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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여름 무도회 (32/47)

제8장 여름 무도회

라파엘은 왕을 배웅하고 돌아섰다. 왕은 마법의 다리를 통해 선 플레이스로 돌아가면서 장난스럽게 오른손 검지로 키스를 보냈다. 잘 모를 질문만 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돌아가는 왕이 의아하기만 한 라파엘은, 왕의 키스에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왕은 라파엘의 고지식한 태도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유쾌한 얼굴로 윙크하곤 사라져버렸다. 

왕이 긴 인간들의 꼬리를 달고 사라지자, 라파엘은 멍하니 자신이 한 말들을 반추해보았다. 왕이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양 같다는 말이 좋았던 걸까.

라파엘은 그가 저렇게 웃는다면 몇 번이고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왕이 웃은 건 왠지 그 말만이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

모르겠다.

늘 내던 그 결론을 또다시 내고 있는 라파엘에게, 시녀장이 다가와 나지막이 고했다.

“스완 라 포 대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시녀들은 라파엘이 스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라파엘과 같이 움직이면서 시녀들은 왕이 부러워졌다. 왕의 강력한 권세와 재산, 신의 총애는 그저 남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하늘 위 인간의 것이라 그녀들이 부러워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 작고 초라한 남자의 연정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부럽기 그지없었다.

어느 누가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일방적인 사랑은 무거운 족쇄밖에 되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들 이런 사랑을 원하지 않는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전제가 분명하게 들어가 있다면 일방적인 사랑은 한 인간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제물일 것이다.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두고 라파엘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시녀장은 몇 번이나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비록 그가 직접 그녀에게 한 말은 아니었고, 그녀는 공기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여 의견을 내놓을 수는 없었지만, 저 둔한 남자가 사랑하는 왕을 지키고 싶다든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시녀장은 이미 먼지를 뒤집어쓴 감수성이 고개를 드는 걸 느끼곤 했다.

남자는 왕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게 아니다. 남자는 사랑하는 그에게 바칠 가장 귀한 제물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에게 던지는 것과 같이 맹목적이면서도 신성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좋은 건 아니란 말이지.’

라파엘의 뒤를 따르는 시녀아이 둘의 눈이 어째 몽롱하다. 시녀장은 뒷목이 뻐근해져왔다. 라파엘의 이 열렬한 사랑은 경주마와 같다. 양옆의 시야가 막힌 채 앞만을 바라보는 경주마처럼 라파엘은 자신의 사랑만을 생각한다. 왕의 해바라기는 왕을 향해서만 피어서 그 옆의 자잘한 잡초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관심조차 없지만, 꽃밭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인 시녀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일이다.

‘저렇게 사랑해본 적이 있던가.’

시녀장은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쉬 나오지 않았다. 그녀도 젊은 시절 사랑을 했지만, 저런 사랑은 아니었다.

문득 이미 흘러간 젊은 시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특수군 대장이 기다리고 있는 대응접실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들어가기 전 시녀장은 이미 가버린 마리 트리지아를 생각하며 슬퍼졌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지만, 마리 트리지아는 너무 어린 나이에 쓸쓸히 가버렸다. 가문에 의해 결정된 삶과 무거운 죄책감에 몸부림치다 친오빠에 의해 죽고야 말았다. 그 마리 트리지아는 이 엄격한 삶에서 저런 사랑을 해보았을까.

그때 문이 열렸다.

“비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스완이 무릎을 굽히며 절했다. 그 옆에는 여성도 있었다. 스완과 동행한 여성인 모양이다.

여성은 예를 갖춘 뒤 천천히 베일을 벗었다. 진갈색 베일이 천천히 벗겨져 나가자 시녀들이 숨을 삼켰다. 중년 여성이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했고, 검은 머리칼이 단정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존재감이 있었다.

“라피.”

안드레아는 울컥 솟아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그녀의 가여운 아들은 요염한 여자가 되어 눈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타인 보듯 자신을 보고 있는 걸 견뎌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라피라고 이름을 불러도 아들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문득 아들이 고개를 돌려 이젠 시녀장이 된 마리의 유모를 바라본다. 괜찮나 하는 시선이었다. 시녀장이 고개를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라피――!”

안드레아가 달려가 끌어안으려는 순간 라파엘이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얼굴은 분명히 안드레아를 거부하고 있었다.

안드레아의 검은 눈이 크게 뜨이자 라파엘이 미안한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봐야 그 웃음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런, 제기랄.’

스완은 안드레아의 뒤에서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안드레아가 정보를 준 대가로 라파엘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을 때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고 여겼다.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는 약간의 기대감까지 가졌다. 이 여자가 사실은 자신에게 조금쯤 기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러려고 데려왔구나. 스완 자신이 왕비를 만날 때는 완벽한 경호 체제 안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안드레아는 그 경호 체제 안에서 아들을 불러보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망할. 어차피 이용당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기대했다가 버림받고 다시 이용당할 줄은 몰랐던 스완이 이를 갈았다.

스완의 심리 상태가 파랗거나 빨갛거나 관심도 주지 않고, 안드레아는 라파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손톱만치도 마음을 내주지 않는 아들은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엄마가…….”

엄마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이렇게 사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있고, 귀족 사회는 그렇게 자기 약점을 내보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그래서…….

안드레아가 말을 하려는 순간 라파엘의 시선이 스완에게로 옮겨졌다.

“무슨 일이야?”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가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도 라파엘은 태연히 스완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 태도에서 아주 약간의 적의라도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라파엘은 정말 지금 상황이 불편할지언정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라파엘을 그동안 참 좋아하던 시녀들의 눈에서 콩깍지가 툭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시녀장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시녀들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바닥의 보드라운 카펫이나 먼 천장의 화려한 벽화나 샹들리에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제가 용건이 있는 게 아닌데요, 비전하.”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안드레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용건을 기다리는 얼굴은 타인을 보는 것과 같았다.

“…….”

안드레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만났는데, 자신의 진심을 내놓을 수 있는 자리까지 겨우 왔는데, 용서를 빌 수가 없다. 상대가 증오라도 해줘야 용서를 빌 텐데 라파엘은 증오도, 무엇도 없었다. 도리어 그녀의 태도가 이상한지 스완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안드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라파엘의 뺨을 만졌다. 라파엘은 그것을 피하려 했지만, 안드레아의 뒤쪽에 서 있던 스완이 고개를 저어 피하지 말아달라는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에 꾹 참았을 뿐이었다.

안드레아의 마른 손이 라파엘의 뺨을 쓸어내렸다. 스물여섯인데도 아직 아기처럼 보드라운 뺨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어리게만 느껴지는데, 그녀 안의 라파엘은 아직도 엄마를 잃은 어린 아들인데, 라파엘의 시선은 너무나 건조하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바람이 스치듯, 절망감이 안드레아의 몸을 휘감았다.

“……유니스 라 버시슬이라는 아가씨가 있습니다.”

안드레아의 말에 스완이 ‘율레즈여’라고 신을 불렀다. 신이여, 저 정말 오늘 초상 치르는 날입니까? 시녀들은 공작부인이 갑자기 왕후가 되고 싶어 안달한다는 여자의 이름을 꺼내자 당황했다.

“다음 주에 있을 여름 무도회에 그녀를 데려가면 그녀에게 인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뭐야! 시녀들의 정중한 안색 뒤로 당황스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공작부인이 말하는 ‘인사’는 보통 인사가 아니다. 왕의 배우자가 왕의 여인을 인정하는 ‘인사’였다. 한마디로 정처가 첩을 만천하에 인정해주는 치욕적인 인사였다.

‘친자식의 앞길을 왜 막으려는 거야.’

시녀들은 의아해했고 몇몇은 분개했다. 시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공작부인. 그것은…….”

“감히 어디서 끼어드는 거냐!”

괜히 사교계의 여왕이 아닌지라, 안드레아가 시녀장을 노려보았다. 오랫동안 한 지붕 밑에서 식구처럼 지내왔던 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혈육에게도 차가운데 하물며 피고용인에게 나눠줄 정 따위는 없는지라, 안드레아는 매서운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비전하의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비전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데 천한 게 어디서 입방정이야!”

안드레아의 말에 놀란 건 라파엘 쪽이었다. 신분의 차이로 반말을 하고 있긴 해도 라파엘은 늘 시녀장의 말을 따르는 편이었다. 왕의 말을 따르고, 왕이 아무 말도 안 해준 일이면 스완이나 시녀장의 말을 따르는 게 일상이었던 그는 안드레아가 이렇게 나오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상태였다. 스완도 어쩐지 안드레아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시녀장도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라파엘은 하겠다고 해야 할지, 하지 않겠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시녀장은 최대한 눈에 안력을 실어 마음의 소리를 보냈다. 안 된다고 하세요, 무조건 안 된다고 하시라고요.

아. 라파엘이 소리 없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드디어 시녀장의 마음을 알아챈 듯 라파엘이 안드레아에게 말했다.

“그러지.”

아아아아악, 그게 아니고!

시녀장이 망했다는 얼굴을 했다. 스완은 저 교활한 시녀장이 노골적으로 낭패에 젖은 얼굴로 어금니를 악무는 걸 보고 약간 고소해졌다. 저 시녀장도 당하는 상대인데 나라고 별수 있냐고. 게다가 반한 여자인데. 스완은 묘한 위로를 받았다.

“아, 잠깐.”

라파엘은 시녀장의 절망과 고뇌에 가득 찬 얼굴을 보고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잠깐만…….”

“감사합니다, 비전하. 그럼, 여름 무도회에서 뵙겠습니다.”

안드레아가 활짝 웃었다. 안드레아를 오래 모신 시녀장은 안드레아가 아까와는 달리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걸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안드레아가 우아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예를 갖추자 라파엘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순간 스완의 귀에는 시녀장의 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장마철에 핀 장미처럼 진한 아름다움을 가진 안드레아가 자신을 에스코트해준 스완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녀들의 싸늘한 시선이 일제히 스완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시선에 스완이 입을 열려는 순간 안드레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도하면서도 쓸쓸한 손에 스완은 자신도 모르게 붙잡고야 말았다. 안드레아가 움직이자, 스완도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라졌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라파엘은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희미하게 난처함이 묻어나왔다.

“잘못한 거지?”

“……예.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상대는 사교계의 여왕이다. 교활한 수단으로는 쇼어 공작조차 한 수 접어주었던 여인. 정숙한 부인부터 요녀, 교묘한 정치가의 아내, 궁정 사교계의 스타까지―그녀는 몇 가지나 되는 역할을 수행했던 여자였다. 라파엘 같은 단순한 남자는 밍밍한 와인처럼 단숨에 삼켜 그 향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니, 라파엘이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안드레아가 버렸던 아들에 대한 애틋함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는 시녀장은, 안드레아의 행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안드레아의 행보는 아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녀장이 아는 안드레아는 아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모친이다. 그 우직한 제럴드가 잔인한 에드워드의 곁에 있으면서도 무사했던 것은 안드레아의 덕이 컸다. 그런데 왜 라파엘의 정치적 라이벌인 유니스 라 버시슬을 도우려고 하는 걸까.

그 속을 어떻게 아나.

시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라파엘을 배신할 생각인가. 아니, 배신이랄 것도 없나.

“전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

라파엘이 물었다. 자신은 정치에 대해 모르나 왕은 탁월한 정치가이다. 그러니 왕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시녀장은 애매해졌다. 그녀는 라파엘을 모시고 있다. 라파엘은 마리 트리지아의 분신이며 마리의 은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처참한 시신을 거두어준 유일한 인간이고 그녀의 원한을 풀어준 인물이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자신의 여주인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자신의 여주인이었던 안드레아를 왕에게 밀고하는 것만은 내키지 않았다. 사정도 모르는 채로 단숨에 밀고한다는 건, 좀…….

“아니요. 전하께서 아실 정도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잖습니까.”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할 일이 많은데 괜한 부담을 얹어주고 싶진 않다.

라파엘이 볼일 끝났다는 듯 응접실에서 등을 돌리자 시녀들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시선을 교환했다.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왕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여인을 왕비가 공식 석상에서 왕의 여인으로 인정한다는데, 이런 코미디를 왕이 알 필요가 없다고? 시녀들은 시녀장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눈빛을 교환하다 시녀장의 엄한 시선을 받고 고개를 재빨리 숙였다.

라파엘이 침실로 돌아가는 동안 모두는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 근위병이나 특수군조차 그랬다. 이 일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번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경호 문제가 아니므로 상관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보고하면 출셋길이 열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재수 없으면 출셋길이 막힐 것 같기도 하다. 아, 게다가 저 새끼들이 문제야. 근위병은 특수군을, 특수군은 근위병을 노려보았다. 쟤들이 먼저 보고하면 우린 죽는 건데.

그날, 결국 근위병과 특수군 사이에는 ‘말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거래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시녀들 사이에서는 ‘시녀장님을 믿자’는 구호가 떠돌았다. 보신을 위해서 생각해낸 최선이었다.

왕의 정무가 밀렸다. 여름 무도회가 다가오는데다, 헤수스의 겨울은 빠르다. 최근 몇 년은 특히 수로 공사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수로가 계속 파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대륙의 노트코가 꼼수를 쓰기 시작하자 동대륙과 남대륙에서도 국경 수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헤수스 국경에 군대를 밀집시켜놓고 있었다. 동대륙과 남대륙의 영지에서도 도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왕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했다. 왕과 왕의 심복들이 밤을 새워 회의를 계속 하는 동안 라파엘은 문 플레이스로 돌아왔다.

“또 나가시게요?”

시녀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낮게 소리쳤지만 라파엘은 검지를 입에 대어 보일 뿐이었다. 이미 라파엘은 하늘거리는 여성용 잠옷을 벗고 특수군용 검은 위장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비전하. 안 되십니다. 지금은 궁내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요.”

“조심할게.”

라파엘이 무심히 대답하며 가방을 어깨에 멨다. “비전하!”라고 시녀장이 소리치며 달려오려 했지만 라파엘은 손바닥을 보여 그녀를 멈추게 했다.

“오지 마.”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건데요? 이제 알아보실 것도 없지 않으십니까?”

“있어.”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는 것도 쥐뿔 없는 주제에 뭘 알아볼 게 있다는 거야. 시녀장이 속으로 고함을 치는 사이에 이미 라파엘은 마법의 다리가 아닌 반대쪽 발코니 문을 열고 있었다.

다녀올게. 라파엘이 목소리만 남기고 훌쩍 뛰어내렸다. 왕비의 밤시중 당번인 시녀들이 비전하, 라고 소리칠 뻔한 입을 스스로 틀어막았다. 특수군들이 라파엘을 잡으려 했지만 손은 바람만 잡았을 뿐 정작 그를 잡지는 못했다. 특수군들이 결국 라파엘의 뒤로 따라붙었다.

라파엘은 익숙한 몸짓으로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숲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굉장히 빠른 속도라 특수군들도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왜 저렇게 빨라! 특수군들은 얼굴을 찌푸린 채 이를 악물었다. 정말 뒤에 쫓아오는 사람 생각은 조금도 없구나, 젠장하아알―!

두 사람이 뒤처졌지만 나머지 특수군들은 뒤처진 동료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낙오자에게 시선을 줄 정도로 만만한 속도가 아니었다.

겨우 라파엘이 한 나뭇가지 위에서 멈추자 특수군들은 몸을 숨긴 채 헐떡였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그들은 눈짓을 교환했다. 저 조그만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느라 어디로 오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문득 밤 조장이 고갯짓을 했다.

우아한 궁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화려함보다는 기품이 느껴지는 궁전은 조용하고 싸늘했다. 밤의 여왕처럼 보이기도 했고 폐허처럼 보이기도 하는 궁은 은은한 빛을 냈다.

‘태후궁!’

특수군들은 라파엘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라파엘은 태후궁을 바라보았다.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아서 특수군들은 새삼 라파엘이 살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파엘은 기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라파엘이 뒤로 돌아섰다. 특수군들은 드디어 설명을 해주려나 싶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라파엘은 그들을 스쳐 다시 달리기 시작할 뿐이었다.

라파엘의 밤 산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태후궁에서 멀찌감치 서서 계속 지켜보다 가기를 반복하던 라파엘은 결국 나무에서 내려갔다. 라파엘이 나무에서 내려가는 순간 특수군들은 그를 말리려 했지만 라파엘이 적반하장격으로 ‘따라오지 마. 방해된다’고 말하는 통에 어영부영 나무 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역시, 여기인가.’

라파엘은 새 모이통과 물통을 찾아냈다. 며칠 전 전서구는 역시 태후궁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궁에서는 전서구를 보낼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전서구를 보낼 정도로 급한 연락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라파엘은 모이통을 들여다보았다. 모이는 새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다는 건 곧 다시 보낼 생각이겠군. 요 며칠 야수사에게 물었고 자신도 하늘을 주시했지만, 전서구를 본 적은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니 전하에게 알려드릴 수조차 없네…….’

그러나 전서구를 잡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전서구를 또 보낸다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니 혹시 사람이 드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전서구로 보낼 생각인가 보군. 시녀를 보내봤지만 시녀도 태후궁에 사람이 드나든 적은 없다 말하고, 자신이 감시하는 밤에도 사람은 드나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자가 전서구를 사용할 수 있다니 태후는 정말 보통이 아닌데. 라파엘은 고개를 저으며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액체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로 액체와 모이를 잘 섞었다.

‘전서구를 잡는 수밖에.’

전서구가 날아다니는 동안에 잡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전서구는 사람과는 달리 단순한 동물이다. 모이를 잔뜩 먹고 날아오르고, 다녀와서도 모이를 잔뜩 먹는다. 전서구가 여기 오면 모이를 잔뜩 먹을 수 있다는 걸 새겨주기 위해서 언제나 한자리에 모이통과 물통을 놔주어야 한다. 모이통에 수를 쓰면, 전서구는 잡히기 마련이다.

라파엘은 나무로 펄쩍 뛰었다. 그는 문 플레이스로 돌아가기 전 그동안 자신을 가장 잘 쫓아왔던 특수군을 붙잡았다.

“여기서 잠복하고 있다가 전서구를 날리면 그 뒤를 쫓아가서 가져와.”

라파엘의 말에 특수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날아가는 전서구를 어떻게 잡습니까. 화살을 써서 노력하긴 하겠지만 잡을 수 있다고 확신은…….”

“날아가면 곧 떨어질 거야. 가져와.”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고 문 플레이스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특수군들이 달리면서 남은 특수군에게 윙크를 건넸다. 잠복 잘하라는 인사에 특수군이 울상을 지었다. 검은 무리로 된 안개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좀 멋있다.’

특수군들은 왕비의 조막만 한 등을 보며 침을 삼켰다. 달리는 건 여전히 힘들었지만 요 며칠 계속 이 짓을 했더니 처음보다는 나아진 상태였다. 마치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를 교관으로 삼아 강해지는’ 클래스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싫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왕비는 평소에는 정말 백치 같은데 이런 때에는 유능하기 짝이 없었다. 군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특수군들이지만 그래서 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왕비의 모습에 이끌리는 건 사실이었다. 이런 데 끌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연인을 위해서라면 성도 포기할 수 있는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도대체 어디를 나돌아 다니고 있는 거냐?”

겨우 시간을 내 왕비를 보러 왔던 왕이 침실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발코니로 건너온 라파엘이 말없이 왕에게 웃어 보였다. 헤주욱. 웃음은 여전히 어설펐다.

“안네마리, 대답해. 어디에 있었느냐?”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가 일에 빠져 라파엘의 몸을 그리워만 하고 있는 사이 이 철없는 왕비는 밤 산책을 나다녔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저것들을 다 족쳐야 돼, 쓸모없는 것들. 왕은 시녀와 병사들을 흘낏 노려보며 라파엘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라파엘의 몸에서 희미한 땀 냄새가 났다. 그 사실이 평소와는 달리 라파엘의 남자다움을 한껏 고양시켰다.

“그냥 산책…….”

실제로 한 게 없었다. 아무런 결과가 없었으니 그건 산책이 맞았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라파엘의 목을 깨물었다.

“왕에게 거짓말을 하면 사형이다. 알고 있느냐?”

“처음 알았습니다.”

“다시 묻지. 뭘 했느냐?”

왕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산책했습니다.”

라파엘의 목소리는 좀 낮아져 있었지만 그 내용은 여전했다. 왕이 픽 웃었다. 어련하시겠어. 라파엘이 돌아오지 않는 동안 왕은 시녀들을 족쳤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울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었고, 왕은 시녀 한 명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런데도 라파엘은 왕의 팔 안에서 쾌감에 떨며 산책이라고 한다. 산책일 리가. 너는 산책을 깊은 밤에 하나.

하지만 왕은 굳이 라파엘을 추궁하진 않았다. 특수군이 같이 움직였으니, 곧 특수군의 보고를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왕 자신은 몰랐지만 스완은 분명 보고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녀들은 이제 라파엘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막을 것이다.

굳이 내가 나쁜 역을 맡을 필요야 있나. 왕은 라파엘이 웃는 것처럼 히주욱, 하지만 속으로만 웃었다.

“무기한 근신령. 방 밖으로도 나가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 지금 왕비가 아니라 근위대장이니까…… 아.”

왕의 손가락에 유두가 걸리자 라파엘이 어깨를 움츠렸다. 오랜만에 받는 애무에 라파엘의 유두가 바짝 섰다. 왕이 라파엘의 유두를 비비며 그의 귓불을 진득하게 핥았다.

“과연, 남자다워서 좋은데.”

왕의 젖은 목소리가 귀 안쪽에 닿아 라파엘이 머리를 빼려 했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의 머리칼 안에 손가락을 꽂아 단단히 잡은 채 놓아주질 않았다.

“하지만 남자치곤 너무 민감하잖아. 여기가.”

왕이 가슴을 난폭하게 잡았다. 잡을 것도 없는데도 그렇게 잡히는 것만으로도 라파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왕이 무리하게 유두에 손톱을 세우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흐음, 늘 내던 신음성과는 달리 약간의 달콤함이 섞여 있었다. 왕이 단숨에 흥분해서 신음 소리를 냈다. 왕의 신음 소리가 귀 안쪽으로 직격하자, 라파엘이 등을 떨었다.

갑자기 실내가 어두워졌다. 시녀들이 커튼을 치고 황급히 침실과 이어진 작은 응접실 쪽으로 물러났다. 여자들이 물러나는 소리와 함께 왕이 라파엘의 옷을 벗겼다. 팔 들어. 왕의 명령에 라파엘이 양팔을 들자 셔츠가 겨드랑이를 지나 머리 위로, 그리고 손끝을 지나 사라졌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양팔로 단단히 안고 유두를 깨물었다. 이를 세우자마자 라파엘이 왕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자신 쪽으로 밀어붙였다. 쾌감에 약간 탐욕스러워진 라파엘을 느끼며 왕은 한 팔로 라파엘의 등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음식이 아니면 거의 먹지 않는 살수의 등은 늘 말라 있었다. 얇은 등가죽은 뼈의 윤곽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뼈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만지고 눌러주자 라파엘이 왕을 더 자신의 가슴으로 밀어붙였다.

왕이 라파엘의 입술을 깨물자, 라파엘이 입술을 열며 혀를 내밀었다. 왕도 혀를 내밀어 핥았다. 허공으로 내민 혀가 핥아지는 라파엘이 너무나 음란하게 느껴져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라파엘이 왕의 옷을 벗기려 하자 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시간이 없어서 안 돼.”

그 말에 라파엘이 이해할 수 없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키스만 할 건가 싶어서 라파엘이 뒤로 물러나려 했다. 왕은 작게 웃으면서 라파엘의 벗은 어깨를 안아 당겼다.

“이러고 날 보낼 거냐?”

왕의 손이 라파엘의 바지 안 성기에 닿았다. 이미 반쯤 서 있던 성기는 왕의 손이 닿자마자 바짝 일어나버렸다. 라파엘의 흰 얼굴이 보기 드물게 붉어졌다. 당혹과 곤란, 수치와 쾌락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라파엘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눈만 깜빡거리자 왕이 라파엘의 뺨을 핥았다.

왕은 곁에 있던 소파로 라파엘을 끌었다. 성기만을 내놓고 라파엘을 품에 넣었다. 라파엘은 왕이 뭘 할 건지도 모르고 쫓아왔다. 그것은 왕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끌어들이는 것 같은 배덕의 쾌락을 주었다.

입술이 맞닿자, 라파엘은 왕의 입술을 빨았다. 오랜만에 닿은 몸에 흥분한 탓에 이미 이성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왕이 라파엘의 혀를 잡아채 깊이 얽으면서 자신과 라파엘의 성기를 같이 잡았다. 라파엘의 눈가가 붉어졌다.

천천히 왕의 손이 움직였다. 라파엘이 몸을 꿈틀거렸다. 왕의 것과 맞닿은 채 움직이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것과 똑같으면서도 다른 뜨거운 것과 비벼지는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라파엘이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의 허리를 한 팔로 잡은 채 놔주지 않았다.

아, 아. 좋아. 정말, 좋아.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고, 왕은 도망치려는 라파엘의 목을 물었다. 자신의 흔적이 희미해진 라파엘의 목을 물어뜯다시피 하면서, 왕은 계속 움직였다. 라파엘의 성기에서 나오는 액체가 자신의 액체와 한데 뒤섞여 다시 성기에 문질러진다. 서로의 열이 서로에게 전해져, 결국 열은 그 둘 사이를 휘돌고만 있다. 뜨거워. 누군가가 말하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와 상대의 목소리가 같이 열에 들떠, 멀리만 들린다.

라파엘이 왕의 목을 콱 물었다. 아직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 또 라파엘은 왕을 아프게 물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도리어 그 아픔에 부추겨져 더 난폭해졌다. 왕의 손이 자신의 것과 왕의 분신을 거칠게 문질렀다. 왕의 것이 너무 잘 느껴져서 미칠 것 같다. 그 혈관이나 점막의 느낌 따위가 너무 선명하다.

“넣어, 흑, 주세요.”

왕의 목을 물면서 이 느낌을 견디다 못한 라파엘이 왕의 귀에 대고 사정했다.

“넣어주…… 세요, 전하.”

라파엘의 목소리가 한껏 젖어서, 왕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저 멀리 응접실 입구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시종장이 흘낏 고개를 들며 머리를 젓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다. 조금 더 시간을 끌면 비서관이 문 플레이스까지 왕을 납치하러 올지도 모른다.

“안 돼.”

왕의 거절에 라파엘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왕이 더 빠르게 팔을 움직였다. 라파엘이 울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우는 목소리가 애처로워 더욱 성감을 자극한다. 달래야 할지, 더 광포하게 굴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지금 이 순간이 지독하게 좋았다. 지옥의 불길에 몸이 바짝바짝 타오르는 기분. 이대로 죽는다면 그것이 천국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한 순간.

왕은 라파엘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늘 그 스스로 견딜 수 있는 것보다 과한 감각을 요구하는 왕을 밀어내는 것인지 끌어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라파엘이 안겼다.

파정의 순간은 새하얗게 찾아왔다.

끝나자마자 시종들이 왕의 성기를 닦고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왕은 시종이 들어오기 전, 창문에 걸린 커튼을 잡아 뜯어서는 라파엘의 몸에 떨어뜨렸다.

“나다닌 벌이야.”

왕이 웃으며 말하곤 사라져버렸다. 그가 나가자마자 “전하, 티스에서 급한 전갈입니다!”라며 비서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커튼에 머리끝까지 감싸인 라파엘은, 소파에 누워 쾌감의 잔재로 욱신거리는 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전서구?’

왕은 보고를 받다 말고 스완을 바라보았다. 전서구라니, 이건 예상하지 못한 보고였다.

왕이 새로 따라준 차를 마시며 귓속말로 스완의 보고를 받는 동안 대신들은 닫힌 입술을 뚫고 흘러나올 것 같은 한숨을 겨우 삼키고 있었다. 이제까지 왕이 얼마나 독설을 퍼부었는지 다들 질릴 대로 질린 터였다. 내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일단 저 혀를 뽑고, 그리고. 대신들은 시종장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목이 안 마르도록 차를 계속 따라주는 저 손모가지도 꼭 부러뜨릴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스완과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태후궁에서 보내는 전서구를 보고, 며칠 동안 지켜본 모양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숨기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왕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말을 못 할 건 없어 보이는데 굳이 라파엘은 ‘산책’이라고 우기지 않았던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스완이 고개를 저었다. 그 왕비님의 속을 그나마 제일 잘 아는 게 이 눈앞의 전하이신데, 이분도 모르시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왕이 ‘일단 넘어가지. 그 전서구를 잡으면 내용은 외워두라고 해’라고 말하자 스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완이 물러나자마자 왕은 다음번에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건설 대신에게 시선을 주었다. 또 나야? 건설 대신 버시슬 백작은 지친 얼굴로 일어났다.

“예, 전하.”

지금까지 수로 공사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겨울 대비를 해두지 않았다는 걸로 욕을 먹고 또 먹은 버시슬 백작은 이제 더는 어떤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왕은 그를 비웃듯 말했다.

“지금 당장 수로 공사 장부를 가지고 와라. 리아스, 근위대가 건설 대신을 도와라.”

버시슬 백작의 눈이 커졌다. 장부? 지금 당장이라니 곤란했다.

“저, 전하. 장부라니, 그 규모가…….”

“수로 공사에 관한 장부가 그렇게 많진 않을 텐데? 다른 건설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지 않은가? 근위대, 뭐 하는 거냐. 모시지 않고.”

왕의 말에 버시슬 백작이 입을 달싹거렸다. 수로 공사는 왕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수로란 물길을 말하지만 헤수스에서 말하는 ‘수로’란 지하로 움직이는 민물을 말했다. 헤수스는 모든 집에 우물을 두고, 그 우물을 지나가는 수로를 만드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수로는 북대륙 특유의 혹한과 겹쳐 툭하면 파괴되는 등 그 성과가 더뎌 큰 사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수로 사업은 확대되고 있었고, 현재는 수도 근교까지 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수로는 또한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워낙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서 다듬을 곳이 많았다. 문제가 많은 만큼 명목 없이 돈을 유용해도,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재무대신. 바로 장부를 확인해라.”

재무대신의 부하들이 확인한다면 바로 확인될 돈들이었다. 버시슬 백작은 다급해졌다.

“전하!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는 전하의 충실한 신하입니다!”

버시슬 백작이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왕이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버시슬 백작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몹시 원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너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왕이 코웃음 쳤다.

“다정한 신사인 네가 네 부하에게 속고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되었나?”

너를 아직 잘라내진 않겠지만 장부는 조사할 것이고 그 책임은 지게 할 것이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버시슬 백작이 이를 갈면서도 겨우 허리를 숙였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원탁의 대신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쇼어 공작부인을 쫓아다니면서도 결국 그 도도한 장미를 꺾을 용기는 없어서 마약이나 처먹고 어린 소년이나 소녀를 범하는 놈이 ‘다정한 신사’라!

“감…… 사합니다, 전하.”

“천만에. 너의 진심은 언제나 잘 알고 있다.”

왕이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저었다. 귀찮은 개를 내쫓는 듯한 손짓에 버시슬 백작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아내느라 힘이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쇼어 외무대신.”

왔다.

재수 없는 버시슬이 당하는 걸 보며 살짝 웃고 있었던 제럴드가 벌떡 일어섰다. 싫으면서도 절도 있게 일어나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슬픈 습관이리라.

“대장군 하타.”

“예, 전하.”

제럴드만큼이나 절도 있게 일어난 노년의 사내가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심복 중에서도 대장군 하타는 특이한 편이었다. 그는 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 어릴 때부터 지지해왔는데 그저 왕이 ‘왕세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제2왕자는 왕이 못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하타의 논리였다.

“동대륙과 남대륙을 조용히 시켜라. 국경에 적당한 군인을 보내도 좋다. 내 인내심을 자극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라. 놈들에게 어디에 붙어야 하는지 똑똑히 보여줘라. 방법은 대장군에게 일임한다.”

“명을 받듭니다.”

“외무대신 쇼어, 경고와 수습을 맡긴다. 놈들에게 헤수스의 왕은 더는 남아 있는 인내심이 없으며, 군신 쿠치아노의 총아들은 언제나 검무를 즐긴다고 전해라.”

제럴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럴드뿐만 아니라 모든 대신들이―심지어 근위대의 재촉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버시슬조차―눈을 부릅뜨고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침묵이 회의장을 쓸고 지나갔다.

제럴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선전 포고입니까?”

왕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제럴드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우직하고 단순한 인간이 있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냐. 반드시 ‘그렇다’가 아니면 ‘아니다’인 건가? 너는 지금 제정신인 거냐? 네가 하고 있는 게 외교라는 건 알고 있는 거냐? 그렇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놈들을 압박하는 거다. 너처럼 멍청한 걸 내가 데리고 있으니 놈들이 이렇게 나오는 거 아니냐. 제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아라, 쇼어. 제발. 제발, 그 머리를 쓰란 말이다. 네 누이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섹시하고 귀여운데, 너는 어떻게 닮은 점이 강아지 손톱만큼도 없느냐?! 그걸 놈들이 물어보면 잘 써먹는 게 너의 역할이란 말이다, 이 병신아!”

왕이 고함을 지르며 눈앞에 있는 서류를 제럴드의 얼굴로 집어던졌다. 휴. 같이 놀라고 같은 생각을 했던 대신들이 숨죽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 스완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도 왕비 자랑이 하고 싶을까. 스완은 혀를 차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씨근거리며 다시 대신 하나하나를 불러 일으켜 세워서 독설을 뱉기 시작하는 왕의 등을 바라보며 스완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왕비가 유니스 라 버시슬에 대해 공식 인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틈을 찾을 수가 없다.

‘기분 좋은 날 말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만 그 왕비님이라도 모시고 와서 우연인 척 만나게 해볼까?’

대부분의 경우 왕은 왕비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재빨리 말하면……, 그래도 기분은 좋아지지 않겠지. 스완은 왕의 뒤에 서서 난감해졌다.

그는 이미 연인인 안드레아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한 뒤였다. ‘당신을 좋아하지만 나는 전하의 심복이야’라는 스완의 말에 안드레아는 밤에 피는 꽃처럼 요염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로 똑같네요. 미안하단 말은 않겠어요. 단지, 이젠 만나지 마요.’

그렇게 스완은 차이고 말았다. 차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거대한 짐은 아직도 유효했다. 왕비가 해맑은, 아니, 뇌 맑은 얼굴로 유니스 라 버시슬에게 공식 인사를 건네는 순간…… 왕은 모두를 족치고, 스완의 목을 졸라버릴 것이다.

“나는 그대한테 대단한 유감이 있어, 교육 대신.”

스완이 정신을 차리자 이미 마지막 차례인 교육 대신이 덜덜 떨며 왕에게 쥐어짜이고 있었다.

“도대체, 교육비로 나라 재정이 얼마나 낭비되는데, 어째서 평민들이 ‘클로버’를 모르는 거냐! 세계의 다른 말이 ‘클로버’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돈을 그렇게 썼는데도 ‘클로버’를 모를 정도면, 도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에 쓰이고 있다는 뜻인가? 너는 돈을 갖다가 하수구에 처박나?! 헤수스의 국경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면, ‘주 바다 경계선’을 모를 정도면, 도대체 교육비는 어디에 쓰이고 있는 거냐!”

“대부분의 평민은 그 정도는 알고 있…….”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나는 대단히 친밀한 사이인 평민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그는 아무리 내가 이야기를 해도 세계 지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어디에나 열등생은 있다는 뜻이죠…….

교육 대신은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왕과 친밀한 평민이면 왕의 정부쯤 되는 모양인데 어떻게 대놓고 ‘열등생’이라고 표현하겠는가. 교육 대신은 그저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펄펄 뛰는 왕의 뒤에서 스완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왕이 말하는 친밀한 평민은 라파엘인데…… 교육 대신이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그는 길드에 소속된 어린 살수였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섹스에 대해 무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새삼 스완은 왕과 라파엘이 정말 다른 세계에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둘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인물이었다. 라파엘이 왕을 이해할 수 없듯, 왕 또한 라파엘을 이해하지 못한다. 왕은 라파엘이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라파엘이 살아온 세계가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이 커다란 세계의 차이라니. 그럼에도 둘은 죽도록 서로 사랑한다니.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스완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왕은 모든 대신들에게 온 짜증을 다 내고선 벌떡 일어났다.

“내일은 이것보다 더 심해질 줄 알아. 내일 보지.”

왕이 등을 돌리자 대신들이 스완에게 손짓했다. 좀 남아보라는 그 손짓에 스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나가자 병사와 시종 등이 그 앞뒤를 따랐고, 그들이 다 나간 다음에야 대신들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의자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요?”

대신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독설 수준에서 그쳤는데 지금은 짜증까지 겹쳐서 도저히 견딜 수준이 못 되었다. 특히나 아무 잘못 없이 쥐어짜이고 있는 교육 대신 등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뭐…… 대신님께는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으시고요.”

사람 죽이는 것 빼고는 백치이신 왕비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클로버를 외지 못해서 결국 포기하고야 말았던 왕을 떠올리며 스완이 실없이 웃었다. 교육 대신이 “그 개인적인 원한이 뭐냐고 묻는 거 아니요!”라며 고함을 질렀다.

“일단은 여러분의 무능함에 전하께선 좀 질리신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그저 한가한 무뢰배인 줄 알았던 놈이 무능함을 운운해대니 대신들이 발끈했다. 하지만 스완은 대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도리어 한심하다는 눈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아시다시피 전하는 유능함을 제일의 미덕으로 치시는 분입니다. 뭐, 서로 조심하는 게 좋겠지요. 대신님들도, 저도.”

스완이 등을 돌리자 그동안 남아 있었던 특수군들이 스완을 따르기 시작했다. 스완을 필두로 한 검은 무리들이 사라지자 회의장에는 무거운 한숨만이 감돌았다.

회의장을 나와 첫 번째 복도를 지나 두 번째 복도에 들어섰을 때, 스완은 당황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유니스 라 버시슬.

버시슬 백작의 여식이자 본인의 말대로 왕후의 자격이 제법 충분한 여자이기도 했다. 사실 마리 트리지아가 자살했을 때 그녀는 가장 강력한 왕후 후보였다. 그때 재빨리 결혼하여 외국으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녀는 별 탈 없이 왕후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왕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왕을 향해 수줍은 눈길을 보냈었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저기 왜…….

“좋은 날씨입니다, 버시슬 아가씨.”

이혼한데다 포르타미스 사건 이후에 결혼했다 최근 돌아오는 여성들에게는 대체로 ‘아가씨’라는 호칭을 써주는 사교계였다. 스완도 그 호칭을 쓰며 유니스의 앞에 섰다. 유니스가 “아” 하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손을 내밀자, 스완은 그 손을 잡아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는 흘끗, 유니스가 서 있는 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유니스가 서 있는 곳은 근위대장실 앞이었다.

“이그나치오궁에 오셨었군요. 아버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그 아버지는 지금쯤 근위대에게 장부를 건네준 뒤 탈진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겠지만, 딸의 얼굴을 보면 기뻐할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스완은 뻔뻔하게 생각했다. 유니스가 뭘 하러 온 것이든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근위대장을 만나러 온 것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정체만 모르면 된다.

“아니요.”

유니스는 백합 같은 얼굴로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근위대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순간, 스완의 심장은 덜컹 입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뻔했다. 스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자, 유니스도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어쨌거나 둘 다 평생 귀족으로서 살아왔다. 처세술과 표정 관리라면 누구보다 능숙했다.

“오, 의외로군요.”

“…….”

스완이 의외로군요, 라고 말을 하면 유니스도 뭔가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유니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웬만한 귀족 아가씨는 이러지 않는다. 상대가 이렇게 운을 떼면 자신도 저렇게 받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말 눈치챘나.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덜컹덜컹,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 위의 짐가방처럼 난폭하게 흔들린다. 그때 유니스가 아주 조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포 대장님은…….”

유니스가 고개를 들어 스완을 바라보았다. 스완은 문득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딱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분명히.

“쇼어 대장님에 대해 잘 아시나요?”

“예에, 뭐. 남들 아는 것보다는 좀 더.”

이 아가씨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선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스완이 잘 안다는 식으로 대답하자 유니스의 눈동자가 여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어떤 분인가요?”

어떤 분이냐니……. 이건 라이벌 탐색인가. 스완은 불안해하면서도 대답해주었다.

“키가 좀 작고 단정한 얼굴에, 조용하고,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는 분입니다.”

“아아.”

“그리고 대단히 솔직하시죠.”

좀 덜 솔직해야 할 텐데. 스완이 자기 기분에 따라 덧붙였을 때였다. 유니스가 어머, 라고 말하며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스완이 당황한 눈으로 “버시슬 양?” 하고 부르자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유니스 라 버시슬은 참 훌륭한 귀족 아가씨였다. 모든 점에서 그녀는 합격점을 훌쩍 넘어서는 재원이었지만 단 하나, 표정 관리가 약했다. 평소에는 완벽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상대로는 표정이 관리되지 않는 아가씨였다.

왕에게도 그랬다. 늘 왕에게 홀딱 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유니스는 순진하거나 해맑은 성격이 아니다. 그녀는 사교계에서도 상당히 교활한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만 유독 그러했다.

그런데 왜 근위대장에 대해 들으면서 이러시나……?

설마.

“혹시,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아아, 네. 며칠 전에 이그나치오궁 정문에서.”

유니스의 말에 스완이 ‘설마’ 하고 유니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왕이 좋다는 아가씨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녀는 왕후 자리를 노리고 있다. 버시슬 백작도 교활한 늙은이지만 유니스 라 버시슬은 지독한 암여우다. 왕이나 스완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근위대장 집무실 앞에서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전하를 알현하러 오신 게 아니셨습니까?”

스완이 물었다. ‘전하’라는 호칭이 나오자 유니스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이 여자 뭐야. 스완은 당황했다.

완전히 당황한 그가 유니스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다물자 유니스가 “알현은 현재 거부되고 있어 전하는 뵐 수 없었답니다. 혹시, 근위대장님과 친분이 있으시다면 절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라고 물었다.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한 번 결혼하더니 나름대로 연애 기술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실례지만 용건이……?”

“실례네요.”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기냐.

스완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라파엘의 위장을 눈치챘거나, 라파엘에게 빠졌거나.

문득 스완은 어느 게 더 나쁜 걸까 하고 자문해보았다.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 이후 이렇게 어려운 질문은 처음인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대장님은 안 계실 겁니다.”

매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떻게 아시죠?”

암여우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나긋나긋하다. 스완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으니 호의도 없다. 아이고, 암여우, 나도 너처럼 어린 여우한테는 관심 없거든. 나도 눈이라는 게 있어―라고 소리칠 수 있다면 인생 편해질 텐데. 스완은 혀를 차고 싶은 걸 참으면서 대답했다.

“근위대장님은 비밀직이거든요. 평소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옛날의 포 대장님처럼요?”

“뭐, 비슷합니다만…….”

스완이 대충 얼버무리자 유니스가 생긋 웃었다. 그 사교성 웃음 뒤에 바로 인사를 건넨 유니스는 스완 같은 불량한 남자의 맞절은 받기도 싫다는 얼굴로 홱 등을 돌렸다. 그 무례함보다도 스완은 유니스의 의도가 걸렸다. 유니스는 도대체 왜 여기에 온 걸까.

왕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스완은 순간 살기가 치솟았다. 저 여자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데 확 죽여버리면 안 될까. 하지만 죽이자니 그 중요한 명분이 없어서 스완은 결국 눈살만 찌푸리고 말았다.

문득 스완 라 포는 만사가 억울해졌다. 왜 자신만 당하고 있는 건가? 왜 그만 번민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조금만 더 냉정히 생각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졸지에 맞지도 않는 감투를 써서 힘든데 그 와중에 역사에 남을 외교 문제가 빵빵 터진 제럴드라든가, 위로는 왕에게 옆으로는 스완에게 밑으로는 다 귀족인 근위병들에게 닦이는데다 마음 붙일 곳이라고는 어머니밖에 없는 제이슨이라든가, 옛날 모시던 아가씨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남자 왕비―심지어 백치―를 모시느라 등골이 휘는데다 여주인과 적이 되었는데 하필 그 여주인이 사교계의 여왕이라는 악조건에 부딪친 시녀장을 생각해봤다면 자신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은 다 힘들다. 그를 버린 도도한 안드레아조차 필사적으로 아들을 되찾으려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힘들면 타인의 힘든 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었다. 지금의 스완이 그러했다.

“제이슨, 나 할 말이 있는데.”

스완은 근위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여전히 근위대장 대리 업무에 빠져 있는 제이슨을 불렀다. 제이슨이 흘낏 시선을 주더니 “아무 말씀도 말고 가세요”라고 대답했다.

“야, 아직 말도 안 꺼냈잖아.”

“안 좋은 말이죠? ―안 듣겠습니다.”

제이슨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안 좋은 말일지 좋은 말일지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죠. 대장님과 함께한 시간 동안 제가 손 놓고 놀았겠습니까.”

“너 많이 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장님보다는 연상이었습니다만.”

제이슨의 기분은 최저를 달리고 있었다. 스완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가 우리 왕의 모토가 아니던가. 정말 얄미운 모토지만 지금 당장은 고마운 말씀이었다. 생각해보면 왕은 참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스완의 밑에 있을 때는 스완을 상대로 말로 이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왕을 상대하다 보니 스완 정도는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기든 지든 별 상관도 없고.’

그냥 빨리 가버리기나 해라, 라는 게 제이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이슨 리아스.”

스완이 낮은 목소리로 불러서 겨우 제이슨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슨은 완전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장님.”

제이슨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대장님이 이 자리를 추천해주셨던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원망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이 자리가 정확히 어떤 자리인지 말씀도 안 해주시고 그저 ‘급료가 두 배인 건 좋잖아?’라고 사기를 치셨지만 그래도 원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이슨이 초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 하시면 제 원망도 처음부터 할 겁니다.”

스완은 차마 더 말을 걸 수 없었다.

§  §  §

「여름 무도회가 예정대로 시작됨에 따라, 나라 안의 귀족들이 대부분이 수도에 도착했소. 왕의 군대는 그대들과 다르게 동대륙과 남대륙으로 움직인다 하오. 계속하시오.」

태후궁에서 나온 글씨는 우아하고 간결했다. 그 글씨는 귀족 특유의, 철자를 쓸 때 꼬리를 둥글이는 것까지 교육받은 여성의 것임이 분명했다.

왕은 쪽지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하간 귀찮은 여자였다.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살짝 일었다. 하지만 선왕의 인장이 있으니 그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이 미친년이 드디어 제 목숨에 초를 치는군. 왕은 그 작은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대장군 하타가 그를 배신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타는 좋은 군인이다. 왕을 따르며 부하들을 믿는……, 그리고 하타의 직속 부하로는 육군대장이 있다. 태후의 소꿉친구인 남자. 결혼은 했지만, 언제나 태후의 편에 서 있었던 사내.

‘하지만 역시 똑똑하단 말이야.’

태후는 이 쪽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쪽지의 신뢰성을 위해 쓴 것은 그녀 자신의 서명이 아닌 태후궁의 문장이었다. 만약 족치면 그녀는 주임 시녀를 대신 밀어내고 자신은 도마뱀이 꼬리 자르듯 보신을 꾀해버릴 것이다.

아아, 그렇게 도망치게 둘 수야 있나. 왕은 입술을 올린 채 쪽지를 구겼다. 태후에게는 마지막 ‘선왕의 인장’이 남아 있다. 덫은 이중으로 놓아야 한다. 태후가 인장을 사용하는 순간,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 번째 덫으로 옭아매어야 한다.

‘어차피 우린 이래야 했어.’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가했던 학대들, 그 끔찍했던 시간들도 잊을 수 없었다. 왕은 평생 그 시간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보다 더 다른, 근본적인 문제이다. 태후는 왕좌에 다른 누군가를 앉혀 조종하고 싶어하고, 왕은 결코 이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 문득 머릿속에서 마법의 다리가 떠오른다. 왕후궁의 침실과 이어져 있는 마법의 다리는, 왕이 된 자만이 저 침실에 있는 이를 가질 수 있다고 호언하는 듯하다. 아아, 그래. 빼앗길 수 없지. 어차피 태후와 그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다.

왕이 쪽지를 시종장에게 건네자 시종장이 다시 특수군에게 건네주었다. 특수군이 받아서 왕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묶어서 안네마리에게 가져다주어라.”

왕의 말에 특수군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는 곧 “예, 전하. 그대로 행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물러났다. 특수군은 왕의 앞에서 물러나며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그렇게나 총애하는 왕비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냉혹한 사내다.

그러나 왕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특수군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라파엘의 충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 그 자신이 중간에서 쪽지를 가로채도 라파엘은 특유의 멍한 얼굴로 그렇구나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라파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신에게 이 쪽지를 줄까. 그렇다면 자랑스러워할까? 쪽지를 주지 않는다면 왜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일이 생길지 마냥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스완은 곁에서 왕의 그런 기분을 꿰뚫고 있었다. 지금인가. 왕의 기분이 이 이상 좋아지기란 무리일 듯했고, 그럼 지금 할 말을 해야 했다. 내일부터 여름 무도회가 시작되는데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전하.”

“응?”

왕은 기분 좋은 얼굴로 스완을 바라보았다. 그 부드러운 얼굴에 대고,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스완은 해야 했다.

“비전하께서 유니스 라 버시슬에게 공식 인사를 약속하셨습니다.”

왕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얼굴 그대로 굳었다. 왕의 시선이 스륵, 움직여 스완을 노려보았다.

“뭐? 무슨 공식 인사?”

왕비가 여자에게 할 공식 인사라는 건 대체로 그 인사를 말하지만, 아니, 그 인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왕은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스완은 입술을 깨문 채 침묵했고, 왕은 벌떡 일어났다.

“공식 인사?!”

왕의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귀신같은 형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스완은 왕의 시선을 외면했다. 시선 끝에 기립해 있는 시종들의 발이 보였다. 시종 중 한 명과 자리를 바꿨으면 소원이 없겠군. 괜히 어린애 같은 소원을 빌어보며, 스완은 다가올 벼락같은 고함 소리를 대비했다.

“넌 도대체 뭘 했어?!”

네, 터져 나왔습니다. 이럴 줄 알았지요. 후, 스완은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겨우 삼켰다.

“비전하께서 너무 갑자기 약속을 하시는 바람에…….”

“내 토끼는 토끼 말밖에 몰라!”

왕이 고함을 질러서 스완은 자신도 모르게 ‘그건 아니야!’라고 맞고함을 칠 뻔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뻔한’ 것에서 그친 스완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에 보일 듯이 상황이 그려졌다. ‘인사’라니 인사인 줄 알았겠지.

“어떤 놈이야.”

왕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스완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 감히 내 비의 순진함을 악용한 거냐. 어떤 놈이, 감히!”

정말 괴롭다, 괴로워.

눈앞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왕을 외면하며 스완은 한숨을 억눌렀다. 여기다 대고 한때 애인이었던 여자의 이름을 말한다는 건 정말이지 못해먹을 짓이었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스완은 그 이름을 말하기 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언젠가는 이럴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던 관계였다. 농염한 여인에게 농락당하는 역도 여유가 있을 때나 맡아줄 수 있는 것이다.

‘안드레아, 진검승부로는 당신은 왕을 이길 수 없어.’

스완은 입을 열었다. 여름 무도회에서 왕이 생각지도 못한 여인을 공식 정부로 들이는 것보다는 지금 듣는 것이 나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드레아를 도우면서 왕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런 고민 따윈 하지 않겠지.’

스완은 왕이 토끼니 순진하니 하는 왕비를 떠올렸다. 언제나 직선으로밖에 달리지 못하는 그 남자는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겐 신념도 목표도 없으니까. 오로지 사랑만 있는 인생은 분명 편하고 달콤할 것이다. 부럽군. 스완은 지금 이 순간 왕비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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