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장 왕의 대리인 上 (42/47)

제17장 왕의 대리인 上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스완 라 포는 혀를 찼다.

그는 사실 왕비가 일을 제대로 못 하길 바라고 있었다. 왕비가 왕의 여자로 사는 것이 낫다, 그 이상의 역할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왕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잊은 듯했지만 상대는 쇼어 가문의 남자였다. 제럴드 라 쇼어가 외무대신을 맡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왕비가 근위대장직을 겸임한다고?

그때 스완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의 존재를 말살하고 싶지 않아 했기에 스완은 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왕은 존재를 말살하지 않겠다고 했지, 왕비에게 정말 근위대장 직무를 맡긴다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왕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맨날 사랑에만 빠져 있을 줄 알았는데.”

스완의 말에 왕이 피식 웃었다.

라파엘은 왕에게 첩자들의 목록과 그 자백서를 제출했다. 왕은 잘했다며 라파엘을 무릎 위에 앉히고 몇 번이나 이마를 비볐다. 라파엘이 눈을 내리까는 것을 보고, 왕은 더 참지 못해서 라파엘을 안쪽의 서재로 끌어들였다.

길고 긴 키스 끝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옷은 카펫 위에 떨어져 있었다. 언제 벗겼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라파엘이 책상을 손으로 짚고 돌아섰고, 왕은 라파엘의 입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선명한 키스마크 위를 다시 애무한다. 온몸에 남아 있는 이 병 같은 사랑의 흔적들이 더욱 진해지도록. 혼자서 젖어들어 뻐끔거리는 입구를 한 번에 가르자, 라파엘이 허리를 젖히며 낮은 숨을 몰아쉬었다.

책상에서 시작해서 창가에서 끝냈고, 울다가 지친 라파엘을 안아다가 문 플레이스까지 친히 데려다주었다. 데이트를 하는 보통 커플들이 이럴까.

침실에서 나가려는데 몹시 아쉬웠다. 휘장을 붙잡은 채 키스하고, 키스했다. 가려는 그를 라파엘이 붙잡았었다. 누우려는 라파엘을 그가 붙잡았었다. 키스는 너무 길었다. 하지만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돌아왔더니 스완이 한다는 소리가 이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라파엘의 보고서를 읽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어. 마치 이제 더 이상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이 보고서는 놀랍습니다. 목록도 목록이지만 자백서가 진짜 일품이네요.”

자백서에는 별별 내용이 다 쓰여 있었다. 아는 것은 전부 적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자백서였다. 일뿐만 아니라 어떻게 들어왔는지, 어떤 경로로 정보를 보냈는지, 언제 무슨 정보를 보냈는지 등이 전부 적혀 있었다. 대단한 자백서였다.

정말 살수답군.

스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라파엘이 첩자들에게 무슨 고문을 했는지는 이미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라파엘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문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고문을 하는 태도였다. 가학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은, 그저 일을 대하는 태도로 라파엘은 사람을 고문했다.

고문의 목적이 자백을 받기 위한 용도라면, 라파엘의 고문은 몹시 효율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일곱 명의 인물에게서 사흘 만에 자백을 받아냈으니까.

하지만 인간적이진 않았다. 그는 종일 고문을 가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흙을 삽질로 파내는 것처럼 그 일을 일상적인 얼굴로 해냈다. 라파엘이 일을 다 마치고 나올 때 근위병들이 덜덜 떨었을 정도라고 하니 알 만했다.

“고문 실력이 엄청나더군요. 사랑에만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고문을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왕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저는 전하께 충성합니다. 사랑하는 여인도, 제 자신의 미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스완이 진지하게 하는 말에 왕이 코웃음 쳤다. 왕이 그의 말을 가벼이 여겨도, 스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왕비의 충성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슨 말이냐?”

“직접 협상에 왕비가 가야 합니다.”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른하게 미소 짓는 입술이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다. 그러나 스완은 말을 계속 이었다.

“왕비는 위험합니다. 그는 라파엘 에반스입니다. 살인과 고문의 대가지요. 전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시지만, 그는 여장이나 하고 있는 남자 정부가 아닙니다. 그는 나라 안을 떨게 만든 사람입니다. 계속 살수로 살아갔다면, 그는 어쩌면 역사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입 닥쳐.”

“그는 자신의 충성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예전 일을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애국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헤수스에 대한 충성을, 전하에 대한 충성을……!”

컵이 날아왔다. 스완은 피했고, 컵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왕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충성이 뭔지는 모릅니다!”

스완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전하의 어깨에 도대체 몇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까? 그런데 충성이 뭔지도 모르는 ‘라파엘 에반스’를 계속 곁에 둔다는 게 쉬운 줄 아십니까? 그런데 이젠 라파엘 에반스에게 권력을 쥐여주시겠다고요?!”

스완의 고함에 왕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피곤했다. 왕은 최근 이런 압박을 많이 받고 있었다. 왕비를 직접 협상에 보내라는 압박이었다.

티스를 잃을 순 없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는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티스 성에서 노트코와 접촉한다는 첩자의 보고가 들어온 이상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직접 협상을 하는 척이라도 해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협상은 어차피 결렬이야.”

왕이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 결렬될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군대를 보낼지 말지 아직 결정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결정이 나는 데에는 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뿐인가요? 항구가 폐쇄된 티스에 어떻게 정박할지도 관건이죠. 게다가 티스 바로 뒤에는 노트코가 있습니다. 이 일이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전하께서 그동안 해두셨던 모든 것들이 마비됩니다. 수로도, 빈민 복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쟁뿐이죠. 겨울이 다가옵니다. 헤수스에서는 사람이 얼어 죽는 계절이지요.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결정이 서십니까?!”

스완이 소리 질렀다.

전쟁이라는 건 무력만큼이나 돈이 중요한 게임이다. 헤수스는 돈이 아주 많은 나라지만, 이번 전쟁의 경우 다른 나라가 노트코를 지지할 가능성이 컸다. 주 바다 경계선에 관한 전쟁이다. 아무도 헤수스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때를 위해 헤수스는 다른 나라의 귀족들과 혼인을 많이 해서 유대를 돈독히 다져둔 편이었지만, 왕은 반수가 넘는 귀족들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들은 왕의 적이지, 왕의 편이 아니다.

스완의 말은 전부 옳았다. 그래서 왕은 낭패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태후는 죽었고, 왕이 보낼 수 있는 ‘대리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사실 왕이 라파엘에게 일을 맡겼던 것도 라파엘의 실력을 보려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무력에 익숙하고 강한지.

그러나 아직도 판단은 서지 않았다.

“전쟁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제껏 힘쓰신 내치가 모두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하타가 준비 중입니다. 그러나 최대한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왕비가 갔다가 돌아오는 데 최소 두 달은 걸릴 테니 그만큼의 시간이라도 벌어야 합니다. 잘못되면 어쨌거나 명분은 충…….”

이번에는 왕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왕은 총을 꺼내 스완의 이마에 대었다. 긴 장총이 몇 걸음 앞의 스완에게 닿았다.

“……지나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완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왕은 총을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서재를 떠났다. 응접실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스완은 한숨을 쉬었다.

스완과 왕이 서재에 처박혀 있는 동안 아닌 척하며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은 스완이 응접실로 나오자마자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왕의 행차가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은 스완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제이슨 리아스가 물었다. 라파엘의 고문 행위를 처음부터 지켜본 제이슨은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스완은 그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얼굴을 굳혔지만, 제이슨은 왕비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가 고문에서 가학적인 쾌감을 받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이슨은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스완이 딱딱하게 굳는 걸 본지라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왕비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뭐라시나?”

궁정대신이 물었다. 이미 대신 회의에서도 왕비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대두되고 있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처럼, 누가 왕에게 간언하느냐가 관건이었을 뿐이다. 궁정대신 옆에서 비서관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스완은 그들을 돌아보다 비서관에게 말했다.

“내일 일정을 조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마 침실에서 나오지 않으실 테니까요.”

“보내실 것 같습니까?”

스완은 잠시 생각했다.

왕은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이 얼마나 애절한 것인지, 누구보다도 스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다.

“보내실 겁니다.”

아이브리 이그나치오는 왕이 되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결국 왕좌에 올랐다.

그는 누구보다 왕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내치에 능하면서 외교 감각도 일품이었다. 그는 저울질에 능했고, 냉혹하기도 했다. 몰살을 결정할 때 그는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복수를 할 때 그는 차가웠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아무리 내치를 잘해도 주 바다 경계선이 무너진다면 역사에 실정을 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왕은 왕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왕비가 무사히 돌아오면 된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왕비만 무사하다면, 왕은 가슴이 찢어지더라도 왕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스완은 왕의 사랑이 몹시 크고 무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은 평생을 남색가라는 걸 괴로워하며 산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짝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포기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만난 단 하나의 연인, 왕비가 무사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왕은 다시 미칠 것이다. 이번 광풍은 사람 두셋이 죽는 것으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분명 전쟁이 될 것이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스완은 그렇게 말하고 응접실을 떠났다. 몹시 피곤했다. 왕비의 충성을 증명하게 해야 한다고? 말은 참 번지르르했다. 왕비의 충성?

이 세상에서 왕의 곁에 끝까지 남을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이 왕비였다. 스완조차도, 왕과 피를 나눈 스완조차도 왕의 곁에 끝까지 남을 수는 없다. 왕과 치명적인 의견 차이를 보인다면 불가능해질 것이다. 왕이 갑자기 선선대 왕처럼 폭군이 되어버린다면, 스완은 결국 왕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왕비는? 왕비는 왕의 곁에 지금처럼 앉아 있을 것이다. 왕비는 끝까지 왕을 보호하려 들 것이다.

왕비는 왕이 주는 음식은 무조건 먹는다.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이라도 먹겠다는 의지이다.

왕비는 왕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한다. 아마 자살하라는 명조차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왕비의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

‘젠장할.’

스완은 혀를 찼다. 왕에게 이 진언을 올리는 건 자신의 역할이었다. 충실하게 수행해냈다고 자신했다. 왕은 의무와 연정 중에 고민하겠지만 결국 그는 왕의 의무를 내려놓지 못하리라.

이미 대장군 하타는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왕비가 티스 성에서 협상을 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소수 정예 부대를 실은 배가 왕궁에서 상선으로 위장해 출발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왕비는 첩자를 잡아낸 것이다.

왕비가 티스에서 벗어나면 노트코로 가는 척하며 말을 돌려서 상선에 태워 먼저 데리고 올 예정이었다. 왕비가 떠나는 즉시 이런 내용을 고하고 최종 확인을 받을 예정이었다. 일단 왕비가 출발만 한다면 결재를 받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스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드레아의 차가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왕비를 협상 자리로 보냈다는 걸 안다면, 그녀는 얼마나 자신을 증오할까.

‘어차피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이미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 스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서 술이나 진창 퍼마신 뒤 자고 싶었다. 이미 왕은 술을 마시고 있겠지만, 오늘은 둘 다 홀로 술잔을 기울여야 할 듯했다. 창 밖을 바라보자 무심한 달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라파엘이 왕의 부름을 받고 왕의 침실로 들어왔을 때 드물게도 왕의 시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종은 눈에 익은 자였다. 그가 라파엘에게 ‘전하의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다. 부디 주의해주십시오’라고 속삭였다.

라파엘이 한 걸음 걸어 들어갈 때마다 시종들의 시선이 짙어졌다.

가장 안쪽, 왕의 침대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을 때 라파엘은 독한 술 냄새를 맡았다. 라파엘은 가벼운 걸음으로 왕에게 다가갔다. 왕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걸음걸이, 완전히 존재를 지우자 왕은 그가 같은 방에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 듯했다.

왕은 몇 번이나 투명한 병을 들어 청동잔에 술을 부었다. 술은 보라색으로 마치 사람의 피부 위에 멍이 든 듯한 색이었다. 창 밖에서 바람이 살짝 불어올 때마다 왕의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흔들렸다.

왕은 또다시 괴로워 보인다. 라파엘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여름 무도회의 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팠고 몹시 슬펐다. 왕이 그를 아프게 해서 슬펐고, 왕이 절망하고 있어 아팠다. 또 그런 시간이 다가오는 건가.

라파엘은 차마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다. 언제 왕에게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리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에 라파엘이 잠시 빠져 있을 때였다. 왕이 아무 이유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안네마리?”

왕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불렀고, 라파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들어왔지? 이리 와, 여기로 와.”

왕이 나른한 얼굴로 한쪽 팔을 벌렸다. 웃고 있는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라파엘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발을 움직여 왕의 품 안에 들어섰다.

왕이 라파엘을 끌어안고 술잔을 입에 대주었다. 마시겠어? 왕의 말에 라파엘이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술을 받아마셨다. 그는 왕이 주는 걸 거절해본 일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술은 쓴데다 뜨거웠다. 한 잔을 마신 것만으로도 눈앞이 흐릿할 정도로 독한 술이라 라파엘은 왕을 붙잡았다. 세상이 울렁거린다. 그는 왕에게 매달렸다.

“이런. 안네마리? 괜찮은 거냐?”

라파엘은 괜찮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왕은 안네마리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살짝 열꽃이 오른 그 얼굴을 보고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잘 못 마시는군.”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희미하게 떴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이 술이 지독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늘 그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왕에게 기대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무리하지 않았다. 무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휘장 안쪽, 침실이 존재하는 공간에는 왕과 그, 단둘뿐이었다.

라파엘은 왕에게 안긴 채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씁쓸한 술맛이 아직도 혀끝에서 맴돈다.

왕은 라파엘을 안았다. 라파엘의 존재가 너무나 가까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한데, 그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티스로 보낼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결정해야 한다, 고?’

왕은 라파엘을 두 팔로 끌어안고 그 목에 입술을 묻었다. 그는 끌끌거리며 웃었다. 조금 웃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같이 슬퍼져, 왕은 라파엘의 목에서 나는 체향을 들이마셨다. 결정해야 한다고? 그는 그 말이 우스웠다. 결정해야 한다니. 그는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결정을 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고, 때로 그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는 안네마리를 티스로 보낼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스완은 왕이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걸, 아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왕비가 대리인으로 간다는 걸 전제로 일을 진행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랬다. 그는 라파엘을 서대륙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키스해다오.”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라파엘의 입술이 다가왔다. 허공을 더듬듯이 올라온 얼굴이 가까워졌다. 라파엘의 입술은 평소와 달리 약간 뜨거웠다. 알코올 때문인 듯, 촉촉하고 뜨거운 입술이 왕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게 다가온 입술을 삼키고 거의 보여주지 않는 치아 하나하나를 혀로 더듬었다. 하지만 머리는 뜨거워지지 않았다.

티스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티스라니? 왕은 라파엘을 왕후궁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도 싫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티스는 곧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라파엘은 전쟁터로 변할 그곳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시간을 끄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무리 그가 살인 기계라도, 다수의 공격에는 그도 쓰러질 수밖에 없다.

물론 라파엘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진 않을 것이다. 왕궁특수군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이중 삼중으로 라파엘을 호위할 것이고, 라파엘 자신도 스스로의 몸을 지켜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수가 많았다.

‘쿠치아노.’

왕은 그 이름이 떠오른다. 인간들이 아무리 다수로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고위신. 그러나 쿠치아노는 이제껏 라파엘의 기구한 생에 한 번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라파엘의 안에서 쉬고 있었을 뿐이다. 쿠치아노가 애초에 도울 것이었다면, 라파엘이 총을 맞기 전에 도와야 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때 총을 맞았다.

‘쿠치아노는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어.’

쿠치아노에게 도움을 청하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그 전쟁신은 한숨을 쉬면서도 티오안의 청은 무엇이든 들어주었으니까. 그러나 쿠치아노가 저 몸에서 여러 번 각성할수록 라파엘의 정신 균형은 무너질 것이다.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융합은 불가능하다.

방법은 하나뿐.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라파엘을 빼내야 한다.

“전하?”

왕이 입을 맞추다 말고 머리를 물리자, 라파엘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를 불렀다.

“나를 불러봐.”

왕이 속삭이자, 라파엘이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아이브리 전하.”

왕은 다시 라파엘을 끌어당겼다. 그는 자신의 걱정을 떨쳐내기 위해, 라파엘에게 격정적으로 키스했다. 잠깐 놀랐던 듯했던 라파엘이 곧 왕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채 키스에 응해왔다.

보내지 않을 방법만 있다면……! 그런 방법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못 찾는 것에 불과할 것 같은데, 그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약간의 시간만 더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무서운 곳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차라리 자신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왕은 수십 번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경우, 헤수스는 끝장이다. 왕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후계자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내부적으로 왕좌를 두고 다투는 끝에, 전쟁에선 패하게 될 것이다. 그는 왕이었고, 그렇게 만들지 않을 의무가 있었다. 이제껏 왕의 권력을 향유했던 만큼, 그는 왕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

아아, 그러나.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그 방법이라는 걸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왕은 라파엘의 옷을 벗겼다. 라파엘은 왕의 손에 옷이 벗겨지도록 도우면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웃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안네마리? 왕이 장난스럽게 속삭인다. 부끄럽기라도 한 거냐? 그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데, 이상하게 왕은 어딘가 힘들어 보였다. 라파엘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문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물으면 안 되는 일이 몹시 많을 텐데 괜한 걸 물어보는 건 좋지 않다.

라파엘 자신이 만약 살수로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면, 라파엘은 아무리 상대가 왕이어도 말해주지 못할 것들이 몹시 많을 테니까. 하물며 그는 살수 나부랭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헤수스의 왕이 아니던가.

“아…… 그만. 전하……?”

왕은 벌써 몇 시간째 라파엘을 애무만 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아무리 왕을 끌어당겨도, 왕은 그의 몸에 삽입하지 않았다.

왕은 라파엘의 온몸을 핥고 빨아들였다. 발바닥이나 엉덩이 안쪽까지, 손가락 사이나 머리칼 안쪽까지도. 가면 갈수록 그는 말도 없어졌다.

그는 미친 듯이 라파엘의 온몸을 애무했다. 어느 한 곳도 자신의 몸이 닿지 못한 곳이 있다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미 왕과의 교합에 익숙해져 있는 라파엘은 몇 번이나 왕을 불렀지만, 왕은 그를 안지 않았다. 이미 온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은데, 몇 번이나 끈질기게 괴롭혀진 유두는 쓰릴 정도로 울리는데, 왕은 그를 안을 것 같지 않았다.

라파엘이 사지로 왕의 온몸을 감은 채 속삭였다.

“아이브리 전하……. 호, 혹시 그냥 나가볼…….”

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싶어서 묻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왕은 원래 잘 웃는 사람이었고, 라파엘은 그의 곁에서 그의 웃음을 지켜보았었다. 화가 날 때, 어이가 없을 때, 즐거울 때, 사랑하고 있을 때…… 그는 종종 웃었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웃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웃고 있었다.

‘모르길 바라는 건가?’

상대가 모르길 바란다면 모르는 척하는 게 나으리라. 그리고 라파엘 자신도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이다.

“여기를 이렇게 세우고 나갈 테냐? 드레스가 아니라서 감춰지지도 않을 텐데?”

왕이 짓궂은 목소리로 물으며 라파엘의 중심을 어루만졌다. 성기는 젖어 있었는데 라파엘이 흘린 것도 있었지만, 왕의 타액도 묻어 있었다. 왕은 라파엘의 성기를 입에 넣고 빨아들이다 뱉고, 다른 곳을 애무하다 다시 그것을 입에 넣고 애무하길 반복했었다. 라파엘이 몸을 뒤틀 때마다 ‘조금만. 착하다’ 따위로 말하면서, 오랜 시간 라파엘을 미치게 만들었다.

“……나, 나가는 건 어떻게든 됩…… 아. 아아아― 잠, 손을 좀――.”

“나갈 수 있다고? 그래, 너라면 바람처럼 날아갈 수도 있겠지. 그렇게 돌아가서 여길 어떻게 달랠 테냐, 응?”

“그, 그건…….”

왕이 한 번 더 웃었다. 강한 척은. 왕의 웃음에 라파엘이 할 말을 잃고 눈을 감았다. 왕이 그의 것을 흔들고 있었다. 소리가 제멋대로 흘러나온다. 아아, 읏…… 아! 라파엘이 눈을 감고 낮은 신음을 흘리자 왕은 라파엘을 바라본다.

그는 라파엘 에반스를 보았다.

라파엘은 안네마리지만, 안네마리만은 될 수 없었다. 그는 라파엘 에반스였다. 그는 강하고 무시무시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살인도 고문도 라파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궁내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안네마리였다.

왕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안네마리였다. 심지어 왕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일 뻔했던 그 안네마리이기도 했다.

라파엘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절정으로 가고 있는 라파엘의 얼굴은 안네마리의 얼굴이다. 강력하고 무서운 살수와 지고지순한 안네마리가 겹쳐지는 그 얼굴은―정체가 무엇이든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다.

지켜주고 싶었다. 한 번도 보호받지 못하고, 그저 착취당했을 뿐인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아무도, 신조차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그는 큰소리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왕은 라파엘에게 희생의 길을 강요해야 한다. 라파엘은 왕의 말 한 마디면 그 길을 기쁘게 걸을 것이다. 그는 왕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왕은 ‘사랑에 빠져 있는 안네마리’에게 자신이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안다. 라파엘은 물론 무사하게 돌아올 것이고, 그것을 위해 모든 이들이 최대한 배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희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라파엘은 위험한 곳으로 떠날 것이고, 협상이라는 무거운 자리에 서야 한다.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라파엘이 그런 자리에 서는 것은 희생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힘겹게 절정에 달한 라파엘이 힘을 빼자, 아이브리는 라파엘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왕이니까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너무나…….

라파엘이 눈을 떴을 때, 왕은 라파엘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왕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문득, 라파엘은 여름 무도회의 그 밤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잊은 줄 알았는데.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그때의 충격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불쾌감, 늪에 빠지듯이 계속 진창으로 빠지는 몸…….

뭐지. 라파엘의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라파엘은 자신의 의지로, 팔을 내리눌렀다. 아니. 그가 생각해내야 할 것은 그 밤이 아니었다.

“전하…… 이제…….”

라파엘의 속삭임에, 왕이 천천히 들어온다. 물이 들어오는 것처럼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라파엘이 시트 위에서 몸을 튕길 때마다 기다려준 왕이 이윽고 라파엘의 안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제야 라파엘은 몸에서 힘을 풀고, 왕을 마주 안았다. 다리를 왕의 허리에 감은 채 왕에 의해 흔들렸다. 왕이 속삭이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아련했다. 안네마리. 안네마리. 그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멀어서, 라파엘은 왕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목소리가 왜 이렇게 먼지 알 수 없었다.

교접의 끝, 왕은 라파엘의 품에 쓰러졌다. 술은 독했고, 라파엘의 안은 뜨거웠다. 알코올과 섞인 피가 뜨거워진다. 왕은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버렸다.

§  §  §

아침에 왕의 침실에서 돌아온 라파엘은 다시 서재에 처박혔다.

시녀장이 식사를 권해보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원래 식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시녀장은 라파엘이 무도가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라파엘은 몸을 움직이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연습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식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녀장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고양이처럼 움직인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휙, 허공을 날듯이 뛰어다닌다. 그 모습은 때로 놀라움을 넘어서 아름답기까지 했다. 밤고양이처럼 허공으로 뛰어오른 그의 뒤로 달이 비추면,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비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니까요.”

그 아름다움을 본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된 이 청년을 보아도, 확실히 왕비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특수군 호위조 조장 그레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시녀장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왕비가 부르지 않은 이상 창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 그레이드는 어쩔 수 없이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시녀장은 그를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무뚝뚝해 보이는 중년 여성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라고 지금 제가 몇 번째 말하나요? 물러나세요.”

“저는 여쭤볼 말이 있어요. 시녀장님께는 말씀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포 대장님에게 먼저 보고하시죠.”

시녀장이 차가운 시선에 그레이드가 혀를 찼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시녀장님은 알고 계십니까? 비전하께서 ‘왕의 대리인’이 되실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 말입니다.”

왕의 대리인? 그것은 특사가 아닌가. 시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실제로 몰랐지만,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다.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상대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이 수법은 귀족들에게는 반쯤 통하고 반은 통하지 않지만, 이렇게 순진한 청년에게는 통하기 마련이다. 그레이드가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하고 투덜거렸다. 시녀장이 입을 다물자 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비전하께서 티스로 가시는 걸로 결정되면, 저희도 반드시 가야 합니다. 비전하께 반드시 그 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들여보내주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포 대장님에게 말씀하세요.”

“전쟁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레이드가 낮게 고함쳤다. 시녀장은 순간 눈을 크게 뜰 뻔한 것을 겨우 내리눌렀다. 전쟁. 그렇게 무서운 단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포 대장님은 안 돼요. 그분은 비전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비전하를 그 선두에 내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전쟁 전에 비전하를 빼낸다 하더라도, 그건 분명히 위험한 일입니다. 저희는 그 일에 반드시 동행해야 합니다.”

“왜?”

시녀장이 물었다.

“……예?”

“왜 동행해야 하냐고 물었소.”

시녀장이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레이드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는 몹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모시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분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비전하께서는 제자를 받지 않으십니다. 설사 비전하께서 허락하셔도 국왕 전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오.”

“제 마음속에서 스승으로 삼을 분이라 결정했으니 반드시 동행해서 지킬 겁니다.”

시녀장이 가만히 바라만 보자, 그레이드가 울컥해서 소리쳤다.

“아, 씨발! 안 데려가주시면 특수군 때려치우고라도 쫓아갈 거니까 비키라고요!”

“그따위 말버릇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비킵니까?!”

시녀장이 나지막이 일갈했다.

그레이드가 미치겠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녀장은 가슴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이 왕비를 티스에 보낸다.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결말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왕비는 왕을 사랑한다. 그리고 왕비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왕이 왕비를 티스로 보낸다? 그리고 왕비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왕은 고작 여기서 괴로워할 뿐이겠지. 겨우 찾은 부모와 평생을 종사해온 직업과 자신의 성까지 버린 왕비를 잃고, 왕은 또 슬퍼하기만 할 것이다. 왕비는 특사직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왕비가 거절하면 되겠지만…….

그는 거절하지 않는다.

왕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 ―왕비는 거절하지 않는다.

“가.”

시녀장이 중얼거렸다. 그레이드가 “아, 뭐라고요?”라고 신경질을 내자 시녀장이 고함을 질렀다.

“가! 가라고! 안 들려?!”

그레이드는 깜짝 놀라 어깨를 굳혔다. 시녀장은 늘 정중한 얼굴을 한다. 저 여우같은 포 대장과 음모의 백전노장인 왕조차 속여 넘겼다고 들었다. 그 정도로 표정 관리에 능숙한 시녀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꺼지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레이드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가 벼락을 맞은 듯이 웅얼거렸다.

“……정말…… 모르셨군요…….”

티스로 왕비를 보내면 시녀장이나 시녀들은 당연히 동행해야 한다. 그녀는 아마 그런 것에 충격받은 듯하다. 죽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저럴 만하지, 그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 대장은 늘 그에게 제발 생각 좀 하고 살라 그랬는데, 이번에는 정말 반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레이드가 사라지자 시녀장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왕비는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그는 왕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왕이 자신을 짓밟는 그 순간에도 왕비는 끝까지 반항하지 않았다. 왕에게 다쳐도 왕비는 원망 한 마디 없었다. 왕비는 왕을 사랑한다. 그것은 기묘한 열광을 동반하는 사랑이다. 왕비는 왕을 위해 자신을 내주고 싶어한다. 인간이 자신을 위하는 감정을, 왕비는 왕에게 주고 싶어하는 사랑으로 모두 바꿔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왕비는 불행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특사직을 받아들일 것이고,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는 대지를 밟을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왕을 위해 움직이겠지. 우리한테 분명 그렇게 말할 거야. 자신은 왕명만을 지킬 테니, 지켜줄 수 없고, 그러니 물러서도 좋다고. 당신은 언제나처럼…….’

시녀장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창 밖을 노려보았다. 그늘진 복도는 약간 어두웠다. 환한 창가와 그림자가 교차하는 긴 복도를 바라보며 시녀장은 왕비의 인생 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화려한 곳인데도, 왜 늘 찬란할 수는 없을까.

왕비에게는 행복한 끝일지도 모른다. 그는 왕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했다. 그가 왕을 바라보는 시선은 신도의 시선보다 더 깨끗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바라는 것은 오로지 왕의 행복뿐. 신도조차 신에게 가호를 바라는데, 왕비는 왕의 행복만을 바란다. 그것은 정말로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맹목. 왕비는 왕을 위해 제물이 된다. 자신을 제물 삼아, 그는 왕에게 바치고 또 바친다. 자신의 생과 목숨과 감정을, 스스로의 손으로 잡아 뜯어선 피가 줄줄 흐르는 상태로 제단에 올린다.

시녀장은 문을 열었다. 라파엘이 책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총을 만지다 말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

왕비는 아직 자신에게 드리운 운명을 알지 못한다. 하긴, 그는 알아도 별 관심도 없어 하겠지. 왕에게 뭔가를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니.

“저는 같이 갑니다.”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어디에? 그러나 시녀장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계속했다.

“저는 반드시 같이 갑니다. 절 보호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이상입니다.”

“……어디에 같이 가는진 내가 몰라도 되는 건가?”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녀장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는 담담한 얼굴 아래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마리의 일이 아니고선 시녀장이 이렇게 동요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옆에 뒹굴던 총을 잡아선 시녀장에게 던져주었다. 시녀장이 엉겁결에 그 총을 잡았다.

“비전하?”

“어디를 가는지 몰라도 위험한 곳인가 보지? 만약 혼자 자신의 몸을 지킨다면 그 총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시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툭하면 폭발하는 이 총이 말입니까?

“내 생각엔 폭발하지 않을 가능성이 제일 큰 총이거든.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

“믿어도 됩니까?”

시녀장이 웃었다. 마치 왕의 웃음처럼, 쓸쓸하고 아파 보인다. 라파엘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아서 억눌렀다. 요즘 한숨이 자주 나오려 한다. 이렇게 자신이 한숨을 많이 쉬었던가?

“내 생각에는 그래. 하지만 사정거리가 짧으니까, 가능한 한 가까이서 쏴야 해. 총구가 상대의 몸에 닿을 수 있다면 좋겠지.”

“칼로 찌르는 거와 별다를 바가 없네요.”

“칼로 찌르는 데는 기술이 필요해. 하지만 그 총은 그럴 필요가 없이 아무 데나 쏘면 돼.”

전직 살수가 태연히 말한다.

시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왕비를 만났을 때, 그 살인 기계라는 말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리의 죽음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살인 기계가 아니라 악마의 손이라도 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의 곁에 남았지만 한기가 들 정도로 무서운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평민으로서는 오를 수도 없을 위치에 올라 있어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왕비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시녀장은 왕비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가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사람. 하지만 왕비는 위선이 일체 없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예민하지도 않았고, 상대에게 편견도 없었다. 그는 공정한 윗사람이었고, 게다가 말도 몹시 잘 들었다.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시녀들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나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도 좀 들었다. 늘 빼앗기는 인생을 산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머, 머리를 쏘는 게 낫겠죠?”

“그게 편하긴 하지. 하지만 아무 데나 쏴도 돼. 어차피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총을 내려다보았다. 왕은 왕비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사랑할 뿐이다.

‘너희들이 다 그렇지! 너네, 왕족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들은 다 그 모양이지! 의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은혜도 없는 배은망덕한 인간들!’

시녀장은 총을 품에 안았다. 자신을 위해서, 혹은 왕비를 위해서 그녀는 이 총을 사용할 것이다. 여기서도 지켜주지 못한 주제에, 티스로 보내면서 지켜주겠다 하겠지. 시녀장은 왕이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그리고 왕비는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는 왕의 말을 믿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티스에서 지켜주지 못해도, 왕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할지언정, 왕이 지켜주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머릿속에서 마리 트리지아의 환하게 웃던 소녀 시절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마리를 지켜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리의 분신은 지켜줄 것이다. 최소한 손을 놓은 채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따윈 하지 않겠다. 그 변명은 한 번으로도 과했으니까.

시녀장이 서재에서 나가자 라파엘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왠지 모르게 요즘 사람들의 감정을 조금쯤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별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왜 저렇게 기합이 들어가 있지?’

시녀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총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생각하자 라파엘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설마하니 궁 안에서 쏠 건 아니겠지? 괜히 총을 줬나?

라파엘은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특수군이 장난스럽게 나뭇잎을 흔들었다. 라파엘은 잠시 그들이 하는 짓을 바라보다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왕이 왜 그에게 여장을 권하지 않는지 그는 모른다. 왕이 왜 근위대장 업무를 지시했는지, 그는 역시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왕은 자신을 정리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라파엘이 듣기로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했다. 심지어 권력의 정점에 선 지배자의 사랑은 더 짧을 것이다. 귀족들에게 애정을 주었다가 우는 젊은 처녀 이야기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왕의 태도는 이상했고, 그것은 떠나가는 애정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라파엘 에반스는 비인간적이다. 라파엘이 평생 동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다. 라파엘은 혀를 차며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기계적인 특성이 발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은 흔들린다. 하지만 기계는 일단 작동하면, 망가지기 전까지는 그 일을 계속한다. 아마 라파엘의 감정 또한 그럴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는 왕을 사랑할 것 같았다. 왕은 근사하고 강하다. 태양처럼 눈부시면서 거침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승패조차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에게서 그는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뭐, 내가 이상한 거겠지.’

라파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가슴이 아프다는 걸, 왕을 만나서 알았다. 그는 왕을 만나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아프다는 걸, 절망조차 달콤하다는 걸, 그는 모든 걸 왕에게서 배웠다.

라파엘은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새벽에 왕의 침실에서 벗어날 때 라파엘은 왕의 침실에서 스완에게 붙잡혔었다. 침실과 응접실과 손님 대기실과 시종 대기실 등이 모여 있는 왕의 침실에서, 라파엘은 스완에 의해 시종들의 대기실로 끌려갔다.

물론 스완이 그를 강제로 끌고 갔던 것은 아니었다. 라파엘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었다. 만약 라파엘이 스완을 밀어냈다면 모든 근위병은 스완에게 창을 겨누었으리라.

최근, 라파엘은 근위대장으로서 살고 있었다. 그것은 왕비의 호위조와 시녀들이 모두 없다는 걸 의미했다. 라파엘은 혼자 있었고, 그래서 스완은 수월히 라파엘을 시종 대기실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당신은 티스로 가셔야 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스완은 그렇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당신을 아끼셔서 그리 하지 않으려 애쓰시지만, 결국 그리 하시게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완이 말을 이었다.

‘티스 성이 노트코 군인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적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분명히 노트코 군인입니다. 그들은 티스를 노트코에 넘겨 주 바다 경계선을 무너뜨릴 예정입니다. 저희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경계선이 무너지면, 전하께서는 실정을 하신 것이 됩니다. 이후로는 어떤 업적도 전하의 실정을 덮을 수 없게 됩니다.’

스완이 빠르게 말했다. 그는 거의 매달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스완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빼내었다. 그제야 왕비의 팔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스완이 혀를 찼다.

‘전하께서 원하시면 갈게. 됐어?’

라파엘의 말에 스완이 숨을 삼켰다. 그는 더 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스완이 결심을 굳힌 얼굴로 말했다.

‘다, 당신께서 먼저 가겠다고 해주십시오.’

‘싫어.’

라파엘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용건이 끝난 것 같아 방을 나서려는 라파엘을, 스완이 급히 붙잡았다.

‘당신은 티스로 가셔야 합니다. 헤수스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너는 지금 말을 이상하게 해.’

라파엘은 스완을 바라보았다. 스완은 평소와 몹시 다른 모습이었다. 숨이 넘어갈 것같이 초조해하면서도 말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말투도 전혀 능란하지 않았다.

‘조금 전엔 전하께서 보내실 거라 했잖아. 그리고 내가 먼저 가겠다 하라고 하고.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헤수스는 나와는 상관없어.’

이쯤에서 뭐라고 대답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스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그저 절박한 얼굴로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하께서 나의 티스행을 원하시는 거야?’

라파엘의 질문에 스완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실소했다. 헛웃음처럼 가볍고 허무한 웃음이었다.

‘원하시게 될 겁니다.’

스완이 대답했다. 어느새 말투가 그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라파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었다.

숲으로 뛰어내린 라파엘은 천천히 걸었다. 저 멀리서 왕비의 호위조가 움찔거린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라파엘이 뛰어내리자 습관처럼 튀어나오려다, 라파엘이 검은 잠행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춘 상태였다. 현재의 라파엘은 근위대장일 뿐, 왕비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은 라파엘을 호위하면 안 된다.

라파엘은 천천히 걸었다. 이그나치오궁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이 아름다운 곳을 다시 한 번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 떨어져가는 나무들이 쓸쓸하지만 헤수스는 눈이 많이 오는 나라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라파엘에게 있어, 모든 곳에서 왕이 생각나는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을 것이다.

이그나치오궁에 들어가던 그는 근위병에게서 당연한 듯 인사를 받았다. 최근 그가 근위대장으로 움직이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얼굴을 익힌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가 왕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청순하고 요염한 왕비는 시녀들의 걸작이었다. 그저 단정할 뿐인 라파엘의 얼굴과 그 아름다운 왕비의 얼굴을 겹쳐 떠올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비록 왕비 쪽은 화려함이 부족해 늘 혹평을 받고는 했지만, 그래도 감히 남자의 얼굴과 비교할 생각을 해본 사람은 없었다).

긴 복도를 지나 왕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집무실 앞에 서자 근위병들이 길을 터준다. 문이 열리고 라파엘이 들어서자 멀리서 시종장이 의외라는 시선을 던졌다. 시종장이 왕에게 속삭이자, 왕이 고개를 들어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

왕은 그를 라파엘이라 불렀다. 라파엘은 왕에게 근위대장으로서 인사를 했다. 왕이 라파엘이라 부른다는 건, 여기에 사정을 모르는 눈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재무대신이 구석에 서 있었다. 라파엘이 먼저 고개를 숙여 보이자 재무대신이 흘끗 눈인사를 했다.

“대신, 나가 보지. 난 내 근위대장과 시간을 좀 보내고 싶군.”

왕의 말에 재무대신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으로 몸을 돌리기 직전, 라파엘은 재무대신이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느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왕이 환하게 웃으면서 팔을 벌렸다.

“안네마리, 오늘은 일찍부터 갔더구나. 누가 너한테…….”

“저는 전하께서 원하시면 티스에 갑니다.”

라파엘이 왕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왕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하지만 라파엘은 왕에게 계속 다가가며 태연히 말했다.

“하지만 전하의 말씀이 아니면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전하께서 뭘 원하시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타인이 하는 말을 전하의 의지라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저는 전하 마음의 기미를 알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시종장은 오늘 새벽 스완이 라파엘을 끌고 시종 대기실로 들어가던 것을 떠올리며 속으로 맙소사를 외쳤다. 왕비가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누가 너에게 티스 이야기를 했느냐?”

무시무시한 얼굴로 왕이 물었다. 그리고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피식 웃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떠오른 실소는 바짝 마른 땅이 갈라지는 것마냥 건조했다.

“아아, 그래. 누군지 뻔하지. 그래서, 너는 내가 원하면 거길 가겠다고?”

“예, 전하.”

왕의 벌린 팔이 내려왔기 때문에, 라파엘도 멈추어 섰다. 고작 몇 걸음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나 아느냐?”

“잘 모릅니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는 말이 아니야! 그건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왕은 오늘도 그 일로 대신들과 입씨름을 하고 결국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방법을 찾을 시간 또한 없다. 왕비를 티스로 보내는 것이 유일한데다 효율적이기까지 한 방법이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도 혀도 귀도, 모든 것이 거부한다. 각오와 의지를 다질 수가 없다. 왕비를 보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선 혀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수십 번의 간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쟁이다. 너를 거기에 두고,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단 말이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그런데 안네마리 본인이 하는 말만은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내가 토끼라 했더니, 넌 정말 토끼라도 되어버린 거냐? 너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는 있는 거냐? 너는…….”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파엘이 물었다. 왕이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의 남자는 그가 언제나 사랑해온 그 사람이었다. 그가 최근에 지을 수 있게 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사실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전하께서 명하시면, 저는 뭐든 한다는 걸.”

그것은 뼈아픈 말이었다. 왕은 잠시 숨을 멈췄다. 안다. 라파엘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티스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라파엘은 자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신에게서도 외면받는 일을, 라파엘은 태연하게 할 사람이었다. 안다. 그는 라파엘을 왕의 대리인으로 지목해야 하고, 그럼 라파엘이 서대륙으로 갈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라파엘의 그 사랑에 기대어서, 다른 사람이라면 거절할 수 있을 특사직을 수락하게 할 것이다.

“명령하시면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라고!”

왕이 화를 냈다. 차라리 너무하다고 말해! 그는 속이 상하는 나머지 뒤집어졌다. 라파엘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너는 보호받아야 했어. 나는 너를 보호해야 했어. 하지만 그렇게 못해줄 것 같은데, 너는 왜 심지어 자의로 자신을 바치는 거냐!

라파엘에게 내는 화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내는 화였다. 분노가 치밀어서 눈가가 뜨거웠다. 사람이 화가 나면 심장이 뛰고 눈가가 뜨거워진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그토록 화가 났다. 지켜준다고 하고, 결국 라파엘을 또 죽음의 근처로 밀어버리는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고, 그런 자신을 위해 선뜻 명만 내리라고 말하며 웃는 라파엘이 가여워 슬펐다.

“……돌아오지 못하게라도 되면…….”

한참이나 고함을 지르던 왕이 갑자기 조용해져서 중얼거렸다. 라파엘은 가만히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너무 무서워서, 이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운 듯 보였다. 라파엘이 곁으로 다가가자, 왕이 고개를 들었다. 늘 강하고 근사하며 주저함이 없던 왕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네가…… 만약에…….”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티스 성을 점령한 노트코 놈들은 명분을 찾고 있다. 헤수스에서 협상을 거절했다는 핑계로 티스 성을 노트코에 넘겨버리기 전에, 왕비를 보내야 하는데 도저히 보낼 수가 없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전 누구보다 위험에 익숙합니다.”

왕의 곁에 선 라파엘이 가만히 서서 말했다. 왕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손을 어떻게 뻗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라파엘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왕이 아이처럼 허약해 보여서 라파엘은 온 힘을 다해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죽음에서 살아오는 자는 저 하나일지도 모릅니다만, 저 하나만은 반드시 전하 곁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못 하지만, 저 자신의 생환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합니다.”

라파엘이 힘껏 설득했다.

“저는 돌아옵니다. 반드시.”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왕이 심하게 동요하는 와중에 자신이 있는 것은 결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왕의 동요를 진정시킬 수 있는 자는 검은 옷을 입은 왕비뿐일 테니까.

왕이 라파엘의 팔을 아프게 쥐었다.

“반드시?”

왕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반드시? 반드시라고?

모두가 말한다. 

‘아무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그는 혼자 가는 게 아닙니다. 많은 호위를 받으며 갈 것이고, 노트코 군인들도 감히 헤수스의 왕비를 건드릴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들이 협상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태후를 끌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직 태후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아서 협상 카드를 버리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제발,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분명 그럴 텐데도 왕은 라파엘을 보낸다는 생각만으로도 한기가 들었다. 오싹했다. 마치 절벽 끝에 발을 반만 걸친 채 서 있는 것처럼 바닥에서 온몸의 기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반드시라고?”

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뭐라도 믿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누군가가 왕의 귓가에 속삭인다. 안네마리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는 약속한 이상,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귓가에서 되풀이되는 마지막 말.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왕은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칼, 언제나 정직한 검은 눈, 햇살이 닿으면 변색될 듯이 창백하고 하얀 피부, 그리고 색이 옅은 입술, 단신의 마른 몸, 그 몸에서 나는 부드러운 체향. 그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는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그의 머릿속에 사는 것이 신이 아니라 악마라는 걸 알면서도, 왕은 숨을 크게 쉬어본다. 왕이 다시 팔을 벌리자 라파엘은 그 품에 안겼다. 익숙하게 안기는 그 몸이 너무나 황홀하다. 왕은 몇 번이나 물었다.

반드시?

그때마다 그의 충성스러운 연인은 대답해주었다. 반드시.

밤은 지독히 황홀했다. 왕은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을 받으며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라파엘이 집무실로 찾아오고 나서, 왕은 라파엘과 선 플레이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미친 듯이 라파엘을 탐했다. 그건 쾌락이 아니라 공포로부터의 도피였다. 별거 아니라고 신하들은 몇 번이나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왕비를 지킬 것이고, 어떤 문제가 생기든 그전에 왕비는 서대륙을 나올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무서운 상상들만 들었다. 왕은 그 모든 상상들로부터 도망쳤다. 라파엘의 우는 얼굴은 달콤했고, 라파엘의 안은 뜨거웠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환희는 금세 찾아왔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입술이 부드러웠고, 피부는 따뜻했다.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왕은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때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라파엘의 다리라도 부러뜨릴까 하는 몹시 끔찍한 생각. 그러나 부러진 다리는 낫는다. 그리고 라파엘은 그의 곁에 계속 있을 것이다.

전하, 아이브리 전하. 라파엘은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태어나길 왕세자로 태어나, 그는 언제나 이름 따위는 잊힌 존재였다. 그는 왕이었고, 왕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런 자신이 싫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왕의 권력을 향유하는 만큼, 의무도 언제나 이행해왔다. 하지만, 이건…….

왕은 라파엘의 몸 위로 올라갔다. 새벽은 아직 아침이 되지 못했다. 아주 밝은 빛이 비치지 않는 지금이라면, 연인의 팔 정도는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연인의 완벽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하지만 몇 번이나 그 팔에 힘을 주려다가도 그는 결국 할 수 없었다. 그는 고의로도 실수로도 이 몸을 짓밟았었다. 고의로 이 몸을 배신했고, 실수로 이 몸을 죽일 뻔했다. 그런데 또 팔을 부러뜨린다니, 그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전하.”

밤새도록 울어 쉰 목소리로 라파엘이 그를 불렀다.

“제가 할까요?”

그 말에 왕은 당황해서 “뭘 말이냐?”라고 물었다. 제발 몰랐다고 해. 전혀 다른 말을 해. 내 추한 마음 같은 건 몰랐다고 해. 왕은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제 팔을 골절시키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

“원하신다면…….”

굳이 당신이 힘을 쓸 필요는 없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원하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는데, 결국 왕은 라파엘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라파엘은 왕에게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 완벽한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왕이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안전이야, 안네마리.”

왕이 지친 얼굴로 말한다. 라파엘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그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데, 라파엘이 뭔가를 해주려고 할 때마다 그는 막다른 곳에 몰린 듯 절망스러운 얼굴을 한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어서 왕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걸까?

“너의 무사야. 네 팔이 아냐.”

왕이 속삭인다. 애처로운 속삭임에 라파엘은 흠칫 몸을 떨었다. 물론 자신은 무사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은 무사히 왕의 곁으로 돌아올 텐데. 몇 번이나 왕에게 말했다. 자신은 언제나 무사했고, 생존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왕은 괴로워하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 라파엘로서는 도저히 왕의 괴로움을 사라지게 해줄 수가 없어서.

“아이브리 전하.”

라파엘은 왕의 목에 팔을 걸었다. 왕의 몸이 살짝 굳었다.

“전하.”

왕을 유혹해서라도 그가 조금 더 편해졌으면 했다. 유혹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망설인 것은 잠시뿐이었다. 라파엘은 왕을 부르며 끌어당겼다. 왕의 얼굴이 힘없이 끌려왔다. 새벽빛만큼 푸른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아이브리, 전…….”

라파엘이 그를 부르며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그의 입술에 키스하려 했다. 그 순간, 왕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라파엘이 그를 부른다. 슬프고 아팠는데도 그 목소리 한 번에 숨이 막혔다. 새벽의 차가운 기온에 땅 밑으로 꺼진 줄 알았던 열기가 삽시간에 왕을 휩쌌다. 왕은 놀라 눈을 깜빡였고, 그때 라파엘의 입술이 다가왔다. 키스를 위해 조금 모로 기울인 고개와 내리깐 눈에 발정했다.

어젯밤은 지독히 황홀했으나 여러 가지 생각에서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엄연한 도피였다. 하지만 왕은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왕이 입술을 핥았다. 짐승처럼 육욕적인 키스가 되풀이되었다. 라파엘은 왕과 키스하다 어느 순간 키스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는 그저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듯 왕은 라파엘의 입술 안을 헤집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왕의 목에 매달렸던 팔이 시트로 떨어졌지만, 왕과 라파엘 중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의 손이 가슴에서 느껴져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밤새도록 시달린 유두는 시트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바짝 섰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왕은 그 예민한 유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파야 정상인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정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 들어서 라파엘은 왕에게 더 유두를 내밀었다. 더 해달라고 하자, 왕이 얼마든지 해주겠다면서 아예 입으로 유두를 깨물었다.

라파엘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교접에서 많이 우는 편인 라파엘은 조금만 흥분해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익숙하지 못할 때 괴로워하면서 울었는데, 이젠 쾌감에 몰려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왕은 라파엘의 눈물이 좋았다. 절대 울지 않을 것 같은 라파엘이 울 때, 정신적인 쾌감이 육체적인 쾌감을 압도하고 부추긴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왕은 라파엘의 다리를 벌리고, 이미 흥분한 중심을 입에 넣었다. 라파엘에게밖에 해보지 않은 애무지만, 그래서 라파엘에게 맞춰져 있는 애무였다.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주자, 라파엘이 몸을 뒤틀며 신음성을 냈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을 놔주지 않았다.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다.

라파엘이 토정하기 직전에, 왕은 라파엘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라파엘은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안아 왕의 눈앞에 자신의 입구를 적나라하게 벌려주었다. 왕이 스스로의 것을 문질러 그 애액을 라파엘의 입구에 바르다 말고 라파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붉어진 눈가를 하고서, 라파엘은 그가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에서 보이는 건 정욕뿐이었는데, 그것이 사랑스러웠다. 왕은 젖지 않은 손을 들어 라파엘의 입가를 문질렀다. 타액으로 엉망이 된 입술은 평소와는 달리 붉디붉었다.

“언제나 예뻐.”

왕이 속삭였다.

왕의 눈에 라파엘은 언제나 예뻤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그의 눈엔 늘 라파엘이 아름다웠다. 귀여웠다. 살인 기계든 왕비든, 남자든 여자든, 쇼어 가문의 태생이든 암살자든, 그런 모든 것이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라파엘은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그랬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왕은 라파엘에게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왕의 육체는 라파엘에게 환장을 했고, 왕의 영혼은 라파엘에게서 구원받았다. 왕에게 있어 라파엘이란 벗어날 수 없는 늪과 같았다.

라파엘이 팔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만지고 있는 왕의 손을 붙잡았다.

“네, 전하는 예쁩니다.”

라파엘은 ‘예뻐?’라는 질문형으로 들은 모양이다. 그는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웃으려던 왕은 라파엘의 시선에 웃지 못했다.

왕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목숨을 바치든 팔을 바치든 죽음으로 돌진하든, 왕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왕이 한 번 웃을 때,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환해졌다. 왕이 절망할 때, 라파엘은 세상을 비추는 빛을 빼앗겼다. 왕은 라파엘의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였다. 왕은 라파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이 조금 인간적이 되었다면 그것은 왕이 만들어준 변화였다. 왕은 라파엘을 기계에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니까 라파엘은 왕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단 하나.

“하지만 예쁜 사람과 같이 있는 건 싫습니다.”

그것만은 싫다. 유니스 라 버시슬과 함께 있는 왕은 아름다웠지만 라파엘의 세상은 평소와 달리 환해지지 못했다. 심장이 아파서 바라볼 수 없었다. 왕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라파엘은 그런 표정까지는 읽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좋습니다. 저는 명하신 대로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넌 정말 무드라고는 손톱만치도 없어. 거북이도 너보다는 눈치가 좋을 거다.”

왕이 타박했다. 정말 거북이가 나보다 눈치가 좋나? 라파엘이 잠시 생각에 빠졌을 때, 왕은 단숨에 라파엘의 안으로 들어왔다. 이완된 몸은 거대한 분신을 잘도 삼켰다. 그러나 라파엘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왕이 속삭였다. 아, 안 돼. 멈추어주고 싶은데…… 안 되겠어. 그리고 왕이 움직였다. 음란하면서도 난폭한 움직임에 라파엘이 왕에게 매달렸다. 왕이 라파엘을 안고 뭐라고 속삭였다. 라파엘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지난밤에 남아 있던 쾌감의 잔재에 불이 붙었다. 미칠 것만 같은 쾌락에 속수무책으로 절정으로 밀려간다. 절정의 순간, 뜨거운 것이 몸에서 번지는 것을 느끼며 라파엘은 토정했다.

“넌…… 너무 귀여운데 눈치가 없어.”

왕이 뭐라고 말하는가 했더니, 아마 불평이었나 보다. 라파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은 라파엘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며 계속 투덜거렸다. 넌 예쁜데 요령이 없어. 넌 사랑스러운데 남의 기분을 잘 몰라. 넌 너무 깜찍해서 내가 못 참게 해……. 왕의 불만을 들으면서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왕의 뺨에 키스했다. 그러자 왕이 더 키스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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