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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트랙_상(賞) (35/47)

히든 트랙_상(賞) 

라파엘 라 쇼어는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저 멀리 선 플레이스는 대낮처럼 밝게 붉을 밝힌 채 근위병과 특수군이 힘을 합쳐 물샐 틈 없는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군기가 들어간 모습을 보면서 라파엘은 검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는 아직도 경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가 선 플레이스에 잠입하게 된 거지?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단은, 오늘 낮이었다.

왕은 라파엘의 드레스 차림을 몹시 좋아했지만, 가끔 별식을 먹듯이 라파엘의 남장을 원하곤 했다. 오늘은 심지어 근위대 제복을 입어보라는 통에, 평소 입던 검은 잠행복이 아니라 근위대 제복을 입어야 했다. 시녀들은 ‘이걸 맞춰놓긴 했지만 정말 입게 되실 줄은 몰랐는데요’라고 수군거리면서 제복을 가져왔고, 라파엘은 왕의 앞에서 드레스를 벗고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니, 갈아입으려 했다.

그러나 갈아입는 도중 왕이 흥분하는 바람에 윗옷은 제복을 입고 아래는 벗은 채로 왕을 받아들여야 했다. 제복은 처음 입었는데 이미 찢어졌고, 왕의 것이 넘쳐흘러 결합부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몇 번이나 왕의 것을 받아들이며 운 끝에 겨우 잠깐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더니 왕이 그를 씻겨주고 있었다. 흔하진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왕은 라파엘을 종종 씻겨주거나 그 머리를 빗겨주거나 했었다. 물론 왕은 시중을 드는 척만 했을 뿐이고 실제적인 시중은 당연히 시녀나 시종이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왕은 진심으로 라파엘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했다.

라파엘은 따뜻한 대욕탕에서 왕에게 안긴 채로 멍하니 일어났다. 곧 시종과 시녀들이 각각 들어와 두 사람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시중을 받는 동안 왕은 라파엘에게 살짝살짝 물을 튀기면서 웃었고, 라파엘은 그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따라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이 좋았다. 그가 웃으면, 다 좋은 거였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라파엘은 그의 말에 좋은 생각이 났나 보다 했지만, 나머지 궁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시종, 시녀, 근위병, 특수군병들은 전부 긴장한 얼굴로 왕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왕이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왕에게만 ‘좋은 생각’일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의 왕, 즉 이그나치오 23세는 그런 일이 적은 편이었지만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라, 그의 아이디어를 면전에서 반대할 수 있는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 최측근 인물 정도나 가능한데 지금 그의 최측근 인물이라고 해봐야 시중드는 사람이 아니면 왕비 정도였고, 왕비는 왕이 욕탕의 물로 수프를 끓여 먹자고 해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대꾸해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어여쁜 안네마리가 아니라 멋진 라파엘로 있어봐.’

왕이 즐거운 얼굴로 말했고, 라파엘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에 대고 왕이 상냥한 키스를 퍼부었다.

‘아아, 그래. 나는 안네마리를 사랑하지만, 가끔 라파엘과 바람을 피우는 것도 괜찮지. 나는 왕이니까, 안 그래? 좋군. 남자와 여자, 어여쁘고 순종적인 정처와 근사하고 싸늘한 정부를 다 가진 남자라니. 과연 왕에 어울리지 않는가. 완벽해.’

바람을 피운다는 뜻인가……? 근데 안네마리도 나인데, 라파엘도 나인데, 나와 바람을 피우는데, 남자와 여자가, 그런데 정처와 정부와…… 어?

라파엘이 이해하지 못하고 뜨거운 물속에 멍하니 있을 때 왕은 신이 난다는 발걸음으로 욕탕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 명령을 하달받은 시녀들이 라파엘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머릿속으로 왕이 바람을 피우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손을 들어 가슴께를 눌렀다. 가슴이 아픈 것 같았다. 왠진 모르지만. ……뭔가를 잘못 먹었던가?

‘비전하, 서두르셔요!’

시녀들의 재촉에 서둘렀더니 검은 잠행복을 입게 되었다. 라파엘이 검은 잠행복을 입자 왕은 눈웃음을 지으며 라파엘의 입술을 진득하게 빨았다. 그리고 라파엘은 씻은 보람도 없이 이번에는 검은 잠행복을 입은 채 왕과 얽혔다.

‘라피.’

라파엘은 잠시 왕을 바라보았다. 그를 ‘라피’라고 부르는 건 쇼어 가문 사람들뿐이다. 어쨌거나 ‘라피’라는 건 ‘라파엘’의 준말일 텐데, 왕이 라파엘이라고 부르는 건 몹시 드문 일이라 신기했다.

‘예, 전하.’

왕이 옷을 입으라고 해서 정액을 빼내지도 못하고 팬티를 올리자 왕이 히죽거렸다. 재미난 일을 생각해낸 개구쟁이처럼 거침이 없었다.

‘날 도와줘.’

도와?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왕이었고, 라파엘은 그의 비이며 그의 검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움직인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는데 왕은 왜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걸까. 라파엘은 의아한 눈을 했지만 곧 대답했다.

‘? 예, 전하. 하명하십시오.’

라파엘이 단호한 목소리를 내자 왕이 유쾌한 얼굴을 했다.

왕명을 받아 시종장이 근위대와 특수군을 소집했다. 물론 전원을 다 소집한 건 아니었고, 라파엘의 정체를 아는 병사들만 소집했다.

불시에 소집당한 병사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거기에 대고 왕은 목욕 직후의 물기를 머금은 얼굴로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진급하고 싶나?’

병사들이 차마 대답을 못 하자 웃고 있던 왕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기 싫나?’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왕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참 잘 웃는 왕이었다. ……도대체 왜 웃는진 몰라도.

‘봉급 두 배로 오르고 싶나?’

이번에는 다 같은 답변이 나왔다.

‘오르고 싶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왕이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에 있는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이 밖으로 나가서 여기로 돌아올 거다. 근위대장이 나를 먼저 잡으면 근위대장의 승리, 너희가 근위대장을 먼저 잡으면 너희의 승리다. 너희가 승리하면 진급과 봉급 인상을 약속하지.’

이건 군사 훈련이야. 실전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왕이 그렇게 말을 마쳤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라파엘 한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악취미라 생각하면서도 봉급 인상과 진급을 위해 달려 나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군사 훈련이니까 난 아무것도 없는 건가?’

라파엘은 멍하니 생각하면서 숲 속을 걸었다.

선 플레이스의 경계는 철통과 같았다. 왕이 침실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간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많은 인원이 전부 침실의 경호를 서고 있었다. 마법의 다리 위에, 발코니 창 앞에, 그리고 복도의 침실 문 앞에.

아무래도 몰래 들어갈 여지는 보이지 않아 라파엘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나. 라파엘의 혀가 가볍게 입술을 훑고 사라졌다.

라파엘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문 플레이스로 달려가 마법의 다리 위에 섰고, 그러자 반대편에서 “나왔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움직이지 마! 자리를 유지해!”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다.

라파엘은 양검을 손에 쥔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셋이었고, 그 뒤 발코니 문가에는 왕이 서 있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에서 왕은 신기한 것을 바라보듯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 오시면 안 됩니다!”

근위병이 라파엘을 향해 소리 질렀다.

“오시면, 오시면…….”

뒤에는 왕이 있다. 왕이 보는 앞에서 왕비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왕비는 라파엘 에반스이고, 라파엘 에반스는 의뢰를 받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손속에 사정을 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파엘 에반스가, 아니,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한다. 근위병 세 사람이 뒷걸음질 쳤다.

진급이라니, 봉급 인상이라니. 그딴 것에 눈이 어두워 라파엘 에반스를 마주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미쳤지. 그들은 진저리를 쳤다. 다가오는 남자는 분명 그들이 아는 사람이었다. 키가 작고 창백하게 말라서 여장을 해도 눈에 띄지 않는 그 남자. 그런데도 왜 지금은 이토록 거대하게 느껴지는 걸까. 살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인가.

라파엘 에반스가 가볍게 검을 돌렸다. 비키지 않으면 뚫겠다는 의지였다. 그때 응원군이 도착했다. 침실 문을 지키고 있던 인물들이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라파엘은 흘끗 그쪽을 확인하고 마법의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안네마리!”

왕이 놀라 발코니 문을 열고 뛰어나오려 했다. 그러나 왕의 앞을 특수군이 막았다.

“아, 안 됩니다!”

“비켜!”

“저, 절대로 아닙니다. 저기, 아닙니다. 안 다치셨습니다!”

그사이 마법의 다리에서 당황하던 근위병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비어 있는 침실 문을 보고 “문! 문을 막아!”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침실 문을 맡고 있던 특수군들이 재빨리 달려갔다.

왕이 “횃불! 횃불을 가져와! 안네마리가 어떻게 된 거냐!”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근위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라파엘 에반스가 다쳤을 리 없는데, 왕이 난리를 피우니 당황한 탓이다. 괜찮을 거라고 그들은 왕을 필사적으로 안심시켰다. 절대 다치셨을 리 없다고, 라파엘 에반스는 이런 일에 다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왕은 여전히 그들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모두가 다쳤을 리 없다고 장담하자 겨우 소리치는 걸 멈추었다.

이런 데서 뛰어내리다니!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안네마리가 아닌 라파엘 에반스가 어떤 이인지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두 번 했다간 송장이 될 판이다.

‘라파엘 에반스요? 지금 비전하 말씀하시는 겁니까?’

며칠 전, 스완에게 묻자 스완이 술을 마시다 말고 되물었었다. 왕이 그렇다 대답하자 스완이 잠시간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검은 물이라는 이름의 길드 살수였다가 독립했고, 지금은 전하의 비지요.’

왕이 마뜩찮은 얼굴로 그 정도는 안다고 말하자 스완은 왕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 정도만 아시는 게 좋겠습니다.’

스완의 얼굴은 분명히 뭔가 있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스완은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고, 왕은 생각 끝에 수도군 대장을 불렀었다. 라파엘의 정체를 모르는 수도군 대장은 왕의 앞이라 긴장한 상태로 주절주절 아는 바를 전부 토해냈다.

‘라파엘 에반스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청부업자입니다. 다른 것도 한다고 들었지만 워낙 살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서 다른 걸 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로 수도에서 활동했었고, 2년 전부터는 행적이 묘연합니다. 검은 물 길드의 살수였던 걸로 아는데 언제 독립했는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계속 검은 물 길드를 통해서만 의뢰를 받은 걸로도 유명합니다. 가슴에 심장이 아닌 시계 장치가 들어 있다는 말도 있고, 고작 20대 초중반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왕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심장에 시계 장치가 들어 있는 건 말도 안 되지만 20대 초중반일 수는 있지 않나?’

수도군 대장이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라면 차라리 심장에 시계 장치가 든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왕의 기분을 확 상하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직하고 눈치 없는 수도군 대장은 왕의 심정을 알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라파엘 에반스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상당히 긴 편입니다. 그동안 그가 행한 살인이나 상해…… 그러니까 제가 올리는 말씀은, 고문이나 기타 등등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더러운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제 20대 초중반이라면 그는 어릴 때 이미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됩니다. 전하, 이런 말 송구합니다만, 그렇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

왕은 ‘그렇군’ 하고 그저 웃었지만 입술은 경련하고 있었다. 저 새끼가 감히 누구더러 괴물이라는 거야.

그가 사랑하는 안네마리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라파엘 에반스가 궁금했다. 하지만 만족할 답변은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직접 보기로 한 것이다.

됐어. 토끼 같은 안네마리로 족하다. 그가 어떤 인물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관계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을 뿐.

왕이 시종들에게 등을 가져오라 손짓해서 다리 밑을 내려다보려 했을 때였다. 웬 손 하나가 다리 밑에서 휙 올라왔다.

“전하. 이렇게 잡으면, 제가 이기는 겁니까?”

말간 얼굴이 어두운 허공에 떠 있었다. 왕이 억 소리도 못 내고 눈만 크게 뜨자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이 다시 한 번 다리 밑을 내려다볼 것 같아 다리에 매달린 채 왕의 기척을 따라왔는데 놀라게 한 것 같다. 하지만 룰을 잘 모르겠다. 잡는다는 건 이렇게 잡는 걸까. 아예 사로잡아야 하는 걸까.

왕은 어둠 속에서 달걀처럼 둥실 떠오른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아닙니까, 라고 물어오는 작은 입술도.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양팔을 내밀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시시하군.”

라파엘이 왕의 팔을 잡고 휙 올라왔다. 근위병들이 다리 밑에서 올라오는 그를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라파엘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병사들은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고, 왕도 침실 안에서 결코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상태에선 운신도 어려웠을 테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라파엘을 왕이 끌어당겼다.

“상을 주지. 바라는 걸 말해보아라.”

고개를 들자 왕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라파엘은 여전히 그가 뭘 바랐는지 잘 몰랐다. 아까의 그는 재미있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즐거워했는데 지금의 그는 약간 힘이 빠져 보였다. 그가 뭘 기대했고 무엇 때문에 힘이 빠졌는지 라파엘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을 준다고 하자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바람이라. 왕은 마음에 드는 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라파엘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라파엘 자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바람을 피운다는 게…… 아니.”

라파엘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왕의 권리를 침범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신뿐이다. 라파엘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하지만 왕이 상을 내린다면, 라파엘은 받고 싶었다. 문제는 ‘그것’이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지만.

“저는 전하를 사랑합니다.”

라파엘이 천천히, 그러나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힘이 빠졌던 왕이 라파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왕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검은 눈에는 어떤 불순물도 보이지 않는다.

“전하께서 그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소리가 싫더냐?”

왕이 키득거렸다. 바람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궁중 사교계는 기혼자에게 고귀한 타락을 용납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왕이다. 어떤 꽃이든 꺾을 수 있는 지상 최고의 권력자.

“싫습니다.”

라파엘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에게 다른 이를 안지 말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자신이 그것을 싫어하냐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할 순 있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왕이 다시 웃는다. 뭔가를 기대하고, 김이 빠졌다가, 다시 즐거워한다. 이 감정 기복을 이해할 수 없어서 라파엘은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왕이 말했다.

“좋아. 내 마음은 영원히 너의 것이다.”

왕의 입술이 다가온다. 라파엘은 눈을 감으면서 왕의 상에 만족했다. 뭔가 잘 알 수 없었지만, 왕의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로 뭐든 다 괜찮은 듯했다. 키스는 달의 숨결처럼 애틋했다.

§  §  §

이그나치오 23세가 그의 비인 안네마리에게 성명(聖名) ‘잉그램’을 내린 것은 다음 해 신년제에서였다.

‘안네마리 라 쇼어’가 ‘안네마리 이그나치오’로, 그리고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까지, 안네마리 왕비의 출세는 가팔랐다. 쇼어 가문의 이름만 가졌을 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뻔했던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왕비가 되는 듯하더니,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젠 성명까지 받는다고?’

신년제에 참석하는 귀족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툭하면 아프다며 제대로 공식 석상에 참석도 못 하는 왕비가 무슨 성명씩이나 받는단 말인가. 성명을 받는다는 건 왕의 변하지 않는 총애에 대한 약속이었다. 앞으로 누가 왕후의 자리에 앉든, 왕의 총애는 언제나 안네마리 제1왕비에게 있을 것이라는 공언과 다를 바 없었다.

겨울감기와 몸살까지 겹쳐 앓아누웠었다더니, 왕비는 오늘따라 한 떨기 꽃처럼 연약해 보였다. 핏기 없는 피부가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젯밤에도 왕과 같이 있었던 듯, 왕비의 마차는 문 플레이스가 아닌 선 플레이스 앞에 서 있었다. 선 플레이스를 지나며 귀족들은 왕비의 마차가 선 플레이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걸 보고 혀를 찼었다. 왕과 왕비는 신성한 자리임을 의식한 듯 따로 왔지만, 그래봐야 이미 모든 귀족들은 그들이 어젯밤에도 환락에 빠져 있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위대한 헤수스의 제1왕비, 안네마리 이그나치오는…….”

제사장은 작년에만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귀족과는 달리 신전은 단결력이 좋다. 첫 번째 제사장이 목숨을 걸고 왕의 독단에 항의하자 왕은 제사장을 이국의 신전으로 이동시켰다. 두 번째 제사장이 왕의 곁에서 아첨을 떨며 공물을 개인 재산으로 빼돌리자 왕은 그를 죽여 수도의 가장 큰 우시장에 목을 내걸었다.

그래서 현재의 제사장은 왕에게 항의하지도, 왕을 이용하지도 못한 채 왕의 말을 신의 말보다 더 떠받드는 멍청이가 되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할 거예요.’

누군가가 두고 보라는 듯 속삭였다.

‘전하께서는 무능한 자를 혐오하시죠. 1년이나 버틸까.’

그 순간 제사장이 성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왕의 곁에서 좋은 꼴로 해임당한 인물은 몹시 드물었다. 본인도 자신의 목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감투를 썼다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좌중의 귀족들이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도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이제 제사장은 잠이 들어도, 기도를 해도 이 웃음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쯧, 반년은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왕은 불쾌한 낯빛으로 좌중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뚝 멈추었다. 유령이 따로 없다.

왕비가 제사장 앞에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오늘 새벽까지 왕에게 안기고, 한잠도 자지 못한 채 치장을 해야 했던 라파엘의 안색이 새하얗다. 마치 어젯밤 내린 눈과 비슷할 정도라, 왕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남자라 치장에 있어 한결 자유로운데다 본래의 피부색도 하얀 편이 아닌 왕은 눈을 좀 붙인 덕에 안색이 괜찮았지만, 한숨도 못 잔 라파엘은 애처로울 정도로 희어서 남자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왕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

제사장이 당황한 얼굴로 바닥에 뒹구는 청동 잔과 성수로 드레스를 적신 왕비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미 그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왕은 그를 내칠 것이다. 먼 이국으로 쫓겨 갈까, 아니면 죽음을 당하게 될까. 어느 쪽이든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왕이 혀를 차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제사장이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왕을 돌아보았다. 왕이 고갯짓을 하자 그제야 제사장은 새로운 청동 잔이 도착했음을 깨닫고 새 잔에 성수를 담아 왕비를 축복했다.

왕비가 제사장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가만히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왕비를 보며 왕은 입술을 올렸다. 평생 저렇게 산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불편하고 괴로운 삶이 될 것이다. 왕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최고의 총애’라는 타이틀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라파엘은 분명 용서해줄 것이다.

그나저나 아까 그 계집 목소리가 분명 레트 백작부인이었지?

‘제 남편 사업 다 망쳐놓을 생각이군.’

왕은 속으로 차게 웃었다. 이 권좌를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다시 말하자면 그는 권력을 아낌없이 즐길 자세가 되어 있었다. 권력은 쓰라고 있다. 그는 성인이 아니다.

레트 백작은 사치품을 수입하면서 은근슬쩍 마약도 수입한다. 고급 마약으로 중독성이 없고, 평민들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가격이다. 왕은 레트 백작의 뇌물 아닌 뇌물을 받으며 그의 사업을 은근슬쩍 묵인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린 사업을 하는 남자들이 그러하듯 레트 백작도 제 부인에게 자신이 뭘 해서 돈을 버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걸 알려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지. 귀족이 사업을 해서, 그것도 마약을 수입해서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데……. 그걸 친하지도 않고 말은 더럽게 많은 여자에게 알려주겠는가? 비록 그녀가 자신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잊고 있는 것 한 가지―둘은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제례가 끝난 왕비가 지상의 왕을 향해 몸을 돌린다. 왕은 의식을 잇기 전 팔을 열어 왕비를 안았다. 부정하다는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보다 더 화려한 라파엘의 어깨를 감싸며 “잘하고 있어”라고 격려했다.

새해의 아침, 유연한 햇살이 신전의 긴 아치창을 통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안네마리 이그나치오’가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가 되는 순간이다.

<히든 트랙_상(賞)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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