추억에 젖어들었다.

“언제나 제멋대로였지.”

헬리아는 괜히 물어본 게 아닌가 후회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의 과거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이 끌렸는지도 모르겠군.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니 말일세.”

“전하도 말인가요?”

공작은 헬리아 공주가 내뱉은 전하란 호칭에 그제야 며칠 전 빈센트가 왜 씁쓸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뭐라 말하려다 두 사람의 문제인 것 같아 공작은 그 부분에선 발을 뺐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셨지.”

헬리아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부모의 로맨스를 듣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과거 앨범을 들추는 듯 자신이 겪었던 일도 아닌데 생생히 그 감정이 전해지는 듯했다.

“전하도 마마도 서로를 정말 사랑하셨네. 이제껏 살면서 그 두 사람만큼 서로를 사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공작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립군그래.”

공작이 넋두리처럼 말을 끝맺자 헬리아는 가만히 그를 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께 듣게. 그분이라면 이 사람보다 더 자세히 알려줄 테니.”

헬리아는 점점 어머니란 사람에 대해 아리송해졌다.

그때 정원에 레브가 찾아왔다.

“공주님, 클리드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헬리아는 잠시 공작을 바라보다 이내 그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알렸다. 그리고 곧 클리드가 정원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클리드는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 사신이 온다 합니다.”

“제국에서? 왜?”

옆에 앉아 있던 플로렌스 공작이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연례행사네. 왕국과 제국은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네.”

“제국에서 사신이라…….”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에서 오는 자들에 대해 조사해 줘.”

“알겠습니다.”

클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가 그런 지시를 내릴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보다 그 이야길 하러 온 거야?”

“아뇨. 그게…….”

클리드가 플로렌스 공작을 힐끔거리자 눈치가 빠른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네.”

헬리아는 공작을 일별하고 클리드를 보았다. 업무 보고 시간이 아닌데 그녀를 찾아왔다면 필시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그것이, 일이 생겼습니다.”

“일?”

“예, 아돌프 후작에게서 기사단에 대한 항의서가 왔습니다.”

“기사단에?”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에 헬리아의 눈이 찌푸려졌다.

* * *

왕족 기사단의 일과는 단조롭다. 수련과 수련, 그리고 수련. 일주일에 한 번씩 주어지는 외박이 그들의 숨구멍이었다.

헬리아의 기사단도 휴일을 맞아 시내로 나갔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말 많은 숀, 덩치는 크지만 순한 성격의 휴, 그리고 박학다식한 렌스. 그 세 명은 시내를 걸었다. 사복 차림을 한 그들의 얼굴은 휴일을 즐기는 여느 사람들처럼 싱글벙글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숀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뚱한 표정을 짓고는 팔짱을 꼈다.

“뭐가 불만이야?”

휴가 숀의 불만 어린 표정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렌스는 휴의 옆구리를 찌르며 뒤를 가리켰다.

“보나마나 저 녀석 때문이겠지.”

렌스가 가리킨 곳을 보자 그곳에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지닌 세인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숀은 씩씩거렸다.

“따라오지 마!”

숀이 세인을 향해 외쳤지만, 세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내가 가는 길을 네가 가고 있는 것뿐이야.”

“그럼 네가 앞장서서 가!”

“싫어.”

“이익!”

숀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암튼 좀 가!”

꼴도 보기 싫은 세인이 자꾸만 뒤를 따라오자 숀은 어린아이처럼 화를 냈다. 세인은 그저 입가에 웃음을 짓더니 이내 숀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같이 가지?”

“야!”

“주점에 가는 거지?”

숀이 렌스에게 묻자 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지.”

“나쁘거든!”

하지만 휴와 렌스는 이내 세인의 동행을 허락했다. 세인은 품행이 가볍기는 했지만, 특별히 자신들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긴 숀은 예외긴 했지만 말이다.

“자자, 같이 가자고.”

세인은 숀의 어깨에 팔을 턱 하니 걸쳤다. 숀은 묘하게 자신보다 키가 큰 세인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더 이상 나빠질 기분도 없어 그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개자식.”

“오늘은 내가 쏘지.”

“정말이지?”

숀이 눈을 가늘게 뜨자 세인이 피식 웃었다. 말도 많은 투덜이 숀이지만, 본성이 나쁜 녀석이 아니었다. 툴툴거리는 게 흠이지만, 그것대로 재밌는 녀석이었다.

“흥, 네가 쏜다고 내가 가는 건 아니야.”

“아무렴 그러시겠지.”

세인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세 명에서 네 명이 된 그들은 인근에서 꽤 유명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사람이 북적거렸지만, 다행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네 명은 각각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카악, 이 맛이야.”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숀이 잔을 내려놓으면서 탄성을 질렀다. 힘든 수련 다음에 먹는 맥주는 정말이지 꿀맛 같았다.

“젠장, 대장 때문에 안 쑤시는 데가 없다고.”

이안의 살벌한 수련을 떠올린 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도무지 대충을 모른다니까.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그보다 들었어?”

렌스가 입을 열자 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빈민가에 불이 난 일 말이야.”

밖에 나올 일이 없는 숀과 휴다. 밖의 이야기에는 귀가 밝지 못했다. 그나마 귀가 밝은 렌스가 입을 열었다.

“빈민가에 불이 나서 아무도 손을 못 썼는데, 헬리아 공주님이 나서서 불을 끄셨대.”

“에이, 설마.”

“부풀린 거 아니야?”

숀과 휴는 믿을 수 없었다. 기사 서임식에서 보았던 그 청초한 공주님이 어떻게 불을 끈단 말인가. 그 점은 렌스도 이해가 불가능했지만, 이미 수도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다.

“벌써 수도에 공주님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고. 성녀님이라고.”

“캬아, 성녀님. 확실히 공주님의 이미지와 딱 맞긴 하다.”

찰랑이는 금발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금안. 미의 여신도 울고 갈 미모였다. 헬리아 공주의 얼굴을 볼 때면 그 힘든 수련도 잊을 만큼 힘이 되었다.

“역시 사람은 줄을 잘 타야 해.”

“저번엔 썩은 동아줄이라며.”

“쉬잇! 그건 옛날이고!”

휴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히는 숀의 논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세인은 그저 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세인은 투덜거리는 숀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그때 세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이, 이거 애송이 숀과 그 패거리 아니야?”

숀은 애송이란 소리에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으득, 하인스!”

숀은 이를 악 물었다. 상대는 바로 자신들과 함께 기사단에 입단하여 현재 2왕자의 친위대에 들어간 하인스였다. 이십 대 중반의 하인스란 남자는 기름을 바른 듯 번들거리는 짧은 금발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남자였다. 숀과 휴, 그리고 렌스와는 악연으로 묶인 사이였다.

“같은 쓰레기들과 함께 있으니 보기 좋네.”

“꺼져!”

하인스의 눈이 구겨졌다.

“평민 나부랭이 주제에. 영지에 있었을 때는 찍소리도 못 한 놈이.”

하인스와 숀 일행은 같은 레이몬 영지 출신이었지만, 하인스는 레이몬 남작의 아들이었고, 숀 일행은 그 영지의 평민이었다.

하인스는 자신의 시중이나 들어주는 놈들과 같은 계급의 인간이 자신과 동급의 기사라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정식으로 기사단에 배정받기 전에 훈련을 하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숀 일행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 탓에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 또 그때처럼 코뼈 부러지기 전에 꺼지지?”

“그 재수 없는 입은 여전하군.”

하인스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숀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사단에 있을 때 신나게 두들겨 맞았던 하인스다. 물론 그 덕에 레이몬 자작이 손을 써서 숀 일행은 큰 곤욕을 치렀지만, 그나마 실력이 출중한 덕분에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그때 렌스가 그가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저놈 뒤에 있는 놈은 휴스턴 자작의 둘째 아들이야.’

숀은 렌스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하인스와 함께 휴만큼이나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서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거들먹거리는 입술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익스퍼트 중급이야. 조심해.”

렌스의 말에 숀은 살짝 긴장이 되었다. 현재 자신은 초급에서 중급 사이. 이제 겨우 초급에 올라선 하인스라면 무리 없지만 만약 휴스턴 자작의 둘째 아들이라는 놈이 가세한다면 자신은 필패였다.

‘젠장, 하인스 놈!’

숀은 하인스를 노려보았다. 하인스의 꼴은 딱 호가호위였다. 호랑이의 권세를 빌린 여우 꼴에 숀은 이를 앙다물었다.

“숀, 물러나자.”

휴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숀을 말렸다. 하지만 숀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아니, 하인스의 다음 말에 숀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공주가 성녀라며? 웃기는군.”

“뭐야!”

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을 욕보이는 것은 결코 기사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숀을 도발할 목적이었는지, 성과를 거둔 하인스가 더욱 입방정을 떨었다.

“웃기지 않아? 일부러 불을 낸 다음 끈 시늉이라도 했을지.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애초에 그런 하녀 출신의 반쪽 공주 따위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 2왕자님을 이길 수 없을 테지.”

“지금 말 다 했어!”

숀이 하인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렌스와 휴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이건 기사로서의 명예가 달린 일이었다.

“어이, 뭐야? 칠 거야?”

“결투다! 결코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어!”

하인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방향으로 간 것이다.

‘큭큭, 오늘이야말로 네놈의 그 입을 찢어놓고 말겠다.’

하인스가 휴스턴 자작의 둘째 아들 데이먼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리고 숀 일행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또 한 명이 더 있었다.

‘네놈들 아주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하인스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크억.”

숀이 벽에 부딪치며 피를 토했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이런 비겁한…….”

숀은 하인스의 일행을 노려보았다. 특히 아까까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한 명을 죽일 듯 바라봤다.

“비겁하게 기사의 싸움에 마법사라니…….”

“흥, 테스도 분명한 2왕자님의 친위대 소속이다. 그리고 기사의 결투라곤 말 안 했는데?”

하인스가 쓰러진 숀 일행을 보며 크게 비웃었다. 숀과 렌스, 휴. 그리고 하인스 일행의 결투는 의외의 결과를 보였다. 처음 붙었던 하인스와 숀의 대결에서 하인스가 밀리자 테스라는 마법사가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결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애초에 하인스는 그들을 폭행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네놈 주제를 알아야지! 평민 주제에 어디서 까불어!”

“크윽!”

하인스는 있는 힘껏 숀의 배를 걷어찼다.

“그만하지?”

그때 누군가 하인스의 다리를 막았다.

“네놈은 누구냐!”

“그쪽이 발로 차고 있는 놈이 내 동료걸랑?”

세인이 팔짱을 낀 상태로 하인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수수방관하던 놈이었다. 한데 이제 와 끼어든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방해한다면 그도 칠 생각이었다.

“크윽, 네놈 역시 짜증 나.”

“어이, 도와줘도 욕이야?”

“도와줄 거면 애초에 도와주라고!”

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렌스와 휴도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세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는 끼어든다고 뭐라고 했으면서.”

“이익, 암튼 어떻게 할 거야! 저 마법사 실력은 보통이 아니라고!”

숀의 말에 세인이 피식 웃었다.

“뭐야, 걱정하는 거야?”

“내, 내가 무슨!”

숀의 얼굴이 빨개지자 세인은 숀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어 근처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셋 중에서 제일 심하게 다친 사람이 바로 숀이었다.

“네놈 몸이나 잘 간수해.”

“야! 내가 무슨 걸레냐!”

세인은 툴툴거리는 숀을 내버려 두고 하인스 일행과 마주 섰다.

“하, 잠자코 있었다면 사지는 멀쩡했을 것을. 네놈이 화를 자초하는구나!”

“글쎄, 누가 화를 자초했는지는 이제 알게 되겠지.”

세인의 눈이 순식간에 살기를 띠었다. 하인스는 흠칫했다.

‘뭐, 뭐야.’

옆에 있던 데이먼과 테스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강자다.’

‘방심하지 마.’

그러나 멍청한 하인스만은 자신이 쫄았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뛸 뿐이다.

“뭐, 뭐야? 째려보면 어쩔 건데? 데이먼, 테스! 어서 저 녀석을 공격해!”

데이먼과 테스는 자신들을 고용인 부리듯 하는 하인스를 아니꼽게 바라봤지만, 하인스 가문에서 원조를 받고 있는 처지라 그의 말을 함부로 거부할 수 없었다. 데이먼이 먼저 앞으로 나서자 세인이 말했다.

“번거롭게 따로따로 나오지 말고 한꺼번에 나오지?”

“건방지긴!”

데이먼은 검을 쥔 채 이를 앙다물었다. 그러나 냉정을 되찾은 그는 세인에게서 느낀 묘한 기운에 테스를 돌아보며 고갯짓을 했다.

‘합공한다.’

‘알았어.’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데이먼과 테스는 순식간에 앞으로 나섰다.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파이어볼!”

데이먼과 테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데 그 순간 앞에 있어야 할 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로 가.”

“데이먼! 네 뒤!”

“크윽!”

순식간에 데이먼이 쓰러졌다.

너무나 빠른 공격. 하인스는 단번에 쓰러져 버린 데이몬을 보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저 녀석은!’

그때 왕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수석으로 졸업한 이의 얼굴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젠장. 그 미친놈!’

하인스가 도망가려는 순간이었다.

“크윽!”

테스마저 세인의 한 방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어딜 가시나?”

하인스는 자신의 앞에 턱 하니 길을 막고 있는 세인에게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그럼 이제 빚을 갚도록 하지.”

그러면서 세인이 싱긋 웃었다.

“저들이 갚아줄 거야.”

숀과 렌스, 그리고 휴가 몸을 풀면서 쓰러진 하인스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 * *

“뭐, 잘했네.”

기사단에 대한 보고를 들은 헬리아는 여유롭게 차를 음미했다. 맞은 놈들이 2왕자의 친위대니 잘했다고 상을 줘야 할 판이다.

“그걸로 끝이 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란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항상 후작이 문제지.”

“후우,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클리드는 옅게 한숨을 내뱉었지만, 헬리아는 아니었다.

“그래서?”

“후작 측에서 기사들의 직위 해제와 처벌을 원하고 있습니다.”

“꼬투리 하나 잡았다 이거로군.”

헬리아는 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레브가 헬리아의 잔에 차를 따르기 위해 주전자를 들었다. 헬리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클리드를 보며 물었다.

“대응책은?”

“직무 중에 일어난 일로 기사 대 기사 간의 싸움보다 개인과 개인 간의 싸움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황상 법적으로 별 무리없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다만 후작 측에서 이 빌미를 쉽게 넘기지 않을 겁니다.”

클리드의 설명에 헬리아가 턱을 쓰다듬었다.

“개인이라. 그럼 그놈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다면 후작도 더는 말을 꺼내기 힘들겠지.”

헬리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나 무슨 꿍꿍이가 튀어나올 때 짖던 웃음이었다.

“그놈들한테 압박을 넣어. 후작 몰래.”

“알겠습니다.”

클리드는 곧장 그것이 헬리아 공주의 힘이 아닌 엘라드 상단주의 힘으로 무마시키라는 것임을 알아들었다. 헬리아 공주의 힘은 아직 미약하지만, 엘라드 상단주라는 신분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그놈들은?”

“기사들 말씀이신가요?”

마침 클리드는 정원으로 오면서 본 광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안 경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만 클리드는 자신이 본 그 모습이 훈련이란 범주에 포함되는 것인지 잠깐 의문이 들었다.

“흐음, 그래?”

헬리아는 눈매가 휘어졌다.

* * *

“헉, 헉.”

숀의 입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옆에서 렌스와 휴도 숨이 차는지 계속 헉헉거렸다.

“젠장.”

숀은 이를 악 물고 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이안 때문이었다. 그 소란이 있은 후 이안은 그들을 불러 모았고, 지금 이 꼴이 되었다.

“어째서 우리가…….”

숀은 불만이 많은지 얼굴을 구겼다. 발을 움직이면서 쉴 새 없이 입도 함께 움직였다.

“그거야 우리가 사고를 쳤으니까 그렇지.”

휴가 지금 상황에 대해 일러주었다. 하지만 숀은 더욱 불만스러웠다.

“우리는 그냥 얻어 터졌다고!”

제대로 때리기라도 하고 기합을 받는 거면 모를까, 된통 얻어터지기만 했다.

“저 녀석 때문이잖아! 그러게 왜 곤죽으로 만들어서.”

숀이 뒤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뛰는 세인을 보며 외쳤다.

“그때 너도 웃었잖아.”

“그, 그거야…….”

숀은 세인의 말에 답이 궁색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사실이었다.

“잡담할 여유가 있나 보군. 앞으로 오십 바퀴 더!”

“으악!”

“야, 숀!”

“너 때문에 미친다.”

결국 이안에게 주의를 받은 숀 일당은 푸르죽죽한 얼굴로 달렸다.

“헉, 헉. 음?”

그때 숀의 눈에 헬리아 공주가 비쳤다.

“고, 공주님이다.”

“우와, 정말 예쁘다.”

숀은 혹시 이 사태를 무마시켜 줄 구세주가 아닐까 싶었고, 휴는 그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탄성을 질렀다. 기사 서임식 이후에 헬리아 공주는 공사가 다망하여 자주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헬리아 공주는 절벽 위의 꽃이며 여신이었다. 그녀를 몰래 짝사랑하는 기사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진면목을 모르는 자들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저들만 따로 훈련하는 거야?”

이안은 헬리아가 웃으며 나타나자 시선을 돌렸다. 아직까지 그때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간신히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헬리아는 그의 물음에 대답 대신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이안은 헬리아가 등장하자 기사들 대부분 그녀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결국 훈련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훈련 중인 기사들을 집합시켰다.

“훈련치고는 싱겁게 그냥 달리기만 하네.”

“처벌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안의 말에 기사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헬리아는 그런 그들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처벌은 무슨,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 말에 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이거 잘만 하면 처벌은 피하겠다.’

휴와 렌스의 얼굴에도 옅게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헬리아의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가 신경에 거슬린 것이다.

“이쯤 하는 게 어때? 기사들도 이만하면 반성한 것 같고.”

헬리아가 숀 일행을 보자 그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충분히 반성했습니다.”

숀과 휴의 말에 헬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 바람에 그 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안의 눈매가 좁아졌다. 도대체 그녀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서임식 이후에 기사단에 대한 것은 그에게 일임한 그녀였다. 바쁜 탓도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연무장에 나타났다. 이유 없이 움직일 그녀가 아니었다.

“기사단의 규율 문제입니다. 가벼이 하다간 기강이 무너집니다.”

“애초에 단단했으면 기강이 해이해질 일도 안 일어났겠지.”

헬리아의 말에 이안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

이안이 대답이 없자 연무장에는 순식간에 냉기가 흘렀다. 그제야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기사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왜, 왠지 비꼬는 것 같지 않아?’

‘그, 그러게 말이야.’

‘이, 이거 이러다 우리만 죽어나는 거 아니야?’

‘야, 대장 얼굴 좀 봐봐.’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 속에 헬리아의 미소만은 상큼한 봄 날씨처럼 해맑았다. 이안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불길이 튀었다. 그가 이를 씹어 먹을 듯 냉담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기강이 해이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사들은 그 말에 다들 얼굴이 해쓱해졌다.

‘마, 망했다.’

‘으악!’

기사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헬리아는 변해가는 이안의 표정에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고 입가에 맺힌 미소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 그리고 내가 너무 기사단에 소홀히 했던 것 같아.”

헬리아가 손짓하자 레브가 한 가득 포션이 든 병을 가져와 이안 앞에 내려놓았다.

“상급은 아니지만, 중급 포션이야. 생각해 보니 너무 지원을 안 해준 것 같더라고. 앞으로 중급 포션은 매일 지급될 거야.”

“우와!”

“중급 포션이라!”

기사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상급 포션만큼은 아니지만 중급 포션도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만큼 비쌌다. 하물며 매일매일이라니. 이런 호사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호사가 아님을 기사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그보다 나도 훈련에 참가하면 안 될까?”

헬리아가 이안을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은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들과 함께 훈련이라니.

“……훈련에 말씀이십니까?”

이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응.”

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안 될까?”

평소 잘 짓지 않던 미소를 남발하는 헬리아를 보며 이안은 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럼 따로 훈련 시간을 조정하겠습니다.”

“아니, 기사들과 함께했으면 좋겠어.”

“……함께 말입니까?”

“응.”

“불가합니다.”

“왜?”

“기사들의 훈련에 방해가 됩니다.”

헬리아가 불쌍한 표정을 지어도 이안은 꿈쩍하지 않았다. 헬리아는 기사들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어, 어떻게 하지?’

‘감히 공주님이랑 훈련을 해?’

‘야, 그래도 저렇게 부탁을 하시는데…….’

기사들은 망설였지만, 결국 헬리아의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다. 어느 누가 아름다운 여인의 청을 거절할쏘냐.

“정말 방해가 돼?”

“아닙니다!”

“절대 방해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즉시 한목소리로 단결되는 아름다운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안이 그들을 차가운 눈초리로 보자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방해됩니다.”

일관된 표정을 짓는 이안에게 헬리아는 자신의 카드를 꺼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듣기에 기사들이 마법사에게 된통당했다지? 마법사에 대한 대처 훈련은 제대로 한 것인가? 상대는 3서클 마법사라고 하는데.”

“그건…….”

정식으로 배정받기 전에 충분히 마법사의 공격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들에겐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후우.”

이안은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훈련에 참가한다는 그녀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입니다.”

“응.”

“우와!”

“그럼 공주님과 함께하는 건가요!”

“와아!”

기사들이 모두 환호를 질렀다. 아름다운 공주님과의 훈련이라니! 기사 모두 머리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연신 땀방울을 흘리며 촉촉이 젖은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한 것이다.

“그럼 간단한 대련부터 할까?”

헬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콰아아앙!

“크악!”

헬리아가 날린 에어볼을 맞고 숀이 연무장 벽에 처박혔다. 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공격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면 숀은 곧바로 저승행이었을 것이다.

기사들은 모두 넋을 잃고 숀과 헬리아를 보았다. 모두들 가볍게 생각한 대련이었다. 어떻게 공주님과 대련을 하냐에서부터,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다들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 따윈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옷깃이 문제인가. 그녀가 쏘아대는 마법은 전혀 대련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공격들이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격.

기사들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들은 헬리아 공주가 마법사임을 그제야 알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눈에 보이는 전부가 아님을 직감했다. 물론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자, 다음 사람?”

헬리아의 얼굴엔 개운함이 감돌았다. 그 뒤로도 날아가 처박히는 자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곳에서 쿵, 저곳에서도 쿵. 나가떨어지는 기사들이 속출했다. 기사들은 그녀의 과격한 공격에 잠시 신분을 잊고 공주에게 반발했다. 하지만 헬리아는 그들의 의견을 상큼하게 묵살해 주었다. 바로 포션을 가리키면서.

“다치는 건 걱정하지 마. 포션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말에 기사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포션의 용도가 드러난 것이다.

‘차, 차라리 대장의 훈련이 나았어.’

‘우, 우린 죽을 거야!’

‘아, 악마다!’

그동안 천사로 굳게 믿었던 믿음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기사들은 헬리아의 진면목에 몸을 떨었다. 이건 이안보다 더했다. 아프면 포션을 먹였고, 기절하면 깨워 포션을 먹였다.

‘망했다!’

기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야, 잘해!”

“너밖에 없다!”

“너 지면 죽는다!”

숀이 마지막 남은 세인을 향해 외쳤다. 기사 모두 열렬한 눈빛으로 세인을 응원했다. 이제껏 데면데면했던 사이는 어느새 헬리아라는 훌륭한 악역 덕분에 일치단결되었다.

“걱정 마.”

세인은 숀의 응원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앞으로 나섰다. 이제 마지막 남은 사람은 세인. 기사들은 손에 땀을 쥐고 자신들의 희망인 세인을 향해 응원을 보냈다.

헬리아는 마지막으로 등장한 세인을 보고는 살짝 눈매를 좁혔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운 모습. 이제까지 기사들은 호기롭게 나오긴 했지만 여유가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인이라는 남자는 달랐다.

‘기도는 분명 평범한데.’

게다가 알 수 없는 웃음까지. 헬리아는 그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시작할까?”

실력을 보면 알 수 있는 일. 헬리아는 매번 그랬듯 먼저 공격했다.

파지직!

번쩍이는 전류가 세인을 향해 쏘아졌다. 지금까지 기사들을 상대한 것보다 더욱 매섭고 강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그녀를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세인은 그 공격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단숨에 헬리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런 공격! 헬리아가 실드를 펼치자 아슬아슬하게 실드에 검이 부딪혔다. 헬리아는 검이 부딪힐 때 미세하게 실드에 균열이 가는 것을 보았다. 3서클 정도의 마법만 쓰고 있다고 해도, 쉽게 균열이 갈 실드가 아니었다.

헬리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실력이 출중하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세인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공격이 이어졌다.

헬리아는 4서클 마법을 시전했다. 다른 기사들에게 3서클 마법을 쓴 것과는 대조되었다.

“이거 저만 특별 대우인가요?”

세인은 웃으며 그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마치 가까스로 피한 것 같았다. 하지만 헬리아는 그것이 가까스로 피한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과연 수석 졸업다웠다.

‘한 수 있다는 건가?’

솔직히 헬리아는 전투에 능하진 못했다. 전투가 주력도 아니고, 기사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마법사와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역시 마법사를 쓰러뜨린 이유가 있었군. 마법사와의 싸움에 능숙해.’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와 함께 세인의 웃음도 깊어갔다.

그때였다. 세인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그의 검이 헬리아의 목으로 쇄도했다.

“위, 위험해!”

기사들은 세인의 위험천만한 행동에 모두 경악했다. 그의 검이 어느새 헬리아의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

이안의 검이 세인의 검을 막아섰다. 이안의 날카로운 눈과 세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부딪쳤다. 세인이 먼저 물러섰다.

“이크, 설마 피하지 못할 줄 몰랐습니다.”

“기사의 신분을 망각하지 마라.”

“깊이 새겨듣지요.”

세인이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이안도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온 신경은 세인을 향했다.

‘그 감각은…….’

이안은 순간 세인과 부딪혔을 때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먼저 손에서 힘을 뺐다.’

만약 그가 힘을 빼지 않았더라면?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공주님.”

그때 멀리서 클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련은 끝났으니 이제 가봐야겠네.”

헬리아가 이안을 지나쳐 세인에게 다가갔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송구합니다.”

세인이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만한 실력자가 내 기사라는 게 기쁜데?”

세인은 묘한 눈으로 헬리아를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그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무척이나 반가워.”

세인과 헬리아의 시선이 찰나 마주쳤다.

“그럼 다음에 보지.”

헬리아는 뒤를 돌아서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다음에도 또 올게. 훈련은 걱정하지 마. 포션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웃으며 떠나가는 헬리아의 뒤로 기사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도대체 훈련에는 왜 끼어드신 겁니까?”

클리드는 난데없이 기사들과 훈련을 하고 있는 헬리아에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재밌는 녀석이 있더라고.”

연무장에서 멀어져 고개를 돌린 순간 헬리아는 세인과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세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세인 경 말입니까?”

헬리아는 잠시 연무장에 시선을 둔 뒤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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