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2)

제3장 암습

어딘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르센 왕국의 심처에 조성된 한 정원에서 나는 소리였다.

한 손에 나무를 들고 한 손엔 조각칼을 든 남자가 정성스럽게 조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을 하는지 남자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묻어 있었다.

“전하, 플로렌스 공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빈센트가 뒤를 돌아보자 뒤에는 플로렌스 공작이 서 있었다.

“왔는가?”

빈센트는 그제야 조각도를 손에서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종이 뒤로 물러나자 정원에는 플로렌스 공작과 빈센트 둘만 남았다. 그러나 진짜 둘만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은 곳에 국왕을 지키는 그림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플로렌스 공작은 빈센트의 옷에 묻어 있는 나무 껍데기를 보고는 혀를 찼다.

“도대체 뭐 하는 겐가?”

일국의 왕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친근한 친우를 대하는 듯했다.

“일국의 왕이 조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러나 빈센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장미나 키우는 어디 공작보다는 낫네.”

한 방 먹은 공작은 소태를 씹어 먹은 듯 얼굴을 구겼다.

“예나 지금이나 자네의 그 입담은 여전하구먼.”

빈센트와 플로렌스 공작은 동갑인데다가 같은 아카데미를 수학한 친우였다. 게다가 더 어릴 적 공작은 국왕의 놀이 친우였다. 더없이 가까운 사이라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서로 툭 터놓고 이야기하곤 했다.

“빈, 자네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 얼굴하며.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겐가?”

“원래 내가 좀 동안이라네.”

얼어 죽을. 공작은 입술을 틀어 올렸지만 딱히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안 하던 조각은 왜 하는가?”

“선물을 할 거네.”

“누구에게?”

“누구긴 누구야.”

“지극정성이로군.”

빈센트는 웃으며 자신의 옷에 묻어 있던 껍질을 털어내고 근처 테이블로 걸어갔다. 공작도 그를 따라 걸었다. 그들이 테이블에 앉자 시녀가 금세 따뜻한 차를 내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빈센트가 먼저 운을 뗐다.

“무슨 일인가?”

공작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 알지 않은가?”

“조각이나 하고 있는 왕이 뭘 알겠는가?”

‘속도 좁기는.’

“지금 속이 좁다고 생각했지?”

혹시 독심술이라도 배우는 것일까. 공작이 눈을 좁히며 그를 흘기자 빈센트는 친우의 표정에 싱긋 웃었다.

“다 안다 치고 말해보게.”

플로렌스 공작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공주가 내게 선택을 하라는군.”

빈센트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가?”

빈센트는 피식 웃었다. 함께 지내온 세월이 긴 만큼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세드릭 때문인가?”

“왕세자를 버리고 공주를 선택하는 날 책하지 않는가?”

빈센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왕이라도 그런 것까지 일일이 뭐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미 엎어진 것을.”

“…….”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드릭의 일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을 공작은 알았다.

“……그럼 선택해도 되겠는가?”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빈센트는 그저 입가에 미소를 단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의 그 얼굴은 도무지 읽기가 어려워. 그러고 보니 공주는 자네를 쏙 빼닮았더군.”

“그거 칭찬이로군.”

빈센트가 웃으며 차를 입에 대었다. 그리고 친우를 보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날 생각하지도 말고. 솔직히 내가 자네 인생을 책임져 줄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무책임하기는.”

그러나 그것이 공작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선택은 자네의 몫이네. 나는 그것을 존중해 줄 뿐이지.”

“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뿐이네. 그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나?”

정곡을 찔린 공작은 낮게 웃었다. 지금이야 덜하지만 예전의 공작은 지금의 이안보다 더 고지식한 사내였다. 또 신중해서 쉽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공작은 움직일 때마다 빈센트에게 항상 확인을 받았다. 그 버릇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자넨 너무 신중해. 이제 그만 좀 과감해지게.”

“자네만 할까.”

공작은 빈센트의 말에 한시름 던 사람처럼 어깨에 힘을 빼고 차향을 음미했다. 헬리아 공주의 손을 잡을지 말지 이미 결정했다. 빈센트의 말처럼 그저 자신의 결정이 잘한 것이라고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자네는 그 완벽주의 탓에 분명 후회할 걸세.”

“후회하고 있네.”

빈센트의 씁쓸한 표정에 공작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공주 때문인가?”

“…….”

“만약 공주가 스스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둘 참이었나?”

“그럴지도.”

빈센트는 찻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좋지 못했네.”

“…….”

“처음에는 세드릭이 자리를 잡은 다음 빼낼 생각이었네.”

하지만 3년 전 세드릭이 화를 당하면서 왕국의 판도가 달려져 버렸다. 그것도 헬리아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후작이 기세를 잡은 상황에서 아무 힘도 없는 헬리아를 바깥으로 꺼내 봤자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자네는 너무 완벽하려고 해. 그러니 냉정하고.”

빈센트가 고개를 들어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비상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무 도움 없이 스스로 나아가고 있었네. 이미 훨훨 날고 있는 그 아이의 날개를 내가 꺾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네.”

그 당시 헬리아가 세운 엘라드 상단은 파죽지세로 커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상황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공주의 신분이었다면 그렇게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 아이를 공주로 복위시켜 이 답답한 성에 가두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싶었네.”

빈센트는 씁쓸히 웃었다.

“만약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두었을 걸세. 하물며 그 아이가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잡지 않았을 거야.”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빈센트가 얼마나 고민했을지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래도 공주는 원망할 걸세.”

“원망해도 상관없네. 하지만 원망은 하지 않는 것 같더군. 오히려…….”

빈센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열여덟 그녀의 성인식에서 그녀를 8년 만에 만났다. 하지만 헬리아는 국왕을 마치 남처럼 대했다. 아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생경하게. 차라리 원망이라도 했다면 이리 마음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빈센트는 더 활짝 웃었다.

“그 아이가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

“전하라고 하네, 전하.”

공작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빈센트가 씁쓸히 웃었다.

“항상 듣는 말인데도 그 아이에게 듣는 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네.”

“후회하는가?”

“후회하네.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걸세.”

언제나 자신을 보고 웃었고 그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바마마라 부르던 헬리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빈센트의 그늘진 얼굴에 공작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차피 자식은 부모의 품을 떠나게 마련이네. 부모가 자식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뿐이지.”

“후후.”

공작의 말에 빈센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일국의 왕이 아닌 한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다.

“헬리아를 잘 부탁하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헬리아는 창밖을 통해 하늘의 반을 가린 높은 성벽을 바라보았다. 데이지궁을 감싸고 있는 성벽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하지만 벗어났기 때문일까. 매일같이 바라보던 저 높은 성벽은 여전하나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복위가 된 헬리아는 원래 기거하던 로즈궁으로 가야 하나 로즈궁의 수리 및 고용인 문제로 잠시 그녀는 데이지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서두른다면 빨리 나갈 수 있으나 8년간 알게 모르게 정든 데이지궁이었다. 거기다 주위가 조용하고 고즈넉해 헬리아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똑똑-

“공주님, 세바스찬입니다.”

흰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노집사는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8년 전보다 더 노쇠한 그 모습에 헬리아는 그에게 쉴 것을 권했지만 그는 부득불 자신이 그녀를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헬리아는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플로렌스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드디어 왔군.’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들라 하세요.”

헬리아는 플로렌스 공작을 응접실로 맞이했다. 세바스찬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플로렌스 공작은 차를 내온 세바스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왜 자네가 여기 있냐는 눈빛이라 헬리아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세바스찬은 공작의 표정에도 의연하게 그저 집사의 임무를 완수할 뿐이었다.

“그에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 아닐세.”

이내 세바스찬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둔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서 헬리아는 속으로 다시 한번 세바스찬의 정체에 대해 확신했다. 물론 예상했던 일이다. 그날 성인식에서 자신을 대하는 빈센트의 태도를 통해 그가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붙였을 거란 걸 알았다. 그게 세바스찬인 것이다.

하지만 헬리아는 딱히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8년간 그녀에게 보여줬던 세바스찬의 정성 어린 보살핌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헬리아가 공작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선택은 하셨나요?”

“공주를 따르겠네.”

헬리아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꽤 늦으셨네요.”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자신의 미래만이 아니라 플로렌스 가문의 미래를 통째로 거는 일이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그때를 놓친 것 같지는 않군.”

‘능구렁이 같기는.’

헬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래서 나이 든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했다.

“그런데 궁에 사람이 너무 없군.”

공작은 응접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있어야 할 시종이나 시녀들이 그녀의 궁에선 보이지 않았다. 복위가 된 지 며칠이 흘렀건만, 사람이 너무 없었다.

“번잡스러운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어차피 로즈궁으로 궁을 옮겨야 하는데다가 오랫동안 그렇게 지낸 탓에 불편함은 없었다. 헬리아는 공작이 불쑥 다른 이야기를 꺼낸 것 같지 않아 이어서 나올 그의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말문을 뗐다.

“후작의 문제도 있고 하여 전하께 주청을 드려 호위를 붙이기로 했네.”

“호위요?”

헬리아는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지금 그녀에겐 엘라임이 있고, 또 그녀 스스로도 능력이 있었다. 굳이 호위 기사가 필요할까 싶었다. 그런 헬리아의 속내를 읽은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공주의 능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는 안전 문제 이상으로 공주의 체면이 달린 일일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하세요.”

공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헬리아는 호위 기사 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긍정을 표하자 공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네. 이제는 혼자의 몸이 아니니 신변은 물론 품위 또한 생각해야지.”

“호위 기사는 어떤 자죠?”

함께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잘 맞지 않는다면 서로 불편할 뿐이다. 그 말에 공작의 눈이 얄궂게 휘었다.

‘이거 뭔가 꿍꿍이가 있군.’

헬리아는 단박에 그것을 간파했다. 공작은 그녀의 반응에 상관치 않고 말했다.

“아직 결정은 되지 않았네. 워낙 까다로워서.”

헬리아로선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자라네. 그 점은 염려하지 말고 기다려 주시게.”

“그렇다면야.”

그러나 이미 공작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감시를 붙이시겠다?’

노련한 공작답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놓는 셈이다. 헬리아는 딱히 그것에 반발하지 않았다. 이 정도쯤은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보다 이제 어찌할 겐가?”

공작은 헬리아가 과연 어떻게 해나갈지 궁금했다. 후작이 그녀에게 칼을 갈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리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녀는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가 아닌가? 공작은 그녀가 어떤 일을 벌일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헬리아는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자는 잘 있나요?”

“그자라니?”

“노엘 말이죠.”

“노엘이라면…….”

공작은 자신의 성에 있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자의 정체가 누구인지도.

“노엘이 왕세자의 호위 기사더군요.”

헬리아의 말에 공작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역시 맞았군.’

헬리아는 키안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아돌프 후작에게 적대심을 가진 사람, 그날의 사건 중 유일하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자. 그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순간 공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그를 거론한 이유를 알아차린 탓이다. 기억을 잃었다 하나 그는 왕세자의 사람. 게다가 그녀가 증거를 가져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헬리아로서는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그자를 어찌할 생각인가?”

“치워 버려야지요.”

헬리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그와 동시에 공작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건 곤란하네. 내 비록 공주의 사람이 되었으나 그 일만은 받아들일 수 없군.”

노엘은 왕세자의 사람이기 전에 한 명의 주군을 모시는 기사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기억을 잃은 기사를 자신의 이익 때문에 사사롭게 죽일 순 없었다. 그건 기사도였다.

헬리아는 고리타분한 기사도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가 이리 완강하게 나오자 오해를 풀어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를 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헬리아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 없었다.

“어찌하려는 건가?”

“공작님이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공작님의 기사도에도 어긋나지 않는 일이지요.”

헬리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하압!”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남자의 검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했다. 하체는 단단히 바닥에 고정되어 흔들리지 않았고, 상체 또한 완벽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검을 휘둘러 본 자의 자세였다.

“열심이로군.”

남자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검을 늘어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단장님.”

노엘은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플로렌스 공작가의 기사단 단장인 에론 남작이었다. 190에 달하는 거구에 단단한 근육이 그를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에론의 눈이 노엘의 몸을 훑었다. 체계적으로 훈련된 몸이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의 자세, 습관,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절도 있는 태도까지, 모든 것이 그가 정규 기사 과정을 거쳤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라.’

노엘의 대한 정보를 떠올리던 에론이 다시 눈을 휘며 말했다.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제법 잘 따라오는군.”

“아, 예. 왠지 익숙한 듯해서.”

노엘이 에론의 위압감에 주춤거리며 입을 뗐다.

“그래, 뭔가 기억은 떠오르는가?”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노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좋지만 도무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도 몸은 기억하는 모양이군.”

“……예.”

노엘은 머리를 긁적였다. 노엘은 플로렌스 공작성에서 의원 카디스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기억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한동안 기억에 대한 실마리를 잡지 못해 낙담해 있는데 카디스가 그에게 검을 잡아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의 몸이 훈련된 기사의 몸이라는 것을 카디스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 뒤로 노엘은 쭉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먹고 자기만 하는 게 미안해 이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야 마음이 편했다.

“마치 제 일 같아요.”

“그 느낌을 잊지 말게. 그러면 곧 기억을 되찾을 걸세.”

“감사합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에론 남작은 가볍게 웃으며 노엘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때 멀리서 한 시종이 훈련장을 찾아왔다. 그는 곧장 공터를 가로질러 검을 휘두르고 있던 노엘에게 다가왔다.

“노엘 님, 조엘 남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를요?”

조엘 남작은 플로렌스 가문의 정보를 담당하는 자였다. 갑자기 그가 자신을 왜 찾는단 말인가? 노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진 않겠죠?”

“너무 걱정 말게.”

“……예.”

에론 남작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노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플로렌스 공작이 데이지궁을 방문한 지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공작이 다시 한번 헬리아의 궁에 방문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안 플로렌스입니다. 오늘부터 공주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 거기다 눈빛은 사람 하나 매장할 듯 음울하기만 하다. 헬리아는 자신의 호위 기사라고 말하는 이안을 보다가 공작을 노려보았다.

“공작님!”

“흥분하지 마시게.”

“지금 흥분하지 않게 생겼습니까?!”

“내 장담하건데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네. 내 아들이라서 하는 빈말은 절대 아닐세.”

공작은 그녀의 뾰족한 태도에 유들거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연한 반응에 헬리아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구겨졌다.

‘젠장, 이래서 늙은 여우랑은 상종을 말아야 하거늘.’

설마하니 대놓고 자신의 아들을 꽂아 넣을 줄 몰랐다. 헬리아는 힐끔 이안을 보았다.

‘호위 기사는 무슨 얼어 죽을. 무슨 눈빛이…….’

암살자를 옆에다 데려다 놓은 느낌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겁니까?”

“전하의 허가는 받았네. 탐탁하게 여기시진 않았지만, 원래 그분은 남자라면 다 탐탁치 않아하시지.”

공작은 이안을 헬리아의 호위 기사로 들이밀자 자신의 딸을 넘보는 건 백 년은 이르다며 헛소리를 지껄였던 빈센트를 떠올렸다.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거죠?”

“감시라니? 다 공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 몸의 깊은 충정이외다.”

공작은 그리 말하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충정 좋아하시네!’

느물거리며 회피하는 꼴이 정말 구렁이 뺨칠 정도였다. 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리라고 해도 안 하시겠죠?”

“이만 한 호위는 어디 가도 구하기 힘드네.”

“후우…….”

헬리아는 머리를 흩뜨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공작은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마침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네. 이 녀석은 여기 두고 가겠네. 안 돌려줘도 괜찮으니 잘 쓰시게.”

그냥 챙겨갔으면 좋겠다. 공작은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는 스킬을 시전하며 헬리아의 방에 이안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놈을 떨구고 쌩하니 방을 빠져나갔다.

“…….”

“…….”

공작이 나가자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때 문을 열고 세바스찬이 들어왔다.

“세바스찬!”

헬리아는 반가운 마음에 그를 반겼다. 이 지독히 어색한 공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든 좋았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소식은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이안 경의 짐이 도착했습니다. 어찌할까요?”

“……짐이라뇨?”

설마 여기서 산다는 건 아니겠지?

‘맙소사!’

헬리아는 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달이 휘영청 캄캄한 밤하늘을 비추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이지만 헬리아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운 헬리아는 눈을 감지 못하고 계속 뒤척거렸다.

벌떡!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하필 그 사람이라니.”

헬리아는 머리를 흩뜨렸다.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떨어져 내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공작도 공작이지만 이안의 생각이 더 궁금했다. 아마 공작은 이안을 호위 기사 겸 감시로 붙여놓을 요량일 것이다. 거기다 더해 둘 사이가 가까워지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공작의 속내야 워낙 시커멓다 보니 같은 시커먼 종자인 헬리아는 쉽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안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궁금증이 떠나가지 않았다. 최소한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그녀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거렸다.

“물어볼까?”

바로 옆방이 그의 방이었다. 얼마든지 물어보려면 물어볼 수 있었다. 그가 답을 하고 말고는 둘째 문제지만 말이다.

“너무 늦었는데.”

시간을 보니 벌써 열두 시가 넘어 한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헬리아가 까치발로 테라스에 나가 바로 옆 테라스를 살펴보니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젠장. 왜 아직도 안 자는 거야?”

그녀는 괜히 애꿎은 이안을 탓했다. 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그러려니 하고 내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으니 그녀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그냥 물어보기만 하고 올까?”

머릿속에 수만 가지의 상념이 들었다. 그러다 역시 너무 늦었다 싶어서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이 너무 맑고 또렷했다. 이대로 가다간 아예 밤을 새울 기세였다.

“안 되겠어.”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방에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불은 켜져 있는데.’

혹시 무시하는 걸까? 그녀의 눈이 좁아졌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이 이대로 돌아가려 했으나 그를 만나게 하려는 신의 계시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툭 하고 손으로 밀었던 것인데 문이 열려 버렸다.

‘헛!’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열린 문 앞에 잠시 머뭇거리다 주춤거리는 것도 성미에 안 맞아 방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실례합니다.”

저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소리를 낮추었다. 아직 제대로 짐을 풀지 못했는지 상자들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세바스찬이 매일 청소를 해둔 터라 방 안 자체는 깨끗했다.

원래 소박한 것인지 늘어놓은 물건들은 죄다 수수한 것뿐이었고, 대부분 책이 많았는데 대충 살펴보니 검술이나 무술 관련한 책이었다. 물건을 보면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고 이안은 생긴 것처럼 참으로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따분한 종자인 거지.”

헬리아는 저 혼자 비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이안이 없었다. 슬쩍 열린 문틈으로 침실을 살펴보았는데 그곳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이번에야말로 돌아가라는 계시인가 싶어 헬리아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헉!”

“여기서 뭐 하십니까?”

난데없이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난 이안을 보며 헬리아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그의 차림새 또한 가관이었다.

“도, 도대체 옷은 왜 벗고 있는 거야?”

“여긴 제 방입니다.”

“그, 그…….”

‘그렇긴 하네.’

헬리아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눈을 굴렸다. 욕실에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하체만 타월로 둘둘 말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아직도 몸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이안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눈빛 하나만으로 사람을 골로 보낼 수준이었다. 그러나 헬리아는 꿋꿋했다.

“이야기를 좀 하려고.”

“……이 시각에 말입니까?”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천천히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벗은 몸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즐기며 보는 수준엔 도달하지 못했다. 헬리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그가 한 발 더 다가왔다.

한 명은 뒤로 가고, 한 명은 앞으로 왔다. 조용한 추적은 길지 않았다.

탁.

어느새 헬리아의 등은 벽에 맞닿아 있었다. 헬리아가 달아나려 하자 순간 이안이 한 팔로 벽을 짚고 그녀를 가뒀다. 헬리아는 순간 너무 가깝게 보이는 그의 상체에 시선을 돌리다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웃음인지 조소인지 알 수 없었다.

“뭐, 뭐야?”

어떻게 도망갈까 궁리하던 그녀의 귓가로 이안의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이야기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이야기하는 자세란 말인가. 혹시 그에겐 이야기하는 방법이 일반인들과 다른 것인가.

“이건 이야기하는 태도가 아닌데?”

헬리아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육체적인 힘으로는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의 단단한 팔에 갇혀 헬리아는 오도 가도 못 한 채 서 있어야 했다.

“그런 차림으로 이 늦은 시각에 남자의 방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걸 바란 게 아니십니까?”

순간 헬리아는 영문을 몰라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잠옷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속이 보이거나 야한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값비싼 실크 잠옷이라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런.’

헬리아는 자신의 멍청한 실수를 자책했다.

“이건…….”

그러나 이안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유혹하는 게 아니라면,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겠습니다.”

싸늘한 표정으로 그가 몸을 돌렸다. 명백히 축객령이었다. 헬리아는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이안이 아까보다 더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계속 있으실 겁니까?”

그가 허리춤에 있는 타월을 벗으려 하자 헬리아는 놀라 서둘러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헬리아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마구 걷어찼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아무리 욕해도 쉬이 묘한 기분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날 밤. 헬리아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 * *

헬리아는 벌게진 눈으로 휘적휘적 길을 걸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 그 일이 있은 후 헬리아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리숙하게 겉으로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하루 종일 뒤통수에 붙은 거머리처럼 그녀의 신경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피곤해…….’

원채 지독히도 말수가 적고 음울한 남자라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헬리아는 오히려 그게 더 고역이었다. 차라리 뭐라 한 소리 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뚜벅뚜벅.

몇 걸음 뒤에서 이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건 그녀답지 않았다. 헬리아는 마주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째서 호위를 맡은 거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아무래도 아직 어제의 기억이 생생한 탓이다.

그런데 대답이 금방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이 거리에서 들렸을 텐데 말이 없다는 건 듣지 못한 게 아니라 대답을 안 한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 헬리아가 몸을 돌렸다. 그때서야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새카만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눈동자에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빤히 보는 것도 아닌데 시선 한 번에 사람을 왠지 파헤쳐 놓는 느낌이 든다.

오랫동안 둘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이안이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명입니다.”

헬리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럼 아버지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왜 받아들인 거지?”

“…….”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툭 내뱉었다.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안은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아예 고개까지 돌려 버렸다. 말하기 싫다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헬리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호위 대상과 호위 기사 간에 최소한의 신뢰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

공작이 억지로 밀어 넣은 호위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물리는 일도 어렵지 않다. 헬리아의 엄포에 이안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 호위를 맡은 거지?”

다시 되묻자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이안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가지런한 가마가 보였고, 그 아래에 희고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가녀린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왕국 최고의 엘라드 상단주이며, 적을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일궈낸 자다.

궁금해졌다. 과연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이 여자가 어떻게 나아갈지. 지켜보며 확인하고 싶었다.

“당신이 후작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러나 이안은 자신의 속내를 적당히 감추고 이야기했다.

‘이건 뭐…….’

한마디로 후작의 증거를 말아먹고도 네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지 확인하겠다는 거 아닌가? 그때 지켜보겠다는 소리가 그냥 한 소리가 아닌 모양이다.

헬리아는 입을 비틀며 뾰족하게 대답했다.

“그럼 잘 보라지.”

헬리아는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좀 전의 의미 없는 대화에서 홀로 분에 뻗친 헬리아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음? 이상한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3미터 반경 내에 사람이 없었다. 길에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편이었다. 한데 그녀의 주위에만 사람이 없었다. 마치 그녀의 주위로 실드가 펼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헬리아는 처음엔 의식하지 못하고 길을 걷다가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뒤통수는 물론 사방을 향해 살을 에일 듯한 살기를 내뿜는 저 음울한 인간 때문이었다.

눈에 힘을 주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가뜩이나 위압감을 주는 인간이 거기다 살기까지 내보이니 사람들이 피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헬리아는 갑작스런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그녀는 우뚝 멈춰 서 뒤를 돌았다.

“당신 누구 호위해 본 적 없지?”

“…….”

말이 없는 것만 봐도 알 것 같다. 순간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는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살기를 뿌려대?”

“…….”

헬리아는 지금 당장에라도 공작의 목덜미를 잡아채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최소한 호위에 대한 기본 지식은 집어넣고 보냈어야지! 그러나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거늘.

헬리아는 머리를 흩뜨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떨어져서 걸어.”

“그럴 수 없습니다.”

이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불만인 모양이다. 헬리아는 실소를 지었다.

“당신이랑 다니면 오히려 눈에 더 띈다고.”

헬리아와 이안을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게다가 공간이 만들어지니 더 눈에 띄는 것은 당연지사. 헬리아는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에 절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

이안이 살기를 거두고 불만스러운 듯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가 몇 걸음 더 그녀와 거리를 넓힌 것으로 보아 그녀의 말이 통한 모양이다.

헬리아는 그제야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괜히 그랬나.’

헬리아는 바글바글한 사람들 틈에 끼어 힘겹게 앞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그래도 아까는 창피는 하지만 걷기 불편하지 않았다. 거기다 이안과의 거리가 제법 되었다. 혹시 자신의 말에 상처받는 건 아닐까.

‘그럴 리는 없겠지.’

헬리아가 갑갑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아갈 때였다.

퍼억!

누군가 부딪쳤는지 한 남자가 소리쳤다.

“뭐야?”

헬리아와 부딪친 남자는 험악하게 생긴 얼굴에 허리춤에는 검까지 차고 있었다. 남자의 외침에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 세 명이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귀찮게 됐군.’

그냥 봐도 상대는 용병 나부랭이들 같았다. 그것도 질 나쁜. 자신이 부딪친 이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자라는 것을 발견한 남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이봐,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딱 봐도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게 보였다.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합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인간적으로 사과를 건넸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네 발 달린 짐승에 불과했는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미안하면 다야?”

그가 소리를 높이자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헬리아는 더는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 우선 자리를 이동하기로 했다.

“보는 눈이 많은데 자리를 옮기지?”

그녀가 근처 인적이 드문 골목을 가리키자 그들은 이게 웬 떡이냐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클클, 그거 좋지.”

사내들은 헬리아를 이끌고 근처 골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그자는 뭐 하는 거야?’

힐끔 뒤를 돌아봤더니 역시나 멀찍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거, 보면 볼수록 정말 예쁜데?”

사내들이 헬리아를 둘러싸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긴 금발은 찰랑거렸고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월척이 아닐 수 없었다.

“클클, 이참에 우리랑 같이 노는 게 어때?”

놈들의 수작질에 헬리아는 짜증이 났다. 거기다가 이안은 도통 이곳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자꾸만 뒤를 힐끔거리는 걸 본 남자들은 이안을 보고는 픽 웃었다.

“뭐야? 일행이 있었어?”

“그런데, 킬킬, 꿈쩍을 안 하네?”

“어이, 저런 놈은 놔두고 차라리 우리랑 놀자고.”

남자가 헬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투박한 손이 헬리아의 팔에 엉켜들자 헬리아는 아주 불쾌했다.

“놔.”

“큭큭, 안 놓으면 어쩔 건데?”

헬리아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결국 헬리아가 이안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있을 거야?”

“스스로 몸을 지킨다 하셨습니다.”

헬리아는 아까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고는 이를 물었다.

“이 좀생이!”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내가 창피하다고 하니까 그런 거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태 파악을 못 한 네 명의 사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뭐야, 둘이 싸워? 그럼 잘됐네. 우리가 잘해 줄게.”

사내가 헬리아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헬리아의 몸이 마치 철심을 바닥에 박아놓은 듯 단단히 고정되어 있자 남자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허억!”

그는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숨을 헉 들이마셨다. 헬리아의 손에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허공에 불길이 솟아오르자 사내들은 혼비백산했다.

“어으으…….”

“마, 마법사!”

반쯤 혼이 나간 사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 크악!”

“사, 살려줘!”

마법이 그들의 몸에 난사되었다. 그러나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었는지 헬리아는 적절히 파이어볼과 아이스볼을 사용하여 그들의 혼을 빼놓았다.

콰앙!

결국 마지막 마법에 남자들은 모두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나가떨어졌다. 헬리아가 그들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차 한 잔 마시는 정도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순식간.

그때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다는 말이 잘도 나오는 모양이군!”

“나오지 못할 건 없죠.”

헬리아는 씩씩거렸지만 자기만 이렇게 분에 차는 게 오히려 짜증이 났다.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드는 법을 어디서 배운 것은 아닐까. 그때였다.

“……!”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비수가 헬리아의 심장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너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헬리아가 그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푹!

헬리아의 동공이 커졌다. 날아온 비수는 바닥에 꽂혔다. 그리고 헬리아는 어느새 이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안이 검을 빼 들고 주변을 주시했다. 그제야 헬리아도 서둘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마법을 준비했다.

쉬이익-!

또다시 비수가 날아왔다. 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헬리아는 이번엔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실드를 펼쳤다.

챙! 채앵!

비수가 속절없이 실드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주변의 기운이 일렁이면서 하나둘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앗!”

“합!”

대략 열 명쯤 되는 암살자가 헬리아와 이안을 향해 검을 찔러왔다. 워낙 빠르고 민첩하여 헬리아는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채앵!

실드가 그들의 검에 부딪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검에서는 은은하게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젠장, 최상급 익스퍼트!’

암살자 중 최상급이 껴 있었다. 헬리아의 마법으로는 최상급 익스퍼트급 암살자의 공격을 쉬이 막아낼 수 없었다.

파앗!

결국 실드가 깨지자 암살자들은 헬리아를 향해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때 이안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촤악!

이안이 땅을 박차며 암살자의 몸을 단숨에 검으로 갈랐다. 허공에 선혈이 튀었고, 이안은 다시 민첩하게 쇄도하는 암살자의 검을 쳐 내며 그의 목에 검을 쑤셔 넣었다.

“크악!”

암살자들은 이안의 검에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안의 움직임이 천천히 둔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것을 눈치챈 암살자들은 이안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를 물리치지 않고서는 헬리아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암살자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그들은 고도로 훈련된 합공으로 이안을 몰아붙였다.

“크윽!”

이안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검으로 암살자의 급소를 찔러갔다.

“크아악!”

암살자들이 죽어가며 빈틈이 생기자 헬리아도 서둘러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볼!”

콰아아앙!

그녀의 공격에 암살자들은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마법사다!”

“조심해라!”

설마하니 헬리아가 마법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암살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이안은 그들의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암살자들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촤악!

검기가 둘러진 검에 암살자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갔다. 그때 이안의 다리가 꺾였다.

“큭!”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봐!”

헬리아가 그를 불렀지만 이안은 고통스런 표정을 지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설마 독이……!”

검에 독이 발라져 있었던 모양이다. 이안의 얼굴은 점점 파래졌다.

‘시간이 없다!’

결코 가벼운 독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치사량의 독. 서둘러 치료해야 했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앗!”

암살자의 검이 이안의 목을 향해 내리꽂혔다.

“조심해!”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이안이 자신을 공격해 온 암살자의 검을 쳐 내고 그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크악!”

“큭!”

이안은 그 순간 다시 검을 다잡고 남은 암살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늑대처럼 흉포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챙그랑. 푸욱!

이안의 검에 서린 검기가 암살자를 두 동강 냈다.

“으아악!”

피분수가 터져 나왔고 암살자는 단말마를 터뜨리며 쓰러졌다. 살아남은 마지막 두 명의 암살자는 죽은 동료들을 보며 사태를 파악했다. 결코 이길 수 없다. 상대의 전력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설마 헬리아 공주가 마법사일 줄은!’

그들은 서로 눈짓하고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안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는 도망가는 이들을 향해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집어 오러를 실어 던졌다.

휘이익-! 푸욱!

빠르게 날아간 비수는 도망가는 암살자의 뒤통수에 정확히 꽂혔다.

“아이스피어!”

나머지 한 명은 헬리아가 다리에 아이스피어를 맞춰 도주를 막았다.

“크악!”

다리를 휘감는 고통에 암살자는 신음을 흘렸다. 헬리아는 경련을 일으키는 암살자에게 다가갔지만, 그새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린 암살자는 입안에 있던 독낭을 깨물어 자살했다.

“젠장!”

헬리아는 죽어버린 암살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에게 배후를 캐낼 생각이었으나, 이미 죽어버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를 노릴 자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돌프 후작!”

연회가 끝나고 어떤 식으로든 뭔가 반응이 올 줄 알았건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

“크윽!”

그때 들려온 이안의 신음에 헬리아는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바닥에 검을 꽂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안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이안의 눈앞이 흐려질 찰나, 그의 시야에 헬리아가 비쳤다.

“이봐! 괜찮은 거야?”

헬리아는 이안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독이었다.

“큐어!”

헬리아는 서둘러 치유 마법을 걸었지만 그녀의 치료 마법 실력으로는 독을 완전히 해독할 수 없었다.

‘젠장, 이대로는.’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다 결국 엘라임을 소환했다.

“엘라임!”

그녀의 앞에 푸른 머리 물의 정령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움직이지도 못 할 것 같던 이안이 칼을 빼 들고 엘라임을 향해 겨누었다.

“이 녀석 뭐야?!”

엘라임이 이안의 칼을 잡아챘다. 그리고 곧 그의 눈동자를 보고는 그가 이미 항거 불능 상태라는 것을 파악했다. 엘라임을 암살자로 착각한 것이다.

헬리아는 미련한 이안의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그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얼른 치료해 줘.”

“그보다 먼저 검부터 치우라고 해.”

엘라임이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검을 놔.”

헬리아가 이안에게 말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엘라임을 경계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헬리아는 더는 지체했다간 정말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그를 불렀다.

“이봐! 검을 놔!”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이안. 그의 어깨가 피로 흥건해져 이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라임, 네가 그를 떼어내!”

“이 녀석 먼저 물러나라고 해.”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순간 그의 몸이 흠칫 움직였다.

“그는 적이 아니야.”

“…….”

“이안!”

“…….”

툭. 쨍그랑.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는지 이안의 검이 떨어지며 그의 몸이 무너졌다. 헬리아가 그의 몸을 받으려 했지만 엘라임이 빨랐다. 엘라임은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보다 치료부터 먼저 해줘.”

엘라임은 혀를 차며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래? 호위 기사는 개뿔. 아주 비실이구먼.”

엘라임은 뿌루퉁한 표정으로 이안을 치료해 나갔다.

* * *

페이튼 자작이 긴 복도를 지나 후작의 방문 앞에 당도했다.

“페이튼입니다.”

“들어오게.”

페이튼 자작이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를 서 있던 후작이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일은 어찌 되었는가?”

아돌프 후작의 낮은 목소리에 페이튼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전멸했습니다.”

“전멸이라? 그 아이가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후작은 플로렌스 공작의 아들인 이안을 떠올리며 의아해했다. 암살자는 그의 무력에 맞춰 보냈다. 한데 전멸이라니? 혹여 저번처럼 실수라도 할까 이번엔 최상급까지 붙여 보냈다. 그럼에도 전부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조사 결과 검에 의한 상흔 말고도 마법에 의해 죽은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페이튼 자작의 말에 후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마법이라…….”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후작이 페이튼 자작을 보았다.

“그럼.”

“예, 헬리아 공주가 마법사인 것 같습니다.”

“하.”

후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앙큼한 계집애가 마법사였단 말이지? 후작은 그날 보았던 헬리아의 당당한 기색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지.”

“암살자를 상향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지난번 플로렌스 공작령의 마법사와 검사는 공주와 플로렌스 공자로 사료됩니다.”

“흐음.”

톡톡톡-

후작은 책상을 두드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보다 월리슨 남작과 공주의 관계는 알아보았는가?”

헬리아 공주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지금 자신과 공주를 연결한 월리슨 남작의 행동에도 의심이 갔다.

페이튼은 조사한 결과가 담긴 서류를 후작에게 내밀었다.

“조사한 결과 월리슨 남작과 헬리아 공주 사이에 접점은 없었습니다. 이후 감시를 붙였지만 한 번도 접촉한 일이 없습니다. 월리슨 남작의 성향을 알아본 헬리아 공주가 먼저 다가간 듯싶습니다.”

후작은 월리슨 남작의 금발 패티쉬를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 외에 특별히 접합점은 보이지 않았다.

“공주가 남작을 이용한 것이군.”

후작은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고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강한 암살자를 보내야 그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페이튼 자작은 잠시 고심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주의 마법이 4서클 이상인 듯싶습니다. 또한 플로렌스 공자 또한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무력이니 전력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페이튼 자작의 분석에 후작은 동의했다.

“흐음, 어쩔 수 없군.”

후작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다크소드에 연락하게.”

페이튼 자작의 눈이 커졌다.

“하오나…….”

“돈은 아끼지 않고 지불한다고 전해라. 최대한 서두르게.”

페이튼 자작은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페이튼 자작은 이번엔 공주와 플로렌스 공자를 단번에 죽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헬리아와 쓰러진 이안을 업은 엘라임이 엘라드 상단으로 들어갔다.

“어이! 그거 빨리 가져와!”

“야, 뭐 하는 거야!”

직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종이가 날아들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들의 얼굴은 온통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아마 제대로 씻지 못한 것 같았다.

“아차……!”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여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날짜를 곱씹어 보았다. 벌써 한 달이나 흘러 있었다. 후작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그다음 곧장 성인식 준비 때문에 많은 시간을 소요한 것이다.

“큰일 났군.”

그녀가 없이도 상단이 돌아가도록 체계를 잘 잡아놓았지만 역시나 상단주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게다가 헬리아의 일처리 능력은 일반 사람 다섯 명에 맞먹는 효율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선 상단이 바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그, 그러는 게 좋겠어. 어차피 이놈이야 그냥 눕힐 곳만 있으면 되는 거고.”

엘라임이 독을 해독해 놓았기에 그리 다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헬리아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엘라임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역시 뒤로 돌았다. 헬리아가 조금 한가할 때 와야겠다-과연 한가한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싶어서 몸을 빼려는 찰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상단주님!”

“상단주님이다!”

“상단주님이 오셨습니다!”

직원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헬리아는 상단 근처에서부터 가면을 꺼내 쓴 상태였다. 그녀의 표식과도 같은 흰 가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크!”

거기다 멀리서 클리드와 워렌이 그 소리를 듣고 좀비 꼴을 하고서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상단주님, 어딜 가십니까?”

“혹시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클리드와 워렌이 그녀를 포위했다. 그 뒤로는 이미 직원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하하, 미안.”

“상단주님!”

“까먹고 있었어.”

그 말에 모두 기괴한 울음을 터뜨렸다.

“끄응.”

따가운 눈초리에 뭐라 말도 못 하고 헬리아는 묵묵히 서류를 결재했다. 자신이 한 일이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자마자 서류를 산처럼 쌓아놓다니.

“이거 너무 많…….”

타악!

클리드가 그녀의 책상에 다시 한 아름의 서류를 올려두었다.

“더 갖다 드릴까요?”

말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헬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엘라임 이 자식!’

재빨리 상황 파악을 한 엘라임은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간다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새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다. 워낙 엘라임이 신출귀몰해서 사람들은 그가 사라지고 나타나도 그러려니 했다. 무엇보다 엘라임에게는 남과 다른 오라가 느껴져 사람들은 쉬이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오직 유일하게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은 헬리아뿐이었다.

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흠흠, 그런대로 내가 없어도 잘했네.”

따끔따끔.

정수리에 콕콕 박히는 눈초리를 애써 무시했다. 워렌이 한 소리했다.

“도대체가! 왔으면 바로 상단으로 왔어야지!”

“그게…… 바빴다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워렌이 씩씩거렸다. 헬리아는 미안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꼬마 아가씨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소식이라도 전해 줬어야지!”

워렌은 시큰둥한 헬리아의 반응이 복장이 터질 정도로 답답했다. 아돌프 후작의 눈을 피해 갈 만큼의 일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아 혹여 잘못된 것은 아닌지 많이 걱정했던 것이다. 워렌의 걱정을 알아챈 헬리아는 조금 미안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건.”

“조금만 빨리 왔으면 내가 한 달 치 일을 하지 않았을 텐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도망이라도 가는 거였어. 클리드 저 독한 놈.”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클리드가 마음이 들지 않는지 워렌을 흘겨보았다.

“…….”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헬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저를 걱정한 마음보다 결재하기 싫었던 마음이 더 큰 것 같네요.”

“……무, 물론 아니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연락이 오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클리드의 시선이 쓰러져 누워 있는 이안을 향했다. 엘라임이 이안을 적당히 아무 데나 내팽개치고 곧장 정령계로 간 탓에 다른 방으로 옮길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엘라임의 치료로 독은 모두 해독했지만 아직 내상이 충분히 다스려지지 않아 이안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음.”

헬리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슬슬 말할 참이었어요.”

워렌, 클리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헬리아의 표정이 달라지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헬리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고심했다. 헬리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탁 하며 펜이 책상에 부딪치는 소리에 그들은 긴장하며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이제까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그들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헬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아돌프 후작과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제 단순히 상단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으로 인해 그들도 큰 폭풍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 헬리아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자신의 싸움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면 그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서 자신 혼자 싸울 생각이었다.

한데 문득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과연 자신의 정체를 알고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지금은 이미지가 바뀌었다지만 예전에는 소문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은 공주다. 평범하지 않은 신분을 8년간 그들에게 감추고 살아왔다. 어쩌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헬리아는 손에 축축이 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얘기하려고 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헬리아는 곧 결심했다.

“내 이름은 리아가 아니에요.”

그들의 표정이 변했다. 헬리아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똑똑히 그들을 응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움직이자 그들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다시 소개하죠.”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르센 왕국의 공주, 헬리아. 그게 내 이름입니다.”

헬리아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클리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워렌은 뭔가 생각하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

“…….”

그 둘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헬리아는 초조함에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역시 아닌가.’

그때 워렌이 입을 열었다.

“역시나.”

클리드가 거들었다.

“그렇군요.”

그들이 한 마디씩 주고받자 헬리아는 어리둥절했다.

“역시나, 라니요?”

“뭐, 예상은 했어.”

“예상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헬리아가 영문을 몰라 당황하자 워렌이 말했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열 살 소녀.”

“8년간 함께 있었습니다. 알려 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알게 되더군요.”

워렌과 클리드의 말에 헬리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헬리아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그녀였다.

“알고 있었어요?”

“우릴 뭐로 본 거냐? 8년이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워렌과 클리드는 상단 최고의 간부. 수많은 귀족과 만나면서 교류를 해왔다. 그러면서 그들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특히나 아르센 왕국에 살면서 왕족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플로렌스 공자지?”

“그것도 알았어요?”

워렌이 정확히 이안의 정체를 맞추자 헬리아는 낮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이었다. 자신이 다 속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탈해하는 헬리아를 보고 워렌이 피식 웃었다.

“어른을 뭐로 보는 거냐, 꼬마 아가씨?”

“그럼 왜 말하지 않았어요?”

“말해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리드의 말에 워렌도 덧붙였다.

“뭐 말하지 않은 이유도 짐작은 갔어.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말해줄 거라고 믿었어.”

워렌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근데 8년은 너무 길다고.”

“하, 하하.”

헬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까지 긴장한 것이 허무해졌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자신을 믿고 있었다.

“하하, 정말 알고 있었단 말이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함께 있다 보니 점점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퍼즐처럼 하나둘 그녀의 정체에 관한 실마리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던 날, 워렌은 그날 많은 술을 마셨다. 그녀가 자신들을 속인데 대한 야속함,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상황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8년 전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 살에 불과했다. 부모 밑에서 재롱을 떨 나이에 그녀는 시장에 나와 물건을 팔았다. 손 마디마디 상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시간이 아깝다며 밤을 새운 날도 수두룩했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이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런 아이가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거렸을 것이 떠올라 답답하기도 했다. 자신들을 믿지 못하고 있는 건가 싶어 자괴감도 들었다. 그건 클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원망하지 않아요?”

헬리아의 말에 워렌과 클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달라지는 건 없다. 자신들을 구해 주고, 더불어 상단을 통해 더 큰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헬리아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잘 알고 있겠죠?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

헬리아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죽을지도 몰라요.”

“뭐야? 그래서 우리보고 모른 척이라도 하라는 거야?”

“…….”

헬리아는 무언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우릴 뭐로 보는 거야!”

“맞습니다. 저희는 상단주님의 편입니다. 도망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헬리아가 입을 열려는 것을 워렌이 막았다.

“천하의 엘라드 상단을 만든 사람이 후작가 따위를 무서워하는 거야?”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정말 못 당하겠다.

“아니요.”

“그럼 뭐가 걱정이야!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워렌이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네 곁에 있으면 없는 떡도 떨어지거든. 말년에 노후 준비해야지. 암!”

워렌의 단호한 말에 클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는 무슨!”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였다.

“고마워요.”

“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가씨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헬리아는 작게 웃고는 말했다.

“저는 기회를 드렸어요. 이제부터 도망은 금물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들 저한테 인생 저당 잡혔으니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말아요.”

“으음, 이거 도망갈 때를 제 손으로 버린 느낌이…….”

워렌이 넋두리를 늘어놓자 헬리아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오늘 이 선택이 인생 최고의 배팅이 될 겁니다.”

맑게 갠 하늘처럼 그녀의 미소도 맑았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이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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