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장 납치 (44/47)

제19장 납치

헤수스에서 안네마리 왕비의 납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이었다. 

스완은 잠시 마법 새가 물고 온 종이를 보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몹시 간단한 문장이었다. ‘왕비 납치당함. 명령 대기 중.’

그 서신은 최고속도로 날아왔다. 왕비가 납치된 지 이틀 만에 온 서신이었다.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내용의 서신인데, 스완은 정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죽고 싶었다.

안네마리 왕비가 납치당했다. 맙소사. 스완은 율레즈를 찾으며 서류를 집어던졌다. 당장은 서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왕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는가. 스완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왕비가 납치를――아니, 근데 그 양반은 대체 왜 납치 같은 걸 당해준 거야!

스완은 라파엘이 힘이 없어서 납치를 당했을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도대체 50명이 넘는 인원을 어떻게 따돌리고 납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라파엘이 납치를 당해주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그는 라파엘의 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스완은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드러누웠다. 왕이 펄펄 날뛸 걸 생각하자 서류고 나발이고 꼴도 보기 싫었다.

‘납치를 당했느냐, 당해준 거냐 따윈 전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그저 결과만 중요할 뿐. 그리고 납치를 당해줬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에는 그런 소릴 해봐야 왕은 더 화를 내고 말 것이다. 스완은 잠시 괴로워하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차피 내일이면 보고해야 하는 건을, 왜 자신 혼자서 괴로워한단 말인가. 솔직히 그는 왕비를 보내기 위해 악역을 자청해서 맡았었다. 그거면 됐지, 그가 무슨 인격자라고 계속 이런 괴로운 역할만 맡아야 한단 말인가. 스완은 집무실을 나섰다.

대신들은 요즘 회의실을 벗어날 수 없을 지경으로 바빴다. 물론 벗어나기도 했지만, 회의실에는 누군가가 늘 있었다. 어디론가 갔다가도 회의실로 돌아오고, 많은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야 할 때도 회의실에 들어오면 두 번에 한 번은 협조를 받아낼 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점심시간 직후 사람이 가장 많을 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워낙 스스로의 일이 바쁘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지라 아무도 그쪽에 시선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스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얼마나 화급한 일이든 간에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일할 의욕이 바닥을 기게 되리라고.

“주목해주십시오.”

스완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최악의 소식입니다. 비전하께서 납치당하셨습니다.”

그 순간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멍하니 스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모두를 압사시킬 것처럼 내리눌렀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제럴드 라 쇼어 외무대신이었다.

“……라…… 아니, 안네마리 비전하 말입니까? 제 여동생인?”

“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제1왕비 전하께서 납치당하셨습니다. 마법 새를 이용한 최고속 서신입니다.”

스완의 말에 누군가가 서류를 떨어뜨렸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비가 혼자 납치당하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왕비가 납치당한 것도 큰일이지만, 왕이 화를 낼 걸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관을 미리 짜놔야겠어.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왕은 왕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도대체 왜……?”

누군가가 물었고, 스완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 새는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한 번에 날아오는 새였지만, 그 새의 단점은 그냥 종이가 아닌 마법지에 글을 적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법지는 긴 글을 적을 수 없었다. 사실 스완은 그레이드에게 마법 새를 주었을 때 그레이드가 그걸 써먹을 상황이 정말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데…….

“현재 안네마리는 무사합니까? 현재 위치는 확인되었습니까?”

제럴드가 물었다. 여기서 안네마리 왕비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아무리 왕비가 고귀한 여인이라 해도 자신의 목숨보다 중할까, 왕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과연 살 수는 있을까―를 생각하며 벌벌 떠느라 왕비의 안위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위치는 티스 성인 듯하지만, 무사한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스완의 말에 제럴드가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외무대신인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보고 경로를 이용할 것이 분명했다. 제럴드가 나가자, 이제 회의실에 남은 자들은 모두 스스로의 생존을 바라는 자들뿐이었다.

제이슨 리아스가 패닉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도 의아한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렇겠지. 스완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이해가 안 간다. 그 라파엘 에반스가 왜 그런 놈들에게 붙잡혔는지.

제이슨이 흘끗 벽을 눈짓하고 조심스럽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스완은 약간의 시간을 더 끈 다음에 회의실을 나섰다. 옆방으로 들어가자 제이슨이 초조한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납치라니요.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라파엘 에반스를 그렇게 쉽게 납치할 수 있다면, 살인 기계의 악명이 그토록 드높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제이슨은 벌써 몇 번이나 라파엘의 실력을 보았었다. 다른 데는 맹해도 잠입, 보안, 고문, 살인 등에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던 라파엘이다. 왕궁의 보안을 강화하고, 암살자들을 막아내고, 첩자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낼 때의 라파엘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라파엘이 고작 도적으로 위장한 군인들에게 잡혀간다고? 그럴 수 있었다면, 헤수스 수도방위군은 애초에 라파엘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상황을 몰라.”

“상황을 모르시다니요. 그레이드가 근접 호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레이드가 알려줘서 납치 사실을 안 거야. 그 외에는 알 수 없지. 납치당한 지 이틀밖에 안 지났고.”

제이슨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왕비를 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왕의 얼굴뿐이다. 왕이 얼마나 이성을 잃을까 생각하자 정말 환장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왕비를 한 번 잃을 뻔했을 때 왕이 했던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두고 보았던 쇼어 가문을 쓸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포 대장 밑에나 있었지.’

당시 그는 스완의 바로 밑이었고, 왕과 마주하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스완의 명에 따를 뿐 특별한 걱정을 하진 않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윗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왕은 왕대로 왕비는 왕비대로, 게다가 옆에서 포 대장조차 그를 괴롭혔다.

“전하께서 아시면…….”

아니, 그보다도 누가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하는가?

제이슨은 당면한 문제에 놀라 스완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죽어도 못 한다. 아무리 근위대 대장 대리라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죽어도 못 한다. 제이슨이 머리를 흔들었다. 제이슨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스완이 “내가 할 테니 그만해. 보기 흉하다”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제이슨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회의 중에 보고할 거야.”

스완의 말에 제이슨이 눈을 크게 떴다. 미리 보고하지 않겠다고? 제이슨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고 스완이 혀를 찼다. 당연한 듯이 남에게 총대를 메라는 건 무슨 심보냐. 스완은 코웃음을 쳤다. 이 상황에서 혼자 짊어지길 기대하는 쪽이 미친 거 아닌가?

제이슨은 스완의 냉소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지나친 기대라는 건 알지만 스완과 왕은 몹시 친한 사이가 아니던가. 둘은 혈육이기도 했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더라도 둘은 혈육이니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라서, 제이슨은 결국 “예……”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밤, 제이슨 리아스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차라리 내일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어린애 같은 바람을 계속 되뇌며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찾아온 다음 날, 멸망은 고사하고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온 제이슨은 그 화창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하늘이 자신이 보는 마지막 하늘일 것만 같았다. 엄마, 안녕……. 제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 대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자네, 괜찮나?”

저 멀리서 다가오던 제럴드 라 쇼어 외무대신이 미간을 좁혔다.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에 서서 멍하니 창을 바라보고 있는 제이슨 리아스가 한심한 듯했다. 쇼어 공작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제이슨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미쳤나?’

제럴드는 조금 걱정이 되어 제이슨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발이 선 눈까지, 아무래도 잠도 못 자고 고민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거야 모두가 마찬가지일 텐데, 왜 유독 이 남자는 티를 내는 것인가. 제럴드는 동생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제럴드 자신보다 남자가 더 괴로워 보인다. 어째서? 그는 왕의 반응만을 걱정하면 될…….

……아아, 뭔지 알았다.

“그렇게나 목숨이 중한가?”

제럴드의 빈정거림에 제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목숨이 중요하지, 그럼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하긴, 제럴드 라 쇼어는 쇼어 가문의 인물이다. 평민의 목숨 따윈 중요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제럴드가 제이슨을 창문으로 밀쳤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쇼어 외무…….”

“내 동생이 거기서 고초를 당하고 있는데, 너는 이 안전한 왕궁에서 안위가 걱정되느냐?”

제럴드의 말에 제이슨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아, 그렇다. 왕비는 사실 제럴드 라 쇼어의 남동생이었다. 제럴드의 잘생긴 얼굴에 경멸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제이슨은 혀를 찼다. 낭패감이 들었을 때 제럴드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먼저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물론 목숨은 중하고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외무대신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동생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섭다고.’

솔직히 제럴드 라 쇼어도 좀 무서울 것이라는 데 제이슨은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 자신의 동생이 무사한지도 걱정이 되겠지만, 당장 왕이 난리칠 것도 걱정이 될 것이다. 안 될 수가 있나. 왕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제이슨은 멱살을 잡혔던 곳을 툭툭 손으로 털어냈다. 그리고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부디, 오늘 왕의 기분이 좋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리 좋은 기분이어도 그는 곧 최악의 기분을 맞겠지만.

제이슨이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회의실은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왕비가 잘못되면 떡갈나무 관이나 준비하라고 했던 재무대신의 얼굴이 특히 어두웠다. 그나마 괜찮은 사람은 스완과 제럴드였는데, 스완은 이미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고 제럴드는 동생의 안위까지 걱정하느라 지금 당장 왕의 반응에 그렇게 겁먹지 않았던 탓이다.

“전하께서 오십니다.”

시종의 알림에 모든 신하들이 일어섰다. 다들 사색이 된 얼굴로 숨도 쉬지 못하고 문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그 발소리에 차라리 이 순간 심장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누군가는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의 심장도 멎지 않고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은 상태로 몇 분이 더 흘러서 왕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  §  §

헤수스의 이그나치오 왕이 진노하였다는 소문은 티스까지 흘러들어왔다. 이그나치오 왕의 진노는 주변국을 벌벌 떨게 하고 있었다. 살육자. 이그나치오 왕의 즉위 당시 붙었던 별명이었다. 그 이후 내치에 힘쓰는 이그나치오 왕의 특성상 저 별명은 쑥 들어가고 말았지만 한때는 그의 별명이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었다. 즉위하자마자 피바람을 일으킨 이그나치오 왕을 잊은 이는 아무도 없다. 언제나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던 한량 같던 인물이 즉위하자마자 인간 청소를 시작했으니, 세계가 벌벌 떨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이그나치오 왕은 다른 왕들과 비슷했다. 가끔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띄진 않았다. 대단한 독설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본인도 열심히 일하는 왕이었다. 귀족과 왕, 신전으로 이루어진 체제는 내내 다툼이 끊이질 않았고 그 다툼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그나치오 왕은 그 체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고, 귀족과 신전을 내내 저울질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지켜나갔다. 그는 냉혹하면서도 유능한 왕이었다. 이제까지 이그나치오 왕은 진노한 적이 없었다.

“그 이그나치오 왕이 진노했다는 겁니다. 헤수스의 대장군이 직접 군대를 소집했다는 소식입니다.”

“전쟁인가.”

왕의 측근들에게서는 병신 취급을 받는 왕세자는 티스에 있었다. 티스 성에 앉아서, 왕세자는 주의 깊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 이 일은 왕세자의 측근들이 꾸민 일이었다. 물론 노트코의 사리스 왕은 이 계획을 듣고 몹시 좋아했다. 이그나치오 왕이 되고 싶어하는 그로서는 덥석 물 만한 미끼였던 것이다. 실패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사리스 왕은 무모하게도 이 계획을 실행했다. 티스를 가진다니! 그렇다면 그는 이그나치오 23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군으로 역사에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저 무도한 헤수스의 손에서 티스를 구해낸 영웅으로!

“이그나치오 23세는 안네마리 왕비를 몹시 총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달 전엔 왕에게 허락 없이 왕비에게 알현을 요청했던 귀족 자제를 그 자리에서 죽였던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

“드디어 전쟁인가.”

하밀 왕세자가 씩 웃었다.

그의 형 사리스는 이그나치오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이그나치오를 미워했다. 정말 애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그나치오는 그 존재도 모를 애증. 그러나 하밀은 달랐다. 그는 이그나치오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이그나치오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이그나치오의 처세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을 뿐이다. 힘이 없을 때는 가장 무력하게, 힘이 생기는 즉시 휘어잡는 법을 그는 배웠다. 이그나치오는 정말이지 놀라운 인물이었다. 20년 가까이 멍청이처럼 살고, 패권을 잡자마자 적들을 잔혹하게 처리했다. 왕세자는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이그나치오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티스 성은 비워질 것이다. 왕비만 남은 티스 성을 본 이그나치오 군대가 왕비만 데리고 돌아갈까? 아니, 그들은 그대로 노트코로 향할 것이다. 신력을 가진 이들이 화기를 다루는 헤수스 군대를 도대체 무슨 수로 노트코가 막겠는가. 게다가 헤수스 왕은 바닷가의 모래만큼 돈이 많은 자였다. 그 엄청난 재력으로 군대를 동원해 밀어붙일 텐데 노트코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헤수스 왕이 나라를 뒤흔드는 사이, 그는 사리스를 처치하고 노트코의 왕위에 올라 이그나치오와 협정 체결에 들어갈 것이다. 체결을 잘 마치면, 그는 노트코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왕비는 어디에 있지?”

하밀의 말에 병사들이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는 얼굴이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사실은 여기에 오면 안 되었다. 사리스는 의심이 많았고, 그는 자신에게 늘 감시를 붙여두고는 했다. 감시를 따돌리고 오긴 했지만, 그런 행위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왕세자 전하,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왕비와 협정을 체결하는 척하며 왕비를 끌고 왔던 군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몹시 위험한 계획이다. 하밀은 가능한 한 왕궁에서 멍청이인 척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주군이 갑자기 이상해진 듯하다.

“아아, 일단 안네마리 왕비를 보고. 그녀는 어디에 있지?”

“일단 탑에 가뒀습니다만.”

“저런, 가엾게.”

하밀이 혀를 찼다. 군인이 지금 누구를 가여워하느냐는 얼굴을 했지만 하밀의 시선을 받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밀은 사리스와 같은 피를 타고났다. 하밀이 사리스에 비해 훨씬 장점이 많았지만, 아랫사람의 대꾸 한 마디도 못 참는 것은 사리스와 똑같았다. 하밀이 오만한 얼굴로 고갯짓을 했다. 안내하라는 그 제스처에 군인이 어쩔 수 없이 앞장을 섰다.

좁은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서야 겨우 탑의 골방을 막은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왕세자는 안네마리 왕비가 어쩌고 있을까 생각했다. 얼음 같은 얼굴이 눈물에 푹 젖어 있을까. 침대에 쓰러진 채 흐느끼고 있을까. 그 흐느끼는 어깨는 얼마나 가련할 것이며, 눈물에 젖은 뺨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 것인가.

‘아아, 아쉽구나.’

이번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안네마리 왕비가 반드시 무사해야 한다. 그래야 하밀이 왕위에 올랐을 때 협상이 가능할 것이다. 안네마리 왕비가 손톱 끝이라도 다치는 날엔 협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울고 있는 그녀는 너무나 애처롭고 귀여울 듯한데.’

왕세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군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쩌고 있지?”

왜 왕비에게 관심을 보이지? 군인은 불안한 눈으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왕세자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 지금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걸려 있는데, 왕세자가 이그나치오 왕의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바람에 그 모든 계획을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무서울 정도더군요.”

군인의 말에 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섭다니. 그녀가 탈진이라도 할 것 같단 말인가?”

“직접 보시죠.”

군인이 문에서 조금 비켜섰다. 하밀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철창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안네마리 왕비는 연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허름한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였다. 허공을 가만히 직시하면서, 그녀는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울거나 괴로워하거나 공포에 질린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별명이 인형 왕비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사실 ‘까마귀 왕비’라는 별명이 더 유명해서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까마귀 왕비?”

하밀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그나치오 왕이 그녀를 너무나 총애해서, 보석을 계속 안겨다준다고 합니다. 헤수스 궁정 사교계에서는 안네마리 왕비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생각하기 때문에―아무래도 그 마리 트리지아 왕후와 비교를 당하고 있으니까요―까마귀에게 보석을 안겨준다는 식으로 빈정거리는 모양입니다.”

하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왕비를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저렇게 매혹적인 여인이 있을까. 그의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 모습은 고고한 여신과 다를 바 없었다. 저 여자가 이그나치오 왕의 총비. 과연 그 남자는 여자를 보는 눈이 있었다.

라파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리는 대신 문가를 비추는 거울을 흘낏 바라보았다. 하밀 왕세자? 라파엘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사리스 왕이 보낸 영접단의 대표였던 하밀 왕세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라파엘은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때를 떠올렸다. 그는 탁자로 걸어갔었다. 탁자로 걸어가서 상대가 내민 손에 손을 내밀었다. 왕비로서 그는 몇 번이나 남자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었다. 당연히 그런 차원이라고 생각했었다.

문득, 시선이 탁자 위에 있는 종이에 닿았다. 종이는 새하얀 백지였다. 협정서일 거라는 그레이드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움직이려고 했지만, 남자 쪽이 빨랐다. 남자는 탁자를 걷어차고 그를 끌어당겨서는, 그의 옆구리를 뭔가로 꾹 눌렀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서로의 옷과 망토가 펄럭거리는 가운데, 라파엘은 똑똑히 그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옆구리에 닿아 있는 물건은 총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신력이 없어도 쏠 수 있는 마법총이지. 귀한 얼굴 망가뜨리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라파엘은 잠시 고민했다. 잘하면 남자의 목을 단숨에 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잘못되면, 저 총에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는 그런 모험을 하진 않았다. 왕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그나저나 내 총은 왜 여기에?’

역시 태후가 육군 대장을 이용해서 총을 티스로 빼돌린 모양이다. 하긴 그녀는 자작을 암살자로 보내기도 했던 여자가 아니던가. 그녀라면 티스로 총을 빼돌리고도 남았다. 마법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은 라파엘 자신이 개조한 총이 틀림없었다.

“비전하, 하밀 왕세자입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왕세자가 갑자기 들어왔다. 라파엘은 시선만 움직여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왕세자의 허리에 찬 검이 보인다. 저 검으로 왕세자를 위협하면 단숨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라파엘은 문득 생각났다. 스완은 말했었다.

‘이 경계선이 무너지면, 전하께서는 실정을 하신 것이 됩니다. 이 이후 어떤 업적도 전하의 실정을 덮을 수 없게 됩니다.’

왕의 업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자 라파엘은 자신이 여기서 벗어나는 게 무책임한 일인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게 무책임한 일인지 알 수 없어졌다. 하나 확실한 건, 왕은 몹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왕이 통치하게 되면서 헤수스는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그는 존경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티스를 잃으면, 영원히 존경받을 자격을 잃는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

라파엘은 왕을 떠올렸다. 왕은 티스 일로 바쁠 때도 길드를 잡아들였다. 그것은 라파엘 자신을 위해서였다. 왕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라파엘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때라도 라파엘의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라파엘의 일을 돌보아주었다.

또한 그는 라파엘의 행운이기도 했다.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퀴즈를 맞혀준 것은 왕이었다. 왕은 라파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일단은 두고 볼까. 라파엘은 왕세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비전하?”

“기억납니다.”

라파엘이 속삭였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을 뿐이지만, 왕세자는 그 모습만으로도 심장이 떨렸다. 정말이지 새침하면서도 다소곳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하밀과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끄러운 듯도 했고, 화가 좀 난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남자와 오래 시선을 마주치지 않을 생각인 건 분명했다.

“이런 허름한 곳에 계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방을 준비해드릴 테니, 거기서 편히 쉬시죠. 하녀들도 붙여드리겠…….”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언뜻 우울해 보이는 듯도 해서 왕세자는 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군인이 ‘왕세자 전하!’라고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하밀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는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왕비는 새치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끌려온 지 이틀이나 지나 화장이 조금 지워진 참이었는데, 요염하다기보다는 단정하고 청초해 보였다.

“비전하, 다른 게 필요하십니까?”

그 말에 군인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게 필요하냐니, 왕비는 분명 나가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왕비는 그 대신 다른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탑에서 보이는 정문에 꿇어앉아 있는 시녀들을 가리켰다.

“……제 시녀들.”

당장 나가게 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왕비는 의외의 것을 요구했다. 왕세자가 돌아보자, 군인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라는 말에 군인이 얼굴을 구겼다.

‘거의 다 되었는데, 갑자기 여자에게 빠지다니.’

그것도 이그나치오 왕의 총비에게.

군인이 나가자 왕세자가 일어나 왕비에게 팔을 내밀었다. 자신의 팔을 잡으라고 내미는 팔짱을 보며 라파엘은 왕을 떠올렸다. 왕은 종종 저렇게 팔을 내밀어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팔을 벌려 안거나, 혹은 아예 안아 올리기도 했었다.

왕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자신의 상황을 알고는 있을까.

라파엘은 왕세자의 팔을 잡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도, 왕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왕은 물론, 상황을 알고 있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몇 번이나 폭발했었다. 왕이 라파엘을 보내게 된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스완이나 그 외의 대신들은 왕에게서 몇 번이나 목숨을 위협받았다. 신하들보다 하루 늦게 소식을 들은 왕은 총을 빼들고 말했었다. ‘안네마리를 찾아오기 위해 너희가 하루 동안 뭘 했는지 보고하라.’ 지난 하루 동안 왕이 알면 어떻게 될지만을 생각하며 벌벌 떨기만 했던 대신들 대부분은 아무런 말도 못 했고, 왕의 총은 결국 왕비의 티스행을 가장 강력하게 추천했던 스완의 팔에 발사되었다. 총알은 팔을 스쳤지만, 대신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부동생이자 최측근인 스완 라 포를 쏘았다. 이건 다른 대신들의 목숨 따윈 얼마든지 거둘 수 있다는 선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스완은 총상을 입은 팔에 대충 응급 처치만을 한 채, 왕의 곁에 머물렀다.

“내가 지금 가장 빨리 티스에 가면 얼마나 걸리지?”

“일주일 정도입니다.”

왕의 말에 하타가 조용히 대답했다. 군선은 무겁고 둔하지만, 왕의 배는 가볍고 날렵하다. 게다가 왕의 배는 그냥 배가 아니라 마법석의 원리로 이동하는 배였다. 다른 배가 이틀에 걸쳐 갈 거리를, 왕의 배는 하루 만에 움직일 수 있었다. 게다가 노트코보다 티스는 더 가까웠다. 그러니 노트코 항구로 들어가 육로로 이동할 것이 아니라면, 왕은 확실히 일주일 뒤엔 티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타는 왕에게 대답을 하면서 스완을 흘끗 바라보았다. 곧 전쟁터로 변할지도 모르는 곳에 왕을 모시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왕 중에는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 왕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왕은 그런 타입이 아니지 않은가.

“전하.”

스완이 결국 뒤에서 그를 불렀다. 왕비가 납치된 것을 안 지 고작 이틀째인 지금, 그가 티스로 출발한다는 것은 과한 일이었다. 그러나 왕은 하타가 보여주는 지도를 보며 대답했다.

“닥쳐.”

“…….”

“넌 내게 안네마리의 무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안네마리는 어떻게 되었지?”

왕의 말에 스완이 한숨을 쉬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

스완의 말에 왕이 그를 돌아보았다. 왕의 푸른 눈이 일렁인다. 이런 경우를 몇 번 보았던 스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왕이 이렇게 이성을 잃었던 적은 오직 왕비에 관련해서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 것인가. 고작 남자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 때문에 왕이 이러는 것인가. 왕을 사랑하는 남자는,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제법 되지 않던가.

“전하.”

왕은 지금 스완과 아무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전원을 깡그리 죽이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못 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안네마리를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안네마리의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인을 해야 할 자리에 안네마리는 그런 내용을 썼다. 반드시. 그것은 안네마리와 그만의 암호였다. 그는 반드시 무사하게 돌아올 거냐고 물었고, 안네마리는 그에게 수도 없이 한 약속을 다시 한 번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네마리는 티스 성에 납치당했다.

“대장군, 잠깐만.”

왕의 말에 하타가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하타가 완전히 방을 나간 다음에야 스완은 말을 꺼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무엄합니다만…… 왕비는 무사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무사해? 너는 계속 무사할 거라고 말했는데 안네마리는 지금 어디에 있지?!”

왕이 고함을 질렀다.

“무사할 거라고? 너희 모두는 그렇게 말했다. 무사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와 안네마리까지도 그렇게 말했었지! 티스가 중요해? 왕비가 더 중요하다! 티스는 빼앗기면 끝장이라고? 찾아오면 된다. 하지만 너희는 안네마리가 잘못되면 어디서 찾아올 것이냐? 너희가 그렇게 대단한가? 죽음에게서 안네마리를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스완이 입을 다물자, 왕의 고함은 더욱 커졌다.

“티스를 빼앗기더라도, 역사에 폭군으로 남더라도, 내 안네마리를 되찾겠다! 안네마리의 손끝 하나라도 잘못되면, 지도에서 노트코라는 나라는 없어질 것이다!”

왕의 분노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반드시!”

안네마리가 지키지 못한 말이지만, 자신은 반드시 이행한다. 왕은 고함을 쳤다. 그리고 왕은 화가 난 얼굴로 스완을 노려보았다.

“너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누구라도 보내란 말이다. 누구든 보내서 안네마리를 빼내라고! 헤수스의 군인을 보낼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용병이라도 고용하란 말이다! 우린 아예 용병 군대인 왕궁특수군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안네마리를 빼낼 수 없다는 거냐!”

“누구를 보낼까요?”

계속 공격당하던 스완이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 용병을 쓰는 건 가능합니다. 선대 왕족 납치에는 종종 용병들이 비밀리에 움직이기도 했었지요. 나라의 군대를 움직이면 눈치채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하. 누구를 보낼까요? 잠입에 능숙하고, 입이 무거우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몹시 유능한 인물. 여기까지도 어렵지만 어쩌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스완이 침착한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 누군가 중에서 가장 능력이 좋은 자는 라파엘 에반스일 겁니다.”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왕의 시선이 멈칫했다.

“라파엘 에반스일 겁니다.”

스완이 단호히 말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마리 트리지아 왕후가 납치를 당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마리 왕후 생전에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용병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라파엘 에반스를 고용했을 겁니다. 그 이상의 적격자? 없습니다.”

왕이 입을 다물었다. 스완의 목소리는 이미 좀 지쳐 있었다. 그 지친 목소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상황은, 그 라파엘 에반스가 심지어 잠입에 성공한 상황입니다. 라파엘 에반스입니다. 아마 본인의 몸을 빼는 정도가 아니라, 인질이 더 있다고 하더라도 라파엘 에반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질을 구해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납치를 당한 게 아닙니다. 납치를 당해준 겁니다!”

“왜?”

왕이 물었다. 그러자 스완이 “그건 모르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왕이 스완의 멱살을 잡아 자신의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왜인지도 모르는데, 안네마리가 그냥 납치를 당해주었다고? 그러면서 너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냥 두자고? 안네마리는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그냥 두면 된다고? 너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그냥 두면 살아나올 텐데, 내가 이러는 게 지나치다고 하고 싶은 거냐!”

“……그런 뜻은…….”

스완이 중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런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왕이 스완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오늘만큼은 널 보고 싶지 않다. 꺼져.”

스완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서 일어났다. 왕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어서 나가라는 무언의 압력에 스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런 뜻이 되어버렸다. 스완은 입을 달싹거렸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무시무시한 지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사랑을 찾았던 형님에게 이해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를 더욱 화나게 하는 말일 것 같아, 스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완이 방을 나오는데 왕이 말했다.

“오늘 파티를 연다. 그리고 내일 바로 출발한다. 내 대리를 네가 맡도록 해.”

“저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는 내 유지를 이어나가라.”

스완이 고개를 돌리며 “전하!”라고 소리쳤지만 왕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스완이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시종들이 막아섰다. 아니 되십니다. 시종들의 말에 스완은 결국 그 방을 나서고 말았다. 파티에서라도 왕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최소한 스완은 같이 가야 했다. 그는 특수군 대장이었다! 왕의 호위를 최우선 임무로 삼고 있는 특수군의 대장인 자신이 왕을 호위하지 않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날 밤의 파티는 평소보다 훨씬 화려했다.

왕은 늘 그렇듯 잘 웃고 있었고, 몇 명의 귀부인들과 춤을 추기도 했다. 또 다른 몇 명의 귀부인들이 그를 유혹하기도 했지만, 그는 적당한 선에서 거절했다. 왕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놀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완은 그가 이 파티를 일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왕은 개인적인 시간을 전혀 가지지 않은 채 많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분명 다음 날의 출정을 계산한 움직임이었다.

“오랜만이군요, 포 대장.”

스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쇼어 공작부인.”

스완은 뻣뻣하게 인사했다. 안드레아가 스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월이 아주 비껴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몹시 고운 손이었다. 메말랐으면서도 우아한 손을 잡고 입을 맞춘 스완이 흘끗 왕에게 시선을 주었다.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왕이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곤란하다고 생각했을 때 스완은 갑자기 자신의 손을 붙잡는 따뜻한 손을 느끼고 깜짝 놀라 안드레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안드레아와 헤어지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했고, 스완은 왕비는 왕의 아내이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헤어졌는지도 확실치 않지.’

둘이 가장 반목한 것은 그 일이지만,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 둘은 잘 맞지 않았다. 스완은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스완을 정부 중 한 명으로만 대했다. 스완이 아무리 원해도 그녀는 스완의 곁에 머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교계의 여왕인 쇼어 공작부인에겐 남자가 참 많았고, 스완은 가끔 그것이 괴로웠다. 궁중 사교계라는 곳이 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스완은 때때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길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스완의 말에 쇼어 공작부인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는 스완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로 이끌었다. 그녀의 날씬한 배에 닿아서 스완은 움찔 떨었다. 드레스로 감싸인 배인데도, 그저 닿은 것만으로도 스완은 그녀의 몸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녀의 우아한 몸을 안고 미친 듯이 탐하고 싶었다. 스완이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사교계의 여왕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폭탄을 터뜨렸다.

“당신의 아이예요.”

……네?

스완은 잠시 이해할 수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뭐라고…… 요즘 왜 이렇게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많이…….

“당신의 아이가 이 배 속에 있어요.”

안드레아의 말에 스완은 당황했다. 안드레아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안드레아는 아직 가임기의 여성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스완이 입을 벌렸을 때 안드레아가 속삭였다.

“내 아들을 구해 와.”

스완이 당황해서 안드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새 안드레아는 스완의 품 안에 바짝 들어와 있었다. 키스를 할 것처럼 눈을 감으며 안드레아가 말했다.

“아니면, 네 아이는 나와 같이 죽을 줄 알아.”

스완이 눈을 휘둥그레 떴을 때 안드레아는 발뒤꿈치를 들고 스완의 입술에 키스하고 있었다. 안드레아가 스완의 앞에서 등을 돌렸다. 그 날씬한 뒷모습을 보며 스완은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왜 왕비도 아닌데 눈을 깜빡이고 있지. 멍한 머리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스스로 현재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안드레아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스완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새벽에 아주 조용히, 배 한 척이 왕궁 선착장에 정박해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계속 사람들이 찾아와 배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왕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새벽안개를 헤치고 달려왔다. 왕이 먼저 배로 들어가고, 시종들이 짐을 싣는 동안 뱃고동이 울렸다. 뱃고동이 길게 울려 퍼졌을 때 멀리서 말 한 필이 달려오고 있었다. 질주하듯이 달려온 말에서 내린 자는 스완 라 포였다. 스완은 아슬아슬하게 떠나려는 배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는 순간, 배가 출발했다.

“오지 말라니까.”

갑판에서 왕이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스완에게 말했다. 스완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너는 왕명도 네 멋대로 무시하는 거냐?”

왕의 말에 스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고 스완이 말했지만 왕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듯, 왕이 코웃음을 쳤다. 스완이 왕의 곁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전하의 동지이지 않습니까.”

왕이 대답해주지 않자 스완이 어깨를 으쓱했다. 왕이 어떻게 생각하든 스완은 왕의 동지였다. 그리고 왕의 형제이기도 했다. 왕은 스완을 보다 피식 웃으면서 잔을 권했다.

“마셔라. 총상에는 그저 술이 최고라더라.”

“……저번에 비전하께는 그러지 않으셨잖습니까?”

스완이 의심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왕이 키득거렸다. 어딜 비교하느냐면서 왕은 스완의 잔에 넘치도록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실제로 넘쳐서, 스완은 황급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솔직히 비전하보다는 제가 연약합니다. 저 몹시 섬약한 남자예요.”

“섬약이 얼어 죽었군.”

왕이 빈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멀리 보이는 것은 숲이다. 안네마리도 이 숲을 보며 떠났겠지, 생각하자 왕은 울음이 치밀어서 고개를 돌렸다.

“전하.”

왕의 태도가 변한 것을 알고, 스완이 바로 그를 불렀다. 눈물을 참던 왕이 이윽고 물었다.

“네 말대로 안네마리는 강하니까 괜찮을 거다. 그렇지?”

내가 갈 때까지만 제발 버텨다오. 왕은 혀로 입술을 쓸면서 기도했다.

왕이 라파엘의 걱정을 하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건만, 라파엘의 상태는 몹시 좋았다. 라파엘은 티스 성주의 아내가 쓰던 방을 배정받았고, 제발 왕비를 모시게 해달라며 며칠이나 성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던 시녀들까지 만났다. 시녀들, 특히 시녀장은 라파엘이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시녀장이 우는 통에 라파엘은 당황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녀들에게서 다시 시중을 받았다. 라파엘이 시녀들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실 씻는 것 따위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화장이 지워지고 있었다. 화장이 지워지면 라파엘 자신의 얼굴이 드러날 것이다.

“왕비 전하, 이제 만족하시는지요?”

왕세자가 물었다. 벌써 며칠째 왕세자는 라파엘의 곁에 붙어 있었다. 툭하면 필요한 게 없느냐며 달라붙는 왕세자 때문에 라파엘은 상당히 불편했다. 이왕이면 조심해서 이 성 안를 정탐해보려 했건만 이 왕세자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라파엘은 혀를 찼다. 마리의 일로 왕궁을 정탐할 때, 그는 종종 왕에게 시간을 빼앗겼었다. 하지만 그때는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다. 그저 왕을 바라보는 순간 그에게 얽매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왕세자를 상대로는 그저 귀찮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예, 감사합니다.”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시녀들이 가져온 약 때문에 이제는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새삼 여장은 시녀들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녀들이 챙겨주는 약, 시녀들이 해주는 완벽한 치장 없이는, 라파엘은 여자가 될 수 없다.

“오늘은 정원을 좀 산책하시겠습니까?”

정원을 왜 산책하지?

라파엘은 이 왕세자가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와중에 정원은 산책해서 뭐할 것인가.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을 때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죄송하지만, 우리 비전하께서는 이제 주무셔야 합니다. 몸이 워낙 미령하시어, 조금이라도 무리하시면 탈이 나십니다. 그런데 최근 심적으로 고통받고 계시어, 자주 힘들어하십니다.”

너희가 납치한 덕분에 몸도 아픈데 어딜 데리고 쏘다니겠다는 거야, 안 돼―라는 말을 몹시 정중하게 한 시녀장이 라파엘을 부축했다. 라파엘은 시녀장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낮잠 주무실 시간입니다.”

시녀장이 속삭였다. 속삭임이라고 해도 왕세자가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지만. 그 말과 동시에 시녀들이 “오늘도 약을 못 드시면 안 되는데…… 오늘은 조금만 드셔보아요”라며 시녀장의 말을 한껏 거들었다. 라파엘은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시녀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보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시녀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때 제지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시녀들은 총명한데다 비상히 눈치가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는 그녀들의 의도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치가 좋지 못했다.

“그런가……?”

왕세자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안네마리 왕비가 몸이 약하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몸이 약해서 시녀들이 저렇게 싸고도는 건가?’

왕세자는 쫓겨나다시피 방을 나서면서 의아해했다. 노트코 궁정에서는 저렇게 윗사람을 싸고도는 시녀들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납치당한 윗사람에게 보내달라고 성문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비는 시녀들이라니, 난생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 시녀들이 결국 티스 성으로 들어왔다. 엄중한 체크를 받고 들어온 시녀들은 왕비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하더니만, 그러고 나서는 왕비의 시중을 들겠다며 문을 닫았다. 시녀들의 손에 의해 목욕부터 치장까지 마친 왕비는 몹시 아름다웠다.

‘이그나치오 왕의 여자.’

절대로 꿈꿔서는 안 되는 여인. 그러나 보면 볼수록 왕세자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 왕비 때문에 그는 괴로워지고 있었다. 왕비는 그에게 웃어준 적도 없었고, 그들은 거의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왕비는 너무나 아름답고 도도했다. 솔직히 미모는 궁정의 다른 여자가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왕비처럼 특유의 매력을 가진 여자는 없었다. 청초하면서도 요염하고, 도도하면서도 수줍어하는 그 모습은 왕세자를 지나치게 자극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되는데…….’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지금 당장 궁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에게서 관심을 끊어야 한다.

모든 것이 다 안 되는 일뿐인데,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왕세자는 괴로운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등 뒤에 있는 문을 열고, 왕비의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에 충동은 더욱 강해졌다. 왕세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다.

왕세자가 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시녀는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아우, 드디어 갔네요. 저건 왜 저래.”

“비전하께 반한 거지, 뭐. 해주는 건 별거 없으면서 생색은 하여간. 놔주지도 못하는 게.”

시녀들이 한마디씩 했다.

“돈도 없어. 얼굴도 별로야. 그렇다고 터프하길 해? 제 주제 파악도 못하고 어디서 껄떡거려, 껄떡거리길.”

시녀들의 말에 시녀장이 주의를 주었다. 시녀들은 일단 말을 멈췄지만, 한없이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왕비가 잡혀갔을 때, 그녀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특수군 호위조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왕비가 납치당하는데도 아무것도 못 한 남자들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만 반복했다. 군인들은 특수군에게 잘못을 전가했다. 그리고 특수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특수군은 시녀들에게만 말했다. ‘비전하께서 잡혀가주신 것 같다’고. 그게 말이 되느냐고 시녀들이 반발하자 특수군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 없다고. 어째서 비전하께서는 잡혀가신 거냐고. 이건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특수군이 얼이 빠져선 중얼거렸다.

‘라파엘 에반스란 말입니다……. 여러분도 눈이 있으면 보셨을 거 아닙니까. 그분은 어디에 잡혀갈 분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분통이 터져 시녀들은 티스 성 앞까지 걸어갔다. 활의 사정거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왕비가 나오지 않으면, 왕은 그녀들을 죽여버릴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성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발 여자들만이라도 받아들여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그 간청이 어느 순간 받아들여졌다.

지금 시녀들은 특수군부터 티스 성을 점령한 도적(을 가장한 노트코 군인)까지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 엉망이었다, 전부. 특수군은 괜히 명줄을 거는 짓이라며 그녀들을 타박했지만, 그녀들은 지금 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특수군이 포기한 일을 그녀들은 해낸 것이다. 아예 어떤 일도 시도해보지 않는 특수군과 군인들이 꼴 보기 싫었다. 그녀들의 왕비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뭔가를 시도했다. 왕이 근신령을 내려도, 왕비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왕비가 믿을 만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왕비의 곁에서, 왕비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다.

시녀들이 드레스를 벗겨주자 라파엘은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최근 라파엘은 낮에 잠들었기 때문에, 시녀들이 두꺼운 휘장으로 빛을 가려주었다.

시녀들이 온 뒤, 왕비는 성 안을 정탐하고 있다. 마치 마리의 죽음을 캘 때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가 돌아오는 그를 보며 시녀들은 역시 여기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왕비는 손 놓고 있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뭔가를 시도한다.

‘총을 가지고 있었어.’

왜 잡혀왔냐는 말에 왕비가 무심히 대답했다. 총이 옆구리를 찌르고 있어 피할 자신이 없었다고. 시녀들은 그럼 그렇지, 라며 다시 한 번 성 밖에 있는 특수군에게 이를 갈았다. 뭐? ‘잡혀가준 것 같다’고? 천벌받아 마땅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총으로 위협당하고 있는데 왕비가 무슨 수로 벗어난단 말인가.

사실 라파엘이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날 수 있긴 했다. 그는 군인의 팔을 꺾을 수 있었다. 그러면 부상을 입을 확률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군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이 다치면 싫어할 것 같았다. 왕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 라파엘은 얌전히 잡혀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언제든 빠져나가면 되는 거니까. 첫 번째 기회는 왕세자가 탑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라파엘은 빠져나가려 했었다. 하지만, 왕의 업적이 떠올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왕이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오늘 밤에는 이 성을 조금 흔들어볼 생각이었다.

밤이 다가왔다.

라파엘이 눈을 번쩍 뜨는 모습을 시녀들은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왕비는 언제나 스스로 눈을 떴다. 그는 일어나고자 마음먹은 때에 반드시 일어나곤 했다. 시녀들이 깨울 필요가 없었다.

라파엘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시녀들이 잠행복을 건네자, 잠옷을 벗고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드레스와는 달리 잠행복은 늘 혼자 입는 라파엘이 옷을 다 입고는 창을 열었다. 시녀 한 명이 라파엘의 잠옷을 입고 침대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음에 그는 시녀장에게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총으로 쏘고 문을 잠가.”

시녀장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라파엘은 창 밖으로 휙 뛰어내리고 말았다. 시녀장이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밑을 바라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라파엘이 나무 사이로 숨어버리고, 조금 뒤 타이밍 좋게 보초가 창문 아래를 지나갔다. 라파엘은 분명 보초가 다가올 시간이라는 걸 알고 한 짓이리라. 그래도 너무나 아슬아슬해서, 시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나무 그림자에서 라파엘이 튀어나왔다. 흡, 시녀장이 숨을 삼켰을 때, 라파엘은 보초를 덮치고 있었다.

라파엘은 왼손으로 보초의 입을 막고 오른손으로 보초의 허리춤에 달린 총을 꺼냈다. 개조총은 신력이 없는 자가 사용하면 발사될 수도, 폭발할 수도 있지만, 신력을 가진 자의 손에선 백 퍼센트 발사된다. 이것만은 편하지. 라파엘은 보초의 허리춤에서 낚아챈 총을 보초의 턱 아래에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쾅―. 총소리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뭐야. 어디야. 병사들의 황망한 소리를 들으며, 라파엘은 다시 나무로 뛰어올랐다. 그늘이 진데다 달빛이 비추지 않는 사각지대에 정확하게 숨고선, 내리고 있던 목깃을 코끝까지 올렸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달려온다. 라파엘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총이야, 총에 맞았어!”라며 수선을 떠는 걸 보다가 천천히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나뭇가지를 흔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나무와 나무 사이로 움직인 라파엘은 군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달렸다.

“넌 여기에 있어!”

다른 무리들이 한 군인에게 소리 지르며 군인을 놓고 사라졌다. 그 군인이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라파엘은 어둠 속에서 군인에게 총을 겨누었다. 숨을 멈추고 반동에 주의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쾅, 소리에 군인이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군인이 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라파엘은 달려가 군인의 맥을 짚어 그가 죽었음을 확인하고 그의 손에 아까 보초의 총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의 발코니 문이 열려 있었다. 라파엘이 들어오면서 옷을 벗어던지자, 시녀들이 재빨리 그의 옷을 어딘가에 숨긴다. 그리고 라파엘이 아까 시녀가 입었던 잠옷과 똑같은 잠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밀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시녀들이 다가와 라파엘의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기본 화장이라도 해두어야 했다. 안네마리와 라파엘은 동일인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화장 때문이었다. 안네마리는 라파엘에 비해 눈이 컸고, 코가 오뚝했고, 입술이 붉었다. 복숭앗빛 뺨을 가지고 있었고, 턱선도 보드라웠다. 거기에 비해 라파엘은 옅은 입술, 창백한 얼굴, 베일 것 같은 턱선을 가졌다. 닮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왕비 전하, 하밀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문이 거칠게 열렸다.

총소리가 두 번이나 울리자 왕세자는 달려왔다. 왕비가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왕세자뿐만 아니라 그의 측근도 같이 달려왔다. 안네마리 왕비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이 모든 계획은 무너진다. 이그나치오 왕은 이미 진노했다. 왕비가 죽는다면 이그나치오 왕은 격노하여 노트코를 공격할 것이다. 노트코의 왕이 누구든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왕비는 다치지 말아야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왕세자는 왕비를 걱정했다. 왕비가 혹시나 잘못될까 봐 무서웠다. 그 새하얀 피부에 피가 번져 있을까 봐 공포스러웠다. 자신이 왜 그녀에게 끌리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서웠다.

“비전하.”

마침 시녀들이 왕비의 앞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왕비가 당황한 듯 가운을 걸치면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깊게 파인 잠옷이 쇄골을 드러내고 있다. 그 움푹 파인 곳에 혀를 묻고 싶었다. 이 여자를 비로 삼은 이그나치오가 미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태후가 와야 했는데.’

원래는 이 역할에 태후를 둘 생각이었다. 왕이 귀애하는 왕비는 너무 위험이 컸다. 왕이 미워하면서도 구할 수밖에 없는 태후가 이 역할에 딱이었다. 태후를 원하는 장군이 작업했고, 태후는 여기에 올 예정이었다. 모든 게 잘되어가고 있었다. 왕도 왕비를 보내느니 차라리 태후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태후에게서 연락이 끊기고, 왕비가 도착했다. 왕세자는 당황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왕비가 밤이라 그런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몹시 낮아서 남자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는 듣기 싫기는커녕 육욕적으로 들렸다.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놀라셨을 줄 압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있으니 기다려주십시오.”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가 목소리에 놀랐다. 약을 먹지 않았지. 그는 그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시녀장이 대담하게도 약과 물을 가져왔다.

“비전하,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그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세자 앞에서 약을 먹었다. 왕세자가 시녀에게 “어디가 아프신 거냐?”라고 물었다. 시녀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가 생기는 약입니다.”

그 말에 왕세자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시녀는 태연했다. 왕세자의 노골적인 치근거림이 싫은 그녀가 대놓고 왕세자를 물 먹인 것이다. 라파엘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생기는 약?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알지만 하필이면 왜 저런 약 이름을 말했을까. 그러나 곧 라파엘은 거기서 신경을 돌렸다. 상관없지, 무슨 약이든.

아이가 생기는 약이라는 말에 왕세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저 여인이 이그나치오 왕의 아이를 가진다고? 당연한 일인데도, 숨이 막혔다.

왕세자가 주춤거리며 방을 나왔다. 왕세자의 태도를 바라보던 군인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지 마세요. 이그나치오 왕의 총비입니다.”

“알고 있어.”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 이그나치오 왕이 저 여자가 부탁한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더군요.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한 여자를 무릎에 앉히고 내내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해주려 애쓴다고 합니다. 그녀를 거의 안고 다닌다고 할 정도입니다. 일 중독자에 냉혈한 살인마인 이그나치오 왕이요.”

“안다고!”

왕세자가 소리쳤다.

“아시긴 뭘 아십니까.”

군인이 물었다. 그가 한숨을 쉬면서 왕세자에게 등을 보였다.

“쇼어 가문의 여인입니다. 헤수스의 귀족과 왕을 동시에 등에 업은 여인이지요.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연약하거나 부드러운 여인이 아닐 거라는 걸 모르시…….”

푸욱, 그런 소리는 실제로 나지 않았다. 하지만 왕세자와 군인은 둘 다 들은 것 같았다. 군인이 놀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왜……?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왕세자는 말대꾸를 싫어했다. 그런 것을 못 참는 성미였다. 그동안 궁정에서는 유들유들한 멍청이인 척하느라 모든 걸 참고 있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부류였다. 하지만.

……그래도, 왜…….

고작, 이런 말에 목숨을 걸었던 부하를…….

왕세자는 군인의 옆구리에 꽂았던 검을 좌측으로 한 번 그어서 확실한 치명상을 입힌 다음에 검을 뽑았다. 피가 줄줄줄 흐르고, 군인이 뒷걸음질 쳤다.

“저, 전하…….”

군인이 커다랗게 뜬 눈으로 왕세자를 불렀다. 그러나 왕세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군인은 결국 뒤로 쓰러졌다.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왕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멍청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내 감추고 있었는데, 군인의 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조잘조잘조잘조잘.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저 여자를 가지면 안 된다고?’

이그나치오 왕의 애처라 안 된다고? 하지만 뭐 어떤가. 그는 곧 왕이 될 사람이 아닌가. 이제 곧…… 왕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는 여인을 스스로 골라도 되었다. 비록 이그나치오 왕이 강대국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잘될 것이다. 노트코 하나로는 벅찰 수도 있지만 일단 주 바다 경계선이 무너지면, 그 경계선이 무너진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도 일제히 자신들의 대륙에 있는 생뚱맞은 헤수스 영토들을 공격할 것이고, 왕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까 가져도 돼.’

자기 좋을 대로의 생각이다. 이제까지 치열한 계획을 세웠던 그가 왜 이렇게 단순한 생각에 빠졌는지, 후에 노트코 사람들은 전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헤수스에서 안네마리 왕비가 괴물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 노트코는 그 소문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왕비가 궁의 옥에 갇힌 건장한 남자들을 꺼내어 그 몸을 취한 뒤 산 채로 잡아먹었다는 소문은, 헤수스보다 노트코에서 더 강하게 돌게 되었었다. 옥에 갇혔다가 왕비의 부름을 받고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내들. 그들을 산 채로 잡아먹은 왕비의 입술이 더욱 붉어지고 있다는 소문은 헤수스가 아니라 노트코에서 시작되었을 정도였다.

어쨌든 왕세자는 갑자기, 마치 쥐약이라도 퍼먹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바꿨다. 그는 본래 이기적인 성격이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그에겐, 목표가 다가올수록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목표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경품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더욱 그렇다. 그는 자신의 경품도 아닌 것을 탐하고, 자신이 골을 울려서 그 경품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가지는 게 좋을까?’

안네마리 왕비를 겁탈하고 싶진 않았다. 부드럽게 안고 싶은 건 아니었다. 거칠게, 그 흰 피부에 붉고 푸른 자국이 남도록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겁탈은 아니었으면 했다. 

“전하, 큰 소리가…….”

병사들이 달려와서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의 대장이 죽어나빠진 것을 보고 당황하는 병사들을 보며 왕세자가 창을 가리켰다.

“이상한 놈이 도망쳤다!”

어떻게 생겼습니까, 어디로 갔습니까, 무사하십니까 등등의 말에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되는대로 지껄였다. 남자였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칼이었다. 다른 건 보지 못했다. 키가 작은지 큰지 잘 모르겠다. 창 밖으로 나갔다 등등, 되는대로 지껄이는 동안 병사들이 우왕좌왕했다. 공포에 질린 연기를 하면서 왕세자는 속으로 왕비를 어떻게 가질지 생각해보았다. 처음엔 부드럽게 시작해야겠지. 하지만 곧 그녀의 꽃잎을 찢듯이 강렬한 섹스를 하리라. 왕세자는 자신이 세운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에 씩 웃음 지었다.

아마도 왕세자가 하는 생각을 알았더라면 아이브리 이그나치오, 통칭 왕은 펄펄 뛰었을 것이다. 라파엘이 납치되었을 때보다 더욱 분노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왕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배가 티스의 한적한 바닷가에 정박했다. 헤수스 군대는 거기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티스 성에서는 아직 모르지만, 라파엘이 노트코에 도착했을 때 헤수스 군대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왕비로 시선을 돌리고 티스 바닷가에는 상선으로 위장한 배가 바닷가에 정박해 있었다. 그 상태로 그들은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모두가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흘끗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레이드가 보인다.

“내 비는?”

왕이 첫발을 디디자마자 물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레이드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 티스 성입니다.”

“티스 성? 구할 수는 없었느냐?”

“송구합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왕이 그를 지나치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너 따위의 송구함은 필요 없어.”

그레이드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왕이 이열로 늘어선 길을 걸어서 막사로 걸어가자 그 뒤에서 걷던 스완이 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시종장과 시종들이 왕과 같이 걸었고, 장군 한 명이 바로 달려가 왕을 위한 막사로 그를 안내했다. 그사이 스완은 그레이드의 앞에 서서 당장 상황을 말해보라고 종용했다. 그레이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티스 성은 여기서 말을 타고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비전하의 안전 때문에 티스 성을 공격하진 못했습니다. 티스 성은 모래벌판 위에 지어진 성이라 밤에만 조심스럽게 정탐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총성이 두 발 울렸습니다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단지…….”

“잠깐, 총?”

노트코 놈들이 총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는 얼굴의 스완이, 곧 자답하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태후, 그 여자 짓이군.”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왕궁에서 사라진 총이 여기에 와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 대충 아귀가 맞습니다. 비전하께 들이대어진 게 검이 아니라 총이었다면, 비전하께서도 함부로 움직이시긴 어려우셨을 겁니다. 검과는 달리 총은 팔이 비틀려도 쏠 수 있는 물건이니까요. 사실 팔을 비틀지 않아도 발사될지도 모릅니다. 그 총은 워낙에 안정성이 떨어지니까요.”

“그래서 비전하께서 납치당하신 거군.”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비 전하의 시녀들이 성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연락이 되나?”

스완의 질문에 그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와 미리 약속하신 게 아니라, 다짜고짜 성문 앞에 꿇어앉아서 들여보내달라고 한 게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멍청한! 그 시녀들 사이에 끼어서 들어갈 생각은 왜 못 했단 말이냐!”

스완이 화를 내자 그레이드가 한숨을 삼켰다.

“비전하가 특이한 케이스지, 대부분의 무인은 여자로 위장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스완이 혀를 찼다. 이런 젠장할. 라파엘은 심지어 끌려가준 게 아니라, 진짜 끌려간 것이었다. 못 나오는 상황인가? 하긴 라파엘 에반스가 무슨 투명 괴도도 아니고, 그도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래서 평민들에게 총이 가면 안 되는데.’

귀족은 언제나 평민들을 상대로 승리한다. 평민이 얼마나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이고, 훌륭한 무도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귀족들은 총을 한 방 쏘기만 하면 되고, 그럼 평민들은 어쩔 수 없이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젠 평민도 총을 쓸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라파엘 에반스 같은 인물을 변변치 않은 인물이 제압할 수 있게 되다니, 역시 총의 개조는 막아야 하는 것이었을지도 몰라.’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귀족들은 평민과 귀족의 차이가 없다고 불평을 쏟고 있다. 상인 계급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들 중 몇몇은 돈으로 작위를 사기도 했다. 훌랜드 자작이 대표적이었다. 버시슬 백작 같은 자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그들을, 귀족들은 비웃으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대장님, 전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왕비 호위조였던 특수군 한 명이 스완에게 말해서, 스완은 발을 옮겼다. 여기로 오는 동안 왕은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유람을 나온 사람처럼 웃거나 술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스완은 왕이 그럴수록 두려워졌다. 왜냐하면 왕이 그렇게 나온다는 건, 이미 마음속에서 어떤 결론이 섰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왕은 아예 초조하지 않은 것이다. 왕비에 대해서 분명한 결론이 있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스완이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왕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단 왕비를 구해내면, 헤수스는 노트코를 공격한다.”

장군이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숙인 머리를 보며 왕이 덧붙였다.

“지도 위에서 노트코를 없앤다.”

이제까지 변변한 전쟁을 한 적이 없던 왕의 선전 포고였다. 티스 성을 탈환하면서 서쪽으로 계속 진군해 노트코를 없애겠다는 선언은 몹시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장군은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헤수스는 이제껏 약해서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북대륙의 척박한 땅, 그 땅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왕은 내치에 힘썼었다. 그는 왕가와 귀족들이 내내 싸우고 신전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제 잇속을 차리는 가운데 즉위해서는, 순식간에 왕권을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내내 그 강력한 왕권으로 백성들을 위해 힘썼다. 그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에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왕에게는 위업이 필요하다.

헤수스 군대는 강하다. 쿠치아노의 가호를 받는 군대다. 그러나 주변국들은 강대국인 헤수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발톱 빠진 호랑이 취급을 해대곤 했다. 이제, 주변국들에게 다시 세계의 패권을 쥔 나라가 어디인지 알려줄 때가 되었다.

‘하타 대장군님…….’

장군은 본국에 있는 하타 대장군을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장군 하타는 자신이 죽기 전에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헤수스의 시대가 올 수 있겠냐며 아쉬워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시대가 도래하려 한다.

“세계에 강력한 헤수스를 보여, 감히 넘보는 자가 없게 할 것이다.”

왕의 말에 군인들이 숨을 삼켰다. 그들이 바라는 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 아닌가. 

‘하여간 혀에 기름칠을 하셨다니깐.’

왕이 강력한 헤수스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걸 아는 스완은 식어빠진 시선을 바닥에 던졌다. 왕은 그저 열을 받았을 뿐이다. 자신의 왕비를 건드린 노트코를 응징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잘만 하면 대단한 해피엔딩이다. 사랑하는 왕비를 구해내기 위해 타국을 친 이그나치오 23세는 역사에서 빛나는 인물이 될 것이다. 게다가 평민들은 지금도 왕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왕비를 구하기 위해 티스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더욱 열광하게 될 것이다. 평민들은 그런 왕을 좋아한다. 다혈질적이고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내. 게다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설명이 들어간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내 아들을 구해 와.’

안드레아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니면, 네 아이는 나와 같이 죽을 줄 알아.’

안드레아는 농담한 게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다. 내 아이……. 스완은 잠시 생각해본다. 아이가 생겼다는 건 대단한 부담이다. 그는 유력한 인물이지만, 그래도 아직 작위는 없는 상태다. 작위를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상대가 낳은 아이. 사생아밖에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기뻤다. 안드레아 라 쇼어, 그녀의 배 속에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두려웠다. 안드레아가 정말 아이를 가진 채 죽어버릴까 봐.

잘만 하면…… 해피엔딩이 될 것이다. 왕비를 구해서 왕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면 된다. 왕이 설마 진두지휘하며 군대를 이끌진 않을 테니, 군대는 노트코로 보내고 일단 그들은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내 비를 구한다. 그러기 위해선 성에 들어가거나 혹은 성에서 나오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왕의 말에 장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곧 식량이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문을 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내 비를 굶기자는 거냐?!”

왕이 버럭 화를 냈다.

“그, 그럼 어떻게…….”

“밤에 불을 지른다.”

왕비 전하가 굶어 죽는 것과 타 죽는 것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시는 겁니까? 장군이 차마 말은 못 하고 왕을 내려다보았지만 왕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일단 성에 불이 붙으면 경비는 느슨해진다. 그리고 라파엘은 일단 성문이 열리고 경비가 느슨해지면 분명히 빠져나올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성문이 열려야 라파엘을 구하러 갈 수 있다.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지 않느냐.

예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결국 돌아왔던 라파엘이다. 그의 곁을 떠날 리가 없는 라파엘이니, 분명히 돌아올 것이다. 분명히.

“준비해라.”

왕의 말에 장군이 “예, 전하”라고 고개를 숙였다. 차마 왕비의 안위가 걱정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왕이 결정했다. 왕의 책임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왕비를 걱정할 필요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면 된다.

왕은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반드시, 보고서에 쓰인 라파엘의 사인이 떠올라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라파엘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그는 라파엘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초조해서,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쿠치아노.’

왕은 라파엘의 안에 숨어 있을 신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만, 제발, 도와줘.’

제발 쿠치아노의 가호가 라파엘에게 있기를, 그는 소원했다. 전능한 신이 자신의 몸을 숨겼던 그릇을 구해주기를. 이번 한 번만. 불길에 휩싸일 성에서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라파엘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위험하다면 도와주기를. 

……그래주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왕은 내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