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장 태어난 곳이 어디든 (37/47)

제12장 태어난 곳이 어디든

이른 아침, 라파엘은 왕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는 왕의 품속에서 손쉽게 빠져나와서, 어딘가에 고이 접혀 있을 지도를 찾아 헤맸다. 노트코.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노트코가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여름날의 아침. 안네마리는 맨발로 걷고 있었다. 왕은 모로 누워서 회화를 감상하는 눈길로 안네마리를 지켜보았다. 키의 두 배가 넘는 아치형 창 앞을 지나치는 안네마리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길게 기른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이 허공에서 흔들린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팔이 새하얀 잠옷 아래로 갈대처럼 흔들렸다.

“안네마리, 뭐 하는 거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왕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빛이 부서져 내리는 침대 위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왕이 싱긋 웃었다. 왕은 시종들의 손길을 떨치며 라파엘의 곁에 섰다. 시종이 재빨리 다가와 왕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실내화를 내밀었다. 왕이 실내화를 신는 사이 안네마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도를 찾고 있습니다.”

“지도는 왜?”

“노트코가 어딘지 궁금해서 찾아보려 합니다.”

힉. 시종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왕은 어제 노트코 대사의 도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러니 오늘 왕의 앞에서 노트코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텐데 왕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트코를 입에 담고 있었다. 분명 노트코의 대사 일을 듣고, 노트코가 어딘지 궁금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왕의 면전에서 그 호기심을 티내면 어쩐단 말인가! 시종들은 당황해서 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왕은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시종에게 손짓하자, 한동안 ‘공부’로 매일 펼치던 지도가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왕이 라파엘의 어깨를 안은 채 설명했다.

“여기가 서대륙. 헤수스의 영지인 티스는 여기까지이고.”

왕이 서대륙의 말단을 가리키고 나서, 그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티스와 마주 본 국가가 노트코다. 노트코는 티스를 가지고 싶어하지. 왜일까?”

“……주 바다 경계선…….”

“그래. 그리고 동대륙과 남대륙도 내색하지 않지만 노트코를 응원하고 있지. 우리는 이 주 바다를 영해로 가지고 있지만, 티스를 잃으면 이 바다도 잃는다. 그건 즉, 동대륙과 남대륙에도 영해가 생긴다는 이야기지. 이 가운데 바다인 ‘주 바다’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대륙 간 상권에 간섭하고 있다. 그러니 이 바다를 잃으면 엄청난 이득을 잃는 거지.”

왕은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차가운 눈으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도를 외울 수 있을까? 곧 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네마리가 굳이 이 지도를 외울 필요는 없다. 안네마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네마리에게 애정만을 줄 것이다. 안네마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노트코의 대사가 왜 사라진 것입니까?”

“모른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남들에게는 물고기의 눈처럼 아무런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 그러나 왕에게는 아기 새의 눈처럼 유순한 그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왕이 웃었다.

“그걸 알기 위해서 대사를 잡으러 간 거 아니겠느냐?”

“제가 잡아올까요?”

라파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사람을 추적하는 건 자신 있었다. 물론 다른 나라에 있다고 하니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라파엘은 자신이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왕이 라파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이 쓸쓸하고 안타까운 기색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며 라파엘은 의아해졌다. 하지만 왕은 조용히 고개를 저였다.

“아니, 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라. 그것으로 충분해.”

라파엘은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가 결국 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그러자마자 왕은 라파엘의 뒤에 기립해 있는 시종에게 눈짓했고, 시종은 바로 지도를 접어 내갔다.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그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어젯밤, 왕은 라파엘을 데리고 침실로 돌아왔다. 시종들이 옷을 벗기자 라파엘은 전라로 왕의 곁에 섰다. 왕이 라파엘을 안으려고 했을 때 라파엘이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왕이 왜 그러느냐고 달콤하게 속삭이자 라파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절 묶고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왕은 말을 잃었다. 라파엘은 자신을 강간한 자에게 반항하고 싶어하면서도, 자신이 그렇다는 걸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왕에게 자신을 당연한 듯 내주고 있었다. 그런 라파엘이 가여워, 왕은 라파엘을 그저 끌어안고만 있었다. 울 수도 없었다. 라파엘 자신이 울지 않는데, 라파엘을 짓밟은 왕이 악어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용서해다오.’

왕은 또 그렇게 말했다. 라파엘은 왕의 말이 신기해서 그를 올려다보았었다. 자신은 용서를 모른다. 모르므로 행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왕은 말하고 있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왕은 또 말했다. 용서해다오. 언젠가…… 언젠가는, 용서해다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말하며 왕은 라파엘에게 손수 잠옷을 입혀주었었다.

“전하, 쇼어 외무대신이 급히 뵈었으면 한다는데 어찌할까요?”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이 라파엘을 놓아주며 “대기시켜라”라고 말했다. 그러자마자 시종들이 왕의 차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왕의 온몸을 조심스럽게 씻기고, 그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히는 동안 라파엘은 내내 왕의 곁에 있었다. 왕이 씻을 때 같은 물에 들어가 있었고, 왕과 똑같이 시중을 받았다. 물론 남자인 왕보다 라파엘 쪽이 훨씬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왕이 방을 나서게 되었을 때 라파엘은 이제 치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침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지만, 점심은 같이 하자.”

“예, 전하.”

라파엘의 대답에 왕이 흡족하지 못한 듯 라파엘의 뺨을 꼬집었다.

“아침, 많이 먹어라. 네 몸은 이제 마른 나뭇가지 같아, 뿌리가 나올 것 같으니. 어디 안는 맛이 나겠느냐?”

“…….”

“네가 언젠가 용서를 하면, 나는 네가 울고 불며 빌어도 나 좋을 때까지 안아버릴 거니까. 그때까지 포동포동 찌도록 해.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도록.”

왕이 웃으면서 라파엘의 뺨을 놓았다. 라파엘은 왕이 왜 자신을 안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왕은 라파엘과의 용건은 끝났다는 듯 시녀들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윗사람을 잘 모셔라. 알겠느냐? 순진하신 왕비이니, 모든 일에 더욱 철저히 신경 써라.”

순진은 뭐 맨날 하는 소리니 차치하고라도, 왕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시녀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왕의 시선이 냉혹했다. 평소에 왕비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며 얕잡아 보긴 하지만, 왕이 무서운 자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시녀장이 허리를 숙이자 시녀들이 재빨리 따라 숙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왕이 하는 경고다. 새겨들을 수밖에 없다.

왕이 침실을 나서자 긴 인간 꼬리가 생겼다. 시종과 근위병, 노예로 이루어지는 긴 꼬리가 천천히 빠져나간 뒤에야 시녀들은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시녀장이 라파엘에게 다가가 가운을 입혀주며 물었다.

“전하와 화해하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라파엘이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화해?

“축하드립니다.”

“다행입니다.”

어쨌거나 왕이 사과를 하거나 합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둘이 화해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녀들은 앞을 다투어 라파엘에게 한 마디씩 속삭였다. 라파엘은 의아해졌다. 화해라니, 그는 왕과 싸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왕은 라파엘이 배신당했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배신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랬다. 어쩌면 정말 둘은 싸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고개를 까딱이자, 시녀들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들은 속으로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는 것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왕이었고, 왕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게다가 이 살인 기계는 왠지 모르게 왕을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계속, 그 사랑은 멈추지 않은 채 커져가기만 했으니 살인 기계라 사랑도 비정상이겠거니 하는 수밖에 없다.

“비전하, 시중은 문 플레이스로 모신 다음에 들까요?”

시녀장이 물어서,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좀 적은 곳에서 노트코에 대해 찾아보고 싶었다. 특별히 왕에게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시녀들은 준비를 서둘러 왕후궁으로 움직였다. 그 행렬의 중간에는 당연히 라파엘이 있었다.

아름다운 문양으로 수놓인 벽지와 붉은 카펫, 섬세한 조각이 아름다운 샹들리에, 길고 높으며 큰 아치창,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긴 복도를 왕비의 행렬이 지나간다. 모든 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예를 표한다.

왕의 침궁 선 플레이스의 수많은 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가운데 왕비의 행렬은 천천히 복도를 벗어났다. 그 행렬이 출입이 엄금된 다리로 멀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눈이 부신 듯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전하, 버시슬 백작입니다.”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다리 위에서 시녀장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주며 라파엘이 “그게 누군데?”라고 물었다.

“그…… 전에 전하께서 쏘아 죽이신 그 여자의 아비입니다.”

아아, 라파엘은 그제야 이상하게 계속 말을 붙이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왕은 그 여자를 질투했었다고 고백했다. 여자는 왕의 손에 죽었다. 라파엘은 시녀장이 알려주는 쪽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마침 상대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꽃과 나뭇잎으로 시선이 반쯤 차단된 상태에서도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라파엘은 손을 뻗었다. 다리에 드리운 가지에 핀 하얗고 큰 꽃송이를 따서 시야를 확보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전하를 원망하나?”

딸이 죽었으니 당연히 원망할 테지. 그렇다면 그는 전하에게 위험인물인가? 라파엘이 물었을 때 시녀 아이 하나가 “웬걸요”라며 피식 웃었다. 시녀장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는 얼굴을 했지만 시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식의 죽음을 팔아 제 위험을 넘겼답니다. 도리어 여식의 죽음을 기꺼워할 테지요.”

시녀의 말에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리자 곧 왕비의 일행이 다리 위에서 움직여 문 플레이스로 사라졌다.

버시슬 백작은 그 모습을 보며 못마땅해 혀를 차고 있었다. 왕은 근위대장을 총애한다. 자신의 딸이 근위대장과 함께 있자, 질투한 나머지 딸을 총으로 쏠 정도로 총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른 아침에 왕의 침실에서 나오는 건 또 왕비다. 그것도 외출 가운 차림으로 왕후궁으로 건너가고 있지 않은가. 밤새도록 왕의 사랑을 받았을 여자는 아침 햇살을 받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도도한 시선이다.

‘빌어먹을 것.’

유니스가 잘만 했으면 저년을 물 먹였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일이다. 버시슬은 혀를 찼다. 유니스가 죽고 나니 괜히 그녀에게 높은 가치를 매기고 싶어진다. 이게 부모의 마음인지, 아니면 잃은 말에 대한 아쉬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안네마리라니, 말도 안 되지. 분명 다른 년일 텐데.’

버시슬 백작은 쯧쯧 소리를 내며 이미 아무도 없는 다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갈 길을 재촉했다. 유니스 덕분에 그는 현재 자신의 관직을 보전했다. 하지만 왕은 여우가 따로 없으니 언제 다른 핑계거리를 찾아내서 그의 목을 자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왕이 그의 목을 자르기 전에, 왕의 손에서 그의 목을 자를 칼을 빼앗아야 했다.

‘분명 저 비리비리한 계집의 정체는 왕의 아킬레스건일 텐데.’

버시슬은 신경질적인 눈으로 땅을 훑었다. 지난밤, 그는 훌랜드 남작과 같이 있었다. 아름답고 젊다는 점이 왕을 닮았지만 왕과는 몹시 다른 남자였다. 상대의 몸을 탐닉하는 그 남작의 몸 아래에서 버시슬은 환희에 젖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이 이야기를 꺼내자 남자는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상단을 움직여 확인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남작의 몸과 그 길고 뾰족한 성기를 떠올리자 또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계집의 정체를 알면 남작을 처리하는 게 좋겠지.’

사탕은 혼자 먹는 법이다. 괜히 여럿이서 먹는다고 사탕을 쪼개면 부스러기만 잔뜩 생기게 된다. 버시슬 백작은 남작을 처리할 방법을 떠올리며 길드들을 떠올렸다. 확실한 일처리라면 역시 길드 살수들이다. 듣기로는 라파엘 에반스가 깔끔하다고 들었는데 요즘 통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뭐, 상관없다. ‘검은 물’은 확실하다. 그들에게 의뢰하면 확실하게 처리될 것이다.

왕이 자리에 앉자마자, 보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측근 회의가 한 차례, 그리고 대신 회의가 그 뒤에 있을 예정이었다. 측근 회의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스완이었다. 스완은 안타까운 얼굴로 “죄송합니다만, 전하. 비서에게선 특별한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고문을 해볼까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아는 것이 없어 보여서 굳이 고문까지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서두를 열었다. 왕이 그걸 보고라고 하고 앉았느냐는 얼굴이 되자 스완이 입술에 마른침을 바르며 덧붙였다.

“인두를 집었더니 바로 똥오줌을 지리며 쓰러지는데 전들 어떡합니까…….”

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 뒤를 이어 바로 제럴드 라 쇼어 외무대신이 배턴을 받았다.

“노트코에 사자를 보낸 상태입니다.”

“뭐라고 사자를 보내?”

“대사에게 변고가 생긴 것 같으니 아는 것은 모두 말해달라고, 수색에 협조해달라고 했습니다. 도주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일단 염려하는 척하며 수색에 나설 예정입니다. 분명한 명분이 될 것이고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이 확실한 만큼 노트코에서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왕이 시선을 주자 대장군 하타가 고개를 숙였다.

“정식 추적조를 짜고 있습니다. 완벽한 추적조가 곧 1차 추적조에서 보내온 정보에 기초해서 빈틈없는 추적에 들어갈 것입니다.”

“거기에 첩자를 붙이지.”

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스완이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첩자…… 라고요?”

“노트코에 정식으로 들어가서 헤집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대대적인 수색조를 가장한 정식 추적조와 첩자조를 보낸다. 첩자들은 티스 옆에 있는 노트코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의 염탐을 주 임무로 하고.”

왕이 태연하게 말했다. 대사가 도망치든 사라지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말투였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사가 사라져 왕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와중에, 그걸 이용해서 첩자를 들여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왕이 놀랍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확실히 지역이 맞긴 합니다만.”

스완이 떨떠름하게 맞장구쳤다.

“명분도 확실하지. 대장군 하타, 바로 준비해라.”

“예, 전하.”

“외무대신. 사자에게 전서구를 보내 따라잡아라. 대사는 왕이 총애하는 충신으로서 왕은 특별히 대대적인 수색조를 보내 곤경에 처해 있을지도 모를 대사를 구할 예정이라고 덧붙여라.”

왕의 말에 제럴드가 허리를 숙였다. 왕이 궁정대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궁정대신. 여름 무도회가 지나면 밤 연회를 줄인다. 미리 준비하도록. 그리고 태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왕의 말에 궁정대신이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현재는 태후궁의 쪽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태후궁에서 태후와 육군 대장이 교접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만…….”

궁정대신이 왕의 눈치를 살폈다. 왕이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궁정 사교계에서 불륜 정도로 판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조심스럽게 육군 대장 쪽에 젊은 시녀를 붙여보았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그는 연인이 있다며 시녀를 거절한 모양입니다.”

궁정대신의 말에 왕이 그를 돌아보았다. ‘연인이 있다’며 거절했다고? 육군대신은 이미 초로에 가까운 남자다. 그가 태후에게 절조를 지키고 있다? 궁중 사교계가 어떤 곳인지 뻔히 알면서?

왕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육군 대장 쪽이 시녀를 거절했다, 라. 그렇다면 덫은 태후 쪽에 놓아야 하는 것인가?

왕은 궁정대신에게 “잘했어. 이번에는 이쯤 하지”라고 말했다. 덤불을 자주 흔들면 짐승은 도리어 덤불 속에 웅크리고 나오지 않는 법, 흔들었다 싶으면 물러설 필요가 있다.

시종장이 회의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리자 다들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응접실에 홀로 남은 왕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늘 그렇듯 일은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터졌고,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생각하고 계산하며 결정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잠깐 라파엘을 떠올렸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아름다운 연인, 그리고 자신을 묶으라고 충고해주던 순진하고 가여운 연인. 그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반짝이게만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왕은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만을 사랑하고 그만을 바라보다 그에게 짓밟힌 연인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쓰라렸다. 미안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바라는 문제도 아니었다. 물론 미안하고 용서를 바랐지만 그보다 먼저, 그는 순수하게 라파엘을 생각했다. 라파엘의 입장에서, 라파엘이 가엾고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쿠치아노.’

왕은 쿠치아노를 떠올린다. 쿠치아노는 분명 티오안에게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른다. 신들은 저들끼리 사랑하고 돌려 사귀기 일쑤였다. 쿠치아노는 그 진부한 세계에 빠지지 않고 홀로 고고한 척했지만, 그도 결국 그중 한 명에게 애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쿠치아노는 티오안을 찾아 여기까지 달려와 이런 고초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치아노는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 티오안으로서 자각하지 못했었듯 쿠치아노도 왕을 티오안이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표한 이를 찾지 못한 쿠치아노는 라파엘의 깊은 곳에서 반쯤 잠든 채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육되는 라파엘을.

왕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전하, 회의실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시종장의 말에 왕이 일어났다. 쿠치아노가 말없이 라파엘의 안에서 라파엘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보고 있었을 생각을 하자 끔찍하게 여겨졌다. 티오안 역시 그랬지만 티오안은 이미 신이 아니었고 무능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왕은 분명 괴로웠지만 그는 어린 시절 왕세자였으며, 탄압받고 있었으나 열린 미래로 가는 길 또한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 아니, 아니!

왕은 시종들의 재촉에 회의실로 움직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건 어쨌든 상관없다! 자신은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자신은 인간이었고,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탄압받았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그 가여운 연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인자로 키워져 낙인찍혔다. 살아남은 것만이 유일한 행운일 뿐. 괴로운 일조차 괴롭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안네마리는 학대당했다. 그런데 전능한 쿠치아노는 그저 손 놓고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국왕 전하이십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왕은 차가운 눈으로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건설대신 버시슬 백작이었다. 노골적으로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꼴이 역겨웠다. 딸자식의 죽음과 명예를 갖다 바쳐 관직을 유지하는 게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경들의 안색이 좋은 걸 보니 몹시 기쁘군.”

왕은 의자에 앉으며 싱긋 웃었다.

“여름 무도회가 경들을 즐겁게 하는 듯하여 나도 기쁘오.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소식이 있는데 들었는지 모르겠군. 외무대신.”

왕이 차례를 넘기자마자 제럴드가 일어났다. 미리 허가받은 대로 얘기하는 제럴드의 목소리를 듣는 사이 대신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노트코의 대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일행이 전부 탄 배에 혼자 타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도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무대신, 대사의 재산을 압수하라.”

왕명이 떨어지자마자 재무대신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재산을 압수한다는 조치는 반역자로 다루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확증이 없으니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는 점이 왕다웠다.

“궁정대신, 대사의 식구들을 궁으로 데리고 와라.”

인질로 감금해두겠다는 뜻임을 바로 알아들은 궁정대신도 고개를 숙였다.

“근위대. 궁정대신의 일을 돕는 것은 물론, 대사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과 노예들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찾아내라.”

왕명이 계속 떨어졌다. 대사에 대한 명령이 계속 떨어질수록 대신들의 얼굴은 굳어져만 갔다. 아직 대사는 반역했다는 것이 확실치 않다. 그러니 왕도 대사를 반역자로 규정하진 않지만, 미리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가 반역했다는 증거가 나오면 왕은 바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리라.

그러나저러나, 또 왕의 재산이 늘어나는 건가?

대사가 반역자가 되는 것 정도야 남의 일이니 내 알 바 아니라지만, 그 대사는 상당한 자산가였다. 그의 재산이 또 왕궁에 몰수되어 왕의 개인 재산이 된다는 것이 영 탐탁잖은 대신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노트코가 정말 우리와 반목할 생각인가?’

헤수스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 대륙을 통일한 강국이다. 주 바다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 헤수스를 정말 적으로 돌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대신들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계산이 오간다. 분위기가 침착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왕이 말했다.

“그리고 수도방위군 대장을 불러들여라.”

대신들이 일제히 왕을 바라본다. 대사가 혹시 수도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 대신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대사가 수도에 있다면, 분명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접촉하려 들 것이다. 그 누군가가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대사와 접촉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서로를 저울질해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대사를 산 채로 왕에게 갖다 바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때 왕이 말했다.

“왕궁에서 길드들의 존재를 묵인해주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평민들의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드들은 ‘질서를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 ‘질서를 해치는 자’로 최근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왕궁은 일벌백계로써 그들을 다스리고자 한다. 길드 ‘검은 물’을 잡아들여라.”

신하들이 이런저런 계산을 하다 말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은 헤수스의 국민들에게서 몹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국민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왕이지만, 어떤 대단한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님을 신하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웬 질서 유지? 왕은 저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길드는 필요악이다. 그리고 필요악에 관심을 둘 사내가 아닌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자정은 수도방위군이 담당하고 있으니, 왕은 차라리 수도방위군의 비리에나 신경 쓸지언정 길드 따위에는 일절 관심이 없을 텐데.

“거, 검은 물이요?”

대장군 하타가 당황해서 물었다.

길드 검은 물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살수를 여럿 배출한 곳으로, 길드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무시무시한 길드로 유명했다. 하지만 하타 자신이야 장군이니 아는 것이고 이 자리에 있는 대신들은 모르는 사람도 여럿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사에는 무게감이 없는 존재인데, 왜 왕이 직접 언급씩이나 하는 건가. 혹시 군대에 무슨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걸까?

하타가 걱정하고 있을 때, 다른 한 남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검은 물의 존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버시슬 백작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를 쳐낼 생각인가!’

길드들은 대체로 귀족 한두 명을 스폰서로 삼아 움직인다. 그리고 검은 물의 스폰서는 버시슬이었다. 그가 즐기는 어린 남자아이들을 상납하는 곳도 검은 물이었던 것이다. 아마 시기상 조금만 잘 맞았더라면 라파엘도 버시슬에게 몸을 바쳐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라파엘이 길드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의 스폰서는, 가문의 치부를 맡겨두었던 쇼어 공작이었다. 쇼어 공작이 죽고 나서 검은 물은 급히 귀족 스폰서를 필요로 했다. 길드를 보호해줄 수 있는 권력자. 건설대신 버시슬은 거기에 잘 맞는 인물이었다.

‘아, 안 돼!’

버시슬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벌백계라 하심은, 길드 중 한 길드를 쳐내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아무 길드나 상관없지 않습니까?”

버시슬이 물었다. 왕이 무심한 눈으로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버시슬이 질끈 눈을 감는 것을 보며 왕은 ‘오호’ 하고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단지 라파엘의 수난에 열을 받은 것이었지만 의외의 보너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버시슬이 제대로 표정 관리를 못 할 정도로 당황한 걸 보니, 버시슬과 검은 물 사이에 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네마리를 떠올리자 왕은 다시금 이가 갈렸다. 자신을 묶으라고 말하던 그 얼굴이 너무 담담해서, 그 얼굴을 떠올리자 검은 물이라는 재수 없는 이름의 길드의 관련자 놈들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용서를 모른다는 목소리가 담백하면서도 다정해서, 왕은 안네마리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라.”

“……예?”

대신들이 동시에 입을 벌리며 멍하니 왕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의 왕은 약간 정신 이상자같이 느껴진다. 물론 왕은 늘 정상인을 가장한 미친놈이긴 했지만, 오늘은 계속 뜬금없이 구는 게 이상하다. 도대체 누구를 타깃으로 이러시나?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대신들이 속으로 덜덜 떨고 있을 때, 왕은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채찍 50대형에 처해라.”

분명 이런 것에 전혀 관심 없던 분이 왜 이러실까. 대신들은 자신들이 버렸던 사생아들을 떠올리며 애매한 얼굴로 “예, 전하”라고 동시에 대답했다. 왕의 뒤에 서 있던 스완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왕이 누구 때문에 이러는지는 확연했다. 왕비 때문이다. 쌍둥이로 태어나 버려졌던 왕비가 길드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학대받으며 비인간적으로 자란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왕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스완은 마른침을 삼켰다. 왕은 과거를 보상받고자 하는 인물이 아니다. 복수심이야 당연히 있지만, 그래도 뜬금없이 이런 식으로 모든 과거를 정리하고자 한 적은 없었는데.

‘아니, 딱 한 번 있었지.’

왕비가 그의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왕은 그동안 두고 보았던 쇼어 가문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그때야 왕이 반쯤 미쳤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원래는 아닌데…….

아, 이젠 체계적으로 미치실 예정인가?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수도방위군 대장이 들어왔고, 그도 ‘검은 물’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자잘한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왕이 왜 이러나 싶은 얼굴이다. 하지만 그는 군인답게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대들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어.”

왕이 회의를 마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시작했다. 그 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걸 알기에, 대신들도 그렇게 귀 기울여 듣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다들 얼굴만은 경청 그 자체였다.

“특별히 그대들의 추문을 들춰내고자 하는 일이 아니다. 부디 마음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군. 그대들이 밤에 발도 뻗지 못하고 잠드는 일은 바라지 않아.”

뭐, 추문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렇지?

왕이 잔인하게 웃었고, 대신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스완은 나오려는 한숨을 되삼키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왕이 일어나며 아름다운 얼굴로 환한 미소를 날리고 가버리자,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스완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 서린 분노와 걱정을 보며 스완은 “네, 네”라고 중얼거렸다. 제가 죽일 놈이죠. 네네, 저분은 전하이시니까요. 제가 대신 죽어야죠, 어쩌겠어요. 스완이 입술을 올린 순간 대신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비 냄새가 짙어졌다. 라파엘은 커다란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는 세 종류로 세계 지도와 노트코의 지도, 그리고 티스의 지도였다. 왕이 그렇게 외우라고 할 때는 외우지 못했는데, 정작 필요를 느끼자 노트코가 어디에 있는지 외울 수 있었다. 주 바다 경계선과 노트코, 그리고 티스. 노트코의 대사는 헤수스로 오려 했고, 헤수스로 오는 가장 빠른 해로는 티스에서 배를 타는 것이다. 하지만 대사는 배를 타지 않았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용을 정확히 들은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어.’

그가 마지막으로 소재지가 확인된 곳이 어딘지, 누구와 접촉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사전 정보들이 없는 한 아무리 라파엘이라 할지라도 대사를 찾아낼 수 없다. 라파엘은 결국 지도에서 눈을 뗐다. 찾아낼 수 없을뿐더러, 멀리서 왕의 일행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절제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라파엘이 고개를 돌리자 시녀장이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라고 물어왔다.

“아니, 전하께서 다가오고 계셔서.”

왕비의 말에 시녀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왕비가 하는 말은 늘 옳았다. 왕비가 비 온다고 하면 비가 오는 거였다. 지금 당장은 비가 오지 않아도 곧 왔다. 왕비가 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였고, 특히 왕비가 왕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면…….

“안네마리, 아침은 먹었느냐? 어째 굶은 얼굴인데.”

오는 것이다.

왕이 들어오자 모든 자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나 그 인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왕은 라파엘에게 다가가 안색을 살피다 입을 맞췄다. 천천히 그 입안을 핥아도, 그 입에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뭘 먹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시녀장, 안네마리가 아침에 뭘 먹었지?”

이제까지 많이 먹으라는 소리는 종종 했지만 확인한 적은 없었기에 시녀장이 당황했다. 그러나 왕의 질문에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법, 시녀장은 순순히 대답했다.

“차와 샌드위치 반 조각, 쿠키 한 조각입니다.”

“맙소사. 사슴도 그보다는 더 많이 먹겠군.”

왕이 웃고 있었지만 시녀들은 왕이 몹시 불쾌해졌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본래도 왕비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먹는 것보다는 입는 것에 더 신경을 썼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것에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져, 시녀들은 당혹했다. 시녀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시녀들을 한 번 싸늘하게 노려본 뒤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모습만 본 라파엘은 왕이 기분이 좋은 거라 생각했다. 왕이 라파엘의 얼굴을 마주하며 더 싱그럽게 미소 짓다가 고개를 돌려 라파엘이 보던 지도에 시선을 두었다.

“아아.”

왕은 라파엘이 뭘 보고 있었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는 웃으면서 라파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왕이 머리를 자주 쓸어내리는 탓에, 라파엘의 머리칼은 대체로 긴 머리를 풀어서 곱게 흐트러뜨린 모양이었다.

“신경 쓸 것 없다. 늘 문제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왕이 그 이마에 키스했다.

“관심이 가나? 설명해줄까?”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찾으러 가도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목소리가 어찌나 상냥한지, 된다고 하는 줄 알았다. 라파엘은 “그렇다면 제가 들어도 소용이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라고 왕에게 되물었고, 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나는 네가 궁금하다는 건 다 말해줄 생각이니까.”

왕은 라파엘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무릎을 숙여 라파엘과 시선을 맞췄다.

“정말이다, 나는 네가 궁금한 것을 뭐든지 말해줄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것이다.”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특별히 뭔가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뭔가를 원해본 적도 없었다. 원한 것이 있다면 왕 정도이지만, 왕은 지금 그의 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왕은 모든 걸 알려주고, 모든 걸 손에 넣어주겠다고 말한다. 그 목소리가 애절해서, 라파엘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왕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이상하지?”

“아닙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도, 왕은 뭔가를 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겨우 이해했다. 왕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왕’이지만, 라파엘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지 않았던가. 세상의 빛이란 빛은 모조리 그러모아 만들어진 듯한 사내에게, 라파엘도 뭔가를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줄 수 없어서 가끔 라파엘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라파엘의 마음속엔 가끔 그런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러니 왕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충동을 선사하는 듯하니까.

“토끼 귀를 달아볼까? 그럼 네가 진짜 토끼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

왕이 뜬금없이 토끼 타령을 했다. 하지만 왕의 토끼, 거북이, 새, 사슴 타령은 늘 뜬금없이 시작되는 것이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라파엘조차 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읽은 이야기에 그런 것이 있었다. 자유자재로 토끼가 되는 마법사 이야기.”

“모릅니다.”

“나중에 내가 읽어주지.”

왕이 라파엘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쿠치아노에게 다시 욕설이 치밀어 오른다. 쿠치아노는 이 작고 여린 연인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치아노는 이 연인을 방치했다. 쿠치아노는 티오안을 찾길 원했고, 그 외에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신이라는 것들이 다 그렇지.

신과 융합했지만 여전히 반은 인간인 왕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예.”

이야기 따위 별 관심은 없지만, 왕이 읽어준다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라파엘에게 왕이 힘주어 말했다.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책을 읽어주마.”

“예.”

“내가 아는 모든 자장가를 불러주지.”

자장가?

라파엘이 갑작스러운 왕의 제안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만 말했다. 라파엘이야 본래 덤덤한 성격이라 그저 의아해하는 수준에서 그쳤지만, 두 사람의 주변부는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웬 자장가? 다들 정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야기책을 대령해놔야겠구나, 라는 건실한 생각은 아주 조금뿐, 대부분은 왕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오늘 회의에서도 이상한 명령을 내려서 대신들이 아직도 스완에게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모양이던데, 정말 오늘따라 이상하다.

왕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훔쳐보고 싶어하는 시종들이 서둘러 시선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흥, 왕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점심을 먹지.”

왕이 라파엘을 품에 넣으면서 속삭였다.

“나를 돕고 싶다면 저런 지도보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다오.”

갑자기 왕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졌다. 라파엘은 가만히 왕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시녀들의 얼굴은 확 굳어졌다. 왕의 목소리에선 사탕으로 아이를 꼬여내는 듯한 음험한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식사를 위해 온실로 옮기는 내내 왕은 라파엘에게 한껏 상냥하게 굴었다. 사실 왕은 ‘평생 행복하게 해주리라. 상냥하게 해주리라’라고 다짐하고 있었고, 그 다짐을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이 라파엘에게 뭔가를 물어보려 하는 것이 확실했던지라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약간 숨긴 게 있는 듯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왕은 탁자 앞에서 라파엘을 무릎 위에 앉히고, 그 입술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라파엘은 왕이 원하는 대로 그 무릎에 앉은 채 아기 새처럼 음식을 받아먹으면서도 계속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오래도록 왕비를 모셔온 시녀들의 눈에는 그 얼굴에서 희미하게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늘 그렇듯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네가 어느 길드 출신이었더라?”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은.

모두가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왕이 왕비에 대해 모르는 게 뭐가 있겠는가. 특히 시종들은 왕이 왕비에 대하여 보고받는 것을 직접 보았기에 더욱 의혹을 느꼈다. 딱 봐도, 왕이 물으려는 건 왕비의 출신 성분 따위가 아니었다. 왕은 왕비에게서 듣고 싶은 뭔가가 있었다.

“검은 물입니다, 전하.”

“참, 그랬지. 몹시 명망 높은 길드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 길드는 어디에 있느냐?”

라파엘이 받아먹다 말고 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몹시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얽힌다.

“길드 본부의 위치…… 말입니까?”

안네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란스러운 눈이다. 언제나 왕의 질문에 대답을 망설이지 않던 안네마리가 처음으로 대답을 꺼린다. 왕은 더욱더 환하게 웃었다. 그래, 길드 본부의 위치. 왕이 한 번 더 말했지만 안네마리는 아무 말이 없다. 왕은 안네마리의 작고 얇은 입술 사이에 작은 스테이크 한 조각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네가 큰 곳이 궁금할 뿐이다. 대답하기 곤란하느냐?”

“아니, 아닙니다. 제가 큰 곳은 길드가 아니라 목장이어서.”

“목장이라. 어느 목장이지? 위치가 기억나느냐? 네가 어디서 컸는지 몹시 궁금해. 어느 하늘을 보았는지, 어느 나무를 보았는지, 어느 대지 위를 달렸는지. 사랑스러운 내 사슴을 키운 땅은 어디인지. 내게 말해주지 못할 뭔가라도 있는 건 아닌지. 가령 예를 들어 옛 약혼녀라든가……?”

왕의 수작질에 넘어간 라파엘이 “아니요. 아닙니다”라고 서둘러 대답했다. 왕이 여자 때문에 잔혹하게 대했었다는 것이 기억나자 라파엘은 바로 지명을 입에 담았다. 지명과 정확한 주소를 대면서 라파엘은 약혼녀 따윈 없다고 몇 번이나 왕을 안심시키려 들었다. 약혼녀는 없었다. 여자도, 다른 사람도 없었다. 라파엘의 건조한 인생에 밝은 빛은 왕뿐이었다.

왕이 기쁘다며 라파엘을 끌어안는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왕은 라파엘을 끌어안고 있었다. 왕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북소리처럼 크고, 속삭임처럼 다정하다.

“너는 나만을 좋아하지.”

왕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라파엘이 그만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몹쓸 짓을 해버렸다. 알고 있었는데, 그랬는데도. 

“예, 전하.”

라파엘은 왕이 믿어주는 것 같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내 이제 믿느니.”

“예, 전하.”

“내 사랑스러운 안네마리. 너는 내 곁에서 영원히 사랑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 사랑을 받을 존재였던 너에게 죄악을 범한 무례한 자들은 그 죄를 갚아야 할 것이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얼굴이 바로 앞에서 웃고 있었다.

“저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왕의 정원에서 길을 잃어 멀리 나간 토끼라 할지라도, 왕의 토끼에 해를 가한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원히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영 어지러웠다. 죄악을 범한 사람들은 토끼에게 해를 가해서 왕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라파엘이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있자, 왕이 그 코끝에 키스했다.

“너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그것은 맞는 말일 테지.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순간 눈이 멀 것 같았다. 너무나 빛나는 존재에 압도되었다. 그저 아름다워서 손을 뻗어보기조차 미안한 존재, 그것이 왕이라는 걸 라파엘은 처음 깨달았다. 그랬다. 라파엘은 처음부터 왕의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왕에게 압도되어, 내내 왕에게 옭아매일 수밖에 없었다.

“예, 전하.”

라파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왕은 거기에 힘을 얻었다. 라파엘이 부정하지 않는 이상, 라파엘은 왕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태어난 그 순간부터, 라파엘은 왕의 것이었다. 어느 여자의 배를 빌어 태어났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인정한 순간, 라파엘은 왕의 것이 된다.

“그래, 그러니 나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이 라파엘의 이마에 이마를 대었다.

“지지해다오.”

왕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라파엘은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왕의 목소리는 근사했다. 그 목소리는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의 귀를 황홀하게 울렸다. 가슴을 두근두근 쳐서,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끝까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예, 전하.”

라파엘은 왕을 지지할 것이다. 왕이 무엇을 하든, 왕이 어떤 폭정을 펴든 그를 지지할 것이다. 위험할 때 목숨을 걸고 왕을 지켜낼 것이다. 왕이 말하는 ‘배신’을 몇 번 당하든, 그의 곁에서 그를 사랑할 것이다. 가끔 사랑과 등을 맞댄 증오가 모습을 드러내도, 아마 라파엘은 결국 왕의 곁에 남을 것이다.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온실 유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왕이 라파엘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왕의 무릎에서 조금 미끄러졌던 라파엘이 다시 왕의 품으로 바짝 끌려갔다. 왕의 손에 의해 라파엘의 팔이 왕의 목을 둘렀다.

“시끄러워서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말도, 않…….”

왕의 말에 라파엘이 뭐라고 대꾸했지만, 왕이 조금 더 그를 끌어당겼다. 약간의 틈도 벌어지지 않은 채 둘이 꼭 붙어 앉게 되자, 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뭐라고 했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왕이 큭큭거렸다. 라파엘의 몸에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베르가모트 향을 맡으며 왕이 “지금 말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머리도 새 같아서야 어디에 쓰지?”라며 라파엘을 놀렸다. 왕은 라파엘을 놀리는 것이 재밌는 듯 즐겁게 웃고 있었지만,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왕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오늘 무도회에서 권투 대회가 있어.”

왕이 라파엘에게 속삭였다.

“네가 아무리 토끼라지만 멍청하게 아무에게나 귀를 쫑긋거리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았느냐?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만 응원하란 말이야.”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 라파엘의 검은 머리에 가볍게 얼굴을 비볐다. 자신이 꼭 이길 테니 두 눈 잘 뜨고 보라는 둥, 너무 잔인한 것 같으면 감아도 된다는 둥, 왕이 라파엘에게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특수군은 시선을 피했다. 지금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건지…….

하지만 왕비는 너무나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왕비는 누구의 시선도, 누구의 생각도……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늘 그랬듯이, 그는 왕의 말만을 듣고 있었다. 곧은 시선은 왕만을 향해 있었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  §  §

태풍이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궁정은 준비를 서둘렀다. 궁정대신의 지휘 아래 궁정이 서둘러 태풍 대비를 마치는 동안, 한편에서는 여름 무도회의 마지막 무도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지막 무도회는 여름 무도회의 절정이자, 여름 무도회라는 이름 밑의 수많은 거래들이 종지부를 찍는 무도회다. 크고 작은 거래들이 오갔고, 많은 뇌물과 배신도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오후 시간 내내 라파엘도 치장에 서둘렀다. 푸른 드레스에 자수가 들어가고 허리가 극단적으로 강조된 드레스였다. 쇄골을 겨우 드러낸 드레스였지만 그나마 길게 늘어뜨린 에메랄드 목걸이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드레스 자락을 커튼처럼 주름 잡아 위로 올려 대부분 무릎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어떤 곳은 주름을 많이 잡아 무릎 위쪽을 살짝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다리는 비단 스타킹이 감싸고 있다. 구두는 파란색 하이힐. 인조 보석이 아닌 진짜 보석이 달려 있는 값비싼 것이었다.

왕비의 침실은 도둑 떼라도 든 것처럼 엉망이었다. 라파엘은 내내 여름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왕이 라파엘의 공식 석상 참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몹시 중요한 마지막 무도회는 정해진 듯 불참해서, 귀족들은 늘 왕비에 대해서 ‘아주 총애받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왕은 잔인한데다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역시 왕비는 액세서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귀족들은 또 갈피를 못 잡은 채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왕은 이번엔 왕비를 동반한다고 선언한 상태였고, 귀족들은 대단히 기대하고 있었다. 시작 무도회를 정부에게 빼앗긴 왕비가 얼마나 마무리를 잘할지 짓궂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선을 잘 아는 시녀들은 기합이 단단히 든 채 라파엘을 치장하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거의 라파엘을 뒤집어서 탈탈 털고 싶어하는 듯한 시녀들에게 이리저리 끌리며 라파엘은 천천히 요염하고 청순한 왕비가 되어갔다.

“비전하, 잠시 보고를……. 곤란하십니까?”

방에서 라파엘을 감시하다 다시 창 밖으로 쫓겨났던 그레이드가 창을 넘어와서는 난장판에 입을 다물었다. 시녀들이 왕비의 머리를 올리다 말고 그레이드를 노려보았다. 보면 모르겠냐는 시선이 야수마냥 무시무시해서 그레이드는 기가 눌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매사에 무심한 왕비는 “말해”라고 대답했다.

“아, 아니. 다음에 뵐까요?”

“상관없어. 말해. 내 총 이야기지?”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굽실거리며 시녀들 사이를 지나갔다. 자신의 머리보다 더 높이 드레스를 쌓은 채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시녀, 보석함을 세 개나 든 채 쏟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시녀 사이를 지나갈 때에는 그녀들의 이 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이윽고 그레이드가 라파엘의 근처까지 와서 무릎을 꿇었다.

“예, 비전하. 총의 시험 사격을 다 마친 상태입니다만 그동안 보고를 드리기 어려워 늦어졌습니다.”

그레이드는 완곡한 표현을 썼다. 보고를 드리기 어려웠던 ‘그동안’에는 왕이 라파엘을 강간했던 시간이 포함되어 있지만, 라파엘은 아무 생각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적으로 보고드리자면, 반수 정도가 ‘쓸 수 있는 총’이라 사료됩니다. 하지만 쓸 때마다 쓸 수 없는 총이 생기므로, 반드시 쓸 수 있는 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머리를 하는 중이라 정말 시선만 흘끗 주는 것이 전부였다.

“어쨌거나 두 번의 시험 사격에서 폭발하지 않은 총이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언제 총들을 받을 수 있지?”

“지금이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만…….”

그레이드가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가져오겠습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그래, 라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떠돌았다. 그레이드의 입장에선 라파엘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갈 수 없었고, 라파엘은 할 말을 다 했기에 그레이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레이드가 물러감을 허락받으려 했을 때 라파엘이 물었다.

“총은 어땠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다.

라파엘은 자타가 공인하는 건조한 살인 기계였지만 그에게도 취미는 있었다. 그는 무기 컬렉터였다. 수많은 무기가 그의 손에 있었지만. 총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총은 그가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쓸 수 없는 무기를 모으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궁에 들어와 수많은 총들을 손에 넣었다. 개조하기에 충분한 양의 총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신력을 가지고 있었고 총을 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가지지 못했고 익히지 못했던 단 하나의 무기를 보고 있자니 희미한 정복욕이 끓어올랐다.

물론 라파엘은 왕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가 총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전력에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과 함께 이런 희미한 정복욕도 없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라파엘은 총이 어떤 위력이 있었는지 타인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제작자의 견지에서.

그런데 그레이드가 갑자기 눈을 반짝 빛냈다.

“굉장합니다!”

그레이드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울려 퍼진 목소리는 그레이드 한 사람의 것이었지만, 마음만은 왕비의 침실을 경호하는 모든 특수군이 함께했다.

대단해, 대단해! 대단한 줄 알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대단해도 좀 변태라고 생각했는데, 변태고 뭐고 너무 대단해요! 뭘 원하세요! 제가 뭐든 다 해드릴게요! 그런 소리들이 시커먼 남자들의 근육으로 짜인 마음속에 가득했다.

“조, 조금만 더 개조하시면 분명 상용화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합니다! 비전하는 천재십니다!”

“…….”

“사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사부라고 부르게 해주십시오! 저는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정말, 비전하께선…….”

“사형도, 사부도 안 돼.”

라파엘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레이드, 그리고 시녀들조차 의외의 눈으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왕비가 이렇게 뭔가를 딱 잘라 말하는 것은 몹시 드물다. 대체로 왕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가 뭘 말하든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다. 본인이 정치나 왕궁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인지, 아주 싫지 않은 한은 상대의 말에 특별히 간섭하거나 거부한 적이 없었는데.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라파엘은 늘 그렇듯 제대로 된 해명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레이드는 시무룩한 얼굴로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기계니까.”

라파엘은 단호히 말했다.

크면서 내내 들었던 말이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기계다. 그러므로 너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너는 괴롭지 않을 수 있다. 너는 기계다. 그리고 라파엘의 별명은 정말 ‘살인 기계’가 되었다.

잠시 그레이드는 말을 잃었고, 시녀들은 손놀림을 멈췄다. 하지만 라파엘은 늘 그렇듯 차가운 얼굴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얼굴. 심지어 시녀들조차 라파엘의 그 무표정에서 어떤 기분도 읽을 수 없었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런 말을 하면서 정말 아무 생각도 없다면…… 그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전, 비전하가 좋습니다.”

그레이드가 말했다. 그리고 그레이드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것같이 놀란 얼굴로, 제풀에 경악해선 덧붙였다.

“물론, 사형이나 사부로서 말입니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기계는 사형이나 사부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안 돼.”

라파엘이 다시 말했고, 그레이드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드도 길드 살수 출신이지만, 검은 물 출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레이드는 길드라고는 해도 소규모 길드 출신이라 검은 물 같은 유명 길드의 살수들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무성한 소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문일 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레이드는 입술을 깨물고 싶어졌다.

“같은 스승에게서 배우신 게 아니니 사형은 안 되고, 왕비 전하께서는 전하의 허락 없이는 누구의 스승도 되지 않으십니다.”

계속 반복될 것 같은 문답을 멈추게 한 것은 시녀장이었다. 시녀장의 말에 그레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한 그레이드는 허락을 받자마자 사라졌다. 그리고 라파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놀라던 그레이드의 얼굴이 떠오르자 라파엘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추상적으로 말했나?’

자기 자신이 정말 기계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물론 인간이다. 단지 기계같이 키워졌고 기계에 가까운 인간이니, 누군가의 모범이 될 인물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는데.

‘하긴. 정말 기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

라파엘 에반스가 정말 살인 기계라고, 그 심장에 시계 장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당수 있었다. 오죽하면 돈 많고 할 일 없는 귀족 나리는 살인 기계의 심장을 가져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심장이 정말 인간의 것인지 아니면 기계 장치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괜히 가슴을 갈라보겠다고 하기 전에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눈치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라파엘은 잠시 그런 것을 걱정했다. 그런 사이 시녀들은 왕비의 치장을 거의 다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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