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가장 강력한 적
“일부러 모이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시종장이 늘 그렇듯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미소가 조금 더 짙었다. 아직 달이 채 다 차지 않은 달밤이었다. 반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달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든 하우스에서 시종장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웃으면서 옆에 있는 흰 장미를 한 송이 꺾었다. 갑자기 장미를 꺾는 노인의 모습에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그가 작게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 장미는 공중에서 액체로 변했다. 그 액체는 공중에 고여 있었다. 공중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있는 것처럼.
“주인이 다녀갔었군요.”
시종장이 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가 담겼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도 있나?”
왕의 질문에 시종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입니다.”
“좋은 마법이군. 도청의 방법으로 쓸 수도 있겠는데.”
“무리입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사람이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종족이니까요. 어떤 마법도 인간이 하는 그 수많은 말을 저장할 수는 없습니다. 저장하지 않고 직접 가져온다면, 가령 예를 들어 실프를 이용해 소리를 실어올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몇 시간이나 말을 하는데 그만큼 오래 집중할 수 있는 마법사는 흔하지 않습니다. 거리가 가깝다면 모를까, 멀어진다면 전무하지요. 그러니 불가능합니다. 이번의 경우에는 어떤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전하.”
시종장의 말에 왕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사이 시종장이 손가락으로 액체를 휘감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발동어를 읊조렸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는 이 가든 하우스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액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어떤 여자의 요염한 목소리였다.
“반지의 주인이 말한다. 앞면의 문을 열어라. 문의 이름은 재스민.”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반지의 주인이 말한다. 뒷면의 문을 열어라. 문의 이름은 에디.”
그리고 맹세의 반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문의 이름은…… 에디? 여기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왕의 시종들, 특수군, 근위대였다. 그리고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디라니. 이 사건에 나올 ‘에디’는 에드워드 라 쇼어밖에 없는데.
제럴드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디가…… 궁에 있었…….”
“태후궁에 있겠군.”
왕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 얼굴이었지만 라파엘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굳어졌다. 더 굳어졌다고 해봐야 그걸 알아챈 사람은 왕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워낙 무표정한 얼굴이라 남들이 보기엔 거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라파엘을 끌어와 품에 안았다.
“괜찮아.”
평소와 똑같은데 웬 수선이야.
다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왕은 전혀 개의치 않고 라파엘의 귀에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이부었다.
“괜찮아.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안네마리.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고. 네가 아니면, 아무도.”
라파엘이 왕의 품에서 눈을 깜빡였다. 에드워드 라 쇼어가 왕궁 내에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왕궁 내에. 라파엘은 이 궁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어둠을 틈타 움직이기가 얼마나 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에드워드 라 쇼어는 이 궁의 지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경비를…….
경비를 강화하자고 말하려던 라파엘은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았다. 소용없을 것이다. 그들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저 왕의 품에서 눈만 깜박이던 라파엘이, 처음으로 미묘한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시종장이 “그건 그렇고”라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재미있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시종장이 스크롤을 꺼냈다. 마법 스크롤이라는 건 알겠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갑자기 스크롤이 펑 소리를 냈다.
“이번이 본건입니다. ……생각보다 이 일의 정체가 커서 본건처럼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첩자께서는 나와주셔야겠습니다.”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발동어를 외기 시작했다. 발동어를 듣기 시작한 왕이 “잠깐, 잠깐” 하고 시종장을 중지시켰다. 시종장이 천천히 목소리를 낮췄지만 잠깐 발동어를 멈췄을 뿐이라는 게 명백한 태도로 왕을 바라보았다.
“첩자라지만 태워 죽이는 건 좀 그런데.”
시종장의 얼굴이 조금 움직이자, 시종장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자가 물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쓸까요, 전하?”
시종장은 발동어를 멈춘 상태라 입을 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왕이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라파엘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뒤로 물러섰다. 한참을 물러선 왕이 손을 내저었다.
“태워 죽이든 말려 죽이든 부디 훌륭하신 시종장의 뜻대로.”
그러자 시종장이 발동어를 다시 외기 시작했다. 고대어가 길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지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시종 중 한 명이 납작 엎드렸다.
“잠깐, 잠, 잠, 잠깐만요! 잠, 안, 안, 악―아악―악―악―.”
시종장이 싱긋 웃으면서 말을 멈췄다. 시종이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덜덜 떨고 있는 그 등을 보며 왕이 픽 웃었다. 왕이 라파엘을 뒤에서 안은 채 그 목에 턱을 괴었다.
‘배짱도 없는 놈이 잘도 첩자 노릇을 했군.’
왕이 라파엘의 목에 턱을 문질렀다. 라파엘의 부드러운 피부와 그 밑의 단단한 근육이 닿았다. 라파엘의 피부는 아주 보드라웠다. 그건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후천적인 것이었다. 마리 트리지아의 그 미모를 가꾸어낸 시녀들이 라파엘의 피부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아마 그전에는 이토록 실크처럼 부드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이 피부가 사막처럼 버석거렸다 하더라도.’
왕은 턱으로 그의 피부를 느끼면서 가볍게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라파엘의 몸을 어떤 리듬으로 느끼려 노력하는 사람처럼. 시종과 특수군, 그리고 근위병은 한마음 한 뜻으로 그 리듬이 부디 보다 고상한 것이길 바랐다.
‘이 피부가 진흙과 오일이 뒤섞인 같은 불쾌한 것이었어도, 아마.’
왕은 눈을 반쯤 감고 웃었다. 그래, 아마도 그는 불쾌감을 느끼지는 못했으리라. 불쾌감은 무슨. 그는 열광했으리라. 율레즈의 발밑에 무릎을 꿇듯이, 아니, 그보다 더 열광했으리라.
한참이나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시종이 잔뜩 겁먹은 작은 동물처럼 고개를 들어 눈만 굴렸다.
“무…… 슨.”
시종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근위병들이 다가갔다. 그들이 시종을 포박하고 끌고 가려 했을 때였다. 뒤로 왕에게 안겨 있던 라파엘이 물었다.
“누가 시켰어?”
시종이 라파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퉷―. 그 침이 라파엘의 어깨에 날아가 묻었다. 침이 라파엘의 어깨에 묻자 당장에 두 사람이 열을 받았다. 한 명은 당연히 왕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제럴드 라 쇼어였다. 왕은 라파엘을 자신의 뒤로 물렸고, 제럴드 라 쇼어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부하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라파엘은 시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말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말로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사이, 제럴드가 시종의 멱살을 붙잡았다.
“고모님이 그러던가? 내 동생에게 침을 뱉으라고?”
시종이 굳은 얼굴로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제럴드가 왜 시종을 첩자로 들여보낸 배후를 태후로 규정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라파엘을 제외한 모두는 당연히 태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 이 일에 관련된 사람은 세 사람. 에드워드 라 쇼어,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 그리고 태후이다. 그중 에드워드 라 쇼어는 수배 중이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은 귀족 사회에서 왕따였다. 태후가 아니라면 시종이 왕의 측근이라는 엄청난 엘리트 자리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잘 들어.”
제럴드가 박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투옥될 거야. 무슨 죄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넌 투옥될 거고, 근위대와 특수군이 골고루 너와 면담할 거다. 네가 정확히 너의 진정한 ‘주인’, 아니지, ‘여주인’의 정체를 털어놓을 때까지 말이야. 다양한 면담을 거치게 되겠지. 아주, 아주 다양한, 면담을 말이야.”
갑자기 제럴드가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왕이 그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왕의 푸른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자신의 시종, 얼굴만은 낯익은 남자를 향해 왕이 웃음 지었다.
“자, 다양한 면담이야 너도 잘 알겠지. 후춧가루나 물이나 오래도록 서로 마주 보는 것 따위지만 네가 그러는 동안 너의 불쌍한 노모, 아내, 아이는 어쩌지. 응? 하긴, 네게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겠지만, 콘라드. 너의 서재 말인데, 너의 사랑스러운 서재 말이야. 응, 그 귀엽고 섹시한 너의 서재.”
시종이 대경실색하는 것을 보면서 왕이 아직 놀라면 안 되지, 라는 듯 손가락을 거만하게 흔들었다.
“네가 네 친구에게 보낸 1,500권의 책은 또 어떻고? 내가 그 책들을 어떻게 할 것 같아? 네가 다양한 면담을 거칠 때마다 외로운 너를 위해 특별히 동석시켜주지. 외롭지 않을 거야, 콘라드. 그렇지? 난 참 덕망 있는 임금이지 않느냐, 응?”
왕이 싱글거렸지만 그 푸른 눈은 몹시 사적인 원한으로 번질거렸다. 콘라드라고 불린 시종은 안 된다며 왕의 발치에 매달렸다.
“저어언하!”
“내 비는 아방한데다 눈치도 더럽게 없고 게다가 내 속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고 내 아랫배 아래쪽을 지져놓지만―.”
그냥 귀엽고 사랑스럽고 관능적이라고 하시라니깐.
누군가가 투덜거리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는 동안 왕이 시종의 목을 발로 짓밟았다. 왕과 시종장은 이미 콘라드가 변절자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물증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지져놓지만…….”
왕이 그렇게 말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라파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라파엘은 남자 차림이었다. 이틀 남았다. 누군가가 보더라도 의심하지 않도록 특수군의 검은 군복을 입고 있는 라파엘은 단정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 얼굴은 애절하도록 고왔다. 왕은 그 얼굴에 손을 뻗는 대신 시종의 목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뭐―너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야, 콘라드. 내가 노여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왕의 발밑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제럴드가 왕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왕의 발 아래쪽에 손을 깔았다.
“전하.”
“나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럴드 라 쇼어.”
“…….”
“손을 치워라.”
제럴드가 당황한 얼굴로 흘끗 시선을 주자 시종장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제럴드의 눈짓은 ‘제가 손을 치워도 변절자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라는 뜻이었고 시종장은 ‘아니요’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제럴드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전하, 제발.”
“치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차라리 노엽다 하십시오.”
제럴드의 말에 왕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럼, 당장 죽이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왕의 말에 제럴드가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라파엘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이 그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했을 때 라파엘이 소파 밑을 들여다보더니 그곳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었다. 라파엘의 손에 걸려 나온 것은 핑크색 구두였다.
라파엘이 구두를 자세히 살피더니 말했다.
“피가 묻어 있네요. 마리의 구두가 맞는 듯합니다.”
“그 외엔 없습니까?”
제럴드가 정중히 물었다. 왕비를 대하는 그 말투에 왕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라파엘이 구두를 한 손으로 옮겨 들고 다른 손으로 안쪽을 휘휘 젓더니 다른 것을 끄집어냈다. 작은 봉투였다. 라파엘이 왕에게 건네자 왕이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보고 혀를 찼다. 그는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돌아가자”며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그러면서 그는 콘라드의 목을 밟고 가든 하우스의 출구로 걸어 나갔다.
아직 봄이라고 해도 날씨는 쌀쌀했다. 타닥타닥 타는 벽난로 앞에서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완이 왕이 건넨 서신을 보더니 혀를 찼다.
“에드워드 라 쇼어가 죽으면 그의 재산을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에게 남긴다고요?”
스완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왜 에드워드 라 쇼어를 돕는지 알 것 같았다. 알긴 하는데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스완이 술잔을 입에 대는 사이 왕은 라파엘의 입술에 그의 술잔을 대어주고 있었다. 라파엘은 마치 아기 새처럼―귀엽다는 뜻이기도 했고, 머리라는 게 아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술잔의 술을 천천히 받아 마셨다.
“이렇게 주는 대로 마셔서야 쓰겠느냐, 안네마리. 내가 주는 것 말고는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 누가 너에게 마실 것을 주든 간에, 절대로. 알겠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으로 알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술을 받아 넘겼다. 첫 한 모금을 받아 넘긴 라파엘의 눈이 잠깐 놀라서 굳어지더니 그다음에는 조금 편안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변화였고, 대부분은 다 똑같은 무표정이었다. 그 작은 변화를 자신만 알아볼 수 있다는 데에 왕은 왕관도 걸 수 있었다.
라파엘이 다 마시고 나자 왕이 “맛있지?”라고 물었다.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렇게 달콤한 술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첫날밤엔 이 술로 대욕탕을 채워주지.”
왕이 속삭였다. 술을 욕탕에 채워준다고? 왜? 그게 어떤 비유인가, 아니면 정말 그렇게 해주겠다는 뜻인가? 귀족 사회의 적응에 다소 실패한 편에 속하는 라파엘이 왕의 품에서 술에 반쯤 취한 채 상념에 잠겨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 귀족과 평민 양쪽에 완벽히 적응해 있는 스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첫날밤 생각이라니. 수치스러운 줄 알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왕이 너무나 들떠 있어서 차마 할 수가 없다.
‘저 성격에 저 지위에 저 재력이면 하고도 남지.’
라파엘이 마신 술은 아주 비싼 술이지만, 돈으로 구하지 못하는 술은 없다. 왕은 그 술로 수영을 하고도 남는 라파엘의 그 대욕탕을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왕의 혀가 라파엘의 귀를 핥았다.
“아아, 달군. 달아, 혀가 저릴 정도로.”
“제발, 제발, 제발이요, 전하!”
스완의 애원에 왕이 라파엘의 귀에서 입술을 떼었다. 단지 그것밖에 해주지 않는 매정한 형에게 주먹을 날릴 수 있는 평범한 형제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스완이 아쉽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닳아빠진 창부라고 해도 순진한 데가 있군요. 에드워드 라 쇼어가 이런 유언을 남긴다고 해서 그의 유산이 그녀에게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보죠.”
순진하기도 해라, 스완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가 무슨 유언을 남기든 간에 에드워드가 죽을죄를 짓고 죽지 않는 이상, 에드워드의 모든 유산은 그의 유일한 계승권자가 가지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의 경우에는 그의 처, 프랜시스 라 쇼어였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스완이 가늘게 웃었다.
“새어머니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스완의 말에 왕이 라파엘의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글쎄 하고 중얼거렸다.
“내 어머니가 아니라서 말이야.”
“분명히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복수심에 불타겠죠?”
“노릴 건가?”
함정을 놓겠느냐는 말에 스완이 왕을 바라보았다. 놓아도 그만, 놓지 않아도 그만, 네 마음대로 하라는 그 무책임한 목소리에선 어쩔 수 없는 욕망만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물론 스완을 상대로 한 건 아니었다. 사실 스완으로서는 왕이 스완을 상대로 욕정을 품으면 좋진 않아도 편할 것 같았지만, 아마 왕은 스완 따위 백 명이나 천 명을 준다고 해도 싫어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둘을 이간질하면 얻는 게 있겠죠?”
“이간질하지 않아도 놈을 잡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궁에 있다면 놈이 있을 곳은 뻔하니까.”
왕이 그렇게 말했다. 스완도 그 말에 동의했다. 단지.
“언제 어떻게 놈을 잡느냐가 문제지요.”
라파엘은 눈을 깜빡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 그 친절하고 유쾌하며 상냥한 귀족 남자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실감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그가 마리를 죽였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마리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라파엘은 도무지 마리같이 예쁘고 천진한 여동생을 죽이는 ‘친절하고 유쾌한 오빠’를 상상할 수 없었다. 최소한 그는 그런 오빠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여동생을 죽이는 오빠는 친절하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그랬다.
라파엘은 뭔가를 묻기 위해 입을 달싹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저 입술을 벌렸다가 다문 것만으로도 왕은 귀를 기울여주었다.
“응?”
“아닙니다, 전하.”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말하려다 둔한 혀를 멈췄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친절하고 유쾌한 오빠가 여동생을 죽이는 일도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배에 탄 것처럼 정신없이 머리가 흔들렸다.
졸려.
왜 이렇게 졸리지.
라파엘은 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자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네마리와 라파엘의 이중생활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잠이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라파펠이 왕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잠들자 왕이 나직이 속삭였다.
“저런. 잘 자.”
“술이 약하시네요.”
“그러게. 그리고 술버릇이 얌전하군. 뭔가 대단한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왕의 말에 ‘존재만으로 대단한데 뭘 또 대단한 걸 기대하셨습니까’라고 스완이 속으로 빈정거리며 물었다.
“대단한 거요?”
“검무를 춘다든가?”
“그런 고상한 기술을.”
말도 안 되죠, 라고 말하면서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라는 것도 많다. 마치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한테 우리 아이는 ‘전 세계 10개 국어를 다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격이었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낫다. 그건 최소한 가능성이나 있지. 살인 기계에게 검무? 그것도 스물셋이나 먹은 살인 기계에게?
“재워야겠어.”
왕이 그렇게 말하며 세 살짜리를 안듯이 엉덩이를 받쳐서 라파엘을 안아 올렸다.
스완은 별 소득 없는 술자리에서 일어서며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은 정말이지 행복해 보였다. 라파엘 라 쇼어는 대단히 기구한 팔자였다. 그는 참 가지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응당 가졌어야 할 많은 것들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가족들을 탓하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일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는 훌륭히 해냈다.
왕의 뒷모습은 그가 가졌어야 할 모든 것을 축약하고 있었다. 가족, 연인, 보호자, 스승. 왕은 그에게 그 모든 것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왕이 바라고 또 바랐지만 차마 소망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왕에게 주게 될 것이다. 용감한 연인, 표현해도 다치지 않고 어떤 왜곡이나 모략이나 위협에도 지지 않을 사랑.
그들은 완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해 보였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 § §
안개 낀 새벽, 라파엘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일어나고자 한 시각을 맞추지 못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창 밖을 보자 그가 생각한 시각보다는 살짝 늦은 것도 같았다. 술 때문인가. 라파엘은 눈을 뜨면서 어젯밤을 떠올렸다. 기가 막히게 맛있었지만 어딘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컨디션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경이 평소보다는 약간 둔한 것 같은 기분에 라파엘이 눈을 잠깐 깜빡이며 일어나려 했을 때, 뒤에 있던 사람이 그를 바짝 끌어안았다.
“더 자, 안네마리. 아직 새벽이야.”
왕이 안네마리의 머리칼에 키스했다. 왕의 숨결에선 습기와 독한 술 냄새가 났다. 라파엘은 얌전히 누운 채 왕이 다시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왕이 잠들었을 때 이번에는 아주 조심히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써서 움직였다. 그것은 암살자로서의 능력이었고, 당연하지만 왕은 그가 왕의 품을 빠져나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뒤척이는 왕을 보면서 라파엘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라파엘은 왕의 몸에 시트를 잘 덮어주고, 왕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수십 명이 조용히 지키고 있는 침실을, 라파엘은 어렵지 않게 빠져나왔다. 일단 빠져나오자 마법의 다리가 그를 반겨주었다. 새벽의 다리 위를 달리자 문 플레이스 쪽 아름다운 격자문이 활짝 열렸고, 그의 시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녀들의 가장 앞에는 수잔 데인이 서 있었다.
“전하.”
“가자, 너의 오빠가 기다려.”
“오빠…… 로버트요?”
수잔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라파엘은 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수잔을 어깨에 들쳐 메었다. 그가 발코니로 달리자 거기에 서 있던 시녀가 양쪽에서 문을 활짝 열었다. 라파엘의 신형이 훌쩍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지자 시녀장이 재빨리 손짓을 했고 그에 따라 시녀들이 문을 닫았다. 문 플레이스의 창가에서 어른거리던 희미한 불빛이 재빨리 사라졌다. 그 불빛이 사라졌을 때 라파엘은 버려진 왕비궁 중 하나에 도착해 있었다.
“……라파엘.”
누군가의 목소리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로버트 데인이 거기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루 라 트뤼포아가 몹시 초췌해진 채 포박당해 있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바이런 라 프시스에게 안 좋은 추억이 있는 로버트가 그 신경질을 트뤼포아에게 푼 모양이다.
라파엘이 그를 바라보았을 때 수잔이 소리쳤다.
“로버트!”
당장에 로버트의 안색이 달라졌다.
“수잔!”
둘이 서로에게 달려가 열렬히 부둥켜안을 분위기라, 라파엘은 수잔을 잡아챘다. 로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디어 납치당한 여동생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라파엘이 수잔을 보내주지 않는 건가. 로버트가 어쩔 줄 몰라 하다 트뤼포아를 붙들었다. 트뤼포아가 그를 여동생에게 데려다줄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내 수잔을 돌려줘요.”
“이, 이거 놔! 로버트, 로버트!”
“우리 수잔을 돌려달란 말이야!”
하지만 라파엘의 입장에서 이건 인질 교환이었다. 그는 일반인과 인질 교환을 한 적이 없어서, 이런 막무가내식의 인질 교환에 황당해졌다. 라파엘이 손가락으로 트뤼포아를 가리켰다.
“맞교환이야.”
라파엘의 말에 그제야 로버트는 라파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유일한 공식을 깨달은 마법사처럼 경이로운 얼굴로, 그러나 산적 두목같이 흉악하게 트뤼포아를 잡아끌어 라파엘에게 들이밀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수잔을 놓아주었다.
수잔이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달려가 로버트에게 뛰어들었다. 로버트가 격정적으로 그녀를 마주 안았다.
“로버트!”
“수잔!”
오누이가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동안 트뤼포아와 라파엘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는 것은 트뤼포아뿐이었다. 라파엘은 무심한 얼굴로 트뤼포아를 풀어주었다.
“라파엘.”
트뤼포아가 오래 묶여 있어 저린 팔을 주무르며 라파엘을 불렀다.
“당신이 날 구한 건가요?”
희망과 절망, 미움과 애정이 뒤섞인 그 목소리는 로버트나 수잔이 들어도 상당히 애틋했다. 그러나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알아듣기에 라파엘은 둔했다.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라파엘은 “가로챈 거야”라고 대답했다.
“가로채…….”
트뤼포아가 그 목소리에서 차갑고 어두운 어떤 것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입니까, 라고 말하면서 트뤼포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마리는 에드워드 라 쇼어를 추적하고 있었어. 클레르 라 포나 바이런 라 프시스나 반지를 찾은 것도 결국은 전부 에드워드 라 쇼어를 추적하기 위해서였겠지. 왜 그녀는 에드워드를 추적해야 했을까? 둘은 같은 가문이잖아. 나는 귀족 사회를 거의 모르지만 서로의 가문에 아주 충실한 사회라는 걸 알아.”
라파엘이 거의 속삭이듯이, 아주 빠르게 말했다. 그가 물었다.
“너와 내가 만난 건 1년이 조금 넘었지. 마리가 에드워드를 쫓기 시작한 것도 1년 전. 이런 일은 좀처럼 우연으로 일어나지 않지.”
“우연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너에게 말했지. 「트뤼포아. 그래서 네가 얻은 게 뭐지? 잃은 것만 있지 않은가. 얼굴 반쪽, 팔 하나, 별장 둘, 아아, 여자 하나도 있지」라고.”
그 말에 트뤼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라파엘이 대거를 꺼내 트뤼포아의 목을 가볍게 그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목에서 주룩,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 여자가, 마리인가?”
루 라 트뤼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라파엘의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눈을 언제 처음 봤었지. 지뢰가 터지고 나서였다. 쾅, 그 소리는 세상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세상이 끝나는 소리였다. 그는 그냥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이 뜨였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어둠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것이었다. 그 어둠이 천천히 멀어지더니 누군가의 눈동자가 되었다. 그 검은 눈이 물었다. ‘뭔가를…… 먹을 수 있겠나?’ 그리고 루 라 트뤼포아는 두 번째 생을 부여받았다.
트뤼포아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줄 수 없어요, 라파엘.”
라파엘의 손이 번개처럼 한 번 움직였다. 쇠 비린내가 목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서 더 강해졌다. 트뤼포아는 사신이 낫을 조금씩 휘두른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뤼포아.”
라파엘이 이름을 한 번 부르는 것으로 경고했다.
“말해줄 수 없어요.”
트뤼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라파엘을 원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비록 그를 원하고 있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면 그 앞에서 옛 연인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최소한 트뤼포아가 배운 예의는 그러했다. 그게 아니다 하더라도 트뤼포아는 말할 수 없었다.
트뤼포아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그의 목에서 흐르는 핏줄기가 이리저리 줄기를 새로 만들었다.
라파엘이 대거를 한 번 가볍게 허공에서 둥글게 돌렸다.
“좋아.”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트뤼포아를 땅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라파엘이 트뤼포아의 옷을 벗기면서 대거보다 작은 주머니칼을 꺼냈다. 그 주머니칼이 독특한 톱날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자마자 로버트 데인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자, 잠깐만요! 수잔에게 그런 걸 보여줄 순 없어요!”
근위병인 로버트는 그 주머니칼이 소위 말하는 고문 칼이라는 걸 알아보고 수잔의 눈을 가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라파엘이 희미하게 고갯짓을 했다. 어서 가라는 얼굴에 로버트가 수잔의 가는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대충 확인하고 나서 라파엘이 칼을 들었다.
트뤼포아의 눈이 라파엘의 검은 눈과 번뜩이는 주머니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트뤼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근위병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거.’ 트뤼포아는 저게 어떤 건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라파엘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일에 종사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설마, 라파엘. 저한테 이러실 거 아니죠?”
트뤼포아의 입가가 떨렸다.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라파엘이 그를 구했던 기억들이었다. 그를 기억하고, 그의 대소변을 받고, 의사를 데려오고, 인내심 있게 그의 움직임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던 기억들. 라파엘은 단 한 번도 트뤼포아를 탓했던 적이 없었다.
“할 거야.”
단호한 한마디였다.
그는 마리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낼 예정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집착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라파엘 에반스’로 돌아가든, ‘안네마리 제1왕비’가 되든, 뭘 하든 간에, 마리를 누가 죽였는지 분명히 알아야 했다. 이 일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라파엘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트뤼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는 화가 난 듯 소리쳤다.
“하세요, 라파엘.”
라파엘이 잠시 내려다보자 그가 악을 썼다.
“하시라고요, 고문이든 그 이상이든! 당신이 준 목숨이야. 당신이 살린 목숨이야. 뭐든 하세요, 부디, 부디! 그 빌어먹을 지뢰에 죽을 뻔했던 목숨이야. 당신이라는 천사가 살리지 않았으면 어차피 그 지뢰를 설치한 새끼 때문에 난 죽었을 거라고요! 마음대로 해요, 라파엘!”
“난 여기 와서 눈치가 는 것 같아.”
라파엘이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트뤼포아는 그런 라파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문 칼―인 것 같지만 그 이상의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을 든 라파엘이 딴소리를 하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조금 의아하면서도 희망적인 기분이 들어서 그는 라파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그런 그를 보면서 열심히 혀를 굴렸다. 왕을 상대로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트뤼포아를 상대로는 말이 조금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쉬운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라파엘이 말했다.
“말해두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는 최대한 자세히 말하려 애썼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말한 축에 속하는 경험일 것이다. 그는 최대한 혀를 굴려서, 말을 하려 노력했다.
트뤼포아가 라파엘의 뒤통수로 손을 돌려 라파엘을 천천히 당겼다. 그들의 얼굴이 키스를 하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그들의 숨결이 섞여서 어느 것이 누구의 입술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트뤼포아가 속삭였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트뤼포아가 중얼거렸다.
“우린 느끼면 되는 거니까…….”
트뤼포아의 입술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라파엘의 입술은 마치 그의 성정 같다고 트뤼포아는 생각했다. 그 입술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마치 검처럼. ……검처럼? 트뤼포아가 눈을 뜨자 그의 입술은 검으로 막혀 있었다.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네가 밟은 지뢰.”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내 지뢰야.”
트뤼포아의 얼굴이 멍해지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거긴 내 집이고, 거기 함정은 모두 내 거야. 내가 너를 구한 건.”
“…….”
“거기에 시체가 있으면 함정이 의심받아 소용없어지기 때문이야. 일이 아니면 난 죽이지 않아. 사람이든, 동물이든.”
한 번에 많이 말했더니 급격히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라파엘은 왠지 성취감이 들었다. 이 굳은 혀도 하면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상대는 왕이 아니라 트뤼포아였기 때문에 상대는 라파엘이 똑같이 무표정하다고 여겼다. 트뤼포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게, 라파엘이라고? 라파엘의 지뢰라고? 트뤼포아는 당연히, 자신의 적이라고 여겼다. 왕이든, 에드워드 라 쇼어든, 누구든. 그런데, 라파엘이라고?
“말도 안 돼…….”
트뤼포아가 중얼거렸다.
“마리가, 마리가 말했어. 거기는 ‘안전’하다고!”
역시 그 여자는 마리였군.
라파엘은 확신했다. 라파엘이 다시 검을 트뤼포아의 목에 대었다.
“마리가 왜 안전하다고 했지? 마리가 안전하다는 곳으로 너는 왜 와야 한 거지? 너는 그때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어. 왜 쫓겼던 거지?”
“그 지뢰가 당신 거라고?”
“두 명의 근위병이 너를 쫓았지. 그들은 죽었어. 살아남은 건 너 하나뿐. 하지만, 셋 다 내 집에 대해서 알고 있진 않았지. 마리가 내 집에 대해서 알려줬다? 그녀는 왜 너에게 내 집에 대해서 알려줬지? 왜 너는 여기에 와야 했지? 너는 마차에 타고 있어서 너 혼자만 살 수 있었던 거야. 산산조각이 났지만 추측컨대―마차에는, 여성용 옷가지들이 있었어. 고귀한 여성의 것이었지. ……마리였어? 너는 마리와 떠날 생각이었어? 아니면 다른 고귀한 여자가 있는 거야?”
라파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마리는 누군가와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그 편지를 제럴드가 받은 시점은 트뤼포아가 다친 지 1년이 지나서다. 라파엘이 묻자 트뤼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지뢰가, 당신 거였다고?”
트뤼포아는 오직 그 질문만을 반복했다. 그 지뢰가 당신 거였어? 트뤼포아를 이렇게 만든 건 라파엘이었다. 하지만 그를 살려준 것도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이 트뤼포아를 살린 것은 그저 취미에 불과하다. 라파엘은 유기 동물을 살리는 취미가 있었다. 그저 이번에는 그 동물이 인간이었을 뿐이다.
트뤼포아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지뢰가…….”
살아났다는 걸 아는 그 순간부터, 사랑해왔다. 저 말없는 검은 눈을 맹목적으로 사랑해왔다. 그런데 그의 지뢰였다고? 그런데 그를 이렇게 만들고선 그 흔한 ‘미안하다’ 한 마디 하지 않았다고?
“당신은 내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할 겁니다, 라파엘.”
트뤼포아가 이를 악물었다.
아마 한 15분쯤 지난 것 같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뤼포아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거의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파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고문을 받은 사람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라파엘은 등을 돌렸다. 트뤼포아는 모든 것을 다 고백한 직후 ‘저는 당신에게 뭐였습니까?’라고 물었다. 라파엘은 그가 친구라고 생각했다. 친구라는 단어가 그 자신에게 허락되는 단어라면, 그리고 그 단어를 누군가 한 명에게 써야 한다면 트뤼포아, 아니, ‘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걸 친구라고 부를 것 같진 않았다.
태어나서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일한 긍정적인 결과는, 자신도 말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왕보다 더 말을 잘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라파엘은 피 웅덩이에서 신음하는 트뤼포아를 둔 채 달리기 시작했다. 왕이 깨기 전에 문 플레이스에 도착해야 했다.
문 플레이스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처럼 발코니 문이 열렸지만 문을 열어준 건 시녀들이 아니었다. 문을 활짝 연 시종들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왕을 보며 라파엘이 싱긋 웃었다.
왕이 “너 도대체 어디……”라고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궁의!”
왕의 명령에 시종 하나가 바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라파엘이 응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피로 물든 자신의 옷을 본 뒤 “그게 아니고”라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니? 네가 다친 게 아니냐? 그럼?!”
“아.”
“「아」? 「아」라니? 어서 말하라. 이게 누구의 피란 말이냐!”
라파엘이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은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지만 왕은 어렵지 않게 라파엘의 표정에서 난처함의 조각을 발견했다.
“누구지?”
왕이 물었다.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물었다.
“안네마리, 이건 누구의 피냐.”
“트뤼포아의 피입니다.”
“……트뤼포아. 네가 트뤼포아를 숨긴 거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역시 처음 깨어났을 때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정말이지 왕의 잠을 아주 조금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가 편안히 자길 바랐다. 그래서 기다렸고, 그렇게 시간을 지체했다.
왕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네가 숨겼다고? 왜 숨겼는데?”
옛정 때문에?
왕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라파엘이 말했다.
“트뤼포아는 마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제외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파엘은 확인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이 사실에는 물증은 없이 심증만이 있었다. 그렇지만 라파엘에게는 심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물증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수단을 가린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노려보아도 라파엘이 왕의 시선을 그저 받고만 있자 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트뤼포아가 옛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사랑하는 너에게 지껄여주던가? ―그럴 리가 있나. 그건 아주 천박한 행동이지. 전혀 귀족적이지 않아.”
왕은 라파엘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라파엘의 그 피에 젖은 몸을 본 왕이 한숨을 쉬며 웃었다.
“그래, 너의 방식대로 물었나. 그래서 그가 대답했느냐.”
왕은 굳이 자신의 사랑스럽고 연약한 사슴에게 고문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라파엘은 침묵으로 대답해주는 예의 따위는 갖고 있지 않으니 한 치도 망설임 없이 ‘예, 전하’라고 대답해줄 테니까.
“예, 전하.”
지금처럼.
“알고 싶은 건, 다 알게 되었느냐.”
“아니요, 전하.”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뭘 또 알고 싶으냐.”
왕이 라파엘의 침대에 앉아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팔을 벌렸다.
지금 그는 대단히 불쾌한 상태였다. 라파엘은 마리의 살인범을 찾고 있다. 그는 마리 트리지아가 왜 살해를 당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면 루 라 트뤼포아조차 고문할 정도이다.
루 라 트뤼포아.
왕은 자신의 비와 루 라 트뤼포아의 관계를 조사했었다. 트뤼포아가 사교계에 복귀하던 날 안네마리와의 관계에 대해 ‘서대륙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만났었다’며 너스레를 떨어댔었지만 왕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은 안네마리의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둘의 관계를 알아냈다. 라파엘 에반스에게는 ‘루’라는 이름의 외팔이 미남 부하가 있었다. 라파엘은 폭탄으로 불구자가 된 남자를 거둬서 살려냈는데, 그 남자가 라파엘 에반스의 집을 지킨다고 했다. 겹겹이 함정으로 둘러싸인 집을. 라파엘과의 유일한 연락책이라 할 수 있는 ‘검은 물’에서는 ‘루’만이 라파엘 에반스와 유일하게 사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이라고 확언했다.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뭐든, 여하간 ‘유일한 인간’일 것이라고.
그런데, 그런 인간을 고문했다고? 이렇게 간단히?
라파엘이 다가왔다. 왕은 라파엘을 끌어안았다. 이 작은 남자는 강하다. 가느다랗지만 흉포하다. 하지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안네마리.”
왕의 말에 라파엘이 그의 품에서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왕은 잠시 그를 안은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다가 왠지 지친 기분에 그는 라파엘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다.
“너는 묻지조차 않느냐.”
왕은 쓰게 웃었다.
라파엘은 문득 왕이 쓸쓸해한다고 느꼈다. 그는 이런 감정에 한없이 둔한 편이지만 지금 왕이 그러고 있다는 점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는 왕에게 어떤 위로를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왕의 반짝거리는 금발에 손가락을 얽었다.
오늘, 라파엘은 태어나서 가장 많은 말을 했다. 그건 라파엘에게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죽이거나 검을 훈련하는 것보다 그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리고 라파엘은 지금 자신이 왜 그런 노력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혀는 돌처럼 굳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전혀.
라파엘은 왕의 머리를 안았다. 그는 왕에게 아무런 아픔도 쓸쓸함도, 그런 건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뭘…… 물어야 하는 겁니까.”
라파엘이 속삭여 물었다. 그 목소리가 언뜻 답답하고 아프게 느껴져 왕이 웃었다. 왕은 라파엘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터오는 동녘을 바라보다 말했다.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왕이 중얼거렸다.
“당연하고, 모두가 아는 거지. 너만 빼고.”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게 꽤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거야, 라파엘.”
왕이 ‘라파엘’이라고 불렀다. 라파엘은 왕의 머리를 안은 채 왕이 바라보는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날이 밝아오고 있다. 왜 창 밖이 환해질수록, 방 안은 어두워지는 기분이 들까.
“하지만 말할 수 없어.”
왕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눈을 감고 라파엘을 충동적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동이 터오고, 완전히 날아 밝아올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