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42)

제2장 복귀

“8년 만인가.”

헬리아는 새삼스럽다는 듯 로즈궁을 바라보았다. 8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던 헬리아지만, 실상 지금의 그녀가 로즈궁에서 생활한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히려 데이지궁이 더 익숙했다. 한데 머릿속에 박힌 기억 탓인지 왠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긴 돌아왔군.”

이제야 겨우 시작점에 돌아온 것이다. 헬리아는 그간 8년을 추억으로 밀어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즈궁 앞에는 이미 궁의 주인을 기다리는 시종과 시녀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후후.’

헬리아의 눈이 곱게 휘었다. 줄지어 서 있는 이들 가운데 매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8년이 지났지만 헬리아의 뛰어난 기억력은 마치 오늘 오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8년 전 로즈궁을 담당했던 시녀와 시종들이었다. 헬리아의 입꼬리가 싹 말려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고용인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갔다.

‘잊으면 섭하지.’

천한 시녀의 딸이라 괄시했던 이들. 물론 평온히 지내려던 그녀를 방해한 탓에 어느 정도 맛보기로 잠깐 눌러주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병사들에게 끌려갔을 때 비웃던 자들을 잊지 않았다. 헬리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쥐를 본 고양이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시녀장 벨라입니다.”

벨라가 얼른 헬리아 앞에 나아가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아는 사람 얼굴을 보니 돌아왔다는 느낌이 드네.”

벨라의 얼굴이 썩은 고기처럼 변하니 더더욱.

“벨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시녀장 벨라는 똥 싶은 표정을 짓다 그녀의 질문에 퍼뜩 고개를 들고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그렇지?”

헬리아의 집요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벨라는 침을 삼켰다.

‘젠장, 도대체 왜!’

헬리아는 로즈궁으로 돌아오면서 다른 곳으로 간 시녀와 시종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벨라는 8년 전 헬리아의 성격을 떠올렸다. 그 뒤끝. 세월이 흘렀다고 그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아마 두고두고 갈구리라. 땅이 밭이 되고 싹이 터 열매를 맺을 때까지.

벨라는 눈물을 삼켰다. 이제는 과거처럼 그녀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궁내의 소문에 가장 민감한 이들이 바로 시종과 시녀다. 궁 안의 소문을 가장 일차적으로 접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헬리아 공주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그때는 그렇구나 하면서 과거를 추억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다들 온 거 맞지? 아무래도 혹시 빠진 사람이 있을까 봐.”

헬리아의 말에 벨라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사지 멀쩡한 자는 모두 모였습니다.”

‘나 혼자 죽지는 않으리.’

벨라는 시녀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로 이미 시녀를 그만둔 이들까지 싸그리 모아 원래의 로즈궁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는 앤도 있었다. 그녀는 3년 전 시녀 일을 그만두고 소박하게나마 작은 과일 가게를 차리고 잘 살고 있었다. 한데 벨라가 그녀를 꼬드긴 것이다. 궁내 사정에 어두웠던 앤은 아버지의 치료비로 돈이 필요해지자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덥석 물었다.

‘히잉!’

로즈궁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는 말에 염려가 되었지만 공주는 유폐되었다. 당연히 헬리아 공주를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떡하니 헬리아 공주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 신이시여!’

“앤도 오랜만이네.”

“하, 하하.”

“만나니까 참 반갑다. 그치?”

“당연한 말씀이에요.”

헬리아가 씨익 웃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과거에는 앤의 키가 더 컸지만 지금은 헬리아의 키가 앤보다 더 커졌다. 앤은 반짝이는 헬리아의 눈동자를 보고는 숨을 집어삼켰다. 저 눈빛을 어찌 잊으리!

‘으악, 제발 살려줘!’

악마가 도래했으나 피할 길이 없다.

“다들 잘 지내보자고.”

헬리아는 싱긋 천사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날 악마의 미소를 본 로즈궁의 시종과 시녀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 * *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앤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처럼 잡혀온(?) 이들도 함께 가세했다. 하지만 벨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눈동자의 시선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치우쳤지만.

“돈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 그렇지만 공주님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안 물어봤잖아.”

앤은 울상을 지었다. 당연히 데이지궁에 유폐되어 있는 줄 알았다. 설마하니 복위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발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면 안 돼요?”

앤은 물론 다른 시녀와 시종들이 사정사정했지만 벨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나도 못 가는데 너희라고 가겠어?’

다분히 물귀신이었지만 벨라는 속내와 달리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게 될 것 같아?”

“시녀장니임!”

“이미 끝났어. 정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지 말고 공주님께 직접 이야기해.”

“시녀장님 힘으로 어떻게라도 좀…….”

“공주님이 예전과 같은 줄 알아?”

“그, 그럼 어떻게 해요?”

“포기하면 편해져.”

벨라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벨라의 선고에 앤은 좌절한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에 조금 안쓰러워진 벨라가 그녀를 다독였다.

“벌써 8년이 지났어. 설마 옛날처럼 하겠니? 이제라도 잘하면…….”

“정말 그럴까요?”

“…….”

벨라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에 앤은 더욱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앤!”

그때 다른 시녀가 앤을 불렀다. 앤은 헬리아 공주가 자신을 부른 줄 알고 화들짝 놀라다 같은 시녀라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무슨 일이야?”

그러나 시녀의 표정은 동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앤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말했다.

“공주님이 부르셔.”

“으아!”

앤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운 앤은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헬리아의 방으로 걸어갔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오고 걱정은 태산처럼 높이 쌓여 갔다.

“아, 저기…….”

그때 뒤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앤은 뒤를 돌아보았다. 답답할 정도로 내려온 앞머리에 앞이 보이기나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저기 누군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종 레브입니다.”

제법 큰 키에 머리는 자줏빛이 도는 남자였다.

“아, 레브 씨로군요. 저는 앤이에요.”

이런 자가 있었던가 싶었던 앤은 레브의 말에 이번에 새로 배속된 시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헬리아는 로즈궁의 고용인을 모두 데려오고 싶어 했으나 8년의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사이에 죽었거나, 병에 걸렸거나 그 밖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궁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 틈을 새로운 이들로 메웠다.

“그보다 무슨 일로?”

“공주님의 전속 시종으로 배속되었습니다. 한데 처음 와보는 곳이라…….”

“아! 그래요?”

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저도 지금 막 공주님의 처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앤은 헬리아의 방에 혼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아, 예. 감사합니다.”

레브는 그녀가 그렇게 밝게 웃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를 따라갔다.

똑똑-

“고, 공주님. 앤입니다.”

“들어와.”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리자 앤은 침을 꼴딱 삼켰다. 그러다 옆에 있는 레브를 보더니 조금 안심이 되는지 방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청록색 머리카락에 신비한 오드아이를 지닌 젊은 청년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앤은 궁금했지만 그 남자는 헬리아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워렌은?”

오드아이의 청년은 클리드였다. 헬리아는 궁에 달랑 클리드만 혼자 오자 워렌에 대해 물었다. 클리드는 조금 난감한 듯 말했다.

“그게…… 워렌 님은 싫다고 하십니다.”

“싫다고?”

헬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로즈궁으로 들어온 헬리아는 전처럼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라드 상단에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헬리아는 이참에 플로렌스 공작을 통해 워렌과 클리드에게 단승이지만 남작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한데 워렌이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뭐래?”

“어디에 얽매이기 싫다고 해서.”

“그 아저씨답긴 하네.”

헬리아는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워렌의 평소 행동을 돌이켜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유로운 남자였다. 술 먹기 좋아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격식과는 조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헬리아는 아쉽지만 워렌에 대해서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당분간 클리드가 수고 좀 해줘.”

“물론입니다. 아, 그런데…….”

클리드가 머뭇거리자 헬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혹시 라임 님이 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헬리아가 눈을 찡그렸다.

‘엘라임이 왜?’

그녀가 어리둥절해하자 클리드가 말했다.

“꽤 시무룩하신 것 같으셔서.”

그러고 보니 요새 엘라임을 부르는 횟수가 전보다 줄어들었다. 곁에 이안이 붙어 있는 통에 아무 때나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헬리아는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클리드가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무했나.’

엘라임은 밖에 나와 있는 걸 좋아했다. 시장에서 파는 꼬치구이를 좋아하고 비 맞는 걸 좋아했다.

“…….”

헬리아는 자신의 귀에 매달린 붉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자신도 그 짝이었나 보다. 절로 입안이 썼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류는 곧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헬리아가 생각에 잠겨 있자 클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리드에게는 헬리아도 은인이지만, 엘라임도 그에게 은인이었다. 처음 그에게 포션을 준 것도 엘라임이었기에 그는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자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클리드는 헬리아와 엘라임이 잘되길 바랐다. 물론 신분의 차이가 있겠지만, 헬리아와 엘라임 사이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클리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헬리아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앤은 헬리아와 청년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리다가 청년이 밖으로 나가자 그녀에게 다가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앤은 헬리아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헬리아는 앤을 바라봤다. 헬리아는 지나치게 긴장한 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몸을 떨어? 추워?”

“아, 아니요.”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앤은 헬리아의 눈동자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8년이 지난 헬리아의 외모는 인세의 것이 아닌 듯 너무나 아름다웠다. 물결치는 금발과 백옥 같은 피부. 여신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앤은 그녀의 외모에 속지 않았다. 저 천사 같은 외모는 8년 전에도 그랬다. 실상 그 안에 든 것은 무시무시한 소악마였다.

“그보다.”

헬리아의 시선이 레브를 향하자 레브가 흠칫 놀라다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가 얼굴의 반을 가린 탓에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로즈궁에 배속된 레브입니다.”

헬리아의 눈이 레브를 훑었다. 어딘지 모르게 이 음울해 보이는 사내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로즈궁의 고용인들은 대체로 기존 로즈궁에서 일했던 자들이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외에는 새로 고용인들을 뽑았다. 헬리아는 고용인들을 뽑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세바스찬에게 일을 맡겼다. 세바스찬이 일을 허투루 할 리는 없었다. 직속 시종을 그로 선정한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 잘 부탁해.”

헬리아가 환한 미소로 레브를 반겼다. 레브는 푹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앤은 헬리아의 행동에 자신이 너무 과도하게 겁을 집어먹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 8년이 어디 짧은 시간인가.’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바뀌게 마련이다. 앤은 안도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헬리아는 과거의 일을 오늘 오전의 일처럼 집요하게 잘 기억하는 구석이 있었다. 망각 따위는 강아지 먹이로 줘버리는 인간이 헬리아다.

“앤, 물이나 떠와.”

‘히잉.’

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물을 가지러 갔다. 애초에 물을 먹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좀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는 없는 앤이다.

헬리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말 돌아왔어.”

* * *

로즈궁 뒤편에 위치한 연무장.

넓은 공터에는 검을 찬 기사 열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로즈궁에 배속된 기사였다. 로즈궁의 주인으로 다시 돌아온 헬리아에게 친위대가 생긴 것이다. 로즈궁에 배속된 기사들은 서로를 알아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것은 나쁜 의미라기보다 너는 왜 여기에 왔냐는 그런 눈빛이었다.

“야, 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흔한 갈색 머리에 일반 남성의 평균 키를 지닌 마른 체형의 숀은 거구의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왜 있긴, 여기에 배속됐으니까 그런 거지.”

숀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의 남자, 휴는 숀을 보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큰 덩치만큼 대답하는 것도 느릿느릿했다.

숀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죄다 평민 출신이네.”

옆에서 렌스가 주위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렌스는 기사치고 학사 같은 분위기를 지닌 남자로 단정한 외모에 태도가 꼿꼿했다.

숀이 얼굴을 구기며 바닥을 찼다.

“왕족 친위대라 좋아했건만. 하기야 우리 주제에 무슨.”

숀의 불만에 휴도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울상을 지었다. 불만을 가진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뛰쳐나가 배속을 변경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어느 파벌에 가담하지 않은, 아니, 가담조차 하지 못한 평민 출신의 기사들이었다.

“쳇, 땡 잡으려다 꽝 잡았네.”

숀이 투덜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안색을 흐렸다. 기사단에 배정받을 때만 해도 최근 궁내에서 떠오르는 실세인 헬리아 공주의 친위대가 된다는 말에 혹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을 보니 그것이 실상 과장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기사들의 면면을 보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이긴 하지만, 모두 다른 귀족의 후원 한번 제대로 못 받아본 빽도 신분도 없는 처지인 것을. 이래서야 진급은 물 건너갔다. 평생을 이곳에서 썩어야 할지도.

“설마 저 녀석도 이곳에 올 줄은…….”

숀의 말에 렌스와 휴가 그가 눈짓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있었다. 언뜻 가벼워 보이는 외모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딱 기생오라비 같았다. 흔하지 않은 머리색과 외모라 쉽게 기억하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린 완전 끝이야. 저 녀석이 이곳에 오다니.”

숀은 어깨를 늘어뜨렸고, 옆에서 휴도 한숨을 내쉬었다. 숀은 저 기생오라비가 싫었다. 이름은 세인으로 자신들과 같은 평민 출신 기사지만 뛰어난 외모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뿐더러, 왕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했다. 하지만 말썽이 잦고 엉덩이가 가벼운 탓에 몇 번이고 징계를 먹었다. 무엇보다 숀이 세인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어, 숀 오랜만이야.”

“뭐가 오랜만이야!”

“아, 그렇지.”

세인이 키득거리며 숀에게 다가왔다. 그는 숀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친근하게 굴었다.

“뭐 하는 거야!”

“이제 같은 소속인데 친하게 지내보자고.”

“웃기지 마! 너, 너 때문에.”

“아, 그 여자애? 솔직히 얼굴만 반반했지 영 밤일은 못하더라.”

“야!”

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세인이 꿀꺽했기 때문이다. 숀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젠장, 손 한 번 못 잡아봤는데.’

세인은 숀이 뭐라고 투덜거리든 주위를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우, 그나저나 어쩜 이렇게 떨거지만 모아놓았냐.”

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문제아가 득실거리는군.”

‘네가 제일 문제아거든!’

숀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세인을 떼어내지 못했다. 딱 붙어 있는 모양새가 요상했다.

‘서, 설마…… 이놈이 여자도 모자라, 나, 남자까지?’

숀의 망상을 알기라도 한 듯 세인은 킬킬거렸다.

“큭큭, 야, 너 뭔 생각하냐? 설마?”

“아, 아니야!”

세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퍽이나. 누가 너 같은 바람둥이 놈 따위랑! 죽어도 너랑은 안 친해져!”

“숀.”

숀의 언사가 거칠어질 기미가 보이자 렌스가 말렸다. 그러나 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때 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자 숀은 흠칫 놀랐다. 한순간 보인 그의 눈동자가 너무나 싸늘했다.

“우리 대장이 도착한 모양이군.”

“무슨 말이야?”

숀은 물론 휴와 렌스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어리둥절해하는 찰나, 연무장 안으로 검은 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국은 물론 대륙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흑발에 흑안을 지닌 남자.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그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아르센 왕국의 개국공신가인 플로렌스 공작가의 장남.

이안 플로렌스.

그가 걸어오자 기사들은 순간 옥죄여 오는 기세에 몸을 움찔거렸다. 이안에게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에 압도된 것이다. 자신들과 나이는 비슷했지만 그의 무력과 자신들의 무력은 전혀 달랐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소드 마스터에 오를 것이라 예상되는 자가 바로 이안이었다. 그가 기사들 앞에 섰다.

“이안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았다. 비록 자의가 아닌 아버지의 명으로 헬리아 공주의 호위 기사를 하고 있다지만, 어쨌든 맡기로 한 이상 그 순간부터 그는 공작가가 아닌 헬리아 공주의 친위대 소속이다. 게다가 이안은 이들이 모두 평민 출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의 가문을 말하지 않았다. 몇몇 기사는 그것을 눈치채고 이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모르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평민 출신인데다가 가진 거라곤 오로지 힘뿐인 자들이다. 거기다가 다른 이들의 눈 밖에 날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자도 많았다.

이들을 선택한 건 이안이 아니다. 모두 헬리아가 직접 고른 자들이었다. 이안은 헬리아가 이들을 뽑을 때부터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조슈아와 함께 다음 왕위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다가 플로렌스 공작과 왕세자파의 힘을 모두 등에 업고 있는 게 헬리아 공주다. 응당 눈과 귀가 있는 귀족이라면 헬리아 공주에게 줄을 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초대장을 보내 친분을 다지려 하거나 선물을 보냈지만, 헬리아는 심드렁했다. 그들은 더욱 애가 닳아 로즈궁의 시녀와 시종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헬리아 공주는 8년 전의 고용인들로 채워 넣었다.

귀족들은 이번엔 친위대에 손을 뻗쳤지만, 헬리아는 재빨리 평민 출신으로 채워 넣었다. 모두 다른 자들의 간섭을 배제한 채 오로지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런 자 중에는 플로렌스 공작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안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는 계속 입을 열었다.

“모두 알다시피 많은 이가 이곳에 오길 원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 선택한 건 너희들이다.”

이안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갖고 임하도록.”

기사들의 눈빛에 작은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충성!”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훈련은 오늘부터 바로 실시한다. 친위대 임명식은 일주일 뒤로 공주님께서 직접 검을 내릴 것이다. 그때까지 아직 너희는 진짜 친위대가 아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도록.”

“옛!”

이안은 기사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기사들을 쭉 훑던 이안은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기사의 수는 열 명이어야 하는데, 사람 머리 하나가 더 많았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푸른 머리에 푸른 눈동자. 이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안이 어느 한곳을 바라보자 기사들도 그의 시선이 간 방향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웬 남자 하나가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숀이 작게 소곤거렸다. 휴와 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장님과 아는 사이인가?”

“근데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아?”

이안과 푸른 머리의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대치했다. 기사들은 이 흥미로운 상황을 지켜봤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이안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주변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듯 한기가 스몄다. 이안은 도대체 이자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기는 아무나 마음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엘라임은 이안의 말에 왈칵 짜증이 솟구쳤다.

“아무나?”

엘라임이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안을 죽일 듯 노려봤다.

‘감히 누가 누구한테 아무나야?’

“아무나는 너지.”

“…….”

엘라임과 이안 사이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경고하지. 여길 나가라.”

“네가 무슨 상관이야?”

엘라임은 이안의 공격적인 눈빛에 절로 짜증이 났다.

“나는 공주님의 친위대장이다. 관계있다.”

엘라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곳은 연무장이다. 관계가 없는 사람은 나가라.”

“애초부터 난 네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어.”

엘라임은 처음 플로렌스 영지에서 이안을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했다. 이안은 입매를 비틀었다.

“굳이 당신의 마음에 들 생각 없다.”

“흥, 비실이 주제에.”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

스릉.

이안이 검을 뽑았다. 이 치욕을 갚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듯싶었다.

“뭐야, 나랑 한판 하자는 거야?”

“이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다.”

이안이 다른 이들보다 권위적인 면은 적지만, 그는 공작가의 장남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녀 온 프라이드는 누구보다 높았다. 그런 자존심을 엘라임은 간단히 짓밟았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엘라임은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주변이 그가 만든 물방울로 가득 찼다. 기사들은 난데없이 벌어진 이안과 엘라임의 싸움에 모두들 몸을 피해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숀의 말에 세인이 그의 어깨에 턱 팔을 걸치고 말했다. 무언가 재미난 것을 발견한 듯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재밌잖아? 우리의 대장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겸. 그리고 저자도.”

세인의 시선이 이안을 지나 엘라임에게 향했다. 세인의 말에 그의 어깨동무가 짜증 났던 숀이 그들의 싸움에 집중했다.

“뭐 다치면 내가 잘 치료해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엘라임이 말하며 손을 들어 올리자 물방울이 빠른 속도로 이안을 향해 쇄도했다. 사방에서 짓쳐 들어가는 물방울의 위력은 일반 비수보다 더 강력했다. 이안은 칼로 물방울을 쳐 내며 엘라임에게 다가갔다. 상대는 정령사, 그것도 상급 이상의 정령사이다. 이안은 이를 앙다문 채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였다. 캐스팅을 하지 않아 딜레이가 없고, 공격 패턴이 마법사들보다 자유롭다. 무엇보다 이안은 이제까지 정령사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치잇!”

이안은 이대로 하나하나 쳐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단숨에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안이 뿌린 검기에 물방울들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안은 그 즉시 틈을 놓치지 않고 엘라임의 품으로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큭.”

엘라임은 빠르게 쇄도하는 이안의 칼에 결국 뺨이 긁히고 말았다.

‘힘만 제대로 썼으면.’

자신이 힘을 쓴 걸 알면 헬리아가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아차!’

그제야 헬리아를 떠올린 엘라임의 얼굴이 구겨졌다.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지.’

하지만 이렇게 당하고 끝낼 수는 없는 노릇. 엘라임은 이제까지 펼쳤던 물방울보다 더 크고 거대한 물로 된 용을 소환했다. 과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엘라임은 누구보다 당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물며 그것이 검둥이라면 더더욱.

“흥, 이건 못 당할걸!”

수룡이 용트림을 하며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의 눈이 모두 화등잔만 해졌다.

이안은 거대한 수룡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 힘이라면 쉽게 막지 못하리라. 이안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끌어올렸다.

촤아아악!

수룡이 이안을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들려온 음성에 수룡은 단번에 힘을 잃고 물이 되어 흘러 떨어졌다. 그 물을 고스란히 이안이 뒤집어썼다.

“…….”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긴 이안은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헬리아가 눈에 불을 켜고 걸어오고 있었다.

“엘라임!”

엘라임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 하하. 왔어?”

“지금 왔어란 말이 나와!”

헬리아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엘라임의 기운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던 참이었다. 한데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기운을 느끼고 와보았더니 떡하니 기사들 앞에서 수룡이나 만들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게…….”

엘라임은 시선을 피했다. 헬리아는 말이 통하지 않는 엘라임 대신 이안에게 물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

이안도 뭐라 말하기 곤란하여 입을 다물어버렸다.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 버렸다고 하려니 스스로가 비참했다. 평소 냉정하기로 유명한 자신이었지만 엘라임에게는 욱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헬리아는 한쪽 입을 틀어 올렸다.

“따라와.”

엘라임은 자신을 가리키자 퍼뜩 놀랐다.

“당신은 알아서 수습해.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지.”

“아무리 공주님의 사람이라곤 하나 여기는 궁입니다. 신분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검둥이가!”

엘라임이 이안의 말에 버럭 화를 냈다. 헬리아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그건 내가 보증해.”

“하지만…….”

“내가 보증한다고.”

“…….”

이번엔 이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전에 헬리아가 엘라임의 손을 잡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

이안은 갑자기 치미는 짜증에 주먹을 쥐었다. 알 수 없는 불쾌함. 그것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도대체 저자는 그녀의 무엇이란 말인가? 그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참을 수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기사들은 집 나간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엄청 예쁘다.”

“봤어? 완전 여신이야!”

“소문은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야. 오길 잘했어!”

헬리아의 모습을 처음 본 기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디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은 기사들에게 충분히 명예로운 일이다. 하물며 그 레이디가 여신도 울고 갈 미모의 소유자라면.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르다.”

“근데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야?”

헬리아의 외모에서 푸른 머리 남자로 화제가 옮겨갔다. 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삼각관계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아니야, 아무래도 수상해.”

숀이 의혹을 부풀렸다. 기사들은 숀의 말에 이리저리 살을 붙이고 떠들어댔다.

“조용!”

그때 이안이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기사들은 솜털이 서는 느낌을 받았다.

‘화, 화났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들의 몸을 휘저었다.

“아무래도 정신 상태가 불량이군.”

기사들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안의 눈은 시커먼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훈련에 들어가지.”

이안이 입을 비틀었다.

“연무장 오백 바퀴.”

“오, 오백 바퀴요?”

기사들은 혼비백산했지만 그럴수록 이안은 숫자를 올렸다.

“너무 쉽나? 그럼 육백 바퀴.”

“으악! 바, 바로 뛰겠습니다.”

기사들은 배속받은 첫날부터 입에 단내가 나도록 연무장을 뛰어야 했다. 그날 이후 이안은 기사들 사이에 암암리에 사신으로 불렸다.

* * *

헬리아는 엘라임을 자신의 집무실로 데리고 가 모든 시녀와 시종을 물렸다. 몇몇 이가 눈을 반짝이며 헬리아와 엘라임을 힐끔 쳐다보고 돌아갔다. 방 안에는 무겁게 침묵이 흘렀다.

‘화, 화났나?’

엘라임은 의기소침해져 조용히 헬리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되레 엘라임은 초조해졌다.

그때 헬리아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도대체 거긴 왜 간 거야?”

헬리아는 좀 전까지 그와 자신을 수상하게 보던 이들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었다. 쓸데없는 소문을 막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아팠다.

엘라임은 뽀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야 네가 날 안 부르니까.”

“…….”

엘라임의 시무룩한 표정에 헬리아는 뜨끔했다. 상대는 정령이지만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다. 과거 엘라임이 정령은 도구가 아니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 부르는 거랑 기사단에 간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기사단에 들어가면 자주 볼 거 아니야.”

심통이 난 엘라임의 말에 헬라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정령이 기사가 된다고?”

“정령이 기사 하면 안 되는 법도 없잖아.”

헬리아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후우…….”

이걸 어찌해야 하는지. 하지만 그를 기사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를 달랬다.

“밖에 나오고 싶다면 자주 부를게.”

엘라임은 헬리아의 말에 뭔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태도가 싫었다. 자신은 그저 밖에 나오고 싶어서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 검둥이 녀석 곁에 헬리아가 있는 게 싫었다. 그 자리는 분명 자신의 자리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 달리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저번에도 그래놓고 며칠 동안 부르지 않았잖아. 데이지궁에 있을 때는 매일 불렀으면서. 사람이 변했어.”

엘라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겼다. 하지만 헬리아는 순순히 그의 뜻에 동의할 마음이 없었다. 엘라임이 밖으로 드러나면 오히려 그와 함께하기 힘들어진다. 지금의 자유로운 상태야말로 최적인 것이다.

“정말 약속할게. 매일 부를 테니까 기사가 되겠다는 말은 하지 마.”

계속 반대하는 헬리아를 향해 엘라임이 눈을 흘겼다.

“그놈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데? 내가 검둥이보다 못한 게 뭔데.”

“검둥이는 또 누구야.”

“누구긴 그 검둥이 놈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헬리아는 머리가 아팠다. 엘라임은 잔뜩 짜증이 나 있었다.

‘누구보고 관계가 없대?’

그 어떤 이도 자신과 헬리아 사이만큼 가깝지는 않을 것이다. 엘라임은 관계도 없는 놈한테 관계가 없다는 말을 들은 걸 참을 수 없었다.

“기사가 되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어.”

“상관없어.”

“이렇게 내 방에 함부로 있을 수도 없다고.”

“……그건.”

엘라임은 고심했지만 검둥이가 떠오르자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괜찮아.”

“하아, 도대체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씨알도 안 먹히자 헬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단칼에 잘라 버리기엔 그녀도 미안했다. 최근 바쁜 탓에 그를 거의 불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흐음.”

그녀가 고민하자 엘라임이 초조하게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헬리아가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좋아.”

“정말이지?”

“하지만 기사는 안 돼.”

“뭐야!”

엘라임이 반발하자 헬리아가 손으로 막았다.

“기사보다는 정령사로 해.”

“정령사로?”

조슈아의 곁에 마법사 카쟌이 있는 것처럼 종종 기사가 아닌 마법사가 왕족의 곁에 붙고는 했다. 그러니 정령사라고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의 특성을 버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기사는 다른 사람과 훈련해야 해. 하지만 정령사는 달라. 개인적인 시간도 주어질 거고, 만나기도 더 쉬울 거야. 로즈궁 내에 연구실을 마련해 놓을게.”

애초에 클리드의 말을 듣고 엘라임을 어떻게든 할 생각이었다. 거기다 본인 스스로 밖으로 나오고 싶다고 한다면 제대로 된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정령사 할 거야, 말 거야?”

“할게!”

엘라임이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 *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정자.

그 정자 주변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이곳은 시종은 물론 정원사조차 함부로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주위에 흐드러지게 핀 꽃은 인위적인 관리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의 힘이었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국왕 빈센트가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만든 무덤이었다. 사람의 소리 하나 없는 조용한 정자에 빈센트가 다가갔다. 그는 석조로 만들어진 정자의 기둥을 손으로 훑으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름다운 정자의 중앙에는 기다란 석조관이 놓여 있었다.

세니아, 여기에 잠들다.

빈센트는 용무늬가 새겨진 석조관을 쓰다듬었다. 온기라곤 남아 있지 않은 돌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세니아.”

낮게 읊조리는 그의 음성에 짙은 그리움과 애잔함이 담겨져 있었다.

“세니아.”

그는 연신 세니아의 이름을 부르며 관을 쓰다듬었다.

“헬리아가 아주 잘 컸어. 당신이 본다면 아마 깜짝 놀랄 거야.”

빈센트는 피식 웃으며 헬리아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자신을 전하라고 부르는 그녀의 말이 생각나 안색이 흐려졌다.

“잘한 거겠지?”

휘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이 마치 잘했다는 말 같아서 빈센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금빛이 도는 펜던트에선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빈센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당신이 준 이것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아.”

그는 쓸쓸히 웃으며 펜던트를 만졌다.

“보고 싶다, 세니아.”

꽃향기를 품은 바람이 빈센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 * *

“공주님, 후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비앙카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런 외할아버지의 방문. 비앙카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안부 인사나 전할 만큼 살가운 사람이 아닐뿐더러 목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앙카는 눈썹을 모았지만 이내 몸을 돌려 응접실로 갔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등을 꼿꼿이 세운 칠십 대 노인이 앉아 있었다. 흰 머리와 주름진 손등, 그러나 나이가 무색하게 후작의 눈빛은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빛나고 있었다.

비앙카는 괜스레 그 앞에 서면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며 후작을 맞이했다.

“어인 일이신가요?”

후작은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이리 앉거라.”

비앙카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 주문했다. 이야기가 그리 짧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비앙카가 자리에 앉자 후작은 천천히 비앙카를 훑었다. 그 눈빛에는 한 줌의 애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상품을 관찰하는 듯했다.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열아홉이더구나.”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가요?”

비앙카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그녀는 직감했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더 불만스런 말투가 튀어나왔다.

“제 나이를 외할아버지가 기억할 줄은 몰랐네요.”

그러나 후작은 비앙카의 치기 어린 도발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인사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태도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처녀가 다 되었구나. 이젠 어딜 내놔도 손색이 없겠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어요!”

그때 시녀가 차를 내왔다. 후작은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뒤 말했다.

“제국의 황태자비가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마침 둘 사이에 아이도 없고.”

“…….”

비앙카의 눈동자가 바람에 이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요?”

“황태자와 혼인하거라.”

비앙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제국의 황태자와의 혼인. 그러나 비앙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싫어요!”

후작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만한 자리에 시집가는 게 쉬운 줄 아느냐? 아이만 낳으면 제국의 안주인이 될 수 있는 자리다. 네게도 더없이 좋은 일이야.”

거대한 영토와 강력한 힘을 지닌 페르시아 제국. 아돌프 후작은 그 제국의 황태자와 혼인하라 일렀다. 하지만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혼인한 유부남이다. 거기다 아픈 황태자비를 끔찍하게 생각한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아직 황태자비가 죽지 않았다면 후궁이 아닌가.

“하지 않을 거예요.”

비앙카는 거절했다. 공주라는 신분으로 정략결혼은 피할 수 없다 해도 후궁은 되기 싫었다.

“제국의 왕비가 될 수 있다.”

비앙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국의 왕비. 무척이나 끌리는 자리다. 하지만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의도를 알았다. 오라버니에게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포장만 그럴듯하지 결국 이익을 위해 팔리는 것이다.

“저는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후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마치 웃는 듯했지만 그의 눈은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저는 인형이 아니에요. 오라버니만으로 모자라나요?”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비앙카는 순간 흠칫했지만 그녀는 더 밀어붙였다.

“저도 왕위 계승자 중 한 명이에요. 외할아버지에게, 아니, 후작님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어요.”

“하하하.”

후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비앙카는 몸이 굳어갔다.

후작은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비앙카에게 통보했다. 그것은 일방적인 명령에 가까웠다.

“조만간 제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외할아버지!”

“가소롭구나. 네가 무슨 대단한 위치에라도 있는 줄 아느냐?”

“…….”

“공주란 지위를 빼면 아무것도 저 혼자 할 수 없는 온실 속 화초면 화초답게 적당한 주인이 나타나면 잘 팔려야지. 쯧쯧,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망둥어로구나.”

“…….”

비앙카는 심한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반발하지 못했다.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을 후작은 빼앗아 갈 수 있었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볼일이 그것이라는 듯. 그 외에 할 이야기 따위는 없다는 듯.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헬리아 때문인가요?”

후작이 자리에서 멈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비앙카는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쯧쯧.”

후작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혀를 차고 몸을 돌렸다.

쨍그랑.

비앙카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어째서 내가? 내가 왜?”

비앙카의 두 눈이 붉게 변해갔다.

* * *

“치료소를 짓는다고?”

클리드가 가져온 후작의 동태를 감시한 보고서를 읽던 헬리아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후작과 치료소. 이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2왕자의 명분을 만들려는 것 같습니다. 치료소 외에 고아원을 비롯한 다양한 구제 사업을 2왕자의 이름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톡톡-

클리드의 설명에 헬리아가 책상을 두들겼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니 후작 나름대로 초조한 것이 보였다.

“한데 조금 많은데.”

후작이 세운 치료소의 숫자를 확인한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수도에 중심적으로 깔려 있었다.

“치료소만큼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과한 욕심이다. 하지만 클리드의 말처럼 적절한 조치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아무리 보이지 않은 선행이 미덕이라지만,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야 칭찬을 받는 법이다.

“이쪽에서도 뭔가 조치를 취할까요?”

명분이 필요한 것은 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클리드는 그 점을 꼽았다.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똑같이 치료소나 만들어서는 소용없지. 애초에 우린 이미 치료소가 있잖아?”

“모습을 드러내실 생각이십니까?”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는 엘라드 상단을 통해서 후작의 치료소보다 훨씬 많은 치료소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그 외에 구제 사업에도 큰돈을 대고 있었다. 그녀가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후작의 치료소 따위와는 비교 불가다.

“후작에 대해서는 계속 상황을 보고해.”

“알겠습니다.”

클리드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쪽 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초대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보다 초대는 계속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헬리아가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자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몰려들었다. 특히 회의장에서 벌어졌던 일이 암암리에 퍼지면서 왕세자파와 플로렌스 공작의 세력을 모두 얻은 그녀의 가치는 크게 격상되었다.

“줄타기의 명수들이군.”

헬리아는 비꼬았지만, 그것 또한 중소 귀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뭐든 눈치라도 있으면 죽지는 않는 법이다.

“모두 알아서 거절해.”

“후우…… 알겠습니다.”

클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족들의 초대장을 그냥 거절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대개 거절의 선물을 보내거나 편지를 씀으로써 이쪽에서도 나름 예의를 차려야 한다. 문제는 헬리아가 그 일을 클리드에게 맡겼기에 그가 일일이 써야 한다는 것. 선물이면 편하겠지만, 헬리아는 그런 곳에 결코 돈을 쓰지 않았다.

“아, 그보다.”

이걸 언제 다 하나 걱정하던 클리드는 이내 기억이 떠올랐는지, 한 장의 초대장을 건넸다. 다른 초대장과 달리 이것은 제멋대로 쌓여 있는 초대장과 함께 둘 수 없었다.

헬리아는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거절해.”

“하지만.”

그의 표정이 난감해지는 걸 본 헬리아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대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누구야?”

“비앙카 공주님께서 다과회에 공주님을 초대하셨습니다.”

“날? 걔가?”

헬리아의 표정이 썩은 사과처럼 짓물러졌다. 결코 달갑지 않은 초대였다.

“거절해. 아니, 흐음.”

거절하려던 헬리아는 마음을 바꿨다. 당장에라도 저 편지를 불구덩이에 쑤셔 넣고 불쏘시개로 쓰고 싶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헬리아 나름대로 그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어떤 유치한 수로 나올지도 자못 기대가 되었다.

“언제야?”

“아, 그게…….”

헬리아는 직접 초대장을 받아 들고 편지를 뜯었다.

“그럼 그렇지.”

헬리아는 혀를 찼다. 어디 하나 좋게 가는 법이 없고, 괴롭히는 방법에 도통 실력이 늘지 않는 비앙카다.

“징글징글하네.”

초대의 일시는 오늘 점심. 그것도 당장 한 시간 앞으로 다가온 점심시간이다. 대개 초대는 일주일 전이 필수다. 옷이며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긴 가야 하나.”

비앙카의 얼굴은 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면 그녀의 일그러지는 얼굴은 보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근처 소파에 기대어 다과를 즐기고 있던 엘라임도 함께 일어났다.

“왜?”

“나도 따라갈래.”

“네가 왜?”

엘라임은 미간을 팍 구겼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당연하게 따르는 이안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가잖아?”

“암튼 안 돼.”

헬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엘라임은 입술을 비틀었다. 아무리 호위 기사라지만 항상 붙어 다니는 꼴이 영 보기 싫었다.

“심심하다고.”

“심심하면 일이나 해.”

“일?”

엘라임은 인상을 팍 썼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노는 것도 좋긴 하지만, 정령인 그의 입장에선 자신의 계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 좋았다. 물론 이건 최근 그녀가 그를 별 신경 쓰지 않은 탓에 생긴 관심병 비슷한 것이었다.

“후작을 감시해야겠어.”

후작 곁에 사람을 붙여놓고 있지만 부족한 감이 있었다. 정보길드 베라에 의뢰를 해놓은 것도 있지만 역시 정보는 내부 운영으로 이뤄지는 게 좋았다.

“내가 멀리 가면 힘이 더 들 텐데.”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면 상관없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나 소비도 커진다. 헬리아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이참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시험해 보지. 암튼 다녀와.”

엘라임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말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헬리아는 무례하게도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초대에 응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 *

다과회가 열리는 곳은 비앙카의 궁에 위치해 있는 정원이었다. 헬리아는 초대장에 쓰인 시간에 맞춰 정원에 도착했다. 한데 이미 귀족 영애들이 모두 자리했고, 헬리아는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녀가 늦은 것처럼 말이다. 거기다 그녀를 보았음에도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유치하게 노는군.’

헬리아는 이 모든 일을 비앙카가 꾸몄다는 것을 알아챘다. 알아채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녀와 함께 따라온 이안이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그녀의 눈은 이곳에 모인 열 명의 귀족 영애를 스캔했다. 하나같이 아돌프 후작파의 귀족 영애로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헬리아가 그것에 겁먹을 위인이던가. 그녀는 유유히 웃으며 말했다.

“벌써 이렇게 와 있을 줄 몰랐네.”

그녀의 태평한 말에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흥, 늦은 줄도 모르고 뻔뻔하긴.”

한 영애가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애초에 대놓고 말한 것이다. 모든 영애가 그 말을 듣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화가 나기보다는 그냥 우스울 뿐이었다. 도대체 저치들은 뭘 믿고 저러는 건지 도통 이해 불가였다. 게다가 막말로 지들보다 높은 게 자신인데 공주가 늦으면 좀 어떤가? 헬리아는 잘못한 게 전혀 없다는 듯 당당하게 걸어갔다. 영애들도 머리는 달고 사는지 그녀에게 늦었다고 대놓고 따지는 이는 없었다. 물론 몇몇은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화를 참는 것 같았다.

‘그럼 공주로 태어나든지.’

헬리아는 조소를 지었다. 그녀의 당당한 눈빛에 불만스럽게 보던 영애들은 고개를 돌렸다.

헬리아는 적당히 그들을 눌러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가장 말단에 위치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 그녀의 지위상 상석에 앉아야 했지만 상석은 이미 자리가 다 꽉 차 있었다. 그들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웃기는 짓이군.’

하지만 순순히 말단에 앉아줄 헬리아가 아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 긴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비앙카의 오른쪽 자리로 갔다. 그곳에 앉아 있던 영애 한 명이 헬리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른 비앙카를 보았다.

비앙카는 눈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지?”

“뭐긴, 내 자리에 앉는 거지.”

그러면서 헬리아는 금안을 번뜩이며 자리에 앉아 있는 영애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봤다.

‘무, 무서워!’

그 영애는 헬리아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겁을 집어삼켰다. 암살자도 참기 힘든 그녀의 기세에 영애는 비앙카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자리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아, 예.”

헬리아는 영애를 쫓아내고 응당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인 듯 당당하게 앉았다.

“역시 여기에 앉으니까 언니 얼굴이 잘 보이네.”

비앙카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자 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문제라도?”

“…….”

비앙카는 이를 앙다물고 화를 참았다.

“이제 헬리아도 왔으니 파티를 시작할까요?”

비앙카가 일어나자 영애들이 그녀를 주목했다. 그리고 시녀가 따뜻한 차를 내오면서 간단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영애들의 현란한 혀 놀림도 시작되었다. 겉은 번지르르한 영애들인데 내뱉는 말들은 삼류 양아치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저열하기 그지없었다.

“알고 있어요? 힐스 부인, 젊은 노예랑 바람을 피웠더라구요.”

“어머어머!”

“노예랑요?”

“그러게 말이에요. 어쩜 천한 노예와.”

“하지만 그 남편을 보면 이해가 되긴 해요. 마른 생선 같잖아요.”

“호호, 그건 그래요.”

남의 뒷담화는 기본이고, 사람의 외모, 패션, 성격 등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신나게 찧어댔다.

헬리아는 그런 행태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귀족 영애 정도 됐으면 최소한의 고등 교육을 받았을 텐데 생각하는 것이며 내뱉는 말의 수준이 그들이 천하게 여기는 하층민과 다를 바 없었다.

“아참, 그보다 치료소는 잘되나요?”

뒤섞이는 대화 내용 속에서 헬리아는 귀에 익숙한 주제를 포착했다.

“사람이 얼마나 밀려드는데요. 요즘 그 일로 바쁘세요.”

“하기야 거의 무료니 돈 없는 천한 것들은 좋아하겠어요.”

“호호.”

정치에 관심이 없는 영애들도 자기 아버지의 행보에 대해서는 제법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평민들을 위해 치료소를 세운 이후 후작의 지지율이 크게 올라갔다. 조슈아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여론을 모으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조만간 때를 봐서 엘라드 상단을 드러내야겠군.’

아직까지 자신과 엘라드 상단의 관계를 감추고 있지만, 이렇게 후작이 전면에 나선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후작이 열심히 치료소를 세우고 있다지만 이미 수도에 지어진 수많은 치료소 대부분이 모두 엘라드 상단 소속이다. 그녀가 엘라드 상단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순간 그깟 치료소 몇 채 지은 후작은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영애들의 이야기는 두서가 없고 마치 잡탕처럼 마구잡이였지만, 워낙 수다를 좋아하고 비밀이란 개념이 없어 헬리아는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피곤은 하지만 의외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앞에 놓인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대로 조용히 있다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나 비앙카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헬리아, 차가 입에 맞지 않니?”

비앙카의 말에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모두 헬리아에게 돌아갔다. 헬리아는 비앙카의 눈에 어린 독기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번엔 뭘 준비했을까나.’

오히려 바라던 바라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아아, 남의 집에서 내준 차는 안 먹는 주의라…….”

비앙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헬리아는 그 모습에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언니도 조심하라고.”

“…….”

비앙카가 순간 입술을 실룩거리는 것을 헬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가소로운 년.’

비앙카의 눈에 불길이 잃었다. 짓밟고 짓밟아도 그녀는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비앙카는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헬리아를 지나 멀리 있는 이안에게 닿았다.

이안 플로렌스.

플로렌스 공작의 장남으로 뛰어난 실력은 물론 잘생긴 외모로 모든 귀족 영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내였다. 그가 헬리아 공주의 호위 기사로 간다는 말에 여러 영애가 눈물을 삼키곤 했다. 비앙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까부터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한 영애에게 닿았다. 영애는 비앙카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플로렌스 경과 친한 모양이더구나.”

“…….”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앙카의 말에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그 영애의 시선도 이안에게 갔다.

“한데 저런 곳에 서 계시다니, 너무한 거 아니니? 아무리 네 호위 기사라도 너무했구나.”

비앙카가 옅게 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데이지궁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썼다고 들었는데 좀 더 살갑게 대하렴. 그래도 플로렌스 공자님이신데.”

비앙카의 말은 파장이 컸다. 남녀가, 그것도 지위도 낮지 않은 두 사람이 한 방에서 잠을 자다니. 귀족 영애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궁이지만 같은 방에서 잔 적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녀가 말한다고 해도 그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쇼를 해라.’

헬리아는 심드렁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호위 기사니까.”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가는 모습에 비앙카는 그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구나. 네가 공자와 혼인한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못 들었니?”

헬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몰라도 우스웠다. 물론 그런 소문이 돌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미 플로렌스 공작이 헬리아 측에 가담했고,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아들을 호위로 넣은 게 아니냐는 말들이 오갔다.

“글쎄, 그런 소문이 있었던가?”

“몰랐니? 그래도 그 소문이 맞는 모양이구나. 이런 파티에조차 같이 올 정도면. 분명 호위 기사는 데려오지 말라고 보냈는데.”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영애들의 호위 기사는 물론 비앙카의 호위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을 물 먹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꼴이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시간은 때운 것 같았다. 어린애 놀음에 어울려 주는 것도 이것으로 끝이다.

“시간도 다 됐으니 먼저 일어날게. 나는 누구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

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녀의 눈매가 미약하게나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헬리아가 가장 말단에 앉아 있는 영애를 지나칠 찰나였다.

“다, 당신에게 그를 넘겨줄 수 없어!”

순간 말단에 앉아 있던 영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헬리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 헬리아는 그녀에게 품을 내주고 말았다. 순식간에 단도는 헬리아의 복부를 뚫었다.

“까아악!”

그 모습을 본 영애들의 외침 소리가 헬리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

그녀의 몸이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이안이 빠르게 달려왔고, 비앙카의 비웃음이 그녀의 눈에 스쳐 지나갔다. 단도에 독이 발라져 있는지 시야가 흔들거렸다.

달려온 이안이 헬리아를 찌른 여자, 로즈 영애를 거칠게 떼어냈다.

“공, 공자님!”

“당신 제정신이야!”

이안의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로즈 영애는 울음을 터뜨렸다. 주위는 혼비백산, 영애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저는 공자님을!”

“공주님!”

이안은 쓰러진 헬리아를 흔들었다. 독 때문인지 지혈이 되지 않아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젠장.”

“……다른 곳으로.”

헬리아의 말에 이안은 이를 물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로즈 영애에게 한 소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 똑똑히 기억하지.”

“으, 으으.”

이안의 살기에 로즈 영애는 주저앉아버렸다. 이안의 살기는 한낱 영애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웠다. 이안은 헬리아를 안고 서둘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이안은 자신을 책망했다. 호위라고 붙어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이 부러지겠네.”

헬리아를 안아 들고 의료소로 가려던 이안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놀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헬리아가 또렷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번 속았으면 됐지, 두 번 속냐?”

이안이 멍하니 있는 사이 헬리아가 키득거리며 그의 품에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멀지 않은 자신의 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헬리아의 복부에는 아직도 피가 선연했다. 한데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다니.

“치료 마법은 뒀다 뭐 하게.”

“…….”

“뭐, 비앙카가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이안의 미간이 일순 찌푸려졌다. 왕세자의 일로 그렇게 당하고도 또 그녀의 수작에 넘어가 버렸다.

“후작파 영애들이 있는 곳에서 헬리아 공주가 찔렸다. 비앙카는 물론 후작파도 이번 일로 골머리 꽤나 썩을 거야.”

“……그래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이런 좋은 기회는 확실히 써먹어야지.”

피할까 싶었지만, 직접 찔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내버려 두었다. 거기다 상대는 후작 측에 힘을 싣는 가문의 영애다. 이런 기회를 그녀가 놓칠 리 없었다.

헬리아는 터벅터벅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없자 그녀는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이안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안의 눈이 낮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본 헬리아는 흠칫 놀랐다.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시엔 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당신은 환자니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없겠죠.”

그러면서 이안은 헬리아의 팔을 잡아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니, 입만 웃고 있을 뿐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안은 어리둥절한 모습의 헬리아를 보며 낮게 조소를 지었다. 걱정한 자신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두 번이나 그녀가 칼에 찔린 모습을 보았다. 그녀에게 화가 났고, 그런 그녀를 다치게 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인가!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기왕 할 거면 다급한 모습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갑자기 헬리아를 포대 자루 업듯이 어깨 한쪽에 척 매달더니 최고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환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머, 멈춰!”

고개가 땅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다 보니 그의 어깨에 자꾸만 배가 눌렸고, 토할 듯 어지러웠다. 그러나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야, 야!”

그렇게 어깨에 매달린 채 달린 덕분에 궁 안에서는 헬리아 공주가 칼에 찔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헬리아는 다시는 이안 앞에서 칼에 찔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지금 제정신이더냐?”

아돌프 후작의 노성에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꼬투리를 잡으려는 저들이다. 그런데 비앙카가 벌인 짓은 그들에게 흠을 잡을 꼬투리를 내준 꼴이었다.

비앙카 공주가 다과회에 다수의 후작 파벌 귀족 영애를 모아놓고 헬리아 공주에게 칼을 꽂았다는 이야기가 벌써 성내에 파다했다. 헬리아 공주를 찌른 로즈 영애는 이미 감옥에 갇혀 큰 벌을 면치 못할 것이며, 그녀의 가문 또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로즈 영애의 아버지 할슨 백작은 후작파에서도 재정적인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인사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타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백작가는 비앙카 공주가 로즈 영애를 사주한 게 아니냐며 후작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보거라!”

“…….”

비앙카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후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앙카와 헬리아 공주 사이의 질긴 악연은 그도 알고 있지만, 어차피 어린애들 싸움이라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다. 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경우에는 달랐다.

“다음 달에 제국에서 사신이 올 것이다. 그동안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

“…….”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고 방을 빠져나갔다.

“후우…….”

후작은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몸을 뉘었다.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국이거늘, 한낱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 하는 비앙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페이튼 자작이 다가왔다.

“후작님.”

“무슨 일이냐?”

“수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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