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신성한 내기의 결과
“뭐, 시작할까.”
스완 라 포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는 제발 이 바퀴벌레 커플의 주의를 돌리고 싶었다. 처음에는 인생 기구했던 형님의 행복을 바랐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슬슬 짜증이 차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형님의 태도도 가면 갈수록 신경질적이 되어가면서 스완도 더욱 참아주기 어려워졌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해버린 것은.
그러나 ‘시작한다’는 말에 왕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시작해?”
왕은 스완이 ‘사냥을’ 시작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왕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자, 스완이 지뢰를 밟았다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하는 라피.”
평소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면 지금은 독이 떨어질 것 같은 어조로 왕이 라파엘을 불렀다.
“예, 전하.”
“스완과 뭘 시작할 셈이지?”
라파엘이 잠깐 멈칫했다. 라파엘이 입을 가로로 다물자, 왕의 혀뿐만 아니라 눈에도 독이 서렸다.
“라피.”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왕은 라파엘의 무표정을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라파엘이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안 들어 있는 목소리로 “사냥을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반이나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거짓말처럼 들렸다. 스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왕이 그 소중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안네마리를 더 추궁하지 못하고 스완에게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예, 예.”
앓느니 뒈져버리죠―라고는 못 하고, 스완이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다 왕의 총이 덜컥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를 내자 정자세를 취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할 말도 못 하고 살아야 하는지 몰라, 스완이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와 라파엘 에반스는.”
“라파엘 에반스.”
왕의 목소리에 콧김이 서렸다. 자신의 비를 부르는 이름이 적절치 않다고 또 열받은 모양이다. 그의 냉혹한 성격은 세상의 단 두 사람만을 상대로는 사라지는데, 왜 한 사람을 상대로는 다정해지고 다른 한 사람을 상대로는 다혈질이 되는 걸까. 스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저와 라파엘 에반스는 신성한 내기에 합의했습니다. 주신 율레즈와 군신 쿠치아노의 이름에 걸고.”
왕이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사실이냐는 시선이었지만 라파엘은 그 시선을 읽어낼 눈치가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스완이 보다 못해 거들었다.
“에반스, 너는 나와 신성한 내기를 하는 데 동의했다, 그렇지?”
“그래.”
“증인은 누구지?”
왕이 팔짱을 꼈다.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왕은 내기에 시비를 걸어 중지를 시킬 작정인 모양이다. 왕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궁중 내에서 노련한 언쟁자인 스완이 “신성한 내기는 당사자의 합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라며 방어적으로 나왔다.
“왕인 내가 증인을 요구하는 경우는 다르지.”
“왕비가 인정하면, 전하의 인정을 받는 게 아니었습니까?”
스완의 말에 왕의 푸른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유산철이 섞여 있어 시원한 물처럼 보이지만 손을 대면 화상을 입는다는 코발트블루의 열탕처럼.
왕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너는 방금 라파엘 에반스와 신성한 내기를 했다고 하지 않았나?”
왕이 비꼬았다. 네가 감히 말로 나와 붙으려 들어, 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해서 스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들은 인생에서 아름답다고 감탄을 해대던 하늘인데 스완은 이상하게 하늘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전하, 저는 이 내기를 하고 싶습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눈치가 천치인 저 웬수가 웬일인가 싶어서 스완이 그를 바라보았다. 왕도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파엘이 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왜.”
왕이 물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사냥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겨야 한다’고 못 박고 있었다. 라파엘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왕이 바라보자 스완이 울컥한 얼굴로 라파엘을 쏘아보았다.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반쯤은 농담 삼아 친 고함이었는데 라파엘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라파엘이 스완을 돌아보았다.
“룰을 선언해.”
라파엘의 무표정이 평소보다 더 차가워졌다.
“시작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은 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라파엘의 검은 눈이 스완을 바라본다. 그 순간, 스완이 뒤로 움직일 뻔한 다리를 억지로 붙들었다. 스완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는 웃었다.
“사냥감이 된 기분인데.”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스완이 웃으면서 총을 빼들었다.
“네 사냥감도 이런 기분을 느끼겠지, 라파엘 에반스?”
무서운 형님의 무시무시한 눈길이 느껴졌지만 스완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라파엘에게 물었다. 지금만은 그 유명한 라파엘 에반스와 대등해지고 싶었다. 나중에, 아니, 평생을 형님에게 닦이고 닦여도 지금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한 번 뒤로 물러설 뻔했다. 지금은 야비하게라도 일단 허세를 부릴 타이밍이었다. 취조나 임무에 능한 군인인 스완 라 포다웠다. 하지만 라파엘 에반스는 늘 그렇듯 눈치를 스튜에 말아먹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인간 사냥감 말이야, 에반스.”
“죽고 싶구나, 스완.”
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차 그 목소리에서 알량한 형제애가 사라지는 걸 보고 아무리 허세고 나발이고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라파엘이 말했다.
“나는 내 타깃의 기분을 알지 못하지만, 아마 그들은 자신의 기분을 알기 전에 죽었다고 생각해.”
“「라파엘 에반스」가 노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 거 아니야.”
“그런 건 몰라. 난 나에게 노려지지 않으니까.”
그래, 너 잘났다.
스완이 얼굴을 구기면서 말을 탄 채 가볍게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좋아.”
스완의 목소리에서도 감정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몹시 사무적인 목소리로 스완이 ‘룰’을 선언했다.
“오늘의 사냥감인 사슴만이 유효해. 숫자로 세고, 숫자가 많다면 무게로.”
“…….”
“사냥만 유효해. 강탈은 무효야.”
라파엘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스완이 반응을 기다리자 라파엘이 그에게 물었다.
“……다야?”
은근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니까. 재수 없다는 점에서. 스완이 “다야”라고 대답하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말에 박차를 가해 사라졌다. 순식간이라 쫓아갈 틈도 없었다. 순간 스완은 자신도 모르게 남은 한 사람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왕이 말 위에서 라파엘이 이미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졸지에 버려진 왕을 보고 있자니 가엾고, 왕과 둘만 남겨진 이 상황이 두려워서 스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철컥.
총의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가 왜 관자놀이 옆에서 들리는 걸까.
‘무식하게 긴 총 같으니라고.’
왕이 1미터에 가까운 장총을 정확히 스완의 관자놀이에 대고 있었다.
“무슨 내기?”
왕이 물었다. 스완이 흘끗 라파엘이 사라진 방향을 보다 픽 웃었다.
“좋은 사모님 두셨습니다.”
“뭐?”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보고드린 거 기억나십니까. 이그나치오궁 앞에서, ‘그’ 서류를 빼돌리다가요.”
“그 서…….”
왕이 입으로만 웃었다.
“그 서류. 그래, 그 서류가, 뭐?”
“그 서류의 정체를 아셔야겠답니다.”
“그 서류와 안네마리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왕의 푸른 눈이 동화에 나오는 그믐달처럼 가늘어졌다.
“전하와 관계가 있어서겠지요.”
“나와?”
왕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스완이 왜 갑자기 순진한 척하시냐는 얼굴로 네 하고 대답해주었다.
“제가 전하를 배신하여 전하께서 위험에 빠지시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거죠. 사랑스러운 아내 아닌가요?”
“기어올라라.”
귀엽게 논다, 어? 싸늘한 어조. 하지만 어조와는 다르게 흐뭇하고 뿌듯한 얼굴이었다. 왕이 총을 거두자 스완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냐며 혀를 찼다. 그가 하늘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저도 사냥을 시작해야겠어요.”
“이길 생각인가?”
“그럼 「라파엘 에반스」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한 줄 아십니까? 게다가 이 내기엔 상품도 걸려 있다고요.”
왕이 팔짱을 꼈다.
“그 상품, 내가 줄 테니 그만둬.”
왕의 말에 스완이 퍽이나, 라며 코웃음을 쳤다. 왕이 그 웃음에 미간을 좁히자 스완이 “아아, 전하를 비웃은 건 아닙니다, 당연히”라며 손을 내저었다.
“단지, 그 상품은 전하께서 주실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게 흔하지 않지만, 없지도 않지요.”
그렇게 말하며 스완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저도 갑니다, 전하. 이쪽도 질 생각은 없거든요!”
이랴―! 스완의 외침이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왕은 팔짱을 꼈다. 스완은 왼쪽으로, 라파엘은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혼자 남은 왕이 왼쪽과 오른쪽을 한 번 번갈아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 채찍을 들었다. 그가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말이 북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늘 이렇게 되면 불쌍한 건 아랫사람들이라. 이제껏 몸을 숨긴 채 호위를 진행하고 있던 특수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여섯 명으로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두르고 있었으며 장신에 탄탄한 무인들이었다. 그중 한 남자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어, 어떡하죠?”
그들을 지휘하여야 할 대장은 내기에 정신이 팔려서 사라져버렸다. 대장도 대장이지만 그들이 지켜야 할 대상은 역시 국왕 부처. 그러나 왕비와 국왕이 갈라졌으니 둘을 어떤 비율로 지키러 가야 하는 걸까. 사실 원래대로라면 일단 왕비를 지키러 가서, 그녀를 데려와 국왕과 같이 있게 하는 것이 맞다. 아무래도 왕비는 무엄한 자들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심지어 지금은 ‘사냥 대회’가 아니던가. (왕과는 다른 의미로) ‘사슴인 줄 알았어요’라며 총을 쏘는 놈들이 나오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 왕비 전하는 사실 알고 보면 살인 기계고……, 온실 속의 화초 같은 귀족 나리들이 그 남자를 죽일 수 있다면 도리어 놀라울 따름이다. ‘그’ 기습에서조차 라파엘 에반스는 어둠을 틈타 적들을 제거하지 않았던가. 코르셋에 하이힐에 드레스를 착용한 상태로, 그는 잘도 다수를 상대해냈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상처도 입지 않았었다. 그런데 귀족 나리들이 에반스에게 상처를 입힌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역시 왕과 대장이나 지키는 게 현명한 것인가. 그래도 왕비이니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긴 해야 하나.
쯧, 어쩔 수 없지. 부대장은 결정을 내렸다.
“너.”
‘어, 어, 어, 어떡하죠?’라고 물었던 말단이 변 밟았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요?”
“그래, 너. 너, 비전하 쫓아가라.”
지금 비전하라고 입으로 말하고 속으로 살인 기계라고 읽는 그 인간을 저보고 쫓아가(미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뭘 잘못해서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길” 그는 입속으로 욕을 한 번 지껄인 다음, 미친 듯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부대장이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은 전하를, 나머지 두 명은 대장을 쫓는다. 우리는 당연히 호위를, 그리고 너희는.”
스완을 쫓을 나머지 둘에게 부대장이 말했다.
“대장이 호승심을 못 이겨서 모든 걸 잊게 두지 마. 대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수군의 대장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면 안 되는 사람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압니다.”
“좋아. 그의 정체가 들통 날 바에는 차라리 어깨에 화살이라도 박아버려. 가!”
두 마리의 말이 검은 옷의 사람을 싣고 바람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사라져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다.
결국 저녁이 되어 여성들의 앞에서 사냥감의 숫자와 무게를 세며 그녀들의 야유와 감탄을 받는 시간이 돌아왔을 때, 셋 중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왕이었다. 왕은 사슴을 한 마리 들고 와서는 툭 던졌다. 약한 모습이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예전의 왕은 이렇지 않았다. 최소한 두세 마리,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대여섯 마리씩 가져와서는 던지고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고갯짓을 했다. 무게를 재라는 그 얼굴에선 자랑스러움 따위는 콩 한 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걸 당연히 여겼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분위기였다.
“그 여잔 어디 갔을까요?”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그 여자?”
“있잖아요. 전하가 그렇게나 총애하는 제1왕비.”
“도대체 어디가 좋은 걸까. 단정하고, 또 치장하면 요염하긴 하지만, 왕후에 비하면.”
이제 왕후에서 다시 왕비로 격하되었지만 마리 트리지아에게는 ‘왕후’로서의 품위와 화려함이 있었다. 그리고 만년 소녀다운 천진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두가 인정했다. 마리 트리지아는 타고난 왕후였다.
“어? 어머?”
누군가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서 사람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스완 라 포가 걸어오고 있었다. 늘 그렇듯 유쾌하고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냥감들을 우수수 떨어뜨리는 그의 손은 평소와는 달리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아챈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양이 많네요, 포 경.”
누군가의 말에 스완이 하하 웃었다.
“이런 날도 있어야죠, 모가안 남작부인.”
스완은 웃으면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왕은 그가 누굴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마주쳤을 때 희미하게 고개를 저어주었다. 라파엘은 아직 오고 있지 않았다. 의외로 사냥은 어려웠던 걸까? 라파엘은 암살을 해본 적은 있지만 사냥을 해본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지금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왕은 언짢아졌다. 그까짓 서류 때문에 라파엘이 고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사냥터로 마차를 끌고 가고 싶었다. 씨발. 왕이 이를 갈았을 때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무시무시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디들에다 이미 말에서 내려서 무장을 푼 남성 귀족은 물론, 말에서 아직 내리지 못한 귀족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왕과 스완 라 포는 달랐다. 특히 스완은 노골적으로 달랐다. 스완이 얼굴을 확 구겼다.
그리고 멀리서 호위병이라고 소개된 주제에 얼굴을 제외한 온몸을 검은 천으로 친친 감은 라파엘이 제 몸보다 세 배는 큰 포대를 끌고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름답기는 정말 개뿔이. 스완은 다시 한 번 욕을 하면서 라파엘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마뜩찮은 얼굴로 보았다.
사냥감을 재는 커다란 저울 앞에 라파엘이 포대를 던지자, 노예들이 그 포대에서 사냥감을 줄줄이 꺼내기 시작했다. 큰 사슴, 중간 사슴, 작은 사슴. 사냥터의 모든 사슴을 그냥 쓸어 넣어 온 것 같았다. 끝도 없었다. 작작 좀 하지. 포대에서 줄줄 딸려 나오는 사슴들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리고 말았다.
라파엘이 바라보자 스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이라 왕이 유쾌하게 웃었다. 라파엘은 눈짓 언어 따윈 이해하지 못한다. ‘나중에’라는 간단한 고갯짓도 라파엘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왕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가볍게 라파엘의 머리칼을 쓸더니 거둬졌다. 그러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랑의 힘이라는 게 있긴 하구나.’
스완이 속으로 빈정거렸다. 저 둔치가 말을 알아듣다니.
그날의 승자는 라파엘 라 쇼어였다. 매일의 사냥 대회가 끝나고 열리는 파티에서, 사람들은 라파엘에게 달라붙었다. 사냥의 기술을 물어보는 사람들이나 그 경험을 묻는 남성 귀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과거를 묻는 사람들은 의외로 없었는데 그것은 첫째, 귀족 사회에선 무례한 일로 여겨지고 있고 둘째, 귀족 사회에선 과거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건 과거도 결백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대의명분이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라파엘을 잠깐 데려가죠.”
남성 귀족들을 헤치고 그들에게 둘러싸인 라파엘에게 다가간 스완이 싱글거리면서 라파엘의 어깨를 감쌌다. 멀리서 보고 있을 왕의 복장이 터질 일이지만, 이쪽도 지금 내기에서 져서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만큼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해야 할 판이었다.
라파엘이 스완에게 안긴 채 흘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특수군의 존재가 명확히 느껴졌다. 하지만 라파엘은 어째서 예전의 습격 사건 같은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분명 라파엘은 그때 특수군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완에게 이끌려 가든 하우스까지 오면서도, 라파엘은 내내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그 습격 사건 때 근위병의 존재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때 이곳은 거의 보호받지 못했다. 아까 라파엘은 사냥을 하면서도 특수군의 존재를 느꼈다. 설마하니 살인 기계를 잡기 위해 그를 쫓아다니는 건 아닐 테고―특수군이 그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를 잡기 위해 단신으로 나설 리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왕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랬다면.
특수군의 보호 아래 왕비가 있었더라면, 왕후도 특수군의 보호에서 제외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리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된 거라면, 특수군은 뭘 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들은 전문가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스완 라 포가 물었다.
그때 왕은 가든 하우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반쯤 흐뭇하고 반쯤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걷고 있었는데 전자는 라파엘에게, 후자는 스완에게 느끼는 것이었다. 이그나치오궁에서 조금 떨어져 가든 하우스에 거의 도착했을 때 라파엘이 물었다.
“나는 신성한 내기에 대해서 모르지만, 내기의 상품을 바꿔도 될까.”
라파엘의 말에 왕의 ‘반’ 흐뭇한 기분이 사라져버렸다.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야? 누군데, 그 새끼가? 왕이 안전장치를 풀지 않은 총의 방아쇠를 까딱거렸다.
“뭐, 패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스완 라 포가 웃었다. 그가 상품의 변경을 인정해준 것은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라파엘이 서류의 정체보다 더 관심을 두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가든 하우스에 왕이 들어가기 직전 라파엘이 물었다.
“특수군은 마리의 죽음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젠장, 안 된다고 했었어야 했는데. 이 호기심이 언젠가 날 죽이고야 말 거야. 라파엘이 스완을 올려다보았고, 스완은 마침 들어오는 왕을 바라보았다. 신성한 내기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율레즈와 쿠치아노가 보증하고 있는 신성한 내기였다.
“말해, 스완 라 포.”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땅은 신의 관리하에 있는 땅이니까.
“마리 트리지아 왕후, 이제 격하된 마리 왕비 전하는 자살했습니다. 근위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
“그러나 특수군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비전하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서류에 대해서도 말씀 올리자면.”
그렇게 말하면서, 스완은 라파엘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가 그러는 사이 특수군이 주변에 이 광경을 보는 엿보는 자가 있는지 철통같이 살피는 것은 물론이었다.
“서류는 근위대의 보고서입니다. 이그나치오에서 열람이 가능한 서류 중 하나였습니다. 마리 왕비 전하의 서류는 각 부서의 일정 이상의 직위에 있는 신하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을 겁니다. 왕비 전하, 즉 당시의 왕후 전하의 자살은 국가적으로 대단한 손실이었고 각 부처는 나름대로 업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열람을 허가한 것이었고요. 하지만, 그 이후에 약간의 문제가 발견되어서.”
“문제?”
“특수군은 아직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마리 왕비는 신발을 벗어놓고 자살했거든요. 실내화. 파란색.”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실족사로 인정되지 않고 자살로 인정된 것은 높은 창 앞에 왕후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파란색 실내화였구나. 라파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스완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왕비 전하의 옷차림은 분홍색 옷차림에 동일한 색 가운이었죠. 가운은 실외용이었습니다.”
가운이라.
라파엘은 그때를 떠올렸다. 분홍색 잠옷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가운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아마 보면서도 그게 가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완이 “그래서, 재조사 중입니다. 그게 다예요. 율레즈와 쿠치아노의 이름을 걸고 그게 답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결국 다 말했군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라파엘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두 개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잠옷…… 과 실내화?”
왕이 라파엘을 가볍게 당겨 안았다.
“친애하는 라피.”
그리고 사랑하는 안네마리.
왕이 작게 속삭였다.
“왕족이든 귀족이든, 여하간 궁중 사교계의 ‘여자’라는 인간은 절대로 그러지 않아. 너도 미래를 위해 알아두도록 해. 실외용 가운을 입고 실내화를 신지는 않아. 분홍색 옷에 파란색 실내화? 불가능하지. 그렇게 입을 바엔 차라리 굶겠다고 할 거야.”
마리는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누가?
라파엘은 충동적으로 왕을 마주 안았다. 왕의 허리를 바짝 안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왕의 심장은 뛰고 있다. 마리의 심장도 분명히 뛰던 때가 있었다. 라파엘 자신은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단 한 번 본 그의 분신.
울면서 뛰어들던 마리, 나부끼던 그녀의 긴 검은 머리채. 난생처음 조우한 감정이라는 이름.
“누군가가.”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그녀를 죽였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건조한 목소리.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그 머리에 코를 묻었다. 여장을 한 채 그를 안은 것도 좋았지만 남자 본연의 모습을 한 라파엘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조금씩 더 목이 말라간다. 빌어먹을, 신전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왕은 욕설을 지껄이며 라파엘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였다. 심장이 간질거린다. 그 향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둔갑해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주무른다.
“범인을 잡고 싶나?”
라파엘의 대답이 나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모르겠습니다.”
라파엘은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스완이 라파엘의 머리 가마를 바라보았다. 살인 기계는 조금씩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 왕비의 죽음에 대한 답을 원했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스완은 라파엘이 어디까지 알아냈을지 궁금해졌다.
“라파엘.”
라파엘이 왕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왕이 말렸다.
“우리, 정보를 교환하는 건 어떻습니까?”
라파엘은 왕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였다. 망설임은 짧았다. 그는 수단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특수군이나 왕의 정보는 확실히 필요했다.
“정보 교환이라.”
라파엘이 “좋아”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살인 기계와 특수군의 일시 연합이 이루어졌다.
왕은 팔짱을 꼈다. 그가 안네마리에게 빠져서 해롱대고 있는 동안 그의 안네마리가 모아둔 정보는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이 한 사람에게 빠져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게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언제나 유능한 인간을 좋아했다. 그리고 안네마리는 미치도록 사랑스러운데다 놀라울 정도로 유능했다.
“허리가 너무 당겨서 위험할 지경이야.”
왕이 노골적으로 말했고, 그 순간 회의실에 있던 모든 특수군병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바지춤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군병들은 열심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라파엘이 말을 마쳤다.
“여기까지야.”
왕이 라파엘의 말을 정리했다.
“프시스와 포의 과거 이름에 대해 적혀 있는 메모 하나, 비밀 열쇠인 깃털 펜. 비밀 열쇠는 에드워드 라 쇼어의 사무실 비밀 금고 열쇠였고, 둘의 과거 이름은 사실이었어. 둘은 창녀와 남창 출신이야.”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대답하자 스완이 바통을 받았다.
“너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왕이 팔짱을 풀고 라파엘의 머리칼을 더듬었다. 그 손이 다분히 욕구 불만처럼 보여서 라파엘과 왕 본인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또 그들을 외면했다. 왕이 라파엘의 목에 이를 세웠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은 스완의 어머니지.”
“‘새’어머니입니다. 후처라고요.”
스완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정했다.
“어쨌거나 어머니지. 나에게 태후처럼.”
“예, 예. 전하에게 태후처럼요.”
딱 그런 사이죠, 뭐. 스완이 중얼거리는 사이 시녀들이 남자들 사이를 오가며 찻잔을 놔주었다. 특수군을 대하는 그녀들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한편 특수군은 그녀들을 조심스럽게 대하지는 않았는데, 그녀들이 특수군에 의해 한 번 투옥당했던 기억에 조심스러워졌던 것과는 다르게 특수군은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아는 그녀들에게 조심스러울 필요가 없다는 기분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재스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17번가에서 영업을 했었습니다. 17번가의 유명인이었냐면, 별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인기는 있었지만 그녀만큼 인기 있는 아가씨는 꽤 많았어요. 비전하께서 모르실 스토리는 이겁니다. 포 백작, 즉 제 아버지는.”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당신의 어머니라는 것도 몰랐는데.”
눈치도 없고 말의 장단도 못 맞추고. 괴담을 풀어놓는 것처럼 은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던 스완이 쳇 하고 혀를 찼다.
“예, 예.”
그러면서 스완은 도대체 이 남자의 어디가 좋다는 겁니까, 라는 얼굴로 왕을 한 번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그 남자는, 절대로 창녀를 안을 남자가 아닙니다.”
“…….”
“절대로요.”
스완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내리깔았고, 스완과 왕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왕은 혹시 평생 평민으로 살았던 라파엘이 마음 상해할까 봐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애무해주면서도, 스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빈센트 라 포.
스완의 아버지인 그는 귀족 중에서도 극단적인 인물이었다. 왕이 대단히 싫어하는 부류였는데, 무능한 주제에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의 위에 섰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외모든 인격이든 능력이든 뭐든, 다 없어도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귀족이니까. 스완은 왕이 빈센트 라 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게시리.’
하지만 왕은 포 백작을 칠 수 없었다. 포 백작의 아들은 스완이었고, 왕은 자신의 이부동생인 스완을 아끼고 있었으니까. 빈센트 라 포가 아무리 왕을 긁어대도, 왕은 포 백작을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은 그 점에 대해서 스완의 직위를 지키고 그의 위장을 보호해 특수군 대장이라는 그의 본 직위를 지키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스완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은 스완의 작위를 지켜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재스민은 클레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후처가 되었죠. 물론 재스민은 아버지의 취향입니다만, 아버지는 평민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남자입니다. 비전하, 여기엔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개입?”
“이런 거야, 안네마리.”
왕이 말했다.
“누가, 재스민을 포 백작에게 소개시켜줬을까?”
“그게 마리가 죽은 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파엘이 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검은 눈은 순수하게 의문을 담고 있었다. 여동생의 죽음 외에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문득 왕은 불쾌해졌다. 그는 자신이 왜 불쾌해졌는지도 모르는 채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라파엘이 왕의 푸른 눈에 서린 냉기를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그러나 스스로가 왜 불쾌한지 왕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접고 달콤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마리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그녀는 메모지를 들고 있었다. 그 메모지가 살인범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면, 살인범은 그 메모지의 내용에 대해서 반응하는 자지. 감추려고 하든, 그 내용에 놀란 자든, 뭐든 간에. 우리는 그 내용을 따라갈 필요가 있지. 그 내용은 포와 프시스에 대해서 쓰여 있는 거니까. 즉 살인범은 그 내용과 무관하지 않은 자다.”
“그렇군요.”
“자, 나는 바이런 라 프시스를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에게서 소개받았다. 나는 프시스를 자작으로 만들어주었고 남작으로 격상시켜주었지.”
왕의 말을 스완이 이었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의 격상은 물론 포 백작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이루어진 거겠지요.”
라파엘이 왕의 입술과 손에 머리카락을 맡긴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폭죽이 터지고 있다. 여기는 문 플레이스도, 선 플레이스도 아닌 이그나치오궁의 침실이었다. 이그나치오궁 안에 있는 왕의 침실에서 라파엘은 창 밖의 어둠을 직시했다.
“우리는 에드워드 라 쇼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마 맞겠지요.”
스완이 어깨를 으쓱였을 때 라파엘이 단호히 말했다.
“제럴드.”
라파엘이 왕을 돌아보았다.
“전하, 제럴드를 불러주십시오.”
제럴드 라 쇼어?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둥이? 제럴드 라 쇼어? 스완의 미심쩍은 시선과는 달리 왕은 “제럴드 라 쇼어를 데려와라”라고 명령했다. 차를 마시고 있던 특수군 두엇이 일어서서 발코니로 움직였다. 신형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는 특수군의 모습을 시녀들이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목격했다.
“입을 놀릴 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왕비의 시녀들. 입을 다무는 길에 영광이, 입을 여는 곳에 지옥이. 격언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왕의 말에 시녀들이 “마음과 머리에 새겨놓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사이 왕은 라파엘을 안고 있었다. 라파엘은 안긴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파엘의 머릿속에 제럴드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제럴드는 경비대원의 제복을 빌려 입고 창녀와 놀아나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 선술집 홀에서 제럴드가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럴드가 곧 도착했다.
경비 중이던 제럴드가 들어오자 스완이 꺼림칙한 얼굴로 의자를 권했다. 제럴드가 왕에게 예를 취하고 의자에 앉자 라파엘이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럴드는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근육질의 건강한 몸, 순수하고 구김살 없어 보이는 표정. 라파엘의 시선을 따라 왕도 제럴드를 내려다보았다. 왕은 라파엘보다 훨씬 오랜 기간 제럴드를 지켜봐왔지만 최근 제럴드는 꽤 변해 있었다. 특히 우유부단했지만 그만큼 부드러웠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하긴, 이 녀석이 태후에게 반항하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왕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을 때였다. 라파엘이 움직였다.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공간을 띄엄띄엄 이동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제럴드의 앞으로 이동한 라파엘이 제럴드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제럴드.”
“라, 라피. 왜 이래.”
제럴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라파엘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라파엘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럴드의 크게 뜨인 보라색 눈을 들여다보면서 라파엘이 말했다.
“우리가 만난 곳이 17번가였어. 그렇지?”
라파엘의 말에 왕이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웃었다. 과연.
“너는 그때, 선술집에서 창녀와 놀고 있었어. 상대가 너를 부르던 이름을 기억해, 제럴드. 「제이」였지.”
“그, 그랬지. 그래서?”
아무래도 라파엘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제럴드가 어깨를 움츠렸다. 저 우유부단한 성격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있나. 상대를 바꿨을 뿐 여전한 모양이라고 왕은 속으로 웃었다.
그사이 라파엘이 말했다.
“어지간히 친해 보였지.”
엄마에게 혼나는 어린 남자애처럼, 제럴드가 우물쭈물 변명했다.
“친할 것까지야. 난 돈을 주고, 걘 뭐 걔 할 일을 하고. 그런 사이인데.”
라파엘이 제럴드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 포 백작에게 소개시켜준 사람이 너야?”
헉.
제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굴로 대답을 하는 건 유전인가 보다. 저 집안에 저런 핏줄이 있을 리가 없는데, 라고 왕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쇼어 공작부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녀가 그렇게 귀여운 여자였나. 쇼어 공작부인은 그가 알기로 사교계의 여왕이었는데. 저 태후와 대치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교계의 여왕.
도대체 어디서 온 피가 저렇게 아방한 아들들을 탄생시켰나. 왕이 의아하게 생각했을 무렵 라파엘이 물었다.
“에드워드가 시킨 건가?”
“미안해, 라피.”
제럴드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는 말할 수 없어.”
그러자 라파엘이 “귀찮게 굴지 마”라고 말했다. 마치 임신한 아가씨를 대하는 개망나니 같은 말투에 제럴드가 눈을 부릅떴다. 라파엘이 상의를 휙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왕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가 내리기도 전 제럴드가 손을 뻗어 라파엘의 옷을 확 내렸다.
“맙소사.”
제럴드가 중얼거렸다. 라파엘의 상체 가득히 새겨져 있는 고문흔을 1초라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럴드.”
“집안 전체의 명이야. 누구라고 할 것도 없어.”
“집안 전체?”
라파엘이 물었지만 제럴드는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의 시선이 흘끗 제럴드의 발바닥으로 향했다. 어어, 스완이 고개를 저었다. 특수군의 대장으로서 그도 종종 고문을 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라파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라파엘은 고문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발바닥부터 껍질을 벗기는 고문이다. 대체로는 무릎에 도착하기 전에 항복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완은 지금은 그게 좀 불합리하다고 여겨졌다. 지금은 제럴드가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저 라파엘이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침묵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 살인 기계 왕비 사슴의 수발을 들어야 하나.
스완은 한탄에 한탄을 거듭하면서 입을 열었다.
“태후, 공작, 소공작을 의미하는 겁니다. 수호자, 가주, 차세대 가주지요.”
“마리가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넌 알고 있었어?”
라파엘의 질문에 제럴드가 피식 웃었다.
“라피.”
제럴드의 목소리가 탁하게 흐려졌다.
“귀족 사회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없지. 마리가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거, 네가 안네마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 쇼어가의 저택이 불탄 건 저기 계시는 전하와 특수군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거. 전부, 다들 알고 있어. 여긴 그런 세계야. 사실은 ‘모른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다들 그렇다고 생각해. 하지만 물증이 없어. 그리고 명분이 있지.”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 제럴드.”
다른 나라의 말을 듣는 것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라파엘는 멍한 얼굴로 제럴드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제럴드는 쓰게 웃었다.
라파엘은 이해하지 못한다. 귀족들의 자부심과 의무, 그리고 그들의 약하면서도 비열한 모습을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다. 아마 그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라파엘. 나는 이해시킬 수 없어.”
제럴드가 손을 뻗어 라파엘의 뺨을 매만졌다.
“안타깝게도 아마 평생 안 될 거야. 나의 라피.”
저게 미쳤나.
스완이 우애에 빠진 나머지 세상에서 가장 질투심이 많은―심지어 현재 욕구 불만에 빠진―남자의 존재를 잊은 제럴드를 보며 혀를 찼다. 나의 라피? 근친이 횡행한 이 귀족 사회에서 지금 이 장면은 왕의 온갖 내장을 배배 꼬이게 할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왕이 총을 난사하기 전에 스완이 슬쩍 왕과 라파엘의 사이를 막아섰을 때였다. 방 안에 있던 전원의 얼굴에서 표정이 확 사라졌다. 라파엘이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살기가 발코니 밖에서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를 겨누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왕일 것이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라파엘이 스스로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허벅지에서 나온 대거의 개수는 다섯이나 되었다. 살인 기계의 명성이 아깝지 않다고 특수군병들이 혀를 내둘렀을 때 라파엘이 대거를 던졌다.
발코니의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져 내림과 동시에 스완이 왕을 안고 바닥으로 엎드렸다. 특수군도 일제히 근처에 있는 시녀들을 안고 바닥으로 엎드렸다. 라파엘이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라피!”
제럴드가 고함을 쳤지만 라파엘은 이미 시야에서 벗어난 뒤였다.
“안네마리!”
왕이 비명을 지르며 쫓아가려 했지만 스완이 뒤에서 붙잡았다.
“이거 놔!”
왕이 거칠게 그를 뿌리쳤다. 하지만 스완도 필사적이었다. 한 번 떨어지는 듯했던 스완이 재빨리 그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전하.”
“놓으란 말이다. 그가, 안네마리가!”
“그를 믿으십시오, 전하. 그입니다, 그입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지만, 그 남자입니다. 그가 잡으려 마음먹는다면 여기의 누구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일 것입니다! 전하도 그를 잡아보시지 않았습니까? 함정이 아니라면 절대로 못 잡습니다, 절대로요!”
왕이 몸부림치자, 스완뿐만 아니라 특수군 전원이 왕의 사지에 매달렸다. 혹시나 이그나치오궁 근처에 매복하고 있는 살수가 있다면 왕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왕의 몸부림이 멈추자 그의 사지에 매달려 있던 특수군병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제럴드 라 쇼어가 방을 뛰쳐나갔다. 곧 근위병이 횃불을 대낮처럼 밝혔다. 어둠이 물러가자, 왠지 더 불안해졌다. 왕이 스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왕이 냉혈한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짓을 할 인간이라면 많습니다. 전하께서는, 외람되지만 지금 적을 너무 많이 만드셨습니다. 그 점은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원래 전하께서는 적의 숫자를 좀 조절하셨지만, 아시잖아요. 쇼어가를 친 건 폭탄을 터뜨리신 것과 같았습니다. 이건 그 부작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짓을 할 후보의 이름은?”
“대귀족 중에서 하지 않을 후보의 이름을 대는 게 더 빠르겠지요. 그나마도 두셋이 전부겠지만요.”
워낙 인기 만발이시잖아요. 주로 나쁜 쪽으로.
스완이 반은 농담으로, 반은 염장을 지르듯이 말했고 왕이 흥 코웃음을 쳤다. 그사이 라파엘이 보기 드물게도 찌푸린 얼굴로 돌아왔다.
“안네마리?”
왕이 굳은 얼굴로 그를 불렀다. 당장 튀어나간 그에게 화가 났으면서도 일단 무사하게 돌아온 그가 다행스러운, 복잡한 마음에 얼굴이 굳은 상태로 풀리지 않았다.
스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다친 건 아니죠?”
이제 더는 왕의 히스테리를 감당할 수 없는 동생이자 신하의 가여운 질문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왕이 “왜 그래?”라고 묻자 라파엘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리지 못했습니다.”
아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은 정말 살수를 잡아낸 것이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살수가 잡히기 전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