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교차
안네마리?
왕은 눈을 떴다. 안네마리였다. 차분한 검은 눈, 잘 열리지 않는 작고 붉은 입술. 분명 안네마리였는데 그녀가 다가오고 있다. 그녀의 옷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진다. 그녀의 시녀들이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숄과 드레스가 천천히 벗겨지고 속치마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점점이 떨어지는 그녀의 옷가지와 점점 드러나는 그녀의 몸. 페티코트가 해체되었을 때 보인 건 그녀의 사타구니에 달려 있는 성기였다. 반쯤 선 그것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안네…… 안네마리?
왕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아이브리.
안네마리가 왕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꿈이다. 깨어나야 한다. 어차피 이건 꿈이야, 꿈이니까, 그러니까―. 하지만 안네마리가 다가오고 있다. 그녀가 다가온다. 그녀, 아니, 그의 몸은 아름답다. 납작한 가슴, 열매처럼 달려 있는 유두, 흐르는 듯한 선의 허리와 잘빠진 치골근, 그리고 성기. 조금 휜 듯한 그 성기조차 사랑스러웠다. 꿈. 꿈이라고? 꿈이라면 이 여자를, 아니, 이자를 마음대로 안아도 되는 건가?
왕은 안네마리를 잡아당겼다. 안네마리가 웃는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곧 흩어지고 욕정만이 남았다. 그녀와 키스하자 그 달콤한 숨결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그녀가 손으로 등을 쓸어오는 것만으로도 정말 환장하게 좋았다. 왕은 안네마리의 말랐지만 근육이 붙어 있는 다리를 열고 그 성기를 바라보았다. 이게 달려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너무나 좋았다.
그는 안네마리의 것을 핏발선 눈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안네마리가 허리를 뒤틀었다. 다리를 좁히려는 걸 왕은 두 손으로 잡아 벌렸다.
아이브리, 빨리.
안네마리가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붉어진 얼굴과 요염한 교태를 보고 있자니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왕은 이성을 갖다 버리고 본능만 취했다. 안네마리의 성기를 머금은 것이다. 남자의 성기를 머금은 것은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곧 애무하는 데 익숙해졌다. 비릿한 맛이었지만 안네마리의 맛이라고 생각하자 너무나 좋았다. 왕은 기갈이 든 자처럼 그것을 빨고 또 빨았다. 안네마리의 다리를 어깨 위로 올린 채 거기를 빨고 있자니 안네마리가 교성을 지른다.
뒤도, 응, 거기만 하면―!
안네마리의 말에 뒤로 손을 돌렸다. 꿈속에서도 그녀가 거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녀가 거부하기는커녕 손가락을 조금 넣는 것만으로도 허리를 뒤틀며 환영했다. 입구가 계속 그를 조인다. 조금 더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더 큰 것을 넣어달라고 재촉하고 있다. 왕은 허겁지겁 바지춤을 풀고 안네마리의 항문에 귀두를 맞추었다.
하악, 어서, 어서―! 어서 와, 아이브리, 어서 와줘!
안네마리가 교성을 내지른다. 그녀를 안고 단숨에 끝까지 꿰뚫었다. 그 뒤부터는 짐승처럼 움직일 따름이었다.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토록이나 열망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가지자 정말 미칠 것같이 좋았다. 다시는 놓을 수 없어. 왕의 내면에서 짐승이 으르렁거린다. 절대 놓을 수 없어. 놓아줄 수 없다.
안네마리를 안고 또 안았다. 밤이 새도록 그녀를 안아도 부족했다. 완벽한 충만감이 그를 덮쳤다. 서로 마주 보고 안은 채 삽입했다. 그녀의, 아니, 그의 몸을 안고 가장 안쪽까지 헤집었다. 미칠 듯한 욕정에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어디고 자국을 내주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몸은 이미 순흔투성이였는데도 계속, 계속 남기고 싶었다. 입술 자국을, 잇자국을, 멍을 남기면서 움직였다. 그때 안네마리의 눈이 바뀌었다.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눈이다. 왕은 허릿짓을 멈추고 말았다. 안네마리? 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을 때 그녀가 갑자기 그의 품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한 줌의 연기로 화해 사라진 그녀, 그리고 자신의 팔 안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왕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시종들이 재빨리 침대의 천개를 열고 불을 피운다. 순식간에 침실이 밝아졌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침번 시종들의 책임자인 부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이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밀자 곧 차가운 물이 든 유리컵이 손 위에 놓였다. 차가운 물을 단번에 들이켠 왕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손을 들었다. 분명 이 품 안에 있었는데 사라져버렸다. 아니, 그건 꿈이다. 안네마리는 여자고, 그녀는 가슴이 없고 물건이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아래는 밋밋하고 가슴은 나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꿈일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꿈이면 그냥 끝까지 그렇게 끝나면 좋잖아.”
왕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그대로 안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재수 없게도 연기로 변해 사라지냔 말이다. 왕은 다 마신 물 잔을 시종에게 건네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네마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쓴웃음이 나왔다. 멀쩡한 아내를 남자로 변하게 해서 몽정을 하는 남편을 둔 너도 참 불쌍해. 안네마리는 운도 지지리 없는 게 분명했다. 부모와 같이 별장에 가다 풍랑을 만나 조난당해, 겨우 살아서 돌아왔더니 다들 마다하는 왕비 자리에 앉아, 남편이라는 인간은…….
불쌍한 안네마리.
왕은 웃으면서 아직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안네마리가 보고 싶었다.
그때 안네마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더라면 왕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안네마리, 아니, 라파엘은 빠른 속도로 근위대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발코니로 뛰어올라서 2층의 근위대장실 안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따고 들어가서 근위대장의 책상 서랍에 작은 봉투를 넣었다. 근위대장님께, 라파엘이. ―그렇게 쓰여 있는 부분을 앞으로 오게 한 다음 그는 발코니로 나와서 한 층 위로 뛰어올랐다.
거기서는 바이런이 근위병과 또다시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이번엔 근위병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솟은 성기 위로 바이런이 앉았다. 항문으로 근위병의 성기를 삼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성고문이 아니었나. 라파엘은 그걸 보며 어쩌면 왕과 바이런이 한 행위는 고문이 아니라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정확히 뭔지는 생각해낼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바이런이 ‘흐앙, 아앙, 앙’ 소리를 내며 더욱 빠르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근위병이 ‘하, 할 것 같습니다!’라고 소리치자 바이런은 그에게 참으라고 윽박질렀다. 자신의 안에 싸면 여동생은 죽은 목숨이라는 협박도 덧붙여졌다.
역시 고문인가 보다.
방법은 좀 다르지만, 이것도 신종 고문인 모양이지. 게다가 근위병의 그것은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앞뒤가 안 맞았지만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라파엘은 대충 그렇게 넘기며 두 사람의 행위가 끝나길 기다렸다. 바이런이 사정한 다음 엉덩이를 빼내고는 멀찍이 비켜섰다. ‘해.’ 그러자 얼굴이 시뻘겋게 되기까지 참은 근위병이 결국 정액을 사출했다. 바이런이 피식 웃더니 ‘어? 오줌이 마렵네?’라고 말하며 반쯤 선 채 덜렁거리는 성기를 근위병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의 성기에서 노란 물이 줄줄 떨어졌다.
왜…… 왜 귀족의 고문은 저렇게 더럽지? 그 구멍을 찢지 않나, 사람 얼굴에 소변을 누질 않나. 왜 저렇게 더러운 거야, 도대체.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을 무렵 ‘그럼 내일도 보자구’라고 말하며 바이런이 상큼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근위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가 비통하게 울었다. 라파엘은 잠시 인간의 도리로 놈이 울음을 그치고 얼굴이라도 좀 닦길 기다렸지만 계속 울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따고 들어갔다.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문을 따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근위병은 라파엘이 그의 앞에―그러나 소변 때문에 좀 멀찌감치―선 다음에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라파엘은 일단 검을 뽑았지만 소변을 묻히는 게 싫어 닿지 않는 곳까지만 검을 겨누었다.
“너, 여동생이 무슨 일을 겪고 있기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넌 누구냐!”
“사람들이 달려오면 곤란한 건 너잖아. 소리 낮추고 말해. 여동생이 무슨 일을 겪기에 네가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 거냐.”
라파엘의 말에 근위병이 갑자기 훌쩍거렸다. 엉엉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게 보여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었다. 빨리 듣고서 가고 싶은데 근위병이 하도 훌쩍이는 통에 라파엘은 쪼그리고 앉았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사정도 모르는지라 별로 위로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라파엘이 훌쩍이는 근위병에게 말을 걸었다.
“그 여동생, 뭔지 모르지만 내가 구해주면 대신에 나한테 뭐든 해줄 수 있겠어?”
“너, 너도 변태냐?”
근위병이 질색을 하고 물러섰다. 라파엘은 인상을 썼다.
“아니야.”
“하, 하지만―.”
“여동생을 구하고 싶은 거야, 구하고 싶지 않은 거야.”
라파엘이 결단을 내리라는 듯이 물었다. 근위병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마도 남자일 것이다. 목소리가 상당히 낮았다. 하지만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해서 어쩌면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왕궁에 잠입한 능력자이고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도 근위병인 자신보다 더 여유로웠다.
“구, 구하고 싶어.”
“그럼 말해봐. 여동생은 어디에 있어?”
“지하 감옥에.”
“지하 감옥에 왜 들어갔는데?”
“그걸 모르겠어.”
“넌 근위병이잖아. 왜 들어갔는지는 알아볼 수 있지 않아?”
“내 여동생 이름이 수잔 데인인데, 공식적으로는 그녀가 감옥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래서 알아볼 수가 없어.”
공식적인 죄인이 아니라는 건 높은 분이 비공식적으로 잡아넣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라파엘의 말에 근위병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았다.
“……간수 중에 동기가 있어.”
과연. 라파엘은 감을 잡았다. 근위병의 여동생을 구해줌으로써 일을 하나 시킬 생각이었다. 가능할 것 같으면 그는 구해줄 수 없어도 쇼어 가문 사람들은 구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비공식적 죄인이라면 그도 구해줄 수 있었다.
“그 여동생, 내가 구해주지.”
“……뭐?”
“대신에 하나만 알아봐줘. 가능하겠어?”
라파엘의 말에 근위병이 “노력할게”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남자의 소변을 뒤집어써야 할 정도로 급한 쪽은 자신이었다. 왕의 정부라고 해서 접근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이런 더러운 짓만 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다른 보험을 들어놔도 좋을 것 같았다.
이 복면인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군지 몰라도 어차피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바이런 라 프시스 말인데, 23번가의 ‘후크’라는 남자와 무슨 사이인지 알아봐줘.”
“다, 당신이 내 여동생을 구해준다는 걸 어떻게 믿지?”
“지금 네 여동생을 구해줄 거니까. 그러나 알아둬. 내가 원하는 걸 주지 않으면 따라가서 반드시 죽인다. 알았어?”
근위병은 라파엘의 눈을 보았다. 검고 차가운 눈이었다.
“도, 동생만 구해준다면 뭐든 해주겠어.”
“뭐든?”
사신과도 같은 눈이 재차 확답을 요구해온다.
“뭐든.”
근위병이 홀린 듯이 대답했다. 그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의 똥구멍도 핥았고 오줌도 먹었다. 더 뭘 못 하겠는가.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알아내면 안네마리 왕비에게 알현 신청을 해서 알려주도록 해.”
“너…… 왕비님의 수하인가?”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근위병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라파엘은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때때로 동료나 동기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피가 더워진다고. 라파엘은 갑자기 그 표현이 떠올랐다. 자신은 정말 기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피가 더워져. 사람을 죽이면 피가 뜨거워져.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라파엘은 왜, 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덥지? 그는 사람을 죽일 때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책장을 넘기듯이, 현관문을 열듯이, 그렇게 일상적인 일이었을 뿐이었다.
오늘도 역시 안 덥군.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간수 넷을 베고 감옥으로 들어가자 죄수들은 곧 낯선 손님을 알아채고 환호를 질렀다. 간수는 죽었고 낯선 손님이 왔다. 날 풀어줘, 나 먼저야, 다들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며 허우적대는 꼴을 보다 라파엘은 곧 자신이 목적한 여인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다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허우적대는 가운데 얼굴이 초췌한 여자가 홀로 독방에 앉아 있었다.
독방에 앉히는 경우엔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데다 남의 손을 타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의사 표현일 텐데. 도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잔 데인?”
그 목소리에 여자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본다. 덜덜 떨고 있는 폼이 꽤 무서운 모양이다. 라파엘은 늘 가지고 다니는 만능 열쇠―즉 쇠꼬챙이―를 써서 철창문을 연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 다가오지 마.”
여자가 엉덩이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가오지 마!”
하지만 라파엘은 다가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물러서거나 말거나 다가간 그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근위병인 오빠가 있지?”
“……오, 오빠요?”
“그래. 널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오빠가 하나 있잖아.”
이름은 모르지만, 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제야 라파엘이 말하는 오빠를 깨닫고 눈물을 뚝 흘렸다.
“오, 오빠. 로버트 오빠.”
“그래, 그 오빠가 널 구해달라고 해서.”
“오빠가, 저를요?”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은 수잔의 통통한 허리를 홱 낚아챘다. 괜히 걷게 두었다가 중간에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라파엘이 철창을 나오자 죄수들의 울부짖음은 더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감옥은 방음이 잘되는 편이다. 일단 지하고, 고문 때문에라도 방음에 꽤 심혈을 기울이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수잔을 어깨에 메고 달리자 수잔이 “맙소사”라고 속삭였다.
“당신은 뭐예요? 신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요? 호, 혹시 귀족이세요?”
사람을 하나 메고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원숭이처럼 옮겨 다니는 라파엘에게 놀란 듯 수잔이 물었다. 라파엘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멘 채 최대한 감옥에서 벗어났다. 그는 문 플레이스에 거의 다 와서야 잠시 나무 위에서 고민했다. 여자를 구하긴 구했는데, 어쩌는 게 좋을까.
“수잔 데인. 널 구하긴 했는데 당장 네 오빠에게 보내줄 수는 없어.”
“왜, 왜요?”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해서 여자를 속여야 할 것 같았는데 라파엘은 말로 하는 게 정말 쥐약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던 라파엘은 결국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널 구해주는 대가로 너네 오빠에게 알아봐달라고 한 게 있어. 그걸 알아봐줄 때까지는 보내줄 수 없어.”
여자가 그런 게 어딨냐고 울고불고 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의외로 수잔 데인은 쌈빡하게 인정했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수잔이 활짝 웃었다.
“이렇게 구해져서는 무슨 짓을 당하게 될까 걱정했었는데, 괜찮네요. 오빠가 위험해지는 일인가요?”
“아니. 별로 위험해질 일은 아니야.”
“아―, 그럼 됐어요. 우리 오빠 신의 있는 사람이에요. 머리가 나쁘고 남에게 잘 속아서 그렇지, 신의 하나는 정말 끝내주거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녀는 도리어 라파엘을 격려해주고 있었다. 라파엘이 “어, 그래……”라고 어눌하게 대답하자 수잔이 다시 생긋 웃었다.
“그래서 전 어디에 있으면 될까요? 제가 구해졌다는 걸 오빠는 알겠죠?”
“근위병이니까 알게 되겠지.”
“그럼 됐어요. 전 어디에 있어요?”
요즘 신세대는 다 너처럼 발랄하니. 라파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로 불리면서 주로 살인 청부 의뢰를 받았었다. 덕분에 시체로 만드는 일 외에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 여자는 상상 이상이었다. 라파엘은 잠시 문 플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날이 밝아오고 있어 어차피 돌아가야 했다. 데리고 돌아가서 제럴드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다.
“일단은 문 플레이스에 가서…….”
“싫어요! 구해준다면서요!”
여자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구해준다고―읍!”
라파엘은 재빨리 여자의 입을 막았다. 조금 전까지 상큼하게 웃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서는 공포에 질려 소리 지르는 품이 심상치 않았다. 남들이 보면 왕비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라파엘 자신조차 내가 무슨 짓을 했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구해줬잖아.”
라파엘이 그녀의 입에서 손을 치우며 말하자 그녀가 나직이 이를 갈았다.
“이게 뭐가 구해준 거예요?”
“……다시 철창 안으로 보내줄까?”
“그거와 다를 바가 없잖아요! 아니요, 난 안 가. 이 거짓말쟁…… 읍!”
수잔이 다시 소리치려고 해서 라파엘은 또 그녀의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젠데?”
라파엘이 물었다.
“문 플레이스가 뭐가 문제라는 건지 똑바로 말하란 말야.”
라파엘의 말에 수잔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한 번 좌로 갸웃, 우로 갸웃한 그녀가 손을 떼어달라고 손짓을 했다. 라파엘이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자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왕비는 쇼어 가문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브라이튼 라 쇼어의 양녀잖아요.”
그제야 라파엘은 알 것 같았다.
“널 가둔 게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이야?”
“그래요.”
수잔이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는 듯이 대답했다. 라파엘은 멀리 떠오르는 해와 그 햇살에 반짝여 유독 아름다운 새하얀 문 플레이스와 주근깨 가득한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문 플레이스에서 안 나가도 좋아. 쇼어 공작에겐 안 보낼 테니까.”
“거, 거짓말.”
수잔과 대화를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수잔의 목을 수도로 내리쳤다. 수잔이 툭 하고 쓰러지자 그녀를 지탱해 다시 어깨에 메달고선 그는 문 플레이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가 발코니에 도착하자마자 시녀들이 문을 열었다. 침대에 수잔 데인을 던지듯 내려놓자 시녀들의 눈이 커졌다. 그녀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이런 짐승! 하여간 사내라는 것들은 거기 세울 힘만 있으면 죽어가든, 여장을 하고 있든 간에!’라고 쓰여 있었지만 둔한 라파엘은 그 쓰여 있는 바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 여자 일단 아무 데나 좀 가둬둬.”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욕실로 들어가자 왕비의 침실 안엔 일대 파란이 휘몰아쳤다. 짐승설, 강간범설, 변태설이 접전을 이루는 사이 라파엘은 따뜻한 물에 들어가 몸을 풀었다.
피가 더워진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피가 왜 더워지냐고 생각했었더랬지.
‘안네마리.’
문득 왕이 떠올랐다. 그래, 왕이 다가오면 피가 더워진다. 혈류가 빨라지고, 혈관이 팽창한다. 맥박이 두 배 상승하고, 손이 자꾸 떨리고, 내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을 죽일 때는 피가 더워진 적이 없었지만 왕이 가까이 오면 그렇게 피가 더워졌다.
“당신이 좋아.”
라파엘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닿는다. 당신이 좋아.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알지 못했다. 아마,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라파엘 에반스는 왕을 좋아하게 되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라파엘 에반스를 알지도 못하는, 태양처럼 아름답고 태양처럼 고귀한 왕을.
살인 기계가 ‘태양’이라고 생각하며 피를 데우는 상대는 목하 짜증을 내는 중이셨다. 왕은 공납 현황 서류를 보며 일렬로 주욱 나열해 있는 각 지방의 영주들에게 화를 냈다.
“눈이 와서 공물이 늦어져? 북대륙에 눈이 오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 그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공물이 늦어져? 공물은 늦어지는데 넌 왜 제대로 도착했느냐. 네가 도착할 정도면 당연히 공물도 도착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네 머리는 도대체 어디다 쓸 거냐? 너희 지방에서 온 걸 보니 곡식은 제대로 도착했는데 도착하지 못한 것은 공산품이로구나. 주석, 보석, 철! 이딴 게 눈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냔 말이냐. 눈이 광산 입구를 막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 위에 지붕 공사를 한다며 타낸 세금은 어디다 쓰고 광산이 막혀? 네가 사사건건 변명으로 내세우는 눈이 네 입까지 막았느냐, 당장 대답해보아라!”
“그, 그것이…….”
“항구 기록을 보아하니 올해 네 지방 항구에 참으로 많은 동대륙 상선들이 들어왔더구나. 그런데 수입품에는 별게 없고, 수출품에도 별게 없어 걷힌 세금이 얼마 되지 않으니 이게 무슨 일일까? 대답해보아라. 빈 상선이 왜 그렇게 줄창 오갔더냐.”
“그, 그러니까.”
“세금은 내기 싫고, 공납도 싫고, 그러나 영주 자린 지키고 싶더냐. 내가 3년이나 봐줬더니 이젠 아주 날 삼키려고 드는구나. 3년 동안 내내 언급을 했으면 적당히 처먹었어야지. 그 뱃속엔 아귀가 들었냐. 처먹고 또 처먹게? 아이단가를 백작에서 남작으로 각하, 영지를 회수한다. 단, 성과 성 주변 10킬로미터는 아이단가의 장원으로 인정한다.”
“저, 전하!”
아이단 백작, 아니, 남작이 눈물을 흩뿌리며 흑, 자리에 엎어졌다. 그러나 왕은 냉혹히 일갈했다.
“꺼져. 다음.”
“마르트 자작이옵니다.”
그러자 호명당한 남자가 기름기 줄줄 흐르는 멀쩡한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어이구, 배야―. 전하, 갑자기 배가 아프옵니다.”
오, 저거 좋은 수법이다.
귀족들이 마르트 자작을 보고 눈을 빛냈다. 오늘 왕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사실 왕은 영주들이 좀 떼어먹는 것을 봐주고 있었고, 영주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몇 퍼센트다, 라는 룰은 없었지만 서로서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가끔 내키면 신전에서 몰수했던 땅도 한두 개씩 내려주는 등, 왕은 중소 귀족들에게는 꽤 호의적인 편이었다. 중소 귀족들 또한 왕의 막강한 편이 되어주었고, 왕에게 유리한 법안은 실제로 중소 귀족으로 이루어진 하원을 쉽게 통과하는 편이었다. 하원을 통과하면 대귀족들이 이루고 있는 상원도 통과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귀족들은 왕의 몰살 사건 이후 왕을 아주 겁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이 오늘따라 몹시 까칠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나 죽었소 하는 게 최고라는 걸 아는 귀족들이 마르트 자작을 보고 눈을 빛내었을 때였다.
“배가 아프단다. 궁의를 불러라. 만약 이상이 없다면 짐을 능멸한 죄로 다스려주리라.”
“저, 전하! 갑자기 말짱해졌사옵니다.”
마르트 자작은 안색이 새하얘지면서 정말 아픈 사람처럼 변했지만 한사코 괜찮다며 궁의를 거부했다. 왕이 이를 갈며 좌중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일들을 제대로 안 하는 거냐?”
젊은 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희를 키워주고 싶어도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득에 연연하고 있으니 이거 어디 키울 수가 있겠느냐. 농지를 좀 더 내려 너희의 세력을 불려주고 싶어도 준 농지에서조차 세금이 잘 안 나와, 산적과 도적은 들끓어, 상소는 줄을 이어, 일처리는 형편없어, 주제에 보는 눈은 높아져서는 대귀족처럼 사치를 하려고 드니 그런 너희에게 어떻게 농지를 내려준단 말이냐. 내가 내 총에 대가리를 맞은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뭘 믿고!”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어째서 작은 것에 연연하느냐. 어째서 멀리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너희에게서는 인재가 나오지 않느냐. 이것이 정말 환경의 문제란 말인가? 그러냐? 교육의 정비를 다시 하고 있지만, 이 교육의 혜택을 받아 멀리 보는 인간이 나오려면 도대체 몇 년이 걸리는 거냐. 그동안 너희 같은 돌머리들과 이 씨름을 매년 두 번씩 할 생각을 하니 신물이 난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일만 제대로 하라는 거다. 왜 그걸 못 하느냐.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 왜 더 높은 곳을 향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이러니까 계속 이리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까, 너희들이 계속 약자인 것이다. 어째서 너희가 약자인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왕은 한탄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일을 잘하고 자신의 영지를 잘 관리했으면 왕은 농지를 내려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왕이 보호하고 있어 하원이 막강하지만 전대까지만 하더라도 하원은 그저 허울뿐이었다. 모든 안건은 상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하원은 제대로 모인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 기껏 권력을 안겨주었더니, 그 권력으로 한다는 짓이 고작해야 약탈이다.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대귀족과 신전이 너무 막강한 이 나라에서는 모든 일이 그네 뜻대로, 그네 편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왕은 이 점을 뿌리 뽑으려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더욱이 왕조차도 대귀족과 신전을 곁에 두면 모든 일이 편했다. 모든 일이 편해진다는 것은 왕족, 대귀족, 신전이 삼위일체가 되어 나머지 밑을 빨아먹고 산다는 뜻이다. 또다시 국민들은 혹한에 수천 명씩 얼어 죽게 될 것이고, 교육의 혜택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단순히 약자라는 이유로 짓밟혀야 할 것이다.
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도 특별히 국민에게 성군이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왕은 그런 왕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왕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도리를 지키기엔 인재가 너무나 부족했다.
“나는 처음에 너희들에게 능력을 보이라 했다.”
왕이 질렸다는 얼굴로 일어섰다.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는 놈은 하나도 없구나. 공납 보고는 되었다. 물러가라.”
왕이 등을 돌렸다. 영주들이 어쩔 줄 몰라 해도 왕은 이미 대전을 나가고 있었다. 대충 봐주기에 왕이 이 정도는 넘어가는 줄 알았다. 개중에는 ‘아무리 무섭지만 왕은 애송이니까’라며 무시했다. 그중 한 명이 그런 식으로 배짱을 부리다 지금 쪽박 차게 생긴 아이단 남작이었다.
일단 대전을 나왔지만 왕은 분기를 못 참고 복도에 있는 조각상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뭘 좀 해보려고 해도 저 멍청이들과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왕은 노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탐욕스러운 자들! 평생 저렇게 살 작자들! 신분이 천하여 아쉬운 자 따위는 없었다. 신분이 천하여 마땅한 자들만 있을 뿐이다.
조각상과 화병을 부수고 나서야 왕은 씩씩거림을 멈췄다. 짜증이 났다. 저런 것들에게 권력을 이양해주어야 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귀족들은 저렇게 대놓고 탐욕스럽지는 않다. 저렇게 대놓고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진 않는다. 대귀족들은 법안을 유리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긴 해도 대놓고 저리하지는 않는데 이건 뭐 몇 술은 더 뜨니!
“……문 플레이스로 가겠다.”
왕의 말에 시종들이 흘끗 서로를 본다. 그래도 왕이 발길을 옮기자 그들도 서둘러 왕의 뒤에 따라붙었다. 따라붙으면서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은 왕비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역시 왕비가 왕의 음식에 뭘 탔다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 빈정대는데다 다혈질인데다 성질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못해 총을 난사할 왕이 이럴 리가 없는데.
왕이 이그나치오궁에서 나오자 바이런이 저쪽에서 왕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계산된 우연이었고, 이건 바이런뿐만 아니라 왕의 정부들이 종종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시종장은 왕이 바이런을 못 본 체 지나가자 그 뒤를 따르면서 바이런에게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오늘은 정말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시종장의 경고성 시선에 바이런이 걸음을 멈췄다. 그 굳은 얼굴과 바이런의 뒤에 딸린 시종들을 흘낏 살피면서 시종장은 왕의 뒤를 따랐다.
왕의 정부로서 바이런 라 프시스는 꽤 이름을 날렸었다. 실제로 왕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바이런의 청을 꽤 들어주기도 했었고, 왕의 정부들 중에서도 바이런은 꽤 특별한 축이었다. 일단 기간이 가장 오래된 정부였고, 궁도 받았다. 궁을 받을 때 시종도 몇 받았지만 바이런의 시종들은 어느새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바이런에게 줄을 대는 귀족들이 보내준 시종들이리라. 그런데 오늘 보니 시종이 좀 줄어 있었다. 허영이 심한 바이런은 분명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시종을 다 끌고 나왔을 텐데도 분명히 시종이 적었다.
드디어 끈 떨어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나 보군.
왕궁도 사교계도 무섭다. 소문은 새가 한 바퀴 돌듯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누가 더 권력에 가까이 있는지 끊임없이 체크된다. 열흘 붉은 꽃은 없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건 다른 동네의 생각, 이 동네의 상식은 열흘 붉은 꽃은 없으니 붉을 때 많이 비축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있는 힘껏 권력을 휘두르고 남들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붉은 꽃을 가진 자는 저기 서 있는 저 왕비님인 모양이다. 절세미인도 아니고, 왕에게 성적인 쾌락을 줄 수 있는 남자도 아닌 저 왕비님.
“안네마리.”
오긴 왔는데 왕은 뭐라고 그녀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키스를 하며 몸을 더듬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 남자에게 왕비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등을 돌렸다. 긴 검은 머리가 나풀나풀 허공에서 흔들렸다. 추운 날씨라 흰 모피코트를 입은 안네마리는 그를 보더니 가만히 주시했다. 시선을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환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몹시 복잡해서, 안네마리가 그를 호감으로 여기는지 아닌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 왕이 괜히 온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돌아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였다. 안네마리가 어색하게 입술을 올렸다.
서서 꿈꾸나.
왕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안네마리는 그가 알기로 웃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안네마리가 어색하고 수줍게나마 입술을 올리고 있다. 그 미소에 왕은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전하.”
어떤 달콤한 말도 없었다. 안네마리는 늘 그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안네마리의 그 어색한 웃음이 수백 마디의 말보다 좋았다.
왕은 그녀를 끌어당겼고, 그녀는 왕에게 잡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끌려왔다. 안네마리의 입술은 여전히 올라가 있었고, 왕은 그 입술을 보자 허기를 느꼈다. 아니, 갈증 같기도 했다.
왕이 눈을 감고 라파엘에게 키스했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왕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남자답고 시원한 미소에 시선을 빼앗기자 왕이 손을 들어 라파엘의 눈을 감겼다. 두 번째 키스는 첫 번째의 것보다 길고 깊었다. 라파엘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감긴 왕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장갑을 끼고 있어 그의 살결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시계 장인이 너를 만들었다며?’
그 말은 누가 했던가. 잡화상 존이었던가?
‘네 가슴 안에는 심장 대신 시계가 있다며.’
너무 오래된 이야기. 언제 들었었는지 이미 까마득해진 그 말.
라파엘은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살인 기계였다. 그러나 살인 기계인 자신이 태양을 원한다.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놓아야 하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손등 위에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왕은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세 번째 키스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같이 길고, 그리고 더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날 밤, 연회장에서 왕은 노골적으로 왕비를 끌어안은 채 연방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왕비는 거의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사람들이 목석같다고 혀를 찼지만 왕은 상관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댔고, 왕비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사람들은 그 다정다감한 연인―같은 부부―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데, 왕의 총애를 믿고 위세를 부리던 바이런이 부들부들 떠는 꼴이 가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 보이지? 저 장미꽃 앞에 서 있는 저 여자 말이다. 하마 같은 엉덩이를 흔들며 뽐내는 저 여자.”
“은발의 여성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노인이잖아. 그건 은발이 아니라 백발이지! ……그 옆의 여자.”
왕의 말에 라파엘은 흘끗 시선을 옮겼다. 제법 예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호호 웃는 그녀를 보며 “예” 하고 라파엘이 대답하자 왕이 씩 웃었다.
“저 여자와 자본 적이 있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가슴이 좀 시린 것도 같았지만, 어떤 감정인지 그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저기 저 여자.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칼에 보란 듯이 가슴을 내밀고 있는 게 복어 같은 여자 말이다.”
장미꽃이나 백합으로 비유될 수 있을 아름다운 여성에게 하마니 복어니 하고 있는 왕의 옆에서 라파엘이 “예에” 하고 말을 흐렸다.
“너보다 아름다운 여자들이지?”
“예, 전하.”
왕이 묻자 안네마리가 즉답한다. 이 여자는 진짜 놀려먹을 수가 없다니깐, 왕은 피식 웃었다. 여성스러운 동그란 어깨가 아닌 남자처럼 각진 안네마리의 어깨를 안고 왕이 그 귀에 가볍게 키스했다.
“내 눈엔 그녀들이 하마와 복어로 보인다.”
라파엘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하마나 복어 말씀이십니까?
왕은 뭔가 병이 있는 것일까. 라파엘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왕이 피식 웃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라파엘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주 살짝, 거의 힘을 주지 않은 손길이었다. 라파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손이 닿으면 왠지 닿은 곳이 뜨거워진다. 그가 태양 같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이런, 안네마리. 괜찮은 거냐? 살살 잡아당긴 건데 아팠느냐?”
아주 약간의 반응만으로도 안네마리의 상태를 바로 알아보는 왕이 재빨리 그녀에게 물었다. 안네마리가 살짝 어깨를 굳힌 게 느껴져 그는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주변에서 무언의 경악이 터지는 걸 못 느끼지 않았지만 그는 도리어 그걸 즐겼다. 이제까지는 이렇게 하고 싶은 여자가 없었다. 남자와 키스를 하거나 애무를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다정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안네마리가 유일했다. 그녀에게 네가 유일하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왕은 웃음과 함께 그 말을 삼켰다. 그런 말은 좀 낯간지러웠다.
하는 짓이 더 낯간지럽다는 생각은 못 하고, 왕은 안네마리를 무릎에 앉힌 채 이마를 맞대었다.
“아프게 하려고 한 게 아니야.”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 아프지 말아야지. 네가 무슨 환자도 아니고 고작 이런 걸로 아파서야 되겠느냐. 뭘 하기만 하면 깜짝깜짝 놀라다니. 넌 토끼가 아니고 사람이라고 벌써 몇 번째 말하게 하는 거냐. 왕비답게 의연한 모습으로 있어야지.”
왕비를 무릎에 앉힌 사람이 할 대사는 아니었다.
“예, 전하.”
그러나 그 왕비는 남들이 다 ‘망나니 남색가 냉혈한’이라고 욕하는 남자를 ‘태양’이라며 우러러 보는 터라, 왕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도 아프면 반드시 궁의를 불러라. 네가 아픈데도 궁의를 부르지 않는 것은 궁의가 월급 도둑이 되게 만드는 짓이다. 돈을 받은 만큼은 일하게 해야지.”
“예, 전하.”
“무뚝뚝한데다 잘 웃지도 않고 애교도 없는 너이지만, 그래도 여자인데 가지고 싶은 물건은 없느냐? 드레스, 구두, 보석……. 그러고 보니 그 송치 구두는 갖다 버렸느냐? 쇼어가도 돈이라면 강물에 흘려보낼 만큼 많은 집안인데 양녀에겐 참으로 박하구나. 송치 구두라. 드레스도 예쁜 드레스를 입어봐라. 너에게 잘 어울릴……, 그래, 흰색이 참으로 예뻤지. 공단 드레스가 어울릴 것 같은데 입어보겠느냐? 아, 아예 장인을 보내주지. 그에게서 옷을 지어 입어라. 그는 마리 트리지아가 발굴해낸 장인인데 드레스의 선이 몹시 곱다. 네 절벽인 가슴이나 남자 같은 어깨를 보완할 수 있는 옷을 만들어줄 것이다.”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들어도 근사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만 들리는 라파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예, 전하.”
그 순간 왕은 간밤의 꿈을 떠올렸다. 안네마리가 남자인 꿈이었다. 이 몸을 안고 또 안았었다. 네가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품에 넣고 놓아주지 않을 텐데.
왕이 안네마리에게 속삭였다.
“아이브리, 라고 불러봐라.”
“전하?”
“내 이름을 알고 있겠지?”
물론 라파엘은 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직업 왕, 통칭 전하다. 그 이상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평민 라파엘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 태도만으로도 대답을 안 왕이 혀를 찼다.
“아이브리다.”
“아이브리.”
안네마리가 의미 없이 한 번 중얼거렸다. 그것만으로도 그 이름에 의미가 더해지는 기분이 들어 왕은 즐거이 웃었다.
“그래.”
“아이브리 전하.”
“그래. 그래, 안네마리.”
왕은 웃고 있었다. 그는 잘 웃었다. 혀가 굳고 얼굴 근육도 굳어 살아 있는 기계가 되어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왕은 잘 웃고 화도 잘 냈다. 그런 그가 좋았다. 라파엘은 그를 향해 마주 웃어보려 했다. 하지만 웃는다는 행위는 너무나 어색해서 스스로도 그 어색함이 느껴졌다. 아마 자신은 굉장히 어색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입술을 한 번 올리자 그것만으로도 왕은 “아아” 하고 감탄해왔다.
“웃고 있구나.”
왕이 속삭여,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합니까?”
안네마리가 물었다. 주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스스로 뭔가를 묻는 일도 처음인 듯해서, 왕은 더욱더 활짝 웃었다. 안네마리의 웃는 얼굴은 확실히 이상했다. 평생 웃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불안한 눈으로 치아를 보이며 이상하게 웃는 꼴이 광대가 웃는 것처럼 ‘히죽’ 하는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녀는 웃고 있었다. 히죽 하는 웃음. 대단히 노력해서 웃는 듯 입가가 경련하는 것까지 왕의 눈에는 정확히 보였다.
“그래, 어색해.”
“아, 그렇군요.”
안네마리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왕이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내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해라.”
그의 손이 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왕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왕이 웃어봐라, 라고 명령했다. 라파엘은 천천히 입술을 올렸다. 그가 만진 입술에서 열이 나더니, 그 열이 온 얼굴로 옮겨 붙는 것 같았다.
안네마리가 천천히 웃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그 순간 왕은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하고 있었다. 안네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가 왕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눈을 감았다. 혀와 혀가 닿는다. 왕은 그가 감히 닿을 수 없는 곳을 제외한 그녀의 가장 깊은 안쪽까지 혀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목구멍을 핥고 싶을 정도로 흉포한 충동을 느꼈지만, 거기까지 닿을 수 없었다. 키스가 끝난 뒤 왕이 속삭였다.
“내 앞에서만 웃어라. 다른 놈에게 웃어주면 그 새끼 눈깔을 파내겠다.”
“예, 전하.”
키스의 여운으로 몽롱한 시선을 보내오며 안네마리가 한 번 더 웃었다.
“난 지금 농담을 하고 있지 않아.”
왕이 안네마리의 어깨를 움켜쥐며―그러나 그녀가 아파할까 봐 차마 세게는 잡지 못하며―으르렁거렸다. 안네마리가 왕의 품에 이마를 댄 채 속삭였다.
“네, 아이브리 전하.”
왕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앞에서는 늘 웃어라.”
왕이 말하자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노력하겠습니다, 전하.”
왕이 탄식을 흘렸다. 정사를 벌인 것도 아닌데 도대체 이 희열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삽입하고 허리를 흔들고 정액을 사출하지 않아도 이 작고 마른 여자를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정말로, 그저 포옹에 불과한 이 작은 행위만으로도―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 정원에 가든 하우스 두시고 저게 무슨 꼴값이시랍니까.”
귀부인들이 속닥거렸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도대체 저 촌년이 어떻게 전하를 사로잡았을까요.”
“남색가 취향이 몹시 독특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긴, 촌년의 엉덩이는 야무질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호호호호, 귀부인들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들은 아둔한 여자들이 아니었기에 목소리가 매우 작아 왕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냉혹한 귀부인들이었기에 조금 더 가까이에 있는 바이런의 귀에 닿을 수 있도록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왕비를 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바이런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남색가 취향이라 왕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촌놈인 바이런에게 엉덩이나 야무지지 다른 데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비아냥이다.
그래도 나는 빼앗기지 않아.
바이런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남색가가 아니었다. 그의 뒤를 돌봐주던 여자가 왕과 자서 그의 마음에 들면 귀족이 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혹하여서 왕에게 왔을 뿐, 그는 남색가가 결코 아니었다. 왕에게 처음 범해질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몹시 아팠다. 왕은 바이런의 뒤를 찢어놓았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서, 바이런은 울면서 허우적거렸다. 왕이 피와 정액으로 엉망이 된 성기를 들이밀며 깨끗이 하라고 했을 때는 죽고 싶은 심정만 들었다. 그러나 왕의 성기가 목구멍을 틀어막자 살고 싶어졌다. 정말 호흡 곤란으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바이런은 깨달았다. 그는 남자에게 안긴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왕이든 뭐든 자신이 ‘안겨준다’고 생각했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바이런이 준비를 하자 행위는 수월해졌으며 왕이 내킬 때면 그를 다정하게 안아주기도 했었다. 왕은 수동적인 인물을 싫어했다. 그는 적극적인 인물을 좋아했고, 그래서 바이런이 왕의 총첩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저 여자에게 질릴 것이다.
왕비는 왕이 보지 못한 독특한 타입이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요구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에게 흔히 그렇듯 왕은 곧 질릴 것이다. 그리고 그를 가장 충만하게 만드는 바이런을 찾게 될 것이다.
바이런이 이를 악물었을 때 휘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 같지만 바람 소리치고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소리에 바이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라파엘은 왕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휘익, 소리가 난다. 바람 소리가 아니라 진이 좁혀져오는 소리다. 암살. 그 단어가 떠오른 순간 라파엘은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이 바람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암살. 그러나 진을 치려면 여러 명의 살수가 필요하다. 넷, 아니―. 라파엘은 재빨리 계산했다. 최소 열둘은 필요할 것이다. 이그나치오궁은 큰 궁이다. 건물서부터 좁혀 들어올 테니, 열둘은 필요했다. 이것은 최소의 수준일 뿐 몇 명이 진을 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열두 명이 넘는 살수가 왕궁에 잠입할 수 있었지? 왕궁은 쉽게 잠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소개서가 없다면 잠입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수구 시설은 따로 되어 있는데다 결계도 쳐져 있었다. 그뿐인가. 왕궁은 그냥 봐서는 알 수 없지만 허공에 돔 형식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새도 나비도 그 돔을 벗어나려는 순간 타 죽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많은 살수가 궁에 들어올 수 있었지?
라파엘은 천천히 왕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뭐냐. 언제, 터지는 거냐.
라파엘이 기척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순간 화살이 날아왔다. 사방이 뚫린 홀로 화살이 날아와 한 번에 하나씩 횃불을 떨어뜨렸다. 정확한 솜씨로 횃불을 끄는 화살을 보는 순간 왕이 팔을 뻗어 라파엘을 잡으려고 했다. 어둠에 익숙해지진 않았으나 기척을 알아채는 데 능숙한 라파엘은 그 팔을 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화살이 정확히 왕의 목을 노리고 날아와, 라파엘은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화살을 향해 던졌다. 맞부딪친 단검과 화살이 동시에 어딘가로 떨어졌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마자 살수들이 보인다. 열여섯. 최소보다 좀 더 왔구나. 열여섯이면 부대 둘이 온 셈이다. 쿠치아노의 결계로 이루어진 돔을 깨지는 못했을 테고 분명 정식 절차를 밟아 들어온 인물들일 테니 이 홀 안에 이들을 입궁시켜준 원흉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상 아래로 내려가며 가장 가까운 살수의 발목을 붙잡아 쓰러뜨렸다. 악 소리조차 못 내고 쓰러지는 살수의 목을 잡아 정확히 비틀어 죽인 그가 살수의 허리에서 검을 낚아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라파엘은 아래로 이동했다. 테이블보가 길게 내려와 있는 상과 상 사이를 이동해가며 그는 살수의 발목을 낚아채 상대의 목을 부러트렸다. 그렇게 동료가 넷이 죽자 살수들이 테이블에서 안전거리를 두고 물러서버렸다.
이런, 더는 안 되나.
아직도 열둘이나 남았다. 근위대는 언제 오는 거지? 라파엘은 허리를 숙인 채 살수에게서 빼앗은 검을 양손에 쥐었다. 평소 양날검을 쓰는 라파엘로서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검의 달인이었고, 양날검이든 아니든 검은 그에게 언제나 강력한 힘을 선사해주었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날렵하게 튀어나갔다. 테이블보가 크게 펄럭이는 순간 살수들이 그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쪽은 라파엘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던진 것이었고, 라파엘은 반대쪽에서 튀어나가 검을 교차시켜 그었다. 양쪽에 있던 살수 둘이 동시에 쓰러진다. 가까이에 있던 살수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의 배 한중간에 검을 꽂아 넣고, 그 검을 빼면서 몸을 돌려 뒤에서 달려오던 살수의 목을 베었다.
‘저, 검술을 알아.’
누가 속삭였다.
‘라파엘 에반스다.’
‘살인 기계? 살인 기계가 왜 저 꼴을 하고……!’
그 순간 라파엘은 자신을 살인 기계라 부른 남자의 옆구리를 베고 있었다. 살수들이 몰려들어 곧 그를 원으로 둘러싸고 말았다.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로가 프로였다. 물론 상대는 유명한 프로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진을 칠 줄 알았을 뿐 암살을 해본 솜씨는 아니었다. 전문적인 암살자였다면 일단 왕의 암살 의뢰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고, 불가피한 이유로 왕을 암살한다고 했다면 동료가 죽임을 당한다고 해서 발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왕에게 달려가 그 숨통을 끊어놓았을 것이고 화살이든 수리검이든 뭐든 사용했을 것이다. 몇이 더 죽든 그런 걸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왕을 죽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당연한 듯이 방어를 하고, 심지어 동료가 죽었다고 라파엘을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나로선 다행이지.
라파엘은 양검을 교차시켜 양쪽을 겨눈 채 천천히 돌았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그들을 휘감고 돌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압축된 공기 속에 라파엘이 움직이려고 했을 때였다. 억, 소리를 내며 살수 하나가 털썩 쓰러졌다. 그 순간 라파엘은 쓰러지는 살수에게로 달려가 뛰어올랐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밟으며 원 밖으로 탈출한 라파엘이 둘을 더 베었을 때 탕―소리가 났다.
그리고 살수 하나가 더 쓰러졌다. 또다시 탕 소리가 났다. 그제야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왕이었다. 왕이 단상 위에서 언제나 들고 다니는 장총을 한 손으로 들고 살수를 하나씩 쏘고 있었다. 왕이 자신을 봤는가. 라파엘의 심장이 덜컹,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왕은 자신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라파엘이 그를 바라보아도 왕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라파엘은 바로 살기를 지웠다.
그리고 천천히 단상으로 움직였다. 그가 고작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살수의 반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쓰러졌고, 남은 살수의 반은 도망치다 총을 맞았다. 놀라운 솜씨였다. 저 사격술이 왕의 능력인지 아니면 신력이 부여하는 능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살기를 가진 존재가 없음을 확인하자 왕이 총을 떨어뜨렸다.
“안네마리!”
왕이 고함을 질렀다. 그는 당황한 듯 주변을 허우적거렸다. “불을 켜라. 뭐하고 있는 거냐!” 왕이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확인한다. 주변의 아무나 잡아채서 손으로 얼굴을 더듬고는 쓰레기 버리듯 던져버리면서 그는 라파엘을 찾고 있었다. “안네마리, 어디에 있는 거냐!” 그가 소리 질렀다. 겁에 질린 비명들 틈에서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다들 자신의 목숨과 동행인을 찾느라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의 눈에는 왕만이 보였다. 왕은 뭔가에 걸려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아무 곳으로나 걷고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라파엘인지를 확인하고 밀쳐냈다.
“안네마리, 어디에 있는 거냐? 안네마리!”
불을 켜라, 불을 켜란 말이다! 왕이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라파엘은 그에게로 달리려다 몇 걸음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는 벌써 몇 사람이나 베었다. 드레스에는 분명 피가 넘쳐흐를 것이다.
“안네마리!”
왕이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면서 라파엘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저 팔에 잡히면 안 된다.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어. 라파엘은 후회했다. 왕을 만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체를 숨기는 게 괴로울 줄 알았더라면, 마리 트리지아가 죽었다는 걸 들었을 때 그냥 무시해야 했다. 건조하고 지루한 삶에 단 하나의 호기심이 생겨나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안네마리! 안네마리를 찾아라! 왕비는 어디에 있는 거냐? 내 비는 어디에 있는 거야? 안네마리를 찾아라. 불을 켜라! 안네마리!”
왕이 무작정 어둠을 더듬으며 라파엘을 찾고 있었다. 라파엘은 어둠 속에서 입술을 올렸다. 왕은 말했었다. 웃는 게 어색하니 웃음을 훈련하라고. 아마 지금 그의 미소야말로 어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 처음 흘리는 눈물은 낯설었다. 그는 등을 돌려 궁에서 벗어났다. 문 플레이스로 돌아가야 했다.