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덧없는 약속
“스완 라 포 소백작이다.”
왕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 방에는 은은한 촛불 빛만이 넘실대고 있었다. 넓은 방 안을 촛불만으로 밝히기 위해 수십 개의 초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빛들이 아름다웠지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왕만은 못했다. 수려한 외모의 왕이 라파엘을 보자 손을 내밀어 팔을 잡고는 끌어당기면서 옆에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비님.”
처음에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라파엘은 그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는 며칠 전 만났던 남자였다. 이그나치오궁에서 서류를 빼돌리던 남자가 왕의 측근이었을 줄은 몰랐던 라파엘은 다시 한 번 궁정의 음험함을 몸소 느꼈다. 밤에 왕의 침실에 같이 있을 정도로 친밀한 자가 이그나치오궁에서 서류를 훔친 것이다. 그렇다는 건 그가 왕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되리라. 세상엔 나쁜 놈이 참 많지만, 세상에 치사한 놈은 다 왕궁 안에 기생하고 있구나. 라파엘은 험악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얼굴만은 여전히 그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이부형제이지.”
왕이 앉히는 대로 왕의 곁에 앉으면서 라파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육이라는 게 별거 아니라는 건 라파엘도 잘 알고 있었다. 살인 청부업을 하다 보면 형을 죽이려는 동생, 아버지를 죽이려는 아들, 딸을 죽이려는 어머니……. 대체로 의뢰자는 혈육 관계가 많았다. 타깃이 죽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자가 대체로는 의뢰자였다. 원한에 따른 의뢰도 있었지만 돈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니 왕의 이부형제이면 아버지가 다르다는 거니 더욱 혈육으로서의 가치는 없으리라.
“왕족은 아닙니다만, 전하께오서 제 형님이라는 건 역시 기쁜 일이긴 하지요. 해주시는 건 하나도 없고 부려먹긴 되게 부려먹지만.”
스완의 말에 왕이 호오 하고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시아를 너에게 줄 생각인데 그렇게 말하는 거냐?”
“어이구, 형님. 부디 버리지만 말아주십시오. 이 몸, 뼈가 으스러져라 일하겠습니다.”
스완의 넉살에 왕이 웃었지만 라파엘은 웃지 않았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저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구하려고 해서 구한 것도 아니고 딴생각을 하다 구하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다.
그가 왕을 배신할 작정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직접 베어줬을 텐데.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스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스완이 피식 웃으면서 탁자 위에 있는 라파엘의 손을 가져가 그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확실히 달콤한 분은 아니군요.”
“말했잖아, 목석이라고.”
“형님이 그런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형님 태도가 워낙에 흐물흐물해서 말입니다. 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으로 만들어진 목석인가 보다 했었죠.”
느물거리는 스완에게 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
“오, 발뺌하시는 겁니까?”
스완이 짓궂게 되묻자 왕이 혀를 차며 술을 마셨다. 그러더니 왕이 라파엘의 어깨를 안고 속삭였다.
“너도 좀 마시겠느냐? 그게 긴장이 풀릴까?”
긴장?
라파엘은 자신이 왜 긴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왕이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너의 초야다.”
그 순간 안네마리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얼굴이다. 왕은 그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너에게 쾌락을 줄 수 없다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자가 너에게 쾌락을 줄 것이다.”
라파엘은 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쾌락을 준다고? 그는 평생 그런 것을 바라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와 정사를 벌이는 것 또한 라파엘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라파엘은 늘 집에 처박혀 있다가 의뢰를 받아 누군가를 죽이러 가고, 다시 집에 처박히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은 마치 그를 위해서 뭔가를 희생하는 것처럼 쓸쓸하고 힘겹게 말하고 있었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자라는 게 혹시 저 도둑놈인가.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자 스완이 싱긋 웃었다. 그는 즐거운 듯 보였지만, 라파엘은 지금 이 상황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라 다시 왕을 바라보았다.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스완이 일어나서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그가 라파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라파엘은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올려다보았다.
“전하께오선 남자만 되시는 분이시라 비전하를 안아드릴 수 없답니다.”
스완의 손이 라파엘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저는 여자만 되는 몸이라, 전하를 대신하기에 적합하지요. 어쨌거나 가장 가까운 형제이기도 하고요.”
왕은 안네마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 여자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이 여자에게 쾌락을 줄 수 없다면 다른 이가 주면 그만이다. 어차피 귀족 세계의 결혼은 그런 것이다. 결혼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하되, 쾌락은 다른 이에게서 찾는 것. 그러나 왕은 다른 귀족들보다 자신의 비에게 조금 더 집착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른 귀부인들처럼 자신의 비가 연애를 하게 내버려둘 생각이 아니었다. 연애는 그 자신과 하길 바랐다. 단지, 줄 수 없는 쾌락만은 그가 양보하겠다는 의미였다. 다분히 귀족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평민인 라파엘은 그런 왕의 사고방식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는다고? 정사를 한다고? 그는 스완이 누군지 몰랐다. 지금 이 자리에서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이부형제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저놈은 이그나치오궁에서 서류를 들고 나오다 근위병에게 들켰던 인물이었다. 스완의 손이 뺨이 아닌 목으로 내려왔다. 그 순간 라파엘은 그 손을 붙들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하.”
“그대가 내 곁에 있어도 쾌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다른 귀부인들처럼 너도 네가 원하는 남자에게 안길 수 있을 거라는 의미다. 그러나, 나는!”
왕이 안네마리의 팔을 잡아 돌렸다. 딱딱하게 굳은 안네마리의 눈을 보자 그도 안타까움이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귀족 세계의 결혼이란 다 이런 법이다. 좁은 세계에서 서로 돌고 돌며 사귀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남편과 아내의 자리는 불변이나 서로가 서로의 정부가 되어 놀아난다. 왕후나 왕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귀족의 결혼이었다. 그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도 안네마리는 어차피 다른 놈에게 안기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귀부인들이, 다른 귀족들이 그러하듯이.
다른 놈을 사랑한다. 안네마리가 저 검은 눈으로 다른 놈을, 그렇게 숭배하듯 바라본다?
왕은 그것을 막고 싶었다. 그 자신이 안네마리를 안지 못하니까 그녀가 다른 놈과 놀아날 때까지 두 손 놓고 기다려야 한다고?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안네마리는 어쨌거나 지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마음이 떠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울타리를 치는 수밖에.
“나는, 네가 내 형제에게 안기길 바란다.”
왕이 말했다.
“싫습니다.”
라파엘은 재고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남자를 원하느냐? 트뤼포아 후작? 그를 데려다줄까?”
“저는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중에 누군가를 원하게 될 거다.”
왕은 씁쓸하게 말했다. 결국 사람은 쾌락을 요구하게 된다. 귀족 세계는 냉정하고 야비한 곳이다. 안네마리같이 마음이 여린 여자는 금세 쾌락으로 도피하고 말 것이다. 그는 그런 여자를 몇 명이나 봐왔다. 그러나 그는 안네마리의 마음이 같이 떠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가 모르는 곳에서 그가 모르는 자에게 안기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안을 수 없다고 해도 그녀의 모든 것은 그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어야 했다.
“스완.”
스완이 안네마리의 어깨를 안는다. 스완의 팔이 왕의 팔에 스쳤다. 왕은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안네마리를 밀어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안네마리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며 왕은 다시 손을 뻗어 안네마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처음이라 아플지도 모르지만 곧 좋아질 것이다. ……여자를 안아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프지 않게 하겠습니다. 비전하께오선 전하만 바라보고 계시면 됩니다.”
기분 좋게 도취되어 계시면 끝날 겁니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스완이 속삭이며 안네마리의 목 뒤 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것만으로도 안네마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 마세요!”
“전하께오선 비전하께서 저와 자기를 원하십니다. 키스도 사랑도 없지만, 그러나 아주 다정하게 하라는 명령이셨습니다.”
스완이 농염하게 안네마리의 뒷목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안네마리의 경악에 찬 눈이 왕을 향했다. 왕이 안네마리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나 안네마리는 그 순간 왕을 밀어내고 있었다. 왕이 그 팔을 붙잡아도 안네마리는 미친 것처럼 반항했다. 엄청난 힘으로 왕을 밀어내는 통에 왕은 그녀에게 계속 키스할 수 없었다. 안네마리의 팔이 테이블을 스쳐 술병이 떨어졌다. 깨지는 소리가 천장이 높은 침실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시종들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
“나가라!”
왕이 소리 지르자 시종들은 재빨리 물러났다. 그러나 시종이 들어오는 사이 스완의 손에선 힘이 풀렸고, 안네마리는 소파와 스완의 품을 벗어나 물러섰다.
“전하, 저는 싫습니다.”
라파엘이 말했다. 자신이 여장을 하고 있어 결코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여전히 수려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다정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라파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자에게 그를 안게 할 셈이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싫습니다.”
왕은 안네마리를 바라보며 반쯤 기뻐서 웃었다. 안네마리는 이런 관계를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반쯤 기뻤다. 그리고 반쯤 아파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저렇게 싫어한다. 자신만 보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멍한 얼굴을 하던 여자가 그를 쏘아보며 경계하고 있을 정도로 저렇게 싫어한다. 그런 그녀를, 그러나 그는 안을 수 없다. 이렇게 둘이 계속 이런 관계를 이어가는 건 간단한 일이다. 왕은 이미 마리 트리지아와 그런 관계를 이어나갔었다.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는 남자들에게서 쾌락을 얻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아내인 마리 트리지아가 누구와 관계를 이어나가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리 트리지아는 아무하고도 관계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숙한 왕후였다. 대체 왜 그녀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 저런 거 바라지 않습니다. 쾌락 같은 거 없어도 괜찮습니다.”
안네마리가 더듬더듬 말했다.
“스완.”
왕이 재촉했다.
“전하, 이건 강간입니다.”
스완이 왕에게 경고했다. 스완 라 포라고 하면 상당히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얼굴이 반이나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좋은 루 라 트뤼포아와 같이 그는 대귀족 사회의 바람둥이 쌍두마차였다. 웬만큼 싫지 않고서야 서로 유혹은 대충 받아들이는 이 가벼운 세계에서 왕비처럼 격렬하게 거부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던 그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강간이구나. 스완은 뭐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왕에게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상대가 저렇게까지 나오면 부드럽게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부형제인 왕의 냉혹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이 작고 단정하지만 별 화사함은 없는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왕비가 오기 전까지 그는 왕에게서 왕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왕은 왕비가 몹시 연약한 여자라고 말했다. 세상물정도 모르고 바보 같고 잘 속는데다 아둔하고 촌스럽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스완은 왕이 의외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아둔하긴 또 얼마나 아둔한지. 귀부인이라는 명찰을 써 붙이고 다니는 짐승 같은 것들이 제 궁을 나가면서 제 욕을 하는 줄도 모르는 여자야. 내가 온실에 들어가자 멍하니 앉아 생각에 빠져 있는데 분명히 그것들이 안네마리에게 해서는 안 될 소리를 했겠지. 그 여자는 툭하면 토끼나 사슴처럼 잘 놀라는데다 연약해. 그런 여자에게 하마나 거미 같은 여자들이 달려들었으니 그녀가 남아나겠나. 그렇게 약해서 궁정 생활을 어떻게 하련지. 며칠 전에는 습격 사건도 있지 않았느냐. 내가 궁에 가둔다고 해도 멍하니 있던 여자인데 이번에 울더라. 많이 놀란 모양이야. 안을 때 조심하도록 해. 손목 같은 데 잘 잡고. 하도 비루해서 잘못 잡으면 부러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아파도 잘 모를 여자야. 정말 둔하거든. 바이런이 자신을 코앞에서 모욕하고 있어도 그게 모욕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지. 게다가 촌스럽긴 또 얼마나 촌스러운지! 키스할 때 눈도 안 감는 여자야. 내가 감겨주고 나서야 눈을 감은 여자라고. 게다가 정말 바보 같은 게, 남색가인 나 같은 놈에게 반해서 멍한 눈으로 내가 뭐라고 하든 끄덕거리는 여자야.’
험담을 빙자한 자랑이었다. 언제까지 하실 셈이십니까. 연인 자랑은 하는 자나 즐겁지 듣는 자는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게다가 스완처럼 모든 여자 타입을 다 만나본 바람둥이에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상대는 왕이었고, 게다가 냉혹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이부형제였다. 스완은 굳이 그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들었었다. 왕이 그토록 총애하는 단 하나의 비였다. 강간을 하기 전에 왕의 허락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항목이었다. 그러나 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안네마리 왕비가 벽난로 위에 장식되어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안네마리, 위험해.”
왕이 소리쳤다. 그리고 스완은 순간적으로 슬퍼졌다. 안네마리 왕비는 검을 들고 있었고, 그 검이 겨누는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왕은 지금 왕비에게 위험하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위험한 건 나야, 이 눈이 삔 형아야! 스완은 욕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스완, 물러서! 안네마리가 다친다!”
“다치는 건 저일 것 같은데요.”
스완이 식어빠진 목소리로 말했지만 왕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스완, 당장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안네마리, 검을 내려놓아라.”
“전, 절대로 안 할 겁니다.”
안네마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래, 알았으니까. 내려놓아라. 검은 무기다! 무기는 잘 다루지 못하는 자를 먼저 베기 마련이다. 너같이 둔한 여자는 검으로 제 살을 베고도 남을 게 분명하니 당장 내려놔!”
왕이 비명을 질렀다. 라파엘은 한숨을 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그는 철든 이후 검에 베여본 적이 없었다. 검은 그에게 위험한 물건이 될 수 없었다. 검은 그의 또 다른 육체였다. 단검이든 대검이든 그는 단 한 번도 검을 다루는 데 있어 몸을 사려본 일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당황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순수한 걱정이었다. 그것을 보자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화를 내고 싶은데 굳은 혀는 역시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왕의 긴장한 얼굴을 보자 문득 자신의 몸에 한 번 찔러 넣을까 하는 자학적인 생각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가 만약 자신의 팔이라도 베는 날엔 왕은 많이 괴로워할 것 같았다.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라파엘은 왕이 괴로운 것을 한 번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싫었기 때문에 검을 내려놓고 말았다. 라파엘이 검을 내려놓자마자 왕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네마리!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느냐!”
왕이 질책하자 안네마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네마리의 검은 눈에 눈물이 차오르진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슬픈 눈이었다.
“저는 전하를 좋아합니다.”
안네마리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평소에도 쉰 듯한 허스키 보이스는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왕은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알고 있어.”
“제가 전하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
“그래, 그건 당연하다. 넌 나의 비니까.”
“이렇게, 저를…….”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해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도저히 말을 잘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이렇게 많은 말이 떠돌게 된 것은 왕을 만나기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었고, 한 번도 그 점을 괴롭게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도 어릴 때부터 연습을 해야 느는 것인지 도무지 혀가 움직이질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걸 안 라파엘은 그를 밀어내는 게 좋을지 그와 키스를 하는 게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양손을 주먹 쥐었다.
안네마리가 마주 안지도, 입술을 열지도 않는다. 왕이 안네마리의 입술에 입술을 대고 애원했다.
“입술을 열어라, 안네마리.”
“…….”
“다시는 이러지 않는다. 약속할 테니, 입술을 열어줘. 어서.”
안네마리가 눈을 닫고 입술을 열었다. 왕이 격정적으로 안네마리를 끌어안자, 조금 뒤에 안네마리도 팔을 왕의 등에 둘렀다. 그 애절한 키스 신을 보면서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천년 묵은 여우가 따로 없는데, 무슨.
스완 라 포가 이쯤해서 불청객은 물러가줄까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였다. 여우. 그 단어가 그의 시선을 다시 한 번 안네마리 쪽으로 향하게 했다. 검은 여우. 요즘 왕궁을 들쑤시고 있는 검은 복면인인 검은 여우와 검을 든 모습이 비슷했었다. 스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다리 위에서 라파엘은 자신을 배웅하는 왕을 돌아보았다. 왕은 ‘내일 보자’고 말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는 이러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한 약속을 다시 한 번 속삭여왔다. 라파엘은 웃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최근에야 겨우 배운 웃음이었다. 그는 초급자라 억지로 짓는 고난도 웃음은 지을 수 없었다. 왕이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키스해다오”라고 속삭이자, 라파엘은 발을 들어 왕의 뺨에 키스했다. 왕이 그의 어깨를 잡아 입술을 잡아 눌렀고, 라파엘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몇 번이나 키스해도 부족했다. 왕은 안네마리의 마른 팔뚝을 움켜쥐고 몇 번이고 키스했다. 각도를 바꿔가며, 그녀의 혀에 자신의 혀를 얽었다. 안네마리가 조금씩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왕은 기어코 그녀를 끌어와 키스했다. 키스는 부드럽게 시작해서 격렬해졌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고 싶었다. 단순히 파멸 따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면 왕은 파멸을 선택하고 그녀를 안았으리라. 그러나 왕은 그녀를 안을 수 없었다. 절대로. 그는 그렇게 태어난 몸이었다.
안네마리가 문 플레이스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왕이 등을 돌리자 그를 수행하던 스완이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물었다. 그가 아는 왕은 이렇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자였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스완 자신이었지만 스완에게조차 충성을 바라진 않았다. 유능한데다 어쨌거나 혈육이니 조금 더 신뢰가 간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거기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한 사람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왕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죄책감과 함께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정말 아둔한 여자가 아닌가.”
왕이 중얼거렸다.
“못 이기는 척 너와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이제 어쩔 건가. 내가 남자와 자더라도 혼자 수절하겠다는 거냐? 그런 병신 같은 짓을 도대체 왜. 나 같은 결함품 때문에…….”
왕이 눈을 내리깔았다.
“뭐 그러는 전하도 프시스 남작을 내보내신다면서요.”
쌍방 수절 플라토닉 연애라니 정말 장이 꼬이도록 웃기네요, 라고 스완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왕에게서 들을 책망이 겁나서가 아니라 왕을 말로 이긴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귀도 좋구나.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
“뭐, 다 들려오기 마련이죠. 안을 수도 없는 여자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편리한 남창을 내보내시는 겁니까.”
“그 ‘안을 수도 없는 여자’는 나의 비다. 너는 지금 왕족모욕죄를 범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느냐?”
왕의 말에 스완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 문 플레이스를 슬쩍 돌아보았다. 검은 여우를 만났을 때 그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하다고 생각했었다. 여자라면, 왕이 홀딱 빠진 저 여자일지도 모른다. 안네마리 라 쇼어라…….
안네마리 라 쇼어.
쇼어 공작의 양녀인 그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쇼어 공작의 질녀였고, 부모님과 서대륙의 별장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되고 말았다. 이후, 동생 부부의 시체는 찾았으나 질녀의 시체를 찾지 못한 쇼어 공작은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그게 벌써 10년이나 된 이야기였다. 10년이나 소식이 없던 안네마리가 어느 날 갑자기, 왕의 ‘관대한 명령’과 함께 나타나 왕비가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안네마리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어느 연고 없는 계집아이 하나를 대충 준비시켜 안네마리라 한 거겠지. 스완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타난 안네마리는, 이목구비가 확실히 쇼어 가문의 것이었다. 특히 마리 트리지아와 비슷했다. 쇼어 공작의 사생아가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다.
만약에 검은 여우라면……, 저런 미인 살수가 흔하진 않을 것이다. 용병이나 청부업자일 가능성이 컸다. 최근엔 여자들도 꽤 많다더니 미모는 확실히 발군이군. 그러나 이미 홀딱 빠져버린 왕에게 뭐라고 말을 하면 좋단 말인가. 스완은 왕의 침전에서 나올 때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말굽 소리에 몸을 슬쩍 어둠 속으로 숨기자 백마 한 필이 그의 앞을 휙 지나갔다. 말을 타고 있는 건 제럴드 라 쇼어였다. 왕의 정부랄까, 왕과 서로 이를 갈고 싫어하면서 자는 사이인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쇼어가에 의해 암살 위협을 내내 받아왔던 왕은 쇼어 가문이라면 이를 갈고 싫어했다. 자신을 그렇게나 죽이고 싶어 안달을 하더니, 제2왕자가 죽자마자 왕세자빈으로 자신의 딸을 내세운 쇼어 공작 때문에 그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마 마리 트리지아가 아버지를 닮아 조금만 더 분발해주었더라면 왕은 왕이 되기도 전에 쇼어 공작을 찔러 죽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경우 쇼어가를 몹시 총애했던 선왕의 분노를 샀으리라. 어쨌거나 그의 형이 왕이 되었을 때 스완은 사실 쇼어 가문이 멸문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왕은 마리 트리지아 왕후 때문인지 몰라도 쇼어가를 살려두었다. 어쩌면 말려 죽이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럴드 라 쇼어는 능욕당하고 있지, 에드워드 라 쇼어는 묘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은 노골적으로 왕의 미움을 사서 힘든 일만을 맡고 있었다. 게다가 왕은 세 사람을 다 믿지 않아서 따로 직속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상태다. 그들에게서 늘상 간섭받으며 일하자면 꽤나 힘들 게 분명하다.
그러나 왕은 상당히 공평한 인물이었다. 좀 삐뚤어지고 빈정거리고 냉혹하고 저질이었지만, 그는 아무 이유도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제럴드 라 쇼어가 쇼어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가지고도 왕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자초한 짓이었다.
‘쇼어 가문은 참 명도 길어.’
스완은 음산한 눈으로 문 플레이스 정문 앞에서 내리는 제럴드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빌어먹을 것들인데 명이 길단 말이야.’
마리 트리지아로 인해 그들은 몰살의 즉위 축하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리 트리지아가 죽을 뻔한 일은 제럴드가 몸으로 속죄하고 있었다. 사실 왕의 입장에서는 쇼어 가문을 섣불리 제거할 수 없었다. 몰살의 즉위 축하연에서 죽은 자들은 대부분 영지를 가지고 빈둥거리는 대귀족들이었지, 관직에 오른 자들이 아니었다. 왕은 대귀족 중에서도 권력을 가진 인물들은 내버려둔 채 예로부터 이어지는 부와 지위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인물들을 싸그리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들과 결탁했던 신전들의 재산도 몰수했다. 왕의 토지가 전 국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물론 왕은 그 토지를 전부 돌아볼 수 없었고, 누군가를 영주로 앉혀야 했다. 왕에게 아첨하는 무리가 늘어났다. 귀족들이 별 볼일 없자 신전에서도 왕에게 직접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왕은 신전과 귀족 사이를 오가며 내키면 가끔 토지를 던져줌으로써 그들을 저울질하고, 절대 권력자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면서도 왕의 증오는 여전해서 쇼어 가문은 늘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자학은 그만하는 게 좋지.’
스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이라고 제럴드 라 쇼어를 안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사실 왕의 취향에서 꽤 동떨어져 있는 남자였고, 게다가 그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쇼어 가문의 남자였다. 스완은 왕이 제럴드 라 쇼어를 안을 때마다 몇 번이고 목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왕은 가끔씩 제럴드 라 쇼어를 안았다. 스완이 보기에 그건 그 자신을 학대하는 짓이었다.
왕은 자신이 남색가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쇼어 가문에서 배출한 태후는 왕에게 끊임없이 여자를 안으라고 했으니까. 왕이 여자를 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계속 강요를 했다. 그리고 왕은 여자를 안을 수 없는 자신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그런 치욕을 안겨주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는 육체를 증오하게 된 것이다.
“어라.”
스완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럴드 라 쇼어가 문 플레이스로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제럴드가 뭐라고 말을 하면서 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히? 나티?”
거리가 멀어 입술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스완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티. 혹은 라피……. 그 정도겠군.”
스산한 겨울바람이 분다. 스완은 코트의 깃을 세우며 웃었다. 왕도 쇼어 가문이라면 이를 갈고 싫어하지만 스완도 만만치 않았다. 저 빌어먹을 쇼어 가문을 물 먹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겨울바람보다 차가운 미소가 스완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쇼어 근위대장.”
간밤의 경비 보고를 위해 왕의 집무실로 찾아온 제럴드 라 쇼어는 늘 그렇듯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왕은 제럴드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가끔 제 기분이 나쁠 때 제럴드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제럴드는 어디에서나 옷을 벗어야 했고, 당연히 그는 왕의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서류를 확인한 왕이 제럴드에게 서류를 건네주며 부르자 제럴드 라 쇼어가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혐오와 공포에 왕이 피식 웃었다.
“우리의 계산은 여기까지 하지.”
“……예?”
제럴드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안네마리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왕은 난생처음 제럴드 라 쇼어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만하자고, 병신아.”
“……예?”
다시 보니 둔한 것도 안네마리와 꽤 비슷하네. 그러나 인내심은 안네마리 한정인 왕은 단숨에 싸늘한 눈을 하고 물었다.
“우리 사이의 계산이 하나밖에 더 있나? 원한다면 여기서 설명해줄까?”
“아, 아니요. 아닙니다.”
“그동안 심술에 맞춰 당하느라 수고했어. 이제 떨 필요 없으니 내일 아침부터는 좀 당당히 오도록 해. 군복이 아깝다.”
왕이 말하는 그 계산이라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왕이 이토록 쉽게 자신을 놓아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제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어젯밤 문 플레이스에 들어가 라파엘을 만났다. 왕이 너에게 흑심을 가지고 있어, 라고 말하자 라파엘이 특유의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아. ……나도 있어, 그거.’ 그 순간 제럴드는 라파엘에게 미쳤냐고 소리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라파엘은 쇼어가와 왕 사이의 증오를 모른다. 그리고 아마 안다고 해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이다. 라파엘은 쇼어가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여동생이 왜 죽었느냐 하는 것일 뿐이었다.
“검은 여우는?”
왕이 갑자기 물어 제럴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제럴드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대답했다.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함정이라도 파.”
“하지만 생포를 원하셨지 않습니까. 함정을 파서 생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생포? 왕은 잠시 그때를 돌이켜보았다. 검은 여우는 키가 작고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꽤나 취향일 듯해서 살려서 끌고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왕궁을 제 정원처럼 뒤지고 다닌 놈의 뒤뜰을 파헤쳐줄 생각이었지. 왕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제부로 달라졌다. 아니, 사실 달라진 지는 좀 되었지만 스스로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그는 남자를 안고 안네마리는 다른 남자에게 안겨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 그에게 안네마리가 거부했다. 자신이 남색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그녀가 울었다. 그래, 그녀가 옳았다. 그녀는 죄가 없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였다. 안네마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 되는 것이다. 그녀를 가질 수 없으니까 다른 놈에게 돌린다고? 아니, 아무도 그녀를 가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대등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그는 남자밖에 안지 못하니까 남자를 안고, 그녀에겐 다른 남자를 안겨준다고? 아니, 그에게는 선택지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 자신도 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내내 성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왔었다. 태후는 여자를 안으라고 강요하지, 여자를 안을 수 없지, 반발심으로 남자를 안고, 그리고……. 끝도 없는 악순환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안네마리가 존재하니까. 그가 아무도 안지 않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자신을 내주지 않을 안네마리가 그를 사랑하니까.
‘제가 전하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
그래, 죄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남색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았다. 남자도 여자도 누구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안네마리가 있다. 설사 몸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이어질 그녀가 있다.
“사살해.”
왕의 말에 제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범한다는 소문은 과장된 것이지만, 왕은 자신이 안고자 하는 남자를 못 안아본 적도 없었다. 상대가 적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합의 과정을 밟았지만, 상대가 적이라면 그나마도 없었다. 순종하지 않으면 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왕이 지금 자신이 원했던 몸을 포기하고 있다.
“예, 전하…….”
“습격했던 살수들의 배후는 알아냈나?”
“아직입니다.”
“특수군에게 넘겨라. 그들이 알아낼 것이다.”
“전하!”
제럴드가 나지막이 소리치자 왕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아무리 안네마리를 총애한다고 해도 너는 기어오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쇼어 근위대장. 너뿐만 아니라 너희 가문 모두 내 치세엔 입 닥치고 조용히 사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계산을 끝내긴 했어도 그건 순전히 안네마리 때문이지 너희를 용서했다고는 꿈도 꾸지 마라. 난 너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너희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아마 내가 아는 것보다 너희는 더 많은 짓을 했을 거고, 나도 마찬가지지. 나도 이제까지는 너희의 재롱에 기꺼이 어울려주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왕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가 마리 트리지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진 내 알 바가 아니나, 안네마리의 털 끝 하나 다친다면 영원불멸의 가문은 전설로만 남게 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느냐.”
“마리…… 에게 무슨 짓을 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럴드가 이를 악물었다. 마리에게 무슨 짓을 하다니,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었다. 마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왕이었다. 왕이 그 애를 외롭게 만들었다. 외톨이로 만들었다. 심지어 마음 약하고 다정한 그 애 앞에서 오라비인 자신을 범하기도 했다. 물론 그 장면을 끝까지 본 건 아니었지만, 마리는 그날 정말 많이 울었을 것이다.
“모르나?”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 형이 마리가 죽기 한 달 전부터 툭하면 문 플레이스에 드나들지 않았더냐.”
에드워드가?
제럴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에드워드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너 같은 걸 근위대장이라고 두고 있으니 검은 여우니, 살수니 하는 것들이 드나들지. 일 제대로 해라. 이젠 몸도 쓸모없어진 게 일도 못해서야 어디에 쓰겠느냐. 그리고 근위병들 똑바로 관리 안 하냐? 넌 바이런이 네 근위병 하나 잡고 놀고 있을 때 그것도 못 잡고 뭐 했느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머리에 담고 사는 거냐? 머리도 큰 게 담는 그릇은 왜 이렇게 작으냔 말이다. 그리고 도대체 어젯밤 문 플레이스는 왜 들어갔느냐. 네 친동생이라 해도 밤에 들어가 좋은 이야기가 나올 턱이 없는데, 심지어 안네마리는 너의 사촌이다. 결혼이 가능한 사이에, 근위대장이, 사사로이 왕비에게 가? 너, 진짜 미쳤냐?”
왕의 말에 제럴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왕이 남색질에 빠져서 궁중 내의 일에 대해서는 꽤 무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건 자기 손아귀에 넣고 샅샅이 보고 있지 않은가.
“정신 차려라, 제럴드 라 쇼어. 물러가라.”
왕의 말에 제럴드가 허리를 숙여 보이고 곧 물러났다. 왕은 서류를 집어던졌다. 지가 뭔데 안네마리의 궁에 가느냔 말이다. 바이런의 부정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왕도 귀찮아서 바이런을 데리고 있었지만 슬슬 정리할 생각이긴 했다. 정리하기 위해 바이런의 뒤를 좀 캐보았었다. 털면 먼지 안 나오는 인물이 어디에 있으랴, 싶었는데 이건 먼지가 아니라 흙탕물에 아예 젖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바이런 프시스 그 탐욕스러운 자가 과연 출궁 명령을 얌전히 따를지가 관건이다. 왕은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안 따르면 강제로 따르게 하면 그만이지만, 혹시나 안네마리에게 해가 가진 않을까.
“스완을 불러라.”
왕의 말에 시종장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때, 왕이 예상한 대로 바이런 라 프시스는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식사를 한 직후 왕의 시종이 가져온 출궁 명령서를 보고서야 그는 왕의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년 때문이다. 바이런의 얼굴에 독이 실렸다. 분명히 그년 때문이다. 왕을 뒤흔들던 계집이 드디어 바이런에게서 왕을 빼앗은 것이다.
씨발년.
내가 이렇게 당하고 있을 줄만 알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뒷골목에서 태어났고, 뒷골목에서 자랐으며, 뒷골목에서 몸을 파는 남창이었다. 남자를 상대로 팔아본 적은 없었고, 여자를 상대로만 팔았다. 우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귀부인이 언젠가 자신의 손님으로 올 것이고 그럼 자신은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런 손님은 없었다. 손님은 다 창녀뿐이었다. 창녀들이 남자를 사서는 자신들의 화풀이나 할 뿐이었다. 세상은 엿 같았다. 잘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옛 손님이었던 재스민이 어느 날 백작부인이 되어 나타나기 전까지 바이런의 삶은 고달프고 비참했다. 사실 바이런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고달프진 않았으며, 비참해지곤 했던 건 본인의 허영심이 만족되지 않았던 탓이었지만 당연히 바이런은 그런 생각을 하진 못했다.
왕을 만나서 드디어 팔자가 피는가 했는데 이렇게 허무히 끝나다니. 왕이 그에게 작은 저택을 사주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1년도 못 버틸 것이다. 궁에서 쓰던 씀씀이가 있는데 어떻게 작은 저택과 듣도 보도 못한 시골 영지 정도로 그가 견딜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는 일단 밤을 기다렸다.
바이런은 주로 밤에만 왕을 만났다. 둘이 만나서 하는 일이라는 게 그 짓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왕비는 밤에는 만나지 않는다. 둘은 그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이런은 몰래 침실을 나와 문 플레이스로 향하며 킬킬거렸다. 자지도 않는데 그게 무슨 사이인가. 소꿉장난?
문 플레이스에 도착한 바이런은 조심스럽게 벽을 탔다. 일부러 근위병이 없을 때를 노렸다. 근위병이 언제 교대를 하는지는 최근 가지고 놀았던 로버트 데인이 알려주었었다. 그래, 그 새끼. 바이런은 험악하게 미소 지었다. 꽤 재밌는 장난감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지. 그 새끼의 동생을 누가 구해주었다던가. 내 똥구멍이나 핥던 병신이 갑자기 오만해진 꼬락서니라니.
그러나 다 필요 없었다. 어차피 로버트 데인 같은 놈이야 잠깐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 바이런은 왕후궁의 하얗고 매끈한 대리석 벽을 겨우 기어올랐다. 그리고 발코니 문에 다가갔다.
처음에는 그 장면을 아예 이해할 수 없었다. 왕비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어딜 봐도 그 옷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위아래가 다 검은 옷이라니. 게다가 바지였다. 왜 왕비가 바지를 입지? 왕비가 시녀에게서 검은 천을 받았다. 그 검은 천을 왕비가 뒤집어쓴다. 복면……? 그 순간 바이런은 왕궁 내에서 소문만 파다한 ‘검은 여우’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아버렸다.
……왕비가, 검은 여우였다. 바이런은 재빨리 벽에 붙어 섰다. 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검은 여우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 밝히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 검은 여우의 정체를 밝히면 어떻게 될까. 바이런은 덜덜 떨면서 발코니를 다시 내려갔다. 올라올 때보다 배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검은 여우의 정체를 밝히면 왕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까? 아니, 그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비를 협박할까? 원래도 왕비를 범하고 협박할 생각이었던 바이런은 그 방법이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본 광경으로 보건대 왕비와 시녀들은 한패 같았고 그럼 지금 협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중에 방법을 잘 선택해 협박을 하면……. 바이런은 피식 웃었다.
피식.
그건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라파엘은 시녀들의 배웅도 받지 않고 튀어나갔다. 바이런이 추한 꼴로 건물 벽을 미끄러져 땅에 도착해 있었다. 바이런이 그를 보자마자 옆에 있는 왕의 침전을 향해 달린다. 라파엘이 그를 추적했다. 땅을 달리는 바이런과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그 뒤를 추적하는 라파엘이 나란히 달렸다. 왕의 침전에 가까워지기 전에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라파엘이 검을 뽑아 던졌다. 바이런이 공중을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는 검을 보고 급히 멈추며 허리를 숙였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칼을 스쳤다. 그것을 확인하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검은 가죽신이 보였다. 남성용 가죽신. 그제야 바이런은 왕이 안네마리를 몹시 총애했다는 걸 생각해냈다. 왕답지 않은 일이었다. 여성에게 어떤 흥미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안네마리같이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하다니. 그러나, 사실은 그가 남자였다면?
그 순간 라파엘의 검이 바이런의 목을 잘랐다. 뼈까지 자르는 단호하고 예리한 칼솜씨였다. 바이런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목이 잘렸다. 그때, 라파엘은 살기를 느끼고 재빨리 뛰어올랐다.
콰앙―.
위력적인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이런, 이런. 검은 여우가 드디어 내 궁까지 헤집을 셈인가.”
왕이 거기 서 있었다.
왕은 산책 중이었다. 스완을 불렀지만 스완은 외출 중이었고, 어디를 가는지도 알려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바이런이나 안네마리의 일을 하루 미루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오늘은 내일 빼놓을 시간을 위해 일을 좀 더 정력적으로 해치워야 했다. 식사를 하고 시종들을 물린 채 걷던 그는 문득 습격 때를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그때도 이렇게 시종들을 물렸었지. 그리고 안네마리는 울면서 어둠 속에서 문 플레이스까지 홀로 도망쳐야 했다. 가여운 안네마리. 사슴처럼 귀엽고 연약한 안네마…….
그의 눈앞에서 검은 복면인이 어떤 남자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잔상을 남긴 검이 거두어졌을 때 바이런의 몸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복면인의 손에는 그 머리가 잡혀 있었다. 왕은 총을 잡았다.
콰앙, 위력적인 소리가 났다. 신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는데도 그의 총탄보다 검은 여우가 먼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왕에게로 달려왔다. 어찌나 빠른지 두 번째 조준은 해보지도 못한 채 내려치는 검을 총으로 막는 게 고작이었다.
“전하!”
근위병들이 달려왔지만 그들도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왕과 검은 여우는 대치하고 있었다. 검은 여우가 검을 휘두르면 왕은 총으로 그것을 막았다. 검은 여우의 검은 예리하고 신속했으며, 그것을 막는 왕의 총 또한 빠르고 정확했다. 검은 여우는 왕의 총에 가려 그를 베지 못했고, 왕은 검은 여우가 가까워 조준이 아예 불가능했다.
왕이 그의 검을 막는다. 그때마다 라파엘은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이 들었다. 이 남자를 벨 수는 없었다. 이 남자만은 베고 싶지 않았다. 도망쳐야 하는데 거리가 벌어지면 왕은 총을 쏠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기의 방향만으로도 살수를 맞혔던 남자다. 라파엘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의 총알을 피할 순 없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의 검이 왕을 벨까 봐 두려웠다. 라파엘이 쓰는 검은 양날의 검. 그가 쓰는 검술은 일격필살류였다. 길드는 그를 살수로 키웠다. 살수는 자신이 죽더라도 타깃을 죽여야 하는 게 살수였다.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검술만을 배웠다. 대치하는 상대가 목격자든 타깃이든 어차피 다 죽여야 하는 상대였다. 라파엘은 언제나 그런 일들을 훌륭히 해냈다. 양날의 검으로 베고 또 베었다. 그게 익숙했다. 단 한 번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라파엘의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귀족들이 소일거리로 검을 쓰는 방식이었지, 살수의 방식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담긴 말을 꺼낼 줄도 모르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검도 모르는―그게 자신이었다. 라파엘 에반스. 살인 기계.
라파엘은 왕이 자신을 조준할 수 없도록 쉴 새 없이 왕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너무 느리면 왕이 도리어 라파엘의 빈틈을 파고들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면, 왕은 죽는다. 창―!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총과 검이 부딪쳤을 때 왕이 물었다.
“네겐 검이 두 개인데 왜 하나는 꺼내지 않느냐?”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들통 나면 안 되니까. 그는 왕이 자신에게 가까이 올 수 없도록, 그러나 멀어질 수도 없도록 교묘한 검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가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파엘은 두려웠다.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습격 때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찾던 팔이 떠올라 가슴이 지끈거렸다.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라파엘의 검 끝이 왕의 목에, 왕의 총 끝이 라파엘의 목에 닿은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향해 팔을 뻗은 채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때, 문득 왕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꽤 익숙한 느낌이로구나. 역시 내 궁 안의 쥐새끼였느냐?”
그 순간 라파엘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을 했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뒤로 한 바퀴 돌며 점프한 라파엘이 나뭇가지를 잡고 올라서는 순간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렸다.
‘맞혔다.’
왕은 직감했다. 검은 여우는 그의 총을 맞았다. 그러나 검은 여우는 순식간에 달려서 사라지고 말았다. 나무 위를 마치 평지처럼 달리는 검은 여우가 어두운 숲으로 사라지자 근위병들이 멍한 눈으로 그 방향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 멍청한 것들아!”
왕의 고함이 터졌다.
“그걸 쳐다보고 있으면 놈이 너희 앞으로 기어 나온다더냐? 평소에 머리가 병적으로 나쁘면 이럴 때라도 재빠르든가.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음 어쩌자는 것이냐! 지금 너희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냐, 내가 너희를 구하는 것이냐! 당장 불을 밝혀라! 숲을 샅샅이 뒤져라. 너, 쇼어 근위대장에게 당장 달려가 데려와라. 너, 프시스 남작의 시체를 치워라. 나머지는 일단 불을 밝히지 않고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그제야 허둥지둥 근위병들이 움직였다. 멀리서 검은 여우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흑의를 입은 남자 둘이 달려와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검은 여우가 도망치는 순간 근위병보다 먼저 달려와 검은 여우를 추적했던 왕의 특수군병이었다. 왕이 혀를 찼다.
“놓쳤느냐.”
왕이 차갑게 묻자 특수군병이 번갈아 보고했다.
“빠릅니다.”
“보통 자가 아닙니다.”
“키는 165센티미터가량으로 추적됩니다.”
“최소 10년 이상 검술에 매진한 자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그나치오궁 근처에서 놓쳤습니다.”
“저기…….”
근위병 하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특수군병이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왕도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왕이 총을 확 겨누자 으아악, 소리를 내며 근위병이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렸다.
“그, 그게, 소, 소문으로 듣기엔, 저기, 제 생각엔!”
“일어서서 말해라.”
별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왕이 말하자 근위병이 무릎을 후들거리며 일어났다. 저런 놈에게서 제대로 된 의견이 나올까 싶어 놈을 외면하는 특수군병과 왕의 귀에 정확한 이름이 들렸다.
“라, 라파엘 에반스 아닐까요?”
의외로 정확한 이름이 나왔다. 왕과 특수군병이 동시에 근위병을 바라보았다.
“뭐?”
“라파엘 에반스?”
“그 살인 기계?”
그리고 왕이 특수군병들을 내려다보았다.
“살인 기계?”
왕의 질문에 특수군병들이 다시 보고했다.
“라파엘 에반스.”
“서른다섯 살이라는 설, 마흔 살이라는 설, 스물아홉 살이라는 설…… 심지어는 스물세 살이라는 설까지 다양한 살인 청부업자입니다.”
“별칭은 살인 기계. 과장된 소문이겠지만 심장 대신 시계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시계 장인이 만든 살인 기계라는 소문이 유력합니다.”
“몇 년 전부터 양날의 양검을 사용,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양날의 에반스가 유명해지면서 양날 양검을 사용하는 인물들이 늘고 있는 터라 반드시 라파엘 에반스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살인 기계라니, 얼마나 밥맛없는 인간이면 그런 별명을 얻을까.”
분명 더럽고 지저분한 변태에 피와 색에 미쳐버린 놈이겠지.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여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호흡도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 왠지 살인 기계보다는 왕 자신이 붙인 ‘검은 여우’라는 별명이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왕은 특수군병에게 명령했다.
“일단 라파엘 에반스의 행적을 쫓아봐라. 의외의 대박이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예, 전하!”
특수군병들이 복명의 예를 취했다.
그들이 의외의 대박을 바라며 행적을 쫓아야 할 라파엘 에반스는 이그나치오궁 뒤쪽에서 상의를 벗고 있었다. 근처까지 특수군이 추적해왔었다. 과연 왕의 군병들다웠다. 그가 최근 중앙 정원의 가든 하우스를 확인하기 위해 이 근처를 이 잡듯 뒤져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특수군에게 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지리를 샅샅이 아는 게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여기까지야 어차피 추적되었으니 피가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지만 여기서부터는 절대로 피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라파엘은 옷을 벗어 허벅지에 단단히 묶었다. 그때 움직이면 안 됐다. 안 된다는 걸 몸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왕이 조금 뒤에는 기억해낼 것처럼 말하자 무서워졌다.
그가 알게 되면…….
그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두려웠지만 순간 왠지 모르게 검붉은데다 미끈미끈한 몽둥이가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안 돼, 안 돼. 이쪽이든 저쪽이든 여하간 들켜선 절대 안 돼. 라파엘은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상의를 북북 찢어 허벅지에 감았다. 최대한 꼼꼼하게 감은 라파엘은 피가 떨어지는지를 한 번 확인하고선 문 플레이스로 조심스럽게 돌아왔다. 멀리서 보자 왕의 침전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밝았다. 어둠이 파고들 틈도 없이 밝은 빛이 이그나치오궁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발코니로 들어가자 침번인 시녀들이 반갑게 맞았다가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전하! 허벅지에 피가!”
“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시녀들이 물었지만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방으로 들어와서 “태울 수 있는 천 좀 깔아줘”라고 부탁했다. 시녀들이 곧 테이블보를 가져와 방 안에 깔자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욕실로 움직였고 시녀들은 욕실 안에 천을 깔았다.
왕후의 침실은 화려했다. 가구도 가구거니와 새하얀 양털 양탄자 또한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저런 것들에 피가 묻는다고 해서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피가 묻는 것을 간과할 수도 없다.
“부상이라고?!”
시녀장이 경악에 찬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수면캡을 쓰고 잠옷을 입은 채 숄을 하나 걸치고 달려온 그녀의 앞에서 라파엘이 붕대 대용으로 썼던 상의를 풀고 있었다. 질척한 피를 보고 시녀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 그, 상처는!”
“다쳐서. 약과 붕대 좀.”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약과 붕대! 서둘러라!”라고 소리 질렀다. 마침 약과 붕대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오던 시녀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여, 여기…….”
라파엘이 쟁반 위의 물건을 받았다.
“제, 제가 봐드릴까요?”
시녀장이 조심스레 물었고 라파엘은 조금 찌푸린 얼굴로 지혈제를 상처에 뿌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루형 지혈제를 뿌리고 피가 멎기를 기다린 라파엘이 이윽고 손으로 피를 훔쳐 테이블보에 슥슥 닦았다.
“전하, 수건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피가 묻은 수건은…….”
라파엘이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시녀가 야무지게 말했다.
“빨면 되지요. 피는 잘 지워집니다. 가져올게요.”
그리고 시녀가 달려 나갔다. 그녀의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라파엘이 생각하며 고개를 내려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전에 로라가 한 무례한 말은 잊어주세요, 전하.”
곁에 있던 시녀가 속삭였다. 로라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례한 말이 뭔지 기억도 나지 않아 말없이 상처만 치료하고 있는 라파엘에게 시녀가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랬던 거예요. 죄송스러워하고 있어요.”
“방금 달려간 사람이 로라?”
라파엘이 묻자 시녀가 눈을 깜빡이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예, 전하. 그녀가 로라입니다.”
라파엘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로라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라파엘의 허벅지를 닦으려고 했다. 라파엘은 그녀의 도움을 거절하고 수건을 받아 허벅지를 닦았다.
왕이 그에게 총을 쏘았다.
총을 맞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총알이 스쳤을 뿐 박힌 것도 아니니까, 지혈제만으로도 어떻게 수습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이건 총상이라 완전히 낫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리고 그는 총은 처음 맞아보는 것이라―총을 쏠 만한 신력을 가진 대귀족이나 왕족과 마주한 적이 없었으므로―그 후유증 또한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왕이 그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만은 괴로워졌다. 왕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당연히 쏘아야 했다. 마음으로도, 머리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총을 쏘아야 하는 자가 자신이라는 게 괴로워 라파엘은 희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리 트리지아가 왜 죽었든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어. 라파엘은 후회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 왕궁에 결코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했다.
이미 돌이킬 수도 없는 일들을 떠올리며 라파엘은 난생처음 후회의 괴로움을 맛보았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 시간의 강물을 타고 흘러간다. 희마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자신이 떠가는 곳이 폭포 위고, 이제 곧 절벽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아도, 강물은 멈출 수 없다.
살인 기계가 태양을 원하다니,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관계였다. 이 왕궁이 어떤 곳인가. 위장을 하지 않으면 라파엘은 들어올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라파엘이 자신으로 다니기 위해선 검은 잠행복을 입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여긴 라파엘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에 어울리는 건 그 남자였다. 태양처럼 아름다운, 고귀한, 솔직하고 직설적인 그 남자.
빨리 알아내야 해. 이대로라면 곧 들키게 될 거야.
라파엘의 눈에 예기가 서렸으나 곧 흐려지고 말았다.
마리의 사인을 알아내면, 왕을 떠나야 한다.
허벅지가 아닌 심장이 지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가슴을 누른 채 허리를 숙이자 시녀들이 왜 그러느냐며 몰려들었다. 뿌연 김이 그들을 가리는 사이, 창 밖에서는 날이 밝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