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8장 쇼어 가 (9/47)

제8장 쇼어 가

불이 켜지자마자 왕은 안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안네마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켜지자마자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살수들의 시체를 보며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동안 왕은 다른 건 보지 않고 안네마리만을 찾으려고 들었다. 시종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몸을 피하신 게 아니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말에 고개를 들자 가까운 가든 하우스에서 한 명 두 명 홀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원수 뒤로 몸을 숨겼던 귀족도 겨우 몸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전하께 고합니다!”

근위병 하나가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비 전하께서 문 플레이스에서 쉬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문 플레이스? 안네마리가?”

왕이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 이그나치오궁의 정원은 문 플레이스와 이어진다. 그녀가 정신없이 도망쳐 문 플레이스까지 간 것일까?

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상 뒤의 문으로 빠져나갔다. 안네마리는 많이 다치지 않았을까. 미칠 듯이 초조했다. 분명 곁에 있었는데 어떻게 문 플레이스까지 갔단 말인가. 아니, 일단 정원으로 도망치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무서워서 홀이 아닌 문 플레이스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명한 생각이었으리라.

문 플레이스로 들이닥치자마자 왕은 “안네마리는?!” 하고 고함을 쳤다. 쓰러져 잠들었다는 시녀의 말을 듣는 순간 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곳은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단지 몸이 약하신지라 궁에 도착하셔서 바로 혼절하셨습니다.”

시녀가 왕을 왕비의 침실로 안내했다.

라파엘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왕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왕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왕이 걸어오는 순간 라파엘의 머릿속에는 연회장에서 자신을 찾던 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안위도 염려하지 않은 채 그를 찾아 허우적대던 그 팔이.

“울지 마라.”

왕이 라파엘의 뺨을 쓸어내렸다.

“무서웠던 거냐. 안네마리, 별거 아니다.”

왕이 라파엘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안네마리의 등을 토닥이면서 왕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왜 이렇게 몸도 담도 약하느냐. 별거 아니다. 이번엔 좀 위험했지만, 그래도 내가 너를 지켜줬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나의 비인 이상, 누구도 너를 해할 수 없다. 곧 근위대가 왔었는데, 이쪽으로 오느라 알지 못했겠구나.”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다. 우울하긴 했지만, 눈물이 솟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울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왕은 감은 눈 뒤에 고였을 눈물을 알아챈 것처럼 라파엘의 머리칼에 몇 번이고 키스를 계속했다.

“넌 약하니까 내가 지켜주겠다. 넌 강하지 못하니까, 내가 반드시 널 지켜주겠다. 내 옆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울지 마라. 네가 무슨 수도꼭지도 아니고 왜 눈물을 안 그치는 거냐. 눈물을 안 흘린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어깨를 굳히면 누구라도 알 테니까. 안네마리, 제발 울지 마라.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우는 거냐.”

안네마리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굳히고 가만히 왕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왕은 어쩔 줄 몰라 그녀를 달랬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고 결국 왕은 그녀에게 쉬라고 한 뒤 그녀의 침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쯤 해서 왕의 시종들은 ‘아무리 그래도 왕을 두고 혼자 도망 오다니, 왕비는 진짜 개념이 없네’라고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지만 왕은 아예 그 생각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총애를 하면 먹던 과일을 줘도 그저 기특해 보인다더니 왕이 딱 그 짝이다. 평소 혼자 잘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코가 꿰여 자빠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왕은 왕후궁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으로 가는 내내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몸도 약한데다 담도 약한 안네마리다. 그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으면 자신의 궁으로 뛰어갔단 말인가. 평소 토끼나 사슴처럼 겁 많은 안네마리가 궁까지 뛰어가며 가슴을 졸였을 생각을 하니 새삼 원한이 사무쳤다.

감옥에 도착하자마자 왕은 일단 총을 들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산 채로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 있던 살수 세 명 중 한 명의 한쪽 눈을 총알이 관통했다.

“신원은 알아냈느냐?”

왕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장 제럴드 라 쇼어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나이다.”

“안는 맛도 형편없더니 무능하기까지 하군. 아직도 못 알아냈단 말인가? 너는 뭐 하는 새끼인데 아직도 못 알아냈다는 거냐. 인두 가져와라.”

왕이 소매를 걷으며 말하자 병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왕의 푸른 눈이 삼엄히 빛났다. 횃불 아래에서조차 싸늘하게만 보이는 푸른 눈을 보고 근위병 하나가 인두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건넸다. 왕의 대리석 같은 피부에 약간의 흠집이라도 나면 졸지에 구족이 멸하게 될 것이다.

“총 안 맞은 새끼 중 하나 엎어.”

왕을 따라다니던 근위병들이 왕의 명령대로 한 남자를 엎었다. 엎어진 살수를 보고 왕이 고갯짓을 하자 근위병이 왕의 의중을 알아채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살수의 엉덩이를 높이 쳐들게 했다. 반대쪽에서 잡고 있던 근위병이 살수의 바지를 잡아 내렸다. 왕이 “벌려”라고 명령하자 하얀 장갑을 낀 근위병의 손이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깨달은 살수가 아아악―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인두로 똥구멍을 범해지면, 자신이 누군지 싫어도 생각이 나겠지.”

왕이 냉정하게 말하며 살수에게 다가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가 살수의 눈을 스쳤다. 살수가 소리 질렀다.

“고, 고합니다! 저, 저, 저희는 치센 경비대입니다!”

“치센 경비대?”

왕이 비소했다.

“그럼, 짐의 군대란 말이냐?”

“그, 그렇사…….”

“그런데 왜 군인이 살수가 되었느냐?”

“그, 그게…….”

왕이 인두를 살수의 코끝에서 흔들었다.

“인두의 계집이 되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

“인두로 지져진 구멍을 돼지에게 범해지고 싶다면 말을 멈춰도 좋다.”

“아닙, 아닙니다!”

“그래, 그럼 말해보아라. 왜 살수가 되었느냐?”

“저, 전 모릅니다.”

“모른다, 라?”

“네, 모릅니다. 전 정말 모릅니다. 경비대장님이, 아니, 경비대장이 말했습니다. 왕궁에서 보안, 보안 테스트를 한다고. 왕석에도, 왕비석에도, 다른 귀족들 자리에도 다 분장한 근위병이라고. 저, 저흰 모릅니다. 저흰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들어왔느냐?”

“마, 마차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왕은 인두로 제럴드 라 쇼어를 가리켰다.

“이야기가 제법 흥미롭게 돌아가지 않느냐. 그래, 넌 근위대장이라는 새끼가 산골짜기 경비대가 왜 들어왔는지, 그 경비대가 뭘 하려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단 말이지.”

제럴드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왕이 그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경비대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하, 그것이…….”

“그 검은 여우는 잡았느냐.”

“아,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 이 궁은 시장판이 따로 없구나. 산악 경비대는 살수로 변신해, 시꺼먼 복면을 뒤집어쓴 새끼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대. 도대체 근위대는 뭘 하느라 봉급을 받아먹는 거냐. 며칠 전에는 간수가 죽었다지? 간수는 죽었는데 탈출한 죄인은 한 명도 없다, 라. 너흰 지금 나를 능멸하고자 하는 거냐, 아니면 나를 백치로 알고 있는 거냐. 근육을 키우느라 뇌까지 근육으로 채웠느냐? 도대체 그동안 한 게 뭔지 말해보아라. 왕과 왕궁을 지켜야 할 너희들이 자빠져 있는 동안 왕궁 수비는 이토록이나 위험해졌는데.”

왕이 인두를 들고 제럴드에게 다가갔다. 제럴드가 뒤로 물러서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벽에 몰린 것이다. 이제는 뒤로도 물러설 수 없었다.

왕이 인두를 휘두르는 순간, 제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이 따끔했다. 치익, 소리가 나서 눈을 뜨자 왕이 인두를 감옥의 모래바닥에 집어던지고 있었다.

“이번엔 용맹해 보이는 장식을 얼굴에 하나 달아주는 것으로 끝내지만, 다음에는 네 뒷구멍에 저 인두를 박아줄 것이다. 너희가 그토록이나 혐오하는 남색질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게 되겠지.”

왕의 입술은 웃고 있었으나 왕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제럴드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너희가 영원불멸의 가문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영원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꼴을 좋아하지. 이건 협박이 아니라 경고다. 두 번째 경고는 없다는 걸 명심해라, 쇼어 근위대장.”

“예, 전하.”

“일 잘못해서 집안을 망치면 곤란하지. 그 집안을 너희가 어떻게 지켜냈는데 말이다.”

왕이 비스듬히 웃었다.

“너와 네 가문의 인간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너희는 정말 자존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더러운 것들이다. 그래도 일을 잘해서 끼고 있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없구나. 마리 트리지아를 이용해서 겨우 살아남은 너희가 이젠 불쌍한 안네마리를 떠밀어 또 살아남았지. 이젠 너희 가문의 그 잘난 여자도 남아 있지 않은데 누굴 떠밀어 살아남을 생각이냐.”

왕이 고갯짓을 하자 근위병이 살수를 놓아주고 왕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근위병이라고 해도 왕의 특수군 출신인 근위병들은 왕의 명령만을 받는 존재들이었다. 연회에 그들이 참석을 하지 않았던 것은 혹 안네마리가 그들을 두려워할까 왕이 저어했던 탓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고 왕은 후회하고 있었다.

“전하.”

제럴드가 신음하자 왕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의 왕후와 비가 너희를 살려주었다. 다음에는 갖다 바칠 것도 없으니 목숨을 아끼는 게 좋지 않겠는가.”

왕이 웃었다. 제럴드의 뺨에 왕의 손가락이 스쳤다. 체온보다 조금 따뜻해진 손은 인두의 열이 옮아온 것처럼 느껴져 섬뜩했다.

“가자.”

왕이 등을 돌렸다. 왕의 뒤에 서 있던 시종과 병사들이 재빨리 양쪽으로 비켜 길을 텄다. 길게 꼬리가 이어지고 곧 사라지는 일행을 보며 제럴드는 침을 삼켰다.

§  §  §

“전하, 오늘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비전하, 요즘 유행하는 화장품은 이 장밋빛 핑크색이랍니다. 지금 바르고 계신 건 소녀풍 핑크색 루주시군요. 이걸 한 번 발라보셔요.”

“어머, 문 플레이스의 쿠키는 정말이지 달콤합니다. 마치 비전하의 달콤한 눈동자와 같네요, 호호호.”

어제는 잠을 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을 부르는 왕의 그 쉰 목소리와 필사적인 손짓이, 그리고 먼저 돌아온 자신을 쫓아와 다정하게 달래던 왕의 그 체온이 생각나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평생 처음 흘렸던 눈물은, 평생 처음이어서인지 제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 흘러내렸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는 새벽이었고, 식사를 하고 나서 티파티 자리에 가서 졸 생각이었다. 그러나 식사를 하기 전부터 귀부인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정원이 다 차고 나서도 방문했다가 내일 티파티에 미리 예약을 걸고 가는 귀부인들까지 생겼다.

라파엘은 멍하니 그녀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아첨을 떨고 있었다. 그녀들이 아첨을 떤다는 건 알겠는데 그녀들이 왜 아첨을 떠는지를 모르겠는 라파엘이 잠시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장을 붙잡고 물어보자 시녀장이 대답했다. “어젯밤 전하께서 당신보다 비전하를 더 걱정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녀가 어딘가 적대적인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총희에게 줄을 대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귀부인들은 더욱 열렬하게 말을 이었다. 선물도 받았다. 산호빛 핑크색, 장밋빛 핑크색, 소녀풍 핑크색……. 요즘 핑크색이 유행이라며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분홍색 물품을 선물로 주었다. 모자부터 드레스, 구두, 부채까지 없는 게 없었다. 게다가 이 물건들이 정말 좋은 건 좋은 것들인지 물건이 나올 때마다 근처에 있던 시녀들까지 감탄의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물건을 받자 귀부인들이 더 애가 달아서는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참, 참. 전 이번에 참 재미있는 물건을 손에 넣었답니다.”

남 이야기를 한참이나 한 끝에 한 부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좌중의 주목을 끌어 모았다.

“뭔데요, 백작부인.”

“아이 참, 비전하께서 궁금해하신답니다.”

“어서 말씀해보셔요.”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라파엘을 걸고넘어졌다. 비전하께서 궁금해하셔요. 비전하의 앞에 어서 꺼내놓으셔요. 사사건건 라파엘을 걸고넘어지는 통에 라파엘은 거기서 벗어날 수조차 없었다. 유령 티파티는 참 마음이 편했는데 이것 참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번잡한 탓에 왕의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라파엘은 인형처럼 꼿꼿이 앉아서는 귀부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두를 애태우던 부인이 드디어 짜잔! 하고 작은 그림을 꺼냈다.

“어머, 풍속화잖아요.”

“부인, 그래도 아직 비전하께오서는 젊으시고 전하의 사랑을 받으신 지도 얼마 안 되었사온데…….”

귀부인들이 손을 팔락거리면서도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귀부인이 봉인을 풀더니 차라락 그림을 열었다. 그 순간 라파엘을 제외한 모두가 신음을 터뜨렸다.

“어머…….”

그림 속의 여자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양손으로 잡아 모으고 있었다. 치마는 입고 있었지만 가슴은 검붉은 유두까지 분명히 보였다. 선정적인 그림이지만 이런 그림을 사실 많이 봤던 라파엘은 별 감흥 없이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귀족들은 별의별 변태적인 짓을 다 하는 줄 알았는데 여자분들은 의외로 건전하신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어떤 귀부인이 소리쳤다.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을 닮은 매춘부군요!”

라파엘은 그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뭐라 말할 수 없었지만, 그림 속의 여자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눈빛 하나도 몹시 유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치명적인 매력을 아는 것처럼 혀를 내밀며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정말 닮았군요.”

“어머, 정말요. 하지만 포 백작이 설마하니 매춘부를 아내로 들였으려고요.”

“평민의 손만 닿아도 질색하는 남자니까, 그럴 리가 없죠. 백작부인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녀든 아니든 이 그림은 재밌어요. 그죠? 이번 주에 살롱에도 가져갈 생각이랍니다.”

어머나, 재밌겠네요!

귀부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라파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부인의 손에 있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었다.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데 무슨 글자를 본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부인이 그림을 돌돌 말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이름을 몰랐기에 “부인” 하고 불렀더니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어머, 비전하. 잔느라고 부르세요.”

“그 그림을 다시 봐도 될까요?”

라파엘의 말에 잔느라는 부인이 “얼마든지요”라고 말하며 그림을 건네주었다. 라파엘은 그림을 펼쳤다. 매춘부들이 가게에 붙여놓는 자기 소개용 그림이었는데 밑에 이름이 쓰여 있었다.

재스민.

17번가의 매춘부였군.

라파엘은 그림 속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리 트리지아는 왜 죽었을까. 정말 마리는 자살이었을까? 백작부인이 전직 매춘부였다는 걸 알고 마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마리의 시체에서 떨어진 그 메모에 마리는 뭘 쓰려고 한 것일까. 백작부인은 전직 매춘부였다. 그리고 그 전직 매춘부가 정부로 데리고 있던 평민인 남자를 왕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그것이 마리의 자살에 영향을 주진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타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리 트리지아와 바이런 라 프시스는 본처와 정부의 사이니까.

라파엘이 차가운 눈으로 그 그림을 내려다보다 돌려주자, 부인이 싱긋 웃었다. “풍속화를 처음 보시나 보군요. 눈빛이 너무 무서우셔요”라고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이런 건 별거 아니라는 둥, 비전하도 세상을 좀 아셔야 한다는 둥, 다음에는 비전하를 위해 더 수위가 높은 것을 가져오겠다는 둥 사람들이 말을 하는 동안 라파엘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티파티가 끝났을 때 귀부인들은 문 플레이스를 나오며 반쯤은 허탈해하고 반쯤은 자존심 상한 어조로 불만을 터뜨렸다.

“어지간히 촌년이네요.”

“진짜, 한 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목석도 저거보단 낫겠습니다그려.”

“지가 잘나서 우리가 온 줄 아나 보죠? 전하만 아니었으면, 우리라고 뭐―.”

“너희라고 뭐?”

마지막의 차가운 말에 문 플레이스 앞에서 마차를 타던 귀부인들은 찔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왕이 냉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찌나 건조하고 싸늘한 얼굴인지 그 얼굴보다는 차라리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훨씬 부드러울 것 같았다. 귀부인들이 냉큼 입을 다물었지만 왕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차라리 목석이 낫지. 너희같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징징거리는 하마에 복어에 딱따구리에 원숭이에 상어에 거미에 펭귄까지, 밀림이냐? 목석이니까 밀림을 견뎌준 것이다. 너희들은 왜 여기에 있느냐. 티파티? 너희들이 언제부터 티파티에 참석을 했느냐? 마리 트리지아의 티파티엔 코빼기 한 번 안 비치던 것들이 여긴 왜 왔느냐. 아, 촌스러운 목석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렇게 차려입고 아장아장 걷는 거냐? 창피한 줄은 아느냐? 하긴, 알 리가 없지. 너희들은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과한 소리를 했군. 짐승 같은 것들.”

왕이 혀를 차면서 쌀쌀맞게 등을 돌리자 귀부인들이 합죽이가 되어 고개를 숙인다.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이어도 현명한 그녀들은 결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물론 그녀들도 한 번씩은 왕의 이런 처사에 반발한 적이 있었다. 초기―라고 해도 아주 초기는 아니고 몰살의 즉위 축하연 1년 뒤쯤부터―에 한두 번은 그녀들도 필사적으로 웃는 낯을 하며 왕에게 말을 건네봤지만 본전도 못 건진 경우가 허다했다.

왕이 온실에 들어갔을 때 안네마리는 멍하니 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짐승 같은 것들이 짐승처럼 먹어댔는지 테이블 위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는데 안네마리의 찻잔에는 아직도 찻물이 반쯤 담겨 있었다. 가끔씩 눈을 깜빡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안네마리에게 시녀가 서둘러 다가가 왕의 도착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왕은 손을 저어 시녀를 만류하고 안네마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네마리는 아주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인형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로 그녀는 잠깐씩 입을 달싹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왕은 문 플레이스 정문에서 마주쳤던 여자들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짐승 같은 것들이 그녀에게 뭐라고 한 걸까. 그는 잠시 그런 걱정을 하다 지워버렸다. 아니,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은 다소 짐승 같고 야비할 정도로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콧대를 세우지만 왕의 총희에게 건방을 떨진 않았을 것이다.

안네마리의 공허하던 눈에 드디어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온실을 나가려다 온실 입구에 서 있는 왕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티파티는 이미 끝났구나.”

왕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 라파엘에게 팔을 내밀었다. 라파엘은 왕의 팔을 잠시 바라보았다. 굳건한 팔. 어둠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았으면서도 그만을 찾던 이 팔.

“전하, 저는…….”

안네마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서 왕은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안네마리의 입가에 귀를 대자 안네마리가 한숨을 쉬었다. 따뜻한 숨결이 왕의 귀를 간질였다.

“저는, 전하.”

안네마리가 채 말을 잇지 못한다. 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쇼어 가문의 여자였고, 왕은 이그나치오 가문의 남자였다. 그들은 부부이기 전에 정치적인 관계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이그나치오 가문과 쇼어 가문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이그나치오 1세와 사라 왕후의 경우에도 거의 원수 둘이 눈 맞았다는 수준의 러브 스토리였고, 그 이후에도 종종 그러했다. 쇼어가에서 왕비가 많이 나온 것은 그 가문이 미형을 배출하는 가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대귀족들의 수장격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왕을 견제하기 위해 왕비로 쇼어 가문의 여자를 밀어주었던 것이다. 쇼어 가문은 더욱 커졌고, 한층 더 왕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쇼어가를 선두로 한 대귀족들의 권력이 왕권을 넘보는 때도 종종 있었다.

이그나치오 23세의 경우에도 쇼어가에 대한 감정은 꽤 좋지 못했다. 선왕의 왕후는 쇼어가 출신이었고, 이그나치오 23세를 낳은 것은 제2왕비였다. 선왕은 왕의 친모를 사랑했으나 쇼어가의 압력에 밀려 제2왕비를 폐비시켰고, 현재 왕의 어머니인 태후는 선왕의 왕후였다. 제2왕비는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으며 왕은 쇼어가에 대해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왕세자 시절 그는 궁의 어머니인 태후의 명에 따라 쇼어가의 마리 트리지아와 결혼했다. 마리 트리지아는 좋은 여자였지만 왕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남색가라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애정도 느낄 수 없는데 심지어 그녀는 쇼어 가문의 사람이었다. 둘은 사이가 나쁘진 않았지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도 될 수 없었다. 사실 왕은 마리 트리지아가 자살하기 전까진 그들의 사이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달랐다. 그는 마리 트리지아처럼 건조하고 나쁘지 않은 관계로 안네마리와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감정이 너무 가버렸다. 왕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를 밀어낼 생각이냐.”

안네마리가 그를 마주 안아주지 않는다. 왕은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오는 몸을 부둥켜안은 채 중얼거렸다.

“너는 그리하지 못한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라파엘은 안긴 채 왕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라파엘은 왕을 불렀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는 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속이는 것에 죄책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었다. 마리의 죽음도 밝혀내지 못했고, 왕의 반응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를 죽이는 것일까. 그는 왕의 손에 죽는 것일까.

어차피 살수로 살다 보면 끝에 오는 것은 비참한 죽음뿐일지도 모른다. 라파엘 자신도 몇 번이나 죽음을 넘나들었고, 그의 동기 중 제정신과 정상적인 육체로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는 아직 스물셋밖에 안 되었고 대부분의 살수가 스물여섯 전에 죽는다는 것을 감안해보자면 왕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성고문 같은 건 당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라파엘은 왕을 좋아했지만 그를 이해하긴 어려웠다. 왜 죽은 아내의 오빠와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는지, 왜 바이런과 그런 걸 하는지, 도대체 그 행위는 뭐라고 부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그게 남성 간의 정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남성은 한 번의 정사에 목숨을 걸거나 혹은 정사를 위해 뭔가를 훈련받아야 한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라파엘은 왕의 팔을 잡을 수 없었다. 언젠가 놓을 그 팔을 잡는다는 게 미안해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죄책감도, 무엇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왕에게만은 미안했다. 설명할 수도 없고 할 말도 없지만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전하, 저는…….”

안네마리가 속삭였다.

“저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을 왕이 이해해줄까. 라파엘은 회의가 들었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왕이 이해해줄까.

“된다.”

왕이 강하게 말했다.

“너는 나의 비다. 너의 가문이 어떠하든, 너의 과거가 무엇이든, 너는 현재 나의 비다. 어느 누구도 내게서 너를 데려가지 못한다. 너 자신도 내게서 너를 데려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다정한 자가 아니라 살가운 소리를 잘 못 하지만.”

여기서 왕의 시종들은 뭐 씹은 표정을 했다. 살가운 소리를 못 한다고? 이제껏 왕비의 귀에 들이붓던 그 달콤껄쩍지근한 말들은 다 왕의 입이 아니라 왕의 발가락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복화술로 왕은 입을 뻐금거리고 시종이 대신 읊었나?

시종들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왕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를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남자는 분명 나다.”

왕은 안네마리를 힘주어 안았지만 그래도 안네마리의 팔은 허공에서 흔들릴 뿐 왕을 마주 안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애가 달았다. 안네마리는 이제 유부녀가 되었고 사교계에서는 결혼의 의무를 다한 자에겐 방종의 자유를 부여한다. 심지어 왕은 남색가였다. 안네마리가 원한다면 그녀는 어느 남자든―트뤼포아 같은 놈을 비롯해서―선택할 수 있었다.

“다른 놈에게 가지 마라.”

입으로 뱉으면서 왕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다. 그는 이 여자가 좋았다.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아마도 그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차분한 검은 눈과 표정 없는 얼굴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그를 보는 순간 희미하게 열이 오르는 시선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고, 평생 한 번도 웃어보지 않은 듯한 그녀가 어색하게 웃는 것 또한 좋았다.

“다른 놈에게 네 몸을 주더라도.”

그는 그녀를 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녀도 사람이고, 육체의 욕구를 풀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군주였지만 그녀를 안을 수는 없었다. 그것만은 그가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입술과 네 마음은 내 것이라고 말해.”

라파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왕은 가끔 너무나 눈치가 빨라서 상당히 앞서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왕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다가 왕의 등을 안았다.

나중에 이 죄는 받겠다.

당신이 죽어달라고 하면 죽어주겠다. 성고문이나 그런 건…… 자신 없지만.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안네마리.”

왕이 재촉해서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전하의 것입니다.”

왕이 라파엘의 머리를 잡고 부드럽게 키스해왔다. 그 키스에 입술을 벌리자, 왕이 더 깊숙이 입술을 겹쳤다. 왕이 라파엘의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팔을 감게 했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라파엘이 왕의 목에 팔을 감았다. 왕이 라파엘의 허리를 잡아당기면서 더 깊게, 입술을 겹친다. 열정적인 키스는 사나운 것으로 화했다. 왕은 라파엘의 모든 것을 가져갈 것처럼 키스했고, 라파엘도 모든 것을 줄 것처럼 응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키스는 더욱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 내 침전으로 와라.

왕은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사라질 때도 그냥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몇 번이나 라파엘의 머리칼이며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왕의 시선을 받으며 라파엘도 같이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쓰게 웃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라파엘은 왕에게 시선을 빼앗겨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평소 자신만만한 미남이었던 왕이 씁쓸하게 웃자 조금 더 연약해 보이는 대신 더 아름다운 미모가 돋보였다.

라파엘은 왕이 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자리에 앉아 있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일단 라파엘은 수잔 데인을 만났다. 데리고 와서 며칠간 못 만났던 수잔은 그사이 시녀들과 친해진 듯 라파엘을 보고도 상냥하게 인사를 해와 라파엘을 당황시켰다.

“안녕, 라파엘. 아니, 왕비님.”

드레스를 입고 가발을 쓴, ‘안네마리’의 모습으로 있던 라파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신이 라파엘 에반스구나. 나 당신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라파엘이 속해 있었던 길드 ‘검은 물’은 여러모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래도 평민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이야 이그나치오 23세의 지휘 아래 행정 기관이 많이 개선되었다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일이 흔한 세상에서 길드와 용병은 근사한 직업이었다. 대부분이 태어난 마을에서 아버지의 업을 물려받고 어릴 때부터 알던 여자와 결혼하는 ‘좁은 삶’을 이어가는 데 비해 용병은 먼 세상까지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독 용병, 그리고 용병에서 발전하는 직업인 ‘살인 청부업자’에 대해서 사람들은 꽤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생이 힘들면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용병이나 청부업자들이 그런 유의 인간에 속했다.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의뢰를 받고, 그 의뢰를 멋지게 해치우고, 의뢰 중간중간에 들르는 여인숙이나 술집에서 하룻밤 로맨스가 꽃피는―그런 유의 용병 소설들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모른다. 아마 수잔이 들은 이야기도 거기서 많이 달라지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라파엘이 수잔의 침대 앞에 의자를 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좀 나가줬으면 하는데.”

“있죠, 비전하. 저희는 요즘 상당히 곤란하답니다.”

시녀 하나가 갑자기 생긋 웃었다.

“전하와 비전하가 요즘 무드가 이상하시잖아요? 우리 가여운 마리 님의 한 맺힌 죽음을 풀고자 들어오신 줄 알았는데 요즘 그런 기색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시잖아요. 이런데 저희가 어떻게 나가드릴 수 있겠어요. 뭘 믿고.”

다른 시녀가 그녀의 옆구리를 푹 찌른다.

“하지 마.”

“하지 말긴 뭘 하지 마. 우린 목숨 걸고 여기 들어온 거라고. 마리 님을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저 남자가 맨날 왕이랑 물고 빨기만 하잖아!”

마리 님을 죽인 왕 말이야, 그 왕!

시녀가 화를 내는 것을 보며 라파엘은 난감해졌다. 그는 누군가와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없었고, 이런 항의를 받아본 일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시녀의 항의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첫째, 난 여기에 혼자 들어올 생각이었어. 오겠다고 한 건 당신들이야.”

라파엘이 말했다.

“그리고, 난 돈을 받고 일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내 의뢰주가 아니고, 내게 항의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시녀가 라파엘을 똑바로 바라보자 그 시선을 마주하며 라파엘이 말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노력하고 있어.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 살인 청부업자라며. 돈을 받지 않는데 당신이 왜 일을 해?”

시녀가 다시 물었다. 라파엘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자 옆의 시녀가 재빨리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누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비전하. 이이는 비전하가 입궁하시는 전날 고향에서 돌아와서 사정을 잘 모른답니다. 저희가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옆의 시녀가 웃는 동안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강제로 머리를 숙인 시녀가 “왜, 왜 그래. 내가 틀린 거야?”라며 시끄럽게 굴었다. 그러자 옆의 시녀가 시녀에게 으르렁거렸다.

“제발 닥쳐!”

그러자 시녀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고, 옆의 시녀는 그녀를 질질 끌고 방을 벗어났다. 벗어나기 전, “말씀들 나누세요오, 호호호”라는 말을 남기고 갔는데 그 탓에 라파엘과 수잔은 더욱 어색해지고 말았다.

“라파엘 에반스라니, 로버트가 들으면 싫어하겠다.”

수잔이 중얼거렸다. 수잔의 오빠 로버트 데인은 근위병이었다. 평민치고 근위병이면 꽤 자수성가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수성가해서 바이런 라 프시스에게 당하던 꼴을 생각해보면, 아마 자신이 라파엘 에반스라는 건 개의치 않아 할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여동생을 구해내길 원했다. 아마 자신이 라파엘 에반스가 아니라 악마였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남자였다. 하지만 여동생은 정의의 사도인 오빠가 라파엘의 정체를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라파엘은 굳이 그녀의 환상을 깨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널 쇼어가에 넘기지 않을 테니까 말해봐. 쇼어 공작이 널 왜 가둔 거지?”

수잔은 잠시 망설였다. 어쨌거나 라파엘 에반스가 쇼어가와 친밀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안네마리 라 쇼어로 분해 입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수잔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라파엘 에반스는 수잔을 기절시킨 적은 있어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왕비로, 여자로 위장해서 입궁한 남자에게 ‘신의가 있다’는 표현은 이상하지만 수잔은 그가 세 치 혀로 사람을 속이는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이었다. 그래도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 본인을 믿는 것보다는 라파엘 에반스를 믿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녀에게 어차피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다면 말이다.

“안네마리 왕비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그 전갈을 들었을 때 제럴드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라파엘에겐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다. 왕에게……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성상납? 강간? 정사? 무슨 단어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제럴드는 피식 웃었다. 왕이 쇼어가를 싫어하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그는 쇼어가를 정말 싫어했고, 사실 그럴 만했으며, 쇼어가도 그를 싫어했다. 사실 왕자가 한 명만 더 있어도 다른 자를 추대하였을 텐데 불행히도 선왕에게 왕자는 두 명뿐이었고 다른 한 명이 낙마로 죽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왕세자인 그에게 일단 마리를 왕세자빈으로 보냈지만,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운 여식이 왕궁에서 찬밥이 된 꼴을 보자니 복장이 터지는 것도 있어 그들의 사이는 더욱 나빠져만 갔다.

‘마리를 왕세자빈으로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제럴드는 돌이키기엔 너무나 늦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를 왕세자빈으로 보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순리에서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어머니가 아무리 마리를 왕세자빈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어도 그는 끝까지 마리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다. 마리는 왕세자빈이 되길 싫어했다. 그녀는 울면서 제럴드에게 매달렸다. 제럴드가 도울 수 없다고 하자 그녀는 스스로 라파엘을 찾아내선 그 집까지 찾아가 애원했다. 그녀는 결혼하기 직전 남몰래 많이 울었다. 밤에 시녀들 몰래 제럴드의 침실로 찾아와서는 그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누이동생이 불쌍했지만 제럴드에겐 힘이 없었다. 하지만 힘이 있든 없든,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는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누이는 왕세자빈이 되었고, 제럴드는 왕에게 약점을 잡혀 그에게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행위는 고통스러웠다. 모르긴 몰라도 왕에게도 좋은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왕은 구제불능의 남색가였지만 그가 마음에 드는 남자는 다 범해버린다는 소문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가 범했다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고작 하나였다. ‘몰살의 즉위 축하연’이라 불리는 그 즉위 축하연에서 범한 백작이었다. 하지만 사실 근위대는 진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백작과 왕은 내연의 사이였다. 그것도 왕세자 시절 남색가 기질을 누르고 어떻게든 여자와 자보려고 노력하는 왕세자를 유혹해 결국 그와 잤던 남자였다. 그것을 계기로 왕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백작은 클럽에서 내기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세자가 남색가인가 아닌가. 그리고 취미로 남색도 즐기는 백작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몸으로 왕세자를 꼬셔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안으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안기고 말았고, 그 상태로 둘 사이는 끝났다. 그리고 몇 년 뒤 즉위 축하연에서 왕이 된 남자는 자신을 모욕했던 백작을 공중의 면전에서 안음으로써 복수했다. 그 이후 왕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범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게 두려운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거나 두문불출했다. 왕의 정부들은 대부분 일부러 왕의 앞에 알짱거린 인물들뿐이었다.

“……왕비 전하.”

도착한 라파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윳빛 피부도, 검은 머리칼도 아름답고 청초했다. 그러나 그는 귀족 여성으로 자란 아가씨가 아니라 라파엘이었고, 특유의 무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럴드는 라파엘을 볼 때마다 그의 키가 작은 것은 영양실조로 인한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곤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가여운 동생에게 영양실조에 걸린 적은 없는지를 과연 물어볼 날이 있을까 하고 자조했다. 그렇게 친해질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회의적이었다.

“모두를 물려주세요.”

왕비의 말에 가장 먼저 집무실에서 나간 건 시녀들이었다. 그리고 근위병들이 제럴드의 눈치를 살폈다.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도 곧 자리를 비켜서, 집무실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새침한 내 동생, 웬일이야?”

제럴드가 싱글싱글 웃었다.

라파엘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말을 돌려서 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전후좌우 설명을 모두 덧붙여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언제나처럼 간결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뭘 하든 상관없어. 그러나 내가 어째서 마리가 죽게 됐는지를 알아낼 때까지만 기다려.”

“뭐?”

어떻게 여동생의 남편인 왕과 그런 짓을 하느냐든가 하는 책망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제럴드가 예상 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라파엘은 “당신. 에드워드 라 쇼어.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 세 사람 전부에게 하는 말이야. 괜히 나를 방해하지 마”라고 말하고 등을 돌리려 했다. 정말 이 한마디를 위해 온 것처럼.

제럴드는 황급히 라파엘을 붙들었다.

“라피, 그게 무슨 말이야?”

라파엘의 검은 유리처럼 스스로를 투영하지 않고 타인만을 비추는 차가운 눈이 그를 향한다.

“말 그대로.”

라파엘이 제럴드의 팔을 뿌리쳤다. 

“나는 경고했어.”

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가버리자 열린 문틈 사이로 “어머, 진짜 빨리 끝나셨네요?”라는 시녀들의 말이 들렸다. 제럴드는 라파엘이 뿌리친 팔을 내려다보며 라파엘의 말을 반추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형이나 아버지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처럼 그들도 왕에게 뭔가를 강요당한 것일까. 아니면.

“빌어먹을.”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있던 제럴드 라 쇼어는 코트를 잡아채며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라파엘의 그 차가운 검은 눈.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내뱉는 아버지와 형의 이름.

제럴드는 눈을 감았다. 망막 안쪽에 불쌍하게 죽은 여동생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도와줘, 라며 울던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저택으로 돌아온 제럴드는 자신의 방에 처박히겠다며 하인들을 물린 뒤, 콘솔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침대에서 뒤집어 물건을 전부 쏟은 다음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서랍을 해체했다. 서랍의 정면, 손잡이가 달린 판을 조심스럽게 해체해 뒤집자 서신 몇 통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 하나를 꺼내, 제럴드는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제럴드.

사랑하는 오빠,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 날이 너무 추워서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어. 오빠의 병사들이 창 밖으로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오빠 생각이 많이 났어. 오빠는 잘 지내? 날이 추운데 근무는 불편하지 않아? 난 근위대에 대해 잘 모르지만, 부디 오빠가 힘들지 않기를 율레즈께 기도할게.

오빠, 그는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오빠에게만은 숨길 수가 없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아아, 오빠. 마리를 용서해. 나는 도저히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전하의 그 냉엄한 푸른 눈을 볼 때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전하께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지만, 그분이 아신다는 걸 나도 알아. 매일 밤 그분에게 질책당하는 꿈을 꿔. 무서워. 나는 그분에게 안길 수도 없는데 심지어 나는, 아니야. 이 이야기는 그만두자.

하나 확실한 건, 오빠.

난 멀리 떠날 거야. 전하가 아시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단지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 오빠, 난 가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고귀한 자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나 봐. 어쩌면 나보단 라파엘이 더 이 자리에 잘 어울렸을 것 같아. 아아, 라피. 무정하고 아름답던 내 분신. 그를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꼭 잘해주길 바라.

미안해, 오빠.

오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미안해.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알아. 의무를 저버리는 짓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알아. 그러나 오빠, 나는 이제 무리야.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다음 생에는 제발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 수 있기를.

이제 날이 더 추워지겠지. 추위 조심하고 몸 건강히 지내. 우리에게 연이 있다면 남은 생에 한 번쯤 더 만날 수도 있겠지.

언제나 오빠를 사랑하는 마리가』

이 서신이 도착한 다음 날 마리는 자살했다. 제럴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라파엘에게 이 서신을 전해주는 게 좋을까. 그가 이 서신을 보면 마리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까. 라파엘은 분명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형의 이름도 내뱉었다. 그러나 왕이 그들을 능욕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 그렇다면 제럴드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근위대장인 그의 귀에 왕의 동태가 보고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까, 그건 아닐 것이다.

왕과 처음 한 날을 기억한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고, 마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때는 밤이었고, 마침 그가 궁에 남아 있었다. 마리가 끌려 나갔고, 왕의 뜻에 따라 제럴드는 근위복을 벗었다. 그날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가 근위복의 첫 단추를 풀었을 때 마리는 울면서 나갔다. 마리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제럴드는 뒤에 올 능욕보다 그 울음이 더 마음 아팠던 것을 기억한다.

‘너와 네 가문의 인간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너희는 정말 자존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더러운 것들이다. 그래도 일을 잘해서 끼고 있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없구나. 마리 트리지아를 이용해서 겨우 살아남은 너희가 이젠 불쌍한 안네마리를 떠밀어 또 살아남았지. 이젠 너희 가문의 그 잘난 여자도 남아 있지 않은데 누굴 떠밀어 살아남을 생각이냐.’

왕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마리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쇼어가가 지지하던 제2왕자가 낙마하여 죽고 왕세자의 승계가 확실해졌다고 해도, 후일을 위해 보험을 들어놔야 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마리를 그렇게 보내선 안 되는 거였다.

가문을 위해서 마리를 판 꼴이다.

그리고―마리를 위해서라며 라파엘도 팔아버렸다.

제럴드는 마리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서신들을 한 번씩 쓸어내린 다음 그는 다시 은밀한 틈에 끼워 넣고 서랍을 조립했다. 서랍에 물건들을 채워 넣어 서랍을 끼워 넣었을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제럴드.”

에드워드가 싱긋 웃으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제럴드의 얼굴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도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 좋고 둔한 동생의 미소를 띠었다.

“에디!”

“오늘 라피가 왔었다며?”

에드워드가 들어오자마자 용건을 꺼낸다. 싱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제럴드도 같이 웃었다.

“아아, 왔었지.”

“비밀 이야기라며. 우리 새침한 동생은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한 거냐, 응?”

“별거 아니었어. 왕의 성질머리 이야기인데, 라피한테도 그 성질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구.”

제럴드의 말에 에드워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래? 내가 들은 거와는 좀 다른데?”

순간 제럴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응? 다르다고?”라고 물었다. 에드워드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섬세한 외모의 미남자인 에드워드가 미소 지으면서 제럴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근위대장인 네가 모르는 일이 내 귀에 먼저 들어오다니 놀랍구나. 왕이 라피를 총애한다는 소문이야.”

“총애?”

제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왕은 남색가잖아.”

왕은 남색가다. 그는 여자를 안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세상에서 잘 아는 것은 쇼어가 사람들일 것이다. 몸으로까지 알고 있는 건 제럴드 한 명밖에 없겠지만.

“그래, 그런 왕이 라피를 총애한다는 소문이야. 들통 난 게 아니냐며 어머니는 걱정하고 계시더라.”

“설마. 아니야. 들통 났으면 내가 몰랐을 리 없잖아.”

“하지만 왕의 총애는 놀라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에드워드가 제럴드에게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제럴드는 서랍을 쾅 소리를 내며 닫았고 순간 에드워드의 시선이 흘끗 서랍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제럴드가 서둘러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에드워드가 피식 웃으면서 제럴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프시스 남작의 궁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무슨…….”

“바이런 라 프시스의 천하도 끝나는 거지.”

제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바이런 라 프시스. 평민인데도 왕의 총애를 받아 남작 자리까지 올라왔던 남자도 이렇게 끝나는 모양이었다. 바이런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자이지만 유일한 장점이 있었다. 그는 결코 왕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왕이 그를 어떻게 다루든 받아들였다. 왕은 바이런을 총애했다기보다는 편리하게 이용했다. 왕은 누군가를 총애한 적이 없었다. 그는 누군가를 총애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사선을 넘어온 인물이라 그런지 직설적이고 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자신이 이용하는 만큼 그에게 특권도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상대가 왕의 애정을 바라거나 하면 적절하게 잘라내고, 왕이 ‘사용’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에게 그만큼의 특혜를 내려주는 동안 왕의 주변은 진창과 다름없었다. 왕에게 성상납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남자들과, 그들이 원하는 것을 특혜로 내려주지는 않고 자기 멋대로 특혜를 내려주는 왕과, 남색가인 왕의 첫 여자가 되면―즉 그에게 여자를 알려주는 인물이 되면―그거야말로 대박감일 것이라고 생각한 여자들의 교태. 하렘도 이런 하렘이 없었다.

“그럼 남작은?”

“아마 수도에 저택을 하나 매입해서 남작에게 내려줄 것 같더라.”

“뭐, 남작에게 질린 거겠지.”

제럴드가 웃자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왕은 남자에게 잘 질리곤 했지만, 그러나 다음 타자를 만들어두지도 않고 그냥 내친 적은 없었단 말이지.”

“하지만, 에디.”

“이건 비공식적 루트로 들은 이야기지만, 오늘 밤 라피에게 밤시중을 들라고 했다더군.”

“그놈의 밤시중은 전에도 들었고, 마리도 든 거잖아.”

악질적인 짓이었다. 자신의 아내인 여자에게, 자신이 동성과 정사를 벌이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라는 명령. 그 명령을 라파엘도, 마리도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그 역겨운 밤시중을 또 명령한 건가. 제럴드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 에드워드가 말했다.

“아니야. 바이런이 없이 라피만 들인다는 이야기다.”

제럴드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그건 위험한 게 아닌가?

라파엘만 들인다는 건……, 라파엘을 안겠다는 건가? 에드워드가 물었다.

“정말, 들통이 난 게 아니야?”

제럴드는 오늘 자신을 찾아왔던 라파엘을 떠올렸다. 그의 표정을 보건대 발각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라파엘은 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사교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쇼어가 사람들은 그의 표정을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격도 금세 파악해냈는데 대단히 건조한 남자였지만, 상대가 밝은 얼굴로 밀어붙이면 웬만해서는 밀어내지 않는 편이었다. 사실 그 차가운 얼굴에 질려서 사람들이 못 매달린 것일 뿐 상대에게 꽤 관대한 성격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하다고 말한 것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반쯤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라파엘 에반스는 살인 청부업자였고, 별명은 살인 기계였지만, 피가 이어진 게 고작인 여동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인물이었다. 쇼어가 사람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다정하고 상냥하다 할 수 있었다.

“아니야.”

제럴드는 고개를 저었다. 들통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않아야 한다. 라파엘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에 사실은 발각이 된 것이라면?

마리의 눈물로 젖은 얼굴이 떠오른다. 구해달라던 그 처연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달라붙어 있는데.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구하지 못했다. 남들이 그게 옳다고 말해서 제럴드도 그게 옳다며 그녀를 사지로 보내버렸다. 아아, 그렇게 해서 그는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다. 그런데, 또.

“가봐야겠어.”

“뭐? 괜한 짓 하지 마. 의심만 살라. 라피가 알아서 할 거야. 그 앤 총명하니까.”

“넌 늘 그런 식이지.”

제럴드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늘 남을 띄우고 좋아하는 척하고 그리고 뒤통수를 쳐대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한다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의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희생시키고.”

에드워드가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제이.”

“난 두 번 잃지 않을 거야, 에디. 그의 말이 옳아. 이건 정말 혐오스러운 짓거리라고!”

제럴드가 튀어나갔다. 그의 등을 보던 에드워드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제럴드의 방으로 들어와 노래를 흥얼거리며 콘솔 앞에 섰다. 서랍을 열고 뒤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가 동생의 서랍을 몰래 뒤지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니.”

에드워드가 흥얼흥얼 노래한다.

“뭘 숨겼니.”

에드워드의 손이 서랍을 뒤적인다.

그의 뒤로 나 있는 창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저택 밖으로 말이 달리는 소리와 “어디 가셔요? 제럴드 도련님?!” 하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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