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왕의 대리인 下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내 비가 ‘왕의 대리인’직을 받아들였다. 출발은 언제지?”
왕의 말에 대신들의 얼굴이 몹시 환해졌다. 며칠간 왕의 기분을 살피면서 몇 번이나 똑같은 간언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왕처럼 말을 잘하는 남자를 상대로 싸운다는 건 더욱 어려웠다. 왕은 독설을 내뱉고, 화를 내고, 자리에서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그의 요지는 ‘헤수스 왕비가 노트코 군인에 의해 해를 당한다면, 그것이 더욱 치욕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어서 대신들은 잠깐 입을 다물곤 했지만, 곧 그런 일이 없게끔 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반발하곤 했다. 만약을 말하는 왕과, 그것은 만약에 불과하다는 대신들은 팽팽히 대립했었다. 그런데 왕이 오늘 아침 드디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일로 하겠습니다.”
스완이 왕의 옆에서 대답했다. 왕비만 준비가 된다면 바로 티스로 출발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스완의 준비된 대답에 왕이 실소했다.
“내 비가 티스로 가는 것은 그대들의 말을 믿고서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내 비를 보낸다. 차질 없는 준비를.”
왕의 말에 대신들이 물론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좋아진 분위기에 왕이 찬물을 끼얹었다.
“내 비가 잘못되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내 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너희들을 쿠치아노에게 산 채로 바치겠다.”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스완이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웃고 있었지만 분명히 진심이었다. 왕은 왕비가 잘못되면 정말 대신들을 산 채로 바칠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분명, 그 제물의 목록에 스완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문득 불안해져 스완은 눈을 깜빡였다. 설마 별일 없겠지……. 당연히 별일 없을 것이다. 군인이 몇 명이 같이 가는가. 게다가 왕비 호위조인 특수군도 따라갈 것이다. 그레이드는 그새 왕비와 정이 들었는지, 자신을 반드시 보내달라며 요청까지 했으니까.
“안네마리는 티스로 가서 단 한 번 도적을 만날 것이다. 만나는 곳은 궁 앞에서다. 티스 성은 벼랑을 등지고 있고, 앞은 벌판이다. 매복이 불가능하니 티스 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야 한다. 적당한 위치는 물색해놓았나?”
그 말에 스완과 다른 이들이 당황했다. 성 안에서 만나는 건 안 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당황하는 것을 본 왕이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려쳤다.
“뭐 하는 거냐? 내 비를 끌어들이는 무능한 자들이 내 비의 안전도 책임지지 않을 생각이냐? 스완 라 포! 이 일의 주동자인 주제에 일처리도 제대로 해두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너를 믿고 내 비를 대리인으로 보내라는 거냐? 일을 제대로 할 생각이 없으면 차라리 추진을 하지 말든지. 그래, 내게는 이런 결단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단 말이냐!”
왕이 고함을 지르자 스완이 고개를 숙였다. 왕이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은 채 싫다는 소리만 반복했고, 그걸 달래느라 협상 장소까지 생각해둘 여력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전부 변명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왕이 “하타!” 하고 소리치자 대장군이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가지?”
“일단은 왕비는 노트코를 통한 육로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왕비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저희도 상륙해서 천천히 잠입합니다. 잠입하는 군대는 총 8천 명입니다.”
“내 비를 경호하는 인원은?”
“스무 명 정도입니다.”
왕이 “스무 명?!” 하고 기함을 토했다.
“너 미친 거 아닌가? 대장군 하타, 말을 해보아라. 내 비를 호위하는 게 고작 스무 명이라니, 그 스무 명이서 내 비를 어떻게 지켜낸단 말이냐? 스무 명으로 안네마리를 타대륙으로 보내라는 헛소리를 한 거냐?”
“하지만 왕비는 시종에 특수군까지 일행으로 있어 너무 많이 붙이면 이동이 둔해…….”
왕이 그를 노려보자, 하타는 말을 바꿨다.
“……지는 듯하여 소수 정예를 붙였습니다. 좀 더 유능한 자들을 뽑아 50명을 붙이겠습니다.”
50명도 약했다. 하지만 왕비 하나를 지키는 인원으로 적은 인원은 아니라 왕은 그쯤에서 만족해야 했다. 티스로 향하는 군인은 총 1만 명. 그나마도 현재 노트코에 숨어 있는 2천 명을 더한 숫자. ……적은 숫자이다. 그러나 그 1만 명은 소수 정예군이었다. 노트코는 갑자기 커진 국가로서, 모든 권력은 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노트코의 선왕은 훌륭한 정복 사업을 해낸 인물로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내치에는 별로 힘쓰지 못했지만 그것은 그가 유능한 군인일 뿐, 유능한 행정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왕자들의 난 끝에 올라온 이번 왕은 탐욕이 있되 현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선왕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이 훌륭해서 나라를 꾸려나가고는 있었지만, 이번 왕은 아버지의 업적이 제 업적인 줄 아는 어리석은 자였다. 그는 심지어 자신에게 진언을 간하는 신하들을 하나씩 해임하고, 그 자리에 저보다 못한 인간을 올리기까지 했다.
‘제 아비가 죽은 지 2년 만에 헤수스를 건드리는 미친놈.’
노트코의 선왕조차 헤수스를 건드리진 않았다. 선왕이라고 주 바다 경계선이 왜 싫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왕은 강대국을 먼저 건드리는 악수는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날 건드린 대가는 클 줄 알아, 이 멍청한 자식아.’
왕은 이를 갈았다.
이번의 교묘한 일은 분명 노트코 선왕의 신하 중 남아 있는 자의 작품일 것이다. 현재 왕은 이럴 머리가 없는 놈이니까. 하지만 분명 티스를 먹겠다며 고집을 부린 것은 현재 왕일 것이 틀림없다.
노트코의 선왕은 그 자신이 몹시 현명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신하로 삼아 귀를 기울이곤 했다. 선왕은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나 좋은 왕이었다. 그는 신하들을 중재하거나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몹시 탁월했다. 어느 의견을 받아들이고 어느 의견을 반려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런 그와 유능한 신하들. 중앙이 훌륭하니, 모든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선왕은 군인이었다. 군인들을 곁에 두길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노트코는 지방 방위력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선대에도 그러했는데 이번 왕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멍청한 놈은 파티나 하고 있는 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인데.”
왕의 말에 스완과 궁정대신이 시선을 마주했다.
노트코의 현재 왕인 사리스가 헤수스의 왕 이그나치오 23세를 따라 하고 싶어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사리스는 탐욕스러운 젊은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 제일의 권력자이고 부자이기도 한 이그나치오와 닮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리스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왕만큼 현명하지 못해서? 아니, 왕만큼 냉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위하자마자 몇백 명을 몰살한다는 게 말이 쉽지.’
게다가 왕은 복수인 척했지만, 사실은 복수를 빌미로 쓸모없는 귀족들을 깡그리 죽였을 뿐이다. 철천지원수인 쇼어 가문이나 태후를 건드리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왕은 언제나 다혈질의 폭군처럼 행동했지만 실상 그는 몹시 냉혹한 사내였다. 귀족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왕은 강력한 왕권을 손에 넣은 뒤였다.
“안네마리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 안네마리의 보호가 최우선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하타가 잠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늘 그렇듯 여유로웠다. 태연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왕을 보던 하타가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왕은 최악의 경우 티스를 포기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왕비를 죽이느니 티스를 포기하겠다는 왕의 말은 무거웠다. 대신들이 서로를 마주한다. 아무리 그래도 티스를 포기한다고? 사람 한두 명 죽는 것이 티스를 포기하는 것보다 나을 텐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왕이 대신들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차게 웃었다.
“너희는 안네마리가 반드시 돌아올 수 있다고 약속했다. 그렇지 않은가? 뭘 두려워하지?”
“그, 그러나, 전하.”
눈치 없는 새 건설대신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다른 대신이 그를 막았다.
“아닙니다, 전하. 왕비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스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신하들이 앞을 다투어 말했다. 분명히 돌아옵니다. 군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왕비는 지키겠습니다. 그 말에 왕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니라면 너희의 인생이 그날로 떡갈나무 관에 처박히게 될 테니까.”
왕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왕의 행렬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아직 왕에게 적응하지 못한 건설대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책임한 말이 아니오…….”
티스와 왕비 중에서 선택하라면 왕비를 선택한다니. 티스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왕과 티스 중에서 선택을 해도 티스인데, 하물며 고작 왕비가 아닌가. 왕이든 왕비든, 사람은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빼앗긴 토지와 무너진 경계선은 돌이키기 어렵다.
“전하의 총비 이야길 모르십니까?”
스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고, 건설대신은 한동안 동대륙에 있었다고 대답했다. 몇 년이나? 누군가가 물었고, 3년 정도라 대답하자 사람들이 동정의 시선을 보내왔다. 건설대신이 노골적인 동정의 시선을 받고 당황한 얼굴로 뭐냐고 묻기 시작했다. 결국 대답은 스완의 몫이 되었다.
“안네마리 비전하의 풀네임을 모르시겠군요.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제1왕비입니다.”
스완의 말에 건설대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잉그램? 전하의 성명이지 않소?”
“예, 전하께서는 비전하께 성명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분이 왕후가 되실지 안 되실진 몰라도, 그분은 일생 전하의 곁에 계시겠지요.”
“왕후라니! 당치 않은 말씀! 비전하는 어머니가 귀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쇼어 가문에서 양녀로 받아주었다고 하나 피는 섞이지 않았으니, 그 천한 피를 이그나치오 가문의 피에 섞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오!”
대신들은 건설대신에게서 참신함을 느꼈다. 건설대신이 특별히 용감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뭘 모르는 자가 입을 나불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왕과 세 번만 동석하면 저 말을 입에 담을 수 없게 되리라.
하지만 그래도 참신하다. 오랜만에 듣는 옳은 말이었다. 마치 과거의 영광을 보는 듯했다. 당연히 왕에게 저런 것들을 요구할 수 있었던 과거가 반짝거리며 안녕을 고하는 기분이다.
“이건 호의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건설대신은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이 웃는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그저 웃고 있을 뿐인데도 사람을 무섭게 하는 뭔가가 특수군 대장에게는 있었다. 귀기겠지. 건설대신은 주먹을 꽉 쥐며 생각했다. 네놈이 죽인 귀족들이 도대체 몇인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귀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해도 이상치 않다.
“전하께는 그런 말씀을 올리지 않는 게 현명하실 겁니다. 해임으로 끝날 일도 그렇게 안 되게 됩니다.”
협박인가.
건설대신이 스완을 노려보았다.
“다른 분에게 물어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안네마리 비전하를 몹시 아끼십니다. 이번 특사직을 명하신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울 지경입니다. 괜한 호기에 명을 재촉하시는 일이 없기를.”
스완이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스완과 같이 있던 검은 옷의 특수군병들이 같이 회의실을 떠나자 건설대신이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갈겼다. 어린놈이……! 건설대신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옆에 있던 교육대신이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금 무슨…….”
“부디 조심하십시오. 비전하는 전하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비전하의 말이라면 베갯머리송사도 들어주신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저 전하께서 말입니다. 게다가 비전하는 몹시 병약하신 분이라, 장기적인 공식 행사는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신 정도가 없을 지경이니 더더욱 안타까이 여기실 수밖에요. 그분의 몸은 어차피 후계자를 생산하실 수 없겠지만, 그래도 천한 피 따위의 말씀은 삼가십시오. 그 말은 간언이 아니라, 전하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건설대신이 입을 다물었다. 왕이 베갯머리송사를 들어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은 잠자리에서 하는 부탁을 가장 경멸한다고 들었는데, 그가 그것을 들어줄 지경이라고? 계속 대신들이 말한다. 왕비에게 알현을 신청했다가 총에 맞아 죽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건설대신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가 물었다.
“이번에 비전하께서 잘못되시면…….”
건설대신의 말에 재무대신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떡갈나무 관이나 준비해두는 게 좋을 것이오.”
새벽부터 왕궁의 선착장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근위병, 특수군병, 대신, 그들의 하인과 궁인과 시종 등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선착장에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는 곳에 왕의 마차가 나타난다. 왕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 뒤로 왕비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왕의 마차 옆에 왕비의 마차가 서고, 왕비의 마차 문이 먼저 열렸다. 시녀들이 줄지어 내리더니 절반은 왕의 마차 앞에서, 나머지 절반은 마차의 짐칸 앞에서 기다렸다. 그제야 왕의 마차 문이 열리고, 왕이 먼저 내렸다.
왕의 마차 앞에 서지 않은 시녀들도 왕이 내리는 순간에는 부동자세로 그를 기다린다. 모두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서 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왕이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왕비가 내려왔다.
유독 창백한 피부다. 손가락으로 분이 뜨일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창백한 피부에 새빨간 입술을 한 왕비가 왕의 손을 잡고 내려오다 휘청거렸다. 그 순간, 왕이 왕비를 안아 올렸다. 왕은 왕비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왕비는 왕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뭐라고 화답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들리지 않아, 시종들은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장군 하타가 왕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 50명이 비전하의 호위를 맡을 자들입니다.”
하타의 말과 함께 “명을 대기합니다!”라고 소리치며 50명이 무릎을 꿇었다. 왕의 앞에서 왕비를 호위하는 임무라니, 대단히 영광스러운 임무가 아닌가. 50명은 단단히 기합이 들어가 있었지만 왕은 흘끗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하타가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마지못해 한마디를 했다.
“내 연약한 비를 잘 부탁한다.”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장정 50명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진다. 파드드득, 새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간다.
왕비의 뒤로 어느새 다가온 특수군 여섯 명이 따라붙었다. 50명의 군인들을, 특수군 여섯 명은 샅샅이 살폈다. 살기를 가진 자는 없는지, 무례한 시선을 가진 자는 없는지. 그 눈은 냉혈동물의 것처럼 시리도록 찼다.
“내가 지난밤, 뭐라 했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대답했다.
“티스에 도착해서 협상 자리는 단 한 번, 그 이후 무사히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또.”
“절대 위험한 짓을 하지 말고.”
“또.”
“티스 성의 도적과 만나고 나서는 바로 배를 타고 헤수스로 돌아오라고…….”
왕이 라파엘의 검은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가발을 써서 라파엘의 머리칼과는 느낌이 달랐다. 왕은 머리칼에 입술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예감이 좋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라파엘이 왕의 등 뒤로 팔을 돌려 안았다.
“저는 무사히 돌아옵니다.”
“그래야지.”
왕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하며 라파엘의 이마에 키스했다. 왕이 왕비의 선실에 도착해서 그녀를 내려주는 걸 보면서 군인들은 당황한 얼굴을 재빨리 숙였다. 왕이 안네마리 왕비를 총애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왕이 왕비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 머리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율레즈께서 너에게 가호를 주시길.”
“쿠치아노의 가호가 아닙니까?”
라파엘이 의아한 듯 묻자 왕이 웃었다. 희미한 웃음을 지은 왕이 “쿠치아노는 믿을 수 없어”라는 말을 태연하게 뱉는 걸 보며 군인들은 깜짝 놀랐다. 전쟁 직전, 어쩌면 전쟁을 위해서 떠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수장은 전쟁신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여상히 하고 있는 것이다.
“잘 다녀오거라.”
왕이 그렇게 말하고 라파엘의 입술에 마지막으로 키스했다. 숨통을 막을 것같이 열렬했던 키스가, 꿀물을 전하는 것처럼 달콤하게 끝을 맺었다. 왕이 겨우 배에서 내리자 선장이 왕에게 정중히 고했다. 출발하겠습니다, 전하. 그 말에 왕이 눈을 감았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 오싹한 예감이.
왕이 “그래”라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선장이 배로 올랐다. 그리고 선장이 오르자마자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왕은 자신에게 몇 번이나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의 안네마리는 라파엘 에반스가 아니던가. 그는 분명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런 예감이 들까. 어차피 낼 카드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 카드를 내면 게임에서 지게 될 것만 같은 예감. 그러나 카드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딜레마.
‘아니, 그냥 좀 불안한 것일 뿐이다.’
멀리 라파엘이 보였다. 왕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몹시 아름다웠다. 최근 보지 못했던 라파엘의 여장은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라파엘은 새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끔찍이 어울렸다……. 마치 설원에 떨어진 피처럼, 가련한 아름다움이었다.
왕이 멀리서 그를 바라본다. 천천히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왕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왕을 알게 된 지 몇 년 만에 두 번째로 그를 떠난다. 그때보다 더 아쉽고 더 슬픈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궁이 멀어져간다.
어느새 왕이 보이지 않고, 궁도 손톱만 하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라파엘은 선상 위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비전하, 아직 새벽바람이 찹니다. 선실로 내려가시죠.”
누군가의 말에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호위한다는 군인이었다. 라파엘은 습관처럼 군인의 위부터 아래까지 죽 훑었다. 대거와 장검을 갖고 있으며, 다리에도 단검을 하나 숨긴 듯하다. 완고하게 생긴 얼굴에 잘 훈련된 몸이지만, 몸이 무거워 보인다. 아무래도 특수군보다는 실력이 아래가 아닐까 한다.
‘아니지.’
이 군인과 그레이드가 검술을 겨룬다면 그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군인은 룰이 있는 시합에 잘 적응하는 편이니까. 그러나 정말로 둘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면 그레이드가 이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전하?”
군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가늘고 창백하다. 왕의 팔에 안겨 배에 타지 않았던가. 몸이 약해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하!”
저 멀리서 호위조 조장이라는 남자가 달려왔다. 그는 달려오자마자 군인을 노려보았다.
“뭡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바로 검을 빼어 들 기세다. 군인이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당신이야말로 뭡니까?”라고 받아쳤지만 그레이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드가 조심스럽게 왕비를 불렀다.
“비전하, 돌아가시죠.”
왕비가 입을 벙긋하다가 그레이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레이드가 귀를 보이자 그 귀에 대고 왕비가 뭐라고 속삭였다. 몹시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군인은 그때 알게 되었다. 낯선 남자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정숙해서 인형 왕비라는 소문이 있다고는 들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왜 자꾸 돌아가라는 거야?’
라파엘이 물었다. 군인이 와서 내려가라는 말을 했을 때도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그레이드까지 와서 이러니까 의아해진 것이다.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같이 속삭였다.
‘비전하시니까 그렇죠. 다들 몸이 약한 줄 알고 있잖아요.’
라파엘이 그런가 하고 흘끗 군인을 바라보았다. 군인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아아, 내가 아픈 줄 알고 이러는 모양이군. 라파엘은 그제야 납득했다. 그러나 그는 배를 타러 오기 전까지 왕과 몸을 겹쳤었기 때문에 약을 먹지 못해서 아직 목소리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군인에게 목소리를 내줄 수는 없었다.
왕비가 군인을 바라보았다. 흑경처럼 맑은 검은 눈이 군인을 바라보았다가 곧 사라졌다. 왕비가 휘청거리자 군인이 팔을 내밀려고 했지만 그레이드가 먼저 왕비를 붙잡았다.
“무슨…….”
지나친 경계에 군인이 입을 열었을 때, 특수군은 왕비를 부축한 채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비전하, 저놈하고 놀지 마세요.’
그레이드가 라파엘에게 속삭였다.
‘눈빛이 아주 무엄하네요.’
‘…….’
눈빛이 무엄하다는 말은 이상하다. 눈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뭐가 무엄하다는 건가?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군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아무래도 군인이 그레이드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을 다졌다. 기가 약한 쪽이 잡아먹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재주는 꽤 훌륭한 편이라 잘 배웠더라면 더욱 실력이 빛났을 텐데 아깝다고 생각하고 라파엘은 자신의 생각에 놀랐다. 요즘 내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곤 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는 호불호도 거의 없었고, 타인에 대한 관심도 없었는데…….
‘비전하!’
그레이드가 낮게 주의를 줬고,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군인은 왕비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놀란 듯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아아, 정말 아름답고 수줍음이 많은 여인이다. 그는 감탄했다. 한편으로 왕비는 인형 왕비라 불릴 정도로 다른 남자에게 차갑다는데 자신에게는 왠지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귀족들이 안고 싶어 애가 달아 있다는 인형 왕비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뿌듯해졌다. 왕비가 유혹하면 응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이상한 새끼.’
그레이드가 욕설을 뱉으며 라파엘을 부축했다. 라파엘은 왕과 밤새도록 몸을 섞은데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가끔씩 휘청거렸다. 익숙하지 않을 때 신으면 이러는 것 같다고 라파엘이 말하자 그레이드는 혀를 찼다. 군인들이 지나가면서 왕비를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저렇게 지체 높은 여인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이 새끼들, 다 변태눈깔을 하고 왜…….’
그레이드는 이를 갈았다. 왕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여기까지 수영해서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왕은 왕비가 다른 사람의 눈에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는데 심지어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탐해지다니.
‘하지만 사실 불쌍한 건 저 새끼들이지.’
남자라는 걸 알면 저놈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그레이드는 흘끗 왕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고운 여인의 모습이다. 평소에도 단정한 얼굴 위에 시녀들이 화장품으로 만든 아름다운 얼굴. 아마 인형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저 얼굴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리라. 본래도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화장품을 뒤집어쓴 왕비의 얼굴은 인간다움이 없다.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이라,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가면에서도 그라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든 그는 ‘라파엘 에반스’처럼 보인다.
그레이드의 눈에는 아무리 나긋나긋한 몸에 요염한 얼굴을 한 왕비라 해도 결국 라파엘 에반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 구두를 신느라 휘청거리고, 남자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문 남자.
……아, 그러고 보니 저 변태눈깔 새끼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보셨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그레이드가 묻자 선실로 들어서던 라파엘이 “뭐가?”라고 되물었다.
“아까 그 군인 말입니다. 평소와는 달리 주의 깊게 바라보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재질이 좋은데 거기에 비해 능력이 별로 안 좋아서.”
“아, 저를 제자로 삼아달라고요!”
그레이드가 짜증을 냈고, 시녀들이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그레이드는 시녀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파엘의 앞에서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듯이 펄펄 뛰었다.
“저도 재질 좋아요. 저도 재질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서 스승이 필요하다니까요!”
“재질에 비해선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라파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레이드의 속을 북북 긁어놓는 소리를 했다.
“아닙니다. 저도 재질은 바다같이 넓은데 능력은 조개 하나쯤이에요! 좋은 스승이 필요한 스무 살이라고요!”
라파엘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한 번만 더 말을 하면 그레이드가 고함이 아니라 불을 뿜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실을 꾸미느라 바쁘던 시녀장이 그레이드에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그제야 잊은 것을 깨달은 얼굴로 그레이드가 흘끔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지금 무엄하게 누구의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귀국하면 전하께 말씀드려 당신의 징계를 요청하고 호위조에서 배제…….”
“아, 안 돼요! 안 돼요!”
그레이드가 냉큼 뒤로 물러섰다. 시녀장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그는 정말 곤란할 것 같았다. 라파엘은 곧 관심 없는 얼굴로 안쪽으로 들어가버려서, 그레이드는 더 당황했다.
“정말 안 그럴게요. 정말.”
그레이드가 싹싹 비는 소리가 들린다. 라파엘은 피식 웃었다. 문득, 왕이 아니라 다른 일로 웃는 자신이 낯설다고 느끼지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라파엘은 창을 열고 바닷바람을 맞았다. 왕궁의 강가에서 출발한 배는 어느새 바다로 진입하고 있었다. 짠 내음이 물씬 풍긴다.
왕이 보고 싶었다. 푸른 바다보다 더 푸른 눈을 가진 왕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한 달 뒤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작 한 달인데, 그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 § §
헤수스 왕궁에서 온 화려한 배가 작은 마을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 노트코 왕궁에서 보낸 사자는 초조하게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노트코 왕궁의 왕세자로, 사리스 왕의 동생이었다. 왕세자 하밀은 측근들에게서 안네마리 제1왕비에 대해 안내받고 있었다. 몸이 몹시 약하다는 것, 후계자를 생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 쇼어 가문의 양녀라는 것, 그러나 출생이 불분명해 무엄한 소문이 은밀히 돈다는 것…… 그리고 헤수스 왕의 총비라는 것까지. 그는 측근들에게서 안네마리에 대해 들으면서 미묘한 의문을 품었다. 헤수스 왕은 남색가로 유명했는데 그에게 어느 날 애지중지하는 총비가 생겼다는 것도 의아했고, 그런데 그 총비가 출생은 불분명하고 후계자를 생산하기 어려운 몸이라는 것도 이상했다. 사실은 남자 아냐? 왕세자 하밀이 물었고, 헤수스에 다녀온 적이 있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보시면 압니다.
그리고 곧 배가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마자 나타난 것은 군인들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군인들이 먼저 배에서 내려서는 이열로 늘어섰다. 그리고 배의 갑판에 군인들이 주욱 늘어섰다. 군인들은 번갈아서 검을 빼 들거나 활을 겨누고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에 왕세자가 ‘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며 측근에게 물었다. 측근은 헤수스에서 왜 이리 삼엄한 호위를 펼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이 무능하고 어리석은 왕세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왕세자는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하면 된다. 사리스 왕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런 왕세자였다. 그는 총명한 왕세자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좌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을 전부 배제하고 있는 사리스 왕이니, 괜히 왕세자에게 현재의 정세를 알려주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천천히 왕비가 나타났다. 새카만 옷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여섯 명의 남자가 왕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일행의 앞에 시녀 둘이 안내하듯 앞장섰고, 나머지 시녀들은 뒤에서 이열로 따라오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왕세자는 왕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왕비의 첫인상은 눈처럼 하얗다는 것이었다. 서대륙에 비해 북대륙 사람들은 피부가 희기 마련이지만, 왕비는 정말이지 하얗기만 했다. 빛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듯한 피부에 왕세자는 숨을 삼켰다. 머리에 늘어뜨린 새하얀 레이스는 그 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만 했다. 아니, 그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레이스가 아니라 그 레이스가 덮고 있는 새카만 머리칼일지도 모르겠다. 레이스 아래까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조금씩 날리는 것을 보며 왕세자는 그저 말을 잃었다. 붉디붉은 입술과, 청초하면서도 요염한 미모.
“과연, 헤수스 왕의 총비다.”
왕세자가 감탄하자 측근이 ‘이 멍청이가 미쳤나’ 하는 눈으로 왕세자를 흘겨보았다. 본인이 들을지도 모르는 데서 이런 말을 하다니.
왕비가 천천히 다가오자 행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시녀가 왕세자의 측근에게 적당히 예를 갖춰 보이고 입을 열었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헤수스의 제1왕비이십니다.”
무겁고 무거운 말이었다.
이그나치오 왕이 사랑하는 여자, 이그나치오 왕이 세상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그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내리깐 눈을 들어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요기가 있다. 이 여자인가, 왕세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여자가 그 이그나치오 왕을 치마폭에 사로잡은 여자인가.
“하밀 타파르 야쿠비 랭덩 아크굴 바위르 도미니크 크리스토프 도노위츠 하머스마르크 시 노트코입니다.”
안네마리 왕비는 눈을 한 번 깜빡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왕세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악수를 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왕비에게 손을 내밀어달라 요청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손짓 한 번으로도 여섯 명의 검은 남자는 눈에 살기를 띠었다.
왕비가 남자들의 검은 옷과 옷 사이의 틈으로 팔을 내밀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드레스의 소매, 그리고 그 밑으로 곧게 뻗은 부러질 것 같은 흰 피부가 눈이 부셨다. 왕세자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그나치오 왕의 여자라서가 아니라, 잘못 잡으면 그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이 남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트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손등에 입을 맞춘다. 은은한 장미향이 느껴진다. 손가락에서는 우아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융숭한 영접에 헤수스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기묘했다.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어떻게 들으면 남자인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여성스러운, 그런 목소리였다. 매력적인 여자다. 이것이 이그나치오 왕을 사로잡은 여자.
왕세자가 손을 놔주지 않아 라파엘은 흘끗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왕세자는 아까부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라파엘은 자신의 정체가 들켰나 싶어 조금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까지 놔주지 않자 더욱 당황스러웠다. 라파엘의 손은 남자 손이었다. 남자 손치고는 작은 편이지만, 여자 손에 비하면 컸기 때문에 장갑을 끼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세자가 계속 손을 놓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라파엘은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것만으로도 라파엘의 의도를 알아챈 듯, 왕세자가 불똥이라도 맞은 것처럼 흠칫 놀라 그의 손을 놔주었다.
“노트코 왕궁에서 여러분을 기…….”
“비전하께선 바로 티스로 가실 겁니다.”
그레이드가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선상에서도 변태눈깔 때문에 피곤했는데, 내리자마자 왕세자라는 놈이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노골적으로 치근댄다.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측근들이 놀라 입을 열었다. 사리스 왕은 안네마리 제1왕비를 데려오라 명했었다. 그 이그나치오 왕이 사랑하는 여자가 어떤지 얼굴 좀 보자고 했지만, 이그나치오 왕을 부러워하는 사리스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브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23세. 아마 세상에서 건드려선 절대 안 되는 인간의 목록이 있다면 이 남자의 이름이 그 목록 가장 상단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리스는 반쯤 미친 것 같으니―이그나치오 왕을 건드리겠다는 걸로 보건대 간이 부은 게 틀림없었다. 노트코는 헤수스에 비해 재력도 모자라고 무력도 약하다. 게다가 헤수스는 아직 신의 가호를 받는 나라였다. 그것도 전쟁신 쿠치아노의 가호를―이 여인을 보고 그녀를 욕보일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측근들이 “그럼 어쩔 수 없겠습니다. 우리 왕께서 몹시 아쉬워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라며 바로 말을 바꿨다.
왕세자는 그저 왕비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안네마리 왕비가 가만히 서 있다가 시녀들의 시중과 검은 남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로 걸어갔다. 왕세자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측근이 그의 팔을 잡아 눌렀다.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측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분은 헤수스의 왕비님입니다. 이그나치오 왕의 총비란 말입니다. 그제야 왕세자는 손을 떨어뜨렸다.
‘저 변태눈깔 새끼.’
악질인데. 그레이드가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에 특수군들이 흘끔 왕세자의 얼굴을 확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장이 왕비에게(라기보단 라파엘 에반스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그들도 라파엘 에반스만은 좋았다. 남자들의 꿈과 다름없지 않은가.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세상이 전부 그 이름을 들으며 벌벌 떨지만, 스스로는 아무런 미련 없이 살아가는 거친 사내!
‘저 새끼, 눈깔을 파버리고 싶네. 씨발.’
특수군 하나가 그레이드에게 속삭였다. 그레이드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남자들과 함께 마차로 다가간 왕비가 한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남자 둘과 시녀 둘이 같이 마차에 올랐고, 두 명은 마부석에, 다른 두 명은 마차 지붕 위에 올라탔다.
‘대단한 호위군요.’
시녀들이 마차 두 대에 나눠서 탔고, 다른 군인들이 그 마차들의 마부석과 지붕에 올라탔다. 나머지 군인들도 미리 준비된 말에 올라탔다. 그들이 완전히 올라탄 다음에야 배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이 내려와 말에 탔다. 그 광경을 보던 측근들이 왕세자에게 혀를 내두르며 속삭였지만 왕세자는 그쪽엔 제대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의 신경은 마차 안의 왕비에게 쏠려 있었다.
시녀들을 태운 마차들이 출발한 다음에야 그 뒤를 왕비의 마차가 따랐고, 수많은 군인들이 말을 탄 채 뒤따랐다. 엄청난 먼지바람과 함께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측근들이 긴 숨을 토해냈다.
‘저쪽에서 거절해 다행이다.’
괜히 사리스에게 데려가느니 거절당하는 편이 낫다. 그들이 안도하고 있을 때 왕세자가 말했다.
“매혹적인 여자야.”
남자 아니냐고 할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나오냐며, 측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긴 멍청하니까 왕세자가 된 것이다. 총명했으면 시체가 되었겠지.
왕세자는 모두가 사라진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그나치오 왕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금발에 푸른 눈, 적당히 탄 갈색 피부, 호탕하면서도 냉정한 성격……. 이그나치오 왕은 지배자로 태어난 사내였다. 기질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면서도 그 자신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 있으며,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향유하지만 그 자신의 신념 또한 잃지 않았다.
이그나치오 가문은 여신 루스엔느의 저주를 받았다. 누군가는 장님이었고, 누군가는 목소리를 잃었다. 귀가 들리지 않거나, 영원히 어린애의 머리를 가진 남자도 있었다. 무언가를 결핍당하는 저주는, 대대로 이어질수록 강도가 낮아졌지만 분명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그나치오 왕이 남색가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그가 저주를 받았다고 쑥덕거렸다. 이그나치오 가문은 대대로 누군가가 저주를 받았고, 그 저주를 받은 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대에서는 아무도 저주를 받지 않았다. 그러니 현재 이그나치오 왕이 남색가인 것은 분명 생식의 능력을 빼앗긴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왕은 이그나치오 가문의 일원 중 유일하게, 저주를 받고도 왕이 된 사내였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청초하고 요염하고 차가운…… 만지면 녹아버릴 것 같은 얼음 인형.’
왕세자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왕비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먼저 가라.”
왕세자가 말에 훌쩍 뛰어오르며 일갈했다. 측근들이 놀라서 불렀지만 왕세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해, 왕비의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왕비가 숙소인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한 것은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것은 왕에게 쓰는 개인적인 서신이 아니라 공식적인 보고서였다. 군인, 특수군, 시녀들의 모든 의견을 참고해서 왕비는 우아한 필기체로 빠르게 서신을 적어 내려갔다. 노트코 항구의 분위기, 영접단의 태도와 구성, 호위 형태, 정박한 시간까지 잡다한 것들을 빠르게 적어나간 왕비는 개인적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서신을 끝마쳤다. 왕비가 탁자에서 일어나자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래도 전하께 한마디 적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 보고서를 보는 것은 왕이다. 왕이 보기 전 이 보고서를 보는 무엄한 인간이 헤수스에 있을 리가 없다.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이 잠깐 생각하다 아직 말리고 있는 종이의 끄트머리에 추신을 덧붙였다. 반드시.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왕은 아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반드시?’라고 물었던 왕이다. 왠지 이 서신을 받을 때쯤엔 저 대답을 듣고 싶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끝이십니까?”
건강히 잘 도착했고,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 따윈 없는 거냐고, 시녀장은 눈으로 물었다. 최근 눈치라는 게 생긴 라파엘이지만 눈으로 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진 못했기 때문에 “응”이라고 대답했다. 아마 시녀장이 소리 내어 물었더라면 그렇게 썼을지도 모른다.
“비전하.”
그레이드가 들어와서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은 펜을 시녀에게 넘기면서 그레이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새벽에 출발해도 괜찮으실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여기서 티스까지는 이틀 정도 걸리는 듯하더군요. 성문은 모레 아침에 바로 통과하고, 그럼 티스 성에 곧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티스 성에 미리 사람을 보내지.”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라파엘의 말에 기함하고 말았다.
“네가 가.”
“제가 왜 갑니까!”
그레이드가 소리치자 또 시녀장이 그를 노려보았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시녀장을 보고 그레이드는 급히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군인을 둘 보내고, 뒤로 따라붙어.”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냐는 얼굴에 대고 라파엘이 설명했다.
“정탐해. 그리고 성문 앞에서 합류하도록 해.”
“그냥 군인들을 보내면…….”
“그 사람들이 그냥 죽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 같이 가지 말고 뒤에서 따라붙도록 해. 조심하고.”
티스가 어떤 지형인지 외우긴 했지만 확실히 보지 못했으므로 불리했다.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눈을 반짝였다.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 살수의 모습이다. 비록 그 살수는 가발을 쓴 채 풍성하게 주름을 잡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그래도 이것이 바로 ‘라파엘 에반스’다. 그레이드는 맡겨만 달라며 라파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레이드 노엘, 반드시 생환하겠습니다!”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레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내린 임무가 생환을 운운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것이었나?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라파엘은 의아해졌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레이드는 왠지 모르지만 신이 나서 나가버렸고,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라파엘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이야? 위험한 임무라는 건가?”
“……앞선 군인들은 죽을 수도 있다 하셨잖아요.”
“그건 그 사람들이고.”
라파엘은 차가운 얼굴로 말한다.
“그레이드는 조심만 하면 괜찮을 거야. 얼마나 조심하느냐가 관건이겠지만.”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입을 다물었다. 앞선 군인들의 생사까지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그 말투는 왕비가 늘 쓰는 그대로였다. 왕비는 왕의 안위를 제외하면 다른 누구의 안전에도 관심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레이드에겐 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비록 스쳐 지나가는 말투라 하더라도.
“그레이드에게 조심하라 이르시기에 위험한 일인가 했을 뿐입니다.”
주제넘은 말씀 올려 죄송합니다, 라고 시녀장이 덧붙였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은 자신이 ‘조심하고’라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라파엘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조심하라니? 다른 사람이 조심하든 말든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전하.’
라파엘은 속으로 왕을 불렀다.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곤란해졌다. 왕의 곁이라면 좋았을 텐데. 라파엘은 아쉽게 생각했다. 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는 간결하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줄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
문득 떠오르는 왕의 얼굴에, 갑자기 초조해졌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 목소리가 간절했다.
‘전하, 저는 지금 왜 이러는 겁니까?’
아무리 물어도 왕은 알지 못할 텐데, 그래도 라파엘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작 2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너무나 왕이 보고 싶었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팔을 벌려 보이는 왕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아, 아니다. 왕에게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라파엘의 얼굴을 흘낏 보는 것만으로도 라파엘의 생각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니까.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라파엘은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돌아가야 한다.’
이런 생각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라파엘은 이제껏 돌아갈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집은 기계 장치로 둘러싸인 숲 한가운데에 존재했고, 온갖 장소에서 적이 튀어나왔다. 그는 그저 살아서 숨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라파엘은 지금 돌아가야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 왕의 곁으로, 그곳이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별일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왕과 조금 멀어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린다. 어두운 밤, 모두가 잠들어 있는데 정작 라파엘은 잘 수 없었다. 조금 잠이 들었다가도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소스라쳐 일어난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고 나서야 자신이 꿈을 꿨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꿈인지 환청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았다.
“비전하, 새벽입니다.”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은 몸을 일으켰다.
시녀들이 커다란 나무 원통에 따뜻한 물을 부어 간이 욕조를 만들었다. 라파엘이 씻자, 시녀들이 바로 그의 몸을 닦고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허리를 조이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에 올라타는 동안, 시녀들은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특수군이 곧 데리러 와서 라파엘을 둘러쌌다. 검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려오는 왕비를 군인들이 황홀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고귀한 여인의 모습은 그들의 눈요기를 확실히 시켜주고 있었다.
어제와 다른 마차에 오르며 라파엘은 흘끗 주변을 살폈다. 마을이 작은데 상당히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래는 이렇게까지 북적거리는 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자 시녀장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티스 대신 이 마을이 북적거리는 모양입니다.”
“성문은 폐쇄되지 않았던가?”
“성문의 개방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티스는 중요한 곳이니까요.”
라파엘이 시선을 주자, 시녀장이 답변을 보충했다.
“어느 대륙으로 가든 티스는 가장 가까운 지점입니다. 다른 배를 타고 가는 편이 빠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객은 티스를 이용하지요.”
“어째서?”
“티스를 이용하면 같은 헤수스 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됩니다. 돈이 적게 듭니다. 헤수스에서 헤수스로 가는 데 돈을 받진 않으니까, 승선비만 지불하면 됩니다. 육로를 이용해서 성문을 통과할 때는 대부분의 나라의 경우 따로 내는 돈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대륙 간 이동의 경우에는 승선비 외에 상당한 세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지요.”
그래서 세금을 아끼기 위해 여행자들은 계속 성문이 있는 마을과 그 주변에서 며칠씩이나 묵으면서, 성문의 개방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
“실제로 헤수스가 주 바다 경계선을 지키는 데는 저런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권력자들은 당연히 주 바다 경계선이 무너지길 바랍니다만, 다른 나라의 백성들은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조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헤수스가 주 바다 경계선을 독점하면서 아끼는 돈도 꽤 많으니까요. 조국이 자신에게 돈을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도리어 전쟁이 일어난다면 혼자 사는 할머니의 금반지까지 빼앗아가겠지요.”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장이 노트코와 주 바다 경계선에 대해서 해주는 이야기를 듣거나,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사이 하루가 더 지났다. 아침에 마차는 여유롭게 노트코 성문을 통과했다. 노트코 성문에서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이미 연락을 받은 듯 마차를 통과시켜주었다. 마차가 성문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레이드와 군인 두 명이 합류했다.
“비전하!”
그레이드가 마차에 올라타서는 활짝 웃었다.
“티스 성을 확인했습니다. 성 뒤로는 절벽이 있고,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티스 성에 바로 닿는 길이고, 티스 성을 지나치면 마을, 마을을 지나치면 항구입니다.”
“경비는?”
“성벽에서 보초를 서고, 성문은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비전하께서 도착하신다고 말을 전해달라고 했지만,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요구는 전부 전했습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성벽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누가 말을 타고 달려와 뭐라고 소리친다면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이다. 듣지 못했다면 활을 쏘아서라도 군인들을 나오게 해 들어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성과 마주 보는 곳에 군인들을 세우고, 성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하겠습니다.”
“들어오라고 하면?”
라파엘의 질문에 그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절대 비전하를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무조건 협상 결렬, 우리는 돌아갈 뿐입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무조건 협상은 단 한 번뿐이라고 말했다. 위험한 일을 하지 말고 도적을 만난 다음에는 바로 배를 타야 한다고 했었다. 라파엘은 그럴 생각이었다. 왕이 말한 대로 그저 따를 뿐이다.
“특수군 여섯 명과 비전하께서 천천히 걸어서 성문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협상을 합니다. 성에 갔을 때 아무도 나와 있지 않더라도 협상은 결렬됩니다. 전하께서는 비전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말씀하셨으니, 저희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
라파엘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남은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데 왕비는 늘 그렇듯 태연했다. 그의 전직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빈정이 좀 상하는 건 사실이다. 그레이드가 혀를 찼을 때 어느새 멀리서 티스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티스 성 앞에는 탁자와 의자 두 개가 나와 있었다. 티스 성 쪽에 놓인 의자에는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레이드는 마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티스 성 앞은 휑한 모래벌판으로, 누군가를 매복시킬 수는 없어 보였다. 저 멀리 티스 성벽에서 궁사들이 활을 겨누고 있었지만, 탁자와 성은 제법 거리가 있어서 사정거리 내에는 도저히 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레이드는 이 모든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차 문을 열고서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왕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비는 그제야 그레이드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나는 혼자다!”
저 멀리서 도적이 소리쳤다. 탁자 앞에 앉은 도적은 아무리 봐도 군인처럼 보였다. 깨끗하게 자른 머리가 특히나 그를 그렇게 보이게 했다. 그레이드가 그를 바라보자, 도적이 다시 소리쳤다.
“여기에 협정을 위한 모든 것이 있다!”
그렇게 고함을 치며, 도적이 종이를 들어 보였다. 협정서인가 봅니다, 그레이드가 왕비에게 속삭였고,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군인들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연약하다고 소문난 왕비였는데 의외로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늘 냉정해서 별명이 인형 왕비일 정도이니.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의 왕은 왕비를 총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군인들은 생각했다.
“왕의 대리인은 누구냐?”
그 말에 왕비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잠시 도적은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여성이 아니라 지나치게 젊은 여성이 온 것이다. 도적이 “왕의 대리인을 보내라 했다. 내가 요구한 건 직접 협상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레이드가 대답했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헤수스의 제1왕비이시다!”
그 말에 도적이 입을 다물었다가 “좋아”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를 협정의 상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왕비는 혼자서 오라.”
그 말에 그레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라니? 그레이드가 대답이 없자 상대가 다시 소리쳤다.
“나는 혼자다! 그러니 왕비도 혼자서 오라!”
이런 것은 생각도 못한 전개였다. 그레이드는 당황한 얼굴로 한 번 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어젯밤 이 주변을 정찰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복은 불가능해 보였고, 성벽 궁사들의 사정거리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 자리를 세팅한 것은 저쪽이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저기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조금 불안한 일이었다.
“비전하.”
그레이드가 결정하지 못하고 왕비를 불렀다. 왕비가 저쪽을 한 번 보고 이번에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50명의 군인과 여섯 명의 특수군을 본 왕비가 시녀들에게 시선을 보내고선 그레이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든 좋다는 허락이었다. 그제야 그레이드가 “좋아!”라고 말하며 모두와 함께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왕비는 바람이 부는 모래벌판을 홀로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왕비의 붉은 망토가 붉은 깃발처럼 흔들렸다. 하이힐이 푹푹 들어가는 모래벌판을 가로질러서, 왕비는 협상 테이블에 도착했다. 모래바람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왕비에게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달라는 제스처에 왕비는 손을 내밀었다. 남자들이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것은 몹시 흔한 일이었으니까. 남자가 그 손을 잡는 듯하더니 갑자기 잡아끌었다. 남자의 발치에 협상 테이블이 나뒹굴었다. 종이가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새하얀 백지였다.
“무슨……!”
그레이드가 고함을 질렀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함정이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남자는 왕비의 목을 팔로 조른 채, 왕비의 옆구리에 뭔가를 겨누고서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당장에 튀어나가려는 그레이드를, 동료인 특수군이 말렸다.
‘어차피 비전하께서 빠져나오실 거야. 저런 놈에게 붙잡히실 분이 아니잖아.’
그레이드는 아, 그렇지―하고 수긍했다. 그렇다. 저 나긋나긋해 보이는 왕비는 사실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살인 기계라고 불리던 살수였다. 아무리 봐도 상대는 그저 군인 나부랭이로, 왕비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레이드는 ‘저 새낀 죽었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왕비가 고문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정말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놈 정도는 단숨에 죽일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지만 왕비가 조금 주저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저러시지?’
그레이드가 자신의 조원에게 물었다. 그가 아는 왕비는 저 군인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왕비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 그러게. 왜 우릴 보시지?’
도적이라고 우기는 노트코 군인이 왕비의 목을 팔에 낀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헤수스 군인들은 필사적인 얼굴로 특수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특수군은 당연히 왕비가 놈의 목을 한 손으로 꺾어버리고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저 끌려만 가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다 천천히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성벽의 궁사들이 활을 치켜들었다. 활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정거리 내에 들어오면 다 죽일 기세였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왕비와 놈이 궁사의 사정거리 내에 들어갔다는 걸 의미했다.
“이게 뭐야…….”
그레이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비가 그냥 잡혀가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왕비가 그냥 잡혀갔다. 사정거리 내에 들자마자 남자는 아예 대놓고 왕비를 끌고 성문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왕비가 흘끗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결국은 그냥 잡혀가고 말았다. 이게 뭐야. 그레이드는 너무 놀라고 기가 막혀서 사기를 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왜 잡혀가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비전하!”
군인 중 한 명이 튀어나갔다. 선상에서 특수군병들이 ‘변태눈깔’이라고 불렀던 남자였다. 그는 대경실색해서는 달려 나가다 궁사들의 화살비에 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비전하!”
그제야 군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토록 쉽게 왕비가 붙잡혀 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대일 협상이라고 속이고선 대담하게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납치하다니! 이렇게 훤한 대낮에!
“비전하!”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성문이 닫힌다. 모두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제1왕비는 대낮에, 56명의 호위를 받으면서도 납치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