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잊힌 용서
제가 정말 못살아요. 동 틀 때 나오깁니까? 스완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둘 다 조금 흐트러진 꼴로 나왔지만 몹시 다정했다. 라파엘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약간 나른한 눈을 하고 있었고, 왕은 라파엘을 끌어안은 채 노골적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즐거울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전쟁 나기 직전에, 왕은 왜 저렇게 해맑단 말인가. 아무래도 저 왕은 머릿속도 맑을 게 틀림없었다. 생각이라곤 일절 없을 거야.
라파엘은 집무실 한편에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는 호위조를 보고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아? 호위조 여섯 명은 총을 바리바리 싸 든 채 눈을 부라렸다.
아? 아, 라고? 혼자 잘난 체는 다 하면서 자긴 위에서부터 훑겠다더니 중간에 사라져놓고선 ‘아’? 넌 천국이셨겠죠. 하지만 우린 네가 붙잡힌 건가, 함정에라도 빠진 건가, 아니면 돌아갔나…… 온갖 무서운 상상을 하며 떨고 있었단 말이야!
게다가 스완은 너희들 미친 거 아니냐고 고함까지 질러댔다. 왕비를 호위하라고 붙여놨더니만, 그 비전하와 작당해서 밤에 싸돌아다니다니. 아무래도 다음 재계약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렵지 않겠느냐? 편지를 돌려놓는 데 어려우면 말해라. 여기엔 다른 많은 인재들이 있는데 굳이 네가 가야 할 건 뭐란 말인가. 아아, 우리 다람쥐는 나무도 잘 타지. 그래, 그 재수 없고 역겨운 태후궁에 잘도 잠입하는구나. 예쁜데다 재주도 많지! 하지만 넌 순진하니, 태후 같은 미친년이 도토리 준다고 쫓아가면 안 된다. 알겠느냐?”
율레즈여, 오랜만에 들으니 더 미치겠습니다. 스완이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왕은 스완의 시선에는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도토리를 준다고 쫓아가는 사람도 있나? 하지만 뭐, 쫓아가지 말라니 안 가면 되는 거겠지. 라파엘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왕에게서 벗어나려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든 듯 왕이 라파엘을 가까이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프진 않느냐? 예, 전하. 내가 말한 것은 네 엉덩이 사이다. 괜찮습니다. 둘 다 정액을 뺄 줄 몰라서 대충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들어가서 다시 해볼까? 아니요, 전하. 네 안은 아직도 뜨겁겠지, 나중에 또 넣어줄까? ……예, 전하. 부끄러운 거냐? 천진한 너를 어쩌면 좋을까. 사랑하는 안네마…….
“동 튼 뒤에 하실 겁니까?”
아니지, 제 귀가 그전에 먼저 썩을 겁니다. 스완이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바빠 죽겠는데 또다시 저 짓이다. 꼴을 보아하니 그놈의 금욕을 끝낸 모양이다.
왕은 성교를 처음 알게 된 애송이처럼 눈이 벌게져서 라파엘의 몸을 바라보고, 더듬는다. 당장에라도 침실로 끌고 가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어깨를 안은 손은 어느새 허리로 내려가 은은하게 쓰다듬고 있지 않은가.
“근위대장, 먼저 가라.”
왕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곧 라파엘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한 손으로는 라파엘의 허리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라파엘의 뺨을 감싼 채 몇 번이나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포개길 반복했다.
눈을 감은 라파엘을 더욱 가까이 끌어안고서 왕은 몇 번이나 입술을 떼려 노력한 다음에야 라파엘을 놓을 수 있었다. 라파엘은 한 번 허리를 숙이고는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나가려던 라파엘이 그레이드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그러자 여기 있는 게 죽을 맛이었던 호위조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호위조를 바꿀 예정입니다. 그러니 홀로 가시는 게 나으실 듯합니다.”
스완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왕비의 호위조는 기실 감시도 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레이드의 조는 감시자로서의 쓸모가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니 다른 조를 투입해야 한다. 다행히 왕비는 누구와도 친밀감을 쌓지 않아 그런 쪽으로는 이야기가 빠르…….
“안 돼.”
라파엘이 무심히 말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안 되는 어조라 그레이드 포함 여섯 명은 깊은 감명에 빠졌다. 라파엘이 손짓했다.
“가자.”
근위대장과 특수군 대장을 비교하자면 특수군 대장이 살짝 위라고 할 수 있다. 직무상으로는 근위대장이 위지만 특수군 대장이 워낙 권세가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위대장이 제1왕비를 겸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차피 왕국에서의 권세란 왕에게 얼마나 닿아 있느냐고, 아무리 이부동생에 최측근이라 할지라도 왕비만큼 왕에게 닿아 있진 않다.
따라서 이 경우.
“예, 대장님!”
힘차게 소리치며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입으로는 근위대장이라 말하고 마음속으로는 비전하 만세라 말하며 그레이드 외 다섯 명은 스완에게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희들은 다 죽었어. 스완이 살기 가득한 눈을 했지만 그레이드 외 다섯 명은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비굴한 미소를 흘릴 뿐, 라파엘을 쫓아 나가는 걸음에는 더욱 속도가 붙어 있었다.
라파엘의 뒤를 따라오며 왕비 호위조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웬일이지? 이렇게 의리를 지키는 분이 아니신데,
“비전하, 저기…….”
말을 걸어보려는데, 라파엘이 너무 빨리 달린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건너뛰며 달리는 라파엘의 속도에 맞추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입을 열 수가 없다.
예전이라면 뒤처졌을 막내도 이를 악물고 달려오는 것이 보여 그레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사실 그레이드는 저 막내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둘 사이의 인생 경험은 완전히 달랐다. 저 막내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검술을 배워 용병이 된 남자였고, 그레이드는 처음부터 길드에서 굴렀다. 그러니 능력이 현저히 차이가 날 수밖에.
“잘 달리네.”
그레이드가 막내의 어깨를 툭 쳐주었을 때 막내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는 그레이드를 보고 세상은 넓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실력의 차는 월등히 났다. 솔직히 괴로웠다. 하지만 도망치는 건 더욱 괴로웠다. 그러나 최근 그레이드에 대해서 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그냥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파엘 에반스가 보기엔 그레이드나 자신의 실력 차이는 고만고만할 것이 틀림없었다. 보다 높은 곳에서, 보다 넓게 보는 인간이 존재한다. 그 인간이 보기엔 그레이드나 자신이나 별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확실히 왕비의 호위가 되어 그 뒤를 쫓아다니자, 실력이 향상되었다. 그레이드를 죽어도 못 이길 것 같았는데, 라파엘 에반스의 뒤를 정신없이 쫓다 보니 어느새 그레이드의 등이 보였다.
막내는 그레이드를 추월했다.
‘제법일세.’
그레이드는 혀를 차며 속도를 올렸다. 막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주를 하다 보니 태후궁에 다다랐다. 일곱 명의 남자가 일제히 아름답고 스산한 철문을 훌쩍 넘었다.
“내 총 어디 있었어?”
라파엘이 물었다. 그레이드가 앞장서서 그를 안내했다. 지하 창고에 들어간 라파엘은 창고를 샅샅이 뒤진 다음 특수군을 돌아보았다.
“너희가 가져온 건 어림잡아도 반밖에 안 돼. 더 뒤져.”
라파엘의 말에 호위조가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이 서둘러 창고를 나가자 라파엘은 다시 한 번 창고를 뒤져보았다. 분해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분해를 할 생각이면, 분해를 하는 곳에 총을 쌓아두기 마련이다. 총은 숨겨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분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채로 총만 쌓여 있다는 건…….
‘완제품 상태로 이동했다는 건데.’
어디로 이동했을까. 라파엘은 창고의 문을 닫고 탑으로 달렸다. 총은 다른 이들이 찾고 있으니 그는 서신을 돌려놓을 생각이다.
탑에 도착해 서신을 내려놓았을 때,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긋하면서 조심스러운 발소리. 여자의 발소리다. 높은 굽의 슬리퍼가 또각또각 좁은 계단을 울리고 있다. 라파엘은 책상 위의 천장으로 올라가, 기둥에 바짝 엎드렸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라파엘은 약간 고개를 움직였다. 투드득, 먼지가 떨어진다. 그는 그 상태로 조심히 태후의 거동을 주시했다.
태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서신을 열어본다. 그녀는 잠시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펼치지도 않은 채 그저 내려다만 보던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되었지……?”
라파엘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그녀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다. 종이를 없애려 든다면 그때는 단검으로 저 손목을 찍어서라도 종이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골방에 여자의 쓰디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평생을 노력하며 살아왔다. 권세가에서 태어나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왕의 여인이 되었으나 왕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심지어 그 여자는 아들까지 낳았다. 그래서 그녀를 밀어내기 위해 또 갖은 노력을 다 해야 했다. 그러나 왕과 그 여자 사이의 자식은 사자새끼였다.
‘알고 있었어.’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시선은 섬뜩했다. 스산한 놈이었다. 굶겨도, 빗속에 세워 폐렴에 걸리게 해도, 놈은 늘 웃었다. 그것은 분명 거짓 웃음이었다. 자존심이 없어서? 왕족 중에 자존심이 없는 자는 없다. 놈은 그 웃음에 자존심을 걸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죽을 만큼 힘을 내야 남보다, 적보다 조금 고지에 설 수 있을 뿐이었다. 평생을 괴로워하고 노력하고 뺏고 빼앗기면서 산 인생의 끝은…… 허무해져간다. 그래도 이 나라를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해왔는데, 이제 그녀는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이 나라를 배신할 것이다.
여기는 그저 놈의 나라일 뿐, 이미 나의 나라가 아니다.
왕은 태후궁의 예산을 상당 부분 제한하고 있었다. 시녀도 제대로 배정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태후가 아니었다. 이 나라는 그녀에게 태후로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뒷방 늙은이일 따름이다. 육군 대장 따위에게 사랑을 주는 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여운 신세도 이제 마지막이다.
‘이자벨, 가지 마. 나와 결혼하자.’
어느 빛나는 여름날, 소꿉친구가 그녀에게 속삭였었다. 그 열렬한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그녀는 인정했다. 그녀가 후에 이 나라에 아쉬워할 것은 그 육군 대장밖에 없다는 걸.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권력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자유롭길 원했다. 모든 과거와 욕망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기를.
그녀는 서신을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실제로 그녀가 원하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겠지만.
태후궁으로 말을 탄 사람들이 달려왔다. 동이 터오는 이른 시각, 세상은 어슴푸레했다. 왕은 말을 몰면서 먼 하늘에서 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살아 있는 이상 그의 인생은 어둠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결국 실수했고, 그 여자의 실수를 안네마리가 잡아냈으며, 그의 인생엔 동이 터온다.
‘예쁜데다 능력도 좋지. 순진하면서 섹시하지. 뭐 하나 빠지질 않아.’
그 여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란 현실이 눈앞인데, 정작 그 현실을 겪게 된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가겠다는 생각이다.
과거의 자신이 바란 현실은, 지금의 자신에게는 작은 일이었다. 그렇게 절실하던 복수는 너무 오래 묵혀둔 탓인지 텁텁했다.
태후궁의 문이 부서졌다.
“태후를 잡아라!”
태후를 잡아라, 태후를 잡아라! 엄청난 소리들이 나자, 라파엘은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가볍게 착지한 그는 옷을 털면서 문을 잠갔다. 문을 잠그고 그것으로 모자라 책상까지 앞에 밀어놓고선 서신을 챙겼다. 창을 열었더니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7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라파엘은 누가 왕일까 생각했다. 곧, 누가 왕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계단 아래에서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라파엘이 멍하니 입을 벌리며 문을 돌아보았다. 덜컥거리며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애쓰는 듯, 문이 흔들렸다. 라파엘은 창가에 앉아 그 광경을 그저 구경만 했다.
‘제, 젠장할! 문이 열리지 않소!’
‘아아, 어서 열어, 어서. 여기에 가야 비상 출구가 있단 말이야! 아까 내가 나올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가 초조하게 재촉했다. 라파엘은 덜컹덜컹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비명이 커진다. 안 돼, 안 돼! 그런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아아, 어떻게 해! 율레즈여, 부디 저를 구해주시옵소서! 그리고 계단 저 멀리서 여러 명이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안 돼!’
여자의 비명 소리가 커지는 걸 들으며, 라파엘은 무릎을 당겨 안았다. 뭐, 열어줘야 할 때가 되면 열어달라 하겠지. 그때가 아니라면 굳이 열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왕명에 의해 태후 전하, 당신을 매국 행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타 왕실에 헤수스 왕실의 동태를 알려 밀정 행위를 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아, 안 돼! 이거 놓아라! 무엄하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 안 돼―!’
태후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이 곧 멀어져갔다. 특수군이 그녀를 강제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육군 대장님,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같은 군인이라, 특수군은 태후보다는 육군 대장에게 더 성의 있는 태도를 취했다. 태후든 육군 대장이든 어차피 그들은 이제 다 같은 죄인이었다. 그러니 예전에 존경하던 자에게 예를 갖추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들이 다 내려간 뒤에야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문 안쪽에서 듣고 있던 라파엘은 그제야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지?”
“그레이드입니다, 비전하.”
그제야 라파엘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레이드가 활짝 웃으면서 “뭐, 시작인 것 같지만 저희 역할은 끝난 것 같습니다. 서신 주시면, 갖다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라파엘은 그 손 위에 서신을 올려주었다.
라파엘은 그레이드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레이드가 왕비를 흘끔거린다. 늘 그대로인 표정이지만 그레이드는 왕비의 다른 표정을 알고 있다. 왕과 함께 있을 때, 왕비는 다른 사람이 된다. 왕비를 보고 있으면 왜 왕이 그토록 총애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몹시 솔직해서, 왕과 함께 있는 그를 자세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왕을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그라는 사람에 대해 정보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절절한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식을 가리다 못해 아주 싱거운 음식만, 자신이 아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먹지 않는 그가 왕이 주는 것은 무엇이든 먹는다.
사람이 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듯한 그가, 왕이 무슨 짓을 하든 받아들인다. 그것이 설사 능욕이라 할지라도.
왕비가 왕의 밑에서 겁간당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레이드는 창 밖에서 계속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고, 왕비는 왕의 밑에서 낮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왕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레이드는 왕비가 자신을 부른다면 무조건 난입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왕비는 시선이 닿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이나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왕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눈이었는데도, 그 눈은 고집스레 도움을 외면했었다.
“비전하.”
그레이드가 부르자 라파엘이 돌아보았다.
“저기, 다른 거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번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레이드는 왕궁특수군으로 돈을 좀 모으면 동대륙으로 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전쟁신 쿠치아노의 후예들은 북대륙에 있지만, 세계 제일의 검술 대회는 동대륙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거기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한 다음 전 세계로 수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레이드는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라파엘이 “다른 거?” 하고 되물었다.
“다른 대륙에 간다든가……. 비전하는 헤수스에서 알아주는 무도가이시니 동대륙에서 열리는 검술 대회에 참가해본다든가,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검술 대회? 검으로 승부를 가르는 대회 같은 건가?”
“그렇죠! 상금도 많고, 명예…….”
그레이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승부 같은 건 의미가 없어.”
라파엘이 말했다. 난 기계니까 제자 같은 건 받을 수 없다고 말하던 때와 똑같은 얼굴로.
“일에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아.”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의 얼굴이란 지금 왕비의 얼굴과 비슷할 것이다. 아예 꿈을 꿔보지도 못한 사람 같은 얼굴로 왕비는 단호히 말했다.
잠시 얼이 빠진 그레이드를 두고 먼저 내려가려는 왕비의 뒤에서 그레이드가 소리쳤다.
“저, 저는 비전하께! 아니, 라파엘 에반스에게 꼭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파엘이 “안 된다고 했잖아”라고 무심히 말했지만 그레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기계라도 좋습니다! 살인자라도 상관없어요! 저는 꼭 당신을 사부로 삼고 싶습니다. 제 평생 본 누구보다도 당신은 강하니까요.”
그레이드는 라파엘이 무시하고 가버리진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타인의 말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는 싸늘하고 무심했지만, 언제나 타인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대답해줄 수 없을 때는 ‘대답해줄 수 없다’는 말이라도 해주었다.
“스완도 강해.”
“전 그런 남자 싫습니다.”
유들유들한 바람둥이는 스승으로 삼고 싶지 않다. 그리고 스완은 위명이 훨씬 부족했다. 헤수스에서 라파엘 에반스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스완 라 포는 뭐 하는 귀족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도리어 그 선대인 포 백작이 더 알려져 있다. 상당한 자산가이기 때문이다.
“전, 라파엘 에반스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전수받고 싶습니다.”
라파엘은 그레이드를 보며 팔짱을 꼈다. 그는 제자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좀 돌봐줬던 사람은 옛 친구지만, 그는 결국 라파엘이 직접 목숨을 거뒀다.
제자라…….
라파엘은 회색 돌계단에 멈춰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무도 이렇게 그를 원한 적은 없다. 스승으로서의 그를 원하다니 신기한 기분이다. 결국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은 라파엘은 그레이드와 함께 걸어 내려와서, 입구에서 그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전하께.”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허리를 숙였다.
복수는 늘 시시하다. 몹시 달콤하고 웅장한 복수는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왕은 늘 그것을 깨닫곤 했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 복수를 많이 한 편이지만 복수는 늘 시시했다.
왕이 언젠가 거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을 때 스완이 빈정거렸다. 전하께서는 효율과 탐미를 같이 가지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 둘은 몹시 사이가 나쁘답니다. 즉, 왕이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려 들었기 때문에 복수의 김이 빠지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태후를 치게 될 때는 몹시 달콤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왕은 자신이 또다시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복수는 시시한 것이었다. 산발을 한 채 잠옷과 가운 차림으로 끌려나오는 태후를 보고도, 기분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어느새 태후는 복수의 상대가 아니라 일거리가 되어 있었다.
마침 스완이 그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흘끗 보자, 스완에게 서신을 건넸던 호위병이 라파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아아, 라파엘. 왕은 멀리 있는 연인에게 미소를 보냈다. 오랜만에 안아본 연인의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뜨거웠다.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그저 포옹만으로도 좋으니, 어딘가 닿고 싶어서 가슴이 뛰었다.
이미 이 복수는 빛바랜 것이 되었다. 이 어두운 세계는 더 이상 왕의 것이 아니었다. 왕의 세계는 저 멀리에 있었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가려도 환히 빛나는 연인에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고루한 복수를 해야 했다.
“이자벨 로지아나 이그나치오. 타 왕실의 밀정 노릇을 한 가엾고 추한 사람이여, 할 말이 있는가?”
왕이 서신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의 길고 긴 게임도 여기서 끝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고, 태후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마지막 선왕의 인장이 남아 있었다. 어디 목숨을 구걸해보시지. 왕은 가학적인 기분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태후, 이자벨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송이가 말 위에서 서신을 달랑달랑 흔들고 있다. 마치 개에게 먹이를 보이는 것처럼 가소로운 손길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하늘 저편에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새로운 해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저 해는 천 년 전에도 저렇게 얼굴을 내밀었었다. 그녀는 왕을 도전적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제 끝났다.
아마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더라도 평생 유배 신세겠지. 그녀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녀는, 대 헤수스의 가장 귀한 여인이었던 자니까.
권력은 이동한다. 그녀에게서 저 왕에게로 이동해버렸다. 운명의 바람이, 권력을 밀어내버렸다. 그녀의 사랑하는 남동생도, 남동생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죽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 인생의 마지막 날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가 말려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왕에게 한 짓을 손톱만큼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트코와의 밀약은 누군가가 말려주길 바랐다. 이렇게까지 추락하는 자신을 누군가가 잘라주길 바랐다. 그것이 저 왕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태후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전하의 탄생을 기억합니다.”
왕에게는 상당히 무례한 어조였다. 왕의 주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대는 태후였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현재는 태후라, 누구도 무엄하다 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전하를 미워했습니다. 전하가 눈엣가시 같아서 견딜 수 없었고, 전하를 죽일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태후가 우아하게 웃었다. 왕은 그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 트리지아가 왕후였듯 이자벨 로지아나 또한 왕가의 여인이었다. 타고난 기품과 우아함이 강렬했다. 태후가 말했다.
“내 아들들의 죽음 또한 전하의 탓이라 생각합니다.”
아들‘들’. 태후가 간접적으로 에드워드 라 쇼어의 친모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니 전하도 후회하지 마시오. 우리는 강력한 라이벌이었을 뿐이니, 나중에라도 역겨운 후회는 하지 마시오. 나는 적이되, 전하의 강력한 적이었습니다. 전하가 그것을 존중해주길 바랍니다.”
왕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이자벨을 비웃었다.
“그래서, 이 구질구질한 긴 웅변 끝에 남는 건 뭐지?”
이자벨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이 아픈 생을 단숨에 끝내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선왕의 인장이 있었다. 단 한 번만이 유효한 그 절대 약속이.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좋을 대로 이용당한 육군 대장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모두가 보고 있었고, 그녀는 당당해져야 했다. 자존심과 당당함, 그것만이 그녀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구차한 모습 따윈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땅에 시선을 돌려 육군 대장의 그림자를 찾았다. 잘 있어, 찰스. 그녀는 끝내 못 한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선왕의 인장을 사용하겠소.”
태후가 고개를 들었다.
왕이 쳐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태후는 그와 함께 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왜였을까. 원래라면 혼자 가서 서신을 처리했어야 했는데. 하긴, 그래도 총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도 안 되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는 소꿉친구의 팔목을 잡고 탑으로 달리고 있었다. 비상 탈출로를 통해 둘이 도망치고 싶었다.
태어나서 유일하게 달려보았다. 남자의 손목을 낚아채서 끌고 달렸던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장이 뛰었었다. 자유가 아닌 절망으로 달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걸음이 몹시 가벼웠었다.
‘꿈은 한 번으로 족해. 하지만 여운 정도는 괜찮겠지.’
“육군 대장의 모든 혐의를 벗겨주시오. 이번 일에 있어 그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없음을 약조해주시오.”
왕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여자가 아니다. 분명히 선왕의 인장은 자신을 위해 남겨놓을 여자였다. 혈육에 몹시 집착하는 여자였다. 자신의 남동생과 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았을 정도였다. 그 아이를 뻔뻔하게도 후계자로 만들었던 여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마지막에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다니.
왕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육군 대장이 그녀에게 달려가려다 특수군에게 제지당했다.
“아, 안 돼! 차라리 저도 죽여주십시오, 전하! 이자벨! 이자벨, 안 돼! 안 된다고!”
시시한 복수였는데 심지어 뒤끝도 더럽군.
왕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는 “좋아”라고 말하며 태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태후는 빳빳이 고개를 들고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세대에 있어 가장 강력한 적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왕이 총을 들어 태후의 이마를 겨누었다.
왕의 측근들이 당황했다. 태후는 아직 쓸모 있는 패였다. 그녀를 유배 보내는 것만으로도 쓸모가 많다. 그녀의 존재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보다 높은 정통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왕이 왜.
측근들보다 더 놀란 것은 태후였다. 태후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후회할 겁니다. 정치에 감정을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정치를 너무나 잘 아는 여자가 얄미운 소리를 한다. 사람이 동정을 베풀고 있는데 흥을 깨다니. 왕이 태후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새가 파드득,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둘 다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 게임에서 당신이 이겼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왕의 말에 태후가 흐릿하게 웃었다. 왕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태후가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총탄이 태후의 머리를 꿰뚫었다.
“이자벨!”
육군 대장의 비명이 아침의 태후궁 정원을 수놓았다.
왕과 태후는 서로가 적이었다. 둘은 서로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밉지 않을 때조차 그들은 서로가 거슬렸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운명이 정한 적은, 그만큼 서로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왕은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목숨을 구걸할 거라 생각했고, 유배지까지 결정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할 소꿉친구의 목숨을 구하고 그녀는 왕을 직시했다.
그 순간 왕은 깨달았다. 이 적은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다는 걸. 그녀가 유배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창살 안쪽에서 죽음만을 기다릴 비참한 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그녀가 태후일 때, 가게 해주어야 한다고.
그러고 보면, 그녀는 끊임없이 왕세자인 그의 목숨을 노렸지만 그를 폐하려고 노력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녀 또한 그를 왕세자로서 죽게 해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자벨 로지아나는 태후로서 죽었다. 장례식은 가장 정중하고 엄숙한 형태로 치른다.”
왕의 말에 측근들이 놀라 “전하!”라고 소리쳤지만 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말이 놀라 솟구쳤다가 바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멀리 서 있던 라파엘이 멍하니 그런 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이 고삐를 잡고 익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잡아챘다. 라파엘은 놀란 와중에도 균형을 잘 잡으며 왕에게 매달렸다. 왕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 상태로 계속 달렸다.
“전하?”
라파엘이 속삭여 불러도 왕은 대답이 없었다.
시시한 복수.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미 옛이야기다. 옛날 자신에게 보내는 선물일 따름이다. 한때 이 복수가 그를 살려주었으니, 그 또한 이 복수에 예의를 다하리라.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복수심 자체는 이미 시들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죽어가는 적이 그에게 다시 한 번 알려주었다. 우리는 적이 맞으며, 이건 옛 복수 따위가 아니라고. 감정이 있든 없든, 우리는 적이라고.
그랬다. 이자벨 로지아나 태후와 그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다. 둘은 결코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거나, 환경적으로 미워할 만했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만나는 즉시 서로를 증오할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운명이 만들어낸 적이었다.
왕이 천천히 말의 속도를 줄였다. 말이 설 때까지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아, 여긴…….”
눈에 익은 호숫가였다. 라파엘이 주변을 돌아보는데, 왕이 그를 강하게 부둥켜안았다. 전하? 라파엘이 한 번 더 부르자 왕이 말했다.
“그녀가 죽었어, 안네마리.”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는 죽었다. 왕을 몹시 괴롭혔다고 알려진 태후가 죽었다. 그게 그렇게 기쁜 일이었을까?
“드디어 그녀가 죽었어. 그녀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해왔던가. 그런데 그 모든 함정을 피해낸 불여우가 이런 일에 말려들어 시시하게 죽어버렸어. 분명히 제 목숨을 구할 줄 알았는데, 불여우가 살린 건 육군 대장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 불여우가, 인간이었다고? 그 암사마귀가?”
왕이 라파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한 일이야. 그 여자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모든 게 시시해졌어. 이상하지. 긴급한 안건들이 줄을 잇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힘이 빠져.”
그 여자가 죽었어.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던 그 여자가 죽었어.
왕의 속삭임에 라파엘은 왕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문득 검은 물 길드의 마스터와 교관 등을 죽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 또한 이런 생각을 했다. 절대 죽지 않았는데 의외로 시시하게 죽어버렸다고. 그리고 힘이 빠진다고. 왕도 그런 느낌일지 모른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왕이 길을 헤매는 어린아이처럼 물었고,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말. 대부분 묻는 것은 라파엘이었고, 왕은 모든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해주었었는데. 왕은 지금 몹시 당혹해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어색하게 왕의 머리를 끌어안고 입을 열었다.
왕은 라파엘의 품에 안겨 있다 이상한 노래에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늘 같은 무표정이지만, 확실히 염려가 섞인 시선이다. 왕이 고개를 들자 라파엘은 성실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가 카드리유를 가르칠 때 불러주었던 노래였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지금 저는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로 시작하는 오페라 아리아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지금 저는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저는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이 선택이 신의 저주를 받을지라도, 이 세상 누구도 지금의 저만큼 아름다운 세상을 가지지 못했을지니.
―라고 노래하지만, 한 시간쯤 지나서는 연인의 변심에 울고불고 난리치다 강물에 빠져 죽는 여자의 아리아다.
어쨌거나 저 아리아만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카드리유의 대표적인 춤곡으로 쓰이는 그 노래를, 가사도 몰라서 음만 흥얼거리는 라파엘을 보며 왕은 피식 웃었다.
문득 왕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본다. 되는대로 달려왔는데, 여기는 라파엘과 함께 카드리유를 췄던 그곳이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왕은 새삼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수면과 미풍에도 폴폴 흩날리는 진눈깨비 같은 하얀 꽃.
“아름다워.”
왕이 라파엘을 끌어안은 채 감탄했다.
“네가 밝혀준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워.”
음도 제대로 맞지 않는 노래로 밝혀준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왕은 한숨을 흘렸다. 이것이 그저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왕은 다시 라파엘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지긋지긋한 적을 죽였는데 도리어 위로받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목격했다. 왕은 라파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시작된 키스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눈을 감아도, 계속 천국이라고 느끼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 § §
“오늘부로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이 회의에 참석한다.”
왕이 서류를 보며 여상히 말했을 때, 측근 회의장 안은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사정을 모르는 궁정대신 등은 ‘그 정부라는 그 남자?’라며 숨을 삼켰고, 사정을 아는 이들은 ‘말이면 다인 줄 아십니까?’라고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만 상대는 왕이었다. 아무도 그 앞에서 이 결정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왕후궁에서는 난리였다. 왕비인 라파엘을 꾸미는 데는 공이 많이 든다. 그리고 왕후궁의 체면도 걸려 있었다. 게다가 왕이 그 옷차림에 얼마나 이러쿵저러쿵 간섭해대는지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 라파엘은 근위대장으로서 첫 출근이 될 예정이다. 시녀들은 옷을 보고 또 보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즐거워했다. 왠지 동생이 첫 출근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라파엘은 시녀들이 자신을 만지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얼굴을 드러내자는 의견엔 반대했다. 라파엘은 목 끝까지 옷깃을 올린 다음에 왕후궁을 나섰다. 시녀들이 아주 세심하게 주름까지 잡은 소매를 걷어 올려 구기면서.
“생각해봤는데 말입니다.”
그레이드는 어린 만큼 살짝 개념이 부족했다. 그는 지금 라파엘의 옆을 촐랑거리며 따라와서 말을 걸고 있었다.
“차라리 비전…… 아니, 대장님이 저희 부대로 오는 건 어떠세요? 옷차림과도 딱 걸맞잖아요!”
저 똑똑하죠? 역시 제자로 삼고 싶죠? 사제는 어떤가요?
그레이드는 몹시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드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저희 부대로 오세요! 근위대 애들은 글러먹었어요. 총도 잃어버리잖아요.”
근위병이 지나갈 수도 있는 왕궁의 큰길에서 그레이드는 멋대로 지껄여댔다. 한 번 ‘멋지다!’고 생각하자, 라파엘의 모든 것이 멋있어 보이는 그레이드는 확실히 어린 나이였다. 머리가 비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사실 라파엘 에반스는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멋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라파엘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레이드는 신나서 떠들었다.
“저희 부대 좋아요. 대부분 용병이거든요. 그러니까, 비전, 아니, 대장님도 더 적응이 쉬우실 거예요.”
“난 용병 싫어해.”
라파엘이 결국 한마디 해주었다.
“용병이 왜 싫으세요? 왜요?”
그레이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라파엘 에반스에게 지대한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왕비에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건 라파엘 에반스였다.
“적이 많거든.”
“……아.”
라파엘 에반스를 잡으려는 용병이 대체 몇이었을까. 그들을 피해서 라파엘은 얼마나 도망쳐야 했을까. 싫어할 만도 하구나. 하지만 용병이 그렇게나 많이 달라붙었는데도 라파엘은 기어코 살아남았다.
아아, 더 멋있다.
그레이드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을 때 라파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용병에게 고문을 많이 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라파엘을 잡은 놈들은 대체로 용병이었다. 물론 라파엘을 잡으라고 한 사람은 다른 이였다. 돈이 많거나 권력자였다. 보통 그들은 용병을 고용했고, 그 용병들은 자신들의 의뢰인에게 충실했다.
그는 용병에게서 여러 번 고문을 당했다. 게다가 용병들은 툭하면 라파엘의 집을 찾으려 들었다. 라파엘의 집은 찾기가 힘들다. 마리가 찾아온 것은 신의 가호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원래는 그전에 지뢰를 밟아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는 등 함정에 의해 죽기 마련인데 마리는 어느 한 군데 상처도 입지 않고 그에게 달려왔었다. 그때 라파엘은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느꼈었다.
그러나 용병들에게는 신의 가호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늘 함정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걸 치우는 건 라파엘의 몫이었다. 지뢰에 터진 인간의 흔적을 말끔히 치우는 건 참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싫다’라……?’
라파엘은 자신의 생각을 의아하게 여겼다. ‘싫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낯선 감정인데 몹시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싫다? 용병이? 라파엘은 다시 한 번 용병들을 떠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용병은 싫었다, 용병은.
“우리 근위대장이 왔군!”
이그나치오궁의 대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왕이 벌떡 일어났다. 근위대장이라니, 정말 눈 감고 아웅이구나. 세상 어느 왕이 근위대장이 오자마자 벌떡 일어나주시는지. 최측근들은 흘끗 카펫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최측근이 아닌 비서관이나 궁정대신, 대장군 등은 흥미롭다는 시선을 근위대장에게 던졌다.
그는 키가 작고 초췌한 남자였다. 창백한 피부에, 이목구비는 꽤 단정할 것 같지만 코끝까지 목깃을 올리고 있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나온 팔은 너무 가늘었다.
“라파엘, 이리 와라.”
왕이 팔을 내밀자, 라파엘은 얌전히 그에게 다가갔다. 문득 대장군과 라파엘이 시선을 스쳤다. 라파엘은 이 방 안에서 가장 강력한 기를 내뿜고 있는 자에게 시선을 준 것이었는데, 대장군은 순간 이 허깨비 같은 남자가 대단한 무도가라는 걸 깨달았다.
라파엘은 그를 정확히 알아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려서 왕을 향했는데, 그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부드러우면서 어떤 리듬을 타는 듯한 걸음은 라파엘 라 쇼어가 상당한 고수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저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왔지? 대장군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런 놈을 왜 알지 못했지?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이상 무도를 달성하려면 스승이 필요하다. 집단의 교육이 없이는 저런 인물이 만들어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실 무도 가문 등의 집단 중 대장군이 모르는 곳이라곤 없는데 어디서 저런 인물이 나왔을까.
왕이 라파엘의 목깃을 내렸다. 남자의 새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검은 눈에 색이 옅은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어딘가 안네마리 왕비를 닮았다. 하지만 안네마리 왕비는 훨씬 아름답다. 청초하면서도 요염한 그 향기는 확실히 왕을 옭아맬 만했다. 물론 이렇게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은 측근이긴 하되 최측근은 아닌 몇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었다.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이다. 최근 왕궁의 보안 수준을 높인 인물이지.”
보안 수준을 높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죠, 전하. 보안 수준을 높인 사람은 저고요! 재주를 넘은 장본인 제이슨 리아스 근위대 부대장이 남이 넘은 재주로 이득을 챙긴 라파엘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이런 역할의 대가로 제이슨은 라파엘의 봉급을 받아 챙기고 있었으니까.
“원래는 라파엘 에반스라는 이름이었지. 가여울 정도로 학대당했으나 그는 본디 쇼어 가문의 인물, 납치를 당해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리 트리지아의 바로 손위 오빠가 된다더군. 그렇지, 제럴드?”
라파엘 에반스? 라파엘 에반스?!
대장군은 ‘그럼 그렇지!’라고 이를 갈았다. 그가 모르는 데서 이런 고수가 나타나려면, 저 인물은 햇빛을 받으며 산 인간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그렇지만, ‘라파엘 에반스’를 근위대장으로 올립니까?
“예. 제 남동생입니다.”
제럴드는 은연중에 ‘남동생’을 강조했지만, 왕은 모르는 척 넘겨버렸다.
“모두가 알다시피 나와 몹시 낭만적인 관계라 얼굴을 자주 보여줄 생각은 없어. 미리 경고해두지. 그는 차남이고 미혼이라 여기저기서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나는 그의 결혼을 허락할 생각이 없다. 나와 적대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의 혼사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 소리를 하려고 그의 과거를 공개한 건가. 모두가 얼굴을 구겼을 때 왕이 라파엘의 귀에 키스했다. 잘 잤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자, 왕은 한 번 더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제럴드에게 손짓했다.
“라파엘에게 현재 상황을 가르쳐줘라. 섬세하게 가르치되 이해하지 못하는 걸 강요는 하지 마라. 무슨 뜻인지 알겠나?”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가라는 뜻이지 뭐겠는가. 제럴드가 “예, 전하”라고 대답하자 왕이 라파엘의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배워 와라. 너는 일하게 될 거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거리자 왕이 말했다.
“어서 가.”
왕이 가볍게 밀어서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제럴드의 뒤를 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왕을 돌아보았다. 왕은 다시 서류를 두고 대장군과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고, 라파엘에게 시선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파엘이 제럴드를 올려다보자 제럴드가 라파엘을 구석으로 데려가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럴드가 한 번 더 물었다.
“라피? 갑자기 왜 네가 전면으로 나온 거지? 근위대장이라는 건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런 줄 알았다.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일하게 될 거라니? 무슨 일을 하게 된다는 걸까. 라파엘이 제럴드의 뒤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라파엘은 제럴드의 앞에 앉아 한참 동안 노트코와 헤수스의 신경전에 대해 들었다. 제럴드는 그에게 가능한 한 쉽고 명료하게 설명해주려 애썼지만, 이 신경전은 쉽고 명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라파엘은 노트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이 노트코와 티스에 대해 아는 것이 제법 되어서, 제럴드는 서로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쉬웠다. 단지 둘이서 왜 이런 신경전을 하고 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둘 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도발하고 있고, 그러나 어느 쪽도 전쟁을 일으키는 역을 맡고 싶지는 않은 것에 대해 말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라파엘이 ‘명분’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한참 동안 설명하고 있는데 왕이 다가와 라파엘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잘 듣고 있나?”
왕의 질문에 라파엘이 대답했다. 예, 전하.
왕은 몇 가지를 물었고, 라파엘은 빈틈없이 대답했다.
눈앞에서 팔불출 형님인 제럴드는 역시 자신의 동생이 똑똑하다며 흐뭇해했지만, 왕은 피식 실소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안네머리는 일에 대해서만 똑똑한 듯했다. 일이라고 하니 바로 이렇게 빈틈없기는.
“안, 아니, 라파엘. 네가 할 일은 궁의 보안에 관한 것이다. 노트코의 첩자는 태후 외에도 여럿이 있을 거고, 태후가 부리던 시녀 중에도 있을 거다. 찾아내라. 첩자는 전부 찾아내서 그들이 아는 걸 전부 토해내게 만들어라.”
“예, 전하.”
“그리고…….”
왕은 그렇게 말하고 라파엘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근사한 근위대장이라는 걸 나에게 보여다오. 너는 사랑스러운 왕비지만, 훌륭한 근위대장이라는 걸 내게 증명해다오.”
라파엘이 고개를 들어 왕을 돌아보았다. 왕의 얼굴이 몹시 가까이에 있었다. 왕이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걸 해낼 수 있겠느냐?”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지옥의 불구덩이에도 들어갈 수 있어.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내 심장을 산 채로 당신의 손에 올려놓을 수도 있어. 단지,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런데 고작 저런 일을 하지 못할 리가 없다.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해낼 것이다. 그는 반드시 해내서, 왕이 만족하게 만들 것이다.
라파엘이 웃었다. 웃음은 헤죽도 아니고 히죽도 아닌…… 뭔가 조금 더 부드러웠다. 라파엘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지만 왕은 라파엘이 검은 물 길드의 일 이후 감정이 풍부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랬다. 라파엘은 확실히 무감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도 결국 인간이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이 무감각한 사람은 감정 자체를 마음속에 묻어버린 것이다.
‘아마 그의 정체와도 관계가 없진 않겠지.’
전쟁신 쿠치아노의 인간체. 왕과 티오안은 결국 같은 인물이지만, 쿠치아노는 인간체를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가두었을 뿐 라파엘과 같은 인간이 아니다. 둘은 융합할 수 없다. 그러니 한쪽의 개성이 더 드러날 수밖에.
전생신은 냉혹하면서도 세상을 초월한 듯한 인물이었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신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언제나 모든 걸 관조하고 있었다. 환경도 나쁜데 쿠치아노라는 고위신까지 붙어 있으니, 라파엘은 더욱더 비인간적이 되었던 것이다.
왕은 라파엘의 입술에 키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이야기하다 말고 버려진 대장군이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비의 호위조는 어디까지나 왕비의 호위조이기 때문에 근위대장과 같이 다니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레이드는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을 했다. 특수군은 눈앞에서 호위하진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숨어서 호위한다. 그렇기에 그레이드는 자신이 따라붙어도 될 것이라고 말해봤지만 라파엘은 차가운 얼굴로 거절했다.
돌아가. 그 한 마디는 무거웠다.
그레이드는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드뿐만 아니라 왕비의 호위조 전원은 풀이 죽었다.
라파엘은 일단 근위대장 집무실에 들어갔다. 제이슨이 알려준 곳에 꽂혀 있는 서류를 꺼내 넘겼다. 그것은 근위병 한 명 한 명에 관한 서류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가문에 속해 있는지, 여러 가지 항목에서 그가 어떤 능력을 어떻게 평가받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왕은 첩자를 찾아내어 모든 걸 토해내게 만들라 했다.
첩자는 어디에 있을까. 라파엘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가장 말이 많이 돌면서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 자신이 첩자라면 어디에서 정보를 얻을까. 라파엘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왕궁에 잠입하기 위한 경로를 여러 번 생각했던 과거 덕분일 것이다.
이그나치오궁.
즉 라파엘이 있는 이곳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모든 대신들이 들락거리고, 파티가 열리며, 정사를 보는 곳. 이그나치오궁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
문득 라파엘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햇살이 몹시 화사했다. 이제 곧 겨울인데도, 너무나 화창한 날이었다. 날이 맑았다.
언젠가 이런 날을 보았던 것만 같다. 그래, 왕과 함께 있을 때 종종 이렇게 아름다운 날을 보았었다. 푸르고 환한 아름다움. 그것은 왕이 가져다준 환영이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혼자 있어도 보이는 것일까.
“대장님, 들어갑니다.”
문밖에서 제이슨 리아스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내내 밤샘 회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티스에 직접 협상을 거절하자, 티스는 성주 아내의 잘린 머리를 보내왔다. 왕이 수도에서 노트코 국민을 쫓아내자, 노트코는 수색대를 쫓아내려 들었다. 그러나 수색대는 노트코 전국으로 퍼져 있어 그들은 수색대를 찾아내 쫓아내진 못하고 공문만을 보내왔다. 유감이니 뭐니 잘 돌려서 쓴 공문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것이었다. ‘우리 국민을 쫓아냈으니 너희 국민도 쫓아내겠다! 그러기 전에 알아서 먼저 나가!’
그러나 왕은 그 공문을 가볍게 무시했다. 수색대의 반이 첩자인데 저들이 어떻게 쫓아낸단 말인가. 못 찾았는데 약이 오르니까 하는 소리지. 왕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건 대사의 시체였다. 노트코 대사는 도망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어서 부어 있었다. 이렇게 바로 내놓았다는 건, 대사를 죽인 건 노트코라는 뜻이 된다. 뻔뻔하게도 자신들이 찾았다며 내놓는 것도 모자라, 노트코에선 이제 쓸모없는 수색대는 돌아가라는 공문을 시체와 함께 보내왔다. 더 견딜 재간이 없이, 수색대가 돌아올 판이었다.
아무래도 왕의 대리인은 티스의 도적(을 가장한 노트코 군인)들을 만나봐야 할 듯했다. 이렇게 본국에서 계속 무시하면 상대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티스의 도적들도 헤수스와 접촉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헤수스와 한 번 거래를 시도하고 파투를 낸 다음, 명분이 있는 상태에서 노트코와 거래하는 척하며 성을 넘겨주고 싶을 뿐이다.
“일단 근위대는 이번 일에서 첩자를 찾아내 자백시키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쉬운 일 같지만 쉽지가 않다. 제이슨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수스 왕궁은 하나의 도시에 가깝다. 도시에 왕궁이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이그나치오궁으로, 하루에도 수천 명이 그곳을 드나든다. 이그나치오궁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 플레이스와 선 플레이스. 이 세 궁이 트라이앵글을 이룬다. 이 세 개의 궁이 헤수스 왕궁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 그 외에 태후궁이나 각 왕비들의 궁, 폐허가 된 궁도 있다.
궁 외에도 건물은 많다. 여러 사용인들의 거처가 되는 건물들부터 수많은 용도의 창고들, 그 외의 건물들이 빼곡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도 빼놓을 수 없다. 시냇물부터 강물까지, 언덕에서 산까지, 꽃밭에서 푸른 초원까지, 세심하게 계산된 자연물들. 그 대부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게다가 헤수스 왕궁은 강이 통과하는 지점에 있는데, 그래서 왕궁에는 작은 항구까지 만들어져 있다.
이 거대한 궁을 근위대가 책임지고 있다. 물론 ‘근위대’. 즉, 귀족 출신의 병사들은 주요 거점을 경비하고 그들과 같이 일하는 수도방위군 병사들은 나머지를 책임진다. 그러나 궁이 너무 거대하고 근위대가 책임질 곳이 많기 때문에 특수군은 왕과 왕비의 호위를 따로 책임지고 있다.
실제로 수도의 많은 사람들은 왕궁을 상대로 먹고산다. 왕궁에서 일하거나, 왕궁에 물건을 납품하거나, 관광객을 상대하거나 하는 것이다. 왕궁이 없다면 관광객도 없을 것이다.
“정말 불편한 체계네.”
라파엘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제이슨 리아스가 울컥했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왕은 왕실의 체계화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왕실이 잘된다고 해서 국민이 만족하거나 국력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왕의 입장이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왕이 이런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왕이 다른 왕들보다 더 자주 습격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첩자를 찾는 거니까.”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거구나. 라파엘이 왕에게 진언을 올리면 왕이 다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일 따윈 하지 않을 거구나. 하긴, 왕이 무슨 변덕으로 왕비에게 일을 맡겼는진 모르지만, 어차피 변덕일 것이다. 그러니 왕비야 뒷일 같은 건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난 첩자가 이그나치오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게 다른 생각이 있다면 말해도 좋아.”
라파엘의 말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이그나치오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층부까지는 아마 올라가지 못했을 거고, 기껏해야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겠죠.”
“하지만 분명히 근처에 있겠지.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있을 거고. 외부는 아니고, 내부에.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 그렇지만 보안이 철저한 곳에는 못 갔을 거고, 그래도 의외로 가까운 곳. 그게 잠입의 원칙이다.”
라파엘이 느릿하게 말하면서 이그나치오궁의 지도를 찾아내서 바닥에 펼쳤다. 제이슨이 왜 그걸 책상을 놔두고 바닥에 펼치느냐는 얼굴을 했지만 라파엘은 개의치 않았다. 예전에 매일같이 들여다봐 상당히 익숙한 지도를 내려다보던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이그나치오궁의 사용인 목록이 필요해.”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제이슨이 소파에서 일어나 지도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이그나치오궁이라면…… 궁정대신일 겁니다. 하지만 사용자 목록 같은 건 쉽게 내주지 않을걸요. 몹시 딱딱한 양반이시라서요.”
“난 왕비잖아.”
자기 편할 때만 왕비지. 자기 편할 때만 근위대장이고.
제이슨이 눈을 모로 뜨거나 말거나 라파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라파엘이 가볍게 지도를 뛰어넘어서는 문으로 다가갔다. 살수에게 임무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한다는 방침이었다. 왕을 이용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직위 정도라면 얼마든지 이용해줄 수 있었다.
왕비가 나가자, 제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왕은 무슨 생각인가? 지난 3년간 왕은 왕비를 철저히 왕비로만 대했다. 가끔 근위대장으로서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왕비는 왕비일 뿐이었다.
왕의 사랑을 받는 자. 그것이 왕비의 유일한 역할이었다. 왕비는 왕의 경호 외에는 특별히 다른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왕비는 늘 경호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고, 그것만 맞춰주면 나머지야 어떻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 이렇게 나오다 정말 근위대장직도 제대로 수행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럼 나 봉급 깎이나?’
사실 봉급생활자의 입장에서 봉급이 깎이는 건 뼈가 깎이는 아픔이 아니던가. 아무리 그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아, 싫은데.’
거의 마마보이에 가까운 제이슨 리아스가 우울한 얼굴을 한다.
제이슨의 모친은 제이슨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몹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한 드레스를 입고, 오페라를 보러 다니고, 살롱을 다니면서 그녀는 행복해했다. 제이슨에게 결혼을 하라고 종용하면서도, 제이슨이 진짜 결혼을 하긴 바라지 않는 것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제이슨이 결혼을 해서 그 봉급을 아내에게 주는 걸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듯했다.
뭐, 제이슨으로서는 너무나 바빠서 어머니가 같이 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화를 내실 텐데.’
한숨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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