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장 떠나는 자 (23/47)

종장 떠나는 자

이야기라는 건, 그리고 감정이라는 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시작을 알면 끝도 짐작할 수 있을 터인데.

“쿠치아노?”

이름을 불리자 상대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숨을 한 번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른하고 조용한 분위기, 전쟁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방을 보면서 학문과 발전의 신―더불어 태양신이기도 한 티오안은 싱긋 웃었다.

“가끔은 연회에도 나오라고. 얼굴을 잊어버리겠어.”

이번에는 한숨조차 없었다. 조용하고 나른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쪽이 다 졸릴 지경이다. 티오안은 앉으라고도 하지 않는 방의 주인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건너편 의자에 제멋대로 앉았다. 상대는 흘끗 티오안을 바라보았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티오안은 알고 있다. 이 나른하고 조용한―일견 어둠침침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전쟁신이 자신을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고 있는지.

“차도 안 주는 거야? 아―, 손님 대접이 형편없구만. 나한테도 이러니 남들한테는 오죽하겠어. 10년 전인가 루스엔느가 다녀갔다며? 그녀는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 루스엔느가 화를 풀지 않으면 너한테 인연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사랑과 열정을 주관하는 여신의 분노를 사면 가뜩이나 어두운 인생, 그냥 어둠으로 전락해버린다? 티오안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쿠치아노는 또 한숨을 한 번 쉬어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쿠치아노, 너 내가 여기 온 열두 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말을 한숨으로 대신한 거 알아?”

그리고 쿠치아노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티오안이 웃었다. 아, 미치겠네. 티오안의 그 천박한 말투에 쿠치아노가 열두 시간 만에 입을 열었다.

“열두 시간 동안 네가 용건을 말하지 않았잖아.”

쿠치아노의 말에 티오안이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쿠치아노가 드디어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티오안을 바라보았다. 눈이라도 부신 것처럼.

티오안이 갑자기 정자세를 하고 양손으로 가리켰다.

“태고신이자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 주신 율레즈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요청한다. 천지대전의 승리를,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눈부신 깃발을 저 붉은 대지 위로!”

후, 쿠치아노가 또 한숨을 쉬자 티오안이 싱긋 웃었다.

“―라는 건 그냥 웃자고 한 소리고, 천지대전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 전력의 차이가 별로 안 난다는 이야기지. 쿠치아노 네가 필요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티오안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쿠치아노를 만나는 데 이 시간 낭비의 의의를 두고 있었다. 쿠치아노는 강력한 대신(大神)들 중 한 명이고, 그런 대신이 자신을 추종하는데다 그게 노골적인데다 피곤하지 않다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기분으로 티오안은 이 땅 끝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열두 시간 내내 그의 동태를 살피면서도 무시하는―꽤나 귀여우면서도 초보 짓을 일삼던 쿠치아노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아.”

인간들은 쿠치아노를 아주 크고, 아주 무시무시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 쿠치아노는 작고 무표정한 남자다. 그는 어디에나 있어 보인다. 전쟁과 광기는 어디에나 있고, 가장 평범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학문과 발전, 그리고 태양의 신인 티오안의 빛나는 미모와는 다르다. 하지만 누구나, 신조차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좋게 보기 마련이라 티오안은 늘 쿠치아노가 꽤 귀엽다고 생각해왔다.

문득 쿠치아노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나한테 하나 빚을 졌어.”

“율레즈가 아니라, 나?”

티오안이 자신을 가리켰고 쿠치아노가 스스로의 몸 만한 검 두 개를 벽에서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너도, 율레즈도.”

쿠치아노가 개입하자 천지대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자신의 몸만 한 검을 두 개나 휘두르는 전쟁신은 위력적이었고, 그의 외눈 거인들 또한 무시무시했다. 전쟁을 귀찮아하는 전쟁신이 거인족을 이끌고 천지대전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지신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백 일간의 일방적인 몰살. 그리고 천신들은 위대하지만 시시한 승리를 손에 넣었다.

천지대전의 승리는 천신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다주었다. 무자비한 승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여러 신들이 자축했다. 여러 신들이 각자의 재주로 이 승리를 축하하며 성대한 연회를 여는 동안 쿠치아노는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즐기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뭔가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티오안을 보는 것도 같았지만 특별히 보고 있지도 않았다.

티오안이 쿠치아노가 신경 쓰여 연회를 즐기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포르타미스가 쿠치아노에게 다가갔다. 율레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여신 포르타미스는 조금 과격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남자에게 빠지는 나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처럼 율레즈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쿠치아노에게 호감을 듬뿍 보이며 다가가 그의 곁에 누웠다.

“적의 몰살하는 너의 모습에 경의를 표해.”

쿠치아노는 한숨도 쉬어주지 않았다.

“쿠치아노?”

풍만한 미모의 포르타미스가 쿠치아노를 끌어안자 티오안의 기분은 확 상하고 말았다. 쿠치아노가 멍하니 다른 곳을 보다 티오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쿠치아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는 말도 없이 연회장을 뒤로했다. 그리고 한동안 천계에 나타나지 않았다.

포르타미스 스캔들은 늘 나른하고 노곤한 천계에 대단한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율레즈조차도 포르타미스 스캔들을 즐겼다. 그녀가 이그나치오에 대한 사랑에 애태울 때 안타까워하면서도 즐거워했다. 루스엔느가 살짝 신력을 부리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예 신에 관심이 없는 인간 남자에게 포르타미스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들 즐거워했다. 포르타미스는 아파했지만, 그 포르타미스도 다른 이의 스캔들을 즐겨왔으니 딱히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포르타미스가 자살하기 직전까지는 모두에게 나름대로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었던 그 스캔들은 그 순간부터, 말 그대로 추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포르타미스를 총애했던 율레즈는 대단히 분노했다. 그의 분노는 천 일간 태풍으로 화해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천 일 뒤, 율레즈는 그 태풍을 포르타미스의 신전으로 보냈다. 태풍은 포르타미스의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율레즈는 포르타미스의 시체를 영원히 인간의 눈요기로 두겠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신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율레즈의 사나운 기세에 포르타미스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 포르타미스의 쌍둥이이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티오안은 단신으로 율레즈의 신전에 찾아갔다.

“죽음은 포르타미스의 자유입니다.”

“내 허락 없이는 자유도 없다.”

“저와 포르타미스는 당신의 배에서 동시에 나왔습니다.”

“허나 둘은 하나인 대지가 갈라졌듯이 이미 달라졌다.”

“저는 포르타미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나의 아이. 내게 바쳐야 할 경애가 그 애정보다 높을 것이다.”

“선택은 제 것입니다.”

“아니, 너희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너의 그 아름다운 머리칼 한 올까지도.”

티오안과 율레즈의 ‘포르타미스 대화’. 이 유명한 대화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티오안은 율레즈의 노여움만 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티오안이 싱긋 웃었다. “그렇습니까. 저희는 당신의 노예입니까.” 그 미소는 몹시 불길한 것이었다. 티오안의 미소가 차게 빛났다. 티오안은 그날 밤, 율레즈가 내려준 자랑스러운 붉은 천으로 자신의 여동생을 감싸서 붉은 용암 지대로 달렸다. 붉은 용암 지대로 달리던 티오안의 앞을 여러 괴물들이 막아섰지만, 티오안은 여러 번 괴물들을 물리치며 여동생의 영면을 위한 용암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지막, 머리가 일곱 개 달리고 꼬리가 육지에서 섬까지 잇는 커다란 용만은 이길 수 없었다. 그가 고전하고 있을 때 네 명의 외눈박이 거인족이 나타나 그를 도왔다. 그리고 그에게 서신을 건네었다.

「그대는 나에게 빚이 있다.

하여,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가 그 무서운 결정을 하기 전에 나를 한 번 만나주길 소망한다. 그대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면 나는 승자의 권리를 사용하겠다. 그리해서도 그대를 만날 수 없다면, 그대의 소중한 사람은 갈기갈기 찢기게 되리라.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대는 알지 못한다. 나도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내 마음이 어떻든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되리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저, 단 한 번만.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다오.

이것을 청이라 여기지 마라. 이것은 관대한 명령이다.」

성실하게도 쿠치아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쿠치아노가 오나? 티오안은 피로 범벅이 된 금발을 쓸어 올리며 쓰게 웃었다. 쿠치아노가 쓸데없는 전쟁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쿠치아노를 천지대전에 끌어들였다. 천지대전이 어떤 전쟁이었던가? 천신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으킨, 우매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그는 쿠치아노를 그 전쟁에 끌어들이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쿠치아노를 그 전쟁에 끌어들였다.

후. 한숨을 한 번 쉬고 티오안은 웃었다. 한숨을 쉬고 나니 모든 대답을 한숨으로 대신하는 그 작은 전쟁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야지.’

노을이 지기 전에 가야 한다. 그래야 이 가여운 여동생을 영원하고 평화로운 잠 속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티오안이 달려서 용암 지대에 도착했을 때, 쿠치아노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를 만나지 못할까 봐 거인들과 엇갈려서 달려온 모양이다. 긴박한 얼굴을 처음 보는지라 티오안은 픽 웃었다. 저런 얼굴을 보고 가다니, 제법 짭짤해. 누군가가 들으면 신답지 않은 천박한 언사라고 말하겠지만 뭐 어떤가. 티오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붉은 용암 위에 포르타미스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천천히 포르타미스가 용암 밑으로 가라앉았다.

신으로서 티오안이 예를 갖추자 쿠치아노도 간소하게나마 예를 갖추어주었다. 티오안이 한참의 축복 끝에 쿠치아노를 돌아보았다.

“쿠치아노.”

쿠치아노가 또 한숨을 쉬었다. 티오안이 웃었다.

“내가.”

아직 말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태풍이 달려들고 있었다. 율레즈의 상징이 달려드는 걸 보고 티오안은 쿠치아노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티오안은 웃음도 잃지 않았다. 율레즈는 그 자신이 약조한 대로 티오안을 신적에서 지울 것이고, 티오안은 영원히 인간으로서 인세를 떠돌게 되리라. 다시는 쿠치아노와 만나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신적에 머물렀던 영혼인 만큼 다른 인간보다 조금 우월한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래도 신과의 교감이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티오안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 혹시라도 교감하게 되면 그때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미안하다는 사과도 꼭 하고 싶고. ―그런 말은 좀 이기적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 달려온 사랑스러운 추종자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 티오안은 그저 웃었다.

쿠치아노는 태풍이 티오안을 쓸어가는 광경을 멍한 무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율레즈의 허벅지인지 이두박근인지 삼두박근인지에서 태어난 이래(그는 정말 자신이 율레즈의 어느 부분에서 태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가장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하고.

사흘 뒤, 쿠치아노는 땅 끝에 있는 자신의 신전을 폐쇄하고 있었다.

‘인간화?!’

율레즈가 고함을 질렀고, 그때마다 그의 신전이 덜컹거렸다. 하지만 쿠치아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인간이 되어야 했다. 티오안은 인간이 되어 인세를 떠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인간의 몸이 된다고 해서 티오안을 만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못 만난다면 그것으로 좋다. 어차피 쿠치아노는 신, 백년이든 천년이든 시간은 많다.

‘인간화라니, 나는 허락할 수 없다. 쿠치아노!’

‘그건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 할 사안이 아닙니다, 율레즈여.’

쿠치아노의 말에 율레즈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정말 이 아들을 총애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아들이 사랑스럽긴 했었는데 지금은 이 아들이 완전히 다른 생물로 보였다. 신도 인간도 아닌 전혀 다른 생물. 아니, 그는 요즘 그의 아이들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총애했건만 하나는 자살했고 하나는 그를 완전히 배신했으며 하나는 저주에 신의 생명을 걸었다.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하나가 지금 이러고 있다.

‘제가 인간화를 해서 티오안을 만난다면.’

‘하.’

‘그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주십시오.’

쿠치아노의 말에 율레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주?’

‘불행의 저주를 거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풀어주십시오. 제가 그를 만난다면 말입니다.’

‘내가 왜!’

‘천지대전을 기억하실 겁니다. 승자의 권리를 여기에 사용하겠습니다.’

그 순간 율레즈의 신전이 쩌억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하지만 쿠치아노는 검을 들어 자신을 곧장 내려친 벼락을 귀찮다는 듯이 막고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등을 돌려버렸다. 쿠치아노! 쿠치아노, 거기 서! 율레즈의 부름에 쿠치아노는 평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후―하는 한숨이었다.

그리고 쿠치아노가 신전을 폐쇄하고 자신의 육체를 어디에 묻을지 그 자리를 고민하는 사이 죽음의 신 키탄이 제안했다. 자신의 신전, 가장 깊은 곳을 빌려주겠다는 호의였다. 단지, 둘이 얼마 만에 만나는지 내기를 해도 되겠냐는 첨언이 있었다. 쿠치아노는 대답했다. 후 하고. 대체로 쿠치아노의 대답은 후―였고, 그 대답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백 년, 2백 년, 3백 년.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인세 기준이야, 인세 기준. 이미 쿠치아노는 인세 기준으로 3년이나 뒤처졌어!

신들이 배웅해주는 소리라고 하기엔 솔직히 너무나 방정맞은 소리들 틈에서 쿠치아노는 잠이 들었다. 길고 긴―아주 긴, 잠. 쿠치아노는 정확히 23년 만에 티오안을 만났고, 내기는 승자 없이 끝났다.

§  §  §

그리고 인세 기준으로 30년, 천계 기준으로 고작 한 달 만에 율레즈는 티오안을 불러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놈은 너무나 잘 지내고 있었다. 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천계에서 놈은 최고는 아니었는데, 인세에서 놈은 최고였다. 제일 부자였고, 최고 권력자였다. 가장 아름다운 남자였고, 그런 주제에 너무나 젊었다. 불행해지라고 했지, 누가 저렇게 살라고 했어. 율레즈는 짜증을 내며 신전에 길게 드러누웠다. 루스엔느는 이그나치오 가문에 피를 토하는 저주를 내렸다. ‘누군가는 뭔가를 잃는다’는 저주였다. 그러나 이그나치오의 피도 흐려지면서 저주도 많이 흐려졌다. 이번 대는 생식 능력을 잃었지만……, 있어봐야 소용이 없는 능력이었다.

율레즈는 미간을 좁혔다. 감히 반항을 하다니 어디 한번 집 떠나서 고생 좀 해보라고 내보냈더니 저렇게 잘 먹고 잘 살 줄이야. 그는 혀를 찼다. 게다가 쿠치아노가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집 떠나서 고생하라고 한 놈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고생은 왜 엄한 녀석이 하고 있는 걸까.

부모 노릇은 어렵다.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안 된다. 키워봐야 소용없다. 자식에 관한 동서고금의 진리는 천계에서도 통했다. 율레즈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면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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