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2)

제1장 환생

어린아이가 있었다. 다섯 살 남짓이나 되었을까. 금발의 여자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는 언제나 혼자였다. 아이는 외로웠고, 외로운 만큼 한 여인에게 매달렸다. 아이의 눈은 언제나 그 여인을 향해 있었다. 아이를 똑 닮은 아름다운 금발과 금안을 지닌 여자. 아이는 해바라기처럼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리워했다. 그러나 여자의 눈에 아이는 없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은 오로지 여자의 등이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아이는 성장했다. 하지만 항상 웃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아이의 눈에 젊은 여자 대신 금발의 남성이 비쳤다. 아이의 눈은 언제나 그를 좇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은 그저 자신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눈동자에 그 자신의 얼굴이 비추었을 때, 세상은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다.

* * *

세상이 뒤집어졌다.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추웠다. 여기가 어디인가. 자신은 죽은 걸까?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그녀는 몸부림쳤다. 살고 싶었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아도 살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팔다리를 움직였다. 이곳이 지옥의 수렁이라면 빠져나오리라. 그리하여 복수하리라.

그때 빛이 보였다. 일렁이는 불빛을 따라 안간힘을 다해 헤엄쳤다. 그 빛이 구원인 것처럼.

“쿨럭!”

기도를 막고 있던 물을 뱉어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차가웠지만 기뻤다.

‘살아 있구나.’

폐부에 스며드는 공기가 반가웠다. 그런데 어째서 물속에 있었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어 있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뿌옇던 시야가 깨끗해지고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 여긴 어디야?”

빌딩이 있어야 할 곳엔 웬 오래된 성이 있었고, 차가운 아스팔트 대신 부드러운 잔디가 만져졌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손이 너무나 작다는 것이었다.

“……이게 나라고?”

자신이 빠졌던 호수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인상을 찡그리자 물가에 비친 금발의 아이도 함께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손을 들자 호수의 아이도 따라 손을 들었다. 금발의 어린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보드랍고 분냄새 날 것 같은 흰 살결이 만져졌다.

‘이럴 수가.’

민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물가에 비친 아이, 아니, 그녀의 얼굴은 꿈에서 보았던 그 아이 자체였다. 그런데 왜 꿈에서 본 그 아이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에취!”

바람이 불자 저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는지 온몸이 찼다. 언뜻 입술도 파래 보였다.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휘청.

갑자기 몸을 움직이자 가볍고 연약한 몸이 비틀거렸다. 시야가 낮았다. 정말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꿈은 아니었다. 얼마나 꼬집었는지 아이의, 아니, 그녀의 볼이 붉게 변해 있었다. 이 아픔이 거짓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는 이야기다.

‘현실이라고? 지금 이 모든 게?’

“에취!”

어쨌든 움직여야 했다. 희미하게 떠오른 아이의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찾아 헤맸다. 걸어가면서 자신의 작고 흰 손을 움직여 보며 새로운 몸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작고 흰 손.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그런 손이었다. 소설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충격이었지만,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이제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서른 살 세월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오늘만큼은 자신의 뛰어난 정신력에 감사했다. 아니었다면 뒤로 까무러쳤을 것이다.

멀리 보이는 궁을 지표 삼아 이십여 분을 걷자 드디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데 하나같이 그녀를 보고는 수군거릴 뿐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멀찍이 서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이 나빠졌지만 자신의 꼴이 좀 심하긴 했다. 그냥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무시해 버렸다. 아무리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심적으로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다.

드디어 아이의 궁에 도착했다. 솔직히 제대로 못 찾을 줄 알았는데 몸이 절로 찾아왔나 보다. 다행이었다.

‘인사조차 없군.’

분명 이 아이의 궁일 텐데 시녀와 시종들은 그녀를 보고 인사도 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완전 찬밥 신세다. 허탈감을 감추고 그들을 무시한 채 계단을 올랐다.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것이 지치고 힘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그때 꼬장꼬장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다가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다지 걱정한 얼굴이 아니다. 여인은 그녀의 꼴을 보고 쌍심지를 켜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물이 떨어진다며 타박했다.

‘그럴 거면 수건이나 주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그냥 참았다. 지금은 그저 빨리 쉬고 싶었다.

“제 말 듣고 계신 겁니까?”

상전을 완전히 호구 취급하고 있다. 말만 존댓말이지 귀찮은 물건을 대하듯 했다. 대꾸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는 꼴이 거슬려 귀찮은 듯이 입을 열었다.

“알겠다고요, 이제 비켜요.”

“예? 지금 뭐라고?”

사람 참 귀찮게 하는군. 중년의 시녀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가 먹으니 귀까지 먹었어요? 비키라는 말 안 들려요?”

시녀가 입을 벌리고 어이없어하는 동안 그녀를 지나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축축이 젖은 옷을 대충 아무 데나 벗어 두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입고는 침대에 누웠다. 심리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현재 상황과 앞으로 처할 상황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피곤한 몸이 잠을 원했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벨라는 어이가 없었다. 밤새도록 보이지 않다가-굳이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 헬리아 공주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어디서 뒹굴다 온 건지 머리는 잔뜩 젖어 물을 뚝뚝 흘리는데다 옷도 나뭇잎과 흙으로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놀라고 어이가 없던 것은 비단 공주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세간에선 공주가 오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대개 왕족이 그러하듯 다른 이들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짜증을 잘 부리지만, 남에게 쓴소리 하나 잘 못 하는 소심한 공주였다. 불같이 화내는 게 눈에 보이지만 입으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머저리. 소문과 달리 공주는 그런 자였다. 그래서 벨라는 말만 존댓말이지 헬리아를 공주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그녀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래 봐야 그녀가 어쩌겠나.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질질 짤 뿐이었다.

한데 오늘의 헬리아 공주는 달랐다. 겉모습만 같을 뿐 속 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공주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그것도 잔뜩 귀찮다는 표정을 지은 채-말했다. 그 말도 못 하는 꼬맹이가. 더 놀란 것은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벨라 자신이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서 쉽게 대할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래서 벨라는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정이 된 벨라는 그녀가 들어간 방문을 노려보았다. 어디 약을 잘못 먹었나? 아니면 밤새 미친 게 아닐까? 감히 자신한테 눈을 부라려? 비록 벨라는 시녀장이었지만 엄연히 남작가의 여식이었고, 천한 하녀의 배에서 태어난 헬리아 공주와 달리 제대로 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벨라는 다음에 보면 꼭 한 소리 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헬리아가 잠든 방을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하나 벨라는 몰랐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헬리아를 만나게 될 거라고.

* * *

띠링, 띠리링.

그녀는 익숙한 듯 알람을 끄기 위해 손을 뻗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장사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으, 음?’

더듬더듬. 그런데 익숙한 곳에 있어야 할 알람 시계가 손에 닿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알람이 울렸던가?

“……여긴 어디야? 꿈이 아니었어?”

벌떡 일어난 그녀는 낯선 천장과 거대한 침대를 보고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여전히 포동포동한 어린아이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꿈이 아니었다.

현실을 완전히 자각한 후 민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설에 나오는 여느 주인공처럼 자신을 바꿔보겠다고 발버둥 치지도 않았고, 시끄럽게 이곳저곳 번거롭게 쑤시고 다니며 사건을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겐 지금의 상황이 좋았다. 마치 휴가 같지 않은가. 오랫동안 일만 해온 그녀에게 이곳은 휴가를 온 것처럼 조용하고 편했다. 다만 아무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지만.

헬리아는 아르센 왕국의 공주였지만 그녀의 어머니 세니아 후궁은 하녀였던데다 출신이 불명확한 여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왕과 사랑에 빠져 후궁의 자리까지 오른 여자. 그녀에겐 적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총희를 건드릴 자는 없었다. 그녀와 왕 사이에 헬리아가 태어난 뒤 5년 후, 세니아는 세상을 달리했다. 그 이후로 그녀의 적은 고스란히 헬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때 겨우 다섯 살이었다. 헬리아 공주는 살아남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다. 세니아의 적들은 헬리아를 헐뜯기 시작했다. 그녀를 지탱해 주던 아버지마저 등을 돌리자 그녀는 스스로 호수 아래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뭐?’

민서, 아니, 헬리아가 된 그녀에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자신이 공주라는 것, 이렇게 놀고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 멸시받고 권력이 없어도 이렇게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이나 쬐는 걸로 족했다. 하지만 편안해야 할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착잡했다.

“……허무하군.”

그녀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왔다. 하나 열심히 산 인생의 결과가 허무하기 그지없다. 비참하게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이런 알 수 없는 세상에, 그것도 버림받은 아이의 몸에 들어간 것은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래도 과거보다 지금이 더 나은 게 아니냐고. 그녀는 그게 싫었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이렇게 사는 것은.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다시 과거의 채민서로 돌아갈 것이다.

복수. 그녀는 복수하고 싶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김지윤을 파멸시키고 사랑했던 이윤서에게.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그녀는 반드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였다.

자살? 그녀는 여태껏 어렵게 살았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 양아버지에게 폭행당했을 때나 연인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고? 그녀가 죽는다고 누가 알아줄까. 그녀 자신만 불쌍할 뿐이다. 그녀가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도 없건만 누구 좋으라고 죽겠는가.

그런데 이제 복수를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 과거의 그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순간 무료함이 그녀를 엄습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린 헬리아로서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 * *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적응해 살아가려던 헬리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 생겼다. 어찌하여 하늘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헬리아는 붉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상대가 괘씸했다.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분명 말로는 미안하다고 하는데 표정과 일치하지 않으니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시녀는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달고 엎어진 뜨거운 스프를 닦고 그대로 가버렸다. 헬리아의 달아오른 손등을 내버려 둔 채.

“하!”

어이가 없었다.

‘나 공주 아니야?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주변을 둘러보자 키득거리며 웃고 있던 몇몇 시녀가 눈에 띄었다.

‘웃고 있단 말이지?’

헬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린아이 같은 장난이 계속되니 평화롭게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려고 했던 헬리아의 목표가 흔들렸다. 그녀가 누구인가. 양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라고 멸시받아도 모두 이겨내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녀는 결코 온화하지도 자비롭지도 않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독한 년이라 욕했지 절대 좋은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독한 년 맛 좀 봐야겠다.’

헬리아의 눈이 번뜩였다.

“페이, 다 됐어?”

짙은 갈색머리에 양 뺨에는 아직도 주근깨가 있는 시녀 앤은 동료 시녀인 페이를 향해 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앤은 페이가 건넨 스프를 카트에 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오고 있었다. 앤의 얼굴에 핀 얄궂은 미소를 본 페이는 걱정스러워졌다.

“정말 하려고?”

그러자 앤은 콧방귀를 꼈다.

“뭐 어때? 나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번이 내 차례라고.”

“그래도…….”

“이제까지 혼난 애들 없잖아. 괴롭히는 줄도 모른다고. 솔직히 공주랑 우리랑 다를 게 뭐야.”

“앤!”

앤의 말에 페이가 안색을 흐렸다. 그에 앤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머리색하며 눈동자하며 국왕 전하와 닮은 구석도 없고, 세니아 후궁은 귀족인 우리보다 천한 평민 출신이잖아.”

“누가 듣겠어!”

“다들 하는 말이라고.”

앤과 페이는 귀족 출신의 시녀였다. 왕성에는 평민 출신의 시녀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남작가나 준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그래서 더 시녀와 시종들은 평민 출신의 세니아 후궁의 딸인 헬리아 공주를 싫어했다.

페이의 질겁하는 표정에 앤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월급 나오면 옷이나 사러 가자.”

“아니, 난 됐어.”

“왜?”

그녀의 말에 페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좀.”

페이는 말을 아꼈다. 앤은 그녀의 표정에 머쓱해져 ‘이만 갈게’ 하고 카트를 밀고 나갔다.

시녀 앤은 뜨거운 스프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공주님 괴롭히기’. 남들이 들으면 큰 죄로 끌려갈 수 있지만 여기 로즈궁에서는 암묵적으로 합의가 있었다. 로즈궁에 있는 고용인 대부분이 다른 궁의 시녀보다 더 대접받지 못한다. 거의 좌천되어 오는 곳이 바로 이곳 로즈궁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상전의 신분에 따라 고용인도 그 신분이 정해진다. 눈에 보이는 계급은 아니지만 직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상전을 모시는 고용인은 콧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놈의 빽이 뭐라고. 로즈궁의 고용인은 다른 궁 고용인의 핍박을 감내해야 했고,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인 것이 바로 헬리아 공주였다. 고용인들은 그들의 화를 헬리아 공주에게 교묘하게 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 멍청한 공주는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한 번이 어렵고 두 번은 쉽다고, 고용인들의 괴롭힘은 이제는 당연시되었다.

요즘 들어 헬리아 공주가 전과 달리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여전히 크게 뭐라 하지 않는 걸 보아선 그다지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다고 앤은 생각했다. 앤은 스프를 들고 헬리아 공주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공주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앤은 식탁에 앉아 있는 헬리아 공주를 보았다. 킥킥, 앤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헬리아에게 다가갔다.

흠칫.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늘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피어 있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건가? 아니면 미친 건가?’

앤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저 고개만 갸웃거리고 넘어갔다.

“그럼 식사를 차리겠습니다.”

앤은 힐끔 헬리아가 있는 위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스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잔인한 미소를 띠고 그녀의 머리에 스프를 쏟으려는 찰나.

“어!”

헬리아가 일어나는 바람에 놀란 앤은 뜨거운 스프를 그만 자신에게 쏟고 말았다.

“앗! 뜨거워!”

엎질러진 스프에 앞섶은 온통 더러워지고, 데인 손은 붉게 변해 있었다. 앤은 이를 물고 갑자기 일어난 헬리아를 노려보았다.

흠칫.

‘뭐, 뭐지?’

헬리아는 웃고 있었다. 갑자기 앤은 소름이 돋았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지만 그걸 뭐라 정의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바보 공주는 없었다.

“어라라, 창문으로 뭐가 지나갔는데 내가 잘못 봤네?”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게 아닌가.

“갑자기 일어나시면 어떻게 해요!”

이상했지만 그 이상함이 뭔지 몰라 짜증 난 앤이 그렇게 쏘아붙였다. 분명 상전에게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앤은 헬리아가 이번에도 전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아파?”

“그럼 당연히 아프죠! 여기 좀 보세요. 손등이 빨개졌잖아요?”

“아, 그래?”

“하.”

앤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 공주가 뭘 잘못 먹었나?

“미안.”

“미안하다면 다예요?”

히죽거리던 헬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응, 다야. 너도 그렇게 했잖아?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넌 시녀고 난 공주인데?”

“……그, 그건.”

앤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헬리아가 넘어진 앤의 곁으로 다가왔다. 헬리아는 앤을 올려다보았다. 한데 앤은 마치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착각이 들었다. 헬리아의 금안이 싸늘하게 빛났다.

“내가 호구냐?”

“예, 예?”

“가만히 있으니까 생각도 없을 줄 알았냐고.”

“뭐, 뭐예요?”

순간 헬리아가 앤을 잡아 그녀의 얼굴을 제 얼굴 가까이 대었다. 마주한 얼굴에 앤은 흠칫했다.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이제야 알아챌 수 있었다.

“너 딱 걸렸어.”

공주가 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자신들에게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후에 몸소 느끼게 되었다.

요즘 앤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졌다. 그 ‘악마’는 집요했다. 그리고 교묘했다. 앤은 그것을 처절히 깨달았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결코 그 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 앤!”

“예, 예!”

악마의 부름에 앤은 움찔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악마에게 다가갔다. 금발의 열 살 난 그 악마는 앤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재앙이었다.

“어쩌지?”

“뭐, 뭘 말씀이십니까?”

“그게 말이야, 내가 그만 이 카펫에 잼을 흘렸더라고. 아, 근데 오늘 앤이 내 방 청소 담당이었지?”

“……예.”

앤은 정말 죽고 싶었다.

‘왜 하필 잼이야! 그것도 비싼 카펫에!’

게다가 더 죽고 싶은 것은 청소 검사하는 앤의 선임 시녀가 하필이면 오늘 휴가를 떠난 바람에 시녀장 벨라가 검사하게 될 거란 거였다. 벨라는 시녀들 사이에서 아주 꼬장꼬장한 인물로 소문난 성격 더러운 노처녀였다. 게다가 얼마나 깔끔을 떠는지 특히 청소에 가차 없었다.

“미안, 내가 앤을 또 힘들게 했네?”

“아, 아닙니다.”

“그래? 다행이야. 내가 미안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앤은 착하니까.”

‘이 악마가 또 뭘!’

“저기 보이지?”

앤이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앤은 뒷목을 잡았다.

‘이, 이 악마가!’

악마는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침대에서 주스를 먹다가 흘려 버렸어.”

“포, 포도 주스를 드셨네요.”

‘젠장, 가장 안 빨리는걸!’

앤은 울고 싶었다. 왜 내게 이러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 스프 사건 이후 앤은 헬리아의 전속 시녀로 배정받았다. 헬리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그리고 헬리아 내면에 잠든 악마를 보았다. 오만하고 멍청한 공주님? 누구야 그딴 말을 지껄인 사람은. 앤은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집요한 악마.’

헬리아는 집요했다. 그녀를 향한 괴롭힘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녀는 딱 한 명! 바로 앤 자신만 공략했다. 다른 시녀가 뭐라고 하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내 목표는 너야!’라는 느낌으로 앤만을 못살게 굴었다. 근데 그게 또 교묘하다는 거다. 어찌나 교묘한지 다른 애들은 몰랐다. 그저 그들은 왜 앤이 헬리아에게 그렇게 빌빌대나 의아해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해 봐야 안다.

앤은 그녀의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렸다. 특히 그녀의 금안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앤!”

악마가 부른다. 앤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에게도 공주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 자신만 당하면 억울하니까. 공주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 다음엔 쟤야.”

어깨를 토닥이며 다른 시녀를 꼽자 앤은 희망을 가졌다.

‘그래, 나만 이렇게 당할 순 없잖아?’

* * *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 안 하세요?”

“시험?”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헬리아의 모습에 페이가 의아해 물었다. 전에는 성적이 안 나올 뿐이지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하나 안 하나.”

이곳으로 온 뒤 헬리아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당연히 수업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 통보가 왔다. 그러나 딱히 공부할 마음도, 열심히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다행히 이미 그녀의 성적은 바닥이었고, 그에 맞춰 바닥을 쳐주면 그만이다. 헬리아는 다시 침대에 누워 시험과 전혀 상관없는 책을 펼쳐 들었다.

찰싹!

“윽!”

회초리가 여린 살갗을 매섭게 때렸다. 보송보송한 종아리 살에는 이미 붉게 피가 배어나왔다. 매를 맞는 소년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바짓단을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소리를 죽여 가며 아픔을 참았다.

“이제 그만 되었다.”

매를 때리던 사람이 브리튼 교수의 말에 들고 있던 회초리를 놓았다. 그러자 매를 맞던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제자리에 섰다.

“다음엔 잘 보시길 바랍니다.”

브리튼 교수는 유명한 학자로 공주들의 공부를 봐주었다. 노교수의 말에 헬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대신해 매 맞는 아이에게 꽂혔다. 소년은 얼굴을 푹 숙이고 시립해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아픈지 무릎 아래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헬리아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맞는 그 아이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다. 자신 대신 매를 맞는 아이가 있을 줄은. 그제야 헬리아는 그녀의 신분이 더 이상 평범한 이가 아니라 한 나라의 공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헬리아는 굳이 시험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이제 와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볼 것이다. 그저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전의 헬리아였다면 매 맞는 아이 따위 당연하게 받아들였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이곳의 생활도 그렇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갈 작정이었다. 헬리아는 자신이 피해받는 것도 싫지만, 자신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피해 입는 것도 끔찍이 싫어했다.

‘이런 줄 알았다면 공부할 것을.’

헬리아가 시험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을 때, 브리튼 교수가 그녀를 대했을 때와 달리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역시 비앙카 공주님이시군요, 만점입니다.”

노교수를 사이에 두고 헬리아의 맞은편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보다 한 살 많은 이복형제로 이름은 비앙카였다.

비앙카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해야지요. 전 제 아이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요.”

누구처럼. 왠지 그 뒷말이 있을 것 같은 말투였다. 똑바로 헬리아를 바라보며 말하는 비앙카는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귀엽게 생긴 아이로, 그녀와 달리 왕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도도하게 빛났다.

헬리아는 저런 눈을 많이 봐왔다. 우월감. 남보다 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만이 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저 가증스런 꼬마는 지금 자신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헬리아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헬리아 공주님은 좀 더 분발하셔야겠습니다. 비앙카 공주님을 본받도록 하세요.”

“……예.”

“그럼 다음 시험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은 수학 시험입니다.”

헬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수학이란 말이지?

노교수는 비앙카와 헬리아에게 시험지를 나눠주었다. 헬리아는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속으로 환호했다. 모두 아는 문제였다. 이전 시험들은 역사와 작문, 마법 등 모두 생소한 것이었지만 수학만은 달랐다. 역시 만고의 언어. 헬리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달렸다. 만점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그저 적당히, 자신을 대신해 매 맞는 아이에게 부담이 덜 가도록.

“그럼 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바로 시작해 주십시오.”

헬리아는 자신 있게 펜을 들었다.

“잘하셨습니다.”

비앙카는 열 문제 중 네 문제를 틀렸다. 성적이 좋지 못하자 비앙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에 브리튼 교수는 곧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번 시험은 제법 어렵게 낸 건데 이만하면 잘하신 겁니다.”

“다음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 성적이 아쉬웠지만 칭찬에 만족한 듯 비앙카는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슬쩍 헬리아를 바라보더니 코웃음 쳤다. 하지만 노교수가 헬리아의 시험지를 모두 채점하고 그녀의 점수를 말하자 비앙카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군요!”

브리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점수를 확인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70점이었다. 커닝한 것일까. 하지만 그가 보는 앞에서 시험지를 풀었다. 게다가 커닝한다 해도 비앙카 공주가 더 틀렸다. 커닝한 사람이 그보다 더 잘 맞을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어쩔 수 없이 헬리아 공주의 점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믿을 수는 없지만.

“고,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봅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헬리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표정을 구겼다. 설마하니 비앙카보다 점수가 잘 나올 줄 몰랐다. 시험 문제는 중학교 수준이었다. 당연히 대학을 나온 그녀가 이런 문제를 못 푼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다만 적당히 점수를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을 뿐이다.

‘이런, 열 살이라는 걸 잊어버렸어.’

나름 비앙카의 수준을 생각해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그녀와 자신이 이제 겨우 열 살, 열한 살이라는 것을. 게다가 어린 자신들에게 교사가 어려운 문제를 출제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패착이었다.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비앙카의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졌다. 찍혀도 단단히 잘못 찍혔다.

노교수는 비앙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른 채 좋은 점수를 받은 헬리아를 칭찬했다.

“허허, 열심히 수학 공부를 하셨나 봅니다. 다음에는 다른 과목도 열심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한쪽에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과제를 내드릴 테니 다음 수업 시간까지 해오시면 됩니다.”

브리튼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수업을 파했다. 비앙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따지려 했지만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커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게다가 이미 결론난 일을 가지고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멍청한 애가 나보다 더 잘 봤다고? 믿을 수 없어!’

비앙카가 헬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헬리아는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무시하고 방을 나갔다.

“나보다 더 잘 봤다고? 감히 네까짓 게!”

하지만 우월감에 사로잡힌 비앙카에겐 그녀의 행동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날 이후로 헬리아는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아무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엔 그녀가 처한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최소한의 지식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자 점차 성적이 올랐다. 다만 언제나 비앙카보다 아래가 되도록 성적을 조작했다. 그녀가 무섭다기보다 귀찮아지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헬리아는 노교수에게 매를 자신이 직접 맞겠다고 했다가 불가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브리튼 교수가 매 맞는 아이도 그것이 일이니 일을 뺏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했다.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봅니다. 공주님의 과제는 정말 독창적이군요.”

브리튼은 헬리아가 제출한 과제물을 확인하고는 칭찬을 건넸다. 21세기를 살아온 그녀의 지식은 이곳 사람들과 궤를 달리 했다. 그는 그동안 헬리아 공주가 공부를 못해 못마땅했다. 그런데 이제는 차근차근 공부하려는 모습을 보이니 기특했다.

“이러다가 비앙카 공주님보다 더 잘하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아, 예.”

하지만 헬리아는 칭찬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옆에서 잔뜩 짜증 난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비앙카 때문이었다.

‘이거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브리튼 교수는 가볍게 말한 것이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비앙카는 자신의 성적이 위협당하는 것에 큰 불안감을 느꼈다. 아래로 보던 상대에게 추월당하는 느낌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비앙카의 눈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녀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럼 대신 해준 게 아니란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런 걸 해줄 사람도 없…….”

“그럼 그 멍청한 애가 지 손으로 했다는 말이야?”

비앙카의 고함이 방 안을 떠들썩하게 울렸다. 세간에선 천사라 불리는 그녀는 실상은 오만하고 권위 의식에 똘똘 뭉친 공주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연기한 사랑스럽고 착한 공주로 볼 뿐이었다. 거기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했다.

“칫.”

비앙카는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요즘 들어 헬리아의 성적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게다가 과제도 언제나 선생의 칭찬을 들었다. 분명 이상했다. 아니, 이상해야 한다. 얼마 전만 해도 멍청한 공주가 이런 성과를 낸다는 것이.

비앙카는 로즈궁의 고용인을 몰래 불러서 헬리아의 비리를 캐낼 생각이었다. 한데 본인이 했단다. 그게 더 비앙카의 자존심을 긁었다. 비앙카 자신은 때때로 다른 사람을 시켜 과제를 끝내 왔었다. 질끈질끈 입술을 깨물던 비앙카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바닥에서 기던 놈이 위로 올라오면 안 되지. 기던 놈은 평생 기어야 해.’

비앙카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벨라를 불러.”

* * *

“헬리아 공주님.”

브리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낮게 깔려 있어 헬리아는 의아해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후우…….”

그는 자신의 안경을 한 번 올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표정을 바꾸고 이제까지 그녀가 한 과제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헬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제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라……. 문제는 과제에 있지 않습니다.”

“예?”

도대체 무슨 말인가? 도통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브리튼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과제들을 정말 공주님이 직접 하신 겁니까?”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당연히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안 하면 누가 하겠는가.

“물론입니다.”

그 말에 오히려 그는 실망한 듯 보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질문하죠. 직접 하셨습니까?”

“예.”

“실망이군요.”

“예?”

헬리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때 방 안으로 비앙카와 자신의 시녀장인 벨라가 들어왔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서 오시지요.”

비앙카와 벨라가 헬리아의 앞에 섰다. 브리튼 교수가 벨라에게 물었다.

“시녀장에게 묻겠습니다.”

“예.”

“이 과제 누가 했습니까?”

헬리아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벨라의 입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 설마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했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모함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교수가 벨라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헬리아의 신용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헬리아 공주님께는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

그는 이미 헬리아가 거짓말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한들 믿겠는가.

벨라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를 바라봤다.

‘비앙카!’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신을 모함한단 말인가!

“허허, 변하신 줄 알았건만. 제가 잘못 봤던 모양입니다.”

브리튼 교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는 수업 자료를 챙겨 방을 나갔다. 정적이 흘렀다. 방 안에는 비앙카와 헬리아, 그리고 벨라가 있었다.

“무슨 짓이지?”

헬리아가 비앙카를 노려봤다. 비앙카는 흠칫했지만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이 못내 짜증 났다. 그녀는 당당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남에게 과제를 시키다니, 내가 이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신성한 배움의 공간에서 이런 일이…….”

비앙카는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증스런 비앙카. 헬리아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의 시선은 벨라를 향했다.

“무슨 짓이지?”

“저는 제가 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대로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죄책감? 하!”

‘이것들 한통속이군.’

헬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새삼 비앙카를 다시 봤다.

‘그렇게 싫었던 거냐,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사실이!’

헬리아는 비앙카의 시기와 질투에서 김지윤을 엿봤다.

“먼저 가지.”

그녀는 몸을 돌렸다. 비앙카를 건드리면 일이 커진다. 헬리아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서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명, 그녀에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다. 헬리아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벨라, 너는 아니야.’

* * *

평범한 오후였다. 헬리아는 무료하게 방 안에 앉아 빈둥거렸다. 할 일 없는 것은 그녀 혼자뿐, 그녀가 빈둥거린다고 해서 로즈궁의 시녀와 시종들이 노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일에 분주했다.

“조용하군.”

헬리아에게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그녀도 굳이 찾아가지 않고 항상 방 안에서만 지냈었다. 하지만 요즘엔 달라졌다. 그녀는 매일같이 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헬리아가 시간을 확인하고 보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일과가 된 산책을 위해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하는 산책은 별거 없었다. 그저 궁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로즈궁은 별로 크지 않아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처음에는 시녀와 시종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일주일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하자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나 심심하면 자기 궁을 돌아다니겠는가. 모두 헬리아의 생활 패턴으로 여기고 자기 하던 일에만 열중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헬리아만 관찰하고 있기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고용인의 무시 속에 헬리아는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어떤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방문에는 벨라의 이름이 쓰여 있다.

시녀장은 일반 시녀들과 달리 독방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시녀장은 대부분 나가 있기 때문에 방에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끔 방에 들르는 경우가 있어 조심스러웠다.

헬리아는 도둑고양이처럼 방을 둘러보았다.

“이거야 원, 시녀장이라지만.”

내 방보다 더 좋은 거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며 헬리아는 천천히 벨라의 방을 감상했다. 그녀의 방은 화려했다. 물론 왕족처럼 거하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녀장이 가진 물건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지어 헬리아의 방에 있는 물건보다 좋았다.

‘역시나.’

헬리아는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지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할 맛이 나지.’

그녀는 벨라의 책상과 침대, 심지어 욕실마저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물건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헬리아는 점점 초조해졌다.

“도대체 어디다가 둔 거야?”

그때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리아는 흠칫했다.

“여기에다 물건 놓은 사람 누굽니까!”

“죄, 죄송합니다.”

“얼른 치우세요!”

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리아는 더욱 바삐 몸을 놀렸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헬리아는 서둘러 움직이다 문득 책상 아래 있는 작은 홈을 발견했다.

타악!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덩달아 헬리아의 손도 멈췄다.

째깍째깍.

시곗바늘 소리만이 울렸다. 헬리아는 침을 꼴딱 삼켰다.

“시녀장님!”

그때 누군가 벨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아…….”

헬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미리 준비한 철사로 이리저리 돌리자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빙고!”

내용물을 확인한 그녀는 유유히 벨라의 방을 빠져나왔다.

* * *

벨라는 저녁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방에 불을 밝힌 그녀는 놀라 소리쳤다.

“고, 공주님!”

벨라는 자기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도대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아?”

“시간이 늦었습니다. 어서 돌아가서 주무세요.”

벨라가 엄연히 축객령을 내렸지만 헬리아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과제를 대신해 줬다? 웃기는군.”

“…….”

벨라는 대답 대신 입을 닫았다. 헬리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조소를 지었다.

“뭐, 그건 됐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제야 벨라의 표정이 변했다.

‘어떻게 저걸!’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자신이 숨겨둔 것이었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버릇이 있으셨군요.”

“거짓말하는 사람한테 듣고 싶지 않은 말인걸.”

헬리아가 벨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당하고는 못 살거든.”

“…….”

벨라의 시선이 계속 상자에 가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헬리아는 모른 척 상자를 잡아 올리더니 흔들었다.

“이게 뭘까?”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분명 헬리아는 안의 내용물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 침착함을 유지한 채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노후 준비는 해야지 않겠어요?”

“아, 노후 준비. 그래, 돈이 많아야겠지.”

헬리아가 상자를 내려놓고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아무리 무늬만 공주래도 매달 돈이 들어오는 건 알고 있어.”

벨라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래서 얼마 받는지 잘 계산해 봤는데, 아, 내가 수학은 잘하잖아? 그런데.”

헬리아의 금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벨라는 순간 숨이 멎은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겨우 열 살 어린아이의 기백이 아니었다.

“액수가 다르네?”

“그, 그건…….”

그녀의 안색이 파래졌다. 공주가 그런 것까지 알아볼 줄은 몰랐다. 그동안 벨라는 헬리아 공주에게 배정되는 돈을 조금씩 착복해 왔었다. 공주는 자신이 받는 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 앞에 당당히 말하는 저 공주는 달랐다. 역시 이상했다. 변했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만큼 그녀는 달라졌다.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바라는 거 없어. 그냥 편하게 살다가 가고 싶거든. 근데 왜 이렇게 날 방해하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애써 들쑤신단 말이야.”

“…….”

헬리아의 음성이 점점 낮아졌다. 그러나 입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좀 더 편하게 지내자고.”

그녀의 마지막 말에 벨라가 긴장을 풀었다. 결국 저 공주는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벨라의 태도가 바뀌었다.

“물론이죠, 저도 공주님과 잘 지내고 싶답니다.”

하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쾅!

헬리아의 작은 주먹이 책상을 내려쳤다. 어린아이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소리였다. 벨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헬리아의 목소리는 낮고 싸늘했다.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야.”

“…….”

“이건 명령이야. 나는 조용히 살고 싶어. 하지만 당하고는 못살아. 알겠어?”

헬리아가 벨라에게 걸어갔다. 분명 벨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그녀가 크게 보이는 것일까.

“꽤 많이도 빼먹었지?”

“……무…… 슨 말이죠?”

“알잖아? 이 방만 해도 내가 바보라도 알겠는걸. 시녀장의 방에 고가의 옷이며 장신구며, 거기다 모아둔 돈까지.”

벨라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떻다는 거죠? 증거 있나요? 상자 안에 있는 건 제가 오랫동안 모아둔 겁니다.”

허세였다. 만약 헬리아가 이 일을 알린다면 조사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간 행적을 읽은 벨라는 판단했다. 그녀는 일이 커지길 바라지 않았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허세 떨지 마.”

“…….”

“하지만 맞아. 네 생각대로 신고는 안 할 거야. 근데 이런 고급 정보를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건 아깝지.”

“…….”

“로이네 알아?”

흠칫.

벨라의 몸이 반응했다. 로이네, 시녀장 직위에 욕심을 품고 있는 여자였다. 게다가 벨라와 마찬가지로 남작가 출신의 귀족이라 그녀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로이네가 말이야, 나한테 시녀장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뭐야.”

“…….”

“근데 나는 벨라가 있으니까 거절했지. 하지만 이런 이야기 로이네가 알면 참 재밌겠다, 그렇지?”

그러니 너 시녀장 자리 빼앗기지 않으려면 잘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헬리아의 의도를 알아챈 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말만 잘 들어준다면 로이네에게 횡령 사실을 함구하겠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면 말하겠다. 아마 로이네가 이 소식을 안다면 바로 고발할 것이다. 그러면 벨라는 더 이상 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영악한…….’

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헬리아는 제대로 아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를. 대리 과제 사건으로 그녀의 말이 신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나서는 것 대신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

로이네. 그것도 벨라의 경쟁 상대를 말이다.

“자, 그럼 새 나라의 어린이는 잠을 자러 가볼까?”

벨라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에게 이미 선택권은 없었다.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내일은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지? 누가 내 돈을 훔치는 바람에 궁 재정이 부실해서 영 변변치 않았거든. 하지만 이제는 괜찮겠지, 안 그래?”

“……물론입니다.”

벨라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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