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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고백 (34/47)

제10장 고백

여름 무도회 개최일, 귀족들은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아―, 올해는 정말 재밌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에요, 실망. 이게 뭡니까. 아, 전하. 이것밖에 아니 되십니까아.

물론 이렇게 실망하는 것은 영지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귀족들뿐이었다. 헤수스에서 소위 말하는 컨트리 귀족―수도가 아닌 영지에 머무르며 용건 없는 한 수도에 들르지 않는 귀족들―은 세 종류로 나뉜다. 수도에서 밀려난 그룹, 수도에 관심 없는 그룹, 그리고 수도에 너무나 관심이 많아서 몸을 감춘 그룹. 그리고 이 세 그룹은 모두 여름 무도회를 즐겁게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에서 밀려난 그룹은 왕에게 잘 보며 어떻게든 다시 권력의 중추에 다가가려 하고 있었고, 수도에 관심 없는 그룹은 왕과 왕비와 돌아온 여인들이 보여줄 끈적거리는 치정싸움 및 권력다툼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몸을 감춘 은둔 그룹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행보를 위해 왕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에게 다가갈 가장 튼튼하고 가까운 길인 왕비가, 돌아온 여인들과 한판 승부를 보일 왕비가, 뒤로는 쇼어 가문을, 앞으로는 왕을 내세우고 있는 왕비가, 여름 무도회 개최일인 오늘 여름감기로 불참했다.

늘 그렇듯 즐거운 파티였고, 반년에 한 번 모이는 엄청난 규모인 만큼 다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만남의 장이었지만, 화제의 인물이 참석하지 않은 파티의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칙칙했다.

‘……별로라죠?’

오랜만에 수도에 나온 남작이 싱긋 웃으면서 버시슬 백작의 담뱃대에 불을 붙여주었다. 작위는 낮지만 돈은 많은 젊은 귀족이었다. 버시슬 백작은 내심 딸인 유니스가 왕의 여인이 되지 못한다면 이 남자의 아내로 줘버릴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어디를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포르타미스와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포르타미스. 자살한 여신의 이름은 곧 마리 트리지아 왕후를 대신한다. 그 이름에 버시슬 백작이 후 하고 연기를 멀리 날려 보내며 속삭였다.

‘까마귀일까?’

쿡 하고 남작이 웃었다. 잘생기진 않았으나 부드럽고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진 남자는 쿡쿡거리면서 버시슬 백작의 손을 슬쩍 스치듯이 뻗어 은수저를 집었다. 담배통에 담뱃잎을 넣으면서 남작이 백작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까마귀라니, 저는 싫군요.’

남작의 말에 버시슬 백작이 흠 하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버시슬 백작은 남녀 모두를 가리지 않는 취향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성적으로 열등감이 심해서, 성적인 매력을 가진 이들과 잘 지내진 못하곤 했다. 또한 그 열등감에 걸맞지 않은 자존심 때문에 더더욱 그는 그런 이들과 성적으로 얽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이 남작은 달랐다.

버시슬 백작은 남작을 흘끗거렸다. 그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버시슬 백작은 그의 몸에 깔려 여자처럼 교성을 지르곤 했다.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상기하자, 그는 초조해졌다.

‘제 취향은 백돼지라.’

남작이 웃는 낯으로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은 돼지가 아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몸은 수분기가 없이 바짝 마른 가죽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이 신경질적인 우아함을 더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은 백돼지라는 단어에 흥분해서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웠다.

‘엉덩이는 깨끗이 씻었나요, 백작?’

남작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남작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먼저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작도 몇 사람과 더 인사를 나눈 다음에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홀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그 꼴을 보며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어째서 사람은 자기 차례가 되면 조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왕의 말에 스완이 빙긋 웃었다. 스완의 손에는 이미 남작이 보낸 쪽지가 도착해 있었다. 「작업하겠습니다. 남쪽 항구의 제 물건은 통관시켜주시리라 믿습니다」라는, 남작다운 쪽지였다.

인간보다는 돈에 집착하는 남작의 쪽지에 흘끗 시선을 준 왕이 “그렇게 해”라고 말하자 곧 비서관이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스완은 태연히 촛불 위로 쪽지를 가져갔다. 쪽지에 불이 붙자 빈 술잔에 던져 넣으며 스완이 고개를 돌렸다.

“남작은 잘할 겁니다. 엄청난 통관세를 무느니 자기 몸을 던질 인물이니까요.”

“괜찮은 자지. 하지만 너무 키울 필요는 없어.”

왕의 말에 스완이 “예, 전하”라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충성심이 없는 자의 유능함은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남작은 머리가 좋지만 무술은 젬병이다. 그는 아마 특수군이 따라붙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테지만, 이미 특수군은 그의 정사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스완이 힐끗 왕의 뒤에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는 고열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왕비가,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왕비가 아닌 라파엘 라 쇼어 근위대장으로서 서 있는 것이다.

‘자꾸 이러는 건 위험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완은 라파엘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토록 사람이 다를까. 싸늘한 것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가죽 갑옷 때문에 체격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왕비가 평소에 하이힐을 신는 까닭에 두 사람은 같은 키로 보이지도 않는다. 남는 건 흔하디흔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 혈관이 비칠 정도로 창백한 피부뿐이다. 하지만 피부의 대부분은 가려놓아서 실제로 보이는 건 검은 머리와 작은 키 정도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라파엘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라파엘은 조각상처럼 서서 귀족들의 동태를 살필 뿐이다.

‘저 근위대장이 전하의 정부라죠?’

사람들이 라파엘을 보며 수군거렸다.

‘최근 왕궁의 엄해진 경호도 근위대장의 솜씨라고 하더군요. 뭐, 저는 모르지만…… 바깥양반 말로는 훌륭하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들이 흘끗거렸다. 근위대장 라파엘 라 쇼어는 미혼이다. 왕의 정부에 최측근. 쇼어 가문의 차남이기까지 한 그의 혼처는 많은 여자들이 노리고 있다. 돌아온 여자들은 왕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면 라파엘 라 쇼어의 부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쇼어 공작부인은 차남에 대해 언제나 웃음 어린 목소리와 은근한 말투로 착한 아들이라 자찬할 뿐 혼처에 관해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저 차남은 비밀 임무로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보이지 않을 바엔 왜 근위대장이 된 건가. ―왕의 정부라, 왕이 그만한 직위를 준 게 아닐까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왕비를 예뻐하시면서, 밤에는 저 남자와 뒹구시는 건가요?’

여자들이 노골적으로 라파엘의 온몸을 훑어댔다. 그의 행보, 그의 위치, 그리고 그의 외모 따위를 합쳐 종합 점수를 매기는 여자들의 눈은 매의 눈보다 매섭다.

왕은 여자들의 시선을 느끼며 샴페인을 들었다. 왕이 샴페인 잔을 들자 모두가 들고 있던 잔을 머리 위로 올리거나, 서둘러 잔을 집었다. 왕이 한 번 잔을 들어 보이고 마시자, 귀족들도 일제히 잔을 입술에 대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능숙한 뱃사공이 배를 젓듯이, 왈츠가 뭉쳤던 공기를 확 밀어내며 홀 바깥의 정원까지 울려 퍼졌다.

왕이 등 뒤에 있는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라파엘이 천천히 왕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할 만해?”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할 만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딱히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이 재차 물었다.

“힘들지는 않고?”

“예, 전하. 힘들지 않습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라파엘은 사흘 밤낮을 먹지 않고 여기에 서 있으래도 해낼 수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왕 자신도 라파엘이 이런 일을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주변에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부인 근위대장과 귓속말을 나누는 자신을 과시하면서, 왕은 쇼어 공작부인의 곁에 있는 유니스 라 버시슬과 공작부인을 노려보았다.

‘공식 인사라고?’

가당찮은 이야기다. 왕은 유니스 라 버시슬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녀가 죽든 말든 왕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왕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공식 인사라니. 왕비가 왕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다니. 왕비가 왕의 정부를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불합리하고 모욕적인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 이 상태에서 왕이 한 번 안지도 않은 여자를 왕비가 인정한다는 것은 귀족의 힘에 눌린 왕비가 꼭두각시 짓을 한다는 걸 의미했다. 아니, 아니,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라도.

왕은 라파엘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어느 때라도, 라파엘은 왕의 다른 연인을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궁중 사교계는 공정하다. 라파엘이 왕의 다른 연인을 인정하면, 왕 또한 라파엘의 다른 연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잠깐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당장 저 싸가지 없고 눈치도 없고 간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계집을 끌어다가 그 간을 홀 밖에까지 늘여주고 싶은 지경이다.

왕은 흉포해지려는 심정을 내리누르면서 라파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힘들면 말하라. 알겠느냐?”

“힘들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힘들지 않을 거라고, 라파엘은 단호히 대답했다. 힘들 리가 없다. 그는 무릎 아래가 끊겨도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살수의 생각은 늘 극단적이었지만, 왕은 라파엘의 각오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극단적인지는 알지 못한 채 싱긋 웃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라파엘은 기쁜 얼굴을 했다. 무표정했지만, 분명히 그 얼굴은 기뻐하고 있었다. 고작 웃음 한 번에 라파엘은 이렇게나 기뻐한다. 왕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몇몇 인간들에게 더욱 짜증이 났다.

“착하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왕이 더 말하지 않자 라파엘은 왕에게서 물러났다. 문득 왕은 물러나려는 라파엘의 손을 잡았고, 라파엘은 가려던 발을 멈추고 왕을 돌아보았다. 왕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손만은 힘주어 잡고 있었다. 꽉, 소리가 날 것같이 세게 잡은 왕이 라파엘의 손을 놔주었다. 라파엘이 의아해하며 왕의 뒤로 물러났다.

“전하, 계속 이렇게 버티실 생각이십니까?”

스완이 혀를 찼다. 이미 공식 인사를 약속했다. 그렇다면 왕은 라파엘을 아예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부러 자신이 남색가임을 어필함으로써, 여자를 찾진 않을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스완은 그래봤자 신통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왕의 생각도 그랬다. 왕이 이제 와 근위대장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엔, 그동안 왕이 왕비를 총애한 것이 너무나 컸다. 사람들은 왕이 근위대장을 희롱하는 걸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왕비에게 왕이 화가 났나 하는 의문은 있어도 이제 와 왕이 남색가로 돌아설 거라 생각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너 때문이잖아, 이 무능하고 쓸모없는 동생아.”

왕의 말에 스완이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이제 드디어 속사포로 터져 나오나 했는데, 왕은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만사 귀찮은 얼굴로 고기를 몇 점 집어 먹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네? 스완은 의아했지만, 굳이 매를 찾아 맞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알아봤습니다만.’

며칠 전 저녁, 왕명에 의해 스완의 연애사를 알아본 시종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왕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이 든 주전자에선 우아한 찻물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잔을 들어 따뜻한 차를 마시며 왕이 흘끗 시선을 주자 시종장이 주름진 얼굴로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짧게 말해봐.’

‘스완 라 포 대장은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에게 한눈에 반해서, 원한도 잊고는 구명해주고 이용당하다 차였습니다.’

왕은 차를 마시다 쿨럭거렸다. 너무 간결하고 명료한 말이었다. 뭐? 하고 왕이 고개를 돌리자 시종장이 ‘좀 더 길게 말씀 올릴까요?’라고 물어왔다. 왕은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스완의 사생활에 깊게 관련되고 싶진 않았다. 왕이 공작부인에게 스완에 대해 진심은 없었던 것 같으냐고 묻자 시종장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 마음속이야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포 대장을 좋아하는 낌새 따위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동생의 참혹한 연애사를 전해들은 만큼, 차마 동생에게 화를 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왕은 독한 술만 몇 잔 마시며 울컥 올라오는 독설을 내리눌렀다.

사실 라파엘과의 일이 아니었다면, 왕은 연애고 나발이고 동생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을 잃을 뻔했을 때의 자신을 떠올리자 차마 동생을 탓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자신만 해도, 공들여놨던 모든 것을 내버리지 않았던가. 노골적으로 쇼어 가문을 쳐버리고, 라파엘을 살려내지 못하면 다 죽여버리겠다며 이를 갈았었다. 그 자신도 그랬으니 스완이라고 어찌 다를까.

“술이나 마셔.”

왕이 술을 따라주자 스완이 잔을 받으면서 이상한 듯 왕을 쳐다보았다. 매를 안 맞아서 좋긴 한데, 맞을 매가 있는데 안 맞고 있자니 이건 또 이것대로 불편한 기분이다. 아, 왜 이러지. 뭐 잘못 드셨나. 스완은 바짝바짝 타는 속에 술을 들이부었다. 가뜩이나 멀리서 공작부인이 보이는 통에 기분도 안 좋은데.

그때까지는,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이 몹시 많을 뿐, 평소와 비슷한 파티였다. 파티의 중간, 이미 사람들은 반이나 사라지고 없었다. 궁에 마련된 자신의 방이나 가든 하우스 쪽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빼도 평소 파티가 시작될 시점처럼 사람이 많아 라파엘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왕은 이미 몇몇 귀족 부인들과 춤을 추고 있었다. 왕이 공식 인사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경호를 위해 자신을 불렀다고 믿는 라파엘은 댄스플로어를 천천히 돌며 왕을 경호했다. 검을 가진 자는 보이지 않지만, 고수는 몇 명 눈에 띄었다. 아마 군인 출신이겠지. 저쪽도 라파엘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사생아라고 들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왕의 정부가, 노골적으로 기를 과시하며 왕을 경호하고 있다.

‘뭐야, 정부에게 그냥 준 직위가 아니었어? 진짜 고수잖아?’

장군들은 여자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거나 그 허벅지 안쪽을 쓸면서도 라파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디서 저런 ‘진짜’가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얼굴이나 몸집을 어디서 본 일은 없는지 그들은 열심히 머릿속을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본 적은 없는 듯했다.

‘평민 출신인가? 사생아이니 그럴 수도 있지. 크면서 무술을 배우고 가문을 찾고……, 가능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군인들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가벼운 걸음걸이로 댄스플로어를 돌던 라파엘은 누군가와 부딪쳤다. 라파엘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상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었다. 라파엘은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맞추며,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게 걷는다. 이런 것은 무술을 배우는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다. 하지만 상대가 부딪치려고 마음먹으면 노골적으로 피하지 않는 한 수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네요.”

여자는 아름답고…… 낯익었다.

“아.”

라파엘이 가볍게 신음했다. 왕과 춤을 추었던 여자다. 왕이 호박덩어리라고 불렀던 여자가 아니라,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라파엘은 다시 시선을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사과, 정말 안 할 거예요?”

라파엘에게서 외면당한 여자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라파엘은 의아해졌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네.”

유니스 라 버시슬은 라파엘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보다도 작았다. 아니, 그녀가 하이힐을 벗으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녀보다 작았다. 키고 작고, 얼굴도 그녀보다 더 작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정했다. 기교도 유혹도, 아무것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의 몸에선 희미한 향이 났지만, 사교계의 남자들이 흔히 뿌리는 가짜 향기가 아니었다. 그 향은 마치 나무 향과 비슷했다. 단단하고 깊은 향이었다. 멋져. 유니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향기까지 들이켤 수 있도록.

“전하의 경호인가요?”

왕후가 되어야 한다. 여름 무도회 첫날 얼굴도 보이지 않는 왕비라니, 그런 계집은 왕비로서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유니스는 매일 밤 이 남자의 얼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 때문이 아니었다. 이 남자가 자꾸 생각났다. 자신을 보는 순간 놀라던 그 얼굴, 무표정하게 가슴께를 누르던 그 모습. ‘당신을 본 순간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하던―이런 말이 아니었나? 하지만 비슷한 말이었다. 분명히―그 입술.

왕에게 품은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유니스는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깨달았다. 왕에게 품은 감정은 그저 동경이었을 뿐이다. 지금 이 감정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사랑은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 서로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매일 밤 이 남자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애절하게 떨린다.

“네.”

그는 왕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유니스는 그의 시선을 따라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아름다웠다. 유니스는 어릴 때부터 그를 좋아했고, 지금도 그가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했고, 이미 한 번 결혼도 했다. 좋아하는 남성상은 당연히 변했다. 왕처럼 아름답지만 나쁜 남자보다는 성실하고 단정하고 솔직한 남자가 좋았다.

지금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옆에서도 여전히 왕의 경호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가슴이 아프다고 고백했던 남자다. 그녀에게 사과하지 않겠다고 말한 남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남자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일부러 부딪친 게 맞으니까.

“오늘 밤은 내내 경호인가요?”

“아마도…….”

라파엘은 말을 흐렸다. 왕은 어떻게 할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왕이 다른 말을 해주지 않는 한 그는 계속 왕의 경호를 설 것이다. 하지만 왕이 다른 명령을 한다면 다른 명령에 따른다. 따라서 그는 오늘 밤, 내내 경호만 선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유니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와 이야기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남자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했다. 아마도…… 라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남자인가.

유니스가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버시슬 양, 오랜만입니다?”

눈치 없는 사내가 나타나 그녀와 남자 사이를 갈라놓아버렸다.

아이고, 율레즈 님, 쿠치아노 님, 여하간 신들이여. 모두 다 절 좀 굽어 살펴주세요, 네?

스완은 속으로 온갖 신을 찾으면서 겉으로는 정중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그러면서 라파엘에게 귓속말로 “전하께서 곧 들어가십니다. 먼저 자리로 돌아가 계시죠”라고 권했다.

음악이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완을 스쳐 지나가려다 아 하고 유니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가 아닌 남자로서 사교계에 있어본 적이 없는 라파엘은 그녀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를 알 수 없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스완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라고 눈에 힘을 실어 보냈지만 늘 그렇듯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유니스가 생긋 웃으며 손등을 내밀었다.

라파엘이 그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유니스가 당황한 눈을 크게 떴지만 라파엘은 그냥 스쳐선 왕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유니스가 고개를 돌려 스완을 바라보자 그는 씩 웃었다.

“사교계에 익숙하지 못한 분이고, 여자에게는 더더욱 익숙하지 못한 분이라.”

스완이 그렇게 말하며 왕을 흘끔거렸다. 천운인지 왕은 이쪽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쿠치아노 님, 지금 하늘 위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시군요! 감사합니다! 신이 날 살렸구나 싶을 정도라 스완은 잠시 감동의 도가니에서 허우적거렸다. 정말 이건 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왕이 조금이라도 봤다면 저 여우같은 눈치로 바로 알아챘을 텐데, 감격스럽게도 그가 보지 못했다!

‘아까는 왜 그냥 넘어간 건지 모르지만 이거 걸리면 난 죽을 거야.’

스완은 속으로 울먹였다. 왕은 공식 인사를 피하려고 라파엘을 남장시켜 동행한 것인데, 정작 남장한 라파엘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니. 그런데 그걸 숨기고 있었다니. 이건 걸리면 총살감이었다. 뒷목이 찌르르 울릴 지경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스완은 빈틈없는 미소를 지으며 유니스에게 인사를 건네었고, 유니스도 인사를 받았다.

“네, 여전히 눈치가 없으시네요.”

유니스 라 버시슬의 어릴 때 취향은 독설가에 나쁜 남자인 왕이었고, 지금의 취향은 무표정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어쨌거나 둘 다 정직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다, 유니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는 바람둥이를 싫어했다. 취향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격렬하게 혐오했다. 그러므로 유니스는 스완에게 좋은 말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유니스가 시집을 가던 때와 지금, 스완의 위치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때 스완은 할 일 없이 여자나 유혹하며 빈둥거리는 바람둥이였지만, 지금의 스완은 알고 보니 여태껏 발톱을 감춘 호랑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비밀에 부쳐져온 특수군 대장이었다는 진짜 신분이 드러나면서 귀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즉위식의 밤, 수많은 귀족들을 도륙한 것도 스완의 이 실없는 얼굴일 것이라 생각하자 오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니스는 그 모든 걸 전해들었을 뿐, 충격의 현장에 같이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머리로는 스완의 현재 위치를 인지하고 있다 해도 그녀의 감정에서 스완은 정신 나간 플레이보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유니스는 스완에게 무례히 굴 수 있었다.

“눈치가 없다니, 의외로군요.”

누가 누구에게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스완은 웃고 있던 입가가 경련할 지경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지금 당신이 어느 분께 수작을 부렸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수작?”

유니스가 눈을 치켜떴다. 지금 수작이라고 했어요?

그사이 시종이 다가왔다. 스완은 은쟁반에서 잔을 들었다. 두 개의 잔을 들어 그중 하나를 유니스에게 건넸다. 댄스플로어의 새 댄스타임, 둘이서 댄스플로어로 올라가야 할 것 같은 순간을 자연스럽게 넘긴 스완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입니다. 수작이 아니면 희롱입니까?”

스완의 말에 유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예의상 춤을 추고 자리로 돌아간 왕이 근위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으면서 왕이 말을 하는데 근위대장의 표정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그는 입가까지 가려 눈만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왕이 뭐라고 말하면서 손으로 과일 한 조각을 집어 내밀자 근위대장은 마스크를 내리고 입으로 그 과일을 받아먹었다.

‘어머.’

유니스는 누군가의 감탄을 들으며 못 박힌 듯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부는 정부인가 본데요? 전하께선 꽤 결벽증이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아, 그건 좀 나아지셨다 하더이다. 하지만 그 결벽증이 나은 건 왕비 때문이라 하던데.’

‘어머, 매일 비전하가 적셔주는 모양이죠?’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적셔주는 걸까나.’

수군거림은 거의 음담에 가까웠다. 유니스는 그런 말을 들으며 왕과 근위대장을 바라보았다. 근위대장이 다시 마스크를 들어 코 위까지 올렸다. 왕이 키득거리면서 뭐라고 말을 하자 근위대장은 성실하게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을 움직이는 건 모르겠지만, 설마 왕의 앞에서 고개만 끄덕거렸을 턱이 있나. 분명히 성실하게 대꾸해주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을 외면했던 그 남자가.

유니스가 차갑게 왕과 근위대장을 노려보는 걸 보면서 스완은 “당신이 누굴 원하는지 모르지만, 누구든 그만두십시오”라고 충고했다.

왕후라니. 왕은 왕후를 맞을 생각이 없다. 설사 압박해서 왕에게 왕후를 맞게 한다고 하자. 그래서 뭐가 좋단 말인가. 그 왕후야말로 진정한 포르타미스 사건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유니스 라 버시슬처럼 귀하게 큰 아가씨는 왕의 학대에 얼마 못 버틸 것이라고 스완은 장담할 수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가 그렇게나 오래 버틴 건 기적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라파엘이라면, 그녀는 정말 승산이 없었다. 이 나라, 아니, 이 세계에서, 헤수스 왕의 진노를 사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게다가 라파엘은 그녀를 돌아볼 자가 아니다. 몇 년이나 라파엘과 같이 있었던 스완은 확신했다. 라파엘은 왕을 사랑하고, 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것은 신을 향한 신도처럼 맹목적인 사랑이다.

라파엘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해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을 수단으로 선택한다. 차라리 왕이라면 정치적인 게임에 끌어들일 수는 있겠지만, 라파엘은 아예 이야기의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스완은 유니스를 내버려둔 채 천천히 왕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댄스플로어 옆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유니스를 보자 조금 가여워졌다. 어쩌다 저 아가씨는 라파엘에게 빠진 걸까. 사실 여자가 빠질 구석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뭐라고 해?”

왕이 라파엘과 이야기를 하다 말고 스완에게 물었다. 스완이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지만, 심장이 울렁거렸다. 저 아가씨가 무슨 약을 잘못 먹었는지는 모르나, 왕후가 되겠다면서 라파엘을 유혹하고 있다는 걸 알면 왕은 노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날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입을 다문 자신의 목을 졸라버리겠지. 아, 그런 일만은 제발 막아야 한다.

그렇군 하고 왕이 가볍게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왕은 남장을 한 라파엘과 시시덕거리는 재미에 빠져 유니스 라 버시슬 따윈 잊은 모양이다.

어젯밤 무슨 꿈을 꿨기에 이렇게 재수가 좋지? 도박이라도 해야 할까 봐. 스완이 스스로의 운에 감탄하고 있을 때 왕은 라파엘의 뺨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놀고 있었다. 라파엘이 왕비일 때는 이런 짓을 해보진 못했다. 라파엘의 얼굴에 너무나 많은 화장품이 칠해져 있어서, 그 화장품이 다 지워질지도 모르는 짓은 삼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라파엘은 아무것도 바르고 있지 않았다.

“반죽 같군.”

왕이 웃으면서 라파엘을 놀렸다.

“허옇고 쫀쫀한 게 딱 반죽이야. 안…… 아니, 라파엘. 너는 반죽을 쳐본 적이 있느냐?”

라파엘이 “아니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좋아하니 얼굴을 대주고는 있지만, 도대체 왕이 뭘 보면서 이렇게 웃는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볼이 좌우로, 대칭으로, 위아래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고 있는 것만 겨우 느끼고 있을 뿐이지만, 왕이 즐거워하니 그도 마냥 좋았다. 왕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반죽을 건드려본 적이 있어. 뭐, 구박받던 왕세자 시절 이야기다.”

길게 이야기해봐야 화만 날 이야기라 왕은 그쯤에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당시 왕은 사흘 가까이 식사를 받지 못했었다. 태후의 짓일 것이다. 태후가 했던 짓에 비하면 자신은 참 온정이 넘치는 왕이라고, 왕은 스스로를 자화자찬했다. 태후는 그가 사흘이나 식사를 받지 못하도록 했고, 사흘 뒤에는 이 여름 무도회가 열렸다.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왕세자로서 태연하게 웃고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왕은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주방에 들어가 반죽을 훔쳐 먹었었다.

‘눈물 나는 어린 시절이군.’

왕은 남의 과거를 듣는 기분으로 옛날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악에 받쳤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그 독기는 가시질 않았는데, 그래도 지금은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이 새하얀 얼굴을 한 남자 덕분이다.

“반죽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라파엘이 물었다. 눈치는 정말 손톱만큼도 없는 남자다. 왕이 피식 웃었다. 그는 마스크를 턱까지 내린 라파엘의 뺨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면서 “글쎄, 좋아했던가?”라고 되물었다.

지독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뭐 추억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진 않았었어. 싫어했지만…….”

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의 양쪽 뺨을 두 손으로 눌렀다. 라파엘의 입술이 아기 새처럼 튀어나오는 걸 보며 왕이 키득거렸다. 그 입술을 진득하게 빨고, 왕이 말을 마쳤다.

“뭐, 싫으니까 다시 안 하면 되지. 이 반죽으로 만족하겠어.”

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의 뺨을 가지고 놀려 했을 때였다. 스완이 왕에게 속삭였다.

“전하, 저는 잠시…….”

“아아, 그래.”

왕은 그렇게 대답해주고선 라파엘의 뺨을 가지고 놀았다. 그는 귀족들에게 등을 보인 채로 라파엘의 뺨이 빨갛게 되도록 건드리면서 라파엘에게 물었다.

“라피, 스완은 어디로 가고 있지?”

여전히 왕의 손에 의해 얼굴이 이리저리 흉측하게 변했지만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라파엘은 스완의 행동을 주시했다. 스완이 만나는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정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누구와?”

“쇼어 공작부인입니다.”

차인 게 아니었나? 왕은 그제야 라파엘을 놔주었다.

라파엘이 마스크를 다시 올리는 동안, 왕은 고개를 돌려 스완과 공작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 연인의 싸움이란 복잡한 것이지. 왕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연애 선배다운 연륜이 온몸에서 넘쳐흘렀다.

다가올 일은 알지 못한 채, 그때의 왕은 여유작작한 태도로 과일을 집어 먹었다.

두 번째 댄스타임이 돌아왔을 때도, 스완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다시 한 번 사교상 춤을 춰야 하는 몇몇 귀족 부인 중 첫 번째로 예정된 부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우아하게 그 손을 잡았다. 왕은 라파엘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뭐라도 좀 먹으며 편안히 있어라. 하지만 이 근처에서 벗어나진 말고’라고 주문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게 딱 이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라파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왕궁에는 모르는 음식이 많았는데 심지어 파티장에는 도무지 정체도 모르겠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음식들뿐이었다. 그는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채 왕을 바라보았다.

위험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가져온 자도 보이지 않았고, 왕의 경호에도 빈틈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댄스플로어가 아닌 상석에서 왕과 주변을 확인하며 경계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진 않지만, 이 왕궁은 늘 경계가 삼엄한데도 표적이 되곤 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저…… 아니, 근위대장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레이드가 도착해 있었다. 여름 무도회의 첫날이라 모든 특수군이 야간까지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레이드를 비롯한 왕비의 경호조는 홀 안에서 라파엘이 왕을 주시하듯 라파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얌전하게 있는 양반이라 잘 못 느끼지만 오늘처럼 과시라도 하면 팍 기가 죽는다니깐. 그레이드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뭔가를 발견하곤 서둘러 라파엘의 뒤로 따라붙었다.

“왜?”

라파엘이 물었다.

“저기, 붉은 드레스 아가씨 말입니다. 아까부터 비…… 아니, 대장님 근처에서 맴도시는데 아시는 분입니까?”

그제야 라파엘은 왕이 아닌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레이드가 말한 아가씨가 누군지는 바로 보였다. 아까 자신에게 부딪쳤던 그 아가씨였다. 그녀가 왜 살며시 그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라파엘은 의아해졌다. 이 홀 안에서 라파엘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도 잠깐 만난 것 외에는 일절 알지 못했다.

“모르는데.”

라파엘이 대답했다.

그레이드는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름다운데다 도도한 기색이 역력한 게 아주 잘나가는 집 아가씨임이 틀림없었다. 옷차림도 대단히 좋아 보였다. 그는 여자의 드레스를 평가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이렇게 수많은 드레스 중에서 빛나는 걸 보니 분명히 개중에서도 아주 좋은 드레스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꾸 라파엘을 바라본다. 아, 불안하게 저 여자 왜 저래. 그레이드는 짜증이 치솟는 걸 겨우 참았다. 그는 최근 라파엘에게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물론 남자로서지!’

그레이드는 딱 잘라 남자로서 남자에게 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처럼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무술가로서 무술가에게 반한다는 의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라파엘 에반스라는 이름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무술인이 헤수스에 있던가? 있다면 나와봐라. 그런데 심지어 그 라파엘 에반스가 자신의 검을 사용하고 소중하다는 듯 닦아서 돌려주었다. 여기에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냐고 그레이드는 생각했다.

물론 반하지 않을 남자가 아주 많다는 것을 스스로도 정말 몰랐던 건 아니었으므로,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짓을 저지르진 않았다.

“비, 아니, 대장님.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레이드가 물었다. 아무래도 저 아가씨, 비전하에게 관심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물어보려 했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레이드는 결국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진 못한 채 여자를 흘끗거렸다. 여자는 왕의 눈치를 보면서 살금살금 도둑고양이 같은 발걸음으로 라파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모습을 눈치챈 몇몇 귀족들이 그녀에게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시선을 주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본인은 시선을 끌지 않고서 오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미 시선이란 시선은 다 끌었는데. 아, 곤란해. 이거 좋지 않은데.

그레이드는 아까 스완이 그랬듯이 왕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왕은 무엇 때문인지 춤추는 여자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왕이 왜 왕비 쪽을 쳐다보지 않지? 원래라면 두 눈을 부릅뜨고 왕비를 감시하는데.

‘어쨌거나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그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왕이 왕비를 총애한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그걸 감안하고라도 왕은 확실히 유난인 데가 있었다. 아, 피곤해. 그레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 꼴을 보고 왕이 모든 사람들을 쥐 잡듯 잡는 꼴을 보느니 왕이 이쪽을 안 보는 게 낫다. 하지만 곧 왕이 이쪽을 볼 것만 같아 그레이드는 라파엘을 슬쩍 발코니 쪽으로 밀어버렸다. 왕의 사각지대로 밀린 라파엘이 “왜?” 하고 물었다.

“거기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바깥은 확인 안 하십니까?”

그레이드가 그렇게 묻자 라파엘이 아 하고 신음하고 발코니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을 전혀 확인하지 않았구나. 라파엘은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 난간에 양손을 얹고 있자니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고, 달이 환하게 빛났다. 새하얀 달빛을 받은 채 라파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실내에서 오페라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파엘은 가볍게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마야 소리를 내면서 달아날 정도로 이상하고 기묘한 웃음이었다. 헤죽 하는 웃음은 피에로 가면이 일그러진 것처럼 흉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자신의 웃음이 흉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왕이 라파엘의 미소를 귀엽다고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세상 모두가 라파엘에게 웃음이 흉하다 말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왕은 분명히 그의 웃음을 사랑스럽다 했으니까.

실내에서 흘러나오는 곡은, 왕이 흥얼거려주었던 그 노래였다. 왕이 불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때가 선명히 떠올랐다.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발바닥에 보드랍게 밟히는 풀과 꽃의 융단, 피도 불도 아닌 수채화 물감을 하늘에 탄 듯한 아름다운 노을, 그리고 그 노을을 선명히 비추는 청량한 연못. 호화스럽다 못해, 손이 닿으면 녹을 것같이 달콤한 세계.

왕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세계는, 라파엘이 상상도 못 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왕이 보여주는 세계는 늘 그러했다. 라파엘의 어둡고 굳은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 선명하고 찬란하며 풍성한 곳이었다.

천국이 있다면 분명 이런 곳일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라파엘은 왕의 손을 잡고 빙글 몸을 돌렸었다.

이상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라파엘에게 너 따위는 지옥에나 가라며 저주를 퍼부었고 그 자신도 당연히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모르지만, 라파엘 자신은 왠지 잘 버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는 분명 그래왔는데. 아아, 하지만.

라파엘은 때로 절실히 통감한다.

당신은 천국에 가겠구나. 당신의 세계는 이미 천국이구나.

“대장님?”

밖을 확인하러 나와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유니스 라 버시슬이 서서 생긋 웃고 있었다.

“아.”

라파엘이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유니스에게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만 말하고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니스는 숙녀니까 무조건 예우를 해줘야 하나? 왕비일 때는 분명히 하대를 해야 하는 존재였는데 이젠 어떻게 되는 건지 상하관계가 혼란스러웠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니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싸늘한 분이네요. 숙녀를 몇 번씩이나 걸음하게 만들고요.”

유니스가 애교 있게 라파엘을 탓했다. 라파엘이 입을 달싹거렸다. 여자는 그에게 그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잘못인 건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파엘은 시녀장도 스완도 아닌, 하물며 그레이드만도 못한 여자의 말을 신뢰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유니스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유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도도한 남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점에서 더욱 믿음이 갔다. 이 고귀한 타락이니 뭐니 하는 궁중 사교계에서 이렇게 조신한 남자라니.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만을 바라볼 것 같은 사내였다.

설마 남색가는 아니겠지?

유니스는 약간 불안해하면서 물었다.

“뭘 하고 계시나요?”

라파엘이 주변을 눈으로 훑으면서 대답했다.

“경계하고 있습니다.”

“경계?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데요.”

“네,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유니스가 라파엘의 옆에서 새침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달빛을 받은 정원과 어두운 그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저 멀리 가든 하우스에서 누군가가 뭔가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그녀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유니스는 옆에 서 있는 라파엘 라 쇼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단정한 얼굴이다. 굳이 말하자면 왕비와 좀 닮은 듯도 했다. 왕비도 체구가 작고 키도 작았다. 역시 같은 핏줄이라 이거군. 왕비도 못생긴 주제에 어딘가 모르게 마리 왕후와 닮지 않았던가. 하지만 라파엘은 왕비보다는 체구가 더 커 보였다. 그것이 가죽 갑옷 덕분인지도 모르고 유니스는 싱긋 웃었다.

왕후 자리만은 못하지만 라파엘 라 쇼어의 아내 자리는 혼처 중에서는 최고가를 자랑하고 있다. 쇼어 가문의 며느리, 그것도 근위대장의 아내라니. 출셋길이 너무나 훤하지 않은가. 유니스는 환하게 웃었다.

왕후 자리도 좋지만, 이만한 자리로도 아버지는 충분히 만족할 사람이라는 걸 유니스는 모르지 않았다. 그 천박한 남작에게 그녀를 시집보내려고 하는 아버지가 아니던가. 고작 돈 몇 푼 버는 남작보다는 근위대장이 훨씬 낫지.

왕은 아름답고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그녀의 관심을 오래 끌고 있진 못했다. 흘러간 오페라 가수처럼, 보면 여전히 좋긴 하지만 꽃다발은 새로운 오페라 가수에게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오페라 가수가 여기 서 있었다.

“저기.”

유니스가 라파엘의 손목을 잡았다. 라파엘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팔을 꺾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네?”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파엘과 유니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 뭘 저렇게 끌고 서 있냐.’

그레이드는 발코니 창에 달린 커튼 뒤에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라파엘이 진짜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 세근 네근 방망이질을 쳐 미칠 지경이었다. 긴장감으로 토할 것 같다. 그레이드는 댄스플로어의 왕과 커튼 뒤의 라파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그러다 왕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왕이 그레이드의 얼굴을 이상한 듯 보더니, 바로 시선을 돌려서 라파엘을 찾기 시작했다.

‘나, 난 죽었다……!’

그레이드의 안색이 허옇게 떴다. 그 얼굴을 보자 왕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아무래도 저 춤까지 추고 돌아올 게 확실시되는데 하필이면 이 순간 여전히 라파엘은 유니스에게 팔을 붙잡혀 있고, 스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확실히 그레이드는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다. 아예 안색이 하얗다 못해 노래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종장이 슬쩍 발코니 쪽을 확인했다. 발코니 창으로 상황을 확인한 그가 그레이드의 매달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는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상황을 어떻게 도와주느냔 말이다. 도와달라고 할 거면 미리 하든가.

악마는 오지 말아야 할 그 순간에 온다고 했던가. 왈츠가 끝났다.

왕이 댄스플로어에서 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레이드가 왕과 발코니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그러자 왕이 발코니를 가리켰다. 거기에 있느냐는 질문에 그레이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발코니에서 라파엘은 유니스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대장님은 전하의 애인이신가요?”

라파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는데,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비로서의 그라면 쉽게 대답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라파엘이 말을 잇지 못하자, 유니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다시 한 번 물을게요.”

그리고 유니스가 팔을 쥔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그것은 여자의 힘으로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았다. 라파엘은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고운 손이다. 왕의 곁에 있다면 참 어울릴 것 같았다.

“대장님은 전하의 애인이신가요?”

……하.

그 ‘전하’는 발코니의 사각지대에서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다. 라파엘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에 왕은 대단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여자를 안으면 좋으냐고 묻더니만 감히 내 코앞에서 이런 짓을 해? 사람은 너무 어이가 없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왕이 지금 그러했다. 여자라서 봐준 게 아니라 정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뭐야, 이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차라리 하늘에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편이 덜 황당할 듯했다.

“대답하기 어려우신가요?”

유니스의 말에 라파엘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옳은지, 왕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그는 도무지 정답을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라파엘이 유니스의 팔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겹치며 물었다.

그는 타인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지만 지금만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진심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의도가 왕에게 해가 될까 봐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왕이라면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묻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니스가 “바보 같은 분……”이라고 말하며 손을 뻗어 라파엘의 뺨을, 정확히는 마스크 위를 쓸어내렸다.

자신을 보자마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당황한 눈을 보며 유니스가 천천히 그의 마스크를 내리려 했다. 남자는 아름답지 않지만 정갈했다. 그녀가 키스하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그 입술 또한 붉고 정갈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탐하는 그는 어떨까. 분명 탐욕스럽겠지. 이 단정한 남자가 그녀의 몸을 안으며 욕정에 휩싸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탁, 소리가 어딘가에서 났다.

“아.”

라파엘이 멍하니 신음했다.

“아? 고작 네가 할 말이 그게 다냐? ‘아’?”

그제야 유니스 라 버시슬은 또 한 명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녀가 그 존재를 눈치챔과 동시에 뭔가가 그녀의 뒤통수 한중간을 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유니스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며 시선만을 겨우 돌렸다.

왕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왕은 그녀보다 몇 발짝 뒤에 서 있었는데도 그녀의 머리에는 뭔가가 닿아 있었다. 유니스는 고개를 돌렸고, 좀 전까지 그녀의 머리에 닿아 있었던 것이 이제는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것은 총이었다. 왕의 총. 그 긴 총신이 창백한 달빛을 받아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전하?”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유니스 라 버시슬. 내 비에게 공식 인사를 운운했을 때도 봐주었더니, 그래 이젠 내 정부에게까지 손을 뻗나? 내 정부를 하겠다는 계집이, 내 정부와 놀아난다? 너는 지금 왕을 뭘로 보는 거냐?”

왕은 되는대로 말을 하면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너무 화가 나서 눈에 열이 오를 지경이었다. 머리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 것이 분명했다. 손끝이 저리고, 온몸의 피가 미친 듯한 속도로 내달렸다. 그런데 그를 더 미치게 하는 건 라파엘의 손목이 여전히 미친년에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손 놔.”

“전하……, 그, 그게.”

콰앙―, 총소리로 실내에 꺅 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지금 왕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는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제정신이 아니게 되고 있었다. 그레이드가 어쩔 수 없이 발코니로 한 발짝 나서려는 순간 왕의 총구가 그레이드를 향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

왕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피를 뒤집어쓴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렇게나 예쁘던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그 깨끗한 검은 눈도, 청순한 검은 머리칼도 못 견디게 미울 지경이었다. 라파엘의 크게 뜬 검은 눈을 파내버리고 싶었다. 격렬한 분노가 왕을 진창으로 만들었다.

“손을 놓으라고 했는데 왜 떼어내지 않았지?”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피가 이마부터 뺨까지 흘러내렸다. 이름 모르던 아름다운 여자는 한쪽 머리가 터진 채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 시체에서 한 발짝 멀어졌다. 왕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은 왕이 상처 입은 짐승의 신음 소리를 낸다. 라파엘은 광기에 찬 그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왕족 모독죄로 가둬.”

왕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말하며 유니스, 아니, 유니스 라 버시슬이었던 시체를 스쳐 지나갔다. 시신을 가문에 돌려주지조차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그가 라파엘의 팔뚝을 붙잡았다.

왕은 라파엘을 끌고 이그나치오궁의 위층으로 올라갔다. 왕의 걸음을 제대로 못 따라잡은 라파엘이 몇 번이나 휘청거렸지만 왕은 개의치 않았다. 어디로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채로 라파엘은 어딘가로 끌려왔고, 그리고 내팽개쳐졌다. 등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왕이 그의 위에 올라탄 뒤였다.

“여자를 안고 싶어?”

왕이 물었다. 그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서 있다. 라파엘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왕을 바라만 보다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려 했다. 왕이 그 움직임에 이를 바드득 갈면서, 그러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으면 반항해. 내가 다칠지도 모르지만.”

당황해서 몸에 힘이 들어가려 했던 라파엘이 바로 힘을 뺀다. 왕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왕을 다치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왕이 라파엘의 가슴 위로 올라와 자신의 옷을 헤집어 성기를 빼냈다. 아직 풀죽어 있는 성기가 입술에 문질러지자 라파엘은 멍하니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빨아.”

왕의 말에 라파엘이 잠시 망설이다 왕의 강경한 시선에 밀려 결국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싫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뭐가 싫은지, 라파엘은 잘 알 수 없었다. 사실 싫다는 느낌 자체가 생경했다. 아니, 이 모든 것이 그저 낯설었다. 다정한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싫은 것 같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능욕당하는 기분이, 며칠 전에 새에게 주었던 구더기에 온몸이 파묻히는 듯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왕이 하라고 했으니까. 라파엘은 충직하게도 왕의 것을 성의를 다해 애무했다. 서툴고 어색하지만 성의 있는 애무에 왕은 금세 발기했다.

목구멍 깊숙한 곳을 왕의 것이 쿡쿡 찔렀다. 숨이 막혔지만, 왕은 봐주지 않았다. 라파엘은 숨이 막혀서 시야가 하얗게 물들 때까지 왕의 것을 빨아야 했다. 그러다 잠깐의 공기가 주어지고, 그다음에는 다시 그 짓을 반복했다. 라파엘이 숨이 막혀 손을 들 때마다 왕이 말했다.

“날 다치게 할 셈이야?”

타액에 충분히 젖은 왕의 것이 뒤에 닿았을 때 라파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왕의 명령으로 스스로의 허벅지를 안고 가랑이를 벌린 라파엘은 왕이 어떤 일을 할지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라파엘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왕이 라파엘을 단숨에 꿰뚫었다.

잠깐 귀두가 걸려 멈추는 듯했다. 라파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왕은 힘을 주어 라파엘의 가장 여린 살을 찢어버렸다. 찢어지는 소리가 왕의 귀에,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라파엘의 온몸에 파고들었다. 배 속을 주먹으로 얻어맞는 듯한 고통에 라파엘의 목 안쪽에서 비명이 울린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 비명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고통이다. 왕은 지금, 고통을 주기 위한 섹스를 한다.

하지만 라파엘은 이것을 고문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고문이라면 라파엘은 충분히 아픔에서 정신을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왕이 주는 것이라면 아픔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아픔을 받아들였다. 민감한 몸인 만큼 아픔 또한 지독히 선명했다. 식은땀이 흘러서 절로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그래도 라파엘은 아픔에 몸을 웅크리는 대신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평소 신음 소리를 내던 왕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조금도, 아주 조금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피와 라파엘 자신의 피가 섞여, 피 냄새가 진동한다.

라파엘은 그를 올려다보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끌어안으면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파엘은 손을 올리다가 그만두었다.

빌어먹을. 왕은 자기혐오에 라파엘에 대한 증오까지 겹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이 혐오스럽다. 그리고 여자와 태연히 웃고 있던 라파엘이 증오스럽다. 여자, 여자라고? 여자를 안고 싶다고! 여자를, 안고, 싶다고!

죽여버리고 싶다. 이렇게 가슴이 흔들리는 아픔과 괴로움을 겪느니 죽여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왕이 움직이다 말고 멈춰서, 라파엘이 멍한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바라보는 말간 눈이 싫어서 왕은 손을 들어 라파엘의 눈을 감겼다. 책망당하는 것 같은 괴로움과 그 눈을 파내고 싶은 증오가 같이 끓어올랐다.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의 출구를 열어주려 입을 열자, 분노도 괴로움도 아닌 원망이 흘러나왔다.

“왜……, 너는 왜 이제 와서 여자를 안고 싶다고 하는 거냐.”

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라파엘을 책망했다.

“이제 와서, 네가…….”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이 끔찍하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자각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제정신을 차리고 싶기는커녕 라파엘을 아예 부숴놓고 싶었다. 얼굴? 다리? 어디를 부수면 더 효과적일까. 어디를 뭉개놔야 아무도 너를 신경 쓰지 않을까. 미쳤다는 걸 아는데, 이 생각이 멈춰지질 않아.

사랑받지 못한다.

남색가 따위, 절대로 사랑받지 못한다.

왕의 푸른 눈에서 시퍼런 눈물이 뚝뚝 흘렀다. 너무 화가 나서, 너무 슬퍼서, 그런데 이 통렬한 분노와 슬픔을 쏟아낼 곳이 결국 이 배신한 연인뿐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그는 눈물이 계속 났다.

너 때문이야. 그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속으로 라파엘을 탓했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는 이렇게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를 만나서, 그런데 네가 이제 와…….

피가 이미 엉덩이 부분의 시트를 가득 적시고 등 부분까지 적시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라파엘은 홀린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왕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전…… 안고 ……적은…… 없…….”

또박또박 말하고 싶은데 고통이 상당했다. 라파엘은 목소리를 쥐어짜 내다시피 하며 왕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뒷말은 나올 수가 없었고, 왕은 시퍼렇게 날이 선 얼굴로 눈물을 흘리면서 조롱하듯 웃었다.

“그래. 넌 여자를 안으면 좋으냐고 물어봤지. 안고 싶다고 한 게 아니라. 그리고 여자에게서 고백을 받으며 손목을 잡혀 있었고. 내가 가지 않았으면 어쩔 셈이었지? 키스라도 할 생각이었나? 여자를 안으면 좋은지 그녀의 몸으로 확인해볼 생각이었나? ……나는 네가 미워. 내 토끼, 아기 새, 사슴, 거북이…… 네가 미워. 미워서 돌아버릴 지경이야.”

왕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 누그러들었던 고통이 배가 되어 찾아온다.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통이 더욱 증가한다. 왕이 “여자를 안는 맛은 알려줄 수 없지만, 여자로서 안기는 괴로움은 알려주지”라고 말하며 난폭하게 움직였다. 이미 찢어진 곳은 흘러나온 피로 인해 더욱 수월하게 움직여졌지만, 찢어진 상처를 문질러대는 통에 더욱 날카로운 고통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결국 라파엘이 낮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비명은 계속되었다. 왕은 잔인했고, 라파엘은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기절은 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라파엘을 유린했다. 먼저 떨어져 나간 쪽은 왕이었다. 그는 거칠게 라파엘을 침대에 내려놓고 자조했다.

“대가를…… 치러도 상관없다고? 인간은 참 지긋지긋한 동물이야. 자기 일이면, 너무나 낙관적이 되거든.”

어느 노을 밑에서의 카드리유를 떠올린다. 그 행복이 분명 대가를 담보로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낙관했던 것일까. 타인의 어리석은 행동을 높은 곳에서 비웃으며, 자신 또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야 만다. 왕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혐오가, 피투성이가 된 라파엘에 대한 괴로움에, 무엇보다 자신이 망가뜨린 아름다운 사랑에.

그는 자신이 만든 폐허에 등을 돌렸다. 심장이 쥐어짜여, 여기서 더 이상은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왕이 피투성이가 된 몸을 닦지도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제야 홀로 남은 라파엘은 시녀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인지 기절인지 모를 편안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얗고 가늘지만 언제나 강했던 팔이 침대 밑으로 툭 떨어졌다. 시든 백합처럼 처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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