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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총비 (25/47)

제1장 총비

라파엘은 멍하니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반의반의 반도 못 알아듣겠다고 생각하며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자 왕은 더 이상 라파엘에게 지형적인 이익과 그 정치적인 의미, 그리고 역사적인 분쟁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왕도 라파엘을 무릎에 앉힌 채로 그 귀찮은 이야기들을―게다가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려면 너무나 길고 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라파엘을 무릎에 앉힌 채로 귀와 볼 같은 곳을 핥으면서 가볍게 신음했다. 달았다. 사람의 육체가 이런 맛일 리 없는데도, 라파엘은 언제나 왕에게는 달콤한 독과 같았다. 왕은 중독되고 있었다. 마약에 중독되는 것처럼 빠져나가거나 멀리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걸 보니 심각한 수준이라고, 왕은 생각했다. 왕이 귀를 깨물자 라파엘이 왕에게 매달렸다. 

“안네마리, 복습해볼까?”

가뜩이나 말이 길어지면 멍해지는 라파엘에게 한 시간짜리 강습을 해놓고선 이런 짓을 하면서 왕이 짓궂게 말했다. 라파엘이 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이 가득 찬 눈에 왕이 싱글거렸다. 장난이었지만 진심이 된 왕이 라파엘의 목에 작은 자국을 남긴 뒤 입을 열었다.

“하나 틀릴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는 거야.”

라파엘이 난처한 얼굴로 왕을 돌아보았다. 그는 옷을 많이 입고 있었지만, 그가 입은 옷보다 틀릴 게 더 많은 건 너무나 자명해 보였다. 옷이 모자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이 게임이 끝나는 건가? 하지만 라파엘은 3년간 왕의 곁에 있으면서 왕에 대해 몇 가지를 분명하게 알았는데, 그중 하나가 왕은 손해 보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이 승자가 될 수 없는 게임은 모두 다 손해 보는 게임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이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할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옷이 모자라면요? 그 질문을 미리 하는 게 좋을까, 하지 않는 게 좋을까. 라파엘은 나름대로 왕의 눈치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보다 몇 수, 아니, 몇 백 수 고단수였다. 왕이 싱긋 웃었다.

“옷이 남지 않거나 더 이상 벗을 수 없으면, 다른 벌칙을 받는 거지.”

이제 라파엘은 다른 벌칙을 묻는 게 좋을까, 묻지 않는 게 좋을까를 두고 고민했다.

“다른 벌칙이 뭔진 비밀이야. 자, 시작할까.”

어째서 왕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일까. 라파엘이 경이로운 눈으로 왕을 바라보자 왕이 라파엘의 창백한 뺨에 키스하며 “사랑의 힘이지”라고 대답했다. 라파엘의 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락였다. 빠르게 움직이기도 했지만, 라파엘의 시녀들이 그의 눈썹을 길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것은 뭔가의 날개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끝에는 보석까지 달려 있었다. 왕은 라파엘이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저 긴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늘은 마음에 들었다. 라파엘이 눈을 내리깔 때, 그 무표정한 얼굴을 애처롭게 만들어서 왕의 성욕을 돋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애틋한 심리와는 거리가 아주 먼, 둔하고 요령 없는 인물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자, 이것이 세계 지도지. 세계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

동서남북 대륙이 펼쳐져 있는 세계 지도는 그냥 봐도 흔한 풀을 연상시켰지만 라파엘은 멍하니 그 지도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뭐라고 했었는데. 옷을 벗는 건 괜찮지만, 정체를 모르는 벌은 좀 두려운 라파엘은 필사적으로 왕의 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분명 왕이 토끼와 토끼가 먹는…… 뭔가를 말했던 생각이 났다. 아.

“당근?”

“클로버.”

첫 질문부터 틀릴 줄은 몰랐는데.

왕은 흘끗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클로버 모양으로 네 개 대륙이 정확하게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서 ‘당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재주다 싶었다. 무표정한 라파엘이 희미하게 울상을 짓는 것을 보며 왕이 라파엘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첫 번째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지. 네가 가여우니까.”

라파엘이 작게 입술을 올렸다. 정말 고마워하는 얼굴을 보며 왕은 마주 웃었다. 이마를 대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는 라파엘의 팬티부터 찢어버렸다. 왕의 손에서 찢긴 레이스 조각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그럼에도 라파엘은 여전히 그 일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왕은 키득거렸다.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귀엽긴. 그러나 저러나……. 왕은 세계 지도를 보며 세계를 ‘클로버’라고 말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평민들이 많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그 많은 교육 예산을 다 어디가 처들인 거야?

왕이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이 세계 지도에서 헤수스 영토의 범위는 어디지?”

라파엘은 일단 북대륙을 가리켰다.

“북대륙 전부입니다, 전하.”

“그리고?”

……그리고……. 라파엘이 지도를 바라보았다. 서대륙의 말미를 미묘하게 가리키는 라파엘을 보며 왕이 “그리고?”라고 물었다. 사실 좀 틀렸지만 관대하게 넘어가주기로 했다. 한 시간짜리 수업이었다. 라파엘의 옷을 벗기고, 라파엘의 입에 사정하고, 그의 다리를 벌리게 할 건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면 약간의 사기를 쳐도 되는 것이었고.

“여, 여기?”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는 라파엘을 보며 왕은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라파엘의 드레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등에 달린 비단으로 감싼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에 라파엘의 몸이 흠칫 굳었다. 분명 열심히 들은 것 같았는데 왜 기억에 남는 게 없지? 라파엘은 머리를 뒤지며 뭔가를 기억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역사의식이나 정치적인 건 암살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라파엘은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기억이 나는 건 바다와 사대륙과 헤수스와…… 네 명의 신과, 당근과 클로버와 토끼와 전쟁신과, 포르타미스 사건과, 마리 트리지아와…… 쇼어 가문과……? 응? 이게 다 무슨 상관이지? 라파엘은 옷이 벗겨지는 동안 젖은 귀로 왕의 명을 들었다.

“남대륙은 틀렸고, 동대륙은?”

동대륙에도 헤수스의 영토가 있었구나. 라파엘은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을 품고서 지도의 동대륙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왕이 잠깐 라파엘을 무릎에서 내려놓아 드레스를 발치로 떨어뜨린 뒤 다시 무릎 위에 앉혔다. 페티코트를 입은 라파엘을 보자 왕이 거친 숨소리를 냈다. 왕의 무릎에 앉아 라파엘은 아주 진지하게, 거의 폭탄을 해체하는 심정으로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디였지? 분명히 들은 기억은 난다. 왕의 아름다운 손가락이 지도 위를 오갔던 기억도 선명했다. 그렇구나. 라파엘은 패인을 깨달았다. 그는 왕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봐야 했다. 왕의 아름다운 손가락이 아니라.

왕도 약간의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복습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라파엘과 진하게 놀고 싶어졌는데 라파엘은 왕의 무릎에 앉아서, 힘을 얻기 시작한 그의 성기를 엉덩이로 느끼지도 못한 채, 진지하게 지도를 쏘아보고 있었다. 왜 그걸 못 맞히는 거야? 왕은 라파엘의 긴 머리칼을 한쪽으로 치우고 드러난 목을 입술로 애무하며 지도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냥 어림짐작으로 맞혀도 될 텐데.

‘생각해보니 그는 어림짐작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살수로서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모든 일에서 우연을 배제했다. 어림짐작으로 일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대비했다. 그 결과, 일에 대해선 유능하고 사생활에선 언제나 불리해지곤 했다. 어림짐작을 거의 해본 적이 없으니 가끔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늘 최악의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여…… 기…….”

“틀렸어.”

넌 도박은 안 되겠다. 왕은 그렇게 생각하며 라파엘의 페티코트를 벗겼다. 이제 라파엘의 몸에 남은 건 코르셋과 비단 스타킹, 그리고 가터벨트뿐이었다. 남들이 보면 우스워할 차림인데도 왕은 라파엘의 모습에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끝장을 내볼까. 왕은 라파엘의 드러난 피부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헤수스는 왜 굳이 북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세 대륙의 말미에도 영토를 두었지?”

“왜, 왜였죠?”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왕에게 물었다. 질문이 어려워지자 이제는 어림짐작을 해볼 엄두도 못 낸 라파엘이 다시 물었을 때 왕이 라파엘의 입술을 깨물었다.

끝났다.

이것은 게임이었고, 왕은 라파엘을 게임 상대로 생각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라파엘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라파엘은 왕을 게임 상대 정도의 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파엘은 옷을 반이나 빼앗기고 농염한 치태를 보이면서도 왕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당연히 왕에게 물어야 한다는 태도는 유순하기 이를 데 없어서 왕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왕은 이미 성기가 아릴 정도로 서 있는 상태라 다 잡은 토끼를 놓아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왕이 라파엘의 가터벨트를 찢고 스타킹을 내리면서 속삭였다.

“주 바다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라파엘은 자신이 헤수스어를 듣고 있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은 다른 나라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그사이 라파엘의 스타킹은 양쪽 다 내려가 있었다. 왕이 라파엘을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마지막으로 남은 코르셋을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자, 사랑하는 나의 왕비님. 주 바다 경계선이 뭘까?”

라파엘의 검은 눈이 애매한 호를 그렸다. 이 와중에도 라파엘의 얼굴은 완전한 무표정이었지만, 왕에게만큼은 수를 읽힌 패와 같아서 라파엘의 당혹한 표정을 너무나 쉽게 읽어냈다.

왕이 달콤함이 뚝뚝 떨어지는 미소를 짓자, 그 미소가 한 방울만 닿아도 살이 타들어가는 독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파엘이 절망적으로 물었다.

“뭐, 뭘까요?”

그리고 왕은 짐승처럼 라파엘에게 달려들었다.

거친 숨소리가 너무 가깝다고 라파엘이 생각했을 때, 왕은 이미 라파엘의 코르셋을 찢어내고 있었다. 철사가 들어 있는 코르셋을 반은 찢고 반은 벗겨서 너덜너덜하게 만든 왕이 라파엘의 다리를 벌렸다. 라파엘은 손을 잠시 치켜들었다가 천천히 내렸다. 그는 당황해서 왕을 밀어낼 뻔했고, 그 손을 겨우 밑으로 내리고 있었다. 가끔씩 자기 방어가 먼저 튀어나올 때가 있다, 지금처럼.

“벌려. 어서 벌려.”

왕이 속삭였다. 그가 벌리게 한 것으로는 모자란 것 같아서 라파엘은 천천히 다리를 더 벌렸다. 더 벌리기 위해선 다리를 들어야 했다. 다리가 허공으로 들리자마자 왕은 그 발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벌렸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라파엘의 치부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막히는 광경이다. 쇼어 가문 태생의, 그의 왕비가 된 라파엘. 왕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열에 들뜬 눈으로 그를 망연히 바라보던 자의 치부는 왕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의 성기는 바짝 일어서서 점액질의 액체를 흘리고 있고, 뜨겁게 조이는 내부는 아주 작은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고문이니 뭐니 하더니.”

치사하고 뒤끝 긴 걸로는 왕국 제일가는 왕이 중얼거리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왕이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젠 제법 즐길 수도 있게 되었…….”

라파엘이 왕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른 팔로 왕의 목을 잡은 라파엘이 왕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팔이나 목을 잡는 건 아주 능숙하고, 키스는 여전히 어색하고. 이 격차가 좋다고 생각하며 왕은 입술을 벌려주었다. 라파엘이 자신의 구석구석까지 탐할 수 있도록. 그러자 라파엘이 허리를 움직이면서 왕의 입술을 핥았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왕의 밑에 있는 그 가느다란 몸은 분명히 헐떡이고 있었다. 라파엘의 엄청난 폐활량을 생각한다면 순수한 흥분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라파엘이 키스한다. 왕의 팔을 놓고 그 손으로 왕을 더듬었다. 키스보다 더 서툴러서 3년이나 누군가와 침대를 공유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왕은 도대체 라파엘이 이런 것에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걸릴까, 자문해보았다. 어쩌면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것대로 좋겠지. 왕은 라파엘의 뒤통수를 바짝 잡아당기고, 그 입술 안을 혀로 휘저었다. 머리가 뜨겁다.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다리가 들린 채 왕을 받아들이며 라파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자신의 몸. 마치 유령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와중에 왕의 분신만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라파엘은 왕을 끌어안았다. 더 바짝, 물샐 틈도 없이, 서로의 숨결조차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왕이 거칠고 난폭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교합이라기보단 파헤치는 것에 가까웠다. 라파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힘으로 왕을 당겼고, 그 순간 라파엘과 왕은 동시에 절정에 올랐다.

새하얀, 아주 새하얀 시야.

붉은 선.

라파엘은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그의 몸 안으로 왕의 정액이 쏟아지고 있었다. 뜨거웠다. 용암은 이런 온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안네마리?”

왕이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열에 들떴다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그는 라파엘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라파엘은 언제나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지 않았던가. 태양이라도 보는 듯한 그 눈은, 설령 멀더라도 시선을 뗄 수 없다는 의지 또한 분명했다. 하지만 이 눈은…….

“쿠치아노.”

왕이 작게 속삭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라파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잘못 들었다며 정말 귀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고 타박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그러나 라파엘은 평소와는 달리 왕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늘한 검은 눈이었다.

“쿠치아노.”

왕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러자 라파엘이, 쿠치아노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얼굴이 가볍게 한숨 쉬었다. 하아 하는 그 한숨은 쿠치아노의 것이었다. 왕이 팔을 낚아채는 순간 라파엘이 눈을 뜨고 왕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은 맑은 흑경과 같아서 왕을 똑바로 비추고 있었다. 왕이 “안네마리?” 하고 부르자 라파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왕이 아는 것이었다. 그 순간 왕은 당황해서 라파엘을 놓아주고 말았다.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전하?”

라파엘이 왕을 한 번 부르더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여전히 특수군과 근위대의 경비는 완벽했고,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검에라도 찔린 듯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라파엘을 내려다보았고, 그다음에 시선을 돌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라파엘이 얼굴을 굳혔다.

며칠 전, 왕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왕은 곧 문 플레이스의 탑에서 발견되었고 그는 자신이 여기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이 더 말하고 싶지 않아 해서 사람들은 더 추궁할 수 없었지만, 왕이 집무실에 있는 동안 라파엘과 근위대 부대장 제이슨 리아스, 특수군 대장 스완 라 포는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왕이 어떤 경로로 탑에 올라갔을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추적해보았지만 전부 다 불가능하다는 결론만을 내렸다. 왕은 홀연히 사라졌다가 탑에서 발견되었다. 그게 다였다. 마법의 간섭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어떤 매개체도 없었다. 마법사의 접근도 없었다. 현재 공간 이동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왕을 공중 이동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경우 누군가의 눈에는 띄었으리라. 게다가 부엉이들을 부리는 야수사들도 전혀 그런 보고는 받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지 않은가.

라파엘이 왕을 붙잡으려 했다. 그는 왕을 사랑했고, 그의 ‘사랑’이라는 정의는 상대를 지켜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를 지키는 것이 라파엘의 기준이었다. 라파엘은 살수로서 살아왔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자였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타인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이 유령과도 같다면, 그는 왕을 지킬 수 없다.

“전하.”

불안감으로 가득 찬 라파엘이, 그답지 않게 당황해서 왕을 붙잡으려고 했을 때 왕이 그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라파엘이 있었다. 쿠치아노와 비슷한 얼굴을 가졌지만 전혀 다른 라파엘이 거기에서 그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왕은 그 순간 라파엘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라파엘이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끌어당겨 안았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는 것이 가슴께에서 느껴졌지만 그는 라파엘을 놓아주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에는 쿠치아노였다. 

왕은 자신이 ‘티오안’이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 둘은 같은 사람이던가? 분명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쿠치아노와 라파엘은…… 달랐다. 왕 자신에게는 그 둘이 같을 수 없었다.

“전하? 아이브리 전하?”

“내 이름을 잊지 않는 게 기적이다. 네 머리는 왜 한쪽으로만 잘 돌고 다른 쪽으로는 아예 멈추느냐? 이래서야 언제쯤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겠느냐, 응?”

왕이 웃음 띤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는 라파엘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이 왕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테스트에 통과…… 라니, 무슨……?”

“내일 다시 수업하지.”

라파엘의 얼굴에 ‘내일도 말입니까?’라고 쓰여 있었지만 왕은 보지 못한 체하며 일어났다. 라파엘의 얼굴이 희미한 울상을 그렸지만, 왕이 손을 내밀어주자 결국 그는 헤죽 웃고 말았다. 3년이나 노력한 끝에 라파엘은 ‘히죽’ 하는 웃음을 ‘헤죽’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웃는 것도 재주라고 스완 라 포는 빈정거렸지만 왕은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왕의 손을 잡은 채 일어났다. 속옷이 없어 정액이 다리를 타고 흘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신경 쓰는 대신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왕은 아주 즐겁고 유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섹스란 좋은 건가.

라파엘은 손으로 왕의 뺨을 어루만졌다. 왕은 그를 안고 나면 이런 얼굴을 했다. 그전에 어떤 불쾌한 일이 있었든, 얼마나 마음이 상했든 간에 그는 라파엘을 안고 나면 대단히 상쾌해 보이곤 해서 라파엘은 신기했다. 라파엘은 그에게 안기면 나른하고 몸 안이 저린 기분이었는데.

왕이 눈을 감았다. 라파엘이 뺨을 어루만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왜 장님처럼 더듬는 거냐?”

취한 것처럼 눈을 감아준 주제에 말은 잘했다.

“머리가 나쁜 걸로 모자라 눈도 나쁘면 곤란한데, 눈이 나빠진 거냐. 응? 아니면 머리가 완전히 나빠져서 눈까지 나빠질 때를 대비해 미리 연습이라도 해두는 거냐?”

왕이 독설을 지껄여댔지만, 라파엘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눈을 감은 건 왕이었지 라파엘이 아니었다. 라파엘은 도리어 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금발과 비단결 같은 피부를 바라보고 느끼던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근위대장입니까?”

“그래…….”

라파엘의 손이 왕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웠다가 사나워지는 것이 종잡을 수 없는 입술이다. 라파엘의 성기를 수십 번 물었던 입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입술은 늘 더러워 보이지 않고,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제가 근위대에 간섭해도 됩니까?”

“이미 하고 있지 않느냐?”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왕다워 라파엘은 잠시 멍하니 왕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의 시선에서 온도가 올라가 있다. 조금만 유혹해도 넘어오는 비를 보며 왕은 심술궂게 웃었다. 그의 비는 언제나 손쉬웠다. 처음부터 그에게만은 손쉬운 사람이었다. 왕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음 짓자 라파엘이 홀린 듯 다가와 그 입술에 키스했다. 까치발을 들고 키스하는 라파엘의 허리를 잡은 채 왕은 서툰 키스를 즐기다 그의 혀를 잡아채 농후한 키스를 해주었다. 마치 키스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  §  §

제이슨 리아스는 근위대 부대장이었다. 옛날에는 특수군 부대장이었으니 ‘만년 부대장’이라는 별명이 달릴 만도 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그 별명이 별로 어울리진 않았다. 특수군에서는 부대장이었지만 근위대에서는 대장 대리였다. 대장은 말이 대장이지 대장일 수 없는 남자였고, 제이슨은 대장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대장 대우를 받든 대장 대리이든 간에 그가 대장이라는 뜻은 아니어서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왕은 그 남자가 예뻐 죽는 모양이지만 제이슨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라파엘 에반스를 물고 빠는 왕도 이해할 수 없고, 왕을 위해서 결국 몇 년째 여장을 하고 사는 라파엘 에반스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이 모든 걸 ‘변태라서 그래’로 축약해서 자신의 머릿속에 잘 가둬두고 있었다). 안네마리 제1왕비, 라파엘 에반스, 그리고 근위대장 라파엘 라 쇼어라는 세 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그의 건너편에 앉은 채 경비를 강화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아니, 비전하.”

처음 라파엘 에반스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부르면 자신의 목을 단숨에 따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겪어 보니 그는 의외로 무던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용건 외에는 스스로가 어떤 모욕을 받는지 관심 없어했다. 하긴, 에반스는 본디 그래서 유명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는 복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뢰를 받으면 누구보다 잔혹하게 해낸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정말 위대한 것이었다. 변태의 사랑이라고 해도 위대하긴 위대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본인이 무슨 짓을 당해도 움직이지 않던 에반스가 왕을 위해서는 어찌나 빠릿하게 움직여대는지.

‘아, 피곤해 죽겠어.’

에반스든 쇼어든, 어쨌거나 라파엘이 움직이면 피곤한 건 그 바로 밑인 자신이기에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라파엘에게 말을 걸었다.

“비전하, 여기서 어떻게 더 경비를 강화합니까. 전에 말씀하신 야수사 건도 사실 무지하게 곤란했다고요.”

경비가 더 강화된 건 사실이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천한 야수사 따위를 궁에 들여놓자고 건의(강요)하시는 바람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십니까. 아니, 왕비님이야 ‘야수사들의 부엉이로 시야를 넓히자’는 아이디어 하나만 던져주시면 끝이겠지만, 그걸 위에 보고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저는 깨지고, 깨지고, 깨지고……. 평민이 궁에 들어온 걸로도 모자라 이젠 천민까지 끌어들이려 한다는 욕설을 정말 뒈지게 먹었던 기억이 나자 제이슨은 ‘라파엘 에반스고 뭐고 계급 떼고 붙자, 이 새끼야’라는 소리가 혀끝까지 나온 것을 내리눌러야 했다.

“선 플레이스 근처 숲에 염산 함정을 놔.”

라파엘의 말에 제이슨이 벌떡 일어났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소리를 내리누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군 생활이 준 선물이리라.

“비전하!”

제이슨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 숲에는 별별 사람이 다 들어간단 말입니다. 자객이나 첩자보다 귀족분들이 훨씬, 훨씬, 훨씬 많이 들어가시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선 플레이스 근처 숲이라는 건 이그나치오궁 근처잖아! 제이슨의 말에 라파엘이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라고 되물었다. 그게 뭐 어렵냐는 얼굴이라 제이슨은 입을 멍하니 벌리다 턱이 빠질 뻔했다. 턱이 빠지기 직전에 수습한 제이슨이 “절대로 안 돼요. 죽어도 안 됩니다” 하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절 죽이세요”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제이슨이 이렇게 나오면 정말로 안 되는 거라 라파엘은 염산 함정을 포기했다. 사실 라파엘은 귀족이든 뭐든 한 명만 염산 함정에 빠져서 소문을 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분히 살수다운 생각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라파엘과는 달리, 목적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그에 걸맞은 사람만을 죽이도록 노력하는 군인인 제이슨은 절대로 안 된다며 라파엘을 혐오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렵네.

라파엘은 의자에 앉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어려웠다. 라파엘은 왕 한 사람만 지키면 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왕조차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라파엘은 왠지 숨이 막혔다. 옴짝달싹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일어섰다.

“누군가를 지킨다고 말하면서 이것저것 가리면, 지킬 수 없어. 절대로.”

라파엘의 말에 제이슨이 그를 도전적으로 노려보았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이유가, 어떤 짓이든 다 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어주진 않습니다. 절대로.”

라파엘이 “당신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해. 전하께선 문 플레이스의 탑으로 올라가셨어. 우리는 아무도 그 경로를 추적해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전하께선 기억도 잃으셨지. 당신의 최우선 순위가 뭐지?”라고 물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라파엘이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제이슨이 물었다.

“비전하의 최우선 순위는 뭡니까? 전하의 안전이십니까, 아니면 비전하의 사랑입니까?”

제이슨의 말에 라파엘이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의 안전.”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라파엘의 검은 머리칼이 틈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제이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실 제이슨에게 최우선 순위는 자기 자신이었다. 왕의 안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진 않았다. 물론 자신은 군인이므로 목숨을 바쳐 왕을 구해내겠지만, 제이슨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 왕을 저울에 올려서 비교한다면 제이슨은 어머니를 먼저 구하러 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파엘은 망설임이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을 정도라면 라파엘은 뭐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목숨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제이슨은 진심으로 라파엘이 무섭고 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라파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호위병들이 라파엘의 뒤로 죽 늘어서 있었다. 왕이 사랑해마지 않는 왕의 총비. 병약해서 거의 궁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는 총비가 오랜만에 이그나치오궁의 근위대장 집무실까지 나온 참이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호위병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고, 시녀들은 혹시 왕궁 사정에 둔한 라파엘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라파엘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생각은 알지도 못한 채 제이슨의 말을 반추해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이유가, 어떤 짓이든 다 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어주진 않습니다. 절대로.’

제이슨 리아스는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이미 생부와 친형제를 죽였고, 몇 번이고 더 죽일 수 있었다. 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었다. 라파엘은 자기 자신조차 제거할 수 있었다. 산 채로 팔을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해낼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최우선 순위를 위해서는 절박하고 냉혹해지지 않던가? 제이슨 리아스는 분명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라파엘은 제이슨 리아스가 그를 싫어하든 말든, 그가 이상하다 여기든 말든 그런 건 하등 상관없었다. 그가 상관하고 있는 것은―.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라파엘은 우뚝 멈춰 섰다.

“전하께서는.”

라파엘의 멍한 목소리에 시녀장이 “예, 비전하”라고 서둘러 대답했다.

“전하께오선 어디 계시지?”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 중이면 만날 수 없다. 라파엘은 한숨을 쉬었다. 라파엘이 어쩔 수 없이 정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면서 시녀들은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회의 중이 아니어도 왕비는 왕을 만날 수 없다. 왕이 자신의 비를 만나는 데는 절차가 필요하지 않지만 왕비가 왕을 만나는 데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라파엘은 종종 그 절차를 무시하곤 했다. 우아하진 못하지. 시녀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라파엘은 기품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고귀한 인간이 아니었다. 고귀한 피를 타고났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우아했던 마리 트리지아의 분신이면서도 그녀의 그런 점은 조금도 가지지 못했다. 라파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냈다. 어떤 수단을 쓰든 간에. 라파엘이 지금 덜 절박한 것일 뿐, 만약 정말로 절박했다면 왕이 회의 중이라 할지라도 만나러 갔을 것임을 시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그나치오궁 앞에는 붉은 마차가 서 있었다.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그 마차는 모든 귀부인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라파엘은 이런 마차를 벌써 세 대나 가지고 있었다. 흰 백합과 사슴으로 된 제1왕비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와 그 시녀들이 타고 갈 마차까지 뒤에 두 대가 더 서 있었다. 시녀들과 함께 라파엘이 마차에 오르자 시녀장과 시녀 두 명, 호위병 두 명이 같이 마차를 타고, 마부석에도 호위병 두 명이 올라탔다. 그리고 호위병들이 일제히 마차 주변에 서 있는 말에 올라타고, 그제야 시녀들이 뒤에 서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 복잡한 순서가 끝나서야, 이그나치오궁에서 걸어서도 얼마 걸리지도 않는 문 플레이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

라파엘이 마차 안에서 시녀장에게 속삭였다.

‘전하를 언제 뵙게 되지?’

시녀장이 새끼 사슴 가죽으로 싸인 수첩을 꺼내 들었다.

‘오늘 밤에 파티가 있습니다. 동행하실 테니, 그때 뵈시겠군요.’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볼 테니 초조해할 일은 아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라파엘은 시녀장과 시녀 한 명 사이에 끼어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그나치오궁에 숨겨져 있는 특수군들은 웬만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라파엘의 눈에는 쉽게 보였다. 저 정도의 경비면 사실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될 일이다. 실제로 요즘은 왕궁이 습격받는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라파엘은 차가운 눈으로 이그나치오궁에서 문 플레이스까지의 길과 그 사이의 경비를 내내 확인했다. 어떤 경비도 완벽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데…… 어째서 왕은 문 플레이스의 탑에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라파엘은 탑에서 만난 왕을 떠올렸다. 한순간, 라파엘은 그가 왕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법이라든가, 그런 가능성이 떠오르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소리 질렀다.

그는 너의 왕이 아니다.

라파엘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가 뭔지 알았다는 듯 가볍게 신음하더니 라파엘의 눈을 감기고 ‘안네마리’라고 라파엘을 불렀다. 그것은 왕이 라파엘에게 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그저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준 것은 왕이었다. 그리고 그 왕이 라파엘을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는 라파엘이 아는 왕이었다. 라파엘은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왕이 한 번 더 말했다. ‘나다. 너의 아이브리다.’ 그리고 눈을 뜨자 거기에는 라파엘의 왕이 서 있었다.

그저 착각인가? 라파엘은 가까워져오는 왕후궁을 노려보았다. 라파엘은 우연도, 착각도 신용하지 않았다.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을 이용해서 라파엘은 사람을 죽여왔다. 사람들이 ‘어, 착각했나?’라고 생각했을 때 라파엘은 담을 넘었고, ‘평소 오던 심부름꾼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뭐 어때’라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을 때 상대의 목을 잘랐다. 그는 착각이라는 허울 좋은 감각을 경계해왔다. 그리고 그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인상 깊었다.

“비전하, 다른 예정이 있으신지요?”

시녀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마차의 문이 열려 있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젓고 마차에서 내렸다. 지금은 낮이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는 왕을 해할 수 없을 것이다. 라파엘은 밤에 만나는 왕의 곁에 반드시 붙어 있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라파엘의 착각이라 할 수 있었다. 라파엘이 왕의 곁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왕이 라파엘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밤에 만날 줄 알았던 것과는 달리 왕은 굳이 정무를 보는 와중에 시간을 내서 문 플레이스에 들러서는, 파티를 위해 치장을 시작한 라파엘의 곁에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네 주인에게 무슨 불만을 가진 거냐? 이게 청초한 왕비의 모습이냐? 음란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쇄골 아래쪽은 보이지 말라고. 그리고 스타킹도 그물은 무슨 그물이냐. 내 비가 펄떡거리는 은어라도 된단 말이냐?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애교점이 너무 입술에 가깝지 않느냐! 키스해달라니, 도대체 누구에게 꼬리치게 하는 거냐?”

시녀들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름이다. 헤수스는 그렇게 더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다운 유행이 넘쳐나고, 귀부인들은 서로의 드레스에 트집 잡기 일쑤였다. 요즘 드레스의 유행은 가슴 위쪽까지 파이는 것으로서, 가슴을 바짝 올려붙여서 풍만하게 드러내는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거기에 가슴 윗부분에 인조 보석으로 작은 장식까지 하는 것이 대단한 인기였는데 특히나 가든 하우스나 객실에 다녀와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며 사랑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다. 물론 그 가슴의 장식을 헤집은 건 남편이 아니겠지만, 키스마크가 아닌데다 본래 귀족 사회에서 유부남과 유부녀는 외도가 상식인 만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도리어 애인이 있다는 것이 자랑에 속한다. 그 장식이 흐트러지고 흐트러질수록 격렬한 사랑을 받은 것이라, 귀부인들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인조 보석 가격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현 왕비는 언제나 목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귀족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숙한 여자라 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왕의 그 수많은 악의적인 소문에 소문이 하나 더 붙었다. 왕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위협을 가한다는 소문이었다. 왕후인 마리 트리지아에 현재 왕비인 안네마리까지, 왕의 비들은 정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왕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왕의 행실이 비난받았다. 왕은 언제나 외도를 하고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 때는 여러 남자와, 게다가 지금도 라파엘 라 쇼어를 감춰두고 있지 않은가. 근위대장이라는 그 남자가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거나 사냥 대회에 나타난, 왕과 진한 키스를 했던 그 남자는 확실히 존재하고, 왕의 정부임이 분명하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럼 우리 비전하가 너무 불쌍하잖아.’

시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왕이 안네마리 제1왕비를 곁에 두는 것은 ‘안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왕이 후계자를 가지면 왕비는 버려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에 라파엘이 유행에 훨씬 떨어진 옷차림까지 하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왕비의 몰락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치 그런 사람들을 만족시켜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시녀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인 침묵을 고수하는 가운데, 그들의 윗사람인 라파엘은 멍하니 거울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울 속의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시녀들에게 긴 잔소리를 늘어놓다 말고 라파엘을 돌아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왕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제법 괜찮다만.”

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의 목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라파엘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이렇게 나오면 수치를 알려주지.”

“수치.”

라파엘이 거울 속의 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그래, 내 앵무새. 수치를 알려주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정액을 흘리는 건 어땠지? 너는 그게 ‘창피하다’고 말했었지.”

또 다른 수치를 알려주지. 그렇게 말하며 왕은 라파엘의 목을 더듬어 올라가 그 턱을 어루만졌다.

“창피하다는 건 의외로 다양해, 안네마리.”

라파엘의 검은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라파엘이 이런 협박에 아주 약하다는 걸 아는 왕은 흐뭇한 마음으로 이미 화장한 라파엘의 뺨을 질척하게 핥았다. 혀끝에 닿는 분의 맛은 불쾌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 멀리서 왕비에게 충실하며 왕에게는 묘하게 반항적인―따지고 보면 그들의 모든 보너스는 왕의 개인 재산에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왕비의 시녀들이 어깨를 떨었기 때문이다. 왕이 혀를 내밀어 왕비의 뺨을 핥을 때마다 시녀들은 그저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왜 저렇게 심술궂으냐고! 그래도 명색이 비전하인데 유행의 발가락에는 따라야 할 거 아니야!’

왕은 왕비의 입술을 먹어치우듯 키스했다. 왕비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만지자 인조 보석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시종장이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왕은 또 왕비의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들어 시녀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제 왕비는 다시 치장을 시작하게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 인조 보석은 엄밀히 말하면 전하의 개인 재산이란 말입니다!’

시종장은 떨어지는 인조 보석을 아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왕은 라파엘의 정돈된 머리칼을 고정하고 있는 수많은 보석 핀을 빼내서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라파엘의 입술을 붉게 만든 것들을 먹어치운 왕이 라파엘의 입술 안쪽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달콤하면서도 뜨거운, 그 타액의 맛이 왕을 흥분시켰다. 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까이에 있는 라파엘에게 시선을 맞추려 하면서 좀 더 깊숙한 곳에 있는 타액까지 갈취하기 위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몇 번이나 자세를 고치며 키스하는 왕의 목에 라파엘의 가는 팔이 매달렸다.

왕의 물컹한 혀는 마치 낯선 생물 같다. 라파엘은 왕의 혀를 받아들이며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 라파엘이 조금 뒤로 물러나려 하자마자 왕이 쫓아와 그의 혀를 잡아챘다. 화라도 난 것처럼 난폭하면서 달래는 듯 몇 번이나 촉촉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왕이 라파엘에게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자 라파엘이 의자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잡았다.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깊은 키스였다. 왕은 늘 ‘그대가 너무 경험이 없어서야.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좋아지고, 즐길 수 있게 돼. 그러니까 연습하자고’라고 말했지만 벌써 3년이나 되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이렇게나 어지러운 것일까. 라파엘은 흐릿한 정신을 바로잡으려 했다. 지금 누군가가 왕을 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하지만 그 가능성조차 키스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왕은 이것이 익숙하고, 그저 좋고, 단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라파엘은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으면서 심장이 욱신거렸다. 연습. 왕은 그것을 누구와 했을까. 경험. 왕은 그것을 누구와 쌓았을까.

“안네마리…….”

왕이 입술을 붙인 채 자신을 불러서, 라파엘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왕은 너무나 근사해서 어느 누구도 왕을 거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남자도 왕을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가. 그건 당연해. 당연한 거니까 라파엘은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다. 그런데 당연한 사실에 심장이 아팠다. 그는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을 좋아하는데, 어째서 키스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 가슴이 아파야 하는 것일까. 왕은 그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왕은 그에게 쾌락과 아픔을 알려준다. 그로써 심장의 위치를 알려주고……. 왕은 쾌락과 아픔이 다른 것이라고, 교접과 고문은 다른 것이라고 말했지만, 라파엘은 때때로 그 둘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었다.

“역시 이 드레스는 안 되겠어.”

왕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유희로 시작한 가벼운 농탕질이 어느 순간 진심이 되어버린다. 위험한데. 왕은 흘끗 거울에 시선을 주었다. 거울 속에서 시종장과 시선이 마주치자 시종장이 곤란한 듯 흘낏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왕을 바라보았다. 늦었다는 뜻이었다. 곤란하지. 지금 여기에 온 것도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것이니만큼 지금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 솟구치는 욕정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라파엘을 꿰뚫고 싶었다. 그리고 라파엘을 몇 번이고 ‘안네마리’라고 부르며 그 몸에 자신을 집어넣고, 울리고,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것.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가 쾌락을 무서워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왕 자신밖에 없었다. 라파엘은 쾌락을 대단히 두려워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각이라는 것을 무서워해서 평소 왕은 라파엘을 심하게 다루지 않는 편이었지만, 가끔 시간을 들여서 라파엘에게 쾌락을 느끼게 하고는 그가 울면서 몸부림치고 결국 왕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왕은 몇 번이고 그에게 ‘안네마리’라고 귀에 쏟아부었다.

라파엘 에반스. 심장 대신 시계 장치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는 살인 기계.

하지만 누구도 그 살인 기계가 쾌락을 두려워한다는 걸, 그러면서도 쾌락을 주는 왕을 꽉 끌어안는다는 걸, ‘아이브리 전하’라고 부를 때의 목소리가 얼마나 애처롭게 젖는지, 사람을 몇이나 죽였다는 그 팔이 얼마나 창백하고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왕은 누구도 그것을 모르길 바랐다. 언제까지라도.

“절대로, 안 돼.”

그런데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왕비의 시녀들은 왕비를 반나체로 만들지 않았던가.

“절대로.”

라파엘은 아름답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장을 하면 그저 우스울 따름이겠지만 라파엘은 달랐다. 왕은 여자의 드레스에 욕정을 품은 적이 없었지만 라파엘의 드레스에는, 라파엘의 향수에는, 라파엘의 긴 머리칼과 레이스 장갑에는 미칠 것같이 흥분하곤 했다. 그는 그런 게 잘 어울렸다. 라파엘에게는 성을 초월한 분위기가 있었다.

라파엘은 멍하니 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왕이 천천히 그를 앉혀주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자 왕이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면서 몇 번이나 그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 멀어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왕비를 노리는 새끼들이 많아 피곤한데 이따위 옷이라니, 시녀장. 넌 대체 뭐 하는 계집이냐? 남자를 유혹하다 못해 죽이는 옷차림 따윈 절대로 용납 못 한다. 정숙하고 현숙하고 철두철미한 왕비의 모습으로 준비해드려라. 그리고 돈이라면 얼마든지 갖다 쓰라고 했는데 왜 이런 잡다한 보석들을 쓰는 거냐? 다른 드레스를 입혀라. 그리고 왜 툭하면 같은 드레스를 입히는 거냐? 새 드레스를 입히란 말이다! 남들이 보면 내가 내 비에게 드레스도 사주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왕비를 노리는 새끼’라면 딱 한 명 있었지만 그 왕비의 손에 죽지 않았던가. 이미 사라진 가여운 인생을 떠올리면서도 시녀장은 빈틈없는 얼굴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 전하.”

그러자 왕비의 시녀들이 일제히 허리와 무릎을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왕은 휙 등을 보였다. 어우, 저 싸가지. 시녀들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애써 다물었다. 정말 평민이었으면 넌 벌써 변사체감이야. 주먹이 운다. 그녀들이 일제히 이를 가는 동안 왕은 시종과 호위병을 한 사단은 이끌고서 문 플레이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왕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창문으로 확인한 시녀들이 일제히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름에도 겨울과 똑같은 드레스를 착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시녀장님!”

“계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귀부인들이 비전하를 보고 뭐라고 하는지 시녀장님도 아시잖아요.”

“이건 왕후궁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왕후궁의 자존심 문제라는 것에 시녀장은 깊이 통감했지만 정작 그 왕후궁의 주인은 멍한 눈으로 왕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좋으냐고 해봐야 저 무심한 남자는 ‘아무거나’라고 대답하겠지. 음식도 차도 다기도 식기도 꽃도 드레스도 전부 다 ‘아무거나’일 여주인을 생각하자 시녀장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아, 그래도 울지 말자. 마리 님의 하나뿐인 분신이고, 그분의 원수를 갚아주신 은인이 아니시던가.

‘마리는 에드워드에게 살해당했었어. 그리고 나는 원수를 갚았어.’

멀리 갔던 라파엘이 돌아와 시녀들에게 해준 말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간의 침묵 뒤에 덧붙였다.

‘하지만 마리의 명예 회복은 불가능해.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라고 전하께서 말씀하셨고, 당신들이 전하의 적이 된다면 나는 당신들을 처단하겠어.’

처단하겠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시녀들은 왠지 기뻤었다. 소위 말하는 윗사람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상황을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진심을 있는 대로 까발려준 사람도 없었다. 시녀장과 시녀들은 당연히 마리의 원수를 갚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내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개죽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다정하던 주인의 죽음을 그저 모르는 채 넘어갈 순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진상도 알았고 복수도 했다.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었고, 새로운 주인을 맞을 만했다. ……일단 먹고살기도 해야 했고.

하지만 시녀장은 전형적인 ‘무심한 남자’인 라파엘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왕비는 섬세하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만이 해낼 수 있는, 아주 어려우면서 미묘한 직책이다. 그런데 라파엘은…….

“비전하.”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라파엘이 문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응.”

“일단은 화장부터 다시 하지요.”

“응.”

여전히 문에서 눈을 떼지 않는 라파엘이 왕을 얼마나 사랑하는진 알겠다. 하지만 헤수스 왕궁이라는 곳은 사랑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시녀장은 머리가 아팠다.

왕은 마법의 다리 위에서 라파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 플레이스에서 기다려도 되고 이그나치오궁에서 만나도 되는데, 그는 또 마법의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매일 보는 라파엘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일 같이 자고 때로 그 몸을 안기도 하는 라파엘인데, 그는 종종 여기서 라파엘을 기다렸다. 문 플레이스까지 가는 것은 너무나 초조하게 보이는 것 같아 싫었고, 하지만 선 플레이스에서 기다리는 건 라파엘이 다가오는 게 보이지 않아서 싫었다. 시종들은 늘 ‘도대체 전하께서 왜 이러시는 겁니까?’라고 시종장에게 물어보곤 했지만 시종장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저 멀리서 나타나는 왕비의 일행을 보고 왕이 늘 기분 좋은 얼굴로 씩 웃었기 때문이다.

“늘 이렇게 늦다니. 넌 정말 느림보구나. 옛날에는 네가 사슴이나 토끼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거북이가 따로 없어.”

무슨 동물 농장도 아니고 그만하시지, 좀.

시녀들은 왕의 독설에 질려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라파엘은 왕의 심술 때문에 늦었으면서도 멍하니 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검푸른 밤하늘 밑의 왕은 빈틈없이 차려입고 있었다. 멀리 이그나치오궁에서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여름밤의 부드러운 바람과 왕이 내민 커다란 손바닥. 라파엘은 그 손바닥을 잡지도 않은 채 어째서 이 일상적인 것들이 이토록 특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왕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라파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네마리. 거북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거냐? ……물론 넌 아주 예쁜 거북이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거북이.”

그래봐야 파충류잖아!

―라고 시녀, 시종, 근위병이 속으로 동시에 소리쳤지만, 세 부류의 사람들 모두 훈련된 궁인들이었으므로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거리자 왕이 허리를 펴고 내민 손을 가볍게 움직여 보였다. 그제야 라파엘이 손을 잡았다. 그때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옷이…… 이게 뭐냐?”

왕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지는 것을 들으며 시녀장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왕궁에 들어와 외줄타기도 벌써 3년, 그녀는 이미 외줄타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새 드레스는 그 드레스 하나뿐입니다.”

이게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딱 그런 눈으로 왕이 시녀장을 내려다보았지만 시녀장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새 드레스를 명령하셔서…… 어쩔 수 없었나이다.”

왕은 짜증이 솟았다. 그는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서 램프를 빼앗아서는 라파엘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라파엘은 늘 그렇듯 청초하면서도 요염하고 아름다웠다. 청아한 매력은 마리 트리지아를 따라갈 수 없으니 왕비의 시녀들은 라파엘을 청순하면서도 요염하게 보이도록 치장하곤 했다. 그리고 왕은 그 요염한 모습을 볼 때마다 라파엘을 안고 싶은 충동과 다른 귀족들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야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라파엘은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요즘 여자들의 유행이라는, 실크로 된 천이 그 아래 있는 속옷의 레이스를 비출 듯 말듯 관능적이다. 게다가 풍성하게 퍼져 있으면서도 한쪽을 주름잡아 무릎 위쪽까지 드러낸 드레스는 왕의 살심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 다리에는 그물로 된 스타킹이 신겨 있었고, 그것은 맨살이 보인다는 걸 의미했다.

‘이것들이 다 죽고 싶은가.’

왕은 오랜만에 폭군다운 마음이 들었고, 그 순간 장총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시녀장이 입술을 깨물고 왕이 장총을 꺼내려던 그 순간,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어디에 적이 있는 겁니까.”

라파엘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왕은 이것이 ‘라파엘 에반스’, 즉 살인 기계의 목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사무적인 목소리.

“어디입니까. 제게는 전혀 느껴지지가…… 아.”

왕이 라파엘을 확 안아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라파엘의 사각지대에서, 시녀장에게 ‘너 오늘은 운이 좋았는 줄 알아라’라는 시선을 한 번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전하?”

라파엘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왕은 한숨 대신 웃었다. 그는 라파엘의 시녀들에게 짜증이 났지만 라파엘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것보다는 짜증을 참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라파엘의 시녀들은 가끔 불온해서 그렇지, 어쨌든 유능하니 참아줄 수 있다. 쓸모없는 대신들도 참아 넘기는 마당에.

“전하…….”

왕은 라파엘의 목소리가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눈여겨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도 않는 그 풍경처럼 희미해도, 너무나 아름답고 연약한 목소리라고 여기면서 라파엘의 귓가에 키스했다.

“가자, 파티에.”

“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짜증이 났을 뿐이야.”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에 아주 조심스럽게 왕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조금 더 조심스럽게 얼굴을 묻었다. 사람에게 이렇게 가까이 닿았던 것은 왕뿐이었다. 라파엘은 누군가에게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왕에게 닿는 것은 좋았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뭔지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런 게 그 비슷한 색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라파엘은 여실히 깨닫게 된다.

‘사람을 죽이면 피가 뜨거워져.’

동료들이 말했던 것은 결코 쾌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아픔도 포함된 ‘열’ 자체였다는 것을. 하지만 왕은 이런 감각을 모를 것이다. 아니, 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미 이 감각을 나눈 사람이 있겠지.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그가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는 왕의 검이 되기로 결심했고, 그러기 위해 세상에 경고를 했다. ‘신이여, 은총을. 왕이여, 용서를.’ 다분히 귀족 취향인 이 문구를 생각해낸 것은 스완 라 포였지만, 세상에는 쇼어 가문의 남자들을 죽인 것이 근위대장 라파엘 라 쇼어라는 것이 정설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으며, 라파엘은 왕의 검이 되어 왕의 앞길을 막는 그 누구라도 벨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미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이유도 아니었다. 하지만.

왕은 문득 자신의 목에 두른 라파엘의 팔에 힘이 들어간데다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날씨가 좋아서 이대로 안고 이그나치오궁까지 걸어갈 셈이었는데 라파엘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게 느껴져 그는 “안네마리?” 하고 불렀다.

“예, 전하.”

“어디가 정말 안 좋은 거냐?”

왕의 물음에 라파엘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을 비롯해 궁에서 살아오거나 세도가에서 까다로운 주인을 모시느라 눈치가 백 단이 된 사람들에게 그 대답은 ‘무슨 일이 있다’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왕은 잠시 라파엘을 토닥이다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파엘은 왕에게 매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왕에게 매달리고 싶지만 왕의 목을 졸라버릴까 무서워서 팔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는 왕을 사랑했다. 사랑이 뭔진 모르지만 이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맞았다. 그는 왕을 지켜주고 싶었고, 왕을 생각하면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러니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 감정이 맞는데, 그런데.

어째서, 가면 갈수록 아파지는 것일까.

행복에 가까워질수록 왜 두려워지는 것일까.

라파엘은 왕에게 안긴 채 마차에 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영원히 이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라파엘, 내가 수수께끼 하나 내줄까. 이걸 풀면 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에게 양검을 선택하게 해준 교관이 우스개처럼 말해주었던 수수께끼를 그가 풀지 못했던 것처럼. 매일 왕이 가르쳐주는 지리를 매일 틀리는 것처럼.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늘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좋았는데, 어째서 가면 갈수록 모르는 것들이 무서워지는 것일까. 안네마리가 된 지 3년, 라파엘은 가면 갈수록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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