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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사냥 대회 (15/47)

제14장 사냥 대회

왕비가 왕의 말 등, 왕의 앞에 앉아 나타났을 때 남성 귀족들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사냥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자들은 멀리서 기다리기나 하고 총에 작은 리본이나 매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앞에 왕이 라파엘을 안고 나타나자 다들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까 포 백작이 충언이랍시고 간섭했다가 ‘너나 잘해, 이 새끼야. 거시기에 총알 박히고 싶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돌려 듣는 바람에 아무도 더는 불평을 토해내지 못했다. 왕은 그들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즐기는 표정으로 라파엘의 귓가에 키스하며 가볍게 말을 타고 내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이렇게 따뜻한 날씨에 사냥 대회를 여는 것도 처음이군.”

왕의 말에 귀족들이 쓰게 웃으면서 멀리 여성들이 있는 곳에서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태후를 힐끔거렸다. 6년간 일절 나타나지 않던 태후가 거기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쇼어가의 여자로 태어나 한때 왕을 누르고 절대 권력을 가졌던 여자였다. 아니, 이제는 그녀의 권력이 타인에게 이양되었는지 아니면 잠깐 그녀가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것에 불과한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암호랑이와 수사자의 눈치를 살피는 육식동물들의 모습을 보며 스완은 말 위에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이 전쟁에서 왕이 이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1년 전만 해도 왕이 쇼어 가문을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던가. 그러나 왕은 해냈다. 그리고 이제 쇼어 가문에 남은 것이라고는 저 여자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저 여자를 고꾸라뜨릴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스완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가볍게 숨을 갈무리했다. 아직은 표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때 스완은 왕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라파엘 에반스. 당대 최악의 살인마라고는 할 수 없어도 당대 최악의 살인마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살수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구슬처럼 감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들어가 있지 않는 눈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다. 저 눈은 왕을 바라볼 때가 아니면 도무지 감정을 담지 않는다. 너 따위에겐 감정을 담지 않는다는 거야, 뭐야. 참 가지가지 하는 커플이에요, 아주 장도 꼬이게 노는 바퀴벌레 한 쌍이라니까, 대충 하고 헉헉 해라, ‘난 왕이니 수발을 들어라’와 ‘아싸.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로구나. 왕 하나 잡아 출세해보세’면 되겠구만, 지들이 무슨 사춘기 소녀인 줄 알아요―까지 스완이 생각했을 무렵, 라파엘의 시선에 뭔가가 담겼다.

어?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중에 잠깐 보자는 시선이었는데, 왕비가 그를 보자고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 왕비의 시선은 용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완이 자신을 가리키려는 찰나였다.

멀리서 말굽 소리가 전력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굳혔다. 스완이 라파엘의 차가워진 얼굴을 보고 그 시선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라파엘보다 약간 늦게, 그의 눈에 상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반쪽이나 날아간 루 라 트뤼포아 후작이었다. 좀 늦었군. 스완은 별거 아닌 일에 라파엘이 왜 얼굴을 굳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그를 향했다.

“안네마리?”

왕이 불렀지만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루를 직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 여우는 내 것인데.”

그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루의 손에 잡힌 은여우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파엘이 팔짱을 끼고 말하자 루가 입술을 올렸다.

“당신이 두고 간 여우지요. 병원비는 제가 지불했으니 저의 여우입니다.”

라파엘의 시선이 흘끗 근위병 하나의 허리춤에 닿았다. 스완의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라파엘의 시선은 아주 잠깐 움직였을 뿐이지만, 스완은 라파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라파엘의 얼굴에서 감정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왕이 라파엘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라파엘의 검은 눈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전하.”

라파엘의 말에 왕이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여우냐.”

라파엘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 여우는 왕의 여우였다. 왕은 알지 못하지만. 라파엘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왕이 라파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때 루가 은여우를 든 손을 치켜들었다. 라파엘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루의 손이 크게 반원을 그렸다. 은색 털 뭉치가 허공을 날아가는 것을 라파엘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왕이 허공에 총을 쐈다.

그와 동시에 환호성과 함께 수많은 말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사냥 대회가 시작된 것이다. 왕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가자!”

왕의 백마가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왕은 정확히 은여우가 떨어진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라파엘이 왕을 돌아보자 그가 웃었다.

“너의 여우라면 잡아야지.”

라파엘이 아무런 말이 없자 왕이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너의 여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너의 여우로 만들어주겠다.”

초봄이지만 아직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라파엘은 말없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이 한쪽 팔로 라파엘의 허리를 단단히 안은 채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재촉했다. 왕의 말이 덤불을 몇 개나 건너뛰었다.

“전하의 여우라고요?!”

어느새 트뤼포아가 가까이 근접해 있었다. 루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요!”

루 라 트뤼포아는 상당히 거구였다. 덩치로 치자면 제럴드 라 쇼어 못지않으리라. 제럴드나 루와 키는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늘씬한 왕이 총구를 겨누었다. 놀고 있네. 왕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사냥 대회에선 이런 식으로 정적을 처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처리되고 싶지 않다면 근처에 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왕 자신도 몇 번이나 총을 맞을 뻔했고, 또 몇 번이나 누군가를 쏘았다. ‘사냥감인 줄 알았다’는 변명이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게 이 대회 주간이었다. 그런데 총의 컨트롤로는 역대 제일이라는 왕의 곁에서 나란히 달리다니, 루 라 트뤼포아는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었다. 왕이 총을 겨눈 순간이었다.

라파엘이 고삐를 잡고 있는 왕의 손을 움켜쥐었다.

“안네마리, 위험해!”

왕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지만 라파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왕이 아슬아슬하게 고삐를 틀었다. 말이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위험하게 방향을 튼 순간 총성이 들렸다. 아주 가까웠다. 왕이 본능적으로 라파엘을 품 안에 잡아채 안았다.

트뤼포아의 말이 비명을 지르며 솟구쳤다. 트뤼포아가 허공에 던져진 순간, 라파엘이 왕의 안장에 걸려 있던 채찍을 잡아채 허공에 질렀다. 채찍 끝에 간신히 트뤼포아의 몸이 걸려, 물고기처럼 허공에서 낚이는 광경을 왕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트뤼포아는 워낙 건장한 남자였기에 중간에 그 무게를 못 이긴 채찍이 끊어지는 바람에 땅으로 떨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낙마로 떨어지는 것에 비하면 훨씬 가벼운 통증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임을 왕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정말 그 라파엘 에반스이긴 하군.’

왕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안고 있는 이 파리한 남자가 그 살수라는 걸 자각했다. 그러자 손끝이 뜨거워졌다. 왕은 기본적으로 남자다운 타입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마초를 좋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남자다운 남자를 안는 걸 좋아했다. 라파엘이 방금 보여준 모습은 왕에겐 상당히 매력으로 다가왔다. 하긴, 라파엘의 뭔들 왕에게 매력이 아니겠느냐마는.

“제럴드.”

라파엘이 조용히 중얼거려 왕이 고개를 돌렸다. 제럴드 라 쇼어가 흑마 위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가 든 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총을 쏜 건 제럴드인 모양이다. 제럴드 라 쇼어가 나를 노렸나. 왕은 여상하게 생각했지만.

“명하시면, 체포하겠습니다.”

제럴드 라 쇼어는 왕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럴드 라 쇼어를 쏘고 그 집안을 무너뜨린 건 왕이었다. 제럴드 라 쇼어의 입장에선 트뤼포아 후작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도 시원치 않을 판국이다. 그런데 체포라니.

저게 총을 맞고 머리가 잘못됐나. 왕이 생각했을 때 트뤼포아가 왕의 생각을 대신하듯 물었다.

“제럴드 라 쇼어, 너 미쳤어?”

“명하기만 하십시오. 저 새끼든, 태후든, 에드워드든, 전부 체포하겠습니다.”

제럴드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미쳤나 본데. 왕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제럴드가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총에 맞았고, 여전히 드레스를 입은 채 여자처럼 안겨 있어야 하는 가여운 남동생을 바라보던 제럴드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윽고 제럴드가 말했다.

“그러니까 라피, 아니, 안네마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제럴드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집안은 몰락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마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러나 그들의 몰락은 이미 끝났으니 그가 어찌할 수 없으리라. 에드워드는 구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가 그렇게 된 건 아버지와 에드워드, 그리고 저 멀리 있을 태후의 탓이었다. 제럴드는 마리를 그렇게 만든 누구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가여운 어머니. 불쌍한 마리. 이미 죽은 사람들. 제럴드는 이제 산 사람을 구하고 싶었고, 그가 구할 사람은 오로지 라파엘뿐이었다. 그는 굳게 다짐했다. 라파엘을 위해서라면, 저 불쌍하고 불쌍한 동생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다녀오겠다고. 악마의 발이라도 핥겠다고. 그 마음은 참으로 대견한 것이었지만.

‘네가 뭔데 안네마리를 잘 부탁하고 말고 지랄이야.’

왕의 심사가 꼬이고 말았다. 놈이 잘 부탁하지 않아도 그는 안네마리를 대단히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졸지에 놈이 애걸해서 인질을 존중하는 꼴이 되었으니 심사가 꼬이지 않겠는가. 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네가 뭔데 라파엘을 잘 부탁하고 말고야!”

이제껏 단 한 번도 왕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트뤼포아가 또다시 왕의 마음을 대변하듯 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왕은 트뤼포아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불쾌감에 혀를 찼다. 그때 라파엘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자신을 두고 잘 부탁한다는 둥 두고 봐야 안다는 둥 하고 있는 세 남자는 그대로 둔 채 라파엘이 또각또각 걸었다. 하이힐이 흙바닥에 동그란 자국을 찍어내는 것을 보며 라파엘보다 키가 크고 덩치도 큰 세 명이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라파엘이 덤불 뒤로 가서는 쪼그리고 앉더니 조금 뒤에 걸어 나왔다.

“아.”

셋이 동시에 맥없이 신음했다. 라파엘의 손에는 은여우가 들려 있었다. 라파엘이 은여우를 한 손으로 안은 채 왕의 말에 올라탔다. 긴 드레스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은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저는 당신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압니다, 라파엘.”

루 라 트뤼포아가 말했다.

“은여우는 그저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생각도, 당신의 행보도 누구보다 빨리 알게 될 것입니다. 라파엘, 저를 밀어내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될 것입니다.”

루의 말에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그 비극적인 분위기를 망친 건 이제까지 일단 두고 보던 왕이었다. 왕이 웃음을 터뜨리며 라파엘의 입을 막았다. 커다란 손으로 라파엘의 입을 막은 왕이 웃으면서 유들유들하게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왕의 말에 루 라 트뤼포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왕이 말 위에서 가당찮다는 얼굴을 했다.

“감히, 너 따위가, 내 비의 적씩이나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웬만큼 웃기는 소리를 해야 웃질 않지. 왕이 이죽거리자 트뤼포아가 무시무시한 눈을 했다. 그래봐야 왕은 그저 픽, 코웃음을 한 번 친 게 다였지만.

“웃기고 자빠졌다. 너는 이제껏 나를 고꾸라뜨리기 위해서 참 많이 노력했었다, 트뤼포아. 그래서 네가 얻은 게 뭐지? 잃은 것만 있지 않은가. 얼굴 반쪽, 팔 하나, 별장 둘, 아아, 여자 하나도 있지.”

왕의 말에 루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왕이 비열하게 웃었다.

“내 안방에서 지랄을 떨고선 내가 모르길 바라다니, 꿈이 크구나.”

“알고 있었…….”

트뤼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걸 보면서 라파엘이 그와 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루를 1년이 넘게 봐왔지만 한 번도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트뤼포아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따뜻한 초봄의 햇살이 남의 일처럼 비추었다. 라파엘의 시선이 제럴드에게 닿았다. 제럴드도 당황한 듯 보였다.

“이, 이 개 같은 자식.”

트뤼포아가 노성을 터뜨렸다.

“이 비열하고 더러운 자식! 넌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트뤼포아가 달려왔다. 낙마 도중 총을 잃어버린 트뤼포아가 달려와 왕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왕의 총구가 먼저 트뤼포아의 이마에 닿았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트뤼포아의 이마에 닿은 총이 움직이기 직전 왕은 시선을 흘끗 움직였다. 라파엘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태에 당황한 얼굴이다.

“안네마리.”

이 자리의 모두는 라파엘의 본명을 알고 있었지만, 왕은 그를 본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일을 저질렀어. 비열하고 더러운 건 사실일 거다.”

“…….”

“그렇다고 해서, 네가 도망칠 수는 없겠지만.”

유감이지?

왕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쓸쓸하지 않았다. 왕은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전혀 유감이라고 생각지 않는 듯했고, 라파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눈을 가볍게 깜빡이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전하의 과거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저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왕의 금발이 햇빛에 비쳐 사르르 빛났다. 마치 녹을 것 같다. 라파엘은 햇빛에 반짝이는 왕의 머리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녹으면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말을 이어야 하는 것 같아서 잇고 있었지만 사실 별로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그 순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괜찮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왕이 그래, 그래―라고 웃으면서 총을 거두었다. 왕이 손을 까딱거리면서 제럴드에게 말했다.

“잘되었군. 그래, 쇼어 근위대장. 너에게 명한다. 루 라 트뤼포아를 체포해라. 죄명은…… 음.”

“반역죄로 할까요?”

제럴드의 질문에 왕이 “그거 괜찮군”이라고 대답했다. 트뤼포아가 입을 열려다 왕의 품 안에서 은여우를 안고 있는 라파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루 라 트뤼포아는 귀족이었다. 왕족인 왕이 왕비를 안기 위해 신전에서 합방일을 받는 데에 연연하듯이 귀족인 트뤼포아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옛 여자의 말을 들먹일 수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비실용적이지만, 그것이야말로 귀족적인 것이었다.

제럴드에게 체포당한 트뤼포아가 절절한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을 먼저 사랑한 건 자신이었다. 왕이 아니었다. 저 비열한 개자식이 아니었다. 라파엘을 필요로 하는 건 왕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지상 최고의 권력자이자 부자인 헤수스의 왕이 아니라, 팔과 외모와 사랑을 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라파엘은 왕의 품에 안겨 연행되는 자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트뤼포아가 절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당신을 필요로 하는 건 접니다. 왜 그걸 모르는 겁니까. 여기에,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내가 있는데.”

트뤼포아가 절규했다. 아아악―, 그렇게 절규하는 트뤼포아를 끌고 가며 제럴드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왕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라파엘을 보며 제럴드가 한숨을 쉬었다. 넌 도대체 왜 이딴 놈들만 불러들이는 거냐. 왕은 말할 것도 없는 비열한 놈이고, 트뤼포아……. 얼굴이 날아가기 전에는 그 대단한 외모나 있었지, 이젠 외모도 없는데. 심지어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널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나니까 날 좋아해야 한다’는 한심한 놈이라니. 좀 멀쩡한 여자까지는 안 되어도 멀쩡한 남자라도 어떻게 안 되겠니.

제럴드는 한숨을 쉬며 트뤼포아를 연행하다가 귀찮아지자 수도로 내려쳐 기절시킨 뒤 질질 끌고 가버렸다.

사냥 대회 둘째 날, 왕은 여전히 왕비와 동행했다. 아이보리 드레스를 입고 붉은 모피 숄을 두른 왕비는 왕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귀족들은 험악한 뒷말을 주고받았지만 왕비의 앞에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둘째 날 아침에는 왕명에 의해 티파티가 없었지만, 티파티가 없었기에 문 플레이스에는 전날 아침보다 더 많은 선물들이 들이닥쳤다. 진귀한 선물들이 수도 없이 밀려들었다. 코끼리를 비롯한 동물부터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들, 실크를 포함한 천들까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왕은 필경사를 따로 보내서 문 플레이스에 들어온 선물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왕이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진 다음에야 라파엘에게 물었다.

“어제 보니 채찍도 쓸 줄 알던데, 검 말고 또 쓸 줄 아는 것이 뭐가 있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총 말고는 다 쓸 줄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왕이 “진정 무인이로구나”라고 말하며 그 뺨에 몇 번이고 키스했다. 오늘 같이 동행한 스완 라 포가 정말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진주 액세서리 세트를 착용한 우아한 왕비에게 ‘진정한 무인’ 운운하는 왕과, 왕이 아름답다 얼굴을 비벼도 무표정, 진정한 무인이라 칭송해도 무표정한 라파엘의 대비를 보기가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총 말고 다라. 검하고 채찍…… 창이나 봉도 쓰느냐?”

“활이나 암기도 쓸 수 있습니다.”

“정말 총 말고는 다 쓰는구나.”

기특해 죽겠다는 목소리다. 제발 동행한 동생―겸 부하―도 좀 생각해주세요. 스완은 지끈거리는 위를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개들이 짖는 소리가 멀리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냥개들이 사냥감을 모는 소리였다.

“어디, 솜씨를 한 번 보여주려느냐.”

왕이 은근히 권하자 라파엘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기가 없습니다만…….”

라파엘이 대답했을 때 사냥감이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의 사냥감은 백노루였다. 은여우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흔치 않은 사냥감이었다. 놓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스완이 총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안은 채 물었다.

“총을 쏴보겠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저는 총을 쏘지 못합니다, 전하.”

백노루가 거의 가까이 왔는데 왕과 라파엘은 딱 붙은 채 속닥거리고만 있었다.

“그래?”

“예. 저는 마리와 쌍둥이니까요. 마리에게 신력이 갔으니 제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렇지. 그럼 내가 내 총을…….”

더는 참지 못하고 스완이 나섰다.

“아, 제가 잡습니다. 제가 잡으면 될 거 아닙니까. 제가 잡겠습니다, 제가 잡는다고요.”

스완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왕의 앞으로 나섰다. 스완이 왕의 것보다는 훨씬 짧지만 그래도 제법 긴 총을 두 손으로 들고 사냥감을 겨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가는 백노루를 따라 검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쾅―소리와 함께 스완의 몸이 뒤로 가볍게 흔들렸다.

펄쩍펄쩍 뛰던 노루가 한순간에 땅으로 고꾸라졌다. 사냥개들이 일제히 그 앞에서 짖어대기 시작한다. 노예들이 달려가서는 사냥감을 확인하는 것을 본 왕이 이죽거렸다.

“남의 사냥감을 가로채긴.”

“지켜드린 거죠, 가로챘다니요.”

스완의 말에 왕이 말없이 코웃음 쳤다. 왕과 라파엘, 그리고 스완은 곧 사냥터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사냥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냥을 한 건 왕과 스완이었고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세 명은 꽤 낭만적인 일행이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 흑발을 가진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남자 한 명의 품에 안긴 채 그들은 사냥터를 질주하며 피를 보았다.

문득, 라파엘은 사냥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일몰을 확인한 라파엘은 시선을 들어 왕의 동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스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라파엘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어.”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갑자기 고개를 휘청거리면서 제대로 걷지 못하기 시작했다. 스완은 몇 미터 앞에서 혀를 내둘렀다. 아마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는 라파엘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스완과 시선을 마주한 채 손을 움직였다. 라파엘은 두 가지를 노린 것이다. 첫 번째는 왕을.

“왜 갑자기 이러지? 전혀 움직이질 않는데. 이런, 이런. 안네마리, 이러다 다치겠어.”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을 안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라파엘이 얌전히 왕에게 안긴 채로 스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특별한 적의가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라파엘은 스완에게 용건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정확하군.’

무섭도록 정확하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라파엘의 희고 메마른 손가락은 수천 번은 해본 것처럼 움직였다. 손가락은 말의 목, 한 지점을 제대로 눌렀다. 말은 바로 쓰러져서 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다. 섬세하고 예민한 동물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눈을 깜빡이며 휘청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쟀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특수군 중에서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과연 스완 자신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왜 갑자기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쓰러지는 거지.”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약간 휘청거릴 뿐 멀쩡하던 말이 갑자기 옆으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왕이 스완을 바라보았다.

“…….”

평소라면 스완이 자신의 말을 왕에게 건네고 말을 구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순간, 라파엘 역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적의는 아니지만 살기 어린 눈. 문득 스완 라 포는 깨달았다. 라파엘 에반스는 그에게 용건이 있다.

그리고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그와 검을 겨룰 마음도 있다.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와 검을 겨룬다?’

스완은 무인이었다. 그는 군인이었고, 심지어 특수군이었다. 자신의 입장상 그는 스스로의 실력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고, 자신의 이름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알고 싶어했고, 남자라면 가질 명예욕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 에반스와 겨루는 기회가 온다?

당연히, 당연히, 온몸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러려면.’

스완은 흘끗 자신의 형님을 살폈다. 라파엘 에반스를 목마른 사슴쯤으로 아는, 눈이 단단히 삔 저 형님을 어떻게든 쫓아 보내야 검을 맞대보기나 할 텐데.

스완의 머리가 미친 듯한 속도로 돌아갔다.

“안네마리, 괜찮느냐? 그 둔한 심장이 놀라지는 않았느냐, 응?”

왕이 놀리듯이 물으며 라파엘을 고쳐 안았다. 라파엘은 예전보다 훨씬 가벼웠고, 그 사실이 왕을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내몰았지만 왕은 내색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다시 무거워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진미를 이 무뚝뚝한 손과 입술 아래 들이밀어줄 것이다.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하지만 얼굴은 놀란 것마냥 허옇구나. 이거 어디 데리고 다니겠느냐. 허여멀개가지고 남들이 보면 내가 잡으러 다니는 사냥감이 저기 도망치는 것들이 아니라 너인 줄 알겠다. 어째 안색이 이토록 돌아오지 않느냐.”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이 두 손으로 라파엘의 뺨을 감쌌다. 그러면서 왕이 흘끗 스완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서 가서 말을 끌고 오지 않고 뭐 하느냐는 얼굴이라 스완이 혀를 찼다. 정말 가지가지 하십니다. 스완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억누르면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무표정하고 무감동하고 무의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얼굴 어디가 예쁘다고 그의 형님은 저렇게 애절복통하시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그건 그렇고.

“전하.”

스완은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신중히 말을 걸었다.

“왜.”

왕이 라파엘을 살피다 말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스완을 돌아보았다.

“전하께오서 움직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두 분이서 같이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스완의 말에 왕의 시선이 스산해졌다.

“안네마리를 노리는 놈들이 있을 거라는 뜻이냐?”

“그것도 여러 곳에 있겠지요. 반왕파 인물들은 정통파 왕비인 비전하를 노릴 것이고, 높은 여성분을 위시한 보수파는 비전하를 인질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이 추대했지만, 그 진실을 전하께서 터뜨리실까 봐 두려울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전하께오선 대귀족을 적으로 돌리셨습니다. 여러모로 두 분이 같이 계시면 한꺼번에 처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왕의 굳은 표정에 스완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왕이 이 자리를 뜨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껄이는 소리였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왕비는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보수파의 마스코트 같은 인물이었다. 쇼어 가문 출신이지 않은가. 반왕파―군주주의를 반대하는 대귀족들이 주를 이룬다―는 그 마스코트를 깨부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파 또한 그러길 바랄 것이다. 최소한 내부 사정을 아는 몇몇은 분명히 그러길 원할 것이다. 라파엘의 정체―쇼어 가문 인물이지만 마리의 쌍둥이 오빠. 저주받은 인물이고, 더욱이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인데다 왕을 속이고 궁을 들쑤셨던 그 검은 여우―를 안다면 더더욱. 보수파의 수치니까.

왕이 혀를 찼다.

“빌어먹을, 그 욕심으로 뒤룩뒤룩한 얼굴들을 엿 먹이는 게 재밌긴 했었는데. ……곤란하게 됐군.”

사실 ‘라파엘 에반스’인데 곤란은 무슨 얼어 죽을 곤란인가 싶었지만, 스완은 말하지 않았다. 왕은 사랑에 빠져 있었고, 그의 눈에 라파엘 에반스는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사슴 닮은 연인일 뿐 살인 기계가 아닐 테니까. 남자란 그런 동물이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상대가 객관적으로 어떤 인물이든 사랑스럽게 보이면서 보호해주고 싶어하는 동물.

더불어서.

“다녀와야겠군.”

머리도 좀 나빠지고.

조금만 더 생각하면 금세 알 수 있을 텐데 상대를 중심으로 생각하느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저 똑똑한 형님도 어쩔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자 스완은 그에게 친근감이 들었다.

“다녀올 테니 스완과 있어라.”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 손이 처음에는 부드러웠는데 두어 번 만에 에로틱하게 변하는 걸 보면서 스완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사랑에 빠진 사내란 저렇지. 상대가 어떤 인간이든 사랑스러워하고, 보호해주고 싶어하고, 객관 따윈 물에 말아 먹어버리고, 상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그리고.

그렇게 잘해주고 싶어하면서도 질척하게 울리고 싶어하고. 아, 진짜 너무 티 난다.

“예, 전하.”

사실 도리어 인간답지 않은 건 저쪽이 아닌가.

스완은 라파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가 작고 창백한 남자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모르겠는 남자는 여러모로 아리송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인간인지 기계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선인인지 사신인지. 어느 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그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섬뜩한 감상을 준다.

“그럼…….”

“전하는.”

드물게도, 떠나려던 왕을 라파엘이 붙들었다. 왕이 움직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응?”

“전하는 위험하지 않으신 겁니까?”

라파엘의 무심한 검은 눈을 보고 왕이 픽 웃었다. 그 검은 눈에서 왕은 남들은 찾아낼 수 없는 동요를 읽었다. 한없이 둔한 주제에 제가 뭐라고 라파엘은 왕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제가 라파엘 에반스에 살인 기계여 봐야 그는 귀족도 왕족도 아니었다. 궁중 사교계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남들이 눈앞에서 대놓고 빈정대도 저 무심한 눈으로 멍하니 있기 일쑤였다. 백치 같은 얼굴로 바이런 같은 놈에게서 있는 모욕, 없는 모욕 패키지로 당하고 있던 주제에 그래도 제 남편이라고 왕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남편. 배우자.

좋은 어감이었다. 세상이 공인하는, 절대적인 곁붙이.

‘쇼어 가문 새끼들은 딱 질색이지만, 그래도 하나는 인정해야겠지.’

그들은 라파엘의 혈육이고, 라파엘을 낳았으며, 심지어 라파엘을 이 궁으로 들이밀었다. 왕은 평생 쇼어 가문의 존재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할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은 왕에게 라파엘을 선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양이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라파엘은 왕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흔한 웃음 한 번 없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도무지 애교 하나 없는 연인이지만 왕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져서 라파엘의 뒤통수를 낚아챘다.

키스는 길고 거칠었다. 심장이 아프고 시렸다. 이 남자가 너무나 좋았다. 지금 당장, 스완이 있든 없든, 이 남자의 스커트 자락을 헤치고, 그 안에 있을 비문에 자신의 것을 묻고 싶었다. 아, 율레즈여. 그 따뜻하게 조여져 있을 곳에 들어가는 순간 왕은 심장이 멈출지도 몰랐다. 합방일이니 신전이니, 엿 먹어. 다 꺼져. 왕이 목 안쪽으로 거칠게 신음성을 터뜨렸다. 라파엘이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그는 라파엘을 상대로 사정했었다. 그런데 하물며―.

“흠! 어흠흠흠흠흠!”

스완이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시키려 시도하다 왕이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대놓고 고함을 쳤다. 왕이 어쩔 수 없이 라파엘을 놓아주었다.

“씨발.”

왕이 중얼거렸다. 라파엘의 젖은 입술을 보자 그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떼면서 평생의 원수에게 중얼거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너 일단, 하기만 해봐.”

뭘 한다는 건지 모르지만 라파엘은 늘 그렇듯 묻지 않았다. 라파엘이 가볍게 헐떡였다. 왕의 한 손이 그의 머리를, 다른 손이 그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왕의 손이 뜨거웠다. 왕의 입술이 헤집었던 입술이며 입 안쪽이 저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왕과 이런 키스를 계속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라파엘은 섹스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도 성인 남자인지라 성적인 상식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의 라파엘은 믿고 있었다. 본래 어린애들은 자신이 다 안다고, 다 컸다고 믿는 법이다). 좋아하니까 키스하고, 좋아하니까 언젠가는 섹스하게 될 것이다. 아마 같은 침대에서 뭔가를 하게 되겠지.

하지만 이런 키스를 하면 할수록 무릎에서 힘이 빠진다는 말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다녀온다.”

왕이 그렇게 말하고 라파엘의 젖은 입술을 슬쩍 손가락으로 훔친 뒤 등을 돌렸다. 그때까지 (다양한 의미에서) 칼을 갈고 있던 스완이 이제 해볼까 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뭔가가 목에 닿았다.

순식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라파엘이 아직 쾌감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은 몇 미터 멀어지지도 못한 상태였다. 스완은 자신의 목에 뭔가의 촉을 대고 위협하고 있는 라파엘의 무심한 검은 눈과, 남자 애인의 입술을 유린하곤 희희낙락 사라지는 형님의―믿음직스러워 보이지만 믿지 못할 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뭔데.”

스완이 반말로 되물었다. 왕비로서 묻는 건 아닐 테니까.

“전에 한 번 만났었지. 이그나치오궁 앞에서.”

라파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스완은 라파엘의 발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특이한 보법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끊은 발의 모양을 볼 때 분명 보법이 상당히 독특했을 게 분명했다. 탐난단 말이야. 라파엘은 군인들이 가지지 못한 기술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 이 기술. 이 능력. 탐난다, 탐나.

“서류를 가지고 쫓기고 있었어.”

라파엘이 말했다. 스완이 성의 없이 “아아” 하고 대답하면서 흘끗 시선을 내렸다. 라파엘의 손에 들린 것은 대거나 나이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늘이었다. 이게 뭘까.

“이게 뭐야?”

스완이 눈짓으로 바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블로 건(Blow gun)?”

“무슨 서류였지?”

“블로 건에서 침만 뺀 거야? 하지만 그게 무기로서 무슨 효용이 있지?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암살에 양검을 쓰는 게 좋아? 너무 눈에 띄잖아?”

“무슨 서…….”

“이 침, 촉에다 독 바른 거야? 검에다가도 독을 바르는 편이야? 암살자는 돈을 얼마나 벌지? 용병과 암살자는 어떻게 다르지? 검을 모으는 게 취미라고 들었는데 요즘 남대륙 대거가 유행이잖아. 로프날 대거 써봤어? 어때?”

라파엘이 스완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 에반스가 검 수집가라는 건 은근 유명한 소문이었다. 물론 노골적으로 유명한 소문은 아니었다. 스완 라 포 정도 되는 인물이나 캐낼 수 있는 은밀한 정보였지만, 그래도 라파엘이 굳이 자신이 검 수집가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기에, 거금을 지불하고 라파엘에 대해 캐내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중에 ‘검 수집가’라는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써봤어. 별로야.”

잠깐의 눈싸움을 하던 라파엘이 대답했다. 스완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어려울 것 같았고, 라파엘은 아무래도 말로 밀어붙이는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왕의 동생이었다. 왕은 그를 대단히 신뢰하는 것 같았고 라파엘은 아무래도 왕의 소중한 인간에게 수단을 가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디스 대거는?”

“그저 그래.”

“힐 다온 대거는?”

“날은 잘 드는데 자루가 별로야. 그런데 난 대거를 별로 안 좋아해서 대거에 대해서는 나한테서 참고할 만한 이야기를 듣기 어려울 거야.”

라파엘이 침을 거둬들였다. 어차피 협박을 하지 못할 거라면 굳이 그 목에 괜한 헛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법은 뭐야? 어떻게 다가온 거야?”

서로 알게 된 이래 스완이 이토록 라파엘에게 호감과 호기심을 보인 적이 있었을까.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말해줄 수 없었다. 군인은 기술을 전수하고 팀을 이루어서 임무를 완수하는 데 목적을 두지만 암살자는 다르다. 암살자는 타인이 모르게 그를 죽이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다시 말하자면, 암살자의 정체와 그 기술은 알려지지 않을수록 유리하다.

스완의 언뜻 선량해 보이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졌다.

“치사하다. 시동생에게 보법 하나 못 알려준단 말이야?”

자기 편한 대로 재빨리 ‘시동생’이라고 자칭하는 스완에게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서류지?”

정말 기계 같다. 스완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왕과 있을 때의 라파엘은 꽤 인간 같은 데가 있다. 공중제비도 돌고……. 그러나 왕이 없을 때의 라파엘은 정말이지 기계 같았다.

문득, 스완 라 포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무슨 서류인지 궁금해?”

스완이 씨익 웃어 보였다. 이 웃음이 불길하다고 여기고 재빨리 발을 뺄 수 있을 정도로 눈치가 좋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마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라파엘이 순진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스완이 총을 꺼내 라파엘에게 정확히 겨눴다. 철컥,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둘 사이를 차갑게 울렸다. 그런데도 라파엘의 얼굴 근육은 아주 작은 미동도 없었다.

‘재미없기는.’

스완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겉으로 쾌활한 태도를 가장했다.

“신성한 내기를 하자.”

“내기?”

라파엘의 검은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내가 지면, 어떤 서류인지 알려주지.”

스완이 싱긋 웃었다. 웬만한 귀부인들은 바로 유혹할 수 있는 선량하고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라파엘의 얼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아서 정말이지 밀랍 인형을 앞에 두고 웃음 연습을 한 것같이 뻘쭘해져, 스완은 엉겁결에 웃음을 멈추고 말았다.

“네가 이기면?”

라파엘이 물었다.

“내가 이기면, 보법을 가르쳐줘.”

라파엘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스완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왕의 얼굴의 조각을 아주 조금씩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왕이 말한다면 라파엘은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이 말한다면 라파엘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왕이나 혹은 왕이 지정하는 자에게 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뻗었다. 스완의 총구를 잡아서 라파엘이 재빨리 그 총을 내렸다. 스완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 이쪽에 등을 보이면서 말을 찾으러 갔던 왕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스완이 눈을 크게 떴다. 왕은 스완이 보는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즉, 왕은 라파엘의 뒤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라파엘의 뒤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스완의 시야에 완전히 잡힌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파엘은 스완의 총구를 내리고, 스완의 총에서 손을 떼었다. 라파엘이 스완의 총에서 손을 떼었을 때는 왕이 돌아온 뒤였다.

“안네마리, 스완에게서 구박받지는 않았느냐.”

왕이 다정하게 하는 말에 둘 중 누가 울컥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음 날, 즉 사냥 대회 사흘째 되는 날. 왕의 기분은 한없이 추락해 있었다. 게다가 귀족들은 왕이 갑자기 호위병 중 한 명을 사냥 대회에 참여시키겠다고 하는 말을 멍한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일주일간 지속되는 사냥 대회는 이미 사흘째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틀간 사냥감을 가장 많이 잡은 순위권자 중에 왕은 없었다. 첫날 여우는 왕비가 준 은여우로 대신했고―귀족들은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았고 특히나 ‘여자의 사냥감으로 대신하다니, 수치를 알아야 한다’며 말들이 아주 많았지만, ‘내 아내는 나의 분신이며, 법적이자 신이 인정하신 나의 심장이다. 너희는 심장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니 편리하고 대단한 능력을 가졌군. 굉장한 일이야’라는 빈정거림밖에 듣지 못했다―둘째 날은 백노루를 가지고 왔었다. 그러나 왕은 기본을 했을 뿐 사냥감의 수로는 뒤처지고 있었다. 웬일이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네. 귀족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세 번째 날, 왕이 열받은 얼굴로 단정한 얼굴의 호위병을 대동했다.

“내…….”

왕은 말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스완 라 포―왕과 함께 망나니짓을 하기로 유명한 바람둥이가 싱글거렸다.

“새 호위병이십니까. 오, 비전하는 어디 두시고요?”

왕은 또 말을 하지 않았다.

“호위병은 왜 갑자기.”

“그는 귀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는…….”

더 이상은 왕의 독선을 참아줄 수 없다는 듯 보수파 귀족들이 일제히 낯을 굳혔다. 태후가 여인들의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 드레스. 아무래도 귀족들이 그녀에게 드레스를 갖다 바친 모양이다. 왕의 푸른 눈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던 찰나에, 의외의 목소리가 의외의 방향에서 터져 나왔다.

“제 동생입니다.”

제럴드 라 쇼어였다. 왕족과 대귀족, 헤수스의 귀빈 중의 귀빈은 다 모여 있는 자리. 그들의 하녀와 노예, 시종과 시녀, 궁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 엄청난 대규모의 축제에는 당연히 근위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진 듯하더니만 말도 없이 나타나선 천연덕스럽게 다시 근위대장직에 복귀한 제럴드 라 쇼어가 경비를 서다 말고 간섭했다.

동생?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서 쇼어 가문의 구성원에 대해 모르는 자가 있을까. 아무도 없었다. 쇼어 가문에서 제럴드의 동생은 그 유명한 황후 마리 트리지아뿐. 그리고 그녀는 죽지 않았던가.

“같이 자라진 않았지만…… 동생입니다.”

“제럴드!”

태후가 노성을 터뜨렸지만, 제럴드 라 쇼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왕족은 아니었지만, 최고 권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가장 귀족적인 사고방식으로 가장 귀족적인 삶을 살았고, 그런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귀족적으로 일이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누가 희생되는지, 그런 것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럴드는 태후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저 고모님에게 마음을 줄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은 아니었다. 좀 더 의지를 빨리 굳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마리가 죽고,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하지만, 몰라.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더라면, 아니.’

제럴드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귀족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귀족들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저게 누구야. 저기 서 있는 저 남자가 도대체 누구지? 저 사람이 제럴드 라 쇼어라고? 그 순둥이에 남에게 이용당하고도 헤헤거리고 부하의 군복을 빌려 입고 창녀와 뒹굴던 그 남자라고? 정말로? 저 굳은 의지를 가진 저 남자가?

제럴드가 다시 근위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주변을 경계하자, 사람들은 당혹했다. 그런 그들에게 일부러 무표정하게 굴려 노력하면서 제럴드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에드워드가 옆에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자 아찔해졌다. 그사이 왕의 호위병이라는 키 작은 남자는 가볍게 창을 든 채 흑마에 휙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가벼운 몸놀림은 그가 상당한 수련을 거친 무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과시해줘. 전하의 호위병이라고 소개할 건데 다들 의심의 눈초리로 볼 테니까 말이지.’

라파엘이 흑마 위에서 창을 빙빙 돌렸다. 라파엘은 자신의 무술을 과시해본 적이 없었다. 감출 필요는 있었지만 과시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몰래 사람을 죽였지 대놓고 죽이진 않았으니까. 과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라파엘이 창을 빙빙 이리저리 돌리면서 생각했다. 그 모습은 사실 무인으로서의 과시라기보다는…….

“광대 같네요.”

태후가 웃으면서 난처한 듯 말했다. 그러자 태후의 주변에 있던 레이디들이 반쯤 웃음을 터뜨렸다. 나머지 반 중 반은 웃지 않았고, 반은 웃음을 머금기만 했다. 태후를 비롯한 모두의 반응은 계산된 것이었다. 그러자 왕이 말 위로 휙 오르면서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완이 왕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괜히 쇼어 가문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왕은 레이디들의 비아냥 섞인 시선이 라파엘에게 향하는 걸 보자 짜증이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광대를 좋아하죠, 어머니.”

아시겠지만 하고 왕이 불량하게 혀를 내밀어 스스로의 입술을 핥았다. 태후가 상냥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전하를 잘 이해하는 좋은 광대인가 보군요.”

네 수준이 광대랑 비슷한가 보구나, 라고 태후가 비꼬았다. 왕이 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특히 몸을 잘 이해하죠.”

스완은 에구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왕의 열망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다 아직 못 가졌다는 사정도 잘 알고 있는 만큼 왕의 호쾌한 웃음 뒤에 서렸을, 분하고 짜증 섞인 마음을 알고 있었다. 몸을 이해하긴 개뿔이.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좋은 일입니다, 국왕 전하.”

“네, 어머님께서도 광대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저런, 왕이 유감이라는 듯 혀를 찼다. 왕이 고삐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웃었다.

“광대와 공작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는데요. 입이 아니라 외모가 요란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왕의 말에 태후의 웃음 띤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다. 그래도 태후는 거의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연 쇼어 가문에서 태어나 궁중 여인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몸답다고 스완은 생각했다.

“하긴, 이 광대는 수수하니 어머님께 대기엔 격이 맞지 않으려나요.”

미묘한 언사였지만 ‘광대’ 쪽이 더 위라는 뜻으로 하는 말에 태후의 얼굴이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굳었다. 왕이 가볍게 지시를 내리자 왕의 백마가 타박타박 움직였다. 왕이 호위병의 옆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말에 오른 남자 귀족들과 안전한 곳에 앉아 있는 레이디들이 지켜보았다.

“라피.”

왕이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라파엘이 약간 늦게 그 이름에 반응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왕이 자신의 말에 앉은 채 손을 뻗었다. 왕의 손가락이 라파엘의 뺨을 지나치고 귀를 스쳐서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입술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왕의 입술을, 라파엘은 눈을 깜빡이며 받았다. 그는 잠시 주변을 흘끔거리는 듯했지만 곧 눈을 감았다.

‘열받으셨네.’

스완이 혀를 내둘렀다. 하긴 안고 싶어 죽겠지만 아직 안지도 못했는데 안았다고 (홧김에) 허세를 부렸으니 열받을 만도 하지. 스완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평소 그는 사냥 대회에 힘을 쏟지 않는 편이었다. 도리어 왕과 같이 출발해서 왕이 사냥을 하는 동안 왕의 정적을 사냥하곤 했었다. 사실 사냥 대회에서 인간 사냥은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다. 서로가 서로를 사냥했다. 가장 명예롭고 거대한 사냥감은 역시 왕이겠지만 왕의 주변에는 특수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감히 왕을 노리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물론 그건 사실이었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태후는 굳은 얼굴로 라파엘 에반스와 왕의 키스를 지켜보았다. 각자 말을 탄 채 그들은 키스하고 있었다. 왕이 라파엘 에반스의 머리를 잡아채 키스하는 모습을, 그리고 라파엘 에반스가 곧 눈을 감고 그 키스를 받아들이는 걸 빠짐없이 보았다.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봄바람에 왕의 금발이 흔들린다.

“또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몇 번째지. 쇼어 가문 킬러로군요, 전하는.”

“감히, 어디서!”

태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공작부인이 날카롭게 책망했지만 클레르의 느긋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 쇼어 가문은 이그나치오 가문의 전용이지만, 이번은 정말 심하네. 네 명이나 되는군요. 한 세대에 네 명이 한 남자의 것이라. 과연, 몸 바쳐 일하는 충성스러운 가문답군요.”

클레르의 말에 공작부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했지만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은 픽 웃을 뿐이었다. 문득 공작부인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태후의 아름다운 손이 공작부인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러지 마셔요.”

태후가 부드럽게 말했다.

“포 백작부인이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닐 테니.”

“하지만, 태후 전하.”

“아니에요, 괜찮아요.”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과 태후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했다.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속삭였다.

‘네 명? 왕후와 왕비…… 저, 라피라는 남자, 그리고 누구라는 거야?’

‘그 소문이 사실인가? 쇼어 근위대장이랑…….’

‘맙소사. 비서관하고도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정말이지 모든 자식을 갖다 바친 셈이 되는군. 뭐야, 그렇게 고고한 척 왕과 반목하더니 뒤로는 자식을 떼로 갖다 바치면서 환심을 산 거야?’

말이 너무 심한데, 라고 모두가 생각했을 때 태후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저 여인은 누구시지?”

“소니아 자작 부인입니다.”

“오늘부터는 아니게 되겠네요, 저런.”

불쌍한 소니아 자작. 그는 신중하지 못한 아내를 만나 작위를 잃게 되었다. 가여운 일이었다. 아마 소니아 자작 부인은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하는 걸 보자 호기로운 마음에 떠든 것일 테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본디 자작과 백작은 작위의 격이 다르기도 했지만,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은 저래 봬도 정치의 줄다리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소니아 자작 부인처럼 무작정 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후가 자신을 못 건드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작 부인은 아니었다.

소니아 자작 부인이 설마 하는 얼굴로 지금까지 자신과 이야기하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듯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제니퍼?”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하고, 진정 친구라고 생각했던 여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소니아 자작 부인은 충격을 받았다. 레이디들이 일제히, 그녀들뿐만 아니라 하녀들까지 일제히 소니아 자작 부인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혼자 남았다.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 같은 혹독한 취급이었다.

키스가 끝나고 남성 귀족들이 일제히 사냥터로 출발했다. 말굽 소리가 진동이 되어 대지를 울렸다. 웅장한 소리와 자욱한 먼지, 하녀와 노예들이 서둘러 커다란 부채로 흙먼지를 쫓아 보내고 긴 후드를 씌웠다. 하지만 소니아 자작 부인에겐 그녀의 하녀들조차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부채를 든 하녀들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흙먼지를 쫓아 보냈고, 후드를 든 하녀는 무심한 얼굴로 스스로 뒤집어썼다. 먼지 폭풍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소니아 자작 부인뿐이었다.

언제나 입이 재앙이었다.

사냥터 한중간에서, 라파엘은 창을 들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흥으로서의 사냥 대회를 즐기는 귀족들에게선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반응이다. 왕은 라파엘의 무심한 얼굴에서 어떤 쾌감의 징조도 찾지 못했다. 스릴이나 아주 약간의 흥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파엘 에반스는 명백히 사냥에 흥미가 없었다.

「인간 사냥꾼들은 동물을 사냥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 애호가여서가 아니라 동물을 사냥하는 데 어떤 흥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은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라파엘의 무표정하고 창백한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라파엘이 도대체 왜 이 사냥에 참여하고 싶어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의 사냥감인 사슴이 지나가도 무표정했다. 라파엘의 무표정한 얼굴의 밑, 왕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희미한 표정에 순수한 열이 올랐던 것은 왕이 그를 잡아 키스를 한 그 순간뿐이었다. 그 외에 사슴이 지나가든 오소리가 지나가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라파엘이 문득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깜빡거리는 것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물론, 왕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이야기다. 라파엘이 꽤나 오랫동안 고개를 들고 있어서 왕도 똑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이었다. 날씨는 제법 좋았고, 흰 구름이 솜을 찢어놓은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뭘 보고 있느냐.”

새 한 마리가 넓은 하늘을 가로질렀다. 눈이 부신 광경에 라파엘은 눈을 가늘게 뜨는 대신, 부릅떴다. 특이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왕이 물었다.

“새와 하늘과 구름을 보고 있었습니다, 전하.”

언제 들어도 참 무뚝뚝한 목소리가 사탕 같다고 생각하면서 왕이 “왜?”라고 물었다.

“아름다워서요.”

그 목소리 어디에서도 아름답다는 감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라파엘은 창을 늘어뜨린 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은.’

스완은 고개를 반쯤 기울인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이 안 좋은 사람이 하듯 시야를 가늘게 하고 바라보자, 아주 조금 라파엘의 표정에 감탄이 보이는 듯도 했다. ……보이는 ‘듯’도 했지만 보이진 않았다. 그냥, 보이는 ‘듯’도 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분명히.

단정한 것 빼고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남자를 황홀하게 잡아먹을 것같이 바라보는 왕의 눈에는 보일 것이다. 왕의 귀는 라파엘의 목소리에서 감탄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스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 그냥저냥 좋은 날씨였다. 특별할 것은 없는 하늘이라고 생각했는데 왕이 대답했다. 달콤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군.”

오, 제발 작작들 좀 하시라니까요. 스완이 얼굴을 걸레처럼 구겼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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