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마지막 무도회 (38/47)

제13장 마지막 무도회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왕실의 파티는 늘 호화로웠지만 오늘은 그 차원을 넘어서서 사치 그 자체였다. 금빛이 넘실거리는 홀 안에서 왕이 잔을 높이 들자 모두가 따라서 잔을 들었다. 라파엘도 잔을 높이 들었다. 

왕이 짧은 기념사를 마치자마자 기다린 듯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고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왕은 자신의 잔을 비우고 라파엘이 홀짝이는 잔도 빼앗아 비웠다. 라파엘의 손에는 빈 잔만이 남았다. 

“이런, 오늘 몹시 호전적이십니다?”

왕의 곁에 앉은 스완이 피식 웃었다.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의 스완과 잔을 부딪치며 왕이 물었다.

“누구에게 걸었지?”

“도박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론은 집어치우고.”

왕이 살짝 흥분한 것을 보니 스완은 자신의 열 살 때가 생각났다. 열 살 때, 스완은 또래 중에서 가장 힘센 모 백작가 아들과 검술 시합을 벌였다. 모 공작가 영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딱 그때의 자신과 현재의 왕이 비슷했다.

“사실 왕비가 출전했더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왕비입니다만.”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의 스완은 결국 그 백작가 아들에게 졌고,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뜨거운 불덩어리가 배 속에서 올라왔다.

“지금은 전하께 걸었습니다.”

왕이 훗 하고 웃자 스완이 밉살스럽게 덧붙였다.

“뭐, 인생, 돈이란 잃고도 또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신 전하께서 그 돈을 대신 내주실 수도 있는 것이고요, 아니 그렇습니까? 스완의 말에 왕이 실소했다. 자신의 이부동생은 살짝 얄밉게 굴지만 그 점이 귀엽다면 귀엽다. 왕이 별말 없이 술을 입에 대자 스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전하의 상대는 저기 저 소백작이 될 것 같던데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예, 뭐 익숙하진 않으실 겁니다. 일단 망나니로 유명하고, 돈에 꽤 쪼들리는 모양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진 빚을 백작이 갚아주지 않자 그 돈 때문에 나온 것 같았습니다.”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낌 없이 패주면 되는 상대라는 뜻이군.”

“언제는 안 그러셨나요?”

“유독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 있잖아. 개망나니라든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빚을 지는 놈이라든가, 작위도 없는 주제에 사고를 친다든가 하는 귀족 놈들 말이지. 머리엔 더러운 것만 가득한 게, 머리가 나쁘면 몸이라도 빠릿빠릿해야 할 텐데, 귀족 놈이 몸이 빠릿빠릿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한 마디로 쓰레기라 바다에 갖다 버려야 할 귀족 놈이라면 패 죽여도 마음이 상쾌하지 않겠어?”

왕의 말에 스완이 아하하 하고 웃었다. 요즘 좀 안 이러는 듯싶더니 또 독설을 화려하게 꽃피우는 왕이었다. 뭐, 언제나 이런 성격이라 은근히 편하기까지 했다. 아침에 불만을 토로하던 대신들도 ‘전하는 어쩔 수 없지’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는 왕이고, 모두에게 공평히 성질을 부려대기 때문에 악감정은 잘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왕이 갑자기 손을 뻗어 라파엘을 끌어당겼다. 멍하니 앉아 있던 라파엘이 삽시간에 왕의 품속으로 끌려왔다.

“권투가 뭔지 아느냐?”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말로만 들었지, 본 적은 없었다. 권투는 몹시 귀족적인 스포츠다. 사냥 대회에선 사격을, 여름 무도회에선 권투를 선보이는 귀족들의 전유물. 평민들이 종종 귀동냥한 것을 바탕으로 따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권투와는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라파엘이 고개를 젓자 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게 무엇인지 보여주지.”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이 물었다.

“기대되느냐?”

왕의 손에 이끌려 라파엘은 왕을 직시했다. 왕의 파란 눈동자 속에 작게 자신이 들어 있다. 라파엘은 그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요.”

권투라는 게 어떤 것인지 말로만 들었었다. 주먹질을 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왕이 그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진 모르지만, 누군가와 싸우는 왕은 어떨까 생각하자 그저 걱정스러웠다. 왕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주먹질을 잘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은 본디 약하기 마련 아니던가?

라파엘의 부정에 스완이 킥 웃었고,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기대를 안 해!”

“권투란 싸움이지 않습니까?”

왕이 왕비를 의자째로 홱 돌려 앉혔다.

“그래서? 넌 지금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순간 침묵이 흘렀다.

당연히 ‘아니요’가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왕과 정곡을 찔린 왕비 사이에 무겁고 미묘한 침묵이 가실 줄을 몰랐다. 게다가 살인 기계 앞에서 자신의 권투 실력을 자랑할 정도로 뻔뻔한 왕과 왕이 뭐라고 하든 솔직하게 대답하는 눈치 없는 왕비는 분명히 2차전도 하고야 말 것이기에 스완 라 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둘 사이에서 곤란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완이 눈치 빠르게 사라지는 사이, 왕은 라파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응원을 하랬더니 아예 지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다. 왕이 짜증이 나 안네마리를 노려보자, 안네마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 마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말갛기만 했다.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을 끄라니까 기름을 붓는다. 왕이 험악한 얼굴을 했을 때 홀 가운데에 링이 설치되고 있었다. 왕이 “아무리 토끼 눈이라도 눈 똑바로 뜨고 잘 보도록 해. 어디서 내가 진다고 생각하는 거냐? 무례하기 짝이 없군!”이라고 이를 갈았다. 라파엘이 흘끗 링을 쳐다보았다가, 왕에 의해 다시 시선이 돌려졌다.

“어디를 보는 거냐? 왕의 앞에서, 다른 데를 보다니!”

왕의 앞에서 왕만을 바라봐야 하는 궁중 예의 따윈 들어보지 못했지만, 라파엘은 특별히 그런 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다른 것을 입에 담고 있었다.

“만약에 암살자가 전하의 상대편으로 서면 어떻게 됩니까?”

“귀족과 왕족의 대결인데 암살자라니, 말이 되느냐.”

그런가. 라파엘이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물고기처럼 가끔씩 입을 뻐끔거려 제 할 말만 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무표정한 얼굴을 꼬집은 왕이 두고 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어. 내가 얼마나 근사한지 보여줄 테니까.

왕이 링으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녀들이 가까이 가셔서 응원해야 한다며 라파엘을 재촉했다. 라파엘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링을 향해 걸었다. 왕은 언제나 멋있었다. 첫날, 그저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런데 굳이 근사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게다가 치고받는 게 뭐가 근사하단 말인가. 라파엘은 드물게도 불신에 젖어 무대를 살폈다.

처음 올라간 자는 귀족 남자였다. 남자가 윗옷을 벗어 링에 패대기치자 귀족들 사이에서 작은 환호가 터졌다.

“비전하, 랑베르 소백작입니다.”

옆에 다가온 백작부인이 속삭였다. 라파엘이 흘끗 보자 백작부인이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누구라고 듣긴 했었지만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 과격한 스포츠를 관람하셔도 괜찮으실지요? 혹시 쓰러지시기라도 하시면 전하께서 몹시 상심하실 텐데…….”

살짝 비꼬듯 말하며 백작부인이 라파엘의 옆에서 부채로 살랑거렸다. 시녀들은 정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백작부인의 뜻을 알아들어서 울컥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당연히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랑베르 소백작에 이어 왕이 올라가 윗옷을 링에 벗어던지자 귀족들이 크게 환호했다. 이기라는 둥, 밟아버리라는 둥, 과격한 언사도 간간이 들릴 정도였다. 라파엘은 랑베르 소백작과 왕을 비교해보았다. 둘 다 무인으로서 훈련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둘 다 훈련을 받은 것에 비해 능숙해 보이진 않았다. 즉 둘 중 누구도 무인의 길을 걷고 있진 않다는 뜻이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작부인이 잘난 체하듯 말을 이었다.

“걱정되시겠어요? 랑베르 소백작은 저래 봬도 소싯적에 검술 천재라는 소리도 들었답니다.”

이 여자, 왜 이래? 시녀들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짜증스러워했고, 다른 귀부인들도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었을 때였다. 라파엘이 몹시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체술 천재는 아니었잖아.”

“……네?”

“검술과 체술은 다른 거야. 싸움은 또 다르고.”

그걸 왜 몰라, 라는 눈으로 라파엘이 흘끗 백작부인을 보고, 다시 링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게 그거 아니냐는 백작부인의 말에 라파엘이 대답했다.

“달라.”

백작부인이 발끈한 눈으로 왕비를 노려보았다. 가진 거라고는 왕 하나면서 뭐 이렇게 잘난 체야! 그녀는 화가 났지만, 왕비는 느긋했다. 오늘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모습으로, 왕비는 귀부인들의 중심에서 링을 지켜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왕을 걱정하거나 응원하기보단, 링의 승패를 가늠하는 여신처럼 지엄한 모습이다.

라파엘은 속눈썹과 인조 보석을 붙인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왕이 두 주먹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서 랑베르 소백작과 경계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저런 짓을 왜 하지? 그것이 라파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냥 싸우면 된다. 왕과 랑베르 소백작이 손에 낀 글러브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냥 맨주먹으로 때리면 될 텐데. 공을 울리는 행위 또한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원을 그리듯 가볍게 뛰는 두 남자가 의아하기만 하다. 라파엘은 귀부인들 사이에서 미묘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스완은 혀를 찼다.

‘늑대가 사슴 떼에 섞여 있군.’

그때, 사람들이 “우왓!” 하는 소리를 냈고, 스완도 재빨리 시선을 링으로 돌렸다. 소백작이 먼저 팔을 뻗었다. 왕이 재빨리 피했지만 살짝 뺨을 스친 모양이다. 스완이 다시 왕비를 바라보자, 왕비의 눈이 살짝 차가워져 있었다. 저렇게 여장을 하고 연약한 척하고 있어도,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자신의 친혈육이라도 죽여버릴 인물이 아니던가. 스완은 만약을 각오했다. 왕비가 어쩌면 저 링 위로 훌쩍 뛰어올라갈지도 모른다는.

탐색전을 펼치던 두 사람 중, 이번에 움직인 자는 왕이었다. 왕이 순식간에 움직여서 코너로 몰았지만, 소백작은 빠져나왔다. 둘이 잽과 스트레이트를 교환하고, 어느 순간 공이 울렸다.

‘정말 돈을 잃을지도 모르겠는데?’

스완이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소백작 쪽이 너무 권투에 익숙하다. 물론 왕도 종종 권투를 즐기고는 하지만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백작은 연습을 한 게 아니라 실전을 해본 티가 났다. 그러나 어디서 이런 연습을 했을까. 권투 시합은 여름 무도회에서 열리는 이것뿐인데. 혹시, 평민들과 권투 시합을 즐겼던 건가? 아니면 도박 시합을? 뒤를 캐내봐야겠다며 스완이 결심했을 때, 라파엘은 삐져서 사라진 백작부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공작부인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저 공이 울리면 1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이고, 3라운드를 한답니다.”

“3라운드……?”

“네, 그렇사와요.”

공작부인의 말에 라파엘은 눈을 깜빡거렸다. 왕과 소백작은 헐떡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몹시 즐거워 보였다. 긴장과 흥분이 높아진 듯 보이는 둘이 물을 한 잔씩 마시고는 다시 링의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2라운드는 둘 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서로에게 주먹을 제대로 날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보고 있던 귀족들이 애가 타는지 이렇게 하라는 둥, 저렇게 하라는 둥,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목소리를 높이는 건 주로 남자 귀족들이었다. 귀부인들의 활동이 주가 되는 여름 무도회에서 유일하게 남자 귀족들이 즐기는 오락거리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소백작의 주먹이 왕의 안면을 강타했다. 광대뼈를 제대로 친 주먹 때문에 왕이 헐떡거렸다. 드디어 나온 펀치에 귀족들이 환호한다.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왕이 뒤로 주춤한다. 소백작이 왕을 로프에 몰았을 때, 왕이 소백작의 펀치를 적절히 피하면서 로프에서 벗어난다. 지친 듯한 소백작이 뒤로 물러났을 때 이번엔 왕의 펀치가 소백작의 안면 중앙부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퍽―소리가 났다. 소백작이 휘청거리자마자, 왕이 소백작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다. 턱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남자 귀족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다시 공이 울렸다. 2라운드가 끝난 것이다.

스완은 다시 왕비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왕비는 분명히 눈살을 찌푸렸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평소에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왕비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면, 재수 없으면 왕비가 링으로 난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왕이 짐승 떼라고 말하는 저 개미 떼 속에서 왕비를 끌고 나오는 게 좋을까. 스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왕비가 멍하니 왕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어라? 스완은 잠시 왕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왕비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왕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3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공이 울리자마자 둘은 맞붙었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가벼운 주먹을 나누던 중 동시에 펀치를 내지르는 모습에 귀부인들까지 비명 섞인 환호를 질렀다. 둘의 주먹은 서로의 뺨을 정확하게 밀어냈다. 동시에, 서로가 휘청거리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조차 눈을 깜빡거린다.

라파엘은 그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링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간 라파엘의 시야에 왕이 똑똑히 보였다. 깜빡이는 왕의 눈, 그 속눈썹에 맺힌 땀방울, 이미 멍들기 시작한 얼굴, 그리고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와 크게 움직이는 가슴――. 그리고 갑자기, 왕의 멍했던 푸른 눈에 빛이 돌아왔다.

번뜩이는 눈으로 왕이 등을 돌려 소백작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이미 한 차례 맞았던 소백작의 턱에 왕의 주먹이 작렬한다. 턱이 돌아가고, 소백작이 링 위에 쓰러진다.

우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환호한다.

왕이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라파엘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 하는지 모를 주먹질이 어느새 그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주먹질 때문만은 아니다. 왕 때문이다. 왕의 팔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 그 땀이 흩뿌려지는 모양, 펀치에 당한 뒤 바로 일어서는 그 모습……. 저기서 걸어오는 것은 그저 권력자가 아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모양새가 아니다. 거기서 걸어오는 자는 피가 뜨겁게 돌고 있는, 아름다운 지배자였다.

라파엘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많은 귀부인들도 마치 그처럼 홀린 듯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에게 시선으로 경배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에 의해 라파엘의 머리채가 잡혔다. 그대로 고개가 돌려졌다.

“내가 이긴댔지.”

왕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파엘을 잡아챈 손길은 델 것같이 뜨겁다.

“예, 전하.”

라파엘이 속삭였다.

“입을 벌려.”

왕의 말에 라파엘은 입을 벌렸다. 아주 조금, 물을 마시는 정도만 벌려주었을 뿐이었다. 왕이 입을 맞추고, 당연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듯 라파엘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작게 벌린 입술은, 곧 크게 벌어졌다. 왕의 혀가 라파엘의 입안을 유린한다. 야만의 게임에서 승리한 남자는 전리품을 즐긴다.

라파엘은 땀으로 젖은 왕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귀족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귀를 멍멍히 울린다. 아아. 라파엘은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왕은 약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왕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왕은 낙화하는 꽃 같은 마리 트리지아가 아니며, 아름답지만 강하다. 아아, 이토록 강했었다. 이토록이나, 이토록이나! 라파엘은 왕을 힘주어 안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키스하면서, 쾌락에 미칠 것 같았다. 왕의 쾌락이 옮아와 그대로 심장이 터져버릴 듯했다.

링이 치워지는 동안 왕은 내내 왕비를 끌어안고 있었다. 손짓은 노골적이었다. 애송이처럼, 왕은 왕비를 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듯했다. 시종들이 다시 옷시중을 드는 동안에도 계속 왕비와 입을 맞춰댔다.

왕비 또한 왕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왕의 입술을 몇 번이고 훔치고, 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대단해. 라파엘이 말할 때마다 왕은 의아한 듯 눈썹을 올리면서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좀…… 그만하셔야 무도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텐데 말입니다.”

스완이 결국 참다못해 말을 걸었다. 권투 시합은 그저 식전 행사였을 뿐, 사실 여름 무도회의 ‘마지막 무도회’는 시작도 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그 무도회의 처음을 열어야 할 왕이 왕비와 내내 쪽쪽거리고 있자, 차마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스완의 말에 왕이 라파엘을 무릎에 앉힌 채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진정이 된 왕이 왕비의 손을 잡고 링이 사라진 댄스 플로어로 나가자 악단이 능숙하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아.”

라파엘이 헤죽 웃었다. 예전에 왕이 직접 불러주었던 곡이었다.

“카드리유다. 기억나느냐?”

“확실히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다. 네 곁에는 내가 있지 않은가? 내 앞에서 너를 얕볼 자는 없어.”

왕이 단호히 말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라파엘이 왕과 두 손을 잡았다. 천천히 둘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라파엘이 다음 차례로 넘어가 서열상 다음인 공작과 춤을 추게 되었지만 왕은 너무나 당연한 듯 공작을 뒤로 보내고 다시 라파엘과 만났다. 라파엘이 헤죽 웃었다. 공작과 춤을 추던 귀부인이 얼굴을 굳혔지만, 그녀의 반응 따윈 왕과 왕비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아아, 예뻐. 예뻐서 미쳐버릴 것 같아. 너를 보면 차라리 죽이고 나도 죽고 싶어. 그 정도로 네가 예뻐. 듣고 있느냐?”

왕이 속삭였다. 

놀랍게도 라파엘은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파엘도 가끔 그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라파엘은 가끔 그를 죽이고는 자신도 죽고 싶었다. 지금 그들이 완벽하기 때문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은 라파엘을 스쳐 지나가며 그 머리칼에 입을 묻었다.

두 번째는 왈츠였다. 당연히 춰야 하는 왈츠는 더욱 달콤해졌다.

‘왈츠 다음엔 숲으로 사라지실지도 모르겠는데.’

스완 라 포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왕은 얼굴에 멍이 들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오늘의 승자는 왕이었고, 귀부인들―과 그런 취미가 있는 남자 귀족들―은 왕을 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왕비 또한 왕에게 반해버린 모양이다. 하긴 어떻게 그러지 않겠는가. 친동생이자 왕의 독설을 매일 듣는 최측근 스완조차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판국에.

‘게다가 저 여잔 저러고 있고 말이야.’

스완은 멀리 보이는 안드레아 라 쇼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많은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렇게 많은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여자들 사이에서 고립되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하긴, 괜히 사교계의 여왕은 아니지. 코웃음을 치다 말고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안드레아의 맑은 시선이 뭔가를 말하는 듯했다. 스완은 거기에 대답하기 위해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향하려는 발을 멈추었다. 그녀에게로 가서? 그다음엔?

그는 거기로 갈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을 돌려받고 싶어하고, 그의 주인은 절대로 자신의 연인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스완은 연인을 잃을지언정 주군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안드레아가 바라보고 있지만 스완은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결국 안드레아는 시선을 돌렸고, 다시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스완이 한숨을 쉬며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아까 정신을 잃었던 랑베르 소백작이 비틀거리며 안드레아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물론 소백작과 안드레아는 그저 아는 사이이고, 안타까운 패배에 한마디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정말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건가.’

소백작은 어릴 때 제법 무인으로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다 미끄러져 지금처럼 한량이 되긴 했지만, 옛날에는 그랬었다. 그 소백작을 조종해서 왕을 상대하게 한 것인가? 어떤 결과를 기대한 것인가?

스완은 오싹해졌다.

안드레아는 소백작이 왕을 죽이기라도 했으면 한 걸까? 분명 안드레아는 말했었다.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렇게까지 절박했단 말인가.

스완은 댄스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왕과 왕비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도, 안드레아는 왜 이렇게 절박하단 말인가.

스완은 왕을 바라보았다. 댄스플로어에서 빙글빙글 도는 왕과 왕비를 바라보며 그는 한숨을 삼켰다. 안드레아가 자신의 주군을 해하려 든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검을 겨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극적인 사랑.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농탕질이나 계속 할 것을.’

이제 와 후회해봐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스완은 결국 안드레아의 앞에서 등을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여러 남자들의 틈에서 교태를 부리며 여왕처럼 군림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스완은 왕을 노려보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왼쪽에 있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은 라파엘을 돌리면서 고개를 힐끗 돌렸다. 라파엘이 왕의 팔 밑에서 돌다 말고 휘청거릴 것 같자 왕이 능숙하게 라파엘의 허리를 안아서 같이 돌아주었다. 경쾌하면서도 애처로운 왈츠의 선율과 함께 왕비의 드레스가 둥근 선을 그리며 팔락였다.

“은발?”

“검은 머리였습니다만.”

검은 머리? 왕은 라파엘의 어깨를 안고 움직였다. 빙글빙글 도는 남녀의 화려한 춤이 유리 천장에 화려하게 비쳤다. 왕은 자꾸 라파엘이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자 붙잡은 채로 위협했다.

“날 여기다 버려두고 가는 게 얼마나 대죄인 줄 아느냐, 안네마리.”

“암살자가 저기에…….”

“암살 같은 건 대부분이 실패하지만, 춤추는 홀에서 왕비에게서 버림받은 왕이 조롱받는 건 절대 실패하지 않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여기에 날 버려두고 가면 난 바람피우고 말 거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라파엘의 속눈썹이 위태롭게 움직였다. 속눈썹 끝에 단 보석이 마치 눈물처럼 흔들렸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왕이 라파엘의 뺨에 스치듯 키스하고 허리를 잡아 안았다. 이제는 제법 이런저런 춤을 잘 추지만 조금만 정신이 다른 데로 빠져도 모든 스텝을 잊어버리는 왕비를 허공에 들고 왕은 모든 이들과 같이 빙글, 빙글, 빙글, 세 바퀴를 돌았다.

“아…….”

세 바퀴를 돈 다음에야 돌아야 했다는 걸 깨달은 듯 라파엘이 멍하니 신음하자 왕이 싱긋 웃었다. 암살자가 어딘가에서 그를 겨누고 있다는데도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미친놈이라는 생각도 분명 있었지만.

“바, 바람이요?”

모든 왕은 정부를 둔다. 왕비들은 그것을 당연히 감안한다. 왕후인 마리 트리지아는 왕의 정사를 앞에 두고서 몇 번 울기도 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라파엘이 눈을 지나치게 깜빡이는 바람에 결국 라파엘의 속눈썹에 붙어 있던 인조 보석이 툭 떨어졌다. 마치, 눈물 대신인 것처럼.

“아.”

라파엘이 손을 내밀어 받으려는 듯 왕에게서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왕은 그 손을 내주지 않았다. 인조 보석은 그대로 어딘가에 떨어져 사라져버렸다. 마치 눈물 같다고 왕은 생각했다. 왕은 팔을 들고 라파엘을 가볍게 돌리면서 속삭였다.

“근위대장 라파엘과.”

“아…….”

“너는 ‘아’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 ‘아’ 말고 ‘어’나 ‘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토끼처럼 눈 크게 뜨지 말라고 했지.”

“아. 아니, 으.”

왕이 키득거렸다. 그 순간 라파엘이 웃음을 완전히 멈췄다. 라파엘의 차가운 얼굴, 그것은 ‘라파엘 에반스’ 혹은 ‘라파엘 라 쇼어’의 얼굴이었다. 왕은 살기는 감지할 수 없었지만 라파엘의 시선은 알아볼 수 있었다.

라파엘의 시선이 흘낏 뒤쪽으로 움직인 순간 왕은 라파엘의 뒤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의 남자. 그는 최근 딸이 이국으로 시집간 자작이었다. 평소라면 궁중 사교계에 초대받을 인물이 아니었는데, 누가 그를 데려온 것일까.

‘참 요령도 없지.’

왕은 남자를 보며 혀를 찼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을 해하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쩌다 그게 가능해졌다 하더라도 그다음은 어쩔 생각이란 말이냐.

라파엘이 왕의 품에서 춤을 추며 왕을 바라본다. 왕은 얼굴이 엉망진창이어도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것이 더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왕은 약하지 않았다.

원래였다면 왕을 제치고 달려가 남자를 잡아챘을 라파엘은 왕의 품 안에서 얌전히 춤을 췄다. 아까의 권투 시합 때문일까. 왕의 몸에선 희미하게 땀 냄새가 났다. 정욕의 냄새처럼 음탕했다.

“전하.”

품에서 안네마리가 자신을 부른다. 왕은 안네마리와 춤추며 남자의 동선을 주시했다. 댄스플로어에서 왕을 해할 생각을 할 거라 보진 않지만, 한편으로는 댄스플로어만큼 완벽한 무대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댄스플로어만큼은 호위병이 왕을 근접 호위할 수 없다. 자신의 안위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왕은 마지막으로 멀리 있는 검은 머리의 자작과 눈을 마주쳤다.

자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딸은 먼 나라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참금이 모자라 여러 곤란을 겪고 있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고 있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는 궁중 사교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무척 딸을 사랑했다.

지참금이라니……. 자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딸의 지참금으로 해서 보냈었다. 혼처는 훌륭했고, 자작은 딸의 행복을 위해 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딸은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참금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가면을 쓴 남자가 말했다. ‘자신을 버릴 수 있다면 딸은 행복할 수 있다’고. 

혼자인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다고 한 기특한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 할까. 자작은 수락했다. 돈은 먼저 보내졌다. 딸이 감사 서신을 보내온 뒤에야 일이 몹시 커졌다는 것을 알았다. 돈의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자작이 생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작은 왕의 암살을 의뢰받았다. 그제야 자작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딸은 아버지가 보내온 돈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행복하길, 그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이름뿐인 귀족, 늘 돈에 쪼들렸던 기억 따윈 잊고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가 함께하지 않더라도, 딸아이가 행복하기만을.

그래서 그는 이 미친 짓을 수락하고야 만 것이다.

그런데, 왕과 자꾸만 눈이 마주친다. 아름다우나 잔혹한 왕이 자작의 속내를 아는 것처럼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숨이 막힌다.

왕과 속삭이던 왕비도 그를 바라본다. 청초하고 요염한―하지만 어딘가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이 굳은 왕비가 흘끗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차가운 검은 눈. 그리고 그 눈에 이끌리듯이, 자작은 움직였다.

“으아아아악――.”

자작이 돌진해오는 순간, 왕은 라파엘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비명 소리와 함께, 댄스플로어의 모두가 당연한 듯 비켜섰다. 그리고 자작은 아무 거칠 것 없이 왕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라파엘은 왕을 당기면서 손등으로 검을 쳐내었다.

“전하!”

멀리 있던 스완이 고함을 질렀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왕비를 경호하고 있던 그레이드의 호위조였다. 호위조 여섯 명 중 파티장에 동석했던 세 명이 각자 왕과 왕비, 그리고 자작에게 달라붙었다. 자작이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듯 욱, 소리를 내며 뭔가를 깨물었다.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왕은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일부러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왕과는 달리 라파엘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노골적으로 흥미로운 얼굴을 한 귀족들의 시선을 일일이 마주했다. 그랬다. 귀족들 중 왕을 걱정하는 자는 극소수뿐이었다. 친왕파 인물들조차도 히죽거리는 웃음을 참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경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여하간 귀족 나리들은 악취미라니깐!’

그레이드는 왕비의 곁에 붙어 서서 주변을 노려보았다. 친왕파 인물들, 가령 예를 들면 대장군 하타까지도 그저 시선만 주고 있다는 건 다들 왕이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즐거운 것이다. 왕이 누군가에게서 습격받는 것이.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는 왕을 보며 유쾌해하고 있다. 어디선가 이런 소리도 들린다. 그것 봐. 혼자 잘난 체하면서 툭하면 칼 맞는 꼴 좀 보라지!

“안네마리, 손이…….”

왕이 다급히 말했지만, 라파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왕의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왕은 라파엘의 다친 손을 잡는다. 장갑 안에서 비가 울컥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왕의 팔에 기대었다. 마치 누군가의 보호라도 바라는 것처럼.

피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예전, 라파엘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던 순간이 떠올라 눈앞이 새빨갛게 물든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이 자신에게 기대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정신을 차렸다.

왕과 왕비가 호위를 받으며 서둘러 사라져도 파티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왕이 파티를 종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왕이 돌아올 것임을 의미했다.

하여간 독종이야. 귀족들은 싫다는 얼굴로, 다시 잔을 높이 들었다. 누구도 왕이 습격받은 것에 대해 건배하자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건배는 분명 왕의 무사함을 축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선창에 모두가 술잔을 높이 든다. 본래 왕이 없으면 그 역할을 누군가가 대신하는 법. 왕의 역할을 대신하며 왕의 불행에 가장 먼저 술잔을 들어 올린 공작이 픽 웃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기쁘게 술잔을 비웠다.

귀족들의 시선에 악단이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왕과 왕비는 카드리유와 왈츠로 무도회의 댄스 첫 장을 열었다. 그러니 나머지는 그들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홀에서 나오자마자, 왕은 라파엘의 손을 들어 그 상처를 확인했다. 레이스가 피로 물들어 붉었다. 왕이 바라보자 시종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궁의를 데리러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라파엘의 장갑을 벗기려다 그 긴 장갑을 벗기느니 차라리 손바닥 부분을 찢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시종장에게서 단검을 받아 직접 찢었다.

시녀들이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자 시종장이 나직하게 “자리를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옷시중을 다시 들겠습니다”라고 속삭였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같은 옷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은 문 플레이스로 향했고, 라파엘만 왕의 일행에 섞여 선 플레이스로 움직였다. 침실에 도착해보니 궁의가 이미 와 있었다. 궁의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라파엘의 손바닥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왕은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시종들이 옷을 입히는 동안 그의 시선은 라파엘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라파엘은 궁의가 처치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궁의가 찢어진 손바닥에 소독약을 부어도, 상처를 만져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아프지 않느냐?”

왕이 옷시중을 받다 말고 다가와 묻자 라파엘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사실 늘 아픔이라는 것에 둔감했다. 피를 많이 흘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따위가 뭐 대수라고 아프겠는가. 라파엘이 아프지 않다고 대답하자 왕은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 아직 붕대를 감지 않은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 순간 라파엘은 물고기처럼 파드득 떨었다. 따뜻한 입김과 보드라운 입술뿐이었다. 궁의의 건조한 손길과는 비교가 되지도 않을 만큼 애틋한 스킨십이었는데, 라파엘은 따끔한 아픔을 느꼈다.

아주 작은 아픔이었다. 쓰리고 부드러우면서 약간쯤은 달콤한 아픔이었다. 아픔이 음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라파엘은 처음 알았다. 입에 넣었을 때의 감촉과 그 향, 그리고 맛……. 곧 사라지고야 마는 감각이 아쉬워, 라파엘은 다친 손으로 왕의 팔을 붙잡았다. 다친 손바닥이 왕의 강건한 팔에 사정없이 닿는다.

“안네마리!”

왕이 놀라서 다른 손으로 자신의 팔에서 라파엘의 손을 떼어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궁의!”

상처가 벌어졌기 때문에, 궁의는 다시 왕비의 손바닥을 치료해야 했다. 그때쯤, 왕비의 시녀들이 문 플레이스에서 하얀 드레스와 그 액세서리들을 들고 들어왔다. 소녀처럼 티 없이 하얀 드레스를 들고 들어오던 시녀들이 문가에서 멈칫거렸다.

왕이 사나운 손길로 라파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왜 이랬어? 왜?!”

“전하께 닿았을 때 아파서, 제가 닿아도 아픈가 했습니다.”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고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얼굴을 했다.

“내가 닿았을 때 아팠어?”

왕이 물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왕을 보며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네. 아마 그냥 착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무심히 대답했다.

아주 살짝, 그 상처에 입을 맞추었을 뿐이었는데.

“네가 닿은 건 아프지 않고?”

“예. 원래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왕은 라파엘의 감은 눈을 보았다. 그 눈에 매달린 인조 보석들이 눈물처럼 대롱거리는 것을 보며, 그는 울컥 솟아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기 어려워졌다.

라파엘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왕이 주는 아픔에만은 반응한다. 그래, 그랬었지. 왕은 며칠 전의 밤을 떠올렸다. 그때, 라파엘은 비명을 질렀었다. 아픔을 온몸으로 표현했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 건가.’

왕은 라파엘을 확 당겨 안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도대체 검은 물이라는 개새끼들은 그의 안네마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안네마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파하는 법조차 알지 못한다.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라파엘은 당황했다. 아무래도 왕은 그가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힘주어 안고 있었다. 별로 아프지 않았고, 아픔을 잘 느끼지도 못하는데 왕은 이렇게나 힘주어 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을 걱정한답시고 한 말은 왕에게는 더욱 가슴 아픈 말이 될 뿐이었다.

라파엘의 옆에서 시녀들이 숨도 못 쉬고 서 있는 꼴을 본 다음에야 왕은 라파엘을 놓아주었다. 그러자마자 라파엘은 왕의 곁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져 시녀들에 의해 옷시중을 받기 시작했다. 옷만 갈아입으면 되기에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왕이 팔을 내밀자, 라파엘이 팔짱을 꼈다. 마차를 탄 짧은 시간 동안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마차 안은 조용해졌다.

라파엘은 한 번 왕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렸지만, 곧 자신이 왕의 안색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그나치오궁의 본관에 내렸을 때도 내내 왕의 행렬은 조용하다 못해 엄숙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물론 왕의 행렬이란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행렬이지만, 현재의 왕은 엄숙함 따윈 몰살의 즉위 축하연 때 시체의 산과 같이 태워 없애버린 인물이라 제대로 엄숙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왕 자신이 입을 다무는 즉시 이 행렬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엄숙한 행렬이 되곤 했다, 지금처럼.

“나는…….”

왕이 라파엘에게 속삭였다. 너한테 아프라고 해야 할지, 아프지 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 사랑스러운 안네마리, 널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애틋하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워서,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그렇게 말을 이으려는데,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시, 시체가 일어났어! 좀비다! 노예의 고함인 듯 발음이 약간 이상했다. 좀비? 시체가 살아나?

그 순간, 라파엘은 왕에게서 팔을 빼고 달리기 시작했다. 왕은 재빨리 라파엘을 잡으려고 했지만 라파엘이 너무나 빨랐다. 왕의 손이 라파엘의 팔을 스쳤고, 라파엘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레이드를 비롯한 왕비의 경호조가 라파엘을 재빨리 따라갔다. 그 모습이 몹시 익숙해 보여서, 시종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왕이 말을 가지고 오라며 고함을 질렀고, 마부들이 마차에서 말을 분리해냈다.

라파엘이 달렸다. 왕이 손을 뻗었지만 라파엘은 그의 손을 벗어났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청초한 왕비는 먼 초원에 있다는 짐승처럼 달려서 나뭇가지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왕비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춤을 추듯 자취를 보였다 감추길 계속하다 완전히 사라졌다.

왕이 “말이 왜 아직도 오지 않느냐!”라며 소리 질렀다. 어느 나무에서 고운 하이힐 두 개가 끈을 팔락이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급격히 멀어져갔다.

라파엘은 달렸다. 자작은 미숙했고, 그는 잡을 수 있었다. 라파엘은 달리면서 치마를 걷어 허벅지에 동여맸던 나이프를 꺼냈다.

자작은 분명 사주를 받은 것일 테지. 머릿속으로 왕을 죽이고 싶어하는 귀족들의 목록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라파엘은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것 외에는 추상적인 것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암살자’에게.

자작을 따라잡은 라파엘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나이프를 가볍게 돌렸다. 어쩌면 고문을 해야 할지도. 라파엘이 남자를 붙잡자 남자가 총을 들이댔다. 아까 쓰지 못했던 총을 지금 쓸 생각인 듯했다.

라파엘이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자작이 총을 양손으로 잡은 채 주변을 경계한다. 라파엘은 기척을 지운 채 자작을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말굽 소리가 들려와 자작의 주의가 깨졌다. 그가 자신의 부주의를 깨닫고 서둘러 경계태세를 갖추려 했지만 라파엘이 더 빨랐다. 라파엘은 그를 덮쳐 총을 든 손을 칼로 찔렀다. 목숨에는 이상이 없지만 치료를 빨리 하지 않으면 다시 손을 쓸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라파엘의 무게에 못 이겨 그가 풀밭으로 쓰러졌다. 말을 탄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위에 앉아 그가 쓰러지자마자 다리를 잡고 발목을 부러뜨렸다. 으아악, 그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라파엘은 다른 쪽 발목도 부러뜨렸다. 그리고 남은 팔목도 부러뜨린 뒤 목에 나이프를 갖다 대었다. 정체와 목적을 물어보려 한 순간 라파엘은 자신이 목소리를 바꾸는 약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까 먹긴 했었지만, 그 이후에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피도 흘렸고. 마법이 아직도 그에게 유효할지 알 수 없어서, 라파엘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작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당황해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어봐야 하는데 물을 수가 없다. 어, 어떡하지?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남자에겐 ‘이 새끼를 어떻게 족쳐야 1대부터 22대 왕까지 만족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싸늘한 무표정. 한 사람의 사지를 못 쓰게 만든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감정이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희열을 느끼는 변태였다면 덜 무서웠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때.

“내 비는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말에서 왕이 내리며 말했다. 자작은 왕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죽이려던 왕이 당도했는데도 그는 순간 안심하고 말았다. 그럴 정도로 이 왕비가 무서웠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왕이 애지중지하는 병약한 왕비라더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남자는 이해할 수 없어 왕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방금 죽이려고 했던 왕이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왕은 친절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내 비는 대단히 분노하고 있어, 자작. 내 충실한 신하로 알고 있었던 당신이 어떻게 내게 총을 쏠 수 있었는지 아주 화가 나 있지. 내 비는 평소엔 병약하지만 자신의 지아비인 나를 위해서라면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여자거든. 봤지?”

말이 되냐!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자작은 생각했다. 딸의 일이 아니었어도 그는 원래 이 왕이 싫었다. 아주 지긋지긋했다. 자작이 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아주 친절한 목소리를 가장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그녀는 너무너무 화가 난 나머지 목소리도 못 낼 지경이야. 하지만 나는 그녀와 한 몸이지. 어디 보자, 그녀가 뭐라고 하고 있느냐 하면.”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왕은 정말 그의 표정을 잘 읽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왕이 싱그럽게 웃었다.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 분명하게 알았다는 듯. 그리고 왕이 말했다.

“네 대답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산 채로 삶아버리겠다고 하는군.”

제가 언제요? 라파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순간에 왕은 그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걸까? 평소에는 그렇게 잘 읽으시더니. 라파엘의 눈에 떠오른 의구심에 다시 한 번 상쾌한 미소를 보낸 왕이 말을 더 이었다.

“내 비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군.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아주 사랑하고 있거든. 병약한 그녀가 초인적인 힘을 낼 정도로 이렇게 사랑하는 ‘나’를 노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녀는 울 것 같은 마음을 꾹 참고 인형을 토닥거리는 대신 당신을 토닥거리겠다네. 경, 잘못한 거야. 내 비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녀는 정말정말 나를 사랑하거든. 세상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지. 그리고 경, 경이 잘못 맞히기라도 했어봐. 내가 어디 불구라도 되면 어쩔 뻔했어? 그러다 내가 고자라도 됐으면…….”

무슨 말을 하시는 거냐고 라파엘은 다시 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주 태연했다. 그는 사실 위험하게도 그의 손을 떨치고 달려간 라파엘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럼 내 비가 얼마나 서럽겠어. 내 비는 매일매일 내게서 사랑받아야 하는 여자란 말이야. 아주 요염하게 울부짖는 여자지. 교태를 부리며 허리를 떨고, 내 분신이라면 아픔도 잊는 여자지. 그런 여자에게 무슨 몹쓸 짓이냔 말이야, 경.”

라파엘이 멍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려던 라파엘은 목소리 때문에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억울한 나머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왕이 그런 라파엘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아, 걱정 마, 나의 사랑하는 안네마리. 내가 돌아가서 그대가 좋아하는 우유를 실컷 줄 테니까.”

라파엘은 왕에게 폭 안기고 말았다. 왕이 라파엘을 안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가서 혼날 줄 알아.”

그리고 왕은 라파엘을 안아 올렸다. 왕보다 훨씬 작은 라파엘은 쉽사리 안겨서 들려 올라갔다. 그레이드가 바로 자작의 입안에 천을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라파엘은 왕에게 안긴 채 자작을 돌아보았다. 자신은 저 자작에게서 배후를 캐낼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왕의 앞에서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파엘은 흘끗 자작을 보았다가 다시 왕의 품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왕이 그를 말에 앉히고 그 자신이 뒤에 앉으면서 이를 갈았다.

“다친 주제에 거기를 왜 쫓아가!”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왕은 완전히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화가 나 보여,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도망치면…….”

“여기가 궁인데 어떻게 도망치느냐! 왕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왕의 노성에 라파엘은 왕을 바라보았다. 왕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왕궁은 잠입하기에 쉬운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다면 움직이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제일 잘 아는 건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라파엘은 왕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마리처럼 왕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마리에게 큰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럴 정도로 그녀를 잘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녀와 그 사이에는 신이 선사한 감정이 있었다. 분신으로서, 형제로서 둘은 분명히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감정은 분명 소중하고 애틋한 것이리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사정이 있어도, 둘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마리가 죽었다는 건, 라파엘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 둔한 심장조차 강하게 울릴 정도로.

라파엘이 돌아보자, 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자 그 굳은 입매를 움직여 ‘왜?’라고 물었다.

“다음에는 허락을 받겠습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라파엘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은 몹시 사내답다 할 만했다. 라파엘의 그 말에 왕이 혀를 찼다.

“화도 못 내게 하는군.”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의 뺨에 스치듯 키스했다.

홀에 왕과 왕비가 돌아왔을 때 무도회는 제멋대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반수 이상은 제 볼일을 보러 정원이나 게스트 룸 따위로 사라지고 없었으며, 한쪽에서는 뭔가의 공론으로 시끄러웠다.

귀부인들은 여전히 우아했지만 약간 나른해져서 긴 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그 옆에서는 신사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악단은 조용한 음악을 연주했고, 궁인들이 귀족을 부축해서 하인들에게 인계해주기도 했다. 한쪽에 마련된 펀치 분수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미 비어 있는 댄스플로어에서 왕은 라파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드리유는 무리고, 왈츠나 한 곡 더 출까.”

라파엘은 순순히 왕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왕과 왕비 때문에 악단이 긴장했다.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당연히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왕은 왕비와 둘이서만 댄스플로어에 오른 상태였다. 왜 둘이 춤을 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상당히 궁중 예의에 벗어난 일인데도, 왕은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하긴, 왕은 존경받는 무뢰배였다. 예의는 잘 지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세자로 태어나서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기본 가닥은 있지만, 본인은 예의범절에 썩 신경 쓰지 않았다. 하긴, 신경을 쓴다면 그 독사 같은 혀를 먼저 뽑아버려야 했을 터다.

“용서를 받으려고 했는데, 또 미움을 샀나.”

왕이 라파엘에게 쓴 목소리로 물었다. 라파엘이 “미움?” 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표정은 몹시 희미해서 왕의 눈에나 보일 정도였지만.

“그래, 너의 증오는 깊어졌어?”

“아니요.”

“하지만 너는 나를 증오하고 있잖나.”

왕이 희미한 기대를 품고 물었다.

권투 시합을 하고 돌아섰을 때 라파엘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표정 변화가 없던 라파엘이 눈을 그렇게 뜨는 건 드문 일이었다. 토끼 같다고 늘 말했었지만, 그 모습은 정말로 토끼 같았다. 손을 뻗자 순순히 끌려왔고, 환희에 찬 몸이 그의 팔에 안겨왔다. 라파엘은 그를 바라보며 열광하고 있었다. 다른 귀부인들처럼.

그러니 그 증오를 누그러뜨리고 용서해줄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애절하고 초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용서해. 나를 용서해, 조금만 더 빨리.”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는 왕을 보면서 특별히 그 밤을 떠올리지 않는다. 왕과 키스하는 것이 좋고, 왕을 사랑한다. 하지만 왕과 다시 밤을 보낸다면…….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은 또다시 왕에게 결박을 청할 것이다. 자신의 몸이 무슨 짓을 할지 그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는 분명 왕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노력하겠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네마리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듯하다. 그래, 그는 분명 그런 일을 겪을 만했다.

그는 안네마리를 사랑했다. 안네마리는 그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준 완벽한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 에반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라파엘 에반스는 필요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뿐이다. 하지만 그의 연인이 ‘라파엘 에반스’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궁금했어야 했다. 하늘이 내려준 연인이라며 사랑해놓고, 결국 그를 아프게 하는 일 따윈 없도록.

“용서는 노력하는 게 아니야, 안네마리.”

“그럼, 왜 전하께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라파엘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춤곡은 경쾌하면서도 슬펐다. 왕이 라파엘의 팔을 들었고, 라파엘이 빙글 돌았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왕의 앞으로 돌아온 라파엘의 허리를 붙잡고, 왕이 대답했다.

“바라는 것은 말해야 하니까.”

라파엘이 이해할 수 없어하자 왕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바라는 건 말하는 거야, 안네마리. 상대에게 말하는 거지. 계속, 계속. 이루어지라고. 나는 계속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루어냈지.”

그렇군요,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고 왕이 피식거렸다.

“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거냐?”

라파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래도 물어보지 않을 모양이다.

왕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늘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는데 몹시 근사한 얼굴이구나. 라파엘은 새삼 왕의 얼굴을 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얼굴에 든 멍 때문이리라. 아예 보라색을 띠기 시작한 멍 때문에 왕의 얼굴은 아름다운 대신 약간 사나워 보였고, 그만큼 남자다움이 부각되는 듯했다. 멋있었다.

라파엘은 왕의 얼굴에 홀린 눈을 했다. 그래서 스텝을 잊어버렸기에 왕은 그때마다 라파엘의 허리를 안은 팔로 라파엘을 살짝 들어 올리고 스텝을 밟았다.

“넌 새만도 못해.”

왕이 투덜거렸다.

“새도 제 궁금한 건 짹짹거리며 물어볼 텐데, 왜 너는 궁금한 것도 없어. 정말 안 물어볼 거냐?”

“물어볼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왕이 짜증을 내려 해서, 라파엘은 왕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자 왕의 얼굴이 더 사나워졌다.

안네마리가 그의 얼굴을 보며 또 홀린 눈을 한다. 평소에도 종종 저런 눈을 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시선이 더 열에 들떠 있다. 권투 시합을 본 뒤부터 계속 이런 모습이다. 하긴, 오늘 내가 좀 멋있었지. 왕은 자평을 몹시 후하게 하면서 라파엘의 시선을 즐겼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원한 게 궁금하지 않느냐며 그를 타박했다.

타박을 해도 라파엘의 시선에서는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게 좋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소망을 묻지 않는 라파엘에게는 짜증이 났다. 그런데 라파엘의 시선에서 열이 사라지고 초점이 깨끗해진다. 이젠 그를 보며 홀리지도 않는 라파엘에게 더 짜증이 난다.

그때, 라파엘이 물었다.

“무엇을 바라셨습니까?”

그다지 궁금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고, 실제로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를 고난에 빠뜨린 이들…… 부디 내 자신이 미워하는 모든 이를 다 죽여버릴 수 있기를 소망했었지.”

그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에 가장 가까운 자는 아마 자신일 테지. 그러나 라파엘은 별말을 하지 않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몹시 눈치가 없는 자였지만, 지금 왕의 소망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파엘은 왕의 팔을 잡고, 둘이 맞잡은 팔 아래를 돌았다.

“소원을 잘못 빌었는지도 몰라.”

왕이 쓴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런 소원을 빌 필요가 없었다. 그는 왕이 될 자였고, 그의 이복동생은 낙마했다. 그 낙마는 물론 신이 주신 선물이 결코 아니었다. 왕은 그것이 자신을 지지하던 귀족이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왕의 비밀을 잡았다며 희희낙락했지만, 결국 몰살의 즉위 축하연에서 영원히 입을 열 수 없게 되었다.

비밀은 혼자만의 것이라 가치가 있다. 그러나 혼자만의 것이라면, 아예 없애버리면 간단하다. 그 귀족도 차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은 그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었다.

어쨌거나, 그는 왕이 될 자였다. 유일무이한 적통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매일 원한에 찌들어 이를 갈았다. 어쩌면 그 원한이 그를 살렸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원한은 그의 눈을 멀게도 만들었다.

“자신이 좀 더 강해지길 바랐어야 했어.”

사실 왕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예전부터 피해자가 아니었고, 나이가 들수록 승리를 거머쥐었다. 즉위와 동시에 그처럼 절대 권력을 손에 쥔 자가 역대 왕 중 몇이나 있을까.

그는 엄청난 돈과 은밀한 군대를 손에 넣었다. 그는 귀족과 신관 사이를 저울질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갔다. 물론 그가 유능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적 조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잔혹한 왕이었고, 헤수스의 오만불손한 귀족들은 감히 그에게 대적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남색가라는 사실에 집착해서, 행복해지지 못할 거라 여기며 괴로워했다. 남색가라는 게 뭐가 어때서? 그가 설사 남자 왕비를 들인다고 해도, 귀족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할 것이다.

“전하는 강하십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그는 오늘에야 왕이 강인한 사내라는 걸 깨달았다. 권투 시합뿐만이 아니다. 권투 시합에서 주먹에 맞고도 끄떡하지 않는 그를 보자마자, 안개 낀 듯 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는 강하고 견고한, 성 같은 사내였다. 그는 철혈의 군주였고, 안정된 치세를 펼치는 유능한 국왕이었다. 손쉽게 귀족들을 다루면서 평민들의 한결같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무술 훈련에도 안일하지 않았고, 많은 일에 적극적이었다.

라파엘은 왕이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왕궁에서 일어나는 일도, 왕궁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가끔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측근들과 회의에 돌입할 때도 있었다.

그는 강했다. 그는 온갖 억압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생각을 한 마리 트리지아가 결코 아니었다.

왕이 라파엘의 말에 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은 맑기만 했다. 아까는 이 눈이 열에 들뜨지 않았다며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그 눈은 너무나 맑아서 흑경처럼 깨끗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비춘 눈이 단호히 말한다. 전하는 강하십니다.

“그래.”

왕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강하다. 그 누가 감히 나에게 대적하겠느냐?”

뒷말은 조금 웃으며 덧붙였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감히 헤수스의 왕에게 누가 도전하는가. 그러나 왕좌는 외로운 자리이고, 왕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모든 것이 이 자리에 걸려 있었다. 자존심도, 그의 존재 이유도, 그의 생존도. 명예와 삶,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조차도. 그래서 그는 정작 왕좌를 차지하고선 조금쯤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자리에 앉자, 갑자기 그 많은 것들 중 몇 가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하지만 왕이 기다렸던 것은 안네마리의 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강하다고. 그리고 내가 너의 곁으로 왔노라고. 그것은 물론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는 상대에게서 듣기를 원하는 말이었다.

“너에게 말하지 않으려 한 것이 있다.”

왕이 중얼거렸다. 빈 댄스플로어를 뒤에, 몇 걸음 남은 자리를 앞에 두고 왕은 라파엘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너에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왕이고, 하기 싫은 말은 하지 않으면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하기 싫은 말을 지금 하려 하고 있다.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라파엘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을 때 왕이 그의 손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게 죄를 짓게 하지 마라. 최소한, 너에겐 그러게 하지 마.”

죄라니. 왕이 무슨 말을 감추든 그것은 죄가 아닐 텐데. 라파엘은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이 라파엘의 눈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커온 목장으로 특수군이 가고 있다.”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왕은 라파엘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었다. 라파엘의 검은 눈이 가볍게 일렁였다. 그것이 라파엘로서는 최대한의 놀라움을 표현해낸 것임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작은 남자, 그의 안네마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종이 쪼가리에 쓰인 그 건조한 문장 하나하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안네마리가 더한 일을 겪었을 것임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특수군…… 입니까?”

라파엘이 물었다. 살수일 때 그도 군을 피해 다녔다. 잡히면 교수형감이니까.

“그래.”

그런데 왕궁특수군이 목장으로 향한다. 그것은 왕명으로 인한 특수 체포를 의미하고, 모든 관련자가 엄중하게 다스려질 것을 뜻한다.

라파엘이 “어째서입니까?”라고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는 상관없는 자들을 걱정하는 듯한 안네마리의 모습에, 왕의 속이 뒤집혔다. 안네마리는 그런 놈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건조하고 무심한 남자가 이토록 충격받고 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놈들은 내게 빚이 있다. 아주, 커다란 빚이지.”

왕이 비릿하게 웃었다. 날것의 냄새가 나는 듯한 웃음이었다. 잊고 지냈던 피 냄새가 먼 기억에서 올라온다.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왕을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왕이 빈손을 올려 라파엘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 하지 마라.”

더욱 놈들을 갈가리 찢고 싶을 뿐이니까.

왕의 속삭임에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검은 물. 다시 그 길드를 떠올린다. 

유년 시절, 그리고 그가 아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전부 그 길드에 속해 있음을 상기한다. 왕이 부수려는 것이 그 길드이고, 그 길드는 그의 인생 전부였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하지만―.

라파엘은 긴 심호흡 한 번으로 이 모든 생각을 떨쳐버린다.

그러나 한낱 길드 주제에 왕에게 빚을 졌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많은 피를 흘려서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쪽이 잘못이라고, 전직 살수는 차갑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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