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왕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상한 일이다. 그의 비는 낯선 기척이나 살기가 아니면 잠에서 깨지 않는 인물이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가 침실을 나와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단 한 명의 시종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다가 침대 맡에 총을 두고 왔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어째서? 의아해진다. 그는 어느 때라도 총을 두고 오는 법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런 순간에 총을 두고 왔을까?
침실로 돌아갈까 해서 뒤를 돌아보자 침실 문이 닫혔다. 쾅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침실로 달려가려는 다리를 이성으로 붙잡았다. 당장 침실로 돌아가 그의 비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마치 꿈결처럼 기이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꿈일지도 모른다.
――꿈치고는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위험한 것은 라파엘이 아닌 그였다. 타깃이 되는 것도 그이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자도 그였다. 라파엘은 반드시 스스로를 지켜낼 것이다. 왕이 라파엘의 곁에 없다면 더더욱 라파엘은 그 스스로를 지키기가 용이하리라.
왕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쾅 소리를 내며 정면의 문이 열렸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함정인가? 왕은 복도의 한중간에 서서 뒤에 흘낏 시선을 주었다. 그의 연인,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남자, 그를 위해서 인생을 포기하고 대외적으로 성(性)까지 바꾼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고 근위병도, 특수군도 보이지 않는다면, 왕은 라파엘에게서 멀어지는 게 옳았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라파엘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다.
왕은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열린 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함정이라 할지라도, 그는 역함정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이제껏 얼마나 많은 함정을 헤쳐 나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해치고자 애를 썼던가.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그이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왕은 자신이 꿈과 현실의 괴이한 경계선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앞에는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 모양을 하고 있는 암흑이었다. 그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왕은 그림자가 뒤를 돌아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티오안.」
왕은 멍하니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암흑에 불과한 그 그림자가 어떤 인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왕은 크게 눈을 떴다. 수천 년 전의 일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동안 왕은 어떤 이름 하나를 되뇌고 있었다.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 자신을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 한숨을 쉬면서도 거부의 말은 결코 내뱉지 않았던 입술. ―그자의 이름.
「티오안, 네가 이겼어. 율레즈는 너를 용서하셨다. ……하지만 다음엔 쿠치아노의 지지로도 용서받지 못할 테니 다시는 주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도록.」
암흑의 그림자가 작게 소용돌이쳐서 사라지려는 순간 왕은 그를 붙들었다.
「키탄.」
이미 왕의 팔만큼 작아진 암흑의 소용돌이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뭐지?」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암흑의 소용돌이가 기묘한 초승달 무늬를 그렸다. 웃음처럼.
「알고 있잖아.」
소용돌이는 공중에서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왕은 암흑이 사라진 허공을 노려보았다. 눈이 아플 때까지 노려보아도, 그는 답을 얻지 못했다. 쿠치아노다. 쿠치아노가 연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으나 결코 먼저 손을 내미는 법도 없던 쿠치아노가 왜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어 그에게 달려온 건가? 만날 가능성은 적었다. 만날 수 없을 가능성이 더 컸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윤회를 반복해볼 작정이었던 것이었을까. 신의 생명은 무한하고 따분하다. 모든 신은 때때로 인간화하여 인간의 유한생을 즐긴다. 그 치열함의 매력에 빠져든다. 티오안도 그랬고, 키탄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쿠치아노만은 그런 적이 없다. 그는 인간의 유한생에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율레즈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어쩌면 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안고. ―보장되지 않은 단 한 가지를 위해서 쿠치아노는 달려왔을까.
“전하, 어디 계십니까?!”
근위병들의 고함이 선 플레이스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선 플레이스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왕은 멍하니 창문을 통해 선 플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자각했다. 자신은 문 플레이스에 서 있었다. 분명 라파엘과 자신의 침실에 누워 있었는데, 복도는 단 하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문 플레이스의 가장 높은 탑 속에서 선 플레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가 죽은 그 탑에서.
마리 트리지아는 아주 낮은 가능성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고, 여기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 낮은 가능성은 그녀에게 얼마나 절실했던 것일까. 그녀에게 가능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토록 절박했었다.
고위 신인 쿠치아노 또한 그러했던 것일까.
“능력은 돌아오지 않는군. 과연, 이번 생은 인간으로 살며 반성하라 이건가.”
왕이 중얼거렸다. 그는 탑의 창을 열고 선 플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인영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실제로 날아다닌 건 아니지만 민첩하게 그의 침궁을 샅샅이 뒤지며 빠르게 움직이는 그 인영들은 정말로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명이 그의 침실 발코니 창을 열었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그 고함을 듣자마자 라파엘은 왕의 총과 자신의 검을 들고 튀어나갔다. 그는 왕의 흔적을 따라 복도를 내달리다 주춤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왕의 흔적은 복도의 건너편에서 뚝 끊겨 있었다. 라파엘은 “들어오지 마!”라고 일갈한 뒤, 응접실의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왕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납치를 당했다면 그런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침입한 흔적 또한 없었고, 카펫에선 눌린 자국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응접실 창과 발코니 문을 열고 그 주변부와 지붕까지 뒤졌지만 쓸 만한 것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라파엘은 다시 침실로 돌아와 샅샅이 조사했지만 수확은 얻지 못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찾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기술을 가진 납치범이라니. 그가 왕비가 된 3년 사이, 납치의 기술이 갑자기 획기적으로 발달이라도 했단 말인가. 어차피 인간이 인간을 납치하는 기술에서 획기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마법? 마법인가?
고작 3년이다. 라파엘은 당황했다. 왕의 곁에서 평온하고, 아무런 일도 없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던 날들은 고작 3년이었다. 그 3년 동안 그는 얼마나 마음을 놓은 걸까. 왕이 사라지는데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고작 3년 만에, 그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왕을 잃어버렸다. 말도 안 돼. 라파엘의 머릿속이 공포로 바짝 말라붙었다.
라파엘은 발코니 창을 열었다. 강력한 마법은 허용 범위가 좁고, 약한 마법은 넓다. 인간의 마나가 한정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법이라면 최소한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매개체를 회수할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었다. 인간을 납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라면 매개체의 크기도 상당할 것이며, 또한 그 인간을 멀리 데려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파엘은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왕을 사랑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라파엘의 정의는 수호였다. 그는 왕을 반드시 지킬 것이고, 또한 이런 짓을 한 적들을 처단할 것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 플레이스의 탑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바로 달렸다. 발코니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마법의 다리로, 마법의 다리를 곧장 달려서 문 플레이스로 달린 그는 탑으로 향하는 하나뿐인 계단을 뛰어올랐다. 세 계단, 네 계단씩 뛰어오른 라파엘이 탑의 나무문을 잡아 열었다. 아니, 잡아 뜯었다. 나무문이 계단 밑으로 떨어졌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전하?”
라파엘이 멍한 얼굴로 왕을 불렀다. 그러자 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왕은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고, 라파엘은 그런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여기에 도착했는지, 라파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왕의 표정이 이상했다. 왕은 늘 생기 있는 얼굴이었는데 지금만은 몹시 이상했다. 조용하고 낯선 얼굴. 분명 라파엘 자신이 아는 왕의 얼굴인데도 어딘가 낯익지가 않아서 라파엘은 눈을 부릅뜨고 왕을 바라보아야 했다. 라파엘은 암살자라는 직업상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몹시 능했다. 타깃이 변장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는 억지로 훈련된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왕은 변장을 한 게 아닌데도 왠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왕이 천천히 다가와 라파엘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왕이 눈썹을 올렸다.
“왜 그러지?”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고, 왕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라파엘이 다시 물러서려고 했을 때 왕이 팔을 뻗었다. 상의를 입지 않아 그대로 드러난 팔이 라파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라파엘은 어깨를 잡은 손과 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고, 그제야 왕은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아아” 하고 신음했다. 그리고 왕은 다른 한 손으로 라파엘의 눈을 가렸다.
“안네마리, 나다. 너의 아이브리다. 토끼 같다, 사슴 같다 했더니 이젠 사람을 아예 못 알아보기로 한 거냐?”
짓궂게 웃는 목소리는 왕의 것이었다.
왕이 라파엘을 끌어당겼다. 키가 작은 라파엘이 왕의 품에 안기자 왕이 가볍게 웃었다. 왕의 입술이 라파엘의 입술에 닿았다. 라파엘이 멈칫하며 입술을 벌리지 않자 왕이 이를 세웠다.
“착하게 굴어야지.”
왕의 말에 라파엘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왕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해서 그는 저항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자 왕의 존재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잠깐 달빛 때문이었다. 그래, 분명 달빛에 잘못 보여서 왕이 낯설게 느껴진 걸 테다.
왕의 혀가 라파엘의 혀 아래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혀가 천천히 라파엘의 혀를 끌어냈다. 키스는 뱀처럼 느릿느릿했다. 하지만 뱀의 독처럼 진한 중독성이 있었다. 라파엘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왕의 팔목을 잡고 떨쳐냈다. 그리고 왕의 목에 매달렸다. 왕에게서 섹스를 배운 라파엘이 애가 단 것처럼 왕의 혀를 옭아맸지만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라파엘이 서툴게 왕의 혀를 자신의 혀로 문지르다 결국 입을 벌리면, 그때에야 왕은 다시 느릿하게 그 혀를 탐해주었다. 라파엘이 왕의 중심부에 자신의 것을 비비기 시작했다. 하고 싶으면 이렇게 보여줘야 한다고 왕이 장난처럼 말했던 것을 진짜로 받아들인 풋내 나는 제자의 행동에 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왕의 웃음에 라파엘은 잠깐 고개를 움직였지만 곧 다시 왕에게 키스해왔다.
왕이 고개를 뒤로 움직인다. 그것을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라파엘은, 그리고 장난이라고 생각해도 거기에 세련되게 받아칠 능력 따윈 없는 우직한 라파엘은, 곧 멀어지는 왕을 쫓아가 왕의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끌고 와 입술을 벌렸다.
“유린해달라는 것 같구나.”
잠시 입술을 떼고 라파엘의 옷을 벗기며 왕이 속삭였다. 라파엘은 여성용 잠옷을 입고 있었다. 잘 때만이라도 남성용 잠옷을 입혀주고 싶어하는 시녀들과는 달리 왕은 확고하다. 왕과 침실을 같이 사용하는 이상 누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섹스 중이라 할지라도 급한 용건이 있으면 침실 문은 열린다. 왕은 라파엘에게 시트를 뒤집어씌우고 침대의 휘장도 빈틈없이 친 다음 그 자신이 직접 침대 밖으로 나가 보고를 들었다. 그런 상황이니 섹스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옷은 무조건 여성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왕 자신이 여성용 잠옷을 선호하기도 했다. 왕은 남색가고, 여장을 한 남자에게 도착적인 쾌감을 느끼긴 했어도 여장을 한 여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근육질의 남자 또한 좋아했는데, 그런 그가 여성용 잠옷을 선호하는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여성용 잠옷은 벗길 필요가 없었다. 왕은 라파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치마 들어봐.”
“……흣!”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왕은 종종 이런 짓을 시킨다. 단순히 잠옷을 입었을 때만이 아니라 그는 언제든지 왕이 말하면 치마를 들었다. 양손으로 치마를 들면, 왕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타구니를 핥았다. 왕이 핥는 방식은 다양했는데, 오늘은 길게 괴롭힐 생각인 듯 혀를 내밀어 팬티의 레이스 부분부터 핥고 있었다. 라파엘은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성기가 있어 그 성기를 위쪽으로 갈무리해서 팬티에 집어넣고는 했는데 왕이 핥는 레이스 부분은 맨 끝의 뒷부분에 해당했다. 왕은 까칠까칠한 레이스의 그물 사이로 혀를 뾰족이 집어넣어 성기를 핥았고, 라파엘의 손은 가면 갈수록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라파엘의 손에서 잠옷이 후드득 떨어졌다. 왕은 라파엘의 잠옷 안에 갇혀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 입김이 젖은 곳에 닿았다. 라파엘이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왕은 라파엘의 엉덩이를 움켜잡아 그러지 못하게 했다.
흐릿한 시야가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알려주었다.
라파엘의 요염한 아랫도리가 은은히 보였다. 왕은 라파엘의 옷차림에 간섭하고 있다. 많은 남색가들이 그렇듯이 왕도 상당히 세련된 인물이다. 미적 기준이 높고 궁정 신사들 중에선 탐미적이라는 인물들 중 가장 윗선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그런 인물이니 라파엘의 옷차림에 간섭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라파엘의 모든 옷차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었는데 시녀들은 그런 그를 재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대들진 못했다. 시녀들의 봉급 외 보너스가 왕의 개인 재산에서 나오는데다, 실제로 왕의 어드바이스를 받은 모든 옷이 라파엘에게 기가 막히게 어울렸기 때문이다(그게 아니라도 그녀들이 왕에게 대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시녀들이 왕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왕이 라파엘의 속옷에 대단히 집착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때는 아예 속옷을 입히지 않기도 했던 왕은 이제 속옷을 입히긴 입혔는데 그 속옷은 일관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엉덩이 부분은 두 종류가 있었다. 선 하나가 엉덩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형과 엉덩이 전체를 감싸는 형. 첫째는 보통 때에 입고, 둘째는 왕의 정액을 받아들였을 때 그 정액이 흘러나오는 것을 받기 위해서 입는다. 하지만 앞부분은 일관되게 레이스였다. 그리고 모든 속옷은 유행에 걸맞게 아주 작았다. 그래서 라파엘의 경우엔 성기를 갈무리하면 귀두가 팬티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작았다. 아마 다른 궁중 사교계 남성이라면 총으로 자살을 했을 만큼 수치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라파엘은 별로 수치스러워하진 않았다. 그리고 왕도 이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도리어 라파엘이 견딜 수 없는 건 이것이었다.
왕이 튀어나온 귀두에 가볍게 키스하고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빨아들이면서 입술을 미끄러뜨리고, 다시 뒤로 올라오며 구멍에 가볍게 키스하는 왕 때문에 라파엘이 진저리를 쳤다. 어느새 창가에 등이 닿아 있었다. 창가에 기대자 시원한 바람이 몸을 쓸고 지나가서, 라파엘은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왕을 받아들이는 곳이 간지러워진다. 라파엘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왕은 그의 속옷조차 벗기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쾌락은 지독했다.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쾌락은 참을 수 없다. 라파엘은 그것이 언제나 괴로웠고, 또 그것에 빠져들었다.
“국왕 전하, 비전하. 여, 여기…… 어, 여기 계셨…….”
근위병이 달려오다 말고 주춤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도 병약하고 앳된 왕비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고 잠옷 치마는 솟아 있었다. 저 치마 안에는 분명 왕비를 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들어가 있겠지. 그 유일한 인물이, 하나뿐인 비의 잠옷 속에서 무릎을 꿇은 채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
“꺼져.”
자기 때문에 온 궁이 난리가 났는데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왕이었다. 근위병은 “예, 예!”라고 소리치고 재빨리 물러났다. 그러면서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평소 무표정하던 왕비의 새빨간 얼굴에 당장 설 것 같았지만 그보다는 왕의 모습이 놀라웠다. 왕이 비를 총애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왕비의 잠옷 안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에게 봉사해줄 정도로 사랑이라는 걸 하다니, 몰살의 즉위 축하연으로 유명한 그 왕이 말이다. 쇼어 가문도 반 토막을 낸 그 냉혹한 인물이.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하지만 저 왕이 약점을 잡히다니 그건 그거대로 또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근위병이 탑을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 탑 안쪽에서 “저, 전―하앗! 아아앗!” 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비의 절정이었다. 근위병은 왕이 내려와 불호령을 내리기 전에 재빨리 좁고 가파른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문득 왕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허스키해서 거의 남자 목소리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 내려오려다 넘어질 뻔한 통에 그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