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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애증과 용서 (36/47)

제11장 애증과 용서

여름 햇빛이 싸늘하다. 왕은 자신의 손바닥을 비추는 빛이 싸늘하다는 생각을 하며 실소했다. 여름 햇빛이 싸늘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여름 햇볕은 당연히 뜨거운 것이다. 당연히……. 

“제 여식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까부터 시끄러운 개 한 마리가 짖고 있다. 왕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댄 채 개를 바라보았다. 왕의 차가운 눈길에 개가 움찔거리면서도 다시 말을 이었다.

“가여운 아이입니다. 어린 날 시집가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가진 행복을 가지지 못하여 부모에게 돌아온 그 가여운 아이가 도대체 전하께 무슨 죄를 지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늙고 비루하며 쓸모없는 개.

왕은 찻잔을 들었다. 조금 식어 있던 차는 뜨거운 차로 바뀌어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왕은 개를 조져버릴까 생각했다. 그는 지금 이 개가 몹시 거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개의 딸년에게 노여웠던 것이지만, 이 개 또한 쓸모도 없는 게 욕심만 많았다. 개란 모름지기 충성스러워야 하는 법인데, 이 개는 그렇지 않았다. 호시탐탐 주인의 것이나 처먹으려 들면서 똥오줌은 가리지도 못하고, 아무나 물고, 전염병도 있어 보인다.

‘차라리 개라면 귀여운 점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왕은 눈앞의 중년 신사가 개가 아닌 점이 아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딸의 비극을 항의하는 아버지처럼 보였지만 왕은 그가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은 잠시 계산해본다. 그는 이 늙어서 자존심만 남은 중년 남자에게 젊고 스마트한 청년 남작을 하나 붙여뒀었다. 그 젊은 남작은 이 남자에게 반년에 한 번씩 독을 먹이고 있다. 그 독은 조금씩 남자의 생명을 앗아가고, 내년이나 후년쯤 남자는 하늘나라든 지하 세계든 대지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멀지.’

불행히도. 왕은 혀를 찼다. 안타깝게도 이 개의 콧대를 당분간은 높여줘야 할 모양이다. 뭐, 괜찮겠지.

왕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왕이 노골적인 미소를 짓자 남자가 또 움찔 몸을 굳혔다. 하지만 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왕의 말에 남자는 잠시 주뼛거렸다. 왕이 거래를 제시할 줄 알았는데, 왕은 도리어 그에게 제시해보라 말하고 있다. 곤란한데. 남자는 여전히 슬픔에 찬 얼굴로 낭패감을 숨겼다.

왕은 그의 딸을 죽였다. 그의 딸이 왕의 정부에게 좀 치근덕거린 모양이다. 그러나 유부남과 유부녀에게 한없는 자유를 인정하는 이 궁정 사교계에서 딸의 행위는 비난을 살 만한 행위는 되지 않는다. 단지 문제라면 딸이 유혹하려고 들었던 상대가 미혼남이라는 것과 그 미혼남이 심지어 왕의 정부였다는 사실뿐.

“제 딸아이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값을 치를 수 없…….”

“그럼 우리의 이야기는 끝났군.”

왕이 말을 자르려 한다.

“……지만, 가버린 아이를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전하, 이 쓰라린 상처를 가진 아비가 조그만 위로를 바라도 괜찮겠습니까?”

드디어 본론이군. 왕은 지루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어서 말하라는 제스처에 남자, 버시슬 백작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수로 공사 재정의 면책권을 원합니다.”

이게 본론이었군. 왕의 뒤에 서 있던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여운 딸자식의 비참한 죽음’을 팔아서 자신의 안위만을 보호하려는 아버지라니,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스완은 귀족답게 어떤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왕이 피식 웃었다. 수로 공사 재정의 면책권이라. 많이 해먹은 줄은 알았지만 상상 이상인가 보다.

“좋아.”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때까지 왕의 곁에 가만히 서 있던 궁정대신이 덧붙였다.

“단, 장부의 면책권을 받는 대신, 이번 일은 자네 딸의 잘못으로 알려져야 하네.”

그러자 아까까지 비참한 죽음이 어쩌고 했던 남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정중하게 궁정 인사를 해 보였다.

“물론입니다. 명분은 확실하게 유니스의 책임으로 해두겠습니다.”

말은 궁정대신이 했지만, 남자는 왕에게 대답했다.

“좋아.”

왕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원하는 것을 다 받은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알현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나가자마자 근위병들이 더러운 것을 본 마냥 서둘러 문을 닫았다. 왕이 사자를 조각한 팔걸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궁정대신에게 “다음은?” 하고 물었다. 궁정대신이 서류를 팔락였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 혼자 있고 싶군.”

왕의 말에 궁정대신이 스완에게 시선을 주었다.

궁정대신은 오랫동안 중립에 서 있다가 최근 친왕파로 돌아섰을 정도로 몹시 신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왕이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줄 정도로 유능한 자이기도 했다.

그가 왕의 이부동생이자 최측근인 스완에게 눈짓으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스완이 코끝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있을 일이라고 해봐야 뻔하지 않느냐는 얼굴에 궁정대신이 아아 하고 소리 없이 신음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비서관을 대기시켜놓을까요?”

“방 밖에.”

“예, 전하. 그럼 저녁에 무도회에서 뵙겠습니다.”

궁정대신이 절도 있는 인사를 해 보이고 문으로 사라지자, 왕이 고개를 돌려 스완을 바라본다. 너는 왜 나가지 않느냐는 시선에 스완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 외로우실까 봐요.”

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을 뿐이었다. 스완이 웃는 얼굴로 그 손에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왕이 손을 내젓다말고 뭔가 닿자 흘끗 시선을 주었다.

“길드 ‘검은 물’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수도방위군 대장에게서 빌린 것인데 전하께 올린다고 하진 않았기 때문에 좀 지저분합니다.”

“……이게 뭐냐?”

“홀로 계실 때 심심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이 착한 동생은 형님이 심심하신 걸 볼 수 없어서요. 눈물 나는 충성이지 않습니까? 스완이 능청을 떨었고, 왕은 서류를 받아들면서도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은, 스완의 그다음 말에 굳어졌다.

“라파엘 에반스는 ‘검은 물’ 출신의 살수입니다. 그는 끝까지 ‘검은 물’과만 거래했기 때문에, 그에게 의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검은 물’을 통해야만 했지요. 그가 독립한 뒤에도 말입니다.”

왕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푸른 눈이 단숨에 적의로 차가워지는 것을 보면서도 스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시려면 그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건 전하이십니다. 에반스의 배경은 그 누구보다 척박합니다. 불행으로는 남에게 져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문서에 쓰여 있는 건 지옥입니다.”

왕은 고개를 내려 문서를 바라보았다. 문서는 몹시 두꺼웠다. 지옥? 왕은 스완이 타인의 괴로움에 대해 그렇게 단언하는 것을 보았던 적이 없던지라 잠시 두려워졌다.

그는 이미 라파엘을 괴롭혔다. 라파엘은 밤새도록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명을 삼키려 애쓸 때마다 왕은 더 잔인하게 라파엘을 능욕했다. 라파엘은 온몸에 힘을 준 채 왕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시트를 움켜쥔 손은 왕에게로 향하다가 다시 시트로 떨어지길 반복했다.

라파엘은 왕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라파엘의 의지였다. 라파엘은 내내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짓밟는 자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던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방비한 얼굴에 떠오른 크나큰 배신감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여자를 안으면…… 기분이 좋습니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라파엘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이다. 말의 작은 씨앗 하나가 몸 안에서 독초를 피우기 전에 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그런 걸 물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달콤한 행복 때문이었다. 행복이 너무나 달콤해서, 마치 입안에서 녹을 것처럼 달콤해서, 현실감이 없어서, 그는 도저히 현실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 행복이 깨질지도 모를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스완이 나가고 혼자가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왕은 문서를 그저 노려보기만 했다.

왕이 말하는 ‘혼자’에는 시종들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근위병 등과 여전히 알현실에 함께 머물러 있었다. 왕의 차가 조금이라도 식으면 차를 바꿔주면서, 시종장은 왕의 안색을 살폈다. 왕과 왕비에게 좋지 않은 사건이 있었던 지도 벌써 나흘째, 왕은 정사를 보는 데도 무리가 없었고 건강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종장은 쉽게 그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자 평생 해온 일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왕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씩 졸았지만, 곧 깨어나곤 했다. 밤에도 서류를 받아서 읽었고, 왕의 침실은 거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새벽녘, 불을 켤 필요가 없을 때쯤이 되어서야 왕은 잠들었다. 하지만 곧 일어나 시중을 받고 그날의 업무를 시작하곤 했다.

때때로 왕은 멍하니 앉아 어떤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 생각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의 식사량은 반 이상 줄었고, 말수도 상당히 줄었다.

“전하, 조금 주무시겠습니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은 내내 잠을 못 자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짬이 날 때마다 수면을 취하곤 했었다. 왕비와의 일이 무조건 왕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건 시종장이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고, 왕을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제라면 분명 잤을 텐데, 왕은 오늘은 자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노려보던 문서의 표지를 넘겼다.

졸리고 피곤했다. 정신이 혼미해서 솔직히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파엘과 관련된 문서라고 생각하자 볼 마음이 생겼다. 잠이 더 급선무인데도, 잠을 미뤄놓고 문서를 볼 마음이 든다.

사랑은 사랑이야. 왕은 스스로를 비아냥거린다. 그 사랑을 부숴버린 병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역시 너무 아플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랑이지……. 왕은 아까보다 누그러져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렇게 미쳐서, 앞뒤 재지도 못하고, 천국과 지옥을 수천 번씩 오가는 이 감정이 바로 사랑이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지만,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이 감정이…….

탁자 위에 드리운 햇살이 여전히 싸늘하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어째서 겨울 햇빛처럼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왕은 허공 위의 햇빛을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햇빛은 허무하고 뜨겁다.

왕은 첫 장에 시선을 주었다. 검은 물 길드의 연대순 행적에 대한 요약이었다. 별별 범죄를 다 저질렀군. 왕은 혀를 차며 빠르게 서류를 넘겼다. 특별히 정독할 생각은 없었다. 라파엘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검은 물’이라는 이름뿐, 그 외의 행적들은 특별히 라파엘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청부살인’ 정도일까.

건너뛰면서 대충 훑던 왕의 눈길을 사로잡은 단어는 ‘길드 살수’라는 부분이었다. ‘길드 살수 육성’이라는 부분을 읽기 시작하며 왕은 피식 웃었다. 라파엘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분명 어린 토끼, 어린 거북이, 어린 새, 어린 사슴이지.’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분명 라파엘도 계속 저러했을 것이다.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으려나? 왕은 어린 시절 라파엘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한 번 생각해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왕은 무력했다. 무력했을 때 만났다면, 라파엘은 왕에게 독이 되었으리라. 왕은 어린 시절 사랑에 빠져 앞뒤 분간도 못하고 철없이 자신을 드러냈다가 무참히 제거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만났더라면 귀엽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왕은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때까진 왕의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곧 왕의 얼굴에선 웃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길러지는 과정은 돼지가 길러지는 과정과 비슷하다. 돼지는 축사에서 길러지고 그들은 감옥에서 길러지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첫 훈련을 받는다. 즉 그들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처음 감옥에서 나오고, ‘하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다.」

왕은 잠시 말을 잃었고, 생각도 멈췄다.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것일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사람을 돼지를 기르는 것처럼 기른다고? 역겨운 짓이었다. 심지어 그 ‘인간 돼지’에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안네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 안네마리가 어땠을 거라고? 아기 새, 아기 거북이였을 거라고? 그런 다정하고 평온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열네 살에 정식으로 첫 살인을 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주로 고문을 받는 훈련을 받는다. 죽거나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왕은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왕후궁으로 간다.”

시종들이 당황한 얼굴로 일단 차비를 서두른다. 그사이 시종장이 신중한 목소리로 왕에게 고했다.

“전하, 죄송합니다만 왕비는 현재 몸이 좋지 않습니다.”

“나를 반기지 않을 거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왕의 말에 시종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왕후궁으로 갈 듯했다. 그래서 시종장은 서둘러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렇다는 답변 대신 송구해하는 시종장에게 왕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간다.”

왕의 말에 시종장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흘끗 왕이 가진 문서에 시선을 두었다. 시종장도 검은 물 길드에 관해서라면 대충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길드 살수들은 유능하다. 그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비만 해도 지독하게 유능하고……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한없이 냉혹하고 감정이 제어되어 있는 자들. 그런 자들만이 살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시종들의 걸음도 빨라진다. 선 플레이스의 알현실에서 마법의 다리를 지날 때쯤, 반대편에 있던 시녀가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왕의 행차를 알리는 것일 테다.

시종들이 흘끗 시선을 교환한다. 왕비가 왕을 내치지 않을까. 이제껏 왕비는 그런 적이 없었다. 왕의 처사가 아무리 불공정하여도 그는 늘 왕을 반겼다. 그의 시선이나 손짓에서는 왕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지.’

시종들은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시종 자리는 무엇보다 정보를 필요로 하는 자리이고, 그들은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보에 의하면 왕비는 대단히 상심한데다 평소와는 달리 정말 몸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 있다고 한다. 궁의는 하루에 두 번 다녀가는데, 그에 따르면 몸은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지만 처음 이틀은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왕이 왕비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이 보고가 들어가지 않은 것일 뿐, 왕후궁은 왕비가 완전히 목소리를 잃은 줄 알고 발칵 뒤집혔을 정도라고 하니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다.

마법의 다리 위로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다리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꽃이었다. 큼지막한 꽃들이 돌다리에 떨어져 있는 것은 참 아름다웠지만, 왕은 그런 것엔 시선도 두지 않고 곧바로 문 플레이스로 향했다. 새하얀 문 플레이스는 작열하는 빛을 받아 유독 반짝거렸다.

왕이 다리를 완전히 건널 때쯤, 시녀장과 시녀들이 서둘러 나와 그에게 예를 갖췄다.

“안네마리는?”

나흘이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왕이 갑자기 찾아와 성급히 묻는 것이 여상치 않다고 여기면서도 시녀장은 차분히 대답했다.

“바로 전까지 잠들어 있던 터라,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깨울 필요는 없었는데.”

왕은 혀를 차면서 움직였다. 그러자 안내격인 시녀들이 앞장서서 걸었고, 시중을 드는 격인 시종들은 잠시 멈춰서 자연스럽게 뒤처진 다음에야 걸음을 옮겼다.

왕비의 침실―정확히는 왕후의 침실이지만―에 들어섰을 때 왕이 처음으로 느낀 것은 향냄새였다. 그리고 향냄새로도 지워지지 않는 약냄새가, 어두운 실내 안에 화하게 풍겼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라파엘을 아프게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아프게 했었던가 싶어서 놀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라파엘이 생사를 넘나들 때도 향을 피우진 않았었는데. 왕이 당황하자, 옆에 있던 시녀장이 재빨리 설명했다.

“왕비가 한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 때문에 피우는 향입니다. 마음을 진정…….”

“목소리를 내지 못해?”

왕의 목소리가 단숨에 날카로워졌다. 아, 저 여자. 진짜 여우귀신이 붙었나. 시종장은 흘낏 시녀장을 노려보고는 왕의 곁에서 대답했다.

“하루뿐이었고, 한두 마디 정도는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며, 오전보다 오후가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보고하지 않았다는 시종장의 말을 듣고 왕이 사실이냐고 시녀장에게 물었다.

“정확히는 이틀이지만, 어쨌든 계속 좋아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은? 지금은 어떤 거냐?”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만…….”

시녀장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는 왕에게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그를 사랑하는 마리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라파엘도 짓밟고 있었다. 왕을 사랑하는 인간들은 전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버린다.

“여전히 심적으로 우울해하여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서…….”

시녀장의 말에 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서둘러서 왕비의 침실 가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침 안네마리가 침대에서 일어나서 가운 시중을 받고 있었다. 나흘 만에 보는 안네마리는 초췌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왕이 다급히 다가갔을 때. 왕을 발견한 왕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징조였다. 그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숨을 삼킬 만한 징조이기도 했다.

왕비는 이제까지 왕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왕을 사랑하고 반가워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는 왕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시종장은 시녀장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시녀장도 왕이 조금쯤은 상처 입길 바랐지만, 설마하니 왕비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왕을 거부할 줄은 몰랐기에 놀라서 굳어버렸다.

“안네마리.”

“예, 전하.”

언제나와 같은 한 마디씩인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침실 안은 어두웠다. 안네마리의 우울함을 대변하는 듯이 어둡고 스산했다. 두꺼운 커튼과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안네마리의 검은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검은 머리칼은 그 어둠에 물든 듯했다. 안네마리가 걸친 은회색 가운은 폐허의 먼지처럼 쓸쓸했다.

왕은 다시 한 번, 안네마리의 앞으로 한 걸음을 걸었다. 이번엔 안네마리가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안심했다. 안네마리가 잠시 놀란 것일 뿐이라고, 그는 자위하며 안네마리에게 손을 내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안네마리가 한 번 더 몸을 뒤로 물렸다.

“내게서 멀어지지 마.”

왕의 귀에도 그 목소리는 처연하기만 했다. 이를 악문 목소리에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왕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라파엘은 잘 알 수 없었다. 왕이 준 고통은,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그랬다. 하지만 왕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가 울컥 치솟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듯, 그는 지금 치솟은 감정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증오였다.

하지만 왕을 증오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라파엘은 이제껏 누군가를 증오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증오하는 사람이 왕이라니.

“안네마리, 이리 와.”

왕이 그를 부르며 팔을 벌렸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 팔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안네마리.”

왕이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그를 부르고 있지만, 라파엘은 그 목소리가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왕의 팔 안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왕이 결국 팔을 뻗어온다. 늘 그 손에 잡혀주곤 했었지만, 이번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은 왕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나 왕이 더 움직일 수는 없도록 강하게 움켜쥐었다.

“비전하!”

시종장이 무엄하다는 뜻으로 낮게 소리쳤지만 라파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근위병들이 동시에 라파엘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라파엘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라파엘은 왕의 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총에 맞아 온몸에 구멍이 뚫릴지언정, 왕의 품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왕은 손목을 잡힌 채 안네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안네마리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 표정은 마치 먼 곳의 전쟁신과 닮아 있었다. 둘은 닮을 수밖에 없지만, 또한 상당히 달랐다. 그런데 지금 안네마리는 그 전쟁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냉정해서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네마리.”

몇 번이나 이 이름만을 불렀다는 걸 알면서도 왕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잊은 것만 같았다. 그들은 오랜 시간 함께했고 많은 추억을 같이했는데, 그는 타인을 보듯 왕을 보고 있었다.

“저는 전하를 좋아합니다만…….”

라파엘은 잠시 말을 망설였다. 상대는 ‘왕’이니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예의에는 어긋나겠지만, 그는 말하고 싶었으므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저는 지금 전하를 증오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솔직하잖아!

시녀들의 심장이 덜컹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모르는 남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왕의 심장은 곤두박질치진 않았지만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분명한데…….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안네마리는 차가운 눈으로, 그의 손목을 잡은 채 말하고 있다. 증오하는 것 같다고. 증오, 증오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안네마리가 그를 증오한다니.

차라리 안네마리가 울부짖었더라면, 소리쳐 화를 냈더라면, 그는 덜 놀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건 그 말이 약간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라는 걸 의미했다.

라파엘이 손을 놓아주자 왕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당황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라파엘은 미안해졌다. 왕이 한 짓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던가? 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폭행의 정도라면 타인들이 더 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고, 왕에게는 미움이 싹텄다.

라파엘은 왕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왕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살인 기계고, 마음만 먹는다면 왕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테니까. 가능한 한 가까이 있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이 감정은 처음 가져보는 것이라 어떤 충동이 들지, 그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오늘 저녁, 너는 무도회에 참석해야 한다. 물론 안네마리 왕비로서다.”

왕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입만이 움직였다. 아아, 무도회. 라파엘은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무도회를 겨우 떠올렸다. 하긴 일주일간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제 참석해야 할 때이긴 했다.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하자마자 왕이 등을 돌렸다. 그 등이 떨리는 듯도 싶었지만 라파엘은 그 등을 잡을 수 없었다.

무도회 참석은 왕명이었다. 또한 그 왕명은 감금 해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문 플레이스의 삼엄한 경비는 누그러졌고, 분위기는 다소 부드러워졌다. 왕비로서 치장을 해야 하자 시녀들은 커튼을 열어 가지런히 묶었고, 덕분에 실내에 빛도 쏟아져 들어왔다. 분위기가 산뜻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라파엘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후회라는 단어는 그와 참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왕의 놀란 얼굴이 일그러져 울 것 같았던 것을 떠올리자 가슴이 지끈거렸다. 왕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도 아쉬워졌다. 그 푸른 눈도, 금발도, 햇살에 적당히 태운 갈색 피부와 고양잇과 동물처럼 길고 유연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을 보지 못한 것도 서운했다. 라파엘은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움직이면서 왕을 떠올렸다.

‘아니, 잘한 거야.’

왕을 떠올리자 배 속에서 울컥 뜨거움이 치솟는다.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가 여자라면, 그가 보통 남자라면, 이 생각은 ‘생각’에 그칠 테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으니, 솔직하게 고백하고 멀어지는 것이 현명하리라.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왜 왕은 그에게 그런 고문을 가한 것일까. 그 행위는 정말이지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밀어내고 싶은데도 밀어낼 수 없고, 자의로 참으면서 그 일을 당해야 한다는 점이 더욱 괴로웠다. 왕은 왜 그런 행동을 했지? 라파엘은 늘 왕의 의도를 모르는 채로 지나가곤 했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왕이 이랬는지 알고 싶었다.

라파엘은 손을 들었다. 왕의 손목이 주었던 감촉이 떠올랐다. 그 단단한 팔로부터, 넓은 어깨를 지나 왕의 몸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몸이 그를 끌어안고 속삭이던 아름다운 날들과 그 몸이 라파엘의 위에서 울부짖던 며칠 전의 밤이 동시에 생각났다. 도대체 왜, 왕은 그렇게 변하였던가.

‘어쩌면 이 손 탓일지도 모르지.’

라파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레이스 장갑에 감춰진 손은 굳은살이 박여 있다. 그 손으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라파엘의 많은 동기들이 죽거나 미치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들은 온전한 연애를 하지 못했다. 고문광이든나, 창녀 사이를 전전하든가, 소아만을 상대하든가……. 그것은 그들이 비틀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라파엘 자신도 분명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는 그들보다 더 악명이 높았으니까, 더할 수도 있다.

이 손에 묻은 보이지 않는 피가, 왕을 미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전하, 괴로우시더라도 참…… 아아, 이그나치오 가문은 영원한 악덕을 쌓을 것이 분명합니다!”

라파엘의 머리를 만지던 시녀가 위로를 건네다 말고 눈물지었다. 라파엘이 흘끗 시선을 주자 시녀가 괴로운 얼굴을 감추고 웃으려 애쓰며 그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빗어 내렸다. 그에게 위로를 속삭이는 시녀에게, 라파엘은 문득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리고 그는 그런 것이 생기자마자 입을 열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본래 마음이 잘 변하시는 분이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죠.”

대답을 한 것은 반대쪽에 있던 시녀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왕이 그렇게 변덕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왕은 때때로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졌고, 라파엘은 그의 기분이 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가끔에 불과했다. 대부분 그는 다정했다. 상냥하게, 라파엘의 기분을 보살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냉혹하긴 또 어찌나 냉혹하신지요! 몰살의 즉위 축하연만 생각해도……!”

시녀가 부르르 떨었다. 라파엘은 그제야 즉위 축하연을 상기했다. 왕은 분명 즉위식의 밤, 많은 귀족들을 손쉽게 죽였었다. 그렇다, 그는 라파엘처럼 피를 뒤집어쓴 인물이었다.

허리를 조이고, 하이힐에 올라서고, 머리의 반을 틀어 올리고, 향수를 뿌리고……. 치장하는 내내, 라파엘은 왕을 생각했다.

왕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라파엘 자신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왕은 여자가 아니지 않은가. 라파엘은 살수와 얽히면서 괴로운 나머지 망가져가는 여성들을 두세 명 본 적이 있었지만, 왕은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왕은 그녀들과는 달리 라파엘과의 관계에서 늘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니 왕이 이러는 것은 자신의 탓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뭘까.

언제나 생각은 거기서 멈춘다. ‘왕은 왜 그랬을까.’

밤이 되어 라파엘이 선 플레이스로 움직이려 했을 때, 왕이 먼저 그의 침실에 도착했다. 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라파엘의 앞에 천천히 와서 구부린 팔을 살짝 내밀었다. 팔짱을 끼라는 뜻이었다. 라파엘은 잠시 그 팔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살짝 왕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증오를 하든 말든.”

문 플레이스의 정문으로 내려가며 왕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아.”

절대로 널 놓아주지 않아, 절대로.

덧붙이는 왕의 말에 라파엘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놓아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마치 왕이 그를 붙잡아두고 있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라파엘이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려 했을 때 마침 마차 앞에 다다랐다. 왕은 라파엘이 마차에 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라파엘이 타자마자 바로 마차에 올랐다. 밀실에서 둘이 나란히 앉자, 마차가 곧 움직였다. 마차 등이 흔들려 실내가 깜빡였다. 아, 저런. 라파엘이 혀를 찼을 때 왕이 라파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우리가 내리고 나면 등을 갈 테니 걱정 마라. 왕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때, 마차 등이 꺼져 실내가 어둠에 휩싸였다.

왕이 당황해서 라파엘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등이 꺼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기습은 어둠과 함께 찾아오는 법이니까. 왕이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자, 라파엘이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전하, 송구합니다. 마차 등이 꺼졌습니다.”

마차가 서고, 앞에 앉아 있던 시종이 허리를 숙였다. 시종장이 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시종장이 아닌 부시종장이 야간조라 이런 일이 생긴 모양이다. 바로 기름을 넣겠다는 부시종장에게 됐으니 빨리 가자고 하면서 왕은 여전히 라파엘을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어둠을 틈타서 안은 안네마리는 여전히 작고 말랐다. 어쩌면 더 말랐을지도 모르겠다. 왕은 안네마리의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안네마리는 그를 증오한다고 말했고, 왕은 그런 그에게 상관없다고 했다. 선왕들이 했던 짓을, 자신을 바라보지 않던 여자들에게 했던 짓을, 왕은 지금 안네마리에게 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던 안네마리가 드디어 그를 증오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하.”

안네마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약을 먹은 듯 여자의 목소리로, 안네마리가 그에게 자신을 놓아달라는 말을 완곡히 하고 있다. 왕은 그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도 눈은 곧 익숙해지고 있다. 더 익숙해져서 안네마리의 냉담한 얼굴이 보이기 전에 그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여자를 안고 싶었나?”

왕의 말에 라파엘이 살짝 몸을 굳혔다. 왕은 그 밤에도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 이 목소리보다 훨씬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그는 분명 이런 말을 했었고 자신의 대답은 듣지도 않았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왕이 눈을 크게 떴다. 안네마리는 왕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안네마리는 그의 목을 움켜쥔 채 힘을 주려는 듯했다. 순식간이라, 안네마리가 어떻게 그의 목에 손을 대었는지 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안네마리가 진심이라는 것이다. 안네마리는 살기도 풍기고 있지 않았지만, 분명히 진심이었다. 왕은 알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그만은 알 수 있었다.

“전, 위험한 인간입니다.”

라파엘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섞이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라파엘은 왕을 바라보았다. 왕보다 어둠에 익숙한 라파엘의 눈은 이미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왜 왕의 목에 손을 댔는지, 왜 왕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이 그러했듯 증오 또한 그에게 알 수 없는 춤을 추게 하고 있다. 이럴 것이라 생각해서 왕에게 경고했었는데, 왕은 상관없다며 그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경고하는 것이 좋을까. 그는 경고 따윈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경고를 하는 자가 아니라 실행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왕을 좋아해서, 결코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전 전하를 증오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라파엘은 경고를 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 식으로 경고를 할 경우 대부분의 인물은 왕처럼 반응할 것이 분명하다. 연인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괜찮아.”

……이게 아닌데.

라파엘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직도 손안에는 왕의 유연한 목이 있다. 힘만 주면 순식간에 꺾어버릴 수 있는 목이다. 손가락은 오랜 시간 동안 훈련받은 지점을 찾아내 그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

왕은 라파엘의 손가락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길드 살수’에 대한 설명들이 지나갔다. 라파엘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가축처럼 길러져서, 고문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받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자신의 사명이라 세뇌당하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아서도 자신의 곁으로 와준 연인에게 그는 무슨 짓을 한 건가. 왕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평소에는 인식하지도 못했던 목이라는 신체 부분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너에게라면 좋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왕도 괴로운 일을 많이 겪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라파엘에게라면 그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돌려도 좋았다.

‘단순히 물거품만은 아니지. 웬만한 복수는 다 했잖아? ……아, 태후.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한 게 안타깝군.’

왕의 속삭임에 라파엘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정말로 죽일 것 같다. 왕은 눈을 감는 대신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안네마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설마 죽이겠어. 그런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이라는 남자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라파엘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과장할 줄 모른다. 왜 모르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수 있다. 라파엘은 그런 방법을 배울 인간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라파엘의 말은 전부 진심이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결정을 한다. 보통 사람과는 달리 망설이거나 미련을 갖지도 않고 자기방어도 전혀 없다. 그러니…… 라파엘은 단순한 충동만으로 왕을 살해할 수도 있다.

“네가 가진 감정의 이름은 애증이다. 안네마리, 사랑과 증오는 의외로 등을 맞대고 있는 친구지.”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사랑과 증오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라파엘이 의아해할 때 왕이 비어 있던 팔로 라파엘의 허리를 안았다. 라파엘의 어깨와 허리를 안은 왕이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라파엘을 바짝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내가 허락하느니. 그전에 내게 말해다오. 너는 여자를 안고 싶었는가? 어떤 여자를?”

“여자?”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라니. 왕이 절박하게 물었다.

“온실에서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여자를 안으면 기분이 좋으냐고.”

라파엘이 그 말을 생각해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아, 라파엘이 신음했다.

“아니요.”

왕의 팔은 여전히 라파엘을 단단히 안고 있었다. 라파엘에게 다음 말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런 무형의 재촉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왕과 오래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여겨져 라파엘은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눈은 라파엘을 찾는 것 같았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한 눈은 그 색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 사람뿐이었구나.’

라파엘은 이제 와 깨닫는다. 왕 외에는 누구도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여자가 아니라 전하를 안으면 어떨까 했습니다.”

왕이 “뭐?!” 하고 경악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탓에 라파엘의 손이 왕의 목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라파엘은 그 탓이라고 하며 왕의 목을 놓아주었다.

“나를?”

“……전하께 안기면 기분이 좋기에, 제가 전하를 안으면 전하도 기분이 좋으실까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자를 들먹인 거냐?”

“주로 안기는 사람들은 여자가 아닙니까?”

믿을 수 없게도 라파엘은 몹시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왕은 자신이 미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왕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벙긋거릴 때 부시종장이 타이밍을 맞추듯 재빨리 “도착했습니다”라고 고했다.

마차 문이 열리자 왕은 마차에서 내리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홀에서 쏟아지는 빛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라파엘의 얼굴에 대고 왕이 다시 물었다.

“나를…… 그러고 싶더냐?”

어릴 때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어릴 때의 그는 꽤 귀엽지 않았던가. 냉혈한 살수의 얼어붙은 심장도 한 방에 녹일 수 있을 만큼 귀여운 아이였다고 자평한 왕이 다시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나긋나긋한 몸의 소유자가 자신을 안고 싶다, 라…….

“특별히 소망한 것은 아닙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특별히 소망하진 않았다니. 몹시 하고 싶진 않았지만 하고 싶긴 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왕이 손을 내밀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왕은 정말 변덕이 심한지도 모르겠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는 또다시 웃고 있지 않은가. 라파엘이 잠시 왕의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는…….”

“위험한 아기 새라 할지라도, 너는 분명 나의 아기 새가 아니더냐.”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놈의 새타령이 또다시 시작되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히 여기며, 시종과 시녀들이 숨을 삼켰다. 왕비가 개조한 총처럼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평온해진 것이 의아하면서도, 모시는 입장에선 안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다시 한 번 망설였다. 이건 왕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왕이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손을 잡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 손을 잡아서, 자신이 애증이라는 감정에 충동질당해, 또다시 그 목에 손을 대고, 이번에야말로 그 목을 꺾어버릴까 봐.

그러나 왕은 라파엘의 손을 낚아채 잡았다. 그 손을 자신에게 팔짱을 끼게 하고선 이그나치오궁 홀로 들어섰다. 곁에서 걷는 라파엘의 몸이 어색하게 굳은 것이 느껴졌다.

“여자를 안는 게 어떤지 나는 모른다만.”

왕은 거기까지 말하고, 이그나치오 연회 홀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문 안쪽에서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이십니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석문처럼 두꺼운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환한 빛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왕이 말을 이었다.

“너를 안는 것은 황홀하지. 세상에 태어나 이런 황홀한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왕과 함께 나선의 계단을 내려가며 라파엘은 눈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몇 번이나 봤던 얼굴들이 똑같은 미소를 담고 그들을 올려다보며 서로 뭔가를 속삭인다. 그들이 무엇을 속삭이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도 왕과 자신이 무엇을 속삭이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라파엘은 ‘세상살이’라는 걸 조금 배운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뿐이지만.

왕이 버시슬가의 영애를 죽이고 정부인 근위대장을 끌고 게스트룸으로 들어갔었다. 밤새 능욕을 당하며, 근위대장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버시슬 가문에서는 ‘치욕을 저지른 자는 친자식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버시슬 가문의 법도’라는 말로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 사람들은 왕과 왕비의 불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도 사이가 좋았지만, 오늘은 더더욱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귀족들이 속삭였다. 인조 보석으로 유독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이 자신의 정부로 보이는 남자에게 귓속말을 하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왕비를 솜사탕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저렇게 애지중지 대할까.”

“왕비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욱 달콤한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옆에서 젊은 남작이 대꾸했다. 남작의 눈에도 왕과 왕비가 보였다. 왕과 왕비는 지정석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형 왕비라 불릴 정도로 거의 말이 없던 왕비도 오늘만은 입을 자주 열고 있었다. 그리고 왕은 아예 왕비 쪽으로 돌아앉은 채 그녀에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첫 구애를 하는 청년처럼 열정적이었다.

흠. 남작은 작은 헛기침 소리를 듣고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버시슬 백작이 조금 거리를 두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여자를 상대하고 있는 게 불쾌한 모양이다.

‘전하께서는 자네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으셨네.’

비서관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계획대로 움직이게.’

버시슬 가문의 여식을 여러 사람의 눈앞에서 죽여놓고도 왕은 아무런 대미지도 입지 않았다. 도리어 버시슬 가문 수장이자 여자의 아버지는 그의 딸이 ‘왕족 모독죄’를 저지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왕족 모독죄로, 죽어서 감옥에 갇혔던 여자는 이제 시체가 되어서 땅에 묻히지도 못한 채 황무지에 버려질 것이다.

무서운 남자다. 즉위 축하연에서 귀족들을 죽인 것은 그저 오랜 원한풀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자를 죽이는 그 순간에도, 왕은 곤경을 피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멀고 높은 곳에서 왕은 여전히 왕비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다. 문득, 왕은 왕비의 손을 잡아 그 손등을 뺨에 대며 웃었다. 아름다운 남자. 눈이 멀 것처럼 아름답고 강한 제왕. 그는 어떤 계산을 가지고 저 왕비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인가.

분명히 우리 모두는 저 왕에게 체스판의 말밖에 되지 않겠지.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갯짓으로 정원을 가리켰다. 그러자 버시슬 백작의 안색이 금세 환해진다. 젊은 남자에게 빠져서 온갖 정보를 늘어놓는 늙은 돼지 같은 놈. 저런 놈이 왕과 겨뤄보려 하다니. 남자는 기가 찼다.

그는 홀에서 나가기 전 흘끗 왕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예 왕비를 무릎 위에 올리기 직전으로 보이는 왕은, 왕비의 뺨에 키스하며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왕은 말 잘 듣는 말을 버린 적은 없다. 그러니 그 정도면 모실 만한 제왕이지. 어차피 우리 같은 인간들은 그 밑의 콩고물이나 거나하게 모으면 그만 아닌가.

남자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왕은 남작이 홀을 빠져나간 뒤 곧 버시슬 백작이 쫓아 나가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백작은 천천히 독에 중독되고 있다. 그리고 백작이 평소에 즐기는 마약들이 더욱 백작을 죽음으로 빠르게 이끌 것이다.

“전하?”

왕의 말이 갑자기 멈추자, 안네마리가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어디까지 했었지? 아아, 그래……. 나는 네가 여자를 안고 싶어하는 줄 알았지.”

왕은 홀 안을 잠시 둘러보았다.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과 시선이 두 번이나 마주쳤다. 유니스 라 버시슬을 왕후로 추대하려던 사교계의 여왕은 영 손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왕은 쇼어 공작부인과 시선을 마주하고, 말없는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 왕은 시선을 거둬 안네마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그는 홀 안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안타깝고 안네마리에게 미안해서, 왕은 그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안네마리의 몸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왕은 개의치 않았다.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던 왕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왕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느끼며 라파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왕이 바라보았던 쪽에 흘낏 시선을 주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왕이 라파엘의 턱을 잡아 그를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안고 싶은 여자를 찾은 줄 알았다.”

언젠가 왕이 허밍으로 불러주었던 곡을 악단이 연주하고 있다. 라파엘은 그 곡을 들으며 왕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안고 싶은 여자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라파엘이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왕이 웃었다. 그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가면 갈수록 착잡해지고 있었다. 라파엘이 문득 그의 속을 뒤집을 소리를 했다.

“그 여자가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화를 내기 전, 의식적으로 숨을 멈추며 화를 누그러뜨렸다. 라파엘의 화법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할 정도로 느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전하의 옆에서도 아름다울 것 같았습니다. 저보다, 더욱.”

왕이 환하게 웃었다.

“질투구나.”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투란 화가 나는 감정이 아닙니까? 저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니 질투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고선 라파엘은 입을 다물었다. 질투가 아니라? 그는 그 감정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그 여자를 보고 있으면 왕이 떠오르고, 왕과 그 여자가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아팠다는 것뿐.

왕은 안네마리가 곰곰이 생각에 빠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라파엘은 감정의 정체를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사랑과 증오뿐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강렬한 감정은 모두 왕을 향해 있다.

증오조차 기꺼울 줄이야.

왕은 웃으며 라파엘을 끌어당겨 기어코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면서 착잡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런 연인에게 그는 무슨 짓을 했던가. 라파엘이 왕의 품에 안기면서도 고지식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위험해지십니다.”

왠지 지금은 애증이라는 감정이 사랑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둘이 등을 맞댄 친구라면, 언제 증오의 모습이 보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라파엘은 그런 것을 걱정했지만, 왕은 라파엘의 어깨를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왕이 라파엘과 눈을 맞췄다.

“분명 그때도, 너는 내 손을 잡아주고 있을 테니.”

“……왜.”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라파엘의 목소리에 왕이 상냥한 얼굴로 말해보라는 눈으로 웃어 보여서,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왜, 전하께선 절 고문하셨습니까?”

왕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것만은 정말 고문이었다. 그는 라파엘을 고문했고, 그럼에도 라파엘은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왕은 잠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여장을 한 남자는 그저 여자처럼 보였다. 모든 귀족의 눈앞에서 남자의 무릎에 앉은 채로, 남자는 여전히 담담하고 조용하다. 그의 얼굴은 치욕도, 수치도 모른다. 아니, 아주 조금은 그런 것을 알고 있다. 왕이 그에게 그런 것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왕은 그저 사랑의 유희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생각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학대받아 인간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감정의 지도를 가지지 못한 남자. 그런 남자를 연인이란 이름으로 절벽에서 밀어내는 행위는 아니었던가?

“나는 몹시 성급하고 독점욕이 강한 폭군이다.”

라파엘의 눈이 약간 커졌다. 왕이 스스로의 입으로 ‘폭군’이라 칭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서 시종과 시녀들도 당황했지만, 그들은 늘 그렇듯 없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연인인 너를 믿지 못하여 너를 배신하고 고문했다.”

라파엘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늘 똑같은 얼굴이지만, 왕은 그 얼굴에서 당혹감을 읽었다.

왕은 라파엘에게서 연민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민을 구하고자 했으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라파엘이 처했던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자기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라파엘의 입장에서, 라파엘의 상황을 말해주고 싶었다. 라파엘 본인은 알 수 없을 그 상황에 대해서, 라파엘은 자신을 짓밟은 남자에게 물어보고 있다. 라파엘의 세계에 그런 걸 물어볼 상대는 한 명밖에 없는 것이다. 그 믿음을 다시는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왕은 천천히 말했다.

“너는 배신당했어.”

“…….”

“그래서 너는 나를 증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미련하도록 착한 성품이라,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라파엘이 멍하니 바라보자, 왕이 라파엘의 검고 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과 표정이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달라서, 라파엘은 말을 잃었다. 라파엘이 가만히 있자, 왕이 속삭였다.

“용서해다오.”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정말로 화가 났더라면 왕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왕을 증오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 증오는 사랑과 등을 맞대고 있고, 현재는 사랑 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언제 증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데, 왕에게 어떻게 용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용서라는 건 어떤 기분이 들어야 용서했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저는 용서를 모릅니다.”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난생처음 증오를 배웠으므로 아직 용서는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는 라파엘을, 왕은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는 도대체 이 가여운 연인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안네마리는 작고 말랐다. 쇼어 가문의 남자들은 장신이었다. 여자인 마리 트리지아조차 안네마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컸었다. 남자가 이렇게 작고 마르려면, 이렇게 작고 마른 남자가 엄청난 무인이 되려면 무슨 짓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왕의 머릿속으로 ‘길드 살수의 육성’이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간다.

“네가 용서를 배울 때까지 내가 끊임없이 용서를 빌지.”

“저는 지도를 익히지 못했듯, 영원히 용서를 배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는 영원히 같이 있을 수밖에 없겠군. 아니 그런가?”

왕의 말에,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은 또다시 웃고 있다. 왕은 아주 조금쯤은 변덕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는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가 왜 웃는지 라파엘은 알 듯하면서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헤죽 하는 웃음에 왕이 그의 얼굴을 가려 남들이 보지 못하게 하며 같이 웃었다.

“전하.”

그때까지 왕의 옆에서 한 쌍의 연인의 콩 까는 소리를 듣고 있던 스완이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왕을 불렀다. 왕이 라파엘을 안은 채 스완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스완은 의자에서 일어나 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자가 새겨진 팔걸이를 잡고 허리를 숙여 왕의 귀에 속삭였다.

“노트코의 대사가 배를 타지 않았답니다.”

“배를 타지 않아?”

“신병을 확보하러 간 군인들로부터의 긴급 전갈입니다. 노트코 대사는 본국으로 귀환하는 배를 타는 척하면서 다른 배를 탄 듯합니다. 뱃사람들은 처음부터 타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는데요.”

왕의 시선이 차갑게 빛났다.

노트코에 보냈던 대사가 뇌물을 받아먹을 것임은 그도 쉽게 예상하고 있었다. 왕뿐만 아니라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외무대신인 제럴드는 본국 귀환 조치까지 내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대사가 아예 도피할 줄이야. 왕의 푸른 눈이 차가워진다. 대사는 왕의 대리인, 그런 인물을 놓치는 것은 왕의 명예에 관련된다.

왕이 올려다보자 스완이 “신병을 확보하러 갔던 조가 이미 추적에 들어갔습니다만, 시간은 걸릴 것 같습니다”라고 낭패 어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노트코가 어딘지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지리는 역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왕이 살짝 짜증 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막연히 지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노트코가 어딘지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시간이 없어. 가능한 한 빨리 잡아와. 대사의 일행이 전부 오지 않았다는 거냐?”

“일행은 왔습니다. 현재 대사의 비서가 궁으로 오고 있습니다.”

왕은 라파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라파엘의 입술에 키스하듯 가까이하며, 입술이 닿기 직전 스완에게 말했다.

“전부 토해내게 만들어라.”

“예, 전하.”

스완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이쪽을 주목하고 있을 귀족들을 의식한 미소였다. 곤경에 처한 듯한데 웃고 있는 두 사람이 이상해서, 라파엘은 왕을 한 번 바라보고 스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왕은 라파엘의 턱을 붙잡아 키스했다. 불이 붙듯이 격렬한 키스였다. 조금 전에 들은 난처한 이야기들은 모두 잊은 듯, 왕은 키스에만 몰두했다. 도리어 라파엘이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자, 왕의 혀가 더욱 깊은 곳까지 건드리며 정욕을 자극해왔다.

왕은 라파엘의 입술 안쪽을 핥으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키스에 응해오지 않는다. 집중도 하지 못하는 듯해서,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려는 라파엘의 턱을 단단히 고정하고, 왕은 교묘한 곳까지 애무하며 라파엘을 두드린다.

왕에겐 몹시 길게 느껴졌던 시간 끝에, 라파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마자 왕은 라파엘을 부서질 듯 안으며, 세상의 끝에서 하는 것마냥 달콤하고 격렬하게 키스했다. 라파엘이 왕의 몸을 마주 안으며, 왕의 입안에 혀를 넣어온다. 그 순간, 왕은 지독한 쾌감에 신음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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