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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귀환 (12/47)

제11장 귀환

오랜만에 아침 햇살이 밝았다. 왕은 초조한 얼굴로 라파엘의 손을 들어 그 손등을 확인했다. 창백한 손에 새겨진 붉은 순흔. 그것은 분명 자신이 꿈에서 남긴 그 증표였다. 그건 꿈이었는가, 아니면 현실이었는가. 왕은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라파엘은 분명 그렇게 약속했고, 왕은 그 약속의 증표를 지금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는 꿈인가, 현실인가. 왕이 떨리는 손으로 그 붉은 자국을 한 번 눌러보았다. 라파엘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궁의, 궁의를 불러라.”

왕이 중얼거렸다. 휘장 너머에서 시종장이 “전하……?” 하고 조심스레 부르자, 그가 고함을 질렀다. 

“궁의를 불러라!”

휘장 너머에서 시종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숨죽인 발소리를 들으며 왕은 라파엘의 뺨에 손바닥을 대었다. 차가운 뺨. 그러나 시체 같던 안색에는 희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왕의 손가락이 라파엘의 뺨에서 코로, 그리고 작게 주름 잡힌 미간으로 이동했다.

“그래, 네가 나를 버릴 리가 있느냐.”

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에도 나를 위해 검을 거두던 네가, 나를 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왕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라파엘을 내려다보며 라파엘의 미간을 펴주었다.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달려들던 그와, 자신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던 그 소름 끼치는 느낌. 그리고 허공에서 서류가 눈처럼 팔락거리는 가운데, 웃음 짓던 검은 눈. 작별을 고하는 그 따뜻한 눈을 보는 순간 왕은 평생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심장은 차가워졌다. 동사하는 사람처럼 온몸에서 감각이 사라져, 모든 것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전하, 궁의가 도착했습니다!”

시종장이 정중한 목소리로 고해왔다. 왕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라파엘의 미간에서 손을 떼었다가 참지 못하고 거기에 키스했다. 입술에 닿는 피부가 어제보다 조금 따뜻해서, 얼어붙은 몸도 녹아내린다.

왕이 휘장을 열었다. 넓디넓은 방에서 일하던 모든 시종들이 재빨리 무릎을 꿇어 보였다. 왕은 침대 가까이에서 무릎을 꿇은 궁의에게 “내 비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돌봐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궁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라파엘을 살피기 시작했다. 왕은 초조한 얼굴로 침대를 지켜보았다. 궁의와 궁의의 조수들, 그리고 시종들이 둘러싼 침대 위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라파엘이 잠들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죽어버릴 것같이 희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물씬 밀려들었다. 왕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약속을 떠올리며 입가를 가린 손을 세게 쥐었다. 죽을 리가 없다. 그는 돌아온다 하였다. 방금 그 약속의 증표를 확인하지 않았던가. 방금 확인했던 것들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아, 율레즈여. 왕은 탄식했다. 제게 허락된 모든 것을 앗아가셔도 좋으니, 제발 제게서 그를 데려가지 마소서. 제발……! 왕은 입안으로 몇 번이고 신에게 간원했다. 몇 번이나 간절히 외친 것일까, 궁의가 그를 돌아보았다. 왕이 눈을 크게 뜨자 궁의가 작게 웃어 보였다.

“곧 정신이 들 듯합니다.”

왕이 “율레즈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충실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라고 중얼거리며 침대로 걸어왔다. 스완 라 포가 왕을 막으려다 왕의 시선에 결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상대는 왕비이기에 앞서 라파엘 에반스였다. 냉혹한 살인 기계, 인간백정계의 새로운 기수이자 유명인. 가슴에 심장이 아니라 시계 부품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의 냉혈한이 자신을 쏜 자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하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면서 스완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전하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한 인간이 ‘라파엘 에반스’라고? 살인 기계 에반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훌쩍거렸다고? 스완은 자신이 아는 ‘라파엘 에반스’와 자신이 보아온 ‘안네마리 라 쇼어’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때때로 혼란스러워졌다. 안네마리 왕비가 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냥 보고 있으면 보였다. 왕비는 때때로 넋을 잃은 듯이 왕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위장도 없었다. 위장의 냄새가 났다면 왕이나 그가 모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왕비의 행동에는 위장의 냄새가 없었다. 도리어 그런 냄새를 풍겼던 것은 왕비의 정체였다. 왕비가 정체를 속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왕도, 그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가 속이는 게 안네마리 라 쇼어가 아니라는 것일 줄 알았지, 설마 성별까지 속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왕비는 감정을 속일 줄 모른다. 스완은 장담할 수 있었다. 왕비는 그런 기술이 아예 없는 인간이다. 왕비가 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 왕비는 왕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절명의 순간에 그것을 증명해냈다. 왕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왕비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손목에 검날을 꽂고 상대가 쏜 총을 맞았다. 스완이 들어온 ‘라파엘 에반스’와 스완이 아는 왕비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정한 ‘그’일까.

스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왕의 행보를 주시하는 사이, 왕은 흘끗 라파엘을 보는 궁의의 손길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너는 현명한 자다.”

왕의 냉엄한 푸른 눈이 그를 쏘아보았다.

“네 앞에 있는 여자는 나의 하나뿐인 비. ……이 사실을 네 마음과 머릿속에 새겨놓도록 하라.”

왕에게 시선을 못 박고 있던 스완 라 포가 궁의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궁의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덜덜 떨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궁중 사교계에는 스완 라 포가 호탕하고 한량인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특수군 대장이었다. 왕의 측근이라면 왕 다음으로 가장 두려운 자였다. 왕의 명령이라면 스스로의 목도 망설임 없이 자를 인물. 왕의 최측근인 남자가 궁의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잘 처신하지 않으면 어두운 밤에 보게 될 거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네 앞에 있는 ‘여자’는 나의 하나뿐인 ‘비.’

한마디 말에 들어 있는 중압감이 궁의의 심장을 짓눌렀다. 궁의는 이 남자를 두 달 가까이 돌보고 있었다. 그가 돌보고 있던 왕비는 남자였고, 그것은 왕비의 시중을 든 왕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를 ‘여자’라 칭했다. 그리고 왕을 배신한 ‘검은 여우’였던 자를 여전히 ‘왕비’라 칭하고 있다. 즉 왕은 이 모든 것을 암묵적으로 덮어둘 생각인 것이다.

궁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왕은 말을 조심하라 하고 있었다.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다는 경고였다. 혀를 자르든, 목을 자르든, 어딘가는 잘리게 되리라. 궁의는 오한을 견디면서 ‘왕비’의 몸을 덮고 있는 시트를 조심스럽게 걷었다.

‘고문흔입니다.’

라파엘의 상체가 드러났다. 왕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앙상한 어깨, 상처투성이의 몸.

‘흔적을 보아하니 상대는 피부를 얇게 떠서 고문하는 방법을 썼군요. 잔혹한 방식입니다.’

라파엘은 옆구리와 왼 팔목에 붕대를 두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극단적인 식사 제한 때문에 체력이 상당히 손실되었습니다.’

처음 라파엘을 진찰했을 때 궁의가 한 말에 제럴드 라 쇼어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라파엘은 어째서 마리가 죽게 됐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 아이는 전하께 위해를 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분신이 왜 비참한 죽음을 당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알아서 어쩌겠다는 거냐.’

‘모르겠습니다.’

왕이 노려보자 제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라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는 마리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며 궁에 들어왔고, 그리고…… 전하께 마음이 있다 하더이다.’

라파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제럴드의 말을 반추해보던 왕이 문득 스완에게 물었다.

“제럴드 라 쇼어가 한 말 중에서 안네마리가 내게 마음이 있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느냐.”

그 말에 스완이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 스완의 기억과 왕의 기억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스완은 왕이 편리하게 지운 부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럴드 라 쇼어가 라피가 어쩌고 운운했을 때 왕은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었다.

‘라피라니. 누가 라피냐. 네가 말하는 ‘라피’가 설마 내 비는 아니겠지? 내 비의 이름은 안네마리다, 너는 네 사촌의 이름도 모르느냐. ……그녀는 너의 사촌이다. 너와는 거의 타인이지.’

핏줄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 궁중 사교계의 상식으로 볼 때 사촌은 결코 타인이 아니다. 조금 과장하면 ‘내 또 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다. 왕의 말에 스완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니 제럴드의 표정은 거의 썩어간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안네마리는 사실 진짜 안네마리가 아니라 그의 남동생 라파엘 에반스가 아니던가. 제멋대로 하는 말에 제럴드의 얼굴이 구겨지던 걸 떠올리며 스완이 대답했다.

“예, 전하. 기억납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단어도 뉘앙스도 다릅니다만 뭐 굳이 뜻을 따지자면 그렇겠지요……. 스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별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벽해.”

“……예?”

뭐가 완벽하세요? 쇼어가를 쓸어버린 통에 귀족들은 이를 드러내려 하고 있고, 왕비는 인간 백정에 남자였……. ……‘남자.’ ‘남자 왕비.’ 쇼어가 출신의 ‘남자 왕비’.

“그렇군요.”

심지어 왕이 그토록 애절하게 생각하는 상대가 알고 보니 남자에 쇼어가 출신에 왕비. 확실히 완벽한 조건이다. 어쨌거나 그는 공식적으로 ‘안네마리 라 쇼어’이며 여자였다. 그렇다, 왕의 입장에서는 완벽했다. 궁중 사교계라는 곳은 핏줄이 아니면 믿을 수 없음, 핏줄이어도 믿을 수 없음, 사실이야 어떻든 대의명분만 제대로라면 만사형통인 세계였다.

거의 기적과도 같은 우연이었다. 악당은 정말 악당이라니깐. 스완이 픽 웃었다. 적이 마련한 덫에서 자신의 이득만 취하다니 정말 믿음직스러운 형님이 아닌가.

“완벽해.”

왕이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에 깔린 희미한 환희를, 스완 라 포는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왕이 바라는 완벽한 행복이 눈을 뜨고 있었다. 안네마리 왕비. 왕의 유일한 총비가 눈을 뜨고 있었다. 가느다란 햇살이 왕비의 납작한 가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저 가슴에 둔덕이 있든 없든, 왕비가 안네마리든 아니든―왕비는 여자이며, 안네마리 왕비가 될 것이다. 왕이 그렇게 원하는 한 그는 분명히 안네마리로, 여자로, 왕비로 살게 된다.

“눈 치워.”

왕의 가느스름한 시선이 와 닿아 스완이 “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딜 보고 있는 거냐. 불경죄 저지르지 말고 눈 치워라.”

사내 새끼 가슴 좀 본다고 뭐가 달―!

예, 착하고 훌륭한 제가 참습니다. 스완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무는 동안 왕은 몇 발짝 떨어져 왕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완은 왕비에게서 시선을 떼어 왕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외로웠던 형님의 눈이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왕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활한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가 거기 있는 것처럼 그 시선은 못 박혀 있었다.

왕비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스완은 왕의 얼굴에서 읽었다. 왕비의 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왕의 얼굴에 너무나 잘 나타나고 있었다. 완벽하다고 말하던 목소리에 깔렸던 희미한 환희가 왕의 얼굴에 조금씩 퍼져 나가는 것을 스완은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왕비의 눈이 조금씩 열릴 때마다,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이 이는 것처럼 그렇게 왕의 얼굴에 희망과 사랑스러움이 퍼져 나간다.

“라파엘,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왕의 목이 멘 듯한 목소리에 시종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왕의 눈물을 보는 무엄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완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도리어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왕이 왕비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왕비의 이마에 그의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전하?”

여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허스키하다고 여겼던 왕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쉰 채로 흘러나온다.

“……그래.”

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저 한 마디 대답한다. 스완의 시선이 왕비에게로 향했다. 왕비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어나다 말고 왕비의 얼굴이 한 번 찌푸려지자 왕이 서릿발 같은 시선을 궁의에게 보냈다.

라파엘이 입술을 달싹이자 왕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왕이 서둘러 말했지만, 라파엘은 힘겹게 목소리를 토해냈다.

“……돌…… 아왔습…….”

라파엘의 말에 왕이 작게 웃었다.

“그래, 믿고 있었다. 믿고 있었으니,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감았다. 피곤한지 바로 잠에 빠지는 라파엘을 보던 왕이 손을 한 번 휙 젓자 시종 한 명이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한결 어두워진 방 안에서 왕이 라파엘의 뺨에 손등을 대었다. 차갑고 축축한 뺨의 감촉이 왕을 불안하게 했다. 왕이 궁의에게 시선을 보내자 궁의가 “조금씩 좋아질 겁니다. 깨어난 이상 고비는 넘겼다고 보시면 됩니다”라고 보고했다. 궁의의 말에 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표정이 좋아지지 않자 궁의가 말했다.

“생각보다 체력이 좋습니다. 극단적인 식사 제한이 있어 근육이 상당히 손실되었고 체력도 떨어졌는데, 잘 버티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극단적인 식사 제한?”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말에 왕이 차가운 눈으로 궁의를 바라보았다.

“예, 아무래도 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듯합니다.”

몸매?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몸매라니, 이 앙상하게 곯아빠진 이 몸매? 왕은 라파엘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라파엘 에반스가 너무 말랐다고 생각했다. 라파엘이 사경을 헤맨 두 달간, 그는 가능한 한 라파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안으면 안을수록 지독하게 가볍기만 해 라파엘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식사를 제한했다고?

“할 일도 더럽게 없군.”

왕이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라파엘이 왜 식사를 제한하면서까지 몸매를 유지하려고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라파엘은 여성으로 분하기 위해 몸매를 유지했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몸매에는 차이가 있다. 라파엘은 키가 작은 덕을 보았지만 그래도 여성으로 위장하기 위해선 확실히 몸매가 필요했다. 남자 특유의 굴곡 없는 몸을 여성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까지 해서―목숨을 걸고 식사를 제한하고 드레스를 입으면서까지 자살한 마리 트리지아에 대해 알고 싶어했단 말인가.

제럴드 라 쇼어도, 문 플레이스의 시녀들도 라파엘의 목적이 ‘복수’가 아니라 ‘어째서 죽게 됐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라파엘이 어떤 방식으로 알아내려고 하였는지는 알지 못하며, 라파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른 이와 공유하지도 않았던 듯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꾸준히 밤의 어둠을 틈타 무언가를 조사하고 다녔다고 했다.

“마리 트리지아가 왜 죽었는가라.”

왕이 손을 뻗어 라파엘의 검은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마리 트리지아의 죽음. 그따위가 뭐 중요하다는 걸까. 억울하게 죽은 자는 흔하다. 어차피 귀족이란 그런 것이다. 화려한 세계에서 벌이는 생존 게임. 나를 제외한 누구도 나의 완전한 편이 될 수 없는 신분. 그것을 귀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리 트리지아는 그녀 자신 또한 그런 세계의 일원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리 트리지아 대신 버림받은 라파엘이 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가. 어째서 그따위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가.

“정말 할 일도 더럽게 없지. 그딴 것을 위해서.”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왕의 손길은 애틋했다. 왕은 라파엘 에반스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를 더듬었다. 최근 두 달간 왕은 끊임없이 이 몸을 매만졌었다. 돌아오라고, 정신을 차려보라고, 수백 번 수천 번 애원했었다. 그때는 느껴지지 않던 생기가 희미하게나마 손끝에 걸리는 것 같아서, 왕은 도무지 라파엘의 몸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군인 한 명이 기척을 죽이고 걸어와 스완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스완이 손짓하자 일어선 그가 스완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스완이 낭패 어린 표정 대신 한 번 웃었을 때,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던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전하, 방해 드려 죄송하옵니다만 태후가 문 플레이스로 향하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그 말에 군인과 스완이 동시에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시종장의 보고는 방금 군인이 스완에게 보고한 내용과 같았다. 그러나 군인과는 달리 시종장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무서운 노인네.’

스완이 웃는 얼굴 뒤로 혀를 찼다. 분명 시종 중 누군가가 시종장에게 보고를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보고한 것일까? 스완은 시종장을 한 번 쳐다본 뒤 시종들의 면면을 살폈지만 시종들 사이의 신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미 신호가 오갈 일이 끝난 것이다.

“문 플레이스로?”

왕이 라파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확인해왔다.

“예, 전하.”

“용건은 뭐라고 하더냐?”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조카를 봐야겠다’고만 했다 합니다.”

“조카?”

하, 왕이 비웃었다. 조카는 조카지. 하지만 태후가 생각하는 조카와는 달리 이 조카는 태후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가문이 갖다 버린 조카가 아니던가. 그 빌어먹을 가문에 기대볼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왕은 당연한 듯 그렇게 생각했다가 생각을 바꿔먹었다. 라파엘은 마리 트리지아를 위해 이 궁에 잠입했을 정도로 다정하고 어리석다. 그 늙은 암여우의 꼬임에 넘어가 이번엔 고모님을 위해 뭔가를 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내가 내린 근신 명령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아마 강행 돌파하려는 모양입니다.”

“저런, 이제 그 잘난 가문도 없는데 뭘 믿고서.”

왕의 차가운 목소리에 스완이 왕을 바라보았다.

“태후에게는 ‘선왕의 인장’이 있습니다. 태후는 아직 단 한 번도 ‘인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스완의 목소리에 증오가 어렸다. 그는 태후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자신의 친모를 몰락시킨 여자에 대한 증오는 깊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 철철 넘치는 증오가 느껴질 정도였다.

“태후가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고작 제 조카를 만나는 데 쓸 것 같아? 아니, 그 여자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러나 그런 스완보다도 태후를 더 증오하는 이는 왕이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고, 왕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그가 싫어하는 무능력한 귀족들에 대해 말할 때와 똑같이 가볍고 일상적인 어조로 왕은 태후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의 모든 이가 태후에 대한 왕의 증오를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목숨을 위협받고 성적으로 농락당하며 수많은 모욕과 사선을 넘어온 왕의 증오는 이미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 여자는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라파엘의 목숨 같은 건 수백 번도 버릴 수 있는 여자다. ‘인장’을 쓸 정도로 기특한 인간이 못 된단 말이지. 도리어 라파엘을 방패나 폭탄으로 쓴다면 모를까.”

왕의 마지막 말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왕이 손을 뻗어 라파엘의 창백한 뺨을 쓸어내렸다.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밤의 기억. 달려들던 라파엘과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의 손, 그리고 놀란 얼굴의 라파엘. 그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뿜어 나오던 피, 그의 옆구리에서 허공으로 흩날리던 서류들.

라파엘이 무슨 생각으로 왕에게 달려들었는지 모르나 그는 분명 왕을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내 비를 지켜라.”

왕이 명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내 비를 지켜야 한다.”

이번에는 그가 지켜줄 차례였다. 이 화려하고 냉혹한 세계에서 그가 이 다정하고 순진한 살수를 지켜줄 것이다. 그를 되돌려주신 주신 율레즈와 북대륙의 수호신 쿠치아노의 이름을 걸고, 왕은 맹세했다.

태후 이사벨 로지아나가 왕후궁 문 플레이스에 도착한 것은 왕이 보고를 받은 지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왕의 즉위 이후―정확히는 몰살의 즉위 축하연 이후―은둔하고 있던 그녀가 6년 만에 처음 자신의 궁을 나선 것이다. 시녀들을 데리고 나선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기품 있었으며, 특유의 타인을 억누르는 카리스마도 여전했다. 그녀는 자신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싱긋 웃으면서 “나는 선왕의 비였고, 그 아이의 고모가 되네. 아무리 전하의 명령이라지만, 내 조카의 안위에 대해 궁 안팎에서 잡음이 들리는 만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네. 자네들은 비록 귀족이 아니지만, 그래도 궁의 안위를 책임지는 경비병이니만큼 내가 말하는 의무를, 그리고 그 의무를 이행해야만 지킬 수 있는 명예의 의미를 알리라 믿네”라고 말했다. 근위병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난처해하자 태후는 더욱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선왕을 생각하시게. 선왕의 녹을 받으셨던 자네들이 아닌가.”

“선왕을 생각하는 것이 현재의 왕인 저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뒤에서 끼어드는 목소리에 태후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도 잠깐, 태후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훤칠한 미청년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녀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전하. 오랜만입니다.”

왕의 뒤쪽에 서 있는 사생아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꼴에 이부형제라고 붙어 다니는 꼬락서니하고는.’ 태후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강하신 듯하여, 이 어미의 마음이 몹시 놓이는군요.”

“제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어머니께서 두문불출하시는 통에 제 마음이 온통 애틋함으로 가득 찼었는데 이리 뵈오니 얼마나 좋은 날인지요. 좋은 날답게 날씨 또한 좋습니다.”

그 순간 우르르―쾅―소리를 내며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아침부터 우울하던 날씨가 드디어 비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번쩍 벼락이 꽂히는 걸 흘끗 곁눈질한 태후가 화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취향이 고상하시오.”

그 비아냥거림에 왕이 말을 이었다.

“어머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쇼어가 특유의 보라색 눈을 가진 미녀와 태양신처럼 빛나는 미남이 서로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어둡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벼락이 번쩍거릴 때마다 두 선남선녀의 새하얀 치아가 서로를 향해 번뜩였다. 태후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망이군요. 전하, 이 어미는 비를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제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참으로 슬픕니다.”

“저야말로 안타깝습니다, 어머님. 분명 10년 전의 제게는 좋아한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10년 전?”

태후의 웃음 띤 얼굴에 한 줄기 의아함이 어렸다. 왕은 웃으면서 그 의아함이 정점에 다다르길 기다려 대답했다.

“예. 기억이 나지 않으시다니, 아쉽습니다. 분명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결코 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비를 좋아하실 따름이라고 말입니다. 빗속에서 네 시간이나 산책을 같이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만.”

왕의 말에 태후는 그때를 기억해냈다. 선왕의 명령으로 왕이 그녀와 매주 한 번씩 산책을 해야 했던 때였다. 선왕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두 사람을 친밀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그 산책은 음험한 공격과 방어의 싸움이었다. 당시에는 태후가 왕보다 훨씬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산책을 빌미로 왕을 상당히 괴롭혔다. 진흙탕에 우산을 던지고선 건져달라고 하는 등 억지를 부리기 일쑤였다. 왕이 말하는 그 산책 또한 그런 억지의 일환이었다. 그날은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겨울비가 쏟아져 내리는 추운 날, 태후는 왕을 데리고 네 시간이나 산책을 나갔다. 그녀는 왕에게 우산도 주지 않은 채 ‘건장하신 분이니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으시겠지요. 알렉시스는 일부러 냉수마찰도 하는데 형으로서 위엄을 보여주세요, 호호호’라고 웃었었다. 왕은 폐렴으로 죽을 뻔했던 그날을 떠올리면서도 선량한 미소를 지어낼 수 있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요.”

태후의 웃는 얼굴에 살짝 금이 가는 것을 왕은 놓치지 않았다.

“예. 하긴 어머님께서도 이제 연세가 드셔서 취향이 바뀌셨나 봅니다. 아무래도 노인들은 따뜻한 곳을 좋아하시지요. 따뜻한 방에 앉아 벽난로 앞에서 뜨개질을 즐기실 때가 되셨나 봅니다.”

아하하, 왕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뒷방 늙은이답게 꺼지라는 말을 한껏 돌려서 한 왕의 태도에 태후가 그저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왕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런, 저런. 드레스가 구겨집니다. 그러고 보니 6년 전에 봤던 그 드레스로군요. 6년 동안 드레스 한 벌 구입하시지 않다니, 참으로 근검절약의 표상이십니다. 모든 궁인의 본보기가 되실 겁니다.”

왕이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 제스처에 태후가 떨리는 입가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거절했다.

“전하는 훌륭한 분이시지만, 멋모르는 자들의 우매한 말에 상처 입는 연약한 어미를 용서하세요.”

남색가와 팔짱을 끼면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난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왕이 가볍게 웃었다.

“부디 뜻대로 하십시오. 참 여긴 웬일이신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왕의 말에 태후가 “내 조카를 만나러 왔소”라고 대답했다. 태후가 ‘내 조카’에 힘을 주자 왕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제 비 말씀이시군요.”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남자의 가면을 뒤집어쓴 왕이 ‘제 비’를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제 비는 현재 근신 중입니다. 아무리 어머님이라지만 만남은 조금 미루셔야 할 듯합니다.”

“그 아이는 내 조카요.”

“그리고 제 비지요. 제 가족이고, 제 아내입니다. 제 분신이지요. 그리고 저는 왕입니다.”

왕이 권위로 찍어 누르자 태후가 “과연. 위엄 있으시오”라고 감탄하는 척 야유했다. 왕은 “감사합니다”라고 허리를 숙여 보이면서 가볍게 그 야유를 넘겼다.

“허나 난 내 조카를 만나봐야겠소.”

태후가 얼굴을 굳혔다. 차가운 얼굴을 본 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비를 만나시는 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나에겐 불가능 따윈 없소. 누구보다 전하께오서 그 사실을 제일 잘 아실 텐데요.”

왕은 말없이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태후가 굳은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꼭 그 사실을 이 많은 신하들 앞에서 알게 해드려야 하겠소이까?”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왕은 결코 언성을 높이지도, 얼굴을 굳히지도 않았다. 그는 실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태후를 상대로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다. 평생 특혜만 받으며 살아온 그녀와는 달랐다. 그녀에게 단련되어 모든 굴욕을 맛본 왕은, 이 정도 도발로는 눈 하나 깜빡거릴 생각이 없었다.

“전하.”

태후가 부르자 그가 싱긋 웃었다.

“자아, 어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는 어머니께서 왕명을 거절하실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시잖소!”

“모릅니다.”

당연히 알지. 하지만 왕은 시치미를 뚝 떼고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왕의 눈이 조금 가늘어지는 것을 본 태후가 입을 열려다 황급히 다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왕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면책은 세 번뿐이었다. 그 귀중한 세 번 중 한 번을 그런 출신도 모를 계집애 얼굴을 보는 데 쓸 수는 없었다.

왕은 태후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는 껄렁하게 웃으며 태후를 도발했다. 비가 좍좍 쏟아지는 가운데 왕은 웃고, 태후는 웃는 낯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왕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태후가 세 번의 면책권 중 한 번을 사용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고, 태후가 오욕감에 젖어도 생존을 위해 면책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눈요기가 될 것이다. 왕이 어디 해보라는 듯이 서 있자 태후가 등을 보였다.

“영원한 광휘가 있으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전하. 세상일이란 참 모르는 것이랍니다.”

태후의 말에 왕이 피식 웃었다.

“몸소 보여주신 덕분에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태후가 고개만 흘끗 돌려 바라보자 왕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예를 갖추고 가셔야지요. 너무 오랜만에 나오셨나 봅니다. 세간의 예의를 전부 잊으신 모양이네요.”

왕의 말에 태후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왕이 싱글싱글 웃고 있자, 태후가 허리를 우아하게 굽혀 보였다. 그 모습은 아리땁다고 느껴질 정도로 기품이 넘쳤지만 왕은 태후의 분한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러가셔도 좋습니다, 어머니.”

왕의 말에 태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왕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먼저 등을 돌렸다. 어린 시절 저 여인에게서 모진 핍박을 많이도 받았었다. 뻔히 독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가 권한다는 이유만으로 먹어야 했던 적도 여러 번, 수많은 더러운 꼴을 보면서 살아남아왔다. 인간으로서의 어떤 권리도 없었다. ‘어머니’가 먹으라는 독을 먹고, ‘어머니’가 자라는 여자와 자면서 마치 모욕을 받기 위한 듯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여자를 안는다는 것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어머니’였다.

율레즈여.

왕은 위대한 이름을 불렀다.

제 영원한 경외를 당신께 바칩니다.

율레즈의 팔 아래 만사는 공평하다더니, 왕은 라파엘을 만났다. 마치 왕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처럼 모든 것이 들어맞는 상대였다. 모든 것이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 사람에게 정신없이 이끌렸었고,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런 게 바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의 안배로 만난 사람이었다. 왕은 등 뒤의 적을 느끼면서 쾌활한 웃음소리를 냈다.

왕이 무력하던 시절, 아무도 그를 구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에게는 그가 있었다. 그는 힘없이 몰락해야 했던 그의 친모와는 달랐다.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왕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라파엘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 새하얀 얼굴을 보자 뜨거운 것이 북받쳐와, 왕은 떨리는 손을 들어 라파엘의 뺨을 쓸어내렸다. 왕은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꼈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10대 때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고결하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아무도 그를 지켜줄 수 없었고, 그 자신도 지켜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었다. 그것을 서운해한 적은 없었다. 이유 없는 도움이라는 건 옛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랑하는 자를 해치느니 스스로를 해하고.

그저 피가 통했을 뿐인 상대의 명예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런 것은 그저 전설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참으로 요령 없고 순진해 빠져서는…….”

왕이 뜨겁고 축축한 목소리를 냈다.

“눈만 커다란 사슴 같은 게…….”

시종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까부터 왕은 라파엘 에반스가 몹시 연약하고 청순가련한 존재인 것처럼 다루고 있는데, 그의 앞에 있는 건 ‘그’ 라파엘 에반스다. 살인 기계,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의 그 라파엘 에반스. 어제 먹은 사슴 스튜가 다 올라오려고 한다. 왕은 도대체 사슴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툭하면 사슴 운운인가. 아, 가여운 사슴. 인간에게 먹히는 걸로 모자라서 이런 모독까지 견뎌야 하다니.

왕이 고개를 숙였다. 라파엘의 입술에 왕의 입술이 닿는 것을 보고 근위병과 특수군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라파엘 에반스. 그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사내가 여장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응이 안 되는데, 심지어 왕은 그 사내와 키스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왕이 겉보기에는 예쁜 여자와 키스를 하고 있는데 그 광경이 왜 이렇게 추울까. 남들은 떨거나 말거나 왕은 자신의 비에게 오래도록 키스했다. 열정적이면서도 애절한 키스 끝에 라파엘이 눈을 떴다.

‘이러지 마, 제발!’

시종, 근위병, 특수군 전원이 한마음 한 뜻으로 소리쳤지만, 본디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사정을 잘 모르는 법이다.

“라파엘.”

왕의 부름에 라파엘이 힘없이 웃었다.

“왜 웃느냐?”

왕이 물었다. 설탕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이 달콤한 목소리였다.

“전하…… 서, 부르……, 어색해서…….”

라파엘이 띄엄띄엄 말하자 왕이 대답했다.

“그럼 안네마리라고 부르지. 어차피 너도 이 이름에 익숙해져야 할 테니까.”

왜……?

라파엘이 입을 달싹여 겨우 물었다. 라파엘은 알 수 없었다. 왜 왕이 아직도 이렇게 달콤한지, 어째서 왕이 ‘안네마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왕을 능멸한 죄로 온갖 고초를 겪다 죽게 될 것이다. 그게 분명한데도 어째서 왕은 이토록 달콤한 걸까.

아아, 꿈인가. 꿈의 연속인가.

그렇다면 이 꿈을 영원히――.

“또 바보 같은 게 꿈인 줄 알고 꿈으로 빠져버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왕이 윽박지르는 바람에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왕이 라파엘의 코를 가볍게 비틀었다. 말이 비튼 것이지, 거의 살짝 손을 대었다 떼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라파엘의 검은 눈에 가득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왕이 짙게 웃었다.

“어서 와라, 안네마리.”

“전하.”

라파엘이 다시 불렀다. 왕이 상냥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

“꿈이…… 아닌가요?”

라파엘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왕이 그를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아니.”

라파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눈이 멍하게 자신을 향해 있는 걸 보며 왕은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두 달 만에 눈을 뜬 라파엘은 여전히 열에 들뜬 눈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의 입술이 열리는 걸 보며 왕은 마른침을 삼켰다. 겨우 눈을 뜬 그를 당장 두 팔 안에 가둬버리고 싶어졌다. 짐승 같은 충동에 손끝이 저렸다.

라파엘이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킨 그가 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입만 달싹였다. 왕이 팔을 들어 라파엘의 어깨를 감쌌다.

“왜 일어나는 거냐?”

왕이 다시 눕히려는 걸, 라파엘이 왕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라파엘은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혹시라도 검이 왕을 스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자 심장이 식어 굳어버릴 것 같았다. 검으로 사람을 죽인 적은 많지만 검을 거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은 제대로 검을 거두었을까. 왕은, 무사했을까.

“없어.”

“정말,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습니까?”

왕이 가볍게 고개를 젓자 라파엘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아주 조금 흐트러지는 것만으로도 왕은 라파엘이 얼마나 크게 안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왕이 라파엘을 안아 올렸다. 전에 안았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무게에 왕이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이렇게 가벼워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식사를 제한했다니. 이 몸 어디에 식사를 제한할 데가 있다고. 이 몸으로 두 달 만에 깨어나서는 왕을 걱정하는 라파엘이 안쓰럽고 애틋해서, 왕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다친 건 너뿐이다.”

그 말에 약간 굳어 있던 라파엘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라파엘의 얼굴이, 라파엘의 온몸이, 그렇게 읊조리고 있었다. 왕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나 때문에 너만 다쳤지.”

왕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탓입니다.”

라파엘은 당연하다는 어조로 말했고, 왕은 다시 한 번 ‘내가 쏘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누구의 탓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가 쏘았고, 라파엘은 그를 속였다. 그래서? 라파엘은 이렇게 그의 품으로 돌아왔고, 둘은 서로의 과오에 대한 계산을 끝냈다. 그럼 된 거지.

‘―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지만.’

스완은 왕의 옆모습을 흘끗 보고 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비밀이라는 건 언젠가는 새어나가게 되어 있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아는 비밀이라는 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왕이라면 분명 웬만한 문제 따윈 저 기가 막힌 독설로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바보 같군. 너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쳤는데 고작 내가 다치지 않아서 기쁜가?”

왕이 묻자 라파엘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참았다. 왕이 말을 이었다.

“정말 바보다, 너는. 그따위 머리를 이고 다녀서 뭐하느냐, 당장 갖다 버려라. 네가 안 다치는 게 우선이지, 내가 뭐라고, 너한테 뭘 해줬다고 내가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하단 말이냐. 가뜩이나 곯아빠진 게 식사는 또 왜 가렸느냐. 네가 식사를 안 가리면 네 몸에 살이 찐다든. 근육이 좀 있으면 뭐가 어때서. 어차피 그 치렁치렁한 드레스로 다 가릴 텐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내가 죽든 살든 너 따위가 신경 쓸 바 아니란 뜻이다. 그러니까.”

스완과 시종장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냥 걱정했다, 다치지 마라, 네가 다치면 내 가슴이 찢어진다…… 고 할 것이지. 솔직하진 못해가지고. 말투는 달콤함으로, 내용은 걱정으로 흘러넘치고 있건만 단어만은 싸늘했다. 그게 보는 사람을 더욱 괴롭게 해서, 둘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치지 않겠습니다.”

라파엘이 대답했다. 너무 빠르고 길어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결론은 다치지 말라는 것 같아 그렇게 대답했더니 왕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전하?”

“아, 아니다.”

눈치라고는 개벼룩만큼도 없는 주제에 마치 왕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대답해서 왕은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왕이 침대에 라파엘을 내려주려는 순간 “전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라파엘이 물었다. 왕이 내려주려는 찰나여서 라파엘의 입김이 왕의 목에 닿았다. 축축한 그 입김에 왕이 놀라 라파엘을 홱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라파엘의 옷은 얇은 잠옷 하나였고, 그 잠옷은 라파엘의 가슴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남자다. 자신이 안을 수 있는 대상. 빌어먹을, 목이 타는 것 같아서 왕은 찌푸린 얼굴로 팔짱을 꼈다. 라파엘이 살아 돌아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당장 안고 싶어졌다. 왕은 혀를 차면서 궁의에게 고갯짓을 했다.

“내 비는, 언제쯤 완치되는 거냐.”

궁의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완치는…….”

“1주일? 2주일?”

급한 마음 알겠는데 너무한 거 아니시냐고, 스완이 눈짓했다. 그러자 왕이 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신이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최대한도의 날짜를 말했다.

“3주? 설마 한 달이나 기다리라 할 셈은 아니겠지? 벌써 총 맞은 지 두 달이나 되지 않았느냐.”

“송구하오나, 평생 완치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스완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왕의 싸늘한 시선이 궁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차갑고 날이 선 시선에 궁의가 어금니를 악문 모습도 보였다.

왕이 삭막한 얼굴을 하고 있다 픽 웃었다. 하, 왕의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위험하게 들렸다. 저, 전하. 누군가가 왕을 부르는 순간 왕이 긴 장총을 한 손으로 들어 궁의의 이마 한가운데를 겨눴다.

숨을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럴 리가 없다. 왕은 부정했다. 라파엘은 그를 위해 검을 거두고 다쳤는데, 그는 위험하다는 본능에 져서 라파엘을 쏘았다. 그것만으로도 평생 미안하고 미안할 일이었다. 그런데…… 뭐?

왕의 총에서 덜컥 소리가 난 순간 궁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전하의 총을 그토록 근거리에서 맞았습니다. 영원히 완치는 안 될 겁니다. 피부는 물론 낫습니다만, 장기의 손상을 피할 수는…….”

“그걸 낫게 하는 게 너의 일이 아니던가.”

“죽은 사람을 되돌리는 건 의사의 영역이 아닙니다. 죽은 조직을 되돌리는 것 또한 의사가 할 수는……!”

왕의 총이 발포되었다. 콰앙,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벽이 파였지만 아무도 벽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왕의 노여움이 너무나 커서 감히 왕에게서 주의를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궁의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는 소변을 지린 뒤 게거품을 물며 쓰러질지도 몰랐다.

궁의를 구한 것은 의외로 그의 환자였다.

“의사는 언제나 제게 완치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만.”

라파엘이 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는 언제나 완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라파엘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왕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언제나 태양처럼 밝게 웃길 바란다. 하지만 화내지 말라고 하면 왕은 더 화낼 것 같았고 이 상황에 맞는 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둔한 혀는 여전하구나. 라파엘은 자신의 혀를 원망했다.

“그러니까, 아니…….”

말을 잇지 못하는 라파엘을 왕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단어를 찾을 수 없는지 “그러니까” 하고 두 번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궁의는 왕비가 눈을 뜨기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왕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정말로 돌아왔다. 궁의는 왕비가 완치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라파엘은 완치될 수 있다고 말했다.

라파엘은, 아니, 그의 ‘안네마리’는 완치될 것이다.

왕이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싱긋 웃었다. 악동 같은 미소였다.

“그래, 그래야지.”

왕이 웃는 얼굴로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라파엘을 다시 끌어안았다. 놓으려고 해도 계속 끌어안게 된다. 놓아줄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연인은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주신 율레즈에게? 이 땅에 은총을 내리는 쿠치아노에게?

아니, 팔 안에 있는 이 마르고 아픈 남자에게. 왕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어졌다.

“너는 여럿을 살렸구나. 나를 살렸고…… 불쌍한 궁의도 살렸군. 나가봐도 좋다, 궁의. 내일도 최선을 다해 내 비를 돌보는 게 좋을 거다. 너와, 네 아내와, 너의 딸인지 정부인지 모를 어린 계집한테도 아마 그게 좋겠지.”

왕의 말에 궁의가 왕진 가방을 떨어뜨렸다. 스완 라 포의 시선이 궁의를 향했다. ‘딸인지 정부인지 모를?’ 그가 친딸과 부정한 관계라도 맺고 있다는 건가? 그의 친딸은 분명 미혼일 텐데?

스완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궁의는 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어린 딸만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왕이 알고 있는 걸까. 궁의가 뒷걸음질 치자 왕이 픽 웃으면서 왕비를 당겨 안았다. 입술로 왕비의 검은 머리칼을 느끼면서 왕이 말했다.

“떨 필요 없다. 네가 입을 다물면, 네 비밀도 지켜질 테니까. 아.”

왕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첨언했다.

“특히 태후에겐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녀가 네 딸자식의 사교계 데뷔를 도와준다고 해서 네 자식이 대귀족과 결혼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궁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여간 여우시라니깐.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

스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망나니처럼 매일 밤 연회를 열고 남자를 안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지만, 왕은 사실 정치적인 계산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인간이었다. 왕의 수많은 눈들이 궁중을 오가며 모두를 감시하고 있다. 왕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만큼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기분에 따라 인간을 죽이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지 않는다. 게다가 보수도 후하게 주기 때문에 왕의 눈들은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 윗사람의 눈이 되어도 한 푼 받지 못한 상태로 어느 순간 입막음을 위해 살해되기 일쑤지만, 왕은 그러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궁 구석구석까지 왕의 눈들은 왕에게 보고한다. 특히 왕의 적들은 그들의 표적이 된다. 그들은 적들의 일거수일투족, 사소한 말 한 마디까지 모두 보고한다.

“저, 저는, 단, 단…….”

“나가봐라. 처신,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왕이 왕비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물면서 궁의를 노려보았다. 머리카락을 입에 문 귀신같은 형상이 되어버려 궁의는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며 문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어 왕을 올려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왕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살수일 뿐 정치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이 화려한 세계가 사실은 상당히 음험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로 사이가 좋은 듯이 보이는 가족도 한 꺼풀 벗겨보면 각자 나름대로 이득을 두고 싸울 정도다. 그러나 라파엘은 이런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왕을 지켜줄 수도 없을 것이다. 조심하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왕은 알지만 정작 라파엘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이 라파엘의 눈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내게 위해를 가하지 못해.”

왕은 이상한 남자다. 라파엘이 말을 하지 않아도 왕은 신기하게 라파엘의 마음을 알고 있다.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왕이 잡아끄는 대로 왕의 가슴에 안겼다. 왕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그는 곧 잠에 빠졌다. 아주 잠깐, 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 그는 자신의 호신에 대해 떠올렸다. 이 품에서 자도 될까. 여기서 그가 그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라파엘은 아마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의 그라면 지금 당장 이 품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은신을 도모해야 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잠들어서 죽게 되어도 좋다.

라파엘은 극단적인 각오를 다지며 잠 속으로 깊이 밀려들어갔다. 왕은 라파엘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에 그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휘장을 닫고 나왔다. 시종장이 속삭였다.

“태후가 태후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왕이 가볍게 눈을 치켜떴다. 계속 말하라는 제스처에, 시종장이 말을 이었다.

“제럴드 라 쇼어가 입궁했습니다.”

“자의로?”

왕의 질문에 시종장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왕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닫힌 휘장과 시종장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거참 하고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이상한 핏줄이야. 음험하지 않으면 아방하다니. 쇼어 공작 부부 중 어느 쪽 피가 이렇게 약 먹은 병아리의 피일까.”

왕이 키득거렸다. 쇼어가에 대해 웃으면서 말하는 왕을, 스완 라 포는 어색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왕에게 쇼어가는 우스운 대상이 아니었다. 증오와 경멸의 대상. 어느 때라도 웃을 수 없는 상대. 그런 상대였는데 왕은 픽 웃고 있었다. 자신을 능멸한 남자, 자신이 짓밟은 남자, 그 남자의 이름을 말하면서 왕은 웃었다.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스완은 쉬이 결론내릴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자고.”

왕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그 여자. 왕의 인생에서 내내 왕을 괴롭힌 저주 같은 여자. 쇼어가에 대한 증오는 조금 누그러졌어도 그 여자 개인에 대한 증오는 누그러뜨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스완은 안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 웃음에 왕이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냐?”

왕의 말에 스완이 가볍게 웃었다. 특수군의 대장이라는 직위는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스완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한없이 가볍고 껄렁한 한량에 바람둥이다. 그리고 스완은 그에 걸맞은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이 경쾌한 웃음에 왕이 “또 정신 나간 웃음이군. 이번엔 또 누굴 조질 생각에 그렇게 즐거워?”라며 빈정거렸다. 스완은 그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시 흘흘 웃었다.

스완 자신은 그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왕이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졌고, 아직 왕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도했다. 이 얼마나 치졸한 일인가. 홀로 이 증오에 갇혀서 분노를 불태울 자신은 없어서 왕이 곁에 같이 있어주길 바라다니. 복수는 이미 했다. 그리고 그 복수에 대한 책임은 공식적으로는 떨거지에 불과한 그가 아니라 왕이 오롯이 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왕이 단순히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만으로도 쓸쓸하다니.

나도 좋은 동생이 되긴 글렀어.

스완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왕이 그런 스완을 찡그린 얼굴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뭘 잘못 먹은 게 아니고서야, 혼자 실실 쪼개다 얼굴을 구기더니 혀를 차고 고개를 젓고 있질 않나. 내 동생이지만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시종들은 각자의 세계에 빠진 듯한 스완과 왕을 번갈아 보면서 ‘피가 물보다 진하긴 진해. 정말 진해’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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