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장 빚 (40/47)

제15장 빚

왕의 행렬이 죄인의 탑으로 들어간다. 

아주 긴 행렬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위들을 생각하면 더욱 길고 견고한 행렬이리라.

왕은 행렬의 머리 부분에서 걷고 있었는데, 눈에 확 띄었다. 일단 그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고, 그 옆에는 행렬에서 유일하게 검은 옷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남자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남자가 그 근위대장이군. 쇼어가의 사생아래. 궁인들이 수군거린다. 그리고 왕의 시종들은 그런 속삭임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비웃고 있었다. 너희는 눈이 생선 눈이냐? 그따위 눈 팔아버려라.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지 않던? ―사람을 생선과 비교하는 것 하며 독설을 퍼붓는 꼴이 윗사람을 심히 닮아 있었다.

“전하.”

지하 감옥 입구에선 스완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을 보고 우아하게 인사를 한 스완이 그 옆에 서 있는 라파엘을 보고 당황했지만,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다. 많은 좌중 앞에서, 검은 잠행복을 입고 있는 라파엘에게 최대급의 인사를 할 수는 없으니까. 왕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인데도 햇살 한 줄기 들어서지 않는 척박한 감옥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넘쳐났다. 횃불이 기둥마다 걸려 있었다.

“어디야?”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어, 목적어를 다 빼고 스완이 물었다. 마주하는 게 괜찮으냐는 뜻이 아니다. 라파엘을 달고 가도 괜찮으냐는 뜻이었다. 라파엘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일 텐데 꼭 데리고 가야겠냐는 뜻이기도 했다. 왕은 코끝으로 그 말을 무시하고 근위병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양옆으로 나 있는 감옥에서 죄인들이 왕의 행렬을 바라본다. 왕을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 멀리서 보거나 초상화로만 봤던 왕은 실제로 보니 더욱 아름답고 위풍당당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문득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라파엘!”

라파엘은 흘끗 시선을 돌렸다. 장물아비 댄이었다. 검은 물의 장물아비. 평소와는 달리 초췌하고 피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라파엘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나야, 나. 댄이야. 나, 기억 안 나?

그리고 동시에 양옆에서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기억나지 않느냐는 사람부터 자신은 죄가 없다는 사람까지. 더러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두고 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근위병들이 검집을 씌운 검으로 창살을 탕탕 치자 그제야 조용해졌다. 그때쯤 왕의 일행은 가장 안쪽의 창살문에 다다랐다.

“문을 열겠습니다.”

근위병이 낮은 목소리로 고해왔다. 곧, 창살문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감방 안에서는 다섯 명의 남자가 V자 모양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다리에 발목이 결박되었고, 팔은 등 뒤로 등받이를 안고 묶인 형태였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의복은 해져 있었다. 그 누구도 멀쩡한 사람은 없었다. 

라파엘은 왕의 뒤에서 감옥으로 들어오며 그들을 확인했다. 전원 아는 얼굴이었다. 마스터, 훈련 교관, 포주, 중개인, 그리고…… 버시슬 백작. 건설대신인 버시슬 백작이 왜 저 멤버에 들어 있는지 몰라서, 라파엘은 의아해졌다.

왕이 고갯짓을 하자, 근위병이 가장 중간이자 앞에 있는 마스터의 얼굴을 들게 했다. 그가 핏자국으로 엉망인데다 퉁퉁 부은 얼굴을 들어 겨우 눈을 떴다.

“검은 물의 길드 마스터냐?”

“…….”

“전하께 대답을 드리지 못할까!”

근위병이 검집으로 마스터의 턱을 가격했다. 라파엘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까지 마스터가 이렇게 당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직접 보자 왠지 모르게 충격이 컸다. 마스터가 갑자기 파르르 떨었다.

“저, 전하라니. 맙소사, 정말 국왕 전하시란 말입니까?”

마스터가 쉰 목소리로 묻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눈을 깜빡이며 왕을 쳐다보려 애썼다. 정말 왕인지 확인하겠다는 것처럼. 왕이 횃불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을 잘 볼 수 없는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드디어 얼굴을 확인한 듯 몸을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며 “왜, 왜……” 하고 목소리를 떨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국왕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그들을 공격하는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않은 자는 버시슬 백작 한 명뿐이었다. 그는 왕과 오랫동안 같이 일했고, 왕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무슨 일이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왕이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여우같은 이그나치오 가문의 놈.’

버시슬은 침음했다.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될 말이지만, 몸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은 그의 뒤통수를 치려고 한 걸까? 수로 공사의 장부를 봐달라고 한 것이 그렇게나 배알이 뒤집힐 일이었단 말인가.

어느 밤에 그는 이곳으로 끌려왔다. 그는 왕궁특수군이 몰살의 즉위 축하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왕궁특수군은 그를 붙잡았다. 그를 붙잡자마자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리고 왕궁특수군은 그를 붙잡고 가다가 그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그는 깨달았다―자신의 모든 운이 다했다는 것을.

“죄인.”

왕이 그를 불렀다. 마스터가 두려운 얼굴로 왕을 바라본다. 그는 다른 곳을 쳐다볼 수조차 없는 모양이다. 너무나 무서워서, 왕의 곁에 서 있는 라파엘에게 시선을 주지조차 못한다.

“내 옆에 있는 자를 기억하느냐?”

그제야 그는 왕의 옆을 바라보고 라파엘을 본다. 그 얼굴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그는, 곧 눈을 크게 뜬다. 배신당한 자의 분노를 한껏 안은 그 얼굴을 보고, 왕은 역겨워졌다.

마스터가 자신을 보자마자 분노와 경악의 표정을 짓는 걸 보며 라파엘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왕은 길드가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 했지만, 그는 역시 자신이 무슨 해를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왕이 어떤 이유로든 길드를 쓸어버리겠다 결정했다면, 라파엘은 그의 곁에서 지지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검은 물과의 관계는 끝났으니까. 그가 검은 물을 지켜줄 의리나 의무는 없는 것이다.

“기, 기억합니다.”

“너는 잘도 내 사람을 학대했더구나.”

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 아닙니다! 우리는 몇 년간 만난 적도 없습니다!”

라파엘 에반스가 왕의 사람이 되었다고? 평민인데다 살인 기계인 라파엘 에반스가 왕의 사람이 되었다니, 그 자체로도 놀랄 일이다. 그래서 몇 년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군!

하지만 마스터는 도대체 왜 여기서 ‘학대’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학대라니. 아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학대한단 말인가!

마스터의 말에 왕이 입가에 시린 미소를 걸었다. 왕이 그에게 다가가자, 스완이 왕을 보좌했다. 왕이 고갯짓을 하자마자 스완이 마스터의 목을 잡아 올렸다. 라파엘의 귀에 목을 졸린 마스터가 캑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학대한 적이 없다고? 널 그 목장에서 키워줄까? 저기 저 라파엘처럼 커보는 것이 어떠하냐? 그것이 학대가 아니라면, 너 자신은 그 생활을 즐길 수 있겠구나. 그렇지 아니한가?”

“저, 전하…….”

마스터가 눈을 크게 떴다.

“라파엘은 그 목장에서 14년을 자랐다. 그리고 6년을 더 너의 노예로 일해야 했지. 돼지는 돼지로구나. 진주를 알아보기는커녕 흙바닥에 굴려서 그 빛을 잃게 하다니. 그러나 그 진주는 그냥 진주 정도가 아니라, 내게 진상될 물건이었다. 내 왕관을 가장 빛나게 하는, 아니, 내 왕관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지. 자, 이제 나의 원한을 알겠느냐?”

마스터가 시선을 돌려 라파엘을 바라본다. 왕에게서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라파엘 에반스는 여전했다. 차고 싸늘했다. 무덤가에서 걸어 나오는 것같이 냉정한 무표정으로, 라파엘은 그를 방관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개입하지 않는 라파엘의 냉정함은 여전했다. 도대체 저 라파엘이 어떻게 해서 ‘왕관과도 바꾸지 않을 정도’의 총애를 받게 된 걸까.

마스터는 곧 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떻게든 이 절대자의 마음을 풀어야 했다.

“그 진주는…….”

마스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말은 위험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덥고 추운 때를 가릴 수 없었다. 생각나는 말은 뭐든 해야 했다. 아니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

“그 진주는 제가 건져낸 것입니다. 제가 그냥 두었으면 죽었을 라파엘을 살려냈습니다. 쇼어 가문에선 라파엘을 귀찮아했습니다! 얼어 죽어도, 타 죽어도, 그들은 상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살려냈고, 제 길드 보호하에서 그는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전하께 충성하는 자일 뿐, 전하께 감히…….”

“그럼 너는 상관했을 거라는 이야기냐?”

왕이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왕의 푸른 눈이 불빛을 받아 일렁였다. 마스터는 그 눈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재의 왕, 이그나치오 23세는 국민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이야기도 엄청나게 떠돈다. 그 대부분은 당연히 왕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다.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해 결국 자살하고야 만 마리 트리지아 왕후, 일명 포르타미스 사건. 그리고 왕은 몹시 인기가 좋았던 왕후의 자리를 여전히 비워둠으로써 그 사건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언제나 남색가라는 소문이 돌았던 왕이지만, 사실은 왕후를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왕후를 들일 마음이 없는 게 아닐까. 그가 몇 년 동안 총애한 안네마리 제1왕비도 결국 쇼어 가문 사람이고, 어딘가 은근히 마리 트리지아를 닮았다는 점이 이 소문을 더욱 부풀려주었다.

그리고 왕의 모험담들도 있었다. 귀족들과 싸운 왕, 몰살의 즉위 축하연에서의 비정한 왕. 왕에 관한 이야기들은 평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평민들은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통속 소설 중에는 노골적으로 이그나치오 23세를 모델로 한 인물이 나오는 것도 흔했다. 그래서 마스터는 지략가로서의, 그리고 행정가로서의 왕을 생각하긴 했어도 왕 개인의 카리스마에 대해 생각해보진 못했었다.

눈이 마주치자 말을 채 이을 수가 없다. 그 푸른 눈에 위압당한다. 군림하는 자. 그렇게 태어나서 만들어진 자의 절대적인 권위.

“……저…… 는…….”

“라파엘이 아프면 간호해주고, 죽지 않도록 어떻게든 보살폈을 거라는 이야기인가? 너는, 지금 국왕의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가?”

결국 마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이 허리를 들었다. 그가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라파엘은 왕의 시선을 받았다. 왕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터가 느꼈던 그 절대자의 권위를 지금 라파엘도 느끼고 있었다.

왕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왕 자신이 일부러 과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익숙했던 왕의 주변이 엄숙해지고, 스완 라 포를 비롯한 모두가 왕의 위엄 아래 복종한다. 그러나 라파엘은 왕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왕의 시선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헤수스의 지배자인 나 이그나치오가 라파엘 에반스에게 의뢰한다.”

그 목소리는 몹시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이 앞의 다섯 죄인을 처형하라. 그것으로 라파엘 에반스의 모든 죄를 사한다.”

라파엘은 멍하니 그 다섯 명을 바라보았다. 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귀로는 들었는데 머리가 알기를 거부한다. 라파엘이 손 놓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자 죄인들의 앞에 서 있던 병사 몇몇이 비켜섰다. 다섯 명의 앞을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라파엘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가 멈칫했다. 바닥의 회색 모래가 이상하게도 목에 걸린 기분이다.

라파엘은 늘 들고 다니던 검을 뽑았다. 습관처럼 양검을 전부 뽑았다가 검 하나를 돌려놓는다. 검을 하나만 잡아서인가, 손이 어색하다는 기분이 들어 그는 다시 검을 빼 들까 망설이며 한 걸음 더 앞으로 걷는다. 또 한 걸음. 모래 위에 희미한 발자국만 남긴 채 라파엘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스터에게 도착한다.

마스터가 그를 올려다보며 클클 소리 내어 웃었다. 왕의 위압감에 눌려 있었다가 이제 라파엘의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횃불이 흔들렸다.

“재수 없는 쌍둥이 따윈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마스터가 이를 갈았다. 왕이 참지 못하고 라파엘의 뒤에서 총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라파엘이 검을 움직였다. 빠르고 정확하게 몇 번의 검이 날렵한 그림을 그리며 움직였고, 마스터의 목이 축 떨어졌다. 그는 죽은 것이다. 라파엘은 흘끗 보고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동하면서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아냈다. 그 순간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감옥 안에 피 냄새를 흩뿌렸다.

“라파엘.”

그 옆의 포주가 다급히 라파엘을 불렀지만, 라파엘은 무심하게 그의 목을 베어냈다. 그리고 버시슬 백작의 앞에서는 머무르지도 않았다. 한 번 검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피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라, 라파엘. 오랜만이야. 라파엘!”

중개인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라파엘 자신을 눈에 띄게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대체로 쾌활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적당히 사근사근하게 구는 인물이었다. 왕궁에 들어와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인물이 엉망진창이 되어서는 라파엘에게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의외라는 생각에 라파엘은 아주 잠깐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중개인을 아주 오랫동안 알았다. 그가 목장에서 훈련을 받을 때 중개인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를 보러 온 것은 아니었다. 사흘 동안 밖에서 벌거벗고 나체로 매달린 채 채찍을 맞던 도중 중개인이 목장에 들렀을 뿐이었다. 그때의 그는 라파엘을 비롯한 동기들을 보며 쿡쿡거렸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절박하게 울고 있었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라파엘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스터도, 중개인도 당연히 그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훈련받는 모습을 보며 웃었던 사람들이다. 그는 당연히 그들이 그보다 더 인내심이 뛰어날 것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미 네 명이 죽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았다. 라파엘이 그 앞에 섰을 때, 상대가 고개를 들어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구나, 라파엘.”

그는 길드의 훈련 교관이자 라파엘의 훈련 교관이었던 사내였다.

“너는 내가 낸 수수께끼를 기억하고 있나?”

사내가 물었다. 여유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놓아줘야겠구나, 라고.

왕과 스완은 그 순간 당황했다. 설마 정말 라파엘이 놓아달라며 간청이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이 더 나아가기 전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수수께끼를 푼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내가 인생의 승리자가 될 거라고 했었잖나.”

라파엘이 무심히 대답했다.

“저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길 원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교관은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많은 인간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많은 인간들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봐왔다. 처음엔 놀랐고, 역겹고, 소름이 끼치고, 짜증이 나고…… 그런 인간적인 감정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살수 후보생들에겐 더 이상 인간적인 감정이 생겨나질 않았다. 그중 소수만이 성인이 되어 진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은 쓸모가 없어지고 폐기된다. 그러니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 편하다.

이 라파엘 에반스는 그에게 있어서도 특이한 후보생이었다. 목장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섯 살에 외부 세계를 만난다. 하늘과 땅, 나무와 새, 흙과 바람이 존재하는 그 세계에 아이들은 압도된다. 문을 열어주면 아이들은 세계에 압도되어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모든 것을 확인하려 드는 아이들도 흔하다.

그런데 라파엘은 달랐다. 라파엘은 외부 세계에 나와서 교관의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이나 나무 따위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처음 보는 그 거대한 세계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이 아닌 것처럼 취급받는’ 아이들 속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이 아닌 아이’. 교관이 라파엘 에반스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강렬했다.

아이는 잘해나갔다. 무엇을 시켜도 잘했다. 그리고 아이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감정은 찾기 어려웠다. 아프냐고 물으면 아프다고 대답했지만, 참을 수 있다고 말해주면 참아냈다. 표정은 처음부터 없었다. 말도 거의 없었다. ‘네, 교관님.’ 그 한 마디 외에는 거의 말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상하게 신경이 갔다. 작은 괴물이 존재함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채색의 다른 아이들보다는 이 작은 괴물에게 신경이 쓰였다.

아이는 단 한 번, 교관의 말에 토를 달았다. 양날검을 쓰겠다고. 본인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상관없다고 말하며 아이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강력한 무기를 선택했다. 양손에 무기를 들고, 방어 따윈 염두에 두지 않았다. 교관은 양날검을 주면서 이 어린 괴물에게 매혹되는 한편 두려움을 느꼈다. 이 괴물은 결코 첫 둥지에 검을 겨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교관은 어린 괴물에게 수수께끼를 내주었다. 그가 결코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그러나 너는 해답을 찾지 못했지.”

교관의 말에 라파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가 일을 끝내지 못한 것과 같지.”

이게 무슨 개소리야.

왕은 라파엘의 뒤에서 짜증이 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죄인 주제에 묘하게 당당한 놈이 거슬리고, 검을 휘두르지 않는 라파엘도 걸린다.

스완이 옆에서 “교관이었었답니다”라고 상대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교관이라면, 라파엘을 저렇게 만든 ‘실무자’라는 뜻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왕은 그들을 지켜본다.

그냥 죽이는 거였어. 왕은 조금 후회했다. 그냥 죽이고 끝내는 거였는데, 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는 그저 희생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복수란 되갚아준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완결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완결을 위해서는 라파엘 본인이 여기에 서야 했다.

“그런가요?”

라파엘이 교관에게 되물었다.

“그렇지.”

교관이 말했다.

“이 수수께끼를 내었을 때 너는 ‘풀어보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너는 나를 죽여선 안 돼.”

교관의 말에 라파엘은 결국 검을 내렸다. 그건 맞는 말처럼 여겨졌다. 그는 분명 수수께끼를 냈고, 라파엘은 종종 그 수수께끼의 답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주로 어딘가에 잡혀서 감금당해 있을 때였지만.

그때 더는 참지 못한 왕이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수수께끼가 도대체 뭐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교관이 소리쳤다.

“이것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교관의 고함에 왕이 “뭐?” 하고 인상을 썼다.

“공평? 너 따위가 나와 공평해야 할 이유가 뭐냐? 헤수스의 지배자인 내가, 너 같은 버러지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다니. 그것만으로도 그 혀를 잘라도 되겠군! 근위병!”

“수수께끼란 도박과 함께해야 합니다. 전하께오선 통촉하여주십시오! 저는 그 수수께끼의 주인입니다. 수수께끼는 신의 장난 어린 숨결, 그 주인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수께끼입니다.”

근위병이 다가오는데도 교관은 끊임없이 소리 질렀다. 이제까지는 차분하게 있던 교관이 소리 지르는 모습에, 왕은 교관이 그 수수께끼를 믿고 이제껏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라파엘에게 구명될 생각이었던 것이다.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놈!’

왕은 분노를 삼키며 놈을 노려보았다. 인간 같지 않은 놈이었다. 이 와중에 라파엘을 얼러서 목숨을 구명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니.

“좋다.”

왕은 손을 들어 근위병을 제지했다.

“수수께끼를 내보거라. 내가 맞힐 수 없다면, 너를 한 번은 살려주고 사흘간 쫓지 않겠다. 내가 맞힌다면.”

왕이 단호히 말했다.

“너를 화형시키겠다. 오랜만에 볼거리가 생기겠군.”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형은 대단한 볼거리다. 사람들은 화형을 보며 끔찍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화형의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로 매료된다. 또한 화형은 왕에 대한 두려움을 단숨에 급증시킨다. 좌중 앞에서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자가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현재 왕은 굳이 화형이라는 본보기를 쓸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외한다. 이 이상 공포를 심는 것은 좋지 않다. 왕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화형을 운운하고 있다. 저 남자가 그 정도로 미운 것이다.

“좋습니다.”

교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수수께끼는 아주 오래된 수수께끼 책에서 본 것이었다. 그는 그 책이 몹시 희귀한 책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수수께끼 책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 왕도 이 수수께끼를 모를 것이리라 그는 확신했다. 그 확신은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이 벼랑에서 떨어져도 나뭇가지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큼 자기 최면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그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라파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교관은 저 수수께끼를 자신 외에 두 사람에게 더 냈었다는데, 결국 맞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은 교관을 놔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교관을 놔주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왕이 몹시 상심할 것 같았다.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조여진다. 이윽고 교관이 말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점심에는 두 개, 저녁에는 세 개가 되는 것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교관은 왕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를 것이다, 모를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마치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이 스스로에게 외쳤다. 저 얼굴을 보라지. 왕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괴로운 수수께끼를 만난 것처럼! 그는 풀려날 것이다.

“하.”

왕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 뭐?”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점심에는 두…….”

“사람. 사람이니까, 넌 입 좀 닥치고 있어.”

왕이 으르렁거렸다. 고작 이따위 수수께끼에 저놈을 못 죽이던 라파엘을 생각하자 몸 안의 내장이 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젠 저놈을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애도 아는 저따위 수수께끼 때문에 이 순간에도 놈을 죽이지 못하는 라파엘이 안타까운 나머지 화가 났다.

저렇게나 멋모르는 남자가 가여워서, 지금도 무표정을 한 채 “그게 사람입니까?”라고 교관에게 확인하고 있는 라파엘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지만 라파엘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학대당했다’는 말 같은 건 도저히 해줄 수 없었다. 그가 지금 보여주는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슬프고 아픈 것인지, 왕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라파엘을 당겨 안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힘으로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품 안의 남자는 이런 강한 포옹에 아파하는 법도 없이 왕을 마주 안아준다.

고작 이런 수수께끼에조차 너는 결박되어 있는 것인가.

“어떤 누구도 너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못하게 해주겠다. 그 누구도.”

왕의 말에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그를 학대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이 몹시 연약해서 당장이라도 잘못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게 이상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시는 이 땅에서 누구도 너에게 이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러지 못하게 하겠다. 그게 나라 할지라도, 너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는 어떤 신의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신이 아니나 신이 될 자이며, 신이 아니나 신이었던 자이다. 그의 이름을 빌어 맹세한다. 그의 존재가 멸하게 되더라도, 이 저주는 남으리라.”

포르타미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티오안은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이해해본 적은 없었다. 쌍둥이 누이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친애하는 누이의 명예를 지키고 대지로 떨어질 순 있어도, 그 누이의 어리석은 애정을 이해할 순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 그는 포르타미스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거는 것.

그러나 지금 왕은 라파엘의 과거를 바꿔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게, 슬펐다. 왕이 몹시 슬퍼하며 라파엘을 끌어안은 사이, 근위병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공포로 소리를 지르며 이 분위기를 깨려는 눈치 없는 교관의 입에 걸레를 쑤셔 넣고, 의자째 내갔다.

왕명은 절대적이다. 이 남자는 오랜만에 화형에 처해질 것이고, 그는 산 채로 뜨거움에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심지어 그런 그의 모습은 구경거리로 전락하게 되리라.

§  §  §

“화형의 반응은 어땠어?”

왕이 물었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절차상 물어본다는 식이었다. 갑자기 왕궁에서 화형을 거행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수습을 하느라 괴로웠던 궁정대신과 비서관은 나쁘지 않았다며 더 이상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왕이 자세한 보고를 원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굳이 묻지 않은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화형은 몹시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오랜만의 화형에 들뜬데다, 왕이 직접 화형을 지시한 반역자라는 말에 더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반역자라는 단어가 몹시 광범위하게 쓰이고 대체로는 ‘왕의 심사를 거스른 놈’이라는 뜻이라는 걸 몰라서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왕은 유능한 행정가고 훌륭한 치세를 펼쳤다.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고 있고, 왕궁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물론 모든 것이 다 좋진 않았고,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왕은 분명히 신뢰할 만했다. 최소한 왕은 백성들에게 뭔가를 줄지언정 빼앗을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는 부자인데다 같은 부자인 귀족들을 쥐어짜 내는 게 취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왕이, 즉위 이후 처음으로 ‘반역자’라며 화형을 지시한 인물에게 사람들은 몹시 냉혹했다.

죽여라, 죽여라. 처음 죄인을 데려가는 그 순간부터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게 처형식인지 축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죄인을 매다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죄인의 근처로 와서 꼬집고 때렸다. 점화 전 판사가 나와 ‘마지막으로 이자의 무죄를 주장할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 참석해주신 증인들 앞에서 말하라’고 했을 때는 아주 잠깐 조용해졌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도리어 판사가 너무 오래 서 있다며 군중들은 화까지 냈다. 반역자의 편을 드는 게 아니면 꺼지라는 성난 군중의 목소리에 판사는 놀라서 자리를 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서관은 오싹해졌을 정도였다.

물론 왕은 국민들에게 좋은 왕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적으로 훌륭하거나 도덕적으로 결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정치가로서 유능한 인물일 뿐이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왕은 신보다도 가까우면서 신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였다.

비서관은 그 점이 조금 무섭다고 느꼈다. 왕은 냉혹하고 거리낌 없이 몰살도 자행했던 인물인데도 사람들은 그의 편이다. 이미 헤수스에선 왕에게 대적할 인물이 없다. 왕이 암살이라도 당하는 날엔 온 국민이 들고 일어설 판국이다. 이번 화형은 그의 그런 인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나가봐.”

왕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말에 비서관이 나가고 그 뒤를 궁정대신이 이으려는데, 왕이 그를 불렀다.

“잠깐.”

궁정대신이 나가려다 말고 되돌아왔다. 그가 왕의 앞으로 다가오자 왕이 물었다.

“왕후궁의 공식 일정을 최소한으로 줄여봐.”

“지금도 최소한입니다.”

궁정대신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면에서 우러난 한심한 기색이 그 정중함과 함께 얼굴에 나타나려 했다. 라파엘의 정체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했다.

왕비가 아무리 몸이 약해도 그렇지, 궁정대신인 그조차 왕비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왕비를 잘 모르지만, 왕비가 아주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왕비는 정말 연약할지도 모른다. 그 마른 몸 하며 창백한 낯빛 따위를 보면 분명 몸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왕후궁에 궁의는 잘 들락거리지 않는다. 궁정대신은 왕후궁의 방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 줄여.”

“왕후를 들이실 겁니까?”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짜증을 내기 전에 궁정대신이 대답했다.

“공식 행사에 참여할 다른 이를 세우지 않는 한 무리입니다.”

왕이 정말 고민하는 것 같자 궁정대신이 뭘 고민 따윌 하느냐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 다른 이의 몸에서 자식을 보셔야겠지요.”

“무리지.”

“네. 현재 왕비에게서도 임신 소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무리일 듯합니다. 원래 이런 경우 왕비에게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아주 조용하군요. 궁정대신인 저조차도 왕비가 문제라는 생각은 왠지 들지 않을 정도니까요.”

왕이 혀를 찼다.

자식이라니, 그의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자를 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왕의 핏줄을 끊을 수도 없다. 이그나치오 가문은 대대로 자식이 귀하다. 지금 왕에게도 형제는 단 한 명도 없다. 스완은 공식적으로 왕의 형제가 아니며 이그나치오 가문의 일원도 아니다.

‘내가 애를 못 가지면 다음 왕가는 어느 가문이 되려나.’

왕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문을 떠올려본다. 다 고만고만했다. 원래는 당연히 쇼어가였지만, 제럴드 라 쇼어가 공작위를 물려받고 나서는 쇼어 가문의 세도 약해졌다. 현재는 포 가문이 쇼어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포 백작은 혐오스러운 자지만 대단한 자산가였다. 그는 현재 스완에 의해 저택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감금된 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스완과 왕의 어머니를 능욕한 대가이다.

그리고 포 백작에 의해 작부 주제에 백작부인이 된 여자도 있다. 클레르 라 포. 이 여자야말로 포 가문의 흠이라 할 수 있겠다. 포 가문이 왕가가 된다면 이 여자는 태후가 되는데, 그 꼴을 두고 볼 귀족들이 아니었다.

“애는 가지지 않아.”

“그 말씀을 공식 석상에선 삼가주십시오.”

“진심이야, 궁정대신. 나는 애를 가질 생각이 없어.”

궁정대신이 동그란 은테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배가 부른 안네마리가 싫거든. 물론 귀엽긴 하겠지만 그 배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른 남자를 몸 안에 넣고 있는 안네마리를 보면 화가 날 것 같아.”

궁정대신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냐는 얼굴을 했다.

“젖이 줄줄 흐르는 안네마리는 관능적이겠지만 말이야. 생각하니 좋긴 하군. 그 얼굴로 운다면 끝내주겠어.”

역시 안네마리 왕비는 이 잔혹한 왕을 몸으로 묶어둔 건가. 궁정대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안네마리 왕비를 잠시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녀 같은 몸이라 할 수는 있지만, 관능적인 몸을 가진 여성은 아니었는데.

“애가 불행한 것도 원치 않고.”

왕은 그렇게 말하고 짜증을 내면서 “공식 행사를 줄여봐! 왜 못 줄여. 그런 걸 하라고 너를 그 자리에 임용한 거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잘 생각해보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무조건 불가능하다는 말 따윈 하지 마. 내가 하늘에 다리를 놓으라고 했나? 아니면 하늘을 날라고 했나?”라고 투덜거렸다.

당신이 나를 기용한 것은 궁정을 잘 보살피고, 대외적으로 궁정의 안정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궁정대신은 꾹 참아냈다.

“생각해보겠지만, 기대에 보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궁정대신은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왕이 이상한 것을 요구했을 때는, 아랫사람이 짜증을 좀 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은 의외로 마음이 넓었다.

왕이 나가보라며 손짓하자, 궁정대신은 인사를 하고 바로 움직였다. 혹시나 왕이 뒤에서 부를까 봐 걸음을 빨리했을 정도였다. 뭔가 중요한 용건이 있나 했더니 이따위 소리나 해대고…….

왕비의 공식 일정을 최소한으로 줄여보라고? 왕비는 공식 일정에 참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귀부인이었다면 저택을 관리했을 것이다. 집사가 있긴 해도 집안 경제는 부인이 다스리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왕궁은 궁정대신이 따로 있어 그럴 이유가 없다.

왕이 여러 비를 들였더라면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도 왕비의 몫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왕후가 없는 한 그녀가 제1왕비니까. 하지만 왕은 그녀 외에 누군가를 들일 마음이 없다. 그런데 이제 왕비의 공식 일정도 최대한 줄여보라니. 어차피 공식 일정이 있든 없든 아프다며 잘 나오지도 않지 않은가.

궁정대신이 재빨리 사라지는 것을 보며 왕은 웃음을 머금었다. 궁정대신은 솔직하고 유능한 자였다. 그는 몹시 유능했지만,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생각하면 상대가 왕이라 할지라도 안색을 굳히고 짜증도 살짝 내비쳤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살짝뿐이었지만.

“전하, 제럴드 라 쇼어 외무대신입니다. 몹시 급한 일로 뵙고자 한다 합니다.”

몹시 급한 일?

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들여보내.”

왕이 근위병에게 말하고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시종장이 허리를 숙이자 그 귀에 대고 왕이 속삭였다.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을 찾아와라. 시종장이 ‘예, 전하’라고 말하며 허리를 폈다. 시종장이 시종들을 훑어보고 그중에서 두 명을 불렀다. 그리고 제럴드 라 쇼어가 들어오는 그 뒤쪽으로 두 명의 시종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제럴드가 왕의 앞에서 예를 갖춰 인사한다. 그 우아하고 절도 있는 인사를 보며 왕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애를 가진다면, 어릴 때 공부를 잘 시키고 청소년기에 군대에서 좀 굴린 다음 청년이 되자마자 왕세자로서 소임을 다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저렇게 우아하고 절도 있는 인사를 할 수 있으면서도 저렇게 대책 없이 순진한 머리가 되진 않겠지. 왕은 그런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제럴드는 얼굴이 허옇게 떠서 왔고, 이제 분명 안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될 텐데 그는 한가하게도 안 생길 애의 육아를 생각하고 있다. 괜히 궁정대신이 애 이야길 해서 그래. 왕은 괜히 궁정대신의 탓을 했다.

그러다가도 안네마리가 어릴 때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아마 방금 생각한 대로 키우진 못했을 것이다. 왕은 안네마리가 너무나 예뻐서, 무릎에서 떼놓질 못했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을 하든 무릎에서 놓질 않았을 테지.

‘그리고 크면 잡아먹고? 율레즈여, 저와 아무 상관없이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이 신께 감사드렸을 때에는 제럴드가 그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일단 당황해서 달려왔지만, 정작 왕을 보자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제럴드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노트코의 첩자로부터 긴급한 전갈이 들어왔습니다. 티스가 점령되었다고 합니다!”

긴급 회의의 분위기는 스산했다. 대신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고, 대장군 하타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티스로 건너가 무엄한 놈들을 다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커다란 아치창 밖에선 쓸쓸히 낙엽이 지고 있었다.

한참 뒤에 “전하가 오십니다!”라는 말에 대신 전원이 일어났다. 현재의 제사장이 ‘쿠치아노여, 헤수스에 가호를’이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왕은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탁자를 내리쳤다.

“교활하고 비겁한 놈들!”

왕의 고함에 대신들이 머뭇거리며 착석했다.

왕의 진노는 대단했다. 대신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한편으론 대장군의 안색을 보며 전쟁과 승패에 대해 복잡하게 계산을 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각자 자신이 맡은 분야에 얼마나 피해가 올 것인지도 생각해야 했다.

노트코는 분명히 헤수스를 도발하고 있었다.

“제깟 놈들이 감히 티스를 넘봐! 쿠치아노가 수호하는 우리 헤수스와 전쟁을 해보겠다는 의미다!”

힘쓰시네. 스완은 왕의 뒤에서 혀를 찼다. 왕은 이런 일에 열을 내는 성격이 못 된다. 지금 화를 내는 건 어디까지나 전시 효과였다. 대신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위기를 주지시키겠다는 의미였다. 

마치 짠 것처럼 제럴드 라 쇼어 외무대신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티스 성을 점령한 것은 노트코가 아니라 도적들입니다. 아직 노트코 군인이라는 증거는 잡지 못했습니다. 첩자들의 활동은 미비합니다.”

“명을 내리신다면, 당장 우리의 땅에서 그들을 몰아내겠습니다.”

대장군이 단호히 말했다. 정말로 화가 난 사람은 왕이 아니라 대장군이었다. 티스는 국경 지대였으므로 당연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고작 도적 따위에 몰살당한 것이 되었다. 죽은데다 명예조차 지키지 못했다. 군대의 수장으로서, 그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함정이라면?”

왕이 물었다. 주 바다 경계선이 무너지는 것은 헤수스를 제외한 나라들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 연합군이 기다리기라도 한다면? 왕의 말에 대장군이 그럴 리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첩자에게서도 그런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에 왕은 혀를 찼다. 게다가 요즘같이 평화로운 시대에 헤수스 같은 강국이 고작 손바닥만 한 땅을 위해 군대를 일으켜 대륙을 건넌다는 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함정이라는 징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함정일 것만 같다. 예감이 더러웠다.

“놈들이 바라는 건 뭐지? 놈들이 도적단을 사칭하고 있는 이상 티스는 우리의 것이다.”

도적단이라고 사칭하면 티스가 공격받더라도 헤수스가 본국을 공격해올 수는 없다는 계산 아래, 노트코는 도적단으로 가장한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도적단이라고 사칭한 이상, 노트코 또한 영토를 그냥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적단들이 점거한 티스는, 아직은 헤수스의 영토가 맞았다.

“직접 협상입니다.”

제럴드의 말에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무엄한 것들! 이제까지 딱딱하게 굳어만 있던 얼굴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분노를 토해낸다. 그들은 지금 헤수스의 왕과 직접 협상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감히 헤수스의 지배자와 협상을 하려 들다니! 

왕은 생각에 빠졌다. 상대가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지만 그들도 왕이 서대륙 땅을 밟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왕의 대리인을 보내라는 뜻일 뿐.

‘왕의 대리인’이란 왕의 가족이어야 인정이 된다. 하지만 왕에게는 보낼 만한 가족이 없다. 스완은 공식적으로 왕의 혈육이 아니다.

“대사를 보내겠다고 해라. 그 정도도 놈들에겐 과분해.”

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티스는 빨리 수복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건의했다. 왕이 그를 한 번 노려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빨리 수복해야 한다. 왕들의 가장 커다란 의무 중 하나는 주 바다 경계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 그 바다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왕의 의무였다. 그리고 그 바다를 빼앗기게 된다면, 왕은 영원한 실패자가 된다. 그가 어떤 정치를 펼치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바다를 빼앗긴 것만으로도 그는 영원한 패배자로 남아, 실정을 펼친 왕이 되는 것이다.

“이, 일단은 대리인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태후라든가…….”

왕과 사이가 나쁜 태후가 그 일을 허락할 리 만무하다. 게다가 왕으로서도 태후에게 그 일을 맡길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태후는 아무래도 노트코와 밀약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태후를 보내는 것은 적을 돕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아니면…….”

대신들이 왕의 눈치를 본다. 그들도 정말 태후를 추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제1왕비. 왕의 성명을 받은 왕국의 유일한 왕비. 그녀라면 충분했다. 게다가 그녀는 외무대신의 사촌이기도 했다. 완벽한 자격을 갖춘 왕비였다.

“아니면?”

완벽한 자격을 갖췄으나 왕의 총비이기도 했다. 아프다며 궁에서 내보내지도 않으려고 하는 왕이 왕비를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낼 리 만무했다.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총살당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대신들은 결국 왕에게 안네마리의 이름을 꺼내보지 못했다. 분위기는 기묘해졌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왕이 벌떡 일어났다.

“고작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게 놈들의 요구대로 해주자는 거냐?”

조금 전에는 일부러 화를 낸 것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속이 뒤집힐 것 같다. 자신의 대신들은 단체로 미친 게 분명했다. 긴급회의씩이나 열어서 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가 고작 왕비를 보내자는 것이란 말인가.

대신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게 아니라는 말은 빈말로라도 나오지 않았다.

“노트코로 간 2천 명의 군인들은 뭘 하고 있다더냐!”

왕의 고함에 대장군 하타가 일어섰다.

“노트코에서 성문을 닫았습니다. 그들 말로는 티스에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이 있다더군요.”

“전염병?”

제럴드가 강한 어조로 부정했다.

“거짓말입니다! 티스에서 온 마지막 보고는 한 달 전, 전염병의 징후에 대해서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이런 비열한 수작이 있느냐며 다들 목소리가 높아졌다.

“티스로 향하는 성문은 열어줄 수 없다고 합니다.”

대장군이 왕을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항구가 폐쇄되고 노트코를 통한 육로로도 들어갈 수 없다면, 남은 것은 항구가 아닌 곳에 배를 대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왕의 전결이 필요했다.

“티스항을 폐쇄시키려는 수작입니다. 실제로 티스항은 현재 폐쇄된 상태입니다. 도적들의 기승에 일하러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제럴드의 말에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더 불쾌한 소식이 있습니다. 티스에 남은 사람은 오직 헤수스 사람뿐입니다.”

제럴드가 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염병 핑계를 대며 노트코로 들어가려는 피난민들 중에서 헤수스 사람은 다 제외시켰다더군요. 이유는 같습니다. ‘전염병의 징후가 보임.’ 어떤 징후인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티스에 현재 남은 건 헤수스 국민뿐입니다.”

왕이 혀를 찼다.

“때를 기다린 게 분명해. 대사가 없는 때를 노렸어. 티스는 작지만 훌륭한 상업도시다. 헤수스 국민은 티스에 가서 척박한 땅을 도시로 일구어냈고, 국가는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더 이상의 주민을 허용하지 않았다. 주민은 몇 백 명이지만 실제로 그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아 자리 잡은 이는 몇 천 명이지. 국가는 헤수스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그들은 부자가 되어 나라에 엄청난 세금을 상납했다. 그들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국민이다.”

실제로 헤수스는 타 대륙 말미로 이동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대우를 해주었다. 그들이 이루어낸 땅에 다른 이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헤수스의 정책이었다.

처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타 대륙으로 갔던 사람들 상당수는 대대로 부자가 되었다. 본국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혜택을 주려 힘쓰는 만큼 그들도 애국심이 대단해서, 웬만한 첩자보다 나은 보고들을 자발적으로 해주곤 했다.

“대장군 하타, 전열을 가다듬어라.”

왕의 명령에 하타가 고개를 숙여 보인다.

“외무대신 제럴드 라 쇼어, 왕의 분노를 노트코에 알려라. 왕은 너무나 분노하여 이성을 잃었고, 노트코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여러 차례 간했으나 도리어 더욱 분노하기만 했다고.”

“예, 전하.”

“수도방위군 대장에게 알려라. 노트코 국민을 한 달 내로 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라.”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대신들 사이에 당혹감이 감돈다. 전면전을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하는 짓이 전면전과 다를 바가 없다. 노트코가 아닌 척하며 뒤통수를 칠 거라면 이쪽도 못할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사실 이런 경우 불리해지는 건 노트코였다. 치킨게임으로 이 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현 시대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치킨게임은 미칠수록 유리하다. 그리고 몰살의 즉위 축하연이라는 엄청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그나치오 23세야말로 이 시대의 광인이었다.

“궁정대신. 모든 파티를 중지한다. 안네마리 제1왕비의 와병을 세상에 알려라.”

왕은 선수를 쳤다. 그는 먼 서대륙으로 왕비를 보낼 생각이 없다. 그리고 대신들이 요구하기 전에 와병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대신들이 또 아프냐는 얼굴을 했지만 서슬이 퍼런 왕의 기색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노트코와 헤수스와의 침묵의 전면전 직전이었다. 왕은 도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적이 아니라 노트코 군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되, 증거가 없으니 대놓고 말하진 않겠다는 의미였다.

싸늘한 늦가을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  §  §

늦가을의 바람은 온 궁을 휩쓸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외교의 중대사였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중대사였다.

라파엘은 소매를 걷은 차림으로 서재의 커다란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안고 앉아서 몇 번이나 며칠 전 일을 되새겨보았다. 왕은 라파엘 에반스에게 검은 물의 주요 인물들을 죽이라고 했다. 본래라면 자신을 키워준 길드를 치는 건 금해진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지라 라파엘은 그들의 목을 베었다.

‘사람이더군…….’

라파엘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마스터라든가 훈련 교관은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그들의 삶을 마감하지 않는 한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는 건 불가능할 듯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들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고, 검을 꽂으면 그만인데.

왕은 그가 학대받았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던 왕은 나중에 라파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 복수는 왕 개인의 것이라고.

하지만 라파엘은 왕이 또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길드는 왕에게 진 빚이 없다. 길드가 라파엘을 학대했다고 생각한 왕은 분노해서 라파엘의 복수를 대신 해준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는데.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학대란 당한 쪽에서 상처를 입어야 가능한 법이지만, 자신은 상처 입은 적이 없었다. 남들도 자신에게 기계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많은 것이 모자랐다. 피에 찌든 손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 특별히 학대라 할 것도 없었는데.

‘너는 이 수수께끼를 풀면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교관이 말했었다. 그 말을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수수께끼를 받아들였었다. 교관은 교활하고 무서운 자라, 수수께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독을 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란 신의 문자, 받아들인 이상에는 의뢰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의뢰인을 죽일 수는 없다.

인생의 승리자.

그게 뭔지 라파엘은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그 수수께끼를 라파엘 대신 왕이 풀어주었다. 왕은 몹시 쉽게 풀어주었다.

그 순간 라파엘의 가슴에 따뜻한 기운이 차올랐다. 만약 자신이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면 왕이 거기에 있어 절대적인 열쇠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왕은 화를 내고 슬퍼했지만, 라파엘은 그저 기뻤다.

검은 물이 없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다. 허전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 왠지 모르게 창 밖으로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날고 싶진 않지만.

라파엘은 책상에서 내려왔다.

며칠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더니 이젠 한계였다.

며칠 전에 교관이 화형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라파엘도 아직 화형을 당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고문이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행위다. 물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고문을 한 적도 있다. 의뢰인이 몹시 원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산 채로 이것저것을 해달라는 말에 응한 적은 있지만, 그때도 태운 적은 없었다. 연기가 나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화형은 도대체 어떨까? 산 채로 타는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이지? 라파엘은 조금 궁금했지만 교관이 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아는 사람이 산 채로 타는 건 별로일 듯했다.

‘늦네?’

라파엘은 창문을 열었다. 오늘부터 다시 총을 개조해도 좋다고 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아침부터 총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오질 않는다. 왜 이렇게 늦지? 라파엘이 의아히 여겼을 때 서재 문이 열리고 그레이드가 새파란 얼굴로 나타났다.

“비, 비전하.”

“응.”

라파엘이 담담히 대답한다.

아, 아, 이분은 진짜! 그레이드는 답답해졌다. 아랫사람이 새파랗게 질려서 나타나면 ‘무슨 일인가?!’라고 하며 장단 좀 맞춰주시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응’이라고 대답하시면 이쪽은 어쩌란 말인가!

그레이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입을 달싹이고 있을 때 뒤에서 시녀들이 들어왔다. 또 식사를 서재에서 하겠다 해서 식사를 가지고 오던 시녀들이, 그레이드의 당황하다 못해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시녀장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얼굴을 굳히자, 그제야 그레이드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비전하,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레이드가 허리를 숙였다. 시녀들의 안색이 나빠진다. 호위조의 조장이 이렇게 허리를 숙인다는 건 몹시 나쁜 징조였다. 하지만 이 징조를 눈치챌 수 없는, 눈치만은 토끼라 불릴 자격이 있는 라파엘이 “왜?”라고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총이 없어졌습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몇 자루나?”라고 물었다. 

“전부…… 입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고, 그동안 시녀들이 도리어 ‘어떡하면 좋아!’라고 수선을 떨었다.

그때 시녀 한 명이 ‘거봐, 내가 봤다니깐!’ 하고 옆 시녀에게 속삭였다. 그 순간 그레이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찌나 무시무시한 얼굴인지 시녀는 순간 다리가 풀리려 했다. 실제로 다리가 반쯤 풀려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부축하듯 붙잡고, 그레이드가 물었다.

“뭘 봤다는 거야?”

반말……? 시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가 특수군이면 특수군이지, 특수군이 왕후궁 직속 시녀보다 잘났어? 왜 반말 짓거리야? 시녀장은 짜증이 났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아냈다.

“아, 그게…….”

그레이드가 붙잡자 더 겁을 먹은 시녀가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그런 그녀와 같이 바닥으로 조금씩 내려가면서, 그레이드가 재촉했다.

“뭘 본 건데!”

왕비의 총은 군사 기밀이었다. 시험 사격은 시중드는 이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루어졌고, 그 총을 보관한 것은 근위대였다. 그런데 총이 없어지다니.

왕비의 심부름으로 갔던 특수군 막내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돌아왔다가 그레이드에게 몹시 깨졌고, 그레이드는 잠시 호위조에서 이탈해 근위대를 뒤집었다. 처음에는 미안해하던 근위대도 네가 뭔데 이렇게까지 나오느냐며 화를 냈고, 육탄전 직전에 현 근위대 대장 대리인 제이슨 리아스가 나왔었다. 그레이드는 제이슨을 아주 좋아했지만 이번만은 서슬이 퍼런 얼굴로 항의했다.

결국 제이슨 쪽이 미안하다며 일반 군인이자 옛 부하인 그레이드에게 머리를 숙여줘야 했다. 그렇게 근위대에 적을 무더기로 만든 그레이드였다.

“그, 그게.”

시녀가 덜덜 떨었다.

“태후궁에서, 총을 봤어.”

하지만 그 와중에 반말이었다. 네가 반말을 하면 나도 반말을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왕후궁 시녀들은 독기가 있었다.

“총? 무슨 총?”

하지만 시녀들과는 달리 그레이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해? 어떤 개새끼라도 반드시 목을 따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왕비가 맡긴 물건을 잃어버리다니, 이건 그의 경력에 오점이 될 것이다.

“유, 육군 대장님이 총을 가지고 계셨어. 그런데 직접 쏘시진 않고, ‘제법 개조를 잘했군요’라고…….”

개새끼의 이름이 육군 대장이었어!

그레이드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시녀를 그냥 두고 사라지려 했다. 그런 개새끼를 살려두는 건 말도 안 된다. 감히 내 (윗사람이 맡긴) 것을 가져가? 이 늙은이가 인생 빨리 막 내리고 싶은가 본데, 오냐,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가 당장 달려가려는데 라파엘이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레이드가 라파엘에게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시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파엘이 그레이드에게 물었다.

“시험 사격은 다 했었어?”

그레이드가 붙잡힌 채로 중얼거렸다.

“예, 비전하.”

한없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다.

“어디에 보관해뒀었지?”

“근위대에서 보관했었습니다.”

“그리고 근위대에서 잃어버린 건가?”

“예, 비전하.”

라파엘이 손바닥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럼 찾아오지, 뭐. 일단 가서 내 총인지 확인이나 좀 해보고.”

그리하여 밤이 찾아왔다. 왕은 오늘도 바쁠 것 같다는 첩자―시녀 하나가 선 플레이스의 시종 하나와 사귄다고 한다―의 언질에 따라 오늘 밤, 라파엘과 호위조는 다 같이 태후궁을 급습하기로 마음먹었다.

호위조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왕궁특수군은 매우 특수한 위치다. 대장을 제외한 전원이 평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귀족들도 두려워하는 존재고, 대우가 몹시 좋지만, 그만큼 잔류 가능성이 불투명한 경우가 많았다. 특수군은 거의 용병 군대에 가깝다. 계약 기간은 2년. 2년마다 계약 갱신을 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이런 커다란 실수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유능하다는 것만이 그들의 장점이 아니던가.

부엉이가 창공을 날아 사라진다. 야수사들의 눈에 띄면 당장 끌려 나갈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일단은 우린 일곱 명이니까, 지하부터 뒤지자. 각자 뒤지면 될 것 같은데, 불안한 사람은 두 사람씩 짝을 지우는 것도 괜찮아. 어쨌거나 자신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중요해.”

그레이드가 말하는 동안, 라파엘은 옷깃을 코끝까지 올렸다. 태후궁은 몇 번 와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온 왕궁을 이 잡듯 뒤졌었다. 밤새도록 뒤지고 뒤져서, 마리에 관한 작은 단서 하나라도 떨어진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난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라파엘이 말했다. 굳이 다 지하에서부터 올라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호위조는 잠시 빈정이 상했지만, 곧 마음대로 하시라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라파엘 에반스를 죽일 인간이 최소한 태후궁엔 없을 것 같았다.

검은 옷을 입은 인영 일곱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그들은 태후궁의 아름다운 철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여섯 명은 지하로 향하는 문을 찾고, 나머지 한 명은 나무를 타고 훌쩍훌쩍 뛰어올랐다. 나무를 타고 오르던 라파엘은 침실에서 보이는 광경 때문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정사의 장면이었다.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아름다운 태후와 육군 대장의 정사였다. 태후가 사지로 육군 대장의 건장한 몸을 친친 동여맸고, 육군 대장은 거칠게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사랑하오, 사랑하오! 그 목소리가 제법 애절했다. 라파엘은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다 다시 훌쩍 위로 뛰어올랐다.

왕과 정사를 나누지 못한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아니, 오래되지 않았는데 오래되었다는 느낌이다. 여름 무도회 이후 한 번도 정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고 타올랐던 시간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둘은 담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더라? 라파엘은 의아해져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알 수 없었다. 왕이 이제 섹스를 싫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살짝 들 뿐이었다.

아. 라파엘은 소리 없이 신음했다. 왕이 자신을 안고 싶지 않아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약간 아픈 듯했다.

……아니, 좀 많이일지도. 어, 왜 이렇게 아프지? 그러고 보니, 왜 왕은 갑자기 그를 안지 않는 걸까. 가끔 닿아도 소스라치게 놀라 밀어내곤 한다. 키스를 하다가도 밀어내고,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다가도 밀어낸다. 그때마다 왕은 ‘미치겠네’ 따위의 말을 읊조린다. 왜 미친다는 걸까?

라파엘은 탑으로 통하는 계단에 열린 창문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몸을 밀어 넣어 태후궁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그는 태후궁의 보안이 꽤 허술하다는 걸 깨달았다. 왕후궁은 이런 실수가 없다. 시녀에 근위병에 특수군까지, 삼중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산해.’

왕후궁의 산뜻함과는 사뭇 다르게 스산하다.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모든 것이 조금씩 낡고 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원이 모자란가?’

그럴지도 모른다. 왕과 태후는 사이가 대단히 나쁘다. 그리고 태후를 지지해주는 세력도 이젠 거의 없다고 한다. 쇼어 가문이 태후와 반목하고 있는 이상, 반왕파도 태후에게서 이용 가치를 발견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일단 탑으로 올라갔다. 가장 먼저 탑부터 확인해야 한다. 나무문의 열쇠를 조심스럽게 따고 들어가 총이 있는지 확인한다. 총을 전부 훔쳐간 이상, 그 부피는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분명 한데 모여 있을 테니 그저 눈으로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확인하고 나오려는데 웬 서신이 눈에 띄었다. 내용 자체는 별거 아니었다.

『티스에서 기다리겠소.』

사인도, 무엇도 없었다. 하지만 그 편지지에는 노트코 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라파엘은 잠시 고민하다 혀를 찼다. 이걸 가져가도 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걸 놓쳐도 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라파엘은 참 솔직하고 직선적인 남자였다. 그것은 그의 장점이다. 그리고 그의 단점은 눈치가 없고 배려심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가져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몰라서, 일단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찾으러 온 총은 찾지 않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무래도 왕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호위조를 두 번 죽이는 짓을, 라파엘은 거리낌 없이 실행하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이그나치오궁에 도착해선 왕의 집무실을 올려다보았다. 저 집무실을 그냥 들어가는 건 그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별로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라파엘은 어둠 속에서 당당히 나갔다. 정문에 도착한 라파엘을 저지하려는 근위병을 다른 근위병이 급히 막았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응. 전하께선 어디 계시지?”

“집무실에 계십니다!”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외치는 근위병에게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이그나치오궁 정문을 통과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대장?’ ‘어, 우리 대장이야.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님!’

라파엘은 그렇게 집무실까지 무사통과했다. 라파엘의 얼굴을 모르는 근위병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자신이 근위대장이라고 밝히자마자 ‘아!’ 하고 소리치며 바로 통과시켜주었다. 라파엘은 자신이 마리와 별로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얼굴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면.

“도대체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왕을 만나기 전에 스완을 먼저 만났다. 라파엘을 보자마자 왕의 집무실 옆 대기실로 끌고 간 스완은 완전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평소의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아니었는데도, 라파엘은 태평하게 “전하를 뵙고 싶어”라고 말했다. 상대의 분위기 따윈 살필 줄도 모르고 살필 생각도 없는 라파엘의 태도에 울화가 치민 상태로, 스완이 팔짱을 꼈다.

“바쁘십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저한테 하십시오.”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스완이 말했다.

“저한테 하실 수 없는 말씀이시라면 지금은 안 됩니다.”

약간 비꼰 것이지만, 라파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잠시간의 생각 끝에 품속에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태후궁에서 가져온 건데…….”

“태후궁이요?! 언제 말입니까?”

스완이 낮게 고함을 질렀다. 태후궁엔 언제 간 거야. 호위조, 이 자식들은 그동안 뭘 했단 말인가!

“지금.”

“지금이요? 이 야심한 시각에 거긴 왜 가신 겁니까!”

“내 총을 가지러.”

미치겠다. 아무리 거기에 잃어버린 총이 있어도 그렇지 거길 왜……. 잠깐. 총이 거기 있다고? 스완은 화를 내다 말고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총이, 태후궁에 있다고?

“총이 거기 있습니까?”

스완이 미심쩍은 눈으로 묻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는데, 내 시녀가 태후궁에서 본 것 같다고 해서.”

“그래서 확인하러 가신 겁니까?”

“응.”

확실치 않은 정보라면 태후궁을 급습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선왕의 왕후에게 그럴 수는 없으니, ‘본 것 같다’는 정도로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확인할 길이 없긴 하다. 라파엘에게 기가 막히긴 한데, 그 방법이 최선의 방법인 건 사실이라, 스완은 뭐라 말도 못 하고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호위조 놈들은 뭘 한 거야?’

내일 날 밝으면 두고 보자고 스완이 이를 갈고 있을 때, 라파엘이 편지지를 든 손을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런 걸 찾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갖다두는 게 좋을까?”

“태후궁에서 가져오신 편지입니까?”

스완이 심드렁한 얼굴로 편지를 펼쳤다가 멈칫했다. 노트코 왕가의 문장이었다. 그는 서둘러 편지를 펼쳤다. 티스에서 기다리겠다는 한마디뿐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위력을 가진 한마디였다.

티스에선 왕과의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그리고 가장 적격자인 안네마리 제1왕비는 몸이 약해서 공식 일정에도 거의 참석하지 못한다.

왕의 대리인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직 두 명, 왕의 공식적인 어머니와 공식적인 아내뿐. 따라서 안네마리가 티스로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다음 차례는 분명 태후의 차례였다. 지금 전서구에 의해 오간 밀서의 존재를 알기에 태후를 보내는 걸 경계하고 있을 뿐이지, 만약 밀서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태후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절 따라오십시오.”

스완이 앞장섰다. 라파엘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집무실로 들어가 한참 안쪽으로 향했다. 그제야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에 들어간 라파엘은 왕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왕의 존재가 같은 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방 안이 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시선이 마주쳤던 왕이 눈길을 홱 돌렸다. 그것이 외면이라는 걸 깨닫는 데, 라파엘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전하, 이것을 좀 보십시오.”

스완이 왕의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왕이 스완이 건넨 것을 보고 살짝 눈이 커졌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후의 자존심도 완전히 바닥이군. 여기선 육군 대장에게 몸을 팔고, 저기선 적국의 남자에게 웃음을 팔았나? 한 나라의 태후가 창녀와 다를 바 없다니 슬픈 일이야.”

왕이 그렇게 말하며 스완에게 눈짓했다. 라파엘이 왜 여기에 있냐는 시선에 스완이 대답했다.

“근위대장이 가져온 것입니다.”

그 순간 왕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완은 각오를 다졌지만, 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라파엘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왕이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스완에게 편지를 돌려주었다.

“제자리에 돌려놓고 지금 급습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도 재주 좋게 없애버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스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왕은 이 편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급습해선, 이런 편지를 발견했다는 식으로 나올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스완으로서는 그 생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태후는 지독한 여자다. 저 편지를 감추기 위해 태후궁에 불을 지르고도 남을 여자인 것이다.

“제가 거기 가서 그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편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불태우지 못하도록 감시하겠다는 말에 왕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라파엘은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는 왕은 약간 여위었다. 일정이 지나치게 바쁜 탓인 듯했다. 턱선은 더욱 날렵해지고, 광대는 조금 도드라졌다. 안타까우면서도, 그런 왕에게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라파엘은 가만히 왕을 바라본다.

‘정말 가슴이 아프네.’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왕을 계속 바라보며,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무런 자극 없이 이렇게 아프다니. 마치 독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하지만 라파엘은 이것이 왕을 향한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질투를 했을 때, 이렇게 아팠다. 왕이 질투라고 알려줬었다. 지금은 질투를 할 때가 아니지만, 어쨌든 왕을 보면서 느끼는 고통임은 분명했다.

그때 왕이 잠시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나 좀 보지.”

왕의 말에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라파엘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는 살짝 맥이 빠져 있었다. 라파엘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 흠칫해서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왕이 노골적으로 무시해서인지, 살인 기계는 풀이 죽은 모양이다.

왕이 응접실보다 더 안쪽인 집무실로 움직이자 라파엘도 그 뒤를 따랐다. 왕은 늘 라파엘의 곁에서 같이 걸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왕의 뒷모습은 단호해서 라파엘에게는 너무 멀어 보였다.

왕이 시종들도 물리고 응접실에 홀로 들어가자, 라파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시종들의 복잡한 시선을 받았지만, 라파엘은 시종들의 시선까지는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라파엘이 응접실에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전…… 읏!”

응접실에 들어와서도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왕을,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을 때였다. 왕이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그는 라파엘을 벽으로 몰아붙이고, 두 팔 안에 가둔 채, 입술을 탐했다. 초조하고 격렬한 키스였다. 라파엘이 입술을 열자, 그것만으로도 왕이 신음했다. 키스는 난폭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왕은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으로 키스하며, 라파엘을 탐했다.

미칠 것 같았다. 단지 라파엘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는 이 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왕이 자신의 전 생애에서 몇몇 남자들을 안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상대와 교감했던 것은 라파엘이 처음이었다.

몇 번이나 이 몸을 안았었다. 온실에서, 침실에서, 어디든. 그에게만 약간의 표정을 보여주는 라파엘이 노골적으로 흐트러지고, 울고, 매달려왔었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이고 라파엘의 안쪽을 파헤치고, 토닥였다. 라파엘의 안에 자신을 새기고, 다시 그 위를 덮는다. 라파엘에게 수치스러운 속옷을 입히고, 때로는 정액을 그저 품고 있게 해서 곤란하게도 만들어보았다.

왕은 라파엘이 자신의 정액을 흘리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안쪽에서 흘러내린다며 곤란해하는 라파엘의 발에서 구두를 벗겨내고, 그대로 카드리유를 가르쳤었다. 처음에는 잘 따라오던 라파엘은 결국 신음을 흘리며 그의 품으로 무너졌었다.

라파엘은 왕의 앞에서라면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그를 알고 있는데, 그를 앞에 두고 금욕을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용서를 받기 전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한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결심은 빠르게 사라져버리곤 했다.

왕의 손이 옷을 밀어 올리며 그 안쪽을 탐했다. 탐욕스러운 쾌감을 알면서도, 한동안 자극받지 못했던 유두가 빳빳해지는 것을 느끼고 라파엘은 등을 파르르 떨었다. 왕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아아, 안네마리. 네 체향이 너무……’라고 중얼거렸다. 왕의 손가락이 라파엘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가슴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왕은 그 가슴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유두도 애무했다.

라파엘이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려고 하자, 왕은 라파엘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딱딱해진 중심을 왕의 허벅지에 비볐고, 둘은 동시에 신음성을 터뜨렸다. 왕은 허겁지겁 라파엘의 귀에 키스했다. 귀를 빨아들인 그 입술은 점점 내려갔다. 라파엘의 손이 왕의 옷 안쪽으로 교묘하게 들어가자, 그저 살갗에 닿은 손만으로도 왕이 진저리를 쳤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왕의 체온이 낯익으면서도 묘하게 생경하다. 라파엘은 왕의 육체 중 자신의 입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키스를 퍼부으며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왕이 라파엘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허공에 들린 라파엘이 왕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자 왕이 다시 라파엘의 입술에 키스했다. 소파로 움직이는 동안에 떨어지는 것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들은 그렇게 움직였다. 왕이 라파엘을 내려주었을 때, 라파엘은 왕의 앞에서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왕이 라파엘의 유두로 달려들었다. 껍질이 벗겨질 것같이 강하게 빨아들이다, 왕은 라파엘의 창백한 피부에 그가 남긴 자국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온몸을 물어뜯듯 자국을 남겼다. 가슴과 배, 옆구리에 키스마크를 낸 왕이 라파엘을 엎드리게 해서 등뼈를 따라 이를 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있는 라파엘의 하의를 끌어내렸다.

왕의 입술이 라파엘의 엉덩이로 내려온다. 꼬리뼈를 이로 살살 긁자, 라파엘이 몸에 바짝 힘을 준다. 괴로운 듯 연방 울음소리를 터뜨리고 있다. 그게 좋아서, 왕은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도록 그 부분을 괴롭혔다. 엉덩이는 아예 깨물었다. 콱 깨무는 순간 라파엘이 팔을 뒤로 내밀어 허우적거렸다. 그를 밀어내려는 건지 아니면 엉덩이를 가리고 싶기라도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뒤로 내밀어진 한쪽 팔을, 왕은 강하게 움켜잡아 손바닥을 핥아 올린다. 손금을 따라 혀를 움직이자. 라파엘이 괴로워한다. 손을 놔주자마자 손은 앞쪽으로 도망쳐버렸다. 왕은 다른 쪽 엉덩이 또한 깨물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엉덩이를 혀로 핥고 빨아들이자 라파엘이 움찔거렸다.

이미 너무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해.

그것은 왕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라파엘이 있었다. 상의는 없고, 하의는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엉덩이만 들고 엎드린 창피한 자세로 그를 기다린다. 오래도록 금욕한 왕에게는 너무나 아찔한 광경이었다. 왕은 라파엘의 엉덩이 골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천천히, 살을 가르면서 손가락을 내린다. 손가락 끝에 입구가 닿았다. 약간 축축하게 젖은 입구는 라파엘이 이 행위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입구를 꾹 누른 손가락에, 라파엘이 파드득 새처럼 떨었다가 엉덩이를 조금 뒤로 밀었다. 마치 해달라는 것처럼.

왕은 라파엘의 엉덩이를 좌우로 열었다. 그 안쪽에 보이는 곳은 그의 열락의 입구. 오랜만의 자극에 조금 벌어져 있는 곳은 유혹하듯 오물거리고 있다. 왕은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혀를 내밀어 한 번 핥아본 것만으로도, 이미 왕은 사정할 것 같았다.

“용서한다고 말해.”

왕이 속삭였다. 라파엘이 힘겹게 고개를 돌린다.

“네?”

“용서한다고 말하라고.”

라파엘은 지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기억해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왕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내부는 이미 왕의 것을 기억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안쪽의 육벽이 기대에 차 벌름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랫배에 스멀거리는 쾌감이 성기에 몰린 열과는 또 다른 것을 알리고 있다.

라파엘이 “용, 용서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왕이 라파엘의 앞쪽으로 돌아왔다. 라파엘의 앞에서, 왕은 성기를 내보였다. 아아, 이런 것이었던가. 라파엘이 신음했다. 형태라든가 색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큰 것을 자신의 안은 기다리고 있다.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쾌감이 계속 아랫배에 쌓여 엉덩이를 흔들게 된다. 지금도 라파엘은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흔들수록, 안쪽이 더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적셔줘.”

왕이 헐떡이며 요구했다. 라파엘은 거리낌 없이 왕의 것을 물었다. 하지만 왕은 그에게서 시중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라파엘도 왕의 것을 애무하는 데 서툴렀다. 왕이 몇 번 가르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뿐이기도 했다.

왕이 조교한다. 뿌리 끝까지 넣어봐. 아, 안 되겠어? 그럼, 그냥 핥는 것으로 좋아. 응, 그거야. 잘하고 있어. 침을 발라. 아, 가득, 가득. 거길 그렇게, 아, 좋아. 조교는 곧 행위로 변해버린다.

“뜨거워. 입안이 축축하고 뜨거워. 나…… 액체 나오면 말해. 내가, 뺄…… 아. 그런데, 네가 너무 뜨거워. 아, 허리를 움직일 것만 같아. 안네마리, 네가 너무…… 아.”

왕은 신음을 내거나 소리를 내는 데 솔직하다. 그는 라파엘보다 더 소리를 내는 편이었다. 라파엘은 그런 그가 좋았다. 자신이 어설프게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왕은 미칠 것 같아 하니까. 사실 왕은 다른 사람과 할 때는 거의 신음을 내지 않는데다 그 독설까지 발휘하곤 했었지만, 아마 라파엘이 그런 왕의 모습을 보게 될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라파엘은 왕의 모습에 더 왕의 것을 빨아들였다. 씁쓸한 맛이 입안에 휘돌기 시작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맛없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어디에, 할까?”

왕이 성급히 묻는다. 입에? 아니면, 네 안에? 어디가 좋아? 그러자 라파엘이 왕의 것을 입에서 뺐다. 그것만으로도 답을 안 듯, 왕은 다시 라파엘의 뒤로 돌아갔다. 아아, 빌어먹을. 왕은 라파엘의 엉덩이를 벌려서 그 입구를 확인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입구는 조금 더 열려 있었다. 자신의 것을 입에 넣고 애무하면서 이곳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하자 왕은 전율한다. 천천히 성기 끝으로 라파엘의 입구를 꾹 누르자 라파엘이 괴로워한다. 그것이 꼭 괴로움만이 아니라는 건 왕도 잘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천천히 힘을 뺐다. 왕의 것이 조금씩 밀고 들어올 것을 상상하자 안쪽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을 단숨에 꿰뚫었다.

아아앗. 라파엘이 등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면서도 왕은 제어할 수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빈다. 안이 너무 뜨거웠다. 너무 좁았다. 사납게 허리를 움직여 원하는 것을 취해도, 아마 금세 기갈에 시달리게 되겠지. 그래도 왕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곳에서, 숨이 막혀 죽어버렸으면 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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