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마법의 다리
서대륙에 있는 헤수스의 영지. 위로는 노트코의 국경과 맞닿아 있으며 아래로는 바다와 닿아 있는 작은 영지인 티스는 소유자가 상당히 많이 바뀌었던 영지이기도 했다. 노트코는 언제나 이 작은 영지를 가지기 위해, 그럼으로써 서대륙을 감싸는 모든 바다를 가지고 또한 주 바다 경계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왔다. 그들이 이자벨 로지아나 태후의 뒤를 살펴주었던 것도 결국은 이것을 위해서였다.
최근, 이 티스에 많은 도적들이 출현하여 강탈을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상으로 보자면 앞은 바다, 뒤는 노트코이니 노트코 국경에서 도둑들이 일제히 넘어왔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도둑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해서 아무리 봐도 오합지졸의 솜씨가 아니었다. 헤수스에선 그들이 도둑의 탈을 쓴 노트코 군인들이라 의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비밀회의의 안건은 이것이었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여기에 대해서 건전히 논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회의는 변질되어 있었다.
“아, 미치겠네.”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이 투덜거렸다. 티스에 대해 생각을 짜내야 하는데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다. 티스의 현 상황, 그가 사랑하는 안드레아의 싸늘하고 이기적인 태도, 그리고 왕과 왕비의 한없이 민폐에 가까운 염장질까지.
“덥네요. 올해 왜 이렇게 덥습니까.”
근위대 부대장 제이슨 리아스가 창문을 열었다. 이미 밤이라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그저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제이슨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어머니를 떠올렸다. 특수군에서도, 근위대에서도 마마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어머니와 사는 생활이 좋았다.
그에게 여자를 사귈 여유는 없었다. 집에 돌아갈 여유도 종종 보장받지 못하는 그가 여자를 사귈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의 생활은 주로 궁에서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근위대 부대장이라고 해도 아직 평민인 그와 사귀어줄 여자는 궁 안엔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는 고사하고 집에 가서 브라우니나 먹었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러자면 일을 다 끝내야 했다. 원래 둘이 할 일을 혼자 하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근위대로 소속을 옮기는 게 어때.’
왕이 싱긋 웃으며 하던 말이 생각나자, 제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직위는 부대장이지만 월급은 대장 대우를 해주지.’
그때 왕의 금발은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으며, 그는 상냥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왕이 제이슨에게 그토록 다정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제이슨이 그 얼굴과 목소리와 말투에 속아서 근위대에 자리를 잡자 서슬이 퍼런 얼굴로 닦달해대기 시작했다.
그가 특수군 부대장이었던 시절에는 그와 왕 사이에 스완 라 포가 있었으므로 다소나마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젠 위로는 왕이, 심지어 서류상 상관이자 왕의 총비인 남자조차 툭하면 사고를 치고, 옆으로는 옛 상관 스완이, 밑으로는 귀족이랍시고 콧대만 높은 근위병들이 나대어서 그는 정말 괴로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
“……행복해 보이니 다행인가.”
제럴드가 티스푼으로 차를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남’동생 라파엘은 믿을 수 없게도,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왕이 제럴드를 안았을 때 그건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왕이 제럴드에게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못이 박힌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보다도 아팠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렇지 않았다. 왕이 어떤 밉살스러운 말을 해도, 그 어리고 불쌍한 동생은 사슴처럼 순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땅바닥에 붙어 있다는 걸 제외하곤 어디 하나 빠질 데가 없는 동생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서울 정도로 강해졌으며, 자신을 버린 식구들에게조차 등 돌리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씨까지.
‘저 양반, 또 헛생각 하고 있구만.’
어느새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제럴드를 보며 제이슨과 스완이 시선을 교환했다. 라파엘 에반스는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 아니지, 평범한 남자치곤 키가 좀 작은 대신 피부가 상당히 좋은 남자였다. 그것 외에는 전설적으로 강하고, 전설적으로 눈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수는 해 드셨습니까―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이 남자, 은근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제이슨이나 스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매력이 폴폴 풍기는지 어쩌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그는 유독 인기가 좋았다. 왕에게 그랬고, 자기 친형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친모에게도 그렇지.’
스완은 여전히 히죽거리는 제럴드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연인인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을 떠올렸다. 혈육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지 않을 때의 이야기일 텐데, 안드레아는 지금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 하고 있다. 친아들인 라파엘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라도 악마에게 팔 기세였다.
“시간이 곧 다 되어가는군.”
스완의 중얼거림에 제이슨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시냐는 시선에 스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무섭고 아름다운 여인이 기다리고 있거든.”
“하, 어련하시겠습니까.”
제이슨 리아스는 이제 말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서류에 고개를 박았다. 왼쪽은 여자를 생각하고 오른쪽은 동생을 생각하느라 일은 뒷전이다.
스완은 그런 제이슨을 슬쩍 흘겨보았다. 유명한 마마보이인 제이슨 리아스는 일을 재빨리 끝내고 엄마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다. 귀족 사회에서는 간간이 근친상간도 보이는 편이지만, 제이슨은 평민이고 근친상간의 기역 자만 나와도 모욕감으로 치를 떨며 자기가 죽든가 놈을 죽이기 전엔 끝나지 않을 결투를 신청할 것이 분명했다. 제이슨은 순수하게 어머니를 좋아하고, 어머니와 같이 사는 생활이 좋은 모양이었다.
사랑이 없다면 이 험난한 삶에 무슨 재미가 있지. 스완은 제이슨을 보며 다소 의아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놈이 부러웠다. 으, 저렇게 집에나 정을 붙이면서 살면 지금처럼 괴로울 일은 없을 텐데.
‘티스에 도적이 더 늘어났다더군요. 알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동그랗고 새하얀 어깨를 보고 있을 때 안드레아가 물었었다.
‘아니요.’
‘계속 늘어나고 있대요, 하지만 티스에선 본국에 보고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요.’
안드레아의 검은 머리칼이 굽이굽이 물결쳤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실크 위에 놓인 메마른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우아했다.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습니까?’
‘서대륙의 누군가에게서.’
‘대가성 정보인가요?’
안드레아는 말없이 웃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성모 같기도 했고 탕녀 같기도 했다. 그녀는 아들을 되찾으려는 어머니였고, 몸을 하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여왕이었다.
안드레아가 뭘 원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목적은 알 수 있었다. 안드레아가 원하는 마지막엔 그녀가 한 번 버렸던 아들 라파엘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지만, 나는 해줄 수 없어.
스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안드레아가 좋았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가올 때 가슴이 뛰었고, 그녀에게 농락당해서 화가 나 미칠 것 같아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정의는 왕이었다.
“대신님, 티스엔 연락해보셨습니까.”
스완의 질문에 제럴드가 아아 하고 신음했다. 별로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도적의 숫자가 급증한 건에 대해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어.”
“노트코의 대사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티스에 대한 특별한 소식은 들어본 일이 없다고…….”
제이슨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본 일이 없다고?”
제이슨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되물었다.
지금 티스의 상황은 모든 대륙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만약 이렇게 맥없이 티스가 서대륙에게 먹혀버린다면, 동이나 남대륙 말미의 영토들도 그 즉시 침략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노트코에서 머무르고 있는 대사가 ‘들어본 일이 없다’?
제럴드가 침묵했다. 근위대장이었을 때의 그 역시 심플한 임무만을 맡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교처럼 길고 은밀하며 모든 나라의 이익과 입장이 얽혀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제럴드에게 외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외교는 오랜 인내심과 성의를 가지고 부딪쳐야 하는 진검승부인데, 제럴드는 군인이었다. 그는 인내심과 성의보다는 검이 더 가까운 남자였다. 날 물 먹이려고 이런 시기에 외무대신을 맡겼나? 오랫동안 왕에게 괴롭힘을 당해온 제럴드는 슬슬 피해망상적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럴드가 아무 말이 없자 스완이 그의 말을 독촉했다.
“그래서?”
제럴드가 눈을 깜빡였다. 스완과 제이슨은 제럴드가 라파엘과 친형제는 친형제구나, 라고 동시에 생각했다.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어딘가 닮았다.
“모른다는데 뭐라고 해?”
그 말에 스완은 뒷목을 잡았다.
안드레아는 아무래도 아들을 너무 오냐오냐 키운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서 어떻게 이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상당히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교묘한 안드레아의 아들이 이렇게 우직할 수가 있나. 차라리 죽은 에드워드 라 쇼어가 더 안드레아의 아들에 가깝지 않은가.
“그럼 그 뒤에 아무런 조치도 안 취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제이슨이 노골적으로 어이없어하자 제럴드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슨이 아차 싶어서 시선을 불안하게 굴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평민을 대하듯이 상대를 추궁해버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높기로는 외무대신부터 낮기로는 시종까지, 여하간 귀족들은 전부 불쾌하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리고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때에 뒤통수를 맞는다.
“본국 귀환 조치를 취하십시오.”
스완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와중에 여자를 안을 기분이 나시다니, 참 태평하십니다.”
제이슨이 한숨을 쉬자 스완이 혀를 찼다.
“모르는 소리 마. 마녀에게 몸을 팔러 가는 심정이니까.”
제이슨이 무슨 말이냐는 듯 흘낏 시선을 주었지만 스완은 그를 보지 않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안드레아에게 가기 전 왕에게 보고할 것이 남아 있었다. 왕에게 티스를 약탈하는 도적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했었지만 티스 쪽에서 본국에 보고할 마음이 없었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왕은 아마 그가 혀 위로 올리지 않은 말을 알아들었겠지만 그래도 왕에게 다시 말을 해둘 생각이었다. 대사가 아무 일도 없다고 보고해왔다는 것까지 모두 보고하고, 그리고.
스완은 마음을 굳혔다.
안드레아와 어쩌면 반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그의 정의―즉, 왕을 따른다는 것을.
스완의 보고를 받은 뒤 왕은 “대사를 귀환 조치하고, 내일 원수를 불러들여”라고 간단히 말했다. 왕은 두 번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조치는 깔끔하면서도 완벽했다. 스완은 싱긋 웃으며 물러가려 했다. 그때, 왕이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스완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 밑이 거무죽죽한 스완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왕에게 스완이 초췌한 웃음을 던졌다.
“저, 차이면 술 대작이나 해주십시오.”
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스완은 피식 웃으며 예를 갖췄다. 우아하게 무릎을 구부려 절을 한 스완이 침실을 나가자 왕은 파이프를 물었다. 라파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이부동생이다. 라파엘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귀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시종장이 파이프에 담배 가루를 넣고 불을 붙여주자 연기를 뱉으며 왕이 말했다.
“좀 알아봐.”
“동생분의 연애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종장이 얄밉게 말하자 왕이 눈초리를 접었다.
“심술궂게 굴지 말고 알아보라면 좀 알아봐. 녀석이 영 상태가 안 좋잖아.”
“네, 네. 어디까지 알아볼까요?”
“녀석의 성생활만 빼고.”
전부라는 이야기네요. 시종장이 태연히 말하는 동안 왕은 창을 등진 채 연기를 뱉었다. 멀리서 싸늘한 검처럼 얇고 날카로운 달이 은은히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 § §
왕은 자다 말고 눈을 떴다. 그의 연인이자 비인 안네마리―라파엘이라고도 불리는―는,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달은 모습을 감췄고, 창 밖의 하늘은 청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벽이었다. 곧 날이 밝을 것이 분명했다. 사랑스러운 왕비가 그의 품속을 빠져나가 뭘 하나 했더니 고작 검을 노려보는 것인가 싶어 그가 소리 없이 입술을 올렸을 때였다. 라파엘은 검에 손을 뻗었다가 미처 날에 닿기도 거둬들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전하.”
왕이 일어나 있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마침 새벽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 흰 커튼이 날렸다. 온몸에 왕의 흔적을 새긴 채, 나체의 라파엘이 왕을 직시했다.
“왜 그러느냐?”
일어나서 라파엘에게 가도 좋았지만 이 나른함도 나쁘지 않아 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라파엘의 한쪽 옆으로 커튼이 흩날리는 것이 아름다웠다. 초상화가라도 불러다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방식으로는 전하를 못 지킬지도 모릅니다.”
라파엘이 밤새도록 울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왕을 지키고 싶었다. 그게 사랑 같았다. 라파엘은 평생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 외에는 자기 의지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살기 위해서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사랑 같은 숭고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상대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라파엘은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에서는 그 간단한 게 지독히 어려웠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왕을 지킬 수 없다. 어제만 해도, 그는 왕의 곁에 암살자가 둘이나 붙어 있는데도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한 번 움직이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 전 뭘 해야 할까요?”
그럼, 사랑이 뭐지?
라파엘은 혼란스러워졌다.
왕은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고, 왕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히고 열이 올랐다. 그에게 뭐든,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검으로 가슴을 갈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이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심장을 줘봐야 아름다운 왕을 더럽히기밖에 안 하겠지.
라파엘에게 있는 것은 무력뿐인데, 그것으로 왕을 지켜도 결과적으로는 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번 일만 해도 라파엘은 왕을 지켰지만, 괜히 얼굴이 노출되어 혹시라도 정체가 들통 나면 어쩔 거냐며 모두가 화를 냈다. 어차피 그들은 왕에게 접근할 수 없었을 거고, 교대 시간에 결국 정체가 확인되었을 거라고 했다.
“내 곁에 있으면 되지.”
왕이 당연한 말을 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팔을 괴고 모로 누운 왕이 놀고 있는 한 손을 벌렸다. 라파엘은 자동인형처럼 튀어나가려는 발을 멈추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양검은 ‘X’자로 놓여 있었다. 라파엘이 다시 왕에게 말했다.
“저는 전하의 곁에서 뭘 하나요?”
라파엘은 혼란스러워했다. 왕은 라파엘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라파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강하고 무표정하고 엄살 따위는 떨 줄 모르는. 손해만 보는 저 남자가 귀여웠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귀애했다.
“사랑을.”
“사랑이란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모르겠어, 정말. 그건 왕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푸념이었다.
커튼이 펄럭였다. 새하얀 커튼이 앞뒤로 나풀거려 라파엘의 몸이 가렸다. 왕은 문득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긴 커튼에 가려 라파엘의 몸이 사라졌다가 보이길 반복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라파엘이 자신을 지키길 원하지 않았다. 그냥 사랑하면 되잖아. 지킨다든가 하는 어떤 목적을 가지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라파엘에겐 라파엘의 생각이 있으니 그 자신이 뭐라 간섭할 여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지킨다는 말로 라파엘이 종종 사라지는 것이 불안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그는 라파엘이 곁에 있길 원했다.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라파엘의 손을 반드시 붙잡고 싶었다. 같이 죽어달라는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라파엘을 볼 수 있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내 안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불과하고.’
굳이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게 느껴진다. 왕은 창가로 다가가 라파엘을 홱 끌어냈다. 평소 행동에 어른스러운 부분은 손톱만치도 없지만, 그래도 왕은 라파엘보다 세 살이나 위였다. 그리고 라파엘에 비해 세상 경험이 말도 못 하게 풍부했다.
“네 마음속에서 사랑은 어떤 것이다 하는 정의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해봐.”
왕이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구부려 라파엘과 시선을 맞췄다.
“머리를 비우면 눈앞의 내가 보일 거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잖아?”
한 번 죽을 뻔했었고 말이야.
왕이 웃으며 농담을 덧붙였지만 라파엘의 혼란은 여전해 보였다. 라파엘이 창백한 입술을 열어 물었다.
“전하가 잘못되면.”
고작 한 마디 말만으로도 라파엘은 숨이 막히는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이한테 귀신이 온다는 말을 해도 이토록 공포에 질리진 않으리라.
“제 심장은 멈출 겁니다.”
“그래.”
왕은 쉽사리 인정했다. 왕은 밉살스러운 성격이니 여기서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안 그렇더라고’ 따위 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만은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그를 쏘았지만, 라파엘은 그를 베지 못했다.
왕은 라파엘을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라파엘은 왕을 위해 친부도, 친형도 죽였다.
―그렇다고 해서 라파엘이 왕을 ‘더’ 사랑한다는 건 아니지만, 라파엘이 왕을 ‘아주’ 사랑한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다. 이 사랑이 영원의 숨결을 간직한 특별한 것이라고 왕 자신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네마리. 네가 나를 구한답시고 죽어버리면 나는 어찌 되는 것이냐?”
왕은 이제껏 묻지 못한 것을 물었다. 라파엘의 검은 눈이 크게 뜨여, 그 검은 눈 속의 왕 자신이 좀 더 크게 보였다.
“나는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
라파엘의 눈이 파닥파닥 소리를 냈다. 모닥불이 꺼지기 직전 같은 그런 소리를.
“당연히…….”
그리고 라파엘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왕이 잘못되면 당연히 죽는다. 그런데 자신이 잘못되면 왕은 당연히 살아야 하는가?
감정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같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른 것인가?
……둘은 분명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고 있는데.
“네가 죽으면, 나는 이걸 누구에게 물어야 하지?”
라파엘은 그제야 왕이 보였다. 그가 몇 번이나 왕을 구하겠다고 할 때마다 탐탁찮아하던 왕이 똑바로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높은 콧날, 따뜻하고 지적인 남자가 그를 직시하는 것이 선명히 시야에 들어왔다. 라파엘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왕은 창과 창 사이의 벽을 한쪽 팔로 짚은 채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왕의 입술이 닿았다고 느끼자마자 혀가 들어와 라파엘의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처음에는 낯몰라 소름 끼쳐 했던 쾌락도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턱을 움켜잡힌 채 키스를 받는 것도 친숙했다. 입술이 포개져 눌린 채 혀를 빨리자, 팔을 들어 왕의 목과 허리에 감았다.
입술이 잠시 떨어진 사이 라파엘이 헐떡이며 말했다.
“죽지 말…… 읏, 하읏.”
왕의 손이 라파엘의 유두를 심술궂게 비틀었다. 라파엘이 나직이 신음을 내지르는 위로 왕이 불퉁하게 말했다.
“넌 귀여운데 얄미워.”
꼭 내가 듣고 싶은 말이랑 반대로 말한다니까.
왕이 라파엘의 귓불을 깨물었다. 라파엘이 몸을 가볍게 튕기자, 왕은 라파엘을 안아 창가에 앉히고 유두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최근 애무받기 시작한 유두는 새빨갛게 물들어 바짝 서 있었다. 왕이 이로 잘근잘근 물었다. 라파엘이 왕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몸을 떨었다. 왕은 어젯밤에도 그젯밤에도 유두를 괴롭혔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이 예민해지는 감각은 괴롭고 이상했다. 뒤로 왕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질 때는 내장이 끌려나와 온 세상에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연약한 부분이 공개되는 두려움부터 더러운 것을 보이는 수치심까지.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피부 위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라파엘에게 유두는 뱃가죽이나 손등과 비슷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왕이 유두를 만질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앞이 서고 뒤가 벌름거렸다. 왕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따끔거리고 아프면서도 저리고 달콤한 그 감각을 결국은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슬슬 침대로 돌아갈까.”
왕이 라파엘에게서 떨어졌다.
라파엘이 창가에 걸터앉은 채 왕을 바라보았다. 왕도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한 걸음뿐이었다. 침대로 갈 생각 따윈 전혀 없어 보였다. 3년이나 함께해서, 라파엘은 겨우 왕이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라파엘은 흘끗 침실 안을 살폈다. 이미 침실의 시종들은 물러가거나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예전에 시종 하나가 등을 돌리기 전 다리를 벌렸다가 ‘놈에게 자랑하고 싶었냐’고 왕이 추궁하는 바람에 괴로웠던 적이 있던 라파엘은 그제야 다리를 벌렸다.
“착하네.”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파엘이 흣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이런 게 왜 부끄러운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부끄러웠다. 다리를 벌려야 하니 벌렸지만, 허벅지 안쪽이 경련하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고문이 나아. 그는 속으로 또 고문과 비교했다. 왠지 모르지만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역시 고문이 나은 것 같다.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이 안 좋지만.
“전하…….”
몸에 열이 올랐다. 어째서지? 라파엘은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여름이고 덥지도 않다. 그런데도, 온몸에 열이 오른다. 눈이 뜨거웠다. 제멋대로 눈물이 흐른다. 사타구니에서 바짝 선 것이 저리고 아픈데, 이걸 가라앉히려면 왕이 도와줘야 한다. 왜 혼자는 불가능한 감각에 취하게 되는 걸까. 왕이 도와주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무서웠다. 그런데 무서우면서도 몸은 더 뜨거워졌다.
“흣, 너―.”
왕이 이를 갈면서 라파엘을 덮쳤다. 라파엘의 입술을 난폭하게 비집고 들어온 왕의 혀가 그의 혀를 잡아채 옭아맨다. 왕의 손이 유두를 꼬집었다. 라파엘이 왕에게 매달렸다. 신음도, 헐떡임도 왕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왕이 라파엘의 유두를 비비고 비틀었다. 그때마다 라파엘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왕의 신음 소리가 라파엘의 귓가에 선명히 닿았다.
“너, 누가 이―, 웃, 하아.”
왕의 혀를 조금 빨아보는 것만으로도 왕이 길게 신음했다. 왕이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왕은 흥분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그는 라파엘이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몸을 떨고, 라파엘이 키스 중 혀를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신음하고, 라파엘이 신음할 때마다 좋아한다. 그 모든 것이 그의 강한 육체 전부에서 퍼져 나왔다.
왕이 성급히 라파엘의 다리를 어깨에 걸쳤다. 엉덩이가 들리자마자 왕은 라파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입술처럼 부은 채 다물려 있는 입구를 간신히 가르자 라파엘이 희미하게 비명을 질렀다.
“아프냐?”
왕이 겨우 멈춘 채 몇 번이고 라파엘의 얼굴에 키스하며 물었다. 본래 잘 소리를 내지 않는 라파엘의 반응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황한 기색으로 라파엘이 대답했다.
“아, 아니……, 죽을 것 같…….”
예민해져서, 신경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은데 그곳을 굵고 둔탁한 이물질이 긁자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픔과는 다른, 그래서 더 견딜 수 없는 감각.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호소하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왕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잠시 숨결이 더 거칠어지는 것 같던 왕은 어느 순간 라파엘의 몸을 그대로 꿰뚫었다. 아아아읏. 라파엘의 비명 소리가 커져도, 왕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라파엘이 헐떡이며 몸을 비틀어댔다. 그의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 구부러진 채 부들부들 경련했다. 라파엘은 울면서 헐떡이고, 손을 들어 왕을 밀어내려다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읏, 하읏, 네 안이 얼마나 뜨거운지, 읏, 내가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라파엘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왕이 말할 때마다 그 안쪽이 울리고, 부은 곳이 저렸다. 왕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내장을 맨손으로 잡힌 것처럼 괴로우면서, 행복에 빠져 죽는 것처럼 달콤했다. 아프고 좋아서, 라파엘은 울면서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왕의 시종이 라파엘의 무엄한 말투에 벌떡 일어섰다가 왕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요염하고, 흣……, 뜨거……워. 이런 몸을 하고, 읏, 이런 몸으로, 아.”
왕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듣고 싶지 않아 라파엘은 필사적으로 왕의 분신을 조였다. 그것만으로도 왕은 몇 번이나 말을 멈추고 열에 들떠 신음했다.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고, 결합된 곳에선 젖은 소리가 끊임없이 흘렀다. 왕의 움직임이 과격해졌다. 왕이 격렬하게 퍼억퍼억 쑤셔대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쑤셔 넣었다. 라파엘이 등을 뒤로 휘며 눈을 감았다.
“거기, 안…… 돼…….”
라파엘이 신음하며 힘없이 말했지만, 왕은 그가 가장 느끼는 곳에 대고 사정했다. 왕의 것이 최고로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육벽에 맞닿은 채 뜨거운 것이 새어나와 배 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에 라파엘이 무력하게 떨며 사정했다. 왕이 라파엘의 몸을 쫓아오듯 안아서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흰 목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세게 깨물어도 라파엘은 그저 사냥당하는 사슴처럼 떨고 바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배 속이 뜨거워지고 있다…….
라파엘이 눈을 감은 채 기절했다. 아픔도 피로도 아닌 쾌락의 파도에 잠긴 채 희미하게 도취된 새하얀 얼굴에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왕은 그 뺨에 키스한 채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요염하고 뜨거운 토끼 같은 얼굴로 나돌아 다닌다고 생각하면 열불이 솟는다니까.”
“전하, 조례에 지각하지 않을 예정이시라면 지금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만.”
아침에 도착해 있던 시종장이 침실 밖 응접실에서 조용히 물었다. 왕은 대답하지 않은 채 라파엘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말하지 마, 라니. 오늘 유독 귀여웠지. 왕은 불한당처럼 키득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종일 이 몸을 끌어안은 채 유두와 자신을 받아들이는 기특한 곳을 사랑해주고 싶지만, 오늘 조례는 반드시 나가야 했다. 왕은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찼다가 결국 라파엘을 안는 것은 밤으로 미루었다. 그리고 라파엘을 안아 침대에 데려다준 뒤 휘장을 친 다음에야 시종들을 들였다. 어느새 창 밖은 환한 아침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하는 말인데 들릴 듯 들리지 않는다. 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지?
‘이건 너에게 주는 인생의 비밀 퀴즈야.’
아아, 교관의 목소리다. 라파엘은 눈을 뜨지 못한 채 교관의 목소리를 들었다. 라파엘에게 양검을 허락해준 교관은 무서운 남자였다. 그는 라파엘을 예뻐했지만, 라파엘이 타깃의 목을 베느라 아주 약간 늦게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일주일이나 식사를 주지 않았던 남자였다.
일주일이나 식사도 하지 못하고, 계속 채찍으로 얻어맞으며, 빛도 없고 몸도 펼 수 없었던 곳에 감금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무서웠으면서도 다시 떠올리니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건 그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리라.
‘이걸 풀 수 있다면 넌 인생의 승리자가 되겠지.’
교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파엘은 피식 웃었다. 라파엘은 퀴즈에 젬병이었고 풀려고 노력한 적도 없지만, 그러나 분명 푼다고 해도 인생의 승리자 따윈 될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라파엘은 왕을 만남으로써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인생의 비밀은 사실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파엘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어두웠다. 라파엘은 몸을 일으키다가 배 속의 태아처럼 구부려 누웠다. 그러자 엉덩이 사이에서 묽은 액이 덩어리져 흘러내렸다.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그 선연한 느낌에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왜 좋아지질 않지.
라파엘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얻어맞거나 고문을 당하는 건, 당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조금씩 적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감각에도 적응해서 무뎌진다. 라파엘은 쾌감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흣…….”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갈수록 예민해졌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가와서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다리 사이의 떨림, 왕의 신음 소리, 왕의 분신이 닿았을 때의 그 아슬아슬한 감각, 벌름거리는 점막과 신경이 곤두선 피부……. 지금만 해도 유두에 닿은 시트가 거슬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닿고 싶고, 문지르고 싶을 지경이다. 엉덩이 사이에서 정액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고 있다. 이 배설감이 괴롭다.
“비전하, 휘장을 열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휘장 밖에서 시녀장이 물었다. 라파엘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라파엘은 “응” 하고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좀 좋아질 것이다. 아주 좋아지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좋아지니까.
“날씨가 아주 화창합니다. 지금부터 시중을 들어도 될까요?”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시녀들의 시중이란 세심하고 노골적이다. 엉덩이 사이를 닦는 것까지도, 그녀들은 거침이 없었다. 매일 왕이 그 안에 정액을 들이부으면, 그녀들은 매일 긁어내었다. 본래는 왕의 시종들이 하는 일이라고 했다. 라파엘도 바이런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비니까 시녀들이 직접 해주는 것이라고, 그게 훨씬 낫지 않느냐고 시녀들이 반문한 적이 있었다.
옛날에 라파엘은 이런 것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급소를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내키지 않아졌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그곳이 더러운 곳인 건 사실이니까.
“그러지.”
라파엘이 몸을 일으키자 시녀장이 화사하게 웃었다.
한동안 목욕 시중이 계속되었다. 목욕이라고 해도, 라파엘에게 목욕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섹스에 대한 책임이나 여성으로서 위장을 위한 관리 등, ‘목욕’이라는 단어 안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그것들이 다 끝나고 나오자 화장과 드레스 착용 등 본격적인 위장이 시작되었다.
“참, 오늘은 방문 신청이 있습니다.”
라파엘의 머리칼을 손질하여 늘어뜨리다 말고 시녀 한 명이 말했다. 원래 라파엘은 방문 신청―알현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이 많은 편이었다. 왕의 유일한 총비이고, 베갯머리송사가 받아들여진다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방문 신청?”
알현이라는 공식적인 루트가 아닌 방문 신청이라.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눈 안쪽이 뻑뻑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라파엘은 어제 많이 울었는지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자신이 뭘 했었는지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얼마나 울었는지를 떠올린다는 건 무리였다.
“괜찮은 건가?”
라파엘이 물었다. 무기한 근신령을 받은 상태에서 그런 신청이 가능한 거냐는 질문에 시녀장이 대답했다.
“친족의 방문은 허락되니까요.”
“친족이라는 건 어디까지지?”
“원래는 더 넓은 범위를 일컫습니다만 비전하의 경우에는 쇼어 가문만을 의미합니다. 사가의 분들만이지요.”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가라면 제럴드가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자신이 왕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레이드를 시켜서 만나러 오라 할까. 라파엘이 생각에 잠겨 있다 눈살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챈 시녀가 “죄송합니다. 어디가 불편하셨는지요?”라고 물어왔다.
라파엘은 대답 없이 고개를 내렸다. 시녀는 라파엘의 가슴에 고무로 된 가슴을 부착하던 차였다. 그 가슴은 물컹거리는 것으로, 여자의 브래지어로 고정하게 되어 있었다. 시녀가 가슴에 대는 고무는 불편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고무라 해도 유두를 짓누르지 않을 수 없다.
왕이 괴롭혔던 유두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왕이 음란하다며 놀리던 모습 그대로였다. 왕은 그에게 만져달라고 하고 싶을 때 유두가 이렇게 붉어진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왕에게 유두를 만져달라고 하고 싶은 걸까? 왕이 그의 유두를 빨고 깨물던 감각을 떠올리자, 라파엘은 그 작고 별거 아니던 기관이 달콤하게 저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비전하?”
“아니야. 해.”
라파엘의 말에 시녀는 의아해하면서도 라파엘의 몸에 가슴을 부착하고 브래지어를 입혔다. 코르셋을 입는 동안, 시녀장이 재차 고했다.
“비전하, 방문 신청이 있습니다만.”
“아아.”
그러고 보니 누구지?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친족이라면 제럴드밖에 없지 않은가. 굳이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시녀장이 뜻밖의 이름을 말했다.
“스완 라 포 대장입니다.”
“친족이 아니잖아?”
“전하의 친족이시지 않습니까.”
라파엘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별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장이 뒤에 기립하고 있던 시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재빨리 답장을 써서는 시녀장에게 가져온다. 시녀장이 그 내용을 확인하고 건네주자 시녀가 침실을 나섰다.
시녀장이 다른 시녀들에게 문 플레이스의 준비를 명하는 동안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 또 뭐 때문에 저러시지?’
왕비의 낮 호위조의 조장인 그레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별일 없어 보이는데 왕비가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있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결국 나무에 몸을 숨겼던 그레이드가 붉은 나뭇잎을 하나 떨어뜨렸다. 붉은 잎이 공중을 날아 팔락팔락 떨어지자, 스스슥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경계태세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 전하의 호위조보다 힘든 것 같아.’
왕비 본인이 워낙에 고수이자 전설이시니 모시기가 영 힘들었다. 게다가 저 백치 같은 얼굴로 제법 사기도 치시지. 그레이드는 불퉁하게 창문 안쪽의 왕비를 바라보았다. 어제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한 왕비는, 그 이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선 태연하게 복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자신은 ‘근위대장’이니 약속을 어긴 게 아니라는 말에 그레이드는 혈압이 올라 뒤로 넘어갈 뻔했었다.
‘어, 어라?’
아직 옷을 다 입지 않은 왕비가 머리를 수수하게 늘어뜨린 채 창문을 열었다.
“그레이드.”
‘아우, 안 된다고요.’
위장 호위 중인 그레이드는 나뭇잎에 몸을 숨긴 채 왕비의 부름을 무시해보려 애썼지만.
“그레이드!”
왕비가 포기하기는커녕 더 크게 부르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그레이드는 훌쩍 뛰어서 왕비의 창가에 안착했다. 마치 강아지같이 네발로 쪼그리고 앉은 그레이드에게 라파엘이 말했다.
“부탁이 있어.”
“안 됩니다.”
부탁이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레이드는 거절했다. 성격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왕비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라파엘도 이렇게 깔끔히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약간 크게 뜨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난 후 라파엘이 물었다.
“무슨 부탁인지도 모르잖아?”
“모르지만 싫습니다.”
왕족 모독죄에 해당해서 죽을 수도 있는 중죄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그레이드의 마음은 선선한 미풍이 불어오는 듯 상쾌하기만 했다. 왕비는 이게 죄인 줄도 모를 것이다. 라파엘 에반스는 그런 오만불손한 왕족님들과는 달랐다. 아예 그런 도도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은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하지. 알았어.”
라파엘이 간단하게 말하고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쯤 되자 반대로 그레이드가 그 부탁이 뭔지 궁금해졌다.
“비전하!”
그레이드가 부르자 라파엘이 왜, 라고 묻듯이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 을 들어드릴 수는 없지만 들어만 보겠다고 하면, 화내실 겁니까?”
다른 왕족이 화를 내면 감옥에 갇히지만, 라파엘 에반스가 화를 내면 그냥 목을 잘리거나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기심이란 대단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 감정의 충족을 위해 목숨도 걸지 않던가.
“뭐 하러?”
그레이드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뭐 하러? 화를 내겠다는 뜻인가?
“예? 뭐 하러…… 라니요?”
“뭐 하러 말을 하냐고. 넌 어차피 안 들어줄 거잖아.”
“드, 들어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레이드는 급히 말을 바꿨다.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왕비가, 즉 라파엘 에반스가 할 부탁이 뭔지가 참 궁금했다. 또한 그 라파엘 에반스가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는 게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안 들어준다며?”
라파엘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들어드릴게요!”
안 말해줄 것 같아 제멋대로 지껄이던 그레이드가 헉 하고 제 입을 스스로 막았다. 그가 수습을 하기도 전에 라파엘이 픽 웃으면서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거 시험 사격 좀 해서 가져와.”
그레이드는 라파엘이 내미는 제 몸의 3분의 1만 해 보이는 보따리를 질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그 보따리 안에는 전부 총인 모양이다. 이 총을 전부……? 그레이드가 설마 하는 시선으로 라파엘을 바라보았지만 라파엘은 제 할 말을 다 했기에 다시 침실 안쪽으로 돌아가버렸다.
“비, 비전하. 잠시만요!”
그레이드가 서둘러 불렀지만 시녀가 생긋 웃으며 다가오더니 창을 쾅 닫아버렸다. 그레이드가 재빨리 빼지 않았더라면 그의 손을 찍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저 총이 드디어 사라졌구나. 속이 다 시원하네! 시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라파엘은 시녀들이 가져온 드레스 착용 시중을 받으며 흘끗 창 밖에 시선을 주었다. 결국 그레이드는 보따리를 낑낑거리며 끌고 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 많은 걸 다 언제 시험 사격을 할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그레이드의 위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저 방향은……. 라파엘은 차가운 눈으로 전서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 것 같았다.
드레스를 다 입고 구두를 신었을 때 시녀장이 보냈던 시녀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문 플레이스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러자 발코니에 서 있던 시녀들이 문을 열었다. 마법의 다리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며 라파엘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 다리는 어떻게 떠 있는 거지? 마법으로?”
언제부터 떠 있는지 몰라도 이렇게 무거운 다리를 내내 매개체도 없이 뜨게 할 수 있는 마법사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마법사라면 선 플레이스 근처에 조건부 함정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라파엘이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그 뒤에서 보조를 맞추던 시녀장은 ‘네가 그렇지’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성왕 때부터 있었던 겁니다.”
성왕이란 이그나치오 1세를 말한다.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그게 가능한가?”
“왕의 신력을 증명하는 징표입니다, 비전하. ……이건 어린애도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나는 모르는데.”
아는 게 뭐가 있으시겠어요.
총이나 검 따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지만 상식이라고는 개미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라파엘에게 시녀장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승하와 함께 다리는 조금씩 내려갑니다.”
다리 위에서 듣기에는 조금 불편한 이야기였지만 아무도 놀라거나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라파엘은 모두의 태도에서 이 이야기가 정말 많이 알려진 이야기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장이 말을 이었다.
“다리가 땅에 닿기 전 대관식이 이루어지면 다리는 다시 올라갑니다. 순식간에 올라가 이 높이를 유지하지요.”
“이상한 다리네.”
“신이 왕을 허락했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한 번은 대관식이 끝났는데 여전히 다리가 올라가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라파엘이 문 플레이스의 침실로 한 발을 들여놓으며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는 시선에 시녀장이 눈을 내리깔았다.
“안타깝게도 국법에 의해 대관식은 무효, 왕은 죄인이 되어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왕세자가 아니었나?”
“신이 선택하지 않은 왕은, 왕이 아니지.”
침실 문간에 왕이 나타나서 시녀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라파엘도 허리를 숙였지만, 왕은 곧 라파엘의 허리를 잡아 펴면서 그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마법의 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다리를 돌아보았다. 라파엘은 마법의 다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둥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다리는 불완전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바닥에 추락해 산산조각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왕의 자격을 알리는 징표라는 말을 듣자 저 다리는 부서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라파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예, 전하.”
“귀족의 위에 서는 왕은 당연히 귀족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신력을 보여야 하지. ……대책 없이 낭만적인 선조지?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징표를, 태연히 사랑하는 이의 침실과 연결해두다니 말이야.”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에서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이그나치오 1세는, 신들을 적으로 돌려 신력이 불안정했었다고 하지. 그래서 저런 징표까지 만들 정도로 자신의 가치를 영주들에게 알리는 데 필사적이었던 셈이지.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신력이 사라져 왕좌에서 쫓겨나면, 그렇게 사랑하던 사라 왕후와도 끝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 다리가 내려갈 때마다 왕후도, 왕좌도 전부 다 사라져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매일 되새기고 있었던 걸까?”
라파엘은 건너편에 보이는 왕의 침실을 바라보았다. 왕의 힘이 사라지면 이 다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자, 안타까웠다. 하지만 전부 다 사라진다면 그것을 굳이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일까. 라파엘은 오늘 아침에도 누워 있었던 왕의 침실을 바라보며 의아해졌다. 어차피 사라진다면, 대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그것을 매일 되새길 필요가 있을까?
왕의 입술이 귀에 닿아, 라파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왕을 밀쳐내지는 않은 채 라파엘은 멀리 보이는 왕의 침실에 시선을 주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파엘의 질문에 왕이 라파엘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자신의 침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는 침실은 자신이 매일 생활하는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몹시 넓고, 몹시 높고, 많은 시종들이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 화려한 침실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왕궁의 모든 것이 그러했다.
규모가 너무 크고 천장이 너무 높고 너무 넓어서, 벽에 손이 닿을 일조차 없어서, 어느 공간도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왕은 모르겠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와 발코니 창을 반쯤 가린 커튼이 흔들리며 침대 기둥이 흘낏 보였다. 그 침대조차 자신의 물건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왕은 고개를 움직여 자신이 안고 있는 라파엘의 옆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파엘이 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에 그가 남긴 흔적을 잔뜩 달고서 곤히 잠들어 있었던 것을 떠올리자, 왕은 피식 웃었다.
“글쎄.”
왕이 라파엘을 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어차피 그 남자와는 다르겠지.”
왕이, 아니, 티오안이 중얼거렸다. 왕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선명해서, 티오안 자신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뒤였다. 하지만 불쌍한 누이만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해서, 외면당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서, 신의 무한한 생명을 스스로 꺾어버린 포르타미스를 떠올리며 티오안은 라파엘을 힘껏 안았다. 문득 이 몸에 들어 있는 검은 한숨의 남자를 떠올린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뿐이니까.”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명부터 질문까지 홀로 맘대로 읊어대더니, 갑자기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발언이라니.
“이 다리가 어떻게 되든 전하는 왕이실 겁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왕이 피식 웃었다. 이 다리가 어떻게 되면, 그는 반드시 죽는다. 그것은 그의 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이든 근위병이든 누구든, 아무도 왕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다리가 내려가면 그는 신에게서 버림받아 죽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럴 리가 없지.
왕은 픽 웃었다. 왕의 신력은 전쟁신 쿠치아노로부터 나온다. 그 쿠치아노가 누구던가. 그 쿠치아노가 자신을 외면한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왕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이 다리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진지하게 말했다.
“전하는 태양이니까, 전하는 언제나 왕이실 겁니다.”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웬만한 아첨꾼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왕이 당황해서 바라보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왕의 얼굴에서 자신이 뭔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듯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린 라파엘이, “태양신의 은총을 받아서? 아니……” 하고 입을 달싹이다 결국 다물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라고 해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라파엘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태양신이라.”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니, 정확히 그의 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존재는, 천공신 율레즈에게 참으로 많은 빚이 있었다. 더 안 좋은 것은 상대가 주신 율레즈여서는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분노는 내내 안에서 갈무리하는 수밖에는 없으니, 정말 질이 안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태양신이라!”
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갈무리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해소되는 방법도 있구나. 왕은 라파엘을 안고 드러나 있는 목을 콱 깨물었다. 라파엘이 또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뿐,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섹스할 때가 아니면 그의 비는 그를 밀어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아파도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가만히 있겠지. 왕은 라파엘을 물면서 라파엘의 팔을 잡아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마치 애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도록.
너무 어색한 손짓이라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제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왕이 결국 라파엘의 목에서 이를 떼고 쾌활하게 웃자, 라파엘이 의아해서 물었다. 스스로도 말이 이상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태양이라는 말은 역시 이상한가. 하지만 역시 라파엘은 왕이 태양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환하고 유일하며 눈부신 점이 태양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둔한 혀는 이런 말을 잘 표현할 수 없었고, 왕 또한 웃느라 라파엘의 말을 들어줄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녀들이 흘낏 시종들을 가리켰다. 너희 주인님의 다음 예정은 언제시니. 언제까지 이 꼴을 견뎌야 하니―라는 눈이었다. 시종들이 곧 간다고, 그러니 조금만 견디라는 동병상련의 마음을 보내왔다. 후, 시녀들은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