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지옥
태후가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의 목이 베이든 말든 개의치 않는 태도로 그녀는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제럴드 라 쇼어를 쏘아보았다.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그녀의 그 중얼거림에 제럴드가 시선을 피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군. 모두가 대충 이해했지만 라파엘은 이해하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태후의 아들이면, 부친은 누구란 말이지? 라파엘은 언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태후의 턱을 고정하고 다시 칼끝을 대었다. 그 위협에 에드워드가 고갯짓을 했다.
“죽여봐.”
에드워드의 말에 제럴드가 눈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이라고?”
“그래.”
라파엘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살수로 많은 일을 처리해왔고, 라파엘에게 의뢰하는 많은 의뢰인은 타깃의 가족이었다. 타깃이 죽어서 그의 유산을 갖게 되는 상속 순위권자는 가족이니까. 증오나 돈, 두 가지 중 하나가 사람에게 살의를 품게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 가까울수록 얻기 쉬운 것이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놀라워하지 않았지만 제럴드는 달랐다. 태후와 에드워드는 순수한 핏줄이었다. 이 냉혹한 귀족 사회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핏줄.
제럴드가 “……친어머니를 죽이라고?”라고 멍청히 되물었다. 그제야 그 말을 이해한 것처럼.
“얼마든지.”
에드워드의 말에 제럴드가 입을 벌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헐떡였다. 그사이 왕은 흘끗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여긴 3층이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의 도주로는 없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도망갈 수 없었다. 에드워드의 총구를 주시하면서 왕과 스완이 흘끗 시선을 교환했을 때였다.
제럴드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제럴드가 총을 내던졌다. 그는 맨몸으로 에드워드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깜짝 놀란 근위대원들이 그에게 매달렸다. 안 됩니다! 부하들이 매달려도 제럴드는 반미치광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네가 사람이야? 마리도 죽이고, 이제 네 친어머니도 죽여? 너한테 방해되면 다 죽이는 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가져야 할 게 뭔데? 고작 돈이야?”
제럴드의 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돈? 권력? 그런 거였어? 그게 마리보다, 친어머니보다, 식구들보다 중요했어? 그랬냐고?!”
“마리보다, 친어머니보다?”
에드워드가 무슨 개소리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나 친어머니라는 게 애초에 뭐가 중요하지?”
그 말에 제럴드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제럴드는 부하들을 떨치고 야수와 같이 에드워드에게 덤벼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에드워드로서도 예상치 못했는지,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이 조금 늦고 말았다. 탕―. 총알은 빗나갔고, 곧 둘은 엎치락뒤치락 달라붙기 시작했다. 제럴드가 고함을 질러댔다.
“어떻게, 어떻게. 마리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는데.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얼마나, 용서하고 싶어서, 얼마나 사랑하려고, 얼마나, 얼마나!”
제럴드가 고함을 지르며 에드워드의 몸에 올라탔다. 그리고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제럴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타앙. 그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몸 위에서 제럴드가 옆으로 천천히 고꾸라졌다.
“다가오지 마!”
에드워드 라 쇼어가 모두를 경계하며 총을 치켜들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에드워드보다 그가 쏜 제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럴드 라 쇼어. 에드워드의 동생이었고, 에드워드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해준 인물.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런 동생을 쏘고도 아무런 충격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어.”
라파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들어 눌렀다. 뭔가가 시큰거렸다. 제럴드가 에드워드의 옆에 쓰러져 있었다. 피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꼴을 라파엘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당신밖에 없어,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날 구할 수 없단 말이야.’
소녀인 마리가, 맨발로 울고 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지. 「무엇으로부터」? 그 아름답던 분신은 무엇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했던 것일까. 저 오빠라는 거죽을 쓴 미친놈으로부터? 그런데 라파엘 자신은 그녀를 다시 저 미친놈에게 돌려보냈던 것일까.
라파엘은 잠시 떠올렸다. 그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었다. 그는 사흘간 굶었었다. 그리고 고문실에 들여보내졌다. 고문에 성공하면 딱딱한 보리빵을 하나 받았고, 고문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어먹지 못한 채 사흘간 묶여 있어야 했다. 자는 것도 묶여서 자야 했다. 그렇게 있다 보면 다음 번 고문에선 효율만 생각하게 된다. 정해진 시간 내에 고문을 성공하게 되는 법만, 사흘 내내 연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의 모든 어린 시절은 그런 생활로 점철되어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고문자’라는 직업은 피고문자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라파엘의 인생은 그런 식이었다. 그는 평생을 마리 라 쇼어에 대해, 그리고 마리 트리지아에 대해 들어왔다. 평생을 그는, 마리라는 타고난 아름다운 소녀에 대해, 타고난 왕후에 대해 들어왔다. 자신의 분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 그는 좋았다.
자랑스럽다든가, 부럽다든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좋았다. 거기에 그녀가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이 있어서 좋았다. 그랬다. 거기에 그녀가 ‘선택’된 것이, 여기에 그녀가 아닌 자신이 ‘버림’받은 것이―그는 둘 다 좋았다. 그는 억울하지 않았었다.
마리 트리지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 인생은 비록 학대와 피와 아픔과 살육으로 점철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라파엘에게 지옥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 트리지아에게는.
라파엘의 눈에 그저 찬란하게만 보이던 마리 트리지아의 그 인생.
마리 트리지아에게 그녀의 그 찬란한 인생은 사실 빛나는 지옥이었을까? 그녀가 살려달라고 손을 뻗었을 때 그 손을 밟아 지옥으로 밀어버린 건 사실 자신이었을까?
지끈거렸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다.
그때 태후가 말했다.
“전하.”
태후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라파엘이 태후를 바라보자 태후는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어떤 가치도 없었다는 아들을 보던 태후가 조용히 말했다.
“선왕의 인장을 사용하여 요청합니다.”
“설마.”
스완이 말도 안 된다고 신음했다. 하지만 태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를 무사히 토우셔 항구에 있는 노트코 대사의 배에 승선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에드워드가 씩 웃었다.
그는 태후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태후는 지독한 신분 차별주의자다. 신분 차별주의자들이 그렇듯 그녀도 혈통을 대단히 중요시했고, 그래서 친동생의 아이도 낳았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아들 한 명이 죽지 않았던가. 둘 다 잃을 수는 없으니 하나는 살리게 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태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면서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도저히 이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이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태후를 데리고 오라는 제스처에 라파엘이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라파엘이 “부축해드릴까요, 태후 전하?” 하고 물었다. 그러자 태후가 “내 목에 닿았던 검이나 버리게!”라고 쏘아붙였고, 라파엘은 순순히 그 검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들이 왕과 특수군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 근위대는 쓰러져 있는 자신들의 대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을 스쳐 걸으면서, 태후가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이면, 라파엘 라 쇼어?”
태후가 물었고,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라파엘 라 쇼어가 안네마리 왕비라고.”
“예, 전하.”
“우습지만, 아주 나쁜 결말은 아니로군.”
태후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거의 왕에게 도착해 있었다. 태후는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문득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개 같은 놈과 몇 년을 싸워왔던가. 피곤했다. 지독하게, 피곤했다. 무엇 때문에 싸워왔는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냥, 피곤했다. 그뿐이었다.
왕이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대단히 불편해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결국 마리의 살인자를 찾아내 물었다. 그녀를 죽였냐고. 마리의 살인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왜 죽였냐고 묻자 그 살인자는 왕을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시선이었다.
나 혼자 죽였니?
―그런 눈이었다.
왕이 입을 달싹였을 때, 그가 보고 있던 라파엘의 검은 눈이 커졌다. 라파엘이 본능적으로 몸을 수그리며 왕의 다리를 낚아채었다. 왕이 바닥에 털썩 떨어지며 총의 사정 높이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러면서 왕의 총이 바닥 저 멀리 굴러가버리고 말았다.
에드워드의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왕이 에드워드 라 쇼어가 정말 미쳤다고 결론지었을 때 라파엘은 손을 휘저어 무기를 찾고 있었다. 손끝에 뭔가 닿긴 했는데 하필 총이었다. 이 궁에 들어올 때 엄중한 감시를 거친 끝에 숨겨 가지고 온 것이라곤 단검 하나뿐이었다. 그 검은 아까 태후가 버리라고 해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고, 총은 신력이 없는 그로서는―.
“쏴, 라파엘!”
스완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왕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쏴, 쏴버리라고! 어깨든 어디든 쏴버려! 쏴!”
라파엘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냥 대회에서 내내 봐왔던 대로, 왕이 하는 그대로 했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어깨를 맞은 에드워드 라 쇼어가 옆으로 툭 떨어지는 것을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쌍둥이 여동생 마리 라 쇼어는 왕후가 되었다. 신력 테스트에서, 그녀는 놀라울 만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왕후가 되었다.
쌍둥이는…… 한쪽이 신력을 부여받으면, 다른 한쪽은 부여받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라파엘은 총을 사용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라파엘이 말을 더듬었을 때 태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번째 인장을 사용하겠어요. 동일한 요청입니다! 에드워드 라 쇼어를 무사히 토우셔 항구에 있는 노트코 대사의 배에 승선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태후의 절박한 얼굴과 라파엘의 멍한 얼굴을 보던 왕이 마른침을 삼켰다. 스완이 “한 번만 더”라고 중얼거렸다. 스완 라 포가 어깨를 맞아 신음하고 있는 에드워드 라 쇼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한 번만 더, 날뛸 생각은 없나? 아무거나 좋아, 제발 한 번만 더 날뛰어봐. 제발.”
쇼어가에 대한 증오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스완이 에드워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제발,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지랄해보란 말이다, 이 새끼야!”
태후는 마지막 남은 한 번의 인장은 자신을 위해서 아껴둘 것이다. 그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제 에드워드에겐 기회가 없었다. 스완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에드워드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도 스완을 비웃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눈이…… 눈이 정말 많이 오는 겨울이었어, 라피.”
며칠 만에 정신을 차린 제럴드의 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쇼어가의 컨트리 하우스에서, 제럴드는 안절부절못한 채 아버지와 형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몇 번이나 시계와 침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율레즈여, 쿠치아노여. 제발 도와주소서’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제럴드도 마찬가지였다. 유모인 소피아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쇼어 가문은 왕비를 배출하는 명문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만큼 모두에게는 아름다운 아가씨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여동생이면 제럴드는 늘 그녀를 위해 오빠로서 모든 것을 다 해주리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꽃을 따다주고, 동화책을 읽어줄 것이다. 아버지 몰래 검술도 가르쳐줘야지. 어떤 무례한 놈이 내 곱고 귀여운 여동생에게 흉한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 응접실 내에서 침착한 것은 오로지 장남인 에드워드 라 쇼어뿐이었다. 에드워드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누가 태어나든 별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소피아가 “도련님도 기쁘시죠?”라고 반쯤 의심스러운 듯 물으면 “당연하지, 소피아”라고 환하게 웃어주었지만 아무리 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참 뒤, 비극은 일어났다.
아기 울음소리가 왠지 겹친다고 느껴졌을 무렵 산파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어머니의 비명이 들렸다. ‘내 아이야. 내 아이란 말이야. 내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내 아이를 돌려줘, 돌려달라고!’ 어머니가 열에 들뜬 채 까무러칠 때까지 제럴드는 그 비명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문득 제럴드는 에드워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드워드가 두 손으로 책을 탁 덮고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쇼어 공작부인,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의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그 깐깐하고 고상한 얼굴로 응접실에 행차하셨다. 침실로 들어갔던 공작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양팔에 갓난애를 하나씩 안고 있었다.
‘아이가…… 둘이에요, 어머니. 여자애와…… 남자애.’
공작의 말에 쇼어 공작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쌍둥이란 말이냐?’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그녀는 화를 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어머니의 뜻대로 되는 것이었던가? 어린 제럴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서운 할머니는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쪼글쪼글한 갓난아이가 둘. 쌍둥이였다. 멸문이나 가문의 위기를 예고한다는 쌍둥이의 출현에 할머니의 노여움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문득 할머니가 조금 전까지의 노여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을수록, 갓난애가 태어난 집안에 찾아왔어야 할 축복도 눈 속으로 파묻혀버리는 듯했다. 추웠다. 그래도 제럴드는 벽난로 쪽으로 움직이는 대신 아버지 쪽으로 움직여 동생의 모습을 보려고 애썼다. 그랬을 때 두 살 위의 형 에드워드가 싱긋 웃었다.
‘역시, 여자애지요?’
그 말에 아버지가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에드워드는 맞지 않느냐며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쇼어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쇼어 공작은 물론 귀족다운 남자였다. 자신의 작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여러 가지 일을 해왔고, 불륜 상대도 여럿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내와 금실이 좋은 편이었고, 아이들도 사랑했다.
‘여자애라니.’
그는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었지만, 도저히 이해한 티를 낼 수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그런 무서운 말을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했다는 것 또한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제럴드의 할머니―가 불쾌한 낯빛으로 혀를 찼다.
‘당연히 여자애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브라이튼.’
‘어머니.’
쇼어 공작부인이 에드워드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과연, 핏줄이 깨끗해서 그런지 똑똑하구나.’
제럴드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의 제럴드는 할머니의 저 칭찬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저렇게 말하자 아버지의 얼굴이 확 굳어지는 이유 또한 알지 못했다.
쇼어 공작이 ‘어머니!’ 하고 낮게 소리치자 쇼어 공작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소리치니, 천박하게!’
그렇게 핀잔을 주는 사이 에드워드가 공작의 옆에서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아들은 둘이나 있잖아요.’
그 순간 제럴드는 말을 잊고 말았었다.
할머니는 ‘그렇지, 그렇지’라며 에드워드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에드워드는 생긋 웃었었다. 웃으면서도 어딘가 위로하는 기색이었지만, 공작은 자신의 양팔에 안긴 갓난애와 에드워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저 눈을 깜빡였다. 방금 빛을 보게 된 아이 중 한 명을 선택하게 된 그는 괴로웠다. 너무나 괴로웠는데 에드워드는 조금도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에 제럴드는 에드워드보다 쇼어 공작과 더 가까워졌었고, 쇼어 공작은 자신의 최후를 예견한 것처럼 제럴드에게 말했다.
‘나는 왕을 믿지 않는다, 제리.’
그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취해서 말했다. 예전보다 잘 취하게 된 것이 더 늙으신 것 같아 제럴드는 마음이 좀 짠했었다.
‘그는 3백 명을 죽였어. 평민도 아닌 귀족을 3백 명이나 죽였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야. 나는 그를 결코 믿지 않아.’
쇼어 공작이 그렇게 말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3백 명을 죽이는 건 보통의 정신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제럴드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분 차별주의자이자 뼛속까지 귀족인 쇼어 공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나는 절대로 믿지 않아, 절대로. 내 딸은 놈에게 살해당했어.’
술을 마실 때마다 쇼어 공작은 괴로움에 떨었다.
‘마리, 내 귀여운 딸. 내 사랑스러운 딸. 너도 알지, 그 애가 얼마나 완벽한 왕후였는지.’
‘예, 알아요.’
‘세상에, 역사에 그토록 완벽한 왕후는 다시 나오지 않아!’
‘아버지, 그럼요. 알아요.’
‘놈이 죽였어! 왕이라는 그 새끼가! 3백 명이라는 귀족을 노예처럼 죽인 그 새끼가! 내 딸도 그렇게 죽였다고!’
제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며 우는 늙은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왕에게 난폭하게 당했던 뒤에서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골이 시렸다. 눈이 왔다. 라파엘을 버리던 그 밤처럼, 눈이 진절머리 치게 많이 내렸다. 귓가에선 아직도 마리의 울음소리가 선연했다. 그리고 눈앞에선 아버지가 울고 계셨다.
‘그래요, 아버지.’
늙으신 아버지께, 제럴드는 차마 에드워드에 관한 이야기를 다 해드릴 수가 없었다.
‘그가 나빠요.’
그래서 제럴드는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그저 표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제럴드의 아버지는 라파엘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쇼어 가문은 절실히 여자아이가 필요했다. 그들은 왕비감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은 남자애를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들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도덕심 때문은 아니었고, 신력이 남자아이에게 부여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곧 잊혔다. 산파는 남자아기가 늦게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쇼어 공작부인―제럴드의 할머니―이 ‘이놈이 떨거지였군’이라며 당장 갖다 버리고 걱정은 집어치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헤수스에서 쌍둥이는 정상적으로 태어날 아이와 재앙의 씨앗이 같이 태어난다고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정상적인 가문의 일원이고 다른 하나는 재앙의 씨앗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남자아이’가 재앙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본래라면 남자아이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려져 얼어 죽어야 했지만 브라이튼 라 쇼어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은밀히 자신이 스폰서가 되어주고 있었던 길드 ‘검은 물’로 아이를 보냈다. 이름을 짓는 데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15분밖에 없었다. 조부의 미들네임인 ‘라파엘’로 결정하고 보낸 것이 공작의 최선이었다.
마리 트리지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다. 그 아이는 정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났다. 분명 아이는 왕후로서의 재목감이었다. 그 아이는 그냥 왕후로서 율레즈가 빚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일이 시작되었다.
‘요즘 아버지가 많이 우울하시니까.’
처음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신 쿠치아노의 힘은 여성에게는 잘 전수되지 않는 힘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귀족의 일원들은 대부분 미약하게나마 그 힘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마리는 도무지 신력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개인마다 신력의 조짐이 보이는 때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마리는 아주 늦은 편이었다. 마리가 열넷이 되던 해,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의 생일에 에드워드가 제안했다. 깜짝 놀래드리자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작은 마술을 꾸몄다. 마리가 물 위의 나뭇잎에 신경을 집중하는 척을 하면 에드워드가 슬쩍 나뭇잎을 띄우는 것으로.
물론 이 마술은 대성공이었다. 모두가 아주 기뻐했다. 그 당시에는 마리도, 제럴드도 재밌어했다. 에드워드는 ‘곧 너도 신력을 쓸 수 있게 될 거야’라고 말했으니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장난에 불과했다.
그해에는 좋지 않은 일이 아주 많았다. 가장 중요한 건 알렉시스 제2왕자의 낙마 사고였다. 자살인지 아닌지도 모호한 그 죽음으로 인해 반왕파 귀족들은 일제히 침통에 빠져들었다. 그는 아이브리 왕세자의 유일한 대항마였다. 그가 사라진 이상, 이제 아이브리 독주 체제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의 정혼녀였던 마리는 정작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그녀가 고작 열네 살에 불과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은 마술은 모든 것을 뒤바꾸어놓았다. 그녀가 신력이 있다고 생각한 공작은 그 사실을 자신의 모친과 고모인 태후에게 말했고, 마리는 정혼자인 알렉시스 제2왕자가 죽은 지 2년 만에 아이브리 왕세자의 왕세자빈 후보로 간택되었다.
그리고 마리 라 쇼어의 빛나는 지옥이 그 문을 열었다.
아이브리 잉그램 이그나치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왔는지는 모든 귀족들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몹쓸 학대를 받았다. 그는 툭하면 태후에게서 학대를 받았다. 그는 태후의 심술 때문에 얼음물에 들어가고, 겨울비를 맞고, 벽난로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수많은 시종 앞에서 여자를 안으려 노력하고……. 그 모욕은 끝이 없었다. 목숨을 끊고 싶어질 하나하나의 모욕을 그는 별것 아닌 것처럼 감수해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긴 세월 동안 모욕을 감수해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렉시스 제2왕자가 고작 네 살 때, 당대 최고의 가문 쇼어가의 독녀인 마리 라 쇼어와 정혼한 것에 비해 아이브리 왕세자는 나이가 차다 못해 넘쳐도 왕세자빈조차 없었다. 태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남의 귀한 집 아가씨에게 씨도 못 뿌리는 왕세자를 어디 들이미느냐’며 그를 모욕했었다. 거기서도 왕세자는 웃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해서 그는 웃었다.
그런데 권력의 명패에 드디어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러자마자 쇼어 가문은 어거지를 써서 마리를 왕세자빈으로 만든 것이다. 마리 라 쇼어가 신력이 없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고, 왕은 왕세자빈 자격시험에 ‘신력 테스트’를 추가했다. 자신은 다른 여성을 부인으로 맞을 의사가 없으며, 왕세자빈이 성인이 되면 곧 왕후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물론 그건 억지였을 것이다. 왕은 마리 라 쇼어가 신력이 없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그녀를 왕세자빈 자격시험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신력 테스트를 추가했고, 그러기 위한 변명거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추가된 신력 테스트에서, 마리 라 쇼어는 소문과는 달리 아주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그 신력 테스트 당시.
제럴드는 먼발치, 문 앞에서 근위대장으로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왕세자빈 자격시험이라 특별 경비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는 거기에 서 있었다. 마리의 굳은 얼굴.
그리고 제럴드는 신력을 운용했다.
마리가 웃었다. 슬프게 웃었다. 웃으려고 노력하던 마리가 고개를 들고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격시험이 끝나고 본가로 돌아온 날 밤, 마리는 사라졌다. 후에 그녀는 라파엘에게 갔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모든 보석을 팔아서 ‘검은 물’ 길드에 의뢰했었다고. 라파엘 에반스와의 만남을 의뢰했었다고, 그리고 라파엘의 허락으로 단 한 번 만났었다고 말하면서 그녀는 울었다.
‘그는 날 구해주지 않아. 당연하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겠어. 아름다운 나의 분신. 처음 본 것에 불과한데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숨이 막혔어. 보는 순간, 그가 나의 분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 달려가서 끌어안았어.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고 아늑했어.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지만.’
그녀는 울면서 횡설수설했다.
‘그가 여기에 와야 해. 여긴 그의 자리야. 나에겐 신력이 없고, 그에겐 신력이 있을 테니까. 모든 것이 제자리로 가는 것만이 나를 구하는 길이지만, 그렇지만, 오빠. 그가 어떻게 나를 구해주겠어.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 아, 율레즈여. 아름답고 아름다운 나의 라피. 나의 라파엘.’
그녀가 갑자기 제럴드에게 매달렸다.
‘오빠, 제럴드. 라피는 그렇다 쳐도, 오빠는 날 구해줘야 하잖아. 이대로 궁에 들어갈 수는 없어. 모두를 속일 수는 없다고! 들통 날 거야! 평생을 속일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잖아! 제발, 날 구해줘. 날 구해줘, 오빠!’
마리가 목 놓아 울었다.
‘내가 그분을 연모하고 있었다는 걸, 오빠도 알잖아! 그분이 우리를 증오하고 있다는 걸, 오빠도 알잖아! 나를 그 지옥에 밀어 넣지 마, 제발! 제발!’
제럴드는 그저, 그저, 마리에게 그 가슴을 내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마리는 하룻밤 내내 울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마리에게 신력이 없다는 것은 곧 발각되었고 마리와 제럴드가 벌인 그 조잡한 사기도 곧 들통이 났다. 왕은 지독하게 증오하는 얼굴로 제럴드에게 몸이라도 바쳐보라고 말했다. 네 잘난 여동생의 지위를 보장받고 싶다면 몸이라도 바쳐보라는 말에 제럴드에겐 다른 길이 없었다.
어차피 이 증오는 끝이 없었다.
그들에겐 다른 길이 없었다. 처음이 어디였지? 이미 생각할 수 없었다. 마리의 앞에서 범해지는 것은 사실 기분 더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리어 아주 조금은 이렇게라도 마리의 그 지옥에 동참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기분도 들었다. 차라리 다행이야. 너만 지옥이 아니니까.
마리, 그 지옥에 너 혼자만 보낼 리가 없잖아. 나도 같이 있어. 오빠가 지켜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줄게.
마리의 지옥은 제럴드의 지옥이기도 했다. 그리고 혼자만의 지옥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지옥은 견딜 만했다. 그리고 별로 같이 있고 싶진 않았지만 이 지옥은 결코 왕의 천국이 아니었다. 이 지옥은 왕의 또 다른 지옥이기도 했다. 왕은 제럴드를 안을 때마다, 아니, 제럴드의 몸에 손을 댈 때마다 구더기 굴에 손을 집어넣는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제럴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럴드는 마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왕궁을 떠나려 했던 것을 이해했다. 온 마음으로 이해했다. 누군가는 이 지긋지긋한 증오에 끝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비인간적인, 부모도 사랑도 성도 자식도 미래도…… ‘자기애’조차 내팽개친 이 미움의 고리를 누군가 한 명은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리는 총명하고 용감했다. 그리고 마리는 트뤼포아와 깊은 관계는 아니어도 연애를 했었던 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트뤼포아와 도망쳐 제2의 인생을 살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출궁은 에드워드에 의해 제지당하고, 트뤼포아는 근위대에 쫓기다 마리가 말해준 ‘안전한 곳’으로 향한 끝에 그 안전한 곳 근처에 있는 지뢰에 의해 불구가 되었다. 이후, 마리는 1년 동안 에드워드의 약점을 잡아냈고 그것으로 그와 타협하기 위해 어느 새벽 마법의 다리에서 만났다. 그리고 에드워드에 의해 다리 위에서 밀려 그대로 추락사하고 말았다. 마리는 에드워드와 타협해서 트뤼포아를 다시 찾으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때 이미 트뤼포아는 라파엘에게 반해서 마리를 잊은 다음이었으니 차라리 나은 결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제럴드가 말했다.
§ § §
“더는 들어줄 수가 없군.”
라파엘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보기 드물게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두고, 또다시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두길 반복했다. 자꾸 말인지 감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그의 심장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는 마리가 달려오던 것을 기억한다.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는 신을 모르고 믿은 적도 없지만, 신전에서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를 본 순간 그의 마음이 그러했으니까. 아아, 율레즈여. 여기에 기적이 있나이다. 그는 그렇게 속삭였었다. 마리가 맨발로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그렇게 울던 그 여린 목소리를 돌려보낸 것은 두려워서도, 그녀를 미워해서도 아니다. 당연히 그녀에게 ‘옳은 일’을, 그녀에게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이 주먹으로 내려친 탁자가 주저앉았다. 단 한 번의 가격으로 주저앉은 탁자를 보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별히 라파엘의 힘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는 비록 빈틈없이 여장을 하고 있었지만, 라파엘 에반스였다. 아무것도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의 감정이 드러난 것에는 놀라웠다. 라파엘은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무표정했는데 지금은 난생처음 범람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 이딴 게 사랑이라고?”
라파엘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럴드가 올려다보자 라파엘이 보기 드물게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너희는 사랑이라는 말을 정말 쉽게 하는군. 같이 지옥에 있어줬다고? ―차라리 너는 길드에 말해서 나와 접촉이라도 했어야 했어.”
“너와 접촉을 하면 뭐가 달라졌는데!”
제럴드가 고함을 질렀다.
라파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 눈이 내리던 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한쪽은 선택받았고, 한쪽은 버림받았다. 그 버림받던 아기의 볼이 발갛던 것이, 그게 마치 사과 같은 색이었다는 게 아직도 선했다. 그래―그는 그 모든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옥에 라파엘은 없었다.
에드워드는 정말……, 그들은 정말 에드워드를 사랑했지만 그는 악마였다. 형제가 아니라 악마였다. 제럴드와 마리는 그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악마의 삼지창 대신 ‘우애’라는 삼지창을 흔들어댔고,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지옥에 라파엘은 없었다. 그 주제에 입만 나불거리다니!
“너와 접촉을, 하면! 그러면!”
“나는 살렸을 거다!”
라파엘이 맞고함을 쳤다. 그걸로 모자라 그는 제럴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 애를 살렸을 거야! 나는 바보 같아서, 모자라서, 단지 몰라서, 그 애를 사지로 밀어 넣었지만!”
라파엘의 검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도대체, 도대체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이 난다. 아름답다…… 고 생각했다. 그의 분신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고.
행복하기 위해서, 입궁 직전에 도와달라고 달려온 여동생의 말을 듣지도 않고 수도로 내리쳐 입을 막아 돌려보내버린 자신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너는 선택받았잖아. 버림받은 건 나잖아. 그러니까, 너는 거기서 행복했어야지.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행복할 거라고. 당연히, 믿었는데. 당연히, 불행은 나 하나에게 밀어놓고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었을 거라고 믿었는데.
“몰라서…….”
몰랐어, 단순히 몰랐었다.
라파엘의 볼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당연히 귀족이니까, 그 유명한 ‘마리 라 쇼어’니까, 행복할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그렇지만.
“이게, 너희 귀족들이 말하는 사랑이냐?”
라파엘이 멍하니 물었다.
“고작 최선을 다해봐야 지옥에 같이 가주는 게,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거야?”
라파엘의 목소리에 제럴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피.”
제럴드의 보라색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라파엘은 평민이었다. 귀족은 당연히 행복하고, 귀족은 당연히 부유하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평민이었다.
“놈은.”
라파엘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낮게 변했다. 라파엘은 의도적으로 왕을 바라보지 않았다. 왕 대신 스완을 바라보며 라파엘이 물었다. 검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놈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으면?”
더는 참지 못하고 왕이 물었다.
왕은 아까부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아는 라파엘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라파엘은 무표정한 남자였다. 그에게 안겨서는, 무표정하게 그에게만 표정을 보여주는 남자였다. 거의 아무런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라파엘. 사랑스러운 그의 사슴. 그런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라파엘이, 왕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라파엘을 볼 때마다 술 취한 나비가 심장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나비가 라파엘로 화한 듯했다. 그의 손을 벗어날 것 같았다.
안 돼.
왕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라파엘을 놓을 수 없었다. 지옥? 제럴드의 과거 회상을 왕은 진심으로 비웃었다. 엉덩이 두세 번 뚫린 걸로 지옥이라고? 지랄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개소리였다. 정말 지옥이 뭔지 모르는 귀족 도련님의 허풍이었다. 왕은 지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없으면, 그 지옥은 왕의 평생을 함께할 것이었다.
라파엘이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어쩌고 싶은지 그 자신도 정말 모르겠어서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왕이 충동적으로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잊어라.”
왕이 명령했다.
라파엘은 언제나 왕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예, 전하. ―그 대답은 늘 명쾌했다. 라파엘은 왕의 명령에 의문도, 반대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번에도 그렇게 대답해줄 것이다.
아아, 그래. 그러면―.
오늘은 부디 첫날밤을.
신전에서 합방일을 정해 보내온 건 벌써 며칠 전이었는데 이미 그 날짜는 지나갔다. 하지만 뭐 어떤가. 신이 점지한 날짜 따위 다 엿 먹으라고 해. 나는 지금 너를 원해. 지금 너에게 쏟아붓고, 너의 타액을 마시길 원해. 이 갈증이 나를 태워 죽이기 전에.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고 있지. 나의 안네마리. 나만의 안네마리.
지금 우리 둘만의 침실로 가는 거야. 문 플레이스, 선 플레이스. 달의 장소이든, 태양의 장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람. 어디든 영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잊지 못합니다.”
라파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저는 놈을 쫓겠습니다.”
아직도 놈의 얼굴이 선명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하던 놈의 얼굴. 라파엘 자신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멀쩡하다. 그러니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파엘과 에드워드는 결국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는 여동생을 죽였고, 친어머니를 쏘려고 했다. 그리고 라파엘 자신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를 고문했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둘은 다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르겠다.
살수인 라파엘 에반스는 물론 돈을 받으면 에드워드 라 쇼어의 주변 인물 누구라도 죽였을 것이다. 그와 에드워드 사이의 다른 점은 도대체 뭘까.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다르지 않아도 좋다. 똑같은 괴물이어도 좋다.
“놈을 제거하겠습니다.”
“난 보낼 수 없어.”
왕이 고개를 저었다. 왕의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보내지 않겠다.”
“저는.”
라파엘이 또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놈은 위험인물이다. 미치광이다. 라파엘은 그런 놈을 몇 명이나 알고 있었다. 살수 중에는 종종 미친놈들이 많았다. 사람을 죽이면 피가 더워진다는. 그런 놈들의 특징을 라파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은 자신의 타깃을 죽이지 못했을 때 대단히 애석해한다. 심지어 타깃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반드시 찾아내서 죽이고야 말 것이다. ―자신에게 오면 차라리 다행이다. 라파엘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만에 하나.
놈이, 왕을 노리면?
왕은 공식 석상에도 많이 나간다. 왕궁은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고, 그는 왕궁을 지나치게 잘 안다. 만에 하나지만.
“저는, 전하. 저는.”
“너의 복수에 나는 찬성도, 허락도 하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라파엘을 안아 올렸다. 라파엘은 늘 그렇듯 반항하지 않고 왕의 품에 안겼다. 안긴 채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전하를 노릴지도 모르니까 제거하겠습니다’라고 말할까? 하지만 그러면 왕에겐 괜한 두려움을 안겨주는 게 아닐까. 에드워드 라 쇼어는 서대륙의 노트코 공국으로 간다는데 괜히 왕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지. 라파엘은 자신의 대화 능력이 미천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말을 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안겨 있었다.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재빨리 침실로 이동했다.
아아, 율레즈여. 그는 신을 저주했다. 신은 언제나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가 앗아간다. 지옥 같은 고문이었다. 라파엘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분신인 마리 트리지아의 복수를 선택했다. 마리 트리지아가 신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출궁의 소망을 알면서도, 그것을 빌미로 지옥을 만들어준 남편이라는 작자가 꼴도 보기 싫어진 모양이다. 안 돼. 왕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벌써 끝이라고? 이렇게 끝이 난다고? 안 돼, 아직은 안 돼. 아직,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 성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키스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직 사랑도 해보지 못했다. 고백도, 싸움도 해보지 못했다. 왕은 안네마리에게 반지도 준 적이 없었고, 둘이서 같이 야유회에 참석한 적도 없었다. 여행도 가본 적이 없었다. 둘은 오페라를 구경해본 적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왕이 안네마리에게 준 게 뭐냐고? 옆구리에 준 상처? 그의 분신에게 준 지옥? 안 돼, 아직 안 되었다. 언젠가 끝이 난다고 쳐도, 아직은 아무것도…….
왕이 라파엘을 침대에 내던지자, 시종들이 재빨리 휘장을 치고 물러났다. 둘만의 밀실이 되자 왕이 침대로 다가왔다. 흉흉한 기세였다. 왕이 침대에 완전히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라파엘이 왕을 끌어당겼다. 부지불식간에 왕이 라파엘에게 끌려왔다. 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하.”
라파엘이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랑을 하진 않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봐야 지옥에 같이 있어주는 사랑 따위, 라파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살릴 것이다. 마리에 대해 어떤 감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낸 것은 단지 마리에 관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모른다는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이 마리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에 화가 났고, 그녀를 죽음으로 되돌려버렸다는 것이 슬펐고, 그리고…… 혹시 왕에게 그런 일이 생겨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공포를 느꼈다.
라파엘의 검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안네마리?”
“저는, 절대로 그따위 사랑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물만이 떨어졌다.
라파엘은 알 수 없었다. 왕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운데, 그는 도저히 왕의 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아아―. 라파엘은 절망했다. 이런 게 아마 기계식 절망인가.
라파엘의 눈에서 눈물이 또 떨어진다.
사랑인지, 이별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떨어진다.
“울지 마.”
“저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겠습니다.”
“울지 마.”
왕의 입술이 라파엘의 볼에 닿았다. 처음 맛보는 라파엘의 눈물은 어머니의 바다처럼 짜고, 감로수처럼 달았다. 왕이 혀를 내밀어 한 번 더 핥았다.
“울지 마라, 제발. 제발, 울지 마.”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왕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다음에 닿은 것은 시선이었다. 혼란스러운 시선이 서로를 탐색했다. ‘그것이 너희 귀족들이 말하는 사랑이냐’라고 분노하던 라파엘. 그리고 ‘그런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단언하던 라파엘의 혼란스러운 얼굴에서 본심을 끌어내려던 왕과, 왕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라파엘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또 실수하게 될까 봐 겁에 질린 둘은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힘든걸.”
또 라파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혼자 살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할 때는 힘들지 않았었다. 살수로 살 때도, 고문을 당하거나 고문을 할 때도, 길드에 의해서 트레이닝을 받을 때도―.
라파엘 에반스로 살 때, 그는 단 한 번도 힘들지 않았었다. 괴롭지 않았었다. 지옥이라고? 그에게 지옥은 단 한 번도 아가리를 벌려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으니, 단 한 번도 불행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힘든 걸 왜 저는 하고 싶은 겁니까.”
“널 힘들 게 하는 게 뭔데.”
왕이 라파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비볐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행복이요.”
왕이 가볍게 신음했다. 이 남자는 그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손짓 하나에, 말 한 마디에 그를 미치게 만드는 기술이 있다. 왕이 잠시 망설이다 손을 올렸다. 처음 라파엘을 침대에 내던질 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였다. 왕이 맞댄 이마를 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라파엘의 뺨을 닦았다.
“울지 마.”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이 다시 속삭였다.
“네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우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울지 마. 나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너무 사랑해서라고 해도, 울지 마라, 제대로 웃지도 못하는 게. 우는 거 먼저 배우면 못쓴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라파엘의 목소리에 왕이 피식 웃었다. 언제나 듣던 그 목소리였다. 그의 왕비가 내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 왕이 조금 얼굴을 떼었다. 그래도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웠다.
“웃어봐.”
그러자 라파엘이 웃었다. 히죽, 히죽, 히주욱. 웃으면 웃을수록 일그러지는 웃음을 보면서 왕이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라파엘이 웃을 때마다 한 번씩 키스해주었다. 광대처럼 바보같이 짓는 그 웃음이 어느 여자의 세련된 미소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네가 좋아. 왕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네가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심장이 네 미소에 찢어질 것 같아. 너는 우는데 세상이 멀쩡하면, 찢어놓고 싶어져.
“또 웃어봐, 어서.”
왕의 말에 라파엘이 또 웃는다. 히주우욱. 왕도 웃었다. 왕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라파엘은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파엘의 웃음은 사랑스럽다. 아아, 신이여. 왕은 악마를 찾을 순 없어서 아까 저주했던 신을 다시 찾았다.
저에게 평생 지옥을 주어도 좋습니다. 그에게 부디 작은 천국을.
“말하는 걸 잊었었는데.”
왕은 라파엘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고백조차 못한 이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전에 라파엘은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라파엘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지자 왕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말라버렸다. 왕은 평소처럼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라파엘의 뒤통수를 감싸 자신 쪽으로 잡아끌었다.
휘장 밖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건 어차피 당연한 것이다. 사생활은 보호받지 못한다. 그들은 왕과 왕비니까.
하지만 왕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자 라파엘은 엉겁결에 신음 소리를 냈다. 섹시한 신음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조금 놀란 것뿐이었다. 왕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며, 왕의 손이 등에 달린 단추를 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파엘이 신음 소리를 내자 왕의 손이 라파엘의 입을 막았다. 쉿, 왕이 주의를 주었다. 라파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왕이 고개를 저었다. 소리 내지 마.
라파엘이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살기는 없다고 말했다. 왕이 조금 웃었다. 당연히 살기야 없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 말에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이 그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이 빌어먹게 복잡한 드레스.”
왕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왕의 손은 생각보다 라파엘의 복잡한 단추를 잘 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얼마나 예비 행사를 치러왔는지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왕의 입술이 귀를 덧그리자 라파엘이 어깨를 움츠렸다. 생각해보니 꽤 오래 아무도 안지 않았었군. 왕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했다. 아니면 당장 이 남자를 눕혀놓고 마음대로 해버릴 것 같았다.
아아.
위를 대충 벗기고 겨우 드러난 가슴을 보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까지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돌기를 깨물자 라파엘이 깜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가 손을 떼었다. 뭔가를 참는 것처럼 라파엘이 주먹을 쥐었다.
가슴에 왕의 치아가 닿았다. 물어뜯을 것만 같다. 본능적으로 왕을 밀어낼 것 같았지만 주먹을 쥐고 참아내며 라파엘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묶어달라 부탁할까. 이러다가 왕을 밀어내면 어떡하지? 밀어내는 건 괜찮은데 만약 밀쳐서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 어떡하지?
“……흣.”
라파엘이 불에 덴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이로 물 때는 그저 밀칠까 봐 걱정이 되었는데 그 저린 곳을 혀로 핥자 이번에는 기묘한 기분에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왕이 다시 손을 갖다 대자 라파엘은 그 손을 치우고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 이런 소리가 나는 거지? 여자들이 이런 소리를 낸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냥 내는 소리가 아니었…….
“흡, 흐읍!”
라파엘의 몸이 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민감한 몸이다. 도망치고 싶은 모양인지 뒤로 물러나고 있어서 왕은 어디 가보라는 심정으로 같이 가주었다. 침대 끝, 헤드에 등이 부딪친 라파엘이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을 돌려 막다른 곳임을 확인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는 얼굴은 열다섯 살만도 못하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말도 못 하고, 라파엘은 그저 감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몸을 떨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꽉 주면서. ―왕은 차마 더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마치 추행 같지 않은가.
“안네마리.”
왕이 정염에 쉰 목소리로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 이라고 부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는 라파엘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평생 ‘안네마리’로서 라파엘을 잡고 있을 것이다. 신이여. 왕은 아까 찾은 그 신을 또 찾았다. 부디 저에게 평생 지옥을. 그리고 그에겐 작은 천국을. 마리 트리지아가 제 곁에서 지옥을 맛보았다 하더라도, 그에겐 부디 지옥을. 제게 그가 가져야 할 몫의 지옥까지 내리소서.
“나는 너를 안을 거야. 안는 게 뭔지 아느냐?”
“압니다, 전하.”
휘장 밖에서 시종들끼리 ‘제대로 모른다는 데 백 골드 겁니다’라는 내기가 횡행하는 사이, 휘장 안에서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행도, 성교도 아니야.”
초보자에게 너무 어려운 개념에 라파엘의 얼굴이 급격히 흐려졌다. 라파엘의 눈이 깜빡이자 왕이 그 깜빡이는 눈에 키스했다.
“하나만 약속해줘.”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왕이 침대 헤드를 탕―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짚었다. 자신의 어깨를 지나는 그 팔을, 라파엘이 흘끗 바라보았다. 왕이 싱그럽게 웃었다. 웬만한 눈치가 있었으면 ‘불길하다’고 표현할 만한 미소였는데, 불행히도 상대는 웬만한 눈치가 있지 못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