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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사냥 (11/47)

제10장 사냥

말하지 않아도 된다. 

왕은 어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열병처럼 머릿속을 맴돈다. 그는 만난 이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살인 기계의 무딘 혀가 바보같이 마음속 말 한 마디 못 꺼내도, 그는 그 말을 굳이 꺼내라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앞서 생각해주었다. 그 생각은 맞는 것도 있었고 틀린 것도 있었지만, 그의 생각이 설사 틀렸다 하더라도 그가 그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하면 마치 사실처럼 느껴졌다.

“안네마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꿈……. 그래, 꿈이다. 이 흐릿한 시야는 분명 꿈이라서 그런 거다. 그렇다면 당신이 여기에 와 있는 것도 꿈인가. 그렇다면, 나는.

왕은 당황해서 안네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네마리의 작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어제부터 아팠노라 보고하는 시녀장의 목을 그대로 분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왕은 안네마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평소 그녀에게서 나던 체향에 약간의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섹시하군. 왕은 피식 웃었다. 남색가라 다행이다. 여자를 안을 수 있었다면 지금의 안네마리를 덮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음은 곧 사라졌다. 안네마리는 많이 아파 보였다.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안네마리의 안색이 지나치게 좋지 않아서 왕은 궁의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안네마리가 팔을 뻗었다. 마른 팔이었다. 왕은 그 팔 안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침대에 앉아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그의 머리를 안고 거칠게 입술을 부딪쳤다.

왕의 눈이 커졌다. 라파엘은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라파엘을 밀어내려는 듯해서, 라파엘은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왕의 팔이 약간 힘을 주는 듯하다 곧 떨어졌다. 당신은 어제 내게 상처를 줬어. 당신의 형제에게 나를 안으라고 했고, 당신의 총은 내 몸을 스쳤다. 하지만 이상해. 지금 날아갈 것같이 기분이 좋아. 열에 들뜬 꿈은 황홀해. 그래, 당신이 준, 난생처음의 상처가 달콤해. 현실의 당신에겐 이럴 수 없지만, 꿈속의 당신이라면 이럴 수 있겠지.

안네마리의 혀가 거침없이 왕의 입안을 헤맨다. 바싹 마른 입술이 가여워 왕은 안네마리의 입술을 몇 번이고 핥아주었다. 안네마리는 그를 덮친 주제에 키스는 여전히 서툴렀다. 열은 용기를 주지만 테크닉까지 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안네마리는 필사적으로 그의 입술 안을 더듬고 있었다. 왕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숨결이 상쾌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숨결은 뜨거웠고, 그것을 집어삼키는 것만으로도 왕의 머릿속도 바짝바짝 말랐다. 왕이 안네마리를 밀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아읏!”

안네마리의 몸이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리고 동시에 왕도 번개라도 맞은 것마냥 뒤로 물러났다. 뭐지. 안네마리가 침대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왕이 “궁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시녀장이 수건을 들고 달려와서는 안네마리의 허벅지를 닦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궁의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시녀장의 말은 왕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듯, 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미쳤나.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왜 피를 흘리는 거냐. 허벅지를 다친 거냐, 아니면 그 위에서부터 피가 흐르고 있는 거냐. 뭐냐? 궁의를 불러와라!”

“이 피는!”

시녀장이 재빨리 소리쳤다. 궁의가 와서 진단을 하는 날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청진기를 대기 위해 옷이라도 벗기는 날엔 전원의 목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되는대로 소리쳤다.

“이 피는, 여자라면 누구나 흘리는 피입니다!”

왕이 어깨를 굳혔다.

“누, 누구나?”

왕이 그답지 않게도 말까지 더듬었다.

“네, 누구나. 한 달에 한 번씩.”

시녀장이 대답했고,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최대한 그 피의 정체를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면서 시녀장에게 물었다.

“그…… 피 말이냐.”

“예, 전하.”

“그렇다 하더라도 궁의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저렇게 낭자하게 흘리고 있는데.”

“원래 나오는 피입니다. 보기가 흉할 뿐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 피치고는 피가 하얀 시트를 빠른 속도로 먹어가고 있었지만 시녀는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끝까지 우겼다. 시녀들은 시녀장의 외줄타기를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서워서 도저히 눈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

왕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는 남색가였고, 여자의 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 것 때문에 저토록 열이 오르는 건가? 저렇게 괴로워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원래 남자분들은 잘 알지 못하시지요.”

“그, 그걸 참으면 안 되는 건가? 그게 꼭 저렇게 낭자하게 흘러야 하는 거냐?”

“그건, 배 안쪽의 아기집이 부서져 흐르는 피입니다. 상처가 났을 때 상처 부위를 손으로 오므리고 있다 해서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시녀장이 꿋꿋하게 우겼다. 왕은 그녀와 안네마리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여자들의 생리 현상이라면 그가 뭐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궁의는 정말 없어도 되겠느냐.”

“고귀한 분의 은밀한 곳입니다. 저희가 보겠습니다.”

시녀장의 말에 왕이 마지막으로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안을 수 없으니 그녀의 나체를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더욱이 그녀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체를 본다는 건, 귀족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은 이 침실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 괴로워 보였고, 뭔가 잘못될 것만 같은 생각에 그는 내내 그녀의 곁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는 침대의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천개를 닫고 그녀를 돌봐라.”

흐릿하게 잔상이 비치는 정도의 비단 휘장을 사이에 둔 채 왕의 앞에서 라파엘 에반스의 옷을 벗기고 그 상처를 치료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저 왕이 언제 갑자기 휘장을 들출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어 시녀장은 “예, 전하”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천을 사이에 둔 채 시녀장은 라파엘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왕이 움켜쥐었던 상처 부위는 터져 있었다. 시녀장이 시녀의 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혈제를 가져와. 그러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휘장 밖으로 나갔다. 휘장이 거의 열리지 않도록 조심히 나가는 시녀의 모습을 확인하다 시녀장은 휘장의 틈 사이로 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친 것은 한순간으로 곧 휘장이 그들의 시선을 차단시켜주었다.

왕의 푸른 눈을 보자 시녀장은 심장이 그대로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몰살의 즉위 축하연’은 고작 6년밖에 안 된 일이었다. 그때 죽은 것은 귀족만이 아니었다. 그 귀족들을 모시던 사람들도 모두 목숨을 잃어야 했다. 시녀장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 분명했다. 목숨을 잃는 것은 각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두렵더라도 자신들의 총명하고 자랑스러웠던 마리 트리지아가 개죽음을 당한 것은 억울했다. 그녀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일어나세요.”

시녀장이 라파엘의 귀에 속삭였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당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라파엘의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출혈이 심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 때문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혼자 붕대를 감던 라파엘이 떠올라 시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짐승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플 텐데 무표정을 유지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손놀림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홀로 고고히 살아가는 짐승들처럼, 라파엘 에반스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아예 기댄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일어나요.”

그가 있어야 마리의 죽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버려져 홀로 살아온 그가 이렇게 허무히 죽는다는 건 너무나 가여운 일이다.

“일어나세요, 라파엘 도련님.”

누군가가 그를 부른다. 하지만 ‘라파엘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건대 어쩌면 그 이름은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 집에 가야 한다. 라파엘은 열에 들뜬 채 생각했다. 집에는 검과 새와 고양이와 개가……. 아아, 그래. 그 집은 불타 없어졌다고 했던가.

추웠다. 라파엘은 시트를 둘둘 만 채 몸을 웅크렸다.

아까는 누군가의 입술이 닿았었다. 누군가가 그의 입술을 핥아주었다. 짐승처럼. 하지만 짐승이든 사람이든 내게 가까이 오지 마. 당신도 죽게 될 테니까.

열이 들끓는다.

따뜻해. 여긴 어머니의 뱃속인가. 그렇다면 부디, 이곳에 좀 더…….

라파엘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 주에는 사냥 대회가 열린다. 대귀족과 왕족들이 참석하는 사냥 대회는 1월 마지막 주 내내 진행된다. 매일 다른 사냥감을 잡아 마지막 날 점수를 계산해 우승자에게는 왕이 후한 상을 내리는 대회였지만, 최근 6년간은 그 우승을 왕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대귀족들과 왕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질수록 자리를 같이할 때면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고, 그 격전지가 바로 사냥 대회였다. 지기 싫어하는 건 귀족이나 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왕도 최근 몇 년간은 계속 몹시 진지한 자세로 사냥 대회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냥 대회 따위에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던 왕은 정부들을 데리고 가서는 귀족들의 눈앞에서 음탕한 짓을 하며 약까지 올렸다. 그건 마치 테스트 전에 코피 터뜨리며 공부해놓고 ‘아아, 공부는 하나도 안 했어. 어쩌면 좋아’라고 말하는 얄미운 아카데미생과 비슷했다.

그러나 올해, 왕은 그렇게 과시할 만한 정부가 없었다. 알려진 정부부터 알려지지 않은 정부까지 모조리 정리한 그에게 남은 건 자신의 정비인 안네마리뿐이었다. 하지만 그 안네마리를 과시 대상으로 삼을 생각이라곤 없었으므로, 보다 성실히 사냥을 해서 우승은 둘째치고 일단 은여우나 잡아볼 생각이었다. 최근 안네마리가 생리통으로 상당히 고생했었기 때문이다. 생리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던 왕은 가뜩이나 삐쩍 마른 안네마리가 아예 곯아빠지자 우습게 볼 게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는 의사와 학자들을 모아놓고 ‘너흰 도대체 뭐 하는 거냐. 여자들은 다 저렇게 아프다는데, 저러다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런 위험에 인류의 반을 밀어 넣을 생각이냐. 너희가 그러고도 의사고 학자란 말이냐! 너희들이 불사니, 불로니, 연금술이니, 기계 인간이니 하는 동안 몇 사람의 가여운 목숨이 날아가고 있는 거냐. 경고해두건대, 내달까지는 결과를 갖다 바쳐라. 내 비가 한 번 더 저런 식으로 사경을 헤매면 너희 같은 새끼들에게 주는 예산을 빼앗아 내 비에게 주겠다. 알았느냐?!’라는 말도 안 되는 폭언을 퍼부었다. 결국 내 비가 생리통으로 아픈데 너희가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정말 왕다운 짓이었다. 의사와 학자들이 입을 꽉 다물고 그저 당하고만 있는 동안, 왕은 의사와 학자들이 그동안 내놓았던 연간 보고서의 항목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빈정거리다 식사 때가 되어서야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점심을 먹기 전 안네마리의 상태를 묻자 시종장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호전되었다 하더이다. 열은 내렸고, 안색은 좋아졌으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도 길어졌고, 오늘은 식사도 잘하신다 하더이다.”

“……걸을 수는 없다고 하더냐.”

“거동도 가능하온데……, 어쨌거나 비전하께서 힘들어하신다고 하오니…….”

안네마리는 벌써 나흘째 왕을 거부하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비웃음과 함께 문을 열었을 왕이나 눈앞에서 피가 낭자한 꼴을 보았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그녀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있었다.

“힘들다, 라.”

놀라울 정도로 많은 피였다. 빌어먹을. 어차피 왕은 그녀를 안지도 못하고 그녀는 아이를 가지지도 못할 텐데, 그딴 아기집이 다 뭐라고. 그녀가 아프지만 않다면 확 떼어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네마리는 분명 거절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좋은 약은 보냈느냐.”

“약도 음식도 보냈습니다. 아마 곧 떨치고 일어나시겠지요. 시녀들에게 물으니 늘 이러신 것은 아니옵고 이번이 유독 힘드셨나 봅니다. 아무래도 입궁하셔서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압박이 되었던 거겠지요.”

왕은 쓰게 웃었다. 누군가를 능욕하고 모욕하고 처치하는 짓은 많이 했어도 누군가를 품 안에 넣고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처음 하는 일이라 어설펐던 모양이라고 그는 자평했다. 안네마리는 약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억지로 왕비가 되어, 습격 사건도 거쳤다. 그녀가 입궁한 뒤부터 살수니 검은 여우니 하는 것들이 설쳤고, 그녀는 그에게 내색하지 않았으나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뭐, 여자와 있어본 적이 있어야 내가 여자를 알지.”

왕이 혀를 찼다. 여자란 다 저렇게 약한 것이냐. 다른 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약한 여자를 안고 또 안는 것이냐. 그놈들이 미친 것이냐, 그놈들의 여자는 여자가 아닌 것이냐.

네 마누라가 이상한 거야, 라고 차마 직언할 수 없었던 시종장은 그저 황공하다는 듯이 허리를 더 숙여 보일 뿐이었다. 뭐라 하겠는가. 왕이 그렇다는 데야.

“다음번엔 궁중 예법이고 지랄이고, 아파해도 내 품에 두는 게 낫겠다.”

생각해보니 여자가 흘리는 그 피가 뭐라고 내가 물러났담. 왕이 혀를 찼다. 미리 그녀의 허락을 받고 피를 흘리며 아파하는 그녀의 몸을 내내 닦아주겠다. 차라리 그게 낫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만 듣고 있는 것보다는.

그러나 그의 왕비 안네마리, 즉 라파엘 에반스는 침실 안에 멀쩡히 서 있었다. 라파엘이 왕을 만나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왕궁을 떠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지도를 꺼내 다시 왕궁 내의 배치를 확인했다. 그 지도는 여러 가지 메모로 지저분했는데 대부분은 라파엘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가든 하우스는 스무 개 남았군. 이 스무 개 중에서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다면 거기에 뭐가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가든 하우스를 깃털 펜으로 체크해두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 요즘 계속 머릿속에 걸리는 게 있었다.

“비전하, 약 드셔야지요.”

고개를 돌리자 수잔 데인이 서 있었다. 라파엘은 수잔에게 손짓했다. 시녀로 은근슬쩍 들여놓은 수잔이 싱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빠를 만나길 바라면서도 시녀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수잔은 꽤 귀여운 소녀였다. 주근깨와 오똑한 코, 건강하게 탄 갈색 살결이 매력적이었다.

라파엘은 수잔에게 다시 확인했다.

“쇼어 공작이 널 가둔 이유가 첩으로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했지.”

“네, 그는 저에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서 해주겠다고 하면서.”

라파엘은 수잔의 얼굴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잔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로버트 데인은 평범한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보라색 눈은 몹시 특이한 색이다. 라파엘은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한 종류의 인물들뿐이었다.

“……네 집이 토우셔라고?”

서쪽 해안 지역의 이름을 대자 수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빠인 로버트 데인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흘러넘치고 있어 라파엘은 그저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라파엘보다 조금 더 키가 큰 그녀가 “전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릿속에 걸리는 걸 아무래도 확인해야겠다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이미 몸은 다 나았고, 마침 오늘 밤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 밤, 라파엘은 검은 잠행복을 입고 발코니에서 시녀들의 배웅을 받았다. 침번인 시녀뿐만 아니라 시녀장을 비롯한 모든 시녀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조심하시라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라파엘은 어쩔까 하다가 한 번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발코니를 빠져나갔다.

그때 그가 남긴 미소 때문에 시녀들 사이에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완전 어색하네요, 웃는 것도 연습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렇게 웃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남자도 저렇겐 안 웃죠. 그녀들이 그렇게 소란을 일으키다 시녀장에게서 한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을 때 라파엘은 문 플레이스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사라궁에 도착한 라파엘은 주변에 아무런 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재무 비서관실로 이동했다. 그의 신형은 누군가 본다 하더라도 잘못 봤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속했다. 잠깐 어둠에서 벗어났을 때 달빛이 그를 비췄지만, 곧 그의 몸은 어둠에 가렸다. 재무 비서관 집무실 발코니에 도착한 라파엘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발코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쪽을 확인했지만, 안쪽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에서도 느껴지는 기척 또한 없어 라파엘은 안으로 들어가 일단 문을 잠갔다.

발코니 유리문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한 채 책상 앞까지 움직였지만 정작 봐야 하는 작은 틈은 어슴푸레한 달빛만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라파엘은 발코니의 두꺼운 커튼을 치고 책상 위의 촛대에 꽂혀 이미 반쯤 녹은 초에 불을 붙였다. 홈을 찾아낸 라파엘은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끝에 위장용으로 덧대어놓은 문을 열고 그 안쪽의 비밀 금고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깃털 펜을 꺼내 열쇠로 조립하고 홈에 끼웠다.

설마.

달칵, 달칵. 열쇠를 좌우로 돌려보았지만 맞는 듯 맞지 않는 열쇠인지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았다. 역시 아니었나. 라파엘은 열쇠에서 손을 떼고 눈에 붙은 먼지를 떼어냈다.

그때 달칵,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은 한쪽 눈을 감은 채 열쇠를 바라보았다. 열쇠가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열쇠를 꽂은 채 손을 놔야 했던 것이다. 마법이 부여되어 있던 열쇠였구나.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집무실에 이런 금고를 마련해놨을까.

라파엘이 천천히 서류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기척이 느껴졌다. 곧 다가올 살의에 그는 황급히 서류를 꺼내 자신의 옷 안에 대충 구겨 넣었다. 금고를 제대로 닫아놓은 다음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라파엘은 살기가 다가오고 있는 발코니가 아니라 복도 쪽으로 달렸다. 길고 높은 복도의 붉은 카펫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이 집무실 쪽에서 콰앙― 하는 굉음이 들리며 궁이 흔들렸다. 마침 계단에 도착한 라파엘은 2층 난간에서 1층으로 뛰어내렸다.

“라파엘 에반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라파엘 에반스. 나오거라.”

상대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라파엘은 그 목소리가 스완 라 포 소백작의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걸음이 잠시 멎었다. 놈은 왕을 배신하고 있다. 이그나치오궁에서 어떤 서류를 빼돌렸다. 놈을 죽이는 게 왕을 위한 일일까.

그러나 라파엘은 등을 돌려 사라궁을 빠져나갔다.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데 왕을 위한답시고 왕의 이부형제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확실하지 않은 동안은 살려두는 수밖에.

사라궁을 빠져나가는 순간 라파엘은 느끼지 못했던 살기의 기척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왕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라고 라파엘이 눈을 크게 뜬 사이 왕이 총을 빙그르르 돌리며 피식 웃었다.

“역시 사냥은 여우 사냥이 제일이지.”

그리고 재무 비서관 집무실에서 스완이 뛰어내렸다.

“전하, 잡으셨습니까?”

“아직.”

왕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도망칠 수 있을까. 라파엘은 주변을 가늠해보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어디 있을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알 수 없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왜 그동안 나다니지 않았느냐. 덕분에 매일 밤 잠도 못 자고 괜한 수고를 하지 않았느냐.”

왕이 비릿하게 웃었다. 모든 궁의 문을 열어놓게 하고 30분에 한 번씩 닫힌 문이 없는지 확인하게 했다. 그러면서 왕과 스완도 계속 궁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은 여우가 설마 목적 없이 궁을 떠돌 리는 없다. 그가 살수라고 한다면 너무나 느긋하다. 그는 다른 목적이 있는 자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질 목적은 아마도 기밀 서류나 보물,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관료들의 궁인 사라궁과 왕의 전용 집무궁인 이그나치오궁을 비롯한 몇 군데의 궁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검은 여우가 누구와 결탁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발코니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은 특수군이 직접 움직였고, 어느 누구도 밤에 남아 있지 못하도록 미리 명령을 내려놓았다.

“흰 여우, 은여우. 여우는 많지만 어디 검은 여우를 잡는 손맛만 할까.”

왕의 웃으며 총을 겨눴다. 1미터에 가까운 그의 긴 장총이 가볍게 라파엘을 조준한다. 피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막연한 예감이 들었었다. 그랬었다. 그래도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지. 이렇게 마지막에 웃을 수 있게 될 줄도 몰랐지.

라파엘은 검을 꺼냈다. 개죽음은 사양이다. 손을 늘어뜨린 채 죽고 싶진 않았다.

“잠깐, 전하!”

스완이 고함을 쳤다. 하지만 왕은 이부형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검은 여우의 입술이 웃고 있다. 그런데 그 입술이 붉은 루주를 바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세상 모두가 검은 여우라 할지라도 그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매료시켰던 그 입술이, 그 어색한 웃음을 짓던 그 입술이, 지금 죽음 앞에서 웃고 있는 입술과 비슷해 보였다. 왕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그녀는 약하고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가 저기서 양날의 검을 쓰는 검은 여우일 리가 없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순간 라파엘이 달려들었다.

“전하, 쏘면 안 됩니다!”

스완은 비명을 질렀다. 라파엘 에반스가 죽는 건 아쉽지 않았다. 안네마리 왕비가 죽는 것도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건가. 그러나 왕은 분명 대단히 상심하게 될 것이다. 스완은 왕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왕은 정말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 에반스를 아꼈다. 심지어 그가 여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를 여자로 알았는데도 그렇게나 총애했다. 그래서 스완은 안네마리가 라파엘 에반스라는 걸 알아내 이런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였어도 결국 왕에게는 사실을 고할 수가 없었다. 왕이 믿을지도 알 수 없었고, 차라리 그가 직접 두 눈으로 보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포하든 사살하든 그의 앞에서 라파엘 에반스, 즉 안네마리 왕비의 정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당장은 괴롭더라도 곧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을 스스로 죽인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 좋아하는 사람이 살인 기계에 빌어먹을 사기꾼이라 할지라도 그런 건 잊게 된다. 남는 것은 분명 자책밖에 없을 것이다.

스완의 고함에 왕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왕이 고개를 돌리자 라파엘은 내려치던 검을 거두고 말았다. 왕이 당연히 막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쳤는데 왕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당황해서 검을 거두다 살수가 된 이래 처음으로 검에 자신의 한쪽 손목을 깊게 베이고 말았다.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왕은 고개를 돌리고선 자신이 고개를 돌렸다는 것을 생각해내자마자 무조건 신력을 끌어올려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라파엘 에반스는 검을 높이 치켜들며 달려들고 있었고, 그는 살수에게 목숨을 빼앗기기 전 뭔가를 해야 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그의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본능에 의한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콰앙―.

엄청난 위력의 총이 발사되었다. 검은 여우의 옷과 살점이 스치고 지나간 총알 때문에 뭉개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검은 여우의 옷에서 서류가 흩날렸다. 무슨 서류인지 모르나, 서류가 낙엽처럼 날렸다.

왕은 고개를 돌려 검은 여우를 바라보았다. 특수군들이 밝힌 횃불 때문에 상대가 똑똑히 보였다. 검은 눈.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검은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허공에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황급히 거둔 그와, 그의 손목에서 솟구치는 피, 그리고 그의 검은 눈.

언제나 그를 담담히 바라보던 검은 눈이 순간 웃는 것도 같았다. 그 입술도 웃는 것 같았다.

키스를 할 때처럼 코앞에 가까이 있었다.

“안네마리…….”

왕이 중얼거렸다. 그가 더 웃는 것도 같았다.

입술이 닿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아니, 그의 몸이 닿지도 않았는데 손이 뜨거웠다. 왕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눈만을 내려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새빨간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구의 피지, 이건? 안네마리의 피? 하지만 안네마리의 피는 손목에서 솟구치고 있지 않은가.

그를 살리기 위해 검을 거두어서, 손목에 상처가. 아니.

그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갑자기 시간이 제대로 움직였다. 안네마리가, 아니, 라파엘 에반스가 그의 앞에 툭 떨어졌다.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손목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지만 옆구리에서도 엄청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총알이 스친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에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 에반스의 허리는 깊이 파여 있었다.

“거, 거짓말이야.”

왕은 부정했다.

“이건 꿈이야.”

안네마리가 검은 여우일 리 없다. 그가 안네마리를 쏘았을 리가 없다. 마치 이 어두운 세상에 단둘뿐인 것 같던 그녀가 이랬을 리 없다. 왕이 한 발짝 물러섰다가 이미 시체에 가까워진 것 같은 몸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를 배신해도, 그녀만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녀는, 안네마리는.

“전하! 그가 죽습니다!”

스완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온다. 그제야 왕은 라파엘에게 달려갔다. 그의 복면을 찢어내고 그의 상처를 손으로 막았다. 피가 철철 흘러나간다. 라파엘 에반스인지 안네마리 라 쇼어인지 모를 생명이 빠져나간다.

“궁의를 불러!”

스완이 비명을 질렀다. 저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분명 쇼어 가문과 음모를 획책하였을 것이 분명했다.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불쌍한 형을 위해서도 저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 형은 미칠지도 모른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다. 왕세자로 태어나서 온갖 사선을 넘어 수십 번의 암살 위협을 이겨내고 때로는 살수를 그 스스로 잡아내면서 왕이 되었다. 남색가라는 이유로 왕자로서는 상상도 못할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자였다. 남자든, 여자든.

스완이 자신의 옷을 찢어 라파엘의 손목을 지혈했다.

“안네마리, 들리느냐?”

왕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 에반스. 눈을 떠봐라.”

제발, 눈을 떠라.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살인 기계, 단 한 번도 타깃을 놓쳐본 일이 없다는 라파엘 에반스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남자에게 검을 휘둘렀다가 그가 정말 베일 것 같자 급히 검을 거두었다. 양날검이라는 건 거두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사용자의 어떤 안전도 보장하지 않는, 일격필살을 위한 검.

그러나 라파엘 에반스는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그의 목숨을 구했다.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다. 스완도, 특수군도, 그리고 왕도.

“전하, 나오십시오. 지혈을 해야 합니다.”

스완이 나직하게 말했다. 왕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가 차라리 비명을 지르거나 했다면 스완도 조금 안심했을지도 모르는데 왕은 아주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라파엘. 눈을 떠라. 안네마리, 안네마리, 눈을 떠라. 그의 얼굴이 너무나 창백했다. 결국 스완이 눈짓을 하자 특수군이 왕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끌어냈다. 왕의 몸이 힘없이 뒤로 물러나자 스완은 서둘러 그 상처 위에 손을 대고 신력을 불어넣었다.

이게 도움이 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쓰는 신력은 전쟁신 쿠치아노의 힘이다. 쿠치아노는 주로 공격에 기인하는 힘을 사용하게 도와줄 뿐 치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손을 놓고 육체에서 생명이 흘러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 사기꾼 살인자 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형을 위해서. 그리고 그의 형을 구하려고 했던 ‘안네마리’를 위하여.

왕은 라파엘에게서 두 발짝쯤 떨어져 있었다. 그는 특수군병 하나가 복면을 벗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복면이 위로 올라가며 천천히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밀랍을 부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거기 있었다.

그를 속이고, 그가 죽인, ‘남자’가.

신력을 쏟아붓던 스완은 갑자기 떠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왕이 그를 밀치고는 라파엘의 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살아라, 라파엘 에반스.”

왕이 조용히 말했다. 왕의 손에서 붉은 빛이 쏟아진다.

“죽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

그러나 왕은 다른 자를 떠올린다.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그런 가증스러운 사기질을 하면서도 제대로 웃는 법조차 모르던 어떤 남자를 떠올린다. 서툴던 키스와 둔하던 반응과 그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라고 말하며 울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죽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그것은 살아만 난다면 무엇이든 용서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  §  §

‘양날검은 분명 너에게 어울릴 거다, 라파엘.’

누구지? 라파엘은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았다. 누군지 모르겠다. 손을 들자 끈적거리는 피가 덩어리져 툭 떨어진다. 누구의 피지? 곧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교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의 피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 너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 문제다.’

‘저는 검에 의해 다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순간, 네가 검을 거두어야 하는 때가 온다면 너는 다칠 수밖에 없어. 양날의 검이란 그런 것이다.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면 네가 죽는 것이다. 네 목숨을 걸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관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날이 한쪽만 있는 검을 선택해라. 그것은 보류가 되어줄 거다.’

‘…….’

‘단순히 위력을 위해서 네 목숨을 걸 셈이냐. 넌 살수지만 살수 짓도 목숨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도 미래에 꿈꾸고 있는 게 있겠지? 그 미래를 위해 살아남으려면…….’

라파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어느 때에 서 있는지 깨달았다. 열네 살 때다. 사람을 처음 죽였을 때. 검으로 폐를 찔러 단숨에 찢었었다. 그래, 뼈를 스치던 검의 느낌이 생생했다. 돼지나 닭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던 감촉이었다.

‘……양날검을 주십시오.’

이제껏 기억해내지 못했던 날들이 갑자기 환하게 펼쳐진다. 첫 살인은 배신자였다. 평원에서 그를 놓아주자 라파엘은 쫓아갔었다. 그가 백 미터를 뛰기도 전에 라파엘은 쫓아가 검으로 찔렀다. 내장을 찢으며 검을 빼내자 손에 피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도 핏빛 노을이 졌고, 교관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것이 첫 살인이었다. 살인 기계로서의 진정한 첫 걸음이었다.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제럴드 라 쇼어를 노려보았다. 라파엘이 총에 맞은 다음 날에도 왕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왕은 문 플레이스에 근신령을 내렸다. 표면적인 근신령과는 달리 안쪽은 처참했다. 시녀들은 전부 각자의 침실에 갇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왕의 침전은 초토화된 상태였다. 왕은 어떤 남자를 안고 와서 살려내지 못하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핏발 선 눈으로 공언했다. 궁의가 다섯 시간마다 와서는 세 시간씩 머물렀다. 그렇게 해서 라파엘의 생명을 그 몸에 붙여놓고 있었으나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다음 순간에라도 죽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 궁의는 말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본인의 생명력이 질긴 것에 불과하다며 궁의는 망설이다 다음 말을 덧붙였다. ‘본인도 살려는 의지가 약합니다.’

왕은 업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라파엘을 안은 채 내내 속삭였다. 살아라. 살아서 내게 말하라. 살아서 내게 죄를 갚으라. 살아라. 그는 자지도 먹지도 않고 내내 라파엘에게 속삭였다. 시종들이 애걸하면 어쩔 수 없이 라파엘을 안은 채 입을 벌려 시종들이 떠먹여주는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라파엘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뒤 제럴드 라 쇼어가 불려왔다. 사흘 만에 간밤의 경비 보고를 하러 온 제럴드가 왕에게 안겨 정신을 잃은 라파엘을 보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라피…….”

제럴드의 신음과 함께 스완이 제럴드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 제럴드가 시선만 들어 그를 바라보자 스완이 나직이 명령했다.

“전하께 낱낱이 고하라. 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제럴드는 그냥 죽이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젠 모든 게 짜증스러웠다. 쇼어가에서 태어난 게 그의 인생을 망쳤다. 저 왕에게 능욕당한 몸에는 아직도 그 찌꺼기가 남아 그를 괴롭힌다. 구차하게 목숨을 잇고 싶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귀족이랍시고 억지로 웃는 것도, 바보에 순둥이인 둘째 역을 계속해나가는 것도 지쳤다.

그러나 왕의 팔 안에 라파엘이 누워 있었다. 밀랍처럼 하얀 얼굴로 쓰러져 있는 라파엘. 마리처럼 죽을지도 모르는 라파엘. 아니, 마리는 구하지 못했어도 라파엘은 구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왕은 지금 당장 라파엘을 죽일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사실을 고하고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제럴드는 자신이 아는 것을 고했다. 마리의 마지막 편지도, 라파엘이 왜 궁으로 들어왔는지도, 그리고 라파엘이 누군지도. 그리고 왕은 그를 냉혹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얼굴에 나타난 지독한 경멸 때문에 제럴드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럴드 라 쇼어. 너와 네 가문은 이렇게 나를 미치게 만드는구나.”

왕이 이를 갈았다.

“가문이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더냐?”

왕이 침대에 널려 있는 서류를 구겼다. 라파엘의 피에 젖은 서류가 구겨진다. 그 서류에 따르면 에드워드 라 쇼어는 왕의 개인 재산을 빼돌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 서류를 재정 비서관 집무실에서 빼돌리던 중이었다. 그걸 어디에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쇼어가에 돌려줄 생각으로 빼돌리진 않았으리라.

너는 도대체 왜.

왕은 라파엘의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 몸은 희미한 체온만이 남아 있었다. 체온이 사라져가는 것만 같아 무서웠다.

너는 도대체 왜 이렇게 요령이 없느냐.

너를 버린 집안, 그 여동생이 너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일에 끼어드는가. 왜 잘못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검을 거두고야 말았느냐. 총을 맞은 순간 왜 웃었느냐. 왜 멍청하게 그 순간 웃어주고 말았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라파엘이 사람의 목숨을 많이 거두었다지만 왕만은 못했다. 왕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아니, 천 명이 넘는 목숨을 일제히 거둔 적이 있다. ‘몰살의 즉위 축하연’에서 죽은 자의 숫자는 다 알지 못하나 그들을 태우는 연기가 2주를 갔으니 그 숫자는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죽을 때 왕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죽는 동안 그는 가벼운 내기로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남자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진심으로 유쾌했었다.

그는 지금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팔이 덜덜 떨린다. 라파엘이 죽을까 봐 잘 수도, 먹을 수도 없다. 그를 내려놓는 순간 그가 죽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죽음이 라파엘을 삼킬까 봐 두려웠다. 잠을 자면 꿈속에서 라파엘이 웃고 있었다. 그저 웃는 라파엘을 향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이렇게 소중한데, 그런데 그의 손으로 총을 쏴버렸다. 알았더라면 쏘지 않았을 텐데,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알고 있었는데, 의심했었는데 그런데 쏘아버렸다. 그는 검을 거두었는데 자신은 총을 쏴버렸다.

“가문이란 말이지.”

왕이 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쇼어가. 영원불멸의 가문이라는 그 가문을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이제 마지막 남은 이마저 앗아간다. 고작 가문이라는 간판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깨부숴주겠다. 포 대장.”

왕의 말에 스완이 절도 있게 무릎을 꿇었다.

“특수군 스완 라 포, 명을 받습니다.”

제럴드가 눈을 크게 떴다. 특수군 대장이 스완 라 포였다고? 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마 사교계의 누구도 알지 못할 이야기일 것이다. 스완 라 포와 왕이 친한 것은 그저 둘이 사냥이나 저질스러운 짓을 자주 하기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특수군의 대장이 사실은 스완 라 포였다고?

“쇼어가를 사냥해 와라.”

왕의 말에 스완이 입술을 올렸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스완이 나가자 왕을 지키는 특수군 소속의 근위병들에게 왕이 고갯짓을 했다. 데려와라. 왕의 말에 근위병들이 제럴드의 양팔을 단단히 제압해서 왕의 앞으로 끌고 왔다. 왕은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아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총을 집었다. 총을 든 왕이 제럴드의 옆구리에 대었다. 정확히 라파엘이 총을 맞은 곳이었다. 잊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잠들면 꿈속에서 라파엘이 웃고 있으니까. 거기에 구멍이 뚫린 채로 웃고 있으니까. 네, 전하. 라파엘이 말하니까. 그 빌어먹을 검은 잠행복을 입고서 천치같이 웃기만 하니까. 네, 아이브리 전하…… 라고.

“죄는 같이 지었는데 벌은 하나만 받는다니, 그것은 불공정하지 않은가.”

안 그래, 라고 말하며 왕은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과 함께 제럴드가 뒤로 날아갔다. 그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끌고 나가.”

왕은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제럴드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시종들이 재빨리 제럴드를 끌고 나간다. 왕은 그동안에도 라파엘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살아라, 라파엘. 왕이 중얼거렸다. 살아서 눈을 떠라.

“라파엘,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라파엘은 여전히 핏기 없이 하얗기만 하다. 왕은 제럴드를 쏘았지만 그가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럴드는 신력을 부여받은 자고, 왕이 그의 머리를 정확히 날리지 않은 이상 왕의 시종들도 응급 처치를 해줄 테니까. 그러나 라파엘은 신력도 없었고, 신력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 피를 많이 흘렸다.

“라파엘, 내게로 돌아와라.”

왕이 중얼거렸다. 그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로 돌아만 와다오. 한 번만 더, 내게로 와다오. 다시 한 번 내 눈을 보고, 그리고 내게 말해라.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눈을 떠라. 제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나뿐이라고, 라파엘…….”

어느새 안네마리라는 이름보다 라파엘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졌다. 왕은 총을 집어던지고 덜덜 떨리는 팔로 라파엘을 품에 가뒀다. 그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궁의를 비롯, 시종들이 여러 번 간청해도 왕은 그를 내려놓지 않았다.

오늘도 라파엘이 눈을 뜨지 않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왕은 라파엘을 안은 채 무정히 흘러가는 시간을 욕하며 창 밖을 노려보았다. 왕의 심기가 불편하여 취소된 사냥 대회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이 자자하다 들었지만 오늘 드디어 그들의 수장격인 쇼어가가 멸문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입을 닥치게 되리라. 이로써 왕은 대귀족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겠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전하.”

스완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끌려 들어오는 것은 쇼어 공작과 공작부인이었다. 둘은 끌려 들어와 왕의 품에 있는 라파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작.”

왕이 그를 불렀다. 지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게 마치 독기 같다고 시종들은 생각했다.

“귀찮아서 너를 내버려두었더니 이런 짓을 하는구나.”

왕의 말에 쇼어 공작이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께서 먼저 관대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소.”

“사내를 여자로 변장시켜서 입궁시켜놓고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할 말은 해야겠소.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했단 말이오? 관대한 명령은 떨어졌고, 우리에겐 내놓을 패가 없었소. 그런데 마침 마리와 많이 닮은데다 마른 체격의 라파엘이 우리에게 찾아왔고 그 애가 먼저 말했소. 자신을 입궁시켜달라고!”

쇼어 공작의 말에 왕이 피식 웃었다.

“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왕을 능멸해도 된다 하는 거냐?”

“왕의 명령이 억지였기 때문이오.”

“너희에겐 조카 계집애가 하나 있지 않았던가. 안네마리 라 쇼어 말고 외척 쪽이었지만, 그 계집을 양녀로 들여서…… 하하하.”

왕이 광소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긴 아니구나. 이런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너흰 왕을 능멸했고, 그것만으로 너희의 멸문은 지당하다. 그러니까, 죽어라. 포, 뭐하러 살려 데려왔느냐. 그냥 죽일 것이지.”

“전하께 간청이 있습니다.”

스완 라 포가 웃으며 물었다.

“어차피 죽일 거라면, 제가 좀 데리고 놀아도 되겠습니까?”

선량하게만 보이는 스완 라 포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스쳤다. 스완과 왕의 어머니인 로잘리 제2왕비는 쇼어 가문 태생인 태후의 등쌀에 못 이겨 결국 폐비되었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로잘리 제2왕비가 궁을 나왔을 때 그녀를 낚아챈 것이 바로 빈센트 라 포 백작이었다. 최근엔 사교계에도 나오지 않고 자신의 바람둥이 아내와도 별거하여 서대륙의 별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남자였다. 아내가 수도에 있는 본 저택에서 빈센트의 서명을 위조하여 그의 재산을 펑펑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돼지 같은 남자였던 그는 제2왕비를 능욕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폐비로 쫓겨나는 왕비를 능욕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그따위 생각밖에 못 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감금당해 능욕당하던 끝에 태어난 것이 스완 라 포였다. 스완 또한 쇼어가에 대해서라면 왕에게 지지 않을 원한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감금당한 채 끝없는 치욕을 겪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은 쇼어 가문이 죄 없는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폐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2왕비가 무죄라는 건 선왕도 알고 있었지만 선왕은 압력에 져서 사랑하는 여인을 폐비시켰다.

“마음대로.”

왕이 허락했다. 그러자 공작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도, 도대체 왜 제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저는 쇼어 가문으로 시집온 죄밖에 없습니다. 제 죄는…….”

공작부인이 비명을 지르자 왕이 비소했다.

“네 죄는 태어난 것이다. 내 어머니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 평생을 괴로워해야 했는가? 응?”

왕이 코웃음을 치자 스완이 재빨리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공작과 공작부인이 끌려 나갔다. 공작이 “나는 외무대신이자 쇼어 공작이오!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해주시오!”라고 고함을 쳤다. 왕과 스완은 그런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재판을 받았던가? 아니었다. 로잘리 제2왕비의 명목상의 죄는 저주였다. 그녀가 왕에게 저주를 걸어서 빨리 죽여 자신의 아들인 왕세자를 즉위시키고자 하고 있다는 죄였다. 로잘리 제2왕비는 신전의 신녀가 되려다 신전에 제사를 지내러 온 왕이 한눈에 반해서 청혼을 하여 입궁한 여자였다. 신을 모시려 했던 그녀가 무슨 저주를 내린단 말인가. 그러나 그 일은 삽시간에 불거졌고, 대귀족들은 매일같이 그녀를 폐비시키라며 왕을 압박했다. 그때에는 정식 재판이 있었단 말인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의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스완,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놓아라.”

왕이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라파엘을 끌어안는다. 스완은 한숨을 나오려는 걸 겨우 막으며 왕을 바라보았다. 보통 때의 왕이었다면 알아챌 일을 지금의 왕은 알아채지도 못했다.

“전하,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스완이 말했고 왕이 고개를 들었다.

“안 좋은 소식?”

“……에드워드 라 쇼어가 도주했습니다.”

그제야 왕은 아아 하고 신음했다. 그래, 에드워드 라 쇼어가 없었다. 그런 것을 눈치조차 못 채다니 지금 자신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긴 아닌 모양이었다. 때때로 무력감이 찾아왔다. 그런 놈이 도망을 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쇼어가는 그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그에게서 연인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왕은 라파엘의 식은 뺨에 자신의 뺨을 대었다. 자신이 손만 대도 열에 들뜨던 그 남자의 영혼은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가 여기서 이토록 간절히 육체를 붙잡고 있는데.

“추적은?”

“이미 두 개의 부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동쪽이나 서쪽으로 일단 도주하였으리라 보고 추적 중이나 아직까지는 요원합니다.”

“그래, 잡아와라. 이 빌어먹을 가문을 끝장내야지.”

진작 끝장내야 했다. 왕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광인의 웃음이었다. 수백 명을 몰살할 때도 차갑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스완은 왕의 품에 안긴 라파엘에게 속으로 말했다. 이봐, 좀 일어나봐. 당신을 저렇게 사랑하는 남자가 가엾지도 않아?

그러나 라파엘은 여전히 밀랍 인형처럼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웬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가려한 얼굴에 라파엘은 피식 웃었다. 또 꿈인가. 꿈이라면 좋은 일이다. 어지럽고, 아팠다. 속이 메스꺼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이게 총상이라는 거구나. 라파엘은 실감했다.

웬만한 자상은 온몸에 나 있는 라파엘이지만 총상은 겨우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꽤 거리를 두고 스친 거라 괜찮았는데 아마 두 번째는 제대로 맞았던 모양이다. 총을 쏘고도 놀라던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라파엘은 손을 뻗어 왕의 뺨을 쓸어내렸다. 수염이 까슬까슬했다. 꿈인데 이상하다. 왕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안색이 좋지 않고 얼굴도 엉망이었다. 늘 대리석처럼 깨끗하고 칼날처럼 날카롭던 턱이 수염에 가려 있었다. 라파엘은 그 뺨을 쓸어내리면서 속삭여 물었다.

“왜 그렇게 놀랐던 겁니까?”

왕의 푸른 눈이 크게 뜨이던 것을 보는 순간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때 몰랐어도 그다음엔 알게 되었겠지. 그 푸른 눈에 마지막으로 웃어주고 싶었다. 당신이 가르쳐준 웃음이다. 당신이 내게 부여해준 웃음이다. 당신의 손이 닿아서 나는 인간이 되었다는 증거를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 살인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신을 사랑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나 짧았지.

라파엘은 쓸쓸하게 웃었다. 시간이 정말 짧았다. 그의 푸른 눈은 얼어 있었고, 그에게 생각나는 건 그뿐이었다. 웃었던가? 웃는 데 성공했던가? 당신이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 하지만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돌려주고 싶어서. 그러나 배가 타는 듯이 아파서 도저히 웃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웃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라파엘은 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다. 하지만 조금만 덜 아름다웠더라면 좋았을걸. 왕인 당신은 너무나 빛나지만 왕이 아니라 그냥 비루한 사내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루 라 트뤼포아처럼 지뢰를 밟고 쓰러져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당신을 거두고, 당신을 돌보고, 당신을 살려내는 것이다.

아아, 율레즈여. 저는 왜 지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습니까. 꿈이기 때문입니까.

당신은 화를 내고 있을까.

라파엘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사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에 꿈이 아니라면 죽어서 영원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 자신이 죽었든 쓰러졌든 어쨌든 그는 거동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정체가 들통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시녀들이 구속되고, 쇼어 가문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리의 유품에서 흘러나왔던 열쇠는 에드워드의 집무실에 있는 비밀 금고 열쇠였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는데 그 서류는 무슨 내용이었을까. 마리의 죽음과 연관 있는 내용이었을까. 이젠 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든다. 어차피 죽었다면 눈앞의 이 남자에게 집중하는 게 좋을 것이다.

라파엘은 망설이다 왕의 손을 잡았다. 신장 차이가 나기 때문인지 왕의 손이 라파엘의 손보다 훨씬 컸다. 그 손을 가만히 잡았을 때 왕이 눈을 떴다.

“라파엘?”

“예, 전하.”

라파엘이 대답하자 왕이 멍하니 웃었다. 그답지 않은 미소라 라파엘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꿈이구나.”

“예, 전하.”

“……오늘은 멀쩡하구나. 피도 흘리지 않고 있고…… 그래도 웃고 있구나. 아아, 안색도 이렇게나 안 좋아서.”

왕이 눈을 감으며 라파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라파엘이 잡은 손을 마주 잡으며 왕이 속삭였다.

“내게 돌아와라, 라파엘.”

라파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파엘은 대답 대신 그저 웃었다. 내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라파엘은 그저 웃을 뿐이다. 또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채 웃을 거냐. 왕은 황급히 라파엘의 손을 잡은 채 말을 이었다.

“난 너뿐이야.”

그 말에 라파엘의 표정이 흔들린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겠다.”

왕이 말한다.

“널 죽인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반드시 나 자신에게 그 죄를 갚게 하겠다.”

왕의 말에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당황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살인 청부업자입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만한 인간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입궁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느냐. 난 이미 너에게 빠졌고, 너로 인해 변했는데, 이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거냐. 나로 하여금 널 죽게 두고서? 그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살인 청부업자인, 살인 기계라 불리는, 라파엘 에반스를 죽인 훌륭한 왕이 되어 콧대라도 세우라는 거냐? 넌 지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라파엘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리 서로 마음이 오갔어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버리는 일도 흔하다. 그 모든 것을 라파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왕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이해관계보다 라파엘을 선택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태양 같은 그가, 어둠침침한 살인 기계에게 손을 내민다.

라파엘은 꿈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꿈이라면 좀 더 말을 잘하게 되어도 좋을 텐데 여전히 혀는 굳어 있다. 그한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라파엘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왕이 그와 마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느냐?”

“어떻게…….”

“그런 얼굴이야. 돌아온다고 해라. 그럼 다 해결돼.”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 권한이 아닙니다.”

생사는 라파엘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이 대륙을 관장하는 전쟁신 쿠치아노와 그의 아버지이자 천계의 주신인 율레즈가 관장하는 것이다. 라파엘이 고개를 젓자 왕이 그의 손등을 깨물었다.

“돌아온다고 해.”

“책임지지 못합니다.”

“내내 거짓을 말하더니, 나를 위해서 그 정도도 말하지 못하느냐. 말하라, 내 곁으로 돌아온다고.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온다고!”

라파엘이 한숨을 쉬었다. 왕은 여전히 그를 열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아, 여긴 분명 꿈이다. 그는 지금쯤 내 몸을 육시했을지도 모르는데 꿈속의 그는 왜 이렇게나 달콤한 것일까.

현실이 이렇게 그 좋을 대로만 흘러갈 리가 없는데도, 너무나 달콤한 꿈에 지고 만다.

라파엘이 왕의 까칠한 입술에 키스했다. 그 입술에 키스하고 나서야 자신의 입술도 못지않게 까칠하다는 걸 깨달았다.

“네, 전하.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왕이 입술을 열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고, 입술과 입술이 스치고, 입술이 입술을 삼킨다.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라파엘이 왕의 목에 감자 왕이 그의 위로 올라오며 키스를 더 깊게 이었다.

더 키스하고 싶은데 힘이 없어 할 수가 없다. 라파엘은 눈을 감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왕은 그 얼굴을 몇 번이나 내려다보았다. 돌아온다 말했다. 반드시 그의 곁으로 돌아온다고.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왕은 라파엘의 손등에 키스하다 그 손등을 빨아들여 순흔을 남겼다. 약속의 징표였다. 이 꿈이 지워져도, 이 꿈에서 그가 빠져나가도, 꿈속의 라파엘은 이 징표를 보고 약속을 지키게 되리라.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 흔적을 입술로 눌렀다. 그리고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라파엘이 돌아온다 말했으니 되었다. 이 꿈이 평소의 악몽으로 바뀌기 전에 잠에서 깨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흘러서 왕은 눈을 떴다. 좋은 꿈이었다. 라파엘이 돌아온다 하였다. 그게 거짓이라 할지라도 왕은 안심했다. 지금 당장은 매달릴 것이 생긴 셈이었다. 그는 손을 들려다 자신이 라파엘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라파엘의 창백한 손등에 꽃잎같이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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