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42)

제2장 유폐

쨍그랑!

값비싼 도자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벽에 부딪치며 부서졌다. 방 안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깨진 유리와 찢어진 책들. 그럼에도 방을 엉망으로 망친 장본인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계집애 따위가!”

비앙카가 고운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대리 과제 사건으로 헬리아가 곤란해지자 속이 시원했다. 이제는 그 계집이 제 처지를 잘 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헬리아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전처럼 여전히 말이 별로 없고 행동도 비슷했지만, 무언가 달랐다.

특히 그 눈빛. 그 눈이 마치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비앙카는 헬리아의 눈빛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그깟 년 때문에 자신이 움찔한다는 사실에 열이 올랐다. 그 아이를 갖고 노는 건 분명 나여야 하는데, 비참하고 비굴해져야 하는 건 그 아이인데.

벨라도 요즘 이상했다. 그 탐욕스런 암퇘지가 요즘 들어 잠잠하게 헬리아의 비위를 맞추는 꼴이 눈꼴셨다. 어떻게 해야 잘 괴롭힐까. 차라리 눈에 닿는 곳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비앙카는 결국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중년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고혹적인 외모에 짙은 장미보다 더 붉은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린 여인은 고고한 자태로 차를 음미했다. 왼쪽 눈 밑에 난 눈물점은 그녀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어머니!”

불쑥 그녀의 딸이 티타임을 방해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딸을 바라보았다.

“항상 품위를 지키라 말하지 않았느냐.”

비앙카는 그녀의 질책 어린 말에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어머니이자 아르센 왕국의 후궁인 비비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앉거라.”

비앙카가 테이블에 앉자 금세 시녀가 차를 내왔다.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차다. 마시거라.”

“……예.”

비앙카는 자신의 아름다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닮은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비비안 후궁. 그녀는 릴리궁의 주인이자 귀족파의 수장인 아돌프 후작의 여식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지만 실상 양귀비 같은 여자였다. 치명적인 향기에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질식하고 마는 그런 여자.

비앙카는 자신의 어머니가 무서웠다. 그녀 앞에선 결코 빈틈을 보여선 안 됐다. 그녀가 진정되어 보이자 비비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부탁이 있어요.”

“네가 그런 말을 다 하다니, 별일이구나.”

비앙카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헬리아.”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던 비비안의 얼굴이 어느새 바뀌었다.

“후후, 그 천한 계집아이.”

“제 눈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비비안은 딸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아이, 그러나 자신처럼 독을 품은 꽃이었다. 그녀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비비안은 비앙카 못지않게 헬리아 공주를 싫어했다. 자신의 사랑을 빼앗은 여자의 딸. 아직도 그날의 치욕이 생생히 떠오른다. 천천히 파멸시킬 생각이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걱정 마렴.”

비비안의 웃음은 마치 독초 같았다.

* * *

오늘따라 궁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헬리아는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에 결국 잠에서 깨고 말았다. 마침 이 시간에 방을 청소하는 앤과 페이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들이 들고 온 건 청소 도구가 아니라 옷과 장신구였다.

헬리아가 의아해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앤과 페이가 늘어놓은 옷과 장신구를 보며 헬리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앤이 대답했다.

“아이참! 공주님, 제가 어제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뭘?”

기억이 나지 않아 되묻자 페이가 대답했다.

“일주일 뒤에 비앙카 공주님과 헬리아 공주님의 생일 연회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를 대비해 옷을 준비해 두는 거죠.”

페이는 헬리아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찾았고, 앤은 연회에 입고 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헬리아의 인상이 구겨졌다. 헬리아와 비앙카는 1년 터울로 생일이 하루 차이였다. 그래서 생일 연회는 매년 같이하곤 했었다. 하지만 항상 주목을 받는 건 비앙카였고, 헬리아는 덤에 불과했다. 아니, 덤도 되지 않는 혹이었다.

헬리아는 영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생일 같은 건 과거에도 중요하지 않았고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다시 침대로 푹 들어가자 앤이 말렸다.

“공주님!”

“알아서 해.”

“드레스도 골라야 하고 선물도 준비하셔야 해요.”

헬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내 생일인데 웬 선물?”

“그럼 비앙카 공주님께 선물 안 주세요? 매년 주고받으셨잖아요?”

그런 기억 따위 있을 리가. 헬리아는 짜증스러워 머리를 흩뜨렸다.

“페이, 네가 알아서 사. 비싼 거 말고 제일 싼 걸로. 알았지?”

“예?”

“그럼 난 잔다.”

헬리아는 그냥 침대로 파고들었다.

* * *

퍼드드득.

밤하늘을 나는 부엉이의 날갯짓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캄캄한 어둠 속을 누군가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달이 구름에 가려진 틈을 타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이미 누군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마중 나온 이를 따라나섰다.

뚜벅뚜벅.

조용한 복도에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이쪽으로.”

고혹적인 목소리가 그를 이끌었다. 그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안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아름다운 장미 같은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그를 맞았다.

“……저, 정말 제 아버지를 살려주시는 건가요?”

“아아, 그럼.”

떨리는 음성은 여자의 것이었다. 여인은 그녀를 다독였다. 따뜻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외모로. 그녀는 여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받아 보렴.”

서류를 읽은 그녀는 감격했다.

“……아아.”

“네가 일을 잘해 준다면 그건 네 거란다. 할 수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고개를 숙이자 뒤집어썼던 로브가 벗겨졌다. 촛불에 드러난 것은 로즈궁의 시녀 페이였다.

* * *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샹들리에는 불빛에 화려하게 반짝였고, 연회장 가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저마다 값비싼 의복과 장신구로 장식한 귀족들이 파티를 즐겼다. 연회장 가득 모인 사람들은 오늘 공주들의 생일을 축하했다. 정확히는 비앙카 공주의 생일을 말이다. 그들은 비앙카 공주의 외할아버지인 아돌프 후작에게 줄을 대기 위해 공주에게 값비싼 선물을 진상했다.

오늘따라 더 귀엽고 순수하게 꾸민 비앙카는 천사 같은 외모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녀의 꾸며진 미소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시시하군.”

그와 반대로 오늘 생일도 아닌-정확히는 비앙카의 생일 다음 날이 헬리아의 생일이었다-헬리아는 벽의 꽃을 자처하며 그 모습을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리 될 줄 알았다. 그렇다고 아쉽지도 않았다. 헬리아 또한 귀족들의 관심도, 선물도 필요 없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연회장에 참석한 것뿐, 명목상 그녀의 생일잔치가 아니었다면 벌써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희고 고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흰 리본으로 묶었다. 비앙카 못지않게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모두 그녀를 마치 철창 속 원숭이처럼 바라볼 뿐 다가오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헬리아는 따분해졌다. 딱딱한 구두에 벌써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려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건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을 피해 근처 비어 있는 테라스로 들어갔다.

‘음?’

까마귀다. 아니, 언뜻 까마귀인 줄 알았지만 사람이었다. 이곳에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검은 머리를 보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그곳에 홀로 있었다. 열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헬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검은 눈동자. 그는 온통 검었다. 흑안 흑발과 대비되는 흰 피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귀공자. 헬리아는 소년을 딱 그렇게 정의했다. 소년의 표정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눈이 정확히 헬리아를 향했다. 그녀는 한순간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너무나 익숙한 느낌. 어디서 이 아일 봤던 것일까? 그래서 먼저 묻고 말았다.

“어디서 본 적 없어?”

“…….”

소년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헬리아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본 적이 있냐고 물어서인지, 아니면 그가 혼자 있는 걸 방해해서 그런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소년의 입이 열렸다.

“어째서…….”

“공주님!”

그때 테라스로 앤과 페이가 찾아왔다. 연회장에 주인공이 없자 찾은 것이다. 앤은 헬리아를 보자마자 잡아끌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귀찮아.”

이미 소년에게 흥미를 잃은 헬리아는 앤이 이끄는 대로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소년이 자신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헬리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도대체 뭐지?’

“앤, 혹시 저 애 알아?”

“예? 누구요?”

앤이 헬리아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요?”

“……아니, 됐어.”

헬리아는 사라져 버린 소년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었다. 페이가 헬리아에게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건넸다.

“조금 있다가 비앙카 공주님께 직접 드리시면 돼요.”

상자를 받아 든 헬리아가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게 뭐야?”

페이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걸 알아챈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그냥 차예요.”

“근데 왜 이렇게 당황해? 혹시…….”

페이가 침을 꼴딱 삼켰다.

“뭐야, 비싼 거 산 거 아니야? 내가 싼 거 사랬잖아.”

“아, 아니에요. 너무 싼 것 같아서.”

“그래? 그거면 됐어.”

페이의 말에 헬리아는 더 이상 선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멀리서 페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헬리아가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등을 돌렸다.

“국왕 전하와 왕비마마 드시옵니다!”

홀 안 가득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문이 열렸다. 귀족들은 국왕 내외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헬리아도 멀리서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왕과 왕비를 보았다.

‘저 사람이…….’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남자였다. 사십 대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젊은 외모였다. 그는 왕비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왕비인 캐서린은 갈색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여자로 기품과 현기가 흘렀다.

헬리아의 시선이 오랫동안 왕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렸다.

“다른 왕족들인가.”

헬리아는 멀리 왕과 왕비 근처에 있는 왕세자와 2왕자를 볼 수 있었다. 왕세자는 왕과 똑 닮았고, 2왕자는 비앙카와 닮았다.

그때 왕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비앙카 공주와 헬리아 공주의 생일이오. 모두 즐겨주시길 바라오.”

듣기 좋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헬리아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라는 느낌 같은 건 없었다.

“지루하군.”

왕의 연설이 끝나자 선물 증정식이 있었다. 헬리아는 비앙카에게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내밀고는 비앙카가 주는 선물을 받아 바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생일이지만 헬리아는 전혀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 * *

“까아아아악!”

비앙카의 궁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두 비명이 들린 곳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고, 공주님!”

그곳에는 비앙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도, 독입니다!”

시녀의 말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서, 서둘러 의원을!”

온 왕성이 비앙카의 독살 사건으로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얼마 후, 범인이 밝혀졌다.

* * *

“수고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페이의 앞으로 서류 봉투를 던졌다. 페이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녀의 가문 헤일로가의 영지 문서였다. 그녀의 얼굴이 펴졌다.

“가, 감사합니다.”

“마마께서 아주 만족스러워하셨다.”

페이는 이제야 안도했다. 그녀는 서류를 꼭 품에 안았다. 파산으로 영지가 경매에 붙여지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영지를 살리기 위해 돈을 빌리려 했지만, 결국 마련하지 못해 감옥으로 끌려갔다. 페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에게 뜻밖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 결과 그녀는 아버지와 영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헬리아 공주를 배신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가족이 더 소중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페이는 바로 영지로 내려가 조용히 살 생각이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채앵.

검을 뽑는 소리에 페이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째서……!”

쿵!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남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페이의 시체를 보며 비웃었다.

“모든 증거는 없애라는 마마의 분부다.”

그는 그녀의 피가 묻은 서류를 집어 들고 시체 위에 약을 뿌렸다.

치이익!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핏자국뿐. 흐린 하늘을 보아 다음 날이면 그조차도 빗물에 쓸려 사라질 것이다. 남자는 유유히 숲속을 빠져나갔다.

* * *

어두운 방 안에 촛불만이 아스라이 빛났다. 책상에 앉아 얼굴을 파묻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안색은 어둡게 흐려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와 금발을 지닌 남자는 시름에 찬 눈으로 함께 있던 노인에게 말했다.

“헬리아가 범인으로 몰렸습니다.”

헬리아가 선물한 차에 독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해명할 길이 없었다. 비비안 측에 매수된 로즈궁의 시녀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고, 헬리아는 자신의 범행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완벽하게 헬리아 하나를 노리고 꾸민 음모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녀를 변호하는 자는 없었다. 헬리아를 왕국의 오점으로 생각하는 자들이기에 오히려 그녀를 치워 버릴 좋은 기회로 여겼다.

“제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는 자책했다. 그 아이를 자신의 옆에 두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그가 헬리아에게 관심과 애정을 줄수록 아이는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것도 좋지 못한 쪽으로.

“세니아가 살아 있었다면…….”

시름이 깊어만 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흔들리던 눈이 떨림을 멈췄다.

“헬리아를 왕족에서 박탈하겠습니다. 또한 그 아이를 데이지궁에 유폐합니다.”

뼈아픈 결정이었지만 지금 헬리아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그들의 관심에서 떼어놓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금발 사내가 노인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준 사람, 그녀가 남겨준 사람.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노인은 자신보다 어린 사내를 깍듯이 대했다. 단정하게 넘긴 백발에 외눈 안경을 쓰고 까마귀가 새겨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헬리아를 부탁합니다. 곁에서 지켜봐 주세요.”

노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사명은 이 사내를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름진 손을 쓸었다. 점점 노화가 진행되는 몸은 이제 오래지 않아 붕괴될 것이다. 거절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나 사내의 단호한 눈을 보자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 * *

“깨어났느냐?”

비비안의 말에 비앙카는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비앙카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 찌 그러신 건가요?”

“무엇을 말이냐?”

“……죽을 뻔했어요.”

“이미 해독약을 먹지 않았니? 그 정도로 죽진 않는단다.”

“하지만…….”

“죽지 않았지 않느냐.”

비앙카는 웃으며 말하는 어머니에게 치가 떨렸다. 처음에는 분명 약한 독이라고 했다. 아프지 않은 독을 쓴다고. 하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독은 죽고 싶을 만큼 그녀를 괴롭혔다. 아프고, 두렵고, 무서웠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그랬다. 어머니는 지독한 사람이다. 그걸 깨닫고 또 깨달을 뿐이다. 어머니에게 자신은 그저 이용 가치 있는 물건일 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비앙카는 계속 외면해 왔던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네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마.”

“…….”

“그 아이가 왕족에서 박탈되어 오늘부터 데이지궁에 유폐된단다.”

비앙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조소를 흘렸다. 비록 어머니의 차디찬 심계에 심장은 식어버렸지만, 그 소식에 어느 정도 기분은 나아졌다.

하지만 비비안은 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빼돌렸군, 역시 그는…….’

원래대로라면 헬리아는 감옥에 가거나 궁에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왕은 그녀를 내보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천한 세니아의 딸. 비비안에게 세니아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 복수하려 해도 죽어버렸으니 그녀의 분노는 자연스레 세니아의 딸에게 향했다. 이번 결과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럼 자려무나.”

비비안은 비앙카의 방을 빠져나왔다.

* * *

병사들이 로즈궁으로 몰려왔다. 독살 사건 후 헬리아는 자신의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페이의 배신. 그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헬리아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흘러간 사건에 이를 갈았다. 어찌할 방도도 없이 범인으로 몰렸다. 페이 스스로 헬리아 공주의 사주를 받았다 시인했다. 그들은 헬리아가 반론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간의 행적을 보아 그들은 결코 그녀를 믿지 않을 것이다.

왕족의 독살 사건이라 사건 자체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헬리아의 입장에선 조용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똑같았다.

“하, 하하하…….”

헬리아는 웃음을 흘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기 어려웠다.

배신, 배신. 얼마나 많은 배신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병사들이 문을 열고 헬리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흰 머리의 노인이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펴고 입을 열었다.

“헬리아 공주는 오늘부터 왕족의 지위를 박탈하고 데이지궁에 유폐한다. 이는 지엄하신 아르센 국왕의 명령이다.”

왕실 시종장 로드리게의 말에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곧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 이건가. 가만히 있던 대가가 바로 이거란 말인가.’

로드리게가 헬리아의 앞으로 나섰다.

“또한 비록 죄인이긴 하나 공주의 예우로 한 명의 고용인은 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어떠한 것도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

병사들이 헬리아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허탈감. 헬리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밖으로 나가자 시녀들과 시종들이 그녀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그녀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들이 어떻게 되는지가 더 걱정스러운 듯 보였다. 어느 누구도 진정 헬리아를 향해 걱정 어린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몇몇은 그녀를 향해 역시나 천한 핏줄이라 매도하며 오만하고 멍청한 공주님이라 속삭였다.

“하, 하하하…….”

헬리아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러려고 날 여기에 보낸 겁니까?’

하늘은 맑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보자 헬리아는 속이 뒤틀렸다. 이게 세상이라고,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너는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저 가만히, 조용히 살고자 했다. 과거의 배신과 원한을 잊은 채 그렇게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이제는 과거처럼 누군가에게 쫓기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 와서 자신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그러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과거에서 도망쳐도 결국 이것이 현실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살고자 했지만 그걸 망친 건 너희야. 헬리아의 눈이 붉어졌다. 복수할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알려줄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헬리아는 하늘을 등지고 걸어갔다.

* * *

데이지궁. 국왕이 있는 본궁과 호수를 사이에 둔, 왕성의 가장 서쪽 구석에 위치한 궁으로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된 곳이다. 원래 데이지궁은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과거 아르센 왕국의 선조 중 한 명이 책을 좋아하는 후궁을 위해 궁으로 재건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궁이 죽고 궁은 버려졌다. 대부분의 후궁은 책보다는 왕의 총애에 관심이 많았고, 궁에서 멀리 떨어진 데이지궁에 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데이지궁은 백 년 동안 버려지게 되었다.

헬리아는 데이지궁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성인가.’

로즈궁과 비교하면 오히려 큰 편이었지만-원래 도서관이었다고 하니-너무 오래되고 보수가 되지 않아 외관에 손만 대도 부스스 파편이 떨어져 나갔다. 게다가 이름 모를 넝쿨과 풀들이 어지럽게 자라 있었고, 주변에 생쥐까지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아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여기서 살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하지만 궁 밖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환경이니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치우는 데도 며칠 걸리겠어.”

헬리아가 데이지궁을 훑어보고 있을 때 그녀의 앞에 불쑥 한 노인이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그에게 헬리아는 순간 흠칫했지만, 궁에 정신을 파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한 거라고 납득했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세바스찬이라고 합니다.”

세바스찬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칠십 대의 노인이었다. 깔끔한 시종 복장에 하얗게 센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하게 넘겼다.

헬리아는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보았다. 특이하게 검은 까마귀가 조각된 지팡이였다.

“오늘부터 공주님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주 평범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와 느낌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그것이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

‘왜 이런 곳에 왔을까.’

배신과 배신으로 나락을 경험한 그녀이기에 쉽사리 사람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묘한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이 아직 그녀 안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것인지, 일단 그를 받아들였다.

‘뭐 상관없겠지.’

세바스찬이 어떤 사람이든 그녀 스스로 믿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다. 그녀는 세바스찬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연륜이 담긴 미소를 보낼 뿐이다.

“청소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세바스찬도 궁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그녀의 눈이 그의 다리로 향했다.

“다리가…….”

그가 저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일하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몸이 시원치 않군요.”

그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걷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세바스찬은 궁의 내부를 보더니 혀를 찼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궁 안팎으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청소는 제가 하지요.”

헬리아의 말에 세바스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그쪽…….”

“그냥 세바스찬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노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미안했지만 헬리아는 조금 지쳐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시종들에게 반말을 해왔기에 금세 적응했다.

“그럼 세바스찬은 부엌을 맡아주세요.”

“하지만…….”

“이걸 언제 혼자 다 해요? 사람도 얼마 없는데 같이하죠. 게다가 아침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프네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세바스찬이 똑 부러지게 말하는 그녀를 묘하게 바라보았다. 소문과 다른 모습에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세바스찬은 지팡이를 짚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헬리아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데이지궁에 유폐된 첫날. 하루 종일 청소를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어린아이의 몸이지만 헬리아는 지나칠 정도로 튼튼했다. 도대체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된 것인가 궁금할 때도 있지만 좋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어려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치워볼까?”

소매를 걷어붙인 헬리아는 청소에 열의를 불태웠다. 전처럼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였다. 그 변화는 이후 더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궁은 외관보다 내부 상태가 더 심각했다. 궁 안은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백 년 치 먼지가 쿠션을 이루었고, 걸을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얼마나 심한지 먼지가 날릴 때면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입에는 천을 두르고 손에는 장갑을 낀 헬리아는 우선 널브러져 있는 집기들을 모두 밖으로 내다 버리고 먼지를 털었다. 궁이 제법 커서 오늘 하루에 치우기는 힘들 것 같지만 차근차근 치워 나가다 보면 끝이 보일 것 같았다.

“와!”

위층으로 올라가자 수많은 책을 모아둔 방이 있었다. 헬리아는 방을 보고 입을 벌렸다. 역시 도서관을 재건축해서 만든 건물답다. 비록 책들은 관리가 되지 않아 먼지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눈을 빛냈다. 지식은 무기였다. 혹여 제대로 공부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저어했지만 수많은 책을 보고 안도했다. 이 정도면 왕실 도서관보다는 부족하겠지만 공부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헬리아는 그렇게 청소를 하며 데이지궁에서의 하루를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먼지로 더러워진 몸을 말끔히 씻어내고 식탁에 앉은 헬리아 앞에 세바스찬이 조리한 음식을 내려놓았다. 하루 동안 데이지궁 전체를 청소하진 못했지만 그나마 잘 곳과 부엌은 치우는 데 무리가 없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을 보며 헬리아가 세바스찬을 바라봤다.

“재료가 있었어요?”

“식량은 궁에서 보내줍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굶는 줄 알았어요.”

헬리아는 세바스찬이 차린 음식을 먹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가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

“안 드세요?”

“저는 시종입니다. 공주님과 함께 식사를 할 순 없습니다.”

“하하, 공주요? 세바스찬은 제가 공주로 보이나요?”

헬리아의 낮은 목소리에 세바스찬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무언가 바뀌었다.

“어차피 이제 공주도 아니니 그냥 헬리아라고 부르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세바스찬이 단호하게 말하자 헬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노인 알고 보니 의외로 고집쟁이다.

“부르시라니까요.”

“그럴 순 없습니다.”

“…….”

“…….”

“……그럼 마음대로 부르세요.”

노인의 고집은 꺾기 힘들다더니, 결국 헬리아가 한숨을 내쉬고 포기했다. 어차피 호칭이 다 무슨 소용인가. 부르기만 하면 됐지.

“그럼 그 대신 이리 와서 함께 먹어요.”

“그건…….”

“저 혼자 먹으라고요? 솔직히 저 혼자 먹는 거 안 좋아해요. 불쌍한 사람 구제한다 여기고 앉으세요. 혼자 먹다가 체하면 책임질 거예요?”

“……알겠습니다.”

세바스찬이 묘하게 헬리아를 한번 바라보고는 그녀 앞에 앉았다. 하지만 몇 분 후 그녀는 그와 함께 식사한 것을 후회했다.

“그게 아닙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허리를 펴고 앉으세요.”

헬리아는 아직도 음식을 입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먹으려고만 하면 어디가 잘못됐다, 저기가 잘못됐다고 하는데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려 하고 있다.

‘참자, 참아.’

나이 든 사람에게 버릇없이 소리를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부들거리는 입가를 참고 입을 열었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예전에 예절 교육 담당이었습니다.”

“그, 그래요?”

헬리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예절. 물론 그녀도 예절이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과거에 상류층들과 식사를 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예절을 익혔다. 그래서 별로 예절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 전(前) 예절 교육 담당께서는 마음에 차지 않았나 보다. 조심스럽게 세바스찬이 알려준 대로 움직였다.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제 먹어도 되지요?”

“완벽합니다.”

세바스찬은 이제야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헬리아는 이런 노인과 어떻게 사나 싶었다. 그가 또 지적할지 몰라 얼른 입가에 음식을 넣었다. 몸 안에 음식이 들어가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 * *

헬리아는 데이지궁에서 심심치 않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각 층마다 빼곡히 들어찬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무성하게 잡풀이 나 있는 정원을 손질하다 보면 금세 하루가 갔다. 소소하고 편안한 시간들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녀를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 말고 사람이라곤 햇살 아래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세바스찬뿐이다. 헬리아가 원했던 방식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헬리아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헬리아는 수중에 가진 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아르센 왕국이 있는 이곳 레칸 대륙은 마법과 검의 세계였다. 처음 마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실감하지 못했다.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아직도 현실성이 없다. 이곳에서 마법과 검은 힘이었다. 하지만 헬리아에게 그것들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 헬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환경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하아…….”

조금 더 일찍 움직일 것을. 유폐되기 전에 그냥 성에서 나갈 것을. 그런 후회가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헬리아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그 고난 속에서도 역경을 딛고 성공한 여자 아닌가. 포기란 없다.

헬리아는 손에 든 1실버를 보며 다짐했다.

“공주님, 식사 시간입니다.”

세바스찬의 목소리에 사색에 잠겨 있던 헬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세상을 논하는 데 밥은 분명 필요했다.

“……스프가.”

헬리아는 앞에 놓인 희멀건 스프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야채 스프였다. 고기는 없는 걸까, 아니면 유폐된 공주에겐 이것도 감지덕지란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 온 첫날 배식을 받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헬리아가 비록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해 이 성에 갇혀 있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배식을 담당하는 배식관이 와서 식량을 준다. 그런데 그녀가 민감한 건지, 아니면 세바스찬이 좋아하는 요리가 야채 스프인 건지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부실했다. 그냥 이대로 넘어가기엔 성장기 헬리아의 식탐이 견디기 힘들었다.

‘성장기엔 많이 먹어줘야 된다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는지 세바스찬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배식에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하나 다리도 좋지 않은 세바스찬을 보내기엔 헬리아는 노인 공경을 아는 현대인이었다. 결국 헬리아는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다녀올 테니 기다리세요.”

“이건 제 불찰입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세바스찬은 다리가 불편하잖아요? 튼튼한 사람이 가는 게 맞죠. 또 시종이니 공주니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여기 어디에도 공주는 없어요.”

헬리아의 단호한 말에 세바스찬이 결국 한발 물러났다.

“……후우,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걱정 마세요.”

씩씩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헬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세바스찬이 씁쓸하게 웃었다.

* * *

오늘도 릭은 성에서 내려온 식량이 담긴 수레를 보며 탐욕스런 눈빛을 보냈다. 과연 왕성에서 올라온 물건들이라 그런지 일반 시장에서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유폐된 죄인이 있는 데이지궁으로 들어가는 물건이란다.

“죄인 주제에 이런 걸 먹는단 말이지?”

평소 탐욕스러운 릭은 매번 헬리아에게 넘어가는 식량이 못내 배가 아팠다.

“도대체 뭐가 예쁘다고 감히 비앙카 공주님을 죽이려 한 그 계집에게 이런 걸 다 준담?”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리고 장차 왕국 최고의 미인으로 성장할 비앙카 공주의 추종자 중 하나였던 릭은 헬리아 공주가 싫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공주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 핏줄 또한 자신과 같은 평민이 아닌가.

반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식량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는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데이지궁으로 보낼 식량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처음 한 번은 작은 무에서부터, 그다음에는 달걀 한 판. 그리고 점점 양을 늘려가며 식량을 착복했다.

그런데 웬걸? 혹여 탄로 날까 내심 초조했건만 그의 범행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릭은 깨달았다. 바로 이거라고. 변변치 못한 집안의 릭은 날마다 돈을 벌어오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 그런데 돈과 함께 싱싱한 채소들을 함께 가져가자 대우가 좋아졌다. 이제 돈 못 벌어오는 장남이라고 구박하지도 않았다. 가끔 남는 식량은 장에다 내다 팔면서 부수입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릭은 싱글벙글하며 이번에도 데이지궁으로 들어갈 식량의 일부를 자신이 가져온 수레에 몰래 옮겨 싣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반갑지 않은 손님이 그를 찾았다.

“여기 배식관이 누구죠?”

창고 뒤편에서 몰래 식량을 옮겨 담던 릭의 귀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의아해하면서 자신의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초조해 슬그머니 하던 일을 멈추고 앞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탐스런 금발을 곱게 땋은 금안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성에서 그녀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바로 헬리아 공주였다.

릭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헬리아는 창고 뒤편에서 나오는 남자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삼십 대 중반 정도의 갈색 머리 남자가 뭔가 짜증 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상하군.’

헬리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여기 배식관인가?”

“여긴 무슨 일이지?”

반말이었다. 분명 자신이 공주라는 것을 알 텐데도. 헬리아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아주 동네북이군.’

“당신 배식관 맞지?”

“그래서?”

그의 태도는 뻔뻔스러웠다.

“처음과 양이 달라졌어.”

“이상한걸? 나는 분명 제대로 전달했다고. 잘 확인한 거 맞아?”

오리발을 내미는 그의 표정에서 헬리아는 감을 잡았다. 이 녀석 뭔가 있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창고 뒤편에서 나왔다.

“창고 뒤에 식량이 있는 거지?”

헬리아가 성큼 창고 뒤편으로 들어가려 하자 아차 싶은 사내가 그녀를 막았다.

“여긴 들어오면 안 돼!”

“내가 내 먹을 거 본다는데 무슨 문제 있어?”

“하, 보자 보자 하니까. 죄인 주제에 밥이라도 처넣어주는 게 어디야. 감지덕지하고 살아야지.”

“…….”

헬리아가 말을 하지 않자 사내는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졌다. 그는 험한 말까지 쓰며 그녀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감히 비앙카 공주님께 독을 쓴 죄인을 죽이지 않고 왜 살려두는 거람. 살인자에게 법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니야?”

“비켜.”

헬리아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창고 뒤편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내가 그녀를 막기도 전에 식량 수레와 그 옆에 있는 작은 수레 하나를 발견했다.

‘감히 내 것에 손을 대?’

헬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이건 뭐지?”

“하하.”

사내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지만 곧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한 번에 싣고 가기엔 식량이 많아서 나눠서 가려고 했지.”

구차한 변명이었다. 건장한 사내가 들기에 헬리아가 배정받은 식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발하겠어.”

전처럼 그냥 있지 않을 거다. 헬리아는 결심했다. 뒤로 물러나지 않기로.

“하! 고발한다고? 네가 무슨 수로? 넌 여기서 못 나가.”

“…….”

사내의 말에 그녀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 모습에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이, 너 범죄자라고, 이런 곳에 유폐된. 그런데 너 같은 녀석의 말을 들어줄까? 이래 봬도 나 이곳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네 말을 들어줄까, 아니면 내 말을 들어줄까?”

그가 비열하게 웃었다. 헬리아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식량을 돌려줘.”

“내가 왜?”

“…….”

말이 통하지 않는 사내였다. 헬리아는 달려가 식량이 담긴 수레를 잡고 끌었다.

“내가 먹을 건 내가 가져가겠어.”

“이게!”

멋대로 수레를 끌고 가려 하자 당황한 사내가 그녀를 밀쳐 냈다.

“윽!”

헬리아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상대는 성인 남자였다. 그가 밀치자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부딪친 장소가 좋지 못했는지 바닥에 있던 돌에 그만 이마가 찢어졌다.

뚝, 뚝.

쓰라림에 헬리아가 이마에 손을 댔다. 축축한 피가 만져졌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 어이.”

릭이 당황해 허둥거렸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가 물러나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는 짐짓 허세를 부렸다.

“그,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했잖아!”

“…….”

헬리아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헉!’

그녀의 눈은 인간의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금안은 더없이 짙게 빛났고 마치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길게 찢어졌다. 고양이? 아니다. 릭은 정정했다. 그건 맹수의 눈이었다. 섬뜩한 기운이 그를 옭아맸다.

‘무, 무슨 눈빛이!’

릭이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헬리아는 피를 보자 오히려 분노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느낌에 속이 부글부글 용암처럼 끓었지만 머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다시는 내 식량에 손대지 마.”

낮게 으르렁거리는 말에 릭은 순간 멍해져 저도 모르게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헬리아가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릭은 그녀가 사라진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도, 도대체 뭐지?”

아직도 팔뚝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덜컹덜컹.

헬리아는 릭에게서 빼앗은 수레를 끌고 터벅터벅 자신의 궁으로 걸어갔다. 성인 남자의 손길은 어린 여아의 약한 살갗을 쉬이 찢어놓았다. 입술은 피로 번들거렸고 이마에는 길게 딱지가 생겼다. 곱게 땋았던 머리는 이미 풀려 산발로 바람에 흔들렸고, 손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헬리아는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건 뭐였지…….”

생경한 느낌이었다. 헬리아는 심장에 손을 댔다. 여전히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까의 그 느낌.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분노를 느껴본 적도, 그런 식으로 표출해 본 적도 없었다. 자신의 피를 보았기 때문일까? 차갑게 식어 내리는 고요한 분노가 한순간 헬리아의 몸을 휩쓸었다.

“뭐, 아무렴 어때.”

너무 화가 나서 그랬나 보다 하고 생각을 떨쳐 냈다.

헬리아는 이마를 살짝 만지다 바로 느껴지는 아픔에 인상을 찌푸렸다. 크게 흉질 것 같지 않지만 이 일을 세바스찬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넘어졌다고 할까.”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어떤 변명을 할지 고민하는 사이 데이지궁에 도착했다.

세바스찬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

그가 그녀를 보더니 놀라 뛰어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지팡이도 팽개친 채 뛰었다. 그가 그녀의 꼴을 보더니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헬리아는 그런 모습이 너무 낯설어 흠칫했다.

세바스찬이 낮게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나 헬리아가 세바스찬의 팔을 잡았다. 세바스찬은 그녀의 손길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 어디에도 상처 입은 어린아이는 없었다. 그녀의 금안은 누구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잘 해결됐어요.”

“공주님의 몸에 피가 났습니다. 이건 식량 문제와 차원이 다릅니다. 결코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냥 사고였을 뿐이에요.”

“공주님!”

“말했죠, 전 이제 공주가 아니라고.”

너무도 단호하게 나오는 그녀의 태도에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세바스찬은 순간 그녀가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기백과 말투, 눈빛까지. 뛰쳐나가려던 그의 발이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세바스찬의 시선이 헬리아에게 향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헬리아는 세바스찬이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자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부탁할게요.”

“공주님…….”

“세바스찬.”

헬리아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그래서 세바스찬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한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헬리아가 싱긋 웃었다. 하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릭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번 돈맛을 안 이가 쉽게 제대로 식량을 줄 리 없다. 아마 릭은 다음에도 식량을 빼돌릴 것이 분명했다.

“……후우, 우선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이러다 흉 지겠습니다.”

세바스찬은 우선 헬리아를 안으로 들이고 약상자를 가져와 그녀의 이마를 치료해 주었다. 헬리아는 상처를 치료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의 예상대로 릭은 다시 식량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 * *

쾅!

“뭐라고!”

왕실의 식량을 담당하는 관리인 데인이 책상을 내려쳤다. 그 앞에 선 하급 관리 로스가 떨며 입을 열었다.

“확인했습니다. 게인이라는 자가 매달 일정량의 식량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데인이 화가 나 소리쳤다. 그는 평소 깐깐하기로 소문난 성격으로 자신이 맡은 일은 무조건 완벽해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이제 막 새로 관리인으로 부임한 데인은 사명감에 불탔다.

“오늘 모든 곳을 시찰한다!”

“예, 옛!”

로스는 땀을 삐질 흘리며 데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궁에 가져갈 식량을 받으러 관리청으로 들어간 릭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평소 알고 지내던 호트를 불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야, 못 들었어?”

호트는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완전 뒤집어졌잖아. 그 게인이라는 자 있잖아, 그놈이 식량을 빼돌렸다가 된통 걸렸대.”

뜨끔.

릭이 움찔했다.

‘설마 걸린 건 아니겠지?’

당황한 릭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그때 멀리서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보았다. 이번에 식량을 빼돌린 혐의로 체포된 게인이었다.

“끌끌, 이제 인생 종쳤지 뭐야. 이번 관리인으로 온 데인이라는 자 엄청 깐깐하다고 하더라. 다들 급하게 수습하느라 바쁘대.”

“끄, 끝이겠지?”

“끝은 무슨, 이제 시작이지. 아주 눈에 불을 켰다던데. 오늘 하루 전체 시찰 들어간다고 하더라.”

“…….”

“야, 야! 어디 가?”

릭은 서둘러 데이지궁의 식량 창고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헉, 헉.”

창고로 온 릭은 숨을 몰아쉬었다. 혹여 들킨 게 아닌가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이내 조용한 창고에 안심하고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들킬 리 없지.”

이곳은 궁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이다. 더구나 누가 유폐된 공주의 성까지 감찰하러 오겠나. 그래, 오지 않을 거다. 릭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창고를 나오다 기겁했다.

“헉! 너, 너!”

헬리아가 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네, 네가 왜?”

“오늘 식량 주는 날이지? 오늘은 그냥 물러나지 않아.”

릭은 초조해졌다.

‘젠장, 왜 하필 오늘!’

어서 빨리 헬리아를 돌려보내야 했다. 만일 관리인이 이곳으로 온다면? 릭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야, 야. 얼른 가!”

“식량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가지 않을 거야.”

아주 막무가내였다. 그때 릭의 귀에 사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배식관이 누군가!”

관리자인 데인의 목소리였다.

“자네가 여기 배식관인가?”

“예, 옛!”

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필 이때 올 게 뭐람! 설마하니 감독관이 이런 곳까지 올 줄 몰랐다.

“그런데 이 꼬마는?”

데인의 시선이 헬리아를 향했다. 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헤, 헬리아 공주님입니다.”

“아, 그 데이지궁에…….”

데인은 다시 헬리아를 바라봤다. 그에게 그녀가 유폐된 공주라는 사실은 아무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식량 문제뿐이었다. 다만 궁금한 건 궁에 있을 그녀가 왜 여기에 있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그게…….”

릭의 속이 타들어갔다. 여기서 헬리아가 입만 열면 자신은 감옥행이었다. 머릿속으로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게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이제 끝났어!’

릭이 포기하려 할 때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이 헬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냥 고맙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음?”

“엥?”

데인과 릭 모두 표정이 멍해졌다.

고맙다니? 릭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헬리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릭이 언제나 싱싱한 음식을 잘 전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호오.”

데인이 다시 릭을 바라봤다. 릭은 어리둥절해 머리를 긁적였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릭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꼬마가 갑자기 약이라도 먹었나?’

“그거 참 귀감이 될 만한 자였군.”

데인은 이전까지 바닥을 치고 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곳에 오기까지 여러 곳에서 비리를 적발한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데인의 웃음에 릭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하,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래, 식량을 받는 사람이 이리 고맙다고 할 정도면 안 봐도 충분하구먼. 잘하시게.”

데인이 릭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릭은 그의 손이 마치 망치라도 되는 듯 두들길 때마다 움찔했다.

“그럼 이만 나는 바빠서.”

“사, 살펴 가십시오.”

릭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데인이 저만치 사라지자 그는 지쳐 쓰러졌다.

“하아.”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오히려 이 일이 인사에 반영되어 월급이 오를지도 모른다. 릭이 흘깃 헬리아를 바라봤다.

“왜, 왜 그런 거야?”

헬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릭에게 다가갔다.

“고맙지?”

“…….”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아?”

“그, 그럼 설마!”

릭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내가 말만 하면 넌 끝이야.”

“뭐, 뭘 어쩌려는 거야?”

“이제부터 돈 좀 벌어 보려고.”

헬리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덜컹덜컹.

수레에 가득한 음식을 보며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아마 앞으로 릭은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왕궁에서 벌어진 식량 비리 사건의 시작은 헬리아였다. 헬리아는 세바스찬에게 부탁하여 누군가 식량을 빼돌린다는 상소를 올렸다. 다행히 세바스찬이 올린 상소는 데인에게 전달됐다. 갓 부임한 데인의 세심한 성격 덕분에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식량을 빼돌린다고 투서는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그녀가 알고 있는 건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는 곳은 없다’였다. 그래서 아무 곳이나 찔러봤는데.

빙고! 이번 일은 운이 좋았다. 벌집을 쑤신 것처럼 난리가 났고, 그 불똥이 릭에게까지 튀어 결국 헬리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몰고 갈 수 있었다.

* * *

식량을 건네주러 온 릭을 맞이한 것은 헬리아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릭이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작고 흰 손이 척 그에게 내밀어졌다.

“돈은?”

“우선 식량부터 받으라고.”

릭은 이 어린 돈 귀신에겐 진절머리가 났다. 그녀는 식량보다 돈에 더 집착하는 것 같아 보였다. 릭이 주머니에서 식량 판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자.”

헬리아는 그것을 받아 꼼꼼히 확인하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영수증.”

“칫!”

깐깐하기는. 열 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하나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여기.”

릭이 건네준 영수증을 살피던 그녀의 미간이 살짝 올라갔다.

“1실버.”

“왜?”

“내놔.”

“…….”

“얼른.”

헬리아가 그 작은 손을 내밀었다.

‘이 빈틈없는 계집.’

릭은 툴툴거리며 마저 1실버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가면서 간식이라도 사 먹을까 했는데 액수가 틀린 것을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좋아, 그럼 다음에도 부탁해.”

헬리아가 그제야 얼굴을 펴고 환하게 웃었다. 웃을 때만큼은 영락없는 열 살 어린아이다.

릭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길을 돌아갔다. 어린아이에게 쥐여 사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주머니에 두둑한 공돈에 표정이 밝아졌다.

헬리아는 릭이 준 돈을 자기 방에 있는 상자에 잘 넣어두고 궁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멀리 높은 성벽이 보였다. 이곳 데이지궁은 유폐 생활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생활 반경이 넓었다. 물론 밖으로 나갈 순 없지만 릭이 있는 창고에서부터 주위 성벽까지는 지키는 병사들이 없었다. 그래서 헬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결국 새장 속. 그녀는 결코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탈출을 생각했다. 하지만 곧 단념했다. 자신은 아직 열 살 어린아이. 그녀에겐 밖이 더 위험했다. 아직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아무 준비 없이 나갈 순 없었다.

그래서 헬리아는 돈이 필요했다. 분명 이곳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돈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세상이다. 지금 헬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알아갈 시간과 돈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지.”

헬리아는 주변을 돌아보며 세바스찬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보니 부엌에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성벽으로 걸어갔다. 성벽 위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헬리아를 찾아내진 못했다.

‘분명 빠져나갈 곳이 있을 거야.’

헬리아는 성벽 근처를 맴돌며 주변을 살폈다. 하나 개구멍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벌써 시간이 한참이 지나가 버렸다. 헬리아는 결국 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나가는 길이 있을 텐데…….”

데이지궁은 엄연히 궁. 결코 감옥이 아니었다. 모든 궁에는 비상시를 대비해 비밀 통로가 있게 마련이다. 로즈궁에도 몰래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었다. 헬리아는 지금 그것을 찾기 위해 온 방을 돌아다니며 혹여 장치가 없나 살펴보았다.

“어디에 있지…….”

방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비밀 통로라고 생각되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젠장, 정말 없는 건가.’

자신의 방은 물론이고 책방도 모두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다.

“다 찾아봤는데……. 아, 부엌!”

헬리아는 세바스찬이 요리하고 있는 부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부엌은 아직 조사해 보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기 때문에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뿐인데…….”

왠지 느낌이 왔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바로 세바스찬이었다.

“공주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세바스찬이 지팡이를 짚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헬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배가 고파서요, 뭐 좀 만들어 먹을까 하고.”

“그런 일은 이 늙은이에게 맡기시죠.”

“하, 하하. 그럴까요?”

어쩔 수 없이 일보 후퇴.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세바스찬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상한 할아버지. 헬리아는 세바스찬을 이렇게 정의했다. 분명 무언가 있다. 하지만 도통 그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왜 저 평범한 늙은 시종이 신경 쓰이는 걸까.

결국 그녀는 밤에 다시 오기로 했다.

캄캄한 밤이었다. 밤하늘 위로 휘영청 밝은 달 덕분에 불이 없어도 앞이 훤히 보였다.

달칵.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으스스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헬리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발뒤꿈치를 들어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비밀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지쳐 갔다.

“여기가 아닌가…… 음?”

이제 그만 포기하려는 찰나, 유독 잡동사니가 많이 쌓인 곳에 눈길이 갔다. 저렇게 복잡하게 물건을 쌓아놨다가 실수로 넘어뜨리면 어쩌나 싶었다. 세바스찬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헬리아는 내일 꼭 저 물건들을 다른 곳으로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혹시나 기대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냄비가 달빛에 비친 거였다.

“괜히 기대했네.”

실망한 헬리아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음?”

그런데 잡동사니 뒤로 달빛에 반짝이는 문고리가 보였다. 그녀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혹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문이었다. 한데 문제는 잡동사니가 문 앞을 막고 있었다는 거였다. 지금 이걸 치웠다간 세바스찬이 들을 수 있었다. 헬리아는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집주인이 제 맘대로 돌아다니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헬리아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아주 조심스럽게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세바스찬은 나이가 많아서 소리를 잘 못 들을 거야.’

하나둘 잡동사니를 치우자 역시나 문이 나왔다.

“빙고!”

헬리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삐거덕.

뻑뻑한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긴 통로가 드러났다. 하지만 캄캄해서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부엌에 있는 램프에 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자 통로 끝에 있는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었다.

“이거 큰데?”

문 안에는 좀 더 큰 통로가 드러났다. 이 정도면 작은 수레는 쉬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유레카를 외치며 그녀는 조금씩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십여 분쯤 걸었을까. 헬리아는 끝이 보이지 않자 그만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때 그녀 앞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게 마지막 문일 거라고.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어느 방이었다.

“여기가 아닌가?”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어?”

그때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헬리아는 순간 놀랐지만 조심스럽게 램프를 벽으로 가져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램프를 끄고 창밖을 바라봤다.

달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문을 찾았다.

끼이익.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데이지궁을 가로막은 성벽이었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헬리아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지궁의 비밀 통로는 성벽 밖 외진 곳의 오두막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과 번화한 시장까지는 거리가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 몰래 다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쿨럭쿨럭.”

오랫동안 방치된 통로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온몸에 뒤집어쓴 먼지 때문에 절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에취!”

갑작스레 터진 재채기에 얼른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세바스찬에겐 들리지 않겠지만 저 혼자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안심하고 서둘러 부엌을 나가려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히익!’

세바스찬이 등불을 들고 부엌 입구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헬리아는 속으로 기겁했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혹여 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까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나마 어두운 밤이라 그녀의 몰골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왜…….”

의심의 눈초리에 헬리아가 다급히 말을 지어냈다.

“그, 그게 배가 너무 고파서요.”

꼬르륵.

구차한 변명이었지만 적절한 음향 덕분에 믿을 만한 이야기로 둔갑했다. 헬리아는 때마침 울린 배꼽시계에 안도했다.

“…….”

세바스찬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나 헬리아는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했다.

“역시 식량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뇨, 잘 해결됐으니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녀의 말에도 세바스찬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서둘러 잠자리에 드시지요.”

“그럼 들어갈게요.”

헬리아가 종종 걸음으로 방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세바스찬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 * *

일주일에 한 번 식량을 가져오는 릭을 기다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수레를 끌고 오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사람이 바뀌었나요?”

깐깐하게 생긴 사십 대 남자였다. 그는 헬리아를 보더니 말했다.

“전임 배식관은 진급해서 다른 곳으로 배정받았습니다. 오늘부터 데이지궁의 식량 배식을 맡은 에븐입니다.”

헬리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진…… 급이라고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집히는 건 있었다.

‘젠장, 덜 칭찬했어야 했는데.’

헬리아는 뼈아픈 실수에 살짝 눈물을 떨궜다. 릭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위해 했던 조치가 그만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식량 비리 사건이 터진 후 데인은 비리를 저지른 담당자를 속속 갈아치웠다. 그러면서 빈자리를 다른 인물들로 채워 넣었는데, 헬리아의 칭찬으로 데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릭은 더 좋은 곳으로 배정되었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새로운 배식관인 에븐을 바라보았다. 릭과 전혀 다른 타입으로 한 치의 틈도 용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이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헬리아는 식량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머리를 헤집으며 혀를 찰 때 뒤로 세바스찬이 다가왔다.

“이번엔 식량이 제대로 왔군요.”

“…….”

“소문을 들어보니 저 에븐이라는 자는 굉장히 꼼꼼한 자라고 합니다. 이전 같은 실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겠죠.”

헬리아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헬리아가 방 안을 불안하게 왔다 갔다 움직였다. 간혹 창문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이기도 했다.

톡톡톡.

그녀가 의자에 앉아 책상을 두들겼다.

“어떻게 한담?”

헬리아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비밀 통로를 찾았다. 그러나 부엌에는 항상 세바스찬이 있었고, 밤에 몰래 들어가려 할 때마다 번번이 그에게 걸리는 바람에 다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못 나가겠어.”

세바스찬 몰래 나가려 했지만 그가 알고 버티는 건지, 아니면 모르고 그러는 건지 도통 틈을 주지 않았다.

“방법을 강구해야 돼.”

결국 그녀는 세바스찬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또르르륵.

세바스찬이 찻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헬리아는 뜨뜻한 찻잔을 손으로 움켜쥐며 찻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

말해도 좋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녀가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이 벌써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일은 세바스찬이 마음먹기에 따라 그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 결정을 내렸다. 그녀에겐 조력자가 필요했다. 최소한 그녀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사람이.

‘괜찮을까?’

헬리아를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와 지낸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칠십 대의 흰 머리 노인은 때때로 수상하기도 했지만, 함께 지내면서 본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살펴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궁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지, 외롭지는 않는지, 언제나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말하지 않아도 신경 써주었다.

그녀는 이제는 흉터가 사라진 이마를 짚었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던 세바스찬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과 함께 유폐된 것으로 보아 그도 보잘것없는 신분일 것이다. 하나 만약이라는 게 있다. 그 만약 때문에 헬리아는 이제까지 그를 믿지 못했다. 그렇지만 릭이 사라진 지금, 그녀에겐 누군가가 필요했다.

헬리아가 찻물을 한 모금 마시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세바스찬.”

“예, 공주님.”

“저는 이렇게 평생 살 수 없어요.”

“…….”

세바스찬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헬리아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다음 말을 골랐다. 과연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일까?

“여길 나갈 거예요.”

“그게 무슨…….”

역시나 크게 놀랐는지 평소 근엄하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굳은 결의에 세바스찬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헬리아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초조하게 떨렸다.

“……그렇군요.”

세바스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엔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곳을 떠나는 게 공주님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정말인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살 만큼 산 노인.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았습니다. 공주님께서는 마음 놓고 떠나시면 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바스찬, 공주님이 어딜 가시든 함께할 겁니다.

“…….”

헬리아는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준 것이다. 게다가 함께해 준다고 한다.

‘그래, 믿어 보자. 그냥 조금만, 필요한 만큼만 믿는 거야.’

아직까지 완전히 사람을 믿기에 그녀의 상처는 깊었다.

“세바스찬.”

“예, 공주님.”

“저 안 나가요.”

그녀는 조금 옅게 웃었다. 잘 웃지 않은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자 제 또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농담은 아니에요. 지금 나가지 않을 거란 소리지 나중엔 반드시 나갈 거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세바스찬이 귀를 기울였다.

“돈을 벌 거예요.”

“하나 여기는…….”

“부엌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어요. 돈을 벌고 충분한 준비가 되면 그때 나갈 거예요. 반대하실 건가요?”

헬리아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그녀의 긴장을 무색케 하는 인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공주님 편입니다.”

“……고마워요.”

‘아직 완전히 믿진 못하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헬리아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하면 어떻게 돈을 벌 생각이십니까?”

헬리아는 계획을 말했다.

“밖에 나갔을 때 시장까지 간 적이 있어요.”

“공주님!”

세바스찬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는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인지하게 된다.

“그냥 잠깐 나갔다 온 것뿐이에요.”

“밖은 공주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위험한 곳입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잘할 수 있어요.”

세바스찬이 물끄러미 헬리아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 무엇을 하실 겁니까?”

“식량을 팔 거예요. 가뭄이 들어 채소값이 많이 올랐더라고요.”

“장사를 하실 건가요?”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불가합니다.”

“세바스찬!”

세바스찬의 반대에 헬리아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가 반대하자 시무룩해졌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잘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만 해요.”

헬리아의 금안과 세바스찬의 눈이 마주쳤다.

“…….”

“……세바스찬.”

결국 세바스찬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그럼!”

“단, 저도 함께 갑니다.”

“그건 안 돼요.”

궁을 비워둘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걸 해결해 줄 사람이 남아 있어야 했다. 게다가 세바스찬은 다리를 절었다. 그런 노인과 함께한다면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세바스찬은 한숨을 내쉬고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군요. 다만 제 조건을 충족하신다면 원하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헬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뭐죠?”

“지식을 쌓을 것, 그리고 제게 간단한 호신술을 배울 것.”

지식은 그렇다 해도 호신술이라니? 헬리아가 어리둥절해하자 세바스찬이 덧붙였다.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 그러시다면 제 조건을 무시해도 됩니다. 어차피 저는 일개 시종일 뿐이니 공주님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싸늘한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가 골똘히 생각했다.

‘공부야 원래 해야 하는 거고, 이참에 호신술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헬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견 따위 무시해도 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알겠어요, 조건을 따를게요.”

“감사합니다.”

세바스찬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곳에 함께 온 단 한 명의 시종이 그라는 것에 안도했다.

“잘 부탁합니다.”

헬리아는 세바스찬을 향해 웃었다. 그러나 그 조건을 채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그다음 날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세바스찬의 조건은 혹독했다. 가볍게 생각했던 헬리아는 죽도록 고생했다. 지팡이까지 짚는 칠십 대 노인이라고 만만하게 봤던 것이 화근이었다.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로즈궁에 있을 때도 가정교사를 두었었고, 이곳에 와서도 틈틈이 해왔기에 무리 없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호신술은 달랐다. 세바스찬은 호신술을 배우기에 앞서 체력을 길러야 한다며 궁 주위를 몇 바퀴씩이나 뛰게 했다. 공부에 왕도가 없는 것처럼 몸을 단련하는 데도 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바퀴가 두 바퀴가 되고, 세 바퀴가 되고, 열 바퀴가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헬리아는 자신의 체력에 경의를 느꼈다. 아무리 어린아이지만 이 정도로 소화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세바스찬은 별로 놀랍지도 않은지 더욱 몰아붙였다.

그에게 예절 선생이 어떻게 이런 지식까지 알고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귀족 대부분이 호신술로 기본 무도를 배우기 때문에 자신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해 그녀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헉, 헉.”

헬리아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세바스찬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와 수건을 건넸다.

“잘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잡히지 않을 정도는 되겠군요.”

“싸우는 게 아니고요?”

“그 정도로 어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공주님께서 필요한 건 싸우는 게 아니라 싸움을 회피하는 기술입니다.”

“그게 뭐야!”

헬리아는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이제까지 죽도록 노력한 게 그나마 도망치는 정도란다.

“최고의 방어는 피하는 겁니다.”

그 말에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 * *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자, 물건을 파는 상인, 달려가는 아이들까지. 헬리아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건 인식했지만, 궁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던 그녀는 크게 와 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본 세상은 놀라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이곳은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완벽히 다른 세계라는 것을.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나 돌아간다 해도 그녀를 반겨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더 쓸쓸해진 헬리아였다.

“으차!”

착잡한 기분을 떨쳐 내고 기지개를 켰다. 세바스찬의 조건을 들어주기 위해 헬리아는 혹독한 공부와 수련을 해야 했다. 비록 수련은 어려웠지만 세바스찬과 공부하면서 그의 방대한 지식에 놀랐다. 그는 무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여러 모로 좋은 선생이었다. 평범한 노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행동, 말, 지식. 믿기로 했지만 정말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덕에 지식은 물론 어느 정도 몸을 지킬 힘도 얻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헬리아는 식량을 담은 바구니를 메고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은 짧게 싹둑 잘랐고, 가지고 있던 옷 중에 가장 허름하고 평범한 옷을 입었다. 그래놓고 보니 정말 남자아이 같았다. 어린아이여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나을 거라는 세바스찬의 말에 결국 이렇게 변장하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자를 때 세바스찬이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머리카락은 또 기르면 그만이다.

헬리아가 팔 수 있는 식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녀가 직접 시장에 나온 것은 단순히 식량을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무엇보다 시장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헬리아는 한적한 곳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무얼 하나 관심 있게 지켜보던 사람들도 아이가 싼 가격에 채소를 파는 것을 보고는 금세 그쪽으로 몰려갔다. 몇몇 상인은 그녀를 불편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파는 양이 적은데다 제법 귀엽게 보여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다. 헬리아는 주변 상인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싫어하는 어른은 별로 없던지 흔쾌히 인사를 받아주었다.

“역시 사람은 우선 예쁘고 봐야 해.”

헬리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에 감사했다. 그녀는 외모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영업에 예쁜 게 장땡이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게 그녀의 바구니는 비었고, 주머니엔 두둑이 돈이 담겼다.

* * *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온다는 말이 있다. 헬리아가 장에 나가 식량을 판 지도 일주일. 오늘따라 상인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옆에 장신구 가게를 하는 아줌마에게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다들 표정이…….”

“에구머니, 너 아직도 있었니? 얼른 가렴!”

아주머니가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급하게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리아가 영문을 몰라 우물쭈물거리고 있을 때 그들이 나타났다.

콰앙!

좌판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과일이 바닥에 떨어져 볼품없이 부서졌고, 세 명의 사내가 과일 가게 주인을 둘러쌓다. 한 명은 붉은 머리에 키가 작았고, 다른 이는 거대한 몸집에 둔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마른 체형에 실눈을 뜬 자가 서 있었다.

“어이, 장사 한두 번 해? 돈 안 내놔?”

“저, 정말 돈이 없습니다.”

“허이구, 그럼 이건 뭐야?”

붉은 머리 사내, 불쥐는 상인의 품에서 돈을 찾아냈다. 적은 양이었지만 거짓말한 것이 괘씸해 과일 가게 주인을 후려쳤다.

“거짓말은 나쁘다고. 어이, 흑곰. 어서 시작해.”

거한의 사나이가 과일 가게를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은 울먹거리며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거대한 몸집의 흑곰을 막을 순 없었다.

“어이구, 제발!”

과일 가게 주인은 불쥐의 다리를 붙잡으며 사정했다. 그러나 그는 짜증 난다며 상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악!”

“이게 정말. 야, 다 했으면 그만 가자.”

흑곰이 지나간 자리엔 온통 과일이 부서져 있었고, 가게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가게 주인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힘들게 번 돈을 빼앗긴 것은 물론 오늘 팔아야 할 물건도 모두 저들에게 망가져 버렸다.

흥분에 잔뜩 몸이 달아오른 불쥐는 다음 목표물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의 눈에 헬리아가 포착됐다. 불쥐가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어이, 꼬마. 너 여기서 장사하냐?”

헬리아가 펼쳐 놓은 식량을 발로 툭툭 차며 비웃었다. 그녀는 화가 났지만 입을 다물었다. 저들과 같은 존재는 과거에도 있었다. 굳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저들을 막을 힘도 없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과일 가게 주인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다들 눈치만 볼 뿐 그녀를 외면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웃고 지낸 사이지만 조금 씁쓸해도 이런 게 현실이다.

“장사하면 안 되나요?”

세게 나가나 약하게 나가나 저들은 이미 헬리아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 거다. 그렇다면 굳이 비굴하게 나갈 필요 없었다. 그녀는 그들 몰래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쥐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는 아이를 싫어했다. 특히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더 싫었다.

“그럼 자릿세를 내야지.”

“법에는 그런 거 없는데요.”

“큭큭큭, 법이 가까운지 내 주먹이 가까운지 시험해 볼래? 야, 흑곰.”

“으응.”

거대한 몸집만큼 둔한지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한 흑곰이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그와 비교해 헬리아는 마치 난쟁이처럼 보였다.

헬리아는 떨지 않고 침착하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때 그녀의 시선에 경비대가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 행동하진 않았다.

‘젠장.’

비리가 판치는 세상은 거기나 여기나 똑같았다. 하지만 헬리아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지금 돈이 없는데요?”

“뭐야? 돈도 없이 남의 땅에서 장사해? 죽고 싶어?”

‘이때다!’

“죽긴 누가 죽어!”

헬리아가 바구니를 불쥐에게 던졌다. 불쥐는 방심했는지 그만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헬리아는 흑곰의 다리 사이를 쏙 빠져나가 바로 경비대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경비대가 저들과 손을 잡았어도 코앞에서 상황이 닥치면 가만있진 못할 거다. 헬리아가 전속력으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경비대원들은 헬리아가 자신들에게로 뛰어오자 당황했다. 어리지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체력이 남다른 그녀는 경비대가 있는 곳으로 금세 뛰어갈 수 있었다. 멀리 잔뜩 화가 난 불쥐와 흑곰, 뱀눈이 달려오고 있었다.

“야, 이 꼬마가!”

불쥐가 잔뜩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러나 뱀눈이 경비대원들을 알아보고 그의 팔을 잡았다.

“경비대야.”

“……젠장, 영악하기는.”

아무리 그라도 경비대와 마찰을 빚는 것은 껄끄러웠다.

“쳇, 재빠른 새끼.”

헬리아는 경비대 사이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비대는 그들이 다가오자 당황했지만, 자신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슨 일이지?”

경비대원 중 한 명이 말하자 세 명은 썩은 표정을 짓고는 결국 돌아갔다. 경비대원도 그들이 가자 한숨을 내쉬었다. 인스턴 조직은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조직 단체였다. 그들이 경비대원이라도 부담스러웠다.

“음? 그 꼬마는 어디 갔지?”

잠시 뒤 헬리아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후우…….”

궁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온 헬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일촉즉발이었다. 그녀는 경비대 사이로 숨어들었다가 그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할 때 바로 자리를 피했다. 경비대도 그리 믿을 건 못 됐다.

“마주치질 않길 빌어야지…….”

암만 봐도 그들은 잔뜩 뿔이 난 상태였다. 특히나 그 못되게 생긴 불쥐는 쉬이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재수 없게도.

“자리를 옮겨야 하나.”

어쩔 수 없지만 내일부터는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뭐, 걸리지만 않으면 되겠지.”

헬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악연은 쉬이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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