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퀸
3
제1장 플로렌스 공작
챙그랑!
페이튼 자작의 얼굴을 스치고 간 잔이 바닥에 부딪쳐 깨졌다.
“뭐라? 실패했다?”
후작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 노기가 짙게 배인 음성에 자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아돌프 후작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순히 잡초 하나 제거하려다 뱀이 나타난 경우였다. 엑스퍼트 상급 여섯 명이 전멸당했다.
“조사해 본 결과 한 명은 검사에게, 한 명은 마법사에게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법사와 검사라……. 조력자가 있다는 것인가?”
후작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작은 씨앗 하나가 결국 싹을 틔우고 말았다.
“목적지는 확인했는가?”
“그게…… 플로렌스 영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후작의 질책이 이어졌다.
“정신머리가 있는 것이냐? 그곳에서 일을 벌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소, 송구합니다.”
후작은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로 나오면 바로 처리해라.”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수하가 사라지자 후작은 피곤한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왕세자를 끌어내리려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놈 하나 때문에 발목이 잡힐 순 없지.”
후작의 눈빛이 번뜩였다. 왕세자를 불구로 만들지 않고서야 그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암살 계획을 실행했지만, 생각보다 상대의 무력이 강했다. 결국 왕세자의 다리를 불구로 만드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암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 그리고 그를 도왔다는 마법사와 검사.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후작의 근심이 깊어만 갔다.
* * *
“저기, 저는…….”
다음 날 노엘이 머뭇거리면서 헬리아에게 말했다.
“저는 이안 님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헬리아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손도 빠르긴.’
밤사이 그를 살살 꼬신 모양이다. 헬리아는 조금 고민하는 척을 했다. 말 그대로 척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손에 넣었어.’
기억을 되찾으면 모를까, 지금의 노엘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헬리아는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처럼 입을 열었다.
“본인이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어차피 이제 노예도 아닌데.”
“아, 정말 문신은 고맙습니다.”
“뭘요. 작은 인연의 선물이라고 해두죠.”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노엘도 함께 일어났다. 바로 어디로 갈 생각인가 보다.
‘하여튼 행동력도 빨라.’
헬리아는 속으로 혀를 차곤 그들을 배웅했다.
“그럼.”
이안은 짧게 말을 내뱉고는 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노엘은 꾸벅 인사를 하곤 그를 따라갔다. 헬리아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언제 다시 만나길 바라요.”
물론 속으론 다시 보지 않길 바랐다.
노엘은 못내 미안한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나 보니 손등은 물론 암살자에게 당한 상처까지 모두 나아 있었다.
“문신도 지워주셨는데…….”
“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노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이안은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자신을 따라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노엘은 고민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자신도 왜 쫓기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냥 가기 좀 미안하네요.”
“미안하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우뚝.
순간 이안이 뒤를 돌았다.
‘좋아했다?’
가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이라든지 기운이 그러했다. 마치 볼일 다 봤다는 듯이. 이안은 평소 누군가의 감정 상태를 잘 알아맞히곤 했다. 그는 왠지 미심쩍다는 생각에 눈을 찌푸렸다.
‘돌아가면 먼저 조사해야겠군.’
이안은 여전히 무언가 꺼림칙함이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 * *
다그닥다그닥.
마차가 플로렌스 공작의 성에 다다르자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플로렌스 공작가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플로렌스 공작성인 미라젤 성은 이름 높은 건축가 로렝이 설계한 것으로, 기본적인 방어 목적인 성의 역할을 갖춤은 물론 아르센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 중 하나이기도 했다.
거대한 왕성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하얀 외관과 함께 에메랄드빛 지붕이 어우러져 고고하면서도 은은한 기품이 느껴졌다.
플로렌스 공작은 아르센 왕국의 철의 검이라 불리는 소드 마스터이며, 성격이 곧고 바르며 충직하기로 소문난 자였다. 명장 밑에 졸장 없다고 공작의 수하 중에는 한결같이 강직하고 뛰어난 기사가 많았다. 그 때문에 플로렌스 영지는 왕국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한 영지였다.
히이잉!
성문 앞에 도착하자 마부가 말고삐를 당겨 마차를 멈춰 세웠다. 갑옷을 입고 무장한 병사가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말투와 태도에 상대에 대한 예의가 묻어났다. 문지기만 봐도 공작의 성정이 얼마나 강직하고 뛰어난 자인지 알 수 있었다. 고용한 마부가 뒤를 돌아보자 병사의 시선도 마차 안을 향했다.
달칵.
마차의 문이 열리고 푸른 머리 남자가 내렸다. 그는 정중하게 병사에게 자신들이 온 목적을 알렸다.
“저희는 수도에서 온 엘라드 상단입니다. 플로렌스 공작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병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 유명한 엘라드 상단이라면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특히 신비에 쌓인 상단주는 변방의 병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귀족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
왕국 최고의 부를 지닌 자.
만나고 싶다 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상대가 대단하다 하나 그들의 신분은 상인. 아무리 유명하다 하나 쉽게 들일 수 없었다.
“약속이 없으시다면 약속을 잡고 다음에 오시고, 혹 초대장이 있으시다면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그 정중한 말투에 푸른 머리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과연 플로렌스 공작가다. 행동에 수선함이 없고 시종일관 정중했다.
곧이어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그는, 아니, 그녀는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병사에게 다가와 말했다.
“공작님께 엘라드 상단이 왔다는 것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병사는 눈을 좁혔다. 원칙대로라면 안에 알리겠으니 후에 오라고 말하겠지만 그냥 물리치기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물러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가 성 안에 엘라드 상단의 방문을 알렸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통보가 도착했다.
“확인됐습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흰 가면을 쓴 헬리아는 그 모습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성 내부로 들어가자 성문에서 연락을 받고 나온 집사가 그녀와 엘라임을 마중했다. 집사가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나 굽힌 것은 허리일 뿐 그의 자부심은 꼿꼿이 정면을 향해 있었다.
“플로렌스 영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저희가 갑자기 찾아와 번거롭게 한 게 아닌지요?”
집사는 소문의 엘라드 상단주가 이렇게 어린 목소리의 소유자라는 것에 놀랐고, 그녀의 태도가 거만하지 않다는 것에 더 놀랐다. 보통 그녀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대개 행동에 거만함이 깃들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 상대에 대한 예의가 묻어났다.
집사는 놀람을 감추고 미소로 화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헬리아는 집사를 따라 성 내부로 들어섰다. 밖의 고고하고 웅장한 모습과 달리 속은 공작성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했다. 그러나 가구 하나하나가 모두 오랜 세월을 머금은 것들이라 고풍스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직업병이 도진 헬리아는 가구에서부터 장식물까지 하나하나 눈으로 값을 매겼다.
‘호오, 저것은 200골드쯤 하겠군. 저 작품은 르네의 작품이군. 이거 보물 창고가 따로 없어.’
헬리아는 오랜만에 눈이 호강함을 느끼며 군침을 삼켰다.
그때 한 시종이 집사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였다. 집사는 공작의 접견실로 그녀를 안내하다 말고 멈춰 섰다.
“죄송하지만, 조금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집사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공작가를 책임지는 집사인 만큼 비굴해 보이지 않고 당당했다. 헬리아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공작님께서 지금 일이 있어 잠시 뒤에 뵈었으면 하십니다. 죄송하지만 정원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그도 약간은 난처한지 집사는 연신 헬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헬리아는 공작의 손님이었고, 그녀의 존재 자체도 왕국 최고의 상단 상단주이기에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안해하는 집사의 모습에 헬리아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말했다. 헬리아는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머리를 크게 다친 것 같습니다.”
희끗한 머리의 칠십 대 노인이 노엘을 이곳저곳 살핀 뒤 진단을 내렸다. 노인, 카디스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치료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최고급 포션이라도 먹은 것 같군요.”
노엘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마신 것이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이었다니.
이안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최상급 포션은 그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 귀족들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을 손등의 문신 하나 지우자고 쓴 그녀가 새삼 놀라웠다.
카디스가 말을 이었다.
“노엘 군의 병은 단기 기억상실입니다.”
“단기 기억상실이요?”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기억은 찾을 수 있나?”
의원 카디스는 턱을 쓰다듬고 다시 한번 노엘을 보았다. 노엘은 의원의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또 왜 암살자에게 추적당하는지 알고 싶었다.
카디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기억을 찾는 일은 아무리 서두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노엘의 안색이 굳어졌다.
“다행히 몇몇 군데가 끊긴 모양이니 차근차근 기억이 있는 부분과 연결하다 보면 찾게 될 겁니다.”
카디스는 노엘을 진단하기 전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노엘은 아예 기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둘 조각을 짜 맞춰가다 보면 기억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보다, 이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카디스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노엘의 기억이니 그의 기억을 되찾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카디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행입니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공자님의 몸이 더 중요하답니다.”
카디스가 주름진 손으로 이안의 손을 쓰다듬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안은 쓰게 웃었다.
“미안하네.”
카디스가 나가고 이안이 다시 노엘에게 다가갔다. 노엘은 이안의 정체를 듣고 놀라 눈이 커졌다.
‘플로렌스 공작의 장남이라니!’
짙은 갈색 머리는 염색이었는지, 지금은 새카만 흑발이었다. 노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은가?”
“아, 예. 감사합니다.”
이안이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왜 그들이 쫓는지 정말 기억이 안 나나?”
노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신이 알고 싶다.
“모르겠습니다.”
“흠.”
그때 이안의 머리에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사태가 워낙 혼란스러워 생각지 못했지만, 여유가 생기자 자신이 플로렌스 영지로 돌아온 이유가 떠오른 것이다.
‘설마…….’
이안이 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마지막 암살자는 증거를 가져간 이가 플로렌스 영지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엘을 보았다.
때마침 노엘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일련의 사태가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노엘이 그 증거를 가지고 플로렌스 영지로 가다 사고가 나 노예 상인에게 붙잡혔고, 노엘의 흔적을 찾아낸 암살자가 그를 죽이려고 한 거였다면?
“혹시 뭔가 가진 게 없나?”
“가진 거 말입니까?”
노엘은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이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이 없다는 것이 이래서 문제다. 혹여 다른 곳에 옮겨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노엘은 이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저도 모르게 미안해졌다. 목숨을 구해 주고 치료도 해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으니 도움을 줄 방법이 없다. 노엘은 저도 모르게 머쓱해져 귀를 긁었다. 그러다 맨들맨들 느껴지는 감촉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
“뭔가 떠올랐나?”
“그게, 귀걸이가…….”
“귀걸이?”
“그게 제가 계속 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고 흑요석으로 된 귀걸이였는데, 내가 그걸 빼놓았던가?”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떠올리려고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귀걸이라고?”
“분명 끼고 있었는데…….”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 없어졌는지 기억하나?”
노엘이 곰곰이 기억을 뒤졌다.
“분명 숲에서는 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노엘은 한 번도 귀걸이를 뺀 적이 없었다. 자신이 빼지 않은 귀걸이가 왜 없어진단 말인가? 이안의 눈이 좁아졌다. 그는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물었다.
“치료를 받기 전에는 분명 끼고 있었나?”
“아! 맞아요. 어? 그런데 그다음에는 끼었던가?”
“…….”
‘선수를 뺏겼군.’
확실히 처음에는 노엘을 주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어느 순간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그를 보냈다. 바로 치료를 하고 난 이후부터. 아마 그 귀걸이가 특별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때 느꼈던 위화감이 맞았다.
그 흰 가면 여자. 이안은 우선 그 여자의 정체부터 파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 쉬어.”
노엘을 방에 두고 이안은 나왔다.
* * *
공작가의 노집사를 따라간 곳은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정원 입구에 다다르자 향긋한 꽃향기가 헬리아를 맞이했다. 정원은 입구에서부터 모두 화려하게 핀 붉은 장미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헬리아가 장미를 바라보자 노집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아끼시는 정원입니다. 금방 차를 내오겠습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집사는 그녀를 정원으로 안내한 후 곧 돌아갔다.
탐스럽게 핀 장미들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향긋한 향으로 헬리아를 후각을 자극했다. 한 송이 한 송이 곱게 핀 장미를 보면 얼마나 정성들여 가꾸었는지 알 수 있었다.
헬리아는 꽃엔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다. 매일같이 손질하고 가꿔야 이만한 정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꽃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움과 너무 일찍 져버리는 아쉬움이 있지만 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헬리아는 여유를 가지고 정원을 거닐었다. 문득 장미 한 송이를 손아귀에 감싸는데 그 감촉이 마치 벨벳 천을 움켜쥔 듯 부드러웠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때 장미 수풀 사이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십 대 중후반 정도 보이는 남자는 소탈하게 웃으며 장갑을 낀 손으로 이리저리 옷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갑자기 등장한 중년인을 보고 헬리아는 조금 놀랐지만 모자를 쓰고 가위를 든 폼이 이곳을 관리하는 정원사인 듯했다. 짙은 회색 옷을 입은 중년인은 살짝 모자를 들어 올렸다. 입가에 옅은 미소와 잔잔한 주름들. 왠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장미를 아끼는 마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헬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습니다. 한 송이에도 키운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 있군요.”
“후후, 제법 눈썰미가 있으신 모양이군. 고맙소, 내겐 자식 같은 놈들이지.”
소박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 장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차, 혹 귀족은…….”
“괜찮습니다. 귀족은 아닙니다.”
헬리아의 말에 정원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어찌 오셨는가?”
“공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헬리아는 왠지 정원사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훗.”
헬리아가 웃자 정원사가 이유를 물었다.
“왜 웃는가?”
“아뇨, 문득 제가 여기서 기다린 이유를 알 것 같아서요.”
“기다린 이유라니?”
“저라도 이런 정원이 있다면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원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자 헬리아는 가면 속에 미소를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랑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기다리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런가.”
정원사는 장미꽃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마치 아기를 돌보는 듯 조심스러웠다.
헬리아는 정원사의 모습을 관찰하다 근처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장미향이 코끝을 스쳤다. 왠지 낮잠이라도 자고 싶을 정도로 느낌이 좋았다.
헬리아가 눈을 감고 있자 정원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날이 따뜻해도 바람을 쐬고 자면 감기에 걸리네. 곧 공작님이 오실 테니 잠은 나중으로 미루시게.”
“햇볕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잠이 오나 봅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멀리 검은 매 한 마리가 창공에 족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 심심해 보이니 말벗이라도 해주리다.”
정원사가 가위를 품에 집어넣고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그러곤 헬리아가 앉아 있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헬리아의 시선이 잠시 그의 울퉁불퉁한 손에 머물다 정원사가 입을 열자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범상한 인물 같진 않은데.”
“상인입니다.”
“상인? 평범한 상인이 아무 약속 없이 공작님을 만날 수 없을 텐데…….”
“대단한 위명은 아니나 엘라드 상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오호! 이거 유명하신 분이었구려.”
그녀의 겸손한 모습에 정원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 유명한 엘라드 상단주다. 설마하니 이렇게 어린 여자일 줄 몰랐다. 성격도 소문처럼 괴팍하거나 괴짜가 아니었다. 겸손할 줄 알고 말에도 언뜻 기품이 서렸다.
“한데 정말 그냥 상인인가?”
헬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정원사가 헬리아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좌우로 움직였다.
“내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는데, 왠지 다르구먼.”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것일까. 그러나 헬리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뭐가 다릅니까?”
“왠지 돈 벌러 온 사람처럼은 안 보이네.”
정원사의 말이 재밌는지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상인이 돈 벌러 오지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지. 자네에게만 말하지만 공작님한테 영 돈 나올 구석이 없다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돈 없는 이를 찾아온 이유가.”
헬리아는 그의 말에 정원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맑았다. 보통 정원사라고 믿기 힘들 만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쫓으러 왔습니다.”
“사람?”
“이곳에 돈이 없다 하셨습니까? 네, 돈은 없겠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게 없다 하시면,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정원사의 눈이 빛났다. 상인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제법 그럴싸했다. 상대가 왕국 최고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이기 때문일까.
“재밌는 말이구려. 하지만 상인은 돈을 얻어야 하는 게 아닌가?”
“돈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힘이지요.”
헬리아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말을 끄집어냈다.
“돈에 인생이 좌지우지되고, 흔들리고 내쳐지면서 돈이 힘이란 걸 알았죠. 그런데 돈을 좇자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원사는 헬리아의 눈동자에게 진심을 읽었다. 말재주와 기교가 아닌 진심이었다.
“왜 힘이 필요한 겐가?”
헬리아가 정원사를 직시했다.
“나가기 위해. 살기 위해서.”
정원사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살기 위해 돈을 버는가?”
“이제는 살아가기 위해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왔지요.”
헬리아가 마치 심연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정원사의 눈은 그렇게 온통 새카맸다.
“옛날 유명한 재상이 한 말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열 배의 이익을 얻고, 귀금속을 사고팔면 백 배의 이익을 얻는다 했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대권을 잡으면 천만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장사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권력을 잡는 일입니다.”
정원사의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헬리아는 꿋꿋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에서 힘을 얻어 갈 것입니다.”
“…….”
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원사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이제 저에 대한 시험은 끝나셨습니까?”
“……알고 있었나.”
정원사가 모자를 벗었다. 검은 눈동자와 함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푸근했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무인의 모습이 있었다. 그가 내뿜는 기도는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기의 물결.
그러나 헬리아는 이겨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로렌스 공작 전하.”
헬리아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이 나라의 공작이자 아르센 왕국의 철의 검, 모든 기사의 선망인 소드 마스터, 자신을 시험한 장미 정원의 정원사인 플로렌스 공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
“공자님.”
플로렌스 가문의 정보를 담당하는 조엘 남작은 성으로 돌아온 이안을 반겼다. 조엘 남작은 삼십 대 중반의 짙은 남갈색 머리에 남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돌아오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무탈하신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아무 일 없었나?”
“예,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조엘,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니, 말씀하십시오.”
“사람을 찾아줘.”
“사람이라면 어떤 자입니까?”
이안은 헬리아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져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봐야 했다.
“흰 가면을 쓰고 있어 눈에 띌 거야.”
그러다 순간 가면을 벗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의 여자야. 나이는 확실치 않지만 십 대 후반에서 스물 초반일 거야.”
“여자라…….”
조엘 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여자라면 돌 보듯 하는 이안의 입에서 여자를 찾아달라는 말이 나오다니. 그러나 이안의 심상치 않는 표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이안은 조엘 남작과 바로 헤어져 항상 그가 찾아가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 언덕 위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밑에는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이안은 대리석 비석에 손을 대었다. 차가웠다. 아마 이 밑에 있는 두 사람도 이렇게 차가울 것이다. 그의 흑안이 더욱 어두워졌다. 나무 아래 놓인 두 개의 비석은 어머니와 형의 무덤이었다.
아인하르트 플로렌스, 여기에 잠들다.
“형님…….”
이안에게 있어 형은 사랑하는 가족이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보다 더 그를 살뜰히 보살펴준 건 바로 형이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형이 11년 전 의문의 사고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이안은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을 그의 형이 차가운 시체가 되었다. 최연소로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여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될 거란 소문이 자자했던 천재인 형이었다.
꽈악-
이안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의 눈에서 발하는 살기가 주위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아돌프 후작…….”
반드시 밝혀내 그자의 목을 취하리라. 이안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고 했던 다짐을 되새겼다. 형을 죽인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형.”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형과 너무도 닮은 동생이 거기에 있었다. 그를 보면 마치 형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지곤 했다.
이안이 살기를 흩뜨리고 그를 바라봤다. 듀안은 이안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일부로 짐짓 밝게 이야기했다.
“뭐야, 왔으면 인사라도 해야지. 아버지한테 인사는 했어?”
듀안 플로렌스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드렸어.”
“쳇, 언제나 내가 젤 마지막이지.”
이안은 아돌프 후작의 행적을 좇느라 거의 밖에 나가 있었다. 그 때문에 듀안은 이안을 거의 보지 못했다.
듀안은 나이가 스물이지만, 여전히 형을 뒤를 쫓는 어린아이였다. 마치 이안이 형을 쫓았던 것처럼.
이안이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제 가려고 했어.”
“한동안 있을 거지?”
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보다 엘라드 상단에서 사람이 왔더라?”
“엘라드 상단?”
“그 유명한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가 직접 왔더라고. 얼핏 봤는데 체구도 좀 작은 것 같고, 금발에 이상한 흰 가면을 썼던데. 진짜 그 가면은 이상했어.”
엘라드 상단주는 사람들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베일에 꽁꽁 싸여 있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순간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흰 가면?”
듀안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껴지자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흰 가면에 금발, 거기에 여자. 마침 자신이 찾고 있는 여자와 같지 않은가!
“그자는 어디에 있지?”
“아버지랑 이야기하고 있어.”
설마 하는 마음에 이안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형? 어디 가?”
듀안이 늘 그렇듯 그의 뒤를 쫓았다.
* * *
“……어떻게 알아본 건가?”
“어찌 공작님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헬리아는 입에 미소를 달고 플로렌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흑발에 흑안. 플로렌스 가문의 특징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보고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른 곳이라면 눈에 띄겠지만, 이곳은 플로렌스 가문. 직계는 물로 방계에서도 간간히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고, 헬리아가 이곳으로 오면서 본 몇몇 사람도 검은 머리였다. 그래서 처음엔 그가 공작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손이 정원사의 것이 아니었다. 정원사라면 가위질을 많이 하기 때문에 엄지 바깥 부분에 굳은살이 박인다. 그러나 공작의 손은 달랐다. 장갑을 벗을 때 본 손 안쪽에 딱딱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건 가위가 아닌 검을 쥔 검사의 손이었다.
무엇보다 더 큰 이유는 공작의 기세였다. 상대가 상인이다 보니 힘을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마나를 갈무리하지 않고 기세를 드러냈던 것이다. 아마 상대를 위축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정원사의 몸에 그런 마나가 있을 리 없지.’
하지만 헬리아는 8서클 마도사이자 마탑주인 베로니카 공작의 제자이며 5서클 마법사다. 응당 그의 기세를 간파했다.
플로렌스 공작은 허탈하게 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다시 소개하지. 플로렌스 공작일세. 내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하는 바이네. 엘라드 상단주.”
“저야말로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소문이 과하지 않았나 보군. 눈썰미가 제법이야.”
“과찬이십니다. 그 정도는 해야 벌어먹고 살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헬리아를 보며 공작은 너털웃음을 짓고는 예기 서린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날카로운 기세가 사라지자 장미 정원에는 다시 향긋한 장미향이 가득 퍼졌다.
“하하! 이거, 너무 쉬이 알아봐 싱겁구먼.”
공작은 조금 아쉬운 눈빛으로 혀를 찼다.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정원도 나름 운치가 있지만 그만 자리를 옮기지. 상단주의 말처럼 여길 자랑하려고 부른 거니까.”
그 말을 담아둔 것일까.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자, 안으로 드시게.”
헬리아는 공작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접견실 한쪽 벽면에는 플로렌스 가문을 상징하는 검은 매가 날개를 활짝 펼친 문양이 새겨진 휘장이 걸려 있었다.
내부는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벽을 두르는 높고 넓은 책장 안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아르센 왕국의 철의 검이라 불리고 있지만 학문에도 소홀함이 없는 듯 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마치 학자의 방 같았다.
집사는 이미 그들이 올 것을 예상했는지 다과와 홍차를 가지고 왔다.
헬리아와 플로렌스 공작이 접견실에 놓인 붉은 소파에 앉자 집사가 홍차를 그들 앞에 내놓았다.
플로렌스 공작이 찻잔에 담긴 그윽한 차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편지는 잘 받았네.”
그의 눈빛이 변했다. 흑안이 헬리아를 직시했다. 싸늘하게 굳어진 그의 표정에도 헬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지금의 상황을 잘 아시리라 봅니다.”
“…….”
“2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플로렌스 공작가는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무례하군.”
공작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헬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2왕자의 뒤에 있는 아돌프 후작이 과연 플로렌스 공작가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작가는 그에 대해 대항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헬리아가 그것을 다시 지적했다.
“아무리 단단한 성도 계속 공격을 받다 보면 부서지고 결국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손으로 여러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헬리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공작님께서도 그걸 잘 아시기에 제가 이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그가 그녀를 성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면, 헬리아는 그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공작이 거절할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지만.
“맞네. 그대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동해 결국 그대를 성 안으로 들였지. 왕국 최고 상단인 엘라드 상단을 누가 거절하겠는가. 하지만.”
공작이 헬리아를 보았다. 엘라드 상단이 자신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편지를 읽고 공작은 고심했다. 과연 엘라드 상단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들이 자신을 지지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공작은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왜 나인가? 아돌프 후작이라면 그대의 상단에 큰 이익을 안겨줄 것이네.”
공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세자의 다리를 고칠 수 없는 상태에서 보나마나 다음 왕위는 2왕자의 손에 넘어간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닌 2왕자파, 아돌프 후작이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헬리아가 말했다.
“돈만 좇았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공작은 그녀에게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이미 성 안으로 들였을 때부터 그녀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예감했다. 자신들의 상황은 점점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나마 캐서린 왕비의 세력이 아돌프 후작을 견제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건 2왕자, 아돌프 후작이었다.
그는 왕의 충신.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플로렌스 가문의 가주였다. 이미 승산이 없는 왕세자를 계속 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수백 년 넘게 내려온 가문이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숙적인 아돌프 후작과 한배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네.”
공작은 다시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왕세자는 곧 폐위될 것이네. 그리고 2왕자가 왕세자가 되겠지. 그걸 막을 방법이 있는가?”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왜 다들 왕세자 다음 왕위 후보로 2왕자만을 생각하십니까?”
“그건 당연히…….”
“왕위 후보는 또 있습니다.”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앙카 공주 말인가?”
“후훗, 공작님. 비앙카 공주를 왕위에 올려봤자 결국 후작 쪽 외손 아닙니까?”
“그럼…….”
“있지 않습니까? 또 다른 왕위 후보가.”
“그런 자가…….”
공작이 어리둥절하여 눈을 좁혔다. 그러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가당하겠는가. 하지만 왕에게 그가 모르는 또 다른 자식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왕은 그런 자가 아니었다.
공작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정녕 그녀를 말하는 것인가?”
“왕세자의 파벌에 가담했던 이들이 왕세자가 불구가 되자 붕 떠버렸습니다. 대개 2왕자 파벌로 흡수되었지만 여전히 2왕자와 아돌프 후작을 견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헬리아 공주가 그들을 붙잡아 놓을 겁니다.”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죄인이기 때문입니까?”
“…….”
“아니면 그녀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헬리아도 자신의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나올 힘을 기른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알기에 헬리아는 공작의 마음을 이해했다.
공작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네.”
왕세자가 그렇게 된 후 공작은 헬리아 공주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독살 사건으로 폐위되었고, 가진 바 능력이 의심스러웠다. 그가 헬리아 공주를 후보로 삼는다 해도 다른 자들이 그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공작의 눈이 날카롭게 헬리아를 쏘아 보았다.
“혹 허수아비 왕을 내세울 셈인가?”
엘라드 상단의 자금력이 투입되고 플로렌스 공작도 가세한다면 헬리아 공주를 왕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제 힘이 아닌 남의 힘으로 된 왕이다. 그런 왕은 꼭두각시 신세가 될 것이다. 아르센 왕국의 충신인 플로렌스 공작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엘라드 상단의 제의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대가 꼭두각시 왕을 원한다면 나는 그대와 함께하지 않을 걸세.”
“대단한 충신이시군요.”
역시나 플로렌스 공작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 짚으셨습니다.”
“잘못 짚었다?”
공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하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공작님이 헬리아 공주를 지지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자질 때문입니까?”
“…….”
공작은 무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려도 될까요?”
공작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 살의 어린 소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살범으로 몰려 폐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함이었죠. 그녀는 음모에 빠져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고 맙니다.”
헬리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모두 그녀의 존재를 잊으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죠. 그녀는 힘을 키우기로 했습니다. 그 힘은 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돈을 벌어 세력을 만들고 힘을 길렀습니다. 8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미칠 듯이 노력했습니다.”
공작은 그녀의 이야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헬리아 공주의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와 닮았다고 느꼈다.
공작의 눈이 커졌다.
“설마…….”
헬리아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8년이 지난 지금, 아르센 왕국 최고의 상단주로 바로 공작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헬리아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가면을 벗었고, 가면이 사라지자 그녀의 희고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굽이치는 금발과 금안을 지닌 여자.
플로렌스 공작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저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닮았다. 그녀의 어머니인 세니아 후궁과. 세니아 후궁을 알고 있는 플로렌스 공작은 단번에 헬리아 공주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다시 인사드리죠.”
헬리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르센 왕국의 공주, 헬리아 아르센입니다.”
헬리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그녀의 금안이 플로렌스 공작의 몸을 얽어맸다.
* * *
이안은 서둘러 공작가의 접견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흰 가면을 쓴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안은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이안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갑자기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치잇!”
이안은 그녀를 쫓았다.
“헉!”
‘저 인간이 왜 여기에?’
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우선 뛰기 시작했다.
‘젠장, 설마 플로렌스 가문의 사람일 줄이야. 어쩐지 눈동자 색이 특이하다 싶었어!’
염색으로 검은 머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헬리아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노엘의 귀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하지만 돌려줄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열심히 뛰었다.
“이런!”
그때 길이 양 갈래로 나뉘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헬리아는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에 있으면 이곳 길에 밝은 이안이 유리하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고는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는 바로 뛰어내렸다.
“플라이!”
어차피 이미 마법사라는 것은 들통 났으니 도망가기 위해 마법을 아낌없이 쓰기로 했다. 그냥 플라이로 달아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
이안이 그녀를 향해 검을 뽑아 들고는 따라 뛰지 않겠는가! 결국 헬리아와 이안은 대치하게 되었다.
“왜 날 쫓는 거예요!”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헬리아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귀걸이를 내줄 수는 없었다.
“전 모르거든요!”
“모르면 알게 해주지.”
‘이 사람이!’
헬리아는 이안의 눈동자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로 그냥 때울 상대가 아니었다. 귀걸이가 필요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니, 정확하게 그 안에 든 것을 원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헬리아 또한 그것이 필요했다.
“미안하지만 저도 코가 석 자라 내줄 수는 없겠어요.”
헬리아가 못을 박았다. 그러자 이안이 달려들었다.
“그럼 빼앗는 수밖에!”
“이익!”
헬리아가 마법을 연사했다.
콰아앙!
그녀가 던진 거대한 불덩이가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이어볼! 파이어볼!”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연발 연사! 이안은 순간 당황해 옆구리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안의 옆구리가 새카매지자 헬리아는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도 길도 알려주고 먹을 것도 줬는데.
“공작가에 포션 한 박스 보내줄게요.”
“젠장.”
이안은 그게 더 분한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접근전에서 기사를 이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헬리아는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마법을 뿌려댔다.
콰아아앙!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불에 그슬렸다. 헬리아는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작에게 멋지게 대사를 날린 게 몇 분 전인데 완전 민폐캐가 되어버렸다.
“손해는 엘라드 상단에 청구하세요!”
“하앗!”
이안이 달려들었다. 헬리아가 5서클이지만 상대는 그에 준하는 엑스퍼트 최상급. 거기다 거의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이었다. 조만간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나올 것 같았다.
‘물론 대단하지만.’
헬리아가 얼른 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실드를 펼쳤다. 실드와 검이 부딪쳤다.
“꼭 이래야겠어요?”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이안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정말 간절히 원하는 표정이었다. 헬리아는 마음이 약해졌지만 적어도 지금 그것을 돌려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그럼 어쩔 수 없지, 핫!”
이안이 더욱 힘을 주었다. 헬리아는 실드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모습에 이를 물었다.
‘이러다간 실드가 깨지겠어.’
단 한곳에 집중되는 힘을 실드가 막을 수 없었다.
파아앗!
실드가 깨지고 이안의 검이 헬리아의 몸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만!”
그때 플로렌스 공작의 기세가 두 사람을 옭아맸다.
우뚝.
이안의 검이 헬리아의 가면에 닿아 있었다. 헬리아의 눈동자와 이안의 눈동자가 지척에서 마주쳤다.
“지금 뭐 하는 게야!”
플로렌스 공작은 헬리아에게 칼을 겨누는 이안을 보며 깜짝 놀랐다. 자칫 그의 검이 헬리아의 목을 날려 버릴 위기의 상황이었다.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안!”
아직도 칼을 겨누고 있는 이안에게 공작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러자 결국 이안이 검을 뒤로 물렸다.
파삭!
그때 검의 파동 때문인지 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금은 전체로 이어지더니 이내 가면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이 커졌다. 가면이 부서지면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 그리고 금색의 눈동자.
이안은 헬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헬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얼굴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다행히 이안이 넋이 나가 있어 그녀는 공작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수리비는 후에 상단에 청구하세요.”
다시 이안이 쫓기 전에 얼른 가야지. 헬리아는 유유히 플로렌스 성을 벗어났다.
“이거야 원…….”
공작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성은 난리도 아니었다. 성벽은 폭삭 가라앉았고, 곳곳에 그을리고 부서진 곳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달랐다.
‘설마 공주가 이렇게까지 고위 마법사일 줄이야.’
자신을 직시하던 그 눈빛도 그렇고 과거 그가 알던 공주가 아니었다. 8년간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옅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아들에게 다가갔다. 헬리아를 보며 놀라던 표정을 지우고 공작은 근엄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이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더냐!”
이안이 헬리아 공주에게 검을 들이미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자칫 그의 아들이 공주를 죽일 뻔했다.
“이안!”
“…….”
이안은 여전히 그녀가 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듀안이 그런 형의 모습에 실실 웃었다. 그는 헬리아와 이안의 전투가 요란해 멀찍이서 나오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듀안이 입가에 잔뜩 웃음을 띠고 말했다.
“형, 혹시 아까 그 여자한테 반한 거 아니야? 완전 예쁘던데?”
“…….”
그러나 이안은 말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공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공주가…….”
“할 이야기가 많구나. 들어오너라.”
이안의 눈이 떨렸다.
* * *
월리슨 상단은 최근 무섭게 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돌프 후작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지만 월리슨은 매일매일 두려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새겨진 금제가 헬리아의 말 한마디에 그의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용의주도한 헬리아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이것저것 금제를 없애버리기 위해 노력한 월리슨은 결국 일주일 후에야 포기하고 그녀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곧 그는 만족했다. 어차피 자신의 뒷배가 바뀐 것일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부가 그의 품에 들어왔다.
달 밝은 밤. 월리슨은 액자 뒤에 설치한 자신의 금고를 열었다.
“크큭.”
금고 안에 가득 찬 황금을 바라보며 월리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그 엘라드 상단주가…….”
그러나 그는 얼른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헬리아 공주의 정체에 대해 말했다가는 자신의 머리가 터져 나갈 것이다.
“후우…….”
실수로라도 그 말을 내뱉을 뻔했던 월리슨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정말 의외였다. 그 엘라드 상단주가 바로 헬리아 공주라니. 8년 전 비앙카 공주 독살 미수 사건으로 폐위되어 유폐된 그녀가 어떻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상단까지 세웠을까. 그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 갔다. 하지만 그는 곧 머리를 흔들고는 황금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누구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월리슨은 황금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휘이잉!
그때 거세게 부는 바람 소리에 창문의 커튼이 흔들렸다. 월리슨은 창가에 다가가 문을 닫았다.
“헉!”
뒤를 돌자 흰 가면을 쓴 헬리아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푸른 머리 남자, 엘라임이 자리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월리슨이 비굴하게 허리를 굽혔다. 헬리아는 터벅터벅 걸어와 마치 자신이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소파에 앉았다. 월리슨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의 끄나풀이 되라 말했지만, 그가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아돌프 후작에게 뇌물을 바쳤고, 비리를 일삼았다. 헬리아 공주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감쪽같이 속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때가 온 건가.’
월리슨은 헬리아 공주가 온 이유를 되새기며 침을 꼴딱 삼켰다.
“제,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월리슨은 돈을 밝히고 미녀를 밝히는 놈이지만, 머리는 누구보다 잘 돌아갔다. 그 때문에 월리슨 상단을 이 정도로 키울 수 있었다. 순간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에 비친 그녀의 흰 가면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송구합니다.”
“도대체 네놈이 할 줄 아는 게 뭐냐!”
후작이 페이튼 자작을 향해 잉크병을 던졌다.
“큭.”
잉크병에 정통으로 맞은 페이튼 자작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와 함께 검정 잉크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닦지도, 불평불만도 내뱉지 않았다. 차라리 이것으로 후작의 화풀이가 끝나길 바랐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단번에 그의 목이 어깨 위에서 떨어질 것이다. 후작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그의 온몸을 꿰뚫듯 노려봤다.
페이튼 자작은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페이튼 자작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호기롭게 노엘을 잡아온다 말했지만, 그자는 여전히 성에 머물고 있어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노엘을 잡기 위해 플로렌스 성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공작이 낌새를 알아차린 듯했다.
“네놈이 그놈만 제때 처리를 했었어도.”
노기가 뻗친 후작의 얼굴이 붉어졌고 의자 손잡이를 잡은 손에는 핏줄이 도드라졌다. 후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뒤가 쑤셔왔다. 만약 플로렌스 공작에게 그놈이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면? 자신을 더욱 몰아붙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자칫 그에게 뒤를 밟혀 이제까지 해온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었다.
페이튼 자작이 후작의 걱정을 알아챈 듯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무리 그자가 나선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흐음…….”
후작은 페이튼 자작의 말에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놈이 무엇을 봤고 무엇을 알고 있든 증거가 없다.
하지만 공작이 그놈으로 자신을 물고 늘어질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애초에 그때 완벽히 죽였어야 했거늘. 그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후작이 깊은 한숨을 내뱉을 때, 문을 열고 시종이 들어왔다.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향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후작의 기세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후작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은 시종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얼른 자신이 들어온 이유를 말했다.
“후, 후작님. 월리슨 상단주가…….”
“월리슨이?”
시종이 후작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달마저 구름에 가려 자취를 감춘 밤이었다.
아돌프 후작은 호위로 페이튼 자작만을 대동한 채 은밀히 길을 나섰다. 그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월리슨 남작의 상단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월리슨 남작이 그들을 맞이했다. 후작은 로브를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월리슨은 최근 그에게 많은 부를 안겨줬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동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써먹기 위해 어느 정도 그의 장단에 맞춰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불러낸 그가 썩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먼저 안으로 드시지요.”
월리슨 남작이 후작을 방으로 안내했다. 페이튼 자작은 혹여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그의 손이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월리슨 남작과 아돌프 후작이 마주 앉았다. 남작은 후작을 위해 값비싼 홍차를 내왔지만 후작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후작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말해라. 이 밤에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만약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그 목을 날려 버릴 작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살벌하군.’
월리슨 남작이 후작에게 먹인 뇌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그를 마주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월리슨 남작은 침을 꼴딱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후작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돌프 후작이 월리슨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월리슨 남작은 욕심이 많고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였지만 간이 큰 자는 아니라 큰일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데 이렇게 당당히 나오는 것이 의외였다. 후작은 월리슨 남작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했다.
“네놈의 공을 잊지 않아 이리 나온 것이다.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자가 내게 불필요하다 여길 시에는 그 목이 어깨 위에서 사라질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월리슨 남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를 눌러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자가 후작의 앞까지 걸어왔다.
“멈춰라.”
페이튼 자작이 그의 앞을 막았다. 그가 검을 빼 들고 그자의 목에 겨눴다. 그러나 그자는 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지 검을 목에 댄 채로 움직였다. 오히려 페이튼 자작이 멈칫해 칼을 뒤로 물렸다.
“얼굴을 드러내라!”
페이튼 자작이 검을 어느 정도 물리고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후작의 눈이 좁아졌다. 그가 월리슨 남작을 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로브가 벗겨지고 황금색 실타래가 흘러내렸다.
페이튼 자작은 저도 모르게 검을 내렸고, 아돌프 후작의 눈에는 경악이 서렸다. 후작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니, 왕실 사람이라면 그녀의 얼굴을 모를 자는 없었다.
“그, 그대는?”
“헬리아라고 합니다.”
아돌프 후작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어리둥절했다. 설마 자신을 만나러 온 자가 헬리아 공주라니. 8년 만에 본 그녀의 외모는 정말이지 세니아 후궁을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후작은 그녀의 정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째서 공주가…….”
헬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앉았다.
“제가 여기에 나타난 게 이상합니까?”
“궁에 있어야 할 터인데…….”
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관심도 없는 공주가 궁에 잘 있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돌프 후작은 도대체 그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밝혀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헬리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후작은 자신의 모습을 보자 바로 내치지 않았다. 그는 노련한 정치꾼. 비록 그의 딸과 외손녀가 그녀를 싫어한다 해도 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누구든 써먹을 위인이었다. 합리적이고 냉정한 자. 그게 아돌프 후작이었다.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를 궁에서 꺼내주십시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비앙카 공주와 비비안 후궁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비앙카 독살 미수 사건이 조작된 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헬리아의 말에 후작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가 조소를 지었다.
“내가 왜 공주를 꺼내줘야 하지?”
그의 시선이 월리슨 남작을 향했다. 도대체 왜 이런 자를 자신에게 소개했느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월리슨은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하소연이나 들어줄 시간 따윈 없네.”
아돌프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리아의 금안이 반짝였다. 그녀의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앉으시지요.”
“내게 더 무례할 시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오늘은 그냥 못 본 척해 줌세.”
후작이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마샤프’를 아십니까?”
후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헬리아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그걸 어떻게?”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
“궁금하시다면 대화를 좀 더 할까요?”
후작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심기는 극도로 불편했다.
“무슨 꿍꿍이지?”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죠.”
“…….”
“그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궁에서 꺼내달라고.”
아돌프 후작은 그녀의 말이 단순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랬다면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정식으로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고 다시 원래의 직위로 복귀시켜 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저도 빈손으로 오진 않았습니다.”
헬리아가 품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아돌프 후작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건…….”
후작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헬리아가 먼저 그것을 다시 품으로 가져갔다. 후작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가 헬리아를 죽일 듯 노려봤다.
“아직 거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돌프 후작이 페이튼 자작을 바라보았다. 자작이 검을 들었다.
헬리아는 다가오는 자작의 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기백에 자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궁을 나오기 전에 후작님을 만나러 간다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만약 제가 사라진다면, 제일 먼저 후작님을 의심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후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이미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 예상했다.
“신경 쓰셔야 할 겁니다. 과연 이 사실을 저 혼자만 알고 있을까요? 제가 죽는다면 왕께서 나서실 겁니다.”
“…….”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심이 떠올랐다.
“저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며 당신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헬리아는 계속 궁금했다. 아니, 처음에는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헬리아로 살아가면서 궁금해졌다.
왕은 무슨 생각인 것일까? 왕은 헬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헬리아가 가진 왕에 대한 기억은 온통 배신과 분노로 점철되어 있어 그녀 또한 왕을 좋게 생각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보여진 사실만으로도 그랬다. 하지만 헬리아는 과거의 헬리아가 아니다. 어린아이도 아니다.
그러자 보였다. 배신과 분노 안에 가려진 헬리아가 가진 왕에 대한 기억과 마음이.
왕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누구보다 헬리아를 사랑했던 왕. 다른 사람들은 헬리아를 향해 돌을 던지며 멸시했지만, 그는 따뜻한 웃음을 지어주고 그 넓은 품에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그녀를 멀리했다. 어린 헬리아는 배신감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졌지만, 지금의 헬리아는 알 수 있었다.
지키기 위해. 사랑하기에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유가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딸을 내쳤던 것인지.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왕은 헬리아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데이지궁에 가둔 것이다. 그녀를 죽이려는 독사들의 눈과 손을 피해 데이지궁이라는 감옥 아닌 감옥, 단단한 성 안에 그녀를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붙여준 단 한 사람의 시종. 세바스찬이 왕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학식과 무력은 단순한 예절 선생이 가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국왕이 거론되자 아돌프 후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헬리아를 데이지궁에 유폐시켰지만 그 또한 국왕의 진심을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딸은 헬리아 공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하나 왕이 그것을 막았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후작이 페이튼 자작을 향해 작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헬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를 꺼내주신다면 이걸 내어드리겠습니다.”
후작의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어떻게 공주가 저것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그자보다 더 중요했다. 그자가 암만 떠들어도 증거가 없으면 그를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저건 달랐다. 저것 하나로도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후작이 헬리아를 응시했다.
“왜 이걸 내게 주는 겐가? 플로렌스 공작만 하더라도 충분히 그대를 꺼내줄 수 있을 터인데.”
“저는 절 꺼내줄 사람은 후작님뿐이라 생각했습니다.”
“…….”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닙니까? 저는 자유를 얻고, 후작님은 약점을 지울 수 있으니 말이죠.”
후작이 헬리아를 다시 보았다. 과거 멍청한 공주라 불리던 그녀였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갇힌 세월이 그녀를 이리 만들었을까. 후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녀는 플로렌스 공작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왔다. 이미 왕세자는 두 날개가 모두 꺾인 새다. 그런데 왕세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건 바로 국왕 때문이었다. 국왕은 2왕자를,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끼는 공주가 날 지지한다면?’
후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헬리아 공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머지않아 국왕의 마음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좋소. 그리하지.”
후작이 헬리아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헬리아는 미소를 짓고 그 문서를 후작에게 넘겼다. 후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내가 이걸 받고 모른 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 드오?”
“이제 한배를 탄 사람이 아닙니까?”
헬리아의 눈빛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후작은 이 공주가 꽤 마음에 들었다. 만약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다면 호감은 경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공주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 이달 말이었던가?”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그럼 공주의 성인식 때 보도록 하지.”
후작이 서류를 품에 갈무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리아는 아돌프 후작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 * *
금발의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창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게 푸른 하늘은 그의 눈동자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아돌프 후작이 헬리아의 무죄를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별난 일입니다.”
남자가 창을 닫으며 소파에 앉았다. 시녀가 내온 차를 입에 댄 후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좋은 일이겠습니까?”
남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물론 아돌프 후작이 헬리아 공주에게 큰 적의가 없는 것은 안다. 그녀에게 적의를 품은 것은 비앙카 공주와 비비안 후궁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아이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없는 도움. 세상에 공짜는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 공짜는 그 무엇보다 비싸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한 노인을 바라봤다.
“그 아이는 무슨 생각입니까?”
남자의 우려를 아는 노인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차향을 음미했다.
“공주님께서 결정하고 행동하신 일입니다. 8년간 그분을 가까이서 모셔왔지만, 허튼 일을 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남자의 얼굴에 대견함과 서운함, 안타까움이 연달아 스쳐 갔다. 홀로 8년간 꿋꿋이 자랐다는 것에 대한 대견함과 그 아이의 성장을 지켜볼 수 없었다는 아쉬움,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나오게 만든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못난 부모를 둔 아이가 고생이 많군요.”
남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못 준 자유를 그 아이는 혼자서 이뤘습니다. 참으로 대견하고 미안합니다.”
노인은 남자의 눈에 서린 회환을 보며 그를 달랬다.
“앞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과거보다는 미래를, 앞으로 더 잘하라며 그를 다독였다.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참으로 좋은 사람. 그는 이 사람을 자신에게 남겨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의 생일이 얼마 안 남았군요.”
남자가 창 넘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그 아이가 보고 싶습니다.”
* * *
“이게 무슨 짓인가요?”
비비안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과 상의도 없이 그 아이를 빼낼 수 있단 말인가. 아돌프 후작은 딸의 말에도 무표정한 표정을 지은 채 차를 마셨다.
“필요에 의해서였다.
“아버지!”
“어찌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현재를 못 보는 것이냐?”
비비안은 분한 마음에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째서 아버지는 매번 이런 식이란 말인가. 언제나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는 권력과 야망이 중요할 뿐 자신이나 가족의 생각은 중요치 않았다.
“조슈아를 왕위에 올리는 데 필요한 아이다.”
“…….”
비비안은 그 말에 냉정을 되찾았다. 헬리아가 못내 밉지만 그녀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풀 화가 꺾인 비비안이 물었다.
“정말 그 아이가 도움이 되는 건가요?”
“국왕이 아끼는 아이다. 충분히 도움이 될 터.”
후작은 노엘의 일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다. 비비안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작이 비비안을 위해 말을 덧붙였다.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그땐 네 마음대로 하거라.”
“그 말, 잊지 마세요.”
비비안의 눈이 싸늘하게 빛을 발했다.
“헬리아가?”
문 틈 사이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비앙카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은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온다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헬리아를 폐위시키고 데이지궁에 가뒀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의 손으로 그녀를 풀어준 꼴이 아닌가? 비앙카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외할아버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이미 헬리아를 데이지궁에 가둘 때부터 시작된 악연이었다.
‘네가 다시 공주가 되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이번엔 내 손으로 널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릴 테니까.’
비앙카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오늘따라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도 들떠 있는 듯 가벼웠다.
“후작이 너를 믿을까?”
바람과 함께 그녀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엘라임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돌프 후작과의 거래. 과연 이 거래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헬리아는 책상에 앉아 한 장의 문서를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다. 엘라임의 눈이 그것에 잠시 머물다가 그 내용을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약하네.”
“어차피 그쪽도 날 이용할 뿐이야. 나도 그를 이용했을 뿐이고.”
후작은 헬리아가 가진 문서와 그녀의 존재 가치를 이용했다. 헬리아는 후작을 통해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했다. 본인들 손으로 처넣은 자신이 다시 그들의 힘으로 올라온 걸 알면 지금쯤 속이 꽤나 타들어갈 것이다. 비비안과 비앙카의 불같이 분노할 모습이 떠오르자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 아돌프 후작의 울타리에 속한 인물이었다. 진정한 실세는 아돌프 후작이었다. 그녀들은 그저 분노할 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어.”
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길고 결 좋은 금빛 머리는 햇살에 반짝였고, 흰 피부는 붉은 입술과 대비되어 도드라졌다.
헬리아가 눈을 빛내며 눈부시게 웃었다. 엘라임은 그 순간 헬리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8년 전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작은 손을 가졌던 아이는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한 여자가 되었다.
헬리아가 자신의 드레스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어때?”
“어, 어.”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어떠냐고?”
“으, 응. 오, 옷이 날개네.”
헬리아는 엘라임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지 몸을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더 이상 어린아이는 없었다.
헬리아가 천천히 거울을 만졌다. 차가운 느낌이 손끝에 스쳤다.
“이제 나갈 때야.”
헬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엘라임은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세바스찬입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라임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사라졌다.
“들어오세요.”
세바스찬은 헬리아의 모습을 보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무려 8년이었다. 그녀가 이 데이지궁에 지낸 세월이. 헬리아가 밤낮으로 노력한 그 흔적이 고스란히 그녀의 성장을 통해 드러났다.
세바스찬은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헬리아는 고개를 들고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세바스찬에게 배운 것 이상으로 그녀의 몸에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기품이 흘렀다.
“가죠.”
헬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8년 전 벌어진 비앙카 공주의 독살 미수 사건이 시녀의 단독 범행임이 밝혀진 바, 헬리아 공주의 무죄를 증명하는 바다. 이후 왕족의 직위를 복권하고, 데이지궁 유폐를 철회한다.]
유폐된 지 8년.
헬리아는 드디어 데이지궁을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