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쥐 떼들 (14/47)

제13장 쥐 떼들

줄줄이 포박된 채 끌려 들어오는 시녀들을 보며 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라파엘이 살던 뒷골목에선 그녀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치자면 라파엘 자신이야말로 지금쯤 사지가 잘려 마을 입구쯤에 걸려 있어야 맞는 것이지만. 

가장 앞서 들어오던 시녀장이 라파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살아 계셨…….”

“아, 응.”

라파엘의 심심한 대답에 시녀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살아 계셨어, 율레즈여. 그 수많은 탄성이 울리는 동안 왕은 라파엘의 표정을 관찰했다.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놀라고 있었는데 상대의 반응에 놀란 것 같았다.

‘라파엘 에반스는 신세대 인간 백정 중에서 단연 선두에 선 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만, 라파엘 에반스라는 이름이 공포를 주는 데는 조금 독특한 이유가 있습니다.’

몇 주 전 스완이 말해준 정보가 왕의 귀를 울렸다.

‘라파엘 에반스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말입니다. 한 번도 복수할 만한 일을 당한 적이 없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겠지. 나도 그의 몸에 난 고문흔은 봤어.’

‘예, 그런데 단 한 번도 복수하지 않은 거죠. 덕분에 초기엔 ‘겁쟁이 에반스’라고 불렸습니다. 아주 초기엔 말입니다.’

‘그런데?’

‘라파엘 에반스를 고문했던 인물들 중 한 명이 라파엘 에반스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암흑가의 주인이었는데, 여러 곳에서 다양한 악업을 쌓고 덤으로 적도 일개 사단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죠. 라파엘 에반스도 그의 부하들에게 고초를 당한 적이 있고요. 상당히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라파엘 에반스는 그를 찢어 죽였습니다. 다들 복수 차원이라고 생각했지요. 의뢰도 받았겠다, 전에 당한 것도 있으니 제대로 갚아줬다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었다?’

‘의뢰주가 의뢰했답니다. 산 채로 찢어 죽여달라고. 라파엘 에반스는 그가 원하는 대로 찢어 죽였습니다. 의뢰주가 원하는 목은 따로 잘라 갔고요.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을 고문한 이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살인 기계라는 별칭을 얻게 된 거죠.’

스완의 목소리에 희미한 두려움이 서려 왕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라파엘 에반스가 무섭나?’

스완은 조금의 침묵 뒤에 대답했다.

‘무섭습니다. 그건 인간답지 않습니다. 전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고문흔은 끔찍합니다. 아주 잘 드는 칼로 피부를 얇게 벗겨내는 고문이라는 건, 전하, 신의 명예와 당신의 동생으로서의 애정을 걸고 말씀 올리는데 저는 견디지 못합니다. 아마 제 부하들도 견디지 못할 겁니다. 외람되지만 전하께오서도 견딜 수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라파엘 에반스는 견뎠습니다. 탈출까지 했지요. 그러면 복수를 하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에반스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서일 줄 알았죠. 하지만 정작 의뢰를 받으니 그대로 행해줬습니다. 전하, 그건 마치…… 기계 같지 않습니까.’

사람은 이길 수 있습니다만 귀신은 무섭습니다. 그리고 인간인데 기계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또한 두렵습니다. 그건 신의 섭리에 어긋난 자이니까요. 스완은 그렇게 말했었다. 왕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라파엘을 안은 채 그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라파엘은 어떤가. 죽었을지도 모를 시녀들이 살아 돌아와도 그저 담담하던 그가 시녀들이 자신을 보고 살아 있었다며 감격하자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에 드나?”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만 깜빡였다.

“네가 토끼도 아니고 눈만 깜빡여서 무슨 이득이 있나. 너는 사람이니 정확히 말로 말해봐라. 마음에 들었느냐?”

왕의 심통에 시종들이 고개를 숙였다. 옛날에야 여자인 줄 알았으니 토끼 운운했다 치고 지금은 그 무시무시한 인간 백정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왜 왕은 여전한 걸까.

라파엘이 되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감히 왕명을 거역하고 왕을 능멸하고자 한 무엄한 계집들을 살려놓은 게.”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왕은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다시 물었다.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마음에 들었느냐?”

라파엘은 곰곰이 생각했다. 마음에 들었냐고?

“모…… 르겠습니다.”

어떤 감정이 일렁이긴 했지만 그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어서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시녀장.”

왕이 여전히 라파엘에게 시선을 둔 채 시녀장을 불렀다.

“예, 전하.”

“네 주인을 잘 모셔라. 그녀가 너희를 살렸고,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너희는 전부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시녀들 사이가 말없이 일렁였다. 분명 라파엘 에반스의 정체를 알고 있을 텐데 왕이 ‘그녀’라고 칭하자 혼란스러워진 탓이었다. 그러나 시녀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전하.”

“알아들었다고 봐도 괜찮겠느냐?”

“궁의 ‘안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드립니다.”

라파엘은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그는 도무지 이 화법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이해하길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귀족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왕족의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와 다른 종류의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과 그는 같은 나라 사람인데 말이다.

“좋아. 오늘 밤에 파티가 있다. 내 어머니를 비롯, 나라 안의 모든 대귀족이 참석한다. 문 플레이스로 돌아가 안네마리를 준비시켜라. 말해두지만, 약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자리라는 걸 명심해라.”

어머니?

태후 말인가. 라파엘은 한가롭게 생각했다. 그러나 궁중 내부 사정에 훤한 시녀장은 그 단어에 마른침을 삼켰다. 왕은 친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라고 칭했지만,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왕이 가장 증오하고 경멸할 상대였고, 왕을 가장 증오하고 경멸하는 사람이다. 그 둘은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사이였다.

왕이 즉위한 이래 왕을 부정하는 것처럼 은둔하고 있던 태후가 공식 석상에 나타나다니. 시녀장은 아찔해졌다.

“가라, 시간이 부족할 테니.”

왕이 그렇게 말했다. 시녀장이 일어서자 하얗게 질린 얼굴의 시녀들도 주섬주섬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시녀장이 왕의 앞, 정확히는 라파엘의 앞에 도착해 무릎을 꿇었다.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전하.”

“아, 예.”

“중요한 자리를 위한 준비에 시간이 몹시 촉박합니다. 문 플레이스로 돌아가시지요.”

라파엘이 “예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 하고 신음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왕이 가라고 해서 가는 것일 텐데 정작 왕이 그를 놔주지 않고 있었다. 어라, 가라는 게 아니었나. 눈치는 지독하게 모자란 라파엘이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다 하필 왕과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 왕이 키득거렸다.

“네가 사슴이냐, 눈만 이리저리 굴리게.”

왕이 라파엘의 뺨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솜털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아주 살살 잡아당기는 모습에 시녀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무표정할 수 없다면 고개를 숙이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사슴이라니, 사슴이라니! 사냥꾼에 가깝잖아요. 아니지, 사냥꾼의 목을 따는 백정에 가깝……, 말도 안 돼!

머릿속은 혼란스러워도 표정에는 일절 나타내지 않는 시녀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백조의 물장구처럼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금니를 악물고 얼굴의 근육에 힘을 빡 주고 있는 시녀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왕이 라파엘의 뺨에 다정히 키스했다.

“다녀와라. 예쁘게 하고 오너라.”

문 플레이스에 다시 활기가 들어찼다. 다시 돌아온 문 플레이스는 여전히 정갈했다. 왕의 입김이 닿은 것임을 시녀장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의 사후, 어렵게 들어온 문 플레이스는 폐가의 느낌이 강했다. 지저분하고 어두컴컴하고 거미줄까지 여기저기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때와 비슷한 시간을 비워두었었는데도 마치 단 한 시간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따뜻하고 깨끗하지 않은가.

감회에 젖은 시녀들 사이에서 시녀장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물…….”

“물? 아, 시녀장님. 물 드릴까요?”

헤헤 웃으면서 젊은 시녀 하나가 물었다. 그러자 시녀장이 고함을 질렀다.

“물, 물 받아! 어서 준비해라.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예?”

시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나이가 제법 있는 시녀들만이 “아!” 하고 불현듯 깨달아버렸다. 그러나 태반의 시녀들은 아직도 의아해하는 얼굴이었고, 시녀장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사냥 대회 전야제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나라 안의 모든 대귀족이 참석하는’ 오늘 밤의 파티 말이다. 어서 물 받아! 옷 챙겨라. 서둘러!”

그제야 앞으로의 할 일을 눈치챈 시녀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물을 받는다, 옷을 챙긴다, 보석들을 꺼낸다―시녀들이 부산을 떠는 동안 라파엘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침실로 들어온 그는 왕의 침실에서 들고 나온 지도를 꺼내 침실 한가운데에 있는 책상 위에 펼쳤다.

거의 모든 중앙 정원의 가든 하우스를 확인했다. 어떤 가든 하우스에 ‘반지’가 있는 것일까. 무슨 ‘반지’일까. 바이런 라 프시스. 라파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바이런이 반지를 끼고 있었던가? 라파엘은 다시 떠올려보았다. 바이런은 여러 번 반지를 끼었지만, 그것은 그저 반지였을 뿐이었다. 아니면 바이런이 아니라 다른 쪽, 즉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리는 라파엘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반지를 가리킨 것일 수도 있고.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과 재스민이라는 창녀가 동일 인물이었다면 바이런 라 프시스와 ‘후크’도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다. 23번가의 ‘후크.’ 23번가는 17번가와 대등한 환락가이고, 특히 23번가는 남창이 많기로 유명했다. 바이런 라 프시스가 남창이라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고 그렇게 생각해보면, ‘반지’는 바이런과 클레르에게는 약점이 될 만한 무언가일 가능성이 컸다.

‘목숨을 잃은 건가.’

라파엘의 검은 눈이 한 번 흘낏 움직였다. 당신밖에 없어,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날 구할 수 없단 말이야. 그렇게 울던 그의 분신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일까. 유일하게 그의 가슴에 뭔가를 불어넣었던 존재였다. 그 존재를 위해서 라파엘은 도대체 뭘 해줘야 했었던 걸까.

라파엘은 왕을 떠올렸다. 그녀에 이어 두 번째였고,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감정을 주는 상대. 그에게 가까이 가게 될수록 그녀의 죽음에 더 신경이 쓰였다.

“비전하, 지금 뭘 하시는…….”

마침 시녀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라파엘은 시녀장을 바라보다 모든 일의 처음을 떠올렸다. 라파엘에게 이 모든 사건의 처음은 자신이 태어난 때도, 버려진 때도 아니었다. 그에게 처음은 그의 분신인,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맨발로 달려와 그에게 안겨 눈물로 호소했을 때부터였다.

어째서, 그녀는 그렇게 호소하였는가.

“마리는 왜 울었지?”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마리 님이 우셨었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빈 후보가 되었을 때 당신과 찾아왔었잖아. 그때 마리는 왜 울었지? 무엇 때문에?”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그때를 떠올린 듯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결혼하기 전 힘들어합니다. 심지어 그 결혼이 국혼이라면 더욱 압박이 심하겠지요.”

결혼으로 압박을 받았다는 건 처음 안 이야기지만, 라파엘은 그렇다 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결혼으로 압박을 받을 수도 있고 도망치고 싶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라파엘뿐이라는 건 이상한 일이다. 라파엘이 그녀를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살수에 불과한 그가 도대체 어떻게 고관대작의 영애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라파엘이 물었다.

“그게 다야?”

시녀장이 그 외에 뭐가 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라파엘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녀장을 살피다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되면 고문하겠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투라 그 뜻이 머릿속까지 도달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걸려 확인한 뒤 시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비전하.”

“다시 묻겠어. ―마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눈썹을 치켜떴다.

“설마, 뭔가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그랬어” 하고 중얼거렸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망연자실한 목소리에 라파엘은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시녀장의 머리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랬어, 뭔가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우셨던 거야.”

시녀장이 중얼거렸다. 

“…….”

“당연히 어린 나이에 하는 결혼이, 남색가인 남편에게 시집가야 하는 운명이 괴롭고 힘들어서 우시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라면? 뭔가를 예감하고 있었던 거라면?”

시녀장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의 것처럼 단호하고 깊은 눈을 한 그녀가 라파엘을 직시했다.

“뭡니까.”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알면 물어보지 않았을 거야.”

“그래도 뭔가 아시는 거잖아요!”

“뭔가?”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도리어 물어왔다.

“뭐를?”

질문한 건 이쪽인데 도리어 질문으로 대답을 해온다. 치사하고 무례한 일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시녀장은 참았다. 첫째는 계급이 안 되고, 둘째는 쏘아붙여봐야 이 무딘 남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뭘 알고 계시는 거죠?”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메여 나왔다. 시녀장의 목소리가 너무나 좋지 않아 라파엘은 차마 모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은 시녀장을 상대로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공개할 생각도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비전하, 제발.”

시녀장이 거의 빌다시피 애원했다.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 욕하고 저주를 퍼부은 인간이야 많고도 흔했지만 이렇게 빌고 애원하고 달래는 인물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라파엘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난처함이 살짝 스미는 것을, 오랜 유모 경험의 연륜으로 재빨리 발견한 시녀장이 다시 한 번 애절하게 부르려던 순간.

“비전하.”

다른 시녀가 들어왔다. 아주 잠깐의 난처함은 곧 그 차가운 무표정에 가리고 말았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시녀가 “밖에……”라고 말을 잇다 말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라파엘의 뒤에서 시녀장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제가 뭐, 뭘 잘못했나요?’

―라고 눈으로 묻는 기술은 하녀나 시녀나 유모만이 가질 수 있는 전매특허의 비기.

‘야, 이 기지배야. 너 출세하고 싶으면 눈치 제대로 챙겨. 딱 보고 중요한 이야기다 싶으면 재빨리 토껴야지, 거기서 미적대고 있으면 되겠니. 어? 네가 그렇게 눈치가 밥치인데도 나라 제일의 엘리트인 시녀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잘난 내 덕분인 줄 알아, 이 멍청하고 아둔한 계집애야!’

눈으로 이렇게 긴 말을 할 수 있는 건 시녀장이나 시종장 같은 ‘장’급만이 할 수 있는 절대 기술. 시녀가 바짝 얼어붙은 사이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죠?”

시녀장이 인자하게 웃어 보이자 라파엘이 “방금 살기를 느낀 것 같아서”라고 중얼거렸다.

“착각이셔요. 살기는 무슨 살기입니까, 여긴 저밖에 없는데. 그나저나, 무슨 일이니, 로라.”

시녀장의 말에 라파엘이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밖에 선물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선물이…… 줄을 잇다니?”

물은 것은 시녀장이었다. 라파엘은 선물이 줄을 잇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아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선물 말입니다.”

“이제까지 티파티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던 귀족들이 왜 선물을 보내는 건데?”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전하께오서 비전하를 총애하신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모양입니다. 남색가이신 전하께오서 침실에서 비전하를 놓아주지 않으신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그러셨어요?

시녀장이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필살 ‘눈으로 말해요’ 기술. 그러나 통할 상대가 따로 있는 법이라 라파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라파엘이 졸린 거북이처럼 꿈뻑꿈뻑 눈을 꿈뻑거리자 앓느니 죽는다는 기분으로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전하와…… 그러셨어요?”

“뭘?”

왜 척하면 척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 시녀장이 대단히 괴로운 얼굴을 했다.

“침대에서 두 분이 같이…… 그러셨냐고요.”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시녀장에게 라파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어떻게 알았어?”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물론, 시녀장도 라파엘이 왕과 자는 것을 특별히 반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사실 마리가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알아내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시녀장 자신도 살고 싶었다. 살아남고 싶었고, 또 이 상태로 나름대로 출세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잤어? 그 왕을 상대로? 밀고 당기기 한 번 안 하고?

너 아무리 남자라지만 너무 쉬운 거 아니니!

“저, 저, 저, 저, 전하!”

시녀장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로라가 말을 더듬었다. 라파엘이 “응” 하고 대답하자 로라가 말했다.

“그, 침대를 저기, 같이 쓰셨는데, 그랬는데―뭐, 선물이라든가, 그런 거, 하사받은 거…… 없으셔요?”

선물? 라파엘이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왜 왕이 자신에게 선물을 준단 말인가. 아니, 왕은 자신에게 선물을 줄 만큼 줬다. 그는 살수였고, 왕을 능멸했다. 왕족 모독죄에, 왕의 애인을―왕에게서 성고문을 받던 걸 떠올리면 상대와 왕이 무슨 사이였는지 알 수 없지만 세상에는 고문을 하는 애인 사이라는 것도 있다 들었으니까―살해했고, 왕의 근위병들을 몇이나 죽였는데, 왕은 그 모든 일을 덮어주었다. 왕에게 검을 겨눈 것조차 없었던 일로 해주었다. 그는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해주고, 라파엘을 ‘안네마리’가 되게 해주었다. 왕을 좋아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그 이상 무슨 선물이 필요하지?

“없어.”

선물 같은 건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필요 없다. 라파엘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을 때 로라와 시녀장은 차마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불쌍한 인간 같으니……!

평생을 비루하고 기구하게 살더니, 결국 예쁘다, 사슴 같다 하는 왕에게서도 성적으로 착취나 당하고 선물 하나 못 받아 챙겼단 말인가. 아직 푹 빠진 것 같던데 지금이라도 좀 줄다리기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려던 차에 다른 시녀가 들어왔다.

“시녀장님, 비전하! 도저히 저희로는 감당이 안 되옵니다. 선물이 밀려들고 있어요!”

“선물을 바라는 거면, 저기 있네.”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과 로라가 동시에 인상을 썼다. 그 선물과 저 선물은 격이 달라, 격이! 하지만 둘은 무던한 윗사람의 성정을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녀장이 “가자”고 말하자 로라가 “저는 비전하의 목욕시중을 들겠습니다”라고 거들었다. 시녀장이 눈으로 흘낏 허락하고 라파엘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침실을 나섰다. 라파엘이 옷을 벗고 지도를 집어 들었다.

“지도는 왜 드셔요?”

로라가 물었다. 한때 라파엘에게 적의를 가지기도 했던 그녀는 지금은 꽤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멋대로 적의를 가졌다가 제멋대로 호의를 가지는 그녀였지만 라파엘은 그녀의 적의에 무심했듯 그녀의 호의에도 무관심했다. 그런 라파엘을 잘 알기에 로라는 라파엘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대욕탕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가 결혼을 하기 전 울면서 구해달라고 하면, 어떤 이유지?”

그 말에 로라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대답했다.

“결혼이 엄청 하기 싫었나 보지요.”

“왜 결혼이 하기 싫었을까?”

“남자가 엄청 싫어서. 혹은 다른 남자가 엄청 좋아서.”

로라가 대욕탕 가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라파엘의 어깨에 물을 끼얹었다. 라파엘이 그 말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결혼이 하기 싫었다? 왕과의 결혼이? 어째서? 태양처럼 아름다운 그 남자의 어디가 싫어서?

다른 남자가 좋아서, 라면 과연 누가 좋아서였을까.

“마리를 알지?”

마리의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며 화를 냈던 시녀이니 분명 마리를 알 것이다. 라파엘의 말에 로라가 물론이죠, 라며 웃었다.

“마리는 전하를 싫어했을까?”

라파엘의 말에 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리 님은 전하를 좋아하셨어요.”

로라가 단호히 말했다.

“마리가 전하를 좋아해?”

“아주 좋아하셨어요. 어릴 때 처음 보고 오셔선 저희에게 ‘정말 왕자님이란 그런 분’이라며 어린 새처럼 재잘거리시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한걸요. 좋아하셨어요. 마리 님에게 전하는 첫사랑이셨어요.”

로라의 목소리가 아주 단호했다. 그녀는 말하면서 흘끗 라파엘을 살폈다. 죽은 마리가 너무너무 불쌍해서 라파엘이 살짝 죄책감을 갖길 바랐지만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더 흐려지자 그녀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뭐, 전하는 알아주는 남색가시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휴, 마리 님도 하필이면 하고 많은 남자 중에…….

로라의 말에 라파엘이 물었다.

“마리가 결혼을 하길 원했나?”

“늘 행복한 결혼을 하고 싶어하셨었죠.”

“전하와의 결혼을 원했었어?”

그러고 보니 하고 로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시에는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왕세자빈 후보로 1차 간택이 되신 거였고 2차, 3차 간택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또 정치적인 문제도 복잡했고요. 왕족인 이그나치오 가문과 쇼어 가문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게다가, 로라가 잠깐 망설이다 덧붙였다.

“원래 마리 님은 전하의 동생이신 알렉시스 님의 정혼녀셨거든요. 알렉시스 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왕세자빈 후보로 간택되셨으니 마음의 짐이 크셨을 거예요. 워낙 다감하고 좋은 분이셔서…….”

“알렉시스?”

“그러니까, 지금 전하께오선 로잘리 제2왕비 전하 소생이시고, 알렉시스 전하는 이사벨 로지아나 태후 전하 소생이세요. 알렉시스 전하가 보다 정통한 후계자시지만 지금 전하께오서 먼저 태어나셨고, 또 선왕께오선 로잘리 왕비 전하를 총애하셨거든요.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는데, 태후 전하가 전하를 조금…… 그러셔서요.”

“그렇다니?”

로라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막 다 씻긴 그녀가 라파엘을 탕에서 끌어냈다. 대욕탕에서 끌어내 보드라운 타월로 라파엘의 몸을 깨끗하게 닦은 로라가 혀를 찼다.

“싫어하셨어요. 아무래도 좋아하실 리가 없죠. 여하간 그런 상태라, 알렉시스 전하는 나라 안 최고 가문인 쇼어가의 유일한 여자를 정혼녀로 삼았는데 그때까지도 전하께오선 변변한 정혼녀도 없으셨던 상황이었어요. 태후께서 반대하셨거든요. 급하지 않다, 급하지 않다―그러시면서요.”

흠! 갑자기 헛기침 소리가 들려 로라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욕실 입구에 시녀장이 서 있었다. 괜한 입방정을 떨었다는 생각에 로라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였다. 시녀장이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태후께선 전하의 세력을 경계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친자식인 알렉시스 전하를 왕세자로 만들기 위해선 전하에게 후사가 있어서는 안 되었고, 그래서 일부러 정혼을 허락해주지 않으신 거죠. 알렉시스 전하가 어이없는 낙마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낙마 사고가 일어나고 전하의 위치가 공고해지자마자 태후께오선 알렉시스 님의 정혼녀였던 마리 님을 전하의 왕세자빈 후보로 간택하셨어요. 전하께오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당신을 무시하던 쇼어가의 여자를 아내로 들이셔야 했죠. 이런 상황이었으니 마리 님은 그 결혼이 싫으셨을 겁니다. 마음이 약한 분이셨어요, 정말로.”

로라가 고개를 저었을 때였다. 시녀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리 님은 귀족 여성의 의무를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시녀장이 “유모인 제가 맹세컨대”라며 말을 이었다.

“그분은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면서 그 의무를 내팽개치는 그런 인물은 아니셨습니다. 결코, 아니셨습니다. 절대로.”

라파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알았다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시녀장이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로라, 뭐 하고 있는 거야! 다들 움직여, 움직이라고!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왕이 쇼어 가문을 쳤다. 오랜 앙숙이던 둘의 싸움은 결국 이그나치오 가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쇼어 가문의 저택은 어느 조용한 밤 불타올랐고, 생존자는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심증이라면 넘쳐흘렀다. 왕은 쇼어가를 치면서 쇼어가 출신인 안네마리 제1왕비에게도 근신령을 내렸다. 안네마리 왕비도 곧 숙청될 것이다―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동안 왕이 안네마리 왕비를 애지중지했던 것은 역시 정치적인 쇼맨십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호사가들이 수군거렸다. 그런데, 안네마리 제1왕비의 근신령이 풀렸다. 사냥 대회 전야제가 열리고, 쇼어가 출신이자 왕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태후가 참석하며, 안네마리 제1왕비가 왕과 동석한다.

왕비가 왕을 녹였다. 왕의 증오를 왕비가 녹여버렸다. 근신 기간 동안 왕비가 머문 곳이 문 플레이스가 아니라 선 플레이스에 있는 왕의 침실이라더니, 의외로 왕비는 성교의 화신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전하와 염문이 났던 남자가 몇인데.”

귀부인 한 명이 부채를 팔락거리면서 말했다.

“의외로 쉬운 분이셨더라고요.”

“아무래도 여성의 품이 더 달콤하죠. 남자의 그 딱딱한 품만 하겠습니까. 여자를 알면 남자를 어떻게 안겠어요.”

왕이 자신을 ‘하마’라고 부른다는 걸 모르는 여자가 호호호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첫 발자국은 빼앗겼어도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이야 뭐 어렵겠습니까.”

“그래도 가여운 왕비 전하에게 사냥 대회 주간은 양보하죠. 일단 맛은 들여놔야 중독시킬 테니까.”

여자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고, 여자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 반대쪽에선 남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발코니에 마련된 흡연 장소에서 남자들은 서로의 파이프에 불을 붙여주며 은밀한 음담을 주고받았다.

“얌전한 여자가 침대에선 제법이지, 안 그래?”

“하지만 엉덩이에 가슴도 영 그저 그런 게 안는 맛이 없어 보이던데.”

“전하는 여자를 모르시잖아. 차라리 남자에 가까운 그런 여자부터 시작하는 게 쉬우실지도 모르지.”

국왕 부처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엔 유명한 바람둥이이자 아직도 손가락만 까딱하는 걸로도 여자를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트뤼포아 후작도 끼어 있었다.

루 라 트뤼포아는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있었다. 왕이 라파엘을 침대에서 놓아주지 않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궁중 사교계 내에 파다히 퍼져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왕은 남색가였으니까. 왕이 라파엘의 정체를 아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뢰가 터지고 눈앞이 번쩍이는 것이 마지막 기억,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라파엘에게 쉰 목소리로 묻자 라파엘이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죽어서 살았겠죠.’

라파엘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는 꽤 오랫동안 라파엘의 신세를 져야 했다. 상대의 시중을 받는 것이 당연한 루로서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대소변까지 모두 누군가의 신세를 져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단 한 번도 그 일을 고통스러워하거나 대단히 여긴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파엘은 루를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여겼다. 라파엘은 그저 유기 동물을 데려와 돌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동물이 그저 인간일 뿐. 자신을 연애 상대는 고사하고 인간으로도 보지 않는 자에게 빠져서 루는 모든 것을 잊었다. 그저 행복했다. 그대로 라파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악연인가.’

라파엘이 어떻게 안네마리 라 쇼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라파엘이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왕의 연인이 되었다는 건.

“아니.”

트뤼포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라파엘이 누구의 연인이 되었든 상관없다. 그 자신의 연인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참담한 기분이 들 것이다.

“국왕 전하 드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는 가운데 트뤼포아는 팔짱을 풀지 않고 입구를 노려보았다. 곧 왕의 팔짱을 낀 라파엘이 나타났다. 수척해진 모습. 단정하고 정숙한 옷차림은 남성의 특징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그만큼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라파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라파엘보다 아름다운 여자도, 남자도 많았다. 하지만 라파엘만큼 트뤼포아의 눈길을 잡아끄는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포기할 수 없어.’

라파엘은 그에게 화를 냈다. 어느 쪽이 먼저 배신했는가―그건 어려운 문제였다. 관계를 끊은 건 너라고, 라파엘은 말했다. 하지만 트뤼포아는 만나지 않아도 이어지는 관계 따윈 믿지 않았다.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자 트뤼포아가 피식 웃었다. 그는 역시 저 작고 냉혹하고 정이 넘치는 살인마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뭐야, 이것들.’

왕은 저 멀리서 애틋하고 쓸쓸하게 웃고 있는 루 라 트뤼포아와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라파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라파엘의 귀에 “안네마리” 하고 속삭였다. 라파엘이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자 왕이 말을 이었다.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줘선 안 된다.”

“……눈길을 줘서는 안 된다고요?”

라파엘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왕은 안 된다는 게 너무나 많았다. 왕의 말이라면 원래 사슴과 살수는 동격이라고 해도 믿을 라파엘이었지만, 왕이 하도 하지 말라는 게 많자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왕이 대답했다.

“그래, 사내의 시선과 여인의 시선은 다르다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남자라는 게 들통 나도 좋은 거냐.”

“아.”

라파엘이 신음하자 그 신음에서 ‘들통 나도 상관없다’는 뉘앙스를 읽은 왕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왜 그러느냐.”

하지만 목소리는 봄날의 바람보다 더 부드럽고 달았다.

“아니, 루는 제가 남자라는 걸 아니까.”

“……뭐.”

뭘 안다고? 왕이 으르렁거려서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문득 왕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분명 루 라 트뤼포아는 라파엘에게 몹시 친근한 척을 있는 대로 했었다. 서대륙에서 유학하던 시절 만난 사이라느니, 저를 떠나 왕을 만났을 줄은 몰랐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있는 대로 늘어놓았었더랬지. 이런 혓바닥을 찢어놓을 새끼를 보았나. 왕이 이를 바득 갈면서 루 라 트뤼포아에 대해 아주 자세히 캐물으려 했을 때였다.

“호호호호, 비전하―오랜만이어요. 왜 이렇게 수척해지셨어요오.”

정말 순식간이었다.

왕은 멍하니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자신의 팔 안에 라파엘이 있었는데 어느새 귀부인이라는 이름의 짐승 떼들이 낚아채가고 말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중요한 이야기 도중에. 왕이 버럭 고함을 지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라파엘은 그의 시야에서 멀어진 다음이었다. 뭐야, 이게.

“어이구, 완전 스타 탄생인데요.”

스완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왕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스완이 이마에 손지붕을 해 보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 꼴이 딱 경박하고 한가로운 바람둥이다웠다.

“하긴 소문이 어지간히 파다해야죠.”

“소문? 무슨 소문?”

왕이 짐승의 아가리에 걸린 자신의 가련한 가젤을 구해오려다 말고 스완을 돌아보았다.

“전하께오서 왕비 전하의 밤 기술에 푹― 빠지셔서 헤어 나오지 못하신다는 소문이요.”

왕이 말없이 쓰게 웃자 스완이 “노리셨죠?”라고 물었다. 물론 왕은 그 소문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소문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이브리는 왕이었고, 왕족인 그가 누군가와 침실을 두 달이나 공유하면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가 그 소문을 인지한 건 라파엘이 눈을 뜬 이후였다. 라파엘은 눈을 뜬 이후에도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맸고, 왕이 그런 소문에까지 귀를 기울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라파엘이 공중제비를 돌 정도로 괜찮아지자 왕은 본격적으로 라파엘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왕이 욕설을 내뱉었다.

“밤 기술에 빠지고 싶다. 정말 간절해.”

라파엘을 안으면 도대체 어떨까. 왕은 매일 밤 라파엘을 안은 채 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곤 했다. 품속의 라파엘을 바라보며 꿈속의 라파엘을 떠올린다. 손끝에 닿던 그 매끄러운 피부가 선명해서 당장 안고 싶어지곤 했다.

매일 조금씩,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고 있다. 이제는 라파엘의 목소리에도, 그 입김에도, 그 속눈썹의 움직임에도 발정하고 있다. 빌어먹을, 위험하단 말이야. 아무 데서나 범해버릴 것 같다고.

“밤 기술 같은 건 없어도 좋아. 저 남잔 그냥 거기 있기만 하면 돼. 나무토막같이 뻣뻣하게 있어도 되니까, 그냥 숨만 쉬고 있기만 해도 되는데.”

왕이 투덜거렸다. 밤 기술 따위는 왕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라파엘이 어떤 나무토막이든 질척질척하게 적셔주리라. 왕은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제가 전하의 사생활에 이러쿵저러쿵 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스완 라 포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이 멀리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라파엘을 보면서 “해봐”라고 말했다. 그 나른한 어조에 스완이 “예?” 하고 되묻자 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해보라고. 이러쿵저러쿵.”

“아, 예.”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하라고 하니 더 안 되는 심정을 저 형님은 아실까. 알 턱이 있나. 스완은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차라리 안으십시오.”

라파엘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느라 왕의 반응이 조금 느렸다. 왕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고개를 돌려 스완을 바라보았다.

“뭐?”

왕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스완이 애매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무 단도직입적이었습니까?”

스완의 질문에 왕이 다시 라파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라파엘은 여자들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분명 쓸데없는 소리겠지. 그런데도 라파엘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착해서는. 라파엘에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왕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왕의 말에 스완도 왕의 시선을 따라가 라파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면 그저 예쁘장한 여자 같다. 화장발의 승리다. 마리 트리지아의 유모였다던 시녀장과 하녀들이었다던 시녀들은 정말 유능한 인간들이었다. 그냥 단정한 남자를 어떻게 저런 미인으로 둔갑시켜놓을 수가 있을까. 목울대를 없애는 거야 마법으로 했겠지만 저 미모는 확실히 화장발과 의상 센스의 쾌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니라 초췌하고 흐느적거리는 잠옷 차림의 라파엘을 떠올리며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잠옷 차림의 라파엘을 상대로 왕은 내내 키스하고 속삭이고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속삭이는 듯한 왕의 그 달콤한 행태들. 그리고 왕에게 안겨 그 상냥하고 애정이 넘치는 행위를 받는 무표정한 살인 기계. 그 바퀴벌레 같은 한 쌍은 어울리지 않는 듯 참 어울렸다. 그래서 더욱 남의 속을 뒤집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왕비를 만지작거리시니까 보는 쪽이 좀…….”

성불구자처럼, 변태처럼 조물락거리고 있으니 보는 쪽이 답답하고 심란합니다―라고 말하면 저 혀에 독기름을 바른 형님이 웃는 낯으로 칼을 꽂아주시겠지. 스완은 최대한 말을 골랐다. 하지만 그의 노력을 알 리 없는 왕이 단숨에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내 비를 만지작거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상관은 없습니다. 없지만.”

안고 싶다는 게 너무나 티가 많이 나셔서 보는 쪽이 괴로울 따름이죠.

스완은 말을 고르려다 포기했다. 도저히 고를 말이 없었다.

“안으시면, 의외로 별거 아닐 겁니다.”

게다가 이미 다들 기정사실화하고 있고요. 스완의 말에 왕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지금 나에게 성교육을 하려는 것이냐?”

왕이 가당찮다는 듯 실소하자, 스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왜 잡습니까. ……하지만 전하께오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아해도, 안아보면 그 실체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

“전하께서도 그 점을 아셔서 왕비를 안지 않으시는 거 아닙니까?”

스완의 말에 왕이 팔짱을 끼었다. 스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왕도 스완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안으면 다 똑같고, 성교는 결국 욕구의 분출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왕이 훗 하고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애타는 시선으로 라파엘을 주시하자, 왕의 대답을 기다리던 스완이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지금 비웃음 산 겁니까?”

“안다니 다행이군.”

그것도 모른다면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했어, 라고 왕이 말했다. 스완이 신음하자 왕이 그제야 스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알아. 성교는 별거 아니고, 마음을 섞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왕이 턱을 괴었다. 라파엘이 눈을 뜬 지도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는 매일 라파엘과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이 식사를 했다.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시종들은 라파엘에 대해 ‘기계 같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왕은 라파엘의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포커페이스처럼 위장된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표정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할 뿐이었다. 왕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라파엘은 히죽 웃었다. 언젠가는 왜 쳐다만 보면 웃는지 물어보자 라파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연습하라고 하셨잖아요.’

왕은 왕세자로 태어나 즉위하여 왕이 되었지만, 라파엘처럼 순수하게 자신의 모든 말에 귀 기울이는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라파엘은 정말로 연습하고 있다. 왕이 ‘연습은 혼자 하는 거지’라고 놀렸더니 라파엘이 더 의아해했다.

‘하지만 전하의 앞에서만 웃으라고 하셨잖아요.’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라파엘이 ‘제가 잘못 이해했습니까?’라고 물어왔다. 왕은 라파엘에게 가만히 고개를 저어주었다. 라파엘은 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타인의 말을 다 이해하진 못할지언정, 라파엘은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실망이 두려워서 만찬을 거절하는 인간이 아니야. 날 모욕하지 말라고.”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을 기대하진 않는다. 왕은 느슨히 입가를 누그러뜨렸다. 라파엘을 볼 때마다 왕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라파엘이 곁에 없으면 뭘 하는지가 내내 궁금하고, 라파엘이 곁에 있으면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끌어당기게 되고……, 때로는 왕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그런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인내심은 어디까지 버텨줄까. 분명한 건 이미 인내심의 거의 대부분이 닳아 없어졌다는 것이다. 매일, 더, 라파엘을 원하고 있다. 그 무던하고 무표정하고 요령 없는 남자를 원하고, 또 원한다.

“이 내가 말이야.”

난 10대 애송이도 아니고, 심지어 왕이라고. 왕은 불퉁히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라파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얼굴도, 그 어깨도, 그리고 그 허리나 엉덩이도. 목이 타는 것만 같다. 왕이 두어 번 마른침을 삼키자 시종장이 재빨리 술잔을 가져와 건넸다. 술을 마시며 왕은 라파엘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처음에는 그가 살아나기만을 바랐다. 그가 살아나자 정말 기뻤고,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밤, 갑자기 그 열망이 피어났다.

처음에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그 열망은 부피를 늘려가, 이윽고 왕의 밤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매일 밤 라파엘의 몸을 안고 잠들고, 꿈속에선 그 몸을 거칠게 범했다. 미칠 것 같은 열기에 숨이 막혔다. 울리고 싶지 않은데, 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면서, 그런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러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모든 것을 혼란스러워하고, 두 팔을 열고 그 혼란을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이제는 그 열망이 호시탐탐 낮을 엿보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그 열망이 왕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 안으시면 되잖아요.”

스완이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그래, 안으면 되겠지.”

왕이 갑자기 스완의 말을 긍정했다. 아, 또 왜 이러실까. 사람 불안하게시리. 스완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자 왕이 말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과 별거 아닌 것처럼 그를 안으면 되겠지. ……그래, 안아서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야. 이 애타는 열망도 알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 거니까. 그건 고무적인 일이지. 나를 뒤흔들 게 세상에 정말 없다는 증거가 되어줄 수 있겠지.”

왕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왕이 손을 내밀자 시종장이 눈치 빠르게도 그 손에서 빈 술잔을 채가고 새 술잔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왕이 술을 마시기 전 스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르면.”

스완이 왕의 푸른 눈에 직시당했다.

“다르면, 그땐 어쩌면 좋을까.”

“뭐, 그러면.”

“나에게 목숨도, 성별도 버렸던 남자를 정부처럼 안은 다음 다른 걸 깨달아서, 그다음엔?”

왕의 말에 스완이 아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스완, 나는 그렇게까지 비겁하진 않아.”

라파엘이 왕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왕이 시종장에게 빈 술잔을 건네고 라파엘에게 한 팔을 벌려 보였다. 그 능글맞은 제스처에 박자를 맞춰주기엔 상대가 너무나 무뚝뚝했다. 라파엘은 왕이 팔을 벌려 보이거나 말거나 일정한 속도로 걸어 왕에게 다가왔다. 문득 스완은 라파엘의 뒤로 줄줄이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안네마리.”

왕이 뒤에서 따라오는 인물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저릴 듯이 달콤한 어조로 라파엘을 불러 안았다. 라파엘이 왕의 품에 안기자 왕이 라파엘의 귀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물었다.

“네 뒤의 저것들은 뭐지.”

“귀부인들이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노예인가.”

왕의 말에 라파엘이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문득 스완은 허무하게 죽어버린 바이런 라 프시스를 떠올렸다. 탐욕스럽고 야심도 있는 남자였는데, 참 허무하게 죽었다. 하지만 본래 궁중 사교계라는 곳이 허무한 곳이고, 비단 바이런 라 프시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가니 프시스 남작도 지하에서 억울하진 않으리라(도리어 억울한 걸로 치면 마리 트리지아 왕후가 더 억울할 테지). 그 바이런이 왕의 총애를 받을 당시에도 귀족들은 저렇게 노예를 선물해댔다. 첫째는 뇌물용이고, 둘째는 탐색용으로 겸사겸사 선물했었는데, 바이런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보다 지금 당장 라파엘의 뒤를 따르는 노예의 수가 더 많았다. 바이런 라 프시스는 출신도 불분명하고 남자지만 라파엘은 ‘안네마리 라 쇼어’라는 근사한 간판에 여자―라고 알려져 있다―이기까지 하니 그 격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대단한 선물이었다. 소문은 스완이나 왕이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강력한 모양이다.

“돌려주어라.”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노예들이 서둘러 물러났다. 왕이 라파엘의 머리를 안아다 자신의 가슴에 묻으며 “네게 시녀가 필요하면 말하라. 내가 얼마든지 내려줄 테니까”라고 속삭였다. 라파엘에게 상냥히 속삭이면서 왕은 주변의 귀족들을 슥 둘러보았다. 노예 선물을 용납지 않겠다는 경고성 시선에 귀족들이 재빨리 왕의 시선을 외면했다.

“자, 왈츠가 시작하는군.”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의 손을 잡았다.

“저는…….”

“이건 기본 왈츠지 않느냐. 너도 이 정도는 배우고 들어왔을 텐데.”

왕의 말에 라파엘이 그렇긴 하지만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어지간히 자신 없어 하는 얼굴에 왕이 라파엘의 뺨에 입술을 스쳤다.

“괜찮아, 내가 이끌어줄 테니까.”

사실 널 이끌고 싶은 건 왈츠가 아니지만.

왕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심사를 갈무리하며 라파엘을 데리고 홀의 중간으로 나갔다. 왕이 왕비를 데리고 나오자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멈추고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부드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사냥 대회 전야제 다음 날, 즉 사냥 대회 개최일.

라파엘은 아침부터 도착한 수많은 선물들을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현실에 산처럼 쌓인 선물과 문 플레이스의 철문 저 너머까지 줄을 서 있는 알현 신청자들을 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들지 않을 지경이었다. 라파엘이 목을 긁적이는 사이 시녀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시녀들을 지휘했고, 시녀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선물들을 정리하고 알현 신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라파엘의 시중을 들었다. 라파엘이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온실에 도착하자 귀부인들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숫자의 귀부인에 라파엘이 말을 잃자 귀부인들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전하.”

가장 지위가 높은 공작부인을 필두로 많은 귀부인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문안 인사드리옵니다.”

문안 인사? 라파엘은 온실을 가득 메운 여자들의 숫자를 대강 세어보았다. 대충 보아도 그 숫자는 서른이 넘어 보인다. 라파엘 자신을 포함해 여덟 명이 정원인 티파티에 서른 명이 참석하다니, 라파엘은 기가 질려버렸다. 라파엘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여자들이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돌아가라며 ‘네가 늦게 왔다’는 둥, ‘뻔뻔하게 네 가문 주제에 어디서 버티고 있느냐’는 둥 하는 통에 시끄러워졌다.

이쯤에서 왕비가 ‘다 같이 차를 마셔요’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한 귀부인들이었지만 왕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귀부인들이 싸우면서 왕비를 흘끔거렸다. 왕비는 초췌하고 창백한 안색을 한 채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사람들은 뻔한 연극을 하다 당황해서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따뜻한 초봄의 온실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감돌았다.

왕비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암청색 레이스 장갑을 낀 채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얼굴은 듣던 대로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의례적인 미소는 고사하고, 당연한 인사 한 마디조차 없었다.

‘보복인가.’

귀부인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녀들은 왕비의 티파티를 고의적으로 무시해왔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한편 그 티파티에 재빨리 응한 적이 있던 몇몇 귀부인들은 노골적으로 우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사람은 시류를 잘 타야 하는 법이라니깐.

라파엘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속공으로 배운 궁중 예법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경우를 현명하게 넘기는 법은 침묵이라 믿는 라파엘이 입을 다물자 귀부인들은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 마치 어두운 보름밤 그 의아한 광기를 닮았을 무렵―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아침이었다―즉, 이제 더는 어떻게 수습이 불가능하게 여겨졌을 무렵 유일하게 수습이 가능한 남자가 들어섰다.

“안네마리.”

유일하게 수습이 가능하긴 하지만 수습을 해줄 매너는 전혀 없는 왕이 여자들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라파엘을 당겨 안았다.

“오늘 사냥 대회라 하였는데, 왜 모자를 챙겨 쓰지 않았느냐.”

질문은 라파엘에게 했지만 시선은 그 뒤에 있는 시녀장에게 주고 있다. 왕의 질책 어린 시선에 시녀장이 그저 죄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자 왕의 시선이 라파엘에게로 옮겨갔다.

“티파티는 실내에서 있어서요.”

라파엘이 덤덤히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귀부인들이 서로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왕비는 쇼어가의 여자답게 이그나치오 가문의 왕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긴, 왕이 쇼어 가문에 한 짓을 생각하면 좋을 리가 없지. 왕은 왕비를 총애하는 척하면서 뒤로 쇼어가를 치고 왕비에게 근신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왕비와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어 다시 왕이 저러는지는 모르지만, 왕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다. 최악의 남자. 귀부인들의 엄격한 평점표에 왕의 평점이 매겨졌다. F.

“티파티라.”

왕이 귀부인들을 한 번 돌아보더니 픽 비웃었다.

“이런 건 이제 하지 않아도 좋다.”

의무를 지키라느니 하며 유령 티파티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건’ 이제 하지 말란다. 시녀들이 울컥하는 대신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데 라파엘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티파티는 하지 않는 게 이득이다.

라파엘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그는 마리의 일을 덮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마리가 왜 죽어야 했는지가 궁금했고, 그 이유를 추적할 생각이었다. 아니, 도리어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마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당연히 마리 라 쇼어―마리 트리지아 왕후―가 행복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쇼어가에서 그녀는 언제나 사랑만을 받으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신밖에 없어. 그렇게 울던 마리에게 어떻게 해줬어야 옳았는지 라파엘은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그러자면 마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티파티는 없는 것이 나았다.

“예, 전하.”

라파엘의 대답에 귀부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들이 우아하고 앙칼진 항의를 해보기도 전 왕의 손짓 한 번에 특수군이 들이닥쳐 그녀들을 정중하지만 단호히 밖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