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독이 든 술잔 (26/47)

제2장 독이 든 술잔

‘국왕 전하와 안네마리 제1왕비 전하가 드십니다.’ 

그 소리는 파티의 모든 것을 침묵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커다란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왕은 붉은 비단이 깔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한 팔로는 라파엘의 허리를 안은 채 왕좌까지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후작, 오늘따라 젊어 보이는군”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왕이 호명할 때마다 상대는 깜짝 놀랐고, 왕이 가벼운 인사치레라도 하면 상대는 안도와 감격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숙이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왕은 수틀리면 독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겨우 왕좌에 도착한 왕은 라파엘을 앉히고 자신도 앉아서 잔을 들었다. 옆에 있던 시종장이 우아하게 술을 따르자 정확한 타이밍에 시녀장도 왕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여성들은 크리스털로 된 술잔을, 남성들은 청동으로 조각된 술잔을 들었다. 왕이 잔을 높이 들자 라파엘을 비롯한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잔을 들었다. 왕이 술을 마시자 라파엘을 비롯한 모두가 술을 마셨다. 진짜로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입만 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입만 대는 사람 중에 라파엘이 있었다. 라파엘은 아주 신중하게 혀만 담가서 그 맛을 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술이군.’

왕궁에 들어와 라파엘은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공격하는 자보다 방어하는 자가 무력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독이 들어갔는지 알려면 음식 맛에 철저히 익숙해야 했다. 그런데 왕궁에는 음식이 너무나 많았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술만 해도 수천 가지라는데……. 이렇게 되면 아는 독밖에는 가려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무색무취의 독들도 많은데 그런 독들은 가려낼 수가 없지 않은가. 귀족들은 그것이 두려워 은식기를 쓰는 듯했지만 라파엘은 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의 이름을 백 가지는 댈 수 있었다.

라파엘은 “안네마리”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라파엘은 왕의 손을 잡고 홀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파티에서 라파엘이 할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왕이 말해왔고, 그래서 라파엘은 이 첫 번째 왈츠만큼은 누구보다도 우아하게 출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첫 번째 왈츠밖에 못 춘다는 것에 있지만.

왕과 왕비가 첫 발을 떼자 부드럽게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커플들이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댄스가 시작되었다. 이 첫 번째 댄스만은 ‘추지 않든가’ 혹은 ‘남편과 추거나’ 혹은 ‘기혼자지만 현재 서로 애인으로 둔 사이’라고 생각될 만한 남자와 추는 것이 일반적으로, 댄스 결정권은 늘 그렇듯 절대적으로 여성 쪽에게 있다. 그러므로.

“이번엔 또 왜 화가 나신 겁니까…….”

여성이 거절하면 출 수 없다. 따라서 스완은 쇼어 공작부인 옆에 서서 형님 부부의 닭살스러운 모습을 노려보며 죽을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 사교계의 여왕으로 칭해지는 중년 여성은 멀리서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 번 버렸던, 그리고 그녀가 한 번도 보호하지 못한 아들을. ―정확히는 그 아들이 여장을 하고 왈츠를 추는 꼴을.

거기에 밀어 넣은 건 자기 자신이다. 안드레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와 후회한다는 소리는 너무 뻔뻔해서 할 수도 없다. 거기서 빼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그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부모가 되어서 돌봐주지도 못했고 짐만 얹었으며 이제껏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줄 수도 없었다. 죄책감에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며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감내할 뿐.

“알현이라도 청해보지 그러세요.”

경박한 줄만 알았더니 알고 보니 왕의 최측근에 실세였던 남자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안드레아가 대답하지 않자 스완이 다시 말했다.

“아마 그분은 거절하시지 않을 겁니다.”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잖아.”

스완이 곤란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분은 전하를 제외하곤 아무도 좋아하시지 않아요. 괜히 심장에 시계 장치가 있다는 소문이 돈 게 아니랍니다.”

특별히 당신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고 스완이 말했다. 스완의 말에 안드레아가 고개를 돌려 화사하게 웃었다. 안드레아는 사교계의 여왕답게 어느 때라도 화사하고 우아하게 웃을 수 있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며 언제라도 꽃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여자. 단 한 번,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순간 절규했지만 그 이후로는 결코 진심을 보이지 않으며 천하의 스완 라 포도 코끝으로 다룰 수 있는 여왕벌. 그녀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눈으로 자신의 막내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묘한 표정 변화인데, 이런 걸 알 수 있을 정도라니. 난 이 여자한테 맛이 갔구나.’

스완은 한숨을 삼키며 첫 번째 왈츠를 끝내고 왕과 함께 자리로 돌아가는 라파엘을 지켜보면서 안드레아에게 물었다.

“비전하에게 알현 신청을 넣을까요?”

안드레아 라 쇼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윽고 지나가던 시종의 은쟁반에서 술잔을 들고 싱긋 웃었다.

“포 대장님, 배려만 감사히 받지요. 그리고 저는 약속이 있어서.”

약속? 스완이 고개를 확 돌리자 안드레아가 싱그럽게 한 떨기 장미와 같은 얼굴로 중년 남성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버시슬 백작이 안드레아의 손을 잡은 채 그 뒤에 서 있는 스완을 향해 픽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안드레아 라 쇼어에게 반한 애송이 놈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스완 라 포 백작이 아니던가. 무능력한 한량인 줄 알았더니 특수군 대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가지고 있는 놈이었지만, 그래봐야 애송이인 건 분명해서 안드레아가 제대로 상대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긴 안드레아는 두어 달 전 그에게 이런 말도 속삭이지 않았던가.

‘장미를 다루는 건 연륜과 그 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버시슬 백작님?’

불쌍한 놈. 버시슬은 비웃으며 안드레아의 손을 잡았다. 스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는 폭압적인 왕과 한 핏줄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지금 저 새끼를 날려버릴까 하는 고민을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때 안드레아의 비어 있는 손이 스완의 손을 잡았다. 손을 한 번 부드럽게 잡고는, 안드레아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버시슬 백작의 리드에 맞춰 댄스플로어로 움직였다. 그것을 스완은 무력한 눈으로 바라보다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악마 같은 여자.”

스완은 왕의 곁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서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은 오른손으로 라파엘의 왼손을 움켜잡은 채 요 몇 달간 똑같은 푸념을 반복하는 이부동생을 지긋지긋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몇 달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기 때문에 더는 말할 기운도 없어서 음식이나 먹고 말았다.

“젠장할!”

스완이 술을 퍼마시는 사이, 왕은 옆에 앉은 라파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라파엘은 늘 그렇듯이 물에만 손을 대고 있었다.

“또 안 먹는 거냐.”

왕이 인상을 썼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가 되고 싶은 거냐? 너는 지금도 비실비실하니까 지금으로도 충분해. 딱딱한 고치 같아 안을 맛이 안 날 지경이야.”

그렇게 말하며 왕이 라파엘의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었다. 그런 이부 형을 스완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고치 좋아하시네. 정말 그 남자가 고치 같으시면 넌 고치에 흥분하는 변태예요. 기분 같아서는 그렇게 퍼부어주고 싶지만 말싸움을 시작하면 그게 곧 패망의 길이니 스완은 입을 다물고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은 나름대로 좋은 사이였지만, 사실 불안정한 사이이기도 하다. 왕비가 남자라는 사실이 들통 나는 순간 왕은 치명적인 스캔들에 직면하게 된다. 폐위를 각오해야 하는 스캔들이다. 그리고 그 스캔들이 들통 나지 않는 한 왕비는 계속 자신의 성별을 숨겨야 한다. 매일 독한 약을 먹고,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도 뭐가 좋다고 저 난리들이야.’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밖에 먹지 않던 라파엘이 왕이 담아준 음식들을 천천히 입에 넣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일이 눈을 크게 뜨며 맛있어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스완은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왕이 “어서 먹어라, 어서. 그래, 잘 먹고 있어. 그렇게 먹어야지. 그나저나 넌 애도 아니고 내가 일일이 먹여줘야 하는 거냐? 아니면 지금 내 관심을 끌어보고 있는 거냐, 응?” 하고 놀려대는 목소리를 안 들으려면 빨리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스완의 페이스가 빨라진 걸 느끼면서도 왕은 라파엘에게 음식을 먹이는 데 주력했다. 라파엘은 왕이 음식을 내밀 때마다 입을 조심스럽게 벌려 받아먹었다. 아기 새 같은 게 귀엽다고, 왕은 남들이 경악할 생각을 했다. 문득 왕은 포크가 귀찮아져 손으로 음식을 들고 라파엘에게 내밀었다. 라파엘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자 왕이 “무엄하다. 내 팔이 떨어지면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느냐”라고 은근하게 협박했다. 어쩔 수 없이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귀엽긴. 왕은 웃으면서 라파엘의 입에 한입거리도 안 될 작은 케이크를 넣어주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요?”

귀부인 하나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평범 이하인데.”

“그래도 저 결벽증인 전하께서 직접 손으로 음식을 집어 입에 넣어주시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뿐인 줄 아셔요? 사촌 언니의 자리를 차지한 저 뻔뻔한 여자의 장신구며 옷을 보셔요. 영면에 든 마리 왕후도 저렇게 귀한 대접은 받지 못했었습니다그려.”

왕이 안네마리의 검은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으며 키스했다. 그녀의 입에 든 케이크 조각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랑에…… 빠진 전하는 더욱 아름답군요.”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그랬다. 왕은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도 몇 년이나 안네마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좀 심술궂긴 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그 말이 들리지 않으니 순수하게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다. 창백하고 귀신같은 형상을 한 아내를 사랑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는 지금도 몇 번이나 자신의 비를 쓰다듬고 있다. 그녀만을 바라보고, 그녀의 이야기만을 듣고, 둘만의 세계에서 그녀의 눈 속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라도 아름답겠죠, 아니 그런가요?”

귀부인 중 한 명이 그들 중 가장 우아하게 빛나는 여성에게 속삭였다.

“쇼어 공작부인.”

버시슬 백작과 한 곡을 추고 돌아온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이었다. 안드레아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라파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잔혹하나 그 아름다움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남자가 라파엘의 곁에선 특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안드레아가 대답했다.

“그래요, 상대가 누구라도 그렇겠죠.”

그 주제에 라피의 인생을 빼앗아가려는 건가.

안드레아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서 있던 여성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버시슬 백작부인, 한 번 시도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안드레아가 같이 춤을 췄던 버시슬 백작의 정처인 백작부인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최대한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서도 안드레아에게 좀 질린 상태였다. 안드레아 라 쇼어. 남편이 죽어도, 장남이 죽어도 끝까지 살아남은 여자. 벌레보다 더 질기잖아,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여자인 건 분명한 게, 실종되었다가도 혼자 살아남고, 살아남아서는 금세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탈환하는 여자였다. 지금만 해도 남자라면 애송이든 늙은이든 한 번씩 안드레아를 곁눈질하고 있을 지경이니까. ……저기 왕좌에서 자기 마누라에 취한 남자 빼고.

“그럴까요.”

“네,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나쁘지 않다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거 알잖아! 버시슬 백작부인은 애가 단 얼굴로 안드레아와 저 멀리 있는 안네마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중 한 명의 지지는 필요했다. 하지만 안네마리의 지지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공작부인?”

백작부인의 말에 안드레아가 입술을 올렸다.

“어차피 제 딸도 아닌데요.”

“그래도 피가 섞여 있으시잖아요.”

안드레아는 “부인의 딸이 제 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그때 백작부인의 곁에 있던 아가씨가 차가운 시선으로 안드레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파티 내내 왕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가씨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혼녀지만 요즘 워낙 이런 이혼녀가 많아서 최근에는 이혼녀가 아가씨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사실 아가씨의 싹이 마른 건 다 저기서 제 마누라를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는 남자가, 전처를 홀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 남자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값을 싸구려로 팔았던 여자들이 어린 이혼녀가 되어, 이번엔 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돌아오고 있었다.

자존심들도 없지.

하지만 안드레아는 굳이 그 자존심 없는 여자들을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 딸도 아니야. 저기 멀리서 왕의 키스를 받고 있는 무표정한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다. 딸이 아니었다. 저기서 광대처럼 불쌍한 삶을 살고 있는 건.

‘그래, 저 자리는 너희들끼리 싸우도록 해.’

그녀는 그사이 아들을 되찾을 것이다. 저 불쌍하고 가련하고…… 그리고 착하기 짝이 없는 아들을.

“유니스 라 버시슬이라 하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왕의 곁에 나타났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황갈색 머리칼이 왕의 금발과 어우러지는 걸 라파엘은 남처럼 구경했다. 하지만 남이 될 수 없었던 왕은 갑자기 나타나서는 제 소개를 멋대로 하고 있는 여자를 싸늘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데?”

“이번 달에 귀국하여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기껏해야 이혼해서 귀국하는 주제에 뭐 자랑 났다고 보고씩이나 한다는 거냐. 누가 들으면 나라에 엄청난 이익이라도 가지고 돌아온 줄 알겠군, 그래. 3주 만에 초고속 결혼을 한 게 너 아니던가? 마리 트리지아가 죽고 나서 말이야. 어찌나 신속하고 정확한 결혼인지 감탄했었지. 네 아비의 평소 일처리와는 사뭇 다르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라파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왕의 기분은 그저 날파리를 잡는 정도에 불과했다. 꺼지라는 식으로 가볍게 말하며 손을 휘휘 내저은 왕이 라파엘의 귀를 깨물었다. 라파엘이 어깨를 움츠리자 왕이 키득거렸다.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여전히 무표정처럼 보이는 그 얼굴의 갭이 그를 즐겁게 했다.

“혀 내밀어.”

왕의 말에 라파엘이 미묘한 얼굴로 흘끗 유니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왕이 라파엘의 머리칼을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눈앞에 있는데 다른 년의 얼굴에 시선을 두지 마라. 혀, 내밀어.”

라파엘은 잠자코 유니스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가 혀를 아주 조금 내밀자, 왕이 입술을 겹치며 그 혀를 잡아챘다. 난폭하고 질척한 키스였다. 라파엘의 몸이 뒤로 밀리자 왕은 기회를 만난 것처럼 라파엘의 몸 위로 자신을 드리웠다. 그러면서 라파엘의 시선이 한 번 슬쩍 유니스라는 계집에게 움직였다가 눈이 감기는 것을 보면서 왕은 본격적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키스로 학대가 가능하다면, 지금 왕의 키스가 그런 종류에 속할 것이 분명했다. 왕은 라파엘에게 폭압적인 키스를 퍼부으면서 파충류 같은 시선을 돌렸다.

‘유니스 라 버시슬…… 이란 말이지.’

유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반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왕비에게 폭풍 같은 키스를 퍼부으면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살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왜 왕이 노려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왕 특유의 빈정거림이나 들었을 뿐인데 지금은 빈정거림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왕은 아름다웠다. 그것이 유니스를 반 발짝 뒤에서 멈추게 했다. 흘러내리는 금발, 새파란 코발트블루의 눈동자, 대리석 같은 피부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번은 집안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지만 이제는 왕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물러날 수 없었다.

‘마리 왕후가 자살을?’

왕후의 자살과 함께 곧 왕후 책봉을 위해서 온 귀족 미혼 여성들을 모을 것 같다며 집안에서 부랴부랴 자신을 결혼시키려 했을 때 유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왕후가 되어도 좋다고 말했다. 자살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어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 마리 트리지아도 자살하고 말았는데, 네가 자살이라도 하면 가문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말과 함께 유니스는 억지로 이국의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여전히 왕후 자리는 비어 있고, 그녀는 돌아왔다.

유니스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왕비는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그녀는 왕과 왕비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왕이 왜 왕비를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왕비는 못생겼고 무뚝뚝했다. 내내 차가운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왕비를 의자째 끌어다가 왕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왕이 뭐라고 속삭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사랑일 것이다. 왕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꽃이 피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아련하고 사랑에 가득한 붉은빛 도는 얼굴을. 지금도 왕은 왕비를 잡아먹을 듯 키스하면서도 몇 번이나 왕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유니스의 머리카락보다 뻣뻣해 보이기만 하는 그 까마귀 깃털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왕의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전하…….”

왕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자의 목소리처럼 듣기 싫은 저음이었다.

“아이브리 전하, 이제 그…… 응…….”

하지만 왕은 그 목소리에 흥분했는지 더 키스를 하면서 왕비의 의자 위로 한쪽 무릎을 올리고 왕비를 완전히 몸 아래에 가두었다. 유니스는 고개를 돌렸다.

왕은 유니스 라 버시슬이라는 여자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라파엘의 낮은 목소리와 그 목소리가 부르는 ‘아이브리’라는 이름에 취해서, 마치 독에 취한 것처럼 라파엘을 덮치고 있었다.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 때문인가. 라파엘의 살 내음이 평소보다 진하게 나는 것이, 마치 침대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독에는 강했지만 라파엘에게는 약했다. 그래서 그는 이끌리는 대로 움직였다. 라파엘을 팔 안에 가두고, 그를 자신의 몸으로 가린 채, 그는 라파엘의 드러난 살결에 키스를 퍼부었다. 라파엘이 그 키스를 견디다 못해 왕을 밀어내기 시작했지만 왕은 그 팔을 붙잡았다.

“네가 원한다면 내 팔을 뿌리치기가 어렵지 않겠지.”

왕은 라파엘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내가 강제로 하고 있단 소린 할 생각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라파엘의 양손을 붙잡아 올리고 드러난 살에 붉은 자국들을 남겼다. 라파엘이 희미하게 고개를 움직였지만 왕은 그것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의 입술이 곳곳에 열을 남기고 있다. 라파엘은 힘없이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왕의 말이 옳았다. 그는 왕을 거절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런가? 그는 정말 왕을 거절할 수 있나? 그에겐 왕을 거절할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움직일 의지는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온 힘을 다해 왕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평소 라파엘의 힘이라고 하기엔 우스울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다. 왕이 웃으면서 바르작거리는 라파엘을 다시 품 안에 넣고, 급기야 그의 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그 강하고 억센 손에 라파엘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전하.”

한심하고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품은 목소리가 라파엘의 귀에 들려왔다.

“벌써 아홉 곡째입니다.”

술을 퍼마시고 있던 스완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왕이 대답 없이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꽃을 피운 듯이 붉은 기가 가득한 몸을 드러낸 라파엘은 색정적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왕은 관능으로 뭉친 라파엘을 타인의 눈에 내보일 기분이 들었다. 왕의 순흔으로 가득한 몸을 보임으로서 라파엘에게는 수치를, 타인에게는 경고를 주는 것이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래.”

왕은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의 위에서 비켜났다. 그제야 라파엘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째서 왕에게는 진심으로 저항할 수 없는 걸까. 라파엘은 의아해하면서도 어쨌거나 왕이 자신의 위에서 비켜났다는 것에 그저 안도했다. 하지만 파티장 안은 잠시 술렁였다. 왕비의 드러난 몸이 왕에게서 사랑받은 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드러내지 못해서 쇄골에 붙였던 인조 보석들은 이미 그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팔과 목, 쇄골과 귓가까지 붉은 자국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왕이 왕비의 곁에서 일어섰다.

“돌아온 여인에게 춤 한 곡 정도의 예의는 베풀어야겠지.”

왕이 미묘한 언사로 유니스를 모욕했다. 예의를 ‘베푼다’는 것은 결국 동정을 베푼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유니스는 기죽지 않았다. 그녀를 모욕한 것은 세계의 권력자이며, 그 권력자의 총비 또한 이 모욕을 참아 넘김으로써 사랑을 쟁취하지 않았던가.

왕이 손을 내밀었다.

“마침 곡이 시작되려 하는군.”

참으로 단정한 손이었다. 아무리 흉포한 괴물이라 할지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손. 유니스는 그 손을 잡았다. 이 손을 잡은 순간만은, 왕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왕이 다른 손으로 왕비를 낚아챘다. 짧고 강렬한 키스가 순식간에 지나치고, 왕이 왕비를 놓아주었다.

“착하게 있어라.”

왕이 키득거리며 속삭이곤 드디어 왕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유니스는 보았다. 왕비의 곁에서와는 다른 얼음장 같은 왕의 시선을. 왕이 유니스에게 미소 지었다. 아주 의례적인 미소였다.

“가지.”

그리고 둘은 댄스플로어를 향해 걸었다. 왕이 스완을 지나치며 의자 다리를 한 번 걷어찼다. 스완이 술을 퍼마시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저 잔혹하고 둔한 왕비님을 잘 보호하라는 왕의 말없는 명령에 스완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것을 확인하고 왕은 똑바로 댄스플로어에 섰다.

“언제나 이런 꿈을 꿨습니다.”

유니스가 왕과 손바닥을 댄 채 속삭였다. 왕이 유니스 라 버시슬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순간 음악이 시작되어서 둘은 손바닥을 댄 채 원을 그리듯 돌았다. 유니스가 말했다.

“언제나 전하와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아, 그래.”

왕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들이 훤히 보였다. 라파엘의 온몸에 남겨진 순흔과 결코 정복되지 않는 왕비의 모습을 보며 전의를 불태우는 남성 귀족들을 보고 왕이 속으로 가시를 세웠을 때 유니스가 말했다.

“언제나 경애해왔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전하를 처음 뵌 그 순간부터.”

그리고 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왕의 눈에 유니스 라 버시슬이라는 여자가 똑똑히 보였다. 그 황갈색 머리칼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드레스, 호화로운 장식과 옅은 갈색의 눈동자, 촉촉한 피부와 열매의 즙으로 물들인 듯한 새빨간 입술까지. 왕은 그녀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눈으로 확인하고 입술을 올렸다.

“네 배 속에 왕세자를 가지고 싶으냐?”

왕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형님이 또 왜 짜증이 나셨을까나.”

스완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보는 왕은 냉소를 머금으며 말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유니스 라 버시슬이라는, 외모에 비해 야심이 넘쳐나고 왕에 대한 동경도 강해 보이는 여성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하긴, 유니스는 날을 잘못 잡았다. ‘안네마리 제1왕비가 병약하여 공식 행사에 70퍼센트 이상 불참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유니스는 미리 안네마리의 참석 여부를 알아내서 불참하는 날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안네마리의 참석일에 승부를 걸다니.

‘형님 입장에서는 데이트 방해란 말이지.’

쯧. 자존심 강한 애들은 꼭 저게 문제야. 제 자존심을 지키느라 상황을 못 봐요. 스완이 혀를 차면서 일어났다. 형님이 저 멀리서 보고 이를 가시겠지만 어쨌거나 이 한 곡이 끝나기 전에 댄스플로어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으실 테니, 그전에 이 사랑에 빠진 왕비님을 납치해야 했다. 뭐, 형님 연애 사업도 중요하죠. 하지만 동생 연애 사업도 아주 중요하답니다.

“비전하.”

스완이 부르자 라파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물 외에는 만찬 음식에 한입도 대지 않은 라파엘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얼굴 덕분에 귀부인들 사이에선 ‘까마귀 왕비’라고 불리고, 신사들 사이에선 ‘인형 왕비’라고 불리는 라파엘이었다. 남들에게서 어떻게 불리든 일절 관심이 없고, 남자이면서 여장을 하고 있어도 자존심에 전혀 상처도 받지 않는 이 둔한 남자에게선 청결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담배도 술도 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잠시…… 드릴 말씀이.”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해보라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여간 눈치도 더럽게 없어요. 스완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저쪽에서, 괜찮으실까요.”

그러자 라파엘은 두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완은 라파엘이 그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정치와 사교계에 무지했다. 왕과 스완 자신이 몇 번이나 라파엘에게 정치와 사교계에 대해 가르치려 했지만, 그들은 라파엘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라파엘은 심지어 지리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가 지도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용하지도 않을 지도를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냥 외우라고, 왕과 스완이 닦달해보았지만 라파엘은 해내지 못했다. 라파엘은 목적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라도 마찬가지였다.

‘은근 사용법이 까다로워요.’

스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라파엘이 정치와 사교계에 무지하기 때문에 지금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스완이 하자는 것을 거절하는 법이 별로 없었다. 스완은 왕의 최측근이었고, 그의 혈육이었으며, 그의 목숨을 책임졌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서 가끔 라파엘은 스완에게 좋을 대로 이용당하고는 했다, 지금처럼.

“쇼어 공작부인.”

안드레아 라 쇼어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장미처럼 화려하게 웃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을 대동하고 걸어오는 순간부터 신경을 곤두세웠을 게 분명한데도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 점이 또 사랑스러워서 스완은 속으로 젠장할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점에 빠지면 곤란한데 말이야! 그렇게 화를 내봐도 그런 점이 그의 심장을 직격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네, 포 대장님.”

“안네마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제1왕비 전하이십니다.”

스완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을 소개했다. 라파엘이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안드레아를 바라보았지만, 안드레아는 달랐다. 그녀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동시에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우아하고 격조 높은 인사였다.

“안드레아 라 쇼어 공작부인입니다.”

스완의 소개에 라파엘이 스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잉그램? 왕의 신성 이름을 제1왕비가 받은 건가?”

“그럼 왕후로 승격된단 말이야?”

주변에서 소란이 일어났고, 안드레아는 그 소란이 잦아들 때를 기다려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비전하께 축하 인사를 올립니다. 전하의 신성 이름을 받으심으로써 신이 허락하는 부부가 되셨음을 진정 경하드립니다.”

안드레아의 인사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동시에 “경하드립니다”라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해왔다. 왜 인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라파엘은 배운 대로 똑같이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자 안드레아가 한 발짝 다가섰다.

“보석이 흐트러졌습니다, 비전하.”

그렇게 말하며 안드레아가 손을 뻗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고, 어떻게 보면 왕비가 된 조카에게 아양을 떤다고 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몸짓 어디에서도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손을 뻗은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스완만은 안드레아가 어떤 마음으로 손을 뻗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안드레아의 손이 거의 왕비에게 닿으려던 순간, 왕비가 갑자기 뒤로 확 물러났다.

“무슨 짓이냐.”

왕이 왕비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잡아챈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왕은 불쾌한 기색으로 안드레아의 손을 내쳤다. 안드레아가 미소 지으면서 왕에게 무릎을 굽혔고, 주변의 귀족들이 전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라파엘에게 인사를 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저 인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과는 달리 왕에게 인사를 하는 귀족들에게선 경외심이 느껴졌다.

“보석이 흐트러졌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안드레아가 눈을 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왕이 있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친 순간, 어느 쪽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눈길을 피한 것은 안드레아였다.

왕이 라파엘을 잡아끌었다.

“돌아가자.”

라파엘이 왕의 품에서 흘끗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공작부인을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공작부인은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자애로운 어머니, 사교계의 여왕……. 라파엘은 공작부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어머니.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왕의 품에서 자신과 시선을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리는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의 검은 눈은 그녀를 마치 타인 대하듯 했다. 그리고 곧 왕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거기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니스!”

버시슬 백작부인이 댄스플로어에서 혼자 돌아온 딸에게 다가갔다. 유니스 라 버시슬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버시슬 백작부인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갔고, 곧 안드레아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버시슬 백작부인은 노골적으로 “전하께서 뭐라 하시든? 응?” 하고 물어보고 있었다. 거기에 비해 유니스는 대답이 없이 멍한 얼굴로 있다가 중얼거렸다.

“아이를…… 왕세자를 가지고 싶으냐고 물으셨어요.”

“어머나.”

버시슬 백작부인이 환하게 웃었지만, 안드레아는 웃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넌 뭐라 대답했니.”

“전하를 사랑하니까 당연히 전하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그것이 무엄한 바람이 아니라면요.”

괜찮은 대답이군. 안드레아가 생각했다. 버시슬 백작부인은 백 점짜리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딸을 재촉했다.

“그랬더니?”

“왕후의 자리를 주겠다 하셨습니다…….”

이쯤 되자 버시슬 백작부인도 뭔가 잘못된 걸 알았는지 환한 웃음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유니스가 붙잡을 건 어머니밖에 없는지 버시슬 백작부인의 팔을 세게 쥐었다.

“홀로 수태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왕후의 자리가 아깝겠느냐고…….”

안드레아는 직감했다. 왕은 이 말을 유니스에게 한 것이 아니다. 왕은 안드레아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이 수태할 수 없는 남자의 몸이라 할지라도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경고. 즉, 왕은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다. 하지만 물러날 순 없다.

“홀로 수태를 하다니…… 그건 비전하께서 수태를 하실 수 없는 몸이라는 뜻입니까?”

버시슬 백작부인이 고개를 돌려 안드레아를 바라보았다. 안네마리 라 쇼어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몹시 한정되어 있다. 그중 한 사람인 안드레아를 쏘아보는 시선이 무시무시했다. 안드레아는 버시슬 백작부인에게 웃어주었다. 탐욕스럽고 무식한 여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안드레아는 얼마든지 친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워낙 몸이 약하시지 않습니까. 전하는 열정적인 분, 비전하께서 감당하기에는 조금 무거우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비전하를 제외한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으시지요.”

“본디 남자는 첫 여자에게 집착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풋풋함이 가시면 진정한 여자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버시슬 백작부인이 이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안드레아가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백작부인. 전하께서도 진정한 여자에게 눈을 돌리시면 따님처럼 아름답고 현명하며 사랑스러운 분께 빠지시게 될 겁니다.”

진정한 여자에게 눈을 돌리느냐가 문제지.

안드레아는 싱긋 웃었다. 진정한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결말이야말로 안드레아가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저 악마 같은 사내의 품 안에서 아들을 빼낼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의 불안한 움직임을 멀리서 보며 왕은 피식 웃었다. 이번엔 아예 라파엘을 자신의 무릎에 앉힌 채였다.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왕은 라파엘의 붉은 자국이 가득한 피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스완에게 한 번쯤 경고하는 것이 좋을까. 네 연인이라 할지라도 내게 대립하면 용서는 없다고? 아니, 왕은 고개를 젓는 대신 라파엘의 어깨를 깨물었다. 이 사이에 갇힌 흰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왕이 자신의 연인에게도 용서는 없으리라는 것을 스완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는 현명한 결정을 내리게 되리라. 아마 왕을 지지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왕은 잇자국이 난 어깨를 혀로 쓸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끈질기게 사람의 발목을 잡으며 형편 좋은 꿈을 꾸게 해주니까.

“전하.”

하지만 웬만해서는 스완이 ‘배신한다’는 선택지를 취하진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애무하려 했을 때였다. 라파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전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당연히 라파엘이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왕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또 다른 귀족 영애가 서 있었다. 소위 돌아온 아가씨로, 이국에서 돌아온 이혼녀였다. 포르타미스 사건 때 급히 혼인했다가 돌아온 여자가 수줍은 얼굴을 하고 “귀국을 보고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댄스 신청을 기다리는 걸 보고 왕은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관례는 관례인지라 고개만은 끄덕였다.

“따라와라.”

왕은 그렇게 말하고 라파엘을 휙 안아 들었다. 라파엘을 안은 왕이 댄스플로어 가장자리를 지나치는 동안 여자는 그 뒤를 졸졸 쫓아가야 했다. 그것은 상당히 모욕적이어서 여자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돌아온 귀부인에게 왕이 청하는 의무적인 댄스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왕은 뿔만 달려 있지 않을 뿐이지 악마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왕은 어떤가. 부인이라면 무조건 무시하고, 결혼하고 나면 당연한 듯 사랑 대신 욕망만 속삭이는 이 궁중 사교계에서 독보적이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비만을 사랑한다. 다른 여자를 내칠 만큼, 왕후의 자리를 비워둘 만큼. 감정은 움직이는 것이고, 그 감정을 그녀라고 받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병약하고 창백하고 귀신같은 저 까마귀보다는 그녀가 더 자격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왕이 구석에 있는 긴 의자에 왕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예, 전하.”

왕비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오죽하면 마법사가 만들어낸 인형이라는 소문도 있어. 무표정하게 「예, 전하」밖에 못한다니깐.’

사촌의 편지에 적혀 있던 구절이 떠올라 여자는 왕비를 바라보았다. 왕비는 정말 사람 같지 않았다. 두꺼운 화장에 싸늘한 얼굴. 헤수스는 북대륙이라 여름이 특히 사랑받는 계절이다. 여름이 짧은데 그조차도 그리 덥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비의 주변만은 차가운 저 빙산의 얼음이 쌓여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헌데.

“그래야지. 다른 놈들에게 시선 주지 말고, 나만 보고 있어라.”

“예, 전하.”

“키스해.”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거렸다.

“키스하라니까. 귀가 막힌 거냐? 이런. 우리 거북이, 느린데다 귀까지 막히면 어디다 써먹나, 응?”

왕이 손가락을 들어 라파엘의 귀를 톡톡 두드렸다. 거북이라니. 왕의 뒤에 있던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족 여성에게 파충류에 해당하는 거북이를 빗댄 말은 금기어다. 하지만 왕은 그 말을 악의적으로 사용한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듣고 있는 자신조차도 그 말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조금쯤 쓴맛이 도는 듯하지만 실은 아주 달콤한 초콜릿 같은 말. 여자는 왕비를 노려보았다. 가진 거라고는 쇼어 가문과 핏줄이 가깝다는 게 전부인 계집이 저 자리를, 그리고 저 아름다운 남자를 차지하다니!

라파엘은 왕의 뒤에 서 있는 여자를 흘낏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왕의 곁에 있는 낯모를 여인들에게서 살기가 느껴진다. 그것은 굳이 살기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것이지만, 대신에 날이 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들이 왜 그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의아해하는 그를, 왕이 거칠게 낚아챘다.

“안네마리, 누구를 보고 있는 거냐……!”

왕의 눈이 붉다. 왕은 진심으로 화를 내려는 듯이 보였다. 그가 왜 화를 내려고 하는 걸까 하고 잠깐 생각한 라파엘은 문득 왕을 잡아당겼다. 서로가 서로를 당겨서 가까워졌다. 라파엘은 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키스가 늦어서 화가 난 모양이다―라고, 라파엘은 되도 않는 추측을 했다. 왕은 난폭한 성격이라 자신의 명령을 즉시 따르지 않는 라파엘에게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키스는 스치듯 가벼웠다. 조금 커진 왕의 눈이 여전한 라파엘의 눈과 마주쳤다. 바다를 담아놓은 듯한 푸른 눈을 보며 라파엘은 한 번 더 입술을 겹쳤다.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왕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갈증이 날까.

“흣―, 읏, 잠…….”

왕의 뒤에 있던 여자가 발작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 목소리는 왕비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왕의 것이었다.

“……너, 읏…… 이렇게, 넘어갈…… 읏, 하아…….”

아주 노골적인 신음이었다. 키스하라고 했던 왕은 몇 번이나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왕비 쪽이 적극적이었다. 왕비가 왕의 팔을 잡은 채 키스를 하고 있었다. 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왕비의 입술이 쫓아왔다. 붉게 칠한 입술이 왕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왕은 몇 번이나 왕비를 떼어내려는 듯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그 어깨를 떼어내기는커녕 잡아당겼다가, 고작 고개를 돌려 외면하다 다시 왕비의 입술에 잡히고, 그리고 결국―.

“젠…… 장!”

왕이 왕비를 끌어당겨 성마른 키스를 퍼부었다. 왕비의 작은 몸이 왕의 품에 안겨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며 여자는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왕은 키스를 하면서 왕비를 자신의 몸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은근히 움직이는 허리가 지독하게 육욕적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왕은 왕비를 밀어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인내심을 총동원해 밀어낸 것이 분명했다.

“오늘 밤에 엉엉 울 줄 알아.”

왕이 사납게 말했다. 그 사나움이 화가 아닌 정염으로 인한 것이라는 게 분명히 보여서 여자는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제야 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춤…… 추지. 다음 곡에.”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오늘 밤에 엉엉 울 줄 알아.

왕은 그렇게 말했다. 라파엘은 왕이 기다리라고 한 곳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왕을 바라보면서 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걸까. 라파엘은 멍하니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키스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지 말아야 한 걸까. 하지만 그전에는 키스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싫은 척하면서도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역시 싫은 거였나.’

라파엘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왕은 분명 흥분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었을까? 힘으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집요하게 할 필요는 없었을까. 키스하라고 할 때 바로 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게 좋을까? ―어려운 일이었다. 라파엘처럼 둔한 남자에게 연애란 아주 어려운 공부와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뭐였지? 매일 배우면서도 매일 잊어버려서 매일 왕에게 농락당하게 되곤 하는 건수를 떠올리며 라파엘은 남몰래 혀를 찼다. 당근이었던가, 토끼였던가……? 세계 지도의 그걸, 뭐라고 하더라?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질문은 생각이 나는데, 어째서 답이 생각이 안 나는 걸까.

“비전하.”

당근. 당근이었던 것 같아. 토끼는 아니었으니까.

“비전하?”

라파엘은 그제야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왕비가 흘끗 고개를 돌리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남자들끼리 ‘인형 왕비’라고 부르는 왕비는 지독하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쯤은 아리땁다는 의미로, 반쯤은 왕의 인형 부인이라는 조롱을 섞어 부르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지금만은 오로지 전자의 의미에 해당할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왕비는 아리따웠다. 아름답진 못했어도 누구보다 단정하고 예뻤다. 이 홀의 어느 여자보다 몸매가 덜 드러난 옷차림을 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퇴폐적인 몸을 하고 있다. 세상의 어떤 창녀도 지금의 왕비보다 퇴폐적인 몸을 가지고 있진 못하리라. 저 사나운 왕에게서 사랑받은 증거를 드러낸 채 왕비는 부끄러움도, 자랑스러움도 없이 남자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비전하,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여름이라 그런지 몹시 덥네요.”

아아, 여름이라 더웠던 건가.

라파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술잔을 가져왔고, 그러는 사이 남자들이 라파엘의 주변을 에워쌌다. 저 멀리 댄스플로어에서 ‘멍청아!’라고 속으로 고함을 지르는 왕의 사정을 알기엔 너무나 둔하디둔한 라파엘은 남자의 손에서 술을 받아 들고 왕을 바라보았다. 마침 곡이 끝나고, 왕은 여자와 함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왕이 여자와 함께 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사람들은 흘끗 왕비의 기분을 살폈지만 어느 누구도 왕비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다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라파엘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여기에 두고 다른 여자와 자리에 돌아간 왕에 대해서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왕이 기다리라고 했으니 여기서 기다릴 참이었다. 아마 불이 났어도 거기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기다렸으리라. 불꽃이 몸을 태우는 그 순간에도 라파엘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을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인물은 이 홀 내에 극히 드물었기에, 대체로 사람들은 ‘드디어 왕비도 호된 꼴을 당하는구나!’라며 즐거워했다.

왕은 저 멀리서 라파엘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갑자기 웬 사내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지 모를 일이다. 왕이 짜증을 내자 여자가 왕의 잔에 술을 따랐다. 왕이 데려온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따라온 주제에 술까지 따르는 여자에게, 평소라면 한 마디, 아니, 열 마디쯤 쏘아붙였겠지만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댄스플로어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라파엘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왕은 둘이 같은 술잔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닫고 픽 웃었다. 자신은 여기서 여자에게 술을 받고, 라파엘은 저기서 남자에게 술을 받았는데 같은 술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왕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모든 귀족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남들이 그러하자 라파엘도 술잔을 들어 올렸다. 왕의 술잔에 든 술은 새파란 색이었다. 그것은 좀 탁하긴 해도 왕의 눈동자 색을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술잔에도 그 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술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다음에야 깨달은 라파엘은 충동적으로 술잔에 입을 대었다. 하지만 역시 모르는 술을 마시진 못하고, 혀만 내밀어 살짝 담근 정도였다.

‘이 여자, 정말 자극적이야.’

왕비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왕비는 아주 아름답진 않아도 도도하고 자극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기준도 어디까지나 궁정 사교계의 높은 기준과 마리 트리지아라는 엄청난 벽을 의식한 것이지, 왕비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에 속했다. 그리고 타고난 요염함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을 싸구려로 내주지 않는 엄격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왕비를 안은 자는 오직 왕뿐.

세계 제일의 권력자가 사랑하는 총비를 안는 두 번째 남자가 되기 위해 남자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 왕비가 벌떡 일어났다.

“어.”

스완이 말을 거는 통에 잠깐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려던 왕이, 스완이 내는 당황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이 걸어오고 있었다. 댄스플로어를 가로질러서 다가오는 라파엘을 보며 왕이 스완을 돌아보았다. 왜 저러느냐는 시선에 스완이 고개를 저었다. 카드리유가 한창인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를 만큼 뭔가가 잘못된 것 같진 않았는데, 라파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거기에 서 있던 여자가 왕비의 돌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비전하.”

여자가 용감하게 고했다. 그녀는 자신이 왕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왕비가 시골 촌계집이라고 여겼다. 몸이 약한 왕비보다는 자신이 낫다는 생각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은연중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여자는 이 놀라운 순간 자신이 왕비에게 적절한 충고를 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생각은 물론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왕이 여자를 험악한 눈으로 확 노려보았다. 그때 라파엘이 왕의 앞으로 다가와 왕의 술잔을 빼앗아 뿌리쳤다.

정말 무엄한 광경이었다.

챙, 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왕비가 왕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바닥에서 구르는 청동 잔과 쏟아진 푸른 술. 그리고 술을 따른 여자의 모욕으로 굳어진 얼굴.

‘좋아하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스완은 왕의 옆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왕은 즐거운 기색을 누르느라 애쓰고 있었다. 마치, 마치…… 이건 마치, 질투심에 미친 왕비가 다른 여자가 건넨 술잔을 집어던진 듯한 광경이라 왕을 흐뭇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다른 귀족들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여자와 왕비의 대치를 보고 있었다. 여자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앙칼진 고함을 내질렀다.

“비전하!”

아무리 네가 왕비라지만 무엄하기 짝이 없어, 이 촌년아! ―의 줄임말로 ‘비전하’가 쓰일 수 있다는 걸, 스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어쩌면 스완이 유순하게 해석한 것일 뿐, 사실은 ‘야, 이 미친년아!’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여자는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왕비를 증오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드디어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귀족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왕좌를 주시했다. 왕이 사랑하는 총비와 왕을 원하는 여자들의 싸움은 언제나 즐겁다. 그 장본인인 왕조차 즐거울 일이다. 그 증거로 왕비를 애지중지하다 못해 무슨 거품으로 만든 인형처럼 다루는 왕조차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평소라면 벌써 상대 여자를 그 독랄한 말로 죽여놓았을 텐데.

“아무리 비전하시라지만 너무하십니다!”

왕의 침묵은 지지를 뜻한다. 여자가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이려 했다. 그러나 왕비는 여자를 신경 쓰지도 않고 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시선이나 안색을 뚫어지게 지켜보던 왕비가 여자를 밀쳐내고 왕에게 달려들다시피 안겼다. 왕이 놀라서 팔을 들어 왕비를 마주 안았다. 왕비의 긴 검은 머리칼이 펄럭이는 것이 모두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물론 질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질투인 것만 같아 잠시 지켜보던 왕은 정말 놀라고 말았다. 라파엘의 안색이 아주 안 좋은데다 그가 왠지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무표정한 얼굴에 암호처럼 떠오르는 수준이 아니라, 누가 봐도 절실하고 다급해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왕이 당황했을 무렵, 라파엘이 속삭여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만.”

“정말입니까?!”

그제야 왕은 라파엘이 빼앗아버린 푸른 술과, 라파엘이 마시던 술이 같은 술이었던 것과, 그의 다급한 모습이 겹쳐지면서 라파엘이 왜 이러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역시 질투는 아니었군.

김이 샐 지경이다.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라파엘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황해서는 당장이라도 움직이려 들어서―아마 궁의라도 납치해 오려는 모양이다. 그 드레스를 입고 궁과 궁 사이를, 그리고 지붕 위를 날아다닐 생각이겠지. 그것만은 말려야 했다―왕은 재빨리 라파엘을 붙들었다. 그리고 마치 왕비를 달래려는 것처럼 끌어안아 토닥이면서 작게 말해주었다.

“본래 독주로 마시는 거다.”

라파엘이 왕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역시 독주였군! 라파엘은 당장 왕을 데리고 궁의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독이 필요했다. 왕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하자 숨이 그대로 멎어버릴 것 같았다.

“안네마리, 듣고 있어? 본래 독주로 즐기는 술이라 하지 않았느냐. 독살이 아니야.”

라파엘은 왕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의 말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으나 지금만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세상에 독주를 즐기는 인간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상식보다 왕을 믿는 것을 선택하고 고개를 들었다.

“걱정했느냐.”

왕이 웃으며 묻다가 혀를 찼다. 라파엘은 왕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말 괜찮아 보였고, 그의 안색 어디에도 중독된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세상이 다시 제 색을 찾아간다. 검게 물들었던 세상이 제 색을 찾아가는 걸, 라파엘은 왕을 통해 보았다. 왕의 금발이 햇살처럼 반짝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때 뭔가가 떨어졌고, 라파엘은 당연히 그게 속눈썹 끝에 달렸던 인조 보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울지 마라. 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왕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들어 라파엘의 뺨을 더듬었다. 고작 한 방울뿐이었지만, 라파엘의 깊은 안도감을 알 것 같아 가슴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내가 다른 여자에게 갈 것이 그리 걱정되었느냐. 가지 않는다. 가지 않으니 울지 말거라, 응?” 하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흘끗 여자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의 뒤에 서 있던 계집은 하여간에 왕의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일단 여자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독한 향수 냄새에 코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고, 주제에 제가 뭐라고 라파엘에게 언성을 높이는지―. 왕은 그때 이 여자의 목을 칠 뻔했다. 왕이 참은 것은 순전히 라파엘이 질투하는 것만 같은 그 상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즐길 건 다 즐겼으니, 왕은 여자를 눈앞에 둔 채 주변 귀족들이 들을 만한 적당한 목소리로 라파엘을 달래기 시작했다.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내 가슴이 아프지 않느냐. 나는 다른 누구에게도 가지 않는다. 나는 모두의 왕이나 너만의 남자라 몇 번이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다른 여자들은 그저 호박덩어리에 불과하다. 호박넝쿨을 잡고 춤을 한 곡 추었다고 네가 울면 난 어찌해야 할까.”

목소리는 애틋하고 절절했다. 하지만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들려는 라파엘을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 라파엘은 얼굴을 왕의 가슴에 눌린 채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다. 이것도 정치인가?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없을 정도로 단단히 머리를 고정당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왕이 라파엘의 귀를 쪼듯 키스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다 똥개나 다름없다. 굴러다니라지. 사랑하는 나의 안네마리, 얼굴을 보여다오, 응?”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라파엘이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여전히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라파엘은 고개를 들려다가 왕이 힘을 주면 다시 내렸다.

“어서 얼굴을 보여줘, 응? 내가 이렇게 애타하지 않느냐. 내 심장이 갈가리 부서져야 그 아리따운 얼굴을 보여줄 게냐? 이제 그만 용서해다오. 응? 나도 의무가 아니라면 저런 것들과 손끝 하나 닿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자. 이제 그만, 고개를 들어다오.”

그제야 왕의 손아귀에 적절히 힘이 풀렸다. 라파엘은 고개를 홱 들려고 했지만 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도록 만들어서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들어야 했다.

“아아. 화가 난 얼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구나, 내 안네마리.”

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볼에 떨어진 인조 보석들을 하나하나 누르며 키스해주는 왕은 참 아름다웠지만, 그 인조 보석은 애초에 왕이 라파엘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콱 밀어붙였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니던가.

스완은 흘낏 시선을 돌려 여자를 확인했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졸지에 호박과 똥개가 된 여자는 그 모욕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까지 뚝뚝 떨어뜨렸다.

‘하여간 사디스트시라니깐.’

스완은 어쩔 수 없이 여자의 등에 손을 대고 싱긋 웃었다. 이쯤에서 여자를 구해줘야 했다. 왕이 흘낏 ‘그딴 걸 왜 구해주느냐’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스완은 더 이상 여자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왕좌에서 멀어진다. 왕의 총애를 받아 야심을 이루리라는 꿈에서 한 발짝씩 멀어지며,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뒤를 왕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키스해다오. 아아, 너의 입술은 왜 이다지도 달콤한 것이냐. 안네마리, 이제 그만 돌아갈까.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겠느냐. 너를 안고 싶어하는 남자에게 지독히 냉정한 모습이 마치 달의 여신 같구나.

왕은 여자를 끝없이 놀려대었다. 그러면서 어디 한번 이 모욕을 또 당하고 싶으면 귀국 보고고 나발이고 해보라고, 다른 귀족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스완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왕과 귀족이란 서로 끝없이 찌르고 막아대는 칼과 방패 같은 사이라니깐.

‘불쌍한 비전하.’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듣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왕의 얼굴만 올려다보고 있을 왕비를 떠올리며, 스완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여자를 부모에게 데려다주었다. 여자가 어머니를 만나자 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쳐들었다. 귀족 여성에겐 어머니도 한때의 지지자일 뿐 영원한 같은 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혈육이라 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오래 남을 지지자에 불과했다.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상대는 아니기 때문에 여자는 서둘러 눈물을 갈무리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