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42)

제4장 시작

“후후, 이게 바로 엘라드 상단의 활력 포션 원액이란 말이지?”

월리슨 남작은 술병 크기의 유리병에 든 짙은 푸른색 액체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리오.”

월리슨 남작은 작은 키에 갈색 머리를 지닌 평범한 청년 리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리오의 얼굴에도 남작과 같은 야비한 미소가 흘렀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 상단은, 흐흐흐.”

월리슨 남작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붉게 물들었다. 월리슨 상단의 상단주인 월리슨 남작은 땅딸보 배불뚝이인데다 대머리였다. 나이는 사십을 넘겼지만 살 때문인지, 욕심 때문인지 여전히 얼굴은 탱글탱글했다. 그가 술잔을 들자 아름다운 하녀가 술을 따랐다. 화려한 금발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하녀였다.

“리오 님도 드세요.”

리오는 아름다운 하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 술이 넘치자 화들짝 놀라 얼른 술잔에 입을 대었다.

꿀꺽.

미인이 따라준 술이라 그런지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남달랐다. 리오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남작의 취향인지 그의 하녀들은 하나같이 금발의 아름다운 미녀였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나.’

월리슨 남작이 금발 페티시즘이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젠장, 나도 이 건만 해결하면.’

부러운 마음을 눌러 담은 리오는 남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집사, 그걸 내오게.”

노집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묵직한 검은 가죽 가방을 가져왔다. 리오는 얼굴이 점점 흥분으로 달아올랐지만 참고 기다렸다.

“열어보게.”

집사가 테이블에 가방을 놓자 남작이 말했다. 리오가 손을 덜덜거리면서 가방의 잠금을 풀고 열었다.

“이, 이건.”

‘화, 황금!’

꿀꺽!

리오는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의 눈은 온통 황금에 쏠려 있었다.

“이번 일의 대금일세.”

리오는 황금을 받아 들며 몽롱한 표정에 빠졌다.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무, 물론입니다.”

“한데 들키지는 않았겠지?”

리오가 아니라며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황금에 빼앗겨 있었다.

“아, 아닙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월리슨은 두툼한 턱을 한 번 쓰다듬더니 운을 띄웠다.

“그럼 다시 한번 더 가져올 수 있는가?”

“그, 그게…….”

리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번 일만 성공시키면 바로 아르센 왕국을 뜰 생각이었다. 그자가 알면 자신의 목은 댕강 떨어질 게 분명했다. 물론 그걸 무릅쓰고 행한 일이었지만, 두 번은 선뜻 나서기 힘들었다.

월리슨은 리오의 갈등을 알아채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더 가져오면, 황금도 두 배를 더 주겠네.”

꿀꺽.

리오가 황금을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황금에 물들어 금빛으로 변했다. 황금 앞에서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래, 아무도 몰랐잖아? 그거 몇 병 빼돌린다고 해서 뭔 일이야 나겠어?’

결심이 선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흐흐, 그럼 잘 부탁하네.”

월리슨과 리오가 손을 맞잡았다.

그때였다.

“배, 백작님!”

월리슨 남작가의 기사가 허겁지겁 월리슨에게 뛰어왔다. 기사의 얼굴이 다급함과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월리슨의 표정이 구겨졌다.

“무슨 소란이냐?”

“그, 그게 지금…….”

콰앙!

기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월리슨 남작과 리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도, 도대체 뭐 하는가! 침입자를 내쫓지 않고!”

남작의 외침에 기사가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지만, 검을 휘둘러 보기도 전에 푸른빛이 기사를 에워쌌다. 푸른 머리에 사파이어처럼 짙은 벽안을 지닌 남자. 그의 손에서 물방울들이 휘몰아쳐 기사를 벽으로 패대기쳤다.

“크악!”

“이런, 칼은 함부로 쳐드는 게 아니라고.”

남자의 유들거리는 말투에도 다른 사람들은 반응할 수 없었다. 기사를 단숨에 날려 버린 압도적인 무력! 월리슨과 리오는 움직이지 못했다.

뚜벅뚜벅.

뒤이어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리오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사, 상…….”

리오가 진정 두려워한 이는 이 푸른 머리 남자가 아니었다. 바로 흰 가면을 쓴 채 걸어오는 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작님.”

가면 속에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가 쓴 가면은 무늬가 없는 흰색이었고, 짙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죽음의 사신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리오를 힐끗 보더니 이내 월리슨 남작에게 다가갔다.

“에, 엘라드 상단주!”

월리슨 남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는 얼른 활력 포션의 원액을 몸 뒤로 숨겼다.

“이게 무슨 짓인가!”

숨기려 해도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남작의 호통에도 그녀는 척척 걸어가 그의 맞은편 소파에 턱 앉았다.

“제가 여길 왜 왔는지 그건 남작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흰 가면을 쓴 여자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나직이 말했다.

‘제, 젠장.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남작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리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일은 터졌다.

“밖의 기사들은 뭐 하고 있는가!”

남작의 외침에도 적막이 흐를 뿐이었다. 푸른 머리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다들 피곤한 모양이라 잠 좀 재웠지.”

남작의 시선이 아까 볼품사납게 패대기쳐진 기사를 향했다. 필시 밖의 기사들도 모두 저 꼴이리라. 남작의 손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거 여기서 다 만나네, 리오?”

“사, 상단주님…….”

리오의 낯빛은 이미 푸르죽죽했다.

“그, 그게…….”

“안 걸릴 줄 알았지?”

리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푸른 머리 남자가 그의 뒤를 막고 단단히 퇴로를 차단했다. 사태 파악이 끝난 리오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가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부, 부디 자비를…….”

“네가 엘라드 상단에 들어온 지 3년쯤 됐나?”

“사, 상단주님.”

“그럼 잘 알고 있겠지?”

그녀의 눈동자가 리오를 응시했다. 리오는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이 가빠졌다.

저 눈. 가면을 쓴 그녀가 유일하게 내보인 그 눈은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아군에겐 경외를, 적군에겐 두려움을. 적이 된 그에게 그 무엇보다 두려운 눈이었다.

그녀가 웃었다. 아니,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배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사, 살려주십시오! 상단주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푸른 머리 남자가 리오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사, 살려줘!”

‘제, 젠장.’

절규하며 끌려가는 리오의 모습을 본 남작은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의 잔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건 귀족 모독죄요!”

“큭큭큭.”

흰 가면 속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겨우 귀족 모독죄로 날 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좀 전의 존댓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남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상대는 왕국 최고의 상단, 그곳의 주인이었다. 이미 그녀의 실질적 지위는 남작인 그를 넘어섰다.

“월리슨 상단주. 그대가 한 짓은 잘 알고 있겠지?”

남작은 그녀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무, 무슨 뜻이냐?”

남작의 등에서는 줄줄 땀이 흘러내렸다.

“말 그대로. 그래서 준비했지.”

그녀가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쯤 알아차렸겠군.”

남작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짹깍짹깍.

시계 소리가 적막을 울렸다.

‘뭐, 뭘 하려는 거지?’

월리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남작의 방으로 누군가 급히 달려왔다.

“사, 상단주님!”

월리슨 남작은 갑자기 나타난 상단원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남작의 시선이 흰 가면을 벗어나 상단원에게 닿았다. 상단원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초, 총관이…….”

“총관이 뭘 어쨌기에!”

“총관이 상단의 돈을 갖고 날랐습니다!”

“뭐, 뭐야!”

남작은 충격을 받아 몸이 휘청거렸다. 믿을 수 없었다. 총관이 왜? 총관이 월리슨 상단에 몸담은 지 수년이다. 어떻게 그가! 월리슨 남작은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제대로 설명해 봐!”

“그, 그게…… 총관이 상단의 모든 돈을 빼돌려 종적을 감췄습니다.”

총관의 횡령 사실에 남작은 몸이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서, 설마 다 가져간 건…….”

“현금은 물론 가게 문서까지 모두 가져갔습니다.”

상단원의 말에 월리슨은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

“이, 이익! 그놈이 어째서!”

이제까지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월리슨은 분통을 터뜨렸다.

“얼른 잡아와!”

“이, 이미 찾고는 있지만…….”

“못 찾을걸?”

엘라드 상단주의 말에 월리슨이 고개를 홱 돌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 네년이…….”

좀 전 그녀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월리슨은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배신을 하려면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지.”

“커, 커억!”

“상단주님!”

남작이 거품을 물었다. 남의 상단 물건 하나 빼오려다가 자신의 상단을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어, 어떻게…….”

포션 한 병과 자신의 상단을 바꾼 꼴이었다. 그는 평민 출신의 상인으로 작위는 돈을 주고 샀다. 문제는 돈을 받고 자신에게 작위를 내린 상대가 자신이 망한 걸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나, 난 죽었다.’

그의 얼굴이 절망으로 푸르게 물들었다.

그때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고 싶어?”

흰 가면이 천천히 남작에게 다가왔다. 월리슨이 그녀를 쳐다봤다. 야비한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말의 희망이 보였다. 나중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그가 바짝 엎드렸다.

“뭐,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상단만은!”

그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무릎을 구부렸다.

“난 그 뭐든지 한다는 말이 참 좋아.”

여자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다시 내 소개를 하지.”

그녀가 천천히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화려한 금발이 허리 아래로 흘러내리며 물결쳤다. 그녀의 오밀조밀한 얼굴은 희고 작았다. 두 눈동자는 호박빛을 띠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입술은 앵두처럼 붉었다.

월리슨 남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의 숨겨진 얼굴에 대해 소문이 무성했다. 어떤 이들은 추악한 외모를 가리기 위함이라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심한 흉터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설마 가면 속에 숨겨진 엘라드 상단주가 저리도 엄청난 미녀였다니!

그의 경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는 경악, 아니,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이며.”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르센 왕국의 공주, 헬리아다.”

* * *

엘라드 상단.

8년 전 활력 포션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엘라드 상단은 이후 가르안 상단과 합병하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거기다 마탑과 공동 연구를 통해 내놓은 수많은 물건은 모두 혁신을 일으켰다. 아니, 그것은 가히 혁명이라 불릴 만했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물건이 계속해서 엘라드 상단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에 내놓은 새로운 물건에 열광했다. 그들이 만든 물건은 하나같이 편리하고, 뛰어나고, 완벽했다.

엘라드 상단은 점차 거대해졌다. 그들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새로운 분야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오래지 않아 엘라드 상단은 왕국 최고의 상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엘라드 상단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중앙 광장에 위치해 있다.

5층 높이의 석조 건물로, 건물 표면에는 장인이 공들여 새긴 문양이 한 폭의 그림처럼 빼곡히 조각되어 화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특히 상단의 정문에 대리석으로 조각된 황금 용은 엘라드 상단의 상징이었다. 황금 용은 아가리를 벌리고 황금으로 도금된 구슬을 입에 물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 번 이 용을 본 사람들은 잊지 못했다.

엘라드 상단의 1층에는 상품이 진열되어 있고, 2층부터 4층까지는 사무실로 쓰였다. 그리고 최상층인 5층은 아르센 왕국 최고의 부자라 일컬어지는 엘라드 상단주의 집무실이 있었다.

달칵.

건물 출입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시계는 정확히 아홉 시를 가리켰다.

뚜벅뚜벅.

아침 햇살을 받은 금발은 태양처럼 빛났고, 얼굴에는 무늬가 없는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푸른 머리 남자가 호위무사처럼 따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면 속에서 앳된 여자의 음성이 울렸다. 그러자 1층에 도열해 있던 전 직원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흰 가면을 쓴 여자는 그들의 인사를 받고 유유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직원들은 정지된 시계가 다시 움직이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 막 새로 들어온 신입 직원 켄은 그 얼떨떨한 상황을 마주하곤 자신의 선임에게 물었다.

“도, 도대체 누구예요?”

켄의 말에 선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그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아얏!”

“누군 누구야. 우리 상단주님이시지.”

켄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이에요?”

“그럼 넌 우리가 뭐 때문에 전부 다 나와서 인사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그렇긴 하지만…….”

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흰 가면을 쓰시는구나.”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에 대해서는 소문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가면을 쓴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린 켄은 문득 든 궁금증에 물었다.

“그런데 상단주님은 왜 가면을 쓰시는 거예요?”

엘라드 상단주의 가면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어떤 사람들은 못생긴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흉터를 감추기 위함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아는 이들은 없었다.

켄은 혹시 엘라드 상단의 직원들이라면 그 이유를 알까 싶어 물었다. 선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게지.”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뭔데요? 정말 소문처럼 못생겼나요?”

따악!

“아얏!”

선임이 켄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이씨, 때린 데 또 때려요?”

“네가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누가 못생겼대? 만약 어릴 적 그대로 자랐다면 누구보다 아름다우실 거다.”

그 과거형에 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8년 전 얼굴에 난 큰 상처만 아니었다면 정말 아름다운 미인이 되셨을 거다. 화상으로 흉터가 너무 심해서 포션도 듣지 않았지.”

“아, 그래서 가면을……!”

켄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며 수긍했다. 여자라면 얼굴의 상처는 큰 수치였다. 선임이 단단히 일렀다.

“상단주님 앞에서는 절대 가면에 대해서 입도 뻥긋하지 마라.”

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5층에 있는 상단주의 집무실은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황금 실이 들어간 화이트 톤 벽지는 매우 고급스러웠고, 바닥은 전부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가구들은 고가의 골동품으로, 부르는 게 값인 물건이었다.

흰 가면을 쓴 상단주와 푸른 머리 남자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 상단주는 어깨를 풀며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벗었다.

“마법을 걸어도 답답하네.”

그녀는 코끝을 찡그렸다. 그런데 분명 흉터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쓴다던 그녀의 얼굴 그 어디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피부는 우유처럼 희고 고왔으며, 입술을 장미꽃보다 더 붉고 진했다. 마치 미의 여신이 환생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미녀, 아니, 화려한 금발과 금안을 지닌 헬리아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 앉았다.

“그냥 변장이나 할까?”

헬리아의 투덜거림에 푸른 머리 남자, 엘라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에 있던 가면을 얼굴에 씌워 주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헬리아는 그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가면을 쓰게 된 이유는 베로니카 공작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헬리아 공주인 걸 알아차린 공작은 만약 그녀의 어머니를 아는 사람이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바로 정체를 알아차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가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단 직원은 그녀가 화상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것이라 알고 있었고, 그녀가 화상을 입지 않은 것을 아는 몇몇 최측근은 그녀의 어린 나이를 숨기고자 가면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워렌과 클리드가 들어왔다. 워렌은 8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상인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거구의 체구를 가졌다. 마흔으로 치달아가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혼자다.

그리고 클리드는 8년 전보다 더 성숙해져 있었다. 앳된 청년은 이제 완숙한 청년이 되었다. 옅은 오드아이가 매력적인 클리드는 인근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본인이 숫기가 없는 탓에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지금까지 애인이 없다.

“좋은 아침입니다.”

클리드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는 언제나 깍듯하게 헬리아를 대했다. 자신과 여동생 일리아를 구해 준 은혜 때문인지 헬리아를 대하는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존경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커억, 어제 너무 술을 많이 마셨는지 머리가 아프네.”

워렌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헬리아를 대하는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나마 달라진 것은 꼬마 아가씨라는 호칭 대신 아가씨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외부에서는 꼬박꼬박 상단주라 불렀다.

“가게에 들어갈 냉장고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헬리아의 말에 머리를 긁으며 태도가 비딱했던 워렌이 어느새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 총 스무 곳을 계약했다. 곧 수도 대부분은 계약이 완료될 거야. 계속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

워렌의 대답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드 상단은 마탑과의 제휴를 통해 수많은 마법 물품을 내놓았다. 마나석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냉온수가 나오는 욕조 등 헬리아의 아이디어에 마법 연구진이 머리를 맞대고 생활 마법 용품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특별한 아티팩트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 어마어마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싼 가격으로 공급한 덕분에 이제는 어딜 가든 엘라드 상단의 물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번에 만든 냉장고도 그것 중 하나였다. 음식점에 납품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점차 소문이 퍼지면서 계약이 쇄도했다.

“살롱은 어때?”

이번엔 클리드가 답했다.

“화장품과 드레스 주문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확충이 필요합니다.”

“그럼 더 인원을 보강해.”

엘라드 상단에서 따로 ‘로즈마리’란 브랜드로 살롱을 만들었다. 살롱을 관리하는 것은 클리드의 동생인 일리아였다.

일리아는 헬리아가 준 포션으로 폐렴이 완치되자 클리드와 함께 상단에서 일했다. 그러다 헬리아가 살롱을 개점하면서 그녀에게 살롱을 운영해 보지 않겠냐고 권해 맡게 되었다.

클리드의 동생답게 머리가 좋고 세심한 성격 덕분에 귀부인들은 일리아를 좋아했다. 그 때문에 살롱을 찾는 귀부인이 늘어났고 그와 함께 살롱에서 소개한 화장품과 드레스는 매번 품절되곤 했다.

그런 식으로 상단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상단 보고가 끝나자 워렌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왜 그놈은 그대로 내버려 둔 거야?”

“그놈이라면…….”

“월리슨 남작, 그놈 말이야.”

워렌은 월리슨 남작을 혐오했다. 돈하고 여자 좋아하는 작자치고 제대로 된 인간이 없었다. 그런데 헬리아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자 의아했다. 무슨 의도가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래도 답답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워렌의 말에 헬리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자는 미끼예요.”

“미끼?”

워렌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도대체 누굴 낚기 위한 미끼란 말인가. 클리드가 대신 대답했다.

“월리슨 상단은 아돌프 후작이 뒤를 봐주고 있는 상단 중 하나입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상단주님은 아돌프 후작에게 끄나풀을 심어둘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클리드의 말에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역시 클리드다. 머리가 좋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안목을 지녔다. 장사는 워렌이 위겠지만, 이렇게 정보를 조합하고 시류를 읽는 건 클리드가 한 수 위였다.

“클리드 말이 맞아요. 마침 후작에게 붙여둘 놈을 찾고 있었는데 잘 걸렸죠.”

워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후작이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

헬리아가 클리드에게 물었다.

“왕세자의 상태는 여전해?”

“예,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클리드의 말에 헬리아가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3년 전 라비안 왕국의 사신으로 갔던 왕세자가 왕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객에게 습격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왕세자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고, 그 당시 왕세자와 함께 있었던 기사와 시종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왕세자뿐이었다.

아르센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대대적으로 왕세자를 습격한 자들을 색출해 냈다. 그러나 끝내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저 라비안 왕국의 소행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하나 그것도 증거가 없어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지고 결국 유야무야 흘러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국은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세력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왕세자의 다리가 여전히 불구인 것이다. 신체에 장애가 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없다. 그 탓에 기존에 왕세자를 따르던 세력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비집고 2왕자가 다음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여전히 왕세자를 주축으로 하는 왕세자파와 2왕자를 주축으로 하는 2왕자파로 파벌이 나뉜 상태다.

“3년이 지났어. 이대로 계속 왕세자가 걷지 못한다면, 곧 폐위될 거야.”

“휘유, 이거 그럼 다음 자리는 2왕자한테 가는 건가?”

“아마도. 그리고 2왕자의 외할아버지가 아돌프 후작이지.”

왕세자의 다리가 여전히 낫지 않자 2왕자파 쪽으로 점점 힘이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다 2왕자의 외할아버지이자 아르센 왕국의 실세인 아돌프 후작이 직접 가세하면서 두 왕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귀족 대부분이 2왕자파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만약 앞으로 왕세자가 여전히 불구인 상태라면 차기 왕위는 2왕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워렌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차라리 후작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게 더 낫지 않았어?”

얼마 전 아돌프 후작 측에서 엘라드 상단에 제의를 해왔다.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단을 그대로 둘 리 없었다. 하지만 헬리아는 단칼에 그 제의를 거절했다.

“상단의 이익에 반할 수 있지만, 다시 제의가 온다 해도 거절할 거예요.”

헬리아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아돌프 후작은 자신을 독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몰아 궁에 가둔 비비안 후궁의 아버지이자, 비앙카의 외할아버지였다. 결코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근 그 때문인지 후작 측에서 상단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습니다.”

클리드가 걱정을 드러냈다.

“우리도 슬슬 노선을 정해야겠군.”

“플로렌스 공작 말입니까?”

클리드가 헬리아의 심중을 꿰뚫었다.

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렌스 공작은 국왕파이며, 왕세자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왕세자의 세력이 급격히 무너지며 그의 입장도 난처하게 되었다. 특히 아돌프 후작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2왕자가 왕이 될 경우 운이 나쁠 경우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지금쯤이면 내 편지를 받았겠군.”

헬리아는 자신의 편지를 받아보고 고심할 공작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클리드가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행 간다는 곳이…….”

“플로렌스 공작령에 다녀와야겠어.”

헬리아는 클리드에게 조만간 여행을 갈 거니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과연. 아무도 모르게 갈 생각인가?”

“아돌프 후작이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대놓고 갈 순 없죠.”

상단 누구도 그녀가 플로렌스 영지로 간다는 것을 아는 이는 없었다. 바로 오늘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가실 건가요?”

“조만간, 적당한 때를 봐서.”

보아하니 상단에도 비밀로 하고 갈 생각인가 보다. 클리드는 잠시 고민하다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그의 품 한가득 높이 쌓여 있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가 헬리아의 책상 위로 새로 서류를 한 묶음 올려두었다.

“여행 가실 때를 대비해서 상단주님이 특별히 처리하셔야 할 서류로만 모아 놓았습니다.”

역시나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 클리드다. 헬리아는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정도면 평소 분량이었다. 얼추 할 만했다.

“그러지 뭐.”

플로렌스 영지로 간다니까 제법 생각을 해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클리드가 다시 어디로 가더니 또 서류를 품에 한 아름 안고 왔다. 헬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 이 정도야 뭐.’

그러나 그가 두 번, 세 번, 네 번을 왔다 갔다 하자 헬리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책상이 서류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워렌이 서류 산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걸리실지 몰라 최대한으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최대한으로?”

클리드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웃었다.

“……이걸 다 혼자 했어?”

“상단원들과 함께 밤을 새워서 준비했습니다.”

“……굳이 밤을 새울 것까지야.”

“그럼 결재를 부탁드립니다.”

헬리아는 잠시 서류들을 본 뒤 서 있는 워렌을 향해 천천히 눈을 돌렸다.

‘헉, 왜 날 보는 거야……? 설마?’

워렌은 그녀의 눈빛에 흠칫했다.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가 뒷걸음치자 이미 헬리아의 지시를 받은 엘라임이 그의 뒤를 막고 있었다.

“어이, 잠시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워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리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클리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지.”

“예?”

“나는 아주 비밀리에 플로렌스 영지로 갈 거야.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헬리아가 슬슬 클리드의 곁에서 떨어졌다.

“이미 다들 내가 여행 간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어딜 언제 갈지는 아무도 모르지.”

“아.”

“여행 준비는 계속해. 그리고 마차는 일주일 뒤에 나로 위장한 사람을 태우고 다른 곳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클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그럼 언제쯤 출발을…….”

“지금!”

“하, 하지만 아깐 조만간이라고.”

“아니, 바로 가야겠어.”

“예엣? 사, 상단…….”

클리드가 놀라 그녀를 불렀을 때, 헬리아는 이미 엘라임의 품에 안겨 창문으로 뛰쳐나간 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바람과 함께 들려왔다.

“서류는 워렌한테 시켜!”

“이, 이 아가씨야! 얼른 안 돌아와!”

워렌이 창문을 붙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가 건장한 체구를 지녔다지만 5층 높이에서 그냥 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저 녀석 분명 일하기 싫어서 핑계 댄 게 분명해!”

워렌이 힐끔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았다. 암담함이 몰려왔다.

‘미친. 나는 현장 체질이란 말이야!’

워렌이 슬그머니 뒷걸음쳤다. 그러나 딱 클리드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크, 클리드.”

“워렌 님.”

“이봐, 저건 원래 아가씨가 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권한이 없다니까.”

클리드가 그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책상 위에 이미 워렌 님에게 권한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써두고 가셨습니다. 물론 도장도.”

‘이익! 이 철두철미한 놈!’

이미 빼도 박도 못 할 상황이었다. 클리드가 웃으며 그를 책상 앞에 앉혔다. 그의 어깨를 누르는 힘이 어째 비실거리는 평소 클리드와 달랐다.

“그럼 서류를 처리하실까요?”

그의 미소에 워렌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수도 중앙에 위치한 광장. 중앙 거리에 있는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고, 바닥은 전부 돌로 짜 맞혀져 있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상단을 빠져나온 헬리아와 엘라임도 광장 거리를 걸었다.

그들은 곧장 플로렌스 영지로 가지 않았다. 클리드가 해놓은 여행 준비 외에 그녀 나름대로 챙길 게 있었다. 그녀는 베로니카 공작을 보기 위해 마탑으로 향했다.

헬리아와 엘라임이 거리를 걷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아름다운 미모의 헬리아와 그에 뒤처지지 않는 엘라임의 외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헬리아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곳에서 가면을 쓰는 것이 더 시선을 끌 게 분명했다. 엘라임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머리 뒤로 팔짱을 끼었다.

“분명 내일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킥킥.”

“…….”

헬리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반박하진 못했다. 내일로 예정했지만 그 서류 더미를 보자 일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클리드는 너무 착실한 게 탈이야.”

머리는 좋은데 융통성이 없는 게 문제다.

“뭐, 워렌이라면 잘하겠지.”

물론 고생깨나 할 것이다. 클리드가 얼마나 철저한지 새삼 깨닫겠지. 헬리아는 울상을 짓고 있을 워렌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엘라임은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다가 사람이 많아지자 그녀를 잡아끌었다. 엘라임은 순간 그녀의 머리가 자신의 어깨에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꼬맹이, 많이 컸다.”

헬리아가 눈을 좁히고 그를 노려봤다. 언제 적 꼬맹이 소리란 말인가.

“내가 언제까지 꼬맹이로 있을 줄 알았어?”

“한번 꼬맹이는 영원한 꼬맹이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라임은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인간은 빨리 자라는군.’

그가 코를 살짝 찡그렸다.

“후후, 이게 부모의 마음이군.”

“애나 낳고 말해.”

엘라임의 헛소리에 헬리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정령왕은 너무 감상적이라 탈이다.

그때 엘라임이 퍼뜩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네 열여덟 번째 생일이 얼마 안 남았지?”

“뭐…….”

헬리아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어차피 그 생일은 그녀의 진짜 생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열 살 때 보낸 생일 파티 이후에 그녀는 생일을 지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에서 생일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귀족이나 왕족 정도나 생일을 챙기지 일반 평민들은 그저 지나칠 뿐이다.

“어차피 올해도 똑같지.”

“똑같긴! 열여덟 번째 생일이라고!”

“그게 그거지 뭐.”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엘라임이 헬리아의 머리를 흩뜨렸다. 헬리아는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정돈하고 그를 흘겨봤다.

“울 꼬맹이의 성인식은 성대하게 치러줘야지.”

“나이 먹는 게 대수라고.”

헬리아가 먼저 터벅터벅 걸어갔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반응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자신의 성인식에 저리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을 것이다.

매년 생일을 챙기지 않는 평민도 단 한 번, 바로 열여덟 번째 생일에는 반드시 파티를 연다. 열여덟은 아이가 성인이 된 것과 살아남은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같이 가!”

엘라임이 앞서 걸어가고 있는 헬리아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그때 그의 눈에 지나가던 여자들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헬리아에겐 없고 그녀들에겐 있는 것이 눈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헬리아는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목걸이나 반지 등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았다. 물론 착용하지 않아도 자체가 빛을 내는 사람이었지만.

“좋아하려나.”

엘라임의 눈이 액세서리에 머물렀다.

마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여마법사 르웬이 다가와 맞이했다. 이제 그녀는 제법 나이가 든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최근 자신에게 화장품이 없냐며 옆구리를 찌르곤 했다.

“어서 와.”

“잘 지냈어요?”

“흥, 네 녀석이 갖고 온 일감 때문에 삭신이 쑤신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르웬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헬리아가 아이디어를 넘겨주면 가장 열성을 다하는 게 그녀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마탑주의 방문 앞까지 도달했다.

똑똑-

“마탑주님, 리아가 왔습니다.”

“들이게.”

끼익.

문을 열고 헬리아와 엘라임이 들어갔다. 8년이 지나도 베로니카 공작의 외모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흰 수염은 여전히 길었고, 눈가에 주름이 조금 늘어났을 뿐이다.

“어서 오너라.”

공작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방금 전까지 연구 중이었는지 그의 책상은 종이와 여러 실험 도구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마법 연구에 대한 열의는 마탑에서 제일이었다.

그가 이번에도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번엔 또 뭐냐?”

헬리아가 어떤 재밌는 아이디어를 줄지 자못 기대가 큰 모양이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르웬은 일이 많다고 투덜거리는데, 스승님은 모자라나 보네요.”

“클클, 너도 이 나이 되어봐라. 게다가 르웬, 고것도 네가 뭘 가져올지 궁금해하는 눈치야. 나이가 먹으니 호기심만 느는 모양이구나.”

공작에게 헬리아는 마치 마르지 않은 화수분 같았다. 끊임없이 나오는 그녀의 아이디어에 공작의 편견은 여지없이 깨지고 새로운 시야가 틔었다. 그 덕분에 오랫동안 지체되었던 마법에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저놈이 뭔지는 안 알려 줄 테냐?”

공작이 엘라임을 어깻짓으로 가리켰다. 그동안 엘라임을 지켜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 그것 하나만 알 뿐이었다. 처음에는 엘프라고도 생각했지만 막상 엘프와 비교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영감, 왜 날 걸고넘어져?”

“쯧쯧, 저 못된 말버릇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어떻게 젊은 놈이 매번 나이 든 노인한테 꼬박꼬박 반말이야.”

“그럼 영감은 나한테 존댓말 해야 해.”

엘라임과 공작의 눈에서 순간 스파크가 튀었다. 한 치 양보도 없었다.

“둘 다 똑같아요.”

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순간 베로니카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라임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리던 그는 낯선 기운을 감지했다. 그건 바로 자신 앞에 앉아 있는 헬리아였다.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새 또 실력이 늘었구나.”

헬리아의 심장에서 다섯 개의 서클이 휘돌고 있었다. 웃고 있지만 내심 그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녀가 마법을 배운 지 8년. 물론 그 세월이 짧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마법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상단과 마탑을 오가며 가장 일이 많고 바쁜 건 그녀였다. 오죽했으면 그걸 다 소화하는 그녀를 보고 괴물이라고 했을까.

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하다 보니 되더라구요.”

남들이 들으면 돌멩이가 날아올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녀 스스로 마법 하나에만 매달리지 않았지만 마법은 원래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쉬웠다. 마치 마법을 위해 태어난 몸 같았다.

베로니카 공작은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뭡니까? 그 음흉한 미소는?”

“누군지 몰라도 참 제자 하나 잘 키웠다.”

“칭찬을 듣고 싶은 겁니까?”

“뭐, 해준다면야. 클클.”

“노인네가 말주변만 늘어서는.”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작과 투닥거리는 것이 싫진 않았다.

8년 전 처음 마탑주의 제자가 된다 했을 때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녀의 아이디어가 대단하기는 하나 마탑주가 직접 가르칠 필요가 있냐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베로니카 공작이 직접 나서며 그들의 반대를 묵살했다. 그는 처음 헬리아가 밖으로 나온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때와 달리 그 누구보다 살뜰히 그녀를 돌봐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엔 부정적이었던 마법사들도 점점 헬리아의 열정과 지식에 반해 어느덧 친해져 갔다.

공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웃고 떠들 때와는 정반대로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리 뜸들이더니 이제 움직일 생각인 거냐?”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베로니카 공작은 클클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공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의 얼굴에선 묘한 비장감이 감돌았다. 물론 오랫동안 그녀를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라면 쉬이 눈치챌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이제는 움직여야죠.”

짧다고도 할 수 있고 길다고도 할 수 있는 8년이다. 그동안 헬리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8년 동안 엘라드 상단을 왕국 최고의 상단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신중하게 때를 기다렸다.

“단순히 나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녀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자신을 폐위시키고 유폐시킨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지금의 엘라드 상단 또한 큰 힘을 지니고 있지만 헬리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놈 속이 지금 말이 아닐 게다.”

베로니카 공작은 플로렌스 공작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헬리아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지금이 딱이죠.”

“고약하긴.”

베로니카 공작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잘해 보거라.”

“도와주실 거죠?”

“약한 소리 하기는. 정작 어려울 때도 네놈 혼자 다 하지 않았더냐.”

공작은 조금 섭섭하다며 투덜거렸다. 헬리아는 정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끝내 자신의 힘으로 이겨냈다. 공작은 그때마다 기특하면서도 아쉬웠다. 조금쯤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도 알았으면 했다.

‘시간이야 많으니 차차 알아가겠지.’

공작은 따스한 시선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몸조심하거라.”

“다녀와서 뵙지요.”

헬리아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 * *

아르센 왕국의 북부에 위치해 있는 플로렌스 공작령은 오래전부터 아르센 왕국과 적국인 라비안 왕국과의 경계에 자리하며 국경을 수호해 왔다. 험한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국경을 수호하기엔 천혜의 요새였다. 험준한 산맥 덕분에 공작령으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지만, 산을 돌아 수도에서 플로렌스 영지까지 관도가 닦여 있어 마차로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물론 산을 넘을 경우에는 3일로 여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산길이 험해 지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산을 잘 아는 길잡이와 동행하지 않고서는 산을 넘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은 잘 닦여진 관도를 통해 플로렌스 영지로 들어간다.

“여기가 정말 맞아?”

엘라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숲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사람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길을 걸었다. 그녀는 여행자답게 치마가 아닌 짙은 고동색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흰 셔츠 위에 짙은 녹색 조끼를 걸쳤다. 그리고 산을 타기 알맞게 튼튼한 가죽 부츠도 신었다. 긴 머리는 곱게 한 줄로 땋아 허리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8년간 그녀의 함께 지낸 엘라임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혹시 말이야. 길을 못 찾는 건…….”

우뚝.

헬리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

엘라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살폈다. 그의 입가엔 고소함이 걸려 있었다.

“아니지, 설마 우리 대단한 완벽주의 상단주님이 길 하나 못 찾을까.”

헬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엘라임이 과장되게 놀란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오우! 설마? 정말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지도를 쥔 헬리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벌써 저 소리가 몇 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도 맞게 찾은 건지 불안한데 엘라임이 그녀의 불안을 더 부추겼다. 결국 인내의 끈이 우두둑 끊어졌다. 와락!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지도는 볼품사납게 구겨졌다.

“그럼 네가 찾아봐!”

“아얏!”

헬리아가 지도를 꽉꽉 동그랗게 말아서 엘라임의 얼굴에 냅다 던져 버렸다.

헬리아는 머리를 흩뜨렸다. 설마 이런 복병을 숨어 있을 줄 몰랐다. 그녀는 인정했다. 자신은 길을 잃어버렸다.

‘설마 이렇게 복잡할 줄은…….’

그냥 관도를 따라가지 않은 걸 깊이 후회했다. 그때는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관도보다 3일밖에 걸리지 않는 산길이 더 마음에 끌렸다.

지난 삶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눈뜬 8년 동안 헬리아는 단 한 번도 여행을 간다거나 휴식을 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산이라도 구경하면서 가볼 생각이었다. 물론 거기에 더해 후작의 주목을 끌지 않고 몰래 가기 위함도 있었다.

그래서 잡화점 상인이 지도보다는 길잡이를 고용하라는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체력이야 문제없으니 지도 한 장 달랑 구입해 곧장 산으로 올라왔다. 뼈아픈 실수였다. 이후 설상가상으로 산에 올라와서야 자신이 지도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게 주인의 말을 듣는 건데…….”

홀로 산을 올라가겠다는 것을 극구 말렸던 잡화점 상인의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 무엇하랴. 되돌아가기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산을 쉽게 본 헬리아는 후회했다.

옆에서 헬리아가 축 쳐져 있는 것을 보고 엘라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헴! 걱정 말라고. 이 위대한 정령왕 엘라임 님께서 찾을 테니까.”

“……별로 신뢰가 안 간다만.”

헬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에게 길을 맡겼다. 엘라임은 헬리아가 구긴 지도를 펴 들고 이리저리 길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해하는 엘라임의 태도에 헬리아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몇 시간 후.

헬리아가 엘라임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내가 절벽을 오르고 있냐고!”

헬리아와 엘라임은 가파른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딱딱한 돌산을 힘겹게 넘어가며 거의 기다시피 산을 올랐다. 헬리아는 등산이 아닌 등반을 하는 것에 더는 참지 못하고 엘라임을 노려봤다.

엘라임은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지도를 다시 보았다. 아까는 그래도 걸어가기라도 했지, 지금은 아예 기어가야 할 정도였다.

“이상하네, 분명 직선으로 왔는데.”

헬리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엘라임의 손에서 얼른 지도를 빼앗고 물었다.

“도대체 지도를 어떻게 본 거야?”

엘라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직선으로 걸어갔지.”

엘라임이 지도를 손가락으로 쭉 그었다. 마치 자로 선을 긋듯이.

‘어쩐지 산 넘고 물 건너더라.’

엘라임의 대답에 헬리아는 뒷머리를 붙잡았다.

“이 멍청아!”

엘라임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내놔.”

“뭐?”

“지도 내놓으라고. 내가 그래도 너보단 나아.”

그들은 한동안 누가 더 낫고 못 낫고 하는 이야기로 투닥거렸다. 그러나 오십 보 백 보, 도토리 키 재기였다.

“그래도 얼추 거의 다 왔다니까.”

엘라임에 말에 헬리아는 머리를 붙잡았다. 결국 인내의 한계를 느낀 헬리아가 그를 다람쥐로 만들어버렸다.

펑!

-이게 뭐야!

엘라임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줄어들자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목소리마저 변해 헬리아 이외의 사람에게는 그저 다람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다람쥐가 된 엘라임은 헬리아에게 마구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작은 몸통은 헬리아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역소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이런 모습일 바엔 그냥 역소환이 낫겠어!

“잔말 마.”

역소환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숲속에서 홀로 걸어가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원래 동물을 좋아했다. 고양이나 개를 한 마리 키워 볼까 했는데, 신의 저주를 받았는지 동물들은 그녀를 보면 발작을 일으켰다.

지금도 그녀의 주위에는 동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내심 헬리아는 다람쥐가 된 엘라임이 흡족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이익! 이 치사한 마녀!

헬리아의 힘이 늘어날수록 엘라임이 쓸 수 있는 힘도 늘어났지만, 한편으로는 헬리아가 정령인 엘라임을 제어하는 힘도 늘어났다. 그 때문에 엘라임은 그녀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거기다 정령은 원래 실체가 없는 법. 헬리아는 자신의 생각대로 엘라임의 몸을 변화시켰다.

-이익!

엘라임이 시끄럽게 쫑알거리자 헬리아는 주머니에 그를 쑤셔 넣고 다시 지도를 펼쳐 들었다.

“음, 근데 어디로 가지?”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 * *

헬리아가 헤매고 있는 숲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지도만 제대로 보았다면 도착했을 마을이 있었다. 플로렌스 공작령의 거대한 영지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는 이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에 짙은 잿빛 로브를 두른 남자가 도착했다.

푸드득.

창공을 비상하던 검은 매가 남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이람’이라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앉아서 술을 마시는 이가 간간히 있었지만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손님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자는 바텐더가 있는 바에 가 앉았다. 사십 대 후반에 머리는 짙은 남갈색인 바텐더가 남자를 흘깃 쳐다보고는 물었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소?”

“사이람 한 잔.”

순간 컵을 닦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바텐더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보았다.

“어디서 들었소?”

로브 밑에서 남자의 옅은 웃음이 들렸다.

“장사 안 할 텐가?”

“…….”

바텐더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사이람은 정보길드였다. 남자가 어떻게 이곳의 존재를 알았는지 모르지만, 손님은 손님이었다.

“원하는 정보는?”

“마샤프.”

“…….”

“3년 전 몰살당한 마샤프 암살단.”

바텐더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남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가?”

“말 돌리지 마라. 알고 찾아왔다.”

바텐더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이자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뭘 알고 싶은 거요?”

“그 암살단의 생존자.”

“…….”

“이 마을에 있다고 들었다.”

바텐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테이블 아래에 숨겨둔 칼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순간 로브 아래에 가려진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그와 마주쳤다. 바텐더가 눈이 가늘어졌다.

‘저 눈동자는…….’

바텐더는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검은 매를 보다 다시 남자를 살폈다. 바텐더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얼른 웃음을 숨기고 말했다.

“괜한 일로 쑤시고 다니지 마시오. 이미 지난 일이오.”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다. 그자에게는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후우.”

바텐더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쪽지에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이쪽으로 한번 가보시오. 당신의 그 말 믿겠소.”

그자와 제법 잘 아는 사이인지, 아니면 소란이 생기는 것이 귀찮은지 바텐더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명심하지.”

남자는 쪽지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푸드득.

매가 창공을 날아다녔다. 로브를 입은 남자는 바텐더가 알려준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알려준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험하고 복잡해졌다. 캄캄한 골목길에 접어들자 불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마치 쓰레기 소굴에 와 있는 듯해 남자는 로브를 코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 골목 어귀를 지나 작은 오두막을 발견했다.

“여긴가.”

참으로 찾기 힘든 곳이었다. 만약 바텐더가 적어준 지도가 없었다면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똑똑-

남자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문이 아니라 문짝 위쪽에 난 작은 창이 열렸다. 눈만 보일 정도의 작은 문에서 사람의 눈동자가 보였다.

“누구요?”

상대가 잔뜩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 모습을 드러낸 걸로 봐서는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3년 전.”

흠칫.

집 안에 있는 남자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여 그가 도망갈까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결코 당신을 해하지 않는다.”

“……내 위치는 누가 알려준 것이오?”

“사이람의 바텐더.”

“……그놈이.”

안에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가 소개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는 상대일 것이다. 거기다 목소리에서 한 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오슈.”

남자가 문을 열고 그를 방으로 들였다. 허름한 외관처럼 내부도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방 안에는 가구들이 없었다. 금세라도 집을 나갈 수 있게 구석 한편에 큰 가방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암살단의 생존자는 사십 대로 얼굴엔 왼쪽 눈이 하나 없었고, 나이보다 더 주름지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딱딱딱-

그리고 그가 걸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에 로브를 입은 남자의 시선이 절로 아래로 향했다. 그의 두 다리는 딱딱한 나무가 지탱하고 있었다.

암살자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오. 그저 그냥 당하기 싫어서 나대다가 그런 거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암살자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흩뜨렸다. 그가 자리에 앉아 고심하며 할 말을 골랐다.

“3년 전 우리에게 의뢰가 들어왔소. 큰돈이었지. 우리는 승낙했소. 하지만 의뢰가 의뢰인만큼 한 가지 문서를 받았소.”

암살자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토사구팽당하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지. 물론 결국 이렇게 되었지만.”

그가 자신의 다리를 툭툭 쳤다. 빈 두 다리가 애처로워 보였다.

“그럼 그건…….”

“이미 없소.”

로브를 입은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가 찾아온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젠장.”

그가 낮게 잇소리를 냈다. 암살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그건 다른 사람이 가져갔소.”

그 말에 남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누가 가져갔지?”

반드시 그걸 찾아야 했다.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꽤 젊은 남성이었지.”

로브를 입은 남자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걱정을 알아챈 암살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단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플로렌스 공작령으로 간다고 들었소.”

“그게 언제쯤이지?”

“한 달 전쯤이오.”

로브를 입은 남자가 다급히 문으로 향했다. 암살자가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부디 그자를 꼭 처벌해 주시오.”

로브를 입은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 * *

똑-

마지막으로 물주머니에 담긴 물방울이 헬리아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르렀던 하늘은 노란 물감을 뿌린 듯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헬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가 숲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통 여기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도를 보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그러게 나한테 맡기라니까.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이 주머니에서 톡 튀어나왔다.

“너는 물통에 물이나 채워.”

-내가 물통이냐?

헬리아의 타박에 엘라임의 볼이 빵빵해졌다. 그래 봤자 다람쥐다. 그녀는 말캉한 엘라임의 머리통을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하늘은 점점 캄캄해지고 길은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누가 이기나 보자.’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지도를 펼쳐 들었다. 하늘을 보니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헬리아는 지금껏 사냥을 해본 적이 없었다.

“참 편하게 살았어.”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밥걱정, 잠자리 걱정 없이 따뜻한 밥에, 편안한 침대에서 지내왔다. 그런데도 불행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시 길을 걸었다. 이번엔 아예 지도를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고 본능적으로 길을 찾기로 했다.

“물소리나 찾아봐.”

물길을 찾으면 최소한 자신들이 어디 위치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필요할 때만 찾아.

엘라임이 뿌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머니에서 나왔다.

“하아…….”

헬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른 하늘은 점점 황금빛 노을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부신 저녁 태양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아주 나쁘진 않아.”

꼬르륵.

하지만 배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큭큭.

“……얼른 찾기나 해.”

민망해진 헬리아는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콸콸콸-

-응? 물소리다.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헬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리를 따라 달려가니 계곡이 보였다. 헬리아는 가방에 밀어 넣었던 지도를 다시 꺼냈다. 그제야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를 확인하면서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가면 갈수록 물소리가 커지는 것이 근처에 폭포가 있는 모양이었다.

콰아아아!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든 노을에 반사되어 폭포는 마치 황금처럼 빛났다. 헬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8년 동안 하루하루를 돈과 마법에 씨름하느라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기에 지금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가끔 휴식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노을을 바라보던 헬리아는 슬슬 주변을 훑었다. 이제 금방 날이 어두워질 테니 이쯤에서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길만 제대로 찾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는 언제나 뼈아플 뿐이다.

꼬르륵.

“……배고프다.”

얼른 야영지를 만들고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헬리아는 우선 허기라도 채울 요량으로 폭포에 가까이 다가갔다.

“음?”

그때 그녀의 시야에 이상한 물건이 잡혔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그것에 다가갔다.

“이건 옷?”

-남자 옷 같은데?

돌무더기 위에는 잿빛 로브와 시커먼 옷이 있었다. 다가가 들어 보니 엘라임의 말대로 남자 옷이었다.

‘사람!’

헬리아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옷을 만져 보니 축축하지 않았다. 오래둔 옷이었다면 비를 맞고 축축해지거나 습기에 눅눅해졌을 텐데 이 옷은 그렇지 않았다.

“근처에 사람이 있어.”

이런 곳에 옷이 있다면 분명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헬리아가 주변을 훑었다. 사람을 찾게 된다면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조심해.

엘라임의 주의를 뒤로하고 헬리아는 옷을 들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근처에 옷 주인의 가방도 보였다.

“근데…….”

헬리아는 잠시 멈칫하고 자신의 손에 들린 옷을 보았다. 뭉쳐져 있는 옷가지를 떼어내 보니 상의와 하의가 모두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자신이 옷을 다 가지고 있으면 그 남자는 뭘 입고 있지? 그런 엉뚱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할 때였다.

피융!

-조심해!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에 헬리아는 순간적으로 뒤로 몸을 뺐다.

퍼억!

돌멩이는 헬리아의 머리를 스쳐 뒤에 있던 나무에 박혔다. 얼마나 강한 힘으로 던졌는지 돌멩이에 부딪친 나무는 박살이 나버렸다.

“이런…….”

-얼른 날 원래대로 돌려놔! 위험한 놈이잖아!

엘라임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혀를 차며 돌멩이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옷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물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구냐!”

남자의 목소리에 헬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정체를 말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아니라 도대체 저 남자는 어디까지 나올 셈인가 그런 고민이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헬리아가 먼저 소리쳤다.

“잠깐만요!”

그제야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아마 목소리로 여자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헬리아는 남자가 멈추자 옅은 한숨을 내쉬며 어찌해야 할지 생각했다. 이대로 도망갈 순 없었다. 몇 시간 만에 만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놓치면 자신은 영영 숲속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정체를 밝혀라!”

남자의 목소리엔 잔뜩 적의가 묻어났다. 우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헬리아는 우선 벗었던 가면을 다시 썼다. 상대의 목소리가 호의적이진 않지만 잘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해가 떠 있어 남자는 헬리아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알몸이잖아!

엘라임이 놀라 얼른 헬리아의 얼굴에 올라타 작은 몸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진 헬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헬리아가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엘라임은 죽기 살기로 그녀의 얼굴에 딱 달라붙었다.

-알몸이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널 개방적으로 키우지 않았어!

엘라임의 시답지 않은 말에 헬리아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얼굴에 붙여놓았다. 솔직히 남자의 알몸을 보는 건 피차 민망하긴 했다.

그런데 남자는 오히려 헬리아를 보더니 칼을 빼 들었다.

‘젠장.’

헬리아는 몰랐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수상쩍고 기괴했다. 갑자기 숲에서 나타난 흰 가면을 쓴 여인. 거기다 흰 가면 위에 이상한 다람쥐가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어떡하지?’

그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예 적으로 자신을 규정한 것 같았다.

‘이대로 마법으로 그냥 제압해 버릴까?’

하지만 상대의 실력이 어떤지도 모르고, 만약 그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난감한 건 그녀였다. 자신을 숲에서 꺼내줄 자가 사라진다면 곤란했다.

어쩔 수 없이 헬리아는 최대한 저자세로 나가기로 했다.

“저기, 저는 절대 위험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번엔 제대로 목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살짝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임이 분명한 목소리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까부터 찌르는 듯한 살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옷을 내놔라.”

헬리아가 자신의 옷을 들고 있는 것을 본 모양이다.

-얼른 옷이나 줘.

“아, 옷…….”

옷을 남자에게 전해 주려던 헬리아가 순간 멈췄다.

-안 주고 뭐 해?

헬리아가 손에 들린 옷과 알몸의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군. 상대는…… 알몸이군.’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선녀와 나무꾼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안타깝게도 선녀는 남자였고, 나무꾼은 그녀였다.

‘큭큭큭.’

“이 옷 주인 맞죠?”

“…….”

헬리아는 남자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황하는군. 이거 잘만 하면…….’

음흉한 미소를 가면 속에 숨기고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옷 필요하시죠?”

당연한 말씀. 헬리아는 이 상황을 즐겼다. 물론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칼을 붙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칼은 좀 넣어주시고요.”

“…….”

“뭐, 옷이 필요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헬리아가 옷과 가방을 모두 들고 가려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뒤에서 검을 검집에 넣는 소리가 들렸다. 헬리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로 돌았다. 가면 속에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옷을 내놔라.”

남자는 화를 꾹꾹 참으며 낮게 말했다. 그는 타인이 가까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다. 아무리 폭포 소리가 요란했다고 하지만 지척까지 온 여자의 기척 하나 알아채지 못하다니. 설마 길도 아니고 이런 숲속에 사람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헬리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저기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아주 쉬운 부탁이에요.”

“……뭐지?”

결국 남자가 한발 물러섰다. 그나마 그녀에게서 살기나 다른 꿍꿍이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혹시 길 잘 아세요?”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가 길을 잃어버렸거든요.”

“…….”

“옷 드릴 테니까 저기, 길 좀 안내해 주세요.”

좀 뻔뻔스런 어조였는지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헬리아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옷을 내놔라.”

헬리아가 남자 쪽으로 상의를 던졌다. 하지만 하의를 돌려주지 않자 그는 뜨악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저기 미안한데, 먹을 것도 좀.”

남자는 이를 으득 물었지만 결국 수락했다. 그제야 하의를 받아 들고 무사히 알몸을 가릴 수 있었다.

탁, 타다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조용한 숲속을 메웠다. 이미 해가 산 아래로 넘어간 후라 산속은 어둠에 잠겼다. 하늘엔 별이 총총 빛을 발했고, 달은 실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헬리아와 남자는 더는 산길을 타지 않고, 폭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야영을 했다.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잡아다 나무 꼬치에 끼워 모닥불에 얹어두었다.

헬리아는 도와주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완벽히 야영 준비를 끝마쳤다.

‘이것 참 미안하게.’

헬리아는 입맛을 다시며 그저 생선이 익기만을 기다렸다. 물고기가 익어가면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이거 먹어도 돼?

엘라임이 눈치 없이 튀어나오자 헬리아는 그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무는 엘라임의 머리통을 재차 눌러놓고 남자를 보았다. 모닥불 아래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이상하네. 어디서 봤던가?’

머리는 옅은 갈색이었지만-해가 지기 전에 확인했다-눈동자는 짙은 검은색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모닥불의 빛에 반사되어 마치 황금처럼 반짝였다.

헬리아는 이 세계에서 깨어난 뒤로 검은 눈동자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검은 눈동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깨끗한 흑안은 처음이었다.

‘음?’

언뜻 무슨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헬리아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남자를 살폈다. 키는 제법 컸고, 아까 검을 쥐는 모양을 봐서는 검을 꽤 쓰는 자인 것 같았다. 얼굴은 엘라임만큼이나 미남이었다.

‘뭐 하는 자지?’

검을 쓰는 것이나 복장을 봐서는 딱 용병처럼 보였지만, 느낌이 달랐다. 용병이라기보단 잘 벼려진 검 같은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그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헬리아가 먼저 물었다. 서로 원해서 한 동행은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이 만나면 먼저 하는 일이 호구조사 아니겠는가.

“이름이 뭐예요?”

“…….”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름이라도 알아야죠. 저는 리아라고 해요.”

“……이안이다.”

‘이안이라.’

헬리아는 남자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이 썩 달갑지 않았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처음부터 이 말을 꺼냈어야 했다. 만약 그가 가는 길과 자신의 길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정말 난감했으니 말이다. 남자는 그걸 이제야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플로렌스령으로 간다.”

“다행히 목적지가 같네요.”

‘하기야 근처에 플로렌스 영지가 있으니 그리 가는 거겠지만.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얼굴을 분명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지.’

이 정도면 생각날 만도 하건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제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서 직접 묻기로 했다.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없어요?”

왠지 이 대사도 어디서 한 것 같았다.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이상한 가면을 쓴 자를 본 건 처음이다.”

‘이상하다니.’

헬리아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러나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반박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런 상태로 자신을 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누구라도 황당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가면을 벗을 수도 없었다.

-이상하긴 하지, 킥킥.

‘너는 좀 조용히 해.’

다람쥐 모습을 하고 있으니 진짜 자기가 다람쥐인 줄 착각하는 것인지, 엘라임은 이제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 헬리아는 그를 잡아채려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부끄럽지도 않냐. 정령왕 주제에.’

-그 정령왕을 너는 다람쥐로 만들었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머리카락을 이불 삼아 제 몸을 덮으며 노닥거렸다. 아마 자신을 다람쥐로 만든 데 대한 심술을 부리는 모양이다.

어느덧 고기가 다 구워졌다. 이안은 그녀에게 먹으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곧장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그런 이안을 흘겨보았다.

‘어떻게 먹으라고 말도 안 하냐.’

헬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기를 한 마리 손에 들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것을 보자 절로 입속에 침이 돌았다. 향을 맡아보니 아까 무언가 뿌리던 것이 향신료였나 보다. 잘 구워진 물고기에서는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녀가 고기를 들고 입에 가져가자 이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

그 순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헬리아는 잠시 고기를 내려놓고 가면에 손을 댔다.

달칵.

가면의 하관이 벗겨지면서 그녀의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그러자 이안의 얼굴에서 미미하게 실망과 아쉬움이 번졌다. 아마 음식을 먹기 위해 가면을 벗을 줄 알았나 보다.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물었다.

“이게 특수 제작된 가면이라 분리가 돼요. 관심이 있어 보이시던데,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

이안은 입을 다물고 고기를 먹었다. 헬리아는 참으로 말이 없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신도 고기를 마저 먹었다.

타닥타닥.

모닥불의 불빛이 희미해지면서 서서히 밤이 무르익었다. 헬리아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시며 이안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는 벌써 담요를 두르고 나무기둥에 기대어 취침 중이었다.

헬리아는 슬쩍 그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그는 잠에 취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엘라임이 그녀의 행동에 뭐가 불만인지 뿌루퉁해졌다.

‘……이상하단 말이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거의 잊지 않았다. 그녀가 이안에게 무슨 기시감을 느꼈다면 분명 과거 그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확신할 수 없지만 헬리아는 스스로를 믿었다. 게다가 이렇게 찜찜한 상태로 있고 싶지 않았다.

헬리아가 이안의 코앞에 앉아 잠자는 그를 살폈다. 남자치고 흰 얼굴에 속눈썹이 길고 가지런했다.

‘미남 소리 꽤나 듣겠군.’

이런 얼굴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다. 헬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흠…….’

그녀가 좀 더 그를 관찰하기 위해 코앞까지 다가갔다. 다행히 가면 덕분에 자신의 숨이 그에게 닿지 않았다.

‘응?’

헬리아의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남자의 모근에서 다른 색이 올라오고 있었다. 밤이라도 불이 있고, 눈이 밝은 헬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눈썹색이 미묘하게 머리색과 달랐다.

‘염색을 한 건가…….’

헬리아가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려 할 때였다.

푸드득!

멀리 하늘을 비행하는 새의 날갯짓 소리에 헬리아는 순간 움찔했다. 그 소리 때문인지 이안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헬리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살며시 이안을 살폈다. 다행히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이안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손을 거뒀다.

‘깜짝 놀라라.’

헬리아는 마치 도둑질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놀라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망토를 둘렀다. 밤이라 날이 차지만 마법이 걸려 있는 망토를 두르자 몸이 따뜻해졌다. 헬리아는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이안은 잠을 자지 않았다. 정체도 모를 자를 앞에 두고 잠을 잘 리 없었다. 그저 그녀의 반응이 궁금해서 눈을 감고 지켜봤을 뿐이다.

이상한 여자. 이안은 그녀를 그렇게 정의했다.

처음 등장부터 이상했다. 그녀가 가까이 온 것을 몰랐던 것은 폭포 소리 때문이라고 하지만 뭔가 수상했다.

‘흰 가면을 쓴 여자.’

순간 그 유명한 엘라드 상단주가 떠올랐지만 이렇게 어린 여자-목소리가 조금 앳되었다-일 리 없는데다, 당연히 혼자 다닐 리 없다고 판단해 제외했다.

여자 혼자서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길을 잃었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할 뿐 두려움과 공포는 없었다. 위험에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담이 큰 자거나, 아니면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여자는 왠지 전자 같았다.

그가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때, 그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자가 다가왔다. 이안은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가 자는 동안 그녀가 본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다 코앞까지 다가왔다. 순간 풍겨온 그녀의 향기에 이안은 숨을 삼켰다. 향수도 아닌 묘한 냄새가 그를 자극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눈을 뜨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다행히 자신의 매가 푸득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향기가 멀어지자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새근새근.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흑안이 오롯이 그녀를 담았다.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잠에 빠진 모양이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이 여자는 뭐지?’

목소리를 들어보니 자신보다 훨씬 어린 느낌이었다. 적어도 스물이 되지 않은 듯한 목소리. 이안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가면에 손이 갔다.

‘가면이 거슬리는군.’

이안의 손이 그녀의 가면에 닿을 찰나였다.

-찍찍! 찌찍찍!

그녀의 애완동물로 보이는 다람쥐가 나타나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람쥐를 떨쳐 낼 때,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매가 아니었다.

부스럭!

분명한 인기척. 소리와 동시에 여자가 눈을 떴다. 그녀의 금안이 이안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다행히 가면을 벗기려던 손은 이미 거두고 검에 가 있었다. 그의 눈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 * *

“왕세자파였던 카알 남작과 세이른 백작이 우리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삼십 대 중반의 갈색 머리를 지닌 남자가 말했다. 제법 큰 키의 그는 기사인 듯 허리춤에 장검을 매달고 있었다.

그 말에 책상에 앉아 있는 육십이 넘은 듯한 늙은 노인이 눈을 빛냈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시린 푸른 눈동자는 매섭게 빛났고, 온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흘러나왔다. 그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왕세자의 상태는?”

“여전히 회복 불가입니다.”

“확실한가?”

“3년이 지났습니다. 확실합니다.”

그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그럼 이제 슬슬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가 되었군.”

“준비하겠습니다.”

노인, 아니, 비비안 후궁의 아버지이자 비앙카 공주의 외할아버지인 아돌프 후작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왕세자가 걷지 못하는 사이 그는 왕세자의 부재로 인해 붕 떠버린 세력과 중립파를 흡수해 나갔다. 이제 그 몸집이 왕세자파와 대항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왕세자파를 삼키기엔 부족했다. 무엇보다 플로렌스 공작과 왕세자의 어머니인 캐서린 왕비의 세력 때문이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후작이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왕세자는 이미 가망이 없다. 다음 왕위 후보가 없는 이상 저들은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후작이 검붉은 와인을 꿀꺽 삼켰다.

그때 허공에서 검은 복면을 쓴 이가 내려왔다.

“무슨 일이냐?”

후작의 눈이 꿈틀거렸다. 복면인이 부복을 하며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생존자를 찾았습니다.”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살기를 띠었다.

“암살대는?”

“이미 상급의 실력자로 보냈습니다.”

톡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후작의 손길이 거세졌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최근 왕세자 암살 사건을 조사하는 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장 추살 명령을 내렸지만 이렇다 할 꼬리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1년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겨우 그자를 발견했다.

후작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날 죽었어야 했거늘.”

후작이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죽여라.”

그자가 뭘 봤고, 뭘 알던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작은 잡음 하나에도 신경을 아끼지 않았다.

“존명.”

복면인이 모습을 감췄다. 후작의 안광이 파랗게 빛났다.

* * *

“헉, 헉.”

한 남자가 숲속을 다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캄캄한 숲속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남자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가쁜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심장은 부서질 듯 세차게 뛰었다.

그의 짙은 갈색 머리는 땀에 절어 뺨에 달라붙었고, 녹색빛을 띤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족쇄를 찬 듯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한계까지 뛰고 또 뛰었다.

“하악, 하.”

우거진 나뭇가지가 그의 몸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뺨에 붉게 실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는 이미 남자의 몸에 난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숨 가쁘게 달리는 남자의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 상처가 드러났다. 마치 칼에 베인 듯 날카로운 상처가 남자의 온몸을 붉게 수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쫓던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악.”

잠시 자리에서 멈춰서 숨을 골랐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따돌린 건가…….”

노예 시장에서 탈출한 그는 추적자를 피해 달아났다. 그런데 그들은 끈질겼다. 그는 정말 죽기 살기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도대체 내가 왜…….”

그는 자신의 왼쪽 손등에 새겨진 노예 문신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손등으로 그것을 한 번 문지른 뒤 다시 일어섰다.

“음?”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고소한 냄새도 맡아졌다.

꼬르륵.

남자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쫓아오던 추격자들이 있나 살폈지만 다행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불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헬리아는 갑자기 코앞에 있는 이안의 모습에 놀라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웬 남자 하나가 주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저, 저기…….”

스물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안은 이미 칼을 빼 들고 그를 겨누고 있었다. 헬리아도 일어나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그는 경계하는 눈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닥불 쪽에만 시선을 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다 먹고 남은 생선 잔해였다.

꼬르륵.

남자의 배에서 다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다시 헬리아와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먹을 것 좀…….”

이안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배고픈 동행이 한 명 더 늘었다.

와구와구.

그 남자는 입이 미어질 듯 음식을 입안에 넣었다. 헬리아는 이안이 그의 빵을 내어줄 줄 몰랐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심성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남자는 목이 막히도록 빵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헬리아가 담아놓았던 물통을 입에 붙이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괜히 딱하네.’

헬리아는 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얼른 손등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다 본 후였다.

“도망친 노예인가?”

이안의 목소리에 남자가 소리쳤다.

“저, 전 노예가 아닙니다!”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상한 자들한테 붙잡히는 바람에…….”

“노예 상인인가.”

아르센 왕국은 엄격히 개인의 노예 매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불법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헬리아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전 원래 노예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노예가 되는 거지.”

헬리아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불로 지진 자국은 흉했다.

“이거 안 지워질까요?”

“법적 노예라면 특수 마법 처리가 돼서 지워지지 않겠지만, 불법 노예라면…….”

헬리아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가 헬리아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 그럼 지울 수 있는 겁니까?”

“뭐, 약만 있으면.”

남자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밥도 먹었겠다, 손등의 문신도 지울 수 있겠다, 여유가 생기자 헬리아와 이안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아, 제 이름은…….”

남자가 입을 열려다 멈췄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이름은, 이름은…….”

헬리아와 이안 모두 눈을 찌푸렸다. 상태가 좀 이상했다.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곤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노예 상인에게 붙잡히기 전에는 분명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

“아! 그겁니다.”

헬리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야,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다는 거야?’

“정말 노예 아닌 거 맞아?”

“그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노예라 의심하는 헬리아에게 그는 장담하듯 말했다. 헬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거 참 골치 아픈 동행이 하나 생겼다.

이안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지?”

“그, 그게 이름이 좀 생각날 듯 말 듯한데…….”

“그러니까 뭔데?”

“노, 노엘…… 그다음에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

헬리아는 뭘 고민하느냐며 말했다.

“그냥 노엘로 해. 이름이야 부르기 쉬우면 됐지.”

이름 하나 갖고 고민하기 싫었던 헬리아의 말에 남자, 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드득!

하늘에서 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노엘이 새의 날갯짓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여전히 도망 중이라는 것을.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섭취하자 몸이 그만 긴장을 놓아버린 것이다.

“저, 저는 잘 먹었습니다. 그럼 이만…….”

이들에게 피해를 줄 순 없었다. 노엘이 일어서려 했으나 그보다 이안이 빨랐다. 이안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매는 허공에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가 칼을 빼 들었다.

“이미 늦었어.”

“서, 설마 그자들이?”

따돌렸다 생각했건만, 추적자들은 노엘을 놓치지 않았다. 노엘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도, 도망치세요.”

노엘은 이안과 헬리아에게 말했다. 저들이 노리는 건 자신이지 이들이 아니었다.

“이미 늦었다.”

이안의 눈이 싸늘하게 주변을 훑었다. 수는 여섯. 그들은 노엘뿐만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스스슥.

가까이에서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이미 빼 든 칼을 겨눌 준비를 마쳤고, 헬리아도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했다. 노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기 몸은 지킬 수 있겠지?”

적어도 노예 시장에서 도망칠 정도라면 그래도 제법 실력이 될 거라 판단해서였다. 노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기가…….”

“무기야 생기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아.”

헬리아가 이안의 기세를 느끼며 말을 붙였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칼을 휘두르는 폼에서 오랫동안 훈련받은 느낌을 받았다.

‘정체가 뭔지 궁금해지는데.’

그러나 이안에 대해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숲속에서 비수가 날아왔다.

쐐애액! 채앵!

이안이 칼로 비수를 모두 쳐 냈다. 그는 칼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입매를 틀었다. 상대의 무력이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헬리아는 비수를 보며 의아해 입을 열었다.

“요즘 노예 추적자들도 비수를 쓰나?”

마치 암살자들처럼. 그러나 더는 말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추적자들이 공격에 나섰다. 하나, 둘, 셋……. 무려 여섯 명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모두 느껴지는 기운이 엑스퍼트 상급이라는 것이었다.

헬리아는 그들의 기운에 혀를 찼다. 이 정도 무력을 지닌 자들이 노예 추적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봐, 노엘.”

“예, 옛?”

“도대체 어떤 노예 시장에서 도망친 거야?”

‘하나같이 수준이 높잖아!’

두렵거나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망친 노예 하나를 쫓기에는 너무 과한 인력이었다.

“죽여라!”

추적대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외치자 무기를 든 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안이 가장 강하다고 판단했는지 리더와 그 외에 두 명이 붙였고, 헬리아와 노엘에게 나머지 세 명이 붙였다.

채앵!

이안은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흘렸다. 상대의 무력이 강했지만 이안은 그보다 더 강했다. 그의 검에서 어스름하게 빛이 생성되었다. 추적자들은 이안의 실력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상대는 하나. 그들은 셋이었다. 그들은 빠져나갈 틈도 없이 삼면으로 이안을 포위했다. 검이 허공을 찢으며 이안을 향해 쇄도했다.

채앵!

이안은 그들의 공격을 읽자 손목을 비틀며 검을 쳐올렸다. 그는 순간 만들어진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안의 예기치 못한 반격에 허둥거린 추적자의 몸이 흔들리는 사이 이안의 신형이 그를 향해 파고들었다.

쇄액!

이안이 매처럼 날카롭게 추적자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피해!”

그러나 다른 추적자의 비수로 이안의 궤적이 비틀렸다.

촤악!

선혈이 허공에 튀며 추적자의 목에 큰 상처가 생겼다.

“크윽!”

아쉽게도 목을 가르지 못했다. 이안은 피를 털어내고 다시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신형이 그들을 향해 튀어 나갔다.

세 명의 추적자는 이안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이안의 검은 빠르고 무거웠다. 세 명의 추적자가 눈빛을 교환했다. 따로 공격하기엔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이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죽어라!”

세 명이 한꺼번에 각기 이안의 머리와 가슴, 다리를 노렸다. 한 치의 틈도 없는 완벽한 공격! 이안은 몸을 회전시켜 머리와 가슴으로 짓쳐들어오는 검을 튕겨냈다. 하지만 다리 부분이 그만 노출되고 말았다. 그것을 놓칠 이들이 아니었다.

“하압!”

추적자가 이안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안은 이를 악물고 검의 궤도를 수정했지만 상대의 공격을 막기엔 어려워 보였다.

슈우웅!

그때 뜨거운 열기가 그들을 덮쳐 왔다. 추적자들은 갑자기 느껴지는 웅대한 힘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검은 이안의 옷을 찢고 살갗을 스치는 정도로 그쳤다.

콰아앙!

거대한 불길이 그들 사이에 떨어졌다. 만약 제때 피하지 않았다면 익은 고기가 될 뻔했다. 이안도 그 갑작스런 공격에 미간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것을 보고 추적자들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그들은 마법 공격을 해온 상대를 돌아보며 경악했다.

금발에 흰 가면을 쓴 자. 그자의 손에서 마나의 기류가 요동쳤다. 이안도 그녀의 마법 공격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안은 놀라워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만든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악!”

그들이 방심하는 사이 이안이 연기를 뚫고 추적자의 옆구리로 검을 쑤셔 넣었다. 배가 갈리고 내장이 쏟아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검이 남은 추적자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헬리아는 자신 앞의 추적자를 보았다. 이안에게 달려갔던 이들보다는 실력이 낮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보다 노엘에게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헬리아가 마법을 시전하자 그들은 주춤했다.

“그자를 내놓으시오. 그럼 물러나겠소.”

추적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대가 마법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헬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 누구지?”

“노예 추적자요. 도망친 노예를 내주시오.”

“어디 노예 시장에서 나왔지?”

순간 그들이 흠칫 몸을 굳혔다.

“키릴? 카메룬? 아니면 세바인인가? 그도 아니면 바이른?”

아르센 왕국은 개인의 노예 매매를 엄격히 금직하며 모든 노예 매매는 왕실에서 주관한다. 키릴, 카메룬, 세바인, 바이른. 왕실에서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이 네 곳의 도시에서만 합법적인 노예 매매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불법이군. 그럼 노예도 불법이겠고.”

“…….”

추적자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상대에게서 노엘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었다.

“어쩔 수 없지.”

휘익!

추적자가 헬리아를 향해 독가스를 뿌렸다.

-조심해!

엘라임이 그녀에게 외쳤다. 헬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실드를 펼쳐 독가스를 막아냈다. 연기를 틈타 추적자들이 노엘을 공격했다. 도망친 노예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마법사인 헬리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하자 우선 노엘부터 죽이기 위해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검이 날카롭게 노엘의 목으로 짓쳐 들어갔다.

헬리아는 재빨리 마법을 펼쳤다. 그녀의 손에서 거대한 파이어볼이 생성되었다.

“알아서 잘 피해!”

노엘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추적자들도 함께 물러났지만, 헬리아의 마법이 빨랐다. 그들을 향해 빠르게 파이어볼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그녀가 캐스팅하는 것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크, 크악!”

헬리아가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5서클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천부적인 마법적 신체 능력과 캐스팅 속도 때문이었다.

콰아앙!

상대가 방심한 덕분인지 쉽게 공격에 나가떨어져 나무에 처박혔다.

“노엘은?”

헬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은 한 명의 추적자가 노엘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노엘은 잘 피하고 있었다. 괜히 이런 추적자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역시 평범한 노예는 아니야.’

본인 말로도 노예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헬리아는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저 도망친 노예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추적자들의 무력 수준과 노엘의 몸놀림을 보고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추적자들은 물론 노엘의 움직임도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안과 마찬가지로 노엘도 누군가에게 꾸준히 훈련을 받은 움직임이었다.

‘도대체 이 둘의 정체가 뭐야?’

헬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노엘이 고전을 면치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얼른 죽은 추적자가 들고 있던 검을 주워 그에게 던져 주었다.

“받아!”

그리고 그가 받을 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마법을 난사했다.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그들을 처리할 수 있지만 모르는 자들에게 실력을 내보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콰앙!

노엘은 검을 받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그의 급소를 베었다.

“크악! 이, 이놈이!”

그러나 부질없는 발악. 추적자는 이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하악, 하악.”

노엘은 지친 듯 곧장 주저앉았다. 헬리아는 그것을 확인하고 이안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자신들을 공격한 이들보다 그에게 간 추적자들이 훨씬 강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군.’

이미 그쪽은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 * *

“크으윽.”

추적자의 리더가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움직이기 위해 몸을 뒤틀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손과 다리가 단단한 밧줄로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젠장.’

그는 일이 실패했음을 절감했다. 거기다 그들이 자신을 추궁하기 위해 살려놓았다는 것도.

‘으득.’

그가 이 안쪽에 숨겨둔 독낭을 깨물었다. 그러나 있어야 할 독낭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독낭을 찾나?”

“…….”

이안이 그의 눈앞에 작은 독주머니를 내밀었다. 추적자, 아니, 암살자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암살자인가?”

암살자가 주변을 훑었다. 이미 그의 동료는 전부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러나 노예 추적자들이 입안에 독낭을 넣고 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헬리아는 암살자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노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암살자가 쫓는 자라…….’

수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크크. 죽여라.”

암살자는 고도로 훈련받은 존재, 이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순순히 죽여줄 순 없었다. 이안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 소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기대하지.”

암살자가 눈을 감았다. 다가올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헬리아는 그자의 모습에서 단순히 고통만으로는 정보를 캐낼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

‘마법을 드러내기 싫지만.’

헬리아가 이안의 행동을 저지했다.

“제가 해도 될까요?”

이안이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헬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자르고 썬다는 건 아니고. 이래 봬도 마법사라고요.”

마법사라는 말에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솔직히 이곳의 수상한 자 중 가장 수상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저 노예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이 흰 가면을 쓴 여인도 궁금했다. 하지만 우선 그녀가 뭘 하는지 알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헬리아가 암살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흠칫!

암살자는 헬리아의 금안을 보자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시선을 돌리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헬리아의 동공이 세로로 길어지며 사이한 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헬리아와 등지고 있는 이안과 노엘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자, 당신의 이름은?”

헬리아의 금안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정신계열 마법이었다. 정신계열 마법은 마법 계통 중에서 시전하기 가장 까다로운 마법이다. 시전자가 도리어 정신계열 마법에 잡아먹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정신계열 마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익히기 어려운 것도 한몫한다.

하지만 헬리아는 정신계열 마법이 가장 쉬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을 본 이들은 모두 뱀 앞의 개구리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암살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 나는 사, 삼호.”

‘역시 암살자군.’

헬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신계열 마법은 천천히 내면으로 들어가야 더 효과가 좋았다.

“왜 그를 쫓는 거지?”

“며, 명령을…….”

그의 입에서 거품이 나기 시작했다. 정신계열 마법은 사람의 정신에 큰 부하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심문은 불가능했다. 헬리아는 시간이 많지 않은 걸 느끼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무슨 명령이지?”

“그, 그를 죽이라고.”

도망친 노예는 죽이지 않는다. 데려갈 뿐이다.

“누가 그 명령을 내렸지?”

“그, 그건…….”

순간 암살자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젠장!”

헬리아는 서둘러 치유 마법을 걸었지만, 갑자기 그의 몸이 부풀기 시작하더니 쾅! 하고 터져 나갔다.

“이런…….”

헬리아는 서둘러 실드를 펼친 덕에 피로 범벅이 되진 않았지만 이안과 노엘의 옷과 얼굴은 피로 물들었다. 그들이 놀란 눈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입을 열었다.

“강력한 금제가 되어 있는 것 같군요.”

결국 암살자에게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안이 노엘을 바라보았다. 노엘은 난감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도 왜 이들이 절 쫓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노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살폈다. 평균 키의 갈색 머리 남자. 그러나 다부진 몸에선 고도의 훈련을 받은 흔적이 엿보였고, 그의 검술 실력 또한 범상치 않았다.

‘하필 기억이 없다니.’

도대체 왜 그를 노리는 것일까? 그때 헬리아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건 달빛에 반짝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것을 향했다.

‘……귀걸이?’

워낙 작은 귀걸이라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눈이 그것을 관찰하고자 좁아졌다. 그리고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

헬리아가 힐긋 이안을 보았다. 그는 저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재밌게 됐어.’

그가 왜 쫓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에게 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숲속의 밤은 깊어갔다.

* * *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긴 채 숲속의 밤이 지나갔고 아침이 밝았다. 길을 모르는 헬리아와 노엘은 이안을 따라 반나절을 걸어서야 드디어 플로렌스 공작의 직할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플로렌스 영지는 활력이 넘쳤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플로렌스 영지는 아르센 왕국의 두 명의 공작 중 한 명인 플로렌스 공작이 다스렸다. 영지가 넓지만 대부분 산악 지역이라 농작이 어렵지만 영주인 공작이 강직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어서인지 영지민들의 얼굴이 다른 곳과 달리 힘이 있어 보였다.

“자, 이제 헤어지죠.”

헬리아는 이안과 작별을 고했다. 어차피 목적지까지 왔겠다, 굳이 그와 동행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노엘의 정체가 더 흥미를 끌었다.

“노엘,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헬리아의 질문에 노엘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기억이 없으니 자신이 누군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의 신분은 노예다. 그것을 손등에 찍힌 문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노엘의 고민을 알아챈 헬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갈 데가 없으면 저랑 같이 가죠.”

이안의 눈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도 노엘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모양이다. 하지만 양보할 순 없지.

“원한다면 문신도 지워줄 수 있어요.”

“저,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저와 함께 가는 게 어때요? 이래 봬도 돈도 많아요.”

“그, 그럼 염치 불고하고…….”

노엘이 헬리아의 곁으로 붙었다. 헬리아는 이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길 안내는 고마웠어요. 다음에 보면 이 은혜는 꼭 갚죠.”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 이만…….”

“잠깐.”

길을 가려던 노엘과 헬리아를 이안이 불러 세웠다. 헬리아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요?”

“은혜를 갚는다 하지 않았나?”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젠장, 그 말을 하는 게 아닌데.’

괜히 달라붙게 만들었다. 헬리아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물었다.

“물론이죠. 돈이 필요하시면…….”

얼른 돈으로 때울 생각이었건만 그는 다른 제안을 했다.

“마침 내가 아는 사람이 노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군.”

“예엣?”

노엘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억을 잃은 노엘이다. 당연히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엘의 관심이 이안에게 쏠리자 헬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

이안과 헬리아 간의 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때 노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우, 우선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을까요?”

‘돈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하기는.’

헬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안도 그에 수긍했다. 결국 셋은 떨어지지 못한 채 함께 식당이 딸린 여관으로 들어갔다.

“역시 저 녀석 수상해.”

다람쥐에서 탈피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엘라임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엘라임에게 노엘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수상하다고 여긴 것은 바로 이안이었다.

‘그놈, 내가 아니었으면 헬리아에게…….’

자신이 그놈의 손가락을 깨문 덕분에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계속 저기압인 엘라임을 향해 헬리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서 마차나 구해 와.”

“마차는 왜?”

“내일 플로렌스 성으로 갈 거야.”

엘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내보낸 헬리아는 노엘이 묵고 있는 방으로 갔다.

똑똑-

“노엘, 문신을 치료하러 왔어요.”

“아,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없어도 될 이안도 함께 자리에 있었다.

‘쳇.’

“정말 지워지나요?”

노엘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얼굴에는 기대와 걱정이 가득했다. 평생 노예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엘의 물음에 헬리아가 답했다.

“물론. 흉터 없이 깨끗이 나을 거예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노엘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좀 비켜주시죠?”

헬리아가 이안이 방해된다는 눈으로 말했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지?”

그녀는 정말이지 가면을 쓴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자신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대로 보일 테니 말이다.

“아주 특수한 비법이라서 말이죠.”

“…….”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노엘이 이안을 보며 살짝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결국 이안이 짧게 혀를 차고 방을 나갔다. 헬리아는 드디어 노엘과 단둘이 남게 되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치료를 시작하죠.”

“아, 예.”

헬리아가 미리 준비한 약을 꺼냈다. 진짜 최상급 포션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방에 들어오기 전에 넣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자, 받아요.”

“이건…….”

“특별히 제작한 포션이에요. 다른 상처들도 나을 테니까 먹고 한숨 자세요. 약한 수면제가 들어 있지만 몸에 무리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한숨 푹 자고 나면 몸도 개운해질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노엘은 한 점 의심 없이 헬리아가 준 포션을 받아 들고 곧장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을 헬리아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으음, 뭔가 확실히 졸리네요.”

‘암, 얼마나 강한 수면제를 넣었는데…….’

약하기는 개뿔. 헬리아는 부작용 없는 선에서 가장 강력한 수면제를 집어넣었다.

“그럼 한숨만…….”

노엘이 쓰러지듯 침대 위에 기절했다. 잠을 잔다기보다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잠이 들었나…….”

헬리아가 노엘의 얼굴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좋아, 그럼.”

헬리아는 바로 노엘의 왼쪽 귀에 달린 작은 귀걸이를 떼어냈다. 검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귀걸이는 단순한 귀걸이가 아니었다.

“그냥 노예가 아공간 귀걸이를 지닐 리 없지.”

이건 매우 특별히 만든 특수 귀걸이로, 아공간 주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다. 마탑과 합작하여 상단에서 아주 소량만 만들고 있는 귀걸이였다. 그 덕에 이안도 이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공간을 이렇게 작은 귀걸이에 새기는 일은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력을 요구한다. 마법진을 새기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설령 만든다 해도 용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이 귀걸이도 총 1㎏이 수용 한계였다. 그래서 가벼운 것들밖에 넣지 못한다.

달칵.

그때 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헬리아는 깜짝 놀랐지만 얼른 귀걸이를 소매에 넣었다. 속에 있는 내용물만 빼고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을 생각이었건만, 그의 등장에 일이 틀어졌다. 그러나 헬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정말이지 가면을 쓰길 잘했다.

“무슨 일이에요?”

가면 속에 가려진 표정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대놓고 아주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십년감수했네.’

“치료는 다 끝났나?”

“예. 그럼 저는 제 방으로 가죠.”

헬리아는 이안을 지나쳐 얼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만져지는 귀걸이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다 아무 일도 없는 노엘을 보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온 헬리아는 꼼꼼히 문을 잠그고 귀걸이를 돌렸다. 특수하게 만들어진 귀걸이는 시동어가 아닌 수동으로 움직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귀걸이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헬리아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혹여 누가 보는 건 아닐까 다시 한번 주변을 확인하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건 한 장의 종이였다. 거기에 써진 내용을 읽어 내려간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과연, 왜 노엘이 쫓기게 되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누가 그를 쫓고 있는지도.

“아돌프 후작.”

헬리아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나갈 날이 빨라지겠어.”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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