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42)

제3장 전염병

까악- 까악-

새카만 어둠이 달마저 집어삼킨 캄캄한 하늘.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끄억, 취한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남자가 어두운 밤길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듯 얼굴은 새빨갛다 못해 검붉었고,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음,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너무 많이 취한 탓인지 귀소본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 엉뚱한 곳에 발을 들이밀고 말았다. 그는 낯선 주변 풍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에이, 뭐야. 빈민가잖아?”

퀴퀴한 냄새와 지저분한 길. 주변에는 축 늘어진 사람들이 길가에 주저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고, 찍찍거리는 쥐들이 길가를 맴돌았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러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은 장애물에 턱!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에이 썅! 뭐야?”

그가 성을 내며 자신의 발에 걸린 것을 발로 찼다. 한데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던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

새카맣게 포자가 인 손이 술 취한 남자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히, 히익! 놔, 놔!”

기겁한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사람, 아니, 그것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흉측했고, 또 참혹했다. 온몸은 알 수 없는 기포로 뒤덮여 있었고, 갈라진 피부 사이로 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뒤집힌 흰자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으, 으악!”

남자는 그자의 손을 발로 떼어내고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허, 헉! 뭐, 뭐야!”

달려가는 남자의 정신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또렷해졌다. 그러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제발 우리 아이를…….”

“으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길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울부짖는 소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제발 살려줘…….”

* * *

“전염병이라고?”

클리드의 보고에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안도 눈살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하는 레칸 대륙이지만, 전염병이 한번 돌기 시작하면 수많은 사람이 속절없이 목숨을 잃는다. 포션과 신성력은 외상에는 뛰어난 효과를 보이지만, 내상이나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크게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최상급 포션이나 고위 신관의 신성력이라면 치료가 가능하겠지만, 값이 비쌀뿐더러 일반 백성들이 고위 신관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설령 고위 신관이 나선다 해도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동안 수백, 수만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게 전염병이었다. 그래서 대개 죽는 이는 평민 이하의 하층민이 대다수였고, 간혹 가난하거나 치료의 때를 놓친 귀족도 전염병에 화를 입곤 했다.

“오늘 하루 새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하루 만에?”

헬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치료소에서 집계한 환자의 수입니다. 실제론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전염병에 걸렸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헬리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이 정도 파급력의 전염병이라면 큰 문제였다.

“전하께서 서둘러 대신들을 소집하셨습니다.”

하루 만에 수백 명이 죽는 전염병이라면 서둘러 초기에 병을 잡아야 한다. 전염병은 빨리 막을수록 피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예? 어디로?”

클리드가 어리둥절했다.

“어디긴 어디야, 사태를 파악하러 가야지.”

“공주님이 직접 말입니까?”

클리드가 살짝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만류했다. 수백 명이 하루 만에 죽어가는 전염병이다. 그런 곳에 그녀가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 전염병에라도 걸리시면…….”

“걱정 마. 이제까지 감기 한 번 안 걸렸어.”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괜찮다니까.”

“하지만…….”

클리드가 말렸지만 헬리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후우.”

결국 클리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따라나섰다. 그런데 이번엔 이안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밖은 위험합니다.”

이안이 앞을 막아서자 헬리아가 그를 올려다봤다. 평소 무슨 표정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잔뜩 미간을 좁히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이안이 헬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새카만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헬리아는 순간 흠칫했다. 아무리 봐도 그의 눈동자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다.

‘저번과 같은 사태는 막는다.’

이안은 그동안 헬리아에 대해 충분히 파악했다. 그녀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 또다시 그녀 스스로 몸에 해를 입히는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헬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갈 거야.”

“저는 당신의 호위 기사입니다.”

“그럼 호위하면 되겠네.”

헬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안은 주먹을 세게 쥐다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반대한다 한들 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헬리아가 이안을 지나치다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안 가? 뭐 당신이 안 간다면 나야 엘라임이랑 가면 되니까.”

“후우…….”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꼭 그녀가 엘라임과 간다고 해서 가는 건 절대 아니다.

* * *

헬리아 일행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수수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변장이 썩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본인들은 잘 변장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튀는 건 그들의 옷차림이나 머리색이 아닌 외모라는 것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수도는 평소보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갔고, 모두 입가에는 천을 두르고 있었다. 가게들은 이미 문이 닫혀 있거나, 문을 닫으려는 상인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어느 한 사람도 얼굴에 웃음을 띤 이가 없었다. 활기찼던 수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한껏 드리워져 있었다.

헬리아는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다가 몇몇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궁금해 가까이 다가가니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감사합니다.”

“정말 후작님과 2왕자님이 아니셨다면 큰일이 났을 겁니다.”

“아들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리아의 눈이 좁아졌다. 모두 2왕자와 아돌프 후작을 찬양하는 목소리뿐이었다. 클리드가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돌프 후작이 운영하는 치료소 같습니다.”

“흐음.”

후작이 2왕자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치료소를 지은 것을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임을 알았지만 시기가 좋았다.

“평판은 어때?”

“싼값에 질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어 평민들에게 인기입니다.”

“만만치 않은 늙은이야.”

헬리아는 아돌프 후작을 떠올리고 혀를 내둘렀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고개를 숙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거기다 해야 할 때는 확실히 하는 자였다. 2왕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 후작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눈빛을 가진 자는 누구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지.’

야망에 번뜩이던 후작의 눈빛. 헬리아는 자신의 상대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엘라드 상단의 치료소로 가자.”

우선 후작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돌아가는 사태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헬리아는 후작의 치료소에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이런 돌팔이들!

“너희가 이러고도 치료사냐!”

“퉤엣! 차라리 아돌프 후작님의 치료소로 가자고!”

엘라드 상단의 치료소에 거의 다 와갈 때쯤 때아닌 고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성을 내며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욕을 하며 나온 곳은 바로 엘라드 상단이 운영하는 치료소였다.

헬리아 일행은 서둘러 치료소로 다가갔다. 엘라드 상단에서 운영하는 치료소 앞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반절이 거의 욕을 하며 다시 되돌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엘라임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흠.”

헬리아는 가만히 욕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제가 담당자를 불러오겠습니다.”

클리드가 먼저 치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치료소를 담당하는 자는 호렌이라는 사십 대 남성이었다. 통통한 체구에 작달막한 키를 가진 호렌은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눈 밑에는 시커멓게 기미가 졌고, 안색은 푸르죽죽했다.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아, 안녕십니까. 호렌이라고 합니다.”

호렌은 엘라드 상단의 본점에서 나온 클리드 일행에 바짝 굳어 있었다. 다른 일행의 얼굴은 모르지만 클리드의 얼굴은 잘 알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은 그냥 본점 직원인가 싶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호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최근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피곤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후우, 수도에 전염병이 도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 수십 명이 찾아왔습니다.”

전염병에 걸렸으니 응당 약을 찾게 마련이다. 치료소에 사람이 붐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왜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느냐는 뒷말은 삼켰다. 이미 호렌이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후우…… 보셨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클리드의 질문에 호렌은 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아시다시피 전염병 같은 경우에는 포션으로 치료할 수 없습니다.”

포션의 효과 중 하나는 세포를 더욱 활발하게 움직여 자가 치료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포션이 전염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션이 체내의 전염병 바이러스도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제사가 있지 않습니까?”

치료소는 단순히 포션 상점이 아니다. 치료소 안에는 포션뿐만이 아니라 일반 약재로 치료를 하는 약제사와 치료사가 많았다.

“저희도 서둘러 치료약을 만들고 있지만…….”

호렌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헬리아는 읽어냈다.

“아직 만들지 못했군.”

“…….”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치료소에 와도 치료를 못 하니 욕을 하고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네. 아무래도 이전과 다른 형태의 전염병이라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호렌의 말에 헬리아는 순간 아까 보았던 후작의 치료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묻기 전에 먼저 그가 그에 대해 말을 꺼냈다.

“한데 문제는 다른 치료소에서 저희보다 빨리 치료약을 만든 탓에 환자들의 불만이 많다는 겁니다. 약이 없는 저희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만…….”

치료약이 있는 치료소와 없는 치료소. 사람들이 약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헬리아 일행은 곧장 치료소를 나왔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그 치료소에 가봐야겠어.”

“후작의 치료소 말입니까?”

“응.”

어떻게 후작이 치료약을 먼저 만들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가다간 엘라드 상단의 치료소 평판은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 없지.’

“가서 어떻게 하게?”

엘라임의 물음에 헬리아는 대답했다.

“치료약이 필요해.”

치료약을 분석하면 거꾸로 병이 어떤 것인지 조사할 수 있을뿐더러, 치료약에 든 성분을 알아내 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헬리아는 그 점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는 이뤄지지 못했다.

후작의 치료소에 길게 늘어진 줄 끝에 선 헬리아 일행은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그들의 차례가 돌아왔다. 치료소 안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이상한 약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헬리아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담당 직원인 듯 보이는 남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삼십 대에 흔한 갈색 머리의 담당 직원은 헬리아 일행을 보더니 작게 미간을 좁혔다. 탐탁치 않아하는 눈빛에 헬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기, 치료약을 살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리셔서…….”

한데 그 직원은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치료약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헬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치료소에서 치료약을 팔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치료약을 팔지 않는다고요?”

직원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근 환자가 급증한 탓에 약이 부족합니다. 현재 직접 방문한 환자분만을 대상으로 치료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직접 방문하셔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직접 방문해서 치료를 받는 건 가능해도, 약을 사가서는 안 된다? 헬리아는 묘한 위화감을 받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해서 한 번 더 물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아버지께서 걷기 힘드셔서.”

“죄송하지만 판매는 금지하고 있습니다.”

“…….”

딱딱한 직원은 그 말을 끝으로 냉큼 어디론가 사라졌다.

헬리아는 입매를 비틀었다.

‘약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헬리아는 주위를 살폈다. 치료소 곳곳에 무장한 이들로 경비를 세우고 있었다. 그만큼 약의 보안에 만전을 기한다는 것.

‘독식할 생각이군.’

전염병을 치료한다면 그들의 지지율은 더욱 올라갈 것이다. 더욱이 그들만 치료가 가능하다면 갈수록 상황은 그들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지지율을 더 중시하는 아돌프 후작의 행태에 헬리아는 조소를 지었다.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우선은.”

헬리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방도가 없었다.

“치료약을 빼올까?”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혹했지만 우선 일보 후퇴하기로 했다.

“클리드는 곧장 키안에게 정보를 의뢰해. 비싸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바가지를 된통 뒤집어쓰겠지만 그들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후작의 움직임도 연계해서 정보를 의뢰해.”

“아돌프 후작 말씀이신가요?”

“아무래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

전염병이 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치료약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자신들은 아직 치료약도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건 자존심 문제기도 했다. 그동안 치료소에 투자한 것이 있는데 겨우 신생 치료소에 밀린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 * *

“샨, 샨.”

론은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샨을 업고 뛰었다. 다리가 으스러질 정도로 아프고 무거웠지만 동생의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하자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샨.”

론은 샨을 불렀지만 샨은 대답하지 않았다. 론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렸다.

“샨, 샨!”

“으응.”

다행히 샨이 대답하자 론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듯했다.

“조금만 참아, 치료소에 가면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우웅, 형.”

“그러니까 참아야 해. 알았지?”

열다섯인 론은 비쩍 말라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허름한 옷은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겼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언제 씻었는지 피부는 온통 새카맸다. 고아에다가 빈민가에서 자란 론과 샨이다. 부모 없이 힘겹게 빌어먹고 살다가 샨이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샨을 치료할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던 론은 치료소 이야기를 접하고 서둘러 샨을 데리고 가는 중이다.

“……형, 얼마나 가야 해?”

“이제 다 왔어. 봐, 저기 보이지?”

“으응.”

론은 샨을 업은 채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들이 줄에 끼자 몇몇 사람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론의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을 수 있어.”

“응, 형.”

론의 주머니에는 샨을 위해 치료할 돈이 짤랑거리고 있었다. 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자신들의 차례가 왔다. 하지만 론과 샨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왜,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치료소를 빠져나가던 헬리아 일행은 한 어린 소년의 목소리에 그곳을 바라보았다. 꼬질꼬질한 옷에 얼굴은 새카만 때가 끼어 있었다. 대략 열서너 살 된 남자아이가 그보다 두세 살 어린 남동생을 업고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직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매몰차게 내쳤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여긴 너희 같은 놈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동생을 좀 살려 주세요. 너무 아파해요.”

남자아이는 축 쳐진 동생을 안고 울부짖었다. 안겨 있는 아이는 열이 펄펄 끓어 얼굴이 새빨갰다. 그러나 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막아 세웠다.

“썩 물러가거라! 네놈들 같은 버러지한테 줄 약이 남아도는 줄 아느냐!”

“도, 돈이라면 낼게요. 여, 여기 있어요. 제발 부탁해요. 동생이…….”

론은 직원의 말에 서둘러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지만 직원이 발로 그를 차버렸다.

“악!”

동전이 안쓰럽게 바닥을 굴러다녔다. 1실버. 빈민가의 고아가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직원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러운 놈들! 나한테 병을 옮길 생각이냐! 전염병을 너희 빈민가 놈들이 퍼뜨린 걸 누가 몰라!”

직원의 호통에 헬리아 일행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시선을 집중했다. 론은 사람들의 눈에 가득한 불쾌함을 눈치채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 저희는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꺼져라!”

직원의 발길질이 다시 한번 론에게 쇄도했다. 론은 속절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샤, 샨!”

그 덕에 동생 샨이 뒤로 넘어지자 론은 놀라 동생을 안았다.

“샨!”

“……아파, 형.”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는 이 하나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뭐야, 왜 저래?”

엘라임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들은 못 들어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클리드가 대답해 주었다.

“빈민가의 아이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엘라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관있는 게 현실이다. 빈민은 노예가 아니라 소속된 곳이 없다. 그렇다고 평민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평민에게는 세금이 부과되는데 그들은 가난하여 돈이 없는 자가 대부분이라 세금을 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도, 왕국법에 의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 어찌 보면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었다. 신분도 낮고 돈도 없는 자들. 그들이 빈민이었다.

후작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빈민가의 사람들은 전혀 쓸모없다는 건가?’

헬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치료소로 인해 후작과 조슈아의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평민이었다. 평민이라고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아니다. 군대를 이루는 병사, 땅을 일구는 농민,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이 모두 평민이다. 후작이 노리는 바는 바로 이들을 통해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전혀 쓸데없는 빈민가의 인간 따위는 당연히 제외된 것이다.

론이 울면서 애원했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동생을 살려 주세요.”

이곳에서 내쳐지면 동생을 구할 방법이 아예 없어져 버린다. 론이 직원의 발에 매달렸다.

“이놈이!

직원은 자신의 다리에 붙은 아이를 짜증 난다는 듯 차버렸다. 어른의 힘을 이길 리 만무한 아이는 벌러덩 땅바닥을 굴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직원을 붙들려 했지만 순간 돌멩이 하나가 그의 이마에 박혔다.

“아앗!”

돌멩이는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이윽고 수십 개가 되었다. 그것을 던진 이는 바로 치료소 앞에 줄을 선 평민들이었다.

“이 거지 놈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너희 같은 빈민가 놈들 때문에 내 어머니가 아픈 거라고!”

“너 같은 놈 때문에 약이 다 떨어지면 어쩔 거야!”

“꺼져라!”

“이 도둑놈!”

론은 동생에게 돌멩이가 날아오자 얼른 몸을 말아 동생을 끌어안았다. 작고 여린 몸에 수많은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악마라도 쫓아내려는 듯 비웃으며 그들을 몰아붙였다. 아이는 도망가지도 못 하고 그 돌멩이 세례를 고스란히 웅크린 채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지?”

돌멩이가 날아오는 사이로 헬리아가 걸어 들어갔다. 놀란 사람들은 돌팔매질을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멋모르고 던진 돌멩이가 헬리아의 안면에 돌진했다.

타악!

엘라임과 이안이 순식간에 그 돌멩이를 쳐 냈다. 헬리아는 뚜벅뚜벅 형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잔뜩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 그녀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변한 게 하나도 없군.’

형제의 모습을 보자 어린 날이 떠올라 불쾌했다. 고아라는 이유로 그녀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다. 그저 부모가 없는 것뿐인데.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피가 흐르고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그녀는 다른 사람이다. 그들은 말했다. 그녀의 존재는 자신들과 틀리다고. 다른 것이 아닌 틀린 존재라고. 형제를 보자 그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뭐, 뭐야?”

그녀의 눈빛에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헬리아의 금안이 번뜩였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이 아이들이 당신들에게 피해를 줬나?”

“…….”

모두들 멈칫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꼭 튀는 놈들이 있었다.

“그거야 이놈들 때문에 약이 없어지면…….”

헬리아는 그를 향해 시니컬하게 비웃었다.

“그거 이상한데? 치료도 못 하고 쫓겨난 것 같은데, 아닌가?”

“그, 그건…….”

애초에 치료도 받지 못한 자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약을 빼앗긴 사람처럼 악을 쓰고 어린 형제에게 돌 세례를 퍼부었다.

“웃기는군.”

헬리아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우스웠다.

“너희가 저 아이와 다르다고 생각하나 보지?”

사람들은 흠칫 뒷걸음질 쳤다. 헬리아의 기세는 일반 평민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

“신분이 낮아서, 가진 게 없어서? 그러니까 우스운 거야?”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쓰레기들.”

헬리아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한 노인의 허허 웃는 소리가 들렸다.

“허허, 처자가 말 하나 재밌게 하는구먼.”

헬리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검에 손을 대었다. 엘라임도 눈을 좁혔다. 흰 사제복을 입고 있는 노인은 잔뜩 주름진 얼굴을 보아 칠십 대 정도 되어 보였다. 인자한 얼굴엔 자비로운 미소가 번졌다.

“……누구십니까?”

노인은 싱긋 웃으며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사람들은 모두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저 떠도는 신관이라네. 요한이라고 불러주게. 이쪽은 내 조수 레오라고 하지.”

“레오라고 합니다.”

요한이라는 노인의 뒤로 거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에 근육이 터질 듯 건장한 남자였다. 그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요한은 헬리아를 한 번 보더니 쓰러져 누워 있는 론과 샨 형제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들의 상태를 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 많이 다친 모양이로구나.”

요한은 론과 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아앗!

그러자 그의 몸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론과 샨의 몸에 생긴 상처가 씻은 듯 사라졌다.

헬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신성력! 신관인 건가?’

요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성한 기운에 헬리아는 정말 그가 신관임을 인지했다.

론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열었다. 그러자 한 노인의 인자한 얼굴이 보였다.

“……누, 누구세요?”

“나는 요한이라고 한단다, 얘야.”

론은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게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옷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론은 왜 자신이 아프지 않은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분이 구해 주셨구나.’

론은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맙습니다.”

“……형.”

“샨!”

론이 샨의 음성에 뒤를 돌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죽을 듯 늘어져 있던 그가 반듯이 서 있는 것이다. 거기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지도 않고 생기가 돌았다. 론이 와락 샨을 끌어안았다.

“샨!”

“숨 막혀.”

샨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도 형을 마주 안았다. 론은 샨의 얼굴을 이곳저곳 살피며 물었다. 손안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괘, 괜찮은 거야?”

“응, 이상하게 안 아파.”

론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요한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샨도 형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요한이 론과 샨의 인사를 받고 몸을 돌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요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사람의 가치를 정하는 건 그들의 신분이 아닐세. 바로 그 사람이 지닌 됨됨이지. 그런데 당신은 저들보다 못해 보이는군.”

요한이 씨익 웃으며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뭐, 저 처자의 말을 빌리자면 쓰레기들이지.”

헬리아는 요한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웠다.

요한은 론과 샨 형제에게 다시 다가갔다.

“집이 어디에 있느냐?”

“예?”

론이 어리둥절해하자 요한이 짓궂게 혀를 찼다.

“머리는 다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런, 치료가 덜되었나?”

“아, 아닙니다. 저기 저희 집은…….”

“어서 안내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예?”

“은혜를 받았으면 응당 갚아야지.”

“아, 예.”

뻔뻔스럽지만 왠지 밉진 않았다. 헬리아는 요한과 형제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요한이 그녀를 붙잡았다.

“자네들은 안 오는 겐가?”

“예?”

요한은 허허 웃으며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이것도 인연인데 내가 받을 은혜를 좀 나눠주겠네.”

“굳이 주지 않아도…….”

돈 한 푼 없는 빈민가 꼬맹이들한테 뭘 받는 것이 웃기지 않는가. 헬리아는 이 노인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야 이 아이들도 마음 편하지 않겠나?”

요한이 론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리자 론이 얼른 대답했다.

“무, 물론이에요.”

“자, 봤지?”

엎드려 절 받는 꼴이지만 헬리아는 노인에 대해서 호기심이 들었다. 아까 보여준 신성력도 일반 신관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잘 생각했네. 그보다 이름이 뭔가?”

“……리아라고 합니다.”

“리아라. 좋은 애칭이네.”

순간 헬리아와 이안의 눈이 변했다. 헬리아는 한 번도 애칭이라고 한 적이 없었다. 대개 리아라는 말을 하면 이름으로 알아듣지 애칭으로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헬리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을 제외하곤.

요한은 론과 샨을 데리고 앞장섰다. 이안은 그들을 지켜보다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수상한 자입니다. 우선 알아본 후에…….”

“가보지.”

헬리아는 요한의 뒤를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키안이 자신을 보는 듯한 눈빛과 닮아 있었다.

론과 샨을 따라 일행은 그들이 사는 빈민가로 걸어갔다. 근처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빈민가에 접어들자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이전까지 주변의 집들이 튼튼한 돌로 지어졌다면, 빈민가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온통 나무 판때기로 지어진 집이 즐비했다.

그리고 상황은 더 심각했다. 바닥에는 시체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고 시체에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었다. 아이들의 비명, 죽어가는 사람의 절규. 아비규환이었다. 전염병이 이 정도로 퍼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밖에서는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료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이들이 죽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빈민가의 사람들.

헬리아는 순간 역하게 맡아지는 시체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도, 코를 막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참혹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휘적휘적 걸어가는 요한의 등을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을 아는 것 같은 사람.

‘얼굴이라도 바꿔야 하나.’

도대체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얼굴이 팔린 것인지. 헬리아는 낮게 혀를 차고 묵묵히 론과 샨을 따라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론은 집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인 건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저기가 저희 집이에요.”

대충 바닥 위에 나무판자를 얹어 둔 것이 다였다. 개집도 이것보다 좋을 것이다. 요한은 론의 집을 보면서 허허 웃었다.

“이런이런, 이거야 잘 곳이 없구먼.”

론은 죄송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구해 준 은인에게 아무런 대접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창피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네. 흐음, 아무래도 이곳에선 자기 힘들 것 같네.”

요한이 뒤에 있던 레오에게 손짓했다. 레오는 우직하게 요한에게 다가갔다. 마치 거대한 충견 같았다.

“레오.”

“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레오는 론의 개집보다 못한 집으로 가더니 판자를 들춰 버렸다.

“어엇!”

“저, 저기!”

“걱정 말게.”

론과 샨은 경악했지만 이내 경악을 넘어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척척척! 땅땅땅!

레오는 배낭에서 망치와 칼을 꺼내더니 근처에서 나무판자를 찾아와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곤 이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한 채의 제법 그럴싸한 집이 완성되었다. 론과 샨은 물론 헬리아 일행도 그의 과감한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요한은 집을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이만하면 잘 정도는 되겠군.”

“송구합니다.”

레오는 좀 더 좋은 집을 대령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정도면 그럭저럭 밤이슬은 피하겠군.”

헬리아는 그 광경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본인 입으로 신관이라 말하긴 했지만, 보통 신관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요한의 조수라는 그 레오라는 자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자, 안으로 들어가세. 집주인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 법이네.”

요한이 웃으며 론과 샨을 안으로 이끌었다. 주인은 요한 같지만 말이다.

헬리아 일행은 요한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집 안은 별거 없었다.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모를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그것도 론과 샨은 놀랐다. 그런 건 자신들의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의자에 앉더니 론과 샨에게 말했다.

“차를 끓여 줄 수 있겠나?”

“차요?”

“그게 뭐예요?”

“흠, 그렇군.”

차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론과 샨이 고개를 갸웃하자 요한이 쓰게 웃으며 품에서 말린 잎을 건네주었다.

“자, 받거라.”

“이건 잎인데요?”

론이 요한이 준 잎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뜨거운 물이 있으면 그걸 담아서 오거라.”

“그거면 되는 거예요?”

“그래.”

론은 왜 말린 입을 물에 타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샨과 함께 나갔다. 요한은 론과 샨이 사라지자 헬리아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자, 누추하지만 자네들도 앉게. 곧 아이가 차를 내올 걸세. 꽤 좋은 차야.”

집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에 헬리아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엘라임과 이안은 뒤에 서 있었지만 요한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조수라는 레오도 서 있긴 마찬가지였다.

요한이 엘라임과 이안을 힐끗 보다가 다시 헬리아를 보았다. 그의 눈은 헬리아의 이모저모를 보는 듯 오랫동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헬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신관이라 하셨는데 어디서 오셨나요? 왕국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요한에게는 특유의 말투가 있었는데 그건 아르센 왕국의 말투가 아니었다.

“호오, 그걸 알아맞히다니 눈썰미가 제법이군. 아니, 귀가 좋은 건가?”

요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타나 성국이라고 들어보았나?”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타나 성국은 나라 전체가 태양의 신 헤리온을 모시는 신전으로 모든 헤리온 신전의 근본이며 기초라 불리는 곳이다. 또한 레칸 대륙에서 가장 작은 영토를 지닌 독립 국가였다.

헤리온 신을 믿는 신도의 수를 전부 합하면 제국의 인구에 버금간다고 할 정도로 그 세력이 거대하기 때문에 주변국 중 타나 성국을 무시하는 나라는 없었다. 또한 그들이 지닌 무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군사력으로 보아도 결코 약소국이 아니었다.

타나 성국은 신을 믿는 자가 일생에 반드시 가야 하는 성지순례지의 일 순위다. 신관은 많지만 성국의 신관은 매우 드물다.

물론 헬리아가 놀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타나 성국은 페르시아 제국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페르시아 남동쪽에 위치한 아르센 왕국과는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이다.

헬리아의 놀람을 알아챈 요한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수행차 이곳저곳을 들르다가 마침 이곳에 오랜 친우가 있어서 왔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론과 샨이 난감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저기 죄송해요.”

누군가 론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를 안은 아낙이었다. 아낙의 얼굴은 애처로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녀가 안은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숨이 끊어질 듯 미약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치, 치료사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아이를…….”

아낙의 땟국물 낀 얼굴에 빗물 같은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죄, 죄송해요. 샨의 모습을 보고 묻기에.”

론은 고개를 숙이고 어찌할 바 몰라 했다. 뜨거운 물을 얻으러 밖으로 나갔다가 샨이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이웃 아줌마가 본 것이다.

요한은 일어나 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염려치 말아라. 그건 죄가 아니다.”

요한은 아낙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낙은 초조하게 요한과 아이를 보았다. 요한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파아앗!

그러자 새하얀 빛이 퍼져 나가더니 아이의 몸에 스며들었다. 미약했던 아이의 숨이 돌아왔고 아이는 우렁차게 울었다.

“으앙으앙!”

“아, 아가!”

아낙은 얼른 요한에게서 아이를 받아 아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뜨거웠던 아이의 체온이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걱정 말게.”

“정말 감사합니다.”

아낙은 여러 차례 고개를 숙이고 아이와 함께 돌아갔다. 요한은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쯧쯧,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전염병이 수도 전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전염병이라니?”

오히려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고개를 저었다.

“전염병이 아니네. 이건 독이네.”

헬리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독이요?”

요한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아까 그 꼬마도 그렇고 이 어미의 아이도 그렇고. 쯧쯧, 꽤 험한 세상일세.”

독이라니? 그럼 전염병이 아니란 말인가?

“전염병이 아닙니까?”

요한은 헬리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전염병이라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독과 전염병을 구분 못 할 리 없네.”

“독이라니…….”

헬리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 * *

이른 아침, 국왕을 비롯해 왕국의 대신들이 대전에 모여 있었다. 플로렌스 공작, 하이든 후작, 그리고 아돌프 후작이 왕좌를 제외한 가장 상석에 착석해 있었다. 이들이 이 시간에 모인 이유는 바로 수도에 도는 전염병 때문이었다.

빈센트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안색은 참혹한 소식에 어두워져 있었다.

“경들도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오. 오늘만 해도 수백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소. 이대로 방치해 두어선 안 될 일이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플로렌스 공작이 화답했다.

“전염병의 원인은 알아내었소?”

빈센트의 물음에 하이든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조사관을 파견했으니 곧 그 원인을 알아낼 것입니다.”

“전염병의 진행 상황은 어떻소?”

이번엔 아돌프 후작이 입을 열었다.

“현재 수도 외곽을 중심으로 전염병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추측한 결과 전염병은 빈민가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돌프 후작의 말에 빈센트의 표정이 변했다.

“빈민가?”

“예,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본 결과 이미 빈민가 대부분의 사람이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신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염병을 초기에 잡는 방법은 우선 전염병에 걸린 자들을 격리하는 데 있었다.

후작의 말에 대신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허허,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서둘러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몇몇 대신이 맞장구를 쳤다.

“…….”

빈센트는 침음을 삼켰다. 쉬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후작의 치료소가 떠올라 빈센트는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이 치료소를 하고 있다고 들었소.”

“송구스럽지만 작게나마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 일입니다.”

그 번지르르한 말에 빈센트는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가 2왕자의 명분을 위해서 치료소를 설립한 것을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는 꼴이 우스웠다. 물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만큼 빈센트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대의 치료소에서 전염병에 걸린 백성들을 치료하고 있다고 들었소.”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후작의 겸양에 몇몇 후작파 대신이 말을 거들었다.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아돌프 후작께서 선견지명으로 지으신 치료소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거리에 후작님과 2왕자님의 선행이 자자합니다.”

눈치 없는 한 사람의 말에 후작은 잠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정도는 보여줘야 후에 빈센트도 뭐라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후작파와 달리 플로렌스 공작과 하이든 후작은 심기가 좋지 못했다.

‘선견지명, 웃기는군.’

‘그저 생색내기인 주제에.’

공작과 하이든 후작은 속으로 갖은 욕을 해대면서도 입으로 후작의 노고를 치하했다.

“참으로 우연히 설립한 치료소 덕분에 피해가 줄었네.”

“암. 시기가 좋았네.”

하지만 그 안에 비꼬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후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빈센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빈민가에 투입할 수 있는 치료약은 얼마나 되는가?”

후작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빈민가의 사람들을 치료한다? 후작은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약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빈민들이다. 차라리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평민을 후작과 2왕자의 이름으로 치료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

후작은 난색을 표했다.

“전하, 송구하오나 치료약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평민들에게 쓸 약도 모자랄 판에 빈민가에 약을 쓰는 것은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빈센트는 후작의 의도를 읽었지만 그가 약이 모자란다고 하니 뭐라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현재 왕실에서도 서둘러 치료제를 개발하고는 있지만 아직 완성품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약을 가진 건 오로지 후작뿐이었다. 빈센트의 표정이 흐려지자 후작이 쇄기를 박았다.

“송구합니다. 빈민가에 약을 쓰기보단 더욱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 도리인 줄 압니다.”

그의 의견에 몇몇 대신이 동조했다.

“빈민가를 봉쇄해야 합니다.”

“빈민가를 봉쇄해 더 많은 피해를 막아야 합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올 경우 더 큰 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귀족들이 하나같이 빈민가의 봉쇄를 논했다. 아돌프 후작에 반하는 플로렌스 공작과 하이든 후작도 그 의견에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손쓸 도리 없이 퍼질 경우엔 봉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후작이 입을 열었다.

“빈민가의 봉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후작은 국왕을 직시했다.

“빈민가를 봉쇄하여 불에 태우는 것이 현명한 일이옵니다.”

“…….”

빈센트는 침묵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은 최소 만 명이다. 그 사람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대신들은 강력히 불태울 것을 주장했다.

“전하, 지금은 소를 희생해 대를 지키셔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수도 내에 있는 백성 전체가 전염병으로 고통받게 될 겁니다.”

“현재 빈민가는 이미 치료하기 늦었다고 합니다.”

“봉쇄해 불태워야 합니다.”

빈센트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입을 닫고 그를 바라보았다. 빈센트가 잠시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빈민가에 사는 이들이라 하여 아르센 왕국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네. 불태우는 것은 허할 수 없네.”

“전하!”

대신들이 반발했지만 국왕은 그들을 잠재웠다.

“그만! 봉쇄는 허락하겠네. 하지만 결코 소각은 허락할 수 없네. 경들은 그 외에 방도를 찾아보라.”

국왕의 결정에 대신들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아돌프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혀를 찰 뿐이었다.

* * *

촤악촤악.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방울들이 마른 잎사귀를 촉촉이 적셨다. 숲을 닮은 녹색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키안은 휘파람을 불며 화초를 정성스럽게 가꿨다. 그의 손이 닿은 화초들은 생기가 가득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안.”

“들어오세요.”

잭이 안으로 들어왔다. 은발을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외눈 안경을 쓰고 있는 잭은 그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키안은 분무기를 내려놓고 서류를 받아 들었다. 서류를 읽어가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위적으로 독을 뿌린 것 같다.”

현재 돌고 있는 전염병에 대해 조사한 베라는 그 전염병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질병이 아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독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 잭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웬만해서는 알아내기 힘들더군. 마법사는 물론 일반 신관들도 조사하는 데 애를 먹었어.”

그나마 고위 신관을 통해 전염병에 대해 조사한 결과 전염병이 강력한 독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위 신관이라…….”

키안은 잭의 말에서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좁혔다.

“신관이 나서야 될 일이었습니까?”

“그자들의 짓인 것 같다.”

“…….”

키안의 눈에 순간 살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어느새 평온한 녹안으로 돌아왔다.

“과연. 드디어 꼬리를 밟은 건가요?”

키안은 후후 웃으며 눈매를 휘었지만, 잭은 그것이 웃음이 아님을 알았다.

“누구인지는 알아냈습니까?”

잭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누군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잭이 헬리아가 의뢰한 정보를 키안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아돌프 후작과 연계해서 전염병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었다.

키안이 눈을 반짝였다.

“감이 좋은 사람이군요.”

“꼬리를 밟았으니 몸통을 찾는 건 시간문제다.”

“후후, 이거 기대가 되는군요.”

“그보다 정보는 어디까지 건넬까?”

잭이 톡톡 서류를 두드렸다. 이 안에는 전염병과 후작에 대한 것 말고도 그자들에 대해서도 들어 있었다.

키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제외하고 보내세요. 아직 그녀가 알 때가 아닙니다.”

“알겠다.”

“계속 조사해 주세요. 아마 그녀 주위에 있다 보면 몸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잭은 키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분이 아르센 왕국에 오셨다.”

“그분이라뇨?”

키안이 눈을 찡그리다 이내 누군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호오, 이거야 언제 볼까 싶었는데.”

키안은 턱을 쓰다듬다가 잭에게 말했다.

“워낙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라 또 어디로 튈지 모르겠군요. 잭이 직접 마중 나가주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가는 길에 이것도 전해 주지.”

잭이 서류를 챙겨 들고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키안은 웃음기를 지우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는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던 검은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새카만 펜던트에 새긴 문양은 램프의 빛에 비쳐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찾았군.”

키안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의 손에서 검은 펜던트가 흔들거렸다.

* * *

“독이 확실합니까?”

헬리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건 전염병이 아니네.”

“…….”

다시 한번 독이라는 요한의 말에 헬리아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전염병이 아닌 독. 무엇을 위해 독을 뿌린 것일까?

“……!”

순간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가 풀렸다.

‘이번 사태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자.’

헬리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돌프 후작.’

헬리아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퍼즐이 모두 모였다. 아돌프 후작은 2왕자를 왕위에 올릴 명분이 필요했고, 어떤 성과가 필요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 하지만 헬리아가 턱밑에 칼을 겨누고 있는 상태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

“하, 치료소를 지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독을 전염병으로 둔갑시켜 사람을 감염시키고 자신들이 세운 치료소를 통해 그들을 치료했다. 그동안 온갖 칭송은 후작과 2왕자를 향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게 한 이가 그들인지도 모르고 열광했다.

헬리아는 이를 물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돌프 후작이 범인이라는 정황은 있지만, 증거가 없었다.

‘증거를 찾아야 해.’

독으로 전염되었다면 분명 진원지가 있을 것이다. 지금도 수십, 수백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먼저였다.

헬리아가 요한에게 물었다.

“혹시 치료약을 만드실 수 있습니까?”

요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뜸을 들였다.

“가능은 하네. 하지만 시간이 걸릴 걸세.”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후작의 야망으로 인해 덧없이 죽어갈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과감하고 빠른 결단력. 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순식간에 범인을 알아채고 우선 해야 할 일을 정한다.

‘후후.’

요한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돈과 사람. 그러면 최대한 빨리 약을 만들 수 있네.”

요한의 대답에 헬리아의 입꼬리가 싹 말려 올라갔다.

“돈과 사람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치료약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많을수록 빠를 걸세.”

“좋습니다. 돈과 사람은 제가 보내드리지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요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법 돈이 많은가 보구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의 물음에 헬리아는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죠?”

“그저 궁금해서 그렇다네. 돈도 많은 처자가, 거기다 신분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은 그대가 어째서 이런 곳에 돈을 쓰려 하느냐는 말일세.”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거짓말도 잘하는구려.”

“…….”

“내 처자를 닮은 사람을 한 분 알고 있는데, 거짓말할 때의 표정이 완전히 판박이라네.”

헬리아의 눈매가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노인은 자신을 알고 있다.

요한은 그녀의 표정이 싹 바뀌자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웬만한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할 테니.”

요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기야, 사람을 살리는 데 이유가 있든 없든 사람을 살리면 그만인 것을.”

“…….”

헬리아는 작게 미간을 좁히고 몸을 일으켰다. 요한의 말에 헬리아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이 하는 일도 후작이 하는 일과 어찌 보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다.’

최소한 자신은 자신이 다치면 다쳤지 누군가를 죽이면서까지 목적을 이루진 않는다.

“그럼 이만.”

헬리아가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은발에 외눈 안경을 쓴 자. 바로 베라의 잭이었다.

“당신이 여긴 왜?”

헬리아는 잭이 밖에 나와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등장에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잭은 여유롭게 그녀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지?”

잭은 어깨를 으쓱이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의뢰한 정보를 건네주러 왔다.”

“당신이 직접?”

서류를 받아 든 헬리아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잭의 위치는 마스터 키안에 못지않았다. 그런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

“마침 가는 길에.”

어디를 가는 길이기에 직접 온 것인지 모르지만 헬리아는 이내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건네준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서류를 읽어가는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다.

“정말 독이었어.”

“이미 알고 있었나?”

잭의 눈에 살짝 이채가 깃들었다.

“어느 신관의 도움을 받았어.”

“신관이라. 그럼 맞게 찾아왔군.”

뒷말은 작은 소리라 헬리아는 듣지 못했다. 그보다 서류에 적힌 내용에 더 집중한 탓이었다.

“고위 신관 정도는 되어야 발견할 수 있는 독이라.”

뭔가 특수한 처리를 한 것일까. 정보가 사실이라면 치료사는 물론 마법사들이 독을 전염병으로 오인할 만했다.

‘역시 고위 신관이었어.’

요한의 그 신성력을 떠올린 헬리아는 그가 고위 신관임을 확신했다.

“독의 진원지는 찾지 못한 건가?”

“원인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수소문해 본 결과 이레 전에 빈민가에 위치한 지하 하수도에서 이상한 자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지하 하수도?”

수도 외곽에 위치해 있는 빈민가의 땅 아래에는 수도에서 사용하는 하수구가 외부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부는 외곽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해 있다. 그 탓에 악취가 심해 일반 평민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빈민가 사람들이 그곳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이다.

“맨 처음 전염병, 아니, 독에 중독된 자가 발견된 곳도 그곳이다.”

“지하 하수도라…….”

뭔가 심히 냄새가 났다.

“조사를 의뢰하지.”

“미안하지만, 그건 거절한다.”

잭의 거절에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우리는 더러움에 약하다. 이 점은 양해하길 바란다.”

잭의 변명에 헬리아는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이해했다. 베라는 대개 이종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일반인들에 비해 감각기관이 발달해 있었다. 특히 후각에 발달한 자가 악취가 가득한 곳에 간다면 아마 냄새에 질식사할 것이다. 거기에 엘프 같은 경우에는 깨끗한 곳에서 사는 종족이기에 기절할 공산이 컸다.

헬리아는 아쉬웠지만 상대가 거절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직접 조사해야 하는 건가.’

그녀도 하수구를 조사하는 것은 결코 내키는 일이 아니었지만,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심하라고.”

잭은 그녀가 마음을 굳힌 것을 알고 가벼이 격려해 주었다.

* * *

잭은 헬리아 일행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론과 샨의 집으로 들어갔다. 요한은 잭을 보더니 웃으며 맞이했다.

“자네 왔는가?”

“언제 오신 겁니까?”

잭은 요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요한은 론과 샨이 가져온 차를 음미하다 말문을 뗐다.

“오늘. 그러다가 재밌는 처자를 만났지.”

요한은 헬리아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정말 닮았더군.”

키안도 종종 헬리아를 보면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들르실 겁니까?”

“그러려고 왔네.”

순간 요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헬리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오늘 사람을 치료하는데 그 기운을 발견했네.”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요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곳으로 온 게 다행이군.”

그러다 물었다.

“알고 있는 건가?”

“아직입니다.”

“하긴 모르는 눈치였어. 알면 다른 반응이 나왔겠지.”

요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키안을 만나러 가야겠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것이니까.”

* * *

헬리아 일행은 곧장 하수구가 있는 성의 외곽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 내내 그들은 독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해야 했다. 헬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저들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것이다. 누군가의 야망에 의해.

아이의 우는 소리, 살려 달라 울부짖는 괴성이 빈민가 안에 가득했다. 일행이 하수구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비명은 줄어들었다. 길거리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냄새가 심해.”

엘라임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소매로 코를 막았다. 정령인 그에게 독과 시체 썩는 냄새는 참기 힘들었다. 물로 썩은 내를 날려 버렸지만 가득 메운 냄새를 완전히 없애기엔 무리였다.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이건 다른 이들한테 맡기고. 난 더러운 건 질색이라고.”

한번 찌푸린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엘라임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나 헬리아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럼 가.”

“치.”

그 매정한 말에 엘라임은 입을 삐뚜름하게 치켜 올리곤 터덜터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도 외곽에 다다르자 커다란 하수구 입구가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윽.”

하수구 입구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참을 수 없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꼭 여길 들어가야겠어?”

엘라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코를 틀어막고 눈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헬리아는 오히려 이 악취로 인해 이상한 점을 찾았다. 그녀가 살았던 지구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르센 왕국의 하수 시설은 잘되어 있었다. 이런 악취가 나는 건 뭔가 이상했다. 그 말은 하수구 안에 고약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저 내려가.”

“쳇. 레이디 퍼스트란 말도 있잖아?”

그러나 헬리아에게 씨알도 안 먹힐 말. 엘라임을 안으로 밀어 넣고 그녀도 뒤를 따랐다. 이안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똑- 똑-

고요한 적막 속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자 주변이 얼추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라이트.”

헬리아가 마법으로 빛 구슬을 불러내자 주변이 환해졌다. 빛이 비치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쥐와 벌레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윽, 썩은 내.”

엘라임은 코를 찡그렸다. 하수구 안은 밖보다 더 심하게 악취가 났다. 헬리아 일행은 하수도를 따라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간혹 발에 밟히는 벌레 소리에 헬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중앙에 흐르는 물로 가까이 다가가 빛을 비췄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물뿐이었다.

“엘라임.”

“나도 더러운 건 싫다고.”

하지만 헬리아가 빤히 쳐다보자 엘라임은 툴툴거리며 새카만 물을 들어 올려 독성분이 있나 확인했다.

“오물 덩어리로군. 하지만 독은 없어.”

엘라임은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얼른 물을 쳐 냈다. 그러자 떠올랐던 물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물이 문제가 아닌가…….”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시체가 있습니다.”

이안이 무엇을 보았는지 어디론가 걸어갔다. 헬리아는 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빛을 보냈다.

“어린아이?”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시체가 있었다. 심하게 부패하였는지 몸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고 구더기가 들끓었다.

“이곳에 왜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의 시체를 살피던 헬리아는 문득 그 아이의 팔에 이상한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원체 다른 곳에도 상처가 심했지만, 팔 부위의 자국만 유독 크게 도드라져 있었다. 무엇에 물린 것처럼. 이빨의 모양으로 봐서는 쥐였다.

“이것 좀 봐.”

엘라임이 무엇을 찾았는지 헬리아를 불렀다.

“철창?”

근처에서 굴러다니는 철창은 무언가를 넣어두었던 것 같았다. 철창은 사과 상자 정도의 크기였는데 완전히 우그러져 있었다.

어린아이와 철창.

“도대체 뭐지?”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으로 더 들어가 봐야겠어.”

헬리아 일행은 좀 더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 쥐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찍찍!

쥐들은 헬리아의 빛 구슬에 반응하여 몸을 움직였다.

“이게 도대체 뭐야?”

보통의 회색빛이 도는 쥐가 아니었다. 몸 크기가 어른 개만 했고, 그 색 또한 녹색이었다.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쥐가 흉성을 드러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쥐가 헬리아 일행을 덮쳤다.

엘라임은 그런 쥐 떼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젠장, 이런 데 오는 게 아니라고!”

엘라임이 물보라를 일으켰다. 하지만 물보라는 기존에 있던 하수구의 새카만 물과 섞여 더러운 물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으악!”

엘라임은 더러운 것을 못 참겠다는 듯 공격을 멈췄다.

“이런 바보!”

움찔했던 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기가 개만 한 놈들이었다. 거기다 이빨은 어찌나 큰지 물리면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빨? 쥐?’

그때 헬리아는 아까 죽은 어린아이의 시체가 떠올랐다.

“피해!”

그러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쥐들이 몸을 날려 헬리아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끼이익!”

이안의 검이 쥐의 몸통을 갈랐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한 마리를 죽여도 또 한 마리가 나오고, 또 나왔다.

“이대론 끝이 없겠어!”

이안이 검으로 쥐들을 죽여 나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파이어볼!”

헬리아가 파이어볼을 시전하자 그제야 쥐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으악! 조심하라고!”

그러나 공격이 너무 컸다. 쥐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곳은 지하도였다. 거기다 굉장히 낡아서 헬리아의 마법 공격 한 번에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헬리아가 뒤로 물러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어느새 뒤에도 쥐가 가득 차 있었다. 쥐를 지나치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헬리아가 외쳤다.

“엘라임! 물을 뿌려!”

“뭘 어떻게 하게?”

“얼른!”

엘라임이 쥐들에게 물을 뿌려대자 헬리아는 아이스 마법을 펼쳤다. 물에 젖은 쥐들은 순식간에 얼음에 갇혀 버렸다. 그제야 사태가 진정이 되었다.

똑- 똑-

하수도에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자칫 하수구에서 쥐한테 물려 죽을 뻔했다.

“하아, 대체 뭐야?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나?”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얼음에 갇힌 쥐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일반 쥐보다 더 큰 몸집, 거기다 녹색 눈동자.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키메라.”

이안과 엘라임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군가에 의해 변이된 생물체. 헬리아는 쥐를 보고 키메라를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아돌프 후작!’

헬리아의 눈이 새파란 안광을 뿜어냈다.

* * *

“모두 봉쇄해라!”

한 무리의 병사가 빈민가가 위치한 수도 외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빈민가 사람들은 병사들을 보자 얼른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빈민가에 속해 있는 이 중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자도 많았기 때문에 그저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빈민가 주변에 병사들이 일제히 펜스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빈민가 사람들은 병사들의 조치에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불안한 눈으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 봉쇄했습니다.”

병사들의 보고를 받은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도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해라!”

“옛!”

지휘관은 다른 곳도 제대로 봉쇄가 되었는지 감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정해진 구역에서 펜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면으로 입가를 가리고 빈민가를 주시했다.

그때 기사로 보이는 이가 다가왔다. 투구까지 얼굴에 쓰고 중무장한 이였다. 그가 다가오자 병사들은 예를 차렸다.

“빈민가는 모두 봉쇄했나?”

“아, 예.”

그 기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느 병사도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아르센 왕국의 기사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지 감히 물어볼 생각을 못 했다.

“빈민가 안으로 횃불을 집어 던져라!”

“예?”

병사들은 기사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불을 지르라는 말씀이십니까?”

빈민가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봉쇄하고 불을 지르면 그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병사들이 우물쭈물하자 기사가 노성을 질렀다.

“명령 못 들었나! 횃불을 던지라고 하지 않았나!”

“하, 하지만 사람들이…….”

퍼억!

기사가 입을 연 병사를 발로 찼다.

“왕명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해!”

“아,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후다닥 일어나 횃불에 불을 붙이고 빈민가 안으로 불을 집어 던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피어오른 불 속에 휙 집어 던졌다. 그러자 불길은 더욱 거세게 화르륵 타올랐다. 붉은 불이 피어올랐고, 검은 연기가 빈민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큭큭, 잘 가라고.”

투구 밑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르륵!

빈민가의 하늘 위로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기사는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다.

* * *

찍찍! 찍찍!

바닥은 질척거렸고, 캄캄한 하수구에는 불쾌한 쥐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작은 눈동자에선 흉흉한 살기를 뿜어냈고, 팔뚝만 한 몸집은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쿵쿵 울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엘라임은 찍찍거리는 쥐 소리에 눈을 찌푸린 채 지긋지긋한 눈으로 쥐들을 노려보았다. 어찌나 그 수가 많은지 높이 삼 미터에 폭은 오 미터가 족히 넘는 제법 큰 하수구가 쥐들로 물 샐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아예 빈 벽이 안 보일 정도였다.

“투덜대지 말고 공격이나 해!”

손을 놓고 투덜거리던 엘라임을 향해 헬리아가 한 소리 했다. 그녀도 그 못지않게 지금의 상황에 불쾌감을 느낀 상태였다.

‘수가 너무 많아.’

헬리아는 징글징글하다는 눈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쥐들을 향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쥐들의 공격은 단조롭기 때문에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큰 몸집에 비해 움직임이 빠른데다 한 번이라도 그들의 날카로운 앞니에 물린다면 전염병, 아니, 독에 중독될 위험이 컸다.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아야 했기에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쳇.”

엘라임은 헬리아의 다그침에 어쩔 수 없이 쥐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무려 정령왕인 자신이 하수구에 처박혀 쥐새끼들이나 처리하고 있는 현실이 비참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헬리아가 있는데.

엘라임이 쥐들을 향해 물을 퍼부으면 헬리아가 아이스 마법으로 쥐들을 얼렸다. 그리고 단단히 얼어붙은 쥐들을 이안이 검으로 산산조각을 냈다. 번거로웠지만, 좁은 하수구에서 화염 마법 같은 공격력이 크고 범위가 넓은 마법을 썼다간 하수구가 통째로 무너질 것이다.

헬리아와 엘라임, 이안은 고루 삼박자를 갖추며 쥐들을 처리해 나갔다. 다만 간신히 눈앞의 쥐들을 처리하면 죽은 쥐만큼의 쥐들이 또다시 나타나 헬리아 일행을 향해 녹색 눈동자를 빛낸다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

헬리아는 쥐들을 얼려 버리며 눈을 좁혔다. 괜히 엘라임이 투덜거린 것이 아니었다.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이안이 검으로 쥐들을 베어내서 말했다. 헬리아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지금 상태론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후퇴하자.”

어차피 이곳에 온 이유는 전염원을 찾으려는 것일 뿐, 자신들이 쥐를 전부 죽일 필요는 없었다. 아니, 지금 인원으로 이 쥐들을 전부 처리하는 건 무리였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헬리아 일행의 기세가 주춤하자 쥐들이 더욱 흉성을 드러내며 그들을 막은 것이다. 퇴로까지 막고 사방으로 일행을 포위한 쥐들. 헬리아는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후퇴하는 일도 결국 쥐들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헬리아!”

휘익!

순간 상념에 빠진 그녀 앞으로 쥐 한 마리가 이빨을 들이밀며 튀어 올라왔다.

“젠장!”

헬리아가 실드를 펼칠 틈도 없이 쥐에게 빈틈을 내주고 말았다.

‘쥐한테 물려 죽고 싶진 않다고!’

“크윽!”

“엘라임!”

찰나의 순간 엘라임이 헬리아를 품에 안고 쥐를 막았다. 문제는 공격을 할 틈도 없어 쥐의 이빨에 그의 팔을 내주고 만 것이다. 엘라임이 그의 팔뚝에 이를 박아 넣은 쥐를 거칠게 떨쳐 냈다.

“괜…….”

“이 바보야! 넋을 놓으면 어떻게 해!”

엘라임이 화난 표정으로 헬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를 향해 뛰어든 쥐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엘라임은 자신의 팔뚝을 돌아볼 생각조차 못 하고 헬리아가 다치지 않았나 살폈다.

“후우…….”

다행히 그가 막은 덕분에 헬리아는 다치지 않았다. 엘라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거야?”

헬리아는 그의 팔뚝에 난 상처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엘라임은 팔을 한 번 문지르더니 상처를 치유했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쥐한테 물리는 정령왕이라니.”

두고두고 놀림을 받을 거야, 라고 엘라임은 어이없는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촤악!

그때, 이안의 검이 두 사람에게 달려든 쥐를 처리했다.

“그만 공격부터 하시죠.”

이안이 조금 불만스런 표정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는지 가쁘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헬리아와 엘라임이 원거리 공격형인 것과 달리 이안은 검을 쓰는 근거리 공격형이었다. 검을 쓰는 만큼 더 가까이 쥐들에게 다가가야 했고, 그만큼 움직일 때 체력 소비도 컸다. 물론 이안은 결코 지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검은 눈을 치켜뜨고 쥐들을 처리해 나갔다.

세 사람의 노력 덕분인지 매섭게 공격을 퍼붓던 쥐의 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끝인가?”

엘라임이 점점 줄어드는 쥐를 보고 말했다. 하지만 헬리아는 방심하지 않았다.

“후퇴하실 겁니까?”

이안이 공격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가 상황을 알리고 지원군을 불러 처리하는 게 더 나았다.

똑- 똑-

시끄럽게 울어대던 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들리는 것은 나지막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뿐. 사위가 조용해지자 헬리아는 후퇴를 결정했다.

“돌아가자.”

독의 진원지를 밝혀냈으니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그보다 팔은 괜찮은 거지?”

헬리아가 걱정 어린 눈으로 엘라임을 팔을 바라봤다. 상처는 깨끗이 나아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쥐는 평범한 쥐가 아니라 사람을 중독시키는 놈들이다.

“뭐, 이 정도야. 상처도 다 나았고.”

엘라임은 코끝을 한 번 긁고는 깨끗한 팔뚝을 보여주었다. 상처는 이미 온데간데없었고 옷에 묻은 피만이 상처가 났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헬리아가 자신을 걱정해 주자 엘라임은 조금 머쓱한지 이마를 긁적였다.

“조심해. 아무리 너라도 지금 몸으론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알았어. 알았어.”

엘라임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녀의 머리를 흩뜨렸다. 매사 냉정한 헬리아였지만, 엘라임은 그녀가 누구보다 남을 걱정할 줄 아는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음 그녀의 말에 그는 그 생각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병 옮기지 말고.”

“이씨!”

엘라임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은근 헬리아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제법 되었다.

‘언제 저기로 간 거야?’

거기다 시커먼 검둥이 녀석도 좀 전까진 손에 닿는 거리에 있었는데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멀찌감치 자신의 곁에서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나는 전염 안 된다고!”

“뭐, 그러시겠지.”

헬리아가 어깨를 으쓱하자 엘라임은 분이 터졌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서 돌아가자.”

헬리아는 바닥에 죽은 쥐를 가져가기 위해 주머니를 꺼냈다. 독의 증거는 물론 치료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

“이제 쥐는 징글징글하다.”

헬리아는 눈을 찌푸리고 주머니에 죽은 쥐를 잘 담았다.

바로 그때였다.

“움직입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이안과 엘라임이 동시에 헬리아를 에워쌌다.

“또 쥐야?”

“길이 막히기 전에 돌아가야 합니다.”

헬리아 일행은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엘라임과 이안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호위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쥐들의 흉흉한 녹색 안광이 빛을 발했다.

“젠장, 벌써 막혔어.”

퇴로를 꽉 막은 쥐들 때문에 헬리아 일행은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도망간 게 아니었나?”

그들의 공격에 도망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쥐들의 낌새가 이상했다.

“뭐지?”

헬리아는 눈을 좁히고 쥐들을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친 것처럼 날뛰던 놈들이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그들의 움직임이 좀 전과 달리 수상했다.

“옵니다!”

쥐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이안이 소리쳤다. 그와 함께 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스 스피어!”

헬리아의 아이스 마법이 쥐들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쥐들은 그녀의 마법을 피하며 달려들었다.

“조심해!”

헬리아를 향해 이를 드러낸 쥐들은 이안의 검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안은 헬리아의 안전을 확인한 후 땀으로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안이 꽉 막혀 있는 탓에 절로 땀이 흘러내렸다.

“조심하십시오. 움직임이 이전과 다릅니다.”

이안의 표정이 더욱 신중해졌다.

‘뭐가 달라진 거지?’

갑자기 돌변한 움직임. 놈들은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지휘를 하는 듯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헬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누군가 지휘한다?’

이상하게도 맨 처음 보았던 시체와 철창이 떠올랐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쥐는 질병을 옮기는 주범 중 하나이다. 또한 가장 쉽고 빠르게 병을 옮길 수 있으니 자신이 범인이라도 쥐를 이용했을 것이다.

‘착각했어.’

헬리아는 이 쥐들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키메라라고 생각했다. 또 그런 모습이었다. 한데 다시 생각해 보니 대마법사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키메라를 만들 수는 없다.

‘누군가 전염원을 이곳으로 가져와 쥐들을 감염시킨 거야.’

시체와 철창. 일련의 일이 하나둘 이해가 되었다.

“전염원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야 돼.”

그것이 쥐인지, 쥐가 아닌지, 또 다른 어떤 생물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생각만큼 그 수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엘라임! 이안!”

엘라임과 이안이 그녀를 보았다.

“쥐들을 조종하는 놈이 있을 거야. 그놈을 찾아!”

“어떻게 생겼는데?”

“몰라!”

“모르면 어떻게 찾아!”

엘라임이 난색을 표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쥐 중에서 생긴 것도 모르는 놈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그냥 찾아!”

“최소한 어떻게 생긴 건지는 알아야 찾지!”

엘라임은 투덜거렸지만, 눈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그놈이 그놈이었다.

“젠장.”

그런데 그 순간.

“엇?”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냥 지나쳤으면 못 알아볼 뻔했을 것이다. 주변을 살피던 중 유독 한 부분의 쥐들이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적은 것을 알았다.

“설마?”

마치 자석으로 딱 붙여 놓은 듯 쥐들이 뭉쳐져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찾았어!”

다른 쥐들이 녹색의 거대한 몸집인 것에 비해 놈은 작고 하얬다. 그런 쥐를 주변의 쥐들은 안간힘을 써 가며 보호했다.

“전방의 작은 흰 쥐야!”

엘라임의 목소리에 헬리아와 이안의 시선이 흰 쥐에 꽂혔다. 그러나 그 쥐를 발견했다고 해서 쉽게 제거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쥐들의 움직임이 더욱 기민해졌기 때문이다.

“너무 많아!”

흰 쥐를 공격할라치면 어김없이 변종 쥐들이 흰 쥐를 둘러쌌다. 집중적으로 마법을 난사해 보았지만, 공격은 닿지 않았다.

“빈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안은 냉철하게 사태를 분석했다. 그는 차분히 흰 쥐와 다른 쥐들을 살폈다. 그리고 흰 쥐를 죽일 허점을 발견했다.

“흰 쥐를 제외한 주변을 공격하십시오.”

“주변을?”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헬리아는 이안의 새카만 눈동자에 깃든 확신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임, 주변을 공격해!”

“저 녀석 말을 들으라는 거야?”

“얼른!”

“쳇!”

엘라임은 헬리아의 말대로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흰 쥐를 단단히 감싸고 있던 쥐의 바리게이트가 한층 얇아지는 것이 보였다.

“역시.”

흰 쥐의 지휘로 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래 봐야 결국 쥐다. 행동에 단조로움이 존재했고, 이안은 그것을 간파했다.

“다른 곳을 공격하면 흰 쥐의 방어가 느슨해질 겁니다. 그 점을 노려야 합니다.”

이안의 의도를 알아챈 헬리아가 눈을 빛냈다.

“엄호는 나한테 맡겨. 결코 다치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 이안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쳐 지나갔지만, 부지불식간이라 헬리아는 볼 수 없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안이 자세를 잡았다.

“엘라임, 준비해!”

“알았어!”

“그럼 간다!”

콰아앙!

엘라임의 공격이 사방으로 난사됐다. 그러자 쥐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더니 흰 쥐를 감싸고 있던 방어에 순간 큰 허점이 드러났다. 완전히 흰 쥐의 모습이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지금이야!”

이안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끼에에엑!”

그의 검이 흰 쥐의 몸을 갈랐다. 흰 쥐가 완전히 둘로 나뉘어져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쥐들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고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헬리아 일행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우두머리를 잃은 쥐들을 처리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똑똑-

다시금 하수구에는 물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바닥은 쥐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헬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죽은 흰 쥐에게 다가갔다. 흰 색이라는 것 외에는 여느 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려 감염된 쥐들의 모습이 키메라라고 여길 정도로 흉측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악취도 끝이군.”

전투가 끝나자 하수구의 냄새를 의식한 엘라임은 코끝을 찡그렸다.

“아직 안 끝났어.”

“응?”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얼굴을 찌푸렸다. 헬리아는 주머니를 꺼내더니 흰 쥐를 넣으며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하수구에 있던 쥐들은 대부분 제거했지만, 이 쥐들이 이곳에만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직 지상에는 많은 쥐가 돌아다닐 것이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야 전염자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헬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범인을 잡아야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아돌프 후작을.

“돌아가자.”

이제 쥐라면 지긋지긋했다. 물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쥐를 잡아야 하겠지만, 그 역할을 그녀가 맡진 않을 것이다.

“돌아가면 목욕부터 해야겠어.”

따뜻한 물에 푹 몸을 담그고, 온몸에서 나는 고약한 하수구의 썩은 내를 벗겨내고 싶었다.

“이거 금방 안 빠질 것 같아.”

오늘 하루는 물속에서 살아야겠다.

“음?”

그때 엘라임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을 찌푸렸다.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하수구니까 당연하지.”

“아니, 그런 냄새가 아니야. 이 냄새는…….”

이안도 그 냄새를 맡았는지 얼굴을 굳혔다.

“타는 냄새입니다.”

그제야 헬리아도 하수구의 냄새와 다른 냄새를 맡았다.

“저건.”

검은 연기가 하수구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헬리아 일행은 서둘러 하수구를 벗어났다. 하수구 밖에는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이.”

헬리아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이쪽입니다.”

외눈 안경을 쓴 은발의 잭이 사제복을 입은 요한을 지하로 이끌었다. 끼익끼익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한 방문 앞으로 다다랐다. 잭이 먼저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모셔왔다.”

“어서 들어오세요.”

안에서 키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잭이 문을 열고 요한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지하에 있는 방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화초가 자라나 상큼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숲속에 와 있는 듯 공기가 청량했다.

“자네는 변함이 없구먼.”

요한은 키안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그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키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

“요한, 당신은 많이 늙었군요.”

“10년 만이니 그럴 만도 하지.”

“잘 지내셨습니까?”

“글쎄.”

요한의 두루뭉술한 말에 키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일이 있어서 온 것이군요.”

“각자 정해진 일이 있지 않은가?”

“당신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합니다.”

요한은 희미하게 웃으며 과거를 추억하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이곳에 오기 전에 교황 폐하와 면담을 했었네.”

요한은 잭이 따라준 차로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이제 곧 그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 말씀하셨네. 한데 이곳에 와보니 그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야.”

요한이 작게 웃으며 ‘교황 폐하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거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저를 찾은 건가요?”

“뭐, 오는 길에 성과도 있었고.”

키안이 깍지를 끼며 상체를 숙였다.

“맞게 오셨습니다. 저 역시 그자들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이번 일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군.”

“예, 다만, 그들 전체의 의지인지 아니면 개인의 의지인지 판단이 어렵습니다.”

“흐음. 그럼 그자는 찾았나?”

“찾는 중입니다. 아마 곧 찾을 겁니다. 이 일과 관련이 있으니.”

키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보다 그녀는 모르는 모양이더군.”

“고민 중입니다.”

키안은 한 번 안경을 고쳐 쓰고 말을 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자네가 아닐세.”

요한과 키안의 눈이 오랫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저는 제 주인이 명한 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분께서 제게 전권을 주신 만큼 판단도 제가 합니다.”

“자네는 정말 여전하네.”

“주인에 대한 충정이라고 해두죠.”

키안의 눈이 아릿하게 변해갔다. 자신의 주인, 키안은 오직 그 사람을 위해 지금껏 움직여 왔다. 요한은 그런 키안의 변함없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땐 자네가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게 새삼 느껴지는군.”

키안은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마스터.”

키안이 잭에게 시선을 주자 잭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 키안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빈민가에 일이 생겼다.”

“빈민가에요?”

“화재가 났다.”

“화재?”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재라니!”

천생 사제인 그는 빈민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빈민가를 소각하라는 명이 내려졌다는군요.”

“이게 무슨 말인가! 소각이라니!”

요한이 흥분하자 키안이 그를 달랬다.

“요한,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제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결코 소각을 명하지 않을 겁니다.”

키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공주님에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안은 자신의 손에 쥔 검은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 * *

뜨거웠다.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은 아가리를 벌름거리며 빈민가를 집어삼켰다. 지옥의 혈겁이라도 닥친 듯 빈민가는 온통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푸른색이었던 하늘은 핏빛으로 변해갔고, 시커먼 연기가 붉은빛과 뒤섞이며 사방을 휘저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천지를 울렸다. 연기에 질식해 죽는 사람, 불에 타 죽는 사람. 애초에 전염병, 아니, 독에 가장 많이 중독된 곳이 바로 빈민가였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불에 타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샨!”

론이 다급하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동생 샨을 불렀다. 잠시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간 사이 불길을 본 것이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의 얼굴은 검은 연기보다 더 칙칙하게 변했다. 다행히 론과 샨의 집은 불길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저 섬뜩한 불길이 그들의 집을 집어삼킬지 모르는 노릇. 서둘러 이곳을 피해야 했다.

“샨!”

다급하게 샨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샨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콰아앙!

불에 타들어간 목재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론의 이마에선 식은땀의 줄줄 흘러내렸다.

“샨! 어딨어!”

설마 그사이에 밖에 나간 것일까? 그러다가 불에 휩싸인 것은 아닐까? 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흘러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동생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였다.

덜그럭!

그때 탁자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론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샨이었다.

“샨!”

샨은 몸을 둥글게 말고 귀를 막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와 불길에 놀라 탁자 밑에 숨어든 것이다. 샨이 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혀, 형!”

샨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이처럼 큰 불은 난생처음이었다. 그것은 론도 마찬가지였지만, 샨처럼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샨, 얼른 나가야 돼.”

론이 샨의 팔을 잡아당겨 탁자 밖으로 끄집어냈지만, 샨은 요지부동이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지 얼굴이 푸르죽죽했다.

“혀, 형. 무서워.”

“불길이 마을 전체로 번졌어. 이곳에 있다간 위험해. 얼른 나가야 돼!”

샨이 자꾸만 꾸물거리자 론이 소리쳤다.

“샨! 자꾸 형 말 안 들을래!”

“혀, 형.”

샨이 론의 다그침에 눈물을 흘렸다. 론은 입술을 살짝 베어 물고 샨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를 다독였다.

“샨, 형 믿지?”

“응.”

샨은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론은 샨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여는 순간 뜨거운 불길이 집 안으로 파고들었다. 샨은 더욱 겁에 질려 론의 등 뒤로 숨었다.

‘너무 뜨거워.’

론은 피부에 느껴지는 열기에 이를 악물었다. 그는 천을 가져와 샨에게 덮었다.

“자, 샨, 이걸 꼭 덮고 있어야 돼.”

“혀, 형은?”

“형은 괜찮아. 샨보다 나이가 많잖아? 어른은 이런 것도 견디는 거야.”

그래 봤자 론과 샨의 나이 차는 겨우 세 살에 불과했다. 하지만 론은 샨에게 어른이었다.

“자, 가자.”

론은 샨의 여윈 손을 잡아끌고 집을 빠져나왔다. 다행인 것은 평소라면 금세 지쳤을 테지만, 요한의 신성력 덕분인지 그의 몸은 평소보다 힘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헉, 헉!”

어린 샨이 금세 지쳐 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론이 샨을 등에 업었다. 샨이 어리다고는 하나 그 무게를 론이 이기긴 힘들었다.

“안 무거워?”

“이곳을 빠져나가면 밥 좀 더 먹어야겠다.”

“응, 나 밥 많이 먹을게.”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형제는 서둘러 뛰어갔다.

“헉, 헉. 콜록!”

론의 숨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가득이나 체력도 약한데다가 빈민가 안은 이미 시커먼 연기로 꽉 차 어른들도 숨을 쉬기 어려웠다.

“콜록, 콜록.”

“형, 너무 뜨거워.”

샨의 칭얼거림에 론은 천을 고쳐 덮었다. 하지만 샨보다 론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샨이야 그나마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론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의 온몸이 열기에 붉게 달아올랐고, 심한 곳은 짓무르기 시작했다. 피부 속으로 스며든 열기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크윽.”

하지만 론은 이를 꽉 물고 달렸다.

“샨, 조금만 참아. 이제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응.”

하지만 형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우릴 나가게 해줘요!”

“살려줘!”

론과 샨이 막 빈민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곳은 온통 사람들의 비명과 애원 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아이를 업은 여인, 늙은 노인, 젊은 남자 할 것 없이 빈민가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빈민가 주위에 단단한 목책을 두르고 날카로운 창을 들이밀고 있던 것이다.

“제발 살려 주세요!”

“부탁이에요!”

“밖으로 보내줘요!”

사람들은 억지로 목책을 밀어냈다. 하지만 목책에 박힌 날카로운 나무못이 그들을 상처 입혔다. 방어막이 무너지려 하자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소리쳤다. 지휘관은 수백이 넘는 사람이 몰려오자 이마에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국왕의 지엄한 명이 있기에 이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어서 목책을 더 가져와!”

지휘관이 소리 높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목책이 무너질 것이다. 한데 지휘관의 명을 들은 병사들은 머뭇거리며 움직이지 못했다.

“뭐 하나! 명령이 안 들리나!”

“하, 하오나.”

병사의 눈에 빈민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떠나가질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을 불에 타게 내버려 두다니. 거기다 아직 젖도 채 떼지 못한 갓난아이들까지 어미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만약 자신들이 이대로 계속 그들을 막는다면 뜨거운 불길에 산 채로 타 죽을 것이다. 마음 약한 병사가 움직이지 못하자 지휘관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쿵!

“크윽!”

“죽고 싶나! 전염병이 돈 마을은 폐쇄하여 전부 불태우는 거 몰라!”

지휘관은 소리쳤다. 쓰러진 병사 외에 다른 병사들에게도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이들이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누가 피해를 볼 것 같은가! 바로 수도의 백성들이다! 네 녀석들은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죽는 모습을 보겠는가!”

지휘관의 말에 병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부모와 친구가 이들로 인해 전염병에 걸린다 생각하자 끔찍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보다 이중적인 자신들의 마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른 목책을 더 가져와! 놈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아라!”

“예, 옛!”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지휘관의 말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진 못했다. 귓가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가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살려 주세요!”

“엉엉! 엄마가 죽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우릴 내보내 달란 말이야!”

목이 터져라 살려 달라 외치던 사람들은 이내 흉흉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이판사판이었다.

“내보내 달란 말이야!”

“이 죽일 놈들아!”

자신의 몸이 다치든 말든 그들은 이 방어막을 뚫고자 사력을 다해 밀어붙였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몸으로 밀어붙이자 목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지휘관은 서둘러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서둘러 상부에 병력을 요청해!”

“아, 알겠습니다.”

병사는 지휘관의 말에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우…… 이게 대체.”

냉정하게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었지만, 그의 얼굴에선 씁쓸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병사들이……?’

론은 빈민가 입구를 틀어막은 병사들을 보고 눈을 좁혔다. 어째서 이곳을 막는지 아직 어린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불에 타 죽게 하다니.

‘어떻게 하지?’

샨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형, 우리 이제 못 나가는 거야?”

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갈 수 있어.”

론은 샨을 다독였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가 어려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빈민가 입구만 지키고 있을 리 없었다. 아마 빈민가 전체를 막고 있을 것이다.

‘죽을 거야. 정말 죽을 거야.’

머릿속 한편에서 계속 절망의 소리가 들려왔다.

“형.”

샨이 작게 입술을 깨물고 론의 손을 붙잡았다. 어린 샨도 심상치 않은 론의 분위기에서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론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냈다.

‘반드시 나갈 길이 있을 거야.’

론은 샨을 고쳐 업고 몸을 돌렸다.

‘읏.’

최대한 불길을 피해 움직였지만, 그의 팔다리는 화상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식히지도 못해 뜨거운 열기가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론은 꾹 참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 어디로 가는 거야?”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될 것 같아.”

“형…….”

샨은 형의 말에 조용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론은 샨을 마냥 어리게 보았지만, 빈민가에서 살아온 샨이다. 형에겐 어리광을 부리지만 그도 모르지만은 않는다.

‘형…….’

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형, 나 걸을래.”

“괜찮겠어?”

“응, 형 등이 얼마나 불편하다고.”

론의 등에 업히면서 샨은 론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 형이었다.

‘마냥 어리광 부려선 안 돼.’

“힘들면 말해.”

“괜찮아.”

샨의 모습에 론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훈훈한 우애와 달리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빈민가를 휩쓴 불길은 점점 커져 꺼질 기미는커녕 몸집을 불리며 온 하늘을 불길로 뒤덮었다.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가득해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하지만 불을 끌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 빈민가 안의 물은 턱없이 부족했고, 불길은 일반적인 불과 달리 쉬이 꺼지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불은 온 사방을 다 타울 듯 휘몰아쳤다. 불에 타 죽는 사람, 연기에 질식해 죽는 사람,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현세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헉, 헉!”

“샨, 힘을 내.”

“형, 너무 뜨거워.”

달리던 론은 샨의 목소리에 그도 뜨거움을 견디기 힘든지 거친 호흡을 내뱉고 멈춰 섰다.

‘이쯤에 분명 우물이.’

론은 주변을 살폈다. 때마침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빈민가에 몇 개 되지 않는 우물이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와 물을 퍼 나르며 불을 끄거나 몸에 물을 뿌려댔다. 워낙 인파가 거세 론은 샨을 두고 혼자 우물가로 갔다.

“자, 잠시만요!”

“저리 안 비켜!”

아이라고 봐주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엔 모두 치열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론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작은 몸이 사람들에 치이며 결국 우물가에 닿았다.

‘시원해.’

그러나 우물의 물을 만져 보기도 잠시,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짜증 내는 소리에 론은 얼른 천에 물을 적시고 돌아왔다.

“자, 이제 시원하지?”

“응, 시원해.”

“자, 가자.”

론과 샨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데 이번엔 샨이 아닌 론의 몸이 말썽이었다.

“콜록, 콜록!”

연기가 폐부로 스며든 론은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그의 안색은 벌써 하얗게 변해 있었다.

“형! 괜찮아?”

“으응.”

“형…….”

“난 괜찮아. 어서 가자.”

샨은 미안함에 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론은 그런 샨을 다독이고 샨의 머리에 씌운 천을 고쳐 씌우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샨! 우리 여길 나가면 맛있는 거 사 먹자.”

“응!”

그때였다. 불길에 판자로 된 집들이 불타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너져 내린 자재들이 론과 샨 형제를 덮쳤다.

“형!”

“샨!”

콰아앙!

무너져 내린 곳에는 먼지와 불길이 자욱이 일었다.

* * *

콰앙!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빈센트의 음성에 대전 안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왕좌에 앉아 있는 빈센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흉흉했다. 평소 웃으며 정국을 주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권좌를 내려친 빈센트가 대신들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린지 묻고 있는 거네.”

대신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력을 요청하러 갔던 병사에 의해 빈민가에서 벌어진 화재가 왕성에 알려진 것이다.

빈센트는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분명 내 봉쇄만 하라 일렀다. 한데 어찌하여 불을 낸 것인가?”

그에 후작파 인사인 파리스 남작이 입을 열었다.

“혹여 누군가 실수로 불을 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입 다물라!”

파리스 남작은 본전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메르센 백작!”

“예.”

아르센 왕국의 정보국 국장을 맡고 있는 메르센 백작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평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상황이 워낙 위중했다. 그는 어떤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는 국왕파 인물로 오직 국왕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였다. 사십 대의 샤프한 외모를 지닌 메르센 백작이 입을 열었다.

“빈민가를 포위한 기사와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갑옷을 입은 기사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 빈민가를 소각하라는 명을 내렸다 합니다.”

“그자가 누군지는 밝혀냈는가?”

빈센트의 물음에 메르센 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메르센 백작은 조속히 정보원을 풀어 그자를 찾아내라.”

“명 받잡겠습니다.”

메르센 백작에게 명을 내린 빈센트는 생각에 잠겼다. 봉쇄를 하라 알리자마자 누군가 나타나 빈민가에 불을 질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불을 질렀다는 게 괴이했다.

‘도대체 누가…….’

그때 우연히 빈센트는 아돌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후작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후작의 눈과 빈센트의 눈이 서로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둘러 빈민가의 봉쇄를 풀도록 하라.”

그러자 몇몇 대신이 빈센트의 말에 반박했다.

“하오나 전하! 그리되면 전염병이 더욱 퍼질 것입니다.”

“맞사옵니다!”

콰앙!

빈센트가 권좌를 내려치고 일어섰다. 그러자 대신들은 기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만! 그럼 이대로 모두 죽일 작정인가?”

“그, 그건…….”

“그들도 모두 짐의 백성이다! 봉쇄를 풀고 마탑에 연락하여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불을 끄게 하라.”

“마법사까지 말이옵니까? 그들은…….”

빈센트는 자꾸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대신들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이 일이 저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수밖에 없었다.

“빈민가에 난 불이 수도로까지 번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그대인가?”

말꼬리를 물었던 대신 한 명을 국왕이 지목하자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것이…….”

잘못하다간 모든 일의 책임을 그가 물어야 하니 응당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단순히 빈민가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는 물론 그 불이 왕성에까지 번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시게!”

빈센트가 플로렌스 공작을 향해 말했다.

“이번 일은 공작이 맡아주시오. 서둘러야 하오.”

“명 받잡겠습니다.”

플로렌스 공작은 곧바로 회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빈민가의 불을 제압해야 했다.

“공작님.”

“마탑에서 연락은 왔는가?”

조엘 남작이 입을 열었다.

“예, 마법사들은 곧장 빈민가로 이동한다 하였습니다.”

“서두르게.”

“알겠습니다.”

“한데 자네는 어떻게 보는가?”

“이번 일 말씀이십니까?”

눈치가 빠른 조엘 남작답게 공작의 의중을 읽어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공작이 노엘 남작에게 물었다.

“그 기사라는 자는 왜 빈민가에 불을 질렀을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는 극단적인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전염병이 돈 마을은 소각하는 것이 원칙이지 않습니까?”

“……흐음.”

플로렌스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 찜찜함이 사리지지 않았다.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모든 일이 너무나 딱 맞아 떨어졌다.

‘그것도 아돌프 후작에게 말이지.’

공작이 상념을 거두고 발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공작님!”

공작은 급하게 달려오는 남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헬리아 공주의 호위 겸 감시로 심어둔 이였다.

“무슨 일인가?”

다급한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은 탓인지 공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공주님과 공자님이 빈민가에 들어가셔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공작은 놀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대체 거긴 왜 갔단 말인가! 가뜩이나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당에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공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았다. 고위 마법사인 헬리아와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이안이다. 그 둘이라면 무리 없이 빈민가를 빠져나올 것이다. 평정심을 유지한 공작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마음은 진정이 되었으나 몸은 제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바로 빈민가로 가겠다.”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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