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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트랙_후일담 (47/47)

히든 트랙_후일담

새해, 왕궁은 또 대대적인 해임과 임용이 있었다. 인사이동은 왕의 취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인사이동은 스완 라 포 특수군대장과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이 서로 직위를 맞바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포 백작의 사후에 바로 이루어졌다. 작위를 받자마자 스완은 정식으로 근위대 대장이 된 것이다. 이로써 스완은 왕궁의 제2인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것은 근위대와 특수군 모두가 환영하는 일이었다. 근위대는 평민인 제이슨 리아스가 아니라―사실 라파엘 라 쇼어는 너무나 유령 같은 인물이라 대장이라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왕의 동생이며 백작인 스완 라 포를 장으로 맞게 되었다. 그리고 특수군은 라파엘 에반스를 장으로 맞게 되었으므로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특히 그레이드가 그러했다. 신년식에서 대대적인 인사이동으로 모두의 혼을 쏙 빼놓은 왕이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안네마리가 애를 가졌다.”

순간, 아무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비의 공식 일정은 모두 취소한다. 몸이 약해서 괜히 돌아다니다 아이를 잃게 되면 곤란하니까.”

왕이 너무나 담담히 말해서 귀족들은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왕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쇼어 공작부인은 아이의 유모 역을 맡는다. 지금부터 안네마리를 돌본다.”

유니스 라 버시슬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는 눈을 했다. 안네마리 제1왕비의 위에 유니스 라 버시슬을 올리려고 했던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아니던가.

“왕후궁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잠정 근신에 들어간다. 괜히 알현을 신청한다느니, 선물을 보낸다느니 하면서 수선 떠는 일이 없도록. 할 말이 있으면 왕비의 남편인 내게 하고, 선물은 너희들이 보내지 않아도 내가 그 이상 하고 있으니 되었다. 내 비에게 괜한 압박을 줘서 만약에 내 비가 이 귀한 아이를 잃으면.”

왕이 씩 웃었다.

“인생을 종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겠다.”

귀족들이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안네마리 제1왕비의 납치 사건 이후 왕은 대단히 사나워졌다. 그리고 귀족들은 왕비에 대해서는 왕에게 거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왕비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는 날엔 몹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왕에게 후계자가 생긴다.

강력한 왕의 후계자. 왕권을 공고하게 만들고 헤수스를 안정시키겠지만, 또한 이그나치오 왕가의 건재함을 뜻한다. 귀족들에게는 중요한 소식이지만 좋거나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소식이었다.

§  §  §

이야기는 두어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뭐? 애?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시끄럽고 쓸모없는 것들 말이냐?”

스완은 잠시 얼굴을 구겼다. 사랑스러운 천사, 라고들 많이 말하던데 왜 왕은 이따위로…… 아니, 깊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왕에게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쇼어 공작가의 계집이 네 애를 뱄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왕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왕은 노골적으로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의 안네마리였다. 이제는 안네마리라기보다 라파엘에 가까운 자신의 연인을, 그는 대놓고 시선으로 더듬었다. 새하얀 벽, 그리고 벽을 아름답게 장식한 금색 몰딩. 신화를 수놓은 커다란 카펫과 아름다운 샹들리에까지. 공간은 아름답고 완벽했다. 그 공간 한쪽에선 라파엘이 검은 잠행복을 입은 채 특수군 조장들과 싸우고 있었다.

‘왜 못 해.’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조장들을 휙 돌아보았다.

‘마음을 그냥 비워. 살기를 감추는 게 아니라 가지질 말라고. 그 상태로 스쳐 지나가다가 검으로 한 번 그으면 되는 건데, 왜 못 해.’

스완은 라파엘의 뒷모습을 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아무래도 왕의 정적을 처리할 모양인데, 라파엘은 특수군들의 행태가 답답한 모양이다. 아니…… 그게 말이 쉽지. 살기를 가지지 않은 상태로 그냥 검으로 그어버리라고? 살기도 안 가진 상태에서 사람을 어떻게 죽여.

“참 귀여운데다 유능하기까지 하지. 우리 토끼는 정말 사랑스러워. 새하얀 게 발톱도 가지고 있잖아. 아, 고양이라고 해야 하나.”

왕이 망언을 지껄였다. 스완은 잠시 자신의 선택이 옳은가를 고민하다 눈을 딱 감았다. 어차피 비빌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

“전하, 제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사생아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럼 죽여.”

왕의 말에 스완이 이번에야말로 눈을 뒤집었다. 그가 왕이고 뭐고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왕이 나른하게 말했다.

“포 백작. 그냥 죽여버려. 그렇게 가지고 놀아서 뭐하게?”

왕이 스완을 바라보았다. 스완은 포 백작에 대해서 엄청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증오는 결국 복수를 이루어냈다. 왕은 스완이 포 백작을 어떻게 살려두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마 포 백작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스완에게 2천 번쯤 빌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저는…….”

“네가 그러고 싶다니 놔두긴 했는데, 정말 쓸데없는 짓이야. 그냥 죽이고 잊는 게 건강에 좋아.”

“저는…….”

“우리들의 모친은 살아 돌아오지 않아. 그녀가 겪은 것의 수천 배에 달하는 고통을 안겨준다? 그거 좋지. 그러나 그녀는 고귀한 사람이었고 포 백작은 그냥 쓰레기야. 포 백작이 아무리 괴로워해도, 그녀만큼 괴로워할 순 없어. 놈은 천성부터 글러버린 놈이니까. 놈에게 먹이는 음식이 아깝지. 밥이든 여물이든 간에 말이야.”

왕의 말은 다 옳았다. 스완은 아무 말도 없이 라파엘 라 쇼어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반항하는 그레이드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검을 거두며 ‘이렇게 하면 돼’라고 몹시 간단하게 말하고 있었다. 딱 보니 말귀가 통할 것 같지가 않다. ……자신도 저런 모습일지 모른다. 그래, 오랜 세월 괴롭혔다. 이미 복수도 뭣도 아닌 것이 되어간다. 이젠 포 백작, 혹은 아버지라 불리는 인간을 처리해야 한다.

“작위를 받고, 이혼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받아들이면 되지. 뭐가 문제야?”

“안드레아가 원하지 않아요.”

“호오, 안드레아.”

몹시 친밀한 호칭이군 하고 왕이 피식거렸다.

“왜, 공작부인 타이틀을 벗고 백작부인이 되는 게 싫대?”

왕이 스완의 복장을 터지게 하는 소리만 골라서 한다. 그러면서도 눈은 자신의 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들이 또 생기길 원하지 않는답니다. 작은아들도 저렇게 되었으니…….”

“저렇게, 가 뭐냐? 저렇게 행복하게? 저렇게 사랑스럽게? 저렇게 완벽하게? ‘저렇게’는 뭘 뜻하는 거냐?”

왕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대꾸하지 않은 채 스완이 말했다.

“다시 아이가 생기는 게 싫어서, 아이를 없애는 약을 먹겠답니다.”

“그걸 먹다가 죽은 여자가 한 다발이라는 걸 뻔히 아는 여자가?”

“또 버리긴 싫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버리긴 싫지만, 죽이는 건 괜찮아? 왕이 코웃음을 쳤다. 스완은 왕의 박대에도 꿋꿋했다. 지금 할 부탁을 생각하면 꿋꿋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드레아가 낳은 아이를…….”

하지만 이 부탁은 정말 제정신으로 할 것은 아니었다. 스완이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기 전에 어떻게 말을 꺼내겠다고 이런저런 연습을 했었는데 이미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뭐라고…….

“좋아.”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왕이 대답했다. 뭐가 좋습니까? 스완이 왕을 바라보자, 왕이 아직도 라파엘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훑으면서 대답했다.

“왕국의 후계자로 삼아주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완이 눈을 크게 뜨자, 왕이 픽 웃었다.

“네가 비빌 데가 나밖에 없잖아. 그 소리 하러 왔겠지.”

“하, 하지만 괜찮,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세자의 자리입니다. 전하께서는…….”

“애 낳으라고 지랄인데, 하나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아무래도 안네마리는 애 낳기는 글렀잖아. 저렇게 가늘고 연약해서 아이를 낳겠어? 왕이 헛소리를 지껄였지만 스완에게는 그의 그런 말조차 루스엔느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사랑의 여신이 그에게 희망을 속삭여주는 목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 정말…….”

괜찮겠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내 아이다. 그 점을 공작부인에게 정확히 알려줘.”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

스완은 기쁨에 떨었다.

헤수스의 후계자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달라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자신의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분명히 또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이가 세상에 발을 딛길 원했다. 비록 자신이 키울 수 없다 하더라도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뿌듯해졌다.

물러가. 왕이 귀찮다는 듯 스완을 쫓아 보냈고, 스완은 지금까지 왕에게 했던 모든 인사 중 가장 우아하고 기쁨에 찬 인사를 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왕의 응접실을 나왔다. 문득, 그 응접실을 나온 다음에야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스완은 고개를 저었다.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스완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면서 이 기쁜 소식을 안드레아에게 전하고, 그녀의 어리석은 계획을 막으러 가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  §  §

안드레아 라 쇼어가 처음 왕후궁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렸다.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를 빌미로 왕후궁에 머무르게 되고…….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배당된 방을 둘러보았다. 과연 왕후궁 문 플레이스다웠다.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넘쳐나는 방이었다.

“아.”

라파엘이 복도를 지나가다 말고 안드레아와 마주쳤다. 검은 옷 일색인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고 안드레아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내리누르느라 애썼다. 문득 라파엘이 “편히 쉬세요”라고 딱딱하게 말했다. 대단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그래도 라파엘은 먼저 안드레아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곧 라파엘이 스쳐 지나갔고, 안드레아는 라파엘의 등 뒤에 멈춰 서서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안드레아가 아이를 낳은 것은 여름이었다. 빛나는 여름, 안드레아는 왕후궁에서 아이를 낳았다. 라파엘은 어머니의 출산에 관심이 없었고, 도리어 관심이 있는 것은 왕이었다. 왕과 스완은 나란히 앉아서 안드레아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를 들었다. 안쪽 침실에서 들리는 소리는, 바깥쪽 응접실 소파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스완이 물었다.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내 아이이니까.”

당연한 말인데도 그 말은 스완의 심장을 찔렀다. 스완이 눈살을 찌푸리자 왕이 실소했다.

“듣기 싫으냐?”

“아닙니다, 전하.”

그럼 됐고. 왕이 다시 응접실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문득 스완은 비밀 양자 건을 허락받았을 때, 왕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두려워졌다. 왕은 그의 아이로 뭘 하려는 걸까.

문득 스완은 왕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왕은 왜 굳이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무슨 일을 위해서? 왕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한가하기는커녕 몹시 바쁜 사람이다. 바쁜 나머지 왕비를 홀로 둘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싫어 왕비를 특수군 대장 자리에 앉힌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굳이 시간을 내서 이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쇼어 대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에는 왕비라기보다는 특수군 대장에 가까운 라파엘을 언급하자, 왕이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임무를 붙였지. 모레쯤 돌아올 거다.”

“전하 곁에서 떠나는 걸 몹시 싫어하시잖아요?”

“하도 곁에 붙여놓으니까 이젠 볼일만 보러 가도 못 참겠기에 조금씩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질까 싶어서. 우리는 오래 살 건데 벌써부터 이렇게 진이 빠져서야 쓰나.”

거짓말. 스완이 의심스러운 눈을 하자, 왕이 싱긋 웃었다.

“반 정도는 진심이야. 난 안네마리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데가 있어서 말이지. 약간만 풀어줘볼까 싶어.”

“……뭘 위해서요?”

“안네마리가 돌아올 거라는 걸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서. 안네마리는 반드시 돌아올 사람이니까.”

“안 돌아오면요?”

“궁금하냐?”

왕이 노려보자 스완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떻게 되는지 일단 너한테 시험해줄까, 라는 눈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 드디어! 스완이 벌떡 일어났을 때, 왕은 이미 일어나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문을 쾅 열고 들어온 왕 때문에 겨우 산고에서 해방된 안드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내 아이를 다오.”

왕의 말에 시녀가 왕에게 강보에 싼 아이를 건네주었다. 안드레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자신이 방금 낳은 아이를 왕이 데려가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왕세자가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갑자기. 아직, 아직 얼굴을 채 보지도 못했는데.

“괴로우냐?”

왕이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으면서 안드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길이었다.

“괴로울 리가 없겠지. 제 아이를 하나 버린 걸로 모자라 죽이려고 했던 대단한 어머니가 아니더냐.”

방금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 왕은 봐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괜히 모정이 있는 척 나불거리거나 하지 말라는 뜻이다. 싫으면 버리고 좋으면 달라붙으면서 아들을 돌려받겠다는 말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유니스 라 버시슬 때는 한 번 넘어갔다만, 두 번은 넘어가지 않는다. 알겠느냐?”

왕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그제야 스완은 왕이 안드레아에게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부탁이 왕을 더 화나게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 깨닫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아, 아이를 돌려주세요.”

안드레아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이가 어떤 얼굴인지 보고 싶었다. 아이를 보고 싶었다. 자신의 몸에 넣어두었던 작은 몸이다. 조심조심 움직이며 소중하게 보호했던 그 작은 아이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러나 왕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이를 안은 왕이 등을 돌렸다.

“잠시만, 잠시만요, 전하! 제발, 잠시만!”

안드레아가 울부짖는다. 태아일 때는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아이를 낳고 나니 보고 싶었다. 그 얼굴을, 단 한 번만 보고 싶었다. 아아, 제발. 제발 기다려주세요! 안드레아가 아무리 울어도, 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날씨는 몹시 화창했다. 본래라면 화사하기만 할 왕후궁이, 한 여인의 울음소리로 계속 어두워졌다.

§  §  §

“아버님, 아버님.”

렌돌의 목소리에, 왕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렌돌은, 아마 안네마리가 낳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얼굴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긴 자신의 동생과 안네마리의 친모가 낳은 아이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렌돌은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의무감이 투철해서 제왕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렌돌은 어머니 격인 안네마리에게서 검을 배우는 걸 더 좋아했다. 안네마리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좋은 선생이라고 할 수 없었는데, 하나뿐인 제자는 그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렌돌의 꿈은 안네마리를 검으로 이겨보는 것이었다. 근위대장인 스완 라 포나 왕세자 호위조 조장인 그레이드가 끊임없이 목표가 너무 높다는 걸 알려주려 했지만, 렌돌은 막무가내였다. 언젠가는 안네마리를 이길 거라며 밤새도록 검을 휘두르다 팔을 들지도 못하게 되는 아들이, 왕은 솔직히 좀 한심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렌돌은 더할 나위 없는 왕세자였다.

“왜?”

왕이 물었다. 왕은 후계자가 필요했고, 안드레아 라 쇼어에게 복수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정말이지 안드레아의 피해자놀이에 진력이 났다. 그녀가 피해자라고? 그럼 안네마리가 가해자라도 된다는 건가, 뭔가! 한 번에 두 가지 효과를 노리며 안드레아의 아들을 빼앗아왔지만 아들은 정말이지 귀여웠다. 왕은 아들을 귀여워했고, 안네마리는 아들을 두려워했다. 안네마리는 이렇게 작은 아이는 자신이 잘못 잡으면 부러질 거라며 손으로 잡지도 못했었다. 그래서 왕이 그 아들을 많이 만져주고, 키스도 해주었다. 안네마리와의 아이라고 생각하자 그저 귀여웠다.

그러나 렌돌은 왕을 존경하긴 하되, 안네마리를 사랑했다. 렌돌은 안네마리를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렌돌에게 안네마리는 일종의 목표였다. 안네마리의 어느 부분이 렌돌에게 감명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렌돌은 안네마리처럼 되고 싶어했다. 검이든 성격이든 안네마리처럼 되고 싶어해서, 아이는 말수가 적었다. 안네마리처럼 조용한 게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왕은 그러려니 하고 렌돌을 내버려두었다. 렌돌은 말을 안 할 뿐이지 못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쿠치아노 신전은 우리나라의 곳곳마다 있는데, 이번에 또 수도에 쿠치아노 신전을 지으십니까?”

또랑또랑하게 묻는 아들을 내려다보던 왕이 피식 웃었다.

“지나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요, 아버님. 아닙니다.”

렌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왕이 렌돌을 들어 올렸다. 왕에게 안긴 렌돌이 눈을 깜빡거렸다.

“단지, 전…….”

렌돌이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말해라.”

“왜 쿠치아노 신전만 많은지 이해되지 않아서요. 다른 대륙은 주신 율레즈의 신전이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쿠치아노의 신자니까.”

왕의 말에 렌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의 아버지는 전쟁신을 추앙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일까? 왕은 렌돌이 궁금해하는 것을 보고 싱긋 웃었다.

“자비로운 전쟁신이 소원을 들어주신 적이 있다. 그 이후론 쿠치아노의 신자가 되었지.”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죄를 짓고 살지. 왕이 속삭였다. 아직 어린 렌돌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계속 눈만 깜빡거렸지만 왕은 더 말해주지 않았다.

저 멀리서 라파엘이 걸어오다가, 왕과 눈이 마주치자 멈춰 서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이제 더 이상 왕은 라파엘이 잘못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왕은 영원한 것들을 보았다. 그것이 영원할지 영원하지 않을지는, 영원히 모르겠지만―그러나 왕은 영원의 숨결을 느꼈었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가린 작은 남자는 덩치가 산만 한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오다 멈춰 선 채로 왕에게 홀려 있었다. 멍하니 홀려서는 걸을 생각도,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는 라파엘이 귀여웠다. 가끔 며칠을 떨어져 있다 만나면 라파엘의 태도는 더욱 애절해진다. 더욱 뜨거워진다. 왕은 이런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라파엘이 궁에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매일 볼 수는 없다. 왕이란 그렇게 한가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왕은 렌돌을 한 팔로 안은 채 다른 한 팔을 벌려 보였다. 왕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웃어 보이자 라파엘이 달려온다. 언젠가 라파엘이 그에게 이렇게 달려와 안기며 몇 번이고 신에게 감사한 적이 있었다. 라파엘은 울면서 말했었다. 잘 모르겠지만, 신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그때 왕은 그를 부둥켜안은 채 어떤 신에게 계속 고맙다고 중얼거렸었다.

역시 수도에 하나가 아니라 두 개는 더 세워야겠어.

왕은 라파엘을 끌어안으며 결심했다. 눈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어느 오후였다.

<후일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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