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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근신 명령 (27/47)

제3장 근신 명령

파티가 끝나기 전에 라파엘은 왕과 함께 먼저 이그나치오궁을 빠져나왔다. 이미 참석객의 반은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몇은 자신이 궁 안에 보유하고 있는 방에 돌아갔을 것이고, 몇은 가든 하우스에서 즐기고 있을 것이며, 몇은 아예 저택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대체로는 끈적끈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왕이 그 사랑해 마지않는―심지어 오늘은 유독 그 애정 행각이 도드라졌던―총비를 거느리고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왕이 선 플레이스에 도착하자마자 왕비를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귀족들의 예상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

라파엘이 숨을 삼켰다. 선 플레이스. 왕의 침궁은 침실이 아니다. 그곳은 어디까지나 궁이며, 엄청난 규모의 궁전이다. 왕의 공사가 전부 이루어지는 곳인 만큼 경비는 가장 엄중하고,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몇 백 명의 궁인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만큼 그곳은 여러 사람의 눈이 오가는 공개적인 곳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곳은 왕의 침실이 아니다. 그런데 왕은 선 플레이스에 들어서자마자 라파엘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에 입술을 비벼댔다.

“내가, 읏,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않았던가.”

왕이 말하는 중간중간 신음했다. 그 신음 소리가 지독하게 관능적이라 라파엘은 왕의 팔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신음에 가려 왕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는 일단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왕의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가 유혹적이다.

라파엘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왕을 밀쳐낼 수도, 거부할 힘도 없는 라파엘에겐 그나마 최대의 반항이었다. 하지만 왕은 그런 반항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라파엘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핥아댔다. 옆에 사람이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은 채.

“전…… 하.”

라파엘이 왕을 불렀다. 여긴 아직 사람이 많았고, 자신은 들켜서는 안 되는 정체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왕일 텐데, 왕은 라파엘의 몸에 자신의 것을 비비고 있었다. 그랬다. 왕의 것은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바짝 일어서 있었다. 왕은 흥분한 상태였다. 라파엘의 목소리가 왕의 귀에 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놈이 주…… 는, 술 따위를……, 아…….”

왕이 말을 하다 말고 길게 신음했다. 곤란해. 왕비의 시녀들이 왕의 시종들과 함께 재빨리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방을 선택해서 왕을 모시기 충분하도록 최소한의 상태로 만들어놓고 신호를 보내자, 남아 있던 시종과 시녀들이 왕과 왕비를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시종장이 “전하, 가까운 방이 준비되었습니다”라고 알리자 왕이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래……, 너의 냄새가 나는군…….”

냄새? 라파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냄새라고 하면 좋은 냄새가 연상되진 않았다. 도리어 라파엘에게 떠오른 것은 피 냄새였다.

‘너는 훌륭한 살수가 될 거다.’

그에게 양검을 허락한 교관이 했던 말이었다.

‘네가 걷는 길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겠지…….’

라파엘은 왕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피비린내가 어떤 냄새인지 라파엘은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무심히 목표를 베고 또 베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냄새가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냄새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왕에게 남이 싫어하는 냄새를 맡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사를 위한 방 앞에서 라파엘이 도망치려 들었다. 왕은 급히 라파엘을 붙잡았다. 라파엘이 진심으로 힘을 주기 전에 왕은 라파엘의 팔을 잡아 자신의 등 뒤로 당기면서 키스했다. 라파엘은 지독히 강했지만, 몹시 순진했다. 왕이 혀를 섞으며 음란한 키스를 퍼붓자 라파엘의 무릎이 그대로 꺾였다. 수백 번이나 받은 키스에 다시 점령당한 채, 라파엘은 조금씩 왕에게 끌려갔다. 문을 넘어서면서부터 왕은 거침없이 라파엘의 옷을 벗겼다.

“좋은 냄새다…….”

왕이 몇 번이나 라파엘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면서 중얼거렸다. 라파엘은 그때마다 왕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왕은 단단히 라파엘을 잡고 있었다.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아서, 그 품에서 빠져나가려면 왕의 팔을 꺾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무엄하고……, 또 라파엘은 차마 왕을 아프게 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게 아주 작은 아픔이라 할지라도.

왕의 손이 닿자마자 풀려서 발치로 떨어지는 옷들에 힐끗 시선을 준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왕은 열정적으로 그를 더듬고 있었다. 냄새.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여러 가지 냄새가 났다. 술 냄새부터 담배, 그리고 향수 냄새.

“냄새라니.”

라파엘이 황망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왕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왕의 눈 아래 라파엘의 새하얀 어깨가 있었다. 자신이 심술궂게 남긴 자국들이 찍힌 그 어깨가 사랑스러워 왕이 본격적으로 그를 끌어안으려던 순간이었다.

“응?”

“어떤 냄새입니까?”

왕이 키득거리면서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입술을 깨물자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가 황급히 감았다.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것이라고 알려준 뒤부터 라파엘은 저렇게 눈을 감곤 했다. 지금도 라파엘은 눈을 감고 있었다.

왕은 몇 번이나 키스를 계속했다. 키스라는 것은 그저 타액을 섞는, 그런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와 키스를 하면 이토록이나 다를까. 왕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타액은 달콤하고, 키스는 체온을 올린다. 그렇다. 체온이 올라가고 있다. 몸이 열에 들뜬다. 삽입을 하고 절정에 올라야만 가질 감각이 이토록 손쉽게, 그리고 이토록 달콤하게 다가온다.

라파엘이 입술을 피하려고 했지만 왕은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왕은 피하려는 라파엘의 입술을 따라가 머금고 혀를 집어넣어 그 내부를 샅샅이 핥고 타액을 훔쳐 먹으면서 라파엘을 유혹했다.

천진한 몸을 가진 라파엘은 쉽게도 무너져서 왕의 어깨를 잡은 채 사지를 후들거렸다. 뭐라고 입 밖에 내고 싶어하는 라파엘의 말을 타액과 같이 먹어버리면서 왕은 라파엘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자신이 아는 음식 외에는 잘 먹지 않을 정도로 식사에 썩 관심이 없는 라파엘은 여전히 말라서, 등뼈가 손가락 끝에 걸릴 지경이었다. 살이 좀 찌면 좋을 텐데.

‘살수에게 모르는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그냥 독을 먹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의 습관을 다 고치라고 할 순 없어요.’

스완이 말했었다.

‘저는 도리어 전하께서 주시는 음식을 잠자코 먹는 비전하 쪽이 놀랍습니다. 독이 들었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잖습니까?’

그래서 왕은 라파엘에게 음식을 먹으라든가 살을 찌우라고 진지하게 명령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가뜩이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성(性), 자신의 가문, 직업,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있다. 왕은 라파엘에게서 더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로도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강탈하지 않았던가.

“……읏, 어떤…… 아!”

라파엘이 고개를 들고 몸을 떨었다. 왕의 손길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쾌감을 끌어내는 데 능란한 손이 라파엘의 허벅지 사이를 애무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손바닥만 한 팬티를 천천히 내리면서 왕이 속삭였다.

“젖었네……. 언제부터 젖은 거냐?”

“읏…….”

“이렇게 팬티를 적셔놓고, 다른 남자에게서 술을 받아먹은 거냐? 응?”

왕이 상냥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라파엘은 왕의 손가락이 속옷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왕의 손가락은 허벅지 아래부터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고환부터 만지는 왕의 손가락에 애가 타서 라파엘이 미간을 좁히자 왕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하는 법을 가르쳤었잖아, 그렇지?”

라파엘이 왕의 목에 팔을 둘렀다. 왕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면서 “아이…… 브리 전하……, 읏, 전하……” 하고 불러대기 시작했다. 라파엘의 입술이 얼굴 이곳저곳을 서툴게 스칠 때마다 왕은 신음을 흘렸다. 라파엘의 무게가 팔 안에 전해진다. 그 무게와 이 어색한 입술에도 불쾌하기는커녕 왕은 흥분하고 있었다. 라파엘에게 젖었다고 힐난한 주제에 왕도 벌써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라파엘의 코르셋이 툭 떨어지고 남은 것은 속옷뿐이었다. 위에는 가슴이 납작한 여성들이 사용하는 가짜 가슴을 채운 브래지어, 그리고 밑에는 반쯤 내려간 팬티와 가터벨트, 비단 스타킹이었다. 왕은 우악스럽게 브래지어를 찢어발기다시피 벗겨서 가짜 가슴과 함께 던져버리고, 쿠퍼액으로 질척질척하게 젖은 팬티를 움켜쥐었다.

라파엘이 왕의 입술에 키스했다. 각도를 바꾸어가며 몇 번이나 왕의 입술을 탐했다. 작은 신음이 들렸다. 라파엘은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벌써 몸을 흔들고 있었다. 라파엘치고는 꽤 장한 움직임이었다. 왕이 라파엘의 키스에 응해주면서 “하고 싶었느냐?”라고 물었다. 라파엘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야한 몸으로 다른 남자에게서 술을 받다니.”

왕이 라파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정한 음색이지만 내용은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마시면…… 안 되는 거였……?”

“절대로.”

왕이 라파엘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도록 깨물고선 재빨리 혀로 라파엘의 입술을 위로하듯 쓸어주었다. 라파엘이 눈을 발작하듯 깜빡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왕의 입술에서 목으로 내려갔다. 왕의 눈이 당혹감으로 커졌다가 점차 가늘어졌다.

라파엘은 왕의 아래로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왕이 하는 것처럼 해보려 했지만, 그가 준 쾌감은 기억이 나도 그가 어떻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왕의 성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읏…….”

라파엘이 한숨을 쉴 때마다 그 더운 입김이 음모를 간질인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라파엘을 당장이라도 일으켜서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라파엘이 뭘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라파엘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모양이었고, 키스로 그의 기분을 풀듯 오럴을 해줄 생각인 듯했다. 라파엘이 해주는 오럴이라. 지독하게 서툴겠군. 깨물리는 거 아니야? 왕은 웃으면서도 기대감으로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라파엘의 작은 입술이 그의 것을 머금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절정에 오를 것 같았다.

라파엘이 입을 벌려 왕의 것을 물었다. 그 순간 왕이 헉 하고 신음을 토했다. 좋은 거겠지? 라파엘은 왕을 흘낏 올려다보고 좀 더 깊게 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위에서 당겨 올리는 바람에 성기가 빠지고, 그는 딸려 올라오고 말았다.

왕이 입술을 겹쳐왔다. 왕의 입술이 뜨거웠다. 라파엘은 눈을 감은 채 왕의 입술에 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숨이 막혀서 라파엘은 몸을 떨었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왠지 숨이 막혀왔다. 뜨거운 열기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나중에.”

왕이 겨우 입술을 떼고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중에 해다오.”

그게 왕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왕은 라파엘을 안아 올렸다.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아이처럼 들어 올린 채 키스를 계속했다. 멀리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와 새벽의 시원한 바람도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안배처럼 생각되어 왕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라파엘을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서 내려다보자 라파엘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인데도 여전히 그 눈은 그만을 바라보고 있다. 영원히 그럴 눈동자였다. 왕은 라파엘의 몸 위로 자신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검은 눈에 비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비친 흐릿한 실루엣은 아주 커 보였다. 그 눈에 비친 세상의 전부를 차지한 것처럼 보여 왕은 만족했다.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마.”

파티장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며 장난을 쳤던 왕이 진지한 목소리로 라파엘에게 말했다.

“다른 누구도 이 눈에 넣지 마라.”

눈에 사람을 넣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가 없어 눈을 깜빡거렸다. 왕은 라파엘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굳이 라파엘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라파엘의 발목을 잡아 벌렸을 뿐이었다. 다른 손으로 성기를 꺼낸 왕이 라파엘의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라파엘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왕도 깊게 신음했다.

왕의 성기 끝이 라파엘의 입구에 닿았을 때 라파엘이 왕의 목에 팔을 둘렀다. 라파엘의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섹스를 했어도, 늘 라파엘은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식사조차 통제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는 라파엘이 쾌감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지, 왕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분명 라파엘에게는 쾌감이라는 것이 두려운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은 지금 이 순간 또 팔을 벌려서 왕을 안아주고 있다.

“……원해?”

왕은 라파엘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울면서 도망쳐도,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한이 있어도, 라파엘을 안을 것이다. 그를 품고, 그를 자신의 여자로 평생토록 가둘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문에 불과했다. 답이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질문.

그런데도 왕은 이 순간, 라파엘의 입구에 성기를 누른 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라파엘은 답이 없었다. 왕은 긴장했다. 라파엘이 하지 말아달라고 하면……, 아니, 그래도 왕은 할 테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 상처 입을 것이다. 라파엘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자신을 성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왕은 깊이 상처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라파엘이 왕의 귓가에 키스했다. 그저 입술이 지나간 수준의 가벼운 키스였다.

“흣…… 원합…… 으읏!”

그 순간 왕이 라파엘의 안으로 세차게 박아 넣었다. 단숨에 가장 안쪽까지 후려쳐져 라파엘은 잠시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왕을 밀어내는 대신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읏…… 안네마…… 리. 그렇게, 조…… 으읏, 이면…….”

왕의 말이 신음과 섞여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라파엘이 더 강하게 왕을 끌어안았다. 왕의 것이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잠시 멈춰 있지만 곧 사납게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그는 쾌감에 울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상관없었다. 독을 먹든, 이대로 누군가가 왕과 겹쳐진 그를 같이 장검으로 꿰뚫어버리든 상관없었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죽어서 이 감각을 영원히 가진 채 끝이 난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끝이 되리라.

“죽고 싶습니다…….”

라파엘은 울면서 속삭였다. 왕이 깜짝 놀라 라파엘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왕이 이마로 라파엘의 이마를 콩, 찍었다.

“죽어도…… 흐읏, 좋아, 겠지. 바보 거북이…….”

그리고 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라파엘의 내부가 뜨거웠다. 사막에서 겨우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처럼 왕은 허겁지겁 움직였다. 채워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라파엘의 안은 너무나 뜨겁고 축축했다. 그곳은 동굴 같았다. 그를 사랑한다는 외침이 끝없이 울려 퍼지는 동굴. 어미의 배 속처럼 아늑하고 사랑스러운 동굴이었다. 라파엘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파엘이 “안 돼”라든가 “그만”이라고 하는 소리도 신음 소리에 묻혀 있었지만 분명히 들렸다. 그러나 왕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몸의 피가 내달린다.

심장의 박동이 어딘가를 향해 질주한다.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더욱더 거세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는 라파엘의 가슴을 꼬집었다. 평소 브래지어니 뭐니 하는 것이 많아 건드리지 않는 가슴이었지만, 지금은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가슴을 꼬집고 핥고, 애무했다. 라파엘이 견디기 힘든지 결국 조금씩 밀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라파엘이 침대로 떨어지자 왕은 더욱더 자유로워진 몸으로 라파엘의 유두를 괴롭히며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라파엘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사납게 후려치던 허리가 어느 순간 확, 가장 안쪽까지 찌른 채 잘게 떨렸다. 왕이 라파엘의 내부에 사정을 하며, 라파엘의 팔을 끌어내려 그 얼굴을 똑똑히 내려다보았다. 라파엘은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눈을 뜬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뺨도 눈가도 붉었고, 입가에선 타액이 흘러내렸으며, 눈은 촉촉했다.

“뜨거워서 우느냐?”

왕이 사정할 때 뜨겁다며 라파엘이 밀어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가 고개를 젓자 왕이 눈가에 키스했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그냥 해본 소리다, 내 예쁜 거북이.”

“…….”

“다른 사람이 주는 술 따위는 받아 마시지 마, 절대로.”

왕은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경고했다.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평소와 거의 같은 대답인데도 묘하게 뒤가 늘어지는 대답에 왕이 피식 웃었다. 귀여웠다. 남들은 평소와 똑같다고 하겠지만 왕 자신에게는 귀여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견딜 수 없었다. 섹스라는 건 늘 버틸 수 없는 탈진감을 동반하곤 했다. 왜인지 라파엘은 알 수 없었다. 라파엘은 잠들기 직전 왕이 자신의 입술에 키스하는 걸 느끼고 손을 뻗어 왕의 손목을 붙잡았다. 왕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내부에는 아직도 왕이 있는데, 그는 그래도 왕의 손목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왕이 속삭였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네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 안심하고 자도록 해, 나의 비.”

왕은 아무래도 독심술도 하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라파엘 자신의 생각을 이토록 잘 알 수 있는 걸까.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라파엘은 끝까지 왕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라파엘은 갑자기 눈을 떴다.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히 모르는 발소리가 갑자기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낯선 자의 기척도 느껴졌다. 분명 무술을 배운 자의 기운인데,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위장인가, 아니면 실제로 강하지 않은 것인가.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가 주변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다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는 어제 왕과 함께 침실이 아닌 객실에서 잠들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 쳐도 왕도 객실에서 잠들 줄은 몰랐는데.

라파엘은 자신이 왕을 붙잡았다는 생각에 반성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왕의 자랑이자 검이라 할 수 있는 특수군들이 왜 왕을 침실이 아닌 객실에 그냥 모셨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왕의 침실은 암살을 최대한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 만들어져 있다. 괜히 왕의 침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냥 여기서 잠들게 만들다니. 그러다 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어쩔 셈이지?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라파엘은 도대체 특수군―정확히는 그중에서 왕의 호위대들이 무슨 기준으로 왕을 호위하는지, 무슨 배짱으로 이런 식의 호위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아침이었다.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미풍에 반투명한 실크 커튼이 흔들렸다. 라파엘은 커튼과 커튼 사이에 서서 밖의 동향을 살폈다. 특수군의 기운은 익숙한 것들뿐이었다. 그 외에 익숙하지 않은 기운은 근위병들의 것이었다. 근위병들이 교대를 하면서 선 플레이스의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보는 모양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하얀 전서구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고, 그 외에 특이점은 없었다. 라파엘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시녀와 시종들이 들어왔다. 시종들은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밤을 같이 보낸 왕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왕비가 먼저 이 방을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시녀 한 명이 “비전하”라고 속삭이며 라파엘에게 편지를 가져왔다. 라파엘이 납봉된 봉투를 열고 가문의 문장이 찍힌 편지지를 확인했다.

“……알현 신청?”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편지는 모르는 남자가 ‘안네마리 제1왕비’에게 보내는 것으로, 그녀의 파란색 리본을 가지고 있으니 돌려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비전하의 향기가 배어 있는 고운 리본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둘만의 장소에서 돌려드릴 수 있도록 선처해주십시오’라는 것인데, 누가 봐도 치근덕대는 서신이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라파엘은 알현 신청으로 받아들이고는 “그럼 알현실에서 보지”라고 쉽게도 결정해버렸다.

‘둘만의 장소긴 하지…….’

편지를 받은 시녀들이 재빨리 서신을 훔쳐 읽곤 혀를 찼다. 남자가 말한 것은 왕비의 침실이라든가 가든 하우스 같은 밀회에 어울리는 장소였을 텐데. 가엾기도 해라.

“만나실 겁니까?”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비의 알현은 공식적으로는 신청이 가능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한, 미묘한 상황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현 신청이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언제나 ‘왕비는 몸이 좋지 않아 알현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주라는 왕명이 ‘은근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식 명령이 아니었으며 왕비를 대상으로 한 명령도 아니었기 때문에, 시녀장이 라파엘에게 만나선 안 된다고 둘러칠 말이 없어 잠시 말을 멈춘 사이 라파엘이 대답했다.

“응.”

그리고 그는 시녀장이 아닌 문가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알현 시간에 보자고 답장을 보내라.”

안 돼.

시녀장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시녀는 눈치 없이 허리를 숙이고는 등을 돌려 가버렸다.

시녀장이 아직 잠들어 있는 왕과 이미 잠에서 깨어난 왕비와 벌써 시녀가 사라져버린 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대고 있을 때 라파엘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시트를 허리 아래까지만 두른 왕의 육체가 확연히 보였다.

라파엘은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왕은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몸은 몹시 세심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몸이다. 라파엘 자신과도, 그리고 라파엘이 아는 다른 사내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우 아름다운 몸이었다. 라파엘이나 다른 사내들의 몸이 실전에 의해 다져진 것이라면 왕의 몸은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단련한 몸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몸엔 라파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라파엘이 어젯밤 잡았던 손목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실수했군.

라파엘은 드물게도 후회했다. 아무래도 힘 조절을 못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멍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좀 흐뭇하기도 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라파엘은 난처했다. 왕과 함께 있으면 좋으면서도 곤란한, 늘 검지도 희지도 않은―회색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건 과연 좋은 일일까, 아니면 좋지 않은 일일까.

‘일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라파엘은 어렵잖게 결론을 내렸다. 아주 나쁜 일이다. 일은 정확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마음을 주는 것은 일이 아니라 그의 왕이었다.

어려워.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웠다. 왕궁에 들어와서 그는 내내 어려운 일들과 마주한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곳의 일을 배워야 하고,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완벽한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한 곳. 화려하고 찬란하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비효율적인 곳.

사실 단순한 라파엘에게 왕궁은 미로와 같았다. 뜻하지 않게 들어왔는데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미로. 평소의 라파엘이라면 이 미로를 뚫는 법은 몹시 간단했다. 어떻게든 나가면 된다. 그러므로 아무 방향으로나 벽을 부숴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이 미로의 주인을 사랑하고 있어,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비전하?”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이미 뜨거운 물을 채운 욕조가 들어와 있었다. 라파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아.”

시녀들이 라파엘을 욕조로 이끌었다. 치장을 해놓으면 감쪽같이 여자인데 옷을 벗겨놓으면 그 단단한 몸에 놀라게 된다. 시녀들은 라파엘의 나체에 물을 끼얹으며 한숨을 쉬었다. 늘 보는 몸인데도 옷을 벗었을 때 놀라게 되는 것은 ‘왕의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옷을 벗으면 거기 서 있는 건 키가 작고 말랐을 뿐, 불필요한 지방은 단 1밀리그램도 존재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살인자다.

“비전하, 오늘은 장미향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시녀들이 화사한 얼굴을 하고 묻는 것을 보며 시종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녀들도 어쩔 수 없이 여자다. 그리고 그녀들은 언제나 한 남자에게 귀속되어 그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 남자는 솔직하고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지독하게 강하다. 한 나라의 왕을 지켜내겠다는 말을 하고도 허풍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내가 그녀들의 곁에 있다 보면 시녀들에게도 조금쯤 연애 감정 비슷한 게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궁정의 세련된 사내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시종장은 곧 깨어날 것 같은 왕을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왕비가 시녀들과 염문을 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약간의 애정 결핍과 약간의 의처증 기질을 보이는 왕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왕비는 어떨지 몰라도 시녀는 결코 살아남지 못하겠지. 왕비가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싫어해서 알현도 못 하게 하는 왕이지 않은가.

“뭐든 상관없어.”

“그래도 보다 좋아하는 향이 있으시면…….”

“향이 없는 편이 가장 좋지만 그건 안 된다면서?”

“남대륙에서 새로 들어온 향이 있는데…….”

“모르는 향은 안 돼.”

시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난처하게 웃었다. 그 꼴을 보면서 다른 시녀들과 시녀장은 환장할 것 같은 심정을 내리누르면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저게 미쳤나. 왜 비전하에게 들이대고 난리야. 너 정말 죽고 싶냐.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이 계집애야. 모두의 마음속에 욕설들이 휘몰아쳤지만 어쨌거나 그녀들은 시녀, 일단 얼굴은 계속 밝기만 했다. 그리고 눈치 없는 한 시녀는 라파엘의 옆에서 손으로 따뜻한 물을 끼얹으면서 슬쩍 그 몸에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매일 관리를 받아 촉촉하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였다.

“비전하, 따뜻한 물에서 드시는 차가운 음료는 정말 싫으신가요? 좋은 술이 있답니다.”

“싫어.”

“초콜릿은 어떠세요?”

라파엘이 흘끗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시녀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싫다는데 왜 자꾸 권하는지, 왜 자꾸 용건도 없어 보이는 말을 자꾸 거는지. 그래서 그는 시녀장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가 종종 이해할 수 없을 때 시녀장을 바라보면 시녀장은 대답을 해준다. 왕처럼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하지만, 시녀장은 그의 의문만은 거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시녀장이 난감한 듯 입술을 올리면서 라파엘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시녀를 끌어냈다.

“넌 문 플레이스로 돌아가서 청소를 감독하도록 해.”

“예?”

시녀가 왜 자기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바라보려는 순간이었다. 시종장은 시녀장이 라파엘의 사각지대로 고개를 홱 돌리면서 시녀에게 무시무시한 얼굴을 해 보이는 걸 보고야 말았다. 문득 같은 관리직으로서 동병상련이 느껴져 시종장은 한숨을 삼켰다.

그 시녀가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가고 나서는 별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라파엘이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받는 동안 시녀장은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저 둔한 왕비가 알현실로 가게 되면 왕은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분명 시녀장 자신에게 쏟아지겠지. 심지어 어젯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 모아 왕이 싫어하는 드레스 차림을 시켰던 걸 생각해보면 오늘은 결코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되는 때였다. 안 되겠다. 역시 왕비에게 비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알현실에 가는 것만은 막아야지. 그렇게 결심한 시녀장이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비전하.”

시녀장보다 먼저 왕비를 부른 사람이 있었다. 아까 답장을 주러 갔던 시녀가 왕비를 부르며 사뿐사뿐 들어왔다. 안 돼―! 시녀장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속으로일 뿐,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답장이 왔습니다.”

시녀가 납봉된 서신을 내밀었다. 라파엘은 성의 없이 손으로 홱 뜯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저의 바람을 이루어주시지는 않았으나, 차가운 비전하를 사모합니다. 오늘의 첫 남자로 뵙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을 이루어주지 않았다고? 만나자고 해서 만난다고 했는데 바람을 이루어주지 않았다니. 오늘의 첫 남자로 본다는 건 또 뭔가. 라파엘이 서신을 건네면서 “이게 무슨 말이지?”라고 물었다.

시녀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눈빛은 마치 대지의 사냥감을 노리는 대머리수리의 예리한 시선 그 자체였다. 시녀장이 라파엘의 앞에 서 있는 시녀를 자연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밀치고는 라파엘을 돌아보면서 환히 웃으며 정중하게 서신을 받아들려 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0.7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뛰는 시녀장 위에 나는 분이 계시기 마련.

“뭐냐, 그 서신은?”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서신이 휙 위로 낚아채이는 것을 시녀장은 닭 쫓던 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어느새 왕이 다가와서는 라파엘의 뒤에서 서신을 낚아챈 것이다.

“저의 바람을 이루어주시지는 않았으나, 차가운 비전하를 사모합니다. 오늘의 첫 남자로 뵙겠습니다?”

라파엘의 뒤에서 왕이 흘끗 시선을 들었다. 왕은 라파엘의 사각지대에 있었으며, 왕은 사나운 시선은 정확히 시녀장에게 닿아 있었다. 시녀장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지만 머릿속은 핑핑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걸 어쩌면 좋아. 시녀장이 고개를 숙인 채 차마 들지 못했을 때 그녀를 구한 것은, 애초에 그럴 의도는 별로 없었을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뭐냐, 이 더럽게 못 쓴 글씨로 아침부터 내 눈을 버려놓는 서신은? 바람을 이루어주지 않았다니? 안네마리, 넌 이 전의 서신에 답장을 한 거냐?”

“예, 전하.”

뭘 잘했다고 여기서 당당히 ‘예, 전하’야?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그렇게 일러두었건만 말귀를 못 알아먹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장히 울려줘야 하나. 왕이 쯧쯧 소리를 내며 서신을 찢기 시작했다. 박박 찢는 것이 아니라 한 줄 한 줄, 면 가닥을 내듯이 찢으며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에 가지 말라고 해서 얌전히 안고 있어줬다. 그랬는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낯선 침대 위의 빈 자리였다. 심지어 차가웠다. 몸을 돌려보자 라파엘은 이미 치장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그렇다는 건 왕이 자고 있는 동안 목욕도 하고, 뒤처리도 하고, 드레스도 입었다는 이야기다. 왕은 그 시점에서 이미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자신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라파엘도 당연히 안겨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네처럼 왜 새벽마다 벌떡벌떡 깨는 거야, 도대체.

그런데 심지어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빠져나가선 다른 남자와 밀회를 약속한 모양이다.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수가 있나. 왕이 어금니를 꽉 물고 면처럼 가늘게 찢은 종이를 시녀장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읏, 시녀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 전 서신은 뭐라 하더냐?”

왕은 라파엘이 아닌 시녀장에게 물었다. 그는 지금 짜증이 치솟은 상태라 괜히 둔한 라파엘과 의사소통이 잘못되면 정말 열받을 것 같았기 때문에, 눈치가 빠른 자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왕비의 리본을 가지고 있다며 아스티 소백작이……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시녀장은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지만 상대는 눈치 백 단인 왕이었다.

“아하, ‘만남’이란 말이지.”

아스티 소백작? 심지어 아직 백작 작위도 못 받은 애송이가 말이지? 

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라파엘은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에게서 살기가 피어오르는 게 심상치 않은데, 도대체 왜 이토록 노여워하는지 알 수 없어서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스티 소백작이라는 자와 사이가 안 좋으신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가 졸지에 원수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은 한참 고민하다 손을 내밀어 왕의 주먹을 감쌌다. 왕이 매서운 눈으로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당장 두들겨 맞거나 쫓겨났을 텐데.’

시종장은 왕이 라파엘을 쏘아보면서도 라파엘의 손만은 결코 밀어내지 않는 걸 보면서 한가롭게도 ‘봄날이네, 봄날이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종장처럼 연륜이 깊은 노인장의 생각일 뿐이고, 왕은 부릅뜬 눈으로 라파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손짓 한 번에 내가 너의 모든 걸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스티 소백작을 싫어하는 왕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런 라파엘의 생각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왕이 다시 물었다.

“네가 키스하면 결국 또 넘어가는 나를 비웃고 있느냐?”

왕은 이렇게 묻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라파엘은 지금 상황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기껏해야 상대가 돌려줄 게 있다고 만나자고 하니 그러자 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것은 머리의 설명일 뿐, 가슴은 분노하고 있다. 네가 어떻게 또 다른 놈의 유혹에 냉큼 손을 잡아줄 수가 있어?!

라파엘은 굉장히 당황해서 얼굴이 완전히 굳은 상태였다. 비웃어? 누가, 누구를? 왕이 어째서 저렇게 말하고 있는지, 왕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비웃다니. 라파엘이, 왕을 말인가!

왕은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놀란 나머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한 창백한 얼굴은 그를 향해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검은 눈이 평소보다 크게 뜨인 채 필사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고 화를 내는 대신 이해하기 위해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라파엘을 보자 왕은 괴로워졌다.

피해망상이다. 남색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당했던 일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아 이렇게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은 지금 당장 치밀어 오른 기분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그는 화가 났다. 왕을 이용해먹었던 첫 남자가 떠오르고, 왕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왕에게 몸을 바쳤던 남자들도 떠올랐다. 사랑받는 기쁨에 취하고 있는 만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강해진다. 왕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손을 들어 라파엘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 밑에서 라파엘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새가 손안에서 파닥거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제1왕비에게.”

목소리가 잔뜩 쉬어서 나왔다. 왕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골랐다. 그사이 보이는 것은 라파엘의 작은 입술이었다. 어젯밤 그의 것을 머금으려고 했던 서툴고 정직하고 다정한 입술.

왕은 고개를 숙여 그 입술에 키스했다. 몇 번이나 다정하고 열정적인 키스를 한 끝에, 왕은 선언했다.

“무기한 근신을 명한다.”

그리고 왕은 서둘러 나가버렸다. 옷도 입지 않은 상태라 시종들이 그의 몸 위에 겨우 가운을 둘렀을 뿐이었다. 라파엘은 사라지는 왕을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돌아설 때 잠깐 보인 왕의 아름다운 얼굴이 지독히 괴로운 듯해서 라파엘은 당황했다. 왕은 언제나 라파엘에게 친절했다.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있어도 그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챘으며, 라파엘의 의문에는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라파엘이 묻지 않아도, 왕은 대답해주었다. 언제나……, 언제나.

뭘…… 잘못한 거지?

낯선 객실에 남아서, 라파엘은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왕은 사라지고 없었다.

라파엘은 빠른 속도로 걸었다. 이미 하이힐은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선 플레이스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왕비가 시녀와 호위병을 대동하고 선 플레이스 내를 이동할 때마다 궁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도 어제와는 달리 왕비의 안색을 조심스레 흘끔거려 시녀들은 이를 악물었다. 왕비의 무기한 근신령은 이미 선 플레이스를 휩쓸고 지나간 모양이다. 왕에 관한 소문은 지독하게 빨리 퍼지는 법, 특히나 왕의 하나뿐인 총비에게 내린 근신령에 대해서라면 내일이면 온 헤수스 국민이 알게 될 것이다. 윗사람의 치욕은 곧 나의 치욕인 궁정의 세계, 시녀들은 언제나와 똑같이 정중한 얼굴을 하려 애썼지만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조금씩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시녀들의 굳은 얼굴을 보면서 궁인들은 이번에야말로 왕이 다른 왕비를 들이거나 다른 여자를 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어차피 왕이든 왕비든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구름 위의 사람들, 이쪽에 불똥만 튀지 않는다면 끈적거릴수록 재밌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궁인들은 왕비의 안색을 훔쳐보려 했다.

왕비, 안네마리는 늘 그렇듯 무표정했다. 완벽히 치장하고는 우아하고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충격도 아픔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얼굴이다. 왕이 사랑하든 내치든 늘 저 얼굴이라니, 무서운 여자야. 궁인들은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 싸늘한 얼굴은 사실 거의 습관일 뿐, 지금 라파엘은 대단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왕이 왜 괴로워하는지, 왜 화가 났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전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시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알현실.”

“무기한 근신령이 내려졌으니 알현도 안 됩니다.”

시녀장이 난처해했다. 궁중 사교계에서 유부남이나 유부녀는 자유 교제를 인정받는다. 그게 아니다 치더라도 사실 왕비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비는 그저 술잔을 한 번 받았고, 떨어진 리본을 돌려준다기에 그러면 ‘공적인 장소’에서 돌려달라고 대답했다. 잘못하기는커녕 신녀 아니냐고 이죽거려질 정도로 완벽하고 금욕적인 대응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기한 근신령이라니. 왕에게 악랄한 짓을 수없이 해댄 태후와 같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왕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압박이 될 처벌이었고, 또 대단히 억울할 결과였다.

“그래?”

라파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자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이 그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소백작에게 사정을 전달하라든가 하는 배려 있는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발언이 나오면 우리 비전하가 아니시지.’

시녀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슬쩍 눈짓을 하자 한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왕비의 긴 꼬리에서 한 명이 살짝 이탈해서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라파엘은 사라지는 한 명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라파엘의 머릿속은 ‘왕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왕이 왜 괴로운 얼굴을 했을까’로 꽉 차 있어서 나머지는 관심도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라파엘이 문 플레이스의 침실이 있는 중심부로 향하는 온실을 지나쳤을 때, 왕비의 무리에서 빠져나간 시녀는 문 플레이스의 서관에 있는 알현실로 향하고 있었다. 워낙 많은 궁인들이 일하는 곳이라 표정에 변화를 줄 수 없었지만 착잡함을 숨길 길이 없어서 시녀는 가는 도중에 잠시 아무도 없는 우물 쪽에서 숨을 돌렸다.

‘아니야, 괜찮아.’

시녀는 손으로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왕이 왕비에게 무기한 근신을 명하는 순간 시녀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폐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그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왕비의 몰락은 시녀 전원의 몰락을 의미했다. 최소한 왕비의 최측근, 즉 왕비의 정체를 아는 시녀들은 확실히 제거될 것이다.

‘괜찮다니까. 왜 이렇게 심장이 뛰어.’

그러나 왕비는 여전히 왕의 단 하나뿐인 ‘여자’일 것이고, 단 하나뿐이고 가장 강력한 총비일 것이다. 언젠가 그 총애가 끝날 순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떨어진 근신령에 놀란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시녀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알현실로 향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백작 따위 거기서 평생 기다려보라 하고 싶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녀는 어디까지나 시녀 나부랭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이 난리를 만든 불한당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저는 여유작작하게 비전하나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밸이 꼴려서 확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녀는 궁인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바로 도도하면서도 정중한, 왕비의 최측근 시녀로서의 표정을 유지한 채 우아한 걸음걸이로 알현실을 향했다.

그때 알현실의 그 남자, 아스티 소백작은 즐거운 얼굴로 창가에 서 있었다. 알현실에 들어올 왕비를 의식한 자세였다. 인형 왕비라고 불리는 안네마리 제1왕비를 반드시 유혹해내리라, 그는 그런 결심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궁중 사교계에선 왕이든 왕비든 당연히 고귀한 타락을 즐겨야 하는 법이다. 몇 년 전까지는 왕도 그런 타락을 즐겼었다. 그런데 이제 와 왕과 왕비가 눈이 맞아서 둘만의 세계를 만들겠다니.

“웃기지도 않으시지.”

아스티 소백작은 환하게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런 짓은 촌스럽고 천하다. 소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든 푸른 리본에 입을 맞췄다. 마치 평민들처럼 서로만을 바라다니. 그것은 진정한 결혼이 아니다.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일 뿐인데 개인을 탐하다니. 왕도 결국 쇼어 가문의 안네마리를 선택했을 뿐인데, 그런 주제에 개인적인 행복까지 바라다니. 그것은 천하고 비겁하다. 짜증스럽다. 소백작은 국왕 부처의 닭살 돋는 짓을 계속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의견에 공감했다. 왕은 이 궁중 사교계의 수장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식으로 질서를 흩트려서는 곤란하다.

촌년 주제에, 우리의 왕을 독점하겠다고?

아스티 소백작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왕비를 기다렸다. 안네마리 라 쇼어. 이름도 모르고, 생사도 몰랐던, 완전한 촌년이다. 쇼어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쇼어 가문이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안네마리의 아버지는 작위가 없었으니까. 안네마리의 아버지는 ‘귀족의 아들’이지만 안네마리는 ‘귀족의 손녀’이고, 그쯤 되면 그냥 평민인 것이다. 그 주제에 우리의 왕을 가지겠다고? 그의 그 엄청난 돈과 커다란 힘을 손에 넣겠다고? 네가 뭔데? 고작 촌년 주제에.

그는 반투명한 커튼이 자신의 몸을 스쳐 펄럭이는 것을 보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새하얀 커튼이 펄럭이는 사이에 눈부시게 아름답고 세련된 귀족 청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촌스러운 인형 왕비는 호감을 느끼리라. 그리고 유혹을 하면 넘어오겠지. 그래, 너 따위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피어올랐다.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왕을 떠올렸다.

아이브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23세.

그가 왕을 처음 만난 것은 다섯 살, 어린이 무도회에서였다. 왕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고 말수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그때는 ‘패기도 없는 패배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그는 즉위하자마자 모든 걸 엎어버렸다. 냉혹하고 단호하고 완벽했다. 그는 그렇게 진정한 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내내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를 안았고, 결혼도 했지만―그래도 왕에게 향하는 시선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여자들과 뒹굴면서도, 왕이 자신을 바라보면 시선을 피하면서도, 왕이 혹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을까. 그는 내심 기대했었다. 왕이 관심을 보인다고 남색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왕을 나름대로 좋아했으며, 하나 확실한 건 저런 촌년보다 더 왕을 오래 봐오기도 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와라, 촌년아.’

귀족들은 왕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등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그러면서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아스티 소백작은 왕을 두려워하면서도 애정을 가진 쪽이었다. 그는 아주 환하게 웃으면서 들어올 왕비를 기다렸다.

‘이 촌년아, 네 천하를 내가 끝내주지! 이게 바로 첫걸음이야!’

그가 그렇게 외친 순간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스티 소백작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현실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그가 기다리던 ‘촌년’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었다. 최근 좀 길게 정리한 금발, 바다색 눈동자, 장신의 키. 빛에 반짝이는 왕은 밤에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워서 소백작은 잠시 숨을 멈췄다. 언제나 왕이 그를 바라보려 하면 시선을 피했던 소백작으로서는 이렇게 눈이 마주친 것이 처음이었다.

“너냐.”

왕이 물었다.

“네가 그 리본을 돌려주겠다며 밀회를 신청한 장본인이냐고 물었다.”

왕의 뒤에서 시종장은 무표정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스티 소백작이라. 백작은 알지만 소백작은 특별히 인상에 남아 있진 않았다. 아스티 백작 자체도 별로 인상에 남을 인물은 아니었고, 심지어 그 아들이라면 전혀 기억에 남길 가치가 없었다. 뭐 소위 말하는 후계자들과 함께 문란한 생활을 즐긴다고 들었지만 귀족이야 문란한 생활을 고상한 유희로 아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별로 기억에 남을 인물이 아니었는데 의외로 간이 큰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게.”

“맞군?”

아스티 소백작은 뭐라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왕 때문이었다. 왕이 반나체로 서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왕은 헐렁한 바지에 가운을 걸친 채로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슴의 할퀸 자국이 어젯밤 왕비와의 관능적인 행위를 암시하는 듯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답고 육감적인데 햇살 아래에서 보는 왕은 더욱 건장한 육체와 육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 맞사온데…….”

왕이 픽 웃으면서 아스티 소백작에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맞다……? 감히 내 비에게 밀회를 신청한 주제에, 왕인 나를 보고도 아무런 예의도 취하지 않는 놈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너처럼 무엄한 놈을 보는구나. 아스티 백작의 아들이라니, 너 같은 아들을 둔 아스티 백작이 가여울 따름이다. 나한테 하는 짓이야, 그래, 내 비가 아리따워 네 눈이 좀 뒤집어지고 네 머리가 돌았다 치자. 너 같은 아들을 둬서 말년에 인생이 괴로워질 백작은 어쩌면 좋으냐, 응?”

왕은 고작 몇 걸음 앞에서 아스티 소백작을 노려보았다.

“혀, 협박이십니까?”

“협박? 너 따위가 뭐라고 내가 협박씩이나 하느냐? 스스로가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왕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왕의 하나뿐인 총비에게 밀회를 청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왕이 싱글거렸다. 눈이 반달을 그리고 있는데도 전혀 웃음기가 없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라 아스티 소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평생 처음으로 왕과 이렇게 가까이에서, 둘만 있는데, 왕은 지독히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억울했다. 그는 왕비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왕비를 유혹하고 싶어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인형 왕비의 ‘두 번째’를 희망하는 남자들. 그러나 인형 왕비는 너무 차가워 유혹에 많은 힘이 드는 데 비해 얻는 것이라고는 왕의 분노밖에 없으니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 정도 마음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 마음이 아니었다. 인형 왕비를 좋아해서였다면 그 정도 마음밖에 안 되었겠지만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왕비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힘을 낼 수 있었다.

“궁중 사교계에선 본래…….”

그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 입을 열었다. 그때 쾅―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기대고 있던 창틀이 파였다. 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선 왕이 그 유명한 장총을 드리우고 있었다.

“본래, 뭐냐? 궁중 사교계에선 본래 우아한 타락을 즐긴다고? 너 같은 난봉꾼은 거의 책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우아한 타락의 역사는 40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전의 신성한 금욕은 7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본래’라. 어디 한 번 잘 말해보아라, 아스티 가문의 후계자. 가문의 이름을 그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니 허튼 소리는 하지 않겠지?”

아스티 소백작은 입을 다물지도, 그렇다고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의 총구가 내려오고 있었다. 서, 설마 거기라도 쏘아서 날 병신으로 만들 셈인가. 그가 숨도 못 쉬고 총구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왕의 총구는 그의 손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쥐고 있던 리본을 들어 올렸다. 나비 모양으로 묶여 있지 않아 그저 끈처럼 보이는 푸른 리본이 매끄러운 총구를 타고 흘러내렸다.

왕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게, 내 비의 리본이라고?”

왕의 질문에 아스티 소백작이 숨을 삼켰다.

――사실은, 아니었다. 왕비는 리본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백작은 왕비를 유혹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왕비의 어젯밤 드레스에 푸른 리본이 달려 있는 것을 봤었다. 왕비가 나와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더라도 아쉽다며 말을 이어가면 그만이었다. 그건 그저 빌미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스티 소백작은 리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그 푸른 리본이 아주 고급 물건이 아님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말았다. 아스티 소백작이 창가를 선택하는 바람에 빛이 적나라하게 들어왔고, 그 빛은 리본의 염색 상태가 고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아주 희미한 얼룩이었지만 왕은 예리하게도 그 얼룩을 발견했다.

왕비가 이런 리본을 쓴다면 왕비의 시녀들을 다 죽여버려도 쌌다. 왕은 문 플레이스에 예산을 한정하고 있지 않았다. 왕이 문 플레이스에 바라는 것은 뭐든지 최고로 왕비를 감싸는 것뿐이었다. 작게는 종종 찢어버리곤 하는 레이스 팬티부터 크게는 다이아 목걸이까지. 그리고 문 플레이스에선 왕의 주문을 행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이 리본은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스티 소백작이든, 왕비의 시녀들이든.

왕이 매서운 눈을 하자 아스티 소백작이 몸을 뒤로 뺐다.

“이 싸구려 리본이, 내 비의 것이라고?”

“그, 그게…….”

“말하라. 이 싸구려 리본이 내 비의 것이라면 문 플레이스 시녀들의 목을 죄다 자르겠다. 그러니 말해보아라, 아스티 가문의 후계자.”

아스티 소백작은 그제야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촌년이 왕을 가졌든 말든, 남색가 주제에 인형 왕비를 손에 넣었든 말든, 그런 건 신경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난봉꾼은 난봉꾼답게 여자들과 뒹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가버리면 그 작위를 이어받고,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건데…….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글렀다. 그는 왕의 앞에 서 있었고, 왕에게 무엄하게 굴다 못해 거짓을 고하기까지 했다. 어, 어떡하지. 아스티 소백작은 덜덜 떨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걸까.

“이 리본이 내 비의 것이냐고 물었다.”

왕의 총구가 아스티 소백작의 이마 한중간에 닿았다.

“저, 전하. 송구하옵니다. 사, 사실은, 그 리본은 비전하의 것이 아니옵고…….”

왕이 방아쇠를 당겼다. 쾅, 소리와 함께 아스티 소백작의 머리가 터졌다. 새하얀 커튼에 뿌려진 피를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보고선 등을 돌렸다.

“근위대.”

“근위대 레타 대위, 대기하고 있습니다.”

왕을 따르는 근위병 중 가장 높은 직위의 인물이 무릎을 꿇었다.

“아스티 백작에게 저 쓰레기를 갖다주고 사정을 말해줘라.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용서 없다고 경고도 해둬.”

“명을 받듭니다.”

그를 두고 왕이 알현실을 나갔다. 별 날파리 같은 놈 때문에 라파엘과 어긋났다고 생각하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지나가는 복도에는 격자창이 나 있어 환히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왕의 우울한 마음과는 달리 창 밖은 환한 여름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 햇살은 하루 종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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