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장 배신자의 낙인 (39/47)

제14장 배신자의 낙인

왕궁특수군. 

현재 헤수스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가장 무서운 존재. 그들은 평민이지만, 왕궁에 자유로이 출입한다. 왕명만을 받드는 존재로서, ‘몰살의 즉위 축하연’ 밤에 3백 가구 가까운 귀족 가문을 도륙하여 악명을 떨친다. 그 이후 그들은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자신의 존재를 숨긴 신출귀몰한 존재로서, 대중의 기억에는 악마 같은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수도방위군이 아닌 이 왕궁특수군이 검은 물을 찾아 수도를 헤집으며 다니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왕궁특수군에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자청해서 알려주었다. 왕궁특수군은 왕의 직속,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왕명에 의해서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검은 물은 평민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지만, 이그나치오 23세의 인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검은 물이 잘도 피했더군.”

왕이 피식 웃었다. 대장군 하타가 건너편에서 시종이 따라준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알려준 자가 있는 듯합니다.”

“그렇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제깟 것들이 어떻게 이리 빨리 도망칠 수 있냐며 왕이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밀었다. 그러자마자 시종장이 재빨리 그 찻잔을 빼고 새 찻잔을 왕의 팔 앞에 놓아주었다.

왕은 본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시종장은 이렇게 종종 왕에게 새 차를 내곤 했다. 본래라면 당연히 어떤 차인지 왕에게 설명한 뒤 시음을 권했겠지만, 왕은 이런 건 다 필요 없으니 그냥 내오라고 했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말없이 찻잎을 구할 때마다 새 차와 그 당시 왕이 제일 좋아하는 차를 동시에 준비해서 내곤 했었다.

“그러나, 상당히 고위직일 듯합니다. 이번 체포 명령은 널리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아아.”

왕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타가 날카로운 눈을 더욱 사납게 치떴다.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알아내고 있는 중이야.”

왕은 분명히 알고 있는 얼굴이어서, 하타가 불편한 듯 목소리를 굳혔다.

“알아내시는 중이라니요?”

“후보자가 있거든. 조사하고 있어.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해. 증거가 나오면 바로 족칠 테니까.”

왕은 상대가 잘못했다고 해서 무조건 족치는 인간이 아니다. 왕이 상대가 잘못했다고 무조건 족친다는 건 상대가 무능하든가, 상대에게서 단물이 다 빠졌다고 여길 때였다. 하타는 문득 어느 쪽인지 궁금해졌지만 점잖은 대장군답게 묻지 않았다.

젊은 왕은 그의 건너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왕을 일견 부드럽게 보이도록 하지만, 그는 사나운데다 독랄했다. 게다가 다혈질인 척하면서도, 모든 행보를 계산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에게 속고 휘둘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타는 군대 또한 그렇게 될까 봐 대단히 긴장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군인인 자신이 이 산전수전 다 겪은 왕과 정치를 논할 수는 없을 테니. 왕이 전쟁을 그와 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왕은 군대만은 귀족들을 휘두르듯 하지 않았다. 신전처럼 완전히 깔아뭉개지도 않았다. 왕은 군대를 존중했다. 물론, 왕은 절대 권력자였고, 자신을 거스르는 집단을 용서하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한 번 그를 거스르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하타가 손을 보기도 전에 왕은 먼저 찾아내서 전부 다 죽였다. 상관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직접 목을 쳤다. ‘내가 놓아주고 있지만 주인은 나다’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왕은 군대에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었다.

“수도방위군 대장을 대기시켜놓겠습니다.”

“그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검은 물과 결탁한 자는 군대에 몸을 담은 자입니까?”

하타의 결의에 찬 질문에 왕은 나른히 웃으며 말이 없었다. 하타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럴 만한 부하가 누가 있을까. 최고위직 군인들은 그가 알고 있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그가 다 알 수 없다. 아무래도 한정된 인물만 떠오르는 것이 한스럽다. 하타가 고민하는 것을, 왕은 짓궂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하타가 진지하게 청했다.

“군인이라면 부디 제 손으로 끝내게 해주십시오.”

말없는 왕에게, 노장군이 한 번 더 청한다.

“저는 군대를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저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그에게 알려주고 그 죄를 갚게 할 자는 저입니다. 그 이후, 전하께오서는 신(臣)에게 죄를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거운 추가 물에 가라앉는 듯한 그 분위기는 노장군 특유의 것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명예, 그리고 국가를 위해 살아온 인물이었다. 간사한 귀족들은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할, 그리고 유능하지만 국가에 애정은 없는 왕도 가지지 못한, 얼음처럼 깨끗하고 차가운 결벽이 있었다.

왕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끔 이 노장군을 놀리는 게 재밌었다. 그는 늘 이렇게 당하면서도, 또 이렇게 반응해버린다. 아무래도 예전에 부하를 잃었던 것이 큰 충격과 상처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꽤 괜찮은 사람이지.’

왕은 웃음을 멈추며 생각했다. 군대에서 반란의 기미가 보였을 때 왕은 재빨리 제압했다. 그리고 노장군의 앞에서 그가 가장 아끼던 장군을 베었다. 식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 끝을 하타의 목에 들이대고 왕은 경고했었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네가 먼저 죽으리라.

그리고 하타는 그것을 기억하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왕에게 죽어도 좋으니 자신의 부하는 자신이 죽이게 해달라고. 왕에게 죽는 자신보다, 자신에게 죽는 부하가 더 명예롭게 죽는 것임을 알면서도.

“아닙니까?”

“아니야. 자네와는 거리가 좀 있는 자지.”

왕의 말에 하타가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냐는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원망과 억울함을 보면서도 왕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왕은 부드러운 어조로 지나가듯이 말했다.

“하지만 수도방위군이 해먹는 짓거리들을 그만두지 않으면, 자네는 정말 부하의 목을 쳐야 할지도 모르지. 아, 어쩌면 내가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살려만’ 둘지도 모르겠군.”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하타가 눈살을 찌푸리자 왕이 쿠키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이런 친절한 경고는 놀려먹은 값으로 해주는 거야. 수도방위군 대장에게 전해. 요즘 내가 사랑스러운 왕비에게 정신이 나가 있어서 넘어가고 있지만, 왕비와 가끔 안 좋을 때마다 그 분풀이를 어딘가에 하고 싶어진다고. 이번에 검은 물이 당하는 걸 보고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금값만은 못하지만 똥값보단 비싼 목숨 살리긴 해야지, 안 그래?

왕이 빈정거렸다. 하타가 뜨거운 차를 재빨리 마시고는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 빈정거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리고 말로 이길 수도 없다. 이럴 때는 나가는 게 최고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타가 나가고 들어온 사람은 스완이었다.

스완은 요즘 굉장히 바쁜데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 한량 같은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별일 없는데도 반란이라도 일어난 것마냥 심각한 하타와 무슨 일이 있든 한가로운 스완은 참 흥미로운 대비가 되곤 했다. 둘은 너무나 달라서 사이가 안 좋을 법도 했는데, 사이가 좋은 정도는 아니어도 서로에게 호감은 가진 듯했다. 타인에게 배려가 깊은 하타와 타인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스완이 잘 맞은 결과이리라.

“하타 대장군이 나가던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신 겁니까?”

스완이 하타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나갔다.

“버시슬 백작은 정말 가지가지 하는 작자였습니다. 생각보다 유능해서, 증거를 잡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유능한 자긴 하지만…….”

왕이 잠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까지 유능한 자였던가?”

그가 건설대신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능함보다는 그의 가문 덕이 컸다. 왕은 자신의 측근 외에는 대충 유능해 보이는 인물 중에서 아무나 골라 대신직을 맡겼고 그의 실책이 발견되면 재빨리 해임했다. 그런 지나가는 인사 중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제 치부를 가리는 데는 유능했던 건가?”

의아한 듯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왕의 말에 스완이 문서를 내밀며 대답했다.

“버시슬 백작은 전하가 아시는 그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검은 물의 길드 마스터는 몹시 유능한 자더군요. 버시슬 백작과 자신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도록 상당히 잘 가려두었습니다. 백작은 평민들의 가면무도회에서 난잡한 쾌락을 즐기는 취미가 있는데 그때 접선하는 듯합니다. 백작이 다니는 가면무도회의 살롱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유능한 자라.

분명 피도 눈물도 있는 자겠지. 사람들은 왕에게 냉혈하다고 말하지만 왕은 피도 눈물도 존재한다. 아픔도 괴로움도 알고, 행복을 바라는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그 길드 마스터도 분명히 보통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평소라면 왕이 꽤 좋아했을 인간이었다. 유능한데다 약점을 감추면서 자립해 먼 곳을 바라보는 인간. 하지만 그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인간을 건드렸다.

“곧 버시슬과 검은 물은 접촉이 있을 테지. 덤불을 들쑤셔놓으면 뭔가는 튀어나오기 마련.”

왕이 그렇게 말하고 잠시 탁자를 노려보았다. 라파엘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그 요령 없고 순진무구한 연인을 떠올릴수록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는, 고귀한 피를 가지고도 어두운 목장에서 돼지처럼 사육당했다. 그리고 표정도, 감정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전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쇼어 공작부인이…….”

그 순간, 왕이 쾅 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일에 스완이 뒤로 물러나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고를 하던 와중이었는데, 갑자기 왕이 탁자를 내려친 것이다. 찻잔이 넘어지고 찻물이 쏟아졌다. 시종들이 분주히 주변을 정리하고 왕의 소매를 닦았다.

“막내아들을 돌려받고 싶어하니 주의를 하는 게 좋겠다고? 죽을 목숨을 한 번 살려두면 이렇게 뒤끝이 더럽단 말이지. 누굴 돌려받아? 그 아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그 여잔 아느냐? 고작 쌍둥이가 어쩌고 하면서 버린 아이가 어떻게 컸는지, 그녀가 짐작이나 하느냐? 나조차 상상도 못 한 것들을 그녀가 알 수 있느냐? 돌려받고 싶다? 그 여왕 같은 얼굴에 대고 말해주는 것도 좋겠지. 네가 버린 아이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 그 아이는 죽음에서 가까스로 돌아왔어! 차라리,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도와주는 일이지!”

왕의 고함에 스완이 입을 다물었다. 왕이 하도 왕비의 애정을 불안해하기에 왕비는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감정 표현이 서툴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이라고 말하기 위해 길드 살수의 육성법에 대해 알려주었을 뿐인데……. 왕의 진노는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예 왕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좋아서, 너무 사랑해서,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완벽해서―그래서 그는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폭발하고 있다.

“죄책감도 좀 있을 테고요.”

“죄책감? 당연히 있어야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내 순진무구한 비를 꼬드겨 궁으로 들여보내다니, 그게 제정신을 가진 어미라면 할 짓이냐? 딸이 애틋하긴 하지만 그 저주는 무섭더냐? 그래서 마리 트리지아의 시체를 수습하지도 못한 채, 제가 버린 아들에게 그걸 부탁했단 말이냐? 그리고 마음 약한 아들에게 울면서 호소라도 한 거냐? 딸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라고 발치에 매달리기라도 한 건가? 자신이 버리지 않은 아이의 명예를 되찾아달라고, 자신이 버린 아이에게 애원한 건가? 죄책감? 이게 죄책감이라는 알량하고 편리한 단어로 칭할 수나 있을 일이냐!”

왕이 고함을 질렀다.

토끼니 사슴이니……. 그렇게 부르던 안네마리의 그 서툰 표정 하나하나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헤죽 하는 웃음을 생각하자 왕은 가슴이 메어질 것 같았다. 남들은 이러면 슬프다는데 왕은 이럴 때마다 ‘다 죽여버리겠어!’라고 이를 갈았다. 어떻게 그토록 잔인하단 말인가. 사람은 고사하고 개라고 불러도 개한테 죄책감을 가져야 할 것들 같으니!

“전하.”

“용서하지 않겠다.”

왕이 단호히 말했다. 관련자를 전부 잡아들여라.

스완이 왕을 바라보다 한숨을 억누르며 물었다.

“공작부인도 말입니까?”

왕은 잠시 스완을 바라보았다.

스완은 그의 이부동생이었다. 스완이 왜 왕을 선택했는지, 왕은 잘 알지 못한다. 스완은 왕을 미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완은 왕을 선택했고, 그들은 서로 무능력자를 가장한 채 조심스럽게 미래를 설계했다. 스완은 왕에게 있어 동생이기 전에, 신하이기 전에 동지였다. 위험하고 지루한 세월을 둘이서 같이 넘겼었다.

“이번만은 제외한다.”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없어.”

왕이 가슴 앞에다 팔짱을 꼈다. 안네마리의 친모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쇼어 공작부인을 죽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그녀를 죽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안네마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안네마리가 공작부인에게 애정을 보이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왕궁까지는 들어오는 데는 친모의 역할이 꽤 컸으리라. 그러니, 안네마리는 그가 공작부인을 죽이는 게 싫을지도 모른다.

이번은 안네마리를 위해서, 그리고 스완을 위해서 그는 참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에도 참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왕이 자리를 옮기자 스완이 따라 들어왔다. 집무실에서 신하들과 만날 때 왕은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을 쓰는 편이었지만, 스완은 종종 같이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시종들이 치우는 사이 집무실에 들어온 둘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왕이었다.

“자작은 결국 입을 열지 않았나?”

왕의 말에 스완이 “예, 안타깝게도 자백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자백‘은’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건대, 다른 것이 더 있다는 뜻이라 왕은 시종장이 따라준 포도주를 마시며 눈짓으로 더 말해보라 명했다.

“자작은 죽었습니다만, 자작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습니다. 자작은 보기 드물게도 아내와 몹시 사이가 좋은 부부였다는데, 그 아내는 오래전에 죽고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딸은 최근에 시집을 갔습니다. ……노트코로요.”

“과연.”

왕이 이번에야말로 이를 드러냈다.

노트코. 티스를 가짐으로써 주 바다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그 나라에서 그와 헤수스를 뒤흔들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노트코는 소식이 늦게 전해지는 나라인 듯하다. 헤수스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암살 정도로 헤수스가 뒤흔들릴 나라가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았을 텐데. 왕이 연회 중 칼을 맞아도 흥미진진하게 쳐다만 보는 나라라는 걸 모르다니.

“자작은 분명 그 연회에 초대받을 인물이 아니었지.”

왕이 시종장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궁정대신이 준 목록과 비교해보았습니다. 목록에는 분명 없었고, 발송 목록에도 없었습니다.”

“다른 존귀한 분께서 초대해주신 거겠지.”

왕이 빈정거렸다.

“그렇겠지요.”

스완이 웃었다. 존귀한 분은 단 한 사람을 지칭하지만, 그는 그 이름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왕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매국 행위라…….”

“이번에야말로 묵은 원한을 청산하겠군요.”

왕은 갑자기 라파엘을 떠올렸다. 그와 태후는 서로 주고받았다. 그는 유년 시절에 태후에 의해 비참함을 알게 되었고, 지금 태후는 그에 의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왕은 태후궁의 예산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었다. 태후가 여름 무도회에 감기로 불참한 것은 아마 요즘 풍조에 어울리는 치장을 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조 보석을 온몸에 뿌려놓는 것 따위, 현재의 태후궁에서 가능할 리 없다.

왕은 피식거렸다. 그 도도한 여자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을지 손에 잡힐 듯했다. 그 고귀한 몸을 육군 대장 따위에게 굴려가며 자신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여자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와 그는 기름과 물이며,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귀족의 수장 가문이었던 쇼어 가문의 여인과 왕족인 이그나치오 가문의 그. 전통을 지키려는 그녀와 개혁을 거듭함으로써 늘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 독실한 신자인 그녀와 신전을 짓밟음으로써 권력을 저울질하는 그는 도저히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선왕의 인장도 이제 한 번뿐.’

선왕의 인장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는 만능이 아니다. 그녀가 살려달라 해도, 유배는 피할 수 없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만 일단 일이 벌어지면 분명히.”

스완이 말을 잇지 않고 끊었다. 그는 모든 것에 주의하고 있었다. 태후는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지만, 그러나 호랑이다. 그리고 아직 발톱은 성했다.

왕이 잠시 몸을 뒤로 기대었다.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뿐만 아니라 스완의 안색도 어두웠다. 둘은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괴로웠던 일부터 미쳐 죽었던 어머니까지.

그들이 태후를 처리해도 이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과거야말로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그 원동력이 없이도,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혼자 걸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원한을 잊는 것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피눈물을 흘렸던 과거의 자신에게 누군가가 잊으라고 했다면, 그게 미래의 자신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용서하지 못했을 테니까.

왕이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그의 안색은 조금 밝아졌다.

“수색대가 노트코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스완이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상히 대답했다.

“앞으로 일주일입니다.”

“총 인원이 얼마나 되느냐?”

“2천 명입니다.”

“그중 수색대는?”

“반입니다.”

첩자가 나머지 반이라는 거군.

왕은 첩자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첩자는 은밀하게 활동하는 자들이다. 천 명이라니, 너무 많지 않을까? 왕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노트코와는 전쟁 돌입 직전이다. 노트코는 티스를 압박하고, 당연히 헤수스는 자국 영토인 티스를 보호하기 위해(솔직히 티스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주 바다 경계선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노트코는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티스를 압박하지 않는 척하고 있지만, 그래도 곧 한계가 닥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비의 총은 어디에 있지?”

“……아마, 근위대에서 보관 중인 것으로 압니다. 특수군 개인의 무기 외에는 근위대에서 보관하기로 되어 있어서요.”

“그 총을 상용화하는 게 가능할까?”

스완이 켁 소리를 냈다.

“불가능합니다.”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안 되겠어?”

“그 총의 대단한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 총은 정말로 신력이 없는 자가 사용할 수 있는 총입니다. 문제는 총알이 앞으로 나가면 다행인데 뒤로 나갈 때도 있고, 그 확률이 거의 반반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스완의 말에 왕이 저런 하고 혀를 찼다. 라파엘은 왕을 위해 그 총을 만들었는데 정작 왕의 전쟁에서 이 총을 쓸 수 없다니. 왕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그때 스완이 말했다.

“하지만 조금 더 안정적인 무기가 된다면 대단해지겠지요. 엄청난 군력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전쟁신 쿠치아노의 가호를.”

스완이 가슴 앞에서 쿠치아노의 문장을 그렸다. 왕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총을 개조한 건 그 본인의 능력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쿠치아노의 숙주이기 때문에 가능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라파엘이 그토록 대단한 무력의 소유자인 것은 아마 쿠치아노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라파엘의 외모는 쿠치아노와 판박이이며, 라파엘의 태도에서 가끔 쿠치아노가 엿보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왕은, 그리고 티오안은 다시 생각해본다. 그 자신은 누구인가?

―답은 쉽게 나왔다. 그는 아이브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23세, 헤수스의 왕이다. 그리고 그는 먼 옛날 티오안이라 불렸던 신이다. 그들은 융화했고,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자는 새로운 자이다. 과거와 그보다 더 고대의 과거를 가진 자. 두 개의 과거를 가진 두 명의 자아를 뒤섞은 새로운 인간.

‘쿠치아노도 이럴 수 있을까.’

왕은 잠시 생각해본다. 아니, 무리였다. 왕은 티오안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신성함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티오안을 자각한 것은 주신 율레즈의 용서 아래 가능했던 것으로, 그들은 완전히 같은 인물이었다.

둘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고 다른 성장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같은 인물이었다. 티오안은 신격을 잃고 인간이 되었고, 그것이 아이브리 잉그램 이그나치오라는 인물이니까.

그러나 쿠치아노는 신격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전능한 신이다. 라파엘은 신을 담아둔 그릇일 뿐이다. 신을 완전히 깨워내려면, 때때로 그 연약한 그릇은 깨지고야 만다.

‘아니, 깨지지 않을 것이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쿠치아노가 바라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 같은 인간 나부랭이가 아니지.’

한숨만 쉴 뿐 아무 말이 없는 고귀한 전쟁신이 원하는 것은 왕이 아니다. 그것은 티오안이다. 그리고 왕은 티오안이지만, 티오안‘만’은 될 수 없다. 그러니 쿠치아노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하?”

스완이 왕을 불렀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왕을 보고서 당혹한 듯했다. 왕이 스완을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봐라. 노트코를 경계하되, 검은 물을 잡아들여라.”

왕의 말에 스완이 무릎을 꿇었다. 왕은 싸늘한 눈으로 스완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이 되기 전, 하늘의 존재조차 몰랐을 자신의 비를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린다. 왕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놈들 중 한 명도 자유로이 하늘 밑을 걷도록 허락하지 않겠다.”

왕의 말에 스완이 “명을 받듭니다”라고 대답했다. 시종장을 비롯한 시종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창 밖의 하늘은 푸르렀다. 그곳에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매가 하늘을 날았다. 라파엘은 창가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가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일정하게 오른쪽으로 두 번 돌고 왼쪽으로 세 번 돌았다.

매가 조금씩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며, 그는 의아해졌다. 아무래도 그 새는 보통의 새가 아니었다. 매가 일정한 방향으로 돌면서 조금씩 내려오는 광경은 몹시 낯설었다. 마치 고양이가 꼬리를 흔들며 짖는 듯한 어색함.

라파엘은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반 이상 내밀면서 새에게 집중했다. 어느 순간 새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새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낯설고 기묘한 경험인데 한편으로는 몹시 익숙했다. 어디선가 이렇게 새와 눈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그런 일이 있었지?

“비전하, 포 대장이 알현을 청합니다.”

시녀장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몹시 정중하게 라파엘의 팔을 부축하듯 잡아선 안쪽으로 이끌었다. 왕비의 호위조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인 시녀장은 혹시 라파엘이 창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마리 트리지아가 추락사했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라파엘은 시녀장에게 순순히 끌려 들어오면서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포 대장?”

“네. 돌려보낼까요?”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용건이 있다면 만나는 정도는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알현실로 움직이자 시녀들이 같이 움직였다.

멀리서 같이 알현실로 다가오던 스완이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대외적으로는 와병을, 내부적으로는 근신을 표방하고 있는 왕비는 최근 남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잠행복.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린 왕비는 평소의 멍한 느낌은 어디에도 없었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게 맞는 말이라고 스완은 생각했다.

같이 알현실에 들어서서 라파엘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왕후궁의 모든 가구는 아름답고 화려한 취향으로 꾸며져 있었다. 지금 라파엘이 앉은 의자조차 그랬다. 살구색 가죽에 왕비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동그란 의자. 등을 기대면 약간 깊게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의자에는 의자보다 약간 짙은 살구색의 쿠션이 놓여 있었다.

모든 실내장식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더해지거나 빠지는 것이 없도록. 거기에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 그리고 검은 옷까지.

“비전하께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스완이 딱딱한 어조로 서두를 열었다.

“길드 마스터의 은신처를 알려주십시오.”

스완은 그렇게 말하며 왕비의 표정을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왕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거절도, 승낙도 없이 바라보는 그에게 스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궁특수군이 검은 물을 쫓고 있습니다. 많은 관련자를 잡아들였으나, 아직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몇 명은 잡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완은 내심 초조함을 느꼈다. 왕비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왕은 그를 위해 검은 물을 쫓고 있다. 왕이 상대할 만한 자들이 아닌데도 전력을 다해 그들을 상대하고 있다. 그것은 이 남자를 위해서다. 외교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가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오로지 이 남자를 위해서였다. 이 행동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차가운 얼굴로 스완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디 있는진 알 수 없어.”

아마 아무도 알 수 없겠지.

라파엘의 말에 스완이 “그렇다면 아시는 대로라도 다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딱딱하게 요청했다. 라파엘은 그런 스완을 바라보다 앵무새처럼 따라 말했다. 

“다?”

“네, 다. 전부 부탁드립니다.”

전부라니. 라파엘은 잠시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가 아는 것은 몹시 많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라파엘은 혀를 찼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은 그들이 왕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일개 길드 주제에 국왕에게 빚을 졌다면…… 그것은 그들로서도 각오한 일이겠지.

라파엘은 스완에게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하고 앞장섰다.

스완은 라파엘의 뒤에서 이 기묘한 행렬에 혀를 찼다. 검고 싸늘한, 죽음의 사신 같은 남자. 그리고 그를 호위하듯 따르는 시녀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이상하게 어울렸다. 의아한 일이었다.

라파엘이 도착한 곳은 왕후궁의 서재였다. 스완은 예전 마리 트리지아 생전에 이 서재에 왔었던 것을 떠올렸다. ‘서재는 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말이 맞는다면, 마리 트리지아는 정말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녀의 서재는 생동감으로 넘쳐흐르면서도 안정되어 있었고, 화려하면서도 따뜻했다.

윽, 문이 열리는 순간 스완은 눈을 돌릴 뻔했다. 그 아름답던 서재가 창고로 변해 있었다.

“이게 무슨…….”

너무 기가 막혀 입을 열었는데, 왕비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선,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행거에 걸려 있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한 장 꺼냈다. 스완은 서재에 들어오면서 혀를 내둘렀다. 환한 빛은 그대로인데, 그 빛만 그대로인 것 같았다. 카펫에는 새하얗게 먼지가 앉아 있고, 나사와 총탄 따위가 그 위를 굴러다녔다. 왕후가 소파 등을 두었던 중심부엔 이미 그런 사랑스러운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커다란 책상뿐이었는데, 그 위에도 먼지가 자욱했다. 왕비는 맨팔로 책상 위에서 굴러다니던 여러 가지 것들을 스윽 쓸었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을, 스완은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이곳만은 저희도 출입을 허락받지 못했는지라.”

예상하고 있었다. 왕비의 시녀들이 여기를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다. 이렇게 방치하는 게 아니라 왕비가 여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명하겠지. 스완은 한쪽의 종이 무덤과 총 무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녀들이 잉크 그릇을 가져와 펜과 함께 내밀자, 라파엘은 곧 펜을 들고 잉크를 찍었다.

라파엘은 장정 셋은 누울 수 있을 듯한 종이 중간에 관계도부터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는 걸 다 적으라고 말해도…….”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고 뭔가를 가늠해보는 듯했다. 이윽고 관계도 그리기를 끝내고 글을 적어나가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야.”

“달라지지 않았을 것들은 뭡니까?”

라파엘은 관계도의 가장 윗부분에 쓰여 있는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길드 마스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태도에 스완이 혀를 찼다. 그사이 라파엘은 계속 써나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완은 왕비가 쓰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율레즈여. 스완은 나오려는 침음성을 억눌렀다. 왕비가 그리고 있는 것은 지도였다. 수도와 그 근교의 지도. 어쩐지. 스완은 당황한 눈으로 종이를 훑어보았다. 어쩐지! 이렇게 큰 종이가 왜 필요하나 했더니!

이렇게 자세한 지도는 헤수스에서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일개 살수가 자세한 수도 지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엉성하고 어설프며 지적(地積)도 엉망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 훌륭한 지도였다. 그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복잡한 수도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기에 그 인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큰길부터 샛길까지, 강과 하천과 수로의 진입로까지, 모든 것이 갖춰진다. 이것이 살수인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왕비는 수도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고작 ‘검은 물’의 세력을 알리기 위해서만 쓰이고 있는 지도지만, 왕비가 정말 마음을 먹고 지도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전하께서는 반기시려나. 워낙 유능한 자를 좋아하시는 분이니.’

환하던 창 밖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계속 그려나갔다. 길거리 창녀들, 마약업자들, 노예 상인들, 살롱, 술집, 여관들……. 검은 물의 사업부터 그들을 지지하는 귀족들. 검은 물과 연합한 길드와 대립한 길드. 그런 것들을 지도 위에 자세하게 적어나갔다. 이윽고 그가 허리를 펴고 펜을 놓았을 때는 수도의 지도 하나가 완성되었다.

라파엘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빠뜨린 것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스완은 지도를 한 번 더 훑었다. 경계표도 참 잘 잡았다. 동상이나 호수, 공원이나 병원 등을 보면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무서울 지경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왜 세계 지도를 못 외우는 거야?’

이런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데. 참 특이한 머리 구조일세. 스완이 의아해하면서 라파엘에게 물었다.

“비전하, 길드 살수는 모두가 이런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겁니까?”

라파엘이 스완에게 시선을 줬다. 이미 왕비가 된 자에게 길드 살수 운운한 게 조금 걸려서 스완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 부하들 중에도 길드 살수 출신이 제법 되는데, 이런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인물은 보지 못했거든요.”

“길드 살수?”

라파엘이 되물었다.

“예, 비전하. 특수군은 대부분이 평민으로 용병 출신이기 때문에…….”

“난 한 번도 길드 살수 출신은 보지 못했는데.”

라파엘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 말에 스완이 무슨 말씀이냐며 그레이드를 지적했다.

“비전하를 호위하는 그레이드도 길드 살수 출신입니다만.”

“그레이드는 길드 살수 출신이 아니야.”

라파엘이 단언했다. 스완이 어이없어하며 왕비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왕비는 그레이드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스완은 그레이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라파엘이 이렇게 단언하는가.

“길드 살수 출신입니다.”

“아니야.”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길드 살수들을 많이 봤었다. 그들은 이질적인 인간들이다. 이질적이지 않고선 생존할 수 없다. 원한다면 그들은 인파 속에 완전히 묻힐 수 있다. 그들이 외팔이든, 외눈이든, 키가 너무 크든, 얼굴이 뭉개져 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인파에 자신을 녹여내는 데 특출한 기술을 가진 자들이니까.

하지만 그들과 독대한다면 그들의 이질적인 부분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에 한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자들. 죽음과 등을 맞대고 있는 자들. 인간이라고 하기엔 이미 괴물에 가까워진 자들. 그런 자들이 길드 살수들이다.

아마 스완이 말하는 ‘길드 살수’는 다른 길드 소속 용병들을 말하는 것일 테지. 살인을 겸한 용병과 길드 살수는 엄연히 다르다. 아마 그레이드도 길드 용병일 것이다. 그 대범하고 신속한 기술, 뛰어난 유연함 등이 그의 소속을 말해준다.

‘달의 가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라파엘은 오랜만에 길드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그레이드가 길드 살수가 아니면 뭡니까?”

스완이 울컥해서 묻자 라파엘이 “길드 용병”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길드에서 키우면 다 길드 살수가 아니던가? 길드 용병이라는 말이 있던가?

실제로 그런 말은 없었다. 검은 물을 비롯한 유명 길드에서 길드 살수를 키워 유명세를 떨치자 다른 길드에서도 용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 같이 ‘길드 살수’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 실력에는 차이가 있었다. 대신에 길드 용병은 더 인간적이고, 그 숫자도 많았다. 길드 살수처럼 소수이지도, 비인간적이지도 않았다. 

“길드 살수와 용병의 차이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스완의 질문에 라파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늘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혀는 굳은 듯하고, 단어는 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길드 살수는…… 군인이 될 수 없어. 인육을 먹거나, 고문광이거나, 창녀를 엄마로 삼았다가 죽이길 반복하거나…… 군인이 될 수 없어.”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단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식인, 고문광, 이상 성애, 이런 놈들이 단체 생활을 하기란 어렵다. 스완의 질문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의 대답에 스완은 얼굴을 구겼다. 길드 살수란 완전히 미친놈들뿐이구나. 스완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비전하는 어느 쪽이십니까?”

입에 담고 나서 스완은 난처해졌다. 여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대단히 무례한 질문이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왕비 전하에겐 말할 것도 없고, 한 인간으로서도 묻지 말아야 할 영역이다. 스완이 질문을 어떻게 취소할까 하던 차에 라파엘이 대답했다.

“난 기계잖아.”

잠시 스완은 말을 잃었다. 그런데 왕비는 그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하게도 덧붙여주었다.

“인육을 먹든 고문을 하든…… 그런 건 인간의 영역이니까.”

순간 스완은 욕설을 지껄일 뻔했다. 왕이 학대라면서 펄펄 뛰었을 때, 학대라는 부분에는 동감했지만 왕의 처리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바쁜 와중에 길드 하나를 박살 내겠다고? 왕의 마음도 몰라줄 이 둔한 사람을 위해서?

게다가, 왕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왕비의 이런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왕비의 지난 과거는 보상받지 못한다. 왕답지 않은 쓸데없는 짓이다. 스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스완도 왕의 마음을 이해했다.

라파엘은 스완이 가만히 바닥을 노려보는 사이 책상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왔다. 그리고 손끝을 그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자 시녀들이 “비전하!”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려 했다. 그는 다른 손을 들어 시녀들을 막았다.

“비전하!”

스완도 놀라서 고함을 쳤지만 라파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그 손가락으로 지도의 귀퉁이에 뭔가를 적었다. 라파엘 에반스. 그것은 사인이었다.

“이게…… 뭡니까?”

스완이 당황해서 물었다. 이 사인이 뭔지 묻는 건지, 아니면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고 묻는 건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배신자의 낙인.”

이게 또 무슨 고양이가 왕왕 짖는 소리입니까. 스완이 짜증이 폭발하려는 걸 겨우 참아내고 “무슨 낙인이라고 하셨습니까?”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뭐라고요?’라는 식의 질문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라파엘은 또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 지도가 유출되면 유출자를 찾으려고 할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하는 거야.”

“살수들은 이상하군요. 그렇게 매너가 좋으면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매너는 왜 배우지 못한 겁니까?”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슬슬 독설이 튀어나오려 한다.

“살수는 사람을 잘 죽여야 하는데.”

라파엘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지려 한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도 매너인가. 살수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스완은 재빨리 “그래서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잡아 죽이라고 저 사인을 한다는 겁니까?!”라고 캐물었다. 이렇게 묻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이 “아아” 하고 신음했다.

“아니. 다른 사람이 애꿎은 복수를 당하고, 또 그렇게 되고, 그래서 혼란스러워지면……. 그래서 나중에 범인이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이 쫓아오게 되잖아. 그럼 절대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냥 적을 하나로 만들려는 것일 뿐이야.”

“개소리처럼 들리는데요.”

결국 스완은 한마디 하고 말았다.

“다들 원한을 많이 샀으니까, 그냥.”

라파엘의 말에 스완이 코웃음을 쳤다. 왕비는 왕비로 궁에 머물 텐데, 어느 놈이 감히 라파엘 에반스가 안네마리 제1왕비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무리 저런 업계 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면 되었을 것을, 고지식하기는.

그때 라파엘이 걷었던 소매를 내리며 덧붙였다.

“내가 죽이지도 않은 인간한테 원한을 사는 건 싫으니까.”

스완은 왕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창백한 옆모습. 인간다움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 살기를 담은 시선까지, 검은 잠행복을 입은 왕비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일 때는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인간답기도 했었는데. 눈앞에 있는 자는 건조한 살수일 뿐이다. 하지만, 방금 스완은 ‘라파엘 에반스’의 인간다움을 본 것 같았다.

가을의 왕궁은 몹시 화려하다.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이 티파티를 여는 듯이 화려하고 웅장하다. 하지만 헤수스에서 가을은 봄만큼이나 짧다. 길고 혹독한 겨울의 관문밖에 되지 않는 가을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라파엘이 스완에게 넘긴 그 지도는 검은 물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왕궁특수군은 라파엘이 알려준 모든 곳을 덮쳤고, 줄줄이 죄인들이 잡혀서 왕궁으로 압송되었다.

“일어났느냐?”

라파엘이 일어나자마자 본 얼굴은 왕의 얼굴이었다. 왕은 벌써 의복을 입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전하. 라파엘이 대답하며 일어나자마자 왕은 시종에게 가운을 받아 그에게 걸쳐주었다. 라파엘이 의아한 듯 올려다보자 그가 말했다.

“새벽에 첫서리가 내렸단다.”

알고 있었다. 갑자기 첫서리가 내리는 바람에 호위들이 잠시 당황했기 때문이다. 안정되었던 기가 깨지고, 라파엘은 벌떡 일어났다.

서리에 침착하게 반응했던 것은 왕비의 호위조 쪽이었다. 전직 살수인 윗사람을 모시다 보니 아무래도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왕비의 호위조는 서리를 맞거나 말거나 전혀 기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호위조는 당황해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위해 예비조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예비조를 부르기 위해 한 명을 호위조에서 빼자마자, 왕비가 벌떡 일어나 어둠 속에서 침대 맡에 있던 검을 낚아채 잡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솔직히 호위로서는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예, 전하.”

“마침 어제 겨울딸기가 도착했지. 먹기에 운치가 괜찮겠어.”

왕이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고작 싱긋 웃는 것만으로도 빛이 날 지경이었다. 라파엘이 그의 얼굴을 보고 멍하니 홀려 있는 걸 보고, 왕은 그 뺨에 키스하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겨울딸기는 귀한 과일이다. 그리고 그 과일은 한겨울에 나는 것으로, 가을인 지금 먹을 과일이 아니다. 하지만 북대륙 헤수스의 북쪽 끝에선 잘 익은 겨울딸기가 나고, 그 겨울딸기를 왕궁이 아니면 어디서 먹을 수 있겠는가.

안네마리는 상당히 입이 짧고 먹는 음식도 상당히 가린다. 왕이 주는 것이라면 뭐든 입에 넣지만,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왕은 일부러 겨울딸기를 구했다. 라파엘이 그나마 좋아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라파엘은 먹는 데 운치를 왜 따지냐는 얼굴을 했지만 곧 “예, 전하”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왕은 요즘 대단히 바빴고, 라파엘은 거의 그를 볼 틈이 없었다. 기껏해야 같은 침대에서 잘 뿐이다. 하지만 이 침대는 너무나 큰데다 왕은 늦은 밤에나 들어오기 때문에 실제로 그와 만날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근 늘 그랬듯이, 라파엘은 왕의 침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라파엘이 왕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왕이 그를 붙들었다.

“어디 가는 거냐?”

“궁으로 돌아갑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왕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어서, 라파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이 그런 그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같이 먹자는 뜻이야.”

아아. 마치 심오한 이야기를 들은 듯 라파엘이 신음하자 왕이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너한테 뭘 먹여야 눈치라는 게 생기겠느냐? 눈치는 어젯밤 내린 서리에 파묻었느냐?”

아무리 토끼라지만 이건 심하지 않느냐고, 왕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라파엘이 어깨를 움츠렸다. 뭔진 모르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또 잘못한 것 같았다.

왕은 라파엘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은 눈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에게 홀린 듯한 시선을 바라보며 왕이 흐뭇하게 웃으려는 순간, 그가 잡은 라파엘의 뺨 안쪽에서 뭔가가 스쳤다. 그것은 분명 새빨간 혀일 것이다. 그 순간 왕은 불에 덴 듯 놀라 라파엘을 놓아주었다.

“전하?”

라파엘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잠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안네마리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시종장이 ‘참 새삼스럽고 전하답지 못하며 몹시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했던 짓이었다. 물론 그도 포기하고 싶었다. 아니, 점점 포기하고 싶어졌다.

잠자는 안네마리를 보는 순간, 그 눈동자가 잠깐 뜨이고 자신을 확인한 뒤 다시 스르르 감기는 순간, 달빛을 반사하는 하얀 피부를 보는 순간, 얇은 잠옷 너머 느껴지는 육체의 생생함을 느끼는 순간. 그 순간순간이 고비였다. 맙소사.

하지만 안네마리를 안으려 하는 순간, 안네마리는 자신을 결박하고 안으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안네마리는 그 행위가 뭘 말하는지 모른다. 그 행위의 이름은 교접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알려주지 않으면, 안네마리는 영원히 그 행위의 이름이 교접이 아니라는 걸, ‘강간’이라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전하?”

손끝이 조금 닿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흐른다.

안네마리의 과거를 알고 분노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그럴 리가. 그는 그렇게 분노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안네마리에게 가한 학대에 분노한 것이다. 다른 인간이 당했더라면 신경도 쓰이지 않았을 게 분명했지만 그는 다른 인간이 아니라 안네마리였다. 안네마리의 과거에 분노하고, 그 과거를 굳이 끄집어내서 복수하려 할 정도로 노여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하루하루를 쾌감과 전율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안네마리는 그에게 있어 사랑스러운 연인이면서도 몹시 멀었다. 그는 토끼보다 더 깜찍한 연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무시무시한 살인자였다. 전자는 그가 너무나 잘 아는 영혼의 짝이었고, 후자는 그가 소문으로나 듣던 타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드디어 그 둘이 같은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거지. 금욕생활이 너무 길다는 것.’

조금만 있으면 시선만 받아도 서겠다며 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쟤는 왜 순진한 게 관능적이기까지 한 거야, 사람 괴롭게. 왕은 혀를 차면서 라파엘에게 고갯짓을 했다.

“가자, 아침 먹으러.”

라파엘은 왕의 곁에서 같이 움직였다. 의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왕에 비해 가운밖에 입지 않은 왕비라니 대단히 궁정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왕비의 존재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인지 따르는 자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식당은 몹시 화려했지만 장소가 아주 넓지는 않았다. 왕과 왕비 두 사람만을 위한 식당이기 때문이었다. 왕이 먼저 자리에 앉자 왕비가 건너편에 앉았다. 그 순간, 왕이 왕비의 의자를 잡아선 자신의 옆으로 당겼다. 그 또한 일상적인 일이라 모두 그러려니 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제 내가 읽어준 동화 생각나느냐?”

왕은 요즘 늘 안네마리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성인이 된 안네마리가 지루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안네마리는 누운 채로 집중해서 듣곤 했다. 왕은 바빠도 꼭 침실에 들러 안네마리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유년 시절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일을 계속했다.

어제 왕이 읽어준 동화는 토끼와 겨울딸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토끼는 낮은 산에 살고 있다. 그 산에는 겨울딸기가 열리는데, 토끼는 산에 열리는 겨울딸기가 적당한 양인데도 불구하고 늘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낮은 산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을 보며, 저 산 너머에는 겨울딸기가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결국 토끼는 만류하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높은 산을 넘는다.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며 높은 산을 넘었더니 그곳은 황무지였다는 결말이었다. 소재가 ‘토끼’와 ‘겨울딸기’라서 읽어주긴 했는데, 그것만 아니라면 집어던지고 싶은 내용이었다.

“예, 기억납니다.”

라파엘이 대답했다. 그 단조로운 목소리에 희미하게 스치는 자신감을 느끼고 왕은 의심스러워졌다. 안네마리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지만 기억하진 못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지?”

“산행하는 토끼에 관한 내용입니다.”

왕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뭘 찾아서?”

“먹이를 찾아…….”

“관둬.”

왕이 얼굴을 완전히 구겼다. 오늘의 겨울딸기를 위해 어젯밤 그 동화까지 읽어주면서 바람을 잡았는데 토끼가 먹이를 찾아 산행을 했다고? 맙소사다.

내용은 기가 막혔지만, 어쨌거나 국왕 부부가 환담을 나누는 사이 음식이 차례차례 날라져왔다. 왕이 겨울딸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주자, 라파엘이 오물거리면서 씹었다. 그 모습이 정말 토끼 같다고 생각하며, 왕이 싱긋 웃었다.

“맛있느냐?”

“맛있습니다.”

라파엘이 짧게 대답했다. 그의 뒤에서 시녀장은 정중한 얼굴 아래로 가슴을 퍽퍽 치고 있었다. 전하께 감사의 말씀을 잊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잊으시는 겁니까! 하지만 분명 저 둔한 남자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좋아한다 해서 가져오게 했는데 잘됐군.”

라파엘은 잠시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식탁은 온통 겨울딸기투성이였다. 그 귀한 겨울딸기가 흘러넘치는 식탁을 보고 있자니 새삼 왕궁이라는 곳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곳인지 느껴진다.

그는 사실 별로 겨울딸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과일 중에서는 겨울딸기를 많이 먹는 편이기는 했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맛을 아는 음식만 먹을 뿐이었다.

왕궁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음식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라 그가 먹을 수 없었지만, 이 겨울딸기만은 생긴 것도 딸기였고 맛도 딸기 맛이었다. 극단적으로 식사에 관심이 없는 라파엘은 딸기의 오묘한 맛 차이는 도저히 구별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주 먹는 과일이었는데 그래서 왕은 그가 겨울딸기를 좋아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정말…… 맛있습니다.”

하지만 맛있다. 분명 작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과일인데 지금은 새콤했다.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었던 모양이다. 문득 라파엘은 생각난 의문을 입에 담았다.

“전하께서도 좋아하십니까?”

왕이 나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그 말에 시종장이 왕의 찻잔에 우아하게 차를 따르며 미묘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아주 희미한 움직임이어서 남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지만, 어쨌거나 시종장이 이렇게 입가를 움직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은 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새콤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딸기는 거의 입에 대지 않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비의 앞에서 잇달아 딸기를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종장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남들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지만 눈치가 귀신같은 왕은 딸기를 입에 넣으면서 흘끗 시종장을 노려보았고, 시종장은 가만히 뒤로 물러났다.

“나도 좋아하지만, 너를 위해 가져오게 한 것이니 많이 들어라. 그리고.”

왕이 잠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최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던가 생각해보았다. 그는 라파엘의 복수를 대신 해준 것인가? 아니,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복수를 한 것이다. 자신의 사람을 망가뜨린 것에 대한 복수.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라파엘과는 관계가 없었다. 라파엘은 검은 물에 아무런 은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다 먹고 나면.”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복수를, 라파엘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이것이 라파엘에게 있어서 옳은 일인가? 왕은 잠시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는 일을 할 때 가부를 따지면서 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다수를 위해 효율적으로 일했다. 그 일이 옳든 그르든 개의치 않았다.

“검은 물을 만나러 가지.”

그래봐야 길드 마스터 외 몇 명이지만.

왕의 말에 라파엘이 잠시 그를 직시한 채로 손을 멈췄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또 말하려다 말았다. 복잡한 얼굴로 뭔가를 한참 망설였다. 그사이, 왕은 상당히 애가 달았다. 원래 솔직한 성격인 자신의 비가 계속 입을 달싹거리고 있으니 초조한 것이다.

“뭐야? 말을 해!”

결국 왕은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고,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무례한 듯하지만, 여쭈겠습니다. 검은 물은 전하께 무슨 빚을 졌습니까?”

타인의 은원은 온전히 타인의 것이다. 결코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온 라파엘이었다. 왕의 안위가 달린 문제에는 개입하지만 왕과 완전히 상관없는 이의 은원, 그것도 왕의 안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이라면 자신이 물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역시 검은 물과 국왕의 접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왕이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정원에 올 예정이었던 토끼에 해를 끼쳤지.”

라파엘은 문득 깨닫고 만다. 왕은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화가 나 있다. 나른하게 웃고 있지만, 그는 웃는 것이 아니라 경계하는 것이다. 싸우기 직전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왕은 나른하고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는 것이다. 그것이 왕 나름대로의 적의라는 걸 라파엘은 깨달았다.

한편으로 여름 무도회의 첫 번째 밤도 같이 떠올랐다. 화가 난 얼굴, 떨리던 손, 끌어당기던 강인한 팔, 그리고 뚝뚝 떨어지던 눈물. 왕은 그에게 적의를 품거나 고문했던 것이 아니다. 그게 뭔지 그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고문이 아니었고, 왕이 그를 배신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연인인 너를 믿지 못하여 너를 배신하고 고문했다.’

왕은 현명했다. 라파엘 자신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라파엘은 저 말만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거나 고문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절망했던 것이다. 절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고문과는 거리가 있다. 라파엘은 두 경우를 전부 봤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깨닫는다. 왕의 절망이 몹시 크고 어두웠다는 것을.

하지만.

“토끼…… 라고요?”

왕은 라파엘이 확인해오는 말에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대답했다.

“아니, 너다.”

“…….”

“내 곁에 올 예정이었던 너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니 나는 그 빚을 받아내야겠다.”

왕과 라파엘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식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어느새 둘 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식당을 비추는 가운데, 시녀들과 시종들은 시중을 들지도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이 자신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왕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말을 막았다.

“지지해다오.”

왕이 진지하게 말했다. 약속하지 않았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은 자신이 언제 약속했었는지 기억해냈다. 그랬었지.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인다. 왕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하더라도 라파엘은 결국 왕에게 그렇게 약속했을 것이다. 그는 어느 때라도 왕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이 아니라…….

“예, 아이브리 전하.”

아이브리 이그나치오 개인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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