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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약속의 끝 (45/47)

제20장 약속의 끝

왕의 군대가 밤마다 조금씩 티스 성 바로 앞에 있는 숲에 짚을 모아두기 시작했을 때, 라파엘은 왕세자의 구애를 받고 있었다. 그 구애는 몹시 끈적거리는 것이었다. ‘당신의 입술은 앵두 빛’이라든가, ‘당신은 여신처럼 아름다워. 달의 여신도 당신의 모습을 보며 질투할 것이오’라는 말을 해대며 라파엘을 은근슬쩍 만지려고 들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그러면서 때로 시녀들을 방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 라파엘에게 산책을 권하고, 산책을 할 때마다 라파엘의 머리칼에 코를 묻으려고 들었다. 라파엘이 피하면, ‘당신의 향기에 취했습니다’라며 씩 웃었다. 

라파엘은 그런 왕세자에게 질린 상태였다. 왕을 보면 일을 하고 또 하던데, 이 남자는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것일까. 게다가 툭하면 몸을 만지려고 드는 것도 싫었다. 라파엘은 누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시녀들이나 왕은 괜찮지만, 그 외의 인물은 경계했다. 그는 살수 출신이다.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이 습관이 든 남자이니, 왕세자가 손을 뻗을 때마다 피할 수밖에. 그런 행동이 왕세자의 마음을 더욱 불타게 한다는 생각은 못 한 채.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왕세자가 속삭였다.

“너무나 아름다워. 이그나치오 왕이 총애할 만해.”

왕세자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슬슬 이 왕세자와 있는 게 괴로울 지경이었다. 죽일까? 어차피 죽일 거면 목소리를 못 내게 한 다음에 조금 고문해볼까. 그것만으로도 이 왕세자는 분명 모든 것을 불고 말 것이다. 그러면 간단해지는데. 전부 다 죽이긴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가 나간 다음에 이 티스 성은 노트코로 넘어가게 되는 것인가.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이상합니다.’

시녀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하밀 왕세자 말입니다. 분명 항구에서 만났던 그 사람인데, 분위기가 몹시 달라요. 마치…… 그때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요. 조심하세요, 비전하. 아주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시녀들의 말에 라파엘은 다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충동에 시달렸다. 시녀들은 왕세자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경고했지만, 라파엘에게 위험한 사람은 없었다.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그나치오 왕에겐 아까워.”

왕세자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라파엘은 이미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라파엘은 대충 이 성의 구조를 알 것 같았다. 내내 왕세자와 산책을 하고, 또 밤마다 궁을 정탐하면서 궁의 구조를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궁의 구조를 안다고 해서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할 일이 없어서 이 짓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티스가 노트코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넘어가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전부 죽여버리는 게 가능할까.’

몇 명인지도 모르고,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여기서 빠져나가면 왕은 영원히 실패한 왕이 된다.’

그것만은 싫었다.

생각에 빠진 안네마리 왕비를 보며 왕세자는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 꽉 잡으면 손자국이 남을 듯이 하얗고 가는 팔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당신이 날 유혹한 거야.”

왕세자가 속삭였을 때였다. 갑자기 성벽에 있던 병사가 왕세자에게 소리 질렀다.

“전하, 전하! 군대가 옵니다!”

그 말에 왕세자가 눈을 크게 떴다. 벌써? 헤수스 군대가 티스 근처에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들은 며칠째 움직이지 않고 있어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쳐들어오다니. 왕세자는 문득 그의 옆에 서서 성벽 위의 병사를 바라보고 있는 왕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왕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사실은 헤수스 군대가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것이 기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왕세자의 속이 뒤집혔다.

왕세자가 왕비의 팔을 붙들었다.

“그대는 내 것이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렇게 정했어! 헤수스 군대가 얼마가 오든 그대를 데려가지 못해!”

왕세자가 으르렁거렸다. 헤수스 군대? 아니, 이그나치오 본인이 직접 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왕비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가 그렇게 소리쳤을 때 성벽에서 망을 보던 병사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노트코 군대입니다! 저건 헤수스가 아니에요! 저 깃발은 노트코입니다!”

그 말에 왕세자는 라파엘의 팔목을 움켜쥐고 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라파엘이 쓰는 방에 라파엘을 던져 넣고, 성벽으로 향했다. 벌써 사리스가 알아챘을 리가 없다. 그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돼지에게 벌써 그의 위장이 들통 났을 리가 없다! 심장이 고장 날 것같이 두근거렸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온몸에서 났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왕세자가 성벽에 도착하자 병사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망원경으로 저 멀리 서 있는 군대의 깃발을 본 하밀 왕세자는 눈을 부릅떴다. 깃발은 사리스 왕의 깃발이 맞았다.

“이, 이럴 수가.”

왕세자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들통 나다니, 이럴 수는 없어…….”

왕세자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병사는 활을 꺼내 들었다. 궁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 병사들이 위아래로 뛰어다니는 동안 왕세자는 말도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사리스가 어떻게 알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왕세자의 측근이 뛰어올라와 뭐 하시는 거냐며 잡아끌었다. 왕세자가 그를 붙잡고 애절하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사리스가 벌써 눈치를 챈 거지?

측근이 혀를 찼다.

“이런 식으로 계속 궁을 나와 있는데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셨습니까? 의심 많은 거 알고 계셨잖습니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빨리 눈치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왜일까?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숨기다 왜 갑자기 이렇게 풀려버렸을까. 

“계속 티스 성을 넘기지 않고, 핑계나 대면서 머물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의심을 사고 있었던 상황인데, 왕세자 전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걸 알게 되자 그놈의 의심병이 도진 모양입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의심병만은 아니었다. 사리스는 의심병 환자였지만 이번만은 제대로 짚은 셈이었다. 왕세자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나는 것은 아까 방에 던져 넣다시피 한 왕비뿐이다.

그 여자 때문이다.

왕세자는 생각했다.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섬뜩한 요기가 느껴지는 여자였다. 그 부분이 매혹적이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표정 같은 게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특별한 여자였다.

왕세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측근이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가시자고요!”

“먼저 가.”

“뭘 먼저 갑니까! 전하가 같이 가시기 전엔 전 죽어도 안…….”

왕세자의 검이 번쩍였다. 측근이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측근이 “당신…… 저번에도……?”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여자. 그 여자를 데려가야 해.’

어차피 이번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왕비는 데려가야 한다. 아름다운 여자. 그 얼음 인형을 데려가야 한다. 왕세자는 서둘러 성벽에서 내려와 성주 부인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만은 데려가야 한다.

“이리 와!”

방을 들어서자마자, 왕세자는 왕비의 팔을 붙잡았다. 거칠게 잡았는데도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저 그 검은 눈. 저주가 걸린 거울처럼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검은 눈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 성은 공격받을 거다. 그러니 너는 나와 같이 가줘야겠어.”

“이러지 마십시오, 왕세자 전하!”

시녀장이 그를 만류했다. 그러자 왕세자가 또다시 검을 꺼내려 했다. 시녀장이 왕세자의 눈을 보고 흠칫 떨었다. 눈이 번들거렸다. 광증이다. 그녀는 이미 죽은 에드워드를 떠올리며 숨을 삼켰다. 에드워드도 평소에는 부드러운 남자처럼 지냈지만,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저 미친 눈동자. 시녀장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왕세자가 “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뭐, 뭐, 뭐…….”

왕세자는 자신을 제압한 사람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 아름답고 연약한 왕비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라파엘은 더 이상 왕세자를 참아줄 수가 없었다. 왕세자를 붙잡은 채 죽이려던 라파엘은 갑자기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시녀장은 죽기 직전에 살아남은 사람의 안도와 살해당할 뻔한 자의 분노를 동시에 드러낸 채 왕세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자신의 치마 안쪽에서 총을 꺼냈다. 라파엘이 말리기 전에, 그녀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소리가 났지만 이미 밖은 전쟁터와 다를 바 없이 난리 통이라 그 소리가 크게 들리지도 않았다.

왕세자는 죽기 직전, 왕비를 바라보았다. 왕비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왕비의 손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왕세자는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여자는 여신이 아니라 악마였어. 나를 시험하는 악마……. 그것이 왕세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왕세자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스란히 그 피를 뒤집어쓰고 말았던 것이다. 시녀장이 분노한 얼굴로 목 없는 시체를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라파엘은 그 총을 붙잡았다. 방아쇠를 당겨도 라파엘이 붙잡아 제대로 당겨지지 않자 시녀장은 그를 바라보았다. 시녀장의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라파엘이 한숨을 쉬었다.

“위험할 때 쏘랬잖아.”

아무 때나 쏘라는 게 아니었다면서, 라파엘은 시녀장에게서 총을 빼앗았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녀장을 바라보다 라파엘은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다.

“……난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왕비가 스스로를 답답해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여하간, 괜찮아. 뭐든지 간에.”

왕비의 말에 시녀장이 눈을 감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사람을 죽였다. 총은 너무나 위력적인 물건이었다. 그녀같이 힘없는 평민 여자도 타국의 왕세자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왕족 살해라니, 중죄 중의 중죄다.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녀장이 숨을 삼켰다. 이번만은 괜찮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참을 수 있을까. 그녀는 이제껏 당연히 참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못 참을지도 모른다.

“그 총은 무서운 거예요.”

시녀장의 말에 왕비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운이 좋았던 줄 알아. 잘못하면 반대쪽으로 터진다고.”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라파엘은 발코니로 나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왕의 군대다! 왕에게 들통이 났어!’ 그런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왕? 왕이라고? 라파엘이 돌아보자, 시녀들이 “전하께서 오셨나 봐요!”라고 비명을 질렀다.

“율레즈여, 감사합니다!”

신께 감사드리는 시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라파엘은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 직접 티스를 되찾으실 건가 보지?”

라파엘의 말에 시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말했다. 비전하시죠. 비전하를 구하기 위해 전하께서 오시는 거예요. 아아, 율레즈여, 쿠치아노여. 부디 우리의 왕에게 가호를! 그녀들이 라파엘에게 말하다 하늘에 대고 말하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어법을 사용하는 동안 라파엘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를 구하기 위해 왕이 왔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라파엘은 내내 왕을 구하고 싶었다. 왕을 위해서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유감이었다. 여기에 올 때는 무척 기뻤다. 그를 위해서 바칠 것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불안해하는 그에게 돌아가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이곳으로 왔었다.

그런데 왕이 구하러 왔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따뜻한 물에 잠기는 기분이 들어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왕은 라파엘에게 밝은 세상을 주고, 그것으로 모자라서 이제 그를 구하고 있었다.

‘다시는 이 땅에서 누구도 너에게 이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러지 못하게 하겠다. 그게 나라 할지라도, 너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는 어떤 신의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신이 아니나 신이 될 자이며, 신이 아니나 신이었던 자이다. 그의 이름을 빌어 맹세한다. 그의 존재가 멸하게 되더라도, 이 저주는 남으리라.’

왕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라파엘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 격렬한 맹세가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왕이 그를 지켜주겠다고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은 지금 달려왔다. 아아. 라파엘은 신음했다. 당신에게 주려고 하면 줄수록, 당신에게서 받는 것이 많아진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모든 것을 던져도, 내게 돌아오는 것이 더 많은 것일까.

“옷을 벗겨줘.”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기도하다 말고 시녀들이 그의 옷을 벗겨주었다. 누군가가 라파엘에게 타월을 가져다주었고, 라파엘은 서둘러 피를 닦았다. 그리고 검은 잠행복을 입은 라파엘이 시녀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숨어 있어.”

“비전하께서는요?”

시녀들의 말에 라파엘은 말없이 웃었다.

문득, 시녀들은 라파엘의 미소가 몹시 자연스러워졌다고 생각했다. 전혀 웃지 않던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왕비는 저주를 받았었다. 그 저주가 뭔진 모른다. 쌍둥이로 태어난 것인지, 길드에 얽매여 있던 것인지……. 하지만 왕비의 저주는 풀렸다. 옛 이야기처럼, 왕비의 저주는 왕에 의해 풀렸다. 젊은 연인들은 서로의 저주를 풀었다. 그리고 웃을 수 없었던 왕비는 미소를 되찾았다.

마치 옛이야기처럼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비현실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은……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이겠지.

“전하, 가지 마세요.”

어느 시녀가 그를 붙잡았다. 불안해졌다. 왕이 왕비를 구하러 오는데도 왜 이렇게 불안해질까.

“비전하, 가시면 안 돼요!”

누군가가 또 만류했다. 불길한 기운이 시녀들에게 전염된다. 시녀들이 만류했지만, 라파엘은 또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발코니 창을 열었다.

“여기에 있어.”

한 번 더 말하고, 라파엘은 뛰어내렸다.

“전하! 노트코 군대가 들이닥쳤답니다!”

정탐조가 날려 보낸 전서구를 받은 스완이 벌떡 일어났다. 왕이 지도를 보다 말고 스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눈이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노트코 군대가 왜 들이닥치는데?”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군대가 성을 둘러싸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공격할 것으로 보인답니다!”

노트코 측의 수작이었을 텐데 왜 군대가……. 왕은 벌떡 일어났다. 노트코 군이 얼마나 와 있을지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노트코가 티스 성을 공격한다는 건, 그 안에 있을 안네마리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아니, 처음부터 안네마리의 안위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왕은 막사에서 뛰쳐나왔다. 이제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사하게 구하기 위해서 작전을 짠 것이지, 시체를 보기 위해서 여기 처박혀 있던 것이 아니다. 왕이 말 위로 뛰어오르자 “전하!”라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왕은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왕은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고, 말이 튀어나갔다.

“전하, 기다려주십시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왕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대륙 특유의 모래바람이 뺨을 때린다. 왕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안네마리가 죽을지도 모른다…….

섬뜩한 공포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라파엘이 총을 맞았을 때가 떠올라 왕은 더욱 거칠게 말을 몰았다. 무서웠다. 아직도 그때가 선명하다. 손을 적시던 피, 그리고 희미한 미소. 그리고 끝이었다. 안 돼. 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는 안네마리를 잃을까 봐 너무나 무서웠고, 겨우 안네마리는 그에게 돌아왔다. 그랬는데.

영원한 행복일 줄 알았지. 평생의 행복일 줄 알았지.

평생의 사랑이 평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지. 평생의 사랑이 끝나면, 그 시점에서 평생의 외로움밖에 없는 것을.

왕은 겁에 질렸다. 그는 계속 말을 재촉했다. 그때보다 지금 더, 그는 안네마리를 사랑했다. 안네마리든 라파엘이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사랑했다. 연인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시선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사랑에 빠지고, 우여곡절을 넘어서, 서로의 괴로움을 몰아내주고, 유일한 빛이 되어 인생을 밝혀주는……. 그런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무서웠다. 그가 죽으면 어떡하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하얀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 가는 몸이 피로 물들면, 영원히…… 그 검은 눈을 보지 못하게 되면…….

‘저는 돌아옵니다. 반드시.’

안네마리는 그렇게 약속했다. 그러니 기다려줄 것이다. 분명, 그가 거기에 도착할 때까진 기다려줄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도착하면 무사히 그를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품에 안게 되면 다시는, 절대로 그를 품에서 떼어놓지 않으리라. 절대로.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조금만, 더. 제발, 무사해줘. 거기에 있어줘, 제발.

왕의 말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없이 많은 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라파엘은 잠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왕은 저 멀리서 이 성을 공격하고 있고, 라파엘은 성에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라파엘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눈앞에서는 두 남자가 죽어 있었다. 벌써 라파엘은 여러 명을 살해했다. 왕이 빨리 들어올 수 있도록, 그리하여 왕이 티스를 차지하고 그의 가치를 역사에 증명할 수 있도록. 

엉망진창이 된 성 안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라파엘은 그를 스쳐가는 군인들을 죽였다. 때로는 스쳐가는 군인 중 마지막 군인의 목을 꺾었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그 앞을 달려가는 군인 하나를 낚아채 관자놀이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성 안의 군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달리다 보면 누군가 한 명이 사라졌고, 그래서 되돌아가면 아무도 없는 곳에 그 누군가 한 명이 죽어 있었다. 가뜩이나 절망적인데 무서운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왕세자야. 왕세자가 이런 짓을 하고 있어.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분은 우리의 주군이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대장을 죽였어!”

한 군인의 말에 군인들이 입을 다문다. 사실 군인들도 왕세자가 그들의 대장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세자는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왕세자의 검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었다. 어쩌면 죽은 군인들도 왕세자가 죽였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왠지 그런 생각도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와, 왕세자를 찾자.”

누군가가 제안했다.

그리고 군인들은 갑자기 왕세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수이고, 성을 둘러싼 것은 그들에 비하면 대군이다. 그들은 도저히 저 대군을 이길 수가 없다. 이 상태에서, 그들이 왜 왕세자를 찾기 시작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군인들이 왕세자를 찾으러 갔을 때, 라파엘은 성문으로 달리고 있었다. 마주친 자들을 죽이면서, 라파엘은 이미 몇 명인지 모를 자들의 피가 묻은 검을 든 채 달렸다. 왕이 왔다. 왕이 그를 구하기 위해서 왔다. 티스의 진정한 주인인 왕이 왔다. 왕에게 이 문을 열어줘야 했다.

예전에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라파엘은 성문을 열기 위해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서 돌리는 도르래가 아니기 때문에 한 바퀴, 한 바퀴를 돌리기가 몹시 힘들었다. 노역을 하는 노예처럼, 라파엘은 힘겹게 그 도르래를 돌렸다.

예전에는 생존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라파엘에게는 이제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라파엘에게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지만, 왕에게는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많다는 걸 이제 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거기서 손 떼. 그 누군가가 아마도 성벽에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르래는 거의 다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손을 뗄 수는 없었다.

왕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었다.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도록. 누구도 왕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도록. 

신이여. 제발. 도와주세요.

라파엘은 난생처음 신을 불렀다. 그는 도르래를 거의 끝까지 돌렸다. 그 순간, 뭔가가 날아와 그의 팔에 박혔다. 화살이 박히는 순간, 라파엘은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르래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팔을 움직이는 순간 화살이 팔을 더욱 헤집어 고통스럽게 했지만, 라파엘은 끝까지 도르래를 돌리고 손을 떼었다.

덜컥, 성문이 움직였다. 그리고 성문이 탕―소리를 내며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왕의 군대가 온다. 사리스 왕이 온다!”

성벽에서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사리스 왕? 라파엘이 놀라 성벽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다들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리스 왕? 맙소사. 라파엘은 자신이 한 실수에 아연해졌다. 그는 화살을 맞은 팔을 다른 손으로 잡아 누른 채, 성문으로 걸어 나갔다.

빛이 밝았다. 환한 빛이 정면으로 쏟아져서, 라파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저 멀리서 깃발이 보인다. 그 깃발은 라파엘이 아는 왕의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책으로만 보았던 노트코 왕의 문장이었다. 라파엘은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일이――.

고작 이렇게 죽는 건가.

라파엘은 들고 있던 총을 꺼내 들었다.

왕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든 좋다. 그가 부디 웃고 있길 소망한다.

그는 정확히 선두에 선 남자를 겨누었다. 그가 사리스 왕일지 라파엘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리스 왕이든 아니든, 그는 중요 전력 중 한 명일 것이다.

어차피 팔이 타는 듯 아파서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미 시야는 흐려지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마지막으로 왕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네마리. 그렇게 부르던 그의 목소리, 아름답던 그 얼굴, 그리고 언제나 팔을 벌려 품을 내주던 그의 모습을.

당신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득 언젠가 왕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곁에 있는 것으로 좋다는 그 말. 그는 뭐라고 했었던가. 곁이 아닌 곳에서 죽으면 어떡하냐고 했었던가?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했었지만, 그것은 지키지 못할 약속. 라파엘은 웃었다. 그 자신은 모르지만, 평생 그가 지었던 웃음 중 가장 자연스럽고 환한 미소였다. 자신을 보지 못할 왕을 향해, 그는 미소 지었다.

왕의 얼굴이 몹시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 라파엘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그는 왕의 적을 단 한 명이라도 더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라파엘은 방아쇠를 당겼다.

안타깝고 애절한 슬픔이 아픔을 뒤덮는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날개를 단 듯,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의지로 목숨을 잃는다.

수많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정해진 대로 살면서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때 그는 기계처럼 무감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의지로 한 일로 인해 죽는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마치 운명이 조작한 듯한 실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벽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죽어가므로.

왕을 사랑하다 죽는 것. 그 사랑에 자신을 바치는 것.

그것은 그에게 죽음으로서 완벽한 죽음이었다. 라파엘이 본 그 누구의 죽음보다도 완벽했다. 거의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라파엘은 쓰러졌다. 선두에 있던 남자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건 부디 사랑하는 사람이길 그는 소원했다.

사리스 왕은 숨을 몰아쉬었다. 저건 뭐 하는 놈이야! 그는 깜짝 놀란 상태였다. 그의 바로 앞에 있는 장수가, 저토록 멀리 있는 자의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잘못했으면 자신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무서웠다. 총이라니. 헤수스 귀족인가? 그 왕비와 같이 온 근위병이라도 되는 건가? 뭔진 모르지만 총이라는 건 엄청난 위력의 물건이었다. 왕은 다른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발에 시체가 걸린다. 비록 방금 전까지 자신의 신하였던 남자이지만 이제는 시체에 불과할 뿐. 왕은 발로 시체를 차면서 손을 내밀었다. 신하가 그 손에 재빨리 올려놓은 망원경으로 왕은 군대와 성 사이에 쓰러져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화살을 맞아 피를 줄줄 흘리는 검은 옷의 남자.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사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색 잠행복을 입은 걸로 보건대 분명히 남자일 것이다. 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저놈은 한 명뿐이다. 그 외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뒷문도 포위하고 있으니 나갈 길은 없다는 걸 알 텐데도, 놈들은 굳이 뒷문으로 도망치는 모양이다.

‘흥, 쥐새끼들.’

그 쥐새끼 중에서 가장 더러운 놈이 자신의 동생인 하밀이다. 고분고분하고 멍청해서 왕세자 자리에 앉혀놓았더니 이런 깜찍한 일을 벌였다. 어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헤수스 왕비가 나타나자마자 하밀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개자식 같으니. 내가 왕세자로 올려주었는데, 감히 나를 배신해?

“저건 누구냐?”

사리스가 묻자 장군 하나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뭐, 어차피 죽은 놈. 쓰레기니 됐다.”

사리스가 여상히 말했다. 어차피 곧 티스는 그들의 것이 될 테고, 그와 동시에 동대륙과 남대륙에서도 헤수스 땅을 공격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연합한다면 아무리 헤수스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 이그나치오의 굴욕적인 얼굴을 꼭 보고 싶군그래! 주 바다 경계선을 잃은 왕의 괴로운 얼굴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때, 누군가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아연한 목소리가 구름처럼 퍼져나간다. 사리스 왕은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놈들이 또 뭘 보고 이러는 것인가. 그는 짜증을 내며 남들이 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리스는 곧 “어……?”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사리스의 군대는 2만5천 명이었다. 군대치고는 많은 숫자가 아니지만, 고작 지방의 성 하나 뭉개기에는 상당히 많은 숫자다. 2만5천 명이나 끌고 온 것은, 티스 성 함락보다는 왕이 진두지휘하는 만큼 그 위세를 과시하려는 면이 더 컸다. 그런데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다들 입을 벌린 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티스 성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절벽 위,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이 절벽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절벽을 ‘뛰어’내려올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깎아지른 절벽을 정말 달려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워져올수록 2만5천 명의 군대는 당황했다. 일단 다가오고 있는 것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컸다. 웬만한 바위는 그냥 들고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거인들이었다.

“저, 저게 뭐야?”

“괴물, 괴물이…….”

사리스 왕은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자신이 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그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히 죽은 것 같았던 검은 옷의 남자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가! 그림자가!”

남자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양손 부분이 길어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남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검은 그림자는 계속 길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갑자기 땅에서 떨어졌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남자의 양손에 하나씩 잡혔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갔다.

“검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그림자는 검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완벽한 검이 되어 변형을 멈췄다. 검은 아주 컸다. 남자의 몸만큼이나 커 보였다. 양손에 검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검은 남자, 그리고 뒤에서 달려오는 거인들.

거인들은 얼굴 중앙에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쿠치아노…….”

장군 한 명이 중얼거린다. 외눈박이 거인족을 부하로 삼은 전쟁신 쿠치아노. 대단히 풍채가 좋은 인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지금 저기 서 있는 검은 옷의 남자는 쿠치아노였다. 헤수스의 수호신인, 유일하게 대륙을 버리지 않은 전쟁신.

“말도 안 되는!”

사리스가 노성을 터뜨렸을 때였다. 거인들이 벼랑을 내려와 달려오기 시작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 소리에 귀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검은 옷의 남자를 두고 파도가 밀려오듯이 다가오는 거인들을 보며 사리스의 군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막아! 화살을 쏴! 장수들의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고 있었다. 왕을 지키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리스는 말에 올라타 등을 돌렸다.

괴물이…….

사리스가 말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을 때였다. 조금 전까지 성과 군대의 중간 지점에 서 있던 흑의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자 사리스는 몇 번이나 말을 재촉했다. 어떻게든 말을 출발시키려 했지만, 말은 왠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가 사리스에게 말했다.

「너는.」

그 목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머리로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쿠치아노…….”

사리스는 절망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북대륙의 수호신이 나타났다. 전설인 줄 알았는데, 북대륙의 수호신은 정말 존재했다.

「티오안의 적인가?」

티오안이라면 그 태양신 말인가. 사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태양신 티오안의 적이냐니. 그는 서대륙 노트코의 왕이었다. 티오안의 적이기는커녕, 티오안의 추종자였다. 티오안의 후예였다. 그러니 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서대륙의 왕, 티오안의 추종자입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검은 남자―쿠치아노는 준엄한 시선으로 사리스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사리스는 안심했다. 쿠치아노가 그를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티오안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겠구나.」

쿠치아노의 검이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치 춤을 추는 듯이 우아하게, 검은 허공을 베었다. 그렇다, 그림자 검은 분명 허공을 베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리스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왜 자신의 가슴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걸까.

“거기 서…….”

사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쿠치아노는 이미 사리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쿠치아노는 달리지도, 뛰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었는데도, 순식간에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 쓰러졌던 지점을 이미 지나버린 쿠치아노를 보며 사리스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긴 싫어…….

그는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팔을 허우적거린 덕분에 죽음이 좀 더 빨리 찾아왔다. 그의 몸이 고꾸라졌다. 죽지 않기 위해 그는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자신의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발버둥을 치다가 머리부터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래도 그는 고상하게 죽은 편이었다. 신이 직접 칼을 휘두른 대상이라는 것이 고상하다 할 수 있었다.

그 주변은 초토화였다. 거인족은 손쉽게 인간들을 죽였다. 2만5천 명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도망치던 병사들도 잡혀서 죽음을 당했다. 거인이 한 번 도끼를 휘두르면 인간 몇이 그대로 죽어버렸다. 인간들이 거인의 팔이나 다리 따위에 화살을 쏘아도 거인들은 간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살육이었다.

성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엉망진창이었다. 거인족은 서대륙의 인간들을 몰살했다. 순식간에 주변에서 서대륙 사람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쿠치아노는 천천히 걸었다. 주변에서 비명 소리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그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똑바로 걸어 올라간 그는, 딱 한 번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안쪽에 있던 시녀들이 “비전하! 돌아오셨군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쿠치아노는 그녀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시선도 마주하지 않은 채, 그는 마치 자신이 문을 열어주려고 왔다는 듯 등을 돌렸다.

티오안이 없군.

긴 잠을 자고 깨어났는데 티오안이 없다. 그는 티오안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고, 그 자신이 각성했다는 것은 티오안을 만났다는 뜻이 될 텐데 티오안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지? 왜 이런 인간들의 싸움터에서 각성한 것이지?

분명히 아까 티오안이 그를 불렀었다. 티오안을 만났다는 생각에 쿠치아노는 잠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몸은 피를 흘리고 있고, 정신은 이미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듯하다. 티오안만 만난다면 이 몸이 죽든 살든, 그건 쿠치아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는 그저 티오안을 만나서 천계로 데려가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쿠치아노가 다시 성을 나왔을 때에는 거인들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끝내고 마지막에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주인인 쿠치아노를 바라보면서 서 있는 동안 쿠치아노는 멀리 보이는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티오안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전하! 뒤에서 계속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 채 왕은 달리고 있었다. 제발, 무사히 있어줘. 제발. 그는 기도하고 기도했다. 저 멀리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숲을 지나면 바로 티스 성이었다. 말이 미친 듯이 달린다. 말이 쉬려고 할 때마다 왕은 채찍으로 내리쳤다. 말이 부러진 나무 기둥을 펄쩍 뛰어넘으며 바람처럼 달렸다.

티스 성이 보이고, 그 성을 향해 달리던 왕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성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거인들도 보고 말았다. 외눈거인족. 그들은 쿠치아노의 추종자들이 아니던가. 모래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사이로 왕이 무사를 기원하고 기원했던 연인이 서 있었다.

“쿠치아노…….”

그러나 그는 왕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의 두 손엔 검은 검이 들려 있었다. 그의 몸만큼이나 큰 검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쿠치아노의 대검을 보며 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둠과 죽음의 신 키탄이 내어준 어둠을 천계의 대장장이가 오래도록 고심하여 만든 쿠치아노의 대검. 그것은 아무리 라파엘이라도 도저히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의 무기, 전쟁신의 상징. 그것은 저 사랑스러운 육체를 쿠치아노가 다루고 있다는 뜻이 된다.

「티오안.」

쿠치아노가 왕의 머릿속으로 속삭였다.

「네가 나를 불렀어.」

한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왕의 머릿속을 메웠다. 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부르지 않았다.”

왕이 굳은 얼굴로 말했지만 쿠치아노는 듣지 않았다. 왕을 쫓아온 신하들이 외눈 거인들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전설의 재림이었다. 외눈 거인들, 그리고 자신의 몸만큼 큰 양검을 든 흑의의 남자. 비록 그들이 동상으로 본 것과는 달랐으나 그것은 분명히 전설의 한 장면이었다. 전쟁신 쿠치아노가 그를 숭배하는 외눈 거인족과 함께 서대륙에 나타났다. 헤수스의 영화를 위해서.

「너의 목소리가 들렸어.」

쿠치아노가 무표정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늘 무표정했지만, 사실은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왕은 언제나 그 표정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치부터 기쁨까지, 모든 것이 그 얼굴에서 휘몰아쳤다. 순진하고 솔직한 연인은 무표정 속에도 감정을 드러내곤 했었다.

그런데 알아볼 수가 없다.

저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다. 아무리 보아도, 사랑하고 사랑했던, 왕이 지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고 왕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익숙한 타인의 얼굴에 왕은 진저리를 쳤다.

“나는 너를 부른 게 아니야!”

왕의 말에 쿠치아노는 의아한 눈을 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티오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기 위해 그는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티오안은 그를 부른 게 아니라고 한다.

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전쟁신은 눈을 가늘게 뜬다. 지나치게 인간다운 태양신을 바라본다.

「너는 각성했어. 나는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말에 티오안이 고개를 젓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존재가 저 멀리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저 존재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가 원한다 말하면 자신은 그것을 하고 있었다. 지루한 모든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이가 저 멀리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율레즈는 너를 용서하셨다. 너는 굳이 인간으로서 살 필요가 없어.」

쿠치아노는 천천히 티오안에게로 걸어갔다.

히익, 신하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왕은 쿠치아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쿠치아노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지만, 마치 공간이 그의 앞에서 쪼그라들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왕에게 가까워졌다. 왕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쿠치아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안네마리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저 몸을 안은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멀게 느껴진다.

안 돼……!

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안네마리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안네마리, 혹은 라파엘 에반스의 완벽한 소멸이다. 신은 그릇을 부술 뿐, 재사용하지 않는다. 신을 담은 그릇은, 신이 발현하는 순간 그 수명을 다하기 시작한다. 안 돼. 왕은, 티오안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티오안, 너를 데려가기 위해 내가 왔다.」

쿠치아노가 말한다. 

“나는 가지 않아.”

왕이 이를 악물었다. 

쿠치아노는 티오안을 올려다본다. 그는 지나치게 인간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양신은 그 누구보다도 신다웠다. 그는 아름답고 오만한데다 전능했다. 재미로 벌인 전쟁에 전쟁신을 참여시키면서도 그는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기 싫으면 관두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는 언제나와 똑같이 불손하기만 했다. 포르타미스를 용암에 재우는 동안에도 그는 늘 여유로웠다. 가벼운 어깻짓 한 번으로 전능한 신의 권력을 놓아버릴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사내는 왜 저렇게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모래바람이 분다. 쿠치아노는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한 번으로 불던 모래바람이 갑자기 멈춘다.

「어째서?」

쿠치아노가 물었다.

왕은 쿠치아노를 내려다보다 말에서 뛰어내렸다. 문득 그는 쿠치아노가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쿠치아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상대는 율레즈 정도였는데.

왕은, 아니, 티오안은 쿠치아노를 똑바로 바라본다. 검고 자그마한 신은 엄청난 위압감을 뿜으며 눈앞에 서 있었다. 그가 여기 오는 것을 율레즈는 결코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티오안을 데려가기 위해서.

티오안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추종자를 바라본다. 쿠치아노는 언제나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달려온다.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의외였지만, 새삼 그를 보자 이 사내의 추종이 얼마나 맹목적인 것인지 생각이 났다. 마지막 순간, 용암 지대에서 쿠치아노를 바라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티오안은 거기까지 달려와준 쿠치아노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었다.

티오안은 입을 열었다.

“쿠치아노. 내가…….”

쿠치아노의 검은 눈이 크게 뜨인다. 그도 티오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마지막 순간에 티오안이 입을 다물었던 그 말이 다시 티오안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한 번 너를 만나게 된다면.”

티오안의 말에 쿠치아노의 검은 눈이 일렁인다. 언제나 티오안을 바라보면서도 한 번도 티오안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던 전쟁신이 숨을 삼킨다. 문득 전쟁신이 몹시 가련한 존재로 보였다. 율레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어느 누구보다 고귀한 존재이면서, 왜 전쟁신은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티오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 운명은 신조차도 피할 수가 없다. 신도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절대로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때는 다른 형태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자의 운명을 바꾸어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 사랑하는 자를 만나는 것 또한 운명적인 일이겠지만.

쿠치아노가 멍하니 티오안을 바라보았다. 티오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쿠치아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불렀고, 나는 여기에 왔다.」

쿠치아노가 말했다. 몹시 고통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마 이 전쟁신은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티오안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미안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쿠치아노가 조금이라도 빨리 라파엘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라파엘의 몸에 더 무리가 가기 전에, 쿠치아노는 사라져야 했다. 라파엘이 죽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라파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을 되돌릴 수 있다면, 티오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돌아가라, 쿠치아노.”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의 말에 따라주었던 전쟁신의 마음을 부수는 것 따윈 몇 번이라도 할 수 있다. 라파엘을 다시금 돌려받을 수 있다면.

티오안은 쿠치아노의 얼굴이 아프게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실낱같은 죄책감이 잠시 티오안의 마음을 스쳤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은 신인가, 인간인가.

티오안은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인간 같기도, 어쩌면 신 같기도…… 어쩌면 괴물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존재이든 그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돌아가.”

쿠치아노는 언제나 티오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티오안은 그것을 흥미로워할지언정 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진 않았다. 그럴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달려와준 쿠치아노에게 감사했고 다른 관계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만한 티오안의 ‘자비’로운 생각이기도 했다. 티오안은 쿠치아노에게 관계를 베풀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랬다는 것을 안다.

사랑은 사람을 절박하게 만든다. 쿠치아노에게 느꼈던 감정은 흥미,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쿠치아노가 아니었다. 라파엘은, 안네마리는 쿠치아노가 될 수 없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자아. 그리고 티오안은 안네마리를 돌려받아야 했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한가.」

쿠치아노가 물었다.

티오안은 그의 시선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티오안은 그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티오안은 그저 먼 곳에서 웃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웃는 것은 아니되, 손을 뻗어주지도 않았다. 마지막까지 달려가자, 티오안은 처음으로 쿠치아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내가.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태풍이 티오안을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티오안이 남긴 그 한 마디뿐이었다. 내가. 티오안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쿠치아노는 또다시 달려와야 했다. 그는 다시 달려왔다. 티오안을 향해, 가능성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질주를 시작했다. 분명 다른 신들은 그의 행동을 보며 내기 따위를 걸고 웃을 것이다.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티오안에게로 향하는 길은 늘 그런 식이었지만, 그래도 그 끝은 분명 나름대로 티오안과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가장 가까운 곳까지 이어진 길에서 티오안이 그를 거부한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육체다.”

티오안이 말한다. 힘들고 괴로운 길 끝에 선 티오안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쿠치아노에게 말한다.

“사라져.”

쿠치아노는 말없이 티오안을 바라보았다.

여기 서 있는 것은 누구인가. 태양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되어도 여전히 오만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는 몹시 절박해 보였다. 아아. 쿠치아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이 인간인가. 자신이 숙주로 선택한 이 인간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그러나 그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자신과 거의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어째서 그는 이 인간을 선택한 것일까.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티오안의 잔인함이 옮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인간은 화살을 맞은 채 죽어가고 있다. 그가 조금만 더 이 인간 안에 머무른다면 인간은 확실히 죽을 것이다.

「나와…… 이 인간의 차이가 뭐지?」

쿠치아노가 물었다. 티오안이 단호히 대답했다.

“너희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점이 아무것도 없어.”

쿠치아노가 눈을 감았다.

전쟁신의 불편한 심사에 거인족들의 낌새가 이상해진다. 거인들이 적을 찾듯이 두리번거리는 걸 보며 신하들이 숨을 삼켰지만, 왕은 도리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의 연인을 돌려주지 않겠다면, 나를 죽이는 게 차라리 낫겠지. 너는 그걸 원하는 건가?”

티오안이 물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티오안의 시선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내 연인은 돌려다오. 나는 그를 안고 같이 죽을 테니.”

쿠치아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길고 긴 한숨이었다.

언제나, 언제나 이렇게 티오안은 붙잡힐 듯 붙잡히지 않는다. 태양을 안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눈만 멀 뿐이다. 자신은 도대체 티오안에게 뭘 바라는 것인가. 자신은 왜 티오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자신은 왜 티오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게 되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외면해도, 왜 결국은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는가.

쿠치아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육체 안에서 여러 번 눈을 떴었다. 왕이라는 인간은 티오안과 비슷했다. 그 인간이 이 육체를 사랑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가 너무나 이 육체를 사랑하고 사랑해서, 이 육체에 담긴 혼을 애지중지해서, 쿠치아노는 의아했었다. 그리고 점점 이 육체를 차지하고 싶어졌다. 저 사랑을 직접 받아보고 싶었다. 티오안과 닮은 인간이, 어쩌면 티오안일지도 모르는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는 걸 보고 싶었다.

사실은 티오안이 그를 부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그가 이 육체를 차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만한 핑계를 찾고 있었으니, 뻔뻔하게도 이 육체를 차지해서 자신이 직접 그 열렬한 감정을 한 몸에 받아보고 싶었는지도…….

「나는 또 물러가지만.」

쿠치아노가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거인족들이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티스 성에서 물러나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거인들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티오안이 쿠치아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후에 내게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티오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라도 해줄 것이다. 다시 인간이 되더라도, 아니, 영원히 가축으로 살아가더라도 좋았다. 태양신의 드높은 자존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가장 추악한 벌레로 영원히 살아도 좋았다. 다시 한 번 안네마리를 돌려받을 수 있다면.

쿠치아노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는 인간의 육체에 모습을 감춘 채 웃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상대는 그 웃음에 아무런 화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라파엘은 다시 쓰러졌다.

“안네마리!”

왕이 한달음에 달려가 쓰러지는 라파엘을 부축했다. 피가 너무 많이 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옷자락을 적시는 피에 왕은 새하얗게 질렸다.

“누가, 누가 도와다오! 뭘 보고 있는 거냐! 당장 오란 말이다!”

왕이 비명 섞인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지?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돌리자 왕이 왕비를 안은 채 모래바닥에 무너지고 있었다. 전하! 사람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왕에게로 달려갔다. 어느새 모래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성에서 나오던 시녀들이 “비전하!”라고 비명을 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수없이 죽은 모래벌판 위에서 모래바람이 불고, 산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향해 모여들었다. 태양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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