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잘못된 사다리 (30/47)

제6장 잘못된 사다리

아침 햇살은 눈부시고 청명한 것이다.

아침에 왕의 침실에 들른 스완 라 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 햇살 따위에 평소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데 아주 가끔은 그 햇살이 얼마나 미려한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그가 들어왔을 때 왕은 나체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스완의 기척이 느껴지자 곤히 잠들어 있는 것 같던 라파엘이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싸늘한 눈동자가 스완의 몇 걸음을 좇았다. 라파엘의 그 시선 때문에 스완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나 짐승에 가까워 보이는 그 시선이 조용하면서도 사나웠기 때문이다.

쉿, 다시 자거라.

왕이 라파엘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빗기면서 그를 달랬다. 어젯밤 라파엘을 괴롭혀 저렇게 만들어놓았을 남자는 스완을 공적으로 만들며 은근슬쩍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는 체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침부터 남의 침실에 들어온 무뢰배일 뿐, 신경 쓸 필요 없다. 자, 어서 자거라. 꿈속에서 또 안아주지.

그러자 분명 잠에 취해 있을 라파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꿈속에서 또 안기고 싶진 않은 모양인뎁쇼. 스완은 코끝을 찡그렸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의 그 반응이 불쾌했는지, 아니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잠든 라파엘을 기어코 끌어당기고 말았다.

섹스라도 하려는 건가, 라고 생각했던 스완은 눈을 크게 떴다. 왕은 라파엘과 키스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키스였고, 입술을 겹칠 뿐인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하지만 왕은 그렇게 키스하면서 라파엘을 안아서는, 온몸을 얇은 실크 시트로 둘둘 말아서, 욕실로 데려갔다.

아침 햇살이 그들을 밝게 비춘다.

햇살을 받으면서 왕은 스스럼없이 움직였다. 살인 기계는 폭군의 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고, 폭군은 살인 기계를 연인으로 삼아 즐겁게 그 시중을 들어줄 참인 듯했다. 뭐, 시중이라고 해봐야 시중을 드는 척이나 할 것이 분명했지만 어쨌거나 왕에게서 그런 척이라도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사랑인가.’

스완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저 광경은 그 단어를 붙일 만했다. 그의 하나뿐인 형님은 사랑으로 충만해서 행복한 매일을 보내는 모양이다. 그를 괴롭히던 그의 성벽은 이제 축복이 되었다. 남색가가 아니라면 그는 라파엘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파엘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괴로웠을 것이라고, 왕은 생각하고 있었다. 스완은 ‘남색가가 아니라면 그렇게 괴로울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왕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과거의 모든 괴로움조차 라파엘을 만나기 위한 대가였다면 해볼 만했다고 그는 웃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날이 올까, 안드레아?’

그의 연인은 그만을 상대하고 있지 않았다.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은 여러 남자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교묘하게 조종하며 그 정보를 움직이는 능력은 과연 사교계의 여왕이라며 감탄할 만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연인으로서는 감탄은 고사하고 그저 질투심에 가슴을 칠 뿐이었다.

아침 햇살이라……. 스완은 쓸쓸히 웃었다. 그는 가끔 안드레아와 몸을 섞었지만 몸이 떨어지는 즉시 헤어져야 했다. 안드레아는 스완의 집에선 몸을 씻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그녀의 구겨진 옷을 말끔히 펴고 머리를 대충 손보면, 그녀는 도도히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스완은 믿을 수 없게도 요즘 죽은 쇼어 공작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는 안드레아를 마음껏 안았을 것이고, 그녀를 자신의 집에서 재웠다. 심지어 그는 안드레아의 몸에서 아이를 셋이나―비공식적으로는 넷이나―낳게 했다. 빌어먹을! 스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평생 쇼어 공작을 증오해왔는데 어째서 이런 일로 그를 부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스완.”

이름을 불려 스완은 서둘러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들자 옷시중을 받으며 왕이 흘끗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애가 잘 안 돼?”

“말도 마십시오.”

왕은 놀리려 한 소리였는데, 스완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대답해왔다. 왕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쇼어 공작부인의 입장에선 생명의 은인인데 왜 잘 안 된다는 걸까. 왕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왕은 신경을 끄고, 스완에게 눈짓했다. 남의 연애사는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스완과 쇼어 공작부인의 연애라면 더욱 그러했다.

왕의 입장에서 라파엘은 원수가 아니다. 왕을 괴롭힌 쇼어가의 일원이 아니라, 라파엘은 도리어 쇼어가로 인한 피해자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쇼어 공작부인은 오롯한 가해자였다. 스완이 그녀를 원한다 했으니 더 상관하지 않았지만, 스완과 그녀가 잘되도록 조언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스완이 왕의 눈짓을 받고 입을 열었다.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서대륙에서 도적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었답니다.”

“……그 소식을 왜 쇼어가 아닌 네가 가져오는 거냐?”

제럴드 라 쇼어 외무대신이 아니라 왜 특수군 대장이 가져오느냐는 말에 스완이 시니컬하게 입술을 올렸다.

“다른 쇼어로부터 나온 소식이거든요.”

왕이 “뭐?” 하고 되물었다.

“안드레아, 그러니까 쇼어 공작부인으로부터 나온 정보입니다. 정보원은 알려드릴 수 없다면서 그러더군요. 최근 입국한 노트코인 몇 사람과 이야기해보았는데 한 달 사이 도적의 숫자가 급증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노트코 측은 마음을 굳힌 것 같습니다.”

“외무대신 자리가 제럴드에겐 버거웠나?”

왕이 물었다. 이 이야기를 왕에게 보고할 사람은 스완이 아니라 제럴드였다. 하지만 제럴드는 아마 이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왕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스완이 가볍게 혀를 찼다.

“누구를 조종하거나 정보를 움직이는 데 능숙한 남자는 아니잖습니까. 우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쓸모없기는.

왕이 짜증을 냈다. 스완은 별말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사실 왕은 제럴드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본인이 교활한 수완가라 그런지 우직한 사람들을 선호했다. 라파엘이 그렇고 제럴드가 그랬다. 우직하면서도 유능하면 금상첨화지만, 유능하지 않아도 우직하다면 왕은 싫어하지 않았다. 능력 지상주의자인 왕을 생각해보면 의외의 일면이었다. 제럴드를 꽤나 총애해서, 외무대신이라는 엄청난 자리에 올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왕이 거의 옷을 다 입었을 때야 겨우 라파엘이 욕실에서 나왔다. 가운만 입어 몸을 가린 라파엘이 시녀들을 뒤에 달고 나오다 스완과 눈이 마주쳤다.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해 보이는 스완과는 달리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예의 없기는. 스완이 라파엘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라파엘이 스완과 왕이 보고 있던 지도를 흘끗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외워야지, 그렇지?”

왕이 라파엘을 끌어당기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근이 아니라는 건 이제 아느냐?”

“토끼풀…….”

라파엘이 흘끗 왕의 눈치를 봤고,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은근히 쓸어내리면서 싱글거렸다.

“오늘 밤엔 이미 하나 저금해둔 거다. 기억해두어라.”

라파엘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예, 전하……”라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들어도 저게 뭔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그냥 ‘세계’면 ‘세계’지 어째서 토끼가 먹는 풀 따위의 이름을 붙여야 하는 걸까. 어젯밤에도 그놈의 교습을 받다 다리를 벌리고 잔뜩 울었던 라파엘은 원한의 눈길로 지도를 노려보았다.

“좀 더 자고, 일어나선 열심히 복습해두도록 해.”

왕이 키득거리면서 침실을 나섰다. 스완이 뭘 복습하라는 건지 몰라서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왕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왕의 앞뒤로 긴 꼬리들이 붙은 것을 보면서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모르는 사람이 셋이나 붙어 있었다. 왕의 일행에 모르는 사람이 셋이나 붙다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라파엘은 그 많은 발소리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창을 열었다.

“그레이드.”

라파엘이 부르자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라파엘은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불렀다.

“그레이드.”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연기처럼 홀연히 나타나서 라파엘이 선 창가에 앉아서는 노골적으로 곤란해했다.

“비전하, 천한 소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옵소서. 아시다시피.”

그레이드가 오랜만에 검은 복면을 벗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긴 불평을 늘어놓으려는 걸 라파엘이 단호하게 잘랐다.

“전하의 행렬에 모르는 사람이 셋이나 생겼는데 알고 있었어?”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드는 라파엘을 전담하는 특수군의 조장으로서 라파엘과는 꽤 친한 편이었다. 사실 그레이드 쪽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고, 라파엘은 그레이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지만 어쨌거나 둘은 사이가 나름대로 좋았다. 그레이드는 라파엘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유일한 특수군이었고, 라파엘은 자신의 궁금증을 주로 그레이드에게서 풀었다.

“저는 비전하의 경호를 맡고 있기 때문에…….”

“제이슨은 어디에 있지?”

라파엘의 말에 그레이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디에 있든 간에 제이슨은 절대 선 플레이스에 있진 않을 것이다. 여긴 왕의 침궁이니까. 하지만 라파엘의 ‘제이슨은 어디에 있지’라는 건 제이슨이 있는 곳으로 자신이 행차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행차하면, 총비에게 죽고 못 사는 왕은 라파엘은 가만두겠지만 특수군 대장인 포 대장과 라파엘이 만난 제이슨 리아스 근위대 부대장을 족칠 것이고, 그 둘은 그레이드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려 들 것이다.

“모, 모릅니다만.”

“그래?”

라파엘이 힐끗 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드는 라파엘의 그 시선에서 살기를 느꼈지만 결코 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져서는 안 되었다. 그 뒷감당을 다 누가 하는데, 절대 안 되지. 그레이드가 마음을 굳게 먹었을 무렵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그레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라파엘의 얼굴은 알았으니 포기하겠다는 얼굴이 아니라 알았으니 너는 가봐라, 내 알아서 하겠다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라파엘의 ‘알아서 하겠다’는 건 최종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적으로는 불쌍한 월급쟁이들의 등을 치는 것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레이드는 속지 않고 라파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라파엘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실 겁니까?”

“글쎄.”

“무기한 근신령을 받았다는 건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레이드의 말에 라파엘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곧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어버리는 라파엘을 보며 그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가셔서는 안 됩니다.”

“혹은 눈에 띄면 안 되는 거지.”

잠입의 대가는 쉽게 눈에 띄지 않겠다는 말을 해댔다. 그레이드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비전하.”

그레이드가 결국 각오를 다진 목소리로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리자 그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비전하라 하실지라도 왕명은 절대적입니다. 저희는 절대로 비전하의 예외적인 행보를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돕지 않아도 돼.”

라파엘이 멍청히 대답했다. 그 얼굴은 어디까지나 ‘돕는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 같아 그레이드는 제 가슴을 퍽퍽 치고 싶어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왕명에 반하여 움직이려 하신다면 저희는 기필코 막겠습니다. 그것이 저희에게 내려진 임무입니다.”

라파엘의 시선이 흘낏 움직였다. 그 시선이 살기를 띠는 것을 보며 그레이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는 그 라파엘 에반스였다. 검을 부딪치는 게 영광이긴 한데 살아남을지 장담이 안 된다. 그레이드의 시선이 라파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의 손이 검집을 더듬었다. 승부는 반 초 안에 결정 날 게 분명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라파엘이 홱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치 새침을 떠는 소녀처럼 귀여우면서도 오래도록 라파엘 에반스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있던 그레이드를 힘 빠지게 만드는 제스처였다. 그레이드가 뭐야, 라고 생각하며 검집에서 손을 미끄러뜨렸을 때였다. 순식간에 라파엘이 손을 뻗었다. 그레이드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아니, 그레이드가 눈을 깜빡일 틈도 없이 라파엘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라파엘의 팔이 휙 움직여 그레이드의 검집에서 검을 빼내 그레이드의 목을 겨누었다.

“옛날부터 이야기하려고 한 건데…….”

라파엘이 그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물약을 먹지 않아 남자의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직업 살수는 살기를 노출하며 타깃에게 접근하지 않아.”

그레이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평소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는 것이 바보 같다고 생각해왔다. 살인 기계씩이나 되는 남자가 여장을 하고 눈이나 끔뻑거리거나 왕의 몸시중을 드는 것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눈만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드의 목소리는 목 안쪽에서 흩어질 뿐 도저히 혀 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의하는 게 좋겠어.”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고 그레이드의 검집에 검을 넣어주었다. 검집을 잡고 있던 그레이드의 손이 살짝 베였지만 라파엘도, 그레이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라파엘은 잠시 망설이다 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드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무기한 근신령을 받은 몸이었고, 아무리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왕명을 무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파엘이 왕의 사람이 되기로 한 이상은 더욱 그러했다. 라파엘이 그레이드에게 말했다.

“어쨌든 전하의 허락 없이 나가진 않을게.”

그리고 라파엘이 등을 돌렸다.

그레이드는 그제야 고개를 움직일 수 있었다. 라파엘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절대적인 힘의 차이가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무엇을 당한 건지, 그레이드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살기 따윈 없었다.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눈앞의 라파엘은 평소와 똑같이 나른하고, 조금쯤 멍청하고, 여자 가운을 입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차라도 마시러 갈 것 같은 분위기로 그레이드의 검을 빼앗아 목에 들이대었다.

‘지독히 강하지 않은가.’

그레이드는 질린 얼굴로 라파엘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건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깝지 않은가. 직업 살수는 살기를 노출하며 타깃에게 접근하지 않는다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모든 직업 살수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중 몇몇은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살기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라파엘은 마지막 순간에도 살기를 전혀 노출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것처럼 몹시 태연했다.

‘위험해.’

그레이드는 피가 흐르고 있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문질렀다. 그저 검이 한 번 닿은 것에 불과한데도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평생 여장을 하고 살 거라고 했던 우스운 남자는 사실 아주 위험한 인간이었다. 그는 왕의 곁에 인형처럼 앉아서는, 무표정하게 눈을 깜빡거리다 말고 왕의 목을 단숨에 부러뜨릴 수도 있었다.

그랬다. 라파엘은 세상이 인정하는 무시무시한 살수였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라파엘의 꼴이 우습고, 왕이 하도 애지중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험해.’

그레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왕의 곁에 두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그냥 길을 걷다 말고 왕의 목숨을 거둬 갈 수 있는 사신을 격리하거나 사살하기는커녕 곁에 두다니. 그는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비전하가 원래 그런 분인 줄 몰랐던 거 아니잖아.”

바빠 죽겠는데 왜 특수군인 너까지 와서 이 난리냐고, 제이슨 리아스 근위대 부대장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옛 부하에 대한 그리움은 일절 없는 모양이다.

교대를 성공리에 마치고 퇴근할 시간에 굳이 개인 시간을 축내며 제이슨을 찾아온 그레이드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귀여운 척하지 말라며 제이슨이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부대장…….”

그레이드가 조심스럽게 제이슨을 불렀다.

“하지만이고 그치만이고간에 가라, 너. 나 바빠.”

제이슨이 들은 체도 안 하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레이드가 흘끗 주변을 바라보자 주위에 있던 이들도 그레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작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왔냐는 얼굴이었다.

뭐야, 이거 진지한 이야기란 말이야. 심각한 이야기라고! 그레이드가 울컥해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제이슨이 한숨을 쉬며 그레이드를 눈앞의 의자에 눌러 앉혔다.

“넌 최근에 들어와서 모르겠지만 비전하와 전하 사이에는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어.”

이런저런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자니 혀가 썩는 기분이 들어 제이슨 리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을 어찌 자신의 입으로 말하리오. 제발 이쯤에서 부하가 알아들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는데 그레이드는 참 눈치가 없었다. 무슨 이런저런 일이요? 그렇게 물으며 그레이드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 있었어. 야, 너, 가!”

제이슨이 짜증을 내며 그레이드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방금 앉혔다가 바로 일으키는 건 도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레이드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제이슨은 이미 그레이드를 문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그레이드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제이슨은 막무가내로 그레이드를 밀어냈고, 그러고 나서는 집무실 문을 쾅 닫고 말았다.

“뭐야아…….”

닫힌 문 앞에서 그레이드는 손바닥으로 목을 문질렀다. 아직까지도 왕비가, 아니, 라파엘 에반스가 그의 목에 검을 드리우고 있는 느낌이 든다. 오싹한 한기가 영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살기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교대하면서 같이 근무했던 동기에게 물어보니 동기도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혀. 전혀 느낄 수 없었어. 손을 뻗는 순간에도 나는 설마 네 검을 빼앗으실 줄은 몰랐다고. 검을 빼시는 순간에도 너에게 그걸 겨누실 줄은 몰랐어. 그건 정말……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레이드.’

위험하다니깐.

그레이드가 다시 문을 열려 팔을 내밀었을 때 한숨을 쉬며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레이드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스완 라 포가 서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스완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아, 아뇨.”

그레이드가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스완이 혀를 찼다. 특수군 하나가 근위대장 집무실에서 깽판을 놓고 있다기에 서둘러 왔더니…….

이제 제이슨 리아스는 특수군 소속이 아닌데도 특수군들은 엄청난 귀족인 스완보다 제이슨에게 기대고 싶어했다. 그리고 근위대도 왠지 모르게 제이슨을 편하게 여겨서 제이슨은 요즘 격증된 업무로 얼굴이 급격히 초췌해지고 있었다.

“리아스가 근위대로 옮겼다는 걸 아냐, 모르냐?”

“아,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왜 여기서 난리를 피워?”

그레이드가 “난리 안 피웠는데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스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서대륙 일로 바빠 죽겠는데 부하가 눈치도 없이 말도 안 되는 건으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짜증이 난 탓이었다.

그는 시가를 물며 그레이드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그레이드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신음을 질렀지만 군인답게 곧 제자리로 돌아와 부동자세를 취했다.

“비전하는 전하의 하나뿐인 여성. 그게 다야. 머리에 새겨둬라.”

스완의 말에 그레이드가 멍든 얼굴을 도전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분은 폭탄과 같습니다. 심지어 터질 때조차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요.”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복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왕궁은 어디에나 첩자가 있다. 첩자를 골라낼 수 없으므로 방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첩자가 없는 곳은 왕의 침실 혹은 왕비의 침실 정도지만, 아마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왕비의 침실 쪽이 첩자가 없을 확률이 더 높았다. 왕의 시종들보다 왕비의 시녀들이 더 충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 충성심은 좀 굴절되어 있긴 해도 돈 몇 푼에 움직일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왕은 왕비의 시녀들에게 높은 수준의 급료를 보장하고 있었으며, 왕비의 시녀들은 왕비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정까지 있었다.

‘어쨌거나 여긴 이그나치오궁의 복도고 첩자가 세 걸음에 하나씩 깔려 있는 곳이지.’

그걸 잘 아는 놈이 왜 이렇게 미련히 구는 걸까. 스완은 혀를 찼다. 평민은 평민일 수밖에 없다고, 타고난 귀족인 그는 신경질적인 눈으로 그레이드를 내려다보았다. 귀족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평민은 유능하다. 대부분의 귀족보다 대부분의 평민이 유능하고 총명하며 유연하다. 하지만 가끔 그들은 인내심이 부족하다. 시간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아닌데도 그들은 초조해하고 반드시 대답을 듣고자 한다. 그러면 안 되는 순간에도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느긋한 여유가 전혀 없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스완의 말에 그레이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곧 그레이드는 이게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스완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한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만, 너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어.”

스완은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말했다. 주변에 특별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여기는 근위대장 집무실 앞. 가장 많은 근위병과 특수군이 오가는 곳이다. 그만큼 첩자도 껄끄러워하기에 그 가능성을 믿고 스완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그분은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스완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너는 아직 바쳐본 적도 없는 목숨이지. 목숨의 무게도 모르는 자가 함부로 떠들어 제 주인의 안전에 해가 되고 있지 않나.”

그러자 그레이드가 상처 입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스완은 엄격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레이드는 아직 어렸다. 올해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그레이드는 검술과 궁술에 발군의 재능이 엿보였다. 본인도 겨우 길드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막 자유 용병이 된 상황이었고, 그 첫 직업으로 왕궁특수군이 되었으니 나름대로 출세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드는 어린애답게 돈보다는 ‘라파엘 에반스’라는 이름에 더 반응했다. 나이도, 성별도, 거처도 알려져 있지 않은 살인 기계의 최측근이 된다는 말에 몹시 흥분했던 것이다.

‘라파엘 에반스요? 그, 라파엘 에반스요? 붙어보고 싶어요! 붙어서 제가 지면, 그럼 제가 평생 모실게요!’

참 어렸다. 평생 소리가 후딱 나오는 걸 보니 어리기 그지없었다. 어쨌거나 이 살인 기계의 팬이 왕궁특수군이 되어 처음 본 것은 샤랄라한 드레스를 입고 왕에게 마구 범해지는 라파엘이었다.

그레이드가 스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쓸쓸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스완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그레이드를 싫어하지 않았다. 도리어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녀석은 솔직하고 굴절되지 않았으며 몹시 순수했다. 귀족이라면 어림도 없지.

스완은 그레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는 가끔 그 자신이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귀족 전체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있다는 기분을 숨기기 어려웠다. 하지만 딱히 그만이 아니었다. 귀족이란 다 그러기 마련이었다. 귀족이라는 것에 지독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로는 왕족을 부러워하고 아래로는 평민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족속들.

‘인간으로 치자면 아가씨쯤 되는 족속들이지. 새침한 열여섯.’

새침한 열여섯 아가씨에게 죽음으로 사죄해야 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스완은 그레이드의 뒷모습에서 고개를 돌렸다. 평민은 좋겠다. 마음 편안히 괴로워할 수나 있고. 혀를 쯧쯧 차는 스완의 머릿속에 오늘 밤의 선약이 떠올랐다. 노트코의 움직임을 알려주신 모 마님께서 지정하신 선약이었다. 평소 그 마님께서 선약을 지정해주신다면 발가락이라도 핥을 자세가 되어 있는 스완이었지만―아니, 사실 만나면 자동으로 그 발을 혀로 애무하곤 했었지만―오늘 밤만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도망치면 평생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겠지.

‘난 새침한 열여섯인데. 난 연약한 열여섯인데.’

흑, 전 열여섯이란 말이에요. 다정하게 대해주세요오. 옛 노래를 제 맘대로 바꿔서, 그것도 천인공노하게 부르고 있는 스완의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스완이 고개를 들자 제이슨 리아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초췌해진 제이슨이 질린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 와중에 망상질입니까.”

“그럴 리가.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제이슨 리아스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당연히 보입니다.”

“아니야.”

스완이 오만불손한 얼굴로 대답했다. 귀족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런 얼굴에 속는 건 애송이인 그레이드였지 스완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제이슨 리아스가 아니었다. 제이슨이 피곤한 얼굴을 들어 어디 한 번 이야기해보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데요?”

제이슨이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제이슨의 뒤쪽으로 꽤 많은 숫자의 근위병들이 보였다. 스완이 턱을 치켜들었다.

“세계 평화.”

제이슨이 말을 말자는 얼굴로 문가에서 비켜주었다. 스완은 늘 왕에 대해서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둥,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둥 하지만 제이슨은 종종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걸 느끼고는 했다. 그리고 스완이 왕에 대해 느끼는 감정 그대로, 말로 이길 수가 없으니 입을 다물자는 심정으로 대화를 끊고는 했다. 지금처럼.

“왜? 세계 평화 맞잖아.”

미리 근위대장 집무실에 와 있었던 제럴드가 코웃음을 쳤다.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그 얼굴을 보고도 스완은 태연했다.

“아닙니까, 쇼어 대신님? 서대륙이 잘못하면 세계에 평화 따윈 없지만, 서대륙이 잘하면 당연히 지금의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는 우리 식의 평화군요.”

제럴드의 말에 스완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남의 식의 평화 따위 개나 주라죠.”

외무부와 특수군, 그리고 근위대의 1차 비밀회의는 나름대로 발랄한 분위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근위대장 집무실에서 비밀회의가 시작되고 있을 때 라파엘은 멀쩡한 얼굴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물론 라파엘이 복도로 나왔을 때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수군과 근위병이 ‘그레이드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신 거냐’며 항의까지 하고 몸 바쳐 막기도 했다. 하지만 화장도 지우고 옷도 갈아입어 평범하고 단정한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라파엘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안네마리지만, 라파엘이기도 하잖아.”

살인 기계로서의 과거가 뭐 그리 훌륭하고 자랑스럽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냐며 특수군과 근위병이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 라파엘이 물었다.

“전하께선 왕비에게 무기한 근신령을 내렸지만 근위대장에겐 내리지 않으셨어.”

“그……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그건 진짜 직위가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자니 대놓고 ‘여장한 너 외에는 남자로서의 너는 어떤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병사들을 가볍게 밀면서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라파엘은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그에게 이 왕궁은 미로처럼 복잡한 곳이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입장이 걸려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실제로 몸에 걸린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추상적인 ‘입장’이라는 것들 때문에 그물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라파엘로서는 더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아무도 곤란해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 나도 궁정 사람 다 되어가는 모양이야.’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라파엘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쳐갔다. 그 뒤에서 뭐 씹은 표정으로 라파엘을 보내는 특수군과 근위병의 얼굴 따윈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라파엘은 가볍게 걸었다. 걸음걸이 자체는 평범했지만 근위병들이 그를 흘끗거리는 것은 그 평범한 걸음걸이가 사실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의 걸음걸이에선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근위병들이 흘끗 서로에게 시선을 보냈다. 상당한 고수인데 누구지? 낯이 묘하게 익으면서도 한없이 낯선 인물이었다. 저런 고수를 봤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지? 근위병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라파엘은 느긋해 보이지만 사실은 빠른 속도로 선 플레이스를 벗어났다.

이그나치오궁으로 향하던 라파엘은 궁 입구에서 근위병의 떫은 표정을 마주했다. 어디서 봤더라. 라파엘이 그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근위병이 당황한 얼굴로 “대장님” 하고 그를 불렀다. 대장님, 이라는 목소리에 모든 근위병이 본분을 잊고 휙 그를 향했다. 근위대장 라파엘 라 쇼어. 나타나지 않거나 얼굴을 가리기로 유명한 쇼어가의 사생아이자 행운아가 저 남자구나.

……근데 왜 난 근위대인데 우리 대장을 처음 보는 거지?

“응.”

라파엘이 응, 이라고 대답하는 걸 보며 근위병은 그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놈들은 눈앞의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그래, 꿈에도 모르겠지. 이 대장님이 사실은 왕의 총비라는 걸. 어젯밤에도 그의 동기들은 ‘연약한 비전하께서 빨리 힘을 내셔야 후사가 있을 텐데’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던가.

웃기고 있다고, 그 비전하는 너희 같은 놈들의 목을 단숨에 꺾어버릴 위인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출세하고 싶었고, 왕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건 권력의 핵심부로 가는 가장 빠른 줄이었다.

이 비밀이 노출되면 위험하기도 했지만, 출셋길이 막히는 걸 의미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는 결코 그런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문 채 라파엘에게 아는 체만 하고 있었다.

벌써 동기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선망과 질시의 시선을 받으며 근위병은 어깨가 으쓱거리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내…… 집무실에 지금 누가 있지? 리아스인가?”

라파엘이 약간 어색해하면서 물었다. 지금 정문 조에서 이 근위병은 결코 높은 위치가 아니었는데도 라파엘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조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근위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바짝 붙어 섰다.

“예, 대장님. 현재 예의 회의 중입니다.”

예의, 라는 말에서 라파엘은 눈치를 채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그렇게 나오자 근위병은 신이 나서 더욱 말을 만들어냈다.

“좀 늦으셨군요.”

“아아.”

라파엘은 입을 다물었다. 근위병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라파엘은 그를 지나치려 했다. 무슨 회의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된 이상은 집무실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바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그가 걸어가야 하는 복도 저편에서 한 여자의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미인이었다.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낯빛을 굳힌 채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고, 그녀를 시중드는 하녀들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소리쳐 불렀지만, 그녀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라파엘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누군지는 기억이 났다. 왕에게 춤을 청했던 여자였다.

‘유니스 라 버시슬이잖아.’

근위병은 낭패한 얼굴을 숙였다. 이렇게 만나서는 안 되는 둘이 이렇게 만나다니! 곤란한데.

근위병이 차마 고개도 못 들고 있을 때 라파엘은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자는 참 예뻤다. 왕의 곁에 서 있으면 어울릴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왕의 곁에 서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

라파엘은 손을 들어 가슴을 눌렀다. 왕과 그녀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쓰리고 아파서 가슴을 누르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가슴께를 누르자 근위병들은 괜찮다 물어야 하는 건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부동자세를 풀지 않았다. 풀 수 없었다.

다들 무표정했지만 머릿속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지나치려던 유니스 라 버시슬이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근위병은 라파엘의 정체가 들킬까 봐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저기.”

유니스가 조심스럽게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유니스는 습관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으면서 머릿속을 열심히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남자는 찾기 어려웠다. 키가 작고 단정한 얼굴에 무표정하면서도 약간은 요염해 보이는 인상.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이런 남자를 보았다면 그녀가 잊었을 리 없는데.

마지막의 ‘요염해 보이는’은 그저 화장이 덜 지워진 탓에 느낀 것이지만 그런 사정까지 유니스가 알 수는 없었다.

“어디서 뵈었었던가요?”

유니스의 질문에 라파엘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부정하자 유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본 얼굴인데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고 하니 캐묻기도 뭐해서 유니스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녀는 그래야 했다. 그다음 질문 따윈 결코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그나치오궁을 벗어나기 직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예의상, 라파엘에게 한 마디 더 건넸다.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상대가 가슴을 누르고 있어서 건넨 한마디였고, 당연히 그쪽에서도 ‘괜찮습니다’라고 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유니스는 전혀 다른 말을 듣고야 말았다. 라파엘은 유니스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네,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근위병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뭔가 분위기가 멜랑콜리해지고 있었다.

“가슴…… 이요?”

의아하게 묻는 유니스 라 버시슬의 얼굴을 보며 근위병은 입을 열려 했다. 무슨 말이든 좋았다. 이 분위기를 무조건 깨야 했다. 그러나 라파엘이 좀 더 빨랐다. 라파엘은 진지한 얼굴로, 여전히 유니스의 눈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면서, 멍하니 대답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파서요.”

근위병은 입을 연 채 멍하니 라파엘과 유니스를 바라보았다. 대형 사고. 근위병의 머릿속에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새하얗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근위병들은 눈을 깜빡였다. 아니, 얼굴도 처음 보는 근위대장이 이그나치오궁 정문에서 왕후 후보가 될지도 모르는 아가씨한테 농을 걸고 있다. 어이가 없다. 자신의 병사에게 인사 한 번 안 한 주제에 아가씨에게 치근덕거릴 정신은 있단 말인가. 더 황당한 건 상대 아가씨의 반응이었다.

“……어머.”

유니스 라 버시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남자는 이상했다. 이런 속 보이는 유혹 따위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닌데, 그저 싱긋 웃으면서 넘어가면 그만인데, 남자는 정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가슴을 더 짓누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한 줄기 의아함이 어려 있어 아무리 봐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가슴이…… 아프다고요?”

“네.”

유니스는 당황했다. 그녀는 왕을 사랑했고, 왕의 여자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집안의 지지를 받으며 왕후가 될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랬는데.

“무, 무례하군요.”

유니스가 빨개진 얼굴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토라진 듯한 그 움직임에 라파엘이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로맨스 소설과도 같았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근위병은 고개를 푹 숙였다. 동기들보다 좀 앞서려다가 진짜 앞서가게 생겼다. 왕이 알면 그는 죽을지도 몰랐다. 출세고 나발이고 살아야 다 가능한 일이지.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저 모르는 체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라파엘이 이그나치오궁의 복도를 걸어가고 유니스 라 버시슬이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동안, 그 중간에 서서 근위병은 ‘출세 한 번 하려다가 골로 갈 뻔했네’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

그러나 이 사정을 모르는 조장은 근위병을 보고 이를 갈았다.

“너, 나도 모르는 대장을 다 알고―능력 좋다?”

차라리 뭔가 수확이라도 있었더라면 조장의 괴롭힘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아무런 소득 없이 이런 견제만 받는다고 생각하자 근위병은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근위병이 그러거나 말거나 라파엘은 근위대장 집무실로 발을 옮기면서 유니스 라 버시슬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왕이 왕후를 들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그리고 유니스 라 버시슬은 이그나치오궁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에서 나오는 길이었을까. 혹시 왕을 만났던 것일까.

라파엘은 복도에서 멈춰 섰다.

“아.”

자꾸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 왕을 생각할 때처럼 감미로운 아픔이 아니라 그냥 아팠다. 불쾌하고 짜증 나고……. 더워서 그런가. 라파엘은 애꿎은 더위 탓을 하며 혀를 차곤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겨우 근위대장 집무실에 도착한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 자신의 집무실이니까 말없이 문을 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창 회의 중이던 사람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이슨 리아스가 “비――!”라고 소리치는 순간 스완이 그의 입을 꽉 막아버렸다. 제럴드는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남장에 당황했고, 그다음으로는 동생이 남장을 한 채 훤한 대낮에 활보하고 다녔다는 사실에 경악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몇 특수군은 그대로 굳은 채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문 닫아.”

스완이 웃으면서 말하자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근위병이 해맑은 태도로 문을 닫았다. 문이 쾅 닫히자마자 제이슨이 당장에 달려들려는 걸 스완이 다시 힘주어 막으며 싱긋 웃었다.

“이야, 근위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아.”

라파엘이 대답했다. 아아는 무슨 아아야?! 모르는 건 다 ‘아아’냐!? 제이슨은 입을 막힌 채 항의했다. 아무리 궁중 일을 모른다지만 이렇게 멀쩡히 밖을 나돌아 다니다니, 이럴 수가!

“야, 더러워.”

스완이 제이슨을 놔주며 손을 제이슨의 등짝에 닦았다. 왜 사내새끼가 침을 묻히고 지랄이야. 재수 없게. 스완이 중얼거려서 제이슨은 잠시 옛 상관을 째려보곤 다시 라파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장님!”

“응.”

“여,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내 집무실이니까 왔지.”

라파엘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제이슨 리아스가 욱 하는 얼굴로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그, 그게 아니잖아! 하지만 제이슨 리아스는 아무래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여긴 이그나치오궁이었고, 라파엘은 근위대장 자격으로 그에게 온 참이었다. 근위대 전체가 그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차마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패닉에 빠진 제이슨 리아스와는 달리 스완 라 포가 느긋하게 물었다. 라파엘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 집무실에 내가 오는데 왜 전하께서 아셔야 하지?”

라파엘의 말에 스완이 웃는 낯으로 “전하의 연인이시니까요. 저희는 전하의 질투에 괜한 희생양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쓸데없는 일로 죽어서야 쓰겠습니까. 대장님도 사내라면 잘 아시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라고 독설을 내뱉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전하가 질투를 해서 양이 생긴다고?”

몹시 진지한 얼굴에 스완은 독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스완이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내젓자 라파엘이 제이슨 리아스 근위대 부대장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전하의 일행 중 새 사람이 셋 있던데.”

라파엘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제이슨이 얼굴을 팍 구겼다.

“고작 그런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제이슨이 고작 그런 일이라고 말하든 말든 라파엘은 전혀 기분 상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이슨의 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라파엘을 보며 제이슨은 미친 듯이 자신의 머리를 긁고 헤집었다. 정말이지 이 왕비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 왕비가 차라리 틀린 말을 했더라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 텐데! 불행히도 왕비의 말이 옳긴 다 옳았다. 하지만 그게 옳긴 한데 현실적으로…… 아우, 씨.

“아, 네. 새 사람이 들었습니다.”

“세 명이고?”

라파엘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예! 셋이에요, 됐습니까? 아, 진짜…… 아, 잠깐. 셋이라고요?”

제이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셋? 몇 사람이 바뀌긴 했지만 한 번에 새로운 사람을 셋이나 집어넣진 않는데. 제이슨의 얼굴에 약간의 의아함이 떠오른 순간 라파엘이 등을 돌려 튀어나갔다.

“아냐?!”

스완이 제이슨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쳐 물었다.

“셋을 한꺼번에 넣지는 않았…….”

그리고 스완과 제럴드가 라파엘의 뒤를 쫓았다.

라파엘은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복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보초를 서는 근위병들이 미친 듯이 달리는 세 남자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셋 중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위로!”

빠르지만 길도 모르고 왕의 일정도 잘 모르는 라파엘을 향해 스완이 고함을 쳤다. 라파엘이 난간을 잡고 팔 힘으로 휙 뛰어올랐다.

“왼쪽, 회의실입니다!”

스완의 비명에 라파엘이 단숨에 달리기 시작했다. 회의실 앞에서 보초를 서던 근위병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엉겁결에 총을 빼들었다. 누군지 알 수 없으니 총을 들어야 하는데 달려오는 게 이 낯선 남자만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뒤에서 제럴드가 소리쳤다.

“열어!”

오랫동안 근위대장이었던 제럴드의 명령에 근위병들이 즉각 반응했다.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마자 라파엘이 뛰어들었다. 보고를 받고 있던 왕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데 라파엘이 왕을 잡아채 자신의 뒤로 밀면서, 왕의 뒤에 기립해 있던 특수군 중 새로운 인물들을 노려보았다. 라파엘이 순식간에 검을 꺼내자 회의실을 감싸고 있던 근위병들이 전부 총을 꺼내들었다. 왕이 한 팔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면서 라파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일이냐?”

라파엘은 무슨 일인지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는 정말이지 알 수 없어서 왕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당황하고 있을 왕에게, 그럼에도 그를 믿고 근위병을 제지해준 왕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여전히 혀는 굳어 있다. 라파엘이 혀를 깨물었을 때, 왕은 문가에 서 있는 제럴드와 스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의 서슬 퍼런 눈빛에 설명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둘 역시 입을 다물었다. 셋 중 누가 첩자 혹은 암살자인지 알 수 없으니 입을 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약간 늦게 도착한 제이슨 리아스가 문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가장 왼쪽과 두 번째입니다!”

라파엘의 검이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던 인물의 어깨에 박혔다. 그 인물이 쓰러지는 사이 가장 왼쪽에 있던 인물은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라파엘이 왕을 스쳐서 놈을 잡으려 들었다. 라파엘의 몸이 스치는 순간, 왕은 재빨리 그 팔을 붙잡았다. 부지불식간에 잡힌 라파엘이 크게 휘청거렸다.

“저, 전하?”

그사이 제이슨이 “잡아!”라고 소리쳤고, 근위병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왕을 지키는 최측근 근위병과 특수군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왕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라도 왕의 위험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도록 훈련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지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왕의 일행에는 시종, 특수군, 근위병, 비서관 등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낯선 인물이 한둘쯤 끼더라도 서로 다른 쪽 소속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관문을 넘어야 왕의 일행에 붙을 수 있다. 그러니 왕의 일행에 붙어 있는 이상에는 보증받은 인물이라고 너무나 쉽게 생각해버린 것에 스스로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전하.”

라파엘이 당황한 얼굴로 왕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려 했지만 왕은 놓아주지 않았다. 라파엘이 다시 한 번 “전하”라고 다급히 불렀지만 왕은 도리어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 라파엘은 몸에서 힘을 빼고 말았다.

“가지 마.”

왕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라파엘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는 라파엘이 지금 암살자일지 첩자일지 모를 놈을 뒤쫓아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왕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라파엘은 강하다. 그러나 왕은 라파엘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라파엘이 아무리 강해도 총을 맞으면 힘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다. 라파엘이 살인 기계니 뭐니 불려도 그것은 평민을 상대로 했을 때이지, 귀족을 상대로 했을 때가 아니다.

“내 곁에 있어.”

라파엘의 검은 눈이 흘끗 움직였다. 곧 라파엘은 왕의 곁에 섰고, 왕은 그대로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레이드는 집에 가지 않은 채였다. 스완에게서 제대로 욕을 먹어서 속도 상한 탓에 이그나치오궁 근처의 숲―왕비님이 염산 함정을 두자는 의견을 내놓았던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들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도대체! 욱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스완 라 포 대장을 붙잡아서 한판 붙고 싶지만 그건 마음뿐이고, 현실은 그저 몸을 잔뜩 쭈그리고 소심하게 땅바닥에 ‘바보 대장’이나 쓰고 있는 어린애가 있을 뿐이었다.

“난 나이도 어린데 비전하에, 전하에, 대장에……. 어린 나이에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 대머리가 된다구!”

그레이드가 대장이라는 글씨에 죽죽 줄을 긋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저 멍청이는.’

그레이드는 실눈으로 달려오는 놈을 노려보고 다시 땅바닥에 집중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잡아! 잡아!”라고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레이드는 벌떡 일어났다.

달려오는 놈은 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여하간 소속을 모르겠고, 그 뒤는 분명히 근위대였다. 궁내에서 근위대가 잡으라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그레이드는 목을 좌우로 꺾으면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건 절대로 화풀이가 아니야, 절대로. 암, 도리어 나는 그저 초과 근무를 하고 있을 뿐!’

그레이드가 이를 바득 가는 순간 저쪽에서 달려오는 놈은 급한지 검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비켜!” 비명 소리가 들려서 그레이드를 더더욱 기쁘게 했다. 그래, 때려 죽여도 괜찮을 놈인 게 분명해 보였다.

놈은 개에게 쫓겨 범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죽을힘을 다해 이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레이드는 가뿐한 마음으로 검을 빼들어 놈을 겨누었다. 놈이 가까워져올수록 기분이 고양된다. 괴물같이 무시무시한 왕비도, 남의 속도 모르고 그만을 탓하는 대장도 머릿속에서 하얗게 잊혔다.

“비, 비켜!”

암살자는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밖에는 그의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조금만 더 이성적이라면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차라리 자결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거래를 시도해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윗사람을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원래 궁중이라는 곳이 배신은 필수이고 음모는 당연한 곳이 아니던가. 배신과 음모가 없는 그곳은 궁중이 아니라 산골짜기이다.

그런데 암살자가 갑자기 이렇게 자폭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패닉 때문이었다. 동지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그는 본능에 의해 무조건 도망치게 된 것이다.

“좋아, 비켜주지.”

그레이드가 선심 쓰듯이 말하며 모로 비켜섰다. 암살자가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휘청거렸다. 그레이드가 내민 발에 걸려 넘어지기 직전 몸을 세운 암살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면 어쩔래.”

네까짓 게. 네가 잘나가봐야 암살자, 아니면 첩자, 그것도 못 되면 그냥 멍청이 주제에 누굴 째려봐.

“죽기 전에 비켜!”

“넌 내가 뭘로 보이냐? ……아참, 내가 지금 복장이 이렇지.”

그레이드는 싱거운 자문자답을 했다. 평소의 특수군 복장이었다면 상대도 저렇게 나오지 않았을 텐데. 특수군은 퇴궁할 때 궁인의 옷을 입고 퇴궁한다. 그래서 아마 상대도 검을 휘두를 엄두가 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길드에서 키워진 청부업자 출신에 그 능력을 인정받아 특수군이 된 그레이드는 상대가 자신의 기나 능력보다 복장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같이 놀아봐야 재미도 없겠는데.’

하지만 뭐, 공짜로 들어올 초과 근무 수당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 이 개미처럼 약한 모가지 하나 끊어 가면 될 일인데.

그레이드가 쩝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암살자와 마주 섰다. 검이 몇 차례 부딪치는 사이 드디어 도착한 근위병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복장의 궁인이 암살자를 막고 있다. 둘 사이의 검에서 불꽃이 튀긴 튀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근위병 한 명이 묻자, 다른 근위병이 물었다.

“그러게……?”

심지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양상은 뚜렷해졌다. 그레이드는 싱글거리고 있는데 암살자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실력으로도 밀리지만 근위병들이 주변에 모여 구경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으니 더욱 압박감이 거세질 수밖에. 이 결투를 오래 끌어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아야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도망칠 기회는 멀어진다.

“왜 이래, 시시하게.”

그레이드가 피식거렸다.

“자꾸 이러면 끝장을 내는 수밖에 없는데, 그럼 너무 변변찮잖아? 괜찮은 모습을 보여보라고.”

무슨 벌레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레이드가 낮게 덧붙인 말에 암살자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분했다. 너무나 원통해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끝이라는 걸 아는데도 눈앞의 이 애송이의 미끈한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하나 내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분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닿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애송이는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고, 그는 바람을 베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할 수가 있지.

이건 말도 안 돼. 눈앞의 놈은 고작 궁인 아닌가. 시종도 되지 못하는, 허드렛일을 하는 쓸모없는 인간.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강하단 말인가.

암살자는 최후의 순간을 바로 뒤에 둔 채 발악을 하듯 검을 휘둘러댔다. 어느새 그의 검은 둔탁해져 있었다.

“이 솜씨로 암살자인지 첩자인지를 하려고 했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그레이드가 쯧쯧 혀를 찼다. 실력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 채 아귀처럼 검을 휘두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추잡해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아아, 이래서 약한 것들은 안 돼. 몇 시간 전 왕비가 무시무시하게 강하다는 이유로 바짝 졸았던 자신이 떠올랐지만, 그는 곧 그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뭐? 상대는 전설급이잖아.

“그레이드!”

저 멀리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러서 그레이드가 어깨를 움찔 떨며 뒤를 돌아보자 제이슨 리아스가 산적처럼 험상궂은 팔을 흔들고 있었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제이슨 리아스는 상냥하고 신의 있는 남자지만, 그도 결국 특수군 출신이다. 그가 ‘그만하라’는 건 쓸데없는 짓을 그만하라는 것이지…….

“아아악!”

적을 아무 데도 다치지 않게 고이 잡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레이드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날카로움을 가지고 움직였다. 비명은 짧았다. 그리고 뭔가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것을 본 건 순전히 거기 모인 모두가 무예를 익힌 자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떨어지는 것보다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피가 먼저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왼쪽 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자에게 주는 경고였다.

피가 뿜어 나오는 것보다 먼저 그레이드의 몸이 빙그르 돌았다. 그레이드의 검이 허공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조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박력을 가진 검이 암살자의 눈을 단숨에 찔렀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자에게 주는 경고였다.

비명이 계속 울려 퍼졌다.

그레이드가 흘끗 제이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이슨이 바라는 것은 전시 효과일 것이다. 실제로 제이슨은 그를 막지 않았으니까. 더 필요한 건가 싶어 시선을 주자 제이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얼굴이라 그레이드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낯선 자에게서 물러났다.

비명이 끊임없이 퍼져나간다. 이 비명은 암살자를 고용한 자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벌써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근위병들이 암살자에게 달려가 그의 입을 벌리고 천을 처넣었다. 자해하지 못하도록 몸을 묶는 동안 암살자는 고통스러운 비명만을 지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진 않았다. 다들 익숙한 얼굴이었다.

“주둥이는 안 찢어도 되나요?”

그레이드가 제이슨의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제이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정보를 흘리진 못했을 테니까. 잘못하지 않은 걸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좋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하긴, 우리는 좋은 편이니까.”

그레이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위병들이 피 웅덩이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다 기절한 남자의 사지를 잡고 들어 올려 감옥으로 멀어지는 걸 보며 그레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어떻게 잡아내신 거예요?”

누구의 솜씨세요, 라고 그레이드가 히죽거리자 제이슨이 싸늘하게 대답해주었다.

“근위대장님이 달려오셔서 잡아내셨지.”

“오오, 대장……, 예? 누구라고요?”

그레이드가 고개를 돌려 바라봐도 제이슨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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