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장 동이 트기 직전 (19/47)

제18장 동이 트기 직전

왕과 스완 라 포 특수군 대장, 제럴드 라 쇼어 특수군 대장, 안네마리 제1왕비가 모인 왕의 응접실에서 시종들은 일사불란하면서도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세심하고 특별한 시중을 받으면서 각자의 정보를 모으고 종합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두 번 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왕은 새벽녘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왕이 드러내지 않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알아낼 자신은 없었기에 라파엘은 더 이상 왕의 표정을 살피는 걸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근위대 두 명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왔다. 

로버트 데인이었다.

“루 라 트뤼포아를 빼낸 놈입니다.”

“본인이 인정했습니다.”

로버트 데인은 그사이 초췌해져 있었다. 본인이 루 라 트뤼포아를 데려왔을 때의 꼴과 비슷해서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럴드가 “역시 그랬나”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재빨리 팔을 휘저었다. 데려가라는 그 얼굴에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배후는 누굽니까, 쇼어 대장님?”

“말을 안 하더군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나야.”

라파엘이 간단하게 인정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트뤼포아에게 확인할 게 있었어. ……1년 전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어. 그러다 내 집 주위에 설치해놓은 지뢰를 밟아 그를 제외한 그의 마부, 그를 쫓던 근위대 두 명과 말 두 마리까지 전부 산산조각이 났었지. 그는 마차 안에 있어서 겨우 살았고, 그 마차 안에는 여성용 옷가방도 있었어. 여성과 어디로 가려던 중이었겠지. 그때 그래서 여자 시체도 찾아봤었거든. 날짜는 맞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마리의 옷가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왜.”

“트뤼포아가 그렇게 된 건 1년 전. 마리가 이 모든 것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도 1년 전. 날짜가 왠지 맞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트뤼포아와 마리는 무슨 사이였습니까?”

제럴드가 얼굴을 굳혔다.

“무슨 사이라니, 대단히 불쾌합니다.”

제럴드가 그렇게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리 트리지아 왕후 전하께오선, 아니, 왕비 전하께오선 트뤼포아 후작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셨습니다. 그런 문란한 남자와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관계가 있었어.”

왕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관계가 있었다기보다는 좀 일방적인 것 같았지만 말이지. 트뤼포아가 마리 트리지아에게 빠져 있었거든. 마리 트리지아에게 빠진 남자는 꽤 많았었지.”

왕을 제외하면 그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던 왕후였다. 왕은 치세 능력을 인정받아 인기가 좋았다. 반면 왕후는 개인적인 매력으로 인기가 좋았다. 국민들이 좋아할 정도였으니 남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추종자들 중에는 트뤼포아도 있었다.

“그리고 마리 트리지아는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달까, 그런 게 좀 있었거든.”

왕의 말에 제럴드가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아름다웠다. 미형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쇼어 가문이 한 수 접는다고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왕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마리는 그를 보며 ‘진정한 왕자님’이라고 말했었다.

그래, 그렇게 아름다웠지.

제럴드는 전혀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뺨 안쪽을 깨물었다.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달까?’ 개자식. 누구 때문에 마리가 그렇게 되었는데. 제럴드는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가 왕의 앞에서 옷을 벗던 때, 마리가 떨어뜨리던 그 눈물이. 아니, 아니. 제럴드는 다른 남자를 떠올렸다. 섬세하고 유약해 보이는 아름다운 남자. 하지만.

‘여자애예요. 그렇죠, 아버지?’

그렇게 말하던 자신의 형을.

그 자식이 모든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 왕은 나쁜 놈이었다. 그가 선인이라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왕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시작한 것도 왕이 아니었다. 제럴드도 알고 있었다. 왕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는 걸.

용서와 이해는 늘 같이 다니지 않는다. 때로 그들은 완전히 등을 돌린다. 제럴드는 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는 트뤼포아와 관계가 있긴 했어.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왕이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제럴드가 고개를 저었다.

“둘은 성적인 관계는 아닐 겁니다. 마리는 전하께 절조를 지켰습니다. 아마, 귀족 사회에서 배우자에게 절조를 지킨 유일한 인간일 겁니다.”

“그래서?”

“모릅니다. 단지 제가 아는 건.”

제럴드가 잠깐 망설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마리가 궁을 나가려고 했다는 겁니다.”

“미친.”

왕이 픽 웃었다. 궁을 나가? 왕후가? 하지만 제럴드는 그의 웃음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았다. 제럴드가 진지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 애는 그렇게 힘들어했던 겁니다. 전하의 학대에.”

“학대? 너의 잘난 고모가 나한테 한 짓에 대해서 읊어주길 바란다면 어디 더 지껄여보려무나.”

왕이 싱글거리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내 어머니께 한 짓까지 치면 어디 이달 안으로 끝나겠느냐?”

그 말에 제럴드가 눈을 감았다. 자업자득. 그 말은 너무나 간단하고, 너무나 하기 쉬운 말이지만, 너무나 뼈아픈 말이었다. 더욱이 연좌에 의한 것이면 더욱 그렇다. 제럴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뱃속 깊이 웅크리고 있는 죄와 증오에 신선한 바람이 닿을 수 있길 바라면서.

제럴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마리는 왕궁을 나가고 싶어했습니다.”

“가문이 어떻게 되든지간에 말이냐?”

왕의 지적에 제럴드가 “그렇습니다, 전하”라고 대답했다.

“쇼어가는 멸문에 처하게 되었을 텐데?”

“예, 전하.”

“그녀가 사랑해마지 않는 너도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예, 전하.”

“마리 트리지아가 트뤼포아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왕궁을 나갔을 거라고? 그 수많은 대가와 위험을 감수하고?”

왕이 여유롭게, 그러나 의아하게 물었다. 왕의 질문에 제럴드가 말했다.

“전하께오선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제럴드가 말했다. 그러나 제럴드는 마리 트리지아를 이해했다. 마리는 궁이 숨 막힌다고, 자신은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애원했다. 그리고 그 서신에는 늘 왕의 저 푸른 눈이 그를 숨 막히게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더럽혀도, 마리는 당장 여기서 도망치길 바랐다. 그리고 아마, 복수심도 조금쯤 있었을 것이다. 제럴드는 마리를 이해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마리의 절망도, 희망도 전하께오선 결코 이해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지만 마리는 궁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정말 떠나려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궁을 떠나려고 했는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불쌍한 아이의 소망이 무너졌는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제럴드가 말했다. 어느새 제럴드는 마리를 ‘아이’라느니 ‘불쌍한 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경칭을 잊은 제럴드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경칭을 붙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제럴드가 이마를 짚고 잠시 가여운 여동생을 떠올리며 신음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단지, 트뤼포아 후작의 마차가 발견되던 그 전날 밤, 에드워드가 와서는 죄인이 도망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주 급한 일이라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시급한 일이라기에 근위병 둘을 보냈습니다. 그 대상이 트뤼포아 후작인 줄은 몰랐지만, 나중에 물어보니 트뤼포아 후작이 전하의 개인 재무 서류를 빼돌렸다고 하더군요. 트뤼포아 후작은 반왕파이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아주 곤란해했습니다. 개인 재무 서류를 빼돌린 정도로 멸문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일은 분명히 저희가 뒤집어쓰게 될 여지가 보였으니까 말입니다.”

제럴드의 말에 스완이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고도 남았다. 사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스완도 재빨리 쇼어 가문에 뒤집어씌워서 눈엣가시 같은 가문을 드디어 없애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지뢰에 의해 제 병사들은 죽었고 트뤼포아 후작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차로 보건대 그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겠지요. 알고 보니 그를 데려간 건 라피, 아니, 왕비 전하셨고요.”

제럴드의 말에 이제껏 조용히 있던 스완이 입을 열었다.

“특수군은 세 가지를 알아냈습니다. 일단 에드워드 라 쇼어의 소재입니다만 다들 예상하신 대로 태후궁입니다. 두 번째, 태후궁은 현재 외부인에 의해 방비되고 있습니다. 토우셔 경비대가 입궁했었는데 출궁을 하지 않았더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궁의 경비는 허술하지 않다. 그건 누구보다도 제럴드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제럴드의 말에 스완이 혀를 찼다.

“그들은 근위대장님의 소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군요. 그가 저의 인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파엘이 궁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왔던 그 소개서였다.

“반지 말인가요. 도주할 때 챙긴 모양입니다.”

“반지.”

라파엘이 눈을 번쩍 떴다. 맹세의 반지. 그 조각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이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라파엘은 그 반지를 정확히 기억해냈다. 그 반지를 그는 에드워드의 길고 유려한 손가락에서 봤다. 에드워드가 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라파엘의 말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스완과 제럴드가 어깨를 으쓱였을 때였다. 왕이 과연 하며 웃었다.

“그 반지는 세상에 딱 둘일 테고, 다른 한쪽은 프랜시스 라 쇼어가 끼고 있겠군?”

왕은 악당처럼 웃었다.

프랜시스 라 쇼어가 왕궁에 나타난 것은 그다음 날 오후였다. 왕의 호출에 당황한 프랜시스가 그러나 격식에 걸맞도록 빈틈없는 옷차림을 하고 나타나 알현실의 긴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프랜시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미인이었지만 왕에게 인상 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광인이라는 평을 듣는 왕에게 홀로 불려온 프랜시스였다. 남편은 도주했고, 가문의 본저는 불탔다. 물론 그녀는 시집을 갔다고 해도 그 집안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걸 온 귀족 사회가 다 알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이 옥좌에서 일어나 가볍게 걸었다. 저벅저벅 걸어간 그가 프랜시스 앞에 서서 물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의 부인인가?”

“법적으로는 그렇사옵니다.”

“법적으로만 그렇다는 뉘앙스군?”

“그렇습니다.”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프랜시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안네마리의 영향으로 요즘 갑자기 유행하게 된 반올림머리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저희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율레즈와 쿠치아노께 맹세컨대, 아무 일도.”

프랜시스의 말에 왕이 싱글거렸다.

“그래……. 첫날밤에 남편과 아내가 밀실에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왕의 말에 프랜시스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제 남편은 겁쟁이입니다!”

프랜시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리고 분명히 불구일 겁니다.”

“호오.”

“그는 제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는 성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프랜시스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왕은 흐음 하고 신음하며 흘끗 뒤를 바라보았다.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왕은 쇼어 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를 받았다. 에드워드는 당연히 불구가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꽤 많은 여자와 뒹굴었고, 심지어 아이도 있었다. 비록 사생아였고 에드워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말 그녀에게 관심이 없고 애정도 없다면 생전에 재산을 신탁하기 마련이다. 조금씩 신탁으로 넘겨서, 살아서는 자신이 쓰고 죽어서는 자신이 지정한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넘기기 마련인데, 재무 비서관으로 일해서 누구보다 그런 일들을 잘 아는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도주했다. 도주할 정도면 그는 이 사태를 예견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재산을 전혀, 빼돌리지 않았다. 전혀.

마치 프랜시스에게 남기려는 것처럼.

“프랜시스.”

왕이 의도적으로 환하게 웃자, 프랜시스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웃었다. 눈치를 보듯이 웃는 프랜시스에게 왕이 손을 내밀었다. 프랜시스가 손을 잡자 왕이 그 손을 잡아 일으켰다.

왕은 아주 우아하게 잡아끌며 말했다.

“내 비를 아느냐? 안네마리 말이다.”

왕의 말에 프랜시스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창백한 얼굴에 삐쩍 마른 여자. 하지만 아름답고 어딘가 요염하게 느껴지는 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촌이라더니 가끔씩 하는 행동이나 표정이 마리 트리지아 왕후를 떠올리게 할 때가 있었다.

“문 플레이스에서 사나흘 머무르지 않겠느냐.”

“문…… 플레이스에서 말입니까, 전하?”

“너에게 말하기 조금 곤란한데, 네 남편 에드워드가, 불경한 일을 저질렀단다. 너도 알지?”

프랜시스가 고개를 젓자 “저런!” 하고 왕이 노골적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모른다니 어쩔 수가 없네 하고 입을 다무는 왕에게 프랜시스가 왕의 비위를 맞추듯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일 겁니다, 전하. 말씀하셔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이 더욱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쇼어 가문과 나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오, 너무 불편한 이야기더냐?”

“아, 아니옵니다, 전하. 이토록 속 깊은 말씀이라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래, 그래. 어디까지 했지. 음, 그래. 쇼어 가문. 쇼어 가문의 에드워드 라 쇼어가 제 부모를 나쁜 길로 이끌어 결국은 좋지 않은 결과가 났지. 하지만 그대에게 나쁜 영향이 미치진 않을 거라는 걸 약속하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말하는 왕을 보며 시종장은 인자하게 웃었다. 왕의 자애로운 미소는 사실 시종장의 미소를 모델로 한 것이었는데, 둘 다 속이 시커멓다는 점에서 참으로 비슷했다.

“오, 감사합니다, 전하.”

“단지 너의 서류에서만 남편일 뿐인 남자가 아주 위험한 자라 그대가 걱정이다, 프랜시스. 나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괜한 희생이 되는 걸 원치 않아.”

문득 프랜시스가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프랜시스는 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왕은 다정한 남자가 결코, 결코 아니었다. 그 수많은 독설과 악담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태도는 아주 이상한 것이었다. 프랜시스가 그렇게 쳐다보는 순간 왕이 웃으며 말했다.

“너같이 쓸데없는 목숨이 죽어서 짐승들이 자기들 멋대로 짖어댈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짜증이 나니까, 가만히 문 플레이스에 처박혀 있도록 해. 알겠나, 프랜시스 라 쇼어? 괜히 서류상 남편이라고 왕후궁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걸어 나가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줬다간 너의 친정도 장작 값 좀 아끼게 될 거다. 응? 괜히 쇼어 가문처럼 뜨거운 맛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란 말이야. 알았느냐?”

여전히 미소만은 자비로웠다.

프랜시스가 질린 얼굴로 “……예, 전하”라고 중얼거렸다.

“특수군이 그대를 문 플레이스로 안내할 거다.”

특수군 특유의 검은 군복 두 명이 프랜시스의 앞에 섰다. 프랜시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왕비 전용의 붉은 마차를 보고 프랜시스가 눈을 반짝 떴다.

“아, 이 마차……. 비전하의 마차군요.”

안네마리 제1왕비의 공식적인 문장인 작은 사슴과 백합이 새겨져 있는 붉은 마차를 보고 프랜시스가 물었지만 군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서 타라는 말도 없이 그들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에 질려서 프랜시스가 조심스럽게 마차에 올라탔다.

역시 말로만 듣던 왕비의 마차였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마차였다. 아, 정말 성격은 더럽지만 그래도 그 남자가 매력적이기는 해. 프랜시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차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구석구석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는 마차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마차는 본 적이 없다. 이름난 장인이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매달려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아, 이건 진주인가? 이건…… 설마, 자수정?’

아름답기 그지없는 보석들이 각자 제자리에서 마차를 빛내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손을 뻗어 보석을 쓸었다. 아름다웠다, 너무나. 그 왕비에겐 아깝기 그지없는 마차라고 생각하며 프랜시스는 혀를 찼다. 왕은 이제 정말 여자하고도 되는 건가? 첫 여자에게 이토록 큰돈을 쓰는 건가?

그렇다면 두 번째 여자에겐 어떨까?

궁중 사교계에선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많은 여자들이 치장에 힘쓰고 있다. 솔직히 프랜시스는 그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으나 더 이상은 우습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고, 가장 아름다운 남자지.’

프랜시스의 손윗동서인 도미니크가 키득거렸었다.

‘그리고 제일 성질이 더럽죠. 입도 더럽고!’

왕에게서 ‘하마’라는 폭언을 들은 적이 있는 잔느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분명히 그건 사실이나, 돈도 많고 아름다운 남자라는 건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빚 좋은 개살구가 널린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더욱.

‘왜 쓸데없이 반역은 저지르고 지랄이야.’

프랜시스는 콧방귀를 흥흥 뀌면서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커튼의 감촉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최고급 비단인 것이 분명했다. 마차의 커튼조차 최고급 비단을 사용하다니.

부러운 남편이야.

프랜시스는 처음으로 안네마리 왕비의 처지를 부러워했다. 그녀가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소문난 왕궁의 풍경에 일절 눈을 두지 않는 사이, 마차는 문 플레이스의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마차가 멎고 문이 열리자 시녀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비전하는 어디 계시죠?”

시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이 마주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비전하께오선 오수 중이십니다.”

사람을 불러놓고 오수 중?

프랜시스의 얼굴에서는 전혀 표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도 귀족 영애로 태어나 교육받은 여성인 것이다. 그녀는 이 시녀들이 마리 트리지아의 ‘하녀’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모욕주지 않았다. 다른 귀족 출신의 시녀들과 똑같이, 그녀는 정확한 경어를 썼다.

“달콤한 잠을 즐기시길.”

“쇼어 공작부인, 문 플레이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게스트 룸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프랜시스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방을 안내받으면서 속으로 감탄을 거듭했다. 마리 트리지아 왕후 시절에도 왔었고, 그때에도 문 플레이스는 참 훌륭했었다. 아름다운 곳이었고, 사람들은 왕후의 센스를 칭송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문 플레이스처럼 독보적으로 아름답진 않았다.

‘비록 이 아름다움은 전문가의 냄새가 너무 나긴 하지만 말이야.’

여러 전문가의 냄새가 한꺼번에 나는 것이 아무래도 왕이 고용한 전문가들이 꾸민 티가 났다. 아무래도 안네마리 왕비는 이럴 센스는 없어 보이긴 했었다.

프랜시스가 당연한 듯 소파에 앉자마자 시녀가 왜건을 끌고 들어왔다.

“어떤 차를 드십니까, 쇼어 공작부인?”

시녀장의 질문에 프랜시스가 “백장미차면 될 것 같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시녀장이 당연한 듯이 그녀의 앞에 편지지와 깃털 펜, 그리고 잉크를 놓아주었다.

“목록을 작성해주시면 필요하신 물건을 저택에서 가져오도록 하지요.”

시녀장의 말에 프랜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세한 목록을 작성했다. 수많은, 아주 다양한 목록이었다. 장미 비누부터 낮잠용 베개까지 그 목록은 몹시 길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프랜시스는 결혼반지로 인장을 찍었다. 그러자 시녀장이 빈 종이를 내밀었다.

“저희가 공작부인을 모시기 위한 물품을 보고 좀 더 원활히 모시기 위한 물품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이 종이에 써서 사후 승인을 받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왜 안 되겠느냐며 조금의 의심도 없이 두 번째 편지지에도 인장을 찍어주었다. 자세히 보면 첫 번째 편지지와는 달리 두 번째 편지지에는 왕비의 문장이 찍혀 있지 않았지만, 프랜시스의 눈에는 거기까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낮잠을 자고 있다던 라파엘은 수잔 데인에게 덮쳐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잔 데인이 문 플레이스로 들이닥쳤다. 수잔 데인의 얼굴을 아는 호위병들은 당연히 문을 열어주었고, 수잔은 시녀들이 웬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달려와 라파엘을 말 그대로 덮쳤다. 라파엘은 살기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그의 침실은 수많은 시녀와 특수군이 오가는 곳이라 그가 일일이 인적에 신경 쓰다간 잠을 잘 수 없게 된다―엉겁결에 눈을 떴다.

“수잔…… 데인.”

잠에서 덜 깬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수잔이 말했다.

“도와주세요, 비전하.”

수잔의 말에 라파엘이 “뭘” 하고 물었다.

“오빠가, 오빠가 잡혀갔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라는 얼굴이군.

침실 밖에서 왕이 껄렁하게 생각하는 사이 왕비의 시녀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꼭 이렇게 발소리를 감추고 조용히 와서는 지켜보는 거야, 변태처럼.’

하지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 저 존재감을 인지하지 못하는 유일한 남녀가 마주 보고 있었다.

뭔가를 말해야 할 타이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와, 그 남자의 둔함을 아직 모르는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다가―.

결국 여자가 먼저 말했다.

“비전하, 도와주세요. 제발요.”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아 매달려 있는 수잔 데인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왕의 쓸쓸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안네마리’라고 말했었다. 묻지도 않느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뭘 물어야 하는지, 그가 왜 쓸쓸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살인 기계의 굳은 혀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왕은 평소처럼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좋아진 게 아니라는 건 아무리 살인 기계인 라파엘이라 할지라도 모르지 않았다.

“내려가.”

라파엘의 말에 수잔 데인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수잔이 물었다.

그리고 왕도 문가에 서서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여자를 의식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파엘은 인간을 의식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라파엘 에반스가 의식하는 사람은 단 하나, 왕 자신뿐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질투심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내려가라고.”

“아, 네.”

수잔은 그제야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임을 깨닫고 서둘러 내려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태까지 그녀와 라파엘 사이에는 꽤 스스럼없는 스킨십이 오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그녀를 안고 달렸었다. 필요할 때면 이렇게 달라붙지 않았던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라파엘이 불쾌해하는 걸까.

“저, 전하.”

“다신 하지 마.”

라파엘이 경고했다. 뭘 하지 말라는 건지 정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수잔은 뭘 하지 말라는 거냐고 묻는 대신 “왜요”라고 물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군.’

왕이 라파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라파엘이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라파엘이 대답했다.

“싫으니까.”

‘목적어가 빠졌잖아.’

왕과 수잔 데인이 동시에 생각했을 때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왕이 그의 표정을 정확히 감지해낸다는 건 라파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거울로 스스로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왕만은 그의 표정을 알아내었다. 때로 왕은 ‘그런 표정이야’라고 말하며 라파엘의 감정을 라파엘 자신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렇게 해줄 수 없었다.

트뤼포아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파엘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꼭 써야 한다면, 그 단어가 라파엘의 인생에 허락된다면, 그 단어에 가장 가까운 자는 분명 루였다. 트뤼포아와 동일 인물인 그에게 라파엘은 모든 것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모든 것은 하등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불태웠고, 마지막 남은 은여우마저 사냥 대회의 사냥감으로 써먹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그런 그를 고문했다. 고문한 채로 버려두고 왔으니 트뤼포아는 죽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진 않을 테니, 분명 그것은 친구가 아니리라. 즉, 라파엘에게는 결국 친구라는 단어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파엘에게 연인이라는 단어는 허락되는 것일까?

그는 왕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그는 왕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왕도 트뤼포아처럼 아무것도 라파엘에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아.”

왕이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에 앉아 있는 라파엘의 곁에 앉았다.

“왜 그런 표정이지?”

왕이 또 라파엘의 표정을 알아본다.

“우울한 것이냐?”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왕이 라파엘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의 눈은 선명한 코발트블루. 인간의 눈이 영혼을 비춘다면 왕의 눈은 맑은 바다처럼 왕의 모든 것을 비추어줄 텐데 라파엘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장님처럼.

자신의 눈은 탁한 퓨어 블랙. 그야말로 어둠이다. 그런데도 어둠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라파엘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눈을 깜빡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전하를 보아도, 전하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전하를 좋아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누구 경을 치게 하려고 지금 이러십니까.

시종장을 비롯해 시종들의 안색이 대번에 파래졌다. 왕의 신경질과 분노를 다 어떻게 감당하라고! 그때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태어나서 처음 피가 더워졌습니다.”

“피가…… 덥다고?”

“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잘 웃게 될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하.”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또다. 왕은 라파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왕의 심장에서 술에 취한 미친 나비가 날갯짓을 한다. 팔락, 팔락, 팔락.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단지 기분상의 문제.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시야가 조금 환해진 기분도 들었다.

라파엘은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기분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목소리는 건조했다. 보고서를 낭독하는 신하의 목소리처럼. 그런데도, 어떤 감정이 아주 깊은 곳에서 넘실거렸다. 그 감정은 귀하고 고와서, 몹시 특별한 한 사람에게밖에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하.”

라파엘이 왕을 부르고선 입을 다물었다. 트뤼포아를 상대로 그렇게 노력했고, 어젯밤에도 내내 말을 정리했다. 왕의 쓸쓸한 얼굴이 떠올라서 그에게 뭔가 말해주고 싶었는데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됐다고 했을 법도 한데 이번에 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라파엘의 말을 기다렸다. 아주 한참 만에 라파엘이 말했다.

“전하, 저는 그래도 분명 전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라파엘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라파엘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트뤼포아에게 고문을 행한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살인 기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정말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로서 왕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몸속에 도는 이 뜨거운 액체도 실은 피가 아닌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말, 좋아하고 있는데.

“어쩌면 전하만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하만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전하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라파엘의 말에 왕이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그는 그동안 신전에서 내려줄 합방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차일피일 미루는 신전을 상대로 특수군을 보내서 다 쓸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한 끝에 합방일을 받아냈고, 드디어 라파엘을 ‘정식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듣는다는 말이 ‘전하만큼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요’라.

자신만큼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라파엘이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 왕이 그러고 있는 사이, 옆에서는 오빠의 구호를 위해 달려왔다가 졸지에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수잔 데인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에디.

당신이 말한 대로 집을 내놨어요.

모든 게 당신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어요. 기다릴게요.

당신의 프랜시스」

―이렇게 쓰여 있는 편지지가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의 손안에서 와락 구겨졌다. 집을 내놨다고? 클레르의 고운 이마가 단숨에 찡그려졌다.

에드워드의 전 재산은 클레르의 것이었다. 에드워드가 클레르에게 넘겨주지 않았던가.

‘나는 이걸로 충분하거든.’

에드워드가 서류를 부채처럼 팔락거리며 말했었다. 왕의 개인 재산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클레르에게 말했다. 포 백작의 여자가 되라고. 포 백작, 그 역겨운 놈의 여자가 되어 놈을 마약 중독자로 만드는 데 1년이나 걸렸다. 에드워드가 자라는 남자와 잤다. 에드워드가 빼내라는 정보들을 빼냈다. 에드워드와도 잤고, 그의 아버지인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과도 잤다. 클레르는 모든 것을 했다. 에드워드가 써준 그 유서를 믿고. 쇼어가가 멸문까지는 가지 않으리라고, 그렇다면 그 유서는 유효하리라고 믿었다.

에드워드가 무슨 짓을 하든 마리 트리지아는 왕후다. 왕위 계승권자. 그래서 마리 트리지아가 자살을 했을 때 클레르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강인하게도 안네마리라는 여자를 데려와서 앉혔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프랜시스와 연락을 하고 있고, 프랜시스는 집을 ‘내놓았다’고 한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클레르는 급히 에드워드의 재산에 대해 알아보았다. 프랜시스 라 쇼어가 에드워드의 집을 내놓은 게 맞았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눈앞이 새하얘졌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런 대화재가 일어난 집이니 당연히 내놓는 게 맞는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것은 살아남은 가족들―제럴드, 프랜시스, 도미니크―의 합의에 의한 것이고, 단지 공개적으로 수배 중이 아닌 이상 에드워드의 인장과 같은 프랜시스의 인장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클레르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귀족법에 의하면 이 경우 유서가 어떻든 에드워드의 재산은 무조건 프랜시스 라 쇼어에게 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용서할 수 없어.”

클레르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녀의 인생을 이렇게 만들고 프랜시스에게 전 재산을 준다고?

포 백작의 재산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클레르, 그녀는 후처라 포 백작에게서 받을 재산이 없었다. 그녀가 포 백작과 결혼했을 때 포 백작의 재산은 대부분 스완 라 포에게 넘어가 있었다. 선량해 보이는 미남인 스완 라 포는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남자로 외모는 좀 다르지만 포 백작과 하는 짓은 비슷했다. 클레르는 어떻게든 재산을 받아야 했다. 애초에 모든 것이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시작한 것이었다.

‘버러지 인생으로 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에드워드가 말했었다. 웃으면서 혹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남자.

‘하지만 날 따라오면 작위도 돈도 만질 수 있지. 물론 그만한 위험은 따르지만 말이야.’

그녀는 이 지지부진한 인생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도 작위를 얻기 전의 그녀는, ‘재스민’일 때의 그녀는 자유로웠다. 물론 그때도 그녀를 모욕하는 인간이 있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모두 그녀를 모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귀족 사회에서의 그녀는 북이었다. 지나가다 아무나 그냥 치고 지나가는 북. 아무나 침을 뱉는 땅바닥. 그 무엇보다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더러운 어떤 것. 아무리 그녀가 창녀여도 그건 정말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아냈다.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절대로.”

클레르는 일어서서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단도가 있었다. 여성용 단도는 참으로 예뻤지만 칼날만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녀는 마차를 준비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뒤로 포 백작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약에 너무 취한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포 백작 가문의 마차는 바람을 가르며 왕궁을 향해 달렸다. 이미 노을이 짙은 오후였고, 궁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앞서 걷자 그녀의 뒤를 하인들이 줄줄 쫓아 걷기 시작했다.

금색으로 치장된 높고 화려한 왕궁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일행의 마지막 두 사람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제압되었다. 그들을 제압한 건 작은 남자 한 명과 거구의 남자 한 명이었다. 작은 남자가, 자신이 제압하고 있는 상대의 목을 고정해 옆에 있던 상대를 똑바로 보게 했다. 그러자 거구의 남자가 조금 전까지 그 동료였던 하인의 목을 가볍게 꺾었다. 목이 부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협조하면 넌 살아날 거고.’

남자가 낮게 속삭였다.

‘궁인의 자리를 약속받을 거다.’

남자의 말에 하인은 이미 시체가 된 옛 동료와 경각에 달린 자신의 목숨을 재빨리 저울질했다. 어느 것이 더 중한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하인이 고개를 한 번 깊이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하인을 데리고 재빨리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의 긴 줄 뒤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하인이 품에서 보자기를 꺼내 남자의 머리 위에 늘어뜨려주었다.

태후궁의 정문을 통과할 때 남자―라파엘 에반스는 흘끗 주변을 살폈다. 왕궁은 사냥터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지였고 태후궁도 마찬가지였다. 태후궁은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태후궁은 어디까지나 태후의 개인 공간으로 태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는 곳이니 왕이라고 해도 섣불리 개입할 수 없었다. 태후는 왕의 어머니이지 왕의 아내가 아니었다.

‘경비가 삼엄하다면, 안네마리.’

라파엘을 보내는 걸 몹시 싫어했지만 결국 라파엘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왕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몇 가지를 의미하지만 다 좋은 징조는 아니야. 태후는 나와 이야기할 마음이 없는 거지. 최악의 경우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어.’

‘특수군과 근위대가 있는데 토우셔 경비대 정도로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개죽음이지 않은가, 라고 말하자 왕이 라파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반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이건 시험이지. 그녀에겐 「선왕의 인장」이 있거든. 절대 면제권이지. 세 번. 그녀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 내 앞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천연덕스럽게도 선왕의 인장을 쓸 생각이야.’

왕이 웃었다.

‘그녀에게 최고의 결말은 내가 죽는 거지. 하지만 최악이라 할지라도 선왕의 인장을 한 번 써서 목숨을 구제하면 그만이야. 최고와 최악의 사이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대체로는 내게 타격을 주는 거지. 알았어, 안네마리?’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클레르 라 포는 에드워드 라 쇼어와 크게 싸울 거다. 어쩌면 마리 트리지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위험해지면 바로 빠져나와. 너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네가 도망치고자 하면 누구라도 잡을 수 없을 테니까.’

옆에 있던 스완과 제럴드도 왕을 거들었다.

‘빠져나와야 해, 라피. 절대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

‘혼자 몸이 아니라는 걸, 더 이상 「라파엘 에반스」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전하께 타격을 주기 위해서라면 비전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최적의 방식이지요. 명심하십시오, 비전하. 바로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라파엘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완전히 기척을 죽이고 긴 행렬을 따라 움직였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게스트 룸으로 안내받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등을 돌렸다.

“클레르.”

왕이 라파엘을 부르듯이 다정하게, 그러나 그보다 거짓되게.

“여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위험하다고.”

“사냥 대회 연회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지 않나요, 에디?”

클레르가 독을 품은 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드워드가 클레르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그때는 자기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 키스를 받으며 눈을 감았던 클레르가 조용히 물었다.

“프랜시스가 아니고?”

에드워드의 시선이 한순간 차가운 빛을 띠었다. 라파엘의 시선이 번뜩였다. 그는 타인의 표정을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살기라면 아주 희미한 것까지도 알아챌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순간 살기를 뿜었었다. 아주 희미하게, 아주 잠깐.

아무도 모를 만큼 희미하고 짧았지만, 라파엘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프랜시스라. 그 서류뿐인 여자가 여기서 무슨 관계지?”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가 손을 내렸다. 클레르의 드레스가 천천히 끌려올라갔다.

“나를 가진 건 그 못생긴 계집이 아니야. 너지. 독을 품은 장미 같은 너.”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하며 클레르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팔이 클레르의 허리를 감쌌다. 남녀가 열정적인 키스를 하려던 순간 클레르가 에드워드의 목에 칼날을 대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클레르의 얼굴에 증오가 꽃 대신 피어났다.

“나는 최소한 자유로웠어. 더러웠지만 새였다고. 나를 버러지로 만든 건 너야. 버러지처럼 살았다고? 아니, 네가 나타나기 전에 나는 작은 새였어.”

클레르의 말과 그녀가 겨눈 검을 에드워드는 눈동자만 움직여 흘끗 보았다.

클레르가 헐떡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를 감수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쏟아부었다. 귀족들은 수군거렸다. 그녀가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고. 신분 상승? 아니, 귀족이 되는 것은 결코 신분 상승이 아니었다. 이건 그냥 쓰레기통에 인생을 처박은 것에 불과했다.

그녀와 후크는.

바이런은.

최소한 자유로웠다. 그들은 다른 귀족들처럼 물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바이런도, 그녀도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지고, 모두 다 잃어서, 그런 것들이라도 가지지 않으면―후회로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그녀의 손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후크는 남창이라고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하다 쓰레기처럼 버려져선 결국 개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포 백작의 재산도, 에드워드의 재산도. 그녀가 가진 건 이름뿐인 ‘백작부인’이라는 작위뿐.

클레르가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에 장식된 진주. 십여 개의 진주 중 하나만 팔아도 평민으로서 평생을 먹고살 수 있고, 그녀는 그런 보석이 보석함 가득 있었지만,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는 법이었다. 백작부인이라는 작위로 그녀는 얼마든지 남자를 고르며 살 수 있었고, 귀족 사회가 유부녀의 자유를 약속하고 있는 만큼 그녀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남자를 농락하며 살 수 있었지만―사실 그녀의 전공이 아니던가―마리 트리지아처럼 남자들에게 추종을 받고 싶었다. 조금 지나친 소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평민이던 시절에도 결코 ‘작은 새’는 아니었다. 그녀는 ‘창부 재스민’이었을 뿐이었다. 가슴을 드러낸 화첩을 배부할 만큼 대담하고 바닥까지 내려간.

“작은 새?”

푸하하하, 에드워드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에 어정쩡하게 귀족화된 클레르가 모욕으로 굳어져 단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 에드워드는 웃으면서 뒤춤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라파엘은 하인의 행렬 가장 끝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총을 꺼내 클레르의 옆구리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클레르의 몸이 날아갔다.

“작은 새라니, 웃기는군.”

에드워드는 정말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말하며 클레르의 얼굴을 구둣발로 퍼억, 퍼억 걷어찼다. 죽어가고 있는 그녀가 헐떡이자 하인들이 크게 동요했다. 지금 도망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클레르 라 포의 품에서 작은 서신이 하나 떨어졌다. 에드워드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서신을 주워 펼쳤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랑하는 에디.

당신이 말한 대로 집을 내놨어요.

모든 게 당신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어요. 기다릴게요.

당신의 프랜시스」

그는 이미 한 번 구겨졌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 서신을 다시 한 번 구겼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폈다. 마치 지폐를 펴는 것 같은 손놀림으로 조심스럽게 편지를 펴서 보았다. 에드워드는 그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프랜시스의 목소리로 서신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사랑하는 에디.

과거의 어느 목소리와 환상의 목소리가 교차한다.

‘프랜시스예요, 쇼어 경.’

당신의 프랜시스.

‘제, 제…… 제, 드, 드레스의 단추를…… 푸, 풀어주시겠어요……, 경?’

에드워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프랜시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없었다. 프랜시스는 그를 만나길 원하지 않았다. 몇 번 그는 프랜시스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대단히 사무적인 용건이었지만,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건넬 때 몇 번이나 단어를 골랐다. 원래라면 대리인이 적었을 서신을 그가 직접 적었다.

사랑하는 에디―당신의 프랜시스.

에드워드가 고작 네 줄밖에 안 되는 서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가 클레르의 하인들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도망쳐!”

그리고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총소리가 탕, 탕, 울려 퍼졌다.

남들이 우왕좌왕하며 복도를 달리고 있을 때 라파엘은 가장 가까운 게스트 룸으로 휙 들어갔다. 라파엘이 게스트 룸으로 들어가자 남들도 그 룸으로 달려 들어왔다. 라파엘은 망설이지 않고 창문을 열고서 3층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다른 하인들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그 게스트 룸으로 에드워드가 들어와 총을 난사하자 비명이 난무했다. 그때 라파엘은 2층으로 달려와 처음부터 외워두었던 도면을 떠올리며 달려가 태후를 붙잡았다. 태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라파엘은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메고 3층으로 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냐?!”

태후가 부들부들 떨며 속삭여 물었다.

“이렇게 무엄한 너는 누구냐, 누구냔 말이다……!”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파엘의 몸이 훌쩍, 난간을 넘었다. 라파엘은 계단을 마구 뛰어올랐다. 귀족 사이에선 혈육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분명히 에드워드는 멈추게 될 것이다.

“멈춰.”

라파엘의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 에반스였다. 라파엘이 태후의 목에 검날을 대고 있었다. 아까의 클레르와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클레르와는 달리 빈틈 따위는 없었다. 에드워드는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에드워드가 조금만 움직여도 저 가는 목을 그어버릴 것임을.

라파엘이 태후의 목에 검날을 댄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이미 에드워드의 옆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체들 사이에서 에드워드가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이었다. 라파엘이 태후의 목에 검을 댄 채 입을 열었다.

“마리를 죽인 게 너인가?”

라파엘의 말에 잠시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푸핫, 그는 마치 어린애를 보는 시선으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그의 보라색 눈에 연민의 감정이 스쳤다.

“내가 분명히 이러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안네마리!”

왕이 고함을 질렀다. 어느새 근위대와 특수군, 그리고 왕이 올라와 있었다. 에드워드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궁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토우셔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도주로는 마련되어 있었고, 서대륙으로 도망치기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던 시점에서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시는,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한 번만, 멀리서라도, 한 번만 보자는 생각에 돌아와버리고 말았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 움직이지 마.”

라파엘이 경고했다. 에드워드가 라파엘의 검날이 닿은 목과, 평생 처음으로 이런 직접적인 위협을 당한 여자를 보며 웃었다.

“웃기는군.”

왕은 에드워드가 총을 드는 것을, 그리고 에드워드가 편지를 옷 안쪽으로 집어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편지는 분명 자신이 프랜시스 라 쇼어의 필기체를 흉내 내서 쓴 편지였다. 왕이 그 편지를 바깥쪽에서 알아본 것은 그 자신이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양피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 서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나중에 그 잔재라도 알아보기 위해서 일부러 특이한 재질을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그는 에드워드가 화를 내며 저 편지를 태워버리거나 찢거나 던져버릴 거라 생각했지, 설마하니 저 편지를 품 안에 고이 갈무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라 쇼어라. 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웬만한 왕들은 사용도 못 했다던, 우아하면서도 흉포한 긴 장총을 든 채 의문을 재빨리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에드워드 라 쇼어는 라파엘 에반스에게 총을 겨눈 채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리를 죽인 게 나냐고?”

에드워드가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다.”

그는 간단하게 인정했다.

“왜?”

라파엘이 물었다. 자신의 일상을 다 버리고 이 궁에 들어오게 된 근본적인 질문이 드디어 라파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왜 마리 트리지아는 죽어야만 했지?

그 말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글쎄, 왜 죽었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드워드가 라파엘의 뒤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왕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청년, 마리의 법적인 배우자는 거기에 서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마리가 왜 죽었냐고 묻는 라파엘의 깨끗한 얼굴 뒤로 왕은 어디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다시 라파엘에게로 옮겨졌다.

“너무 길고 복잡해서, 말을 못 하겠는데.”

에드워드가 싱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말 돌리지 마.”

라파엘의 검끝이 태후의 목을 찌르자 에드워드가 웃었다.

“그 여자가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러자 왕의 옆에 서서 에드워드를 겨누고 있던 제럴드가 말했다.

“형의 친어머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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