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장 말할 수 없는 것 (17/47)

제16장 말할 수 없는 것

라파엘은 화장대에 앉아서 변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시녀들은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에 그물을 씌운 다음 정교한 가발을 얹었다. 왕의 시종들이 건네는 호화로운 액세서리를 하나씩 몸에 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고리였다. 라파엘의 귀에 귀고리가 걸렸다. 샹들리에처럼 화려한 귀고리를 걸어준 다음에는, 라파엘의 약간 작고 색이 옅은 입술에 붉은빛이 도는 핑크빛 루주를 덧발랐다. 

“시녀장, 시간에 맞출 수 있겠소?”

시종장이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각을 확인하며 물었다.

왕은 왕비와 함께 세 번째 댄스타임의 시작에 맞춰 내려가야 했다. 국왕 부처는 대체로 첫 번째 댄스타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건 너무 경박하니까. 두 번째 댄스타임에 나타나는 게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늦더라도 세 번째 댄스타임에는 나타나야 했다. 손님들을 맞이하지도 않고 내보낼 순 없으니까.

“시종장님을 비롯한 시종들이 움직이면서 우리들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고, 더불어 5분에 한 번씩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사람 진을 빼지 않으면 가능하겠군요.”

시녀장이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시종장은 눈썹을 흘끗 움직였지만 더는 말하지 않고 시종들을 향해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 손짓 한 번으로 시종들이 모두 벽 쪽으로 물러섰다.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라파엘을 안네마리로 변화시켰다. 단정한 얼굴에 요염한 매력을 뿜어내는 매력적인 안네마리 제1왕비. 비록 만년 소녀 같은, 사과 같은 볼과 화사한 신체를 타고난 왕후만은 못하나 분명히 아름다운 그 왕비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확실히 저 위화감은.’

시종장은 정중하게 기립한 채 예전을 떠올렸다. 왕이 안네마리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안네마리에 대해 ‘작고, 몹시 말라서 낯이 아주 창백했습니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묘하게…… 선이 굵었습니다’라고 대답했었다. 그랬다. 아무리 키가 작고 말라도, 남자를 여자로 만들면 저렇게 되는 것이었다.

‘굉장하군.’

시종장은 감탄하고 말았다.

단정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얼굴에 치덕치덕 많이 발라도 그 얼굴은 남자의 얼굴이다. 게다가 라파엘 에반스의 얼굴 자체가 단정한 얼굴이라 여자의 얼굴로 변화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자 왕비의 시녀들은 아예 그 얼굴을 새로 그리다시피 했다. 단정하거나 청순한 것으로는 남성에게서 여성성을 보이게 할 수 없다. 더욱이 ‘마리 트리지아’라는 극대화된 여성성에 익숙한 귀족 사회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아예 왕비의 시녀들은 처음부터 다른 타입을 선택했던 것이다.

안네마리 제1왕비는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대단히 요염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금욕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옷차림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대단히 유용했다. 그 옷차림은 무언가를 상상하게 했다.

‘그리고 전하는 역정이 나시겠지.’

시종장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오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왕을 바라보았다.

“더 가려.”

왕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예, 전하.”

미학도 모르는 인간.

시녀들은 이가 갈렸지만, 그런 티는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녀들이 라파엘의 옷을 다시 갈아입히는 동안 왕은 스완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스완의 보고에 따르면 태후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파티 도중 하인이나 시종들로부터 은밀히 보고를 받았다. 파티 도중에 받아야 할 정도로 급한 보고였다는 의미인데 도대체 무슨 보고가 그렇게 급했을까. 게다가 메시지 형태의 보고가 아니었다. 구두 형태의 보고였다. 즉, 누군가가 볼까 봐 두려운―은밀한 보고였다는 의미였다.

“그 보고 중 하나는 아까 그 일이겠지요.”

“빠르군.”

“네, 너무 빠릅니다.”

스완이 고개를 돌려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비전하, 살수는 다 처리하신 겁니까?”

라파엘이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하이힐에 오르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응.”

“혹시 놓친 자가 있을 수도 있을까요?”

“없어.”

“살수가 아니더라도, 일의 결과를 위해서 미행하는 조가 따로 있을 수가 있어요.”

“없었어.”

진짜 재수 없다. 어쩌면 1초도 망설임이 없냐.

스완이 말해서 뭐 하냐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왕에게 다시 고개를 돌린 스완이 “그렇다면, 너무 빠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행하는 놈도 없었고 관련자는 다 죽었는데. 누가 그걸 보고 보고를 했지?”

“발코니 창 깨지는 소리에?”

“이 시끄러운 음악과 폭죽 소리에 창문 한두 장 깨지는 소리 따윈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왕의 말에 스완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관계자는 전원 죽었다. 어디서 죽었는지는 스완조차도 모른다. 아는 건 저기 있는 저 반짝반짝 요염하게 빛나는 비전하뿐이었다. 다들 그를 단정할 뿐 별 외모적 장점이 없는 것으로 비하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왕비의 시녀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어쨌거나 저 요염하지만 남자이고 사슴이라는 둥 토끼라는 둥 하지만 실은 살인 기계인 저 표리부동 그 자체인 인물 외에는 아무도 모르지만, 저 인물은 배신자가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왕과 스완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 방 안에, 누군가 배신자가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방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로 저 파티장에 있는 자에게 암살의 결과를 전달했다.

어떻게 전달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전달했는가. 그리고 누가 전달받았는가.

‘하지만 가능하다면 어떻게 전달했는지도 알면 좋겠지.’

스완과 왕이 동시에 생각했을 때 라파엘이 그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반으로 올린 머리칼, 밑으로 내린 머리칼은 촘촘히 가늘게 땋아 내렸다.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치장하고 손가락에는 세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화이트 골드, 옐로 골드, 핑크 골드. 세 가지 색인 대신 단순한 반지였다. 복잡한 자수가 새겨져 있는 핑크색 드레스는 군데군데 생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꿀꺽―하고.

“잘라.”

왕이 낮은 목소리로 스완에게 명했다. 어련하시겠어요, 라고 하면서도 스완은 흘끗 침을 삼킨 놈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시종인가. 스완이 시종장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시종장은 스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자르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리고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굳혀서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있을 어떤 놈을 경계하게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왕의 시종, 왕비의 시녀, 특수군. 그중 왕비의 시녀에는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왕비의 시녀는 왕비의 사가에서 데려온 하녀들이다. 그녀들은 마리 트리지아의 하녀들이고, 마리 트리지아의 명예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건 충성스러운 인물들이다. 게다가 서로 대단히 친밀하다. 그리고 중간에는 감옥에 투옥되는 둥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다른 인물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집단.

시종과 특수군.

첩자는 어느 쪽에 있을까.

시종장과 스완이 파티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물밑으로 첩자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받는 동안, 왕은 안네마리를 안은 채 두 번째 댄스타임의 첫 왈츠를 췄다. 안네마리의 허리를 안자 그녀, 아니, 그의 몸에서 적당히 뿌린 향수에 섞인 체향이 풍겨들었다. 아니, 풍겨들었다기보다 그 향기는 달려들었다.

왕은 웃으면서 라파엘을 능숙하게 리드했지만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심장에서 술 취한 나비가 미친 듯이 날갯짓을 했다. 자꾸 미친놈처럼, 아니면 애송이처럼, 라파엘을 어떻게 하고 싶었다. 저 빌어먹게 복잡한 드레스 따윈 상관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키스하고 싶었다. 한 번이 아니라, 로맨틱한 키스가 아니라, 숨 막히는 키스를 하고 싶었다. 섹스가 아니었다. 성교도 아니었다. 키스가 하고 싶었다. 어딘가에 몰아넣고, 내내 키스가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스텝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의 깜빡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심장에서 날뛰는 나비의 날갯짓 소리 같았다.

라파엘이 문득 “전하, 우리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 올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왕이 그 입술에 키스했다.

커플들이 그들의 주위를 빙빙 돌며 춤추는 가운데 그들은 홀 가운데 멈춰 서서 키스했다. 키스는 길고, 난폭했다. 왕은 키스하고, 그를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귀족들이 수군거리면서 그들을 두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가든 하우스를 두고 왜 이러냐느니 하는 소리들이었다. 언젠가와 똑같은 말들이었지만 그때와는 달리 왕비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아까 그 호위병은 어디 갔대요?”

사냥 대회에선 호위병과 말 위에서 키스를 하더니, 사냥 대회 후의 파티에선 왕비와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에서 키스를 해? 아무리 그래도 가든 하우스나 정 안 되면 발코니 커튼 뒤에서라도 했어야지. 그 정도 예의는 갖춰주었어야 했다.

“발정한 말이 따로 없군요!”

특히나 반왕파―지만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르게도 보수파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녀들은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풍비박산이 된 쇼어 가문의 두 생존자 중 한 명에게 가해지는 학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들은 흡사 파르르, 파리처럼 떨었다.

졸지에 아침에는 남자, 저녁에는 여자와 즐기는 놈이 된 왕은 왕비의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왕비가 넘어질 듯 말 듯 하면서 그에게 끌려갔다. 왕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사이로 왕비를 끌고 가다가 안 되겠는지 “안네마리, 잠깐만”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어깨에 둘러멨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벼운 신음 소리가 음악 소리와 함께 흐르거나 말거나 왕이 개의치 않고 빠른 속도로 홀을 나서자,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저 짓거리를 하려고 아까 그 호위병이라는 놈은 다른 데 떨어뜨리고 온 모양이다.

“쇼어 가문은 차암 명문이에요.”

그 모습을 먼 기둥에 기대어 지켜보며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빈정거렸다.

“아침저녁으로 입맛 다른 정실과 남첩을 갖다 바치고, 충성심으로 가득 찬 명문가죠.”

백작부인이 그렇게 말하면서 비단 부채를 펴서는 팔락팔락 부쳤다. 그 모습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남자는 보석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런 남자는 꽤 많았다. 가면무도회는 아니었지만,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건 남자나 여자나 흔한 일이었다. 불륜을 저지르는 게 일반적이면서도 불륜을 저지른 티는 내고 싶어하지 않는 속물적인 귀족들은 종종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했으니까. 불륜을 저지르는 건 괜찮아도 상대를 감추고 싶어하는 경우에도 유용했다.

특히 클레르 라 포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에게 가면은 필수 소지품이었다. 클레르는 여자들 사이의 공적이었다. 보수파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늘 몸을 드러내고 남자를 유혹하는 클레르는 여자의 적대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데가 있었다. 세상 어느 남자가 여자들의 미움을 사고 싶을까. 그러니 당연히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클레르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언제나 클레르의 곁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한 명 혹은 그 이상 있었다. 클레르는 남자를 한 번에 한 명만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내키는 대로 상대했다. 오늘은 한 명뿐이었지만.

“그렇군요, 클레르.”

“그런데 에디.”

클레르의 말에 에디, 즉 에드워드 라 쇼어가 싱긋 웃었다.

“네, 클레르.”

“전 당신이 서대륙으로 향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저런, 제가 왜요.”

에드워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팔짱을 꼈다.

“토우셔로 향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클레르의 말에 가면 속의 보라색 눈이 가볍게 움직였다.

“저런, 태후 전하와 아시는 사이인 줄은 몰랐군요.”

“그분께서 먼저 서신을 보내오셨어요. 당신이 토우셔에 있고, 도움이 필요하다 하시더군요.”

“도움?”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작은 날이 섰다.

“그렇게 생각해요, 클레르?”

“글쎄요.”

클레르가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끌면서 에드워드의 품에 안겼다. 저 멀리서 어떤 남자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 에드워드의 장미꽃 같은 아내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의 아내, 프랜시스 라 쇼어.

에드워드와 결혼하고 고작 1년밖에 동거하지 않은 프랜시스는 그 이후 몇몇 레이디가 그렇듯 친정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기혼 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에드워드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그들 사이엔 아이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아주 차가운 남자였다. 그는 쇼어가 특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금발, 그리고 보라색 눈동자. 섬세하고 유려한 미모, 장신의 늘씬한 신체. 그리고 냉혹한 성정을 감추는 상냥한 목소리와 다정하고 완벽한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냉혹해서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생이 죽어도, 가문에 관대한 명령이 내려져도, 심지어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도, 그는 전혀 절망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클레르를 확 밀어냈다.

“여전하군요.”

클레르가 화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프랜시스 앞에서의 당신은 이상하네요.”

에드워드의 눈이 클레르에게 닿는 듯했다가 그 뒤의 프랜시스에게 닿았다. 프랜시스는 남자들과 웃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꽃 같은 여자.

‘프랜시스예요, 쇼어 경.’

그 우울한 얼굴을 에드워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 첫날밤 프랜시스에게 단 한 마디도 걸 수 없었다. 입이 자꾸 말라서 그저 침을 삼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침대에 앉은 그녀와 그 앞에 선 그는 내내 그렇게 있었다.

열다섯. 어린 프랜시스가 수치심으로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쥔 채 고개를 수그리고 덜덜 떨면서 물었다.

‘제, 제…… 제, 드, 드레스의 단추를…… 푸, 풀어주시겠어요……, 경?’

그 순간 에드워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그 순간의 긴장을 참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 뭔가가 바뀔 것 같아서 그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앉아 있는 수줍고 작은 장미 봉오리 같은 여자가 그를 망쳐놓을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망쳐질 것 같았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다음 날 아침 사라지고 없었다. 에드워드는 다음 날 그녀에게 사과하기 위해 장미를 한 아름 가져갔다가 그 사실을 알았다. 프랜시스는 그 이후 편지 한 통 없었고, 에드워드도 편지 같은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토우셔로 향하려는 그 순간에, 에드워드는 프랜시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신은 토우셔로 향했어야 했어요.”

클레르가 에드워드에게 다가왔다. 에드워드의 넓은 가슴에 안긴 클레르가 에드워드의 가슴을 잘 손질된 손톱으로 희롱하며 속삭였다.

“당신이 잡히면 우리 모두가 끝장인데, 여기로 오다니. 미쳤어요?”

“누가 날 잡는다는 겁니까?”

그렇게 물은 에드워드가 웃으면서 클레르를 잡아끌었다. 클레르는 방심한 사이 댄스플로어로 끌려갔다.

“말해봐요, 클레르. 누가 날 잡을 수 있다는 거죠. 내 동생에게 우스운 꼴을 시켜놓고 헐떡이는 저 변태가?”

에드워드의 말에 클레르가 퇴폐적이지만 정확한 폼으로 돌아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건 그래요, 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프랜시스는 어떤 남자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낯선 아픔이 에드워드의 심장을 직격했다. 에드워드는 프랜시스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프랜시스의 한참 앞에선 왕이 라파엘을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진 채 이그나치오궁을 나서고 있었다.

궁을 나서자 풀냄새가 풍겨들었다. 라파엘이 “전하?” 하고 그를 불렀다.

“부르지 마, 부르지 마.”

왕이 중얼거렸다.

왕비를 잔디에 눕혀놓고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아, 그렇게까지 추락하고 싶진 않았다. 제발, 율레즈여. 제 인내심의 끈을 조금만 더 늘여주세요. 찢어지지 않게 약간의 탄성만 더 부여해주세요. 제발, 제발.

라파엘이 입을 다물자, 왕이 성큼성큼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이라고 해도 다 급한 건 비슷하기 때문에 비어 있는―곳에 들어가서 라파엘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내려진 라파엘이 주변을 살폈다. 뭐가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지. 주변을 경계하는 그 눈은 늘 그렇듯 차갑고 무표정했지만, 조금 털을 세운 고양이 같기도 했다.

그때 왕이 그의 위에 몸을 드리웠다. 가든 하우스 기둥을 한 팔로 짚은 채 그가 라파엘의 위에서, 아래로 몸을 숙여서 다가오고 있었다.

키스.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피가 더워져. 사람을 죽이면 피가 뜨거워져.’ 그 말이 머리를 스쳤다. 라파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이 남자를 상대로는 늘 그랬다. 그리고 지금.

피가 끓어올랐다.

라파엘이 왕을 잡아챘다. 라파엘이 다가오고 있는 왕을 잡아채서 그 입술을 머금었다. 키스는 거칠고 서투르고 유치했다. 세련된 기술 따윈 손톱만큼도 없었다. 라파엘은 마치 짐승처럼 왕의 입술을 물고 치아를 핥고 혀를 쑤셔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분명했지만, 어떻게든 하고 싶은 것도 명확했다. 왕이 아아 하고 몇 번이나 신음했다. 욕정에 미친 것 같은 이 작은 야수가 왕은 정말이지 좋았다.

넘어뜨릴까.

왕은 날아가려는 이성의 꼬리를 아슬아슬하게 붙잡은 채 생각했다.

씨발, 합방일 따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왕이 가든 하우스 구석의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던 특수군 부대장이 오른손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신전에서 합방일을 점지하는 데 앞으로 사흘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라파엘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왕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신음 소리는 없었지만 그가 거의 미친 것처럼 날뛰는 건 알고 있었다. 왕은 신음을 마음껏 터뜨리며 기둥에서 손을 떼었다. 그가 손을 떼는 순간 라파엘이 왕을 잡아채었고 그는 그대로 긴 소파에 넘어졌다. 머리가 아플 거라 예상했는데 아프지 않았다. 라파엘이 자신의 손으로 왕의 머리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작긴 해도 꽤나 든든한 연인이 아닌가. 왕은 키득거렸다. 연인에게서 보호받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아…… 아프십니까?”

라파엘이 왕의 위에 걸터앉아 물었다. 핑크색 드레스, 군데군데 장식되어 있던 생화는 짓이겨져 있었다. 그게 몹시 선정적이었다. 특히 목 부근에 장식되어 있던 꽃은 라파엘의 쇄골에 짓이겨져 꽃물이 들어 있었다. 순수의 타락인가.

왕이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장식한 핀을 하나하나 빼내기 시작했다.

“멈추지 마.”

왕이 명령했다. 라파엘이 왕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난폭하고 사나웠다. 그게 아주 좋았다. 라파엘이 왕을 구석에 몰아놓고 키스하고,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그 이상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하지 않았지만, 왕의 입술만은 계속 계속 탐했다. 탐해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왕은 잠시 라파엘에게 탐해지는 채로, 그가 이끄는 채로 이끌려갔다. 엉망진창의 댄스에 발맞춰주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아주 노련한 댄서였기 때문에, 어느 순간 다시 뒤집었다.

“――아!”

라파엘이 신음했다. 왕이 라파엘의 얼굴을 쪼듯이 키스했다. 온 얼굴에 계속 키스했다. 왕이 라파엘의 등 뒤로 손을 돌렸다. 드레스의 단추. 의상실 관련자는 다 투옥시켜버려야 돼. 왕은 이를 갈았다. 이토록 복잡한 단추라니, 누굴 죽일 셈인가. 왕이 더 참지 못하고 드레스의 스커트 자락을 끌어올렸을 때였다.

“저, 전하.”

라파엘이 작게 그를 불렀다.

“알아.”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라파엘의 안쪽, 그 뜨거운 육벽. 네가 내 아이를 못 가진다는 것이 내겐 영광이지. 너는 평생 내게 소속되는 거다. 왕이 라파엘의 귀를 깨물었다. 그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강하게 깨물었다.

“하나가 되자, 안네마리.”

왕이 속삭였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처럼 다급하고, 세상에 단둘인 것처럼 단호하게.

“영원히 서로에게 새겨 넣…….”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조금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반지.”

아, 반지. 왕이 녹을 것같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반지를 줄 것이다. 그 가는 손가락에 그를 끼워 넣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다. 못 해줄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비록 3백 명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몰수해서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라파엘이 손가락으로 소파 구석을 가리켰다.

“전하, 반지입니다. 마리의 메모, 가든 하우스, 반지요.”

라파엘이 자신의 굳은 혀를 최대한 움직이면서 말했다. 왕이 라파엘의 스커트를 걷어 올리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왕이 손가락에 걸린 실크 스타킹과 라파엘의 손끝이 가리키는 것을 번갈아 보다가 혀를 찼다. 신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호위라는 명목하에 지켜보고 있던 부대장이 재빨리 손짓했다.

“대장님을 불러와.”

저 신경질을 혼자 감당하기 싫은 부대장의 발악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라파엘이 가볍게 몸을 굳혔다. 왕이 라파엘의 허벅지를 억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다섯 개의 구멍을 낼 것처럼 왕의 손가락이 흉포하게 파고들었다.

“너를 놓아주는 게 내게 아주 힘든 일이었다는 걸 기억해야 돼, 안네마리.”

왕이 으르렁거렸다. 부하가 이그나치오궁으로 향하다 말고 부대장을 바라보자 부대장이 이를 드러냈다. 어서 안 가고 뭐 하냐는 얼굴에 부하가 이그나치오궁으로 달렸다. 달리는 듯하던 그 몸이 어느 순간 밤의 어둠 속에 녹아 사라졌다.

“맹세의 반지입니다.”

스완의 말에도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라파엘은 그게 뭔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왕은 아니었다. 대귀족이나 왕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맹세의 반지’는 맹세를 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 두 사람만이 저 안쪽의 뭔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이 같이 있는 곳에서 서로의 목소리로 각자의 맹세를 담아야만 언뜻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 문이 열리고 안에 있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법사를 불러야겠지요?”

“그냥 부수면 되지 않습니까?”

라파엘의 말에 왕이 귀여운 동생에게 하듯이―실제로 왕은 자신의 동생을 대단히 싫어했지만―머리칼을 가볍게 흩트렸다.

“가능한 한 경계하게 만들지 않는 게 좋으니까. 마법사는 부를 필요가 없어. 우리에겐 훌륭한 시종장이 있거든.”

“감사합니다, 전하.”

시종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무릎을 꿇고 소파 밑에 있는 맹세의 반지 앞에 앉았다.

“해제할 수 있겠나?”

왕의 질문에 시종장의 주름 잡힌 손이 반지를 매만졌다. 정확히는 조각이었다. 반지 모양의 조각. 소파 밑에 새겨져 있었다. 결혼반지 모양이었는데 라파엘은 그 반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종장이 음 하고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불가능합니다. 맹세의 반지는 심플한 구조의 마법입니다만, 대체로 심플한 것이란 강력한 것이기 마련이지요.”

“예를 들면?”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확실한 건.”

“정확한 예시군.”

시종장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반지를 천천히 덧그렸다.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겠지?”

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당신은 대부분의 마법사에 속하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하지만 그런 저도 맹세의 반지는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왕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라파엘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시종장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그리고 신력이 존재하는 유일한 대륙, 북대륙은 마법이라는 영역에 대해서는 어느 대륙보다 월등한 편이었다―이 시종장이 해제 불가능한 마법이라면, 그 마법은 어느 누구도 손쓸 수 없는 마법이라는 뜻이었다.

라파엘이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라파엘의 손가락에서 인간의 손가락에서는 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무섭잖아. 시종들이 아닌 척하면서도 살짝 어깨를 움츠렸을 때였다.

“하지만 이 마법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마법사 사이에서는 잘 안 쓰입니다.”

“오류?”

“예.”

“마법이 너무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틈이 많습니다. 목소리와 키워드만 있으면 됩니다. 개체의 여부는 따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왕이 아하 하고 웃었다.

“목소리를 담을 수 있으면 되는 거군.”

“네. 그것을 보강하는 마법도 계속 나왔습니다만―아시다시피 귀족 사회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마법이 아닙니까. 애인과의 추억을 봉인하기엔 기가 막히게 좋은 마법이지요―사실 귀족 사회는 마법사와는 친하지가 않은 곳이라.”

“지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곳이지. 야만스러운 것들.”

야만스러운 것들이라. 그 백수의 왕께서 왜 이러실까.

스완이 평소보다 한층 짜증이 나 보이는 왕을 보며 쓰게 웃었다. 시종장이 그런 스완을 보고 한 번 웃음을 보낸 뒤 몸을 일으켰다.

“그 보강된 마법들을 굳이 사용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제하는 것보다 시간은 걸리겠습니다만, 이 반지의 주인들이 한 번 더 반지를 사용한다면 우리도 이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모르게.”

“좋아, 뭐가 필요하지?”

왕이 허리에 손을 얹고 묻자 시종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필요한 건 얼마든지 청구해.”

“예, 전하.”

왕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다분히 호전적인 얼굴이었다. 그 싸움을 거는 얼굴에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키가 작고 마른, 누가 봐도 아름답고 요염한 여자로 보이는 남자는 지금 더욱 요염했다. 헝클어진 머리칼까지도 관능적이기 짝이 없었고, 특히 살짝 부어오른 아랫입술이 그러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래서 그녀를 바라보는 게 결코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무서운 남자.

물론 살수는 많다. 살인마도 많다. 둘이 겹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라파엘 에반스’라는 이름이 주는 두려움에는 그들이 주는 이름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 있었다. 비인간적인 공포.

“돌아가야겠군.”

네 번째 댄스타임이 시작할 때였다.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왕은 생각했다. 라파엘을 데리고 어디에 있을까? 여기? 여기는 좋지 않았다. 저 맹세의 반지인지 맹견의 반지인지 어쨌거나 저 반지의 주인들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산통 다 깨졌는데 라파엘을 데리고 이 옆 가든 하우스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선 플레이스로 돌아가자니 그건 그것대로 괴로울 것 같아서 차라리 홀로 돌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왕은 라파엘을 자신의 앞 소파에 앉히고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겼다. 아까처럼 정교한 모양은 아니지만 대충 모양을 갖춰가는 헤어스타일을 보면서 스완이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신데요.”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완은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왕이 진주와 다이아몬드 핀으로 라파엘의 헤어스타일을 대충 다듬자 라파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

왕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쳐다보지 마. 몸을 찢어놓고 싶어지니까.”

라파엘과 왕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왕이 자신의 흉흉한 성기로 라파엘의 몸을 가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하나 다른 것은 왕은 그 장면을 환희에 떨릴 소망으로 여기는 데 비해 라파엘은 그것을 아직 고문으로 여기는 점이었다. 몸을 찢어놓는다, 라. 적절한 표현이 아니던가.

라파엘은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주 아름다운 남자였다. 라파엘은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태양처럼 라파엘을 덥게 만들었다. 라파엘을 생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너무나―너무나.

그러나 왕은 라파엘을 찢어놓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웃었다. 정확히는 웃으려고 노력한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히죽 하고 웃으려 노력했다.

“웃지 마.”

왕이 성을 냈다. 그러자 라파엘이 웃음을 멈췄다. 그 꼴을 보면서 특수군과 시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괴롭네.’

괴롭고 또 괴로웠다. 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라파엘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무표정하게 있거나 실패한 광대처럼 히죽 웃는 두 가지 표정밖에 구사하지 못했다.

문득 누군가가 생각했다.

‘정말 개새끼야.’

그리고 그 누군가는 흠칫 놀랐다. 그는 방금 누구를 향해서 욕설을 뱉은 걸까.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 에반스를 저렇게 만든 놈에 대해서다. 하지만 역시나 라파엘의 손에서 나던 그 비인간적인 두두둑 소리를 생각해내곤 재빨리 동정심을 코 푼 휴지처럼 갖다 버렸다.

그때 제럴드 라 쇼어가 달려왔다. 거구에 근육질에 미남인 남자가 허리케인처럼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 왕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사고 쳤다는 데 전 재산을 걸지.”

그렇게 말하며 왕이 장난스럽게 라파엘을 에스코트했다. 라파엘과 왕, 시종들과 특수군이 줄줄이 가든 하우스를 나왔을 때 제럴드 라 쇼어와 근위병 둘이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제럴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제럴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루 라 트뤼포아가 사라졌습니다.”

거봐, 라는 얼굴로 왕이 스완을 바라보자 스완이 무슨 소리시냐며 코웃음을 쳤다.

“저도 전하께서 거시는 데에 전 재산에다 목숨도 걸었을 겁니다.”

제럴드가 왕과 스완을 번갈아 바라보자 왕이 라파엘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끌었다.

“포, 잘 처리할 거라 믿지. 우리는 홀로 돌아간다.”

왕의 말에 시종들이 왕을 따랐다. 하나의 무리가 둘로 나뉘었다.

§  §  §

왕궁은 상당히 큰 규모이다. 웬만한 작은 도시를 능가하는 대지 위에 단일 궁들이 존재한다.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선 플레이스, 문 플레이스, 이그나치오궁을 잇는 삼각형의 지대인데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사실 왕궁은 워낙 규모가 큰 만큼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연쇄 살인도 역사적으로 세 차례나 일어났으며 사소한 좀도둑이나 사기, 강간, 폭력 따위는 셀 수도 없다. 왕궁은 추문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왕궁의 치안만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는데 그곳이 곧 ‘근위대’이다.

근위대장 제럴드 라 쇼어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이 많은 남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사실 대체로 상충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유능한 제럴드는 종종 발목을 붙잡히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쇼어 대장님, 특수군은 국왕 직속 친위대입니다. 우린 근위대에 개입할 주제가 안 됩니다만, 이건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특수군 부대장 제이슨 리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반 이상이 작위가 있는 근위대가 발끈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잘 참아냈다. 그들의 앞에 선 특수군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특수군은 작위가 없는 이들이 주축이었는데 이것은 왕의 주문에 의한 것이었다. 특수군이 귀족들의 정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특수군의 정체를 귀족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 평민을 고용하는 편이 낫다는 것에 왕과 스완 라 포는 의견 일치를 보아 특수군이라는 새로운 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부대장인 제이슨 리아스는 라파엘 에반스만은 못해도 꽤나 악명을 날린 인물이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까.”

제럴드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이슨이 연륜 있는 얼굴로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근위대장님, 누군가가 감옥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거기엔 전혀 강제로 열린 흔적이 없어요.”

“리아스 부대장.”

“누군가, 에 대해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려볼까요. 그는 근위대원입니다. 그날, 감옥에 갔었죠. 몇 명 안 될 겁니다. 따져보세요.”

“리아스 부대장!”

“우리 대장이 실실거리는 한량처럼 보이겠지만 그는 무서운 사람이고, 사실 우리는 지금 근위대원을 전부 죽여서라도 답을 들어야 할 판국입니다. 부디 우리를 열받게 하지 마세요.”

뭐라고―!

근위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총을 꺼냈다. 개중에는 검을 꺼내는 인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총이었다. 그리고 특수군은 검을 꺼냈다. 하지만 반드시 총이 검을 이기는 법은 아니었다. 접근전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두 집단이 대치한 가운데, 부대장이 말했다. 

“귀가 많군요. 부하들을 좀 물려주시겠습니까?”

부대장의 말에 제럴드의 보라색 눈이 움직였다. 싸울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그 눈에 싸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얄미운 도발을 멈추지 않는 부대장이었지만, 제럴드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제럴드가 근위대원들을 내보내려고 했지만 그들은 나가지 않으려 들었고, 결국 제럴드는 부하들에게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야 했다. 제럴드 혼자 특수군들에게 둘러싸이자 리아스 부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는 왕후 전하가 타살되신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순간 제럴드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가 다 아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사람들을 물리라고 했냐는 그 얼굴에 부대장이 ‘난 정말 귀족이 싫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물증을 가지고 있어요.”

“물증 같은 건 없었어!”

제럴드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물증? 물증이라고?! 제럴드가 부릅뜬 눈으로 리아드를 노려보았다. 그런 게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는 마리를 그렇게 만든 놈을 잡았을 것이다. 잡아서 죽여주었을 것이다. 가장 잔인하게, 가장 비참하게. 놈이 살려달라고 빌고, 빌고, 빌다가 목구멍이 말라 갈라져 죽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증 같은 건 없었다.

“신발입니다.”

“마리는 신발을 안 신고 있었어. 창 앞에 파란색 실내화가 놓여 있었다고. 마리가 늘 신고 다니던 게 맞다고 시녀가…….”

파란색 실내화.

제럴드가 눈을 깜빡였다. 파란색 실내화, 파란색 실내화. 마리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은 최근 유행에 걸맞은 분홍색 잠옷이었다. 그리고 분홍색 실외용 가운. 실외용 가운.

“실외용 가운을 입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건…….”

제럴드가 멍하니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부대장이 말을 이었다.

“예, 귀족분들은 드물게 자살하시는 분들도 정장을 입으시죠. ‘밖’에 나가시는 거니까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실내화는.”

“집이니까요.”

제럴드 라 쇼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뭘 바랐었죠? 아, 루 라 트뤼포아 후작. 그래요, 그 작자가 우리 마리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전에 뭐 하나 물읍시다. 라피는 그렇다 쳐요. 전하께오선 왜 여기에 매달리시는 겁니까.”

“비전하께서…….”

부대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제럴드가 지긋지긋한 얼굴로 거칠게 소리쳤다. 그의 팔이 검처럼 공간을 가로로 그었다.

“집어치워!”

특수군병들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라피가 찾으니까 왕도 찾는다고? 웃기지 마! 나도 평생을 귀족으로 살았어. 무슨 말인지 알아?!”

“압니다.”

“그건 귀족의 방식이 아니야, 왕족의 방식은 더더욱 아니지. 왕의 방식? 웃기지 말라고 해, 네가 아는 만큼, 아니,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는 그 남자를 알아. 나는 그 남자와 같이 커왔단 말이야. 알아들어?! 우린, 같이 컸어!”

부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제럴드가 다분히 적대적인 눈으로 특수군들을 노려보았다.

“왕이, 왕이, 누군지 알아? 그는 말이야, 우리 형이랑 똑같은 인간이야. 왕세자일 때, 그는 물론 쾌활하고 오만한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저 바람둥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 남자가 즉위 후에 한 짓을 생각해봐. 맙소사, 왕세자일 때 그는 뒤로 이미 너희 같은 인간들을 고용해서는 군대로 만들어두었단 말이야.”

제럴드가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엉클었다.

“다시 말하는데, 그는, 당시에 돈도, 권력도, 아무것도 없었어. 그가, 그가 무슨 짓을 했는 줄 알아? 상상도 못 할걸? 너희는 군대가 되었지만, 너희 같은 ‘특수군’이라는 인간 사냥꾼 집단을 가지기 위해서 그가 무슨 짓을 했는 줄 아느냔 말이야. 좋아, 너희는 특수군만 아는 정보를 제공한 모양인데 나도 근위대장만 아는 정보를 제공해주지. 그는 신전에서 할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안치되어 있는 보석을 훔쳤어.”

조부의 무덤을?

특수군들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부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럴드가 말을 이었다.

“그 보석으로 당신 같은 인간 사냥꾼들을 군인으로 묶어두었지. 3년이나. 그는 기다렸어, 아버지가 죽기를. 선왕은 죽은 걸까, 살해당한 걸까?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 어쨌거나! 드디어 아버지가 죽고, 그는 드디어 즉위하여 왕이 되었어. 그리고 즉위 축하연. 어쩔 수 없이 모든 귀족이 모일 그 연회, 다들 당황해서 제대로 방비도 못 했을 그 연회에서 그는 3백 명을 떼로 죽여버렸다. 5백 중에 3백이야. 5백 중에 3백이라고! 그리고 너희들이 그들의 가족까지 싹 다 죽여버렸지. 가족과 사용인들까지 다 합치면 몇일까? 3천? 7천?”

제럴드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런 왕이, 라피를 위해 마리의 살인자를 잡는다고?! 웃기지 마!”

제럴드의 고함에 부대장이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게 뭔데?”

부대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럴드가 손을 뻗어 부대장의 멱살을 잡았다. 제럴드의 두툼한 손에 거칠게 흔들리던 부대장이 “이봐요”라고 그를 불렀다. 동정심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

“당신의 여동생은 살해당한 채 오욕을 뒤집어썼고, 당신의 남동생은 목숨과 미래를 걸고 여동생을 위해 궁에 잠입했죠.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집안을 위해서. 당신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끝났는데, 당신의 형은 어디서 뭘 하는 겁니까?”

부대장이 말했다.

“알고 있잖아요, 누가 일을 이렇게 만든 건지.”

자신의 (공식적으로) 하나 남은 형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울기 시작해서 특수군들이 짜증을 내고 있을 때, 라파엘은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근위대가 쓰는 왕궁 내의 지도가 아니라 헤수스 전도였다. 라파엘은 시녀가 갖다준 차를 입에 댄 채로 토우셔를 손가락으로 찍어보고 있었다.

“뭐하셔요?”

천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 데인.”

“있잖아요, 비전하.”

수잔이 은근하게 말하면서 양털로 만든 러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라파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스로의 무릎을 안고 앉은 수잔이 애교 있게 웃어 보였다.

“언니들이 그러는데 전하는 원래 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면서요.”

“응.”

라파엘이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옆모습을 수잔이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 한 번에 기억하셨잖아요.”

“응.”

“저기, 제가,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나요?”

“특별한 점?”

라파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비전하가 눈치는 좀 없으셔. 하지만 아주 좋은 분이야, 아주. 로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수잔이 웃었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주던 라파엘을 떠올렸다. 그는 매우 강했다. 수잔은 단 한 번도 그렇게 강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라파엘은 아주 미남은 아니었지만 몹시 단정했다.

“이 눈이라든가?”

수잔이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켰다.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눈은 좀 자신이 있었다. 시골인 토우셔에서였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눈이 아주 예쁘고 귀족적이라고 말했었다. 그녀가 자신의 눈을 가리키자 라파엘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왕비의 침실로 들어섰다.

왕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키스를 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여자는 눈을 깜빡였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문득 왕은 그 젊은 남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 분통이 터져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그런 왕을 막은 건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이 손을 들어 왕의 입술을 막았다. 고개를 젓는 시종장의 얼굴이 진지했다.

“……그래. 네 눈은 특별해.”

왕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라파엘이 말했다.

“보라색 눈이라니, 이 눈 색이 흔한 건가?”

“예쁘…… 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쁘다는 말씀을 특이하게 하시네요.”

수잔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라파엘에게 말했다. 왕이 시종장과 시선을 교환했다. 왕이 앞으로 걸어가 수잔 데인의 팔뚝을 붙잡아 돌렸다. 거친 움직임에 수잔이 비명 소리를 냈다.

“저, 전하.”

왕이 수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보라색이었다. 자수정을 박아 넣은 듯한 선명한 보라색.

“이름이 뭐지, 무엄하고 가증스러운 계집?”

“수, 수잔 데인입니다. 전하.”

데인.

왕의 머리를 데인이라는 이름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리 확인해도 그 이름은 왕이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수많은 귀족들의 이름 중 전혀 아는 이름이 아니자 왕이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왕이 라파엘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가 멀뚱멀뚱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시선으로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지. 왕이 쓰게 웃었을 때였다.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데인을 놔주십시오.”

왕이 라파엘을 향해 꺼림칙한 시선을 보냈다. 그가 수잔 데인을 짐처럼 휙 밀어 던지자 라파엘이 그녀를 받았다. 수잔은 다시 한 번 자신을 구해준 왕자님에게 하트가 섞인 시선을 보냈고, 그건 왕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켰다.

“라파엘.”

“예, 전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왕을 바라보았다. 문득 왕은 라파엘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저는…… 전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장난하자는 건가?”

“아니요.”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런 일로 장난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 왕이 잘 알 것이다. 라파엘의 생각대로 왕은 라파엘이 진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화가 났다.

어제도 그는 화가 났었다. 라파엘의 어떤 점에 그는 불쾌함을 종종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라파엘은 그를 좋아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라파엘을 쐈지만, 라파엘은 그를 찌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라파엘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와 뭔가를 공유하거나 그에게 기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를 좋아하진 않았다. 아니, ‘그 정도로’ 그를 좋아하진 않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그저 극단적이고, 그런 방식 외에는 아예 알지 못할 뿐이었다. 라파엘이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당장은 화가 나서 왕은 이를 악물었다.

왕이 이를 악물자 라파엘은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입술과 혀를 움직였다.

“정말,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알아.”

왕의 악문 이에 힘이 더해지는 것 같아 라파엘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다시 수잔 데인을 왕에게 던져주었다.

“그녀를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수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파엘!”

“닥쳐!”

왕이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에 수잔이 변명을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왕의 사각지대에 서 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얼굴에 수잔이 입을 다물었다.

왕이 바라보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잘 모르겠지만, 화내지 마세요.”

라파엘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말투는 조금 애원조였다. 왕은 피식 웃으면서 기분을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기분을 푼 것은 아니었다.

왕이 다시 수잔 데인을 라파엘에게 밀어주었다. 라파엘이 다시 수잔을 받았지만 그때 이미 수잔은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서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다음이었다.

“보라색 눈이라.”

“흔한 건가요?”

라파엘의 말에 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특이한 색이지.”

“그렇군요.”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수잔 데인이 조금 기분이 좋아진 듯 입가를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상대는 왕이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들진 않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왕이 팔짱을 낀 채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저 미치도록 사랑스러운데다 아주 유능한 연인은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은근히 열받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신전에서 연락이 오기까지 며칠이나 남았지?”

시종장이 인자하고 정중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앞으로 이틀입니다.”

“이틀.”

왕이 노골적으로 라파엘의 몸을 훑었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채 마리의 죽음에 대해 캐고 있던 라파엘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살수씩이나 되는 주제에 지독하게 위험 감지 능력이 떨어지는 남자라고 시종들은 생각했다. 네 목숨만 멀쩡하면 다냐. 왕이 저렇게 대놓고 몸매를 감상하며 마른 입술을 핥아대고 있는데도 거북이처럼 꿈뻑 꾸움뻑 눈만 깜빡이면 되냐고.

시종들이 제 가슴을 팍팍 치면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하고 괴로워할 무렵, 문이 열리고 제럴드가 나타났다. 울어서 새빨갛게 부은 눈에 탄탄한 근육질, 흐트러진 옷차림이, 뭐랄까.

차마 불경해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시종 전원이 떠올렸을 때 왕이 물었다.

“나 말고 또 다른 놈에게 당하고 다녀?”

가감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왕은 또 모른다고 여겼다. 아―, 귀찮은데. 왕은 미간을 좁혔다. 제럴드 라 쇼어는 왕에게 있어 미묘한 상대였다. 기억할 만한 가치를 따지자면 좋아하는 연인의 형제였다. 잘해줘서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웬만큼 뇌수를 바닥에 흘리고 다녀야 말이지.

“제가 그렇게 쉬운 놈으로 보이십니까.”

예의고 나발이고 다 갖다 버린 제럴드 라 쇼어에게 왕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게 더 놀랍군.”

싸워서 뭣 하리오. 절대 말로는 이길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아는 제럴드 라 쇼어가 왕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거두절미하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왕이 팔짱을 꼈다.

“어디까지입니까?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어디까지 지게 하실 겁니까? 이 일의 시작은 어디서부터라고 규정하실 겁니까?”

라파엘의 검은 눈이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쇼어 가문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없어야 했다. 그가 당했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면―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났다.

이제 그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의 복수를 어디쯤에서 마무리 지을지.

“태후는 안 돼.”

왕이 단호히 말했다.

“에드워드 라 쇼어도 안 돼.”

제럴드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는 왕의 말을 기다렸지만 왕은 더 말하지 않았다. 제럴드가 눈을 뜨자 왕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쯤에서 넘어가지.”

“저희 부모님은?”

“스완에게 연락해보지. 쇼어 공작부인이라면 모를까, 공작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어머니는 살아 있는 겁니까?!”

제럴드가 절박하게 외쳤다. 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어머니에 연상의 여인에 미인, 그 녀석이 약한 3대 요소지.”

왕의 말에 제럴드가 뜻하지 못한 기적을 본 사람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율레즈여. 쿠치아노여. 그가 신을 부르며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우는 산만 한 덩치의 남자를 왕은 귀찮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제럴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라피는?”

“내 비한텐 신경 끄라는 소리를 다시 한 번 하고 싶구나.”

한 번만 더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면 내 비를 제외한 너희 가문의 일원 전부를 쓸어버리겠다고 맹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이 으르렁거리자 제럴드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 절대로 아닙니다.”

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했다. 가능한 한 빨리 말하라는 그 고갯짓에 비록 라파엘과 같은 ‘아방한 피’를 받은 것으로 의심받고 있으나 어쨌거나 귀족으로 평생 살아온 제럴드 라 쇼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프랜시스나 도미니크는 어떻습니까?”

에드워드 라 쇼어의 아내와 제럴드 라 쇼어의 아내였다.

‘이런, 제기랄.’

왕이 이를 갈았다. 아주 하인 한 명 한 명의 이름까지 다 나올 기세였다. 제럴드는 라파엘의 안전을 챙기면서도 교활하게도 라파엘의 앞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고 있었다. 그 간교한 짓에 짜증이 나면서도 왕은 순순히 어울려주었다. 그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어울려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상대를 처남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했지 않나. 내가 원하는 건 태후와 에드워드 라 쇼어라고.”

제럴드가 왕을 바라보다 말고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리…….”

사람들은 라파엘과 마리가 다르게 생겼다고 말했다. 쌍둥이인 그들이 닮은 점이 없다고. 하지만 제럴드의 눈에는 보였다. 그들은 분명히 닮았다. 이렇게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면, 라파엘의 위에 마리의 영혼이 겹쳐 보였다.

‘도와줘, 오빠.’

마리가 그렇게 애원했었다. 열여섯의 마리가 거기서 울고 있다. 긴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채, 울고 또 울었다. 제발 도와줘. 제발 도와달란 말이야. 누가 날 좀 구해줘. 마리가 손을 뻗었다.

“미안해, 마리.”

왕이 제럴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라파엘이 서 있었다.

“제럴드 라 쇼어?”

“그러려던 게 아니야.”

제럴드가 웃었다. 그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미치지 않았다. 거기 서 있는 게 라파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마리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거기에 있는 게 마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눈을 몇 번만 깜빡여 고여 있는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상대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리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거기에 마리가 있다고 믿고,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해, 마리.”

제럴드가 사과했다. 마리에게, 아니, 마리의 모습을 한 라파엘에게. 라파엘이 조용히 물었다.

“뭘?”

“널 왕세자빈으로 만들어서 미안해.”

왕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제럴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제럴드의 시야에서 마리 트리지아는 사라졌고, 제럴드는 라파엘을 향해 웃어 보였다.

“가끔 사람은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없어. 일하러 가야겠다, 라피. 실례했습니다, 전하.”

제럴드와 왕이 라파엘의 앞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 라 트뤼포아를 잡아와라, 근위대장.”

제럴드가 마치 교본에 나오는 것처럼 정확하고 우아하며 근사한 경례를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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