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2)

제3장 마탑

우뚝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탑.

아르센 왕국의 왕실 마탑으로 수많은 마법사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 안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실험과 결과물이 쏟아져 나온다. 소설에서 언제나 영웅과 함께 등장하는 마법사는 실제로는 돌아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체로 돌아다니는 마법사는 소속이 없는 떠돌이거나 용병 마법사이다.

보통 마법사들은 마법 연구와 수련에 매진한다. 하지만 마법 연구를 하는 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마탑에 소속되거나 귀족의 개인 마법사가 된다.

마법사는 연구에 매진하느라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데, 그 때문에 종종 폐쇄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특히 마법사는 호기심에 살고 호기심에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왕성한 학구열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최근 들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활력 포션’이었다. 활력 포션의 인기에 포션 감정을 의뢰하는 문의가 빗발쳤다. 마법사들은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조사를 하고 보니 웬걸? 실험을 하면 할수록 활력 포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끝내 활력 포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활력 포션 실험에 참여한 한 마법사가 한탄하듯 내뱉었다.

“하아,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마탑에서 제조하는 포션은 각종 재료를 혼합해서 만든다. 트롤이나 몬스터의 피는 물론 다양한 약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값이 비쌌다. 거기다 제작 기간이 길었다. 하지만 활력 포션은 1실버에 공급 물량을 보아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양을 생산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 연구를 하는 이들 사이로 연륜 있는 흰 수염의 노인이 다가왔다. 인자하고 푸근한 외모에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르센 왕국의 왕실 마법사이자 마탑주인 베로니카 공작이었다.

“마탑주님.”

마법사들이 하던 실험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어찌 되었느냐?”

마법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혼합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마법사는 말을 흐렸다. 베로니카 공작은 활력 포션이 담긴 병을 들어 보았다. 포션의 액체가 찰랑거리며 푸른빛이 반짝였다.

“실험에 참여한 정령사는 뭐라 말하더냐?”

활력 포션을 제작한 이가 정령사라는 소식에 마탑은 정령사를 초빙해 직접 실험에 들어갔다. 혹여 이것이 정령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그들의 추리는 정확했지만 아쉽게도 결과물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대답했다.

“여러 차례 실험해 봤지만 정령으로는 포션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정령사의 급은?”

“상급 정령사였습니다.”

공작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의 수염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럼 최상급은 가능하더냐?”

“예?”

“최상급 정령사라면 가능하냐고 물었다.”

마법사가 당황했다.

“현재 최상급 정령사는 페르시아 제국의 레한 공작밖에 없습니다. 공작이 이런 포션을 팔 리 없지 않습니까?”

“흐음.”

공작은 포션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자가 또 다른 최상급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의 눈이 흥미롭게 변했다.

“그자의 소속이 어디라고?”

“엘라드 상단이라고 합니다.”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 * *

쾅!

조쉬가 거세게 책상을 내려쳤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은 비틀린 비명을 질렀다.

“그놈이 상단을 차렸다고?”

조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한 듯 되물었다. 그만큼 가르안 상단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단을 차렸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그 자식이 상단을 차린 게 사실이냐?”

워렌 대신 새로 총관으로 임명된 페론이 조쉬의 분노에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하!”

조쉬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떨쳐 냈다고 생각했건만 여전히 자신은 그의 발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짓을 해도 그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그런 태도였다.

“젠장.”

조쉬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놈 다리는? 정상이 아닐 텐데?”

워렌의 한쪽 다리를 완전히 짓이겨 놓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일어섰다는 말인가?

페론이 그에 답했다.

“……그것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다리가 불편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쾅!

“이런 빌어먹을!”

조쉬의 노기가 분출했다. 그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상단을 새로 만들었다고?”

그가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전부 막아.”

“막으라고 하심은?”

“그 엘도란지 엘라드인지 뭔지 하는 상단과 거래하지 못하게 죄다 막아.”

“알겠습니다.”

조쉬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상단을 만들었다고? 큭, 전부 짓밟아주지.”

* * *

“미안하게 됐네.”

평소 자주 드나들던 가게의 주인이 그를 보자 얼굴이 파래졌다. 워렌이 사정했다.

“어떻게 안 되겠어? 오히려 네게 나쁘지 않아.”

“그, 글쎄 미안하게 됐다니까.”

“한센!”

워렌이 한센을 불렀지만 그는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를 밀었다.

“미안한데 제발 나 좀 살려주게나.”

워렌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게 벌써 네 번째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매정하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상단을 더욱 키우기 위해 다른 곳과 거래를 알아보는 워렌에게 큰 장애물이 닥쳤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한센이 눈알을 굴리며 머뭇거렸다.

“한센!”

흠칫!

워렌이 소리치자 한센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다 깊게 한숨을 토해냈다. 한센이 작게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자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도대체 뭐냐니까?”

“그, 그게 말이지.”

작게 속삭이는 한센의 말에 워렌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 자식이!”

워렌이 씩씩거리며 상단 안으로 들어왔다. 헬리아가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나갔다 들어온 워렌은 얼굴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누구한테 욕이라도 한 바가지 얻어먹었는지 잔뜩 사나워져 있었다.

“젠장, 그 자식.”

그때 어니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크, 큰일 났어요!”

모두 어니를 보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더니 품에서 병을 한가득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헬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활력 포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어진 가짜였다.

“지금 시장에 쫙 깔렸어요.”

헬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올 거라 예상했다. 다른 이들도 눈이 있다. 분명 따라 만들 것임은 자명한 일. 오히려 그 시기가 늦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헬리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활력 포션의 효과. 지금이야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겠지만 효능의 차이를 느끼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보다 더 큰일이 있어.”

안색이 어두운 워렌이 입을 열었다.

“어느 곳도 엘라드 상단과 거래하려는 곳이 없어.”

헬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워렌을 보았다.

“이미 이유를 알고 있군요.”

“젠장! 조쉬 그놈이!”

워렌이 신경질을 냈다.

“조쉬가 분명해. 그 녀석이 일대 상인들에게 압력을 넣은 거야.”

워렌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워렌을 끌어들일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생각보다 조쉬라는 자의 머리가 나쁘지 않은 거다.

“너무 걱정 마세요.”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도 우리와 거래하지 않으려 한다고.”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르안 상단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죠?”

“웬만한 상단은 대부분.”

워렌에 말에 헬리아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상단이 아닌 곳은요?”

워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려고?”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가르안 상단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그런 상대라면 가능하겠죠?”

* * *

“호오, 여기가.”

엘라임이 거대한 탑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마법사의 탑. 그들은 마탑 앞에 서 있었다. 헬리아와 엘라임이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로브를 입은 여자 마법사가 친절하게 다가왔다. 갈색 머리에 나이는 제법 되어 보였지만 미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1층에는 다양한 상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탑은 마법 연구 및 실험뿐만 아니라 그에 파생된 실험물들을 팔며 돈을 벌었다. 일명 마법의 도구라 불리는 아티팩트는 매우 고가에 팔린다.

“마탑주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마법사 르웬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엘라임을 스캔했다. 헬리아는 아예 제외 대상이었다. 그녀의 눈이 오묘해졌다. 마법 스캔을 해보았지만 상대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자신보다 서클이 높거나 아예 서클이 없는 일반인이라는 소리다.

르웬이 엘라임의 관찰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예약이 되어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엘라임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탑주님을 만나겠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탑주를 동네 친구처럼 쉽게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마탑주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엘라암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헬리아가 그에게 작게 말했다.

“말해.”

엘라임이 르웬에게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정령사 라임이라고 합니다. 마탑주님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정령사시라고요?”

단순히 그가 정령사라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정령사 라임이라면 자신들이 최근 실험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 활력 포션의 주인이 아니던가. 르웬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활력 포션 제작자님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엘라임이 고개를 끄덕이자 르웬은 얼른 선임을 찾았다.

“그 활력 포션을 만든 정령사가 찾아왔어요.”

르웬은 자신의 선임 마법사가 있는 사무실로 갔다. 선임 마법사는 르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자가?”

“어떻게 할까요? 마탑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선임 마법사는 턱을 쓰다듬었다. 흥미로운 사람이 찾아왔지만 마탑주를 만나기엔 신분도 알 수 없었다.

“그 정령사가 날 만나러 왔다고?”

그때 흰 수염을 만지며 베로니카 공작이 나타났다.

“마탑주님!”

“재밌게 됐군. 만나지.”

그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거렸다. 마탑에서도 그 정령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길드에 정보를 의뢰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길드에서도 그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궁금한 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오나.”

“걱정 말게.”

베로니카 공작은 마법사를 안심시켰다. 감히 8서클의 대마법사인 자신을 해칠 간 큰 녀석은 세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어서 들이게.”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마탑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법사는 헬리아 일행을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마탑주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이게.”

마탑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헬리아와 엘라임이 마탑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전체가 갖가지 실험 도구와 책으로 가득했다. 일국의 공작이 아닌 학자 같은 면모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 정령사라고?”

“정령사 라임입니다.”

베로니카 공작의 시선이 엘라임에게 향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엘라임에게서 풍겨 나오는 묘한 느낌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네, 인간인가?”

공작이 불쑥 내뱉었다. 엘라임의 기운은 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깨끗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어린아이도 몸 안에 탁기가 있게 마련이거늘, 그에게선 그 어떤 불순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라임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글쎄요. 인간으로 보이면 인간이지요.”

“…….”

공작은 그런 모습에 그가 인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제아무리 8서클의 마도사지만 정령왕의 진실한 모습을 꿰뚫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베로니카 공작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활력 포션이 궁금해 그를 받아들였지만 과연 그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엘라임이 헬리아를 한번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공작의 미간이 움직였다. 그가 엘라임을 다시 바라보았다. 과연 이 정령사는 무엇을 거래하고자 찾아온 것일까.

그때 엘라임의 뒤에 있던 헬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금안에 금발을 지닌 소녀. 누런 노란색이 아닌 짙은 금발의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를 지녔다. 순간 베로니카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헬리아는 베로니카 공작이 자신을 보자 놀랐다. 하지만 소리 내지 않았다. 어린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게 의아한 모양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 이 아이는 제…….”

엘라임이 그녀를 소개하려 했지만 베로니카 공작이 선수 쳤다.

“왜 그 아이가 여기에 있는 거지?”

“…….”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는 거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헬리아가 외면하려 했지만 그는 똑바로 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성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베로니카 공작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는 헬리아가 아닌 엘라임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 아이를 빼낸 것이냐?”

공작의 사나운 기파가 엘라임을 조여들었다. 엘라임은 손을 휘저어 수막을 생성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베로니카 공작의 힘이 예상치 못하게 너무 강했다.

“윽.”

뒤에서 헬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엘라임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만하지?”

그가 반말조로 나오자 베로니카 공작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젊은 놈이 버릇이 없구나!”

그가 힘을 개방하자 결국 헬리아가 피를 토했다.

“젠장! 이 망할 늙은이!”

엘라임이 잇소리를 내자 그제야 베로니카 공작도 놀란 눈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 아이가?”

자신은 오직 엘라임에게 기를 쏘아 보냈다. 헬리아에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라임의 계약자인 헬리아에게는 쓸모없는 배려였다.

“쿨럭!”

헬리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공작은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베로니카 공작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엘라임은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

“힐링!”

그가 얼른 그녀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은은한 빛이 감돌고 헬리아의 안색이 차츰 되돌아왔다.

“후우.”

간신히 헬리아의 몸이 나아지자 베로니카 공작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의 짓이더냐!”

공작의 화가 엘라임에게 향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봐, 늙은이. 당신 때문이잖아! 왜 나한테 그래!”

억울한지 엘라임이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베로니카 공작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분명 네 녀석에게만 힘을 보냈단 말이다! 그리고 나는 늙은이가 아니다!”

늙은이라는 소리에 발끈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가 사납게 엘라임을 노려보았다.

엘라임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그럼 늙은이를 늙은이라 부르지 뭐라고 부른단 말이야?”

“이놈이!”

그때 헬리아가 베로니카 공작을 붙잡았다.

“후우, 그만하시죠.”

“괜찮더냐?”

공작의 걱정 어린 말에 헬리아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이리 나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성에선 어떻게 나온 것이냐?”

“하아, 대화가 필요할 듯하군요.”

헬리아는 머리가 아파졌다. 베로니카 공작이 자신을 알아본 것도, 그가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것도, 모두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베로니카 공작과 헬리아가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헬리아였다.

“어떻게 알아보셨죠? 저는 공작님을 처음 봅니다.”

헬리아는 자신의 과거를 뒤져 봤지만 공작을 본 기억이 없었다. 공작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하기야 너무 어릴 적이라 본 기억이 없을 테지. 하지만 그분을 아는 이라면 누구든 알아봤을 게다.”

헬리아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그분이 누굽니까?”

베로니카 공작이 헬리아를 바라봤다. 아련히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듯 그는 그녀 안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거론되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어머니를 잘 아십니까?”

“하하.”

공작은 웃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눈으로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어째서 궁에 있어야 할 공주가 이곳에 있는 거지?”

그는 여전히 엘라임을 의심했다. 어린아이가 혼자 나올 리는 만무했으니 말이다.

“그가 내보낼 리가 없을 텐데?”

“그라니요? 세바스찬을 아십니까?”

헬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일국의 공작과 일개 시종이 잘 아는 사이다? 그러나 베로니카 공작은 그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헬리아는 그것이 더욱 수상했다.

‘도대체 세바스찬의 정체가 뭐지?’

세바스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후우, 이것 참.”

베로니카 공작은 밖으로 나온 공주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당장에라도 궁에 알려야 했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신 화제를 바꿨다.

“여긴 왜 온 것이냐?”

다시 상황이 처음으로 돌아가자 헬리아는 잠시 의문을 밀어 넣고 말했다.

“거래를 하고자 왔습니다.”

“그래, 거래라. 그보다…….”

베로니카 공작의 눈이 날카롭게 그녀를 보았다.

“내가 당장에라도 궁에 알린다면 어찌할 생각이지?”

“…….”

“나는 공작이며 마탑주네. 유폐된 공주를 눈앞에 두고 못 본 척할 수 없네.”

베로니카 공작의 눈과 헬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헬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안심이네요.”

“안심?”

공작이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 그럴 생각이시라면 이런 소리조차 하지 않았겠지요. 그나마 여지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엔 공작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꽤나 당돌한 말이다.

“재밌군, 재밌어. 내가 말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는 건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헬리아가 엘라임을 가리켰다.

“저자와 활력 포션에 대해.”

“……흠.”

“그러니 마탑주께서 직접 보자고 하신 게 아닙니까?”

“그래서 그걸 빌미로 입을 다물어 달라?”

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알지도 못 할 텐데.”

“공주가 밖을 나왔는데도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

베로니카 공작이 눈을 찌푸렸다. 헬리아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작게 웃었다.

“배경도 힘도 없는 천한 출신에 유폐된 공주 따위를 신경 쓸 사람이 있겠습니까?”

“…….”

자신의 처지를 저리 담담하게 말하자 공작은 새삼 다시 그녀를 보았다. 열 살 어린 소녀는 슬픔도 아픔도 보이지 않았다. 담담히 그 앞에 앉아 있을 뿐이다.

“무슨 거래를 한다는 거지?”

베로니카 공작의 말에 헬리아는 눈을 반짝였다.

“마탑과 제휴를 하고 싶습니다.”

“제휴?”

베로니카 공작은 시큰둥했다. 마치 마탑에 빌붙으려는 모양새처럼 느껴져 오히려 불쾌해질 정도였다.

“엘라드 상단이라고 그랬나?”

이제 막 새로 만들어진 상단이었다.

“그게 마탑에 무슨 이익이 된단 말인가?”

그럴 줄 알고 헬리아가 봉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보시죠.”

베로니카 공작은 그녀가 내민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겹겹이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이건…….”

베로니카 공작이 종이를 하나둘 살펴보자 그의 얼굴에 진지함이 서렸다. 어떨 때는 놀란 눈을 하거나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탁.

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누구의 것인가?”

“제 것입니다.”

“……정말 공주의 생각인가?”

헬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베로니카 공작의 눈이 커졌다. 놀라웠다. 그가 읽은 문서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당장 실용 가능한 것도 있었고, 차후 연구가 필요하지만 굉장한 신드롬을 일으킬 만한 것들도 있었다.

베로니카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헬리아를 바라봤다. 고작 열 살. 이 어린 소녀가 그런 생각들을 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다음은 없는가?”

몇몇 부분은 그다음 장이 없었다. 베로니카 공작은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빼놨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어린 공주를 얕보다간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다음 장도.”

베로니카 공작이 헬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대가가 뭔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엘라드 상단은 마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제공하겠습니다.”

“마탑의 비호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눈치가 빠르시니 더 말할 필요도 없군요.”

베로니카 공작이 물끄러미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맛을 다셨다. 이런 아이디어들이라면, 지금 자신들이 연구하는 것을 더욱 빨리 완성시킬 수 있었다. 연구를 하는 데 있어 목표가 확실하다면 더욱 성취가 쉽다. 그런 점에서 헬리아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일종의 지표인 셈이다. 그만큼 공작의 고민도 깊어만 갔다.

그가 힐긋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까웠다. 그는 헬리아의 독살 사건의 진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가 나서지 않았던 것은 왕의 결정 때문이었다.

공작은 헬리아에게 어떤 사사로운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그분의 딸이기 때문에 관심을 조금 기울인 것뿐이지, 그녀를 복권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본 그녀는 참으로 아까웠다. 능히 세상을 놀라게 할 능력을 가진 아이였다. 그가 눈을 감았다.

헬리아는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쉽게 일이 성사될 줄 알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나. 그가 자신을 알아볼 줄은.

잠시 후 베로나카 공작이 눈을 떴다.

“조금 시간을 주게.”

“…….”

“이틀 뒤에 답을 주지.”

베로니카 공작은 잠시 답을 미루기로 했다.

어두운 밤. 베로니카 공작은 마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작은 병, 활력 포션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포션이 문제가 아니다. 헬리아 공주가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넘기긴 했지만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후우…….”

그의 시름이 깊어갔다.

그때 옅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 잔뜩 긴장한 채 마법을 발사할 준비를 하다 이내 손을 내렸다.

“자네가 올 줄 몰랐군.”

까마귀 모양의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노인은 공작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일세.”

공작은 세바스찬을 보았다. 오랫동안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헬리아 공주의 시종으로 간다는 이야기에 꽤 놀랐었다.

“자네는 왕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세바스찬은 그저 웃었다.

“그분의 뜻이었네.”

“그동안 얼굴은 왜 안 보여 준 게야. 또 왜 이렇게 늙었고?”

공작의 눈이 세바스찬의 주름진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공작의 꾸짖음에 세바스찬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있었네.”

“자네는 언제나 그렇지.”

공작이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5년 전만 해도 그는 훨씬 젊었었다. 5년 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에는 원망하고 화를 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리움이 앞섰다.

“잘 지내는 겐가?”

“후후, 자네는 여전하군.”

세바스찬이 베로니카 공작의 방을 둘러보았다. 일흔이 넘은 노인은 아직도 열성적으로 마법 연구에 매달렸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마법을 위해 살았다.

“부탁이 있네.”

세바스찬의 말에 공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친우는 이제껏 그에게 부탁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공주님이 다녀가신 걸 아네.”

“헬리아 공주 말인가?”

공작은 머리가 아픈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래, 그럼 그 공주의 일로 온 겐가?”

“고민하고 있는 거 아네.”

“놀랐네. 유폐된 공주가 밖을 돌아다니다니. 왜 그리 둔 건가!”

베로니카 공작의 질책에 세바스찬은 그저 웃었다. 공주가 그가 말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탁하네. 못 본 척해 주게.”

“세바스찬!”

“조금만 기다려 주게. 지금은 유폐되어 있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분이 아니야.”

베로니카 공작이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마음에 들었는가?”

“변하셨네.”

헬리아는 과거와 달랐다. 그래서 세바스찬은 그녀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공주는 아는가?”

공작의 말에 세바스찬이 쓸쓸히 웃었다.

“그저 난 공주님의 시종일 뿐이네.”

공작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이내 바람이 불더니 세바스찬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주님을 잘 부탁하네.”

바람 소리 사이로 아련히 들려오는 세바스찬의 목소리에 공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마탑에서 연락이 온 것은 정확히 이틀 뒤였다.

베로니카 공작과 헬리아가 서로 마주 보았다. 헬리아는 초조함을 숨기고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았네.”

“…….”

“거래를 승낙하지.”

헬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두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가르안 상단의 방해를 떨쳐 내는 것은 물론 더욱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베로니카 공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헬리아가 멈칫했다. 그의 말에 집중했다. 베로니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네.”

흥분했던 헬리아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봤다. 조건이란 게 무엇일까. 헬리아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에 있어야 할 공주가 함부로 밖을 나돌아 다니는 건 좋지 않네.”

“하지만 그건…….”

헬리아가 반론하려 했지만 공작이 손을 올려 저지했다.

“아직 이자의 정체도 모르고.”

그가 엘라임을 바라봤다. 엘라임은 어깨를 으쓱였다. 헬리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이 엘라임의 정체를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뭐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니 그가 놔두었겠지.”

‘그?’

공작이 말한 그는 누굴일까.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공주.”

베로니카 공작이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예.”

“공주의 능력은 내 잘 알겠네. 이대로 두기 아깝지.”

“…….”

“하지만 너무 어리네.”

공작의 말에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열 살의 몸뚱이가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급해졌다.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베로니카 공작은 고집스런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가만히 웃음 지었다. 머리도 좋고 배짱도 있다. 거기다 고집도 있다. 오랜만에 참 재밌는 아이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공작이 눈을 반짝였다.

“조건을 말하겠네.”

헬리아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제자가 되게.”

“……엑?”

헬리아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만큼 그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제자라고요?”

공작은 그녀의 놀란 모습이 오히려 귀여웠다.

“에잉, 싫은가?”

“시, 싫다니요!”

헬리아가 저도 놀라 소리쳤다. 이건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고마워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 8서클 대마도사이자 베로니카 공작의 제자라니!

“정말이십니까?”

헬리아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되물었다.

“제자가 되지 않는다면 거래는 없네.”

이거야말로 쐐기가 아니던가. 긴장했던 그녀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흘렀다.

“최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 * *

“뭐라고!”

조쉬의 눈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사, 상단들이 모두 돌아섰습니다.”

“도대체 왜?”

“그, 그게 엘라드 상단이 마탑과 제휴를 맺었답니다.”

“하!”

조쉬는 페론의 말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비틀거렸다.

“마탑과?”

마탑은 폐쇄적인만큼 다른 곳과 거의 교류하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교류하지 않아도 충분한 자금과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들이 모인 집단이다 보니 괴짜가 많았다.

“도대체 무슨 수로!”

조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밟아도 밟아도 끈덕지게 살아남는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의 눈이 어두운 빛을 띠었다.

“하, 하하.”

그의 기괴한 웃음이 방 안을 울렸다. 페론은 멀찍이 떨어져 몸을 떨었다.

“운이 좋구나, 워렌.”

그의 눈에 검은 불길이 번졌다.

“마탑이라고? 훗. 좋아. 그 정도는 해야 워렌이겠지.”

“어찌하시렵니까?”

“그쪽에서 마탑과 손을 잡았다면 우리는 그에 대항할 자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조쉬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 * *

레칸 대륙은 태양의 신 헤리온, 물의 신 바누스, 대지의 신 게르에 의해 형성되었다. 헤리온은 태양을 만들고, 바누스는 바다를, 게르는 대지를 만들었다. 세 신의 균형은 조화를 이루며 레칸 대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인간들은 각각 신을 받들어 모시며 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신들은 조화를 추구했지만 인간은 달랐다. 서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최고라 여기며 분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분열은 점차 종교 전쟁으로 번져 나갔다.

백여 년의 싸움은 결국 태양의 신 헤리온을 믿는 신전이 승리하면서 레칸 대륙에는 태양의 신 헤리온만이 남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헤리온파는 그 기세에 힘입어 왕국들마저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횡포에 참다못한 왕국들은 연합하여 2차 종교 전쟁을 벌였다.

철옹성 같던 헤리온파는 결국 무너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약하지만 그 세를 조금씩 불려가며 지금도 헤리온파는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아르센 왕국의 수도에 위치한 헤리온 신전.

신전을 총괄하는 사무엘 주교는 신전의 재무 담당자의 말에 살에 파묻힌 미간을 살짝 치켜들었다. 사무엘 주교는 오십 세가 넘는 나이임에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맨들맨들 빛이 났고 몸은 비대해 헐렁한 성직자용 로브가 꽉 껴 보일 정도였다.

그가 얄팍한 입술을 움직였다.

“신전의 수입이 줄어들었다고?”

화려한 무늬의 도자기를 닦던 그의 손이 멈췄다. 손가락에 끼어 있는 금반지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주교의 방에는 값비싼 도자기와 물건이 가득했다. 성직자의 신분이었지만 돈에 대한 그의 탐욕은 신심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주교가 묻자 재무 담당자가 대답했다.

“그게, 활력 포션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활력 포션?”

“예.”

주교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도 활력 포션의 인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전의 포션과 활력 포션의 효과는 천지 차이였다.

재무 담당자가 그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말했다.

“아무래도 가격이 싸다 보니.”

“흐음…….”

주교는 자신의 두툼한 턱살을 만지작거렸다.

똑똑-

그때 서재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주교님, 가르안 상단주가 뵙기를 청합니다.”

“가르안 상단주가?”

주교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무엘 주교는 조금 심드렁하게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그래 무슨 일입니까?”

주교의 쌀쌀맞은 반응에 조쉬가 얼른 미리 가져온 상자를 건넸다. 함께 있던 신관이 그것을 대신 받아 들었다. 주교의 눈이 상자를 향했다.

조쉬가 웃으며 말했다.

“기부금입니다.”

“호오, 신자님이셨구려.”

그제야 주교의 표정이 밝아졌다. 주교는 힐금 신관을 보았다. 신관은 상자를 열어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이리 앉으시오. 내 너무 세워두었구려.”

조쉬는 웃었지만 주교를 보는 눈은 싸늘했다.

‘너구리 같은 영감.’

그러나 주교가 그를 볼 때는 이미 눈가에 어린 싸늘함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신관이 차를 내왔다. 둘 사이에 여러 말이 오갔지만 모두 본론을 위한 밑바탕이었다. 조쉬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운을 띄웠다.

“혹 활력 포션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교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주교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태연하게 차를 입에 가져갔다.

조쉬는 쉽게 받아치지 않는 주교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이미 활력 포션으로 인해 신전의 포션 매출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왔다. 하나 주교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조쉬가 먼저 속내를 드러냈다.

“최근 활력 포션으로 신전이 큰 피해를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주교는 조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지 지켜보았다.

“헤리온 신의 독실한 신자로서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주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대 같은 이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오. 헤리온 신의 진실한 축복이 그대에 내려질 것이오.”

하지만 주교는 어리석지 않았다.

“하오나 활력 포션으로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면 그것 또한 신의 은총이 아니겠소?”

조쉬가 초조한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노회한 너구리가 괜히 주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 그 활력 포션이 아무 근간이 없는 약이라면 사정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주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되는 거로군.’

주교가 깜짝 놀란 듯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마탑에서 감정했지만 그 성분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신의 성수인 신전의 포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일개 인간의 힘으로 그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조쉬가 말을 이었다.

“하물며 사람들은 그 활력 포션을 매일 사간답니다. 이는 어떠한 특수 물질이 그들을 중독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교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와 조쉬의 눈이 마주쳤다.

가르안 상단주가 돌아가고 사무엘 주교는 곧장 신관을 불렀다.

“조사한 것은?”

“엘라드 상단의 워렌이라는 자에게 상당한 악감정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엘라드 상단에 압박을 가했지만, 마탑과 손을 잡는 바람에 그것도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하여 감히 신전을 이용하려 한다?”

주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흐음.”

주교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것이 괘씸하지만 그리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이참에 마탑을 눌러놓는 것도 좋겠군.”

마탑과 신전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에 바탕을 둔 마탑은 신전의 신의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운명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탑과 신전의 갈등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일이었다.

주교의 눈이 반짝였다.

“가르안 상단주에게 전하라. 헤리온 신께서 그의 바람을 이뤄주신다고.”

신관은 고개를 숙이곤 서재를 나갔다.

* * *

활력 포션의 인기에도 신전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활력 포션보다는 효과가 훨씬 좋기 때문이다. 신전에는 포션을 사러 온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는 적었다.

한 남성도 포션을 사기 위해 신전을 찾았다.

“헤리온의 빛이 깃들길.”

“헤리온의 빛이 깃들길.”

남자가 신관의 인사에 화답했다. 신관은 한 달 전에 본 남자를 기억하고 반색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예.”

“혹시 활력 포션을 드시고 계신가요?”

“아, 그, 그건…….”

아무래도 포션을 파는 곳에서 활력 포션 이야기가 나오니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신관은 남자가 포션을 자주 마시는 걸 알게 되자 바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놀라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신관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활력 포션의 인기로 많은 백성이 구원을 받아 기쁘답니다. 하나…….”

남자가 신관의 말에 집중했다.

“혹 활력 포션을 먹으면서 이상 증세는 없었는지요?”

“이상 증세요?”

“최근 중독 증상을 보이시는 분들이 계셔 신관으로서 걱정될 따름입니다.”

“주, 중독이요?”

신관이 다시 물었다.

“일주일에 몇 번 활력 포션을 마십니까?”

남자는 손가락을 세어 보았다. 일주일에 거의 대여섯 번은 먹고 있었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문제가 되는 겁니까?”

“후우, 신도님 말고 꽤 되십니다. 활력 포션을 자주 드시는 분들이 아무래도 중독 증상이 보이시는 것 같아 신전에서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현재로서는 어떤 말도 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아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사 드시는 걸 권장합니다.”

남자는 충격에 눈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꽤 그 활력 포션을 자주 먹고 있었다.

‘그, 그게 중독?’

무지한 남자는 벌벌 떨었다. 아르센 왕국에서는 왕국법으로 마약 및 중독 물질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남자의 머릿속에는 갖가지 상상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이내 활력 포션으로 돌아갔다.

신관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었다.

* * *

“이게 대체…….”

워렌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찌 된 영문인지 포션을 사 갔던 사람들이 반품을 요청하고 있었다.

클리드가 안색을 흐리고 물었다.

“혹시 물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벌써 판매한 지도 한 달이 넘었어. 게다가 그 꼬마 아가씨가 얼마나 깐깐한데.”

워렌은 머리를 헝클였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한 손님이 소리쳤다.

“이런 사기꾼들!”

그에 옆에 있던 이들도 합세했다.

“나쁜 놈들!”

이유를 알아야 화를 내던가 하지, 워렌과 상단 직원들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리창을 뚫고 돌멩이까지 날아오자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도대체 뭔 일인 거야.”

엘라드 상단 직원 모두 테이블에 앉았다.

“이유가 뭐랍니까?”

헬리아의 물음에 클리드가 대답했다. 그동안 포션을 반품한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나마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활력 포션에 중독 물질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헬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중독 물질이란 말인가? 그래도 혹시나 하고 엘라임을 바라봤다.

엘라임은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런 걸 넣을 리가 없잖아.”

하긴, 정령왕이 중독 물질을 뭐 하러 넣는단 말인가. 그리고 헬리아도 확인했었다.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일반 백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리가 없다.

클리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신전에 포션을 사러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진 것 같습니다.”

“신전?”

“예, 신전에서 활력 포션에 대한 중독 물질을 검증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럼 아직 밝혀진 것도 없잖아!”

워렌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헬리아도 한쪽 입가를 틀어 올렸다.

“일부러 신전에서 소문을 냈군.”

신전에서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신전의 파급력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일쯤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신전이…….’

하지만 대응이 늦은 감이 있었다. 조치를 취하려면 좀 더 빨리 취했어야 했다.

‘무언가 있어.’

워렌도 감을 잡은 것인지 헬리아를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헬리아의 눈이 깊어졌다. 워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조쉬가…….”

혹시나 하고 헬리아는 정보길드 베라를 찾았다.

“또 보니 반갑습니다.”

키안이 웃으며 그녀의 방문을 반겼다. 여전히 그의 방은 마치 숲에 온 듯 청량한 향이 풍겼다. 헬리아는 여전히 이 미심쩍은 엘프를 믿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정보력은 대단했다.

“신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이번 소문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흠.”

키안이 헬리아의 말에 뜸을 들였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가 약해졌다고 해도 신전을 건드리는 일은 위험합니다.”

헬리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

“흐음.”

키안이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금안과 금발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탓인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꽤 비쌀 겁니다.”

헬리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상관없어!”

그러다 조금 머뭇거렸다.

“근데 할부는 안 돼?”

키안이 눈을 좁혔다.

“안 됩니다.”

헬리아는 혀를 찼다.

키안에게 정보를 확인한 헬리아는 확신했다. 이번 일에 조쉬 가르안이 연관되어 있다고.

“어떻게 할 거야?”

워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신전이 개입되었다면 일이 커질 것이다.

“막아야죠.”

“하지만 신전에서…….”

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라니?”

“애초에 검증하고 있다는 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했다면 더 큰 타격을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신전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죠.”

“그럼?”

“발을 빼둘 여지는 만들어 놓았다는 거죠.”

헬리아는 신전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너구리 같은 자라고 생각했다. 두루뭉술하게 말해 후에 있을 위험에서 몸을 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헬리아도 빠져나갈 길이 생겼다.

* * *

수도에 위치한 헬리온 신전에 헬리아와 워렌이 찾아갔다. 세가 약해졌다고 하나 신전의 위용은 대단했다. 거대한 기둥과 하얀 대리석이 자태를 뽐냈다.

차가운 대리석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신관이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워렌이 말했다.

“엘라드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주교님을 뵙고 싶습니다.”

신관이 고민하다 자신이 결정할 사항이 아닌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왔다.

“주교님께서 뵙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자신들의 방문을 거부하지 않자 헬리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들은 하얀 대리석 복도를 지나 사무엘 주교의 서재로 갔다.

똑똑-

“주교님, 엘라드 상단에서 오셨습니다.”

“들이게.”

주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헬리아와 워렌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시오?”

헬리아가 눈짓하자 워렌이 주교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러자 주교의 눈빛이 변했다. 헬리아는 이미 주교가 어떤 성격인지 키안을 통해 알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탐욕스런 자.’

괜히 신전의 주교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오, 이건.”

워렌이 웃으며 말했다.

“저의 신심입니다.”

“이런, 신도님이셨구려.”

조쉬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러나 상자 안에 있는 액수를 보자 오히려 그때보다 더 입가를 벌렸다.

주교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이미 그들의 온 이유를 알면서도 주교는 여유 있게 말했다. 그 모습이 아니꼬웠지만 속내는 감추고 워렌은 본론을 꺼냈다.

“최근 상단의 활력 포션을 검증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렇소. 아무래도 백성을 보호하는 신전의 입장에선 조사가 필요하다 여겼소.”

워렌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찰나였다. 이미 조쉬가 주교와 만났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하면 언제쯤 그 검증이 끝나겠습니까?”

주교가 고심하는 듯 뒤로 물어났다.

“좀 더 조사가 필요할 듯싶소이다.”

주교는 머리가 좋은 자였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결국 카드를 빼드는 수밖에 없었다. 헬리아가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주교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후후, 이래서 상단 놈들은.’

주교에게 상단은 그저 돈주머니였다. 한쪽에 머물기보다는 적당히 균형을 맞춰주면서 돈을 뜯어냈다.

‘얼마나 들었을꼬.’

주교는 입가가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손수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주교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헬리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상자 안을 본 주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이건.”

주교가 워렌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선물이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주교가 으득 이를 물었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금광 채굴권이었다. 아르센 왕국에선 금광은 무조건 나라에 일차적으로 귀속된다. 개인이 왕실의 재가 없이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고, 소유한다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 다만 왕실이 직접 채굴하지 않고 채굴권만 경매에 붙여 상단에 넘겨 그 이율을 얻는다.

하지만 모든 금광을 왕실이 알 수는 없는 노릇.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금광을 채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금광 중 하나의 채굴권을 사무엘 주교가 가진 것이다.

“꽤 좋은 금광을 가지고 계셨더군요.”

“…….”

워렌의 말에 주교가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연륜으로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뭔가?”

주교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꽁꽁 숨겨두었건만 들켜 버린 것이다. 그가 초조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젠장, 이놈들.’

헬리아는 주교를 보며 작게 조소를 지었다. 아마 그는 더 많은 돈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한번 돈을 주기 시작하면 탐욕에 눈이 멀어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헬리아는 이런 신전에 돈을 처박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주교의 볼이 떨렸다. 화를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저희는 그저 언제쯤 검증이 완료되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주교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세밀하게 조사했는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금방 검증은 끝날 것이오.”

주교가 워렌을 노려봤다. 워렌과 헬리아는 신전과 크게 틀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물러서야 했다.

“감사합니다.”

“하면 이건…….”

“주교님.”

주교의 말을 막은 워렌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주교는 손에 든 종이를 와락 구기며 입가를 비틀었다.

* * *

“뭐라고!”

조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신전이 입장을 바꾸었다. 게다가 신전의 검증까지 마쳤으니 활력 포션은 이전보다 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젠장! 그 주교 놈!”

조쉬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치욕을 느꼈다. 아무리 자신이 가르안 상단의 상단주가 되어도 결국 그에게 못 미치는 현실이 지독히도 그를 괴롭혔다. 그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워렌!”

조쉬의 눈에서 점점 초점이 사라졌다.

“가만두지 않을 거다!”

조쉬는 책상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던졌다. 유리가 깨지고 방은 어지럽혀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알베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오랜 친구인 전 상단주의 뜻을 배반하면서 조쉬를 상단주에 앉힌 것은 상단의 분열을 염려해서였다. 가르안 상단의 간부들은 워렌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워렌이 상단주가 된다면 그들과 크게 반목하여 결국에는 상단이 흔들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조쉬는 상단 일보다 워렌에게 집착했다. 상단주가 돌보지 않으니 당연히 상단이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조쉬의 눈치를 보던 간부들이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상단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애쉬튼.’

알베르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는 조쉬를 한 번 돌아본 뒤 자리를 떴다.

* * *

신전에서 활력 포션에 문제가 없다고 공언하자 돌아선 손님들이 다시 엘라드 상단을 찾았다. 모처럼 만에 상단은 활기를 띠었다. 너무 많이 몰려들어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어니가 투덜거렸다.

“하아, 너무 힘들어요.”

“어니, 투덜거리지 말고 손이나 바삐 움직여.”

워렌이 핀잔을 주었다. 어니는 지쳤는지 안색이 파랬다.

“좀 더 사람을 뽑는 게 어때요?”

사업의 규모가 커지자 사실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다.

그때 상단을 방문한 이들이 있었다.

“어, 자네는?”

“오랜만입니다. 총관님.”

워렌은 낯익은 얼굴을 보자 그를 반갑게 맞았다. 가르안 상단의 옛 동료였던 헥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모두 가르안 상단의 동료들이었다.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 일은 어떻게 하고?”

헥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쉬 가르안은 제정신이 아니야.”

워렌이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일이야?”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헥스가 입을 열었다. 일이 틀어지면서 조쉬는 실성이라도 한 듯이 매일같이 술을 먹고 상단을 돌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떼기 시작하면서 간부들은 마음대로 상단을 움직였다. 힘든 것은 그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가르안 상단이 점차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두고 볼 수 없었다. 헥스가 대표로 조쉬에게 간언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폭언과 실직이었다.

“우린 잘렸네.”

“허…….”

워렌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도대체 그 자식은!”

설명을 들은 워렌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그건 조쉬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어째서 그렇게 변해야만 했을까. 그건 연민이었다.

“총관님, 부탁드립니다. 저흴 받아주세요.”

다른 동료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워렌은 난감했다. 이전엔 총관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그는 일개 직원에 불과했다. 그가 헬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 손이 부족했던 참인데 다행이네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죠?”

워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엘라드 상단을 방문했다. 워렌의 눈이 사나워졌다.

“당신은…….”

“오랜만일세.”

애쉬튼의 오랜 친우이자 조쉬의 외할아버지인 알베르였다.

* * *

“크, 크큭.”

술에 잔뜩 취한 조쉬의 몸이 비틀거렸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걸으며 그가 히죽 웃었다. 이 뒤틀려 버린 나무판이 자신과 닮아 보였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자신의 서재로 들어왔다. 과거 아버지 애쉬튼의 서재이기도 했던 이곳은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물건의 위치며 액자의 위치 하나까지 모두 애쉬튼의 생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쉬가 그의 방에 걸린 애쉬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조소를 지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되었어.”

조쉬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가르안 상단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애쉬튼이 이룩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그의 아들인 조쉬, 그였다.

“하지만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조쉬가 애쉬튼의 초상화를 보다 몸을 돌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술병이 가득한 찬장으로 걸어가 안에서 시커먼 병을 꺼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쉬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무슨 일이야?”

페론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그, 그게…… 워렌이 찾아왔습니다.”

조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꺼낸 검은 병을 잠시 바라보았다.

달이 뜬 밤이었다. 워렌이 조쉬를 만나러 간 그 시각, 헬리아와 엘라임은 몰래 가르안 상단에 침입했다.

“정말 있는 거 맞아?”

조쉬의 서재에 들어온 엘라임이 헬리아에게 물었다. 헬리아는 알베르의 방문을 떠올렸다.

“여긴 대체 무슨 일이시죠?”

워렌이 차갑게 내뱉었다. 알베르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하.”

알베르가 두 손을 맞잡았다.

“조쉬가 그렇게까지 자네를 싫어할 줄 몰랐어.”

“…….”

워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알베르는 조쉬가 상단주가 되어 자신이 그 뒤를 받쳐 주면 가르안 상단은 이전의 영화를 다시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쉬와 워렌. 그 둘이 서로를 의지하며 잘해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조쉬는 그의 바람과는 너무도 다르게 상단을 운영했다.

“자네에겐 미안하네.”

“…….”

알베르가 깊게 한숨을 내쉬다 입을 열었다.

“제발 조쉬를 멈춰주게.”

“그건…….”

“상단주님은 자네가 상단주가 되길 바랐네. 부디 가르안을 막고 이 상단을 지켜주게.”

오랫동안 상단과 함께해 온 알베르는 이대로 상단이 무너지는 걸 볼 수 없었다. 그 말에 워렌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상단주님의 유언은 가르안이 상단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닐세.”

알베르는 유언이 조작되었음을 실토했다. 워렌은 분노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상단주님은 치밀한 성격이네. 언제나 중요한 문서는 두 개를 만들어 놓지. 분명, 유언장이 하나 더 있을 것이네.”

조쉬와 워렌이 마주 앉았다. 조쉬가 먼저 운을 뗐다.

“무슨 일이지?”

“…….”

“날 비웃으러 온 건가?”

조쉬는 키득거렸다. 워렌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훤칠했던 그의 얼굴은 가무잡잡했고 입에선 술 냄새가 풍겼다.

“……왜 이렇게 된 거냐?”

조쉬가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왜냐고?”

“……이렇지 않았잖아.”

조쉬는 가소로운 듯 웃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

워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복수를 하려 했다. 하지만 정말 복수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보다 조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조쉬는 참 잘 웃고 활발한 아이였다. 상재는 없었지만 잘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 모습이 워렌은 좋았다. 그가 자신을 찌른 건 충격이었다. 하지만 순간의 충격이 파도에 휩쓸리듯 지나가자 남은 것은 조쉬의 동기였다. 왜 그가 그래야만 했을까.

복수하기 위해 헬리아와 손을 잡았지만 워렌은 조쉬를 보자 그 마음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네가 싫다, 워렌.”

“…….”

“나보다 더 잘난 그 재능이 싫고.”

워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네가 싫었다.”

“상단주님은.”

워렌이 반론하려 했지만 조쉬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알고 온 거 아닌가? 아버지는 네게 이 상단을 주려 했다.”

“…….”

“어째서 너지? 능력이 좋기 때문인가? 자신의 아들은 내팽겨 칠 만큼 네가 그리도 능력이 있다는 건가?”

조쉬는 비릿하게 웃었다.

“워렌, 술 한잔하지 않겠어?”

조쉬가 워렌에게 그 잔을 내밀었다. 그는 검은 병을 열고 워렌의 술잔에 따라주었다. 워렌은 술을 받아먹었다.

조쉬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보이는 곳에 놔두었다면 이미 조쉬가 알았을 것이다.

헬리아는 침대와 책상 등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분명 애쉬튼은 몸이 좋지 않아 침대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움직이는 반경이 넓지 않을 것이다. 헬리아의 시선이 오랫동안 침대에 머물렀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그녀도 맨 먼저 침대부터 뒤져 보았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없는 걸까.”

알베르의 말만 듣고 무작정 찾으러 나온 것이 잘못되었을까.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엘라임은 이미 포기했는지 침대에 널브러졌다.

“뭐 하는 거야?”

그녀가 엘라임을 쏘아보았다. 자신은 열심히 찾는데 놀고 있는 꼴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안 찾아?”

“없는 걸 어떻게?”

그녀는 이를 으득 물고 그의 안면으로 베개를 던졌다.

“안 일어나!”

“쳇.”

엘라임이 툴툴거리며 느릿느릿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헬리아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알았어. 찾으면 되잖아.”

그때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엘라임을 향해 달려왔다.

“차, 찾는다고!”

또다시 베개가 날아올 줄 알고 팔을 들었지만 헬리아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 침대 머리맡으로 올라갔다.

“뭐 해?”

“이건…….”

침대 머리맡의 나무 조각이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헬리아는 잠시 생각을 한 뒤 손을 뻗어 이리저리 조각의 모양을 맞춰 보았다. 그러자 나무 조각이 움직였다.

탁.

엇나간 그림을 맞추자 소리가 났다.

헬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조각의 홈을 열었다. 그녀는 얼른 안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

하지만 그건 유언장이 아니었다.

“왜, 왜 이런 짓을.”

워렌은 손을 떨며 조쉬를 보았다. 조쉬는 웃고 있었다.

“큭큭.”

조쉬의 몸이 흔들렸다. 그가 피를 울컥 한 모금 토해냈다.

“조쉬!”

워렌이 무너져 내리는 조쉬의 몸을 받쳤다.

“어, 어째서?”

워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크큭, 쿨럭!”

워렌은 헬리아와 엘라임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조쉬가 그를 붙잡았다.

“우, 워렌.”

“조쉬…….”

“나는 네가 싫다.”

“너…….”

“너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워렌이 조쉬를 붙들고 주변을 살폈다. 자신에게 따라준 병이 아닌 다른 병이 보였다.

독. 조쉬는 스스로 독을 마셨다.

“해독제는!”

“크큭, 그런 것 따위 없어.”

조쉬는 이미 죽기로 결심했다. 워렌은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꼭 이래야만 했어?”

“크큭, 역시 가짜는 가짜일 수밖에 없는 건가 봐.”

조쉬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헐떡거렸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조쉬!”

“너도 내가 이렇게 된 게 기쁘지?”

“이 바보가!”

“크큭, 네 녀석의 그런 얼굴을 볼 줄이야. 빨리 이랬어야 했어.”

조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가 욕심 부린 거냐?”

“…….”

“너는 다 가졌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조쉬.”

“왜 나는 아니었는데? 난 열심히 했다고.”

“상단주님은 언제나 널 걱정했어.”

조쉬가 비웃었다.

“크크, 그 영감이?”

“…….”

“이제 다 지겨워졌어.”

“조쉬!”

워렌이 조쉬의 몸을 흔들었다.

그때 문을 열고 헬리아와 엘라임이 들어왔다.

“리아! 조쉬가!”

헬리아가 워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워렌이 다급한 눈으로 그녀를 봤다.

“리아!”

헬리아가 죽어가는 조쉬를 내려다보았다.

“복수하지 않을 건가요?”

“…….”

워렌은 고개를 저었다.

“미워할 수 없는 것도 있어.”

헬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존중해 줄 수밖에.

“자요.”

그에게 애쉬튼의 방에서 찾은 것을 보여주었다.

“이건…….”

“애쉬튼의 편지예요.”

워렌이 편지를 받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것을 보며 조쉬가 비릿하게 웃었다.

“크큭! 결국 유언장을 찾은 거냐! 질긴 아버지군.”

“아니야!”

워렌이 조쉬에게 다가가 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조쉬! 너에게 쓴 편지야!”

조쉬의 눈이 커졌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았다.

[조쉬, 미안하구나.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 사랑한다.]

“크, 크큭. 겨우 이런 걸로…….”

조쉬는 편지를 구겨다.

“이런 걸로…….”

조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쿨럭!”

“엘라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조쉬에게 손을 뻗었다. 따스한 빛이 조쉬의 몸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 * *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조쉬는 눈을 떴다.

“여긴…….”

자신의 방이었다. 조쉬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독을 먹었는데 살아 있었다.

“…….”

그는 구겨진 아버지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방이자, 아버지의 방을 훑어보았다.

“바보 같기는.”

조쉬의 시선이 애쉬튼의 초상화로 향했다.

“너무 늦었다고, 아버지.”

조쉬가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떠날 거냐?”

워렌이 조쉬를 보며 물었다. 조쉬가 워렌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그의 성격은 여전했다.

“여긴 네가 있잖아.”

워렌은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조쉬의 얼굴은 개운해져 있었다.

“죽지 마라.”

“안 죽는다.”

조쉬는 그렇게 떠나갔다. 워렌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과실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헬리아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건가요?”

“미워할 수가 없어.”

헬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배신했는데도요?”

워렌이 헬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 한 마디가 그냥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도 배신을 당해 본 걸까. 워렌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생각을 털어냈다.

“머리로는 용서하지 않아도 가슴이 이미 용서해 버렸어.”

“…….”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워렌의 미소에 헬리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헬리아는 순간 레헨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워렌이 조쉬를 생각한 것처럼 그를 오랫동안 진심으로 믿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워렌처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한다면 과연 자신은 그처럼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아직은 마음의 상처가 깊어 용서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헬리아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일해야죠!”

헬리아가 무거운 분위기를 날려 버렸다. 가르안 상단이 무너지자 엘라드 상단은 가르안 상단을 그대로 흡수했다.

그리고 마탑과의 제휴. 활력 포션에서 시작한 작은 가게가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할 만하다.

“이제 시작입니다.”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유수와도 같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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