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퀸
1
Prologue
멍청하고 오만한 공주.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 * *
“비켜!”
어린 여자아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기사를 향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기사는 무표정할 뿐 길을 비키지 않았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분명 약속을 했다. 그러니 비켜.”
“전하께서 사사로이 찾아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기사의 말에 여아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아이는 기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서서히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직접 아바마마를 뵈어야겠다!”
“허락 없이 들이지 말라는 분부십니다.”
기사의 당당한 태도에 여아가 기사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가 그녀와 아바마마의 사이를 갈라놓는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네가 감히!”
“돌아가십시오.”
“이럴 수는 없다! 아바마마가 왜 내게!”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아이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결국 등을 돌렸다. 아이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믿었던 자에게 당한 배신은 너무나 쓰라렸다.
‘어째서 아바마마가…….’
아이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며 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왕궁의 시녀와 시종들은 그녀의 예의 없는 행동에 눈을 찌푸리며 비난했다. 그들은 그녀가 왜 그런지 알지도,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윽!”
발에 익지 않은 딱딱한 구두가 어린아이의 뒤꿈치에 붉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쓰라린 아픔에도 소녀는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참은 두 눈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정신없이 뛴 탓에 머리는 바람에 날려 산발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소녀의 흐트러진 모습에 시시덕거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소녀는 그들의 비웃음 소리에 귀를 막았다. 이미 발꿈치에선 피가 흘렀지만 아픔마저 잊은 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눈물이 났다. 믿었던 사람, 의지했던 단 한 명의 사람이 그녀를 버렸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도, 경멸 어린 말도 그녀는 모두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나 달렸던 것일까.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주변엔 건물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깊고 어두운 숲속에 오로지 아이만이 있었다.
진탕된 마음을 가라앉힌 아이는 그제야 느껴지는 아픔에 구두를 벗고 맨발로 잔디를 밟았다. 사박사박. 잔디를 밟을 때마다 풍겨오는 풀 냄새에 마음속 불길이 차차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궁의 서쪽에 위치한 큰 호수였다. 아이는 천천히 호수로 다가갔다. 그러자 짙은 물 내음이 맡아졌다. 아이는 조심스레 호수에 고개를 내밀고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호수에는 악독한 표정을 지은 오만하고 멍청한 공주가 아니라 열 살의 상처받은 소녀가 비쳤다.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 깊게 파고든 손톱이 그녀의 여린 살갗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가슴은 그보다 더한 고통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천한 태생에 멍청하고 오만한 공주. 아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시했다. 그녀가 손가락질받을 때도 아버지만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격려해 주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었다.
한데 이제는 아니다.
찰랑.
아이는 자신의 얼굴이 비친 수면을 손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툭-
눈에 고인 눈물 한 방울이 호수에 떨어지면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저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거 하나 원했을 뿐인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다.
네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고,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이는 천천히 호수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호수로 발을 내딛자 차가운 물이 발목을 적셨다. 그녀는 더욱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제는 아픔도 슬픔도 없으면 좋겠다.
찰랑.
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호수로 떨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에 뜬 달만이 호수를 비추었다.
* * *
“자자, 싸요 싸!”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 삼십 대 초반의 여자가 닳아 해진 짙은 녹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연신 소리를 높였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목이 늘어난 반팔 티에 값싼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단골손님이 다가오자 웃으며 더욱 흥겹게 외쳤다.
“언니, 이것 좀 봐. 막 가져와서 싱싱해. 내가 싸게 해줄게.”
까맣게 타버린 피부에 모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머릿결은 푸석했지만, 얼굴만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린 사십 대 아줌마가 관심 어린 눈으로 물건을 살폈다.
“뭐 좋은 거라도 들어왔어?”
“파랑 배추가 실해. 보니까 이제 떨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네가 우리 남편보다 더 잘 안다니까. 호호, 파 한 단이랑 배추 한 포기 줘. 이것도 주고.”
사십 대 아줌마는 민서의 능청스런 장사 수완에 호호 웃으며 예정에 없었던 오이마저 사갔다. 다른 아줌마들도 민서가 떴다 하면 모두 그녀의 트럭에 모여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사기 바빴다.
삼십 도가 넘는 여름의 후끈한 열기에 민서는 모자를 벗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후우,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군.’
그녀가 트럭을 몰며 채소 장수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경험이 없어 채소를 썩게 만든 적도 있고 실수도 잦았다. 과연 이 일이 적성에 맞을까 걱정도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흥수 아저씨와의 인연으로 경험과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초기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했다.
하나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는 민서였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그녀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으음, 헉!’
채소를 팔던 민서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서둘러 채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민서의 행동에 채소를 고르던 손님들이 당황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언니들, 오늘은 이만 가볼게.”
“아니, 벌써? 무슨 일 있어?”
“보통은 저녁때까지 있잖아?”
손님들이 저마다 한마디 했지만 민서는 지금 여유롭게 받아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잊어버렸지 뭐야. 내가 내일 더 좋은 거 갖고 올게.”
내일 여기에 다시 올 수 있다면 말이지. 민서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곤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타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젠장, 저놈들 완전 거머리네.”
백미러 사이로 검은 정장의 깍두기들을 본 민서는 신음을 삼켰다.
민서는 고아였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는 운 좋게 5살 때 중산층의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 하지만 사랑을 받진 못했다. 그녀를 입양하고 얼마 뒤 아이를 가지지 못해 그녀를 입양했던 양부모 사이에 아들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아이가 생기자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녀에게 주었던 관심은 오로지 친아들만을 향했고, 점차 그녀의 존재를 껄끄럽고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거의 방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양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양부모는 그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양아버지는 욕설과 구타를 서슴지 않았고, 양어머니는 그녀에게 하루 한 끼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밥을 주었다.
하루하루가 그녀에겐 지옥이었다. 하지만 민서는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심한 모욕을 받더라도 밥을 굶더라도 그곳은 민서의 집이었다. 가족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외줄을 걷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그들의 관계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사업에 실패한 이후 양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그녀에게 행패를 부렸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양아버지의 눈이 음심으로 번들거렸고, 그는 구타에 쓰러진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려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맨몸으로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다행히 세상은 무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정을 알고 안타까워하던 담임선생님이 그녀를 도와주었다. 비록 시설에서 지내야 했지만 지옥 같던 집을 나오자 오히려 민서는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공부를 해서 성공하는 것. 어린 민서는 차가운 세상에서 힘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녀는 피땀을 흘려가며 노력했다. 결국 최고 명문대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했으며, 수석으로 졸업하여 이후 대기업에 들어가 승승장구했다. 더 이상 그녀는 힘없는 고아가 아니었다. 잘나가는 대기업의 우수한 커리어우먼으로 여대생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여성이었다. 큰 거래를 척척 따내며 성공 가도를 달렸으며, 같은 회사에서 만난 남자와 남부러울 사랑도 했다. 사랑과 돈을 모두 손에 넣은 그녀는 행복했고, 그 행복이 오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핍박했던 가족이 염치도 없이 찾아왔다. 그녀는 그들을 거부했다. 여전히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했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민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겐 저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민서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아와 결혼했다는 꼬리표를 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잘했고, 그녀도 그 정도로 만족했다.
뛰어난 자는 사람들에게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지만 또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그녀에게도 시기하는 자가 많았다. 그 시기의 정점을 찍은 이가 바로 민서를 죽기보다 싫어한 김지윤이었다. 그녀는 M사 회장의 외동딸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여자였다. 또한 충분한 능력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민서를 만나고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항상 수석은 민서의 몫이었고, 그녀는 차석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와 민서가 본격적으로 악연이 된 것은 바로 민서가 사랑하는 남자를 김지윤 그녀도 사랑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녀는 민서를 짓밟기 위해 갖은 수작을 부렸다. 굵직한 계약을 방해하기도 했고 사람을 써서 그녀를 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수에도 꿋꿋이 버티는 민서의 모습에 김지윤은 작전을 바꾸었다.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민서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독불장군이었다. 그것을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민서를 차근차근 고립시키고, 정보 줄을 하나둘 잘라 나갔다. 그러나 민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김지윤은 민서의 가족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민서의 가족을 도박과 마약으로 유도했고, 부모와 남동생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도박으로 계속 돈을 탕진한 그들은 더 이상 도박에 댈 돈이 없어지자 민서에게 돈을 요구했고, 그녀가 돈을 주지 않자 쓰지 말아야 할 사채까지 손을 뻗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박을 끊지 못했다. 사채업자들이 목을 조여 오자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못 이겨 야반도주를 했다.
가족이 사라졌지만 민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빚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에게 돈을 받지 못한 사채업자들은 민서를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다.
회사에서 그녀는 유능한 재원이었지만 사채업자들이 회사까지 들이닥치면서 그녀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고, 결국 회사는 그녀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는 김지윤 그녀가 있었다. 그저 명분을 만들고 소문을 내 민서를 압박한 것이다.
회사에서 쫓겨난 민서는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들의 만행은 그녀를 피폐하게 했다. 그들에겐 민서에게 돈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 민서는 어떻게 해결해 보려 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면 사채업자가 회사 안을 분탕 쳤고, 민서는 어쩔 수 없이 막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그녀가 해보지 않는 막노동이 드물 정도였다. 항상 연필만 잡던 손은 능숙하게 벽돌을 지고 삽을 들었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옥탑방으로, 그리고 다시 몸 하나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고시원 방으로 옮겨 갔다. 이제 더 내려갈 데도 없건만 조폭들은 여전히 그녀를 쫓아왔고 그녀는 도망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점점 악과 독기로 똘똘 뭉쳐 갔다. 그녀는 그런 고통스런 삶조차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두가 안 된다 하는 거래들을 성사시킨 능력자였고 고생 끝에 행복이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김지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리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사채업자들도 더 이상 손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민서는 자신의 처지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혹여 그가 걱정할까 가끔 공중전화를 통해 이야기했다. 그는 사라진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믿어주고 걱정해 주었다. 하루하루가 절망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있어 꿋꿋이 견뎌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한 혼자가 아니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 * *
“아저씨, 가져왔어요.”
“아, 민서구나. 다행이다. 재료가 금방 떨어진 참이었는데.”
중년의 요리사는 민서를 웃으면서 맞아주었다. 그의 레스토랑에 채소를 납품하는 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는 민서가 지치고 힘들 때면 맛있는 요리를 몰래 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가게 안을 둘러보던 민서가 비어 있는 가게에 깜짝 놀랐다.
“어?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항상 인기 있는 레스토랑인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혹여 자신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지레짐작한 민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세윤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 말도 마라. 아주 꼴값 떤다.”
“예?”
세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민서가 되물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프러포즈한답시고 아예 가게를 하루 통째로 빌렸어.”
“통째로요?”
“가끔 있거든. 돈 많은 자식들이 멋 부리는 거지. 뭐, 우리야 손해는 아니지만.”
“헤에, 좋겠다.”
민서도 윤서가 자신에게 이런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떨까 하고 꿈같은 상상을 했다. 세윤은 민서의 표정을 보자 피식 웃었다.
“민서도 그런 거 좋아해? 으음, 원래 여자들은 그런가?”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민서는 도대체 누가 이런 대범한 짓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저기, 아저씨. 살짝 좀 봐도 돼요?”
“그래. 자, 이건 이번 계산이다.”
“아, 감사해요.”
“뭘 내가 고맙지.”
“아저씨도 알잖아요, 저야 그냥 받아서 파는 건데. 애초에 흥수 아저씨가 잘 키운 거지.”
그렇게 말해도 민서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조용히 소리를 죽이며 주방을 빠져나왔다. 과연 어떤 커플이 얼마나 멋진 프러포즈를 하는 걸까.
“도대체 누가…….”
툭.
손에 쥐었던 모자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
민서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엔 차갑게 굳은 얼굴이 자리 잡았다.
한 남자와 여자가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왼손 약지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조명에 빛나고 있었다. 길고 긴 키스가 끝나자 남자가 일어나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나랑 결혼해 줄래?”
“물론이에요, 윤서 씨.”
여자는 고운 이를 보이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안았다.
민서는 그 연인, 아니,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매와 시원한 콧날, 남자치고 붉은 입술과 연한 갈색의 머리는 그녀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윤서…….”
민서는 어떻게 자신이 빠져나온 건지도 모르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해 캄캄했고,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차가운 비가 민서의 몸을 때렸다.
“흐, 흐윽!”
억누른 신음이 흘러나왔고 눈물로 눈가가 붉어졌다. 자꾸만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이 세상 모든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는 연인의 모습.
이윤서. 자신을 사랑한다던 그 입으로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고, 자신을 바라보던 부드러운 눈빛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는 남자.
민서는 배신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여자를 알았다. 아니,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M사 회장의 딸, 김지윤. 결국 김지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이다.
차갑게 내리는 빗줄기가 그녀의 머리를 적셨다.
“민서야, 사랑해.”
“나랑 결혼해 줘.”
“내가 도와줄게. 조금만 참아.”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가 나를 버릴 리 없다. 분명 그 여자의 협박에 못 이긴 것이다. 민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그리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자신을 몰락시킨 여자의 입에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며, 그녀의 손에 사랑의 증표인 반지를 끼워주었다.
가족? 돈? 사랑? 가족은 그를 버렸고, 돈은 그녀를 나락으로 내몰았으며, 사랑은 그녀의 모든 걸 앗아갔다.
이윤서! 돈에 눈멀어 나를 떠나 그녀에게 간 거니? 어떻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김지윤! 단지 네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아악!!!”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야! 난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고!’
번쩍! 콰아아앙!
거칠고 사나운 번개가 내리치고 강한 돌풍이 불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를 버린 가족도, 어린 그녀를 학대하던 양부모도 그녀를 이렇게 아프게 하지 않았다. 돈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그녀는 참을 수 있었다. 오직 그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지탱해 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끝내 자신을 버렸다. 피를 나눈 이에게 버려지고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처참하게 배신당했다.
민서는 달리고 또 달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몸을 채찍질해도 그녀는 달렸다. 점차 생기를 잃었던 두 눈동자에 깊은 분노와 복수가 떠올랐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에게 복수하고 싶다. 자신을 몰아붙인 세상을 부수고 싶다.
빠아아앙!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하지만 빗줄기를 맞으며 달려가던 그녀는 때마침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하하하!!”
빠앙! 빠아아앙!
클랙슨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제야 민서는 자신에게 돌진하고 있는 자동차를 발견했다. 축축하게 젖은 빗길에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차는 거침없이 민서의 몸을 덮치고 말았다.
콰앙!
분노로 시퍼렇게 물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녀의 몸은 그렇게 빗줄기 속을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