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둘만의 세계
‘안는다’는 것의 처음은 왕이 시종들을 내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왕은 대단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시종들에게 나가라고 했고, 누군가가 “이건 법도에 어긋난다”고 했다. 그리고 왕은 말했다.
“해고해.”
더는 아무도 반항하지 않았다. 왕의 애달픈 사랑과 흉악한 욕구 불만을 아는 시종들이 재빨리 나가자 왕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면서 옷을 하나씩 벗어던졌다. 옷이 귀찮았다. 어차피 벗을 옷들이었다. 옷을 벗는 것도 전희에 해당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상대는 안네마리였다. 옷을 벗는 ‘전희’를 하기엔 상대가 너무나 초보자였다. 그리고 왕 자신도 대단히 급했다. 무엇보다 그는 라파엘이 자신을 만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아니, 라파엘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져도 좋았다. 그리고 라파엘이 만지면 당연히 흥분했다. 하지만 일단은 만지고 싶었다.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오면서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자, 그가 돌아오는 길마다 점점이 흔적이 남았다. 바지, 티셔츠, 속옷들. 그가 나체가 되어 침대 시트로 들어왔을 때 라파엘은 아까 그대로의 모습으로 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라파엘이 손을 뻗었다. 왕의 유두를 향해서였다.
하지만 왕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안네마리.”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을 밀어 눕혔다. 라파엘이 푹신한 침대에 깊숙이 파묻혔다. 누운 채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자 왕이 쉿―하고 속삭이며 라파엘의 입술에 키스했다. 몇 번이고, 각도를 바꿔가며, 깊게 그리고 얕게 키스했다. 질릴 때까지 키스해보고 싶었었다. 이 맛에 질려볼 때까지, 타액을 먹어보고 싶었었다.
“아……!”
라파엘이 중간에 소리를 목 안쪽으로 삼켜버렸다. 왕이 고개를 저었다. 라파엘의 양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가 속삭였다.
“소리…… 내봐.”
왕이 헐떡였다. 미칠 것 같았다. 라파엘은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얼마나 안아보고 싶었던가. 얼마나, 얼마나 원했던가? 사막을 헤매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만찬의 신기루를 보는 사막의 미아처럼 허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나 갈구했었던가. 도대체 얼마나!
라파엘이 뭔가 소리를 낸 것도 같은데 왕 자신의 신음 소리에 가려 알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키스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절정에 오를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미칠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아서.
마음에 쌓아둔 말들이 사랑이 아닌 독이 되어 왕 자신을 죽이고 말 것 같아서.
왕이 중얼거렸다.
“사랑해.”
왕은 그렇게 말하고 키스를 멈췄다. 라파엘은 거절하겠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라파엘은 그의 것이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왕의 마음속에는 이 요령 없는 남자뿐이었다. 그가 왕을 사랑하든 아니든 간에.
태양이 땅을 비추듯이. 달이 차고 기울듯이. 네가 있어서 당연히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해, 안네마리.”
왕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정확히는 대답이 없었다기보다는 대답을 해야 하는 걸 몰랐다는 편이 옳았다. 라파엘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채 몽롱한 정신으로 키스를 받고 있었다. 피가 더워지는 기분에 라파엘은 어쩔 줄 몰랐다. 왕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흉포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봤지만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토록 지독한 흥분감이라니.
그리고 왕을 끌어안고 싶었다. 다정하게 보듬어주고 싶었다. 상반된 기분. 어느 쪽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죽이기엔 너무나 사랑하고 보듬어주기엔 자신이 너무나 모자란, 그런 사랑.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애매하고 미적지근한 온도. 라파엘은 손을 뻗었다. 이 기분이 도대체 뭘까. 슬프고 아려서, 화가 날 지경이야. 이 기분이 도대체 뭘까. 자신은 뭘 바라는 걸까.
“사랑한다.”
왕이 속삭였다.
그가 속삭일 때마다 라파엘은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옥 같은 행복감에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화살을 맞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고통에 헐떡였다. 아아, ‘행복’이다.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롭고 공포에 질리게 되면서도 달콤한―말 그대로의 지옥. ‘행복’.
잃을까 봐 겁나서 매순간 숨이 막혀오는 그런 행복.
“사랑한다.”
왕이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라파엘의 귀에, 심장에, 뇌수에, 그 목소리를 바르고 덧바르는 것처럼. 왕의 손이 라파엘의 몸을 헤맸다. 라파엘의 몸은 부드러웠다. 손끝에 걸리는 건 강인한 근육과 귀에 닿아오는 익숙한 듯 작은 목소리.
“저는 놈을 죽일 겁니다.”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던 것 같다.
달콤한 술을 대욕탕에 가득 채워주고 싶었다. 그 위에 장미 꽃잎을 뿌려주고 싶었지. 분명 그의 안네마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게 뭐냐고 눈만 깜빡거렸겠지만, 그래도 왕은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 안에서, 술로 이완된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애무해주고 싶었다. 라파엘이 평소와 다른 얼굴로, 그 창백한 뺨에 홍조를 띨 때까지, 그렇게 애무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왕은 그런 걸 해주고 싶었다는 말조차 결국 하지 못했다. 달변가인 왕이 입을 다무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어쨌거나 그러했다.
그가 ‘그만둘까’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아무리 그가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 에반스를 좋아하고 사랑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섹스에 익숙한 사람이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섹스를 해왔으며 또 제럴드 라 쇼어나 기타 등등의 인간과 섹스를 했다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그만두고 싶어졌다.
얼마나 원했었던가.
“정말, 정말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알았다면 네가 이럴 순 없는 건데 말이다, 라파엘 에반스.”
왕이 이름을 부르자 라파엘이 눈을 떴다. 그 검은 눈, 그 사랑스러운 검은 눈을 보며 왕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는 정말 이럴 수 없는데. 안네마리.”
그는 또 둘을 분리해 부르고 있다. 라파엘은 이번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알 것 같기도 했다. 왕이 상냥한 눈으로 라파엘의 몸 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교해왔다.
그렇게 모든 것을 더럽혀왔다. 그는 바이런 라 프시스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 궁중 암투의 승리자였다. 그리고 그는 일부러 바이런 라 프시스를 가지고 놀면서 상대를 적절하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바이런은 그의 성적 노리개이자 그의 체스 말이었다. 섹스조차 계산에 계산을 거듭했다. 복수와 암투를 계산하며 섹스했다. 제럴드 라 쇼어를 범할 때, 마리 트리지아의 앞에서 욕보일 때, 그는 분명한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라파엘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이것만은 더럽힐 수 없었다.
모든 게 더러워졌다. 이 남자를 제외하고. 왕의 인생은 더러운, 구더기 같은 인생이었다. 문 플레이스. 마치 달처럼, 별처럼, 밤하늘에 반짝이는 그것들처럼―이 남자만이 유일하게 반짝였다. 이 남자마저 더러워지면, 왕의 인생에 반짝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남자를 더럽히면, 그의 인생을 전부 더럽힌 건 그 자신이 되는 셈이었다. 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라파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무표정에 난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기색을 알아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왕이 쓰게 웃었을 때 라파엘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왕의 뺨에 손을 대었다. 단지 손을 대었을 뿐인데, 왕이 그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왕이 가볍게 그 손에 뺨을 비볐다. 그 왕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머리칼이 샹들리에 불빛에 녹아날 듯 반짝거려서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전 귀족이 아니니까 그런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전 놈을 추적해서 죽일 겁니다. 저는, 저는, 전하. 놈이 전하를 손끝 하나 건드리게 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그 말에 왕이 눈을 크게 떴다. 코발트블루의 바다를 보며 라파엘이 최선을 다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는 말을 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었다. 왕의 쓸쓸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왕이 지옥에 있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라파엘 자신도 지금 지옥에 있었다. 하지만 왕이 있는 지옥은 라파엘이 있는 이런 지옥이 아니었다. 제럴드의 말에 따르자면, 왕이 있는 지옥은 이보다 더 어둡고 습하고 무서운 그런 곳이었다.
라파엘은 거기서 왕을 구해주고 싶었다. 그는 사랑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그래도 그런 게 사랑일 것 같았다.
“지옥에, 지옥에 같이 있는 사랑은, 그런 건 전, 모릅니다. 전, 지킬 겁니다. 전, 전하를, 지켜드릴 겁니다. 아니, 물론 전하는 국왕 전하시고, 저는 일개 살수고, 아니, 그러니까 이건 무엄한 거고, 아니, 그러니까―읍.”
입술이 다시 닿았다.
절박해서 난폭한, 그런 입맞춤이었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왕이 라파엘의 옷을 잡아 뜯었다. 라파엘은 다시 자신의 마음속에서 흉포한 야수가 눈을 뜨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톱을 길게 세우고 시뻘건 눈을 왕에게로 향했다. 왕이 라파엘의 옷을 잡아 뜯듯이 라파엘의 마음속에 사는 야수는 왕의 심장을 잡아 뜯고 싶어했다. 그랬다. 그래서 라파엘은 왕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에드워드 라 쇼어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는 돈인지 권력인지를 위해 여동생을 죽였고 어머니도, 왕도 죽일 셈이었다. 그리고 라파엘 자신도 돈을 위해서라면 친형인 에드워드 라 쇼어 정도는 죽일 수 있었다. 아니, 그는 왕을 위해서 에드워드 라 쇼어를 반드시 죽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둘은 똑같은 괴물이었다.
라파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왕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왕의 입술이 그의 몸을 헤집었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충동을 잘 이겨냈다. 충동은 파도처럼 다가오고, 또 밀려났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어둠뿐이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늘 어둠에 익숙했다. 그러나 왠지, 지금의 어둠은 따뜻했다. 밤바다처럼, 태양이 떠오르면 코발트블루로 빛날 그 바다처럼.
그러나 파도처럼, 충동은 어느 순간 크게 커져서 밀려들었다. 라파엘은 왕의 팔을 움켜쥐었다. 왕이 라파엘을 정신없이 탐하다 말고 내려다보았다.
“안네마리?”
“보여주세요, 전하.”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요청했다. 왕이 눈썹을 치키자, 라파엘이 말했다.
“전하의 성기 말입니다.”
왕은 시트를 집어던지고 라파엘에게 보여주었다. 보여주는 것으로는 모자란다고 여겼는지, 그는 라파엘의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그곳에 대게 했다.
그것을 보았을 때 라파엘이 한 행동이라고는 고작 입술을 한 번 깨물었을 뿐이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고문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것으로 몸을 꿰뚫리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편 그는 성교라는 것을 제대로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그는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그게 만약 고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래, 고문이라고 하더라도.
라파엘은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참아낼 수 없다면 바이런 라 프시스는 죽었어야 옳으니까. 살아남은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왕이 그에게 고문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 일이 고문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걸 라파엘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왕이 라파엘의 옷을 마저 찢어냈다. 라파엘의 값비싼 드레스는 넝마가 되었고, 그 드레스를 장식했던 생화와 보석들이 커다란 침대 위를 제멋대로 뒹굴었다. 그러는 동안 라파엘은 왕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왕은 여유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며 라파엘의 몸을 내려다보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마르고 작은 남자. 여자 옷을 입고 그의 곁에 머무르는 남자. 그의 적을 말살하려 그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남자.
그를 지옥에서 반드시 빼내주겠다고 하는 남자. 사랑하는 그의 비. 지금도 태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멍하니, 홀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세상의 단 한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왕이 말했다.
“네가 하고 싶다면 뭐든 해도 되지만 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도망치지 않으면 그걸로 된다. 알았느냐.”
“예, 전하.”
“넌 나의 비. 이건 너의 의무지.”
문득 라파엘의 머릿속에 ‘밤시중’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아, 밤시중.”
왕의 얼굴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왕이 라파엘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의 기세가 워낙 흉흉해서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왕을 밀쳐내고 방어 태세를 갖출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참아냈다.
라파엘이 눈을 크게 뜨자 왕이 이를 갈았다.
“밤시중? 너는 밤시중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잘도 ‘밤시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구나.”
밤시중을 들라며 바이런과의 동침 현장을 목격하게 만든 건 어디 사는 누군지 잊어버린 왕의 편리한 말씀이 계속되셨다.
“너같이 둔한 게 밤시중을 들어? 둔하지, 바보 같지. 지금 내가 이런 걸 들이밀고 있어도 다리도 벌릴 줄 모르는 게 밤시중은 무슨 밤시중이란 말이냐. 내가 널 고작 밤시중 따위나 들라고 그동안 그렇게 이를 악물고 참았는 줄 아느냐. 밤시중? 밤시중 따위를 들라고 할 것이었으면 나는 벌써 너를 가지고는 버리고 잊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너 같은 건 남아 있지도 않아!”
“…….”
오랜만에 듣는 책망에 라파엘이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는 다리를 벌렸다. 잘은 모르지만, 다리를 벌리라는 뜻인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의 앞에 라파엘의 비부가 보일락 말락, 보이지 않았다.
왕이 꿀꺽―, 노골적으로 침을 삼켰다.
“네 의무는…….”
사실 머리는 이미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는데, 그래도 왕의 입은 예정된 단어들을 내뱉었다. 후에 스완 라 포는 ‘라파엘 에반스의 심장에 시계 부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전하의 입이 기계인 건 확실하지. 머리가 터져도 입은 움직일지도 몰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이 과연 그 묘사에 걸맞은 때라고 할 수 있었다.
왕이 말을 이었다.
“네 의무는 내 사랑을 받는 것이다.”
라파엘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었다. 그리고 이번엔 왕의 얼굴이 멍해졌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왕의 앞에서 웃으려고 노력했다. 히죽 하는 광대의 미소였다. 라파엘 에반스는 웃을 줄을 몰랐고 그래서 그의 웃음은 늘 그렇게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 라파엘의 미소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히죽, 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 후련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다운 미소였고, 사람다운 미소였고, 왕의 눈에 몹시 사랑스러워 보이는 미소이기도 했다. 라파엘이 상쾌하게 웃으면서 왕의 팔뚝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자 그의 머리칼이 반쯤 얼굴을 가렸다. 그게 싫어서 왕은 그의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려주었다.
왕이 라파엘에게로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닿고 키스가 시작되기 직전, 라파엘이 말했다.
“에드워드 라 쇼어를 반드시 제거하고, 전하를 지옥에서 구하겠습니다.”
그 말은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왕은 세계 제일의 요부에게 유혹된 것처럼 이끌리다 말고 짙게 입술을 올렸다. 선서문을 읽는 것처럼 어색하고 열정적이고 엄숙하게 말하는 자신의 비가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나를 지옥에서 구할 필요는 없어. 너는 이미 지옥의 왕비니까.”
라파엘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왕이 손을 뻗어 라파엘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 끌어다 겹쳤다.
누군가는 말했다. 너는 기계라고. 네 가슴에는 사람의 심장이 아닌 시계의 부속품이 들어 있다고.
그때 누군가도 듣고 있었다. 너는 신의 불량품이라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모욕과 상처를 주고 비웃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는 이런 미래를 알지 못했었다. 그저 생존을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뿐이었다. 자신을 위한 상대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런 걸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런 건 사치였다. 당장 내일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왕은 난폭하게 몸을 움직였다. 라파엘이 필사적으로 그의 머리며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때때로 라파엘은 주먹을 쥔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알 여유가 없었다. 왕에게는 여유가 부족했다. 라파엘의 몸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이 이럴 거라는 걸 예감했다. 하지만 예감보다 더 강렬한 쾌감이 그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대로 끝이었다. 그는 도저히 멈출 수도, 늦출 수도,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하아, 하아. 누군가가 헐떡이고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왕이 그의 몸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압도적인 감각. 라파엘은 그저 눈을 크게 뜨며 삽입을 견뎠다. 누가 그랬지? ‘네 사냥감도 이런 기분을 느끼겠지, 라파엘 에반스?’ 그가 말하는 ‘사냥감’이 자신의 타깃을 말한다면, 그리고 그 기분이 ‘죽음’이라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죽음 같았다. 그만큼 절대적인 감각이었다. 그리고 왕이 계속 그의 몸을 찌르고 또 찔렀다. 그는 죽고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났다. 이 이상한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고통은 별거 아니었다. 고통에 단련되어 있는 라파엘에겐 그저 우스운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쾌감에는 전혀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왕의 것이 찌를 때마다 그는 고통과 쾌감을 같이 느꼈다. 그 둘은 동시에 오지 않았다. 그 둘은 순차적으로 왔다. 찔리면서 고통이 왔고, 그리고 곧 쾌감이 전신을 전율케 했다. 자신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몸 위에 있는 남자뿐이었다.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기뻤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자신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해서, 라파엘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가리지 마. 왕이 그렇게 외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귓속에서 소리가 윙윙거렸다.
라파엘이 자꾸 얼굴을 가리려고 해서, 왕은 몇 번이나 그 손을 잡아 내렸다. 그는 라파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는 평생 자신이 연인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바이런 라 프시스 같은 놈들이나 만나다가 언젠가 자는 중 침대에서 칼을 맞거나 술을 마시다 피를 토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칼을 맞아 죽든 피를 토하며 죽든 그런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채 죽는 건 너무나 무서웠다.
또 그런 밤 중 하나일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라파엘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의 사랑스러운 왕비인지, 그의 둔하고 요령 없는 사슴 같은 연인인지, 놀라면 울거나 움츠러들거나 하는 토끼 같은 안네마리인지 계속 확인해야 했다. 너무 바라서, 너무 말도 안 되는 걸 바라고 바란 나머지 미쳐서, 바이런 같은 놈을 안으면서 착각하는 게 아닌지 똑똑히 봐야 했다. 사랑해. 왕은 고백했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울리고 있는지, 입 밖으로도 울리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말했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너를 사랑한다.
알 수 없는 감각에 라파엘이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그에게 이 감각은 지나치게 강렬한 감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살수로 훈련받았고, 조금씩 고통에 익숙해진 몸은 정반대의 쾌감에는 지나치게 민감했다. 피부가 다 벗겨진 채로 바다에 빠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라파엘은 정신을 잃기 직전 왕의 입술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왕의 입술이 닿았다. 라파엘은 조금 웃었다. 몸 안쪽에 뜨거운 것이 흘러들어와 라파엘을 가득 채웠다. 추운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차처럼, 몹시 행복한 기분이 들어 라파엘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계속 웃을 수 있었다.
왕은 라파엘의 안에 쏟아부은 뒤 눈을 감고, 그 위에 털썩 쓰러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정사였다. 육체적 쾌감이 아닌 정신적 쾌감이 대단했다. 단지 상대가 라파엘이라는 것만으로 오는 쾌감은 너무 지독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시작이지?”
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정말 기뻐 보였지만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고, 어떤 짐승처럼 보였다.
“그렇지, 안네마리?”
그의 말에도 라파엘은 대답이 없다. 라파엘이 이럴 것임을 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너무나 첫날밤에 기대를 하시는 형님을 보다 못한 스완이 좀 알아본 끝에 넌지시 찔러준 상식으로 알게 된 일이었다. 스완의 부하인 특수군 부대장 제이슨 리아스에 의하면 길드 출신 용병들 중에 그렇게 변태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변태의 태반은 첫 섹스 때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는데, 과도한 쾌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통만을 훈련받은 살수 출신들은 쾌감에 놀라 기절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어마어마한 자극을 찾아 불나방이 되어 변태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변태란 말이지. 후후, 왕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라파엘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이슨 리아스가 ‘하지만 에반스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놈들 대부분이 살인을 하면서도 좋아하는데, 에반스는 사실 돈이 아니면 살인을 안 하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별명이 기계 아닙니까, 기계. 아마 에반스는 담백한 쪽일지도 모르죠’라고 덧붙였다는 사실도 스완은 왕에게 전해주었지만, 왕은 편리하게도 그 부분을 잊은 상태였다.
곧 왕은 질척한 라파엘을 안아 어깨에 메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앞에서 라파엘의 몸에 그나마 매달려 있던 옷을 찢어 여기저기 던져버리고 라파엘을 대욕조에 조심스럽게 넣은 뒤, 왕은 그제야 문을 열었다.
그가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욕실로 들어가자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시종들이, 욕실 문이 탁―닫히자마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보았다.
정말 하셨구나. 정말로. 정말 둘이 했어. 그렇게 난리를 치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신전 측에 합방일을 내놓으라며 협박을 해대고, 급기야 군대를 움직이겠다며 으름장까지 놓으시더니―.
진짜 둘이 했어.
일단 시종들은 움직였다. 그들은 웬만한 군대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엉망이 된 침실을 치우면서 흘끗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도저히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전하께오서 좀 이성을 차리시겠죠?”
남자를 바꿀 때도 보기 좋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멀쩡한 남자에게 드레스를 입혀놓고 ‘안네마리, 안네마리’ 하던 것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 얼굴을 한 시종들이 줄줄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맞습니다. 이제 안으셨으니까 실체를 알고 환상이 좀 깨지셨겠죠?”
“게다가 영원히 남자를 왕비 전하라고 속이실 생각은 아니실 거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전하께선 남색가시지만 사실 남색을 증오하시잖아요. 자기혐오도 깊으시고요. 이제 좀 즐기다가 상대를 바꾸시겠지요?”
시종장이 주변을 확인하면서 느릿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물론, 실체를 아셨겠지.”
그 말에 시종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종장이 그 한숨 쉬는 모습을 보고 비웃듯 말했다.
“실체를 안다고 다 실망하는 법은 아니네. 실체를 알고 다 실망을 하면 도대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시종장의 말에 시종들이 침묵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조금쯤 실망하기 마련이잖아요. 누군가가 중얼거렸을 때 왕이 욕실에서 나왔다. 커다란 타월로 라파엘을 감싸서 안고 나온 왕이 그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시종들이 곧 라파엘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다른 시종들은 왕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라붙어 국왕 부부의 몸을 닦는 동안 시종장은 여느 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왕의 곁에 기립해 있을 뿐이었다.
문득 왕이 웃으며 물었다.
“묻지 않나?”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기다렸던 첫날밤의 감상을 말이야.”
왕의 시원시원한 웃음에 시종장이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대답을 알 것 같습니다만.”
하하, 왕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 시종들이 무릎걸음으로 그를 쫓아가며 왕의 탄탄한 허벅지며 발등에 묻은 물을 닦아냈다.
왕이 1인용 소파에 앉았다. 3인용 소파에 누워 있는 라파엘을 보고 웃으면서 손짓하자 시종장이 뒤에 같이 기립해 있는 누군가에게 속삭였고, 그 누군가가 뭔가를 준비해 가져왔다. 곧 왕의 앞에 술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왕은 술병을 들어 입에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따뜻한 물에 오래도록 있어 상기된 뺨의 라파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놔주고 싶지 않았지만, 라파엘이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선 의미가 없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자신을 느끼고, 자신을 각인해야 했다. 귀족은 본래 우아하면서 쓸데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여쭤보지요.”
사람은 몹시 인상적인 경험을 했을 때 누군가에게 털어놓길 바란다. 왕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시종장이 묻자 왕이 개구지게 웃었다.
“태어나서 다행이야.”
“대단한 찬사네요.”
시종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종들은 고개를 숙였다. 왕이 태어나서 다행이라는데 거기다 대고 얼굴을 구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으음. 라파엘이 희미하게 신음하자 시종장이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시종들을 신속하게 내보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 왕을 돌아보았다.
“말씀드리는 걸 잊었습니다만, 여성으로 보이는 데는 화장술 외에 마법도 조금 필요합니다. 왕비는 목울대가 보이지 않는 마법의 약을 먹고 있었을 텐데, 그 약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 말에 왕이 눈을 찌푸렸다. 뭐? 왕의 말에 시종장이 미소 지었다.
“계속 왕비로 있겠다고 한다면 정말 사랑하나 봅니다. 사랑의 힘이 아니면 웬만해선 견디기 힘들 거라고 생각되는 고통입니다. 특히, 매일은 말입니다.”
“…….”
“전하, 사랑은 신뢰 없이도 얻을 수 있습니다만, 지속될 순 없습니다. 결코.”
왕이 문득 빈정거렸다.
“뭐 하는 거냐?”
그러자 시종장이 아 하고 실수했다는 듯이 웃었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훌륭한 시종장의 고견이었습니다.”
“논다.”
“물러가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라파엘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금색 빛이었다. 왕의 머리칼인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그 빛이 멀어졌다. 라파엘이 팔을 뻗었다. 잡힐 듯했는데 잡히지 않았다. 그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손을 뻗어 확 잡아챘지만 역시 잡히지 않았고, 그리고 손에 남은 건 그저―.
쯧쯧. 혀 차는 소리에 라파엘은 멍하니 고개를 돌려보았다. 분명 정면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왕이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혼자 노는 고양이의 재롱이라도 본 것처럼 우스워하는 모습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라파엘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어쨌거나 왕은 멀어지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는 바로 옆에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전하.”
기절이라면 여러 번 해봤었다. 고통으로 육체적 한계를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감각이 육체적 한계를 느꼈었던 건 분명했고, 라파엘은 고문을 당하고 쓰러져 일어났을 때와 똑같이 일어났다. 문득 자신의 몸 위에서 타월이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왕에게 천천히 다가간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반쯤 와서 다시 머뭇거린 그 손이 우스워 왕은 그 손을 잡고 물었다.
“어디를 원하느냐?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지.”
“…….”
라파엘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이, 왕은 제멋대로 자신의 뺨에 라파엘의 손을 데려다주었다. 왕의 뺨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라파엘은 그제야 왕이 바로 앞에 있다는 실감이 났다.
“다음에는 쓰러지지 마라.”
“예, 전하.”
“착하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착하다? 그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라파엘이 침묵하자 왕이 일어섰다. 라파엘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면서 그가 다시 속삭였다.
“착하다.”
라파엘은 그저 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게 뭔지 모르는 라파엘을 내려다보며 왕은 웃었다. 왕도 지옥 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게 지옥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게 지옥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짐승 같은 것들. 왕은 충동적으로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온몸으로 라파엘이 느껴졌다.
왕이 라파엘을 이끌었다. 그는 왕에게 이끌려 침실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작은 도자기 욕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장밋빛 액체가 그 욕조에 가득 담겨 있었다. 라파엘이 그 액체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자, 왕이 손으로 떠서 라파엘의 입가에 대주었다. 전직 살수였을 그의 사슴 같은 왕비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액체를 마셨다.
“그…… 술이군요.”
달콤한 술이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첫날밤을 지내지 않았더라면 이 술을 욕실에 있는 대욕탕에 채워주었을 텐데 시간이 없어 이 작은 욕조밖에 채울 수 없었다. 왕이 고갯짓을 하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이 너무 들뜨고 즐거운 얼굴이라 다시 물어보기가 좀 그랬던 라파엘은 욕조에 허리를 숙이고 입술을 대었다. 조금 술을 빨아 마신 라파엘이 왕의 눈치를 보더니 이게 아닌가 싶어 이번엔 술을 손으로 떠서 왕의 입술에 대어주었다.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라파엘의 손에 담긴 술을 다 마시고, 그 손바닥을 전부 핥았다. 그리고 라파엘을 들어 올렸다.
“너와 교감을 하느니 사슴과 교감을 하는 게 빠르겠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인지 칭찬인지 여전히 구분을 못 하는 라파엘을 안고, 왕이 천천히 욕조에 앉았다. 오래도록 따뜻한 물에 몸을 데운 직후라 미지근한 술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달콤한 향기가 지독했다. 라파엘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아마 왕이 정면에서 보았더라면 그의 표정에서 미묘한 난처함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취기가 밀려들었다.
“어지러우냐?”
왕의 질문에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왕의 가슴에 기댄 채 라파엘이 고개를 들어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아까 왕의 금발이라고 생각했던 금빛은 저 샹들리에의 빛이었던 모양이다.
“참아라.”
“예, 전하.”
분명히 하나였던 샹들리에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었다가 여덟 개쯤 되었다. 마치 무도회장처럼 샹들리에 여러 개가 밝게 천장에서 빛났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리는 것도 같아서, 라파엘은 가만히 그 음을 흥얼거렸다. 라파엘의 등 뒤에서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왈츠로군. 우리 왕비 전하가 사슴이 두 발로 추는 것처럼 뒤뚱뒤뚱 추시는 그 왈츠. 왜 그러지, 그 춤이 추고 싶으냐? 출까? 아니면 음악이 듣고 싶은 거냐? 오케스트라를 부를까? 안네마리, 뭘 원하는 거냐. 누구를 불러줄까, 무엇을 해줄까.”
라파엘이 흐릿한 머리를 다잡으려고 애썼다. 그는 분명 뭔가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독한 술 때문에 머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누구를…… 잡으러, 갈 생각이 아니었었나.
라파엘은 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계속 그 음을 흥얼거렸다.
“음, 음음, 음.”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그 젖은 머리칼에 키스했다. 라파엘의 머리카락에서 지독하게 유혹적인 향기가 났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왕은 “음음, 음, 음―이겠지”라고 하고는 웃으면서 손을 라파엘의 은밀한 곳으로 미끄러뜨렸다. 성기를 슬쩍 만지자 라파엘의 몸이 펄쩍 뛰었다.
“―!”
라파엘이 또 기절할까 봐 저어된 왕은 라파엘의 성기에 손을 대지 않고, 그의 뒤로 손을 옮겼다.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레 밀어 넣자 술로 이완된 좁은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라파엘이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왕이 속삭였다.
“다리를 욕조 위로 올려.”
“예, 전하.”
라파엘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수치심이라는 게 없는 라파엘은 욕조 위로 양다리를 벌려 올렸다.
“손을 뒤로 돌려서, 내 목을 잡아.”
그렇게 말하며 왕은 두 번째 손가락을 삽입했다. 왕이 하라는 대로 팔을 올리던 라파엘이 팔을 놓쳤다. 라파엘의 팔이 미끄러졌다. 수면을 후려치는 바람에 술이 산산이 흩뿌려졌다. 방울방울 반짝거리는 그 빛을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몸 안쪽에서 왕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다. 그 이질감이 고통인지 쾌감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 그저 이질감에 불과한지도 알 수 없는데 왕이 지독하게 매끄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안네마리, 어서. 어서 내 목을 잡아.”
라파엘이 다시 팔을 들어서 왕의 목을 잡았다. 대단히 치욕적인 자세였지만 왕은 라파엘이 ‘치욕’이라는 뜻을 제대로 알지나 의심스러웠다. 라파엘이 왕의 목을 잡았다. 그사이 라파엘의 그곳은 왕의 세 번째 손가락에 적응하고, 네 번째 손가락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느낌이 어떻지?”
라파엘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예……. 이게 어떤 느낌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싱긋 웃었다. 그래, 왕의 목소리가 낮았다. 문득 라파엘은 왕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알았다. 왕은 그의 검을, 그 둔탁하고 뜨겁고 맥박 치는 검을 다시 라파엘에게 찔러 넣고 싶은 것이다. 다시 라파엘을 죽이고, 다시 라파엘을 라파엘이 아닌 누군가로 태어나게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지독한 취기. 이 취기는 분명 욕조에 가득한 술로부터 오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술이 조금 데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와 왕의 체온이 올라갔기 때문일까.
왕의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왕이 들어오기 전엔 전혀 비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아니, 라파엘은 거기가 비었다는 걸 아예 알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거기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눈을 떴다. 이상한 일이라고 그저 생각했을 때였다.
“이왕이면, 쓰러지지 마라. 너는 사슴도, 토끼도 아니고 사람이라고 내 몇 번 말하는 거냐. 응? 이건 아주 쓸모없는, 귀부인이라는 이름의 짐승들도 잘 견디곤 하니까 너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다, 그렇지?”
하긴, 넌 그것들과는 달리 짐승이 아니라서 못 견디나. 왕이 쓰게 웃었다. 짐승들의 왕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술의 수면이 크게 출렁인 것과 라파엘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왕은 단숨에 삽입했다. 욕조 앞에 있는 전신 거울이 라파엘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라파엘의 얼굴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의 무표정은 타인에게는 완벽한 가면일지언정, 왕에게는 투명한 가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라파엘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라파엘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처 올리는 건, 삽입감이 더욱 깊다고 들었다. 아마 라파엘이 느끼는 이질감도, 쾌락도 배가 되리라. 하지만 고통은 술이 반감시켜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누구를 잡으러 간다고?
왕은 웃었다.
감히 내 곁을 떠난다고?
왕은 또 웃었다.
왕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떤 쾌감도 라파엘의 육체에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어느 순간 라파엘의 팔이 미끄러졌다. 한 팔을 겨우 왕의 목에 매단 채 다른 한 팔로 라파엘이 술의 수면을 첨벙거렸다.
익사하는 사람처럼 허우적대는 라파엘을 보며 왕이 웃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왕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이 달콤하고 독한 술은 왕에게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도 술을 흡수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 술로 채운 욕조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같은 술을 두 병이나 마셨다. 그리고 그의 비.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그를 미치고 환장하게 하는, 그의 남자, 라파엘이 그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뜨거웠다. 눈앞이 흐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숨이 헐떡여진다. 라파엘의 낮은 신음 소리를 들으며 왕은 연방 으르렁거리고 신음했다. 좋았다. 아까 성급해서 남기지 못했던 순흔을 마음껏 남겼다. 등에 온갖 입술 자국을 남기고 어깨에는 잇자국까지 남겼다. 이에 닿는 살결이 너무나 맛이 좋았다. 뜯어먹고 싶을 정도로.
“넌 절대로 못 떠나.”
왕이 으르렁거렸다.
“다른 건 다 해줘도, 그건 절대로 안 돼. 나의 착하고 귀여운 안네마리.”
왕의 말을 들으며 라파엘은 두 번째로 기절했다. 거울 속의 라파엘이 늘어지자마자 왕은 재빨리 라파엘을 붙잡고 흔들었다. 혹시나 그가 술에 빠질까 봐 조심하면서 재빨리 섹스를 끝낸 왕은 라파엘을 건지면서 혀를 찼다.
왕이 바란 첫날밤은 이런 건 아니었다. 아니, 달콤하고 미칠 것같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떠나려는 라파엘을 붙잡아두려는 첫날밤을 바라던 게 아니라 허니문을 바랐다. 이런 첫날밤을 바라서 신전을 닦달했던 게 아니었었다. 이런 사랑을 하려고 라파엘의 옆구리에 총상을 새기고 그를 사경에서 헤매도록 만든 게 아니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사랑은 신뢰 없이도 얻을 수 있습니다만, 지속될 순 없습니다. 결코.’
빌어먹을, 당신이 잘난 체하지 않아도 알아. 왕이 이를 갈았다.
라파엘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돌아보자 혼자였다. 몸에서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나기는 했지만 그뿐, 끈적거리는 무엇도 묻어 있지 않았다. 도리어 시녀들이 목욕시중을 들어주었을 때처럼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라파엘은 일어나서 잠깐 눈을 감고 기척을 탐색했다. 그가 느끼기로 주변에서 인기척은 전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궁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그는 침대 밖에 떨어져 있는 속옷을 발견했다.
왕은 라파엘이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라파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넌 절대로 못 떠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에드워드 라 쇼어 같은 놈들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았고, 더불어 이 궁의 경비가 상당히 허술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궁의 경비가 허술하다기보다는 왕궁의 총 규모가 너무나 크다는 편이 옳을 수도 있다. 근위대가 다 아우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라파엘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거의 망설인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망설여졌다. 왕은 화를 낼 것이다. 그건 차라리 나았지만 그가 또 쓸쓸해한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쓸쓸해하는 그가 그것을 숨긴다면, 그리고 라파엘이 그의 쓸쓸함을 감지해내지 못한다면―율레즈여.
그러나 라파엘은 가야 했다. 놈이 언제 왕을 노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서대륙으로 떠난 뒤에는 더욱 기회는 멀어지고 만다. 아직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놈도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니 토우셔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진 못했으리라.
라파엘은 속옷을 입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앞에 잠행복이 떨어져 있었다. 라파엘은 또 걸어가 그 잠행복을 입었다. 토끼 똥처럼 점점이 물건들이 떨어져 있었다. 급한 라파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옷, 잠행복, 양날검, 돈, 지도. 신발에 장갑에 고정구들까지. 완벽했다. 토끼 똥이라기보다는, 토끼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물건들이 마지막에 떨어져 있던 곳은 한 창문 앞이었다. 창문을 열자 밤 특유의 시원한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어둡고 조용했다.
“전하께오서 진노하셨어. 자네들 거기서 뭐 하는 건가?”
그 목소리는 조금 어색했지만 라파엘은 상대의 연기 실력을 알아낼 만한 안목이 없었다.
“아, 예. ―예, 진!노!하셨!군!요!”
“어서, 오라고!”
“예! 갑니다! 여기엔! 아무도! 아!무!도! 없겠네요!”
그리고 곧 인기척이 사라졌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파엘이 곧 움직였다. 그의 신형은 어둠에 녹았고, 곧 사라져버렸다. 그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가 가는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였지만 라파엘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아닌 것에 일절 호기심을 갖는 성격이 아니었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것 같던 그의 몸이 멈춘 것은 궁의 입구에서였다. 갑자기 궁의 입구에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뭐지? 왕이 그를 찾으라고 한 걸까. 라파엘이 주변을 둘러보며 어쩔까 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이런. 우리 비전하 아니십니까.”
나무 위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라파엘을, 스완이 정확하게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라파엘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자 스완이 “이래 봬도 꽤 잘난 군인이거든요. 내려오시죠”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라파엘을 여자 취급하며 살짝 모욕한 것이었지만 그 모욕을 알아듣기에 상대는 너무나 둔했다. 라파엘은 그 손을 본 체도 하지 않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이에 빚이 있었죠.”
라파엘은 어쨌거나 보고서를 빼내다 근위대와 마주친 스완을 구해준 적이 한 번 있었다. 그걸 말하는 모양이다. 라파엘이 가만히 서 있자 스완이 싱긋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도도한 공작부인을 함락시켜 그녀와 좋은 기분으로 야릇한 놀이를 즐겁게 하고 있는 와중에 왕 앞으로 끌려갔다. 암살 시도라도 있었나 싶어 대경실색해서 달려갔더니만 왕명이라고 내려온 것은 정말 치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이 바라는 건, 이 살인 기계 왕비의 호위였다.
‘안네마리는 에드워드 라 쇼어의 제거를 원해.’
‘좋은 일이죠. 놈은 후환이 될 것입니다.’
스완의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에게 호위를 명했다. 얼음 장미인 공작부인과 이런저런 짓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와중에 끌려 온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에드워드 라 쇼어라면 끌려 올 가치가 있었다. 스완은 그때까진 별 불만이 없었다. 문제는 이런 되도 않는 연극을 하고 있는 왕의 삐뚤어진 성격이다.
어차피 보내줄 거잖아.
그럼 그냥 잘 가라, 조심히 다녀와라, 어이구 우리 이쁜이―하면서 보내주면 되잖아. 스완은 신경질이 났다. 라파엘은 도망치고 있고, 스완은 아까부터 궁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혹시나 라파엘이 궁문을 통과할까 봐 일부러 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짓까지 마다하지 않는 저 삐뚤어진 성질머리. 이래서 왕들은 안 돼. 왕으로 키우면 성질머리가 딱 저렇다니까. 아우, 해줄 거면 그냥 좋게 해주지. 그래서 라파엘을 여자 취급하며 신경질을 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네마리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마라.’
몇 번이나 왕은 당부했다.
‘한 번만 더 말씀하시면 서른 번입니다!’
스완이 소리쳤다. 심지어 왕은 라파엘이 잘 도망갈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시종은 물론 노예까지 포함―을 문 플레이스로 옮긴 상태였다. 당연히 스완까지 문 플레이스로 호출을 받아 왕비의 침실에서 서른 번 가까이 똑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왕이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시종장이 늘 그렇듯 그린 듯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물두 번째입니다.’
‘스무 번에 가깝잖아, 스완. 너는 스물과 서른의 개념도 제대로 못 잡고 그 나이를 먹은 거냐. 혹시 1부터 10까지는 셀 줄 알아?’
왕이 타박을 주었고 스완은 순간 뒷목이 뻐근한 경험을 해야 했다.
여하간 이런 이유로 스완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라파엘이 일어나서 여기까지 오면, 그를 ‘모시고’ 토우셔로 달리기 위해서.
“그런데?”
“한가하니, 모셔다드리죠.”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토우셔.”
라파엘이 입을 다물자 스완이 친절하게 더 설명해주었다.
“그 빌어먹을 개새끼 목을 치러 가시는 거죠. ……우리 집에 있는 잉그램에게 미안해지는군요. 사냥개입니다. 제 친구지요. 물론 전하에게 저희 집에 개가 있다든가 그 이름이 잉그램이라는 건 절대 비밀입니다.”
특히 이름은요. 그분이 아셨다간 어이구, 제 목에 목줄을 묶겠다고 하실 테니까요. 스완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라파엘을 마차로 안내했다. 포 백작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였다.
마차는 아주 잠깐 성문 앞에서 멈춰 섰을 뿐 곧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에는 스완 외에 부하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내 라파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라파엘 에반스. 나이는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스물셋. 그 나이에 이토록 유명한 살수가 있었을까?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비전하가 아니라 에반스 씨에게 말입니다.”
건너편에 있던 특수군병이 물었다. 스완이 눈살을 찌푸려서 병사가 흠칫했지만 라파엘은 늘 똑같은 그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 살인 때 망설이지 않고 목을 꺾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첫 살인? 라파엘은 목을 꺾은 게 첫 살인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물의 살수들은 공식적인 살인 데뷔가 있는데 그걸 말하는 거라면 사실이지만, 난 그전에 했으니까 사실이 아니야.”
“그전에.”
“양날검을 쓰고 싶었고, 특수 무기를 사용하고 싶을 때는 교관의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교관에 따라서는 증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
겁나는 세계네요,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럼 살수의 세계가 말랑말랑 반짝반짝할 줄 알았냐며 또 다른 인물이 핀잔을 주는 사이 라파엘이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스완이 라파엘의 옆에서 ‘내가 이 남자 옆에 앉아서 어깨 너머로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우리 형님이 내 머리를 부숴버리려고 하겠지? 그 무시무시한 장총으로 말이지’라고 악당처럼 싱글거렸다. 악당은 악당이되 일류는 아니고 잘해봐야 이류밖에 못 되는 악당으로 보였다.
“토우셔로 갑니까?”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수도와 토우셔의 딱 중간 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몰지요.”
라파엘 에반스의 정중한 말을 처음 듣는 것 같아 스완이 그를 바라보자 라파엘이 “지금은 왕비가 아닌 것 같아서”라고 중얼거렸다. 웬만한 사람이 말하면 참 귀여웠을 텐데 네가 말하니 왜 이렇게 오싹해, 라고 생각하며 스완은 그저 웃었다. 지금은 왕비가 아니니 계급 떼고 한번 붙어볼까, 라는 분위기다.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여기까지 사흘이면 갑니까?”
“예, 뭐―가능하지요.”
“여기에서 토우셔까진 하루 만에 갈 겁니다.”
하루 만에.
윽, 특수군병들이 일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그 거리를 하루 만에 갈 수는 있겠지만 하루 만에 갈 방법이라는 게 사실 뻔해서 다들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배를 타기 전에 해결을 봐야 합니다.”
라파엘이 무심히 말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누군가가 또 말을 걸었다. 그들도 군인이니 평소라면 이런 우문을 자주 던지는 편이 아니었지만 눈앞에는 왕의 총비이자 그 나잇대에서 가장 유명한 살수가 앉아 있었다. 아무 말이라도 걸어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것이다. 여자한테 작업 거는 남자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존경심이 가미된 것이었지만.
“해결을 못 보면 어떻게 됩니까?”
“쫓아가야겠죠.”
“서대륙까지?”
다른 병사가 물었다. 조금이라도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안 되면, 남대륙까지도 가실 거죠?”
“그렇겠죠.”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고, 그렇게까지 일이 꼬이게 만든 적이 없는 라파엘이지만 어쨌거나 물으니 대답해줄 뿐이었다. 부하들의 흥분한 얼굴과 라파엘의 차갑고 무심한 대답이 대비를 이루었다.
좋은 일이 아닌데.
스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부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게 이상해서 부하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라파엘의 목에 시선이 닿았다. 거기에는 어떤 질투심 강한 사내가 남겼을 법한 자국이 시퍼렇게 남아 있었다. 일부러 저기에 남겼군. 스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파엘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왕이 뒤흔들던 그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꽤 긴 시간을 그는 그 행위에 대해 ‘고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고문이 아니었다. 그건―그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진 모르지만, 고문은 아니었다. 왕은 ‘안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 그건 그 단어에 합당한 행위 같았다.
하지만.
라파엘은 눈을 뜨고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만했어.
또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건 고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그 미지의 경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그 감각. 차라리 고문이 낫잖아. 고문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 감각은…….
라파엘의 고뇌를 안고 마차는 달렸다.
사흘 뒤, 라파엘은 마부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마차를 산으로 몰았다.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한 특수군 여러분에게 새로운 경험의 장을 열어주면서 하루 만에 토우셔에 도착한 라파엘이 에드워드 라 쇼어를 죽인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여관의 가장 좋은 방에 머물고 있는 에드워드 라 쇼어를 찾아낸 라파엘은 “끼어들지 마세요”라고 미리 주문했다. 스완은 라파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왕은 ‘선왕의 인장’ 때문에 에드워드 라 쇼어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스완은 특수군이다. 왕이 준수한 것을 자신 때문에 어기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스완이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위험해지면 개입할 겁니다.”
우리 형님이 날 죽이게 둘 순 없으니까요. 아직 도도하신 공작부인과 끝내주는 밤도 못 보냈거든요.
스완의 장난스러운 윙크에 특수군이 키득 웃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웃지 않았다. 양손에 검을 든 라파엘이 그저 등을 돌리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소리 따윈 나지도 않았다. 비명은 없었다. 그저 피 냄새뿐이었다. 피 냄새가 조금씩 더 진해졌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불쌍한 노트코 대사의 수행원들을 떠올리며 스완은 자신의 형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시고 오지 않았어도 혼자서 잘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도 왕은 라파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라파엘이 걱정되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성격은 정말…… 개차반 같은 게 그래도 연애는 참 순정적이란 말이지. 스완은 창에 팔을 걸친 채 상체를 밖으로 내밀었다. 라파엘이 여자인 줄 알았을 땐 안고 싶어서 애가 달더니, 라파엘이 남자라는 걸 알고 나서는 그를 제대로 안기 위해 안절부절, 그러더니 정작 안고 나서는―.
‘해주고 싶은 모양이지.’
어떤 놈은 여자가 원하는 보석반지를 사주기 위해 강도짓을 하고, 고귀하신 국왕 전하는 총애하는 왕비 전하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 위해 새벽에 이부동생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시고.
‘그게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모양이지.’
자신은 그게 싫어도 다 해주고 싶은 모양이지. 그런 게 사랑인가 보지. 아, 줏대 없다.
하긴 줏대 없는 걸로 치면 저기서 사람이 개미라도 되는 것처럼 손쉽게 죽이고 있을 마르고 작은 남자가 더하다. 이름을 날리는 살수로서의 정체성은 어디로 가고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니까 평생 왕비로 살려고 하는지, 원. 고민하는 척도 안 하냐.
좋아한다―라.
스완 라 포는 자신의 저택에 꼿꼿이 앉아 있을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아주, 고귀한 여성이다.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여자인데, 어릴 때부터 그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자 넣어버렸다. 갖고 놀아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갖고 놀기는. 그녀의 남편을 겨울 별장, 혹한의 정원에 발가벗겨서 버려놓고선 그녀를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혔다. 필요한 건 다 말하라고 하고선, 그 이상은 말도 걸지 못했다. 손에서 땀이 나더라.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겨우겨우 키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즐거운 시간’이라고. 허세였다. 사실은 키스를 하려는 순간 도망치고 싶었다. 왕이 부른다고 하자마자 재빨리 도망쳤고, 왕이 라파엘 에반스를 데리고 어디로 갔다 오라고 하자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다 싶었다.
공작부인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그 집은 이미 그가 태우고 없는데 말이다.
“포 대장님.”
미안하다고 빌어볼까. 제기랄, 내가 쇼어가에 미안할 게 도대체 뭐가 있냐고.
스완이 밝아오는 하늘에 대고 욕설을 뱉었을 때였다.
“포 대장님.”
라파엘의 목소리에 놀라 포가 창 밖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다시 안으로 거두었다.
“예, 예?”
“부탁하고 싶어서.”
“부탁?”
그 라파엘 에반스가 나한테 부탁? 가문의 영광일세. 아니, 가문의 오점인가?
스완이 객실로 들어섰을 때 본 건 참혹한 장면이었다. 다른 놈들은 다 깨끗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라 쇼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사지 중 왼팔과 오른다리를 잃은 채 벌레처럼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스완 라 포는 놈의 최후가 본성과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라파엘이 물었다.
“나는 놈의 죽음이 유명해지길 바랍니다.”
“충분히 유명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놈의 죽음이 전하의 이름을 암시하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아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스완은 열심히 설명하려는 라파엘을 만류하면서 에드워드 라 쇼어를 내려다보았다. 라파엘 에반스는 에드워드의 죽음이 유명해지는 것과 동시에 경고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죽음이 효시가 되어 왕의 정적들이 두려움에 떨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뭐,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정말 내조 하나는 확실한 왕비님이시라니깐.
“맡겨주십시오.”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이 싱그럽게 웃었다. 이럴 때, 그는 왕과 정말 형제다웠다.
그 얼굴을 보면서 에드워드 라 쇼어는 자신의 행운이 모조리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뭔가를 해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파, 아파, 아파. 그는 패닉에 빠져 소리 질렀다. 아파, 아파, 아파. 그가 비명을 질러도 웬일인지 목소리는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까 라파엘, 저 남창이 자신의 목에 뭔가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난 아무것도 잘못 안 했어! 빌어먹을, 제기랄! 아파, 아프다고! 그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 스완 라 포가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 그것을 실감했을 때 에드워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오른팔로 안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프랜시스예요, 쇼어 경.’
―사랑하는 에디.
‘제, 제…… 제, 드, 드레스의 단추를…… 푸, 풀어주시겠어요……, 경?’
―당신의 프랜시스.
에드워드는 겨우, 겨우 겨우, 그 서신을 찾아내 손에 쥐었다. 당신의 프랜시스, 당신의 프랜시스……. 그 목소리만이 유일하게 그를 구원해주었다. 프랜시스의 체온이 담겨 있을 듯한 서신을 쥔 채 그는 스완 라 포를 노려보았다. 스완이 싱긋, 웃었다.
“아아, 참. 선왕의 인장. 맞다, 그 빌어먹을 게 있지. 라파엘, 직접 하셔야겠어요.”
그 말에 라파엘이 다가왔다. 라파엘. 버림받은 재앙의 씨. 눈 오는 날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에드워드는 프랜시스의 서신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단 산 채로 흉곽을 부수고 심장을 뜯죠.”
스완의 ‘오늘 날씨 참 좋죠?’라는 말투에 라파엘이 화답했다.
“그러죠.”
“참. 에드워드 라 쇼어. 넌 그 서신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인데, 그거. 우리 전하가 쓰신 거니 좀 놔라, 자식아.”
스완이 에드워드를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럴 리가. 에드워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분명히 프랜시스의 글씨체였다. 그리고 곧 에드워드의 보라색 눈이 일그러졌다. 왕이 잡기에 능한 인물이라는 걸 기억해낸 까닭이었다. 서체 위조도 능히 행할 수 있을 인간이었다. 안 돼, 안 돼, 아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무표정한 라파엘이 에드워드의 배를 발로 밟고 양검을 휘둘렀다.
에드워드 라 쇼어의 목이 노트코 대사의 배의 돛대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몸은 환락가인 17번가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몸에는 심장이 없었고, 복부에는 단검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이여. 은총을. 왕이여, 용서를.’
며칠 뒤 23번가에선 맨몸으로 얼어 죽은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