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14화 (14/42)

골드퀸

4

제1장 습격

화창한 하늘 아래, 활짝 핀 꽃들 사이로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푸석거리는 금발을 지닌 사내는 잔뜩 긴장해 굳어 있는 남자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저, 전하…….”

가만히 있는 게 답답한지 노엘이 몸을 틀자 그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세드릭의 미간이 살짝 올라갔다.

“움직이지 마.”

“윽.”

노엘은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세드릭을 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다 또다시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몸을 가만히 있어라, 눈을 깜박이지 마라 등등의 주문은 그를 고역스럽게 만들었다. 하나 누구의 명이라고 어기겠는가. 그가 하라면 하는 거지. 누구보다 세드릭을 아끼는 노엘로서는 얌전히 그의 모델이 되어줄 수밖에 없었다.

“……끄응.”

그가 몸을 비비 꼬자 그 모습이 웃긴지 세드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마치 벌 받는 강아지 같았다.

“……웃으실 겁니까?”

“안 웃었어.”

“웃었지 않습니까.”

“노엘이 착각한 거야.”

노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기자 세드릭은 시치미를 떼었다. 감히 한낱 호위 기사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니지만 노엘의 행동을 세드릭은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발하는 그가 웃긴지 세드릭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결국 그 모습에 노엘은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함께 웃어버렸다.

치료사에게 추행당할 뻔했던 그날, 세드릭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울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조용히 이불을 덮고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노엘은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세드릭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노엘을 맞이하였다. 그때 세드릭의 눈가가 붉어져 있는 것을 노엘은 알아차렸지만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가 참고자 한다면 노엘은 그저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 됐습니까?”

“아니, 아직 가만히 있어봐. 이제 얼굴을 그릴 거니까.”

세드릭은 연필을 들고 노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얼굴 안에 눈썹을 그리고 눈과 코를 그려 넣었다. 마지막으로 작게 웃고 있는 그의 입을 그려 넣었다. 그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노엘은 웃을 때마다 왼쪽 입술이 살짝 올라가곤 했다. 마치 자신의 죽은 친우처럼.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아디스는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이후 졸업 후에는 그에게 성을 내려 자신의 기사로 받아들였다. 차라리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그랬다면 그리 죽지 않았을 텐데. 시신조차 찾지 못한 친우를 생각하며 세드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세드릭은 손을 멈추고 노엘을 바라보았다. 닮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같을 줄은 몰랐다. 분명 그는 죽었을 텐데. 왜 자꾸 그가 자신의 친우인 아디스로 보이는 것일까.

‘……정말, 아디스 너인 거야?’

세드릭의 푸른 눈동자가 노엘 안에 감춰진 친우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그를 주시했다. 세드릭의 손이 떨려왔다.

“저하?”

세드릭의 눈빛이 묘해지자 노엘이 물었다. 그의 눈동자도 세드릭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아직은. 노엘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저하.”

노엘의 부름에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웃는 습관조차 그와 닮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와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 처음 본 사이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사람처럼 익숙함을 느꼈다. 아디스가 곁에 있는 것처럼.

“노엘…….”

“예.”

입이 근질거렸다. 네가 맞냐고, 네가 아디스가 아니냐고.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아디스가 아니라면, 세드릭은 더 슬플 테니까.

“다 됐다.”

세드릭은 그림을 완성했다.

그때 시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하.”

“무슨 일이냐?”

“치료사님께서 오셨습니다.”

“…….”

세드릭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치료사 말이더냐?”

“예.”

세드릭은 눈을 감았다. 여전히 몸이 떨리고 두렵지만 피할 수 없었다.

“알겠다. 바로 가지.”

잔뜩 긴장한 세드릭의 어깨를 노엘의 손이 감쌌다.

“괜찮을 겁니다.”

“……응.”

세드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치료사 리아라고 합니다.”

긴 금발을 하나로 땋아 등 뒤로 내리고 흰 얼굴의 반은 알이 검은색인 요상한 검은색 안경으로 가렸다. 게다가 옷차림 또한 이상했는데, 흰 가운을 두르고 있었다. 세드릭은 이번에 온 치료사가 여자라는 것에 안도해하는 한편, 그 특이한 복장에 놀랐다.

“안경은…….”

“죄송합니다. 눈에 상처가 있어서.”

“……그렇소?”

“예, 그러하답니다.”

“…….”

안경을 쓴 이유가 상처를 가리기 위함이라고 하니 세드릭은 차마 벗으라고 강요하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냥 얼버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검사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아, 그보다 먼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세드릭이 의아해하자 헬리아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푸른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말쑥한 사내였다. 엘라임은 휠체어를 끌고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저 사람은?”

“아, 제 조수입니다.”

졸지에 조수가 된 엘라임은 헬리아 앞으로 휠체어를 끌고 왔다. 헬리아는 세드릭에게 휠체어를 잘 보이게 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그 폼이 제법 물건 파는 약장수의 냄새를 풍겼다. 그것도 사이비 같은.

“이번에 제가 아는 상단에서 개발한 특수 휠체어입니다. 인체 공학적인 설계는 물론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치유 마법을 새겨 넣어 한층 편안한 착용감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

이 사람은 치료사인가, 아니면 장사꾼인가? 그도 아니면 사이비? 세드릭은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시선은 새로운 휠체어로 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는 것 같았지만 휠체어는 그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현재 그가 쓰고 있는 휠체어도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지만 불편한 점들이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가볍고 더 편안해 보였다.

“한번 앉아보시겠습니까?”

“…….”

그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말했다.

“사양하지 마세요. 공짜는 아니니까.”

그렇다면야. 왠지 장사꾼에게 놀아난 기분이 들었지만 현재 사용하고 있는 휠체어는 낡고 불편했다.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세드릭이 노엘을 불렀다.

“노엘.”

“예, 저하.”

노엘이 세드릭의 몸을 들어 헬리아가 가져온 휠체어에 앉혔다. 세드릭은 조금 얼떨떨했지만 이내 휠체어에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다 시원한 기운이 자신의 몸 안으로 스며들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온몸에 청량감이 돌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이런 휠체어가 있다니.

“굉장해.”

세드릭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후후, 몸에 활력을 돋우는 마법진을 새겼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급 마나석만 끼워 넣으면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어떠십니까?”

“정말 괜찮네.”

세드릭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인가?”

“가격은 500골드입니다.”

“……그, 그렇게 비싼가?”

세드릭은 가격을 듣고 놀랐다. 500골드라니. 아무리 자신이 왕족이며 왕세자지만 너무 비쌌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미 가격은 왕비마마께서 지불하셨습니다.”

“…….”

세드릭은 어머니에게 너무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간 치료사들에게 지불한 비용도 어마어마할 텐데.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탔던 휠체어를 보았다. 어머니에게 죄송스럽지만 도저히 다시 저걸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왠지 낚인 것 같다. 한데 문제는 낚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바로 검사에 들어가죠.”

“노엘, 날 침실로.”

“아닙니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검사할 수 있습니다.”

세드릭은 헬리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아직 그날 있었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 다들 있는 곳이라면 오히려 안심이었다.

“담요를 치워도 될까요?”

“노엘.”

세드릭이 노엘에게 담요를 건네주었다. 헬리아는 세드릭의 다리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바지 밑단을 올리자 뽀얀 다리가 보였다. 그녀의 다리보다 더 희고 가늘어 보였다. 외관상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겉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좀 더 자세한 진단을 위해 그의 다리를 만졌다. 그때 세드릭이 헬리아의 손길에 살짝 놀란 듯 흠칫했다. 그의 반응에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경은 살아 있군. 하반신 마비는 아닌 것 같은데. 흠, 근육이 거의 없고 잔뜩 경직되어 있어. 그러고 보니 사고 이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가?’

베로니카 공작에게 마법을 배우면서 의학에 대해 공부했던 헬리아다. 뿐만 아니라 포션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몸에 대해 연구했다. 얕지만 지구에서의 의학 지식도 있어 세드릭의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었다.

“어떤 것 같나?”

그다지 기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나 그도 그럴 게 벌써 3년이다. 세드릭은 이미 자신의 다리가 고쳐질 거란 생각은 아예 접었다. 그저 어머니의 노력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모른 척할 뿐이었다.

‘이건…….’

헬리아가 이곳의 의학을 배우면서 안 것은 이곳의 의술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의 의술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포션과 신성력에 있었다.

하지만 포션으로 인해 이곳의 의학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저 포션 하나로 치유가 되는데 무엇하러 약을 개발하고 의술을 발달시키겠는가. 포션은 의학의 발전을 저해시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건 약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치료했어야 했다.

“저하.”

헬리아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검은 안경 속에 감춰진 금빛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아픈 거 좋아하십니까?”

왠지 그 순간 세드릭은 오한을 느꼈다.

* * *

세드릭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푸른 눈빛 속에는 묘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일렁이며 드러났다.

“그자의 말이 사실일까?”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아직도 좀 전의 일로 인해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세드릭은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금발의 치료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특이한 복장에 검은 안경을 쓴 이상한 여자. 그런데 그녀는 말했다.

“걸을 수 있습니다.”

3년간 어느 치료사도 그렇게 확신에 찬 말투를 내비친 적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누구도 공언하지 못한 그 말을 서슴없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에 찬 말투로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말 사실일까? 그녀의 말대로 나을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햇빛을 받지 못해 하얗다 못해 창백한 다리. 사내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얇고 부서질 듯 나약한 다리.

‘3년간 자신을 옥죄던 이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노엘. 그자의 말대로 정말 내가 걸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아무도 치료하지 못했어. 근데 정말 그 말을 믿어도 될까?”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자 세드릭은 혼란스러웠다.

“저하, 나으실 수 있을 겁니다.”

노엘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

세드릭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의 선택은 결정되어 있었다. 치료를 받는다. 그것 외에 그가 선택할 여지는 없었다.

“……참 이상한 여자였어.”

그는 헬리아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묘해. 묘하게 익숙하면서 편안했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야.”

그 우스꽝스런 옷도, 검은 안경도 그녀의 묘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전혀 믿음직스런 모습이 아닌데도 지금껏 봐왔던 수많은 치료사보다 더 믿음이 갔다. 그녀는 확고히 말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목소리.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일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아니,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치료를 받겠어.”

결정을 내린 세드릭의 얼굴은 후련해 보였다. 노엘은 기대감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그를 보며 한 가지 걱정을 떠올렸다.

“……고통스럽다 하였습니다.”

세드릭은 노엘의 말에 헬리아가 내뱉은 말을 상기했다.

“지옥을 보게 될 겁니다.”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지옥? 사고 이후 3년의 시간은 내게 지옥이었어.”

세드릭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껏 감내해 왔던 그 고통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아픔 따위 두렵지 않아.”

* * *

“으윽!”

세드릭이 철퍼덕 주저앉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팔락.

그때 옆에서 누군가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옆에는 다과와 따뜻한 홍차까지 있었다.

“으득.”

세드릭은 이를 물었다.

“저하!”

주변에서 시종과 시녀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세드릭이 만류했다.

“만지지 마라.”

“하오나.”

세드릭의 눈빛에 시종과 시녀들은 할 수 없이 물러났다. 세드릭이 날카로운 눈으로 여유롭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헬리아를 향해 물었다.

“정말 이리하면 나을 수 있는 건가?”

차를 마시고 있던 그녀가 입을 떼고 말했다.

“저하의 다리는 사고 이후 오랫동안 쓰지 않아 근육양이 저하되고 일시적으로 마비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근력을 늘리기 위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세드릭은 자신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고작 책이나 보며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심통이 났다.

헬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제가 아픕니까? 저하가 아픈 거지.”

“…….”

세드릭은 이를 물고 다시 그녀가 가져온 이상한 기구에 몸을 실었다. 그것은 양옆에 봉이 설치된 기구로, 그가 걸을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역할을 했다.

“윽.”

팔에 근력이 떨어져 제대로 버티는 것도 힘들어 매번 꼬꾸라지기 일쑤였다. 세드릭은 잘 움직여지지 않은 몸에 울상을 지었다. 거기다 너무 다리가 아팠다. 그런데 이 짓을 1년 동안 해야 한단다. 처음 1년이란 시간은 그리 길지 않게 보였다. 오히려 1년만 치료를 받으면 걸게 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는 말이다.

탁!

헬리아가 책을 덮었다. 세드릭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헬리아는 씨익 웃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두 시간씩 치료를 도맡았다. 세드릭이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 물었다.

“정말 그냥 가는 건가?”

“저하는 꾸준히 하셔야지요.”

“…….”

어떻게 저렇게 얄미울 수가. 헬리아는 세드릭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웃었다.

‘힘들긴 할 거다.’

옅게 실소하며 말했다.

“언제든 그만두고 싶다면 말씀하세요. 뭐, 저야 손해는 없지만요.”

“…….”

세드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의 복장을 뒤집으러 온 건지, 아니면 치료를 하러 온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럼 저는 갑니다.”

유유히 나가는 헬리아의 뒷모습에 세드릭은 반드시 낫고 말리라 전의를 불태웠다.

“아, 아파.”

침대에서 세드릭은 침음을 흘렸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노엘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여전히 아픈지 세드릭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본 노엘은 당황해 그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괘, 괜찮으십니까?”

“아프니까 살살해.”

말할 기운도 없다. 세드릭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죄송합니다.”

노엘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세드릭의 굳은 다리 근육을 풀어주고 있었다. 헬리아가 치료가 다 끝난 다음엔 마시지를 해야 좋다고 그에게 마사지를 하는 법을 알려주고, 몸을 이완시켜 주는 향초를 놓고 갔다. 방에는 향초의 그윽한 냄새가 가득했다.

“……하아, 노엘.”

“예, 저하.”

“후우…….”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걸 일 년을 더 해야 한단다. 아픔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그렇게 나불대던 자신의 입을 확 꿰매 버리고 싶었다.

“저하?”

게다가 자신이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자신을 보며 비꼬는 그녀의 말투는 정말이지 얄미웠다. 가끔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작게 ‘독한 놈’이라고 읊조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차마 그만두고 싶다는 약한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말을 하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봐서 일부러 그가 말을 못 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세드릭은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노엘.”

“예, 저하.”

“그녀는 악마가 아닐까.”

노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 * *

“다리를 치료한다고?”

아돌프 후작의 날카로운 물음에 페이튼 자작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으레 그렇게 지나가는 치료사인 줄 알았으나 같은 치료사가 일주일 넘게 궁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분명 치료할 수 없다 하지 않았나!”

아돌프 후작의 음성에 페이튼 자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작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이대로 세드릭의 다리가 낫는다면 그의 대계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치료사를 죽여라.”

“예.”

“그리고 왕세자도 함께 죽여라.”

후작의 명에 페이튼 자작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존명.”

후작의 눈이 매처럼 빛났다.

* * *

치료가 다 끝나고 간신히 샤워를 마친 세드릭은 침대에 널브러졌다. 아직 덜 말라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노엘이 와서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세드릭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치료가 끝난 것에 대한 감사와 내일 또 있을 치료 때문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헬리아가 세드릭이 어느 정도 기운을 추스르자 입을 열었다.

“얼추 따라오시는 것 같으니 방식을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세드릭의 치료를 맡은 지 대략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저번처럼 대충 차나 마시고 돌아갈 것 같더니 그래도 치료사 노릇은 하려는 모양이다.

“바꾼다니?”

세드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자 헬리아는 그 모습이 퍽 어린애 같아 픽 웃었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럼 이제 아프지 않게 치료를 하는 거야?”

처음의 딱딱하고 격식 있는 말투와 달리 이제는 제법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치료 기간 내내 악을 쓰며 반말을 하다가 끝나고 난 뒤 다시 격식 있게 말하는 것도 우스워 그냥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헬리아는 웃었다. 그에 안심한 세드릭도 같이 웃었다.

“농담이시죠?”

“……역시 그렇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물론 아주 조금 기대하긴 했지만. 그녀의 말에 풀이 팍 죽은 세드릭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럼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응.”

“내일 뵙죠.”

“아, 저기.”

세드릭의 말에 헬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같이 밖에 나가지 않을래?”

“밖이요?”

헬리아는 어리둥절했다.

* * *

화방 안으로 들어서자 유화 냄새가 가득했다. 헬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열심히 안을 구경하고 있는 세드릭을 보았다. 왕세자와 화방이라니. 제법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묘하게 맡아지는 냄새가 바로 유화 물감 냄새였나 보다.

헬리아는 최근 들어 가장 환하게 웃는 세드릭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왜 같이 가자고 했나 봤더니 공범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궁의 비밀 통로를 지나 성을 빠져나온 세드릭은 웃으며 헬리아에게 말했다.

“치료를 위해서라고 하면 파에톤 경도 뭐라 하지 못할 거야.”

치료를 빙자한 땡땡이를 치고 싶었던 건지 헬리아를 데리고 냉큼 밖으로 나와 버렸다. 거기다 혹여 파에톤이 붙잡을까 싶어 비밀로 했다. 하기야 그 몸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누가 허락하겠냐마는. 세드릭의 행동력에 헬리아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마이 페이스가 국왕과 판박이다.

“자.”

간단하게 쇼핑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가게로 들어온 헬리아와 세드릭, 그리고 세드릭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노엘이 테이블에 앉았다. 세드릭이 건넨 물건을 보고 헬리아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뇌물.”

세드릭이 씨익 웃었다. 헬리아는 선물을 받아 들고 다시 세드릭을 보았다.

‘뇌물이라니.’

헬리아는 속으로 실소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입막음이에요?”

세드릭은 그녀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것도 있고, 그냥 뭐.”

세드릭은 좀 머쓱한지 그저 환하게 웃었다. 헬리아는 그의 웃음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닮았어.’

그녀는 세드릭의 모습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와 똑 닮은 푸른 눈동자와 황금빛 물결치는 금발을 지닌 사람. 빈센트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헤실거리며 웃지만 진지할 때는 누구보다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만약 이 사람이 다리가 다치지 않았다면 능히 왕위에 올라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성군이라…….’

그때 세드릭이 헬리아의 손을 잡았다.

“받아줄 거지?”

말갛게 웃는 세드릭의 모습에 헬리아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선물 고마워요.”

헬리아는 작은 그림을 품 안에 넣었다.

* * *

헬리아가 바쁘다며 돌아가고 가게 안에는 세드릭과 노엘만 남았다. 세드릭은 가볍게 주스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그의 휠체어를 힐끔거렸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쳤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노엘의 말에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나온 나들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나왔다고 하지만 그도 용기를 낸 것이었다. 사고 이후 휠체어를 탄 자신을 바라보는 동정 어린 눈빛이 싫어서 나오지 않았다.

가엽다는 시선도, 보통 사람이 아닌 장애인 취급받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치료를 하고부터 용기가 생겼다. 아직 걷지 못하지만 왠지 걸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의 생동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가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과 말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야?”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도 소리를 듣자 웅성거렸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손님 몇 명이 밖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들어와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뭐야?”

한 사내가 말하자 밖에 나갔다 들어온 이가 말했다.

“짐마차가 넘어졌다는군.”

“그게 사실인가?”

“사람을 피하려다가 마차가 전복되었다네. 한데 운도 없지. 짐이 너무 많아서 마차가 무너져 내리면서 안에 있던 사람이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야.”

“저런! 그럼 얼른 꺼내야지!”

“그게, 힘으로 도통 꺼낼 수가 있어야지. 이럴 때 힘 좋은 사람이라도 있으면.”

“쯧쯧, 어찌하나.”

어찌할 바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모습에 세드릭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

“예.”

“가서 도와주고 와.”

노엘은 그 말에 인상을 썼다. 그는 세드릭의 호위 기사였다. 당연히 호위 대상을 두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자신이 나간 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게다가 점점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제, 제발 좀 도와주시오!”

밖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안에 아이가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 아버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세드릭은 더욱 간절한 눈으로 노엘을 바라봤다.

“노엘.”

“저는 저하의 호위 기사입니다. 명을 물러주십시오.”

“바로 코앞이야. 누가 날 해칠 것도 아니고. 아이가 갇혀 있다고 하잖아? 응당 기사라면 약자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하오나 저하…….”

“노엘.”

“…….”

결국 그의 단호한 눈빛에 노엘은 그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리 강경하게 나온다면 도통 그의 의지를 꺾을 방법은 없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안심이 되지 않는지 여전히 걱정 어린 시선으로 혼자 남게 될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불러주십시오.”

“응.”

세드릭은 밖으로 나가는 노엘의 모습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못내 속상했다. 그래도 사고가 나기 전에는 제법 검술 실력도 좋아서 그 나이 대에 적수가 없을 정도였거늘. 하나 그것도 벌써 옛일이 되었다. 이제는 이렇게 보호받아야 할 처지인 것이다.

“다리야. 조금만 있으면 걸을 수 있겠지?”

자신의 부실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전보다 더 살이 붙어 통통해졌지만 여전히 희고 걷지 못하는 다리였다.

노엘이 밖으로 나간 지 대략 한 시간이 흘렀다.

‘왜 안 오지?’

그런데 노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주위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마차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다행히 어떤 남자가 아이를 구해 주었네.”

“그럼 그 남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말에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까?”

세드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 불안감이 차올랐다. 결국 노엘을 찾기 위해 휠체어를 움직였다. 한데 가게 안이 제법 붐벼 휠체어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맥주를 들고 있던 사내와 부딪치고 말았다.

“읏!”

“이런 젠장!”

사내의 앞섶이 맥주로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하나 세드릭도 맥주가 튀어 머리가 축축했다. 그러나 제가 먼저 부딪친 거라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게 됐소.”

“다 젖었잖아? 미안하다면 다야?”

불행히도 상대는 용병인지 사내의 몸과 얼굴엔 상처가 가득했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짜증 나는지 눈을 부라리며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세드릭은 얼른 수습하려고 말을 건넸지만 사내는 그를 위아래로 보더니 혀를 찼다.

“젠장, 별 병신 같은 것과 부딪쳐서.”

“……충분히 사례는 하겠소. 하나 말이 무례하군.”

세드릭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속은 쓰라렸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사내는 그가 떠는 모습을 보고는 한껏 조소를 지었다.

“꼴에 병신이라고 유난 떨기는.”

“말을 함부로 한다고 생각지 않소?”

“하, 재수 사납게 이런 놈이랑 부딪쳐서는. 그럼 병신을 병신이라 하지 뭐라고 해?”

“…….”

화가 났다. 한데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속이 상하고 분했다. 얼른 사례를 하기 위해 돈주머니를 찾았지만 아차 싶었다. 돈은 전부 노엘이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자 사내의 표정이 점점 야비하게 변했다.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돈이 없어?”

“일행이 오면 주겠소.”

“어이, 괜히 거짓말하지 말라고. 보아하니 그동안 혼자 있었던 것 같은데, 일행은 그냥 간 거 아니야?”

그 순간 세드릭의 몸이 굳어졌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사내는 자신을 보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세드릭은 불안해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의 어깨를 사내가 우악스럽게 잡아 이끌었다.

“윽!”

“도망가면 안 되지.”

사내에게 붙잡힌 세드릭은 신음을 흘렸다. 그 사내는 갑자기 세드릭의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냐!”

사내는 묵묵히 그를 끌고 가게 뒤로 나왔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기 시작하자 세드릭이 소리쳤다.

“노, 노엘!”

그러나 사내가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조용히 하라고. 세자 저하.”

“……!”

세드릭의 눈이 커졌다. 그의 목에 날카로운 검이 드리워져 있었다. 공포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날의 사고가 떠올랐다. 전복된 마차, 그리고 자신의 몸을 난자했던 암살자들.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 세드릭은 사색이 된 얼굴로 손을 덜덜 떨었다.

“어, 어째서?”

그 순간 노엘이 떠올랐다.

“노, 노엘!”

“크크큭, 그 기사를 찾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기사 나리가 참 거슬려서 말이야. 정말 운도 좋지 않아? 갑자기 마차 전복이라니.”

그 말에 세드릭은 다른 공범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의적인 마차 사고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어째서 날 죽이려는 거냐? 나는…….”

“치료를 한다면서? 그렇겐 안 되지. 뭐 솔직히 치료사만 처리해도 되지만 뒤끝 없이 깨끗이 해야지.”

치료사라는 말에 노엘의 눈이 커졌다. 이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리, 리아를!”

리아가 위험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려 해도 그의 손에 잡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리아…….’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리아를 떠올리자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 그럼 죽어라!”

세드릭은 눈을 감았다.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으니 체념한 것이다. 그의 검이 빠르게 세드릭의 목을 향해 내리꽂혔다.

푸욱! 똑-

핏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져 짙은 혈향을 풍겼다.

“……어째서?”

세드릭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그래, 자신은 아프지 않았다. 세드릭의 손이 그의 옷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어, 어떻게…….”

세드릭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때 그의 눈에 흰 가운이 보였다. 흰 가운엔 어느새 붉은 꽃이 피어나 있었다.

은은한 달빛에 빛나는 금발의 여자.

“……리, 리아?”

그녀가 돌아섰다.

“늦지 않았네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세드릭의 몸을 살피더니 이내 희미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되레 제 몸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건만, 제 상처는 안중에 없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세드릭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왜…….”

그녀의 말에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말을 잊지 못했다.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비릿한 혈향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폐부를 찔렀다. 그 칼날은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나 때문에…….’

또다시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 한데도 자신은 그녀가 나타난 순간 역겹게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많은 이가 그를 지키다 죽어갔다. 그런데 자신은 살아남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피해자인 척 굴었다.

‘이런 자리 진작 버렸다면…….’

지키지 못할 자리였다면 구차하게 가지고 있지 말았어야 했다. 버리지도 않으면서, 지킬 마음도 없으면서 가지고만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를 대신해 죽어간 것이다.

‘나 때문에…….’

친우 아디스의 죽음조차 결국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세드릭은 이를 으득 물었다. 태어나 인지할 때부터 그는 왕세자였다. 그래서 그 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소중한 사람이 하나둘 죽어 나가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나는 자격이 없어.”

세드릭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모든 게 제 탓이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려놓자고 마음먹자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시원했다. 그는 울지도 웃지도 못 하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미안, 미안해…….”

세드릭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내가 나오자고 하지 않았으면……. 네가 이렇게…….”

자신이 아직 왕세자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걷지 못하는 두 다리로 이미 큰 값을 치렀음에도 교만했다. 자신은 다리가 낫게 된다는 사실이 기쁠지 몰라도, 그의 지위를 탐하는 자들에겐 결코 기뻐할 일이 아니었거늘.

세드릭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녀가 죽는다면 그 모두 자신 때문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역겹고 토할 것 같았다. 그때 그냥 죽어버렸으면.

“봐요.”

그때 헬리아의 흰 손이 세드릭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죽었어요. 잘 봐요.”

“하지만…….”

“뭐야,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거예요?”

세드릭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헬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세드릭은 참으로 마음이 여렸다. 어떻게 왕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이가 아프다는 것을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아파하는 이다. 잘못을 남이 아닌 자신에게서 찾는 사람.

‘나랑은 다르지.’

때 묻지 않은 세드릭과 달리 자신은 너무나 많이 때가 묻어버렸다. 온통 새카매져서 그게 때인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한다. 그게 돈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순간 헬리아의 입가에 시니컬한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렇게 살아간다.’

헬리아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설사 이번 일로 세드릭이 어떤 결론을 내려도. 그것이 그녀에게 원인이 있더라도.

“자.”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순수한 아이의 미소와 다른 어른의 미소를. 그녀는 품속에 있던 것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그녀가 내민 것은 이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나무 조각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내가 준 그림…….”

헬리아를 위해 나무판에 그렸던 그림이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는 씩 웃었다. 세드릭이 준 그림판이 심장을 관통하려던 검을 빗겨가게 했다. 여전히 피를 많이 흘리긴 하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다. 물론 이대로 둔다면 치명상과 다를 바 없겠지만 헬리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즉사하는 것을 면하지 않았나.

“고마워요.”

“……죽지 않는 거지? 그런 거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세드릭을 보며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죽어요. 남자가 울기는.”

눈물과 정이 많은 사람.

“……너무 과했나.”

헬리아는 작게 말을 내뱉었다. 워낙 작은 소리라 세드릭은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드릭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도 헬리아의 옷깃을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녀가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을 얻자 세드릭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지금 자신이 서 있었다면 풀썩 주저앉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감동의 순간도 잠시뿐이었다.

“네년은 누구냐!”

세드릭을 죽이려던 암살자, 켄은 갑자기 등장한 그녀의 존재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걷지도 못하는 왕세자, 거기에 호위 기사까지 떨어뜨려 놓은 왕세자를 암살하는 것은 어린아이 목을 비트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잽싸게 일을 마치고 술이나 한잔하려던 켄은 예상치 못한 방해자 때문에 심기가 사나웠다.

‘얼른 처리하고 가야지.’

심장을 관통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이미 발치에 고여 있는 피로 보아하니 그녀도 오래가지 못할 듯싶었다. 남은 것은 이제 걷지 못하는 왕세자를 처리하는 것뿐. 거액의 의뢰비에 비하면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의뢰비로 받은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했다. 그러나 일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고?”

헬리아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흡!’

순간 켄은 등에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칼질을 해오면서 이런 기세를 뿜는 자들을 보았다. 대개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자들이었다.

‘뭐, 뭐야…….’

침을 꼴딱 삼킨 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상했다. 상대는 분명 무기도 들지 않은 여자다. 거기다 피를 흘려 안색이 푸르죽죽했다. 무서울 리 없건만, 아니, 그래서도 안 되건만, 자신의 몸은 그녀를 보고 잔뜩 떨고 있었다.

‘내가 떨어? 저 여자 때문에?’

평소 눈치가 빨라 난관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켄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감을 믿을 수 없었다. 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차츰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몸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내가 누군지는 네놈들이 더 잘 알 텐데?”

헬리아의 말에 켄은 그제야 그녀를 제대로 보았다. 검은 안경에 흰 가운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자.

“……어째서 치료사가 여기에?”

이미 죽었어야 할 치료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켄은 잔뜩 경계했다.

‘젠장, 도대체 치료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놈들이 실패했나?’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의 생존 본능이 지금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저딴 계집애 따위한테!’

그는 여자 하나 때문에 겁먹었다는 사실에 몹시 짜증이 나 있었다. 결국 겉만 보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용케 빠져나왔나 보군. 하지만 안됐군. 여기서 죽을 테니.”

켄이 헬리아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 말을 듣고 세드릭이 헬리아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내버려 둬! 너희 목표는 나잖아!”

상대의 목표는 자신이다. 자신이 죽는다면 치료사를 죽일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얕은 생각이었다. 켄은 그런 그를 비웃어주었다.

“목격자를 살려둘 순 없지.”

“그, 그런!”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리아만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리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누가 죽는다고 그래?”

순간 헬리아의 기세가 변했다.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기세에 켄은 저절로 신음을 터뜨렸다.

“크윽!”

날카로운 바람에 베이는 듯 그녀가 내뿜는 기운에 몸이 저릿해 숨 쉬기조차 어려웠다.

“상처를.”

그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려왔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살짝 시야가 흔들렸고, 몸 안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고이 살려둘 수 없지.”

헬리아의 기세가 순식간에 변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가 켄에게 다가갔다.

“네, 네년의 정체가 뭐냐!”

일개 치료사가 이런 살기를 내뿜는다는 정보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결코 이번 암살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 젠장!”

그녀가 다가올수록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피를 흘리는 헬리아, 칼을 들고 있는 암살자. 누가 봐도 암살자가 유리한 상황이건만, 켄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오, 오지 마!”

켄은 칼을 휘둘렀지만, 검은 그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커억!”

순식간에 헬리아가 암살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쨍그랑.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헬리아의 손은 더욱 세게 그의 목을 조일 뿐이었다.

‘히, 힘이!’

인간의 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켄은 스러져 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죽음. 그 공포가 그에게 덮쳐 오고 있었다.

“커, 커억! 사, 살려줘!”

“살려줘? 그럼 너는 살려 줬나?”

선글라스 밑으로 새어 나오는 그녀의 오싹한 눈동자에 켄은 숨을 집어삼켰다.

“나, 난 그냥 의뢰를 받았을 뿐이야!”

켄이 울부짖었지만 헬리아는 조소를 지었다.

“나도 그냥 날 죽이려는 암살자에게서 몸을 보호하는 것뿐이야.”

‘이게 보호하는 차원인가!’

그녀의 손힘이 더욱 강해졌다.

“끄어억!”

켄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헬리아는 오히려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피에 취해버린 탓일까. 그녀의 눈이 평소와 달랐다. 켄의 눈이 뒤집히려는 순간이었다.

“리아!”

켄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들려온 세드릭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헬리아는 맨손으로 암살자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헬리아는 눈을 찌푸렸다.

“……내가.”

사람의 목을 움켜쥔 생경한 감촉이 아직도 남아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

순간 끓어오른 그 살의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피를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곤 하지만, 헬리아는 자신의 상태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전에도 이랬다. 붉은 피를 볼 때마다 안에서 폭발하듯 분노가 터져 나왔다.

‘보호 반응인가.’

헬리아는 짜증이 났다.

“리아.”

세드릭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 찮은 거야?”

헬리아는 그저 웃어 보였다. 그제야 세드릭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가 다치면 어쩌나 싶었어.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저자가 갑자기 꼼짝을 못 하는…….”

그러나 세드릭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헬리아의 신형이 급격히 허물어지면서 세드릭의 품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리, 리아!”

그녀를 흔들어 보았지만 창백한 얼굴에는 생기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피는 세드릭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정신 차려!”

세드릭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의 몸은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주, 죽으면 안 돼!”

“……안 죽어요.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뒷말을 남기고 헬리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세드릭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주,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안 죽는다고 했잖아!”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이미 눈을 감은 헬리아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 아?”

‘설마 아니겠지? 그런 거 아니지?’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검은 안경 때문에 그녀가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세드릭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검은 안경을 벗겼다. 그러자 그녀의 희고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

세드릭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때였다.

“콜록콜록!”

쓰러졌던 켄이 기침을 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줄기에는 손자국이 확연히 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리다 주변에 떨어진 검을 쥐어 들었다.

“큭큭, 결국 죽었나?”

켄은 죽은 듯 조용한 헬리아를 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섬뜩한 살기와 인간이 아닌 힘. 켄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그 두려움의 대상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 그는 검을 들고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세드릭은 헬리아를 더욱 꽉 품에 끌어안았다.

“날 죽이게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세상은 역시 살아 있는 놈이 이기는 거야. 큭큭.”

그는 키득거리며 세드릭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익-

세드릭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죽어간 모든 이와 그의 잘못으로 인해 죽을 리아에게 미안했다.

‘미안해.’

검이 세드릭의 목을 짓쳐 들어갔다.

“이제 그만 죽어라!”

푸욱!

세드릭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이 스러져 가는 켄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낯선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의 검은 켄의 것으로 보이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젠장!”

그가 뒤로 돌더니 이내 낮게 욕을 내뱉었다. 세드릭은 그가 다가오자 헬리아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런 그를 남자는 묘하게 바라봤다.

“저하!”

낯익은 목소리에 세드릭은 안도했다. 뒤를 돌아보자 노엘이 엉망인 몰골로 그에게 달려오고 있던 것이다.

“노엘!”

숨 가쁘게 달려왔는지 그는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몸에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괜, 괜찮으십니까?”

“노엘도 괜찮은 거지?”

“전 괜찮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얼마나 놀랐던가. 노엘은 여전히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복된 마차에서 아이를 구하고 세드릭에게 돌아가는 길에 암살자들을 만났다. 다행히 시간은 걸렸지만 그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암살자들이 플로렌스 영지에서 만났던 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노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걸 본 세드릭은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엘에게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리아가 깨어나질 않아. 어떻게 해?”

세드릭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노엘은 그제야 세드릭의 품에 안겨 있는 자를 볼 수 있었다. 그에겐 세드릭이 최우선이었기에 돌아보는 게 늦었다.

‘고, 공주님!’

노엘은 너무나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그 사람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때 이안이 세드릭의 품에 안겨 있던 헬리아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이, 이봐!”

세드릭은 이안의 행동에 놀라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낯익은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플로렌스 가문의…….”

“그럼 이만.”

이안은 헬리아를 품에 안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세드릭은 오랫동안 응시했다.

“…….”

이미 모습조차 보이지 않자 세드릭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세드릭은 자신의 옷에 가득 묻은 피를 내려다보았다.

“……리아를 그에게 맡겨도 되는 거야?”

“아, 예. 괜찮을 겁니다.”

“……그래.”

당황하는 노엘의 표정. 세드릭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더 이상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궁으로 돌아가자.”

“예.”

세드릭은 힘겨웠는지 오랫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 * *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헬리아를 안고 뛰어가던 이안은 주변의 인적이 뜸해지자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낮아 그가 화가 나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할 상대는 여전히 묵묵부답. 이안은 이를 으득 물었다.

“당신이라는 사람.”

“내가 뭘 어쨌는데?”

떠지지 않을 것 같던 헬리아의 눈이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헬리아는 눈을 좁히고 그의 품에서 내려왔다. 마치 아무런 일도 겪은 적 없다는 듯 그녀의 몸놀림은 상처를 입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흰 옷 가득 묻어 있는 피는 그녀가 상처를 입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도대체 제정신입니까?”

이안이 헬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가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모습을 보고 이안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심장이 한순간 멎은 것 같았다. 아까의 광경을 떠올리는 것만 해도 그의 손이 떨려왔다.

그녀를 안아 올린 순간까지 말이다. 품에 안은 그녀의 몸은 따뜻했다. 그와 함께 안도가 몰려왔다. 하지만 순간 그녀의 상태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안은 헬리아의 금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의 주인은 그의 생각보다 더 독하고 무서운 자였다.

“생각해 봐.”

헬리아가 피 묻은 옷을 매만졌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누가 잊겠어?”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리야. 내가 얻고자 하는 자리는.”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안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 헬리아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걱정이라도 한 것인가?

“도대체 뭐 때문에 화를 내는 거야?”

“…….”

헬리아와 이안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안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스스로도 왜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 몸을 함부로 한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걱정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안은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그가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자 헬리아는 얼른 뒤를 따라갔다.

“뭐야, 먼저 가면 어떻게 해!”

‘칼은 내가 맞았는데 왜 지가 화를 내?’

그러나 순간 보인 그의 표정에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이봐! 이래 봬도 나 환자라고!”

이안이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에게 돌아왔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은 결코 잊지 않는다 했습니까?”

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명백히 비웃음이었다.

“쉽게 잊더군요.”

그렇게 한마디 하고 가버렸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왠지 뭐라 입을 열 수 없었다.

* * *

새 한 마리가 길을 잃은 듯 하늘 위를 이리저리 맴돌고 있었다. 창가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세드릭의 눈이 길 잃은 새를 좇았다. 그러나 이내 새가 제 길을 찾은 듯 나뭇가지에 내려앉자 그의 눈동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노엘.”

“예, 저하.”

세드릭의 곁에 서 있던 노엘이 그의 부름에 다가왔다.

“데이지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데이지궁이요?”

노엘이 눈을 좁혔다. 갑자기 왜 데이지궁을 묻는 것인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를 썼지만 세드릭은 꼿꼿이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알아?”

“아, 예.”

노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찾으면서 왕성의 위치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물론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데 데이지궁은 어째서……?”

“데이지궁으로 갈 거야.”

“예?”

노엘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세드릭은 화들짝 놀라는 그를 묘한 표정으로 한번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동생을…… 보러. 그래, 동생을.”

동생. 세드릭은 그 단어를 내뱉으면서 스스로도 어색한지 입맛을 다셨다. 그 어색함이 우스워 픽 웃었다.

“가자.”

“아, 예…….”

노엘은 조금 불안해졌다. 설마 뭘 알아차린 것일까? 하지만 세드릭의 표정에선 어느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노엘은 세드릭의 휠체어를 끌었다.

“멀구나.”

세드릭은 본성에서 멀어진 지 꽤 되었건만 아직도 데이지궁이 보이지 않자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데이지궁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본성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구경하기 힘들었고, 빽빽하게 들어찬 수목이 그들을 에워쌌다. 마치 이곳만 왕궁이 아닌 다른 세상 같았다.

“이런 곳에서…….”

비앙카 독살 미수 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8년을 데이지궁에 갇혀 살아야 했던 헬리아.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했다.

열 살. 그 나이에 헬리아는 데이지궁에 갇혔다. 과연 자신이라면 버틸 수 있었을까?

세드릭은 걷지 못하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걷지 못해 갇힌 자신과 걸을 수 있지만 갇힌 그녀. 과연 누가 더 불행했던 걸까.

세드릭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과 똑 닮은 호수가 보였다. 따사로운 햇살이 표면에 부딪치며 반짝거리는 것이 꼭 겨울에나 볼 수 있는 빛기둥과 비슷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호수를 지나자 데이지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구나.”

자신도 모르게 세드릭은 긴장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는 묘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저 고독하게 서 있는 단 한 채의 성. 데이지궁이 아르센 왕성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탓에 높다란 성벽이 단단히 시야를 막고 있었다.

“……마치 감옥 같아.”

세드릭의 눈이 흐려졌다.

그때 백발에 점잖은 연미복 차림의 한 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고 있었다.

“데이지궁의 집사 세바스찬입니다.”

정중하고 깔끔한 태도. 한 치 어긋남 없는 예법에 세드릭은 살짝 놀랐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그와 동시에 주변을 훑었다.

“다른 고용인은 없는가?”

그 물음에 세바스찬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공주의 성에 시종이 한 명뿐이라니…….”

세드릭은 침음을 삼켰다.

“헬…… 리아는 안에 있나?”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바스찬은 세드릭을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세바스찬은 세드릭을 응접실로 안내한 뒤 헬리아의 방으로 갔다. 세드릭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궁의 허름한 외견과 달리 초라하지 않았다. 물론 본성과 비교하면 소박했지만 그래도 누추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가구는 부서지고 금 간 게 없는지, 카펫은 뒤틀리거나 색이 바란 게 없는지. 하지만 다행히 깔끔했다.

“다행이야.”

“예?”

저 혼자 생각한 말이 절로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노엘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곧 입을 다물고 그저 휠체어를 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세드릭이 무슨 생각으로 헬리아 공주의 궁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노엘은 이곳에 오면서 내내, 그리고 궁을 보면서 헬리아 공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세드릭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올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에 대한 분노와 세드릭을 구하기 위한 생각들로 가득 차 그녀의 상황을 돌아볼 여유 따위 없었다. 본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성은 주위를 단단히 가로막은 성벽 때문에 감옥 같았다. 새장에 갇힌 것처럼 말이다. 자유를 원했던 그녀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녀는…….’

증거를 빼돌린 그녀를 원망하려 애를 썼지만, 그간 세드릭을 치료해 준 모습이며 세드릭 대신 칼에 찔린 모습 등이 떠오르자 노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세드릭을 치료할 때부터 그녀를 용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끼이익- 하는 문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세드릭은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네요.”

세드릭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차분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긴 금발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성. 이제까지 수많은 미녀를 보았지만 그녀처럼 아름다운 이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의 눈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배를 향했다.

‘배의 상처는…….’

“만나자 마자 너무 뚫어지게 보는 거 아니에요?”

헬리아가 피식 웃으며 세드릭의 시선을 에둘러 타박했다.

“아, 그, 그게.”

세드릭은 멋쩍어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여성의 몸을, 그것도 배를 오랫동안 보고 있는 건 대단히 실례였다.

“미, 미안.”

“미안한 짓은 하지 않으면 돼요.”

헬리아의 차가운 말에 세드릭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헬리아는 그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근처에 소파가 있었지만 휠체어를 의식했는지 의자가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세드릭은 그녀의 배려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세바스찬이 따뜻한 홍차를 내왔다. 세드릭의 시선이 세바스찬에게 향하다 헬리아에게 갔다.

“다른 고용인은 없는 거야?”

“아, 곧 궁을 옮길 거니 불편해도 참아주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세드릭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통해 이제까지 시종이 한 명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드릭은 제가 당한 일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헬리아는 그런 세드릭의 생각을 읽었는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죄인 신분에 시종 한 명도 과분하죠.”

“미, 미안.”

“뭐, 됐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고.”

헬리아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뗐다.

“그보다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요?”

헬리아의 금안을 마주하자 세드릭은 왠지 몸이 움츠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게.”

그러고 보니 무슨 말을 하려고 왔더라. 세드릭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차 한 모금으로 긴장을 씻었다. 그윽한 향기가 그의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건강히 잘 있나 싶어서.”

“하.”

“…….”

“뭐 건강히 잘 있죠. 그런 말을 당신한테 들으니 우습지만.”

세드릭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카데미에 있었다고 하나 돌아온 뒤에도 한 번도 헬리아를 찾지 않았던 그다. 당연히 갑자기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그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요? 휠체어로는 꽤 멀 텐데.”

세드릭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아닌 걸까?’

세드릭은 초조하게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그 순간 세드릭은 창에 비친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저기 커튼 좀 치면 안 될까?”

헬리아는 세드릭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도 많이 가지.”

작게 내뱉은 저 말투. 세드릭은 왠지 묘해졌다. 헬리아는 등을 돌리고 커튼을 쳤다.

그 순간이었다.

“리아.”

“…….”

헬리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드릭은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저 뒷모습을. 세드릭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돌았다.

“몸은 다 나은 거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다행이야. 정말.”

“…….”

헬리아가 아무렇지 않은 듯 뒤를 돌아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세드릭은 오히려 확신을 얻었다. 그와 함께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헬리아를 보아왔다면 필시 알아챘을 것이다. 자신이 이토록 무심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미안, 바로 왔어야 했는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헬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딱딱하고 참 얄밉게 말하는 사람은 리아밖에 없거든.”

“…….”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세드릭은 크게 웃었다.

“후우…….”

헬리아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상대는 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더 빼봐야 자신만 바보가 될 뿐이다. 순간 헬리아의 태도가 변했다.

“아, 그래서 뭐 하러 온 건데요?”

“우와, 완전히 변하는 것 좀 봐.”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고마워.”

“…….”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세드릭이 헬리아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엔 편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이유로 날 치료하는 건지는 몰라. 왜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치료하는지도 난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는 알아.”

세드릭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너는 날 진심으로 대했어.”

거짓에 꽁꽁 싸여 있는 그녀였지만, 그를 대할 때의 행동은 언제나 솔직하고 꾸밈이 없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느낀 것으로 판단했다.

“살려줘서 고마워.”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그래도.”

세드릭은 히죽 웃었다.

“동생이 생겼잖아.”

“원래부터 동생이었지만.”

“아, 응.”

비꼬는 말이었지만 뭐가 좋은지 세드릭은 오히려 정말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만족해했다.

“아, 그리고 이거.”

세드릭이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녀에게 작은 그림을 하나 건넸다.

“전에 거 부서졌잖아.”

헬리아는 세드릭이 건넨 그림을 받았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 그저 그렇게 흘러간 것이 아님을 알면 그는 자신을 원망하려나?

‘진심으로 대했다라…….’

그러나 싫은 느낌은 아니다.

“이상한 게 또 늘겠군.”

헬리아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이상한 조각상 옆에 놓이게 될 그림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아르센 왕국에서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국왕이 주도하지 않고 귀족들이 주체가 되어 회의를 진행한다. 정기 회의, 또는 귀족 회의라 불리는 이 회의에서 국왕은 의장의 역할을 맡을 뿐 발언하지 않는다. 약 100년 전부터 시작된 이 회의는 당시 왕권이 크게 약화되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했을 무렵에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귀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중요도는 달라졌어도 오랜 전통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발언권을 가진 303명의 귀족이 하나둘 돔 형태의 거대한 회의장에 모였다. 가장 상석에 국왕의 왕좌가 놓여 있고, 귀족들의 자리는 국왕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회의 시작 시간이 제법 남아 있는데도 오늘따라 회의장에 착석한 귀족이 많았다. 모두 여느 때보다 훨씬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바로 오늘 회의의 안건이 왕세자 폐위 문제이기 때문이다.

회의장 안이 소란스럽게 변했다.

“과연 이번엔 가능할까요?”

“이제 버티지 못할 겁니다.”

“글쎄요, 저쪽이 워낙 강경한지라.”

“어찌 될지 두고 봐야죠.”

아돌프 후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왕세자 폐위에 대해 말을 나눴다. 회의장 한편에 앉아 있는 아돌프 후작은 팔짱을 낀 채 주변을 훑었다. 소란스럽게 왕세자 폐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있는 자신의 세력과 달리 왕세자 측에서는 별말이 오가지 않았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묘하게 조용한 분위기. 그는 왕세자파의 주축인 하이든 후작을 노려보았다. 하이든 후작은 왕비의 아버지며, 왕세자 세드릭의 외할아버지로 왕세자 측의 핵심 인물이었다.

꽉 다문 입술, 두꺼운 눈썹, 깐깐한 그의 성정은 왕국 내에서도 유명했다. 그의 고집을 꺾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란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후작으로서도 그를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뭔가 이상하군.’

하이든 후작은 불같은 성정의 소유자로 아돌프 후작과 만나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며 욕을 해대는 자였다. 한데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서도 단 한 마디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아돌프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영감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애초에 이번 회의도 이렇게 쉽게 성사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귀족들과 합심하여 안건을 회의에 올렸지만, 너무 쉽게 올라간 느낌이었다. 매번 그들이 왕세자 폐위를 회의 안건에 올리려 해도 중간에서 그들이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후작의 날카로운 감이 그것을 감지했다. 그는 찜찜함을 털어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다가 하이든 후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플로렌스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은 그를 보더니 옅게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후작의 온몸을 지배했다.

끼이익-

그때 회의장의 문이 열리면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왕 전하 드시옵니다!”

국왕 빈센트의 등장에 모든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빈센트는 가장 상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자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자리에 앉게.”

그제야 귀족들은 고개를 들고 자리에 착석했다. 빈센트는 회의장이 조용해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의를 시작하시오.”

그가 회의 시작을 알리자 아돌프 후작 측의 파리스 남작이 손을 들었다.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꺼냈다.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파리스 남작이 운을 떼자 모두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귀족들의 시선에 파리스 남작을 향했다.

“비록 왕세자 저하의 다리는 안타까운 일이나, 지난 3년 동안 왕세자의 자리는 공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주변의 귀족은 모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 측 사람들도 마지못한 표정을 지었다. 왕세자는 그간 치료를 이유로 사람들 앞에 일체 나서지 않았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파리스 남작은 주변의 호응에 힘입어 강하게 주장했다.

“이는 왕세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일. 또한 앞으로도 왕세자께서는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거친 언사였지만 아돌프 후작 측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왕세자 측과 플로렌스 공작 측은 입을 다물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왕세자 측 한 인사가 손을 들고 국왕의 허락을 기다렸다. 빈센트의 허가가 떨어지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치료를 하고 있지 않소?”

그는 파리스 남작의 말을 반박했다. 그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그들도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왕세자의 처소에 같은 치료사가 한 달 넘게 오갔다는 것을. 이는 분명 이제까지와는 다른 일이었다.

파리스 남작은 미간을 좁혔다. 하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치료사가 저하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은 으레 있었던 일입니다.”

파리스 남작은 지금의 상황이 이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치료가 확실한 겁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미 3년이라는 시간이면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파리스 남작의 말에 입을 열었던 귀족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거세졌다. 특히 아돌프 후작 측에서 활발하게 남작의 의견에 살을 붙이고 왕세자를 폐위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회의장은 이내 시장통처럼 소란스럽게 변했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자 빈센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조용하시오!”

그러자 주위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빈센트는 고요해진 주위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경들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소. 이제까지 왕세자가 제 직무를 다 하지 않았음은 사실이오.”

귀족들은 모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서는.”

빈센트는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외쳤다.

“표결에 붙이겠소.”

귀족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귀족 회의가 시작된 이레 표결은 찬반을 결정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초기 귀족 회의에서 표결이 귀족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사항이라면, 현재는 오직 국왕만 표결을 제의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역대 국왕들은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 표결을 제의했다. 이는 표결로 결정된 사항은 귀족들의 손으로 직접 결정하는 바, 결코 이의를 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 이는 국왕이 반드시 자신의 생각대로 되리라 확신하는 경우에만 해왔다. 그러니 지금처럼 왕세자 폐위에 추가 기울고 있는 시점에서 표결에 붙인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히 아돌프 후작은 그러했다. 표결에서 결정된 사항에는 그 어떠한 반박도, 이견도 낼 수 없다. 그게 관례이자 법이었다.

‘무슨 수가 있는 것인가?’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왕을 바라보았다. 하나 이미 표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303명의 귀족 앞으로 특수한 마법 처리가 된 종이가 나누어졌다. 마탑에서 특별히 투표를 위해 만든 종이로 복사나 그 외 어떠한 물리적 제재를 할 수도 없다. 종이를 받은 귀족들은 저마다 투표 종이에 찬반을 명시했다.

종이를 받아 든 아돌프 후작은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오히려 눈매를 좁혔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

그는 폐위에 찬성한다는 표시를 그려 넣고 중앙에 있는 통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종이를 집어넣은 후작은 빈센트와 눈이 마주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그 순간 빈센트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후작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설마…… 자신이 있는 것인가?’

표결에 붙여져 결정된 사안은 왕이라도 뒤집을 수 없다. 귀족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렇게 생각하면 귀족 회의에 왕세자 폐위에 대한 안건이 올라오도록 눈을 감은 저들의 의도도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폐위에 대한 여론이 더 커지기 전에 아예 반대표를 얻어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이리라.

‘하나…….’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후작은 303명의 귀족 중 거의 절반을 포섭했다. 플로렌스 공작이 반대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폐위에 찬성하는 표가 더욱 많을 것이다. 물론 변수는 있다. 하지만 왕세자 폐위와 같은 일을 불분명한 상태에서 진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후작 본인도 여태껏 결판을 미루지 않았던가.

“…….”

후작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하이든 후작과 플로렌스 공작을 한번 흘겨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투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개표했다. 이는 그 어떤 부정도 사전에 없애기 위한 조치다. 귀족 회의의 투표 결과가 유효성을 가지려면 찬성 또는 반대가 과반수를 넘어야 하며, 기권이 50명을 넘지 않아야 한다. 찬반이 과반을 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만약 기권이 50을 넘는다면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표결은 무효가 된다. 이윽고 투표가 끝났다.

찬성 190, 반대 80, 기권 33.

과반이 넘는 수가 왕세자의 폐위에 찬성했고 기권은 50을 넘지 않았다. 왕세자 폐위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후작 측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생각이 있는 자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대다수가 왕세자의 폐위에 찬성을 했다. 아돌프 후작파의 귀족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백 명 정도. 그들만으로 폐위를 성사시킬 수는 없다. 이는 플로렌스 측 세력은 물론 왕세자 측 세력이 폐위에 찬성했다는 걸 의미한다.

“후작님.”

페이튼 자작이 그런 맥락을 읽었는지 후작을 바라봤다.

“…….”

후작은 입을 다문 채 턱을 괴고 상대 진영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폐위가 된 마당에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후작은 눈을 감고 애써 찜찜함을 털어냈다. 아마 3년 동안 그들도 지겨워진 것이리라. 그래서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국왕 빈센트의 말에 귀족들은 소란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빈센트의 얼굴은 변함없이 담담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표결에 붙여진 결과 이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으며 반박할 수 없다. 하여 표결의 결과에 따라 왕세자를 폐위한다.”

아돌프 후작 측은 모두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왕세자를 끌어낸 것이다. 그러던 중 누군가 한 명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그럼 빈 왕세자의 자리에는 누가 앉게 되는 겁니까?”

그 말의 파장은 컸다. 회의는 질서를 잃어버린 채 우후죽순 말을 이어나갔다. 후작 측은 당연히 조슈아를 거론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응당 조슈아 님이 되셔야지.”

“당연히 그렇고말고.”

“맞소!”

“다음 왕세자는 조슈아 님이십니다.”

회의장 가득 조슈아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듯 판세는 조슈아로 기울어갔다.

척!

그러나 그때 하이든 후작이 손을 들었다. 일순 시끄러웠던 회의장에 적막이 흘렀다. 왕비 캐서린의 아버지인 하이든 후작. 그의 입김은 플로렌스 공작과 아돌프 후작에 버금갔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하이든 후작은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여긴 신성한 회의장이지 시장통이 아니오.”

소란스럽게 이야기하던 귀족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국왕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자 입을 열었다.

“다음 왕세자를 이 자리에서 정하는 건 시기상조라 봅니다.”

하이든 후작이 아돌프 후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엔 조소가 맺혔다.

‘네 마음대로 될 성싶으냐!’

하이든 후작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후작의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왕위 계승자는 조슈아 님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다른 왕위 계승자라니! 귀족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놀란 이는 모두 아돌프 후작파뿐이었다.

‘이것이었나!’

아돌프 후작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하이든 후작을 노려봤다. 하이든 후작은 그런 아돌프 후작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하이든 후작이 말했다.

“공주님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왕위 계승자가 꼭 조슈아 님뿐만은 아니지요. 비앙카 공주님, 그리고 헬리아 공주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하이든 후작은 공주들을 거론했지만,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읽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헬리아 공주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합니까?”

예상대로 후작파의 반발은 거셌다. 그러나 왕세자파와 플로렌스 공작 측은 담담했다.

‘도대체 어느 틈에!’

후작은 이를 으득 물었다. 세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왕세자와 헬리아의 세력이 합세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완전히 호랑이를 불러들였군!’

왕세자 측 세력만으로 골치가 아픈데 플로렌스 세력과 합하여 거대한 세력이 되어버렸다. 자신을 공공의 적으로 삼고 두 세력이 동맹을 맺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후작이 궁금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두 세력 간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치료사가 헬리아라는 것을 모르기에 당연한 생각이었다. 아돌프 후작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 없었다.

“헬리아 공주가 그 자리에 어울린다 생각하시오?”

“꼭 헬리아 공주를 거론하지 않았소만.”

그게 그 말이 아닌가. 후작은 심기가 사나워졌다.

“헬리아 공주는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안 될 것이 무에 있소?”

“8년 동안 폐위되었던 공주를!”

하이든 후작이 입매를 비틀었다.

“우습구려. 그건 아돌프 후작, 그대의 손으로 직접 무죄를 입증해 주지 않았소? 그렇다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니오?”

“…….”

아돌프 후작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젠장!’

아돌프 후작은 자신의 손으로 헬리아의 무죄를 만들어준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했다.

‘이런 영악한 계집애!’

그날 보았던 헬리아 공주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 경계했어야 했다. 하나 이미 늦어버렸다.

하이든 후작은 말 한마디로 주변의 반발을 단숨에 잠재웠다. 헬리아 공주가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아돌프 후작이 입증해 주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아무리 왕위 계승자 중 한 명이나 그 능력이나 됨됨이가 파악되지 않았소. 그러니 헬리아 공주를 거론하는 것은 무리가 있소. 도대체 공주가 한 게 무엇이오?”

그때 플로렌스 공작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럼 2왕자는 무슨 일을 했소?”

“…….”

“출발선상에 있는 건 똑같지 않소? 하니 헬리아 공주라고 아니 될 일은 없지.”

회의장은 금세 2왕자와 헬리아 공주로 팽팽히 맞섰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만!”

빈센트의 외침에 서로 목소리를 높였던 두 세력이 잠잠해졌다. 빈센트는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는 왕세자 폐위에 대한 것이네. 그 외의 일은 논의하기 적합하지 않다. 이것으로 회의를 파하겠네.”

그러면서 회의를 종결지었다. 아돌프 후작은 하이든 후작과 플로렌스 공작을 노려보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 * *

카쟌은 조슈아의 마법 수업이 끝나자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걸으며 자신의 팔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은빛 체인으로 된 줄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나는 호박이 박혀 있는 이 팔찌는 조직에서 보내준 탐지기였다.

“내가 무슨 트레져 헌터도 아니고.”

카쟌은 욕설을 내뱉으며 휘적휘적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갑자기 팔찌에 작은 빛이 들어왔다.

“헛!”

카쟌은 깜짝 놀라 얼른 주변을 살피고 다시 한번 팔찌를 보았다. 여전히 빛이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카쟌은 주변에 사람이 있나 살피며 빛이 강해지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이윽고 어느 한 시점에서 보석의 빛이 강해졌다. 카쟌은 놀란 눈으로 그곳을 보았다.

“이런…….”

터져 나오려는 욕을 꾹 삼키며 바닥에 부서진 돌멩이에 팔찌를 대어 보았다. 역시나 빛이 반짝거렸다.

“개나 소나.”

그는 짜증 나 돌멩이를 들고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러자 팔찌의 빛이 사라졌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야? 아니지, 애초에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조직에서 특별히 드래곤의 기운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팔찌였다. 하지만 성능이 너무 좋은 건지 아니면 맛이 간 건지 발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반응해 버렸다. 이런 식이면 아예 드래곤이 밟던 길도 빛이 날 판이다.

카쟌은 짜증이 나 괜히 발을 굴렀다. 그때 멀리서 우르르 귀족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회의장이 있는 건물까지 와버린 모양이다.

순간 귀족들 사이로 아돌프 후작이 보이자 카쟌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굳이 사이도 좋지 않은 그와 마주쳐서 얼굴을 붉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후작은 그를 불순물처럼 여겼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헬리아 공주라뇨!”

카쟌은 귀족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헬리아 공주라고? 그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공주 말인가?’

귀족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분노에 찬 음성들이었다.

“왕세자 자리에 헬리아 공주가 가당키나 합니까? 왕위 계승자에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후작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이곳의 그 누구보다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이가 그였다.

“그만들 하게. 듣는 귀가 많아.”

“후작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틀린 말도 아닐세. 애초에 우리 쪽에도 명분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그러나 그는 이성으로 분노를 잠재우고 소란스런 귀족들을 달랬다. 그리 말하면서도 후작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만 가세.”

후작이 어르자 불만을 표했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갔다. 귀족 무리가 사라지자 근처에 숨어 이야기를 듣던 카쟌이 눈을 빛냈다.

“헬리아 공주라고? 그렇겐 안 되지.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 한 년 하나 때문에.”

자신의 원대한 꿈이 한낱 계집 때문에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쟌이 몸을 움직였다.

파앗!

그 순간 팔찌에서 또다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카쟌은 돌멩이뿐만 아니라 주변을 살폈지만 회의장에서 나오는 귀족들만 지나갈 뿐이었다.

“에라이, 이런 고물 따위.”

카쟌은 팔찌를 벗어 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 길을 갔다.

“뭐야?”

이안이 갑자기 멈춰 서자 헬리아가 물었다. 이안은 저 멀리 지나가는 남자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헬리아를 바라봤다.

“아닙니다.”

별일 없다는 듯한 말투에 헬리아는 살짝 미간을 좁혔지만 다시 걸음을 옮겨 세드릭의 궁으로 향했다.

똑똑-

“저하, 공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안에서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헬리아는 벌써 홀로 열심히 운동 중인 세드릭을 발견했다. 그녀는 근처 의자에 앉아 시녀에게 차를 부탁하고 세드릭을 보았다.

“오늘은 봐주는 거야?”

오늘따라 책을 펼치지 않는 헬리아를 향해 세드릭이 땀을 닦고 웃으며 말했다.

헬리아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결정 났어.”

“그래?”

무슨 결정인지 알고 대답하는 걸까. 세드릭은 대수롭지 않은 듯 시녀가 가져온 물을 마셨다. 헬리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존대하지 않았다. 세드릭이 원했고 헬리아 또한 받아들인 바였다.

“왜 포기했어?”

“포기한 게 아니고 폐위된 거지.”

“손을 쓰려면 쓸 수 있었어.”

왕세자가 폐위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그가 걷지 못해서이다. 만약 1년 내로 걷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다면 폐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냥, 내 자리가 아니더라고.”

차라리 버려야 할 때 얼른 버렸으면 좋았을걸. 세드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버리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의 자리를 지키려 죽어간 많은 이가 떠올라 사라졌다. 이미 자신은 왕세자란 자리에 질려 버렸다. 그리고 버틸 힘을 잃어버렸다.

세드릭은 헬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나보다 왠지 저 아이라면 더 잘해 줄 것이다.

“네가 있잖아.”

헬리아는 세드릭의 맑은 두 눈동자에 피식 웃었다.

“그래서 하이든 후작에게 말한 거야?”

“외할아버지도 아돌프 후작이라면 치를 떨거든. 왕위 계승자는 한 명이 아니다 라고 말하니 척하고 알아들으시더라. 뭐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방해했을 거야.”

세드릭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맙지?”

“뭐.”

“고마우면 갚으라고.”

세드릭은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헬리아는 그의 웃음이 빈센트와 너무 똑 닮아 순간 등이 오싹해졌다.

‘저 웃음은.’

“오빠라고 불러.”

헬리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랬다. 세드릭의 저 표정은 자신을 붕어라 놀리던 빈센트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오빠는 무슨.”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라니. 이런 생소한 단어를 들어봤나! 쉽게 나오지 않는 건 당연했다. 지금까지 헬리아는 누군가에게 오빠라는 소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거리는 세드릭의 모습에 헬리아는 조금 주춤했다.

‘뭐 불러주는 거야 어렵지 않긴 한데.’

하라고 하면 못 할 말도 아니다. 돈도 들지 않는 일. 거기다 빚도 갚을 수 있다.

“오…….”

“역시 무리겠지?”

“…….”

막 입을 열려던 헬리아는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 장난하나! 헬리아의 표정이 심통해지자 세드릭은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저런 모습을 보니 역시 제 나이 대로 보였다.

“그 대신 모델이라도 해줘.”

“안 해.”

헬리아는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왠지 조만간 자신의 캔버스 안에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 같아 웃음을 지었다.

* * *

콰앙!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후작은 치미는 분노에 책상을 내려쳤다.

“헬리아!”

이를 으득 문 후작의 눈에 푸른 광기가 감돌았다. 당장에라도 씹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설마하니 왕세자와 헬리아가 손을 잡을 줄 몰랐다.

어째서 왕세자 측이 돌아선 것일까? 3년이 넘도록 꿋꿋하게 버틴 그들이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 헬리아란 존재는 우군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작은 그 둘이 손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왕세자 측은 대개 왕세자의 외척으로 이루어진 세력인 만큼 결속력이 강해 후작이 흔들려 해도 흔들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왕세자 폐위에 동의하고 헬리아에게 붙었다. 이건 왕세자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한데 왜 왕세자가 헬리아 공주를 돕는단 말인가?

그때 허공에서 검은 복면인이 내려왔다. 후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몸을 뉘였다.

“무슨 일이더냐?”

“오늘 세드릭 왕자의 궁에 헬리아 공주가 방문했습니다.”

후작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제 와서 공치사라도 할 생각인가? 그러나 복면인의 다음 말에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드릭 왕자의 다리를 치료하고 있는 치료사가 바로 헬리아 공주라고 합니다.”

“그것이로구나!”

후작은 그제야 모든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세드릭의 다리를 치료해 주는 것. 그게 바로 세드릭이 헬리아를 도운 이유였다. 세드릭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하이든 후작과 왕비 캐서린이라면 헬리아를 도와주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았다 하나 이미 늦어버렸다. 자신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그들이 뭉쳐 버린 것이다.

“그년이…….”

처음 만난 날 공주에게서 받았던 그 오싹한 느낌이 다시 떠올랐다. 이 정도로 자신을 위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모두 죽였어야 했거늘.”

왕세자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암살단은 모두 전멸했다. 그 자리에 헬리아가 있었다면 전멸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헬리아가 있다면 분명 이안, 그 플로렌스 공자도 함께 있을 테니 말이다.

“젠장.”

후작은 이를 으득 물고 냉정을 되찾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만 지금은 오히려 머리를 차갑게 해야 할 때다.

똑똑-

“누구냐?”

“접니다.”

페이튼 자작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후작은 심기가 사나운지 목소리가 낮았다.

“무슨 일이냐?”

“다크소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이더냐?”

후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어찌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한줄기 빛을 본 것이다.

다크소드. 페르시아 제국에 위치해 있는 유명한 암살 집단으로 백 퍼센트의 암살 성공률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암살단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후작은 턱을 쓸어내렸다. 거액의 돈을 주고 암살자를 불러들였다. 이번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제까지의 암살은 너무 단순했다.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숨어서 칼을 겨눈다 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헬리아 공주가 궁을 옮긴다고?”

“예.”

“그럼 시종과 시녀들도 새로 뽑겠군.”

후작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작님, 마법사 카쟌 님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후작의 눈이 일순 와락 일그러졌다.

“뭐, 그놈이?”

후작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가 찾아온 연유가 궁금하여 안으로 들였다. 검은 안대를 쓰고 입가에 웃음을 띠운 카쟌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보기 싫은 상판이다. 후작은 눈썹을 치켜뜨고 그를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볼일이더냐?”

카쟌은 입꼬리를 싹 말아 올렸다.

“하하, 요즘 후작님의 심기가 사납다 들었습니다.”

“네놈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후작이 카쟌과의 관계를 단칼에 딱 잘랐다. 하지만 카쟌은 손을 비비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섭섭합니다. 이래 봬도 명색이 제가 조슈아 님의 스승 아닙니까? 스승 된 입장에서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요.”

카쟌의 말에 후작은 눈썹을 모았다. 후작의 눈에 카쟌의 욕망이 훤히 보였다. 조슈아를 잡아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그 시커먼 속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려거든 썩 꺼져라.”

“제가 그냥 왔겠습니까?”

카쟌은 넉살 좋게 웃으며 슬그머니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후작의 표정엔 카쟌과 같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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