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총비
여기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포기해본 적이 없는 여인이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인생은 늘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왕비 후보가 되었을 때, 가문을 등에 업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혼자의 힘으로 왕비가 될 수 있는 여자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여자를 물리치고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되어서는 왕의 총애를 여러 여자와 나눠야 했고 늘 자리는 불안했다. 그녀가 아이를 낳기 전 다른 여자가 먼저 아이를 낳았다. 무엄하게도 그 아이는 왕세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이는 가장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2인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일단 왕세자의 어미부터 처리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 낙마 사고로 죽고 말았고, 그녀는 그래서 왕세자를 제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왕세자가 즉위하여 자신을 내쫓는 꼴을 결코 두고 보지 않았다. 그녀는 반 강제로 왕세자빈 자리에 친정의 여자를 앉힐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어려웠지만 언제나 승리했다. 그것은 그녀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 라 이그나치오. 헤수스의 지엄한 태후였다.
“다시 말해보아라.”
그녀는 주름이 거의 없는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시녀들은 어쩌면 그녀가 평생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런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태후의 최측근이자 소꿉친구였던 육군 대장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고 말했으니까.
“궁의가 뵐 수 없다고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뵐 수 없다? 다음에 보자는 게 아니고?”
“예, 전하. 뵐 수 없겠다고, 건강하시라고…….”
태후의 손에 들린 가위가 장미를 싹둑 잘랐다.
“이상한 어법이로군. 오랜 시간 궁의를 지낸 자가 어찌 그리 궁중 예법을 모를까.”
태후의 말에 시녀들이 불안한 듯한 시선을 교환한다. 궁의는 궁중 예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태후를 배신한 것에 불과하다. 저번 주 태후가 딸을 궁중 사교계에 데뷔시켜주겠다고 하자 영혼이라도 바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식으로 배신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왕이 눈치를 챈 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급작스러운 거절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들은 오한이 들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왕. 태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떨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태후가 왕에게 어떤 행동을 해왔고, 왕이 태후에게 어떻게 그 행동을 돌려주었는지 알면 떨 수밖에 없다. 둘은 이미 화해가 불가능한 사이였다. 태후는 왕을 몇 차례나 공적 및 사적으로 공격했고, 왕은 즉위하자마자 그 공격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지금.
왕은 태후의 마지막 무기였던 가문마저 밀어버렸다. 어느 날 밤 붉은 빛이 밤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그 붉은 빛은 쇼어가의 저택이 타는 빛이었다. 생존자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쇼어가를 친 것은 왕이다. 왕의 특수군이 저지른 짓이다. 왕의 특수군이 아니라면 이 세상의 어느 집단도 감히 쇼어가를 칠 수 없으며, 이토록 철저하게 증거를 말살할 수도 없다.
태후는 고립되고 있었다.
“주인을 바꾸는 개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
태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언제나 힘들었지만 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쟁취하고 지켜왔다. 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가엾지만 그녀가 어찌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에게선 연락이 없나?”
태후의 말에 주임 시녀가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곳은 어디였지?”
“토우셔입니다.”
태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한 청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청년을 어릴 때부터 봐왔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청년이 쇼어가의 가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왔다. 야망도, 그리고 야망을 위해서라면 뭐든 잘라낼 수 있는 비정함도.
‘그럼, 그 방만한 놈에게 대항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몰살의 즉위 축하연. 놈의 그 광소가 아직도 눈에 훤했다. 놈에게 대항하려면 그 정도의 냉정함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도 뛰어나지 않은가. 다른 놈들은 느슨히 퍼질러 있다가 처리되었지만 청년은 달랐다. 그는 홀로 빠져나갔고, 홀로 살아남았다.
“그래.”
청년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그는 야심이 큰 자이다. 그는 반드시 힘을 갖춰 돌아올 것이고, 그녀는 다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지금은 굴욕적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라 현명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아이지.”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올케가 없어진 이상 그녀는 파티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사교계의 여왕은 언제나 쇼어가 여인의 것이니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고, 태후 전하께오서는 무사할 거라 생각지 마십시오. 율레즈의 팔 아래 만사는 공평정대하게 흘러가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그 얄미운 올케가 죽은 것만이 이번 사태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한 것은 피. 올케니 어쩌니 해도 그녀의 몸속에는 다른 가문의 피가 흐르고, 그런 이상에는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피가 섞인 자뿐이었다. 그녀의 남동생이자 쇼어 공작인 브라이튼 라 쇼어, 그의 자식들인 에드워드와 제럴드, 그리고 마리.
그래, 피뿐이야. 그나마 믿을 만한 건 피뿐이지.
태후가 거울 속의 여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띤 채 태후에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거울 구석으로 시녀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시녀는 주임 시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주임 시녀가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주임 시녀가 태후에게로 다가와 속삭였다.
“제럴드 라 쇼어 근위대장이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제럴드? 제럴드가 살아 있단 말이냐.”
어느 날 밤이었다. 쇼어가의 저택에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생존자 없음, 목격자 없음. ―완전 범죄였지만, 모두가 심증은 가지고 있었다. 외무대신과 재무 비서관, 근위대장과 사교계의 여왕이 몰려 있는 세도가를 상대로 완전 범죄를 저지를 자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이그나치오 23세, 쇼어가에 친모를 잃고 그 자신도 몇 번이나 암살의 위협을 받은 왕뿐이었다. 왕은 철두철미한 냉혈한이었다. 그가 쇼어가를 말살하는 데 있어 제럴드 라 쇼어를 빠뜨렸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예, 지금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후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혹시 왕의 계략은 아닐지 경계심이 고개를 든 탓이었다. 하지만 왕의 함정이든 아니든 만나봐야 하는 것만은 자명했다. 그녀는 알현실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들이 길게 꼬리를 이루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넓은 복도, 길고 높은 창에서 초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빛과 빛 사이를 지나치던 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초조한 얼굴로 내정원에 서 있는 조카를 발견하고는 그녀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곧 그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태후 전하!”
제럴드가 창백한 얼굴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매우 오랫동안 뵙지 못하였습니다. 율레즈의…….”
“율레즈의 가호로 너를 다시 보는구나. 인사는 되었단다. 알현실에서 기다리지, 왜 여기까지 나와 있느냐.”
태후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묻자 제럴드가 눈을 감았다.
“집안의 참사를 전해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들었다. 그 참사에 희생되었을 줄 알았던 네가 살아 돌아와 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태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허나, 네 부모가 죽고 형제가 멀리 도망가야 했던 와중에 너 홀로 살아서 궁내를 활보할 수 있는 이유는 좀 들어야겠구나.”
라피.
제럴드는 마지막으로 본 라파엘을 떠올렸다. 왕의 품에 안긴 채 시체처럼 잠들어 있던 라파엘을 떠올리자 식은땀이 흘렀다. 라파엘이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손이 떨렸다. 왕의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 마지막 기억, 라파엘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살았는가, 죽었는가. 피가 통하는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태후뿐이었다. 제럴드는 태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태후 전하, 왕비 전하에 대해 고할 말씀이 있습니다.”
“왕비? 안네마리 말이냐? 그래, 나도 그 이야기가 듣고 싶었더랬지. 알현실로 가서 긴 이야기, 서슴없이 해보거라. 자, 일어서거라.”
태후의 말에 제럴드가 일어섰다. 태후는 피가 통한 자니까 분명 제럴드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녀도 라파엘을 구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말하고―.
문득, 제럴드의 머릿속에 그녀의 조심성 없는 한마디가 떠올랐다.
‘네 부모가 죽고, 형제가 멀리 도망가야 했던 와중에.’
형제가 멀리 도망을 갔다? 제럴드는 앞장서 걷고 있는 태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차림이었다. 분명 그의 어머니 쇼어 공작부인이 사라지자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차림이었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당황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제럴드가 살아 돌아온 것을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형제가 멀리 도망을 갔다. 분명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에디는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심장이 지독하게 두근거렸지만, 제럴드는 태연함을 위장한 채 물었다. 앞서 걷던 태후가 호호 소리를 내며 웃었다.
“먼 곳에 있다고 하더구나. 나도 정확한 위치는 듣지 못했단다.”
에드워드와 연락이 된다?
“먼 곳입니까…….”
제럴드가 말을 흐렸다. 먼 곳이라면 어디일까. 아니, 그전에 그 말이 사실이긴 할까? 그는 형인 에드워드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둘은 같이 자랐고, 제럴드는 부모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에드워드를 지켜봐왔다. 에드워드는 잔인했다. 제럴드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에드워드가 인간적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마리와 라파엘이 태어났을 때도, 마리가 왕세자빈 후보에 간택되었을 때도.
아니, 그래도 수도나 그 근교에 있지는 않을 거다. 제럴드는 다시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냉혈한이었지만, 자신의 안신에 민감한 귀족 남자였다. 왕의 특수군이 당일치기로 움직일 수 있는 거리에는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몸을 숨기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어디일까.
제럴드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려고 한 적이 없던 에드워드가 어째서 태후에게만 연락을 했을까. 제럴드는 태후의 가느다란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라파엘의 그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당연히 태후가 라파엘을 구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태후는 에드워드의 편이었고, 에드워드는.
에드워드는 라파엘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제럴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귀족으로 태어나 표정을 제어하는 교육을 받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제럴드는 태후의 앞에서 도저히 표정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알현실에 도착해 태후와 마주 보고 앉자마자 제럴드가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라며 입을 열었다.
“안네마리는 사실 ‘안네마리’가 아닙니다. 이 점을 알고 계시는지요?”
“내 예상은 했거니. 당연하지 않느냐. 10년이나 못 찾은 안네마리인데. 그래……, 그래서 지금 왕의 침실에 있는 안네마리는 누구지?”
태후가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시녀들이 차를 내오는 동안 제럴드는 주의 깊게 태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근위대장이었고, 상대의 거짓말을 가리는 기술을 따로 훈련받았었다. 시선의 움직임, 입가의 경련, 안색 등을 주의 깊게 확인한 제럴드가 이윽고 잔을 들었다.
“저도 모릅니다.”
태후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그럴 리가 없지. 네가 모르는 집안 일이라는 게 가당키나 하더냐.”
“모릅니다. 혹시 에드워드는 알지도 모르지만요.”
제럴드의 말에 태후의 시선이 한순간 움직였다. 제럴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에디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는군요.”
제럴드의 말에 태후가 시선을 흘끗 피했다. 제럴드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마셨다. 찻물이 제럴드의 목을 타고,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동안 알현실은 무거운 분위기로 어두워졌다. 차를 단숨에 마신 제럴드가 일어섰다. 그 단호한 얼굴을 본 태후가 같이 일어서며 달래려는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제럴드, 우린 핏줄이지 않느냐.”
제럴드는 잠시 말이 없었고, 태후는 그에게 매달리는 시선을 보냈다. 제럴드는 늘 마음이 약한 아이였다. 그것이 흠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는 그녀에게 유리했다. 덩치가 크고 근육이 우락부락한 거구의 제럴드가 잠시 태후를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저와 태후 전하보다는, 에디와 태후 전하가 더 진한 피를 가지고 계시지요.”
그 말에 태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제럴드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럴드가 말했다.
“저는 형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사랑할 수 없었지만 제럴드는 분명 노력했다. 그는 모든 식구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하던가. 에드워드는 왕의 개인 재산을 빼돌리고 있었고, 쇼어가가 무너지는 순간에 홀로 도망쳤다. 에드워드에게 제럴드 자신은 정말 가족이었을까? 에드워드는 제럴드를 가족이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런 헛된 노력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리.”
태후가 제럴드를 친근하게 불렀지만 제럴드는 고개를 저었다. 라파엘은 쓰러졌고, 마리는 죽었다. 도대체 쇼어가라는 간판에 몇 사람을 더 희생해야 한다는 건가? 그는 아직도 왕의 육체를 기억했다. 왕과의 성교가 준 지독한 느낌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가 죽어도, 그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은 그의 시체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태후는 아직도 그에게 ‘핏줄’을 운운하고 있다.
핏줄.
제럴드는 그 단어가 이제 끔찍해졌다.
“저는 에드워드에 대한 태후 전하의 극진함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게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시녀 한 명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순간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럴드가 굳은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자, 태후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둘은 침몰하는 배에서 맞닥뜨린 고양이와 쥐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주 오래도록,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제럴드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형에게 전해주십시오. 다음에 만나면 체포하겠다고.”
“제럴드 라 쇼어!”
태후가 소리쳤지만 제럴드는 등을 돌렸다. 예를 갖춘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제럴드를 태후가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쏘아보아도 건장한 등은 흔들림 없이,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던 태후가 어느 순간 입술을 깨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태후 전하.”
주임 시녀가 염려에 찬 얼굴로 다가오자 태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됐어.”
“하지만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됐다니까.”
태후의 차디찬 거절에 시녀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에 위로하는 것처럼 태후의 머리장식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그 손길을 받아들이면서 태후는 버릇처럼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가 손을 폈다. 드디어 왕이 쇼어가를 쳤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그가 오랜만에 파티를 연다는 소식은 우울한 궁중 사교계에 든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오랜만에 활기가 넘치는 궁중 사교계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은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쇼어가의 여자로서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위해 치장을 하다 보니 먼저 간 아들 생각이 났다. 아들은 저 빌어먹을 놈에 비하면 자질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녀는 객관적인 사람이었고, 친자식이라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그 능력을 평가할 줄 알았다. 그녀의 아들은 유감스럽게도 저 왕에 비하면 모질지 못했고, 총명함도 떨어졌다. 그녀의 아들은 그저 착하고 순할 뿐이었다. 제 배다른 형이 저에게 차가운 것에 상처 입던 아들이 어째서 술을 잔뜩 마시고 땅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날 말을 몰고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아들이 대죄를 지은 거라고 수군거렸다. 추운 겨울날 홑옷만 걸치고 술을 잔뜩 마신 채 숲으로 사라지다니, 그건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었다.
‘미련한 것.’
오랜만에 아들 생각을 한 태후는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좋은 남자가 될 아이였다. 평생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 형의 눈치를 보다 결국 허무하게 가버리지만 않았어도……. 미련하고 미련한 것! 태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후 전하, 머리장식이 흐트러집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해서 태후는 다시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어린 시녀가 가져온 거울 속에서는 아직 젊은 여인이 화려하게 치장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꼭 궁지에 몰린 것만 같아서 짜증이 났다.
이사벨 라 쇼어, 왕후가 된 이후 이사벨 로지아나 태후가 된 그녀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가문인 쇼어가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인생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왕세자빈 후보에 올랐고, 왕세자빈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그녀의 선생들은 ‘왕세자빈 전하가 되시면 하세요’라며 그녀의 모든 자유를 제한했고, 그녀는 자신이 왕세자빈이 되는 것이 당연하며, 왕세자빈만 되면 자신에게는 행복만이 남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왕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로잘리 제2왕비.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녀는 천성적으로 밝은 여자였다. 환한 미소를 보자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왕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자신은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왕이 사랑하는 여자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왕세자빈’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아왔는데, 왕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치를 모르는 그년을 천천히 망가뜨렸다. 그건 그녀의 당연한 권리 행사였다.
‘자아, 어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는 어머니께서 왕명을 거절하실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놈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놈은 로잘리 왕비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서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태후는 그 순간을 참아낸 자신을 칭찬했다. 참아야 했다. ‘선왕의 인장’으로 인정되는 면책권은 세 번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면책권을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안네마리라.”
그녀는 아주 어릴 때 안네마리 라 쇼어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특이한 외모는 아니었고 게다가 갓난아기였는지라 기억에 남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왕비가 ‘안네마리 라 쇼어’일 리는 없었다. 관대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타나는 안네마리라니. 말도 안 되지. 분명 그녀의 동생인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이나 혹은 ‘그 아이’가 연고도 없는 계집을 데려와 연극을 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는데, 이제 제럴드가 그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렇다면 그 계집은 지금쯤 공포에 질려 있으리라. ……반드시 접촉해야 하는데, 왕의 가드가 만만치 않았다.
“아직도 그 아이에게선 연락이 없었나?”
시녀는 죄송합니다 하고 웃어 보였다.
“토우셔라.”
안네마리와 그 부모가 죽었던 곳. 서대륙으로 향하는 작은 항구 도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푸른 바다가 있는 곳. 태후는 소녀 시절 거기에 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문득 그녀는 안네마리, 라는 이름에서 뭔가가 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안네마리. 안네마리. 그 귀엽고 어린 계집을 한 번은 만났었지. 어땠었지.
곧 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안네마리가 어땠었든 늘 그렇듯 물증은 없을 것이다. 선 플레이스든 문 플레이스든 그 허공의 다리로 이어질 궁에 있을 계집은 안네마리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증명해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을 굳이 증명해내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남아 있었다.
에드워드 라 쇼어. 상냥한 얼굴 뒤로 비정함을 숨긴 진정한 쇼어가의 피를 이은 자.
“왕비는 어디에 있다더냐?”
쇼어가를 쓸어버리면서 왕비도 근신 명령을 받았고, 왕후궁 문 플레이스의 모든 고용인은 감시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태후로서는 반드시 왕비와 접촉해야 했다. 왕비는 어쨌거나 왕에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자, 그녀의 눈을 빌어 왕의 동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까 문 플레이스에 다녀온 것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이…… 좀 이상합니다.”
주임 시녀가 중얼거렸다. 태후가 문 플레이스에서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문 플레이스의 동태를 살폈던 그녀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태후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이상하다?”
“분명 왕비는 근신 명령을 받고 자숙 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문 플레이스에서는 사람의 기척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 플레이스에서 나온 정보입니다만…… 왕비가 전하의 침실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태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귀족은 누구와도 침실을 같이 쓰지 않는다. 성교는 하더라도 침실은 한 개인의 소유로, 그 개인의 고유 영역이다. 심지어 왕족이나 되면 침실을 같이 쓰기는커녕 건물도 같이 쓰지 않는다. 그런데 왕의 침실에 왕비가 머무르고 있다고? 왕이 다른 자들보다 털털하고 수더분해서 다른 이들을 침실에 들일 인물이냐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왕세자였고, 언제나 왕족이었다. 진정한 왕족이었다. 왕을 증오하는 태후도 그 점만은 인정했다. 왕은 늘 왕족이었다. 출생부터 지금까지. 그는 왕족으로서의 기품과 자존심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다른 이와 침실을 공유하고 있다? 건물도 아니고, 침실을?
“대단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시녀의 말에 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총애가 아니라 감금이겠지. 과연, 아무도 믿지 못하니 제 침실에 가둬두겠다는 뜻이렷다. 태후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화장대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왕을 잘 알고 있었다. 왕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자이다. 놈은 지독한 냉혈한이었다. 누군가를 총애할 인물이 못 되었다. 제 아비를 닮아 비열하기 짝이 없지.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오서 그렇게 총애하는 비라면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 친정 사람이기도 한데.”
왕이 쇼어가의 인물을 총애할 리가 없다. 분명히 감금이다. 그러나 감금이든 뭐든 왕의 침실에 있다면 왕의 동태를 살피는 데 있어 그만한 장소가 없으리라. 태후의 연분홍색 손톱이 톡톡 탁자를 두드렸다.
시녀가 난처해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근신 명령이 해제되지 않아서…….”
“왕비가 선 플레이스에 머무는 건 확실한 정보냐?”
주임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확실합니다.”
탁자를 톡톡 두들기던 태후의 손이 멎었다. 많은 시녀들이 태후의 앞에서 가만히 대기하는 가운데 태후는 알현실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사냥 대회가 너무 지체되는군.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전하께 조언을 올려야겠다. 누가 편지지 세트를 가져와라.”
곧 시녀 한 명이 편지지 세트를 가져왔다. 태후는 우아한 필기체로 거침없이 서신을 써내려갔다. 단조롭고 기품 있는 말씨로 채워진 내용은 언뜻 보기엔 왕을 위한 조언처럼 보였다. 하지만.
“늙은 암여우가 안달이 났군.”
오후 늦게 전달된 서신을 보고 왕은 코웃음을 치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시종장이 붉은 모포를 가져와 건네자 왕은 자신이 안고 있는 안네마리에게 그 모포를 덮어주며 이죽거렸다.
“그래, 꼬리를 잘랐으니 머리가 나오는 게 맞지. 하지만 꽤 시시한걸. 그 잘난 척, 도도한 척 굴던 여자가 이렇게 안달 난 꼴이라니, 너무 쉽잖아.”
왕의 말에 건너편에서 술을 마시던 스완이 물었다.
“어떤 내용입니까?”
“사냥 대회를 열라는군. 왕실의 고유한 전통을 잇는 것이 왕의 덕목이라나.”
“답네요. 한마디로 왕비의 생사가 궁금하다는 겁니까.”
스완의 말을 듣자, 왕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생사를 왜 태후가 궁금해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 순진함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왕은 라파엘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며, 스완에게 대답했다.
“그래. 같은 가문 출신이니 어르고 달래서 제 수족처럼 다룰 생각이겠지.”
라파엘의 순진함에 가슴이 벅차오른 건 왕 혼자뿐. 당대 악명 높은 살수의 아방한 얼굴을 볼 때마다 척추가 휘는 듯한 위화감을 느끼는 스완이 고개를 흘끗 돌리면서 말했다.
“솔직히 ‘정말’ 같은 가문 출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무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제 와서. 정말 우습군요.”
스완의 코웃음에 왕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라파엘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술을 마시던 그가 라파엘의 귀에 속삭였다.
“술은 마시느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마시지 않습니다.”
“어째서?”
“마셔보지 않아서.”
왕이 키득거렸다. 음산하게만 들리던 웃음소리가 경쾌한 울림으로 바뀌었다.
“그래. 그럼 마셔볼 테냐?”
왕이 마시던 술잔을 왕비의 입술에 대어주는 걸 보면서 스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족들은―물론 왕족을 포함해서―성교를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서로의 거리를 지킨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예법이다. 귀족의 예법은 물론 왕족의 궁중 예법에서 기인하며, 사실 왕족들은 예법과 유행의 선두 주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 또한 결벽증이 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교를 제외하고는 정부들과 같은 자리에 눕는 것조차 싫어했다. 상대의 피부가 닿은 시트에 자신의 피부가 닿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 그이니 당연히 누군가와 잔을 공유한 적은 없었다.
왕비의 입술에 금빛 술이 닿았다. 투명한 잔 너머 왕비의 입술이 반쯤 술에 잠기는 것을 보며 왕이 웃었다.
“입술을 열어봐라.”
왕비는 잠자코 입술을 열었다. 가볍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술이 흘러들어갔다. 왕비의 목젖이 한 번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본 왕이 술잔을 거두었다. 왕비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술을 마신 왕이 “생애 처음 마신 술치고는 귀한 걸로 시작하는군. 어떠냐, 맛있는가?”라고 물었다.
“씁니다.”
술을 처음 마시는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왕비는 왕의 무릎에서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왕이 목각 인형을 무릎에 앉혀놓고 희롱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쓰더냐? 하하, 그래. 담배도 난생처음인가?”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 즐거운 얼굴로 물었다.
“이 담배도 피워보겠느냐?”
왕이 재떨이에 기대어둔 파이프를 왕비의 입에 물려주었다. 왕비가 가볍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뱉었다.
“이건 달콤한가?”
“씁니다.”
매력 없긴. 스완이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서 콜록거리면서 얼굴이라도 찌푸릴 것이지 목석보다 더 차가운 얼굴로 ‘씁니다’가 뭐냐고. 그런데 왕은 뭐가 좋은지 크게 웃으면서 왕비를 안고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어린애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쓰지. 담배는 대체로 이렇게 쓰지만 술이라면 아주 달콤한 술도 있다. 그걸 가지고 오라 할까?”
왕비가 고개를 젓자 왕이 왕비의 얼굴에 이곳저곳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케이크나 쿠키를 먹겠느냐?”
왕비는 또 고개를 저었고, 왕은 왕비의 귓가에 키스했다.
……사람을 불러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스완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며 생각했다. 나도 연애해봤어, 당신들보다 내가 연애를 열 배는 더 많이 해봤다고! 왕년에 연애 못 해본 사람 누가 있다고 이러는 거야. 그는 이부형제인 왕을 원망하고 싶었다. 분명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자고 불러놓고 이게 무슨 파렴치한 행동이란 말인가.
“그래, 졸리느냐? 졸리면 얼마든지 자도 된다.”
왕이 왕비의 등을 토닥거렸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 커플이다. 생각 같아서는 인간의 도리와 사교의 기술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그저 계급이 원수였다. 스완은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왕비가 새근새근 잠들자 왕은 왕비가 마치 아기같이 느껴졌는지 계속 토닥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왕의 무릎 위에 있는 저 깡마른 남자는 아기처럼 귀엽게 잠든 게 아니다. 검을 두 자루나 휘두르다 총을 맞고 약에 취해서 꾸벅꾸벅 조는 것이다. 병아리처럼 사랑스러운 생물이 아니다. 앙상하게 마르고 병들어 식용으로도 쓸 수 없는 수탉이 약에 취해서 조는 쪽이다.
하지만 왕의 눈에는 분명 사랑스러운 병아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토록 부드러운 눈으로 상대를 어루만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수탉이 취향인 변태일 수도 있지.’
스완이 심술궂은 생각을 했을 때였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군.”
왕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흘렀다.
태후 이사벨 로지아나가 왕에게 정식 알현을 요청한 것은 그녀가 서신을 보내온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모욕한 왕에게 찾아온 것이다. 왕이 즉위를 한 지 6년, 그동안 은둔하고 있었던 태후의 등장에 궁중 사교계는 바짝 긴장했다. 왕은 쇼어가를 쳤고, 이로써 태후는 고립되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태후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겠냐는 시각과 태후의 히든카드가 나올 거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던 시점이었다. 화해 시도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공격인가. 쇼어 공작부인이 사라지자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자연스럽게 되찾은 태후였지만 그 위세는 예전만 못했기에 더욱 행보가 주목받고 있었다.
태후의 알현 요청을 받아들인 날, 왕은 사냥 대회 전야제를 열었다. 본래 연초에 열리는 사냥 대회가 초봄에 열리게 되었는데도 궁중 사교계는 이상할 정도로 들떴다. 흰 눈 위에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피야말로 사냥 대회의 탐미라고 말하는 귀족들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냥 대회가 부부 동반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그 열기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왕이 왕비를 총애하고 있다. 왕비를 침실에서 놓아주지 못할 정도로 극히 총애하고 있다는 소문에 귀족들은 어떻게든 왕비에게 줄을 대어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는 공식적으로 근신령을 받은 몸이라 어떻게도 줄을 대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냥 대회가 열린다면 왕비는 공식석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 되고, 즉 근신령은 자동 해제가 된다.
“얼마나 왔더냐?”
왕이 보고서를 받으며 묻자 시종장이 정중히 대답했다.
“초대장을 받은 귀족은 전부 왔더이다.”
“그렇겠지, 안네마리를 보고 싶을 테니까.”
하여간 한가한 것들이지, 왕이 비웃었을 때 시종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시종이 무릎을 꿇으며 하는 말에 왕이 시선도 주지 않자 시종장이 왕을 대신해 물었다.
“뭐지?”
“왕비가 일어났습니다.”
“아아.”
왕비라는 말에 왕이 기분 좋은 얼굴로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가면 갈수록 일어나는 시간이 빨라지는군. 약에 취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건 분명 호전되고 있다는 걸 뜻하는 거겠지.”
“예, 궁의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회복력이라고 감탄하더이다.”
시종장이 왕의 기분을 슬쩍 돋우었다. 왕비가 알고 보니 남자였다는 사실에 왕은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왕비의 곁에 있을 때마다 왕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미 시종들은 왕비를 상당히 조심히 대하고 있었다. 왕은 왕비를 총애하고 있다. 왕이 태어나서 이토록 강렬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시종들은 혹시나 왕비의 털끝 하나라도 잘못돼 왕의 노여움을 뒤집어쓸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왕비가.”
시종이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의 시선이 시종을 향하자 그가 서둘러 고했다. 시종의 말이 이어질수록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다 듣지도 않은 채 왕이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너!”
왕이 자신의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고함을 쳤다.
시종의 보고대로 라파엘은 바닥의 러그 위에 앉아 있었다. 곁의 시종들이 하나같이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라파엘은 지도와 몇 가지 책을 꺼내놓은 채 뭔가에 몰두해 있다가 왕의 고함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의 그 검은 눈과 마주친 왕이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려던 걸 참고 시선을 내려 라파엘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았다. 「왕실 족보」. 왕은 “그 책은 뭐 하게?”라고 물었다.
“아, 그냥.”
“그냥? 궁의가 말하지 않더냐? 침대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라고!”
“예……. 그런데 이제 괜찮…….”
왕이 이를 악물었다. 라파엘에게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퍼부을 생각으로 달려왔는데 정작 그 얼굴을 보자 그럴 기분이 사라져버렸다. 왕은 “좋아, 좋아. 좋다고”라는 말을 결코 좋지 않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라파엘의 옆에 앉았다. 그가 라파엘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아, 그러나 결코 다친 옆구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끌어당겼다. 자신의 무릎 위에 라파엘을 안은 왕이 그 어깨에 입술을 묻으며, 라파엘의 마른 어깨 뒤쪽에서 그의 앞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저 지도는 분명 근위대에서 쓰는 지도다. 저걸 라파엘이 가지고 있다는 건…….
“제럴드 라 쇼어군.”
왕의 말에 라파엘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왕이 지도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재스민, 혹은 클레르.’ 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왕의 시선이 지도에서 코앞에 있는 라파엘의 목으로 움직였다. 왕이 라파엘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마치 귓속말을 하려던 듯 보여서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왕이 피식 웃었는데, 왜 웃었는지 라파엘은 알지 못했다. 라파엘의 귀가 살짝 쫑긋거렸다. 그게 마치 은여우처럼 귀엽고 애틋해서―얼굴을 모르던 시절에 ‘검은 여우’라고 불러놓고 얼굴을 알게 되었다고 은여우로 재빨리 뉘앙스를 변경한 왕이었다―왕이 웃음을 흘렸지만 왜 웃는지는 라파엘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안네마리.”
그렇게 부르자 라파엘이 어깨를 움츠렸다. ‘라파엘’이라고 부르면 라파엘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안네마리라고 부르면 라파엘은 당황한 흔적을 드러낸다. 표정으로 드러내는 법은 없었지만 왕은 라파엘이 당황하는 것을 손쉽게 알 수 있었다. 언제는 어깨를 움츠렸고 언제는 또 시트를 움켜쥐면서 라파엘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지금처럼. 라파엘의 감정이 수그러들기 전에 왕은 훅― 입김을 불었다.
“……!”
라파엘의 몸이 1미터 이상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이 검을 빼어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방 안을 울렸다. 허공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아 침대로 착지한 라파엘이 자신의 귀를 부여잡은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왕은 졸지에 비어버린 자신의 허벅지를 불만스럽게 내려다보다가 라파엘을 바라보곤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총을 맞는 그 순간에도 미소 지어주려 노력했던 남자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꽤 유쾌한 일이었다.
왕의 특수군들이 왕의 앞을 막아서고 그 앞을 호위병들이 결연한 얼굴로 막았다. 그리고 시종들도 대거(dagger)를 손에 든 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의 눈에는 겹겹이 싸인 인간 벽 너머의 왕만 보였다. 왕이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온몸에 돋던 소름과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뭔가 때문에 라파엘은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빛을 보았을 때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라파엘은 자신의 귀를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귀가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문지르지 않을 수 없는데 문지를수록 더 뜨거워졌다.
라파엘은 뜨거운 귀에 놀라 눈앞의 살기를 잊어버린 상태였지만 그 살기들의 가장 뒤에 있는 왕은 그렇지 않았다.
“너희가 감히 내 비에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거냐?”
왕의 태연한 목소리에 그를 지키려던 모든 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이 앉은 채 장총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1미터가 넘는 총이 가볍게 돌아갔다.
“응?”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시종장이었다. 그가 슬그머니 대거를 옷 속으로 감추자 다들 은근한 동작으로 무기를 갈무리했다. 시종장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이자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그 일은 궁중식으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
‘착하기도 하지.’
그저 몰라서, 분위기상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왕이었다.
왕이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비켜섰다. 사람의 무리를 가르고 걸어 나와 침대 앞까지 온 왕이 여전히 침대 위에 서서 귀를 감싸고 있는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왕이 손을 내밀었다. 라파엘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오려 하자 왕이 내밀지 않은 손으로 라파엘의 손목을 잡아채서 내민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손을 내밀면 무조건 잡는 거다. 알았어?”
무기를 빼어든 무례한 놈들에게는 고개를 끄덕여준 주제에 자신이 내민 손을 슬쩍 거절했다는 것이 노여워 왕이 윽박지르자 라파엘이 “예, 전하”라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토록 건강하다면 굳이 너를 방에 둘 필요는 없겠군. 비를 준비시켜라.”
준비라는 말에 라파엘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파티를 열었어. 넌 내 비이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파엘이 입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왕이 라파엘의 손을 잡아당기자 라파엘이 순순히 왕의 품으로 떨어졌다. 그를 가볍게 안아 침대 밑으로 내려준 왕이 물었다.
“왜 아직도 네가 내 비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라파엘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봐야 아주 조금 눈이 커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왕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왜일까, 안네마리. 넌 왜 아직도 안네마리이고, 내 비이고, 그럴까? 응?”
“모르겠습니다.”
“난 왜 이렇게 너에게 닿고 싶고, 너에게 키스하고, 너를 내 침실에 가둬두고 있을까?”
라파엘이 멍하니 고개를 젓다 말고 “아, 저 갇혀 있었던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처음 알았다는 얼굴에 왕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왕은 그를 가둬둔 적은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이 왕의 침실을 벗어나려고 했다면, 글쎄. 왕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시종과 특수군과 근위병 전부를 죽이지 않는 한 라파엘은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모시는 자들의 충의인 것이다. 비록 주인의 언질이 전혀 없더라도 그의 마음을 알아채서 시중을 드는 것.
“하지만 방금.”
“세상의 어떤 일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과 별다를 바 없어. 알아, 라파엘?”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몰라도 괜찮아. 안네마리, 넌 나의 안네마리니까.”
라파엘의 눈이 멍해졌다. 왕이 ‘안네마리’와 ‘라파엘’을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기준으로 다르게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은 뭔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라파엘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젓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왕이 물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
“예, 전하.”
라파엘은 망설이지 않았고 왕은 또 웃었다. 뭐가 그렇게 그를 즐겁게 하는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왕의 웃는 모습은 처음 볼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래, 그리고 네가 왜 처벌받지 않는지는 역시 모르고?”
“예, 전하.”
“그래, 이런 것도 괜찮지.”
왕이 말했다.
그가 왕이 되면서, 아니, 그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의 반응을 알아내려 애썼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가 자신을 원하는지 아닌지―그런 것들을 떠보는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다. 어릴 때는 그게 뭔지 몰랐고, 조금 커서는 그게 지독하게 싫었으며, 더 커서는 거기에 익숙해졌다. 마치 공기처럼, 그는 그것을 감수해왔다.
‘그래, 이 눈이다.’
처음부터 라파엘은 그의 반응을 떠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라파엘은 놀라고 반쯤은 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은 그 신선한 반응을 이죽거렸었다. 짐이 그렇게 좋은가? 그러자 라파엘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라파엘은 그에게 홀리고 그를 좋아하고 그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않아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지언정 그를 떠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주변머리가 아예 없지.’
라파엘은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왕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는 궁금해하지조차 않는 것 같다. 왕은 불현듯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조금은 궁금해해야 할 거 아니야.”
왕이 갑자기 투덜거렸다. 라파엘이 시선을 보내자 왕이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넌 도대체 궁금한 게 뭐냐? 네가 사람을 좋아하면 상대도 널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정돈 궁금하지도 않더냐? 물어봐야 할 거 아니야, 상대에게. 네가 상대를 좋아한다고 하면 상대도 대답을 하는 게…….”
예의이긴 한데.
왕은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라파엘에게 무기를 겨눴던 시종이며 근위병들이 다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의고 나발이고, 왕은 손바닥으로 목을 문질렀다. 생각해보니 라파엘은 분명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전하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라고 말했던 라파엘이 아니던가. 그랬다, 따지고 보면―대답을 유보한 쪽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귀족의 영애였다면 울고불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와 남자 형제가 떼로 달려들어 결투를 신청할 일이었다. 아, 물론 이미 그때 라파엘―안네마리는 그의 아내였으니 예가 조금 안 맞긴 하지만.
“제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상대가 절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궁금해야 하는데, 물어봐……, 아?”
라파엘이 이해하지 못하자 왕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냥 혼잣말이었다.”
“저를 보고 말씀을 하셨…….”
“뭐 하냐. 비를 모셔가라. 파티에 참석할 거다, 차질 없이 시중들어라!”
은근 애 같다니까.
시종들이 왕의 뺨에 떠오른 아주 희미한 분홍색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왕은 냉혹하고 철저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시종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안네마리 라 쇼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왕비가 되더니 그 여자가 온 궁을 헤집고 다니고 덤으로 왕의 마음도 쑥대밭으로 만든 다음, 알고 보니 인간 백정이었는데, 오, 율레즈여. 심지어 남자란다. 이 과정에서 왕이 왜 하고 많은 남녀를 다 제치고 저 볼품없는 여자―사실 여자일 때는 요염한 미모나 있었지 화장을 지우니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단정한 얼굴뿐―에게 꽂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불어 왜 저렇게 다섯 살짜리나 할 유치한 행동들을 해대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여하간 왕은 왕비를 상대로는 상당히 유치했다.
왕이 라파엘을 조금 밀어내고 손을 내젓자 시종장이 난감한 목소리로 작게 고했다.
“그러나 궁의는 침대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고…….”
“그 돌팔이는 그녀가 공중제비도 돌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게다.”
이젠 대놓고 ‘그녀’란다……. 시종장이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시종 몇이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왕이 등을 돌렸다. 파티 전까지 그는 두세 개의 일정이 더 남아 있는 상태였고, 파티 전 다시 옷을 갈아입는 것까지 합치자면 앞으로 두 번의 옷시중을 더 받아야 했다. 사실 침실에 올 시간이 없었는데도 라파엘이 침대에서 벗어났다는 보고에 열받아 달려온 것에 불과했다.
“옷을 벗어주십시오.”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그렇지. 안네마리는 여자로서 준비를 해야 하는 거니 그보다는―뭐? 방금 뭘 벗는다고?
“무슨 짓이야!”
왕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라파엘이 옷을 벗다 말고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벌써 상의는 다 벗고 파자마에 손가락을 걸고 있는 라파엘을 보며 왕이 재빨리 시트로 그 몸을 감쌌다.
“너 지금 뭐 하는―!”
왕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고함을 질러대서 라파엘은 넋이 나가버렸다. 왕은 원래 라파엘이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말 복잡해 보였다. 라파엘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수많은 당혹감을 읽어낸 왕이었지만 그 자신도 당황하고 있었다. 왕뿐만 아니라 시종들도 당황한 상태였다.
“전하?”
“다른 놈들 앞에서 옷을 벗다니,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나는 네 옆구리에 총을 쏘았지, 머리에 쏜 적이 없는데 왜 너는 생각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느냐. 감히 다른 놈들 앞에서 네 몸을 보여주다니, 내가 아직 취하지도 못한 몸을! 감히!”
라파엘이 멍하니 있는 사이, 왕은 아주 꼼꼼하게 라파엘을 시트로 동여 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시종장이 몹시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전하, 그럼 왕비의 시중을 누구에게 명하시겠습니까?”
남자 왕비인 시중을 들 수 있는 인물은 한정되어 있다. 왕의 시종들이라면 감시와 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들이다. 게다가 아무도 왕비에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다. 아니, 그보다 남자에게 관심을 둘 시종들이 아니었다. 왕에게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지만 이 한 사람 한 사람은 왕국 내의 최고 엘리트들이다. 미인이 줄지어 따르는 마당에 그 특혜를 포기하면서까지 ‘남자 왕비’를 건드릴 인간은 없다는 뜻이었다. 시종장은 확신했다. 왕은 지혜로운 인물이니 곧 스스로가 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시종들에게 시중을 명할 것이라고.
그러나 왕은 왕비와 시종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시녀들을 데려와라.”
그리고 시종들은 왕이 정말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객관 따위는 이미 개먹이로 던져준 모양이다. 왕이 라파엘의 어깨와 허리를 안은 채 한숨을 쉬었다.
“다른 놈들 앞에서 옷을 벗지 마라.”
왕의 한숨 섞인 명령에 라파엘의 검은 눈동자가 힐끔 움직였다. 왕이 말하는 다른 놈들이라는 건 저 시종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시종과 시녀의 차이를 알 수 없어서―사실 그의 상식으로는 시종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시녀들의 앞에서 벗는 것보다 나았다. 일단 시종은 동성이 아니던가―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예, 전하.”
왕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 쓰게 웃었다. 라파엘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왕은 라파엘이 자신에게 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라파엘이 누군가를 능동적으로 원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타인이 라파엘을 좋아하는 것은 또 달랐다. 여자는 라파엘을 좋아할 가능성이 적다. 남자가 여자의 ‘외모’를 가장 먼저 본다면 여자는 남자의 ‘신분’ ‘재력’ ‘신장’ 순으로 본다. 라파엘은 왕의 총비이고, 왕에게서 받은 재산이 전부이며, 여자와 비슷한 작은 키의 소유자이다. 여자들의 입맛에 맞는 남자는 아니다. 게다가 라파엘의 시녀들은 마리 트리지아의 하녀들로 마리 트리지아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입궁한 열렬한 여자들이다. 그녀들이 라파엘에게 관심을 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시종들은 다르다.
아니, 거짓말.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시종이든 시녀든, 남자든 여자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그저 지금 놀란 것이다. 그는 왕이었고, 그는 시종을 남자로 보는 짓 따윈 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몸에 놀란 것뿐이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
그대로 팔을 내밀어 저 가느다란 몸을 낚아채버릴 뻔했다. 아무 말이나 외친 것에 불과했다. 여자는 안심이라고? 말도 안 돼. 라파엘은 왕의 총비다. 왕을 좌지우지하는 인물. 그만한 권세가 어디 있으며, 헤수스 제일의 재산가인 왕의 유일한 정비 라파엘의 재력을 따를 자가 몇이나 있겠으며, 이쯤 되면 키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내 앞에서만 벗어.”
왕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가오는 입술에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예, 전하.”
그 순진한 대답에 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앞에서는 벗지 마.”
제발, 왕이 신음하듯 덧붙이며 입술을 붙였다. 꾹, 한 번 입술을 누르고 곧 떨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라파엘이 입술을 벌려 왕의 입술을 물었다. 왕이 목 안쪽으로 신음하며 라파엘을 힘주어 안았다. 거친 키스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왕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밀어내려고 하면 라파엘이 그를 잡아당겼고, 라파엘이 숨을 쉬려고 고개를 돌리려 하면 왕이 으르렁거리며 라파엘의 혀를 옭아매었다. 왕의 커다란 손이 라파엘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어느 순간 왕이 라파엘을 밀어냈다가, 확 품에 당겨 안았다.
“저, 전하?”
라파엘이 부르자 왕이 쉰 목소리로 “부르지 마”라고 명령했다.
“예, 전하.”
라파엘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왕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대답하지 마.”
“예……, 아, 아니.”
라파엘이 몸을 굳혔다.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라파엘이 한숨을 쉬자 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입김 불지 마!”
조금 전 귀에다 입김을 불었던 스스로의 행태는 이미 기억에 없는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시종들은 귀로 들리는 억지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살을 찌푸린 건 왕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맛이었다. 사냥 대회 전야제고 나발이고 일단 라파엘을 밀어 넘어뜨리면 딱 좋겠는데 그러기엔 시간도 없고 절차도 절차였다. 아무리 그래도 시정잡배처럼 성교만 냅다 할 수야 있나. 나름대로 프러포즈와 절차가 필요한 법. 궁의의 진단도 필요하고 첫 합방인 만큼 신전의 날짜도 필요했다.
팔락. 라파엘이 눈을 깜빡여 그 속눈썹이 왕의 쇄골에 닿는 것이 느껴지자 왕이 벌컥했다.
“하지 말라고!”
“벗지도, 부르지도, 대답하지도, 입김 불지도 않았는데요.”
하나하나 따져보며 뭘 하지 말라는 건지 의아해하는 라파엘의 목소리. 시종들은 속으로 ‘잘한다!’라고 라파엘을 응원했다. 따지는 어조가 아닌 게 좀 흠이지만 이렇게라도 왕에게 좀 양심이라는 단어를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왕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눈도 깜빡이지 마.”
라파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종들도 그랬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많은 인물들과 그저 모든 것이 의아할 뿐인 한 사람, 그리고 짐승과 인간의 기로에 선 한 사람. 마지막 한 사람이 ‘짐승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들기 시작했을 때 침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