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카드리유
후두득,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라파엘은 온실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특수군이 건네주는 쪽지를 읽고 있었다. 왕과는 달리 라파엘은 일단 그 종이를 유심히 살폈다. 마법적인 효과가 있지는 않은지 알아보기 위해 분무기를 가져와 물에 살짝 적셔보거나 촛불 위에 드리워보기도 했다. 어느 쪽에서도 특별한 문구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라파엘은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전서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내용을 숨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내용이 숨겨져 있지 않다니. 이 전서구는 도대체 어디로 갈 셈이었던 걸까.
‘먼 곳은 아니었나.’
라파엘은 그렇게 추측했다. 가까운 곳이라면 어디일까. 새는 새장 속에서 유순한 눈으로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물어도 새는 대답해주지 않겠지. 라파엘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으악, 비전하!”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라파엘이 손으로 집은 것을 든 채로 “어?” 하고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반대편의 시녀들이 악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왜 그래?”
라파엘이 묻자 시녀들이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그, 그거 말입니다!”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제야 라파엘은 자신이 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구더기였다. 응, 이게 뭐?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묻자 시녀들이 제발 내려놓고 이야기하자며 울상을 지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돌려 새를 바라보았다. 새는 탐욕스럽게 라파엘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훈련된 새는 아니구나. 라파엘은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새에게 구더기를 건네주었다. 그 부리가 구더기를 집자마자 손을 떼었더니, 새는 마치 라파엘의 살점을 뜯어먹을 기세로 구더기를 씹어 먹었다. 꽁무니부터 부르르 떠는 것이 맛있는 모양이다.
‘한심해…….’
라파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레이드에게 맡긴 총은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왕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바쁘다는데, 그래서 라파엘을 만나러 올 수조차 없다는데, 라파엘은 여기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라파엘은 그를 위해 열심히 지리나 역사나 정치 공부를 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나쁜가 봐, 라파엘은 자조했다. 특별히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왕은 거울처럼 그를 비춰서 그의 알지 못했던 점들을 비추고 만다.
왕을 생각하면, 세상이 다 좋은 것만 같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아름답다. 지금 비가 오는 것도, 눈앞의 구더기조차, 그저 아름답다. 그저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세상은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곳으로 변모한다. 당신을 지키고 싶다. 당신에게 뭔가를 주고 싶다. 라파엘의 가슴은 그런 감정으로 충만했다. 피가 온몸을 사뿐사뿐 돈다. 희미한 열에 들떠서, 라파엘이 가진 모든 감정을 지켜주고자, 고양이처럼 그의 온몸을 살금살금 돌면서 그의 온 세포를 일깨운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배 속에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랑이 편안히 잠들어,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코끝으로 흙 내음이 스친다. 물 묻은 공기에 젖어 풀냄새가 더욱 진해지고 있다. 라파엘은 갑자기 눈을 떴다. 평온한 공기를 흐트러뜨리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안네마리?”
온실 저편에서 왕이 여러 명의 시종과 병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문득,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왕은 눈을 크게 떴다. 평소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라파엘이 달려왔다.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드레스가 팔락였다. 긴 검은 머리칼이 허공에서 팔락였다. 희고 마른 팔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순식간이었다. 라파엘은 그에게 달려와 안겼고, 왕은 라파엘의 허리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안네마리……?”
왕이 조심스럽게 불러보았지만,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대신 고양이처럼 왕의 목덜미에 머리를 부빌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그 몸의 체향을 만끽했다. 공식 인사 건으로 화를 내러 온 것이었는데 이미 화는 잊혔다. 라파엘은 왕을 보자마자 달려왔고, 안겼고, 온몸으로 그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뭐 하러 여기에 왔는지조차, 왕은 이미 기억할 수 없었다. 그가 기억해낸 것은 라파엘을 오랜만에 팔 안에 안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흘끗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이미 시종과 시녀와 병사들을 같이 물리고 있었다. 문득 시선이 마주치자 시종장은 소리 내지 않은 채 입만 벙긋거렸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시간이 아주 짧다는 이야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를 내보낸 시종장이 온실 문을 닫자, 왕은 라파엘을 조금 떨어뜨려놓았다.
라파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울기는커녕, 외로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라파엘은 정말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파엘의 몸짓에선 그리움이 전해져왔다.
왕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라파엘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왕은 키가 커서, 라파엘이 뒤꿈치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라파엘이 손을 들어 왕의 양뺨을 감쌌다. 왕도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았다.
갓 태어난 새의 날갯짓처럼, 부드러운 키스였다. 왕이 라파엘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미끄러뜨리면, 라파엘도 똑같이 왕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미끄러뜨렸다. 타액도 교환되지 않는 키스는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욕정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며칠 만에 만나는 연인이었다. 얇은 옷가지가 서로에게 거리감을 주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욕망보다도 이 사랑스러움에 취해서, 둘은 몇 번이고 서로의 떨리는 입술을 번갈아 머금었다.
“응…….”
라파엘이 먼저 신음했고, 왕이 그 순간 달려들었다. 사랑스러움 따윈 축축한 공기에 녹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꽈당―소리를 내며 둘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흙 범벅이 되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상관할 수 없었다. 입술이 닿아 있었고, 혀가 옭아매어져 있었다. 혀의 민감한 부분을 비비면서 신음을 터뜨렸다.
왕이 라파엘의 등으로 손을 돌려 옷을 풀었다. 약간의 틈이 생기자마자 우격다짐으로 벌려서는 손을 집어넣었다. 가짜 가슴을 밀어내고 납작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대자 라파엘이 목을 젖혔다. 이미 유두는 뾰족하게 서서 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 마시지 못한 타액이 라파엘의 턱을 따라 흘렀다. 왕은 그 타액을 따라 핥다 턱을 깨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라파엘은 소리 없이 몸을 떨었다.
왕이 라파엘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이미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들어가는 순간, 라파엘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은 잠시 망설였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 아파, 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열기에 숨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왕이 고개를 움직여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창백하던 얼굴에 붉은빛이 가득했다. 아플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프게 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이 다리를 움직인다. 왕의 허리를 감은 다리가 희미하게, 어쩌면 착각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힘으로, 하지만 분명히 왕을 끌어당겼다. 라파엘이 헐떡였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얼굴을 희미하게 찌푸리면서, 라파엘이 왕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온몸으로 왕을 끌어안았다.
“아, 읏!”
소리를 지른 건 왕이었다. 라파엘이 사지를 사용해서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 라파엘의 점막까지 왕을 끌어당겨, 그의 모든 것이 라파엘의 안에 뛰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있을 수 없는 도취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라파엘의 안으로 그는 온몸을 던졌다.
라파엘이 왕을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왕이 강렬하게 움직인다. 왕의 분신이 심장까지 마구 두드려, 그의 안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듯하다. 그것이 쾌감으로 직결된다. 분명 부서지고 있다. 왕은 그를 부수고 있다. 그렇지만 그대로 좋았다. 왕에게 부서진다면, 그렇게 끝난다면 분명히 행복할 것이다. 가루가 되어 조각 하나하나로 흩어져도, 당신은 분명 눈부시고, 나는 이렇게 열에 들떠서 그저 행복하겠지. 부서지든 말든 왕과 가장 깊숙이 연결되어서, 이렇게 서로 같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라파엘은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왕의 목을 깨물었다. 이 감각을 왕과 좀 더 절실하게 나누고 싶었다. 왕이 호응해주듯이, 손을 들어 라파엘의 가슴을 짓이겼다.
라파엘이 먼저 절정에 올랐다. 소리 내지 않고, 라파엘은 왕의 목에 이를 세우며 온몸을 굳혔다. 왕이 읏 하고 신음했다. 라파엘이 왕을 쥐어짜고 있었다. 걸인이 식사를 하듯이, 왕은 허겁지겁 움직였다. 라파엘이 절정에서 해방되기도 전에 왕은 라파엘의 안에 토정했다. 그 뜨거움에 라파엘이 작게 진저리를 쳤다.
“귀여워.”
왕이 아직도 라파엘의 안에서 뜨거운 체액을 쏟아내면서 속삭였다. 라파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얼굴은 붉었다. 특히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는 게 꼭 강아지 같아…….”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미친개’ 따위의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강아지’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라파엘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도 하지 않고 왕은 몸을 조금 움직여 라파엘의 가장 안쪽에 하얀 물을 뱉으려 하면서 라파엘의 귓가와 뺨에 키스했다.
“밥은 먹고 있는 거냐? 뼈가 부딪치는데.”
왕의 말에 라파엘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먹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왕을 끌어안은 채로 말하기에는 충분했다.
“잘 먹어야지. 도대체 네 시녀들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군. 나는 통통하고 귀여운 강아지가 좋은데 너는 잘못하면 비루먹은 개가 되게 생겼어.”
아, 그런가.
라파엘은 자신을 내려다보았지만 왕이 그에게 달라붙어 있어 자기 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왕의 금발과 강인한 어깨뿐이었다.
“잘 챙겨 먹어라. 내가 없어도 늘 잘 챙겨 먹어야지. 통통한 강아지가 되어서 내게 한입에 삼켜져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라파엘은 그저 침묵했다. 자신이 어떻게 강아지가 되어 그에게 한입에 삼켜지는 걸까. 아니, 그전에. 왕은 강아지를 먹는단 말인가!
“예쁘게 하고 다니고. 너처럼 말라비틀어진 게 그 음흉한 여름 무도회에서 잘 버티려면 잘 먹어야지. 알겠느냐?”
여름 무도회. 무도회를 떠올리자 라파엘은 웬 여자가 떠올랐다. 왕의 곁에 있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 그녀가 떠올라서 라파엘의 가슴은 욱신거렸다. 라파엘이 왕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여자를 안으면…… 기분이 좋습니까?”
왕의 그나마 좋아졌던 기분을 확 상하게 하는 말이었다. 왕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자?”
왕은 나라 안에서 유명한 남색가였지만 라파엘은 왕이 남자만 안을 수 있다는 걸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게 어떤 건지 개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라파엘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예, 전하.”
“여자라니. 네가 여자를 안…….”
왕은 입을 다물었다. 되는대로 나오려던 말이 그대로 막혔다. 라파엘은 섹스를 고문으로 알았을 정도로 색사에 관심이 없는 남자다. 라파엘은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라파엘은…… 여자를 안을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라파엘은 여자를 안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여자를 안으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 라파엘이 하는 건 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파엘은 말을 가릴 줄을 모른다. 그가 물으면 라파엘은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은 건가?’
왕은 자문했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아니, 왕은 솔직한 대답보다는 일률적인 대답을 원했다. 솔직하든 솔직하지 않든, 여자 따위는 안고 싶지 않다는 답변을 원하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아니, 아니다.”
왕은 당황했다. 그에게 있어 말이 막힌다는 경험은 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말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시종장이 들어왔다.
“전하,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
왕은 구세주라도 만난 심정으로 바로 일어났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왕이었고, 라파엘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라파엘이 무슨 말을 하든, 라파엘의 사정은 지금과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라파엘의 입에서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시종들이 뒷수습을 하자마자 왕은 도망치듯 문 플레이스의 온실을 나오고 말았다. 온실에서 라파엘은 왕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둔한 라파엘조차 왕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마 잘못 본 것일 테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던 라파엘이었지만, 왕은 그 이후로 여름 무도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라파엘에게 들르지 않았다.
분명히 그때 뭔가 있었던 것 같아. 뭔지는 모르지만, 그때 뭔가가 있었어.
라파엘은 멍하니 마지막으로 봤던 때의 왕을 떠올렸다. 자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왕은 서둘러 가버렸다. 늘 환하던 얼굴은 그늘져 있어서, 라파엘은 왕의 얼굴을 홀린 듯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왕은 그 이후로 라파엘에게 오지 않았다. 시녀들은 왕이 굉장히 바쁠 때라고 말했고, 작년과 재작년에도 왕은 이때 참 바빴었다. 그러니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작년과 재작년, 왕은 바쁜 와중에도 잠깐씩 시간을 내서 그를 보러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왕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뭔진 모르지만…… 내 잘못이겠지?’
라파엘은 새에게 물어보았다. 새는 비둘기였다. 하얀 몸체에 부분부분 회색이 섞인 비둘기는 새장 안에서 물끄러미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내 잘못일 거야. 가서 사과하는 게 좋을까?’
팍 하고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파엘은 흘낏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비둘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비둘기가 사람 말을 못 한다는 데서 라파엘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비둘기는 사람 말을 못 하고, 그는 사람 말을 할 줄 알지만 그래봐야 혀가 무뎌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파앙, 소리가 난다. 라파엘은 이제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사실 라파엘은 확신하고 있지 않았다. 라파엘에게 인간의 감정이란 어려운 역사서와 같아서, 그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져서 이렇게 되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라파엘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 단순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물어보면 좋겠지만, 그는 지금 무기한 근신령을 받지 않았던가. 그가 지금 여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서면으로 왕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높고 파랬다. 흰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나른하고 아름다운 날씨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왕은 뭘 하고 있을까. 그는 그런 수많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저 하늘을 보고는 있을까.
라파엘은 자신이 살수였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이 살수일 때는 그 자신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그는 주로 땅을 바라보며 달렸다. 자신을 노리는 인물들과 자신이 노리는 인물의 직선 추격전. 그것이 라파엘의 인생이었다. 때로 라파엘은 그 추격전 사이사이에 걸음을 멈추고 동물들을 주웠다. 라파엘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다면 상대는 이름 모를 그 동물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루’ 정도였다.
루…… 라. 라파엘은 자신이 죽인 루를 생각했다. 루는 그 지뢰를 라파엘이 설치했다는 것에 정말 놀라는 듯했다. 어째서일까. 라파엘의 집 앞에 설치된 지뢰를, 라파엘이 아니면 누가 설치했단 말인가.
라파엘은 허리를 곧게 펴고 인형처럼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새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그가 뭔가를 잘못했을 것만 같다.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타인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왕은 그에게서 상처를 입었을 것만 같다.
라파엘은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내리 눌렀다. 아팠다. 왕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초조해졌다. 그런 게 아니라고 왕에게 설명하고 싶어진다. 그는 분명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혀는 녹슨 검보다도 무디다. 종이 하나 자르지 못하는 검보다 쓸모없는 혀는 결국 왕에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왕을 보고 싶었다. 상처를 주려 한 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왕은 다 알아들을 것만 같았다. 왕은 그에 비해 똑똑하니까, 그의 무표정만 보고도 기가 막히게 그의 마음을 눈치채니까.
‘사랑의 힘이지.’
왕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라파엘은 그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 라파엘을 달아오르게 하는 이 뜨거움은, 그를 미치게 하는 이 아픔은, 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악, 난 못 하겠소!”
걸걸한 비명 소리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끌려나오는 남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특수군들이 도살장에 소를 끌고 오듯 그를 끌어냈다.
“뭘 못 해. 앞으로 서른 개밖에 안 남았어.”
그레이드가 코웃음을 쳤다. 용병 출신인 그레이드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약자를 죽인 살인범이다. 임신부나 노인 등을 주로 죽이다가 재수 없게 귀족 여인을 죽여 왕궁 감옥에 갇힌 이 살인범이야말로 그레이드가 경멸과 혐오를 누르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레이드의 옆에는 총이 쌓여 있었다. 한쪽 무더기는 시험 사격이 끝난 것이었고, 다른 무더기는 시험 사격을 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그레이드에게 맡겨진 일이었지만, 그레이드는 라파엘을 경호하느라 그동안 시험 사격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라파엘과 그레이드는 이 화창한 날씨에 초원에 나와 살인범을 하나씩 끌어내서 시험 사격을 시키고 있었던 차였다.
“괴물!”
살인범이 라파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넌 나라를 망하게 할 괴물이야! 우리의 왕을 현혹하지 마라!”
이게 미쳤나.
그레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어차피 가는 생 곱게 가고 싶지 않구나? 흔히 말하는 살인범이라는 새끼들은, 하여간에 지저분하고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약자를 끝없이 괴롭히면서도 정작 제 살점은 몇 군데만 슬쩍 떠내도 눈물과 오줌과 똥을 질질 흘리고 싸면서 살려달라고 말하는 더러운 것들이다. 그런 주제에 라파엘 에반스를 상대로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그레이드는 슬쩍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이 야외용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가끔 라파엘, 아니, 왕비를 볼 때면 그레이드는 이해할 수 없어졌다.
라파엘 에반스로서 그는 완벽한 경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여장을 하고 왕에게 똥구멍 따위를 대주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차라리 먹는 게 낫지.
그레이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스완도 제이슨도 ‘어리다, 어려’라며 대꾸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레이드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라파엘은 그 무거운 하이힐을 신고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것이 무서워 그레이드는 라파엘의 발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소리가 날 때도 있지만,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드는 라파엘이 일부러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알고 오싹했던 적이 있다.
라파엘은 힘을 과시하지 않아서 그의 힘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도리어 상상의 여지를 남겨서 타인을 두렵게 한다.
라파엘이 살인범의 앞에 다가와서 그레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은 그저 우아해 보일 뿐이다. 그레이드가 자신의 검을 그 손에 올리자 라파엘이 검을 빙글 돌려 그 끝을 살인범의 목에 대었다. 검 끝에 닿은 목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집어.”
라파엘의 말에 살인범이 벌벌 떨었다.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 번 더 검을 움직였다. 검 끝이 스륵 움직였다. 조금 옆으로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이제 피는 한 줄기라기보단 한 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정도로 흐르는 양이 많아졌다.
“지, 집겠소. 그러니까, 그러니까 해치지 마십시오. 제가, 너무, 무서워서, 말을 잠깐, 그것이…….”
살인범은 덜덜 떨면서 총을 집었다. 라파엘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살인범이 라파엘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레이드와 특수군 병사들이 “안 돼!”라고 비명을 지르며 라파엘을 덮치려 했다. 몸으로 방패가 되어 왕비를 살려보겠다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고개를 흘끗 돌렸을 뿐이었다.
그제야 특수군은 라파엘이 그레이드의 검을 살인범의 배 한중간에 꽂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는데도, 라파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살인범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살인범이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의 무릎은 곧 허물어졌다.
거구인 살인범이 검에 꼬치처럼 꿰여 몸이 반으로 접혔다. 라파엘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살인범은 별로 좋은 남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은 이런 일에 정치범을 쓰는 건 옳지 않다며, 세상 제일의 개새끼를 쓰라고 했다 하니까. 그러니까 아마 이 남자는 세상 제일의 개새끼였겠지.
하지만 세상 제일의 개새끼가 걱정하는 왕이라니…….
‘역시 내가 잘못했나 봐.’
그는 찬란한데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조차 목숨을 바쳐 걱정하는 좋은 왕이다. 라파엘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잘못이 틀림없었다. 그가 만약 기분이 상했다면 분명 그의 잘못이리라.
“저, 제 검…….”
그레이드가 옆에서 중얼거려, 라파엘은 검을 빼내었다. 그 순간 피가 쏟아졌는데, 라파엘은 그것을 피했고 대신 그레이드가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았다.
“비전하!”
“왜 안 피했어?”
손목에 걸고 다니는 작은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검을 닦으며 라파엘이 의아하게 물었다. 순식간이라 피할 수 없었지만 이 괴물 같은 왕비님은 피할 수 없었다는 사정 따윈 있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묻고 있어 그레이드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냥 피하기 싫었습니다.”
어린애의 말이라 특수군과 근위병들이 키득거렸지만, 라파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었다. 피하기 싫었구나, 라는 태도를 보며 그레이드는 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알아챈 다른 이들이 얄미운 만큼 왕비에 대한 호감이 생겨, 그레이드는 가만히 왕비를 훑어보았다.
왕비는 아름다웠다. 그 알맹이가 단정하고 특징 없는 남자가 숨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요염하면서도 청순한 그 얼굴은 귀족 남성들이 왕비를 안고 싶어 몸이 달아한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에비, 에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레이드는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레이드?”라는 목소리에 끌려 눈앞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이 그에게 검을 건네주고 있었다.
눈치는 더럽게 없고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그레이드는 생각했다. 그 증거로 라파엘은 그의 검을 깨끗하게 닦아서 돌려주고 있지 않은가.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검이겠지만, 그레이드에게는 처음으로 거금을 주고 산 비싼 검이었다. 가장 저렴한 것이긴 해도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라파엘은 그걸 아는 것처럼 검보다 더 비쌀 듯한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서 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티테이블로 돌아가 새장에서 새를 꺼냈다. 새가 라파엘의 손가락에 앉아 넓은 하늘 아래로 나왔다. 새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한 번 더 확인한 라파엘이 휙, 하늘로 새를 던져 올렸다. 비둘기가 날아올라 팔락거리며 다른 하늘을 향해 날갯짓했다. 그 새가 사라지기까지 지켜본 라파엘이 그레이드를 돌아보았다.
“나머지도 시험 사격 해야지.”
“아, 예, 예.”
그레이드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살인범을 끌어내었다.
화사한 하늘 아래에서 왕이 미친 듯이 달린다. 방금 안 돼, 라든가 왕비님, 이라는 소리가 울렸었다. 왕비라니, 이 왕궁에 비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왕이 달릴 때마다 왕의 발치에서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들이 풀썩거린다.
‘여자요? 왕비님, 아니, 그러니까 라파엘 에반스가요?’
스완의 목소리가 왕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전하, 그냥 물어보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나 총애하는 비를 내버려두고 매일 밤 저와 술잔을 기울이시다니, 이 동생 참 영광이긴 한데…….’
스완은 피식거리면서 얼음 위에 술을 끼얹었다.
‘라파엘 에반스가 여자를 안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라파엘 에반스 정도의 이름값이면 창녀들이 그냥 제 몸을 갖다 바쳤을 인물인데, 게다가 솔직히 얼굴도 그렇게 반반한데, 그런데 아무도 안지 않았다는 건 본인이 관심 없는 겁니다. 솔직히, 전하. 전하께서도 남자로서 생각해보십시오. 여자, 아니지. 전하께는 남자라고 하는 게 낫겠습니다만. 전하 취향의 남자가 매일같이 달려드는데, 전하가 고자나 불감증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슬픈 동물이라 무시…… 솔직히, 좀 어렵습니다.’
스완의 말에 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차가운 머리로 생각해보자, 라파엘이 정말 여자를 안고 싶었다면 왕의 앞에서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솔직한 라파엘이라고 해도 여자를 안고 싶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분명히 라파엘은 말을 잘못 했고, 왕은 그걸 또 잘못 들은 것이다. 그러자, 그제야 라파엘을 만날 용기가 생겼다.
오늘 시험 사격을 한다기에 우연처럼 만나려고 정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시간을 내기 위해 왕은 아침부터 모든 일을 당겨서 해야 했다. 내일부터 여름 무도회인데 겨우 오늘에야 동대륙과 남대륙에서 긍정적인 서신과 함께 공물을 보내왔다. 정기적인 진상이 아닌 공물인 걸 보니, 그들도 이쯤에서 일단 물러설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주 바다 경계선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의 앞에서는 이렇게 몸을 납작 수그리고 있어도, 뒤로 서대륙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왕은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내일은 또다시 생각날 일들이다. 그러니 지금은 라파엘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는 라파엘에게 가고 있었다. 안 돼, 왕비님. ―그 순간, 왕은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특수군 한 명이 앞서서 달리고, 나머지 근위병과 특수군은 왕을 보호하듯 둘러싸며 그와 보조를 맞춰 달렸다. 어차피 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왕비의 안전에 대해서라면, 왕은 모든 이성을 상실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왕과 같이 달리고 최후의 순간에 왕의 방패가 되는 것뿐이다.
몇몇 시종들이 뒤처졌고, 몇몇 시종들은 놀랍게도 왕과 보조를 맞춰 따라붙었다. 그중에는 노인이라 할 수 있는 시종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파엘이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많은 인원이 달려오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라파엘이 시선을 주자, 그레이드는 이미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특수군들이 라파엘과 시녀들을 둘러쌌고, 몇 명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긴 채 활을 겨누었다. 화창한 하늘은 축복이 아닌 불길함으로 변해버렸다.
넓은 초원에서 두 무리의 사람들이 조우한다. 조우하는 순간, 독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안네마리!”
정체를 알아보고 안심한 자들과는 다르게 왕은 특수군을 밀치며 라파엘을 찾아냈다. 라파엘을 찾아내자마자 그의 무사함을 확인하는 왕의 얼굴에는 공포가 역력했다. 라파엘은 멍하니 왕의 거친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왕이 나타난 게 신기하고 현실감이 없어서,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왕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왕이 날카로운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다친 곳은?!”
라파엘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죽여도 죽지 않을 사람을 상대로 참 애지중지시라니깐…….
그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옛날부터 왕을 모셔온 자들은 왕이 왜 이러는지를 알기 때문에 차마 그를 말릴 수 없었다. 특히나 총이라면 왕은 질색을 하기 마련이다. 왕비를 총으로 쏘아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버린 건 왕 자신이 아니던가.
“빌어먹을, 저 총을 아주 불 질러버릴 테다! 산산이 가루를 내버릴 거야!”
왕이 고함을 질러서 특수군들이 재빨리 총을 치우기 시작했다. 라파엘의 총은 확률이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발사되고 있었다. 신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살인범 놈들의 손에서 발사되는 총을 봤을 때, 특수군은 얼마나 환희에 찼던가. 저 총들이 개발된다면 가장 먼저 지급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특수군들이었다. 그들은 총을 가지고 싶었다. 열렬히, 특권층에게만 허락된 저 총을 써보고 싶었다. 왕이 열을 받아 다 폐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전에, 특수군들은 재빨리 왕의 시야에서 총을 치웠다.
왕이 라파엘을 향해 언성을 높이려 했다.
“안네마리, 넌 도대체가, 왜 툭하면!”
“역시 제 잘못입니까?”
라파엘이 드물게도 왕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대단히 무엄한 짓이지만 왕은 그런 라파엘을 탓하는 대신 뭐? 하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상처를 드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라파엘이 미간을 좁히며 천천히 말하려고 해서 왕은 라파엘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라파엘이 잘못되었을까 봐, 공포로 머릿속이 하얗게 된 연인에게 라파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은 천천히, 왕을 어떻게든 이해시키려 애쓰면서, 한 단어 한 단어 말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고 찢어질 것 같은 폐의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왕은 라파엘의 양어깨를 손톱을 세워 움켜쥔 채 라파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는…… 제가 뭘 했는진 모르지만……, 전하께 상처를, 아니, 얼굴에 그늘이, 아니…….”
라파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말이 잘 안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왕을 바라보자, 왕은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말을 하라는 얼굴이라 라파엘은 입을 좀 더 달싹였다. 오랜만에 보는 왕은 아름답고, 날씨는 너무나 평온하며, 왕의 바로 앞에서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왕이 왜 달려왔는지는 모르지만, 왕의 몸은 달궈져 있었고 그게 라파엘에겐 좀 곤란했다. 뜨거워진 몸에서 흐르는 땀, 희미하게 풍기는 땀 냄새와 체향이 섞인 그 냄새.
“아…….”
말을 하려고 너무 오랫동안 노력했던 탓인지, 쓸데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노골적으로 달콤한 목소리에 왕이 파란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저는…….”
왕은 라파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소리를 냈다. 라파엘이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왕은 한 손으로 라파엘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도록 했다. 라파엘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홍조를 숨길 순 없었다.
사람을 이렇게나 걱정시켜놓고 발정이냐?
왕은 아직도 폐가 아파 숨이 막힐 지경인데, 라파엘은 작은 동물처럼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다.
“너는 사람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제대로 말해라. 나를 보고, 제대로.”
그제야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은 모르겠지만, 그 얼굴은 발정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물과 비슷했다. 깜빡거리는 눈도, 희미하게 몰아쉬는 숨도, 라파엘의 상태를 말해주는 듯하다.
“토끼처럼 굴지 마. 아무리 눈을 붉히며 귀엽게 굴어도, 지금 네 애교에 넘어가줄 기분이 아니다. 나를 보고 똑바로 말해봐. 뭐라는 거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왕은 이미 누그러질 대로 누그러져 있었다. 눈가가 붉어져서 입가를 오물거리는 것이 정말이지 토끼 같았다. 하긴 성생활에서도 꽤 토끼지. 왕은 속으로 라파엘이 이해하지도 못할 음담을 덧붙였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어 왕을 올려다보았다. 달려왔던 까닭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걸 제외하고 그늘 따위는 한 점도 없었다. 그는 늘 그렇든 환했다. 태양처럼, 눈이 부셨다.
“그늘지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파엘이 하고 싶다는 말은, 왕이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왕은 라파엘이 깜빡거릴 때마다 같이 눈을 깜빡거려보았다. 그러면 혹시 라파엘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같이 깜빡거리자 라파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모로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은 반대로 머리를 기울이며 라파엘의 입술에 키스했다. 화장품 맛이 났다. 그것만으로도 왕은 숨이 막혔다. 여자들의 화장품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라파엘의 입술 위에 바른 화장품은 좋았다. 그 과하게 달콤한 냄새. 그리고 그 이상한 맛이 지워지면서 나타나는 라파엘의 입술을 그는 사랑했다. 그 달콤한 꽃냄새는, 이후에 올 쾌락의 전주였다.
왕이 입술을 물자, 라파엘도 그 왕의 입술을 물었다. 욕정을 풀기엔 장소가 적합하지 않았다. 왕은 라파엘을 아무 데서나 범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아무 데서나 섹스를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사실 모든 왕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라파엘을 상대로는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가 교성을 지르는 라파엘을 바라본다는 것도 싫었고, 이성을 잃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치부를 드러낸다는 기분이 강했다. 마치 암살자에게 등을 내주는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어 왕은 그럴 수 없었다.
욕망을 누르고 하는 키스는 절실하고 애틋했다.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나 그 입술에 청순한 키스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타액의 실이 서로를 이으면, 그것에 도발되어 기꺼이 입술을 가까이 했다.
왕의 목 안쪽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왕은 그를 원한다. 라파엘은 그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온몸이 흘러내려 왕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은 것 같은 욕구가 피어올랐다. 라파엘은 왕이 하던 대로 했다. 왕의 등을 쓸어내리고, 왕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유두가 어디인지, 옷 위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애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라파엘이 손을 안쪽으로 넣으려던 순간, 왕이 거칠게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넌 날 죽일 셈이냐?”
도대체 누가 널 이렇게 야하게 키웠느냐며 왕이 눈으로만 웃었다. 그 웃음은 실제로 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아니, 새카만 욕정에 집어삼켜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라파엘은 홀린 눈으로 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왕이 커다란 손을 들어 라파엘의 눈을 감겼다.
“곤란해.”
눈을 감겨도 왕이 사랑해주어서 조금 부은 입술만은 여전히 벌린 채 작은 숨을 몰아쉬고 있다.
“곤란한데.”
왕은 잠시 풀밭, 아니, 풀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꽃밭인 바닥을 노려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라파엘은 여전히 왕에게 눈이 가려진 채 가만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게 어처구니없게도 도착적으로 다가와, 왕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쩔 수 없이, 왕은 라파엘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못 건너편에, 가든 하우스가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왕은 속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해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이 숨결을 조금만 빨아들이고, 이 피부에 입술을 미끄러뜨리고, 드레스 아래로…… 조금만.
라파엘이 왕에게 손목을 잡힌 채 걸었다. 왕이 라파엘의 가련해 보이는 검은 머리칼에 입술을 묻고 키득거렸다.
“정말 토끼가 따로 없구나. 사뿐, 사뿐……. 올해 첫눈이 오면 맨발로 걷게 해볼까. 토끼 발자국이 찍힐지 어떻게 알겠느냐?”
누군가에게는 라파엘의 그 소리 없는 움직임이 공포로 다가왔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여쁠 뿐인 듯하다. 왕은 걷는 동안 라파엘의 어깨를 감싼 채 그의 머리에, 코에, 입술에, 키스했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눈을 감으며 그 키스를 받았다. 그저 가만히 따라가며 눈을 감는 라파엘이 순진해 보였지만, 왕이 지금 바라는 건 순진한 라파엘이 아니었다. 왕은 라파엘의 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라파엘이 눈을 들자 왕은 또 이마에 키스했다.
왕의 손이 라파엘의 드러난 어깨를 교묘히 애무했다. 왕의 허리에 닿은 라파엘의 손이 손톱을 세우는 걸 느끼며 왕은 가늘고 긴, 욕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 부부 뒤에선 시종과 시녀와 특수군과 근위대가 서로의 영역을 나누느라 한창이었다. 결국 근위대가 특수군과의 기 싸움에서 져서 시험 사격이 양산해낸 시체들을 치우러 갔고, 시녀들의 싸늘한 시선에 몇몇 어린 시종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왕비가 앉아 있던 티테이블 등의 뒤처리를 하러 사라졌다.
왕과 왕비의 뒤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누가 누구의 기에 눌리느냐. 어느 집단이 어느 집단의 위에 서느냐. 그런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서,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 왕과 왕비는 다른 무드에 빠져 있었다.
라파엘은 왕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왕의 몸은 여전히 식지 않았고, 그의 체향은 더 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에 맴도는 그의 체향이 지금 맡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 맡아본 것인지, 라파엘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왕 또한 몇 번이나 라파엘의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가든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왕은 라파엘을 잡아끌었다. 연못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청아한 소리에 두 사람은 몸을 잠깐 움찔거렸다. 별거 아닌 소리에도 몸은 달아오르고만 있었다.
연못 쪽으로 라파엘을 앉히고선, 왕은 라파엘의 치마를 들어 올렸다. 이미 시종과 시녀들은 등을 돌린 상태였고, 특수군은 가든 하우스 지붕으로 뛰어올라갔다.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보다도 미약하기만 했다.
왕이 라파엘의 치마 아래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능란한 움직임에 라파엘이 눈을 감은 채 소리 없이 헐떡였다. 어느새 속옷은 라파엘의 발목에 걸린 채 흔들렸고, 라파엘은 곧 다리를 잔뜩 벌린 채 왕을 받아들였다. 삽입부는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 노출되지 않았다. 라파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왕이 몇 번이나 핥아주었다.
라파엘의 안쪽에서 왕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왕은 크게 신음했다. 집어삼켜지고 있다. 그런 느낌이 왕을 더욱 몰아붙였다. 왕은 거칠게 자신을 빼내고선 라파엘을 엎드리게 만들었다. 라파엘이 가든 하우스의 벤치에 엎드려서, 왕의 손이 유도하는 대로 다리를 벌렸다. 이번에는 드레스 자락조차 꽃이 뒤집힌 것처럼 뒤집혀서, 방해가 되지 못했다.
하읏.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라파엘은 뒤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왕 자신이 라파엘의 얼굴을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질퍽하게, 조금 더 가까이, 가장 안쪽까지 라파엘에게 파고들고 싶었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조이듯 잡으며 움직이자 라파엘의 드러난 엉덩이가 조금씩 움직였다.
왕의 손이 앞으로 돌아가 라파엘의 성기를 붙잡았다. 성기를 문지르자, 라파엘의 움직임이 조금 더 격렬해졌다. 그 움직임으로 왕은 더한 쾌락을 얻는다. 왕은 라파엘의 목 뒤쪽을 깨물면서 마구 움직였다. 조용한 곳이라 고환이 엉덩이에 부딪치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라파엘의 숨소리에 달콤한 것이 섞인다. 라파엘이 좋아하는 곳을 찔러주자, 흐느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라파엘은 무슨 일을 당해도 울지 않을 것이다. 라파엘이 우는 것은 단지 이 순간뿐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왕의 흥분은 더욱 높아졌다.
“읏!”
라파엘이 고개를 저으며 운다. 줄줄 흘리고 있던 성기의 끝을 왕이 막았기 때문이다. 왕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라파엘의 허리도 움직였다. 본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사정을 위해서 왕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음탕하게 벌름거리는 입구, 달라붙는 듯한 안쪽의 점막, 그리고 왕을 도발하는 허릿짓.
왕은 사나워졌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만든 것이다. 섹스를 고문으로 알던 남자에게 이런 쾌락을 가르친 건 오로지 그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율이 흐를 지경이다. 머리가 먼저 타오른 것인지, 정액이 먼저 터진 것인지, 왕은 알 수 없었다.
안쪽에서 뜨거운 액체가, 평소보다 더 깊은 곳에서 터져 들어온다. 배 속으로 직격하는 듯한 그 액체에 라파엘은 여전히 울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왕은 사정하면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노, 놓아주세요, 전하. 라파엘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사정하자 왕이 속삭였다. 키스해주면.
라파엘은 겨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아직도 사정 중인 왕이 그의 입술을 먹어치웠다. 왕이 겨우 손을 놔주자마자, 라파엘은 토정하면서 왕의 키스에 응하지도 못한 채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타액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눈물로 얼굴은 엉망이었다.
시종들이 왕의 성기를 닦고 흐트러진 성장(盛裝)을 고쳐주는 동안 라파엘은 멍하니 왕의 앞에 앉아 있었다. 왕은 옷을 고쳐 입으면서도 몇 번이나 라파엘의 입술을 만지작거렸고, 라파엘은 그런 그를 홀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왕과 있으면 왜 이렇게 되는지, 라파엘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왕과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욕정에 휩쓸려버리는 걸까. 의아한 일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왕을 바라보면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은 기분 좋은 여운이 남은 얼굴로 라파엘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아.”
라파엘이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왕의 것이 안쪽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라파엘은 왕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을 바라본다. 그의 뒤처리를 해줄 시녀들이 타월이며 속옷 등을 들고 서 있었다. 하지만 왕은 불쾌하다는 얼굴로 라파엘의 턱을 붙잡아 자신에게 고정했다.
“감히, 어디를 보는 거냐?”
“시녀들을 봤습니다.”
라파엘이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해서 왕이 흘끗 시녀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녀들은 재빨리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시녀장이 대표로 “시중을 들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즉, 지금 시중을 들어도 괜찮겠느냐는 뜻이다.
왕은 다시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라파엘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서 왕의 바지춤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얼굴을 끌어당기면 성기를 물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위치였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지금 한 번 더 하면, 섹스만 하고 헤어져야 할 테니까.
“오늘은 내 것을 품고 있어.”
왕의 말에 라파엘의 눈이 가볍게 커졌다. 라파엘은 왕의 ‘수치 공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섹스가 고문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가 당했던 것들을 떠올리자 라파엘의 안색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라파엘은 거의 낯빛이 변하지 않는 인물이니 상당히 당황한 것이리라.
왕이 그런 라파엘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라파엘도 반사적으로 왕에게 웃음을 돌려주었다. 헤죽.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왕의 눈에는 귀엽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럼 되는 것이긴 했다.
“자, 옷을 입혀주지.”
왕이 손수 라파엘의 옷을 입혀주었다. 라파엘의 발목에 걸린 팬티를 올려주고 드레스의 매무새를 고쳐주었다. 머리카락을 대충 만져준 왕이 “속옷이 있으니까 편하겠지?”라고 물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속옷이 있으니까 편할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라파엘의 오늘 속옷은 확실히 작긴 해도 엉덩이를 감싸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안네마리, 카드리유를 출 수 있던가?”
왕의 말에 라파엘이 “아니요, 전하. 추지 못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헤수스에서 카드리유는 그렇게 유행하는 춤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름 무도회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무도회만은 카드리유로 시작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동안은 왕비가 아프다고 하며 불참을 통보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세 번째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당연한 듯 카드리유를 추지 못한다는 라파엘의 말에 왕이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라파엘과 처음 춤을 췄을 때 왕은 라파엘의 춤이 속성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더욱 진짜 안네마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왈츠도 그랬으니 카드리유를 배운다는 건 무리였으리라.
왕이 라파엘의 손을 잡은 채 가든 하우스에서 밖으로 이끌었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하늘이 불타는 듯했고, 그 하늘을 비추는 연못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연못가에서 왕은 라파엘을 자신의 앞에 두었다.
“내가 노래를 하면 오른손을 내밀어.”
노래?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을 때 왕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흔한 오페라의 멜로디였다. 왕은 가볍게 흥얼거리고 있었지만 라파엘은 왕의 노래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멍하니 듣기만 했다. 라파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이 그 노래를 들으며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왕의 노랫소리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안네마리, 눈을 쟁반처럼 뜬다고 카드리유를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야. 알겠느냐? 내가 노래를 시작하면, 나를 지나치면서 오른손을 내밀어라. 아무리 순진해도 카드리유는 출 수 있어야지.”
왕의 말에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작게 대답했다. 왕이 다시 흥얼거렸다. 라파엘이 왕을 지나치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왕이 그 손을 붙잡았다. 왕의 손은 참 따뜻했다. 노을에 온도가 있다면, 왕의 체온과 비슷할 것 같았다.
“왼손.”
왕이 흥얼거리다 말고 말해서 라파엘은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왼손을 내밀었다. 왕이 라파엘을 잡고 가볍게 회전시켰다. 라파엘이 왕의 손에 이끌려 뱅그르르 돌았다. 정신을 차리자 그는 왕의 건너편이 아닌 옆에 서 있었다.
“……알겠느냐?”
뭘?
라파엘은 왕이 뭘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는 왕의 손을 잡은 채로 왕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왕의 손에 이끌려 움직일 때마다 발치에선 하얀 꽃이 풀풀 날렸고, 하늘도 물도 라파엘을 두근대게 만드는 피처럼 붉기만 했다.
왕은 라파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라파엘과 살면서, 정말이지 많이 웃게 되었다. 웃을 일이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많이 웃고 있었다.
멍한 얼굴의 라파엘이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마치 이 풀밭에서 사람 얼굴만 한 다이아몬드라도 캔 것같이 보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모르지만, 눈길을 받는 쪽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안네마리.”
왕의 부름에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사냥꾼이라도 본 거냐, 응?”
늘 라파엘을 토끼니 거북이니 사슴이니 해대는 왕이 놀리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왕과는 달리 늘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랫소리가…….”
“응?”
“노랫소리가, 아니, 노래가. 아니…….”
―정확히는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대답을 하기엔 라파엘의 어휘가 부족했다. ‘노래를 하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답고, 당신의 노랫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아서, 지금 이 순간의 세계와 너무 잘 어울려서 감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말을 하기에 라파엘은 참 둔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은 눈을 깜빡이다, “아, 그러니까” 하고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다시 말이 막혔다.
“응, 노랫소리가. 왜?”
왕이 당황한 라파엘을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하게 되물었다.
“처음 들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노랫소리를 꼭 처음 들어서 이러는 건 아니지. 라파엘은 몇 번 입을 달싹이다 또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왕은 그 얼굴에서 감탄을 읽었다. 고작 이런 것에 이토록 감탄하다니, 왕은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마치 노래를 처음 들은 것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왕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왕궁에 들어와서만 몇 번을 들었겠는가. 그 대부분은 왕보다 훨씬 노래를 잘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라파엘의 얼굴에 떠오른 건 찬탄이다.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노랫소리가 좋으냐?”
왕의 질문에 라파엘이 “예, 전하. 아주, 굉장히”라고 대답했다. 라파엘이 이렇게 강조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지라, 왕은 뿌듯해졌다.
“귀가 형편없구나. 네가 들은 수많은 노랫소리들은 이보다 훨씬 훌륭한 것들이었는데. 이렇게 안목이 없어서야 어떻게 왕비 노릇을 한단 말이냐. 이러니까 네가 내게 토끼니 거북이니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안목을 길러야지, 응? 좋은 안목과 좋은 귀를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왕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웃었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는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진 잘 모르지만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왕이 말하는 ‘안목’이란, 다른 노래들이 왕의 이 노랫소리보다 좋게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런 안목은 필요 없었다.
“저는 안목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라파엘이 단호히 대답했다.
“저는 전하의 노랫소리가 가장 좋게 들리는 저의 귀로 만족합니다.”
왕은 잠시 자신의 비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작아서 하이힐을 신어도 언제나 그보다 작은 비는 눈치도 없고 정치도 몰랐다. 총명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왕을 사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왕에게 사랑과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왕은 눈치가 귀신급인 일류의 정치가이다. 하지만 그는 내내 사랑받지 못했고, 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럴 때 이 남자가 나타났다. 여장을 하고 나타나선, 한입에 꿀꺽 삼키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아아, 왕은 라파엘을 확 끌어안았다. 나중에 대가를 치를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분명, 대가를 치를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리. 왕은 라파엘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다.
인간이 이 이상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전하?”
“아아. 잠깐 생각을.”
라파엘이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생각을 한다 하니 그럼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라파엘은 곧 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쌕쌕 숨을 쉬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새가 자신의 숨결을 나눠주는 듯했다.
“자, 다시 카드리유를 춰보자.”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라파엘이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지?”
왕이 고개를 숙여 라파엘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물었다.
“아…….”
다시 라파엘이 신음했다. 그 신음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전하의 것이 나와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왕이 싱긋 웃었다. 왕은 라파엘의 허리를 안아 올려 하이힐을 벗겨냈다.
“너무 흔들려서 그런 모양이니, 구두를 벗고 다시 춰보지.”
아, 그런가 보구나. 라파엘은 고마운 눈길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구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평소처럼 시녀들이 뒤처리를 해주면 끝날 것을. 하지만 왕의 얼굴은 아름답고, 왕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사기꾼은 사기꾼이 아닌 것처럼 보이듯이, 왕도 전혀 거짓 따윈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라파엘은 또 속아선―하긴, 그는 속았다는 걸 깨달은 적도 몇 번 되지 않았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바닥에 부드러운 풀의 느낌이 생경했다. 왕이 싱긋 웃으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왕이 아까 부른 노래와는 다르지만, 또 다른 오페라 곡이었다. 아름다운 곡조가 노을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시녀장이 흘끗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국왕 전하께서 휘파람을 부시잖아요!’라는 얼굴이었다. 휘파람을 부는 것은 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격조와 가장 먼 곳에 있는 행위가 아니던가.
그 눈길에 시종장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너네 왕비님이나 잘 간수하라는 엄격한 눈길이 되돌아와 시녀장이 시선을 내렸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아니, 전하께서 웬 휘파람을…….
많은 사람들의 당혹스러움과는 상관없이 왕은 그저 왕비를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왕비가 왕을 지나치듯 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왕의 입술이 ‘O’자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유혹적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농락하는 듯했다. 퇴폐적이면서도 유쾌한 모습, 그리고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노래. 라파엘은 피리 소리를 닮은 그 휘파람에 맞춰서 움직였다. 왕이 그의 오른손을 잡았고 라파엘은 또 왼손을 내밀었다.
라파엘은 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무기를 좋아하고 무술을 좋아하지만, 댄스는 관심이 없다. 어릴 적에 음악을 대해본 적이 없는 까닭인지 그는 박자 감각이 둔했다. 그래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낯설고 이상했다. 하물며 음악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라파엘에게 불가능의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왕은 언제나 그렇듯 라파엘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주고 있었다. 왕의 입에서 나오는 음은 라파엘에게 맞춰지고, 라파엘은 천천히 댄스를 배웠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왕이 본능적으로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세상 안에서 제각기 다른 소리들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싸한 바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내는 소리, 나뭇잎과 나뭇잎이 스치면서 내는 그 청량한 소리.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 왕이 라파엘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왕의 가슴에 머리를 숨기며 라파엘은 넓은 초원 위에서 파도처럼 멀어지는 바람의 물결을 보았다.
언제나 어둡기만 했던 세계에 다른 색들이 들어찬다. 빛이 그 색들을 찬란히 비춰준다. 소리가 그 세계를 풍성하게 울려준다.
아아.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신음했다. 그 작은 신음 소리에 왕이 “이런. 흙먼지라도 들어간 거냐? 눈만 사슴처럼 뎅그래서는, 나를 담으라니까 먼지나 담고 있었느냐?”라고 놀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라파엘의 턱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 손에 순응해 고개를 들면서 라파엘은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왕은 그에게 이런 세계를 주었다. 하지만 왕의 세계는 처음부터 찬란하고 풍요로워 라파엘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그저 어두컴컴한 살수. 가슴이 슬픔으로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라파엘은 왕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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